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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166)화 (166/300)

달의 황홀경

166화

내가 단명하여 황궁에 발 묶이게 될까 봐 슬슬 걱정이라도 되나 보군.

비소로 차란의 말을 일축한 우찬이 창밖을 내다봤다. 아직 날이 밝다. 해가 진 뒤에나 시작될 상연까지는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태금궁 밖에만 나가도 연회 분위기에 들뜬 궁인들이 고루 보이는데 황제의 궁인들은 모시는 웃전을 닮아 그런지 평소와 별반 다르지도 않았다. 대체적으로 낮은 편에 가까운 우찬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오히려 더 입을 다물고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다.

“마마라고 몸이 성하신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마음이 고우신지.”

“몸이 성하지 않다니?”

주절주절 잘도 나불거리는 차란의 말을 듣던 우찬이 일순 날카롭게 물었다. 차란은 뻔한 걸 물어본다는 듯 눈썹을 올려 쳐다보며 대답했다.

“고뿔이라도 걸리셨는지 얼굴은 하얗게 질리셔서 몸에 기력도 영 없어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잔기침도 잦으셨고요.”

기운 없이 처진 몸을 하고 총총거리는 걸음새가 눈에 띄긴 했지만 불편한 옷차림에 무거운 머리 장신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거기에 내키지 않는 자리에 억지로 불려와 자신까지 상대해야 했으니 그 피로함이 말로 표현이나 할 수 있었을까. 설마 정말로 몸이 안 좋을 거라는 생각에 미치지 못한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따 궁 밖에 나갔다 오는 길에 좋은 약재라도 가져다드릴까 싶습니다.”

“좋은 약재를 황궁 밖에서 찾다니 어리석긴.”

“그 좋은 약재들은 모두 폐하의 것들이라 꼬장꼬장한 사의시 의원들이 한 줌도 내주지 않을 겁니다.”

“……”

“황명이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차란이 눈알을 좌우로 도르르 굴리며 입술 끝을 비죽거렸다. 기대하는 무언가를 곧 얻게 될 것이라는 만족함이 얼굴 만면에 퍼지기 직전이다. 

우찬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다시 창밖을 봤다. 날이 갈수록 바람은 점점 선선해지고 있었다. 이맘때쯤이면 황궁 전역에 고뿔이 유행처럼 돌기 시작한다. 올해는 태자가 시작을 알렸다.

태자는 근래 며칠 동안 새벽같이 일어나 늦은 밤 잠들기 직전까지 바깥 평상에서 종일 글공부를 하며 바람을 쐬다 그 사달이 났다. 황명에 대한 나름의 반발심을 딴에는 표현해보고자 한 것 같은데 우찬의 관심은 조금도 끌지 못했다. 고뿔은 그저 나약한 몸과 정신을 증명하는 일종의 표식이었다. 장차 황제가 될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우찬이 타박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설이 고뿔이라도 걸린 것 같다는 소리에, 우찬은 태자가 고뿔에 걸렸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굳어지는 얼굴만 해도 그랬다. 그걸 눈치챘으니 차란이 기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주안의 약방을 모두 뒤져서라도 귀한 약……,”

쐐기를 박으려는 차란을 외면하고 일어난 우찬이 집무 탁자 위를 뒤져 종이 한 장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목탄필을 꺼내 들고는 종이 위에 짧은 글을 휘갈겨 쓴 뒤 그 끝은 붉은 인장으로 마무리했다. 대강 접은 종이를 들고 다시 돌아와 차란 앞에 휙 던져 놓았다.

“주제넘는 짓도 이쯤 해라.”

“예.”

차란이 근근이 떠오르는 미소를 감추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우찬에게 받은 종이를 품에 고이 넣으며 차란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듯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기분 좋게 나가는 차란을 보고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런 걸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적당히 눌러 참았던 이설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

“아이참, 마마! 지금 여기서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여기서 소청각까지 또 한참입니다. 지금이라도 출발하셔야 합니다.”

사의시 한 편, 약방 문턱 바깥 너머에 서 있는 연화와 화홍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설이 평소 같지 않게 근엄한 얼굴을 하고 ‘이 안으로 한 발짝도 들어오지 말거라’하고 엄포를 놓아 안으로 들어서지는 못하고 양옆에 기둥을 잡고 몸만 쑥 집어넣은 채 성화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거라. 그나저나 약방 관리들은 아직 찾지 못했느냐?”

“이 좋은 날 누가 약방에 눌러앉아 있겠습니까? 다들 소청각 담벼락에 붙어 기웃거리고 있겠지요!”

연회에 들뜬 마음들은 알았다만 설마 황궁 사의시마저 텅텅 비어 있을 줄은 몰랐다. 궁에 누가 급히 편찮아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생각보다 허술하게 돌아가는 황궁 사정에 놀라 혀를 차는 것도 잠시. 이설은 칸칸이 서랍들을 열고 닫으며 안에 든 약재들을 확인했다.

“대체 뭘 찾으시는 건데요, 마마. 꼭 지금 찾아보셔야 하는 겁니까?”

화홍이 초조하게 물으며 시간을 가늠하느라 자꾸 하늘을 올려봤다. 이설도 황궁 안의 높은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지각을 해 눈에 띌 생각은 절대 없었다. 나름대로 시간을 생각하고 있는 건데도 그 생각을 모르는 연화와 화홍은 노심초사였다. 이렇게 좋은 날 사소한 일로 우찬의 심기라도 거스를까 걱정인 모양이었다.

“저희가 좀 도와드릴까요?”

“아니야. 내가 직접 봐야 알 수 있는 거라…….”

이설은 확신이 서지 않는 듯한 말투로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며 연신 서랍들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가끔 긴가민가한 약재들이 나오면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 보느라 콧잔등에 거뭇한 가루가 묻었다.

한쪽 칸의 서랍들을 모두 뒤진 이설이 뻐근한 허리를 뒤쪽으로 쭉 늘린 뒤 긴 숨을 후, 내쉬었다. 그리고 한 손에 쥔 서책에 표시된 부분을 펼쳐 낱장들을 넘겨 유심히 읽어 내려갔다. 오만 약초들의 이름과 효능, 특징들이 세세하게 잘 정리된 이 서책의 단 한 가지 결점은 그림이었다. 엉망진창으로 그려놓은 각 약초는 서책을 어떻게 돌려놓고 봐도 그 모양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웠다.

“분명 본 적이 있긴 한데…….”

이설이 혼잣말로 웅얼거리며 서책을 착- 덮어 내려놓았다. 가물가물하기는 해도 분명 본 적이 있는 약초다. 사실 약초라고 하기도 민망한 감이 없잖아 있다. 다른 약초와 섞어 쓸 때만 약효가 있고, 그 약효라는 것도 그다지 특별한 게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는 일도 드물었다. 어지간히 약초에 해박한 의원이 아니라면 이런 게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그만큼 희귀한 약초였다. 서책에 짤막하게 쓰여진 대로, 연국의 구석 산지에서만 서식하는 구하기 어려운 약초.

이설은 아침에 본 여인이 건네준 수파에서 은은하게 풍기던 냄새를 기억해냈다. 왜 그 수파에서 이 구하기도 힘든 약초를 달인 냄새가 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비슷한 냄새를 착각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특유의 무겁고 진한 흙냄새는 처음 맡아봤을 때 뇌리에 박힌 그대로였다. 섭취할 경우 심한 복통을 일으키는 줄도 모르고 다른 약초와 착각하여 누이에게 즙을 짜 먹이려고 한 적이 있다. 천만다행으로 맛이 쓰다며 누이가 바로 뱉어냈으니 망정이었다. 그리 오래전에 있었던 것도 아닌 일이라, 이설은 제 기억이 맞다고 확신했다.

“마마, 약방 관리를 데려왔습니다.”

바깥을 둘러보고 오겠다던 주 상궁이 한참이 지난 후 나이 든 관리와 함께 돌아왔다. 관리는 어디 구석에서 낮잠이라도 자고 있던 모양인지 관모 아래로 머리카락이 지저분하게 나와 있었다.

“남아 있는 관리는 자네 하나뿐인가?”

“예 그렇죠. 다들 연회다 뭐다로 한참 바쁠 때니까요.”

단잠을 깨운 게 불만인지, 관리가 툴툴거리며 성의 없이 대꾸했다. 못 미더워 보이는 관리였지만 다른 방안도 없기에 이설이 서책의 표시한 부분을 펼쳐 관리 앞에 내밀었다.

“자네 이 약초를 알고 있는가?”

이설에게서 서책을 받아 본 관리가 눈을 찡그리며 서책을 멀리 들었다, 가까이 들었다 반복하며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림과 이름만 보고서는 생각나는 게 없는지 짧게 소개된 글을 다 읽고서야 ‘아아’하며 아는 체하는 소리를 냈다.

“이런 약초가 있다는 얘기는 들어 봤습니다.”

“그럼 여기 약방에도 있는가?”

다급하게 묻는 이설을 보고 관리가 슬쩍 놀랐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 보십시오, 마마. 효능이라고는 숙면을 돕는 것 말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데다가 다른 약초와 섞어 쓰지 않으면 그마저도 효험이 없는데, 이깟 걸 어디에 쓴다고 가지고 있겠습니까?”

다소 무시하는 태도가 분명한 말투에 주 상궁이 한마디 거들려고 나섰지만 이설이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이 약방에는 없다 이거로군?”

“장담컨데 주안 약방을 다 뒤져도 찾지 못할 겁니다. 거 쓸모없는 약초, 아니 잡초래도요.”

관리가 호언장담을 한 뒤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러다 이설의 뒤를 흘끗 보고는 덜 닫힌 서랍들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걸 확인했다. 그제야 의심이 떠오른 얼굴을 한껏 찡그리고는 이설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그런데 마마께서는 소청각에는 아니 가시고, 예서 무얼 하시던 참이십니까?”

“알아볼 게 있어서 잠시 들렀네.”

“혹시 일전에도 다녀가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오늘이 처음이네만, 그건 왜 물어보는가?”

이설의 대답이 믿음직스러운지 관리는 곧바로 의심으로 가늘어진 눈을 풀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요즘 약방에 자꾸 누가 약재를 훔쳐 가는 일이 생겨 한 번 여쭤봤습니다. 하기야, 마마께서 어디 그럴 분이라고……. 괜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그다지 죄송스럽지도 않은 태도로 꾸벅 사과를 하는 관리는 이제 얼른 이설을 쫓아내고 마저 낮잠을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곧 있으면 소청각에서 상연이 시작될 건데 늦지 않겠냐는 말에 연화와 화홍이 다시 한번 채근을 했다. 

황궁의 약방에서는 원하는 약초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더 찜찜해진 이설은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일단 사의시를 나섰다. 

준비해둔 가마에 올라타자마자 연화가 가마꾼을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단법석 떨지 말라며 한 소리 해야 하는 주 상궁의 목소리가 없는 걸 보니 시간이 여유롭지는 않은 듯했다.

기우일 수도 있다. 생각 외로 약초의 서식지가 양화성 부근까지 널리 분포되어 그 여인이 존재를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산속에서 오래 살았다 하니, 이설이 모르는 약초의 쓰임새를 알아 황궁에까지 들여왔을 수도 있다. 별것도 아닌 일에 걱정을 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가슴 한구석에 불편한 걱정이 가시지를 않았다. 걱정에 끝에는 항상 우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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