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64화
이른 아침 이제 막 태금궁 문턱을 넘은 차란은 처마 밑에 서서 고민했다. 황제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기 전 이설을 만나 안부를 확인하는 게 좋을지 말지에 대해서.
우찬은 필히 이설의 동향을 자신에게 물을 것이다. 그리고 차란은 우찬이 묻는 것에 모른다는 대답을 하는 게 싫었다. 차란은 궁 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편이었는데, 소운은 그걸 신분에 관련한 열등감을 이기기 위한 상대적 집착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뭐,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어쨌든 우찬에게 짐짓 아는 체를 하며 거들먹거리기 위해서는 이설을 먼저 찾아뵈는 게 순서였다. 하지만 차란은 오늘 처음으로 이설을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어제 아침이었나 낮이었나. 하여간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때에 이설과 독대하였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 것이다.
주제넘게 이설을 몰아붙인 것도 문제였고, 소운과의 사적인 얘기를 꺼낸 것도 문제였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설에게 했던 자신의 무례했던 언행을 여전히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승상 예서 뭘 하고 계십니까?”
혼자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 차란의 어깨를 누군가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금위대장이었다. 우산을 쓰는 대신 녹사의를 어깨에 걸쳐 비를 피하려고 한 모양인데 장대비에 당해 낼 재간이 아니었다. 홀딱 젖은 몰골에 놀라 차란이 뒷걸음질을 쳤다.
“잠깐 생각할 것이 있어서요. 헌데 금위대장께서는 꼴이 이게…….”
“아주 형편없지요? 어쩌겠습니까. 그나마 이 녹사의도 금군이 훈련장 구석에서 간신히 찾아낸 것입니다. 황궁은 지금 아주 난리가 났습니다.”
“궁 밖의 민가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황궁까지 오는데 평소보다 곱절로 시간이 든 것 같습니다.”
“거참 이상한 노릇입니다. 이맘때 비라니요. 저는 어제 잠깐 이슬비가 내리고 말 줄 알았습니다.”
혀를 끌끌 차는 금위대장이 대문 처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위로 세차게 내려오는 빗줄기가 얼굴까지 튀어 올랐다. 금위대장은 젖은 손을 거둬 얼굴을 쓸어내리며 세수하듯 닦아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 평생 이런 광경은 또 처음입니다.”
“나이 깨나 먹은 윤 내관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합니다.”
“이러다 한겨울에는 눈이라도 오는 게 아닐지 걱정입니다.”
바닥으로 튀어 오르는 빗방울을 보며 차란이 한탄하듯 말했다. 한겨울이 와도 금국은 눈이 내릴 만큼 춥지는 않겠지만 지금 내리는 비를 보아하니 아주 기대 못 할 것도 아닌 것 같다.
금국에 눈이라니. 금빛 기와마다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이 장관이긴 할 것이다.
하지만 감히 바랄 수는 없었다. 농가에 닥칠 피해며 오도 가도 못 하고 발길이 묶일 상인들까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금국은 우장절을 제외하고는 날씨에 별다른 기복이 없기 때문에 이따금 갑작스럽게 변하는 날씨에 대처가 서툰 편이었다.
“금국에 눈이라니 정말 아찔합니다.”
“금위대장께서는 궁에 들어오시기 전에 북쪽 산에서 수비대를 하셨으니 눈이라면 아주 질색이시겠습니다.”
“그게 또 참 이상합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을 멈추었던 금위대장이 씁쓸하게 웃으며 젖은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넘겼다.
“북쪽에 있으면 눈이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내립니다. 발밑에 깔린 눈이 녹을 새도 없지요. 그러니 그게 얼마나 지겨웠겠습니까? 바람이라도 불면 한 치 앞도 못 보니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은 경비를 서는 것이 몇 배는 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금위대장이 아련하게 처진 눈빛을 허공에 멀리 보냈다. 차란은 문득 그 방향이 북쪽이라는 것을 알았다.
“황궁에 돌아온 뒤로는 그 하얗고 시린 눈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특히 보름달이 뜬 캄캄한 밤에 소복이 쌓이는 눈의 정취란 말로 다 표현을 할 수가 없군요.”
금위대장이 원래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옛 기억에 빠진 금위대장을 쳐다보던 차란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북쪽 산에서 눈을 보고 온 사람들의 감상이란 다들 엇비슷했다. 달 뜬 밤, 소리 없이 소복이 쌓이는 눈의 정취를 보고 있노라면 술이 생각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다고.
불현듯 지금은 죽고 없는 늙은 무녀의 신탁이 생각이 났다. 귀담아 듣는다고 들었는데 그간 정신없이 일들이 터져 신경을 쓰지 못하다 보니 잊고 지낸 게 사실이다. 아마 황궁에 눈보라가 몰아칠 거라고, 그런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늙은이의 신기가 거의 꺼져 갈 때쯤이라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잘못 본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황궁에 몰아치는 눈보라보다야 비바람이 훨씬 나은 편이니 차라리 그래 줬으면 좋겠다.
“헌데 폐하를 뵈러 가시는 길입니까?”
“그 전에 잠깐 어디를 좀 들를까 싶습니다.”
“혹시 소의 마마를 만나 뵈러 가십니까?”
이설이 껄끄러운 건 껄끄러운 거고, 해야 할 일은 그냥 하는 게 맞는 거다. 사실 차란도 알고 있었다. 고민 따위 해 봐야 자신은 결국 해야 할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조심스레 묻는 금위대장이 단순히 궁금해 묻는 게 아니라는 티가 났다.
“마마께 전해 드릴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다른 건 아니고 마마께서 비은궁 궁인들의 걱정이 많으시다 들었습니다.”
“뭐 아무래도 그렇지요. 궁인들을 안에 가둔 채로 궁을 폐하였으니 오죽 걱정이 되시겠습니까? 폐하께서 궁인들에게 해라도 끼치시는 건 아닐지 무척 불안해하십니다.”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금위대장이 곤란한 듯 말 꺼내기 어려운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간 힘든 일이 많았는지 한두 달 새 폭삭 상한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그걸 또 마냥 안타까워하자니 자신도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괜스레 눈을 비볐다. 그러고 보니 요즘 눈가에 주름이 는 것 같기도 하고…….
“마마께서 뭔가 오해를 하시고 계신 것 같아 말입니다.”
“오해라니 뭐가 말입니까?”
이만 더 늦어지기 전에 자리를 떠나려던 차란이 들고 있던 우산을 바닥에 탁탁 두드리며 물었다. 금위대장은 살짝 찡그린 얼굴을 손으로 매만지며 대답했다.
“폐하께선 비은궁 궁인들을 해코지하기 위해 가둬 두신 게 아닙니다. 각별히 보살피라 신신당부까지 하셨는데 해를 끼치다뇨.”
“마마의 기우인 건 알았습니다만 폐하께서 신신당부를 하셨다고요?”
“예. 마마께서 아끼는 자들이니 다치거나 병든 이가 없게 하라 하셨습니다. 언젠가 궁으로 돌아가실 마마께서 슬퍼할 일을 만들어선 안 된다고요.”
“…….”
“폐하께선 이리 마마를 생각해 주시고 계신데 어찌 마마께옵서는 그런 마음을 가지신 건지…….”
안타까움에 고개를 젓는 금위대장이 이설을 비난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충성도 높은 무관으로서 제 주군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고 있다 하니 착잡한 기분을 마냥 삼키기도 답답했을 것이다.
차란은 우산 끝을 바닥에 탁탁 두드리며 생각했다. 우찬을 알고 지낸 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도 그 속내를 통 모르겠다고. 차라리 언질이라도 한 번 줬으면 좋았을 거 아닌가. 이설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단단히 오해를 했다. 혼자 오해하고 넘어갔어도 민망한 일이었거늘 정전을 박차고 들어가 그 앞에서 갖은 추태를 부렸다.
어제 하루 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우찬을 대했던 것도 면구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오늘은 또 어떻게 얼굴을 볼까 싶다.
“아무튼 승상께서 모쪼록 마마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비은궁에 궁인들은 다들 잘 지내고 있다고요.”
“마마께도 꽤나 반가운 소식이겠습니다.”
“그나저나 아랫것들을 잘 보살피라는 명을 내리시다니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마마 걱정을 그리 깊이 하실 줄이야. 폐하께도 애처가의 면모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들 몰랐지요, 다들.”
차란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혀를 쯧 찬 뒤 우산을 펼쳤다. 기름을 먹은 종이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빗줄기 기세가 한층 더 매서워졌다. 밤에 오는 이슬비 정도를 막기 위해 사용하는 우산이라 내구성이 확실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퇴궐할 때는 아마 다른 우산을 구해야 할까 싶다. 녹사의 같은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걸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저는 이만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따 대전에서 뵙겠습니다.”
손을 흔든 뒤 처마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밤새 내린 비에 젖은 모래 바닥이 질퍽하게 밟혔다. 더는 더러워질 것도 없는 신을 내려다보며 차란은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빨리했다.
황궁은 전체적으로 어수선했다. 준비된 우의나 삿갓, 우산 등이 한참 모자라 비를 맞으며 뛰어다니는 궁인들이 태반이었다. 이게 무슨 난리냐며 호들갑을 떠는 궁인들을 지나 이설의 침소 앞에 다다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우찬의 침소라며 들락날락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은연중에 이설의 침소라고 여기는 게 기이했다.
궁녀가 건네주는 마른 천으로 대충 얼굴과 손 등을 닦은 뒤 기척을 냈다.
“마마 승상 비차란이옵니다.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기다려도 대답이 들리지 않아 재차 기별을 하려고 한 순간 멀리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대충 들어와도 좋다는 대답이었던 것 같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순간 훈훈한 공기에 싸늘하게 식었던 몸에 온기가 찼다. 겨울의 초입에 내리는 비로 한껏 식은 밖에 온도와는 확연히 다르게 따뜻했다. 침소 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화롯불 덕분인 듯싶어 마음이 놓였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마마.”
“승상이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따뜻하게 밤을 보냈습니다. 고맙습니다.”
침상에 기대앉은 이설이 화로를 곁눈질하며 말했다. 어제 그렇게 매몰차게 떠난 바람에 이설이야말로 자신을 껄끄러워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도 이설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게 나긋했다. 오히려 궁을 떠나기 전 상태와 더 비슷했는데, 그 미묘한 차이가 차란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단순한 착각인가 싶어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