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60화
“없습니다.”
“…….”
“후궁 마마께서 사가에 외출을 다녀오셨다는 얘기는 이제껏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잘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법도 한데……,”
“황궁의 법도는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엄격합니다. 잘 찾아본다고 하여 없는 방법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주 상궁은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으려는 듯 딱 잘라 대답했다. 풀이 죽은 이설이 괜히 빈 놋그릇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아랫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주 상궁은 곧 말없이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황궁을 나가는 것이 녹록지가 않다. 쉬울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예 방법조차 없을 줄이야.
탁자 위를 깨끗하게 치운 주 상궁이 밖에 있던 화홍을 불러 남은 그릇들을 가져가게 했다. 화홍과 함께 나갈 줄 알았던 주 상궁이 다시 들어와 풀이 죽어 있던 이설 앞에 섰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게 뭔가?”
썩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주 상궁이 한참을 뜸을 들이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폐하와 함께 다녀오시는 겁니다.”
“…….”
“폐하께서 마마와 함께 연국에 다녀오시는 거라면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었지만 주 상궁도 이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듯했다. 그러니 고민 끝에 슬쩍 귀띔이나 해 주는 것일 테지.
“내가 별로 원치 않아.”
“…….”
“게다가 폐하께서도 그런 부탁을 들어주실 리 없지 않은가.”
그나마 주 상궁이 쥐어짜 낸 방법마저도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고 나니 정말 아무런 수가 없는 것 같아 절망감이 밀려왔다.
내내 장난처럼 굴었던 기색은 사라지고 어느새 얼굴 위로 어둡게 그늘이 진 이설이 하얀 얼굴 위로 마른세수를 했다.
“하온데 마마, 갑자기 연국은 왜 다녀오시려는 겁니까?”
“아바마마가 편찮으셔. 아무래도 해를 넘기시지 못할 것 같아 얼굴이라도 뵙고 싶네.”
“단지 그 이유 때문이십니까?”
“그럼 달리 이유가 있겠는가?”
주 상궁의 무표정한 얼굴이 가만히 이설과 마주 봤다. 거짓으로 막고 있는 저 깊은 곳의 속마음을 끄집어내기라도 하려는지 까만 눈동자가 이설을 옭아맸다. 주 상궁의 기에 눌렸다기보다는, 더는 감출 이유도 없고 그럴 기분도 들지 않은 이설이 결국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황궁은 숨이 막혀.”
이설이 식은 차 한 모금을 삼키며 지친 마음을 풀어 놓았다.
“생각해 보면 처음 입궁했을 때가 더 살 만했던 것 같아.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거든.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으셨지요.”
“맞아. 그런데 지금은 욕심이 너무 많아졌어.”
“…….”
“난 가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서 황궁은 나를 더 불행하게 해.”
기운 없이 흐리게 웃는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이설은 언제부턴가 온갖 불행을 그득그득 껴안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품에 끌어안은 불행이 너무 많아 더는 가질 수 없을 것 같아도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어제보다 더 배로 늘어난 불행히 어깨를 짓눌렀다. 덜어 주는 이 하나 없이 혼자서만 그것들을 껴안고 살아가는 이 황궁 생활이 너무 버겁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은 이설에게 주 상궁은 이렇다 할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빈 찻잔을 채웠다. 어쭙잖게 위로하려는 말을 하지 않아서 더 좋았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정말 아주 잠깐이라도 황궁을 벗어나고 싶어. 어차피 난 여기서……, 평생을 살아야 하잖아.”
하마터면 우찬과 비밀스럽게 했던 약조까지 말해 버릴 뻔했다. 가까스로 말을 아낀 이설이 주 상궁을 보고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나도 참 나약하지. 다들 버티는 황궁 생활을 이리 힘들어해서야.”
다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하기는 해도 어쩐지 제 모자란 밑천을 다 드러낸 거 같아 괜히 민망해졌다. 음울하게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바꾸려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주 상궁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다들 그렇게 버티고 있는 겁니다.”
“응?”
“소인이 처음 모셨던 웃전께서는 무척 강인하신 분이셨습니다. 헌데 그런 분께서도 입궁 후 매일 밤 창을 모두 닫으시고 혼자 우셨습니다.”
주 상궁이 모셨던 웃전이라 하면 아마 선대 황후를 말하는 것일 테다. 태자의 친모이며 선대 황제가 끔찍이도 아꼈다던 여인.
“하루는 소인이 왜 그리 우시는지 여쭤보니 외로워 울었다 대답하시더이다.”
“…….”
“마마께서만 나약하신 게 아니니 너무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황궁은 원래…… 그런 곳입니다.”
선황제의 지극한 총애를 받고도 외로워 울었다는 황후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 있겠냐마는 황궁은 원래 그런 곳이라는 말이 조금 위안이 된다니 대체 자신은 어디까지 망가진 걸까.
“그래도 처음 입궁하셨을 때보다 마마께서도 많이 단단해지셨습니다.”
“내가?”
“예. 그때는 정말 소인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놀리려 하는 말이 아닌지 주 상궁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이설이 피식 웃으며 민망한 듯 볼을 긁적이자 주 상궁도 인자하게 웃는 얼굴로 내려다봤다. 언제부턴가 주 상궁 저 표정이 어색해지지 않게 됐다.
꿀에 절인 복숭아 한 접시를 다 비울 때까지 기다린 주 상궁이 빈 접시를 들고 나갔다. 목간에 물을 데워 놓겠다고 나간 뒤로 혼자 남은 이설은 침상에 벌러덩 누워 주 상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황제에게 함께 연국에 가달라는 청을 할 수 있을까.
우스운 고민이다. 그런 부탁 따위 할 수 조차 없다. 당장 우찬을 찾아갈 용기조차도 없는데. 게다가 이제는 우찬을 만나기 위해서는 태금궁이 아니라 무암궁으로 향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거지.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얼굴이 떠오른다. 비단옷을 입고 우찬에게 다가가던 여인은 잠깐 봤을 뿐이지만 기백이 당당해 보였다. 우찬의 옆에 서도 초라해 보이지 않을 그런…….
점점 우울한 생각으로 빠지고 있는 이설을 놀라게 하며 단향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욕탕 물이 다 데워졌다며, 얼른 씻고 새 옷을 입어 보자 수선을 떠는 단향 덕에 정신이 쏙 빠진 채로 목간으로 향했다.
*
“……하여, 태자 전하께서 화가 단단히 나신 듯합니다. 허허.”
아침부터 이건 또 무슨 정신 나간 경우란 말인지.
“그래도 폐하의 결정은 참으로 훌륭하셨습니다. 비은궁 출입을 금하시다뇨.”
늙은 사내의 너털거리는 웃음소리가 대전에 듣기 싫게 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태자께서 루 소의 마마의 입궁 이후로 글공부를 게을리하신다 하여 이 늙은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태자가 글공부를 게을리하는 것이,”
가만히 얘기를 듣던 우찬이 처음으로 대꾸를 해 주며 눈을 마주쳤다.
“소의 탓은 아니지.”
“…….”
“태자가 거기까지인 것을, 그대는 어찌 소의 탓이라 하는가?”
“아직 어리신 태자께서야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지만 마마께서 너무 받아 주시기만 한 것 아닌가, 하는 여러 대신들의 생각도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만의 생각은 아니라는 듯 다른 대신들을 들먹이며 빠져나가는 꼴이 우습다 못해 비열하기까지 하지만 물고 늘어질 기분은 나지 않았다. 동이 틀쯤부터 바삐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 정신없이 자리를 옮겨 다니다 겨우 한숨 돌리던 차였다.
이설이 입궁한 뒤로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손조익이 알현을 요청했다. 사냥대회에서 어깨 부상을 당했을 때에도 달랑 안부 서신이나 보내고 말았던 작자가 직접 알현을 요청하기에 무슨 꿍꿍이인가 싶어 안으로 들였다. 하지만 늘어놓는 말들이라고는 영양가 없는 헛소리가 전부이니, 우찬도 슬슬 짜증이 나던 참이었다.
“물론 소의 마마께서 감당하시기에 태자 전하의 고집이 보통은 아니시긴 합니다만.”
다시 허허, 웃고 마는 손조익을 빤히 들여다보던 우찬이 이내 조소로 따라 웃어 보였다. 말 한마디도 그냥 하는 법이 없는 늙은이는 이설이 심약하고 무르다 비웃고 싶은 것이다.
“자네가 어찌 그리 잘 알아? 소의를 만나 보기라도 했나?”
무심하게 묻는 우찬이 손조익의 얼굴을 살폈지만 하도 거죽이 두꺼워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파악하기도 쉽지 않았다. 겨우 구분할 수 있는 건 눈빛 정도인데, 별다른 동요도 없다.
“얼마 전 인사도 드릴 겸 한 번 찾아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 소의가 반갑게 맞아 주던가?”
“예, 무척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그것참 다행이군. 소의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가려 받을 이 구분을 잘 못 하거든.”
에둘러치는 말이기는 해도 비꼬는 의미가 분명했다.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는 손조익도 그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웃고 있기는 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게 뻔했다. 아침부터 저조했던 기분이 그나마 풀리는 듯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 두 개가 허공에서 맞부딪히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건 좀 큰일입니다. 장차 금의 황후가 되실 분께서 그리 사람 보시는 눈이 없으셔야 되겠습니까?”
드디어 드러난 손조익의 본색에 우찬이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인내심의 한계도 결국 여기까지였던 셈이다. 이설이 입궁한 뒤로 내내 참을성 있게 기다렸던 것을 헤아려보면 생각 외로 오래 버티기는 했다. 이리저리 재고 또 재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손조익도 마음이 급해졌을 것이다. 요 며칠 동안 매일 무암궁을 찾는 우찬의 소식을 들었을 테고, 무암궁 안주인이 북쪽 출신의 제법 얼굴이 고운 여인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혹여 우찬이 이설을 버리고 새 여인에게 마음을 주고 황후 직에 봉할까 전전긍긍했을 테지.
생각해 보면 손조익 입장에서는 아주 말이 안 되는 걱정은 아닐 것이다.
우찬은 가만히 이설을 떠올려 봤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소의는 황후가 될 소임이 부족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