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41화
때 이른 시간에 나타난 우찬을 보고 태금궁 궁인들이 놀라 곁눈질로 얼굴을 살폈다. 좋은 기분을 기대하지는 않았던 터라 다들 찍소리도 내지 않고 눈치를 봤다.
“승상께서 다녀가신 후 곧바로 오수에 드셨습니다.”
침소 문 앞에 서자 이설의 감시를 맡겨 놓은 상궁이 조용히 아뢰었다.
“수면향은 그만 피우라 한 것 같은데.”
“향초 때문에 잠이 드신 건 아닙니다. 태의가 말하기를, 몸이 기운을 회복하느라 잠이 많아지신 거니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으시다 합니다.”
“다리를 잘라야 하는 것보다야 차라리 자고 있는 게 낫지.”
가까이서 하는 말을 들은 상궁이 몸을 움찔 떨었다. 고개 숙인 채로 눈을 위로 빗겨 뜨며 윤 내관가 눈을 마주치자 윤 내관이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좌우로 잘게 털었다.
큰 소리가 나든 말든 문을 옆으로 거칠게 밀어젖힌 우찬이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미 활짝 열린 중문들을 지나 침상 앞에 서자 위로 야트막하게 올라선 포단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안에서 잠든 이가 숨도 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찬이 불길한 긴장감을 누르며 조심스레 포단을 잡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앙상한 몸과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만 보자면 살아 있다는 게 믿기 어려운 사람이 몸을 웅크리고 모로 돌아 누워 있었다. 희미한 호흡을 따라 몸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내려왔다.
“안 자는 거 알아.”
“…….”
“네가 잔다고 그냥 돌아갈 생각도 없고.”
“…….”
“억지로 깨우는 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수도 있고.”
옹송그린 어깨에 손이 닿으려던 찰나 등을 보이고 누운 몸이 천천히 돌아섰다. 한쪽 손으로만 아래를 짚고 몸을 일으켜 세운 이설이 건조한 시선으로 멀거니 아래를 봤다.
“오셨습니까.”
대놓고 반기지 않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반색을 하는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갑자기 찾아와 놀란 기색도 없었다. 여기 있는 동안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동요할 게 없다는 듯 해탈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정말 잠이 들었다 일어나긴 한 모양인지 목소리가 먹먹하게 잠겨 있었다.
“팔자가 늘어졌군.”
“폐하 덕분입니다.”
생기가 없다 못해 삶의 의욕조차 없어 보이는 이설이 전보다 더 낯설게 느껴지는 건 저 말본새가 한몫 톡톡히 하고 있었다. 일부러 제 신경을 긁기 위해 그러는 게 틀림없는 거슬리는 말투가 마치 손톱 날을 바짝 세워 귀를 할퀴는 것 같았다.
마른기침을 하는 이설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이설은 이내 잔을 받아 목을 축였다. 물에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은 할 말이 없는 듯 일자로 딱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란이 찾아왔었다고?”
허리를 살짝 숙여 이설이 두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는 잔을 뺏었다. 이설은 우찬이 제게 몸을 숙이자 어깨를 움츠려 최대한 우찬과 닿지 않게 몸을 피했다. 순간 멈칫한 우찬이 느릿하게 무거운 눈꺼풀을 떴다 감으며 시선을 옆으로 빗겼다.
“폐하께서 보내신 것 다 알고 있으니 모르셨던 것처럼 물어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아냥거리는 건 물론 대담하기까지 한 이설이 기특하다 여길 법도 한데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이설이 번들거리는 입술의 물기를 닦으려 옷소매로 입술을 비볐다.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부어오른 입술이 유달리 피를 머금고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우찬은 무의식중에 자기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길게 닦았다.
“내 처소에서 필요한 게 있다 하여 출입을 허락해 줬을 뿐, 너를 만나고 오라 시킨 것은 아니었다.”
“폐하께서 궁금히 여기신 것을 승상께 대신 물어보라 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우찬이 실소하며 잔을 협탁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뒤돌아선 채로 말했다.
“난 그런 것을 묻고 오라 시킨 적 없다.”
“…….”
“네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그걸 알아 오라 시켰었지.”
다시 몸을 돌려 이설과 눈이 마주한 우찬이 한쪽 입꼬리를 비죽 당겨 올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동선을 따라 이설이 시선을 함께 움직였다. 우찬이 침상 끝에 걸터앉자 이설은 불안한 눈빛을 오갈 데 없이 흔들며 포단 아래 다리를 접어 옆으로 치웠다. 쓸데없이 왜 이렇게 포단 안에서 꼼지락거리는지 우찬이 한쪽 눈썹을 들었다 올렸다.
“귀비의 소식이 그리 궁금하더냐?”
“어차피 제가 정말 궁금해하는 것을 묻는다 한들 승상은 사실대로 답해 주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예를 들자면.”
이설이 잠시 뜸을 들이며 포단의 겉 비단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짓거리로 오래 망설인 끝에 물었다.
“연국의 왕이, ……아바마마께서 무사하신지 여쭤본다면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거짓으로 답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폐하라면 그러시겠습니다만, 승상이라면 여기 갇힌 저를 불쌍히 여겨 설사 아바마마께서 서거하셨다 한들 사실대로 알려 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승상의 대답은 제게 쓸모가 없습니다.”
은연중에 내비치는 신뢰가 적잖은 불쾌함으로 다가왔다. 차란은 제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무한한 믿음이, 스스로를 이곳에 갇힌 불쌍한 처지라고 받아들이는 수긍이 여간 기분이 나쁜 게 아니다.
“네가 연국에서 사라진 후 네 아비는 병세가 날로 위독해졌다더군.”
여상한 어투로 말을 하며 우찬은 미세하게 흔들리는 이설의 눈빛을 보고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전혀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었음에도, 이설이 뭔가에 반응을 보인다는 것 자체에 의미가 생기는 듯했다.
“매일 하루를 무사히 넘기면 그게 기적이라고 하니, 얼마나 위중할지는 너도 짐작이 가겠지?”
“……저를 불안하게 하려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나는 그간 받았던 서찰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뿐이다.”
“굳이 제게 그 얘기를 꺼내시는 이유는 뭡니까?”
“나는 언제나 네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전하니까. 거짓 없이.”
이설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턱은 곧 차오를 눈물의 전조 증상이다. 아니나 다를까 눈 아래부터 차오르기 시작하는 눈물이 모여 금세 볼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환궁한 뒤로 걸핏하면 눈물부터 흘리는 이설은 지겨워질 틈도 없이 다시 예쁘고 서럽게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양옆으로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애처롭게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못내 어여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역시 궁 밖으로 놓아줄 수가 없다. 아무리 이설이 저를 원망 가득 담긴 시선으로 한없이 노려본다 한들 보낼 수 있었던 때를 너무 많이 지나쳐 버렸다.
“왜 우는 거지?”
얼굴로 손을 뻗자 이설이 숨을 짧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허공에 멈칫했던 손이 갸름한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돌렸다. 힘없이 돌아가는 고개가 옆으로 똑 부러져 아래로 굴러갈 것 같았다.
시선을 피할 줄 알았던 이설이 눈꼬리 끝에 눈물방울을 달고 우찬을 응시했다. 젖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우찬이 홀린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입술이 맞붙으려던 찰나 이설의 손이 가슴팍을 막아섰다.
“폐하가 원망스러워서요.”
슬쩍 얼굴을 뒤로 물리자 이설의 눈과 마주쳤다.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표정은 한없이 단호했다.
“궁에 돌아온 뒤로 매일이 하루같이 폐하가 원망스럽습니다.”
“…….”
“폐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표정 하나하나가, 전부,”
감정에 북받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울음을 꾸역꾸역 참으며 기어코 말을 잇는 입을 막아야 했다. 턱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세게 주자 고통을 참으려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간헐적으로 터지듯 이어지는 말을 더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턱을 당겨 제 앞으로 끌고 오며 반질거리는 입술에 그대로 입을 맞췄다.
환궁한 이설이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실행에 옮겨 본 적은 없었다. 정신을 잃은 이설에게 욕정을 느낀다는 것이 한심하기도 했고 깨어나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이설이 괘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말랑하게 감겨 오는 젖은 입술의 온도는 미지근했고 표면은 까칠했다. 어떻게 해서든 입술 틈새를 열지 않으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우찬이 턱을 비틀 듯 쥐어짜자 낮은 탄성과 함께 사이가 벌어졌다. 우찬이 기다렸다는 듯 작게 벌어진 틈으로 혀를 밀어 넣으며 이설의 몸을 뒤로 밀었다.
“으읏, ……싫, 하지 마십……,”
“입 닥쳐.”
뒤로 넘어간 몸을 압박하고 올라서서 어깨를 밀어 눌렀다. 잠시 자세를 바꾸며 잠시 입술을 뗀 사이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이설이 싫은 내색을 완강히 내비쳤다. 아랑곳하지 않고 아래 내의 사이로 손을 밀어 넣자 발버둥을 치며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애썼다. 무심결에 다친 어깨를 누르자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폐하, 소운입니다. 안에 계신 줄 알고 있사오나 급히 마마를 찾아뵐 일이 있,”
“잠시 기다려라!”
멀리서 다급하게 울리는 소운의 말을 끊으며 우찬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지 못하고 앞섬만 급히 붙잡은 이설이 넋이 나간 얼굴로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