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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07)화 (207/300)

달의 황홀경

207화

“여기로 들어가면 됩니다.”

시동이 먼저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을 붙잡고 따라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머뭇거리던 이설이 결국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내부는 보기보다 정돈되어 있었고 밖에서 진동하는 악취도 한결 덜했다.

이설과 시동이 들어오는 걸 보고 막 밥 한술을 뜨던 노파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말도 없이 들어오면 어째. 늙은이 간 떨어질 뻔했네.”

전혀 놀란 기색 없던 노파가 혀를 쯧쯧 차며 면박을 줬다.

“진지 잡수시는 줄 몰랐지. 할매, 아저씨는 어디 나갔어요? 일거리 하나 가져왔는데.”

“또랑에 물둑 쌓는다고 새벽부터 나갔어. 근데 같이 온 색시는 누구야?”

눈이 침침한지 노파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설에게 초점을 맞췄다. 시동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설도 얼떨결에 고개를 따라 돌렸지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뒤늦게 자기가 그 색시라는 걸 깨달았다.

“색시 아니고 도련님. 아저씨한테 일 맡길 손님.”

“고놈 얼굴이 아주 반질반질하네. 일은 무슨 일인데.”

“금국으로 서신 하나만 전달해 줘요, 할매.”

“보수는 짭짤하고?”

눈치 좋게 이설이 냉큼 허리춤에 달고 있던 돈주머니를 꺼내서 노파 앞에 놓았다. 노파는 밥상에 그릇들을 옆으로 밀고 주머니 안에 있던 것을 쏟아부었다. 돈을 다 센 뒤에는 비녀들을 하나씩 들어 희미한 불빛에 비춰 값어치를 확인했다.

“좀 모자른 거 아는데 그래도 부탁해요.”

“값이 많이 밑진다면 추후에 꼭 갚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시동의 말을 이설이 거들었다. 돈이 없어 여기저기 곤란한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세기도 힘들다. 초조한 마음에 두 손 공손히 모아 허리까지 굽히니 노파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팍 찡그렸다.

“이 동네 장사는 무조건 선금이야.”

“그럼 안 해 주실 거예요?”

“누가 안 해 준대? 이 돈으로는 택도 없는데 저 색시 하는 짓이 예뻐서 해주는 거야. 이 늙은이더러 어르신이라잖아.”

말과는 달리 이설의 태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괴팍한 표정으로 노파는 이설이 가져온 돈과 비녀를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그중 비녀 하나를 남겨 이설에 발치에 휙 던졌다. 놀라 뒷걸음질 친 이설을 대신해서 시동이 비녀를 주워 자기 옷에 닦은 뒤 이설에게 건네주었다.

“색시도 아닌 게 머리 푸르고 다니면 못 써.”

“요즘에는 그런 거 구별 없어요, 할매.”

“너는 잔말 말고 가서 밖에 나가서 물건이나 주고 와. 이따 아랫집 수레꾼 놈이 일 받으러 간다 했으니 같이 다녀오라고 해. 물둑 쌓아서 몇 푼 받는다고, 쯧쯧.”

노파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다 떨어져 나간 문갑을 뒤져 낡은 옷가지를 다 빼내고 그 아래에 이설이 준 돈주머니를 깊이 집어넣은 뒤 다시 옷가지를 정리해 넣었다.

시동이 도랑까지는 혼자 다녀오겠다고 하기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남문 밖으로 나가서 여기까지 온 것만큼 걸어야 한다는 말에 이설도 두 번 조르지는 못했다. 힘들기도 하거니와 성문을 나갈 때 경비에게 신분을 의심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남문으로 통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해 봐야 빈민촌 부락민이 전부이기 때문에 크게 의심 살 일은 없겠지만 굳이 위험해질 일을 사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가서 좌측에 샛길을 지나면 장터가 있습니다. 꽤 넓으니까 거기 계시면 곧 가겠습니다.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셔도 되고요. 할매, 그래도 되지?”

“맘대로 해.”

“장터 말고 다른 데는 가지 마세요. 특히 장터 안쪽은 위험하니까 절대 가면 안 됩니다.”

이설에게 받은 서신을 챙기며 신신당부한 뒤 시동이 나갔다. 아직 문 앞에 뻘쭘하게 서 있는 이설을 보고 노파가 와서 앉든가, 나가든가 하라며 고함을 쳤다. 고민하다 노파 맞은편에 앉았다. 노파는 시동이 나간 후에야 다시 숟가락을 집어 들었는데, 밥이 다 식었다고 구시렁거리며 욕을 했다.

오는 동안 시동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했던 것에 무색하게 일은 제법 순조롭게 풀려 가고 있다. 시동이 말했던 만큼 먼 거리를 왕복하는 시간이라면 장터 안쪽까지 충분히 다녀올 수 있지 않을까.

“이도 없는 늙은이가 밥 먹는 게 신기해?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멍하니 시선을 허공에 대는 이설에게 노파가 면박을 줬다. 이설은 그런 게 아니라며 쓰게 웃었다. 노파는 여태껏 이설이 들었던 얘기들과 비슷하게 ‘사내놈이 뭘 먹고 얼굴이 그렇게 곱상하냐, 사내가 이리 삐쩍 마르면 힘 못 써 장가 못 간다, 손이 이리 고운 걸 보니 글공부 한다고 부모 속 깨나 썩이는 모양인가 본데 정신 차려라’ 등등 나이든 사람들이 으레 하는 잔소리들을 했다. 이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노파의 말을 맞장구쳤다.

“근데 어르신 장터 안쪽은 많이 위험한가요?”

노파가 혀를 차는 빈도수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쯤 이설이 너무 속이 뻔히 보이지 않게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동네를 처음 찾은 외지인이 가볍게 궁금해할 딱 그 정도로.

“거기? 내 어렸을 적에는 많이 위험했지. 근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아. 도적 떼가 바글바글한 소굴이었으면 관아에서 진작 처리했겠지.”

“듣기로는 많이 위험한 곳이라고,”

“아까 그놈한테 들었지? 이 동네에서 자란 애들은 원체 겁이 없어. 그래서 어른들이 애들 겁주려고 하는 소리야. 나쁜 짓 하면 장터 귀신이 잡아가서 사지를 토막 내 버린다고. 그게 소문이 났는지 외지인도 안 가.”

어린 애들한테 하는 소리치고는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싶긴 했지만, 어쨌든 소문만큼 위험한 곳은 아니라는 소리다. 괜히 겁먹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노파는 사근사근하게 제 말을 들어 주는 이설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심으로 먹으려던 한과를 하나 내밀었다. 색이 누렇게 변하고 겉이 찐득거리는 한과는 언제 만들어졌는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이설은 정중히 거절하고 맹물만 조금 마셨다.

오래된 한과를 노파가 누런 앞니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찐득한 단맛에 쩝쩝거리며 입맛을 다시고는 여상히 중얼댔다.

“근데 암만 흉악한 소문이 돌아도 찾아갈 놈들은 다 찾아가더라고. 달에 한두 명씩 꼭 찾아와 물어.”

“뭘요?”

“거기가면 정말 이름을 지워 주냐고.”

“…….”

“이달에는 색시 네가 처음이야.”

노파는 반 남은 한과를 입에 털어 넣고 찐득거리는 손가락을 입으로 쭉쭉 빨아 닦았다. 그리고 남은 잔여물은 소매 대충 닦고 일어났다. 보기보다 정정한지 상을 번쩍 들어 쪽문으로 나가는 동안 이설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노파가 손에 물을 털며 돌아와서 앉았다.

“왜? 이 늙은이 생각이 틀렸어?”

“……어떻게 아셨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말했잖아. 너 같은 놈들 달에 한두 명씩 매번 찾아온다고. 자주 보면 아는 법이지.”

“…….”

“전에는 다 설득해서 돌려보냈어. 그 뒤에는 그런 일 모른다고 딱 잡아뗐고. 근데 요즘은 오죽하면 여기까지 찾아왔나, 싶은 생각이 들어. 다들 목숨도 내놓을 각오로 찾아오는 거잖아.”

노파가 너도 그렇지 않냐고 묻듯이 이설을 봤다. 이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터 지나 안쪽으로 곧장 들어가면 피 냄새 징하게 나는 데가 하나 있어. 거기로 가 봐. 다른 데는 안 돼. 요즘 북쪽에서 그 짓을 하다 도망 온 오랑캐가 그 옆에 장사를 낸 모양인데 그놈들은 상종도 하지 말고 내가 말한 곳으로 가.”

“오랑캐 말고도 이 일을 원래 하던 사람들이 있나요?”

“당연히 있지. 내가 젊었을 때부터 했으니 꽤 오래됐어.”

“그럼 혹시 그동안 목숨을 잃는 사람도, ……보셨나요?”

이제 와 무슨 후회를 하겠다고 물어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글쎄. 나야 본 적 없지. 송장을 치러도 그놈들이 치를 테니까.”

그러니까, 죽을 수도 있는 확률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확인받을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안색이 안 좋아졌는지 노파가 이 빠진 잔에 물을 담아 건넸다.

“가려거든 얼른 가. 오늘은 구름이 잔뜩 껴서 날이 금방 어두워질 거야.”

노파의 재촉에 마음이 좀 다급해졌다. 시동보다 먼저 이곳으로 돌아와야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시동이 알게 되면 자연히 임씨 아저씨에 귀에도 들어갈 테고, 자칫하면 서신을 받고 사람을 보낼 우찬이 알게 될 수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이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노파가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일이 제대로 끝나면 여기로 돌아오면 되고, 잘못되거든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죽어야 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아무리 나라에서 내놓은 빈민촌이라 해도 집 앞에서 사람이 죽으면 남문 경비가 들여다보는 척이라도 할 텐데 그럼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했다.

“명심해. 장터 지나 안쪽으로 곧장 들어가서 피 냄새가 징한 곳이야. 거기가 원래 짐승 배 가르는 도축장이었는데 냄새가 아주 말도 못 해. 못 찾지는 않을 거야.”

“예. 어르신 감사합니다.”

“돈 한 푼도 안 주고 감사하기는 무슨. 얼마 전에 너만치 곱고 반듯하게 생긴 사내놈 하나가 왔는데 값을 아주 후하게 치르고 갔어. 나더러 어르신, 어르신 하는 게 어찌나 예쁘던지. 그놈이 네 몫까지 낸 셈 치는 거야.”

“그분께 제가 빚을 졌네요. 근데 그분은……,”

“안 죽었어. 대신 손목에 이름 대신 흉측한 흉 하나 얻고 고향으로 돌아갔지. 근데 너.”

노파가 퉁명스레 대답하더니 갑자기 이설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손에 쥔 비녀를 휙 빼앗아 얼굴 앞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머리부터 올리고 나가는 게 좋을 거야.”

노파의 괴팍한 요구가 단순히 사내는 머리를 푸르고 다니면 안 된다는 편견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노파도 더는 캐묻지 않았고 이설이 서툰 솜씨로 머리를 틀어 올려 비녀 꼽는 것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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