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88화
“이만한 것도 천만다행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통 옷을 다시 올리게 해 줄 기회를 안 주는 소운에게서 몸을 당겼다. 순순히 옷을 놓아준 소운이었지만 역시 쉽게 떨칠 수 없는 걱정에 그늘진 우울한 얼굴이었다. 가만히 두면 다른 곳도 얼마나 다쳤는지 보자며 포단을 들춰낼 기세라 이설이 한발 먼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소운 님께서 창화군……, 아니 그, 공자님과 함께 이곳에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궁에서 유학 중이라 들었는데 말입니다.”
부산하게 마실 거리를 챙기러 일어났던 소운은 난감한 듯 콧잔등을 긁으며 뒤를 돌아섰다.
“어쩌다 보니 이리되었습니다. 폐하께는 미리 말씀드리지 않은 일이라 퍽 곤란하게 되었습니다만. ……폐하께서 곧 이곳에 오신다는 얘기는 이미 들으셨겠지요?”
“예.”
그래서 저도 무척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으나 가까스로 삼켜 냈다. 괜한 마음에 가만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발을 보고 마실 것을 가져오던 소운이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느냐 물어 냉큼 아니라 대답했다.
“시국이 좋지 못하다 들었는데 정말 폐하께서 직접 오신다는 건 아니겠죠?”
“일단 답신을 받기로는 직접 오신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국경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도 목숨을 노리는 살수들이 득실득실하는데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짓이란 말인가. 당장 제 사정이 우찬을 보기 껄끄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드는 반감도 있지만 만일 그게 아니었대도 태평하게 기다리며 우찬을 반길 생각은 없었다. 황궁에서부터 이곳까지 달려올 그 길 위에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처에 깔려 있을지 이설조차 눈에 훤했다.
“대군이라도 이끌고 오실 작정이실까요?”
“그럴 리가요. 눈에 띄면 성가시다며 혼자 오시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이런 걸로 농을 할 사람도 아니거니와 농을 하는 표정으로 보기도 어려운 소운이 대답했다. 다 포기한 듯한 말투가, 설령 우찬의 옆에 자신이 있었다 해도 말릴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심정이 내포된 것 같았다.
어지간히 곤란한 일이여야 야단법석이라도 떨지. 빠르면 내일 밤이라도 저 문을 열고 들어올 우찬을 상상하자 눈앞이 깜깜해졌다. 괜한 소원을 고집부려 귀찮은 일을 만들었다 호되게 면박을 놓을 우찬이 혹시 다친 곳을 보자며 발목을 보기라도 한다면…….
“마마, 갑자기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산사람이 핏기가 이렇게 없어서야……. 의원을 불러올 테니,”
“아닙니다. 그냥 갑자기……, 습격을 당하던 날의 일이 갑자기 생각나는 바람에 그렇습니다. 별일 아니니 다른 사람은 부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차츰 잊히고 있는 그 날의 일을 핑계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이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소운은 다시 근심 어린 눈빛으로 이설을 바라봤다. 살은 또 왜 이리 많이 빠지신 거냐며 공손한 태도로 타박을 들어도 기분 나쁘지가 않았다.
소운이야 말로 얼굴이 많이 상했다. 타국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끼니를 거르기 일쑤라기에, 제 말이 그 말이라며 이설이 반색 했다.
“그래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 말고는 그런대로 살 만한 것 같습니다. 북방 이민족에 대해 공부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환경이고요.”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참인데, 대체 여기가 어디입니까?”
“위치로는 양화성 변두리에 있는 관사입니다. 도국에서 직접 양화성 이민족을 관리할 때 무관이 지냈던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보시다시피 창화군이 지내고 있습니다.”
“수도의 궁을 두고 왜 이런 변방에서……?”
이설은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저기 장식이며 문과 창의 양식이 묘하게 이국적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고급스럽다거나 사치스럽다는 느낌은 없다. 고작해야 방에서만 하루 정도 지냈을 뿐이지만 밖에서 외관을 본다 해도 대궐 같다 말하기는 어려울 곳이었다.
“반평생을 타국에 볼모로 잡혀 지내다 온 왕족을 위한 자리가 궁에 남아 있기나 하겠습니까?”
“아.”
“귀국한 뒤 짐도 다 풀지 않고 곧바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셨습니다. 저도 그때 따라왔고요. 폐하께서는 이왕 간 김에 도국의 세법 체계를 좀 더 면밀하게 공부해 오라 하셨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크게 혼이 날 듯싶습니다.”
무거운 분위기를 풀기 위해서인지 농을 하는 소운이었지만 얼핏 들으면 농인지 분간도 잘되지 않았다. 이설은 느낌상 진지하게 하는 얘기가 아닌 걸 알면서도 웃지 못했다. 잊으려고 노력하는데, 소운과 얘기할 때면 계속해서 우찬이 저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장면이 상상됐다.
이설이 아무리 다른 얘기로 화제를 전환하려고 해도 결국은 우찬의 얘기가 나오고야 만다. 소운이 일부로 그러는가 하는 의심이 들 때쯤 이설이 먼저 포기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소운 님 제가 우연히 들은 얘기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어떤 이민족 여인에게 귀비 첩지를 주셨다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크게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조곤조곤한 말투로 묻는 이설과 달리 소운은 눈에 띄게 당황한 티를 내며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큼큼,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불안한 모습도 처음 보았다. 애초에 의심을 가지고 물었던 것은 아니지만 반응을 보니 어젯밤 들은 얘기가 뜬소문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이설은 대답도 듣기 전에 질문 하나를 더 던졌다.
“그리고 그 여인이 진짜 정인이라, 폐하께서 직접 공표하신 것도 맞습니까?”
소운은 이미 뒤돌아선 채였지만 뒷모습만 봐도 당황해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어딘가 달라진 것 같다 느꼈는데 머리를 자른 게 낯설어 보였던 걸까? 단색 띠 하나로 묶어 내리면 길게 내려오던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흔들거리는 모습을 보고 이설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이설은 소운이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그런 줄로 혼자 생각했다. 하지만 소운은 이설이 딴생각에 잠겨 있는 게, 끈질기게 제 대답을 기다리는 줄 알고 한참을 고민하다 몸을 돌렸다.
“예. 폐하께서 그리 공표하셨습니다. 하여 마마께 드린 정인의 증표를 거두겠다고도 하셨습니다만 첩지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정인이 아닌데 첩지가 그대로인 게 의미가 있습니까?”
“마마께서는 아직 금황제의 후궁이십니다.”
애초에 후궁 자리에 앉은 명분이 사라졌는데 아직 그 자리가 제 것이라는 게 무슨 위로가 될까. 그래도 위로하려고 애쓰는 소운에게 할 말은 아니라 마음속으로만 한 번 하고 삼켰다.
“그리고 이건 제 소견이지만 갑작스레 그 여인에게 첩지를 내리고 정인이라 공표한 것도 다 사정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슨 사정 말입니까?”
“창화군은 마마께 절대 말씀드리지 말라 하셨지만 제 생각에는 마마께서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이제는 그게 뭐냐 물어보기도 지친 이설이 소운을 보고 말없이 눈만 깜빡였다.
“몇몇 부족들에게 풍문이 돌았던 모양입니다. 금황제의 정인이 지금 연국으로 가고 있으니 그 목숨을, ……목숨을 취하는 자는 금황제의 명줄을 손에 넣을 거라는 내용이었지 싶습니다.”
“그런 소문이 갑자기 어디서……. 제가 잠시 연국에 다녀오는 것은 갑자기 결정된 일이었고 측근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사항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궁에…….”
이설은 제 다음 말이 섣부른 판단이지는 않을까 싶어 말을 아꼈다. 하지만 정황상 이게 아닐 수가 없다. 분명 궁에 이민족과 내통하는 첩자가 있다.
“궁에서도 이제 그쯤은 눈치챘을 겁니다. 중요한 건 반역을 도모하는 모든 이민족이 마마의 목숨을 노렸다는 겁니다. 마마께서 폐하의 정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설마 그런 정보가 새어 나갔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살수들의 눈을 돌릴 곳이 필요하셨을 겁니다. 더 이상 마마를 쫓을 수 없게요.”
서운한 자신의 마음을 알아챈 소운이 그저 위로하기 위해 상황에 끼어 맞춘 억측일까? 아니면 우찬의 속마음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오랜 벗의 합리적인 추측일까?
후자라고 믿고 싶어 마음이 쏠리면서도 쉽게 놓이지 않는 의심이 자꾸만 불쑥불쑥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이설이 생각하기에 우찬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황궁 가장 안전한 곳에 신줏단지처럼 모셔 놓은 정인을 굳이 만인에 공표하여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하물며 그 이유가 이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더욱.
궁을 떠나기 전 최근까지도 우찬만 만났다 하면 좋은 얘기가 오고 가지 못했던 걸 떠올려 봤을 때 우찬이 자신을 지키려 그 정도 수고까지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는 마마를 무척 걱정하고 계셨을 겁니다. 설사 첩지를 내린 그 여인이 진짜 정인일지라도요.”
쉽사리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이설의 복잡한 생각을 도와줄 요량이었는지 소운이 간결한 문장으로 이설의 마음을 더 헤집어 놓았다.
“몸져누워 계신 분께 이렇게 말씀드리는 건 실례이지만, 마마. 좋은 소식을 들으셨는데 표정이 왜 이리 어두우십니까?”
“아닙니다. 갑자기 상황이 좀 복잡해져서요.”
마음이 복잡해졌다는 것을 약간 돌려 말해 봤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상황이 복잡해지기는 했다. 희미하기는 하나 남의 이름을 버젓이 가지고 있는 주제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을 염치는 없었다.
그래, 백번 양보하여 저딴 이름 따위 가지지도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얘기는 좀 더 수월해진다. 이틀 뒤 도착한 우찬에게 연심을 품었다 눈물로 읍소하며 궁에 머물게 해 달라 청할 수 있다. 잘 해낼 자신은 없지만 일단은 그럴 마음이라도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남의 이름을 가진 뒤라면 얘기가 다르다. 금의 황제가 무엇이 부족해서 다른 사내 혹은 여인의 이름을 가진 후궁을 곁에 두느냐는 말이다.
지금 이 상태로는 절대 우찬과 함께 궁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단 공자님. 접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소운과의 침묵을 깨고 방 밖에서 창화군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사의 주인어른 행세를 하는 창화군이 방 앞에서 공손히 기별을 알리는 게 누가 봐도 참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제게 먼저 허락을 구하는 소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화군은 이설이 아침을 아직 먹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는지 직접 소반까지 들고 오는 정성을 보였다. 소박하게 담긴 찬거리를 힐끗 보고 소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설은 연국에서 먹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한상차림에 평소 같았으면 군침이 꿀꺽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별 입맛이 돌지 않아 공손히 상을 물렸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아침 일찍부터 어딜 다녀오신 참입니까?”
그새 많이 가까워졌는지 소운이 거리낌 없이 창화군의 행적을 물었다. 창화군도 별 고민 없이 소탈하게 대답했다.
“일전에 말씀드린 그 패들 기억하십니까?”
“천명을 만들어 주겠다며 돈을 받고 사람 몸에 이름을 새기고 지우는 일을 하는 그 도당들 말입니까?”
시무룩하게 앉아 있던 이설은 별안간 귀를 쫑긋 세웠다.
“예. 요즘 근처 농가에서 패악질을 부리는 패들이 있다기에 잡아들였는데 글쎄 그 일당들이었지 뭡니까. 놈들을 잡아들여 도망친 잔당의 행방을 심문하고 오는 길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심문을 하는 일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창화군은 눈가를 꾹꾹 누르며 목을 좌우로 꺾었다. 옆에서 소운은 다행입니다, 같은 말로만 성의 없이 대꾸를 해 주고 있어 이설 대신 궁금한 것을 물어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결국 궁금한 건 스스로 묻는 수밖에 없었다.
“궁에서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몸에 이름을 억지로 새기거나 지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런데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이었습니까?”
“가능이야 합니다만,”
창화군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목숨도 내놓아야 할 만큼 무척 위험한 일입니다. 도중에 죽는 이들도 부지기수고 불구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대체 어떤 시술이기에…….”
“저도 최근에야 안 사실입니다만 이름을 지워 준다며 불에 달군 쇳덩이로 생살을 지진답니다. 살이 녹아 흘러내리면 그 위에 찬물을 부어 식히고 다시 그 위를 불로 지지고를 몇 번씩 반복하면 점점 이름이 흐릿해진다고 합니다.”
이설은 그 순간 누가 제 발목에 불덩이를 대기라도 한 것처럼 깜짝 놀라 다리를 움츠렸다. 다행히 두 사람 다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어 보지 못했다. 이설은 손을 포단 아래로 넣어 띠로 감은 발목을 만지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름을 새기는 것은 아직 밝혀내는 중입니다만 아마 비슷한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면 오래전 회국에 이름을 새겨 주는 것으로 유명한 노파가 있었는데 그자는 사람 몸에 직접 수를 놓아 이름을 갖게 해 주었다 합니다.”
자수를 놓다 바늘에 찔리면 그리 아플 수가 없었다. 근데 몸에 직접 수를 놓는다고? 제정신으로 할 짓도 아니었고 들을 짓도 아니다. 듣기만 해도 괜히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이설은 소운에게 물 한 잔을 부탁했다. 하지만 미지근하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물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다.
“이것 참 말세입니다. 천명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인연을 찾아 만들면 될 것을,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저런 패들도 사라지지 않는 거겠죠. 정작 죽고 나면 다 소용없는 것을. ……두 분, 왜 그리 저를 빤히 보십니까?”
이설과 소운은 동시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설은 소운이 조심스레 자기 손목을 쥐어 잡는 것을 보고 급히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운의 치부를 몰래 알게 되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갑자기 생긴 침묵이 어색했는지 창화군은 조금 전 심문에서 알게 된 사실을 하나둘 털어놓았다. 소운은 별 관심이 없는 듯 듣는 둥 마는 둥 흘려들었고 이설은 관심 없는 척을 하며 창화군의 말을 다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해 집중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마음을 단단히 먹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