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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62)화 (262/300)

달의 황홀경

262화

“신이 매일 찾아뵈어도 괜찮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쉽게 허락하는 우찬을 예상 못 했는지 차란이 말없이 양쪽 눈썹을 위로 번쩍 들었다 내리며 물었다.

“문 앞에 호위 둘을 제외하고는 안에서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따로 눈을 붙여 두시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런 걸 신경 써 둔 기억이 없었다. 자연스레 고개가 흑영에게 돌아갔다.

“침소 안에 배치해 둔 호위군은 없습니다. 동향을 필히 살필까요?”

“아니 됐어. 허튼짓하지는 않을 거야. 비좁은 우리에서라도 어디 자유를 만끽해 보라지.”

언제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설도 주변 인기척에 제법 예민해졌다. 서까래에 검은 그림자가 슬그머니 움직이면 이설도 슬쩍 고개를 올려 쳐다봤다. 본능적으로 제 주변을 움직이는 기척들을 알아채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쯤 이설은 마침내 텅 빈 자신의 침소에 홀로 머물고 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할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달이 보이지 않는 밤이니 창가를 서성이며 창밖의 찬 공기에 머리를 내밀고 있는 짓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다행이었다. 이설에게 밤바람은 너무 차갑고 매정했다.

아, 그전에 발을 다쳤던 게 다행이라든가.

“폐하.”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이설이 짓고 있을 얼굴을 상상해 보던 우찬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어느새 더 가까이 다가온 차란이 짐짓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괜찮으신 게 정말 맞습니까?”

“왜? 네 눈에는 내가 괜찮지 않아 보이느냐?”

“어젯밤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자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폐하를 뵙고 나니 무척,”

“무척?”

“평온하십니다.”

어울리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차란이 느끼는 미묘한 이질감을 이해하기는 했다. 확실히 우찬은 지금 평온했다. 하해와 같은 마음이 끝없이 펼쳐져 치솟을 분노가 없게 지반을 다독였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폐하께서 당장 마마를 만나러 가신다고 하셔도 신은 말리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의외의 상황이라…….”

말인즉슨 차란은 자신이 깨어난 뒤 난동이라도 부릴 줄 알았다는 의미다. 그럴 경우 말릴 생각도 없었다고 하니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한 모양인데 정작 당사자의 반응이 미적지근한 것이다. 차란은 혹시 다른 지점에서 우찬이 터질까 이것저것 미끼를 던졌지만 우찬은 싱겁게 반응했다.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면 누가 몸의 장기를 불로 지지기라도 하는 듯 뱃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옆구리가 아픈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렇지만 다시 이설을 찾아가 같은 방법으로 위협을 가할 수는 없다. 아무리 태연자약하게 거짓된 말로 자신을 현혹시키려 하고 끝내 검을 겨눠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괘씸하다 이를 갈아도 눈 밖으로 이설을 쫓아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자신을 아무리 고장 내고 망가뜨려도 이설을 원망할 수가 없다.

“내가 시끄럽게 소란이라도 피우길 바란 모양이지?”

“전혀요. 아뢰옵기 외람되오나 이편이 훨씬 폐하다우시고 합리적이십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막 정신이 들었을 때는 혼란스럽던 감정이 다소 안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아까 먹은 환약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 은근하게 퍼져 있는 이상한 냄새 때문일 수도 있다. 도대체가 몸에 무슨 이상 징후만 보였다 하면 약초를 태워 향을 피우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약효가 어찌나 놀라운지 굳이 태의에게 경을 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피곤하군.”

“깨어나신 걸 뵀으니 신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다시 뵙겠습니다.”

“너도 이만 나가 봐.”

슬슬 떠날 채비를 하는 차란과 달리 꿈쩍도 않는 흑영에게 눈짓을 했다. 흑영은 자신도 나가야 하는 걸 몰랐는지 다소 놀란 눈치로 머뭇거렸다.

“폐하를 홀로 계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나가.”

근래 들어 불복종이 잦아진 흑영이 재차 황명을 거절하려다 차란에게 손이 붙들려 억지로 끌려나갔다. 간단한 인사 후 빠르게 사라진 차란이 문을 열자마자 윤 내관이 숨넘어갈 듯 달려와 폐하는 괜찮으신지 물었다. 차란이 뭐라 대답하는 동시에 문이 닫혔다.

혼자 남아 주변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창문 하나가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물 냄새가 났다. 여긴 금원과 반대쪽이라 물이 고인 곳이 없는데 이상한 노릇이다. 비라도 올 참인가 하는 허탈한 생각을 했다가 관뒀다. 밤이슬이 일찍 들었겠지.

이설은 지금쯤 잠들었을까 하는 감상에 빠졌지만 금세 털어 냈다. 깨어 있다고 무슨 좋은 생각을 할까. 차라리 잠들어 있기를 바랐다. 아무 생각도,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깊이 또 깊이 잠들어 있길.

*

해가 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싶지 않아 무던히도 노력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눈을 감고 수를 세어 봐도 정신은 갈수록 또렷해지고 채 일백을 세기도 전에 생각은 다른 쪽으로 빠졌다.

우찬이 했던 말이, 우찬에게 했던 말이 뒤섞여 머릿속을 맴돌았다.

모로 누워 있는 한쪽 어깨가 배겨 아팠다. 반대 방향으로 눕자니 그쪽은 아직 상처가 낫지 않아 어려웠다. 그나마 낫는 기미가 보였는데 어제 일로 상처가 벌어졌다. 태의는 터진 상처를 보자마자 혀를 끌끌 찼다. 태금궁에서 일어났던 일은 안에서만 쉬쉬하기 때문에 다른 어의를 불러올 수 없었고 종일 태의만 우찬과 이설을 번갈아 가며 고생이었다.

‘상처가 다 벌어졌습니다. 이 통증이면 참기 어려우셨을 텐데 마마도 참. 발목은 어떠십니까?’

걱정 어린 노인네의 말투로 타박하는 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찬은 아직 깨지 못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아직 걷기 불편하시면 몇 침 놓아 드릴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당장에라도 포단을 들출 기세로 물어보는 태의에게서 다리를 치우며 다급히 말했다. 태의는 허허 웃는 소리를 냈다.

‘무서워하신단 걸 이 늙은이가 또 깜빡했습니다.’

실없이 웃는 태의가 어색하다고 느낀 건 직후였다. 가늘게 떨리는 입가의 주름이 만들어 낸 듯 경직됐다. 혹여 이설이 괜한 것이라도 물으면 어쩌나 초조해하는 눈치가 분명했다. 궁금한 게 산더미였던 이설은 결국 입을 앙다물었다. 태의가 이런 식이라면 차란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차란이 다시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일 아침 다시 오겠다며 태의는 서둘러 나갔다. 문을 열자 왜 이리 늦으셨냐며, 폐하께서 아직도 정신을 차리시지 못하셨다며 타박하는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동시에 문이 닫혔다.

태의가 우찬을 살피러 간 지 한참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우찬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을까 막연한 생각을 했다. 본디 태어나기를 여태 사람들과 다르게 태어났다고 했다. 애당초 다치거나 아픈 일도 없지만 설혹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금세 회복하는 장골이니 언제든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아주 예전에 차란이 말했다.

“마마 잠깐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하도 몸을 뒤척이던 탓에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걸 알았는지 상궁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궁녀 둘이 커다란 항아리 같은 걸 마주 보고 번쩍 들어 가져왔다. 자세히 보니 화로다.

“이게 뭡니까?”

“화로입니다. 갑자기 날이 추워지는 것 같아 들여왔습니다.”

“아직 그리 춥지 않아 괜찮습니다.”

“이제 창을 닫아도 새벽 공기가 많이 차가워졌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이설이 한사코 사양하자 화로 안에 불씨가 붙은 숯을 넣을까 말까 고민하는 궁녀에게 상궁이 눈짓을 줬다. 까만 숯덩이가 화로 안으로 떨어졌다.

“마마께서 고뿔에라도 걸리지 않게 만전을 다하라는 승상의 언질이 있었습니다. 아랫것들 곤란케 하시지 마시지요.”

조곤조곤한 목소리지만 어딘가 강압적으로 느껴지는 말투에 대꾸할 말을 잃었다. 어젯밤 소란에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왔던 상궁은 엉망진창이 된 이설과 우찬을 보고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어쩌면 이설이 정말 우찬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승상이요?”

“예.”

차갑게 돌아서 나갔던 차란이 베푼 친절함이 마냥 고맙지만은 않았다. 은근한 중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승상의 개인적인 마음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마음을 받아 말로 전달한 건지 모르겠다. 차란이 조금 매정하게 돌아서긴 했어도 본래 성정이 나쁜 사람은 아니니 괜히 신경을 더 써 준 걸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게 아니라, 차란은 내키지 않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명을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불이 많이 뜨거우니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그리고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이만 침수에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설은 한마디 얘기할 틈도 주지 않고 상궁은 제 할 말만 한 뒤 궁녀들과 나갔다. 우찬의 상태를 물어보려고 입술만 적시던 이설은 또 소득 없이 궁인들을 내보냈다.

“폐하께서는 이제 의식이 좀 돌아오셨습니까?”

아무도 듣지 않는 허공에 혼잣말을 뱉었다. 철저히 혼자인 넓은 침소 안. 아까 태의가 왔을 때도, 방금 궁인들이 들어왔을 때도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차마 염치가 없어 물을 수가 없었다.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이 창밖 너머 바람 소리만 들렸다. 며칠 들어 바람이 좀 잦긴 했지만 오늘만큼 강풍이 몰아쳤던 적은 없었다. 비가 오려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새벽 이슬비가 잠깐 내릴 모양이었다. 아마 아침 동이 밝기 전에는 그칠 테지만. 그리고 밖에 날씨 따위야 어떻든 이설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깟 사소한 일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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