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황홀경
289화
늘그막에 노망이라도 났는지 태사령이 하는 소리를 마뜩잖게 듣던 우찬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아닌 척 애쓰고는 있지만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좌불안석인 이설이 태연한 척하며 손가락을 쉬지 않고 꼼지락거렸다.
“그러니까 지금 연국 소유의 금광을 도국에 대가 없이 넘겨주겠다,”
“…….”
“……고 소의가 자네들에게 공언했다는 거군.”
“예 바로 조금 전에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던 얘기가 아니셨습니까?”
일부러 이설의 표정을 살피느라 우찬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진땀을 뻘뻘 흘리는 것도 아닌데 이설은 어색한 손동작으로 이마를 쓸어 넘겼다. 그 옆에 선 차란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얼굴로 콧잔등을 긁으며 우찬의 시선을 피했다.
태사령은 혹시라도 우찬의 심기를 거스를까 최대한 조심스레 물은 것 같았다. 우찬은 피식 웃었지만 태사령의 마음을 놓게 하기 위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일전에 들은 바가 있긴 했지. 그런데 내가 꼭 그리 할 필요는 없다고 분명 얘기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우찬이 빙그레 미소 지은 다정한 얼굴로 이설을 바라봤다. 좀처럼 보기 힘든 정도가 아니라 대신들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선하디선한 얼굴이었다. 놀라 까무러친 온 대신들이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놀란 티를 드러냈다.
“매암산의 금광은 보통 규모가 아닌데 이깟 일로 도국에 넘기기에는 너무 아깝다 말하지 않았느냐, 설아.”
아래 대신들이야 놀라 나자빠지든 말든 눈길도 주지 않는 우찬이 팔걸이 너머로 손을 뻗었다. 이설은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모양인지 쭈뼛쭈뼛 눈치를 살피다 제 두 손을 우찬의 손바닥 위에 겹쳐 얹었다. 뒤에 선 차란이 이마를 턱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우찬은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한 손이면 된다.”
“아, 네.”
우찬의 다정한 핀잔에 이설이 다급히 오른손을 내렸다. 우찬은 남은 왼손의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별거 아닌 행위지만 버젓이 보기에는 영 민망한, 그것도 황제와 그 후궁의 애정 행각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대신들이 헛기침을 하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마 육추명은 태사령과 눈이 마주치자 질끈 감아 버리기까지 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도는 대전 안에 우찬 혼자만 아무렇지 않은 듯 초연했다.
“그리고 네가 비록 연국의 왕족이기는 하나 이미 금의 사람이 아니냐. 연국 왕족 소유의 금광을 네 맘대로 사고팔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어.”
“아 그거라면 문제없습니다.”
우찬이 난데없이 손등이 입을 맞추는 바람에 덩달아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모르던 이설이 곧 정신을 차렸는지 똑 부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슬쩍 손을 빼 배꼽 앞에 양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었다. 우찬의 입술이 닿았던 왼손 손등을 살살 문지르고 있는 걸 본인은 아는지 모르겠다.
우찬은 내키는 대로 이설을 당겨다 제 무릎 위에 앉으면 무슨 반응을 보일까 심히 궁금했지만, 부끄러워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횡설수설할 이설을 차란이나 대신들 앞에 보이고 싶지 않아 가까스로 충동을 참고 태연히 물었다.
“문제가 없다니?”
“매암산의 금광은 왕족이 아닌 개인 소유지입니다.”
딱 잘라 대답하는 이설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잠시 기다렸다. 순진한 눈망울만 깜빡이던 이설이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덧붙인다.
“그 금광은 제 것입니다.”
명료한 대답은 부연적인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깔끔했지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매암산의 금광 전체가 마마의 것이란 말입니까? 금광이 전부 다요?”
놀라기는 매한가지였겠지만 도통 표현이 풍부하지 않은 우찬을 대신해 차란이 다소 높아진 음성으로 다급히 물었다. 좋고 나쁘고의 감정보다는 그저 놀라운 게 전부라는 듯 떡 벌어진 턱에서 채신머리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차란의 무너진 체통에 혀를 차는 이가 없었다. 순간 정적이 흐르던 대전에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 전부 제 것입니다.”
이설의 명쾌한 대답과 함께 단말마의 감탄사가 한차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우찬은 가장 가까이에서 차란이 비명처럼 ‘맙소사!’ 하고 내지르는 소리에 인상을 슬쩍 구겼다가 이설을 봤다.
생각만큼 어리숙하지만은 않은 이설은 제 대답에 왜 사람들이 놀라는지는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걸 알고 있었으니 여태 숨긴 거겠지.
혼례를 올리기 전 이설이 금으로 가져온 혼수품의 목록을 제출하는 것은 의무였지만, 금에 남겨 두고 온 재산에까지 궁이 관여하지는 않았다. 물론 왕족이었으니 제 몫의 산이나 땅쯤이야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만설지로 향하는 길 중 어느 작은 산 하나가 제 소유지인데, 한겨울이 되면 호수가 얼고 그 위로 달이 비쳐 무척 아름답다는 얘기를 한 번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매암산의 금광은 금시초문이다.
“외람된 질문입니다만 마마, 그럼 매암산에서 채굴된 금 역시 마마의 소유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까?”
평정심을 되찾은 차란이 무표정을 유지하고 정사에 아주 중요한 일인 것처럼 물었지만 속이 빤히 보이는 질문이었다.
이설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겸연쩍게 웃다가 이내 나긋한 말투로 대답했다.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연국의 것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렇군요. ……매암산의 금이 전부 마마의 것…….”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차란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와 별일 아닌 얘기를 들었다는 듯 표정 없는 얼굴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충격이 가시지 않는 눈빛이었다.
티를 내지 않아 그렇지 놀라기는 우찬도 마찬가지였다. 매암산의 금광은 규모가 엄청나다. 산 일부가 북쪽으로 깊이 치우친 까닭에 채굴이 무척 까다롭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 채굴되는 금의 양은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보니 금붙이에 별다른 애정이나 집착이 없던 이설의 태도가 이해가 된다. 저잣거리에 함께 잠행을 나갔을 때도 금가락지는 쳐다도 안 보고 옥 따위에나 한눈팔려 있었다. 연국에서 금이 제법 흔한 줄은 알긴 했지만 그래도 상상했던 이상이긴 하다. 헛웃음이 나오는 걸 참을 길이 없다.
“아무리 네 소유의 금광이라고 해도 그 정도 규모라면 분명 연국에서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연국의 무역에도 타격이 꽤 클 텐데.”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도국과의 문제가 불거진 원인 중 하나인 신첩이 이렇게라도 도움을 드릴 수 없다면 무슨 면목으로 폐하와 여기 대신들, 나아가 금의 백성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있겠습니까?”
“이민족들이 너를 쫓은 게 네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첩이 자리를 비우고 연국으로 돌아간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폐하께서 신첩에게 죄를 묻지 않는 것만으로도 황은이 망극할 따름이옵니다. 그러니 도국과의 일만은 신첩이 도움을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단히 작정을 하고 온 모양이다. 준비라도 한 듯 한 번 더듬거리는 일 없이 써진 글을 읽기라도 하듯 또박또박 말을 전한 이설이 자리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댔다. 언제라고 할 것도 없이 누구에게나 받는 익숙한 자세인데 이설이 제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만은 견딜 수 없는 우찬이 차란에게 곧바로 눈짓했다. 그러자 차란이 황급히 이설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네 마음은 이해하나 도국으로부터 받은 도움이 매암 광산에 빗댈 만큼은 아니다.”
“하오나 폐하 그렇다면 그에 빗댈 대가는 대관절 무엇이 적절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란히 늘어서 있던 대신들 중 누군가가 답답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논의만 벌써 이틀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하니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우찬이 대꾸하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터졌다.
“폐하 말씀이 맞습니다. 도국에 받은 도움이라고 해 봐야 국경 봉쇄와 몇만 병사 지원이 고작인데, 그 대가로 금광을 통째로 넘겨주다니요! 수지 타산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습니다.”
“도국은 우리 금국의 가장 가까운 우호국인 동시에 경계해야 할 나라입니다. 이 정도 투자는 감수해야 합니다. 매암 광산 정도면 장차 두 나라 간의 상호 이익도 보장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리 도국이 금의 우호국이기로서니 이깟 일로 금광 하나를 통째로 바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콧대 높은 도국 작자들이 얼마나 기고만장해질지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그래.”
한 두 사람씩 이어지던 공방이 끝내 여러 사람의 말싸움이 되기 시작하고 장내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중간에 끼어들려던 이설이 저기, 하고 시선을 끌려고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당황한 이설이 우찬을 바라보자 우찬이 가까이 오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제가 혹 잘못한 것입니까?”
“그래서 내 하사품이 그리 우스워 보였군?”
“예?”
단상 아래 대신들이 목청을 높여 공방을 벌이든 말든, 그걸 보고 이설이 발을 동동 구르든 말든 우찬은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는 익숙한 자세로 이설을 올려다보며 눈을 흘겼다.
“그리 큰 금광을 가졌으니 그럴 만도 하지. 이제야 이해가 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폐하께서 주신 물건들을 우습게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것보다 폐하, 신첩의 말대로 해 주세요.”
“매암 금광이라면 나도 탐나는데. 도국 따위에 쉽게 넘겨주고 싶지는 않아.”
“채굴 가능한 남쪽 지역에서는 이미 매장량이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소문만큼 대단한 금광은 아니니 아까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이설이 어린아이 달래듯 어르는 말투로 웃으며 말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심술궂게 장난치려던 기분도 사라졌다.
“손도 안 댄 북쪽 지역은?”
“사시사철 꽁꽁 언 눈 덮힌 땅을 무슨 수로 파내어 금을 캘 수 있겠습니까? 만설지에 눈이 다 녹는 날이 오면 모를까 말입니다.”
“그렇긴 하겠군.”
“그래도 정 탐이 나시거든 폐하께는 다른 걸 드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거라니?”
우찬이 눈을 위로 치켜뜨며 물었다. 이설은 잠시 뜸을 들이다 결국 허심탄회하게 웃었다.
“신첩이 가진 광산이 어디 하나뿐이겠습니까?”
장난스럽게 웃어 보인 이설이 못내 사랑스러워 견디지 못한 우찬이 결국 이설의 팔을 당겼다. 놀란 이설이 바람에 흔들리는 꽃대처럼 끌려와 우찬의 허벅다리 위에 풀썩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천진하게 웃던 얼굴은 어디 가고 수줍어 볼을 붉힌 사내가 품 안에 폭삭 안겨 들어왔다.
세상 떠나가라 소리 내어 웃는 모습을 충격에 휩싸여 구경하는 좌중의 대신들은 안중에도 없는 우찬은 그 순간 더 바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