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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59)화 (259/300)

달의 황홀경

259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비슷한 높이의 시선으로 쳐다보는 눈에 찬기가 시렸다. 갑자기 입안이 말라 목이 텁텁해졌다. 대답을 기다리는 차란의 눈이 집요하게 이설을 바라봤다.

“제게 하신 그 말씀, 폐하께도 똑같이 전하셨습니까?”

“아마 그랬을 겁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우찬과 했던 모든 대화들이 물에 탄 먹물처럼 흐릿하게 퍼져 희미해졌다. 정확히 무슨 말을 뱉었는지, 어떤 식으로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찬이 연모한다는 말을 뱉을 때면 늘 화가 났고 비참했던 기분만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분을 온전히 담아 뱉은 말들에 우찬이 지었던 표정 따위와.

“마마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폐하께서는 연모하셨을 거란 말을 하셨다고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재차 확인하는 차란에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차갑다 못해 서릿발 날리듯 굳은 표정이 산산조각이 나듯 깨지고 괴로움에 일그러졌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마마를 얼마나 아끼셨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고조된 목소리가 이설을 힐난했다. 차란이 자신에게 저런 어투로 따져 들 줄은 몰랐던 이설은 찬바람을 흉곽 가득히 채우며 열을 식혔다.

“물론 많이 서툴고 어긋났던 폐하의 표현 방식을 저 또한 전부 옳다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잘못 짚었다고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예 아주 제대로 잘못 짚으셨습니다. 단단히 틀리셨고요.”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껄끄러운 기색도 없이 차란은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말뿐만 아니라 시선에서도 느껴지는 단죄의 기운이 이설을 따끔하게 훈계하듯 날카로웠다.

“귀비가 나타나기 이전까지 두 분을 떠올려 보십시오. 폐하께서 마마를 오죽 어여삐 여기셨습니까?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그리 다정한 분이 아니시라고 제가 수십 번을 알려 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폐하의 정인인 줄 착각하셨던 모양이지요.”

“아닙니다. 폐하께 이름 따위로 엮이는 천명은 한낱 미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인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귀비가 완전히 가짜라는 것이 밝혀진 지금에 와서야 제가 진짜 정인이 맞았다며 옆에 두겠다 하셨습니다.”

“평생을 부정하던 미신을 억지로 믿는 척하면서까지 마마를 옆에 붙잡아 두고 싶은 폐하의 마음을 마마께서 곡해하고 계신다는 생각은 아니 드셨습니까?”

얼핏 비웃음이 스쳐 지나가는 화난 얼굴에서 우찬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순간 당황하여 몸을 움찔 뒤로 물러났지만 차란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우찬이 이름을 주고받으며 서로 운명을 나누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익히 잘 알고 있다. 하물며 제 몸에 이름이 새겨진 뒤에도 별다른 동요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자신을 데려온 것도, 왕족과 사내라는 자신의 조건이 손조익을 경계하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민가의 평범한 여인이었으면 들여다보기는 했을지 의문이다.

아, 그 여인 역시 이름이 연이설인 이상 우찬은 어쩔 수 없이 연심을 가졌을 수밖에 없었을까.

어긋나는 생각을 어떻게든 연결해 끼어 맞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조차 이설은 찾지 못했다.

어디 한번 자기 질문에 대답해 보라는 듯 쳐다보는 차란에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좀 더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돌려 말했어도 됐을 텐데. 기세에 밀린 나머지 날 것 그대로의 서러움을 토로하고 말았다.

“폐하께서는 귀비가 나타난 뒤 저를 버리셨습니다.”

멈칫한 차란이 왼쪽 눈을 찡그렸지만 정곡을 찔려 당황한 눈치는 아니었다.

“제게 거짓말을 하시고 귀비를 입궁시키셨고요.”

“사실대로 말했으면 마마께서는 어쩌실 작정이셨습니까?”

잘못한 건 우찬인데 도리어 이설에게 따져 묻는 차란이 눈빛을 날카롭게 빛냈다. 이설은 불현듯 오래전 금군이 훈련을 받는 무예 대련장에서 차란과 소운이 만나 얘기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그때 차란에게 느꼈던 낯선 느낌이 다시 재현되는 것 같다.

우찬이 귀비의 입궁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면 이설은 제일 먼저 울었을 것이다. 가능한 아주 서럽고 비참하게. 이설이 이렇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차란이 단언했다.

“분명 궁을 떠날 준비를 하셨을 겁니다.”

“정녕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제 생각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폐하께서 그리 생각하셨다는 게 중요하죠.”

차란이 숨을 짧게 들이켰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가 역력하여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차란은 결국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불안하셨던 겁니다.”

얼마 안 있어 머뭇머뭇 입을 뗀 말에 주어가 없었지만 헷갈릴 일은 없었다.

“정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마마께서 궁을 떠나겠다고 하실까 봐 폐하는 귀비가 나타난 이후 내내 불안해하셨습니다. 그래서 귀비의 존재를 숨기고 싶어 하셨습니다.”

차란은 우찬의 치부를 들춘다고 생각하는 듯 거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어딘가 이설을 탓하는 비난조의 말투였다.

차란의 말투 같은 건 거슬릴 새도 없었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듯한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정신을 단번에 일깨워 주는 말은 곧이곧대로 믿기가 어려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 어느 밤 우찬과 독대하였던 날을 떠올렸다. 우찬은 화가 났었고, 이설은 비통했던 밤이었다. 그날 우찬이 했던 말을 아직까지 똑똑히 기억했다.

“때가 되면 저를 반드시 연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첫 독대에서 하셨던 약조는 아직 유효하다면서요.”

말이 좋아 연국으로 돌려보낸다는 거다. 바꿔 말하면 둘 사이에 별다른 인연이 없고 특별히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게 정확해진다면 폐비시킬 테니 그때가 되면 연국으로 돌아가든 말든 관심 두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우찬은 그때쯤부터 이미 간을 보고 있었던 거라 생각한다. 귀비와 자신 중 누구를 옆에 두는 것이 이득인지. 혹은 그때 미신쯤으로 치부하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천명을 다시 생각해 봤을 수도 있다. 우찬 혼자 이설의 이름을 가졌던 것에 비해 귀비는 우찬의 이름까지 가졌으니, 이 사건을 우연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석연치 않을 테니까.

“제가 궁을 떠나든 말든 폐하께선 조금도 상관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폐하께서는 마마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시는 데에 깨나 길고 복잡한 시간이 걸리셨을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당시 폐하는 마마를 순순히 보내 드릴 마음이 없으셨다는 겁니다. 마마께 무슨 감언이설을 하셨든 절대 진심이 아니셨습니다.”

“아무리 충신이며 벗이라 한들 자기 것이 아닌 그 마음까지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찬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마냥 우찬을 대변하는 차란을 힐난하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사실은 초조하게 요동치는 마음을 들킬까 봐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에 더 가까웠다.

“제까짓 게 뭐라고 폐하의 마음을 꿰뚫어 보겠습니까? 그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마를 다시 연국에 뺏기지 않기 위해 밤새 고민하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니까요.”

“…….”

“마마께서 사라지신 동안 폐하께서 숨은 어떻게 쉬셨는지, 잠은 어떻게 주무셨는지, 끼니는 어떻게 넘기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셔야 할 것도 없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시고 술 말고는 아무것도 드신 게 없으시니까요.”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는 지금까지 오가는 대화에 이미 많이 지친 듯 들렸지만, 이설은 지치다 못해 어깨를 짓누르는 바윗덩이에 깔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루 이틀 밤잠만 설쳐도 안색이 나빠지던 우찬을 떠올려 봤을 때 속이 타들어 가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 차란이 과장했다는 걸 내심 알고 있으면서도 별일 아닌 것으로 무시하지 못했다.

“정말 숨만 간신히 쉬셨습니다. 마마께서 죽을 고비를 넘기시며 도망 다니시는 동안 폐하도 필사적으로 마마의 뒤를 쫓으셨습니다. 혹여 마마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할까 매 순간을 불안에 떠시면서요. 제 평생 폐하께서 그때만큼 초조해하시던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가까이서 봐 오던 우찬의 불완전한 모습이 떠올라 고통스러운 듯 차란이 찡그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설은 멍하니 입을 벙긋 벌리고 먼 곳에 시선을 보냈다. 하필 우찬이 신경 써서 가져다 놓은,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직접 서고를 뒤져 자신의 취향을 헤아려 골라 왔을 책들 위로 먼지만 쌓이고 있다.

언제 돌아올 줄도 모르는 자신을 기다리며 책을 골랐을 우찬의 마음을 감히 가늠할 수도 없다. 우찬은 그때 슬프고 괴로웠을까. 그래도 그때는 아직 이설이 우찬의 연심을 무참히 부정하기 전이라 마냥 비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폐하는 천명에 속아 마마를 연모한다 착각하시는 게 아닙니다.”

차란은 간결하고 분명히 말했다. 길고 복잡한 생각의 골목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설이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을 애써 더 밀어내려고 노력했다.

“저를, ……폐하께서는 저를 원망하고 미워하십니다. 연모는 그런 게 아니라 들었는데 폐하는 저를…….”

더듬거리는 이설의 말에 차란이 우습다는 듯 웃음을 핏 흘렸다.

“그럴 이유야 수만 가지라지만 굳이 하나만 뽑자면 마마의 마음이 폐하의 것과 같지 않아 화가 나신 거지요. 연심이 부정당하신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저 역시 폐하를 연모합니다.”

초연하게 고백하는 이설과 마찬가지로 차란도 호들갑스럽지 않게 이설의 말을 받아들였다. 끄덕이는 고개가 전부였다.

“폐하께 말씀드려 보셨습니까?”

“예.”

“믿지 않으셨겠군요.”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며 차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자신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떠나려는 줄 알고 조금 불안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가까이 다가와 앞에 섰다. 옆에 놓여 있던 물로 목을 축인 뒤 말했다.

“소운이 저를 많이 좋아했습니다.”

느닷없이 소운과의 사적인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 들어 잠시 머릿속이 환기됐다. 의아한 눈을 올려다보는 이설을 피해 차란은 허심탄회하게 뒷얘기를 마저 꺼냈다.

“저는 명망 높은 가문의 막내 도련님이 저 같은 장사치의 아들을 갖고 노는 게 틀림없다 여겨 긴 세월 그 마음을 끊임없이 부정하였습니다. 소운이 저를 연모한다며 하는 짓이 그다지 상식적이지가 못했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 소운이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벌였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일로 크게 싸웠는데, 하필 그때 홧김에 저 역시 소운을 좋아하고 있다 말해 버렸습니다. 결과야 보셨던 그대로입니다.”

차란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소운은 제가 자기를 동정해서 그런 줄로 오해했습니다. 자기 강요에 못 이겨 제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어요. 우습지 않습니까? 저도, 소운도. 저희 얘기를 듣는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저희 둘을 비웃고 손가락질할 것입니다. 근데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니 소운은 잘못한 게 하나 없었습니다. 등신 머저리는 저였던 거죠. 소운이 가진 모든 걸 던져 자기 마음을 전할 때 저는 재고 걱정할 게 많아 마음을 숨기는 데 급급했거든요. 소운이 진심으로 절 좋아할 리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담담하게 털어놓는 긴 얘기의 교훈이 지금 자신에게만큼 와닿을 사람이 있을까. 멍하니 얘기를 듣던 초반 잠깐 차란이 미련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 얘기는 아주 약간 다른 상황의 우찬과 이설이었다. 차란이 자책한 등신 머저리는 곧 이설 자신이다.

“저를 비난하시려거든 마음껏 하십시오. 다만 저를 통해 마마께서도 반추하시는 무언가가 꼭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차란이 뒤를 돌아섰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넋이 나가 있던 이설이 다급히 차란을 불러 세웠다.

“페하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궁에, 태금궁에 계시는 것은 맞습니까?”

“여기 마마의 침소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계십니다.”

“폐하를 뵈어야겠습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찬을 만난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자리를 만들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차란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우찬의 마음을 부정한 것에 아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찬이 비상식적인 명을 내리거나 조금만 모질게 굴면 이설 앞에서 기탄없이 불만을 토로하던 차란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우찬의 충신이며 충우였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이번 일로 폐하께서 마마가 곤경에 처하시는 걸 바라시지 않는다는 건 확신할 수 있습니다만, 깨신 직후에도 마마를 뵙고 싶어 하실지 의문이 드니 말입니다.”

“…….”

“말씀은 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쉬시지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차란이 곧 사라졌다. 혼자 남은 이설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우며 차란이 들려 준 이야기를 해가 질 때까지 내내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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