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09화
“이것 봐라?”
갑자기 불어오는 찬 바람에 몇 가닥 풀어졌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산발이 된 와중에 하던 행동 그대로 얼어붙은 이설은 눈동자만 움직여 문 앞에 서 있는 신발 수를 셌다. 총 다섯 명. 그중 한 명은 좀 전에 나간 이가 누런 사내다.
이설은 재빨리 손을 움직여 비녀를 다리와 의자 사이에 숨겨 넣었다.
“얼굴 반반한 게 머리 굴릴 줄 안다길래 기대 좀 했는데, 대범하기까지 하네?”
괄괄한 사내의 목소리가 조롱인지 감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많이도 느긋한 반면 이설은 가슴이 너무 빠르게 뛰어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얼굴 좀 보자.”
별안간 우악스럽게 잡힌 머리채가 뒤로 확 젖혀지며 숨이 턱 막혔다. 놀란 눈에 허물어지는 천장이 보이고 그 아래로 덩치가 산만 한 사내가 얼굴을 쓱 내밀었다.
흡사 지푸라기 인형이라도 되는 듯 사내는 이설의 머리채를 잡고 이리저리 목을 꺾어 가며 유심히 살폈다.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은 굳은살이 많고 투박하여 피부를 긁어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짐승 털가죽에서 나는 케케묵은 냄새가 났다.
“어떱니까? 이번 물건은 마음에 드십니까?”
“흐음.”
“이 정도 얼굴이면 어느 고관대작 나리들께 팔아도 제값 톡톡히 받아 낼 겁니다.”
누런 이를 딱딱 부딪치며 아까 본 사내가 옆으로 와 거들었다.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에 눈물이 찔끔 난 이설이 사내를 맹렬하게 노려봤지만 분한 마음을 다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풀려난 오른손으로 머리채 잡은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힘의 차이를 전혀 이기지 못했다.
옆에서 이리 알랑방귀를 뀌는 것을 보아하니 이자가 인신매매를 하는 시정잡배들의 뒤를 봐주는 이민족 외지인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물건은 좋네. 아주 좋아.”
“그럼 약속했던 대금보다 좀 더,”
“근데 문제는 너무 좋다는 거야.”
이민족 사내가 머리채를 휙 밀쳐 손을 놓았다. 묶여 있던 몸까지 옆으로 휘청거린 이설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겨 사내를 쏘아봤다. 사내는 이설이 그러거나 말거나 날카로운 눈빛으로 턱을 꽉 움켜잡았다. 이설이 남은 손으로 떼어 내 보려고 했지만 이 역시도 역부족이었다.
“딱 봐도 이 거지소굴 사람 아니라는 한 번에 알겠고.”
“그간 거래해 온 사람들 대다수도 외지인들이지 않았습니까?”
“손에 고생한 흔적이 없는 걸 보니 평민도 아닌 것 같고.”
“그래 보이기는 한데…….”
말소리가 줄어든 사내는 대금을 받기는커녕 잘못된 사람을 데려왔다고 질책이라도 당할까 눈치를 봤다.
이설은 턱이 으스러질 것 같은 고통에 신음을 참느라 어금니를 앙다물어 목에 빳빳하게 힘을 주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사내가 얼굴을 가까이 했다. 눈썹 뼈가 도드라지고 안광이 흉흉한 데다 목 언저리에 얼핏 보이는 문신이 선명하다.
부족마다 새기는 문신의 모양에 대해 우 미인이 한차례 지나가듯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민족들 사이에서도 흉악하다 소문난 몇몇 부족들의 상징이 얼핏 기억났다. 칼 두 자루를 가로 세로로 겹친 열 십(十)자 모양이라는 게, 사내의 목에 문신과 일치했다.
“제일 걸리는 건,”
하필 질이 안 좋은 이민족에게 걸려 낭패라며 좌절하였는데 그보다 더 한 일이 닥쳤다.
턱을 놓아준 사내가 몸과 의자 사이에 있던 비녀를 발견해 꺼내 들었다.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걸로 보아 보통 고명한 집안의 아드님이 아닌 것 같은데.”
“이리 돌려주십시오!”
“말도 할 줄 아네?”
“내놓으십시오!”
악을 쓰듯 소리를 지른 이설이 사내가 든 비녀로 손을 뻗었지만 허사였다. 붙잡힌 손으로도 어떻게든 비녀를 잡아채려 노력해 봤지만 안간힘을 써도 의자에 묶인 몸만 들썩들썩 할 뿐 손도 닿지 않았다.
몸부림을 치는 이설이 성가신지 사내가 뒤에 모인 사람들에게 눈짓하자 누군가 새 끈을 가지고 와서 팔걸이에 손을 다시 묶었다. 달아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것처럼 이전보다 몇 번을 더 돌려 감아 꽉 묶으니 팔 전체가 다 아릿할 정도였다.
사내는 손에 든 비녀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이설에게 물었다.
“뭐 하는 놈이냐? 아무리 지체 높은 집안 아드님이라 하더라도 이런 물건은 함부로 가질 수가 없어.”
“…….”
“대답 잘해야 할 거야. 네가 얼마나 대단한 도련님인지에 따라 내가 널 그냥 돌려보내 줄 수도 있거든.”
한껏 으스대며 생색을 내는 사내지만 거짓말을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쏘아보는 눈빛을 잠깐 거두고 이설은 마른침을 삼켰다. 침착해야 한다.
“너 같은 거 잘못 건드렸다가 관군이라도 들이닥치면 우리도 골치 아프거든.”
그러니까, 없어져도 티 나지 않고 관아에 신고한다 한들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사람들만 잡아다 팔겠다 이거였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는 걸 참지 않자 사내도 따라 웃으며 눈썹을 한 번 들썩 움직였다. 어쩔 수 없지 않으냐, 하고 반문하는 것 같았다.
정체가 뭐냐고 재차 묻는 사내는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지는 않았을 터. 관군이 들이닥치면 가장 먼저 곤란해질 게 자신들이라는 걸 알고 있다.
더는 물러날 곳도 없는 이설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해지기 전까지 내가 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곳으로 병사를 보내라고 했어.”
“궁?”
사내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니 분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다.
“궁에서 볼일이 있어 나온 거야. 이대로 보내 주면 나도 오늘 일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지.”
“궁에서 나온 도련님 이름이나 한번 들어 볼까?”
사내는 거짓말을 믿지 않는 게 분명했다. 놀리는 어투로 조롱하는 사내에게 이설이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창화군이다.”
“금에서 돌아오자마자 양화성으로 쫓겨났다는 그 창화군? 말도 안 되는 소리군.”
“얼마 전 궁으로 돌아왔어. 이런 곳에 있으니 바깥소식이 많이 느린가 봐.”
이설이 태연하게 되받아치자 사내가 약간 당황했다. 왕족 누가 입궁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빠삭하게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창화군의 얼굴 역시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하기야 어렸을 적 금국으로 건너가 황궁에서 일생을 보내다시피 하여 도국 궁에서도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며 허탈해했던 창화군이었다.
사내가 뒤를 돌아 패거리 일행들을 봤다. 다들 어리둥절하던 중에 여인 하나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양화성에서 급히 입궁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고 중얼거리는 말에 사내만 빼고 모두들 기함을 토했다.
“다시 말하지. 이대로 보내 주면 오늘 일은 문제 삼지 않겠다.”
이설이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반복해 말했다. 사내는 태연했지만 아까처럼 여유 있게 웃지 못했다.
“넌 내가 이 짓거리 하면서 봤던 물건들 중에 최상품이야. 너 같은 남첩 하나 사겠다고 돈다발을 들이미는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사내의 말을 다시 풀이하자면, 지금 빠져나가지 못하면 꼼짝없이 얼굴도 모르는 어느 호색한의 남첩으로 팔려간다는 소리였다.
사내가 초조한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이설도 겁먹은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입술이 덜덜 떨릴까 봐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꽉 깨물어 참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숱하게 해 온 거짓말이었지만 이번만큼 대범한 적이 없었다.
“그 비녀는 어마마마께서 선왕께 받으신 유품이야. 왕족이 아니면 갖기 힘든 물건이지.”
“…….”
“해가 지면 관군이 올 것이다. 어서 결정을 내리는 게 좋아. 날 풀어 주든지 지금 당장 팔아넘기든지.”
이설로서는 대담한 승부수를 띄운 거나 다름없었다. 간이 콩알만 해 소심하기 짝이 없는 자신이었는데. 일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스스로에게 칭찬이라도 해 주어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사내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허벅다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뽑아 다가오는 기세에 이설은 지레 겁을 먹고 몸을 웅크렸다. 칼날이 제 쪽을 향한 순간 숨을 멈추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터지는 숨과 함께 손에 묶인 압박이 느슨해졌다.
“네 놈 말을 다 믿는 건 아니야.”
발에 묶인 끈까지 마저 처리한 뒤 사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아직 찜찜한 구석이 남아 있는 표정은 이설을 순순히 보내 주는 게 무척 아까운 얼굴이었다.
“느낌이 쎄하다는 말로 설명이 될까 모르겠네.”
사내는 뺏어 간 비녀를 의심 많은 눈으로 관찰하며 중얼거렸다.
이설을 납치해 온 사내는 자기 성과가 아까워 죽겠으면서도 혹시라도 진짜 이설이 궁에서 나온 창화군일까 잔뜩 겁을 먹고 여기저기 눈치를 봤다.
이설은 문득 그 사내의 허리춤에 달린 지푸라기 주머니에 시선이 갔다. 가까이 왔을 때 악취에 섞인 시큼한 냄새가 났는데 아마 저 주머니가 원인인 것 같았다. 정신을 잃기 전에 맡았던 냄새와 같았다.
“수고 많았어, 왕자 나리. 배웅은 안 할 테니 이만 가 봐.”
“비녀는 돌려줘.”
“목숨을 빚졌는데 이 정도는 답례로 남겨 주셔야지.”
누가 누구에게 목숨을 빚진 건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기가 찼지만 괜히 꼬투리를 잡았다가는 그나마도 도망가지 못할까 말을 아꼈다.
비녀는 수중에 가진 돈 되는 물건 중 몇 안 되게 남은 하나였다. 더 이상 비가랑 상단의 이름을 팔기도 힘은 마당에 저것까지 뺏기면 이름을 지우고 대가로 치를 돈이 없었다. 그나마 남은 거라고는……,
“아니면 그 가락지라도 내놓고 가시든가.”
사내가 턱짓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태자가 준 가락지를 탐낸다는 것을 알고 그 위를 다른 손으로 덮어 가렸다.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렇지. 보통은 비녀보다 가락지에 의미가 더 있는 법이거든.”
비녀는 거짓말이었지만 가락지는 정말 태자 어머니의 유품이었다. 구하에게도 넘기지 않고 간직한 것을 빼앗길 수 없었다. 가락지는 이설이 반드시 황궁으로 돌아가 태자에게 돌려주겠다는 각오를 다진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늘 일은 덮어 주겠다는 약속은 믿어 보지.”
사내가 이만 돌아가라는 눈짓을 하며 휙 돌아섰다. 마음이 바뀔까 싶어 얼른 일어나 문 쪽으로 걸었다. 발목이 오래 묶여 있던 탓에 얼얼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쪽 발을 절뚝이며 천천히 걷는 이설을 사내만 뺀 모두가 조용히 지켜봤다. 누군가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려 이설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장터로 돌아가 처음부터 길을 다시 찾아야 하는지, 그러다가 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일이 한 번씩 틀어질 때마다, 이 이름을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닌지 자꾸만 초조해졌다.
일단 동네 어귀에 있던 노파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문고리를 붙잡은 이설이 막 문을 열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사내가 ‘이봐, 왕자 나리.’ 하고 불러 세웠다. 웃음기 가신 목소리가 살의를 담은 것처럼 서늘했다.
“머리에 물을 들이셨나 봐?”
사내가 손바닥을 앞으로 펼쳐 보이며 물었다. 아까 전 이설의 머리채를 잡고 쥐고 흔들었던 손바닥에 거뭇한 얼룩이 져 있었다.
“그럼 원래 머리는 흑발이 아니라는 얘긴데.”
“…….”
“가기 전에 확인 한번 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