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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64)화 (164/300)

달의 황홀경

164화

닷새간의 연회 동안 황궁 내 돌보던 정사들이 모두 중지됐다. 그럴 만한 시국이 전혀 아니었지만 우찬이 연회의 본질적인 목적을 운운하는 몇몇 대신들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반발은 일단락됐다.

이따금 나가는 사냥 말고는 정무에만 푹 빠져 사는 우찬의 보기 드문 결정은 뭇 대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근거 없는 추측을 만드는 원흉이 되었다. 하지만 우찬이 신경을 써야 할 것들은 아니었다.

제식이 끝난 후 태금궁으로 돌아온 우찬은 환복을 도우려는 궁녀들을 모두 물렸다. 잠깐의 제식을 위해 궁녀 다섯이 몇 날 며칠을 고생해 지은 귀한 의복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치고 침상에 걸터앉았다.

이제야 해가 막 중천에 걸쳐지기 시작했는데 벌써 피곤과 함께 짜증이 훅 밀려들어 왔다. 매년 황궁 전체에 퍼져 나가는 연회의 들뜬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들기는 했지만 지금 마주한 짜증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폐하, 탕약 드실 시간이옵니다. 안으로 들일까요?”

시원한 냉수나 한 잔 가져다 할 참이었는데 궁녀가 가져온 것은 뜨끈하게 달인 탕약 따위였다.

“거기에 두고 물러가거라.”

“송구하오나 내관 어른께서 반드시 빈 그릇을 가지고 나오라 하셨습니다.”

용기가 가상했던 궁녀는 우찬이 쓰윽 돌리는 시선에 눈이 마주치자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부리나케 물러났다. 탕약을 먹은 후 쓴 혀를 달래라며 가져다준 절인 복숭아와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흙탕물 색의 탕약만 커다란 탁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체감할 수가 없었다. 탕약에서 더 이상 김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슬슬 기다리는 사람이 올 때가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정말 오래 지나지 않아 문 바깥 너머에서 승상이 왔다 기별을 알렸다. 제식을 드리는 동안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으면서 격식을 갖춰 입은 차란이 여유롭게 들어왔다.

“시킨 일은 잘하였느냐.”

“예.”

“궁까지 바래다주었고?”

“서고에 들르신다 하여 근처에서 헤어졌습니다.”

“서고?”

“예. 갑자기 뭘 좀 찾아보고 싶으시답니다.”

“…….”

“뭔지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 않았지만 대충 약초도감 같은 것을 보시려나 봅니다.”

크게 문제 될 게 있겠냐는 듯 차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꾸만 흘긋거리며 쳐다보는 것이, 오늘 제 기분 상태를 가늠하기 위해서 하는 습관이라는 걸 안다. 괜한 짓을 시켰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돌을 쌓아 만든 계단을 다 내려간 뒤 차란을 이설에게로 올려 보냈다. 구체적으로는 이설을 언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차란은 왜 자신이 수고스럽게 제식을 마친 장소까지 다녀와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같이 내려오시지, 하는 아쉬운 얼굴이 번뜩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뒤에 선 여인을 발견하고는 입을 닫았다.

“혼자 궁에 계시니 적적하실 테죠. 찾아가 주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대놓고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은 차란이었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그럴 의도는 전혀 없는 듯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안타까움이 가소로운 것 이상으로 기분이 나빴다.

“아마 오늘 무척 고생하셨을 겁니다. 옷이며, 사람이며…….”

이설의 차림새를 떠올려 본 우찬이 혀를 쯧쯧 찼다. 옷보다는 머리 장신구 쪽이 더 문제였다. 그러다 정말 모가지라도 똑 분질러지면 어쩌려는 건지. 뭐, 그렇게 되는 한이 있어도 황궁을 떠나는 일은 없겠지만.

“안 불편한 것이 없는 자리였으니까요.”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거냐?”

“그냥 그러하다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짜증스럽게 구는 차란을 불편한 심기로 노려보던 우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녀가 두고 간 식은 탕약을 벌컥벌컥 마신 뒤 빈 그릇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턱짓으로 반대편을 가리키자 차란도 앞자리에 따라 앉았다.

“신녀가 신탁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만.”

절인 복숭아 그릇을 옆으로 휙 밀어내며 우찬이 눈살을 확 찌푸렸다.

“그게 사실입니까?”

“글쎄. 영 쓸모없는 소리를 하긴 했지.”

“뭐라 하였습니까?”

“겨울이 왔고, 눈보라를 피해야 한다더군.”

“눈보라를요?”

“그리고 억울하게 죽는다 원통해했어.”

“…….”

“살 만큼 산 노인네가 욕심도 많아.”

우찬이 기억하는 모습부터가 이미 백발의 다 죽어 가는 노인이었다. 산송장이라는 말은 그녀를 보고 배운 것이었다. 평생에 신을 떠받들며 속세와 담을 쌓고 지냈어도 죽음이라는 두려움은 극복하지 못한 모양이다.

어리석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 젊은 나이에 사고사하는 일은 단지 운이 나쁜 것일 뿐 세상 이치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죽음 앞에 특별한 존재는 없다.

“죽음 앞에서는 다들 그렇지요. 그나저나 눈보라를 피하라 하였다고요?”

“그래”

“…….”

“뭘 그리 쳐다보느냐?”

“폐하께서는 눈보라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고 있으십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우찬이 인상을 확 찡그러뜨렸다. 차란이 물어보는 의도가 너무 빤했다.

“네가 지금 뭘 물어봤는지 알고는 있는 것이냐?”

“혹시나 해서 여쭤본 것입니다. 눈보라라는 게 저희 금의 사람들에게는 무척 생소한 것 아니겠습니까? 신은 말로만 들었지 평생 본 적도 없습니다.”

차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찬 역시 눈보라 같은 것은 문자로나 읽어 봤지 누군가 입에 담은 것을 들은 것도 아마 이번이 처음이지 싶다. 평범한 금국인에게 눈이라는 것은 어딘가에 있다고는 들었으나 그게 정말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본 적은 없는 무언가였다.

우찬은 열 살 남짓 했던 때에 동북 토벌대를 따라갔다가 눈 쌓인 벌판을 본 적이 있었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마주했던 경험은 없었다. 대부분의 황궁 사람들이 그러했다.

“하얀 눈이 바람에 휘몰아쳐 우장절 빗줄기처럼 떨어진다 하더이다. 어찌나 많이 휘날리는지 한 치 앞도 분간이 안 간다고도 하고요.”

“…….”

“그런데 그 눈보라를 피하라 하였다는 말씀이십니까? 여기 금국에서 눈보라를요?”

믿기지가 않는 듯 차란이 동그랗게 뜬 눈을 하고 상체를 우찬 쪽으로 기울이며 재차 물었다. 어처구니가 없기로는 우찬도 마찬가지라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신탁이 늘 그런 식이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좀…….”

“죽을 때가 되어 하는 헛소리인지 분간이 안 돼.”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식 드릴 장소를 이틀 만에 세 번이나 번복하지를 않나, 애먼 사람을 데려다 앉혀 놓으라고 하지를 않…….”

차란이 슬그머니 말소리를 낮추기는 했지만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제를 올릴 장소를 이틀 동안 세 번이나 바꾸는 바람에 준비에 차질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고 애먼 사람을 데려다 앉혀 놓으라 하여 그간의 제례 전통을 깨트린 것도 사실이었다.

덕분에 이설이 저를 대신하여 들어앉게 될지도 모르는 구원자를 직접 만나게 됐다.

다시 생각해 보니 우습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이설은 호들갑스럽게 기뻐하지도, 나긋하게 환대를 해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날이 선 느낌이 더 강했다. 날카로운 발톱을 세워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야생 동물처럼.

아무래도 함께 있던 자신을 의식한 게 아닐까 싶다. 여전히 자신이 밉고, 곁에 있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감히 괘씸하게도.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이전에도 그 신녀의 말을 무시한 적이 있었어. 그리고 두 번의 국장을 치렀지.”

“그렇긴 합니다만…….”

이제야 과거의 일이 기억났는지 차란이 아차 하는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그때의 과오가 생각난 듯했다. 하지만 과오라도 한들 그때 당시에는 다른 수가 없었으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먼저 알을 깨고 나온 봉황은 아무리 날아도 태양에 닿을 수 없으니, 다음으로 알을 깨고 나온 봉황만이 금의 황실을 부흥케 한다는 신탁을 무슨 수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자신과 차란 단둘만이 들었으니 다행이지, 다른 이가 들었다면 황궁에 피바람이 한차례 몰아쳤을 것이다.

“신탁이란 늘 애매하고 두루뭉술해서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내용을 알려 해석을 구하기도 어렵고,”

“소운에게 서신을 보내 보도록 하지. 지금쯤이면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나를 원망하는 마음도 제법 사그라들었겠지.”

일당백에 믿음직스럽기까지 한 충신이 있는데 무슨 걱정일까. 써야 할 때에 곁에 바로 없다는 게 흠이기는 했지만.

“서신은 오늘 밤 상단을 통해 보내겠습니다. 신탁의 정확한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처음에 말한 그대로다. 겨울이 왔고, 눈보라를 피해야 한다고도 했고, 몰아내야 한다고도 했어. 그리고 늙고 추한 몸은 억울하게 죽는다더군.”

문장을 곱씹어 외우던 차란이 불쑥 아리송한 표정을 하고 혼잣말을 했다. 겨울은 아직 두어 달이 남지 않았냐는 헛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이런 일에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놈이구나 싶었다.

차란이 혼자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정적이 뜨자 다시 아침에 봤던 이설의 모습이 떠올랐다. 여인들의 의복을 입혀 놓으니 평소 드러나지 않았던 사내 특유의 체형이 보였지만 그래도 보통의 사내들보다는 여전히 몸의 선이 부드러웠다.

불편한 옷에 몸이 꽉 조여지니 행동은 더 굼뜨고 느려졌다. 시중드는 궁녀가 없으니 자리에 앉았다 일어나는 일도 애를 먹은 모양인데 손 한 번 내밀지 않는 그 고집이 또 그리 괘씸하더라.

근래에 이설과 말을 섞어 좋은 말이 나갔던 일이 없었던지라 가급적 대화를 피하려고 한 것이 무색하게 시선은 자꾸만 왼편을 향했다. 지루해 죽겠는 얼굴은 소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낼 때만 잠시 경악하고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왔다.

아마 진동하는 피비린내가 많이 역겨웠을 것이다. 후원에 애지중지 키우는 하찮은 짐승을 고려하여 사슴이나 토끼 같은 연약한 동물보다는 되도록 몸집이 큰 것으로 제물을 바치라 미리 일러두었던 게 다 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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