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195화
때마침 돌부리에 걸린 마차가 덜컹 위로 튕겨 올랐다. 내리뜬 이설의 눈이 번쩍 커지는 것을 본 구하가 놀랐냐며 미안하다 사과를 했다.
“사람을, ……찾는다고요?”
덜컥 내려앉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안심시켜 보지만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 들어갔다.
“뭐 그렇다 하더라고.”
“찾는 이가 누구라 합니까?”
“제대로 말을 안 해 주는데 낸들 알아? 아무튼 국경까지 봉쇄하고 아주 난리야. 근데 온 동네에 벽서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데 형님은 그것도 못 본 거야?”
어지간하면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산길이나 좁은 길 위주로 다녔다. 그리고 사람들 눈치를 살피느라 담벼락의 벽서 같은 건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제쯤 한 마을을 지날 때 유독 병사들이 눈에 띈다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런 이유일 줄은 몰랐다.
마음이 괜히 초조해지기는 했지만 자신을 찾는 벽서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른다. 무역과 상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이 많은 도국이 국경을 봉쇄하는 것은 중대사다. 도망친 자신 하나 찾자고 우찬이 도국에 그런 무리한 요구를 했을 것 같지 않다. 도국 입장에서도 자기네들과는 상관도 없는 일에 병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고작 자신 때문에 일이 이렇게 커질 리가 없다.
“뭣 모르는 사람들은 야만족과 내통한 반역자를 찾는 거라 하는데 그건 진짜 뭣도 모르는 작자들이 떠드는 소리지.”
구하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자신만이 진짜 그 정체를 알고 있다는 듯 게슴츠레 뜬 눈으로 말소리를 확 낮췄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아. 분명 설산에서 사라졌다는 그 연국 왕자일 거야.”
“…….”
“몰라? 왜 그 있잖아. 몇 달 전에 금에 후궁으로 팔려간 연국 왕자. 이름이 뭐였더라. 연, 무슨 뭐 그런 거였는데.”
얼빠진 얼굴로 굳은 이설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정신이 나간 듯 멍해진 이설의 얼굴이 무지에서 나온 표정이라고 생각한 구하가 자신이 알고 있는 한에서 이것저것 열심히 설명했다. 다 기억해 내고도 이름 하나는 생각이 나지 않는지 어쨌든 연씨 성을 가진 곱상한 사내놈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북쪽 설산에서 사라졌으면 갈 곳이라고 해 봐야 여기 아니면 연국이지. 아직 설산에 남아 있으면 살아 있기는 글렀고.”
“그렇, 겠죠.”
이설이 음절을 끊어가며 간신히 맞장구쳤다.
“멀쩡한 사내놈이 그깟 이름 하나 팔려서 황제 후궁으로 들어갔다길래 팔자 한번 기구하다 했는데 알고 보니 진짜 정인도 아니었다면서 그놈?”
지루한 여행길에 입맛에 딱 붙는 흥미로운 얘기가 나왔는지 구하가 신나게 떠들어 댔다. 첫인상과 달리 구하는 구사하는 단어들이 한없이 가벼웠고 대화 수준의 정도라는 게 없었다. 이설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세간에 만연하게 퍼져 있는 자신의 평가를 여과 없이 들어야 했다.
“중간에 껴서 처지만 딱하게 됐지. 천박한 야만족 계집한테 자리를 뺏겼으니 얼마나 억울해. 것도 모자라 이민족한테 쫓기기나 하고 말이야. 난 솔직히 이쯤 되면 죽었다고 봐. 여즉 안 죽었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고.”
구하는 생면부지 남이 걱정이라도 되는 양 혀를 찼지만 말투가 표정 그 어느 것에서도 일말의 진심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구하에게 자신의 존재는 무료한 시간을 죽이는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구하뿐만이 아니라 제 이야기를 알고 있는 대부분이 그럴 거라고, 이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버젓이 살아 있는 자신을, 살기 위해 애쓰는 자신의 노력을 외면당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들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스스로 생각할 때보다 훨씬 비참했다.
“그 사람은 정말……, 죽는 게 나을까요?”
“남은 평생을 황궁에서 독수공방하다 늙어 죽는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그게 낫지 안 그래, 형님? 형님 같으면 그렇게 살 수 있겠어?”
“글쎄요.”
“백번 생각해도 죽는 게 나아. 왕족 체면에 폐비로 쫓겨나는 것도 수치스럽고.”
구하가 단호하게 말하며 말린 육포를 입에 넣었다. 이설에게도 한 조각 권했지만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벽서는 무슨 내용이 쓰여 있습니까?”
설마하니 제 얼굴을 본떠서 그린 그림이라도 있을까 염려된 이설이 물었다.
“마을에 낯선 방문자나 행동거지가 수상한 자가 있거든 관아에 신고하라는 거지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크고 작은 동네 어느 곳이든 타지에서 온 행상인으로 북적거리는 도국에 벽서로 붙일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구하도 그걸 알기 때문에 코웃음을 치는 것이다. 신분상 정체를 밝혀 찾게 만들 수 없는 ‘연이설’을 두루뭉술하게 암시해 놓은 내용뿐이라는 말에 이설을 할 말을 잃었다.
어차피 외관상의 특징을 밝혀 놓았다 해도 걱정할 건 없었다. 은회색의 머리카락을 제외하고는 고개 돌린 어느 곳에서나 볼 것 같은 사내가 바로 자신이었다. 사내치고 피부가 뽀얗다는 얘기에 일부러 숯가루를 얇게 털어 얼굴에 바르는 정성까지 보였다. 절대 눈에 띌 리 없다.
“근데 가만있어 봐. 형님이 어디서 왔다고 했더라?”
난데없이 살던 곳을 묻는 구하가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이설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생각해 두었던 대답을 했다.
“회국에서 왔습니다.”
“아아, 저기 검은 골짜기를 넘어서 오셨고만.”
“예.”
“길이 험해서 난 그리 안 다녀. 형님은 고생 좀 하셨겠어.”
“뭐, 좀 그렇죠.”
능글맞게 웃으며 위아래로 훑어보는 구하의 시선이 어딘가 불쾌했다.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불편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앞섬을 단단히 여몄다. 말이 빨리 달릴수록 바람이 얼굴을 할퀴는 세기가 점점 거세졌다. 몸을 움츠리는 이설을 보고 구하가 이 근방만 넘어가도 날이 훨씬 따뜻해질 거라며 위로했다.
한참 뒤 작은 마을을 지나며 주막에 들러 밥을 먹었다. 쌀알이 모래알처럼 씹혀 무슨 맛이 나는지 하나도 알지 못했지만 구하 눈치가 보여 어영부영 먹었다. 구하 말대로 온 동네 담벼락에 벽서가 붙어 있었다. 자신을 특정하여 찾는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냥 모든 게 다 불안했다.
주막에서 내어주는 방 한 칸에서 하루 묵고 가기로 했다. 구하는 건너편에 앉아있던 사내들과 친해져 술을 마신다고 했고 이설만 혼자 방에 들어와 구석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얼굴을 묻었다.
제 발로 떠난 지 사나흘쯤 흘렀나. 벌써 지치기 시작했다. 무작정 떠난 것이 과연 잘한 일이었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고 예정대로 우찬을 만났더라면 지금쯤 비은궁에 몸 편히 도착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오기도 했다. 발목만 들키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텐데…….
하지만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게 끝장이었다. 좋은 꼴로 황궁을 떠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이설은 그런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
“폐하.”
“…….”
“폐하.”
“대답지 않는 것은 더 이상 나를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
“나가 보아라.”
소운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다만 여전히 눈썹 위로 무겁게 얹은 근심으로 우찬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이만 금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믿을 만한 사람을 남겨 두고 왔으니 문제없어.”
“폐하의 안위에 관한 문제입니다. 금의 영토도 아닌 곳에 이렇게 오래 머물고 계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거야말로 전혀 문제가 없다.”
우찬이 아무리 냉정하게 대답해 봐야 소운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또 흑영에게 팔을 붙잡혀 끌려나가는 추한 꼴을 보이고 싶어 저러나 하는 생각이나 한 뒤 무시했다.
옆으로 고개를 까딱 움직이자 소운과 자신 사이쯤에 서 있던 금군이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도국 국경은 전면 봉쇄되었습니다. 벽서에는 따로 루 소의 마마를 특정 지어 기재하지는 않았습니다. 여기, 보시는 바와 모두 같은 내용입니다.”
벽에서 방금 떼어 낸 듯 뒷장이 끈적거리는 종이를 건네받았다. 명한 대로 이설을 떠올릴 만한 특징들은 일절 쓰여 있지 않았다. 어차피 이설도 머리카락 색 따위야 충분히 염색을 하거나 가리고 다닐 것이다. 구태여 그런 것들을 적어 놓아서 이설의 무방비한 상태를 만천하에 알릴 필요는 없었다. 이설을 빨리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안전하게 찾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황궁에서는 자신 대신 차란이 국정을 돌보고 있었다. 금위대장의 군사 지식과 윤 내관의 노련함이 거들고 있을 테니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이민족들과 국경에서 소소하게 벌어졌던 전투는 모두 큰 피해 없이 승리하였다. 회유와 협상이 없는 전쟁은 이기는 게 훨씬 수월한 대신 많은 사람의 피를 흘려야 했다. 그래도 우찬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사암 지방에 반란을 일으킨 이민족들은 모두 진압하였습니다. 전투 중 대다수가 죽었고 남은 자들은 모두 금으로 압송 중입니다. 포로를 압송 중인 금군을 제외하고 모든 병력은 현재 이곳 양화성으로 이동 중에 있는데 이틀 후에는 도착할 것 같습니다.”
“사암 지방의 주둔 중이던 금군에는 손조익의 사병도 포함되어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은가 소운?”
“예. 하지만 그리 많지는 않을 테니 솎아낼 수 있을 겁니다.”
“병사가 모자란 것도 아닌데 누구에게 충성하는지도 모르는 버러지들까지 거두기는 힘들지.”
“도착하는 대로 척출하여 격리하겠습니다.”
말귀를 한 번에 잘 알아듣는 것이 제법이다 싶어 얼굴을 올려다봤다. 낯이 익다 싶었는데 곧 생각이 났다. 우장군 원후연의 장남이며 양 소원의 오라비인 사내다. 양화성 부근에서 처음 발견된 귀비를 황궁까지 데려온 호위대의 대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자를 보니 황궁에 두고 온 귀비 생각이 났다. 내내 좋지 않던 기분이 바닥으로 움푹 꺼졌다.
분명 어엿한 직책이 있을 테지만 양 소원의 오라비라는 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는 사내를 물러가게 한 뒤 소운을 가까이 불렀다. 소운은 며칠째 우찬에게 금으로 돌아가라며 꼬박꼬박 찾아오고 있었지만 우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게 소운을 더 피 마르게 하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