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61화
“기뻐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이었는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그다지 오래 지나지도 않은 일을 그새 잊기라도 한 듯 차란은 능청스럽게 실없는 소리를 하며 물었다.
우찬은 떨떠름한 얼굴로 옆구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내가 이 꼴을 하고 네 앞에서 웃기까지 해야 하느냐?”
“만지시지 마십시오, 폐하. 그러다 상처가 덧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죽기밖에 더할까.”
별일 아니라는 듯 내뱉는 우찬의 말을 듣고 흑영은 곧바로 낯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차란은 별 의미 없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냥 평상시 같은 말투로 그런 말씀 가볍게 하시지 말라며 투덜거리고 말 뿐이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설이 적어도 실망한 눈치는 아니었다 하니 정말 웃어야 하나 고민해 봤다.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깟 소식이 위안이 될 리가 없었다. 그 난리를 피운 와중에 이설이 다치지 않았는지가 궁금했던 거지 그 외 다른 얘기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폐하, 아닌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말해라.”
“소의 마마의 경동에 대해 책임을 물으시고 처벌을 내리시겠습니까?”
“경동이라니?”
이설과 붙어 있는 게 여간 어색한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되씹어 봐도 영 어울리지가 않았다.
“마마께서 폐하를 칼로 위협했다 들었습니다. 직접 그렇게 자백도 하셨고요.”
“그래서 지금 그걸 빌미로 연이설을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거냐.”
“그래야 할지 여쭤보는 것입니다.”
긴장감 없이 이어지는 대화였지만 정작 당사자들과 달리 흑영만 좌우 눈치를 살피며 끝내 차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응시했다.
“당시에는 폐하께서 의식을 잃으시는 바람에 호위군이며 궁인들이 다들 정신이 하나도 없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조치라…….”
차란의 말을 일부러 입 밖으로 꺼내 곱씹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설이 들고 있던 검의 방향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유가 어떻고 의도가 어떻든 이설이 저지른 일에 변명의 여지는 없다. 이에 따른 처벌 수위에 경중을 따질 필요도 없었다. 황제에게 검을 겨눈 후궁이라니 고통 없이 목이 댕강 날아가는 것으로도 하해와 같은 성은이었다.
우찬은 자신이 쓰러져 있는 동안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끌려갔을지도 모를 이설을 상상해 봤다.
“폐하 손에 상처가…….”
갑자기 흑영이 달려와 우찬의 손을 낚아챘다. 모르는 사이 힘이 들어가 주먹을 말아 쥔 까닭에 상처가 터져 다시 피가 새어 나왔다. 쯧, 하고 혀를 차며 차란을 노려보자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물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을 했다. 흑영은 피 묻은 천을 손에서 푸르고 천을 감아 주며 곁눈질로 차란을 노려봤다.
“모른 척 넘어갈까요?”
찡그린 눈으로 다시 봐도 차란이 지금 자신을 은근한 눈치로 떠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확실히 이설이 부린 난동은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이미 목격한 이가 많았고 본인 입으로도 인정했으니 꼭 우찬이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더라도 이설을 벌하는 데에 월권이라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만약 우찬을 대신하여 차란이 이를 정말 천인공노할 짓이라며 괘씸하게 여겼다면 이설을 옥으로 쫓아내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궁에는 이설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라며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차란은 이설은 얌전히 내버려 둔 채 우찬에게 와서 이리 시건방을 떠는 중이다. 이 난동의 당사자인 이설을 과연 우찬이 어떻게 나서서 처리할지 궁금해하며.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우찬이 험악한 인상으로 말했다.
“이번 일로 연이설에게 손 하나 까딱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돼. 너도, 흑영도 그 누구도.”
“예, 여부 있겠습니까.”
건성으로 대답한 차란이 그제야 자신을 내내 노려보던 흑영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 내렸다 올리며 가까이 다가와 옆구리에 상처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정말 급소를 찌르실 생각이셨습니까?”
“거길 노리긴 했지.”
“목숨을 잃으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걸 노린 거였다.”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흑영에게 얘기를 들었을 테고, 연이설도 만나고 오는 길이라면 대충 짐작은 하고 있을 텐데 어찌 묻는 거냐.”
다 알면서도 음흉스레 묻는 차란을 타박하는 것도 더는 지겨워졌다. 어째서인지 화낼 기운도 없었다.
흑영이 새 천을 감은 뒤 물러섰다. 이미 차란에게 모두 말하지 않았느냐는 눈빛으로 올려다보자 다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처음으로 먼저 시선을 피했다.
“신의 짐작이 틀렸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네 짐작이 맞을 거다.”
“폐하께 직접 듣고 싶습니다.”
가뿐하게 차란의 짐작을 인정한 우찬이 다리를 내렸다. 놀란 흑영이 말릴 새도 없이 바닥에 발을 짚고 일어나 걸었다. 옆구리가 뻐근하게 땅기기는 했지만 많이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어깨를 다쳤던 때보다야 훨씬 나은 편이었다. 손이 좀 걸리기는 해도 양팔이 자유로워 다행이었다.
흑영이 마시던 잔에 차를 따라 마신 뒤 창을 열었다. 겨울로 접어들며 해가 떨어지는 시간이 훨씬 앞당겨졌다. 어둑해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익숙한 듯 달을 찾았지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쌀쌀해진 날씨에 반나체의 몸이 차게 식었다.
“절망한 자의 고통은 죽는 것 말고는 이겨 낼 수가 없으니까.”
“예?”
바람 소리가 제법 매서웠다.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까지 합세한 소음에 가려진 우찬의 목소리가 차란에게까지는 닿지 못했다.
우찬은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지 않았고 더는 기다려도 달이 나타날 것 같지 않아 창을 닫았다. 미지근해진 물을 한 잔 더 마신 뒤 자리로 돌아갔다. 차갑게 식은 몸의 체온이 금세 다시 올랐다.
“아무튼 말씀하신 대로 마마께는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폐하께서는 공식적으로 고뿔에 걸리신 관계로 처소에서 정양 중인 것으로 해 두겠습니다. 겨울 초입의 이맘때면 다들 고뿔로 고생을 하는 시기니 다들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 리가 없다. 우찬은 살아생전 고뿔이라는 것을 걸려 본 적이 없었다. 체력이야 타고날 때부터 좋았고 어렸을 적이 아니고서야 크게 앓아 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어딜 다치면 후유증이 오래 남기를 하나, 그것도 아니었다.
아파서 고생했던 것이라고 해봐야 밤잠을 설쳐 머리앓이가 심했던 것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궁 안 모든 사람이 다 알게 할 만큼 떠들고 다녔던 적도 없다.
그랬던 우찬이 고뿔에 앓아누워 태금궁에서 꼼짝을 못 한다니 궁 밖에 거지가 다 비웃을 일이다. 가뜩이나 전후 처리할 것들이 많아 바쁜 와중에 정양이라니, 차란의 말과는 반대로 이상하지 않게 여길 사람이 없었다.
“그럴 필요 없다. 내일 조례는 취소하고 대전에 삼공구경들을 모두 불러 모아라. 구경 그 아래 속관들도 전부.”
“황명이라면 굳이 폐하께서 대전까지 나서실 필요는 없으실 텐데 내일 하루 정도는 좀 더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귀비의 거취를 논의해야겠어.”
“이렇게 갑자기요? 게다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진 바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내 정인도 뭣도 아닌 저것을 궁에 계속 두어야 한단 말이냐?”
우찬의 짜증 섞인 말에 차란은 영 내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반박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닌 듯 눈알을 굴렸다. 가만히 생각해 봐도 귀비를 계속 궁에 두는 것은 무리라고 여긴 눈치였다. 하물며 옥에 가둔 것도 아니고 어엿한 궁에 거처를 마련해 삼시 세끼 쌀밥을 먹여 가며 돌봐 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숨통을 끊어도 벌써 한참 전에 끊었을 텐데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차일피일 미루던 게 너무 오래 지났다. 이설이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면 차라리 처음 의심이 들었을 무렵 곧바로 목을 잘라 궁 앞 가장 높은 것에 걸어 놓는 거였는데.
그랬다면 이설이 이렇게까지 꼬인 오해를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오래전 자신의 결정을 조금 후회했다.
“어차피 귀비가 내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걸 연이설이 알게 된 이상 이제 쓸모도 없어.”
“그렇기는 합니다만,”
“자세한 건 내일 논의하기로 해.”
차란은 아직도 영 탐탁지 않은 듯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귀비가 죽는 걸 원치 않는 건지 당장 내일부터 정무에 복귀하는 우찬이 걱정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차란은 표정을 읽기 꽤 쉬운 편에 속했는데, 차란을 기준으로 하자면 흑영은 아주 쉬웠고 이설은 점점 어려워지는 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자못 어딘가 모자란 것은 아닐까 싶을 만큼 속내를 숨기지 못하더니 지금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우찬을 더 설득하려고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차란이 화제를 돌렸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리며 말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마마께서 폐하를 뵙고 싶어 하십니다.”
아주 예상하지 못한 얘기는 아니었지만 만일 이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지금에 와서, 이 난리가 벌어진 후에 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정말 살아 있는지, 혹시 어딘가 불구가 된 것은 아닌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아예 죽는 것보다는 덜 할 테지만 불구가 되는 편도 이설이 궁을 도망치기에는 괜찮은 조건이었다.
“일단 그건 어려우실 것 같다 거절은 해 두었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 마마 또한 폐하를 뵐 마음이 있으시다는 것만 알아 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난 원래 내가 원하면 언제든 누구든지 만날 수 있어. 연이설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지.”
“특별한 분이시니 굳이 말씀드리는 겁니다.”
“…….”
“지금이라도 마마를 모셔올까요?”
“모셔오기는.”
우찬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발목은 무슨 일을 당했는지 갓 태어난 사슴인 양 걷기는커녕 바닥에 서지도 못하던 이설이었다. 덕분에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걱정을 덜었지만 그렇다고 그 모습이 보기 썩 좋아 보이던 것도 아니었다.
“당분간은 네가 신경 써서 회복하는 데에나 집중할 수 있게 해라.”
이 말인즉슨 자신을 만나면 이설이 회복하는 것이 더뎌진다는 것이었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다시 이설을 만난다면 다른 쪽 옆구리에 칼을 꽂아 넣을 일이 생길지 장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