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달의 황홀경 (266)화 (266/300)

달의 황홀경

266화

“잘 지내신다 하였는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내 표정이 어떠한데.”

차란이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반복하다가 흑영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옥안에 근심이 가득하십니다. 폐하께서 정무에 이 정도로 고단해지실 리가 없으니 이게 다 소의 마마를 향한 근심이 아니겠습니까.”

차란 말에 우찬이 콧방귀를 뀌며 응수했다.

“그러니까 이게 다 연이설의 책임이다, 이 말이냐.”

“지나치게 비약적인 해석이십니다.”

황궁에 돌아온 뒤 별 잡스러운 것까지 하나하나 살펴야 했기 때문에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일을 그르치지는 않을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조금 꼬이고 돌아가도 시간이 걸릴 뿐 결국 바라는 바대로 풀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뜻대로 안 풀리는 건 이설 하나뿐이었다. 잡았다 싶으면 도망가고 나아질까 싶으면 더 악화됐다.

“그렇다고 소의 마마께서 완전히 무결하시다는 뜻 또한 아닙니다.”

전적으로 이설의 책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책임이 없다는 말도 아니라는 것이다. 차란은 우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뻔뻔하게 꽉 다문 입술을 좌우로 삐죽거렸다.

애초에 차란이 틀린 것은 없었다. 이 사달이 일어난 것은 모두 이설의 책임이었다.

“좌우간 폐하께서도 이 점은 꼭 알고 계셨으면 합니다.”

“시끄럽다.”

그렇다고 이설에게 책임을 묻는 차란이 달가운 것은 아니다. 그럴 주제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호되게 깨우쳐 주고 싶었지만 만사가 귀찮아 관두었다.

잊을 만하면 태의가 가져오는 탕약을 먹을 때마다 기운이 빠져 붙들고 물어보니 탕약에 기력을 떨어뜨리는 약재를 썼다고 실토했다. 우찬 성정에 이렇게 큰 부상을 입고도 궁을 활보하고 다닐 것이 저어되어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일지는 불 보듯 뻔하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윤 내관은 종종 자기 목숨을 담보로 내놓고 어리석은 짓을 벌였다.

탕약을 바닥에 조용히 부어 버리는 것으로 황명을 확실히 전달한 게 이른 아침이었다. 새로 들이는 탕약을 먹은 뒤로는 기운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이만 대전으로 가지.”

“밖에 비가 쏟아지는 것을 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차란이 창문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닫힌 창문 너머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요란했다. 이따금 멀리서 천둥 치는 소리도 들렸다.

“갑자기 내린 비로 입궁하지 못한 대신들도 여럿입니다. 날을 미루시는 게 좋겠습니다.”

“해야 할 게 산더미인데 이 일까지 미룰 필요는 없다.”

“폐하께서 비바람을 헤치고 대전에 나가셔야 할 만큼 귀비의 사안이 중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승상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 밖으로 나가시는 것은 위험하십니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흑영이 차란을 거들었다. 하지만 우찬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어깨에 걸쳐 입었던 장포를 벗었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궁인들을 방 안으로 들인 우찬이 대전으로 갈 채비를 하겠다고 말했다. 당황한 궁인들이 머뭇거리다 우찬의 표정을 살핀 뒤에야 허둥지둥 환복을 도왔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차란이 두어 번쯤 더 간곡히 말렸지만 우찬은 아예 말을 무시하는 것으로 대신 대답했다.

소식을 들은 윤 내관이 어디 있다 왔는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나이 많은 노인네답게 비가 오는 날 밖을 나가면 큰 화를 당한다는 미신을 굳게 믿고 있는 터라 우찬을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머리 손질을 해 주려는 궁인을 밖으로 보냈다. 흑영은 대전까지의 동선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나갔고 뒤에 뚱하게 서 있던 차란이 재차 물었다.

“정녕 오늘 꼭 하셔야겠습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을 하는 것에 궁인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한 데에 반해, 특별한 장신구를 해야 하지 않는 이상 머리 손질을 직접 하는 게 편했다. 아무래도 무방비한 상태로 타인에게 목 뒤를 내보이는 게 무의식중에 탐탁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딱 한 명. 이설이 머리 손질을 해 줄 때 그런 언짢은 기분을 느껴 본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그걸 인지한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이설이 제 머리를 만지는 것은 자신에게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비록 이설이 남의 머리를 만지는 데에는 무척이나 재주가 없었지만.

이설은 손재주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글자를 정갈하게 잘 쓰는 것도 세필 붓으로 작게 쓰는 글씨에 국한됐다. 천자는 또 왜 그리 삐뚤삐뚤 쓰는지, 글씨를 쓰는 것인지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니 머리 손질이라고 잘할 리가 없었다. 하물며 남의 머리를 만질 일도 여태 없었을 것이다. 짧고 뭉툭한 비녀라도 우찬의 머리카락 사이에 꽂아 찔러 넣을라치면 혹시나 머리 가죽 어디에 상처라도 내는 건 아닌지 머리카락을 붙잡고 손을 덜덜 떨었다.

“오늘 꼭 가셔야 하시는지 여쭈었는데 왜 갑자기 웃음을……, 소의 마마 생각을 하십니까?”

“머리를 많이 길렀던데.”

“예 그러신 것 같습니다.”

동문서답을 하는 우찬에게 장단을 맞춰 주며 차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찬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사실이 새삼 와 닿은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못 본 새 머리카락이 정말 많이 자랐군요. 딱히 이질감이 없어서 눈에 띄지 않았나 봅니다.”

우찬은 이설을 본 순간 한눈에 알아봤다. 머리카락이 더 길게 자랐고 볼이 더 홀쭉해졌고 앙상해진 손가락 사이사이에 나뭇가지 따위에 긁힌 상처가 얼마나 많이 생겼는지, 우찬은 이설을 보자마자 모두 알아차렸다.

“머리를 길러서인지 날이 갈수록 마마께서는 더욱 평범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달에 사는 전설의 항아가 땅에 내려온다면 그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항아 따위에 견줄 게 아니지.”

면경에 얼굴을 비추고 스스로 머리를 손질하던 우찬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면경에 언뜻 비친 차란이 웃는 듯 마는 듯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별로 상관은 없는 얘기입니다만 금국 설화에 나오는 수신 말입니다. 정인을 찾는다며 금국으로 내려오는 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수신의 땅은 금국이 아니라 편국인데, 잃어버린 정인을 왜 남의 땅에서 찾느냔 말입니다.”

난데없이 설화 얘기를 꺼내는 차란의 얘기에 제대로 집중되지 않았다. 양쪽 손이 불편해 머리끈을 뜻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헛손질을 하고 있는 것 봤다면 차란이 도와준다고 나섰을 테지만 제 이야기에 심취해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알고 보니 수신의 정인 항아가 하늘에서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금국으로 도망을 친 것이라 합니다. 애초에 정인도 뭣도 아닌 것을 수신이 꼴사납게 꽁무니를 쫓아다녔다고도 하고요. 아무튼 그때 항아와 눈이 맞은 사내가 금 황가의 시조이신 성천자 봉황제라는 설이 있습니다.”

귀담아듣지 않는다 해도 흘러들어 오는 말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묵묵히 얘기를 듣던 우찬은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머리끈을 양쪽으로 힘주어 당겼다.

“그 말인즉슨 폐하께서는 태초의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불꽃이신 성천자 봉황의 현신인 동시에 항아와의 후손인 것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는 것이냐?”

“비도 오고 항아 얘기도 나오고 하니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께 이 얘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흥미로웠거든요. 그리고 처음에 별로 상관은 없는 얘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헛소리 말고 따라와.”

“폐하.”

“대전까지 무언하라.”

제대로 묶이지 않은 머리가 흘러 내려오는 것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우찬이 일어났다.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옆구리에 통증이 심해졌다. 그리고 차란은 황명을 무시했다.

“이 시점에서 소의 마마를 다시 폐하의 정인으로 공표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무슨 소리냐.”

의도를 간파당한 것이 놀랍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차란의 의도가 더 중요했다.

“굳이 마마로 하여금 궁에 계속 남아 계셔야 하는 명분을 갖게 할 필요가 있는지 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뭔가 대답하려던 찰나 차란이 재빨리 자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마마를 정인으로 복권한다면 사람들은 마마가 필요하기 때문에 옆에 두신다 생각할 것입니다. 폐하의 연심은 안중에도 없을 테고요.”

“내가 저 밖의 무지렁이들에게 내 연심을 증명할 이유라도 있느냐?”

“신이 걱정하는 건 담장 밖의 무지렁이들이 아니라 마마이십니다.”

고개 돌려 한숨을 쉬는 차란의 말이 무엇인지 대강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제 와 고민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어차피 이설은 자기가 만든 오해로 벽을 쌓은 지 오래였고, 뭣보다 우찬이 저 밖으로 나가 무슨 공표를 하든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설령 연국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고 해도 이설은 모를 것이다.

남은 생에 이설이 태금궁 담장 밖을 넘어가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

“대전까지는 묵언으로 동행할 테니 부디 소신의 말을 한번 잘 헤아려 주십시오.”

헤아리지 않을 것이다.

우찬은 몸을 돌려 사흘 만에 밖으로 나섰다.

한때 자신의 침소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이설의 침소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한 침소를 지나지 않기 위해 복도를 빙 둘러 걸었다. 그 앞으로 지나며 문을 열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끌어안아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과 불같이 화를 내고 싶은 마음이 함께 공존했다. 미쳐 날뛰는 감정을 겨우 막은 마개를 이설이 열게 할 수는 없다.

밖으로 나와 보니 안에서 보는 것보다 비가 더 많이 오기는 했다. 바닥을 튕기고 올라온 빗방울이 무릎 아래를 적셨다. 우찬의 빠른 걸음을 맞추기 위해 뒤에 궁인들은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폐하, 천천히 걸으셔야 합니다. 몸도 성치 않은 분께서 이리 무리를 하셔야 되겠습니까? 이 늙은이 죽는 꼴이 그리 보고 싶으십니까?”

“먼저 가면 나도 곧 따라가지.”

차란이 조용하니 윤 내관이 성화다. 어떻게든 보폭을 맞추며 우찬을 다시 궁으로 돌려보내려고 애쓰던 윤 내관이 울상을 지었다.

“말씀을 왜 또 그리하십니까. 마마께서 기운을 차리시니 이번에는 폐하께서 참.”

그 순간 우찬의 보폭이 확 줄어들었다. 걷는 속도가 느려진 상태에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의가 기운을 차렸다고?”

“예. 조금 전에는 저를 급히 찾으신다고 하여 가 봤더니 읽고 싶은 서책이 있다 하셔서 가져다드렸습니다. 아픈 곳이 있다 하시기에 사의시에 얘기해 연고도 드렸고요. 의원은 통 싫다 하셔서……. 본래 아픈 곳이 있다고 일일이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말씀이라도 먼저 해 주시니 차라리 다행입니다.”

분명 좋은 징조일 텐데 어딘가 석연치 않다. 당장 죽겠다며 미쳐 날뛰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다. 시야에 자신이 보이지 않으니 숨통이라도 트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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