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02화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니, 아니다. 그냥 좀 체한 것 같아.”
간신히 헛구역질을 삼키며 물 잔을 옆으로 밀었다. 물이고 뭐고 목구멍으로 넘어갈 게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 얘기를 처음 듣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모두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만을 떠들어 대던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흘려버릴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박색이라는 소문도, 성품이 모질다는 소문도 다 그러려니 웃어넘겼다.
여태껏 들은 것 중 가장 가슴을 후벼 팠던 것은 대개 제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이미 우찬이 이민족 여인을 새 정인이라 공표한 마당에 사내씩이나 되어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신세가 된 자신은 누가 봐도 처량하긴 했나 보다.
스스로는 그렇지 않다고 골백번을 위로해 봐도 내가 아닌 누군가가 알지도 못하는 저를 두고 신세 참 딱하다며 혀를 차면 그게 비수처럼 날아들어 가슴에 꽂혔다. 어떻게든 견뎌 내고 우찬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한 제 노력이 이렇게 계속 부정당하고 있었다.
“보통내기가 아니야. 어떻게 황제 이름을 훔쳐 달아날 생각을 했지?”
사내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비난을 하는 건지, 대단하다 치켜세우는 건지 구분하기가 모호했다.
“제가 듣기로는 사가로 정행을 가던 중 이민족의 습격을 받아 간신히 도망친 거라고 하던데요.”
이설이 으레 해야 했던 말을 시동이 대신해 주며 사내의 말에 반박했다. 사내는 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 고개는 끄덕였지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들 그런 줄로 알더라고. 근데 그랬으면 시체를 찾아도 벌써 찾았겠지. 지금 그거 하나 찾겠다고 깔린 병사가 몇인데.”
“…….”
“분명 작정하고 도망친 거야. 혹시 알아? 황제한테 앙심을 품고 이민족에 들러붙어 황궁 기밀이라도 다 갖다 팔아 버리고 있을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잠자코 듣던 이설이 딱딱하게 굳은 입을 간신히 움직여 대꾸했다. 두 볼의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게 아무래도 표정 관리는 여기까지가 최선인 듯싶다.
“연에 남겨 둔 가족이 있는데 그런 무책임한 짓을 했을 리가 절대 없습니다.”
“사람 속을 누가 알아. 정인이라고 꾀어 데려갔는데 이제 와 버림을 받았으니 원망이 오죽하겠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사내가 계속해서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빈 술병이 이미 두 병이나 나동그라진 것을 보니 맨정신에 나불거리는 것이 아니라 한 귀로 흘려들어도 그만인 것이었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사내의 말마따나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게 아주 일리가 없는 얘기도 아니었다.
황제가 새로운 정인을 공표했고 같은 시기, 이전에 들여왔던 사내 정인은 행방이 묘연해졌다. 황제는 온 전역에, 특히 도국을 중심으로 병사를 풀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지만 사라진 사내 후궁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다.
만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황제가 연심과 걱정으로 이설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설은 그게 제일 서럽고 참담했다.
“금황제만 바빠졌지 뭐. 전장에 직접 출정하겠다는 얘기가 있던데 진짜인가 몰라. 편국에 나타난 걸 보면 맞는 소리인가 싶기도 하고.”
“황제가 편국에요? 찾는 자가 거기에 나타나기라도 했답니까?”
차라리 잘못된 소문이라도 퍼져 우찬이 도국에 없길 바라며 물었다.
“그건 아닌 것 같고. 편국 왕이 일전에 웬 북방 부족이랑 맺은 협정을 핑계로 금군이 들어오는 걸 막고 있다나 봐. 그나마 있는 금군도 나가라고 지랄을 한다던데. 자세한 건 잘 몰라. 돈 몇 푼 준다고 싸게 입 놀리는 하급 병사들은 애초에 별로 아는 게 없어.”
아는 게 많다 싶더라니.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병사들에게 돈 따위를 주고 정보를 얻었나 보다. 사내는 이설이 자기 얘기를 귀 기울여 들어 주니 내심 신이 났는지 술잔을 하나 더 청해 술을 권했다. 잠깐 고민하던 이설이 잔을 들어 술을 받자 지켜보던 시동이 은근슬쩍 눈치를 줬다. 이설은 모르는 척 잔에 가득 담긴 술을 단숨에 비웠다. 싼값에 아무에게나 파는 주막의 술은 향도 없고 그저 독하기만 했다.
연거푸 석 잔을 단번에 들이켜는 이설이 마음에 드는지 사내가 다른 궁금한 건 더 없냐며, 뭐든 다 말해 주겠다며 으스댔다. 이설은 우찬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무엇을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 쓰게 젖은 입술만 달싹였다.
“근데 그쪽은 연국에서 여기까지 뭐 하러 왔대? 보아하니 장사치 같지는 않은데.”
사내가 느닷없이 이설의 얼굴 요모조모를 뜯어보며 물었다. 술에 취해 풀어진 동공은 별로 날카롭지 않았지만 괜히 속으로 혼자 뜨끔했다.
“아는 분 일을 좀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여태껏 하던 대로 둘러대고는 괜히 옆에 앉은 시동의 눈치를 봤다. 지난 이틀간의 제 행동이 일을 도와주러 온 사람 같지는 않았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별로 도움은 못 되고 있지만요.”
“근데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 난 댁이 묘하게 익숙한데.”
사내가 갑자기 손을 뻗어 이설의 턱 아래를 움켜잡아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시켰다. 놀란 이설이 급하게 손을 뿌리치고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는 행동을 보이자 사내는 허허 웃으며 장난스럽게 ‘미안, 미안’ 하고 술병 든 손을 흔들었다.
“내가 저 기방에서라도 봤나 싶어 확인하려고 그랬지. 뭘 그렇게 내외를 하고 그러시나. 사람 민망하게.”
사내가 술김에 기방에서 봤던 다른 이와 헷갈렸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연국에 있을 때 아바마마를 따라 궁 밖으로 시찰을 나간 적도 더러 있었다. 사내가 연국인인 이상 평생 제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적당히 좀 합시다. 추태도 정도껏 부려야지 밥맛 떨어지게.”
앳된 목소리로, 말투는 다 늙은 노인처럼 시동이 사내를 탓했다. 다분히 비난하는 어조가 담긴 어투에 사내는 기분이 상했는지 술병을 세게 탁 내려놓았다. 일순 왁자지껄하던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사내들 간의 치고받는 몸싸움이라도 기대하는 은근한 분위기를 감지하자 이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둘러 음식값을 지불하고 사내와 서로 노려보던 시동을 끌고 나왔다. 사내가 따라와 난동이라도 부릴까 싶어 사람들 사이를 헤쳐 멀리까지 온 뒤에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괜찮으십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도망칠 필요는 없었는데.”
“거기서 그 사내와 싸울 필요도 없었지.”
사내가 술이 더 달아오르면 적당히 눈치를 봐서 우찬의 소식을 물을 생각이었다. 편국에 있다던 그가 다시 금국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다른 전장을 누빌지. 알아봐야 하등 도움도 안 될 소식인 건 알지만 멀리서나마 지내고 있는 곳이라도 알고 싶었다.
제 편을 들어 주려고 나섰던 건 알지만 간만에 찾은 좋은 정보원을 놓친 게 아까워 혼자 투덜거리자 시동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그 사내놈, 아까부터 말을 참 경우 없이 하지 않습니까? 그런 얘기 듣고도 일일이 참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우습게 봅니다.”
“난 그자에게 더 물어볼 것이 있었어.”
“돈 몇 푼에 싸게 입 여는 병사들은 지천으로 널렸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시거든 저한테 물어보세요.”
석 잔의 술기운이 이제야 돌기 시작했는지 갑자기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길게 뱉는 더운 숨과 함께 돌덩이 같은 머리가 아래로 기울어졌다. 오랜만에 싸구려 술을 연달아 마셔 몸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시동이 하는 말은 그대로 한 귀로 흘려버렸다. 당장은 처소로 돌아가 한잠 깊이 들었으면 싶다.
*
전부터 편국의 군사 이동이 심상치가 않기는 했다. 간간이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음에도 시정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것은 금국에 극히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괜한 일을 만드는 것이 우찬에게는 썩 귀찮았다.
미리 손을 써 두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금국과 편국 국경 직전까지 내려온 편국 군사 대다수가 이민족 출신이었다. 편국의 공식적 입장은, 그들 모두가 귀화 후 정착하여 살고 있는 어엿한 편국 백성이라고 했지만. 그걸로 의심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국경 코앞까지 내려온 오랑캐를 가만두고 보기도 찜찜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무력 충돌을 일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편국에서 오랑캐를 두고 제 백성이라고 감싼 이상, 금군의 공격이 선전포고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북방 토벌 전쟁이라며 분위기가 흉흉한 와중에 편국까지 적으로 돌리는 전쟁을 감행하는 건 황궁은 물론 금국 백성들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한편 편국 왕은 편국 내에 주둔하는 금군 병력 협의를 위해 금국의 사마 육추명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금국과 편국의 군사 경계 지역 드넓은 평야에서 여유롭게 타국의 사신을 기다리던 편국의 왕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타나는 웬 사내를 보고 기함을 토했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길게 휘날리며 말을 타고 나타난 건 말로만 듣던 금의 황제였다. 수천인지 수만인지 셀 수도 없는 금군을 뒤에 두고 선봉에 서서 달려오는 금황제는 멀리서 보기만 해도 살기가 등등하여 흡사 당장 전쟁을 일으키기라도 할 작정인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나라 간의 협상을 하는 자리에 저렇게 많은 군사를 끌고 오는 되먹지 못한 경우는 전례가 없었다.
풍채가 얼마나 위풍당당한지, 용모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상할 새도 없이 금황제는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미리 받아 두었던 협의서에 인장을 찍으라 말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서슬 시퍼렇던지 하마터면 오줌을 찔끔 지릴 뻔할 정도였다.
잔뜩 주눅이 든 채 쪼그라져 있는 편국의 왕을 대신해 옆에 서 있던 나이 든 승상이 그럴 수 없다며 협의서를 금의 황제에게 반려했다. 황제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았다. 대신 협의서를 집어 들어 느릿하게 반을 쭉 찢어 갈랐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오늘 이 일로 자신이 정인을 찾는 일이 하루쯤 더 늦어질 것 같으니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상은 챙기겠다고 말했다. 말투가 너무 담담하여 주의인지 위협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나타난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아 금황제가 떠났다. 승상이 어두운 얼굴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편국의 왕은 선선대 왕의 유지를 상기했다. 금의 황족이란 것들은 모두 불꽃에서 태어난 화(火)신이니 결코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대국으로 섬기며 그 자리를 탐내지도 말라 했다.
편국의 왕은 그것도 다 옛말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였고 천하를 호령한다는 금의 기세도 한풀 꺾인 지 오래였다. 나라들간의 무력 충돌이 없으니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도 구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금은 과거의 영광을 무기로 아직까지도 우위를 점령했다.
그래서 현 황제를 얕봤다. 아름답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이렇다 할 전쟁에 나가 본 적도 없는 샌님이고 여태껏 제 씨로 낳은 후사도 없는 하자 있는 사내였다. 게다가 선황제가 급사하여 갑작스레 황위에 올랐으니 분명 정사를 돌보는 데에는 글러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거사에 동참한 것인데…….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너무 불편하다. 분명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왜지? 일은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이 자리에 황제가 직접 나온 것은 예상 밖의 일이지만, 결론적으로는 편국 내 모든 금군을 몰아낼 수 있게 되었다.
‘오늘 이 일로 내 정인을 찾는 일이 하루쯤 더 늦어질 것 같으니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상은 챙기겠다.’
영 알지도 못하겠는 말만 하고 떠난 황제의 서슬 퍼런 목소리만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