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38화
“자.”
퉁명스레 건네는 종이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잽싸게 낚아채 갈 줄 알았는데 멀뚱히 서서 내려다보기만 한다. 빨리 가져가라고 손을 한 번 더 밀어 봐도 도통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표정이 좀 넋이 나간 것 같다.
“안 받고 뭐 해?”
“…….”
“가져가라니까?”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자 그제야 휙 낚아채 갔다. 서 있던 자리에서 펼쳐 내용을 한 번 더 읽어 본 뒤 가지고 있던 서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인사 없이 돌아서려고 하다가 이설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말을 더했다.
“태자 전하께 소의 마마는 잘 계신다고 안부 전해 드려.”
말을 그렇게 전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약간 찜찜함이 느껴지긴 했다. 누가 봤더라도 태금궁의 이설을 보고 잘 지낸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행색이었다.
원체 사람이 활기 넘치고 쾌활한 성정은 아니었던 걸 감안하더라도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침체되어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겪은 고생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앙상해진 팔다리만 봐도 십분 이해가 됐다. 깜빡거리는 눈꺼풀에까지 매 순간의 고단함이 쌓여 있었다.
그렇다고 환궁하여 제대로 쉬고 있는 것도 아니니 그 처참한 마음을 이해나 다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꼼짝없이 갇혀 지내는 신세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화를 이어 나가는 시간이 숨이 막혔다.
착잡한 표정을 숨기고 뒤를 돌아서는 그때 예의 날카로운 말투가 발목을 붙잡았다.
“진짜 잘 지내시는 거 맞아?”
일부러 시비를 걸려고 하는 게 아니고서야 이 시점에서 물을 수가 없는 말이었다.
무시하고 돌아서 가려는데 옷소매를 휙 잡아챘다. 한숨 한 번에 허공에 시선을 올리고 땅을 봤다가 몸을 다시 돌렸다.
“아니면 뭐 어쩔 건데. 전하께 곧이곧대로 말씀드릴 거야?”
“…….”
“마마께서 다리를 다치셨다는 말은 모두 거짓이고 사실은 황명으로 태금궁에 유폐되어 침소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실 수 없다, 그리 말씀드리려고?”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소운이 옷소매를 당겨 담벼락으로 잡아끌었다. 어차피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조차 얼씬도 하지 않았다.
적당히 대답해 주고 무시했으면 됐을 것을 괜히 짜증스럽게 대꾸를 하고서야 약간 후회가 됐지만,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가뜩이나 태금궁에 오래 머물렀다고 황제에게 한 소리 들을 참인데 큰일이다.
“전하께서 물으시는 게 아니라 내가 묻는 거야.”
소운이 슬그머니 소매를 쥔 주먹을 놓았다.
“마마께서 잘 지내시는 게 맞아?”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상황이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그게 얼마나 나쁜지를 묻는 것이었다.
차란은 잠깐 뜸을 들이고 생각했다. 어떻게 전해도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이설의 처지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입술만 떼었다 붙였다를 반복하는 차란을 보고 소운도 대강 짐작하는 모양인지 이마를 쓸었다.
“계속 태금궁에 마마를 모실 수는 없어.”
“폐하께서 결정하실 문제야. 너나 내가 나서는 건 주제넘은 짓이고.”
“네가 폐하께 말씀드려야 해.”
“무슨 말씀.”
일부러 딱딱하게 단답으로 대꾸하자 소운이 비난 어린 시선으로 봤다.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다 알면서 왜 자꾸 딴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따지는 얼굴이다. 하도 들어 귀에 말뚝이 박혔다.
“폐하의 연심은 틀린 것이라고.”
세상만사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이치를 구분하기가 대쪽 같은 줄은 알았지만, 폐하의 연심마저 제 기준에 맞춰 따질 줄은 몰랐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황제에게 할 말을 서슴지 않는 차란이었지만, 직접적으로 황제의 연심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그것을 틀렸다 재단한 적도 없었다. 황제가 설령 제게만은 자비로운 성군일지라도 그것만은 제 기준에 지나치게 주제넘은 직언이었다.
“연모하는 이를 강제로 가두고 가까운 사람들의 목숨을 볼모로 잡아 겁을 주는 건 절대,”
“목소리 낮춰.”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 소운의 말을 중간에 끊어 냈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고 소리가 좀 컸다 한들 주변에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쓸데없는 말로 폐하의 심중 어지럽게 할 생각 없어.”
“네 자리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 폐하께서 길을 잘못 들이셨을 때 옳은 방향으로 불을 밝혀야 하는 게 네 책무잖아.”
“그래서 지금 그렇게 하고 있잖아.”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 소운의 그림자를 밟았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본 소운은 키가 좀 큰 것 같았다. 전에는 이설보다 좀 크되 확연한 차이는 아닌 느낌이었는데 이제 보니 이설보다 반 뼘은 더 클 것 같은 차이였다. 소운이 조금 컸든가 이설이 조금 작아졌든가 어느 쪽으로나 가능성은 있었다.
소운이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노려봤다. 늘 느끼는 거지만 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에 얼마만큼 확신을 해야 이렇게 흔들림 없는 눈을 가질 수 있을까 놀라웠다. 살아온 행적을 되짚었을 때 과연 후회라는 걸 해 본 적이 있을까? 아마 없을 거다.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마땅한 이유가 있는 사내니까.
“천자는 사소한 감정 따위에 휘둘려 크고 작은 중요한 일들을 하찮게 여기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 그리고 폐하께서는 그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셨고.”
“어떻게 그딴 게,”
“난 나의 주군이 후대에 결점 없는 완벽한 성군으로 기록되시기 위해 애쓰고 있어. 내가 비추는 방향은 폐하께서 성군이 되시는 길이야.”
“…….”
“폐하의 연심이 옳든 틀리든 난 상관없어. 성군이 되시기만 한다면.”
말이 끝난 순간 퍽 하는 소리가 먼저 났는지 고개가 먼저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고개는 돌아가 있었고 왼쪽 턱에 얼얼한 통증이 퍼지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전처럼 손바닥으로 뺨을 맞을 줄 알았는데 주먹질을 당할 줄은 몰랐다. 알았다고 해서 막았을 건 아닌데 그래도 불시에 가격을 당하니 아프긴 제법 아팠다.
“성군?”
짓이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가 화가 나다 못해 덜덜 떨렸다. 아래턱을 좌우로 움직이며 뼈를 맞추는 차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소운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직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지 않은 걸 보니 나름대로 화를 참고 있는 중인 듯했다.
“죄 없는 궁인들을 궁에 가둔 것도 모자라 참수한 머리를 대문 앞에 걸어 두는 폐하를 후대가 성군이라 기록할 거라고 생각해?”
“참수라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소운의 손을 잡아 떼어 낸 뒤 알아듣게 설명하라고 재촉했다. 소운이 손등으로 입술을 짓이기며 잠깐 뜸을 들이는 사이 조금 전 이설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이설이 도망쳤던 이유를 말하지 않고 하루를 버틸 때마다 궁인들의 목을 치겠다고 으름장을 놨던 황제.
“비은궁 대문 앞에 참수된 머리 하나가 걸려 있어.”
억지로 쥐어 짜내는 소리로 소운이 대답했다.
“이유는 아무도 몰라. 폐하만이 아시겠지. 하지만 내가 짐작하기로는 분명 마마께서 관련된 일일 거야. 마마를 설득하든, 회유하든, 겁을 주든.”
“폐하께서 왜, 어째서.”
“무고한 궁인이었어. 폐하께서 아무 죄 없는 궁인을 죽여 그 머리를 걸어 놓으셨는데, 그래도 넌 네 책무를 다하고 있다 말할 수 있어?”
“……이유가, 마땅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가 폐하의 연심이고 그래서 틀렸다는 거야.”
머리가 하얗게 비워진다는 건 이런 기분을 말하는 것이었다. 소운의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머릿속이 백지가 되며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아까 전 태금궁을 나올 때 이설이 했던 말들을 곱씹어 봤었다. 그중 한 가지, 황제가 궁인들을 죽이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는 말을 상기했을 때 차란은 허무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제가 이설을 겁주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황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황제는 참수를 선처라고 생각했다. 극형에 처할 만큼 중죄를 지은 죄인은 노역을 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황제가 누군가를 죽이라고 직접 명을 내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죽이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운의 말이 맞다. 황제가 비은궁 궁인을 죽였다면 그건 궁인에게 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이설의 숨통을 조이려는 목적 그뿐이다.
“마마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절대 폐하를 용서하시지 않을 거야.”
“어차피 태금궁 침소 밖으로는 나오실 수 없는 분이야. 귀에 들어갈 일도 없어.”
사실 황제가 궁인을 죽인 이상 이설에게 사실을 알려 입을 열게 만들겠지만.
“대문 앞에 보란 듯이 머리를 걸어 두셨어. 그게 궁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 같아?”
이 또한 소운의 말이 맞는다. 일부러 머리만 남겨 궁에 걸어 둘 필요가 없었다. 황궁의 궁인이나 대소신료 누가 보더라도 하등 상관없는 광경이었다.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끔찍한 모습을 만들었다면 그건 필시 이설을 겨냥한 것이었다.
황제의 방법은 지나치게 잔혹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설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보다 탁월한 방법이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매사에 냉철하고 가장 간결한 결정을 내리는 황제에게 늘 감탄했지만 이번만큼은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이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간 궁 밖에서 겪었던 고초보다 더 참기 힘든 비통함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가뜩이나 지금도 숨을 쉬는 채로 죽어 가고 있는데 이 이상은 생각지도 못하겠다.
“궁인 한 명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소운은 이 일을 더 넓게 보고 있다. 황제가 고작 한 명의 궁인으로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폐하를 말려야 해.”
“나보다는 네 말을 더 귀담아들으실 텐데.”
“해 봤어.”
소운이 고개를 젓는 동시에 말했다. 화가 좀 가라앉았는지 목소리가 아까보다 많이 차분해져 있었다. 생각해 보니 처음 만났을 때 눈빛이 공허해 정신이 좀 나간 것 같더라니. 비은궁 앞에서 그 꼴을 보고 왔었기 때문인가 싶다.
“근데 내 말은 듣지 않으셔. 내 연심은 이미 너무 많이 잘못됐으니까.”
황제가 소운에게 저렇게 말했을 리 없다. 소운의 자기 연민이 만들어 낸 생각이다. 다만 그 마음을 직접 듣는 제 속도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정말이지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인사 없이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소운도 붙잡지 않았다. 발소리가 하나밖에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소운은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모양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제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소봉궁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만 생각이 앞다투어 들었지만 할 일을 먼저 해야 했다. 당장은 황제를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