달의 황홀경
155화
“화홍아 잠깐 여기 있거라.”
발치에 짐을 내려 둔 화홍을 세워 두고 이설이 주 상궁에게 다가갔다. 대화 소리를 들어 보니 황제 폐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게 막아선 이유였다.
“폐하께서 내리신 명인가?”
“예. 직접 전달받은 황명입니다.”
주 상궁에게는 그리 꼿꼿하던 금군이 이설에게는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대문을 막아선 창은 흔들림이 없었다. 황명을 직접 지시받은 만큼 이설 따위가 아무리 감언이설로 구워삶아도 문이 열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온 마당에 이렇게 쉽게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달리 재주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시도 정도는 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잠깐 가지고 온 것들을 전해 주고만 오려는데, 그래도 안 되겠는가?”
“…….”
“정말 저것들만 전해 주고 온다 약속하겠네.”
이설이 뒤에 화홍이 서있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접히는 눈을 중심으로 화사하게 퍼지는 미소는 어려운 부탁을 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어지간한 냉혈한이나 심보가 못된 사람이 아니고서야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는 없다 배웠다. 이 정도 상냥함이면 못 이기는 척 길을 내어 줄 만도 하다고 자찬했다.
눈이 마주친 금군의 가무잡잡한 얼굴에 돌연 홍조가 돌았다. 안절부절 말을 잇지 못하더니 옆에 선 다른 금군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푹 찌르자 이내 큼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외부인은 물론 쌀 한 톨도 허락 없이 들이지 말라는 황명이었습니다.”
“송구하오나, 마마. 이만 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옆에서 말을 거드는 다른 금군이 흘끔 눈을 돌려 대문 안쪽을 살피며 말했다.
허탈해진 이설이 주 상궁과 눈을 마주했다. 성급한 결정으로 괜한 걸음만 하게 됐다. 이렇게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절단으로 온 이민족 여인을 이 정도로 철저하게 격리시키다니, 사정 모르는 궁인들이 봐도 의심을 살 게 뻔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실까요?”
주 상궁이 나직이 이설의 의견을 물었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와 금군은 듣지 못하게 조용히 속삭였다.
“시일 내로 다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쉬운 듯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하던 이설이 결국 포기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고하게.”
그리고 몸을 돌려 한 걸음 떼는 순간 등 뒤로 육중한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들렸다. 내디딘 발을 축으로 이설은 몸을 다시 반 바퀴 더 돌렸다.
“앗”
살짝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온 신음 같은 작은 탄사가 제 귀에만 들렸다. 양쪽으로 활짝 열어젖힌 낡은 문 뒤로 걸어 나오는 사람의 얼굴은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무슨 소란이……,”
“…….”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소의.”
여간해선 꿈쩍도 안 할 것 같던 금군의 창이 거두어지며 길이 트였다. 활짝 열린 대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우찬이 문턱을 넘어서다 이설을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멈췄다. 예상치 못한 이를 맞닥뜨린 얼굴은 여러 감정으로 뒤섞여 있었다.
“……비운궁의 루 소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못지않게 당황한 이설은 짧은 순간 굳어진 얼굴을 가리며 자리에 부복하였다. 흙바닥의 자잘한 돌무더기에 무릎이 쓸리는 줄도 모르고 급히 엎드린 자세에서 이마를 바닥에 갖다 대니 별의별 감정들이 난잡하게 마음을 파고들었다.
평소보다 한참을 그 상태로 부복하여 있고 나서야 우찬이 일어나라 명했다. 엎드려 있는 동안 마음을 추스른 이설은 태연한 얼굴로 일어나 우찬을 바라봤다. 여러 계단을 지나 높은 곳에 위치한 대문 앞에 우찬이 아직 서 있었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 장식과 옷매무새를 보니 아침 일찍이 이곳에 들렀다 나서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제야 금군이 저를 보고 당황하며 급히 돌려보내려고 했던 것이 이해가 됐다.
“송구합니다. 안에 계시는 줄 모르고……. 소란을 피우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설이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머리를 조아렸다. 생각보다 마음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데에 반해 자꾸만 두 다리가 후들거려 곧게 서 있기가 어려웠다. 역시 이렇게 먼 길을 걸어오는 게 아니었다.
“다시 묻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우찬이 계단 한 칸을 내려왔다. 그렇다고 썩 가까워진 거리도 아니었다. 여전히 둘 사이의 거리가 먼 채로 이설은 우찬과 눈을 마주치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북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다 하여 인사차 들렸습니다. 드릴 것도 있고 하여,”
“드릴 것?”
“간단한 먹을거리와 따뜻하게 끓여 마실 수 있는 찻잎 정도입니다. 황궁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것 같아 준비해 보았습니다.”
이설이 뒤에 선 화홍 발치의 짐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홍은 자리에 엎드린 채라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도 모르는 듯했다.
“하.”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뜨리는 우찬의 앞에서도 이설은 망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차피 더 나빠질 상황도 없었다. 설령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서 찾아왔느냐며, 거짓을 고한 것이냐 경을 친다 하더라도 못 할 짓을 했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이 궁의 안주인이 북에서 온 귀한 손님은 맞으니까.
“폐하께서 계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랬겠지.”
“알았다면 절대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요.”
“…….”
“신첩의 불찰을 용서해 주십시오.”
피로가 아직 남아 있는 수려한 얼굴에 금이라도 가는 것처럼 균열이 일어났다. 서서히 굳어가는 우찬의 얼굴을 마주하고도 무슨 불호령이 내려질지, 어떤 모진 말을 들을지 노심초사하기는커녕 이설은 싸늘하게 식어 가는 몸의 온도를 느꼈다.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에 실리는 제 기분이 고스란히 우찬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비참한지, 여기 있는 다른 어떤 이들보다 우찬이 가장 정확하게 알아주길 간절히 바랐다. 이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을 만큼…….
“폐하. 밖에서 무얼 하시옵니까?”
우찬의 뒤 너머로 나긋나긋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문 문턱을 사뿐히 넘는 비단신을 보고 이설이 꼭 감은 눈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만 궁으로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나올 필요 없다. 들어가 있거라.”
색색의 화려한 치맛단을 올려 든 여인이 우찬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보지 않으려 했으나 정면으로 향한 시선에 담기지 않을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제법 고운 여인이었다. 자신과 같은 처지로 입궁한 황제의 후궁들을 보며 높아진 미의 기준으로도 못났다 말할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아무렴 빳빳하고 무딘 저보다야 여느 여인들이 더 곱고 화사했다. 하물며 한눈에 봐도 건강하기로는 이설과 비교할 바가 아닌 것 같았다. 운 좋게 태어나 보니 왕족이었던 제 신분 말고는 뭐 하나 자신이 비교 우위에 선 것이 없어 보였다.
“저분은 누구시기에 제 궁 앞에 계시는,”
“대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와서는 안 된다고 분명 말했을 텐데.”
꼿꼿이 서 있는 이설을 보고 여인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우찬은 이설이 누구인지를 대답해주는 대신 냉랭한 목소리로 여인을 다시 안으로 들여보냈다. 여인은 우찬의 말에 더는 토 달지 않고 돌아섰다. 그리고 돌아서기 전 이설을 보며 싱긋 눈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까딱 흔들어 보였다. 인사라기에는 건방졌고, 흔히 하는 아는 척이라기에는 생전 처음 보는 여인이었다.
제 궁이라고 했다. 자신에게 비운궁이 있고 황제에게 태금궁이 있으며 양 소원에게 초간궁이 있는 것처럼 저 여인도 이 넓은 황궁에 자신만의 궁을 가지게 됐다. 잠시 머물다 갈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이설은 이쯤 모든 것이 다 피로해졌다.
“그럼 신첩은 이만 궁으로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원치 않으시면 가지고 온 음식들은 모두 가지고 돌아가겠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비운궁에서 준비한 것이냐.”
“예. 제가 직접 준비한 것입니다.”
“그럼 모두 도로 가져가거라.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 줄 알고 이 안에 들인단 말이냐.”
자신을 속상하게 하려고 일부러 못된 말을 하는 것이라면 아주 성공적이다. 태연한 척 서 있기에는 힘에 부칠 만큼 한계에 다다랐다. 짧게 마셨다 뱉는 호흡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이설이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그러겠다 대답했다. 먼저 뒤돌아서겠다는 말에 우찬은 묵묵부답이다.
“주 상궁. 이만 가지.”
꼼짝 않고 서 있던 주 상궁은 이설의 말에야 몸을 돌렸다. 뒤돌아선 뒤에도 제 표정이 우찬에게 보일 리 없었지만 꽉 다문 입술에 입을 주고 버텼다.
아직까지 엎드려 있는 화홍을 일으켜 세운 뒤 짐을 나눠 들고 막 자리를 떠나려 할 때였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정말 그게 전부였느냐.”
“…….”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이설이 서 있던 자리에 멈춰 선 채로 말을 끊었다. 목소리가 가까이 들린 걸 보니 계단을 내려와 말을 건 듯했다.
“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신첩의 선한 마음을 오해하지 마시옵소서.”
우찬의 의심을 단호하게 잘라 낸 뒤 이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우찬은 자신을 더 부르지도, 붙잡지도 않았다. 한참을 걸어 무암궁에서 멀어진 뒤 담벼락 한쪽을 짚고 쪼그려 앉은 이설을 위해 화홍은 곧 가마꾼을 부르러 갔다.
가쁜 호흡을 몰아쉬는 이설의 등을 두드리며 주 상궁이 괜찮으냐 걱정스레 물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정말이지,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