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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26)화 (226/300)

달의 황홀경

226화

하지만 끝내 단도를 던질 수는 없었다. 이설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이설의 몸에 피 한 방울이라도 나게 한다면 사지를 찢고 꿰매기를 반복하여 죽지도 살지도 않게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연이설 피 한 방울의 값어치로는 그것도 모자랐다.

다리가 불편해 전력으로 달리지 못했지만 이설이 남겨 놓은 빛의 궤적을 따라 쫓았다. 마침내 멈춘 곳은 천 길 낭떠러지 앞이었고, 맹랑하게도 이설은 가까이 다가오면 그 아래로 몸을 던지겠다는 협박을 하며 우찬을 밀어냈다.

화가 나야 했는데, 소리를 치고 역정을 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찬은 그냥 애원했다. 제발 이리 오라고, 함께 궁으로 돌아가자고. 어떤 심정으로 품에 넣어 가져왔는지 이설은 짐작도 못 할 종이 쪼가리 따위를 들이밀면서까지 부탁했다.

그런데도 이설은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은애한다는 고백을 곡해하고 연심을 부정했다. 전부를 내려놓고 애원하는 자신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기를 원했다.

“마마를 걱정하시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너무 심려치는 마시옵소서.”

그 밤의 기억을 거슬러 오르며 낯빛이 더 어두워지는 우찬을 보고 차란이 급하게 말했다. 와서 거들라는 눈치로 흑영에게 눈빛을 보냈다. 흑영이 천천히 곁으로 다가왔다.

“우 미인이 오늘 새벽 매복 중이던 적군들을 생포해 왔습니다. 문초하면 마마를 끌고 간 놈들의 근거지를 곧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놈들도 아마 이 일대를 멀리 벗어나지는 못했을 겁니다.”

술병을 침상 위에 옆으로 던지고 우찬이 눈을 치켜올렸다.

“생포한 놈들은 어디에 있느냐?”

“군영 동쪽 막사에 잡아 두었습니다. 제가 직접 문초하러 가던 길에 폐하께서 깨어나셨다는 얘기를 듣고 들른 것이었습니다. ……폐하?”

일어나 두 사람 사이를 지나다 흑영과 어깨를 부딪쳤다. 왼쪽 어깨에 뭉근한 통증이 아직 남아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쳐다만 보는 둘을 무시하고 반듯하게 펼쳐 걸린 장포를 걷어 대충 양팔을 껴입었다. 천막을 걷고 나가자 풀어 헤쳐진 옷 사이로 찬 바람이 스며들었다.

“폐하 갑자기 어딜 가시는 겁니까!”

눈치는 진작 챘을 차란이 쫓아와 뒤에 붙어 섰다. 갑자기 나타난 우찬을 보고 북적거리던 병사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 사이를 헤쳐 지나가는 우찬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산속에 임의로 만든 것치고는 군영이 무척 넓었다. 동쪽 막사 끝에 다다른 우찬이 천막을 휙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찬을 보고 놀라 뒷걸음질 쳤다.

바닥에 포박되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람은 사내가 여덟, 여인이 셋. 거세게 저항했던 흔적은 온몸의 상처와 핏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다들 검은 천을 눈에 묶어 앞을 못 보게 가려 놓은 상태였지만 주변의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하고 몸을 긴장하는 게 보였다.

“일어나셨습니까, 폐하. 존체 무탈하신 것을 뵈니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낯선 얼굴을 한 여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여인에게선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우 미인이라는 걸 알았다. 갑자기 나타난 우찬을 보고도 처음으로 놀라지 않은 모습이었다.

“생포한 것들은 이게 전부인가?”

“예. 여기 있는 자들 외에는 모두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습니다.”

우 미인은 놓친 사람은 절대 없다는 확신을 에둘러 말했다. 우찬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여기 열한 명 중에 이설이 끌려간 곳의 위치를 알고 있는 자가 반드시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무척 귀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뒤쫓아 들어온 차란이 우 미인에게 가볍게 묵례하며 물었다.

“실토하였습니까?”

“아직입니다. 역시 말로는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우 미인이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동시에 검을 빼 들었다. 청량하게 울리는 소리에 바닥에 앉은 포로들은 잠깐 몸만 움찔했을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차란과 함께 들어와 옆에 서 있던 흑영이 주변을 둘러본 뒤 우 미인에게 다가갔다.

“더 이상의 심문은 저에게 맡기시고 마마께선 이만 막사로 돌아가 쉬십시오.”

“고신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우 미인이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천막을 걷고 몸을 밖으로 내밀었다. 불에 달군 인두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거냐는 말에 포로들이 다시 몸을 움찔했다. 눈앞에서 혀가 뽑히는 모습을 봐도 하등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우 미인은 풀린 허리끈을 바짝 조였다.

밖에서 봤던 해의 위치로 보아 대략 정오가 가까워지는 듯했다. 이설이 끌려간 지 사흘. 지지부진하게 일을 끌면 이설은 어딘지도 모를 낯선 곳에서 다시 하룻밤을 더 보내야 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눈을 풀어 줘라.”

포로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우찬이 명령했다. 잠시 눈치를 보던 병사들이 포로 열 한 명의 눈가리개를 풀어 주었다. 밝은 빛에 눈이 시린 포로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앞에 사내가 금의 황제라는 것을 첫눈에 알아보고는 분을 못 이겨 이를 갈았다.

“무엄하다! 당장 고개를 숙이지 못하겠느냐!”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이 포로들 머리채를 잡고 바닥으로 누르며 윽박질렀다. 그중 사내 한 명이 몸부림을 치며 앞으로 튀어 나가 우찬의 발치에 침을 퉤 뱉었다.

반사적으로 우찬을 막아서고 튀어나온 흑영이 사내의 아래턱을 올려 찼다. 신음 소리와 함께 사내의 몸이 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사내는 금세 피투성이가 된 입가에서 낮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이쪽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일단,”

“……연이설을 데려간 너희들의 본거지가 어디냐.”

흑영의 어깨를 툭 치고 밀어낸 우찬이 가장 왼쪽에 앉아있던 포로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음의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위협을 하거나 압박을 가하는 분위기가 전혀 없는 우찬을 올려다보고 사내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순순히 말할 것 같으냐? 그간 네 선조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죗값은 네 놈이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네 첩놈의 명줄을 끊어서라도 반드시…… 커헉!”

우찬이 몸을 살짝 돌려 손을 뻗었다. 병사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을 뽑는 동시에 검 끝이 허공에 반원의 궤적을 그렸다. 모두가 놀라 숨을 죽인 가운데 사내가 짧은 비명과 함께 옆으로 고꾸라졌다. 쓰러진 사내의 목에서 검붉은 피가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폐하!”

차란의 비명 소리에 다들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탄식의 비명을 토해 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우찬의 얼굴에 튀긴 핏방울이 아래로 흘렀다.

“아니, 갑자기 그런……, 폐하 괜찮으십니까?”

서둘러 곁으로 다가오는 차란을 무시하고 옆에 자리로 걸음을 한 칸 옮겼다. 동료가 단칼에 목이 잘려 입에서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본 옆의 사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연이설을 데려간 너희들의 본거지가 어디냐.”

우찬이 평이한 어조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다시 물었다. 숨소리는 고르고 얼굴은 그저 무표정할 뿐 살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다음 심문 대상자가 된 사내가 죽어가는 동료에게서 고개를 휙 돌리며 소리쳤다.

“모, 몰라……, 나는 그런 거 몰라! 나는 다, 다른 부족민이라 그런 것까지 전부 알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우찬은 검을 사내의 목에 꽂았다. 말하는 도중에 목이 뚫린 사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만 한 움큼 토해 냈다. 이렇게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당혹감이 두 눈을 스쳐 지나갔다. 우찬이 단번에 검을 빼내자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며 풀썩 쓰러졌다. 검을 빼는 과정에서 얼굴로 다시 피가 튀었다.

손등으로 무감각한 얼굴 위를 닦으며 옆으로 한 칸 걸음을 옮겼다. 머리를 짧게 자른 여인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우찬을 노려봤다.

“연이설을 데려간 너희들의 본거지가 어디냐.”

같은 말의 세 번째 반복.

“모른다. 설령 안다고 해도 죽으면 죽었지 네 놈에게는 절대,”

비슷한 대답과 똑같은 결말이다.

먼젓번 사내와 같이 목이 꿰뚫린 여인 역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바로 검을 빼내려고 했으나 날이 상했는지 뽑히지 않아 그대로 검을 놓았다. 금세 숨통이 끊어진 여인은 눈도 감지 못하고 목에 칼은 꽂은 채 시체가 됐다.

순식간에 천막 안에 피비린내가 더 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다들 전장을 구르는 무사들이라 이 냄새가 낯설지 않은 데에 반해 차란만은 참기 힘든 듯 코를 소매로 막았다.

“이리 줘.”

우찬이 흑영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의미를 눈치챈 흑영이 자기 검을 뽑아 우찬에게 건넸다.

흑영의 검으로 세 사람의 숨통을 더 끊었다. 남은 사람은 아직 다섯. 잠자코 지켜보던 흑영이 다가와 이 정도면 충분히 위협이 됐을 테니 남은 자들은 자신이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차란도 내심 그러길 바라는 눈치였다. 마침 고신에 사용할 불에 달군 인두와 화로를 가지고 병사들이 들어왔다. 우찬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검만 고쳐 잡았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앞에 포로들이 하나둘 동요하며 몸을 떨었다. 누군가 오줌을 지린 건지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가 뒤섞여 차란은 자꾸만 헛구역질을 했다.

포박된 다음 사내 앞에 섰다. 처음과 표정 하나 안 바뀐 얼굴로 재차 물었다.

“연이설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말하라.”

“저, 정말 모릅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살려 주십!”

앞서 죽어 나간 사람과는 달리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하던 사내도 마찬가지로 목이 꿰뚫려 죽음을 맞이했다. 검을 빼는 힘에 함께 몸뚱이가 앞으로 얼굴부터 고꾸라졌다. 고여 있던 피가 튀기자 남은 네 사람이 이제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살려 달라 애원했다. 자리를 이탈하여 몸부림을 치는 포로들이 비명을 질렀다.

“붙잡아.”

“몰라, 모른다고! 난 그냥 시키는 일만 하는 것뿐이야! 네 놈은 처음부터 우릴 전부 죽일 생각이었어!”

묻지도 전에 대답부터 하는 여인도 죽였다. 남은 사람은 셋. 눈이 마주친 그 옆의 사내가 붙잡고 있던 병사의 손을 뿌리치고 엉금엉금 기어와 우찬의 발치에 엎드렸다. 아까 우찬에게 침을 뱉고 흑영에게 발길질을 당한 사내였다.

아까 흘린 피에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서는 우찬의 신발에 얼굴을 비비며 흐느꼈다.

“아직 사, 산을 빠져나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누군가로부터 서, 서신을 기다리고, 이, 있는데 그전까지는 헤, 헤치지도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연이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건 저도 정, 정말 모릅니다! 이 산 어, 어딘가에 작은 초, 촌락이 있다고만 들었을 뿐,”

엎드린 사내의 목에 검을 박아 넣었다. 사내가 토한 피가 가죽신으로 왈칵 쏟아졌다. 아직은 꿈틀꿈틀 움직이지만 곧 밖에 시체 더미 중 하나 될 몸뚱이를 발로 밀어 치웠다.

이제 남은 건 두 사람. 그 앞으로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직전의 사내가 아직까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넋 놓고 보던 두 사람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북쪽 골짜기, 그 골짜기를 지나 절벽 아래에 저, 저희 은신처가 있습니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가는 길을 아, 안내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제발, 제발 이 모,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울부짖는 소리 앞에 우찬은 검을 놓았다. 피 묻은 흑영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우찬이 몸을 돌렸다. 끔찍한 광경 앞에 할 말을 잃었다는 차란의 눈이 우찬과 마주했다. 흑영은 떨어진 자기 검을 주워 검집에 넣은 뒤 우찬을 따랐다.

우 미인이 물에 적신 천을 내밀었다. 대충 얼굴을 닦은 뒤 주변을 봤다. 제각각 다른 자세로 쓰러진 시체가 아홉 구. 그중 몇몇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젖은 천을 받아 드는 우 미인이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키며 우찬의 안색을 살폈다.

“괜, 찮으십니까, 폐하?”

우찬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옆으로 돌렸다.

“흑영.”

“예.”

“금위대장을 도와 군을 재정비해라. 준비를 마치는 대로 연이설을 데리러 가겠다.”

“송구하오나 폐하께서는 이번,”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준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는 흑영의 어깨를 밀치고 끼어든 차란이 재빨리 대답했다. 먼저 막사를 떠나는 우찬 뒤로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며 투닥거렸다. 그리고는 끝내 흑영이 한숨과 함께 자리를 먼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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