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61화
“소의는 황후가 될 소임이 부족하지.”
“…….”
“아직은.”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우찬의 말 하나하나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는 손조익의 꼴이 우스웠지만 오래 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우찬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왔을 속내는 알았으니 더는 두고 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당장 손조익이 아니더라도 처리할 문제가 많았다.
“어쨌든 그대의 문안 인사는 이 정도 받았으니 충분한 것 같은데.”
“폐하. 신 물러나기 전에 한 가지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
“신이 일전에 폐하와 했던 약조는 아직 유효한 것이 맞습니까?”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다.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는데. 이번만큼은 자신이 허를 찔렸다 인정하며 우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약조하지. 이 자리의 다음 주인은 반드시 태자 해도원이 될 테니 그대는 나를 의심하지 말게.”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듯한 손조익은 우찬의 기세에 눌려 더는 말을 더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운치 못한 표정을 보아하니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생각도 없는 듯했다. 뒤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에 꿍꿍이가 있는 게 확실했다.
“……따라붙을까요?”
풀썩 떨어지는 소리도 없이 작은 바람만 일으키며 아래로 내려온 호위군 하나가 나직이 물었다. 금빛 봉황이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에 앉아 조용히 손조익이 나간 문을 응시하던 우찬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꼬리를 밟을 거라는 걸 알 테지. 오늘은 아마 본가로 바로 돌아갈 테니 그럴 필요 없다.”
“예.”
곧 인기척이 사라지고 넓은 대전에 혼자 남은 우찬이 팔걸이까지 이어진 봉황 조각의 꼬리 깃털 부분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조용히 숨소리를 죽이자 밖의 소란스러움이 안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연회는 내일부터인데 궁인들은 벌써부터 들떠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찬은 아무렴 모든 게 다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설이나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폐하, 차란이옵니다.”
젠장. 잠깐 쉴 틈도 없이 지겹게 찾아오는 쓸모없는 것들.
화를 눌러 참고 들어오라 대답하니 차란이 헐레벌떡 들어와 우찬 아래에 섰다.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보니 알 만도 하다. 또 귀찮은 일이다.
*
중요하다면 중요한 아침. 이설이 목간의 욕탕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평소처럼 어련히 잘 씻고 나오실 거라 생각했던 이설이 한참을 나오지 않자 그제야 궁인들이 이설을 깨웠고 그 뒤부터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됐다. 물기도 다 닦지 않은 몸을 대충 닦아 옷을 꿰어 입고 침소로 돌아왔다.
뜨거운 물에 절여진 것처럼 흐물흐물하게 녹아 있는 몸을 자리에 앉히자 기다렸던 것처럼 궁녀들이 달려들어 치장을 시작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느라 한참이 걸리고, 그 위에 갖은 장신구를 꽂아 넣느라 또 한참. 옷을 입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화홍아, 머리가 너무 무겁다.”
“참으세요, 마마.”
“이러다 내 목이 똑 분질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그럼 제가 다시 철썩 붙여 드리면 되지요.”
전보다 많이 뻔뻔해진 화홍의 대답이 웃기기는 하다마는, 마냥 웃기도 어려운 처지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머리가 무거웠다. 금붙이들을 어찌나 많이 꽂았는지, 햇빛이 번쩍거리는 비녀들 때문에 면경에 얼굴을 들여다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작년에 양 소원 마마는 머리에 이만한 금관을 쓰고 나타나신걸요.”
“정말로 이만하였습니다.”
화홍이 하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강조하며 연화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렸다. 황제 폐하도 그리 큰 금관을 쓰지 않았을 텐데, 괜한 과장을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이설이 웃는 듯 울상을 지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세요. 제식은 금방 끝납니다.”
“그나저나 제식 같은 건 한 번도 올려 본 적이 없는데…….”
“제를 올리는 건 신당 무녀가 하는 일이고, 마마께서는 자리만 잘 지키시면 됩니다.”
“이리 다소곳이 앉아서요.”
옷이 불편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이설을 보고 궁녀들이 깔깔 웃었다. 사내치고 몸가짐이 나긋한 거지, 여인들에게 강제되는 잣대만큼 조신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이설이지만 오늘만큼은 그리 편히 앉을 수가 없었다. 꽉 동여맨 허리끈 때문에 허리를 오므라뜨리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고 밑단의 폭이 너무 좁아 다리를 편히 벌려 앉을 수도 없었다.
늘 자신이 입는 옷이 여인들의 의복이 아닐까 의심하던 이설이 정말 그런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중이었다.
“불편해도 잠깐만 참으세요. 평상시라면 몰라도, 제를 드리는데 사내 복장을 하고 들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마께서는 어디까지나 내명부를 대표하여 참석하시는 거니까요.”
오늘따라 쿵짝이 잘 맞는 연화와 화홍이 이리 얄미운 적도 없었다. 그나저나 여인들은 이런 불편한 옷을 어찌 잘만 입고 다니는 건지, 놀랄 노 자다. 심호흡을 길게 뱉은 뒤 자리에서 혼자 일어나 보려던 이설이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하자 연화가 놀라 몸을 받쳐 주었다.
“보폭을 크게 벌리지 마시고, 조금씩……, 예, 그렇게 좁게 걸으셔야 합니다.”
“이리 걸어서 언제 제식까지 간단 말이냐? 근데 제식은 어디서 한다 했지?”
“황궁 서쪽 끝에 큰 못 하나가 있는데 올해는 그 앞에서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가마를 타고 가실 테니, 그런 건 걱정도 마세요.”
며칠 전 무암궁을 가던 길에 봤던 못을 말하는가 싶다. 매년 신당 무녀의 점괘에 따라 황궁 여기저기로 제식 장소가 바뀐다더니 하필 올해는 왜 황궁의 서쪽일까 싶다. 다시는 그 근처에 얼씬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동안 머리가 무겁다, 모가지가 뚝 분질러지겠다 하도 엄살을 떨어 댄 탓에 다들 개의치 않는 듯하지만 오늘은 다른 날보다도 유독 목이 뻣뻣했다. 걷는 것도 힘든 와중에 머리부터 고꾸라지지 않기 위해 애를 먹었다.
다시 며칠 만에 우찬을 만난다는 생각에 어젯밤 잠을 뒤척이고 걱정했던 것이 지금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어졌다. 당장 가만히 서 있는 것도 문제인데, 우찬을 보든 말든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도 다행히 늦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설을 가마에 태우며 연화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마에 오르기까지 만으로도 기진맥진한 이설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연회 준비로 지나는 길 곳곳마다 궁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에 자신만 이방인 같다. 연회고 뭐고, 제식에 얼굴만 비친 뒤로는 비은궁으로 돌아와 쥐죽은 듯 잠자코 있을 생각이다. 내일 있을 경연은 뽐낼 재주가 없다 해도 자리는 지켜야 한다 하니, 어쩔 수 없지만.
“마마, 모퉁이만 지나면 곧 도착입니다.”
가마 안에 작게 난 창의 발을 들어 올리며 주 상궁이 말했다. 주 상궁은 오늘따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지 아침부터 수선을 떠는 궁녀들을 보고도 꾸짖는 소리 한번 없이 묵묵히 이설의 옆자리만 지켰다.
곧 가마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연화의 시중을 받아 가마에서 나오니 적당히 쏟아지는 햇빛에 반짝이는 못이 보였다. 관리가 썩 잘되지는 않았는지 물이 깨끗하지는 않았다. 보통은 볕이 잘 드는 동쪽의 전각들 중 하나를 골라 제식을 지낸다 들었는데 올해는 무슨 바람이 들어 서쪽까지 가게 만드냐며 오는 길 내내 단향이 투덜거렸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이설에게 차란이 다가왔다. 평소 입지 않는 멋들어진 옷을 보니 제를 지낸다는 게 실감이 났다. 연에서도 달이 맞는 새해를 기준으로 제를 지내긴 하지만 특별한 의식이랄 것까지는 없었다.
“무척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예, 승상께서도 별고 없, ……앗!”
“마마!”
걸음이 영 불편하다 싶던 이설이 결국 돌계단을 오르다 머리 장식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냅다 고꾸라졌다. 긴 장포의 끝을 잡고 뒤따라 걷던 연화가 달려가 몸을 받치기도 짧은 순간이었다. 이대로 돌계단에 이마를 찧겠구나 눈을 질끈 감았던 이설은 곧 허리께의 묵직한 안정감에 실눈을 찔끔 떴다.
“괜찮으십니까, 마마?”
“……아, 승상. 감사합니다,”
“하마터면 크게 다치실 뻔하였습니다. 이걸 사람이 입으라고 지은 옷인지, 원.”
가까스로 이설의 허리를 받쳐 넘어지는 걸 막은 차란이 이설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안도했다. 차마 옷을 지어 온 궁녀들 앞에서 하지 못할 소리를 차란이 대신해 주며 뒤에 선 연화를 흘겨보자 연화가 주눅이 들어 어깨를 움츠렸다.
“여인들의 제례복은 다 이렇다 하여……. 제가 더 조심히 걷는 수밖에요.”
“계단이 많이 불편하실 테니 제 팔이라도 잡으시지요.”
괜찮다 거절하기에는 정말 돌계단이 너무 많았다. 턱이 높지 않아 다행이었지, 턱마저 높았다면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 제가 마중을 나와 있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제 마중을 나와 계셨던 겁니까?”
운 좋게 도착한 시점이 맞아 만난 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이설이 가볍게 놀라 묻자 차란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예, 뭐 겸사겸사. ……보통은 폐하께서 함께 가시는 게 관례이긴 한데…….”
“또 신세를 집니다, 승상.”
차란이 대충 얼버무리는 말로 둘 사이가 민망해지지 않게 이설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이대로 서로 안부만 물었으면 좋을 것을, 차란은 그럴 생각으로 마중을 나온 게 아니었는지 ‘마마’ 하고 조심스럽게 이설을 불렀다.
“경미찬 연회 전에 드리는 제는 오직 신당의 소관으로 준비됩니다.”
“예.”
“제를 지내는 시간, 장소, 음식 모두 무녀의 점괘로만 결정되고 있습니다.”
“대충 들어 알고는 있습니다만.”
갑자기 이 얘기를 왜 꺼내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이설이 차란을 곁눈질로 봤다. 머리가 무거워 목이 고정된 것처럼 빳빳해서 고개를 돌리기가 힘들었다.
“황궁의 그 누구도 무녀의 점괘에 훈수를 둘 수 없습니다. ……설령 황제 폐하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숨이 가빠 터지는 탄성을 순간적으로 삼켜 내자 마른기침이 쿨럭쿨럭 터졌다. 이설이 붙잡은 팔에 힘을 더 세게 준 차란이 착잡한 얼굴을 옆으로 돌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높지 않았던 돌계단의 끝이 보이며 너른 공터가 나타났다. 긴 막대를 세워 묶은 형형색색의 비단들이 바람결에 휘날리며 아래의 사람들을 숨겨 주었다, 보여 주었다를 반복했다.
그중 가장 길게 휘날리는 금빛 반짝이는 비단 천 아래로 우찬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근래에 봤던 의복 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걸치고 햇빛 아래 세상만사가 모두 가소롭다는 예의 그 표정이다.
“그저 무녀의 점괘일 뿐입니다.”
재차 강조하는 차란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금빛 비단 아래, 그리고 우찬의 옆에 낯설지 않은 여인이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