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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65)화 (165/300)

달의 황홀경

165화

“신탁이라는 것들은 어찌 늘 이렇게 난해한 것인지.”

혼자 곱씹어 봐도 이렇다 할 의미를 찾지 못한 차란이 조용한 말로 혀를 찼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신당 일은……,”

난데없이 천장에서 나뭇잎 하나가 느릿한 속도로 내려와 비어있던 탕약 그릇에 살포시 떨어졌다. 낙하하는 나뭇잎의 궤적을 시선으로 천천히 쫓아가던 우찬이 탁자 위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보고해라.”

말 끝나기 무섭게 쓰윽 모습을 드러내는 흑영을 보고 차란이 깜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한두 번 보는 일도 아니면서 흑영이 나타나고 사라질 때마다 저리 부산을 떠는 것이 우찬은 무척 꼴사나웠다.

“특별히 수상한 점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래?”

“누군가 궁 밖에서 은밀히 침입한 흔적은 없었습니다.”

“확실한가?”

“무암궁은 담마다 잔가지들이 많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드나들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좀 더 면밀히 조사해봐야겠군.”

“송구하오나 두 분께서는 지금 무슨 얘기를 나누고 계신 겁니까?”

허리를 탁자 안쪽으로 완만히 기울이며 차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흑영이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며 복면을 아래로 끄집어 내렸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우찬과 눈을 마주쳤다. 우찬이 그렇게 하라는 듯 한 번 손짓하고 나서야 순순히 대답한다.

“사흘 동안 무암궁에서 매복 후 복귀한 참입니다.”

“무암궁을요? ……아, 그래서 어젯밤에도 무암궁에서…….”

차란이 이제야 이해한다는 듯이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어제저녁 무암궁으로 가려는 우찬에게 하고 싶은 말은 꾹 참고 연신 한숨만 푹푹 내쉬던 걱정이 한결 가신 얼굴이기도 했다. 그리고는 정말 궁금했다는 듯이 흑영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계실 때 수상한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습니까?”

“두 분께서는 얘기를 나누시며 식사 후 차를 드셨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폐하께서 심히 피로해 하시며 곧바로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럼 폐하의 시침을……?”

차란이 은근슬쩍 우찬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께서 깊이 잠드신 걸 확인 후 그분은 별궁 처소로 몸을 옮기셨습니다.”

“별궁으로 가는 것은 직접 확인했느냐?”

“별궁 안으로 들어서는 것까지만 확인하였습니다.”

“어째서?”

“폐하의 곁을 오래 비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 발로 직접 침상에 누워 잠들었다고는 하지만 멀쩡한 정신이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니 흑영을 탓하기는 어려웠다. 이른 아침 누군가 깨워주기 전까지는 한번 눈 뜰 참도 없이 정신없이 잠에 빠져있는 상태가 된다. 무방비 상태로 혼자 누워있는 우찬에게 무암궁은 아직 그리 안전한 곳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오늘 저녁 소청각 상연에 참석하기 위해 무암궁이 다시 빌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찾아내라.”

“존명.”

눈 깜짝할 새에 흑영이 모습을 감추며 빈 그릇 안에 들어있던 나뭇잎이 함께 사라졌다. 그새 탕약이 말라 거뭇하게 자국이 남은 그릇 안을 들여다보고는 차란이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찾아내라니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짚이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짚이는 것이야 천지에 널렸지.”

“그렇기는 합니다만.”

“분명 혼자 이런 짓을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대범한 여인이라 한들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올 길을 파지는 않았을 거야. 누구든 내통하는 자가 있겠지.”

“그래도 아직 혐의를 확신하기에는 너무 이르,”

“그 여인은 아니다.”

차란의 말을 칼같이 끊어내며 우찬이 말했다. 무료함에 시들시들하던 눈빛이 이때만큼은 확신으로 가득 찼다.

“그 여인이 내 정인 같은 것 따위일 리가 없어.”

“여쭙기 황공하오나, 그러니까 어떤 연유로 그리 확신을 하시는지 신도 알아야 도움을 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네 도움 따위. 상단에 맡긴 것들이나 잘 처리해라.”

“……”

“그렇다 해도 당장 죽일 생각은 없어. 일단 이 일은 흑영에게 맡길 테니 당분간 너는 북방 방비 쪽에나 신경 쓰도록 해.”

궁 안팎으로 일어나고 있는 귀찮은 일들이 생각나 별안간 짜증이 확 난 우찬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연회로 인한 조례가 잠시 쉬기 직전까지도 대신들의 노성과 걱정 어린 목소리가 대전을 메웠다. 언제부터 그렇게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했다고 이번 기회에 북방 이민족을 토벌하자 목소리를 높이는지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올해 우장절 피해가 농가에 막심하다 하니 조세 감면을 검토해보겠다는 우찬의 말에는 그리 핏대를 세우고 반대 상소문을 올려댄 잡배들이.

그들이 정말 기회를 노리는 것은 북방 토벌을 핑계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여타 나라들과의 오래된 협약으로 어느 국지로도 소유하지 않기로 약속한 북쪽 땅들을 이번 기회에 자기네들이 차지하겠다는 심보다. 기후가 차고 대부분이 산지라 농지로는 적합하지 않겠지만 소량이나마 매장된 금은을 그냥 두고만 보기에는 아까웠을 것이다.

지난 조례에서 누군가 은근슬쩍 연국의 얘기를 꺼내 들었다. 연국에서 이민족들이 남하하는 것을 은밀히 돕고 있는 게 아니냐며 의문을 제의한 그는 사마(司馬: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관직으로서 주로 군사 방면을 담당) 육추명이었다. 건강을 핑계로 한동안 황궁 출입이 뜸했던 그가 조례에 모습을 드러낸 지도 얼마 되지 않아 우찬의 이목을 당겼다. 마침내 손조익이 이설은 이용할만한 패가 아니라는 것을 결정 내린 모양이었다.

우찬은 의미 없는 전쟁을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더 넓은 땅을 갖기 위해 무고한 피를 흘려야 한다니 이 얼마나 덧없는 생각이란 말인가. 

하지만 선대 황제들이 갖은 애를 써 내정을 안정적으로 다져놓자마자 대신들은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렸다. 금국 군사력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조무래기 같은 나라들이 있다는 걸 견딜 수가 없다는 듯 모두들 ‘정복 전쟁’을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하여 주장했다. 

“당장 죽이지 않겠다는 건 그럼 언젠가는 죽일 수도 있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 내 정인이 아니라는 게 확실히 밝혀진 이상 살려두는 것도 이상한 노릇 아니냐?”

“그분께서 정말 폐하의 정인이 아닌 게 확실하십니까?”

“……”

“폐하께서 그리 믿고 싶으신 건 아니시고요?”

느닷없이 목소리를 낮추며 차란이 물었다. 육추명이 연국을 들먹이며 갖은 헛소리를 전할 때에 맞장구를 쳐주던 대신들을 하나씩 헤아려 보고 있던 우찬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내가 뭘 믿고 싶어 한다고?”

“아직 그분이 폐하의 정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딱 잘라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게 신이 보기에는 그저 폐하께서 그리 믿고 싶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긴말을 호흡 한 번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내뱉은 차란은 뭔가를 단단히 각오한 얼굴이었다. 주제넘은 줄을 알면 말을 하지 않으면 될 텐데, 그걸 알면서도 꼭 진언이랍시고 시건방을 떤다. 별로 좋은 기분도 아니기에 평소 같았으면 가만둘 게 아니었는데 일단 듣고 보니 차란의 말도 깨나 일리가 있었다.

정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없다. 정황상 의심스러운 상황과 우찬의 직감만 있을 뿐이다. 우찬은 요 며칠 강하게 들었던 자신의 직감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일순간 저 여인은 나의 정인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고, 그게 전부였다.

“……그럴 수도 있지.”

“예?”

“내가 그리 믿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고.”

“아니, 또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신이……,”

차란이 민망한 체를 하며 목을 긁적였다. 우찬이 역정이라도 낼 줄 알고 긴장하고 있던 게 무색해진 듯했다.

“그러니 흑영이 반드시 찾아내야지. 뭐든, 그 여인이 내 정인이 아니라는 증거를.”

이쯤 되면 설령 정인이 맞다 하더라도 아니게 만들 증거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영과 차란 둘이 머리를 맞대면 그런 일 하나 꾸미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곧잘 하던 짓들이니까.

“그래서 오늘 밤 소청각 상연에 초대하신 겁니까?”

“흑영이 움직이기에는 주인이 자리를 비우는 편이 좋으니까.”

“상연에 모인 이들에게는 뭐라 소개하실 생각이십니까?”

“알린 대로 북방 우호 부족의 사절단인 셈 치지.”

“우 미인이 눈치챌 텐데요. 일전에 출신 부족을 속이고 군에 입대한 사내 여럿을 젓가락질만 보고 골라내지 않았습니까?”

별로 대단하지는 않지만 제법 신통한 재주가 있는 우 미인을 걱정하는 차란을 보고 우찬이 피식 웃었다.

“눈치채면, 제까짓 게 뭘 어쩔 수나 있겠느냐? 이 정도 황궁에서 살았으면 침묵이 미덕이라는 것도 배웠을 테지.”

황궁에 가진 것이라고는 덜렁 궁 하나에 몇 안 되는 궁인들이 전부인 우 미인이 눈치를 채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명분 때문에나 이리 신경을 쓰는 것이지 궁내에는 이미 황제가 궁 밖에서 여인 하나를 데리고 들어와 밤마다 찾아간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자자했다. 어떻게 소개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정체였다.

“루 소의 마마께서도 상연에는 참석하신다 합니다.”

별안간 루 소의 얘기를 꺼낸 차란은 우찬이 별 동요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말을 이었다.

“소청각까지 함께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또 무슨 꿍꿍이가 있어 하는 소리냐.”

“꿍꿍이라니요. 마마께서 폐하의 안부를 궁금하게 여기시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멀리 있는 사이도 아닌데 안부 정도는 직접 묻고 답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설이 내 안부를 물었다고?”

“예. 편찮으신 곳은 없는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기분은 어떠하신지 참 세세하게도 물으시더이다.”

차란은 그게 무슨 좋은 징조라도 되는 양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아침에 만났을 때만 해도 그리 나긋하지 않았던 이설을 떠올려보며 우찬은 차란이 제 기분을 맞춰주려고 의례적인 안부를 과장하고 있다 생각했다. 지난 며칠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오늘만 해도 자신이 이설을 얼마나 냉대했던가.

“이전에 중독되셨던 독화살의 부작용은 없으신지까지 물으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걱정이 되시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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