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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16)화 (216/300)

달의 황홀경

216화

“폐하, 환복하셨습니까?”

오래 지나도록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게 이상했는지 윤 내관이 물었다. 우찬이 시끄럽다고 일갈하자 다시 조용해졌다.

궁인들이 미리 펼쳐 걸어 놓은 군장 예복을 느릿하게 입었다. 거추장스럽기만 한 이따위 옷을 왜 입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특별히 이설을 만날 것을 감안하여 환복했다.

우찬은 제 얼굴에 딱히 감상이 없는 편이었고 남들의 찬사에도 감흥이 없었지만 이설의 반응에는 예민했다. 이설은 우찬이 금색 비단옷을 화려하게 입고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거나 반만 묶어 늘어뜨린 걸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우찬은 이설이 좋아하는 대로 해 주었다.

예복을 고루 갖춰 차려입은 우찬은 반으로 묶은 머리에 짧은 비녀 하나를 꽂아 넣었다. 이설은 이게 무엇인지 기억이나 할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침상 옆 문갑을 열어젖혔다. 문갑 크기에 비해 안에 든 건 달랑 종이 세 장. 그중 제일 위에 둔 것을 꺼내 접어 품에 넣고 침소 밖으로 문을 열었다.

“가자.”

“저, 폐하 잠시.”

내관이 챙겨 주는 검을 받아 들고 막 본궁 밖으로 나서려는 것을 흑영이 막아섰다. 눈길을 던지자 머뭇거리던 흑영이 두 손을 겹쳐 우찬에게 내밀었다.

“고문 중 죽은 시신을 살피던 중 나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그때 몸수색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송구합니다.”

투박한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굵은 옥가락지였다. 꽃모양으로 음각이 새겨져 조금 특이하기는 했지만 별로 돈이 되는 보석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긁힌 상처도 많아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없었다.

우찬은 별 아는 체도 없이 옥가락지를 가져와 약지에 끼어 봤다. 마디에 걸려 들어가지 않자 도로 빼서 새끼손가락에 넣었다. 겨우 들어가기는 했으나 다시 빠질지는 알 수 없었다.

주먹을 쥐고 제 손에 낀 옥가락지를 보니 참 낯설기 그지없었다. 하얗고 마디가 얇은 이설의 손가락에서는 그렇게 보기가 좋더니 제 손에 끼어 놓고 보니 볼품이 전혀 없었다.

이설에게 물어볼 것이 하나 더 늘었다. 이 가락지는 그동안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반드시 물어야 했다.

“그리고 소의 마마의 호위무사라는 자가 수색에 따라가겠다며 찾아왔습니다. 어쩔까요?”

그나저나 내가 이렇게 보잘것없이 초라한 가락지를 탄신일 선물이랍시고 이설에게 줬었나.

가물가물한 옛 생각에 젖어 있던 우찬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은궁에서 연이설과 친하게 지내던 궁인도 하나 데려가는 게 좋겠어.”

“준비시키겠습니다.”

쓸모가 없으면 그 자리에서 버리면 그만이다. 이설을 찾은 뒤에도 제 발로 끌려오지 않으면 낭패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계책이 필요했다. 막말로 포박이라도 해서 데려오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우찬이라고 그런 방법을 사용하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본궁 밖으로 나가자 태금궁 앞마당을 가득 메운 금군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대문 바깥의 너른 공터까지 꽉 찬 인원이었지만 보이는 것이라고 해봐야 전군의 새 발의 피나 될까 말까 한 숫자였다.

황제가 된 후 처음 출정식에 나서보는 우찬은 본궁의 계단 단상에 멈춰 섰다. 때마침 부는 바람이 검은 머리카락과 금색 겉옷 자락이 같은 방향으로 그림처럼 휘날렸다. 그 바로 아래에서 우찬을 올려다보는 양 소원을 비롯한 후궁들과 여러 대신들이 홀린 듯 고개를 추켜올렸다.

“짐의 병사들은 들으라.”

그리 고성도 아닌 목소리에 모인 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흑영을 시작으로 모두 일제히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뒤 단상 아래 사람들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금일 짐의 금군은 조악한 북방의 반역 무리를 정벌하고 이 땅에 다시 금의 위세를 떨쳐 기강을 바로 세울 것이다. 금에 반기를 드는 자는 출신과 부족,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죽여 본보기로 삼아라. 또한,”

우찬이 잠깐 말을 멈추고 건조해진 눈빛으로 무릎을 꿇고 앉은 병사들을 훑어봤다.

“짐이 가장 총애하는 빈이며 장차 금의 황후가 될 소의 연이설을 반드시 찾아내어 환궁시키라.”

느닷없는 공표에 양 소원이 가장 먼저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간발의 차로 양 소원이 가장 빨랐을 뿐 후궁들은 물론 대신들이 속속들이 자세를 세우고 일어나 우찬을 올려다봤다. 놀랄 노 자로 동그랗게 떠진 눈들만이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울지를 말해 주었다.

“지금부터 황명을 지키기 위해 법도를 어기는 것은 금황제의 인장으로 사면한다. 그리고 천도를 저버리는 역륜 역시,”

타닥타닥 발소리가 멀리서 울려 무심결에 눈길을 주니 차란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별일이 아닌 것을 확인 후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성천자 봉황의 자손인 동시에 불꽃에서 태어난 봉황의 현신 나 금우찬의 이름으로 사면받을 것이다.”

이설을 황후로 삼을 것이라는 공표를 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웅성거림이 앞에 선 대열부터 시작돼 뒤로 뻗어 나갔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가 가관이었으나 가장 압권은 차란이었다. 차란은 병사 사이를 뛰어오다 말고 기함을 내지르며 중간에 주저앉아 버렸다.

자기들이 지금 뭘 들은 건지 도무지 실감이 안 난다는 얼굴들에는 출정을 나가는 흥분보다 더한 충격이 내려앉았다.

하도 놀라 ‘폐하’라는 말도 내뱉지 못하는 대신들을 발치에서 무시하고 우찬이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지금 전 호위군은 들어라.”

호위군의 특성상 황제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지만 우찬이 직접 자기 이름을 만천하에 밝혔다는 것에 더없이 놀란 호위군이 얼떨떨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다시 귀를 기울였다.

“목적지까지는 나를 호위하되 수색이 시작된 순간부터는 소의 연이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한다.”

“폐하, 그런 황명은 따를,”

“호위군 개개인의 사사로운 양심과 감정은 황명에 복종한다.”

우찬이 호위군의 충성 서약 중 일부를 첨언하며 흑영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결국 흑영이 ‘존명’ 하고 대답하자 남은 호위군이 따라 제창했다.

출정식이 이루어지는 사이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갔다. 곧 완전히 해가 지고 나면 세상은 어둠에 휩싸이고 불빛 하나 없는 산속을 이설은 또 혼자 헤맬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우찬은 가슴이 저릿하게 저몄다.

제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빛을 반짝이며 겁먹어 덜덜 떨고 있는 동그란 어깨가 눈에 선했다. 그 어깨를 얼른 감싸 안아 주고 싶었다.

*

가쁜 숨소리가 자박거리는 발소리보다 더 컸다. 산을 오른 뒤 기진맥진해진 두 다리로 더는 한 발자국도 갈 수가 없었다. 판판한 바윗돌까지 겨우 기다시피 걸어가 맥없이 몸을 쓰러뜨렸다.

바윗돌의 찬 기운이 옷 사이로 스며드니 달아올랐던 몸의 온도가 조금 식었다. 연국에서 도망을 쳤을 때는 날이 너무 추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지금은 날이 따뜻해 다행이다. 밤사이 온도가 떨어져도 털옷을 덮으면 견딜 만했다. 날이 밝으면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털옷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이유였다.

“어디로 가지.”

벌러덩 누워 공연히 하늘만 쳐다보던 이설이 혼잣말했다. 실은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그냥 이대로 바람결에 쓸려 닳아 없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곧 읏-차, 하는 소리로 일어난 이설은 해와 그림자의 위치로 방향을 어림잡았다. 지금 위치는 도국의 남쪽과 금국의 북쪽이 만나는 국경 경계지역이다. 여기서 서쪽으로 부지런히 가면 편국이다. 넉넉잡아 열흘은 걸릴 길이지만 아주 못 갈 거리도 아니었다. 북쪽 산과 다르게 이곳은 먹을 수 있는 열매나 견과가 천지에 널려서 배가 곪는 일도 없었다.

앉은 김에 주머니에서 아까 주운 밤을 꺼냈다. 이로 꽉 깨물어 겉에 껍질을 갈라 벗기고 율피는 앞니로 살살 긁어 퉤 뱉어 냈다. 오도독 씹히는 밤 알갱이는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빈민촌에서 정체가 발각되어 도망칠 때는 어디로 향하는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리기만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졌고 산속 한가운데 혼자 덩그러니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도망을 쳤는데도 숨을 죽이면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금군이 국경을 모두 봉쇄했기 때문에 이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국경 수비대에게 발각될 수 있다.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이동을 해야 했다. 목적지는 일단 편국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 봐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문제는 금국의 선전포고를 받은 편국의 정세를 모른다는 것인데 아무렴 좋을 리가 없을 테니 그게 걱정이라면 걱정이었다.

“이제 그만 가자.”

혼잣말로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운 좋게도 아직까지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발각된 일은 없었다. 하지만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져서 안심할 수는 없다. 누군가 풀숲 사이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터덜터덜 서쪽으로 향하는 동안 먹을 만한 것들을 모아 겉옷을 대충 묶어 만든 보따리에 넣었다. 그래도 처음 겪어 보는 상황은 아니라 그런지 제법 당황하지 않고 적응하고 있었다. 놀리셨던 만큼 자신이 아주 바보천치는 아닌 것 같다고, 우찬에게 꼭 말해 주고 싶었다.

우찬의 생각을 하면 울적해져 걸음이 느려졌다. 괜스레 왼쪽 발목도 욱신거리는 것 같고 기운도 쭉 빠졌다. 이러면 그냥 다시 또 쉬었다 가는 게 나았다.

다시 또 해가 지기 시작했다. 산에 들어온 후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맞는 밤이었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보름달이 뜨는 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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