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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32)화 (232/300)

달의 황홀경

232화

8장. 이름

겨울의 초입. 바람이 제법 서늘해졌다. 슬쩍 뒤를 돌아 열린 창문을 바라보자 윤 내관이 조용히 몸을 움직여 문을 닫았다. 날이 무척 차가워졌습니다, 하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을 만도 했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아예 없는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굴어서 사실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낮부터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으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얼핏 밖을 보니 해가 아직 다 지지는 않았다.

지금쯤이면 저녁상이 올랐을 시간이다.

“태금궁은 아직 식전인가?”

“지금쯤 상을 올렸을 것입니다. 식사를 다 마치셨는지 사람을 보내 알아볼까요?”

제대로 된 질문도 아니었는데 용케 알아들은 윤 내관이 차분히 대답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됐다고 고개 저었다. 이설이 아무리 고집이 세도 그렇게까지 으름장을 놓았는데 제 말을 무시할 배짱은 없다.

보이지는 않아도 사방에서 호위군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도 알 테고 태금궁 궁인 중 제 편 되어 줄 사람이 없다는 것도 눈치챘을 것이다. 상궁이 지켜보는 앞에서 꾸역꾸역이라도 쌀죽을 먹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낮에는 태의가 다녀갔다더냐?”

“예 이른 아침에 한 번, 점심 식후에 한 번 다녀갔다 합니다.”

“상태는.”

“어제보다 훨씬 호전되었다고 합니다. 어깨 상처도 잘 아물고 있고요.”

“자기 전에 한 번 더 확인 후에 내게 들렀다 가라 전해.”

“어디로 들르라 이를까요?”

너무 속내가 훤히 드러나지 않도록 윤 내관이 천연스럽게 물었다. 그 말인즉슨 오늘 밤 우찬이 어디서 밤을 보낼 건지 돌려 묻는 것과 같았다.

우찬은 깊게 고민할 것도 없이 단답했다.

“여기로.”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윤 내관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재빨리 감췄다.

그제 이설이 혼절한 뒤 하룻밤을 꼬박 새워 옆에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는 걸 확인한 후 태금궁을 나와 하루가 넘게 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제와 같이 오늘도 정전에서 정사를 살펴보다 밤을 새울 생각이었는데 윤 내관은 이게 걱정인 듯했다.

어차피 할 일은 많았고 궁으로 돌아가 봐야 이설이 자신을 반기지도 않을 것이다. 보자마자 또 혼절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읽고 있던 상소문의 모서리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이틀 전 이설과의 일이 떠오르자 기분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아직 팔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셨습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오늘 하루 정도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태금궁으로 돌아가 편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회국 사신들도 만나 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깨까지 부들거리며 주먹을 떠는 우찬에게 윤 내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우찬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상소문을 옆으로 확 밀쳐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쓴 긴 두루마리가 데굴데굴 굴러 정전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그게 어떤 의미의 대답인 줄 눈치챈 윤 내관은 더는 우찬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바닥에 나뒹구는 상소문을 조용히 챙겼다.

“승상은 어딨지?”

“아침부터 대전에서 삼공, 구경과 함께 편국 동남 영토 분할에 대해 논의 중입니다.”

“상직도 함께 있나?”

“상직은 국가 대사 결정에 수를 둘 수 없다는 폐하의 명을 받들어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입궁은 하셨으니 아마 소봉궁에서 태자 전하와 함께 있을 듯싶습니다.”

“두 사람 다 지금 당장 불러와라.”

“예. 속히 모셔오겠습니다.”

윤 내관이 종종걸음으로 정전을 나갔다. 스르륵 닫히는 양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찬이 느닷없이 벼루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모난 곳 하나 없는 평온한 표정으로 매끈한 바닥에 움푹 파인 흠집을 만들었다.

곱씹을수록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설이 자신에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너무 괘씸하고 발칙해서 화가 나다 못해 이따금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일관성 없는 이설의 행동에 속절없이 애만 태우는 자신이 한심하다 못해 혐오스러웠다.

며칠 전 이설을 구하러 갔던 날 밤. 금군 군영에서 멀리 떨어진 협곡 아래에서 촌락으로 이루어진 이민족 잔당의 본거지를 찾아냈다. 금군을 맞닥뜨리자 도망치기 급급했던 이민족들이 기어코 불을 지르려고 애쓰던 오래된 집이 이상할 정도로 눈에 띄었다.

지붕에 이미 불이 번져 금군이 불을 끄는 사이 우찬이 기다리지 못하고 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우찬이 들어가자마자 서까래가 부서져 입구를 막는 바람에 뒤따라 들어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허름한 집 안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를 발견한 우찬이 망설임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밖에서는 지푸라기가 불에 타는 연기 냄새가 심했는데 계단을 내려갈수록 지독한 향냄새가 코를 찔렀다.

음습한 지하 감옥은 어둡고 바닥이 축축했다. 조심스레 ‘이설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향냄새가 진해졌다. 벽 한쪽에 걸린 등불을 따라 걸으며 감옥 끝에 이르는 순간 우찬은 들고 있던 검을 손에서 놓쳤다.

‘연이설!’

소리가 샐 곳 없는 밀폐된 지하 감옥에서 우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쇠창살 너머 이설이 머리 위로 벽에 손목을 결박당한 채 앉아 있었다. 희미한 등불에 모습이 흐릿할 뿐 예의 그 반짝거리는 빛도 없었다.

축 늘어진 몸은 묶인 손목만 아니었으면 언제든 옆으로 쓰러졌을 것 같고 앞으로 꺾인 목 때문에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얼굴도 확인이 되지 않았다. 검게 때가 묻는 은회색 머리카락도 빛을 잃어 얼핏 흘려 보면 이설인지도 긴가민가할 모습이었다. 그래도 우찬은 한눈에 이설을 알아봤다.

‘연이설! 정신 차려, 설아!’

쇠창살을 쥐고 흔들며 아무리 소리쳐도 이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었다. 심장이 발아래로 철렁 내려앉았다는 말은 그저 뭇 사람들의 시시한 과장인 줄로만 알았는데 직접 겪어 보는 기분은 그보다 더 처참했다. 호흡이 거칠어지며 숨을 쉬어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쇠창살 옆에 벽면을 더듬어 걸려있던 열쇠를 찾았다. 걸쇠를 풀은 뒤 창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젖은 볏짚이 가죽신을 적셨다. 우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가 무릎을 꿇고 이설을 품에 안았다. 기억했던 것보다 훨씬 마르고 앙상한 몸은 지나칠 정도로 살집이 하나도 없었다. 생명이 없는 커다란 목각 인형을 안은 기분이었다.

‘설아, 설아 눈 좀 떠 보거라. 설아, 연이설.’

팔을 감아 이설의 목 뒤를 손으로 받쳐 고개를 젖혔다. 목뼈가 아예 없는 사람처럼 흐물흐물하게 움직이는 고개를 따라 머리카락이 움직였다.

끌어안은 몸에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느껴졌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는지 가슴팍이 약하게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하지만 안도는커녕 가까이선 본 이설의 처참한 몰골에 목이 멘 우찬은 하염없이 이설의 이름만 부르며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때 탄 얼굴 위를 쓰다듬었다. 한쪽은 홀쭉하게 볼이 파인 데 반해 다른 한쪽은 뺨이 울긋불긋하게 부어올랐다.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게 맞았다고밖에 생각이 안 드는 얼굴이었다. 참을 길 없는 분노로 어금니를 꽉 물었다.

‘설아 눈 뜨거라 어서. 설아 제발…….’

부르튼 입술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며 속삭이자 품에 안은 몸이 바르작거리며 어깨를 떨었다. 곧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반쯤 감긴 눈을 떴다. 풀린 동공이 어디를 쳐다보고 있는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 차리거라, 설아.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느냐?’

‘……울……, 무, 울…….’

메마른 소리로 애원하는 이설에게 허리춤에 가지고 있던 수통을 입에 대 주었다. 하지만 입술 벌릴 힘도 없어 물이 입술 옆으로 다 새어 흘러내렸다. 하는 수 없이 우찬이 제 입에 물을 가득 채운 뒤 이설에게 입을 맞춰 조금씩 흘려보내 주었다. 꼴깍꼴깍 잘 받아마시던 이설은 그마저도 힘에 부치는지 곧 마른기침을 하며 힘들어했다.

물을 마신 뒤에도 이설은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맞추지 못하고 아래로 내리깔았다. 마비와 환각을 일으키는 향냄새가 너무 진한 탓에 감각조차도 아예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우찬이 주위를 살펴 한쪽 구석에 피워 놓은 여러 개의 향초를 밟아 끈 뒤 서둘러 이설을 다시 품에 안았다. 우선 이설의 손목을 묶은 벽에 사슬을 푸는 게 급선무였다.

때마침 다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열쇠! 열쇠부터 찾아와!’

횃불을 환히 밝히며 들어오는 금군을 쳐다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금군은 이설이 벽에 결박당해 있는 걸 확인한 뒤 급히 주변을 뒤졌다.

‘이제 다 괜찮아. 궁으로 돌아가자. 제발 나와 함께 궁으로…….’

이설을 만나게 되면 크게 비웃어 줄 요량이었다. 나를 피해 도망친 곳이 고작 이런 곳이었는지, 이게 바로 네가 원하는 결말이었는지 물으려고 했다. 더 이상 고집 따위 피우지 못하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이설로 하여금 결국 제 발로 자신을 따라오게 하고 싶었다. 황궁 밖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설의 무능력을 비웃는 동시에 오직 자신만이 이설을 지켜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려고 했다. 비열한 방법일지라도 이런 식으로 이설에게 느꼈던 절망과 비참한 기분을 되갚아 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설을 마주한 순간 그런 마음일랑 눈 녹듯 완전히 사라졌다. 며칠 전 밤 자신에게 모질고 매정했던 이설은 그 순간 모두 잊었다. 이설의 가느다란 숨이 목 언저리에 닿을 때마다 그저 이 숨이 끊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했다.

생에 처음으로 신에게 빌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이설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아래로 무겁게 기우는 몸을 받쳐 든 우찬이 열쇠를 찾는 금군을 기다리지 못하고 호위군을 불러 칼등으로 벽에 붙은 쇠사슬을 내리치려고 할 때였다.

‘……흐아, 는 하아……, 폐흐…….’

숨 섞인 힘겨운 말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말을 하는 것도 기운이 무척 달리는지 숨을 크게 들이마실 때마다 몸이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가 덜덜 떨렸다.

‘쉬이……, 괜찮다. 아프지 않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등을 토닥인 뒤 입을 맞춰 물을 한 모금 더 마실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시 꼴깍꼴깍 잘 받아 넘긴 이설이 긴 한숨과 함께 턱을 우찬의 어깨에 기댔다.

‘폐,하는…….’

아직도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한 호흡으로 이설이 다시 중얼거렸다. 그래도 물을 마신 덕에 쩍쩍 갈라진 목소리는 많이 나아졌다.

‘……무사아, 하십……, 하십니이까…….’

‘설아, 내가 우찬이다.’

‘많이 다치, 지 ……않으셨,어야……, 폐하아를 지켜, 드려어야……,’

미처 맺지 못한 문장을 끝으로 이설은 우찬의 품에서 다시 눈을 감았다. 동시에 호위군이 내리친 칼등에 벽에 붙은 쇠사슬이 한 번에 끊어졌다. 벽에서 풀려난 팔이 아래로 뚝 떨어지며 몸 전체가 우찬을 향해 풀썩 기울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몸을 무릎 꿇고 받쳐 안으며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정전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우찬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을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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