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89화
이른 오후쯤이 되자 이설은 급격히 말수가 줄어들었다. 아직 혼자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소운과 창화군은 일찍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소운은 황궁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눈치였지만 낯빛이 어두워진 이설에게 더는 말을 붙이지 못했다.
다시 혼자 있게 되자 슬슬 덥게 느껴지기 시작한 포단을 옆으로 치우고 다리를 그 위로 올려놔 보았다. 오른쪽 다리는 볼 필요도 없었다. 왼쪽 무릎을 접어 오른쪽 넓적다리에 왼쪽 발목을 올린 뒤 밖에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 전부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 밖에 누구 있습니까?”
제법 큰 소리를 내어 불러도 대답이 없다. 밖이 비었다는 걸 확인 하고서야 왼발에 묶어 놓았던 허리띠를 풀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빌었던 간절한 소망은 보기 좋게 엇나갔다. 어쩐지 어제 확인했을 때보다도 더 선명해진 것 같은 세 글자는 여전히 ‘금우찬’이 아니었다.
한낮의 쨍쨍한 햇살에 머리가 더없이 맑아졌다. 어제보다 더 또렷한 정신으로 마주한 낯선 이름은 숨을 쉬는 것마저도 버겁게 했다.
하지만 이설은 이내 마음을 굳건히 다잡았다. 어영부영 있다가 우찬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일들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일단 오래 기다려본다 한들 이 이름이 우찬의 이름으로 변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이름은 확실히 ‘금우찬’이 아니었다.
사실 첫 글자인 소(小:작을 소) 자만 읽을 수 있고 뒤에 두 글자는 도통 모르는 글자였다. 소운과 우찬이 제 천자 실력이 형편없다고 얘기할 때마다 그렇지 않다고 변명하던 것이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걸 알았다. 긴가민가하게 헷갈리는 것도 아니었다. 단언하건대 생전 처음 보는 글자였다.
“소……, 소…….”
읽지도 못하는 이름의 첫 글자만 하염없이 소리 내어 읽어 봤다. 그러다 문득 이설은 이 땅 어딘가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한 이치를, 한나절이 지난 뒤에야 지각했다.
말하자면, 그토록 바랐던 진짜 인연을 찾은 것이었다. 바라던 대로 우찬이 아닌 게 문제였지만.
이름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성별도 없었다. 성별도 모르는데 어디 살고 있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어떤 집안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따위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 금우찬이 아닌 타인의 인생 따위. 자신과 어떤 인연으로 이어졌다 한들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우찬이 아닌데 대체 왜.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이름 위를 지나가도록 손톱으로 긴 선을 그려 봤다. 한 번으로는 족하지 않아서 몇 번이나 반복하여 긁어 내려간 이름 위로 붉은 선이 생기고 종국에는 손톱 길을 따라 가느다랗게 살갗이 부어올랐다. 그래도 이름은 여전했다.
손톱으로 긁는 건 별로 아프지 않았다. 바늘이나 칼이었어도 참을 수 있었을까?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진다면 기꺼이 감내할 수 있을까?
이설은 어쩌면 지금쯤 이미 황궁을 출발했을 우찬을 떠올려 봤다.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달려오고 있을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우찬에게 낯선 사람의 이름을 몸에 담고서 나타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해 봐야 하나밖에 없었다.
다시 발등과 발목을 허리띠로 감싸 묶었다. 포단으로 덮은 뒤 종을 길게 울리자 곧 일을 봐 주는 여인이 후다닥 뛰어 들어왔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세요?”
비은궁에 두고 온 궁녀들도 황궁에서 일하는 궁인들치고는 행동거지가 촐랑거리고 채신머리가 없는 편이었는데 이 여인에 비할 바가 안 됐다. 이설이 금황제의 후궁인 걸 알면서도 별로 어려워하는 티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설에게는 이 여인이 제격이었다.
“필요한 건 아니고 내내 혼자 있으니 좀 적적해서요.”
“아 그러셨구나. 근데 주인어른은 지금 외출하셨어요.”
“그럼 바쁘지 않다면……,”
“저는 홍진댁이에요.”
여인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홍진댁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군관 서방을 둔 하찮은 여인이니 그렇게 어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그리고 바쁘지는 않습니다. 혼자 계시는 게 적적하시면 저라도 같이 말동무가 되어 드릴까요?”
조심성이 없는 데에 반해 눈치가 빨라 좋다. 이설이 배시시 웃자 홍진댁이 주전부리라도 가져오겠다며 나갔다가 한 상을 차려 가지고 들어왔다. 침상 위에 상을 떡하니 올려놓는 것에 한 번 당황했고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에 두 번 당황했다.
“드셔 보십시오. 여기 부엌에서 일하는 오랑캐 계집들이 만든 것인데, 주제에 음식 솜씨 하나는 기가 막힙니다.”
“이민족 여인들이 여기서 일을 한단 말입니까?”
“여인이고 사내고 여기서 일하는 오랑캐들은 아주 많습니다. 나리께서 워낙 마음씨가 좋으시니까요.”
홍진댁의 태도로 유추해 보건데, 홍진댁은 이민족 사람들이 탐탁지 않은 기세다. 아마 주변 환경상 어렸을 때부터 이민족이 많이 보이던 곳에서 자랐고, 주변 어른들이 이민족을 천대하던 것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것이다.
“듣던 대로 도국 북방에는 이민족이 많이 모여 사는가 봅니다.”
“예. 아주 눈엣가시들입니다. 살 곳이 없다 하여 땅을 내어 주었고, 먹을 게 없다 하여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 은혜를 모르잖습니까? 허구한 날 민가나 약탈하고. 사실 나리께서 여기 몸져누워 있으신 것도 다 그 배은망덕한 오랑캐들 때문 아닙니까?”
“내가 이민족에게 쫓긴 것은 맞지만 이민족들도 여러 부족이 있습니다. 우호적인 곳도, 그렇지 않은 곳도 있는 거지요. 모든 부족이 배은망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여기 양화성에 사는 이민족만 해도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지 않습니까.”
훈계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괜히 발끈해 버렸다. 북방에는 대체로 규모가 큰 부족이 열두 개가 있는데 그중 세 부족이 양화성에 모여 산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세 부족 중 하나가 우 미인의 친정이었다.
홍진댁은 이설의 말에 수긍은 하면서도 완전히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입이 삐죽 튀어나온 게 여전했다.
“선하다는 소문만 들었지 정말 이 정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리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오랑캐를 감싸 주시다니. 혹시나 저를 악덕한 년으로 생각하실까 싶어 말씀드립니다만, 북방 출신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변명의 일환인지 홍진댁은 다른 사람들이 북방 출신의 오랑캐를 얼마나 천대하는지, 그리고 그 오랑캐들이란 것들이 얼마나 흉포한지를 토로하였다. 이설은 한 귀로 들으며 한 귀로 흘려버렸다.
“하여간 상종도 못 할 것들입니다. 이번에 붙잡혀 온 놈들도 보세요. 산사람 몸을 인두로 지지고 생살을 칼로 포를 뜬다는데 그게 어디 사람이 할 짓입니까? 금수만도 못한 놈들.”
홍진댁은 속에서 천불이라도 나는 것처럼 가슴팍을 두드렸다. 아직 이설은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을 먹는 결례는 논할 게 못 됐다. 이설은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처럼 유려하게 질문을 이었다.
“안 그래도 공자께 들었습니다만, 잡혀 온 이들이 모두 이민족이었던 겁니까?”
붙잡혀 들어온 이들에 대해서 함구령이 내려진 듯했다. 홍진댁은 처음에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지만 이설이 ‘공자께서 얘기하실 때 제가 딴짓을 하느라’ 하며 말끝을 흐리자 이설도 다 알고 있는 것이라 여겼는지 순순히 대답했다.
“총 일곱이 붙잡혀 들어왔는데 그중 다섯이 오랑캐랍니다. 그 짓을 해서 벌어들인 게 얼마인지, 주머니만 털어 나온 돈으로 강성(岡城)에 대궐 집 다섯 채는 더 살 수 있대요. 아, 강성은 도국의 수도입니다.”
“이름을 지우거나 새기는 방법을 다 실토하지 않았다 들었습니다.”
“예. 어찌나 지독한지 열 손가락에 손톱이 다 뽑히고도 입을 꽉 다물었다 하네요. 그런데 뭐, 그건 조만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여태껏 손님으로 찾아왔던 사람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적어 둔 장부를 가지고 있더랍니다. 찾아내 문초하면 바른대로 고하겠죠.”
“무척 상세하게 알고 있군요.”
“다 제 서방에게 들은 것입니다. 녹봉도 시원찮은 주제에 이런 정보라도 꿰고 있어야 군관이라 할 수 있죠.”
그래도 딴 사람에게는 비밀이라며 푼수처럼 웃는 홍진댁은 사실 그것도 별로 개의치 않을 것 같았다.
여차하면 심문 중인 죄인들을 몰래 찾아갈 생각이었던 이설은 뜻밖의 수확을 얻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달아난 일당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공자께서 근심이 많으시던데요.”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을 꼬치꼬치 캐묻는 게 이상했는지 의심스러운 홍진 댁의 눈빛이 이설을 훑었다. 이설은 생각도 않던 창화군의 핑계를 두루뭉술하게 대며 눈길을 피했다.
입맛도 없으면서 괜히 홍진댁이 차려 온 음식들을 먹었다. 하얀 쌀떡을 꿀에 절여 풀로 감싼 것이었다. 쫀득쫀득한 게 맛이 좋았는데 함께 씹은 풀은 향이 강해서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궁에 있을 때 찬으로 자주 올라왔을 때도 잘 먹지 않았다.
“떡에 붙은 풀은 떼고 드셔야 합니다.”
“저도 연국에서는 이 풀은 먹지 말라고 들었는데 금국에서는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잘 먹길래 원래 먹는 건가 했습니다. 도국 사람들도 먹는 줄은 몰랐네요.”
“저희도 그런 풀떼기 일랑 먹지 않습니다. 그건 저희 음식이 아니라 부엌에서 일하는 것들이 저들 먹으려고 만들던 건데 맛이 좋아 나리 상에도 올리라 부탁한 것입니다.”
“아아. 이 풀을 벗겨 내고 먹어야 한단 말이죠?”
“예.”
다시 떡을 집은 이설이 떡에 붙은 풀을 떼어 내려 애썼지만 끈적한 꿀과 함께 철썩 달라붙은 얇은 풀잎을 떼어 내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홍진 댁은 이설이 고군분투 하는 걸 웃으며 보았다. 그러다 이설은 금국에서 원래 하던 대로 그냥 먹으려고 하자 홍진댁이 급히 말렸다.
“독성이 있는 풀이라 안 드시는 게 좋습니다.”
“예? 금국에 간 뒤로 벌써 몇 번이나 먹은 적이 있는데요?”
이설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스라치게 놀랐다. 홍진댁은 그 모습을 보고 깔깔 웃었다.
“금국에서는 아마 괜찮으셨을 겁니다. 사실 이 풀 자체는 별로 위험하지 않습니다. 많이 먹어 봐야 배앓이를 하는 정도겠죠. 그런데 이게 향초를 잘못 만나면 좀 문제가 됩니다.”
“향초? 어떤 향초 말입니까?”
“저기 오악산 근처에 자라는 잎이 삐죽삐죽한 뭔 약초가 있답니다. 몇 해 전부터 그걸 말리고 빻아서 만든 향초가 건강에 좋다며 여기저기서 사용됐는데, 알고 보니 그 향초와 이 풀의 상성이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떡을 먹은 뒤 향초를 피운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픽픽 쓰러지지를 않나, 몸이 약한 어린 애들은 잠든 채로 일어나지 못하지를 않나.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아무튼 이 근처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오악산 근처에 자라는 잎이 삐죽삐죽한 약초요?”
향초라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가 잎이 삐죽삐죽한 약초라고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잎이 뾰족한 약초들이 흔하기는 했지만 말리고 빻아 향초를 만드는 종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거기다 다른 약초와의 상성도 좋지 않다는 말에 어떤 생각이 번쩍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