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50화
“그럼 지금이라도 그 짐승의 가죽을 벗겨 네 목에 두를 내피를 만들까.”
“…….”
“하얀 털이 너와도 제법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참고로 가죽은 산 채로 벗겨야 털이 상하지 않는 법이지.”
못마땅한 눈으로 응시하는 얼굴에 대고 우찬이 구태여 말을 덧붙여 기분을 긁어내렸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미 머릿속에 지어진 상상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설이 입을 꽉 닫아 이를 맞물렸다. 바르르 떠는 턱을 보니 감정을 억누르는 게 보였다.
기분 좋은 반응은 아니었지만 다 죽어 가는 시체처럼 구는 것보다야 훨씬 보기 나았다. 이게 뭐라고 웃음이 나는지 피식 웃었다가 이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다.
“즐거우십니까?”
“무엇이?”
“고작 그런 협박으로 제 마음을 후벼 파니 즐거우시냐 여쭸습니다.”
“뭐, 그런대로.”
“제가 괴로워하니까요?”
탕약을 바꿨다더니 약 기운에 없던 성미라도 튀어나왔는지 대드는 기세가 점점 사나워졌다. 아까는 다 죽어 가는 몰골로 앉아 흐리멍덩하더니 지금은 눈빛마저 맹렬했다. 하지만 기력은 쥐어짜 내도 어쩔 도리가 없는지 처진 어깨는 아직 그대로였다.
당돌하게 묻는 모양새가 암만 봐도 시비를 걸고 싶어 안달이 난 게 틀림없었다.
우찬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태의가 앉아 있던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시선과의 거리가 짧아졌지만 이설은 겁먹은 기세도 보이지 않았다.
“네가 괴로워해서 내가 즐겁냐고?”
좀 전보다 다소 느릿해진 목소리로 우찬이 물었다.
“예.”
밥숟가락 한 번 뜨면서도 눈치를 그렇게 살피던 경험이 있으니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이설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깨 한 번 움츠리지 않고 대답하는 태도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가.”
별 의미 없이 입가를 만지며 우찬은 바로 말을 잇는 것을 피했다. 서서히 굳어 들어가는 얼굴을 빤히 보면서도 이설은 입술을 악물었다.
“내가 지금 너를 괴롭게 하고 있는 거였나.”
우찬의 말 끝나기가 무섭게 이설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완연한 비웃음의 작태에 우찬도 조소로 응수했다.
“그런 줄은 몰랐군.”
“다시는 걷지 못하게 발을 잘라 버린다 하셨습니다. 입을 열지 않으면 제 부모형제와 궁인은 물론이고 연의 백성들까지 죽이겠다 협박하셨고요. 하물며 방금 전에는 제가 애지중지 키우는 짐승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이설이 따지듯 물어 왔다. 반대로 훨씬 초연해진 어투로 우찬이 차분히 대답했다.
“근데 네 두 발은 아직 멀쩡히도 붙어 있구나.”
우찬이 포단에 덮인 발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이설이 움찔거리며 발을 움직였다. 태의에게 아프다고 말했던 것이 괜한 엄살은 아니었는지 아까부터 발을 자꾸 피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움직이는 모양새가 영 시원치 않았다. 하기야 이설이 아픈 것을 안 아프다고 고집부렸으면 부렸지 꾀병을 부리는 성정은 아니었으니까.
“네가 지금 걷지 못하는 것은 너의 부주의로 다쳤기 때문이지 나는 네 몸에 손 하나 까딱 한 적 없다. 또한 너는 기어이 황명을 어기고 황제인 나를 피해 달아나며 후궁 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다시 거두어 죄는 묻지 않을 테니 까닭만이라도 알려 달라 하였고. 하여 네가 입을 열었느냐?”
이설에는 이번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도대체가 깨닫거나 뉘우친 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고집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하물며 네 손이 닿은 저 하찮은 짐승 새끼조차도.”
우찬은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굳이 목소리를 낮춰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갖은 협박으로도 입을 열지 않는 너는 내가 조금만 몰아붙이면 울고 다치고 쓰러지고 끝내 내가 네 눈 밖으로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기에 그리해 줬는데,”
우찬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침상 끝에 걸치며 올라왔다. 상체를 숙이고 이설이 머리를 기대고 있는 벽에 손을 짚자 이설의 머리맡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생겼다. 만면에 드러난 고집이 괜한 객기는 아닌 건지 이설은 마른침을 삼킬지언정 마주한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대체 나는 어떻게 널 괴롭게 한 걸까.”
“……손대지 마십시오.”
두 무릎으로 침상 위로 올라와 벽을 짚지 않은 한 손으로 이설의 얼굴을 감싸 잡으려고 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어차피 몸을 돌려 피할 것도 아니라 고개만 옆으로 돌린 게 전부였지만,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은 이설을 보니 목을 부러뜨려서라도 자신을 향해 고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괴로워?”
목부터 턱 아래까지 전부를 한 손에 쥐어 잡아 힘을 주자 낮게 신음을 흘리며 고개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진절머리라도 칠 것 같은 눈빛은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고통에 찬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오자 결국 손에 힘을 풀고야 말았다.
급격하게 힘이 빠진 목소리가 나직이 흘렀다.
“어차피 네가 아파하면 난 오래 버티지도 못하는데.”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아무리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막상 이설의 얼굴을 보면 생각한 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혼자 있는 시간,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다 분을 못 이겨 이설을 찾아왔던 것이 벌써 몇 번인가.
이번 기회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입을 열게 만들어야지. 비은궁 궁인들의 목을 모두 베어 가지고 가는 한이 있어도 이설이 도망친 이유를 알아내야지. 수십 번도 넘게 생각을 하며 태금궁 문턱을 넘었다.
하지만 이설은 한결같았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건 자신일 뿐, 이설은 한결같은 고집으로 시종일관 침묵을 택했다. 차라리 완전히 침묵했더라면 더 나았을까.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설은 고집을 부리고 차갑게 조소하고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래도 이까짓 반응이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아무리 독하고 차게 굴어도 천성은 바뀔 게 아니라 결국에는 울기 마련이었고 그 끝은 혼절밖에 없었다.
아직 이설이 제게 박았던 칼날의 수와 비교하자면 칼자루도 한번 제대로 쥐어 보지 못했다. 매사 배려가 넘치고 모두에게 너그러운 이설은 제게만은 이기적이고 박하다.
“고작 짐승 새끼 가죽을 벗긴다는 말에 가슴이 후벼 파이는 고통이라니.”
“제 손으로 살린 생명이니 귀한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이설이 앙칼진 소리로 목소리를 높이자 우찬이 꼭 그 대답이 나올 줄 알았던 듯 곧장 받아쳤다.
“그럼 내 손으로 거둔 너는.”
“…….”
“내 손으로 거둬 궁에 데려온 네가 내 눈앞에서 궁으로 돌아가느니 절벽에 몸을 던져 죽겠다고 말했을 때. 나의 괴로움은 헤아려 본 적 있느냐?”
이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말문이 막혔다기보다는 분위기상 할 말을 가리는 눈치였다. 눈동자를 피했다 다시 마주하며 입술을 뗐다가 끝내 다른 곳을 바라봤다.
“다시 지껄여 보지 왜.”
“무얼 말씀입니까.”
“내 연심은 착각이고 그로 인한 고통 또한 한낱 환상이라고.”
“저는 그리 말한 적 없습니다. ……허나 제가 그렇게 말씀드리면 폐하께서는 뭐라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런 말을 한 적 없다 딱 잘라 대답하긴 했지만, 속내를 들킨 건 어쩔 수 없는 듯 이설이 우회적으로 그 마음을 인정하며 물었다. 이설이 완전히 그 말을 부정하지 않자 그간 외면하던 사실을 확인받아 실망한 것처럼 기분이 급작스럽게 참담해졌다.
실망과 참담이라.
경험해 본 적 없이 그 존재만 알고 있던 감정이 또 깊은 수렁에서 점차 위로 솟아올랐다.
“글쎄.”
우찬이 몸에 힘을 빼고 상체를 완전히 숙여 이설의 오른쪽 어깨 위로 턱을 가볍게 얹었다.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입술이 자연스레 이설의 오른쪽 귓가에 닿았다. 경직된 몸이 느껴진다. 목을 돌려 피하지 못하도록 다시 턱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흘러내린 연한 잿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설아, 내 연심을 부정하지 말거라. 너를 아끼고 연모하는 나의 마음은 천자의 자리를 걸고 맹세하는 진심이다.”
목울대 아래에서 올라와 입술을 지난 목소리가 허공을 맴돌 사이도 없이 이설의 귓가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잠결에 나른하게 울리듯 숨이 가득한 목소리가 귀를 적셨다. 손에 붙들려 억지로 목이 고정되어 있는 이설이 몸을 바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닌데 버릇처럼 귓가에 젖은 입술로 가볍게 입을 맞추자 물기 어린 소리가 외설스럽게 울렸다. 당연한 수순처럼 말랑한 귓불을 살짝 물었다가 놓자 이설이 어깨를 움츠렸다. 원래 같았으면 이쯤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밤에는 늦었다는 핑계로, 아침에는 해가 밝다는 핑계로 부끄러워하며 눈을 비볐어야 했다.
“……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눈물로 읍소할까.”
괜한 기대감에 슬쩍 고개를 떼고 본 이설의 얼굴이 가관이었다. 질끈 감은 눈이었지만 눈꺼풀 아래를 덮었을 불쾌함이 불 보듯 뻔히 느껴졌다. 또 눈물을 참는 모양인지 가슴팍이 자꾸만 헐떡이고 울음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위아래로 요동쳤다.
실망과 참담 그리고 비참함까지.
다시 분을 못 이겨 턱을 쥔 손에 힘을 줬다가 신음에 반응하듯 힘을 풀었다.
“아니면 내 너를 연모한다는 말을 거두고 천명에 속아 마음이 홀렸던 것을 인정할까. 만인이 우러러보는 내가 너 따위 볼품없는 사내에게 연심을 가졌을 리가 없다고.”
어금니를 꽉 물었는지 이설의 턱 아래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울음 한번 요란하게 참는다며 싱거운 생각하는 것도 다 깊은 감정의 골로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설의 표정에 즉각 반응하는 감정은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대답해 봐. 넌 늘 내게 묻기만 할 뿐 정답을 알려 주지 않잖아.”
“…….”
“이번에는 어떻게 넘어갈까 고민 중인가. 울지, 다칠지, 아니면 스스로 숨이라도 멈출 참일지.”
이설이 울지 않기를 바랐다. 이번에는 눈물을 보인다고 하여 그냥 내려오기는 힘들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귓가에 얼굴을 묻고 맡았던 은근한 살 냄새가 온 몸 구석구석을 자극하고 손끝에 스치는 이설의 살결에 몸이 뜨거워졌다.
여기서 이설이 울기라도 했다가는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고 참는 걸로는 넘어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