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51화
“폐하께서야말로,”
가까스로 울음을 삼키고 이설은 말라붙은 입술을 열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대답을 넘어가셨습니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우찬 앞에 멈추고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방울 하나만 아래로 뚝 떨어졌다. 볼 위에 남아 있던 자국은 이설이 소매로 한 번 닦아 내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도 모르면서 저는 제가 믿고 싶은 대로만 믿었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아끼신다 착각하면서요. 착각인 줄 다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제가 너무 비참해서 매일을 그렇게 꾸역꾸역 참고 견뎠습니다.”
“난 너를 진심으로 아꼈다.”
부정당할 것을 알면서도 우찬은 뻣뻣하게 굳은 턱을 움직여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설이 옅은 한숨이 섞인 웃음을 뱉었다.
“그건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닙니까?”
왼쪽 손목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감겼다. 제 쪽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너무 약해서 버텨도 한참은 버텼겠지만, 우찬은 이설이 원하는 대로 손에 힘을 풀었다. 손을 뒤로 꺾어 손목을 드러나게 하자 은사로 박아 놓은 듯한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설의 눈앞에서 이름을 내놓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후회하는 일들 중 하나지만, 이름이 발현된 날부터 이설이 입궁한 뒤에도 꽤 오랫동안 손목에 끈을 묶어 이름을 가리고 다녔다. 차란에게 답하기로는 보기 흉하다는 말로 일축했지만, 그보다는 감정상의 문제였다.
간혹 눈에 빗겨 들어오는 이름을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속 발음으로 ‘연이설’이라고 세 글자를 뱉어 낼 때면 불편함은 배가 됐다. 계속해서 뭔가 마음에 걸리는 느낌. 이설이 입궁한 뒤로는 그게 더 심해졌다.
자기 이름을 가리고 다닌다는 사실에 이설이 내심 서운해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흘끗거리며 손목으로 시선이 자주 갔으니까.
그래서 끈을 푼 뒤 이설에게 몇 번 제 이름을 보고 싶으냐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괜찮다 말하는 사양이 처음에는 부끄러워 그러는 줄 알았지만, 어느 날 제 이름이 아니니 볼 필요가 없다 대답했다.
이설이 제법 마음에 들고 난 뒤에도 천명이나 정인 뭐 이런 것 따위에 연연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설의 말이 거북하지는 않았다. 너는 내 정인이 아니라고 했던 것은 자신이 먼저였다.
이설을 탓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됐다.
“그리고 하필 제 이름이 연이설이니까요.”
“대체 이게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계속 똑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냐.”
그날 밤 절벽 위에서부터 이설이 끈질기게 의심하고 묻고 매달리는 문제의 요지는 알고 있다. 대체 무슨 까닭으로 그런 오해를 한 것인지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다. 지겨운 반복에 벌써부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사실 이설이야말로 쓸모없는 일로 논점을 흐리고 있다. 제 손목에 누구의 이름이 있든 알 바가 아니고 상관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이설은 끝없는 억지로 우찬의 마음을 부정했다.
“폐하의 말씀대로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제 이름이 아니니까요.”
“네 이름이 연이설인 이상 네 것이 아닐 리가 없다.”
하루아침에 말이 바뀌었다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설이 부정하는 모든 것들을 가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지자면 지금이 옳았다. 이설의 이름이 연이설인 이상, 이 이름이 이설의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론 우찬에게는 이제 와 그게 대단히 중요한 일도 아니었지만.
“하늘 아래 저와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이 어디 저 하나뿐이겠습니까? 연국은 금국과 달라 왕족의 이름이라 한들 만민이 두루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 저를 찾아오셨던 날 폐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천지명관에 입적된 이름이 저 하나만이 아니었다고요.”
“갓 태어난 아이와 죽기 직전의 노파, 그리고 만삭이 된 여인과 다른 이의 이름을 가진 처녀까지 모두 네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 중 한 사람이 진짜 내 정인이다 이 말이냐?”
“아닐 이유도 없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뻔뻔하게 묻는 얼굴이 차라리 그러기를 바라는 듯했다. 연심은 천명에 휘둘리는 착각이라는 헛소리에 뒤이어 저 되도 않는 것들 중에 자신의 정인이 있을 수도 있다니 말문이 막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여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를 잊었다. 평생 들어 왔던 말 중에서 손에 꼽힐 만큼 앞뒤가 맞지 않은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이만 대화가 끊겼어도 화가 주체가 안 됐을 텐데 이설은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저들 중 어느 누구를 이 자리에 앉혀 놓으셨어도 똑같으셨을 겁니다.”
“똑같다니 무엇이?”
“…….”
“너를 은애하듯 네 자리에 앉은 누구라도 내가 은애했을 거라는 말이냐?”
이설은 우찬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은애한다는 말을 뱉을 때마다 눈에 띄게 움찔거리는 반응을 보였다.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게 아닌 것은 확실했다. 도리어 듣기 싫은 소리를 반복해 들으며 질겁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우찬은 이제 그 꼴만 봐도 치가 떨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설의 침묵은 긍정이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기 싸움이라도 하듯 서로를 말없이 노려봤다. 그리고 끝내 이설이 먼저 한풀 꺾인 기세로 숨을 내쉬며 우찬의 손목을 놓았다. 아래로 툭 떨궈지는 손목에 미약하게 남아 있는 열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폐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 절망에 덮인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만약 폐하의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연이설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여 만약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만일 그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폐하께서는 저를 또 버리시지 않겠습니까?”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물을 말한 것이 아니었다. 다시 얼굴을 들여다보니 무표정한 것은 태연한 게 아니라 모든 감정의 달관에 이르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우찬은 왜 이설이 이렇게까지 모든 것을 비약적으로만 해석하는지 답답함을 넘어 슬슬 참을성이 바닥을 쳤다.
“나는 너를 버린 적이 없어.”
“귀비가 입궁하였을 때 제게 거짓말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럼 네게 곧장 진실을 말했다면 너는 아무렇지 않았을 것 같으냐?”
“적어도 제가,”
재빨리 끼어든 이설이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우찬이 막아섰다.
“신이 났었겠지. 당장에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궁을 귀비 덕에 더 빨리 벗어날 수 있게 됐으니. 하루하루가 잔칫날 같았을 텐데 내가 그 꼴을 가만두고 봤어야 했는지, 그걸 물은 것이냐?”
“왜 제가 신이 났을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그때도 지금처럼 네가 나를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났었으니까.”
“…….”
“항상 나와 황궁을 떠나 연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높아진 언성에 반응하듯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결국 참아 왔던 분을 이기지 못하고 내리친 주먹이 침상 모서리에서 천장으로 올라간 긴 나무 기둥을 부쉈다. 우지끈 꺾여져 나간 나무 조각 끝이 뾰족하게 부러지며 손목부터 팔꿈치까지 긁어내렸다. 길게 이어진 붉은 상흔 위로 피가 금세 맺혔다.
우찬의 말 때문인지 아니면 팔에 난 상처 때문인지 적잖게 놀란 이설이 당황하며 손을 안절부절못했다. 흐르는 피를 닦을 심산으로 포단을 끌어다 팔에다 갖다 댔지만 이번에는 우찬이 이설의 팔을 붙잡아 결박했다.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피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찬이 다그쳐 말했다.
“어떻게든 떠날 궁리만 하는 네게 내 이름을 가진 진짜 연이설이 나타났다고 알렸다면, 너는 당장에라도 짐을 싸 연국으로 떠난다며 나를 찾아왔을 것이다.”
“꿈에도 그런 마음은 품지 않았을 것입니다!”
덩달아 언성이 높아진 이설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또 눈물이 차오르는 걸 삼켜 내는 모양이었다. 결국 또 이렇게 눈물로 상황을 모면하겠지. 신물 나게 반복되는 상황에 우찬도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제 마음 같은 건 한 번 묻지 않으시고 왜 지레짐작으로 저를 오해하셨습니까?”
“오해? 그게 오해였다면 네가 습격받은 것을 틈타 도망친 것도 오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왜? 그 또한 오해라고 계속 지껄여 보거라.”
“제가 도망을 친 사실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저를 찾지 않으셨어도 저는 제 발로 궁에 돌아왔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제가 아닌 다른 이를 정인으로 삼아 곁에 두시는 황궁일지라도, 저는 반드시 돌아왔을 겁니다.”
“그 말을 내가 이제 와 무슨 수로 믿지?”
낮은 소리로 윽박지르며 우찬이 이설에게 다시 몸을 숙였다. 또 얕은수로 맘에도 없는 거짓을 늘어놓는 이설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한편, 수를 다 알면서도 저 손바닥에 놀아나는 스스로가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피가 흐르는 손목을 이설이 덥석 붙잡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기껏 힘을 주고 당겨 보지만 우찬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동도 않는 팔목을 쥐고 흔들며 이설이 목에 가느다랗게 핏대를 세웠다.
“폐하께서는 어찌 한 번을 묻지 않으십니까?”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닌데 목소리가 분하고 원통해 마지않았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 억울하고 분통을 터뜨려야 한다면 그게 그건 자신이어야 하는데, 왜 이설이 이렇게 자신을 원망하는 눈으로 보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내가 뭘 묻지 않았느냐?”
“제가 궁에 반드시 돌아오려고 한 이유 말입니다,”
“내가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딱 잘라 거절하는 우찬을 보고 이설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려보냈다. 치켜뜬 눈으로 노려보아 독하게라도 보일 셈인가 본데, 저런 눈빛을 하고도 처연해 보이니 환장할 노릇이다. 끅끅 참는 울음소리를 들으니 품에 안아 달래 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냉정하게 받아치는 눈빛과는 달리 우찬이 저도 모르게 피가 흐르는 팔을 내밀어 어깨를 감싸 안으려고 할 때였다. 이설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말을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