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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황홀경 (296)화 (296/300)

달의 황홀경

296화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적당히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다고 하던데 태의가.”

“설마 태의에게 저를 안을 거라고 말하신 겁니까?”

누가 뒤통수를 후려치기라도 한 듯 정신이 번쩍 든 이설이 깜짝 놀라 물었다. 목 언저리에 연한 살을 핥고 씹는 우찬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누가 그래, 내가 너를 지금 안을 거라고.”

쪽 하는 소리와 우찬이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홍조가 가득한 얼굴로 숨을 가쁘게 쉬는 이설이 목 부근을 괜히 손으로 문지르며 앞니로 아랫입술을 괴롭혔다. 한껏 달아올랐던 몸에 서늘한 바람이 훅 지나갔다.

“잠깐 들른 거라고 했잖아.”

“아, 음, 예……. 그러셨지요.”

“그만 가 봐야 해.”

“예. 가 보십시오.”

“헌데 넌 표정이 왜 그런 것이야? 태의를 불러 줄까?”

웃음을 참느라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우찬이 이설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우찬의 얼굴이 오늘만큼 얄미워 보였던 적이 있었나? 앞으로 튀어나온 입술을 삐죽이며 이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불분명한 발음으로 퉁명스럽게 내뱉는 대답이 영 진지해 보이지가 않았다.

아직 숨이 고르게 돌아오지 않은 이설이 밭은 숨을 짧게 여러 번 내쉴 때마다 우찬이 볼을 쥔 손바닥에 힘을 줬다. 이러다 얼굴이 그대로 짜부라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 이설이 고개를 털어 우찬의 손을 내렸다.

“얼굴 터지겠습니다.”

“아픈 게 아니라 화가 난 것이었어? 왜?”

“화난 적 없습니다.”

누가 봐도 삐친 게 당연한 목소리로 이설이 양 볼에 바람을 불었다. 볼에 붙은 살이 없어 그렇게 하고도 빵빵해지지도 않는 볼을 우찬은 톡톡 두드렸다가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화가 났는데 뭘.”

“신첩이 감히 폐하께 화를 낼 수 있을 리가요.”

“지금 내고 있는 것 같은데. 왜 화가 났을까.”

“화난 거 아닙니다, 정말.”

황제에게 거짓말을 하면 어떤 벌을 받게 되더라? 입궁 전 급하게 읽었던 법도서를 떠올리며 이설은 생각했다. 솔직히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완전한 거짓말이라고.

이설은 우찬에게 괜히 심술궂은 생각이 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꾹 다문 입술로 노력했지만 별로 시원치가 않았다. 기분은 괜히 울적해지고 표정은 숨길 수가 없고, 우찬은 자꾸만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옆으로 돌렸다 부산하게 움직인다. 제 속마음을 들킨 게 틀림없다는 걸 알아서 표정을 더 펼 수가 없었다.

“정말 화난 게 없어?”

“예.”

“그럼 난 이만 가 봐도 되겠느냐?”

“예 그러세요.”

누가 들어도 못내 기분 나쁜 티가 역력한 목소리로 이설이 시답잖게 대답했다. 괜히 별 관심 없는 척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던 우찬이 곧 웃음을 지우고 일어났다.

위로 올려다보니 역시 장신이다. 태자는 얼마나 더 오래 자라야 우찬을 뛰어넘을까? 그럴 수나 있을까. 태자는 내심 그러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이설이 생각하기에는 아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이설에게 등을 돌린 우찬이 벽 한쪽에 있는 경대 앞에 섰다. 손수 의복을 정제한 뒤 다시 뒤를 돌아섰을 때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우 미인을 황후로 추대할 생각이야.”

“우 미인을요?”

갑자기 화제를 전환하는 우찬에게 그때까지도 불퉁한 얼굴로 투덜거릴 수는 없었다.

우 미인을 만나러 갔을 줄은 알았다. 하여 금전적인 보상과 우 미인의 부족에 아낌없는 지원을 약조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금국에 황후가 필요하다는 건 알았지만, 우 미인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내년까지도 황후의 자리를 비워 둘 수 없었고 마침 적당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머뭇거릴 필요는 없지.”

“아”

“반응이 왜 그러지? 마음에 들지 않아? 혹 네가 욕심내던 자리였느냐?”

“아닙니다. 그냥, 그저……. 우 미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조금 전에 말해 주고 오는 길이었다.”

“진심으로 기뻐하였습니까?”

“그래 보이던데.”

우찬은 불과 조금 전에 만났던 우 미인을 기억해 내기 위해 애쓰는 듯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이설은 구겨진 옷깃을 문지르며 곰곰이 생각했지만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정치적으로 봤을 때 우 미인이 황후에 오르는 것은 황권에 어떤 득이 아닐 수 있겠지만, 적어도 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우 미인 역시 실권도 없는 이름만 후궁인 자리보다는 황후가 되는 편이 부족을 위해 훨씬 나을 것이다. 이설의 입장에서도 모셔야 할 윗사람이 양 소원 같은 여인이 되는 것보다야 우 미인이 몇 곱절은 나았다. 자신을 위해 전장에 뛰어든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황후는 물론 세상에 온갖 좋은 것들로 모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게다가 우 미인이라면 태자에게 좋은 어마마마가 되어 줄 것이다. 모자 사이가 될 두 사람의 관계가 제법 기대가 되었다.

“그럼 됐습니다.”

“그게 다야?”

“그럼요?”

“넌 정말 황후 같은 건 관심에도 없었구나.”

“제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욕심 없기는.”

이미 여러 차례 얘기가 오고 간 뒤라 우찬은 별 구박 없이 이설을 한 번 쳐다보는 것에 그쳤다. 이설은 멍하니 우찬의 뒷모습을 보며 웃었다. 아까 실수로 헤집어 놓은 뒷머리가 붕 뜬 것이 평소 우찬답지 않아 괜히 웃음이 나왔다.

제가 머리 손질을 해 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선뜻 그런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아 우찬이 직접 머리를 만지는 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몸 상태가 좋은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찬은 변함없이 수려하고 아름다워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얼굴이 달아올라 기분이 이상해졌다. 어쩐지 앉아 있기만 해도 하체에 힘이 풀려 자꾸만 몸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싶은 생각을 해 볼 틈도 없이 우찬이 어느새 문 앞에 섰다.

“오늘은 다른 데 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 해 질 때쯤 돌아올 테니 식사는 같이해.”

겨울은 겨울인지라 해 지는 시간이 예전보다 많이 늦어졌다. 해 질 때쯤이란 건 다시 우찬을 만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는 뜻이다. 아쉬워 어깨가 절로 축 늘어지는데 우찬은 아까 언제 그리 애틋하게 굴었냐는 듯 건조해진 눈빛을 보냈다.

“벌써 가시려고요?”

“왜? 더 같이 있어 줘?”

그러자고 하면 우찬은 그럴 수 있을까. 문득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간신히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혹시 태자가 오거든 문전에서 꼭 쫓아내고.”

“안 그럴 겁니다.”

농담으로 웃는 우찬의 기분이 오늘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알겠다. 우찬의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마음 한편이 답답하고 언짢은 건지 모르겠다. 궁 내에 남아 있는 궁인이 없어 스스로 장지문을 열고 나간 우찬이 문을 닫기 전 좁은 틈새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입술이 움직인 것 같은데.

침상 아래에 발을 내려놓고 앉아 있던 이설이 눈을 비볐다. 방금 뭐라 하셨는데, 그게 뭐지. 아무도 없는 장지문을 멍하니 쳐다보던 이설이 갑자기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확신이 없던 느릿한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장지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한 발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다른 한 발이 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삐그덕 거리는 나무 바닥 소리가 요란하게 궁을 울렸다.

“폐하!”

모퉁이 한 곳을 돌자 우찬이 혼자 조용히 걷고 있었다. 뒤를 힐끗 돌아봤다가 이설이 달려오는 걸 발견하자 놀란 듯 자리에 멈춰 섰다.

“폐하! 잠시만요!”

“뛰지 말거라. 다쳐, 뛰지마, 설아.”

아직 닿지도 않은 팔을 먼저 뻗으며 다가오는 우찬의 표정이 전에 없이 불안했다. 이설은 달리던 속도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우찬에게 뛰어들었다. 이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두 발로 자리에 단단히 버틴 우찬은 흔들림 없이 이설을 받아 든 뒤 등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다칠 뻔했어. 이게 무슨 짓이야.”

“폐하 말씀이 맞습니다.”

“응?”

“신첩, 화가 조금 난 것 같습니다.”

다짜고짜 달려들어 화가 났다고 칭얼거리는 이설이 낯선 우찬이 고개를 뒤로 빼며 이설을 내려다봤다. 이설은 그게 싫어 목에 손을 둘러 당겼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는 걸 보니 우찬을 놀라게 한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았다.

“화가 났다고?”

“예. 아니면 음, 삐친 것 같기도 하고요.”

둘의 차이를 명확히 알지 못하겠다. 하여간 기분이 나쁘다는 건 확실하다.

“어찌 되었든 이게 다 폐하 때문입니다.”

“내가 무얼 어쨌다고?”

진심으로 황당해 마지않는 우찬의 표정을 보니 더 얄밉다. 왜 그러는지 다 알면서 괜히 저를 놀리려 그러는 게 뻔하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심술이 더 생겼다.

“폐하께서 또 저를 놀리시려고 그러시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가 뭘 어쨌기에 그래?”

난처한 눈에 담긴 애정을 엿본 이설은 괜히 피어오르는 웃음을 삼키며 까치발을 높이 들었다. 그래도 모자라 끌어안은 목을 당겨 최대한 우찬과 눈높이가 맞도록 했다.

그리고는 쪽.

일부러 그게 낸 것도 아닌데 민망한 입맞춤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우찬이 미리 궁인들을 다 쫓아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별꼴을 다 보여줄 뻔했다고, 이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안도하는 건 둘째 치고 우찬이 남아있다. 어이가 없다 못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기가 막힌 우찬은 구부정한 허리 그 자세로 이설을 봤다.

“이게 다야?”

“뭐가 더 있어야 합니까?”

“이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왔으면 적어도 이 한 꺼풀 정도는 벗겨야 하지 않겠느냐?”

우찬이 장포를 흔들며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언제쯤 나의 설이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우찬의 한숨 섞인 말을 끊었다. 매달리다시피 끌어안은 목을 제 쪽으로 당겨 입을 맞췄다. 서로의 타액을 주고받는 혀도 없고 단순히 입술만 대고 있는, 정말 말 그대로 입맞춤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행위만으로도 이설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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