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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48)화 (248/300)

달의 황홀경

248화

“하지만 그자는 이 사실을 몰라.”

우찬에게만은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어쩔 수 없이 털어놓는 듯 귀비가 아랫입술을 짓이겨 꾹꾹 깨물었다. 우찬은 일부러 다음 말을 재촉하지 않고 귀비가 먼저 말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난리 통에 내가 밀서들을 모아 황궁 밖으로 빼돌렸다고 거짓말을 했거든. 근데 별로 개의치는 않은 모양이야. 아마 자기 흔적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테니까. 실제로도 그랬고.”

“…….”

“근데 말이야.”

귀비가 키득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비열하게 웃음을 지었다.

“증좌의 신빙성 따위는 상관없지 않아? 있다는 게 확실하다면 그 내용까지 증명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우찬의 순간적인 속마음을 간파한 듯 귀비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산송장 주제에 머리가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지는 않았는지 생각이 제법 날카로웠다.

귀비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끝내 손조익의 죄를 들추어낼 증좌를 찾지 못한다고 하여 물러설 마음은 없었다. 증좌야 만들어도 그만인 것을, 굳이 이렇게 찾아 헤맬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우찬은 그저 일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고 싶었을 뿐이다.

설사 귀비가 밀서를 아직 가지고 있었다 해도 밀서와 손조익을 완벽하게 이어 붙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필체가 드러나지 않게 남의 손을 빌려 글을 썼을 것이고 종이며 붓과 먹까지 모두 저잣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한 것들을 사용했을 것이다. 직접 밀서를 써 보냈으니 그리 허술하지는 않았으리라.

“어차피 밀서의 내용이라고 해 봐야 별 증좌도 될 수 없을 테니까.”

밀서를 직접 받아 본 귀비조차 저렇게 말할 정도니 굳이 밀서를 필요로 할 일은 없다. 단지 손조익이 밀서의 존재가 황궁 밖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걸로 된 거다.

손조익은 황궁으로 돌아오는 중이지만 병세가 악화됐다는 이유로 거의 하루건너 하루마다 앓아누웠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각지에 흩어진 사병들을 모아 언제 역모에 가담했었냐는 듯 뒷방 늙은이 행세를 할 모양이지만 결국 수포가 될 일이었다.

제대로 된 전쟁도 치르기 전에 패전을 완전히 선언한 편국에서 본국에 남아 있던 손조익의 사병을 알뜰살뜰하게 모아 송환시키는 중이다. 사병이라 함은 본래 충심이 없는지라 설득과 회유, 그리고 모진 고신에는 있는 말 없는 말 모두 털어놓게 되어 있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이만 날 풀어 줘.”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우찬을 깨우고 귀비가 목이 쉰 소리로 소리쳤다. 씩씩거리는 귀비를 쳐다보던 우찬이 군말 없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위로 치켜든 검을 보고 놀란 귀비가 잠깐만, 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이 팔의 궤적을 따라 검이 반원을 그리며 침상에 내리쳐졌다.

높은 음의 찢어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벌컥 열리는 문 너머로 차란이 금군 여럿이 다시 한번 뛰어 들어왔다.

“폐하!”

동시 다발적으로 외치는 사내들의 음성이 귀비의 비명에 가려질 정도였다. 끝없이 길게 이어지던 귀비의 비명이 잦아들 때쯤 우찬이 검을 검집으로 밀어 넣었다. 두 물체가 맞닿으며 나는 날카로운 소리가 차라리 귀비의 비명보다는 듣기 좋았다.

우찬이 끊어 준 밧줄 덕에 손이 자유로워진 귀비는 곧 비명을 멈춘 뒤 숨을 헐떡이며 몸을 동그랗게 말아 모로 누웠다. 순식간에 백지장이 된 하얀 얼굴을 보니 방금 막 죽은 시체를 보는 듯했다.

“죽여 달라 소리칠 땐 언제고, 막상 죽으려니 그건 아니다 싶은가?”

대범하고 강인한 여인인가 싶다가도 결국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해지는 것을 보면 인간이란 다 어쩔 수 없는가 싶다.

그래서 이설이 감추는 비밀이 더 궁금했다. 대체 무슨 비밀을 숨기고 있기에 한없이 나약한 이설이 바닥조차 안 보이던 검은 절벽으로 몸을 던질 생각을 한 건지. 그 밑도 끝도 없는 객기의 근원이 무엇이지.

숨을 헐떡이는 귀비가 몸을 웅크리며 우찬을 노려봤다.

“짐승만도 못한 네가 하늘이 내려 준 천자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네 이년! 황제 폐하께 말조심하지 못할까!”

한 발자국 귀비 앞으로 다가선 차란이 호통을 쳤다. 우찬은 별스럽지 않게 듣고는 한 귀로 흘려 버리고 말 뿐이었다.

당장에 목이 베어 죽을까 봐 놀라 까무러칠 뻔했던 귀비는 아직 기운이 남았는지 차란에게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명심해라. 내가 죽어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되거든 반드시 너를……, 아니 너와 네 정인 연이설을 찾아 나와 내 형제들이 겪은 이 치욕과 수모를 전부, 윽!”

차란이 둘 중 누군가를 먼저 말리기도 전에 우찬이 귀비의 얼굴을 우왁스럽게 잡아 억지로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무시하고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광대가 으스러지기 직전 젖은 천을 입안으로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목구멍까지 막아 버릴 기세에 귀비가 숨쉬기 괴로워 발버둥을 쳤다.

“죽음이 간절한 네가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뭔지 나는 알고 있어.”

입을 완전히 틀어막은 우찬이 억지로 귀비의 턱을 밀어 올려 입을 닫고 힘으로 내리눌렀다. 기도가 거의 막혀 숨쉬기가 어려워진 귀비가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우찬에게 돌렸다. 우찬이 허리를 숙여 귀비 가까이 얼굴을 갖다 댔다.

“다시 한번 그 더러운 입에 연이설을 담으면 차라리 불에 타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어 줄 테니 입조심해.”

천천히 허리를 펴고 일어나 귀비를 내려다보자 당장 혼절이라도 할 사람처럼 눈을 까뒤집고 몸을 덜덜 떨었다. 우찬이 뒤로 물러나자 차란이 재빨리 귀비의 입을 억지로 벌려 안에 쑤셔 넣은 수파를 당겨 꺼냈다. 그리고는 코 아래에 손을 대 본 뒤 안도하며 뒤돌아섰다.

“아직 숨은 붙어 있습니다.”

“이 정도로 죽을 것 같았으면 진작 죽었겠지.”

여상한 말투에 오히려 웃음기까지 섞인 듯한 목소리였다. 차란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귀비를 내려다봤다.

“이제 귀비는 죽어도 상관없는 겁니까?”

“별로 아쉽지는 않아졌다.”

“뭔가 알아내신 겁니까?”

“그런대로. ……자결을 시도하지는 않겠지만 감시는 철저히 하도록. 팔다리는 다시 묶어도 좋다.”

알겠다며 새 밧줄을 준비하는 금군을 두고 밖으로 나섰다. 뒤를 쫓아오는 착잡한 얼굴의 차란이 소리 없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만 입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려 모른 척하기도 힘들었다.

“손조익이 황궁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지?”

“마지막으로 연통을 받은 곳이 향주성이었으니 부지런히 움직이면 사흘 안에도 가능합니다만 병환을 핑계로 미적거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 당장 향주성으로 사람을 보내. 목에 칼을 채워 끌고 와도 좋으니 시일 내로 손조익을 데려와.”

뒤를 쫓아 걷던 차란이 깜짝 놀라 걸음을 빨리해서 우찬 옆에 나란히 섰다. 놀라움과 심각함이 뒤섞인 이상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더는 질질 끌 필요도 없으니까.”

“것보다 신은 뒤탈이 걱정됩니다만……. 아무래도 선황 폐하와 황후 마마의 유지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 유지 때문에 손조익도 망하게 생겼군.”

“예?”

얼빠진 표정으로 되묻는 차란을 지나쳐 걸음을 재촉했다. 밖으로 나오니 땅거미가 질 때쯤 특유의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작년 이 무렵에는 사냥을 다니느라 바빴다. 올해는 계속 여유가 생기면 사냥을 가야겠다 마음만 먹었지, 사냥 대회 이후로는 사냥을 나간 기억이 거의 없다. 해가 넘어가기 전에 여유가 생길지 확신이 없었다.

“순순히 끌려올 것 같지 않으니 금군을 같이 보내는 게 좋겠어.”

“무력 대치도 불사하란 말씀이십니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전해.”

“폐하,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대체 어딜 이리 바삐 가는 길이십니까?!”

점점 걸음이 빨라지는 우찬과 발을 맞추느라 애쓰던 차란이 결국 한 발 앞서 길을 막아서며 물었다. 발을 멈칫 세워 눈을 치켜올리자 황급히 옆으로 한 발 물러섰다.

“급한 마음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선을 넘었다는 것은 아는지 차란이 고개를 조아리기에 그나마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는 얼굴을 보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향주성에 군을 보내 죄인 손조익을 압송하라. 거부할 경우 무력으로 대응해도 좋고 유사시 손조익에 해를 가하는 것도 허락하나 숨은 반드시 붙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태금궁에 가는 길이니 그만 쫓아오도록.”

조아린 고개가 일어나기도 전에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 황제의 뒤로, 차란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태금궁에 들어서는 우찬을 맞이하며 궁인 하나가 기별 없이 오실 줄 몰랐다며 헛소리를 했다. 태금궁은 자신의 궁인데 왜 기별을 하고 와야 하는지, 궁인의 말이 어처구니가 없어 슬쩍 쳐다보자 사색이 되어 이마를 바닥에 대고 사죄했다. 우찬 대신 윤 내관이 호통을 치며 궁인을 옆으로 치워 버리고 궁으로 들어갔다.

“태의와 함께 있나?”

“예. 탕약을 드신 후 경과를 지켜보는 중입니다.”

“몸 상태는?”

“낮에는 머리가 아프다 하시더니 지금은 많이 나아지셨다고 합니다. 다만 목간에서 잘못 넘어지셨는지 발목이 아프다고 하셔서 치료해 두었습니다. 걷는 게 좀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그 핑계로 식사는 건너뛰었겠군.”

“많이 남기시기는 했습니다.”

난감한 기색으로 대답하는 상궁이 침소 앞에서 멈춰 섰다. 기별할까요, 묻기도 전에 제 손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들이닥친 우찬을 보고 태의는 아까 무암궁에서 봤을 때보다 더 소스라치게 놀라며 붙잡고 있던 이설의 손을 던지듯 놓고 일어났다. 더듬더듬 인사를 한 뒤에도 앉지 못하고 서성이다 우찬이 고개를 한 번 까딱거리자 슬슬 눈치를 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태의가 부산스럽게 구는 와중에도 이설은 침상 머리맡 벽에 등을 대고 완만히 앉아 멀거니 우찬이 가까이 걸어 들어오는 걸 쳐다봤다. 귀비와 다를 바 없는 산송장 같은 모습이었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가슴 한편이 무겁게 짓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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