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제2장 (3/5)

데자 뷰

2권

제2장

-3-

짐짝이나 다름없는 캐리어를 끌고 택시에서 내린 선규는 짧은 한숨부터 쉬었다. 당장 바다를 보겠다며 나설 때만 해도 정신이 없어서 힘든지, 귀찮은 일인지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나름 충격에서도 벗어난 데다가 요 며칠 사이에 기온이 올라가 살짝 덥기까지 했다.

캐리어를 질질 끌고 레스토랑으로 향한 선규는 오픈 전이라는 팻말을 보곤 망설였다. 태훈이 오라고 해서 오긴 했으나 아직 영업 개시도 안 한 레스토랑에 무턱대고, 게다가 이렇게 큰 캐리어를 두 개나 질질 끌고 온 게 괜히 눈치가 보였다. 차라리 급한 약속이 생겼다고 한 뒤에 호텔로 갈까. 선규의 짧은 고민이 무색하게도, 레스토랑 문이 열림과 동시에 고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금방 오신다고 했는데 안 오셔서 기다리는 중이었어요.”

“고 실장님. 안녕하셨어요. 저 너무 무턱대고 와서 미안해요.”

“네? 왜 그런 말을 하세요! 미안하다니요. 하여튼 얼른 들어오세요. 대표님은 지금 중요한 약속 때문에 자리를 비우셨어요.”

고 실장은 양조장에서 만났을 때완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그는 쉼 없이 입술을 움직이며 캐리어를 끌고 갔다. 선규가 붙잡으려는 것을 밀어내는 손길이 은근했다. 레스토랑에 처음 왔을 때와 같은 룸에 들어가자 이상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사업상 약속이라도 있었나 봐요. 이렇게 중요한 날인지도 모르고 제가 괜히 연락을 했네요.”

“아니에요. 그분이 갑자기 약속 날짜를 바꾼 거라서요.”

“그분이요? 아, 아니. 대답하기 어려우면 안 해주셔도 돼요.”

“에이, 어려울 것도 없죠. 여기에 투자하신 분인데 이분도 이 대표님이고 저분도 이 대표님이라.”

고 실장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것은 확실히 비웃음이었으나 그의 입매는 금방 균형을 잡았다. 선규는 고 실장의 말에 태훈이 지금 누구를 만나러 갔는지 알 수 있었다. 서울에 오는 날이 너무 좋지 않거나 혹은 날을 제대로 잡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금방 오실 거예요. 항상 약속이 긴 편은 아니었거든요.”

“레스토랑에서 만나지 않고 밖에서 보시나 봐요.”

“그건 우리 대표님이 엄청 싫어하셔서요. 다짜고짜 오지 않으신 것만 해도, 뭐…….”

고 실장의 대화로 보아하건대 그 역시 태훈의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고 실장이 ‘그 이 대표’와 아는 사이일 리 없었지만 호감이 바닥 치게 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선규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고 실장은 얼른 얼굴빛을 바꾸고 차라도 가져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선규는 날짜를 헤아려 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다시 차분한 눈매로 돌아왔다. 애석하게도, 그는 오늘 공장에 오기로 한 클라이언트에 대해 떠올리고 말았다. 쉬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이랬다. 대량 납품이나 고가 주류 제작을 위한 누룩 띄우기 등등. 뭘 그렇게도 많이 신경 쓰고, 가슴에 품은 채로 살았는지.

“자,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가장 무난한 허브티로 가져왔어요.”

“다 잘 마셔요. 고 실장님도 특별한 일 없으시면 저랑 같이 있어 주세요.”

“그럴까요? 대표님 오기 전까지만 여기 있어야겠어요.”

“오픈 준비할 때엔 항상 이런가 봐요.”

“그렇죠. 특히나 6월부턴 계속 준비해 오던 시즌 메뉴가 전부 바뀌거든요. 아, 며칠 전에 오셨으면 다 맛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정식 판매 시작하면 또 올게요.”

고 실장은 사근사근 선규를 대하며 옅은 긴장을 희석시켰다. 선규는 자신이 양조장을 그만뒀다는 걸 알고 있으니 고 실장도 아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게다가 집채만 한 캐리어를 두 개나 끌고 왔으니 이렇게 구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최근 태훈이 얼마나 예민하게 굴었는지, 그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눈치 보느라 힘들었는지를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선규 씨랑 연락이 닿자마자 낯이 확 폈다는 말도 덧붙였다. 선규의 얼굴 위로 미세한 열이 모였다.

“어제 약속 잡으시면서 통화할 때 제가 옆에 있었거든요. 방금 전에 지배인을 쥐 잡듯이 잡은 사람이 사무실 들어오자마자 화색이 달라지는데! 하, 그걸 보셨어야 했는데.”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나저나 저는 두 분이 그렇게 금방 친해지신 줄은 몰랐어요. 양조장 처음 갔을 때에 두 분이 구면인가, 생각하긴 했는데.”

“다른 분들도 그런 이야기 하시더라고요.”

아무렇지 않은 척 의연한 말투와는 달리 테이블 아래 놓인 선규의 손은 바빴다. 그는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것을 느끼며 허벅지에 손바닥을 닦아 댔다. 창밖을 보던 고 실장은 태훈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먼저 발견했다. 하지만 굳이 선규에게 말하진 않았다. 그가 계속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게 고 실장의 눈에 전부 보였다.

금방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 태훈은 격하게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곤 직원들에게 가볍게 인사하며 선규가 있을 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있던 고 실장이 인사하자 태훈은 그와 눈을 마주치곤 나가 보라 손짓할 뿐이었다. 고 실장이 쀼루퉁한 표정으로 나가자마자 선규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선규는 대답 없이 걸어오는 태훈이 약간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차분한 눈으로 걸어와 창가의 블라인드를 내릴 뿐이었다. 늦봄의 태양빛이 강하긴 했다. 선규는 눈을 뜨기 편해지자 몇 번 깜빡거리곤 다시 태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씨 한 점 남지 않은 듯이 보였던 태훈의 눈이 타오른 건 순식간이었다.

안 본 사이에 야윈 선규의 뺨을 한 손으로 감싼 태훈은 그대로 입술을 삼켰다. 태훈이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달려들자 선규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테이블 위에 걸쳐져 있던 선규의 손은 천천히 태훈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선규는 자신을 향한 갈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입술의 움직임과는 다르게, 허리와 뺨을 쥐고 있는 손은 단단하나 부드럽기만 해서 기분이 울렁거렸다.

“흐으…….”

태훈은 선규의 뺨과 귓불을 혀로 핥으며 뜨거운 숨을 귓가에 불어넣었다. 선규는 등을 타고 오르는 소름에 눈을 질끈 감으며 태훈의 팔을 붙잡았다. 태훈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 이 방에 들어올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긴장되는 마음 때문에 소리조차 마음껏 낼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기껏 해봐야 키스가 전부고. 꽉 다물려 있던 태훈의 날카로운 눈매가 서서히 뜨였다.

“잠깐, 태훈 씨…….”

선규의 부드러운 손이 태훈의 머리부터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태훈은 다시 선규의 입술을 빨아들이며 그의 몸을 단단한 팔로 끌어안았다. 이렇게 안고 싶은데 안지 못한 게 며칠이나 됐지. 누나를 데리고 공장에 찾아가서 조금은 놀란 네 얼굴을 보고, 손이라도 닿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주말 내내 너와 함께 있을 거란 계획도 세우고.

태훈은 제가 모든 것을 망친 것은 아닌가까지 생각이 미치자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분명 선규에게 이런 말을 하면 언젠가는 이렇게 됐을 거라고 대답할 게 뻔했다. 이성적으로 머리를 굴려 보면 주 대표의 처신이 잘못된 것이었으나 태훈은 전부 그의 탓을 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했다. 이렇게 돌아왔으니 됐어. 내 옆으로 먼저 왔으니 됐어. 태훈은 간지럽히듯 선규의 아랫입술을 핥으며 생각했다.

“그래, 오랜만이야.”

“얼굴이 너무 굳어 있어서 화난 줄 알았어요.”

“내가 너한테 화낼 일이 뭐가 있어. 그런 거 전혀 없어.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

“얼굴 상한 건 태훈 씨도 마찬가지네요.”

선규는 애틋함을 담은 손끝으로 태훈의 이마부터 턱 끝까지 조심스레 쓸었다. 선이 굵은 눈썹과 매서운 눈은 좀 더 팬 기분이었다. 살도 별로 없어서 날카로움만 뽐내던 뺨과 턱 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라도 먹자. 저렇게 큰 짐을 두 개나 들고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어.”

“그렇지도 않았어요. 약속 있어서 나갔다 오는 길이라면서요.”

“응. 원래 약속은 내일이었는데…… 아냐.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나도 배고팠는데 잘됐어. 뭐라도 준비해 달라고 말하고 올게.”

선규는 잠시라도 태훈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하마터면 그를 붙잡을 뻔한 손은 다른 한 손에 금방 잡혔다. 태훈은 문을 닫는 순간에도 살짝 뒤를 돌아 선규와 눈을 마주했다. 선규는 그 눈빛에 화답하듯 살짝 미소를 지은 채 의자 위에 편히 앉았다. 금방 돌아온 태훈은 선규의 맞은편에 앉으며 아까보다는 밝은 미소를 보였다. 평소의 태훈과 가장 비슷한 얼굴이었다.

“여행은 어땠어. 좋았어?”

“맨날 똑같았어요. 앉아서 바다 보고, 자고.”

“쉬는 것도 중요하니까. 갑자기 떠난 건데 나쁘지 않았으면 그걸로 된 거지.”

“그 말도 맞네요. 하여튼 태훈 씨한테 전화한 다음 날부터는 많이 돌아다녔어요. 맛있다는 집도 찾아다니고.”

“잘했어. 좋았겠다.”

태훈은 자신의 말에 선규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는 것을 보곤 눈을 살짝 치켜떴다. 무슨 말이든 편히 해보란 표정이었지만 선규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선규가 삼킨 말은 다음에 태훈의 시간이 허락한다면 함께 가자는 내용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편히 말할 수가 없었다. 폐 끼치는 게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사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샐러드가 나왔다. 선규는 딱히 입맛이 있진 않았으나 태훈의 앞이기에 열심히 먹었다. 뒤이어 나온 파스타도 꽤 먹성 좋아 보이는 사람처럼 잘 먹자 오히려 태훈이 걱정할 정도였다. 태훈의 앞에서만큼은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의 선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야? 묵을 곳은 있어?”

“당분간은 좀 저렴한 호텔에 있으려고요. 월요일부턴 부동산 사장님이랑 약속도 잡아 놨어요.”

“뭐? 부동산?”

“네. 가서 보기로 한 방이 몇 개 있거든요.”

선규의 말에 태훈의 눈이 커졌다. 그러더니 금세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을 지었다. 선규는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굳이 그 내용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며 물만 들이켰다.

“아니, 뭐 하러 이리저리 돈을 써. 내가 있는데 호텔이라니.”

“태훈 씨, 숙박업도 하세요?”

“장난치지 마. 나 그럴 기분 아니야. 그리고 방을 보러 간다니?”

“나와서 살려면 당연히 방이 있어야죠.”

“아니, 그 방이 나도 있잖아.”

선규는 태훈의 말도 안 되는 투정에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물론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낸 소리는 아니었으나 태훈은 속상하다는 표정까지 지을 정도였다.

“제가 아무리 급한 사정이 있다곤 해도 아무 집이나 갈 수 있겠어요?”

“아무 집이라니. 내 오피스텔만큼 괜찮은 곳 없다?”

“알아요. 그런데 벽이 없잖아요. 그게 탈락 요인이에요.”

“집주인의 취향이니까 좀 봐줄 수 없어?”

“집부터 안 맞는데 무슨 수로 맞춰 가며 살겠어요.”

선규는 장난치듯 말했지만 태훈은 진심으로 다 죽어 가는 표정과 목소리로 선규의 이름을 불렀다. 약간의 애교까지 녹아 있는 목소리에 선규의 마음이 아예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의외로 단호한 선규의 태도에 결국 태훈은 소원의 문턱을 낮췄다.

방을 구할 때까지만이라도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편히 지내란 말에 선규는 혹하고 말았다. 남이 다 해주는 호텔살이가 나쁠 리 없었지만 아무리 저렴한 곳을 간다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지금 그 정도의 돈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뭐든지 장기적으로 봐야 할 때였다.

태훈은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해 조금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지금의 수확에 나름 만족해하며 커피 잔을 들었다. 어쨌든 오늘부터는 선규와 함께였다.

태훈의 차에 오른 선규는 줄곧 태훈의 눈치를 보았다. 말없이 운전만 하는 태훈의 굳은 입가와 눈매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화낼 일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차라리 화를 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선규는 늘 화나 있는 사람의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게 익숙한 사람이니까.

“왜 네가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지어. 우울한 건 이쪽인데.”

“아뇨, 그냥. 우울할 것까지야 있나요. 당분간은 같이 지내게 될 텐데.”

“나는 당연히 너 데리고 살 생각 하면서 즐거워했단 말이지. 너는 열심히 방 구하러 다닐 텐데 마음에 드는 집 안 구해졌으면 좋겠다고 빌 수도 없고.”

선규가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웃자 태훈의 이마 위에 심술이 붙었다. 이렇게 웃으며 넘길 일이 아니래도 그러네.

“신세도 적당히 져야죠. 그래도 태훈 씨 오피스텔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알아보는 중이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완전 가까운 건 아니고 대중교통 타면 한 30분 거리로요. 가까운 곳은 너무 비싸서 안 돼요.”

“좋다 말았네. 같이 살면 얼마나 좋아? 집값에, 생활비도 절약되고 보고 싶을 때 볼 수도 있고. 차라리 내가 이사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운전에 집중하세요.”

“늦봄인데 아직도 찬바람이 부네. 이제 더워질 때인데.”

태훈이 신호 대기를 하는 동안 선규의 손을 잡았다. 선규는 태훈의 말에 입안을 살짝 깨물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오피스텔에 들어가자마자 짐을 벽에 세워 둔 태훈은 선규를 끌어안았다. 선규 역시 그의 몸을 끌어안으며 깊은 숨을 쉬었다. 익숙한 향이 선규의 감각을 깨웠다.

“마트라도 다녀올까요?”

“이제야 단둘이 남았는데 무슨 마트야.”

“내가 내일부터 먹을 수 있는 게 있긴 해요? 시리얼이랑 우유만 있어도 안 가도 되는데.”

“……가자.”

생각이 냉장고 안의 상태까지 닿자 태훈의 뜻이 다시 한번 꺾였다. 좋아 죽을 정도의 사람을 굶길 수야 없지 않겠는가. 꽤 괜찮은 조식이 준비되고 청소할 걱정도 없는 호텔에 가겠다는 사람을 꼬드겨서 집에 데려왔으니 이 정도야 해줘야지. 태훈은 입꼬리를 턱 아래까지 늘어뜨릴 기세였다.

“왜 그렇게 아쉬운 표정을 지어요.”

“둘만 있고 싶은 건 나뿐인가 싶어서.”

“어차피 밤은 길어요.”

태훈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가 싶어서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몸을 돌렸다. 태훈의 시야엔 잘 익은 사과 같은 얼굴을 한 선규가 서 있었다. 당장에라도 얼굴을 가리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그는 용케 참아 내며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태훈은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선규는 느리게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태훈의 손끝이 선규의 입가에 닿았다. 그 손길은 방금 전처럼 조심스러웠다.

“입술 깨물지 말래도.”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버릇이라서…….”

태훈이 키스라도 퍼부을 줄 알았던 선규는 그 손길에 무언가를 잔뜩 바라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용케 이성이 승리한 태훈은 그대로 선규의 어깨를 한 팔로 끌어안고서 오피스텔 밖으로 향했다.

태훈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선규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선규의 얼굴은 꽤 결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러면 뭔가 나한테는 불리한 말을 하던데. 태훈의 직감은 오늘도 비껴가질 않았다.

“생활비랑 월세는 얼마나 드리면 되나 싶어서요.”

“뭐?”

“다음 달에 고지서 날아오면 너무 늦을 것 같고 우선 이번 달 몫은 드려야 하니까요. 그리고 월세도 반은 드리고.”

“아주 본격적이시네, 주선규 씨.”

“이래야 제 마음이 편하죠.”

태훈의 입가가 비틀렸다. 네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예상을 아주 안 한 건 아니었지만 함께 지내는 첫날부터 집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태훈은 어떻게 해야 이 고집쟁이를 꺾을 수 있을지 고민하며 머리 위의 수건을 내려놓았다.

“금방 방 구해서 나간다더니, 사실 나갈 생각이 없나 보구나?”

“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월세로 얼마를 달라고 할 줄 알고 그래?”

“태훈 씨, 화났어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고…….”

“돈 같은 소리 다시 한번 꺼내면 나도 크게 화낼 거야. 네 얼굴 보면 제대로 화 못 낼 테니까 전화로 화내야지.”

태훈은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선규는 그것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좋게 넘기려 하는 게 충분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선규는 시선을 돌리며 미안하다 사과했다.

“이렇게밖에 말할 줄 몰라서 미안해요.”

“미안할 일 아니지. 남한테는 그렇게 하는 게 맞으니까.”

하지만 너에겐 내가 단순한 남이 아니었으면 한단 말이지. 태훈의 말에 선규의 고개는 더 아래로 떨어졌다. 태훈은 선규 쪽 식탁 앞을 손등으로 노크하듯이 쳤다. 선규가 그를 응시하자 태훈은 별일 아니란 듯이 어깨를 들썩이며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선규는 의자를 소리 나지 않게 밀며 태훈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허벅지 위에 앉은 선규는 태훈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태훈은 선규가 무얼 하든 가만히 있을 생각이었다. 그가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게끔 허리만 받쳐 줄 뿐이었다.

선규는 선이 진한 태훈의 눈썹 위에도 입을 맞췄고 늘 자신만 담고 있는 눈꺼풀 위에도 키스했다. 입술은 느리게 내려왔다. 작은 동물처럼 태훈의 콧방울 위에 자신의 콧대를 부비던 선규는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삼키듯 태훈의 윗입술을 빨았다.

태훈은 선규의 등골을 따라 손을 내리며 옷 위를 훑었다. 선규가 태훈의 목을 끌어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규의 몸을 받쳐 들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한 힘에 몸을 일으킨 선규는 두 다리로 태훈을 옭아맸다. 태훈은 성큼성큼 침대 위로 향했다. 선규는 등 뒤로 느껴지는 폭신한 기분에 눈을 떴다. 방금 전 샤워하며 옷을 갈아입은 태훈이 새 옷을 벗어 던지는 걸 보며 선규도 옷을 벗기 위해 티셔츠의 밑단을 붙잡았다.

“아니, 가만히 있어.”

“왜요?”

“내가 벗겨 주고 싶어. 내가 다 해줄게.”

“그 말이 더 불안한데요.”

“아냐, 정말 오늘은…… 다정하게 해줄게. 녹아내려도 좋을 만큼.”

늘 그 정도로 좋긴 했는데. 선규는 자신의 다리를 벌리며 그 가운데에 앉는 태훈을 보며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지금 태훈을 성적으로 자극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태훈이 천천히 내려앉자 선규는 다시 그의 머리를 감쌌다. 마주 닿은 입술과 혀는 서로를 부드럽게 핥았다. 선규는 그의 입술이 한 번씩 떨어질 때마다 아쉽다는 듯 팔에 힘을 주었다.

끈적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태훈의 손은 천천히 선규의 티셔츠 안으로 향했다. 피부 위를 유영하듯 움직이던 손은 티를 위로 끌어 올렸다. 태훈은 선규의 목덜미에 이를 박으며 여린 살을 빨아들였다. 자신을 말릴 줄 알았던 선규에게서 아무런 신호도 오지 않자 태훈은 그 부분을 혀로 핥아 댔다.

“읏…… 태훈 씨…….”

“벌써 너무 좋아서 어쩌지.”

태훈은 웃으며 다시 선규에게 입 맞췄다. 선규는 까슬한 자신의 입술에 닿는 말캉한 감촉에 흐린 시야를 차단했다. 이제 정말 입술 그만 깨물어야지. 그는 태훈의 머리를 헤집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태훈의 따뜻한 손은 차가운 피부 위를 지나 맥동하는 가슴 위에 닿았다.

태훈은 선규의 허벅지와 사타구니 위에 자신의 성기를 비비며 선규의 목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여길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한 번도 닿지 못하게 했으니 그 한을 푸는 건가. 선규는 희미하게 웃으며 태훈의 너른 어깨를 매만졌다.

“목을…… 이렇게 좋아하는 줄은 읏, 몰랐네요.”

“너니까 그렇지. 이제 마음껏 해도 되니까.”

태훈은 울대뼈를 혀로 핥으며 대답했다. 따뜻한 숨이 목덜미 위에 퍼지며 선규를 간지럽혔다. 선규는 눈을 세게 감았다 뜨며 태훈의 귓불을 지분거렸다. 닿는 곳마다 화상을 입는 건 아닐지 걱정될 정도로 홧홧하게 타올랐다. 태훈의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손은 선규의 티셔츠를 벗겨 냈다. 하얀 피부가 눈에 들어오자 태훈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몸을 숙였다.

태훈이 선규의 쇄골을 입술로 물고 핥는 사이 그의 손은 선규의 엉덩이로 향했다. 부드럽게 안겠다던 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선규의 둔부를 붙잡은 두 손에 들어간 힘은 평소와 다르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갈 태훈이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손에 힘을 주며 선규의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곧 이렇게 될 거야, 라는 듯 움직이는 행태에 선규는 손에 힘을 주며 긴장을 풀기 위해 애썼다.

“밤은 길다고 했지?”

“아직 저녁, 흐으…….”

“해 떨어졌으면 밤이지.”

태훈은 선규의 두 다리를 모으곤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겨 냈다. 태훈은 반쯤 고개를 든 성기 끝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선규와 눈을 마주했다. 선규는 매끄럽게 말려 올라가는 태훈의 입꼬리를 보며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났나 봐?”

“안…… 돼, 흐윽……!”

태훈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규의 성기 끝을 빨아들였다. 말캉한 입술과 혀가 닿자 선규는 허리와 엉덩이를 바짝 조였다. 깊게 삼켰던 지난번과는 달리 앞부분만을 혀 위에 올린 채 굴려 대자 선규는 두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크게 신음했다. 마른 배가 들썩이고 밭은 숨이 터져 나오며 주위의 온도를 올려 댔다.

태훈은 슬슬 깊게 삼키며 고개를 움직였다. 그 자극에 선규의 입에서 터져 나온 신음이 크게 울렸다. 선규의 손은 빠르게 태훈의 머리칼 사이로 퍼졌다. 성적 자극에 놀란 손가락들은 갈 길을 잃고 태훈의 귓가와 머리를 헤집느라 바빴다.

“하아― 읏, 그만…… 그만, 제발……!”

선규의 애처로운 신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태훈의 몸은 바빠졌다. 태훈의 손은 허벅지를 간지럽히며 더욱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꽉 아물린 구멍에 손가락 끝이 닿자마자 쑤셔 넣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태훈은 그 생각을 잠재우며 그 주위를 간지럽히듯 굴릴 뿐이었다.

태훈과 마지막으로 관계를 가진 뒤로 한참 동안은 성적 자극에 노출될 일 없었던 선규는 뱉어 내는 숨까지 바르르 떨어 가며 애타게 태훈의 이름을 불렀다. 태훈은 그런 부름에 화답하듯 더욱 강한 힘으로 성기를 빨아들였다. 선규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나 이제, 안 돼…… 빼요, 얼른― ”

그거야말로 태훈이 원하던 바였다. 태훈은 기둥뿌리를 손으로 자극하며 선규가 얼른 사정하게끔 움직였다. 선규는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의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기어이 태훈이 주는 자극에 넘어간 선규가 그의 입안에 사정했다.

비린 맛과 향에 태훈은 살짝 인상을 쓰며 선규가 보란 듯, 허리를 폈다. 선규는 숨을 끊어 가며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런 선규의 눈에 위아래로 움직이는 태훈의 울대뼈와 입술에 맺혀 있던 정액을 혀로 핥아 남김없이 삼키는 태훈이 들어왔다. 선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선규는 손등으로 입술을 막은 채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 보려 애썼다. 물론 전부 흘려보내도 되지만 아직 태훈이 성기를 삽입한 것도 아닌데 잔뜩 흥분한 신음을 그대로 내보내기엔 너무 부끄러웠다. 태훈은 선규의 왼쪽 무릎 뒤를 붙잡은 채로 다리를 벌려 손가락을 푹푹 밀어 넣고 있었다.

“벌써 세 개나 삼켰네.”

“아흑……!”

“꽉 다물렸을 줄 알았는데.”

태훈은 의외라는 듯 웃으며 선규의 내벽을 쿡쿡 쑤셨다. 굵고 긴 손가락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기분에 선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렇게라도 입을 막지 않으면 무얼 원하는지 태훈에게 그대로 말할 것만 같았다.

태훈의 입가엔 멋들어진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그라고 괜찮을 리 있겠는가. 당장에라도 선규의 안에 성기를 밀어 넣고 움직일 때마다 정액이 새어 나올 때까지 사정하고 싶은 게 태훈의 마음이었다.

충분히 풀어졌다고 생각한 태훈은 손을 빼내곤 바로 성기 끝을 구멍에 맞췄다. 선규가 눈을 질끈 감는 것을 보며 태훈은 그의 다리를 꽉 붙잡았다. 제 성기를 삼키는 선규의 구멍을 내려다보던 태훈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끝까지 단번에 삽입했다. 잔뜩 열이 오른 큰 성기를 한 번에 삼킨 선규는 숨까지 끊어 쉬었다.

“내가 그리웠어?”

“으읏…… 윽―”

“그렇다고, 말해.”

태훈은 낮게 몸을 숙인 채로 말했다. 선규는 뜨거운 손으로 그의 볼을 감쌌다. 태훈은 대답해 달라는 듯이 선규의 아랫입술에 입을 맞췄다. 선규의 고개가 미약하게 움직였다. 태훈은 그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됐는지 선규에게 부드럽게 키스했다.

녹아내릴 것처럼 굴겠다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늘 굶주린 짐승처럼 선규에게 달려들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박아 대던 것과 오늘은 확실히 달랐다. 태훈은 부드럽게 쳐올리는 대신 성기를 귀두가 걸칠 정도로 뺐다가 뿌리 끝까지 느리게 박았다. 선규의 호흡은 길어졌지만 안이 가득 차는 감각에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태, 후으…….”

미처 태훈의 이름을 다 부르지 못한 선규는 태훈의 손을 붙잡았다. 태훈은 바짝 조여드는 둔부와 구멍에 낮은 신음을 뱉으며 움직였다. 좀 더, 조금만 더 빨리. 늘 천천히 움직여 달라고 말해 왔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생각이 드는 마음에 선규는 태훈 모르게 울상을 지었다.

그런 와중에도 얼마나 깊게 들어오는지, 온 내벽을 다 자극하며 잘 느끼는 곳을 꾹꾹 눌러 대며 느리게 빠져나가는 태훈의 성기에 선규는 다른 의미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태훈의 손가락 역시 몸을 휘어잡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끊임없이 간지럽히듯 온몸을 돌아다니는 손 때문에 선규의 흥분은 배가 됐다.

“태훈 씨…… 나…….”

“이야기해. 다 들어줄게.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흐읏…… 빨, 리―”

성기를 밀어 넣던 태훈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선규가 발을 잔뜩 오므린 채 무릎에 힘을 주기에 충분히 느끼며 좋아하고 있는 줄 알았다. 허리에 힘을 주고 싶어도 이게 좋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할 줄이야. 그래서 계속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구나. 태훈의 얼굴 위로 나른한 미소가 퍼져 나갔다.

“잘 안 들려, 선규야.”

“거짓―말…… 윽!”

“다시 한 번만 말해 줘, 응?”

“얼르은, 빨리……―”

선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태훈이 움직였다. 그는 평소처럼 빠져나갈 리 없는 선규의 몸이 도망이라도 갈까, 양손으로 붙든 채 퍽퍽 쳐올리기 시작했다. 터져 나오던 선규의 신음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비음이 섞인 신음은 온전히 쾌락에 젖어 있었다. 이제 막을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입가에서 손을 내린 선규는 자신의 배를 더듬어 내려가며 선규의 손에 닿으려 했다.

“좆을 잘, 삼킬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내가 눈치, 없이 굴어서 화났어?”

“아니, 아니야…… 하아, 윽…….”

“아까보다 더, 조이는데 이렇게 좋아, 할 줄은 몰랐네.”

태훈은 선규의 몸을 끌어안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선규는 그 말에 오히려 자극을 받았는데 아래를 오물거리기 바빴다. 태훈은 작게 욕을 하며 더욱 거세게 움직였다. 흥분이 차오를 때마다 선규의 눈에 눈물도 차올랐다. 그것들은 금방 커다랗게 방울지며 떨어졌다. 선규는 태훈의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며 그의 이름을 읊었다.

태훈은 선규의 입술에서 제 이름이 나올 때마다 깊게 성기를 쑤셔 넣었다. 부푼 귀두가 선규의 안을 짓누를 때마다 성기에 들러붙는 내벽에 흥분이 몰려왔다. 성기 끝에 피와 열기가 몰리며 이성을 녹여 버리고 있었다.

선규를 녹이려 했는데, 내가 당했네. 태훈은 선규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씹어 대며 뜨거운 숨을 뱉었다. 깊게 얽힌 두 사람의 주위로 열기가 모여들었다.

이미 한 번 사정한 선규의 성기는 빳빳하게 고개를 든 채 선액을 흘려 댔다. 태훈은 일부러 더 느끼라는 듯 몸을 살짝 밀착시킨 채로 움직였다. 선규는 제 성기에 태훈의 배가 닿았다가 쓸릴 때마다 앞뒤로 전해지는 희락에 울 것처럼 신음했다. 태훈의 손이 엉덩이를 쓸며 손에 쥐자 선규는 살갗에 닿는 열기 어린 태훈의 성기를 느끼며 다시 사정했다.

“아아― 태훈 씨…….”

선규가 흐느끼듯 신음하며 태훈의 귓불을 핥았다. 태훈은 오늘 선규가 보이는 행동들에 하나하나 놀랄 겨를이 없었다. 태훈은 쳐올리는 속도를 살짝 낮추며 선규의 안에 사정했다. 느리게 살결이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태훈은 선규의 입술을 찾았다. 사정 후 느리게 선규의 안에서 움직이며 키스하자 선규는 흐린 신음을 흘리며 태훈의 몸을 끌어안았다. 태훈은 사탕을 빠는 듯 선규의 입술을 탐하며 그의 엉덩이를 고쳐 잡았다.

“천천히 해요…….”

“너는 다른 걸 원하는 줄 알았는데.”

태훈은 놀리는 의도가 다분한 말을 뱉으며 살짝 허리를 움직였다. 선규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다가 다시 태훈의 눈을 마주했다. 한 소리 들을 거라 생각했던 태훈에겐 이런 선규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밤은 길다고, 했잖아요.”

“주선규 때문에 미치겠네.”

태훈은 선규의 목덜미에 콧대와 입술을 부비며 말했다. 선규는 태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끄러움을 외면하려 애썼다. 자신의 안에서 점점 크기를 키우는 태훈의 성기가 느껴졌다. 천천히 들락거릴 때마다 아까보다 더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선규는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태훈은 선규의 몸을 끌어안으며 그를 골반 위에 앉혔다. 깊게 들어온 성기에 선규가 밭은 숨을 쉬었다. 그는 태훈의 어깨를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선규의 구멍이 움찔거리며 더 아래까지 삼켰다. 태훈은 목을 살짝 뒤로 젖히며 선규의 쇄골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우리의 밤은 얼마나 길지 모르겠네.”

“보면…… 알, 겠죠.”

“선규가 너무 여유로우니까 내가 괜히 심술 나잖아.”

태훈은 허리를 움직이며 선규의 유두를 핥았다. 축축한 감촉에 선규는 작은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선규는 자신의 움직임에 태훈의 움직임이 조금 달라졌다고 느꼈다. 그는 엉덩이를 살짝 앞뒤로 흔들며 태훈을 자극했다. 태훈은 벌어진 선규의 허벅지 안을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위로 당겼다. 그들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태훈은 왜 선규가 이 집에서 지내고 싶지 않은 이유로 실내 인테리어를 꼽았는지 깨달았다. 선규가 잠든 사이 음식이라도 제대로 해주기 위해 부산스레 움직이자 선규가 바스락거렸다. 물론 전에도 정사 후에 선규가 깊게 잠들긴 했었지만 오늘은 반찬이 하나도 없어서 요리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니 소음도 계속 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요리를 마친 태훈은 아주 조심스레 조리 도구를 내려놓았다. 선규가 일어나서 씻는 동안 나머지를 준비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는 식탁 의자도 살짝 들어 올린 채 빼야 했다. 이 정도였구나. 혼자 사는 데다가 남이 와서 자고 갈 일이 아예 없었으니 이런 불편함을 깨달을 일이 없었다. 그래, 벽이 있고 문이 있는 게 좋긴 하지.

“어, 일어났어?”

“네……. 크흠.”

“물 줄까? 미지근하게 데운 걸로 줄게.”

태훈은 재빨리 요리를 위해 살짝 데워 뒀던 물을 한 컵 따랐다. 선규는 목이 꽤 말랐는지 그 많은 물을 한 번에 다 마셨다. 그는 환자를 돌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선규의 얼굴을 살폈다. 태훈의 표정을 본 선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퍼졌다.

“왜 그렇게 봐요. 뭐 묻었어요?”

“아니. 그냥…….”

“다른 때 같았으면 양심은 있냐고 한마디 했을 텐데.”

“네가 한 말이 있으니까 그렇게는 못 하겠지?”

선규는 태훈의 말에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금방 태도 바뀌는 것 봐.”

“장난이야. 아침 준비 다 했어. 간단하게 씻고 나와.”

태훈은 선규의 몸을 꽉 안아 일으켜 주었다. 그는 귓가와 볼에 가볍게 뽀뽀하곤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선규는 천천히 욕실로 향하며 요리를 마무리 짓는 태훈을 주시했다. 저렇게나 다정한 사람이라니. 선규는 그에게 받은 수많은 호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탁 앞에 앉은 선규는 저도 모르게 음식 맛에 대해 은근히 기대하는 중이었다. 지난번에 먹었던 것들도 전부 맛있었지. 거기에 오늘은 반찬도 새로 만든 것들인지, 모두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다 지금 한 거예요? 나는 하나도 모르고 잠만 잤네요.”

“안 그래도 얼마나 신경 썼는지 몰라. 네가 뒤척일 때마다 혹시 이 소리 때문에 깊게 못 자는 건 아닌가 걱정했거든.”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뭘 걱정까지 했어요.”

“그래도 마음은 그게 아닌 거지. 어쨌든 네가 왜 벽 없는 게 싫다고 했는지 깨달았어.”

선규는 태훈이 입술을 살짝 내밀고 말하는 모습이 꽤 귀여워 보였다. 그는 잘 먹겠다고 인사하며 수저를 들었다. 선규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태훈의 음식은 당연히 전부 다 맛이 좋았고, 선규는 천천히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태훈이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일 부동산 중개사 몇 시에 만나기로 했어?”

“2시요.”

“나 내일 오전이면 일 끝나는데 같이 가도 돼?”

“……수상한데.”

선규는 모난 눈초리로 태훈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네가 못 보는 걸 내가 발견할 수도 있잖아. 원래 집은 혼자 보러 가는 거 아니라 그랬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집을 구하면 문턱 닳아지게 드나들 사람인데 의견을 구하는 정도야 괜찮지 않나 싶었다. 선규는 자신이 태훈의 고집을 꺾기 어려울 거란 걸 알기에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답을 얻은 태훈은 씨익 웃었다. 선규는 그 미소에 약간의 불길함을 느꼈지만 알겠다고 대답한 이상, 번복할 수는 없었다. 그걸 두고 볼 태훈이 아니었으니까.

외출 준비를 마친 선규는 시간을 확인하곤 다시 소파에 앉았다.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태훈은 아침에 나가는 순간까지도 얼마나 좋은 방을 구하는지 지켜보겠다며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그런 와중에도 선규와 입맞춤은 해야겠는지 나름 화를 표현하기 위해 내놓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뽀뽀라도 해달라는 뜻이었다.

그런 아침을 보내고 나니 선규 역시 묘하게 아쉬워지긴 했다. 하지만 집을 구하면 시작하고픈 일이 하나 있었고, 그걸 태훈의 공간에서 할 순 없었다. 바로 자신이 생각해 온 레시피대로 술을 빚는 것이었다. 누룩부터 직접 만들어서 띄워 놓으면 집에 냄새가 심하게 날 텐데, 태훈이 그런 일까지 겪어야 할 이윤 없다고 판단했다.

밖으로 나온 선규는 마침 도착한 태훈의 차를 타고 부동산 중개인과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태훈은 한 번씩 혀를 차며 선규를 귀엽게 노려봤다. 분명 화를 내는 건데 귀여워 보여서 어쩌지. 자꾸 놀리고 싶네. 선규는 왜 태훈이 자신의 반응을 살피며 놀리려 드는지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연락드렸던 주선규입니다.”

“금방 오셨네요. 그럼 갈까요? 제 차로 이동하시죠.”

인상이 좋아 보이는 중개인은 바로 선규와 태훈을 안내했다. 태훈은 말없이 선규의 뒤만 따를 뿐이었다. 이들은 부동산에서 그리 멀지 않고, 태훈의 집에서도 아주 멀지 않은 곳부터 점차 먼 곳으로 갈 예정이었다. 첫 번째 방에 도착하자마자 태훈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여기가 비어 있다는 곳인가 봐요.”

“예. 혼자 살기도 딱 좋아 보이죠? 가구 들어오면 조금 좁아지긴 하는데 어지간한 건 다 들여놨으니까.”

“그러게요. 전 찬장이 조금 많아야 하는데…….”

“천천히 보시고 궁금한 거 이야기해 주세요.”

비어 있는 집이라니. 그럼 당장 가구 사서 들어오기만 하면 끝나는 거 아냐. 태훈의 미간이 점점 깊게 파였다. 못해도 한 달은 같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태훈은 심각해졌다. 결함, 결함을 찾자. 그는 재빨리 화장실로 들어가 물을 내려 보고 또 틀어 보기 바빴다. 젠장, 수압이 너무 좋은데. 물도 쫄쫄 흐르는 게 아니라 잘 나오고.

“안 그래도 화장실 확인하려고 했는데 괜찮네요.”

“어? 그러게.”

“주방도 한번 확인해야겠다.”

화장실 앞을 기웃거리던 선규는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옆에 있던 중개사는 여기가 중심지와 멀지도 않고 교통도 좋다며 열심히 홍보하기 바빴다. 선규는 그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다 아시겠지만, 요즘 부동산끼리 다 연결이 되어 있거든요. 이 집을 가나 저 집을 가나 나와 있는 건 다 비슷해요.”

“그렇다고 들었어요. 저도 어지간하면 빨리 결정하고 싶어요. 집 보러 다니는 게 보통 일도 아니고…….”

“대단한 노동이고말고요. 곧 날도 더워질 텐데 보러 다니기 힘들죠.”

“그래도 보기로 한 집은 다 보는 게 어때. 다른 집이 더 마음에 들 수도 있잖아.”

태훈은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직 몇 군데를 돌아본 것도 아닌데 중개인의 말만 들어 보면 이 집으로 결정하라는 압박 같았다. 선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다음 집으로 가자며 방을 나섰다. 선규는 어깃장을 놓을 줄 알았던 태훈이 집을 세심하게 봐주자 고마운 마음이 더 커졌다. 그는 중개인의 뒤로 가, 태훈의 손등을 톡톡 건드리며 밝게 웃었다. 태훈의 속도 모르고.

두 번째 집은 문을 열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났다. 태훈은 바로 벽지 뒤에 곰팡이가 피었을 거라며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세 번째 집은 정말 좋았다. 엄청나게 비싼 월세만 아니라면.

“첫 번째 집이 여러모로 마음에 드네요.”

안 돼! 태훈은 차마 중개인 앞에서 말은 못 하고 속만 끓였다.

“그렇죠? 거기가 제일 괜찮아서 첫 번째로 보여 드린 거라니까.”

선규는 태훈을 돌아보았다. 태훈은 반쯤 얼굴을 굳히고 있다가 선규와 눈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선규는 그 미소에서 작위적임을 느끼곤 조심스레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입 모양만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태훈은 그 미소를 유지한 채 아무 일도 없는데, 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닌 게 아닌데. 선규는 먼저 부동산으로 들어가는 태훈의 등을 보며 입술을 물었다.

“그럼 첫 번째 집으로 하시겠어요?”

“네. 더 볼 것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지금 제가 연락 넣을게요. 계약일은 언제가 편하세요?”

“저는 언제든 괜찮아요.”

태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주 일사천리네. 그는 어쩌면 당장 나가게 될 선규를 떠올리며 홈 스윗 홈에 대한 온갖 망상을 접어 두기로 했다.

선규는 늘 요리해 주는 태훈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같이 집을 봐준 게 고마워서 밥을 사겠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태훈에게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선규는 내심 놀랐다. 둘만 남자 태훈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왜 그래요?”

“첫 번째 집만큼은 안 되길 바랐다고.”

“왜요? 거기가 제일 나았잖아요.”

“비어 있잖아.”

“네……?”

“당장 가는 거 아니냐고. 아, 진짜. 동거다운 동거는 꿈도 못 꾸게 생겼군. 이거 완전히 동거 향 첨가 수준이라고.”

“아이도 그런 투정은 안 부리겠어요.”

선규는 몸을 살짝 젖히며 크게 웃었다. 태훈은 정말 심통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계속 얼굴이 굳어 있었구나. 선규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태훈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 행동에도 태훈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집에 들어서자 선규의 몸을 뒤에서 와락 끌어안은 태훈은 목덜미에 콧방울을 부비며 선규의 이름을 불렀다.

“자국, 안 보이네.”

“셔츠 입으니까 깃에 가려지더라고요.”

태훈은 목에 입을 맞추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선규는 태훈의 손등을 쓸며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몸을 돌렸다. 품에 안기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선규를 안고 소파 위로 향한 태훈은 그를 허벅지 위에 앉히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첫 번째 집으로 정한 건…… 빨리 들어갈 수 있는 것보다 여기랑 가까워서 그런 거예요.”

“알아. 너도 나름 많이 알아본 거.”

“여행 가서 태훈 씨랑 연락한 이후로 계속 고민했어요. 앞으로 난 뭘 해야 하나. 일자리 잡는 것도 중요한데, 역시 오랫동안 가진 꿈을 포기하고 싶진 않더라고요. 이젠 내 꿈이니까요.”

내 꿈. 선규는 다시 한번 혀를 굴렸다. 이제 이건 내 거야. 그는 주먹을 쥐었다. 태훈의 커다란 손이 그 주먹을 덮었다. 선규는 그 손등 위에 입을 맞추곤 이마를 댔다. 서로의 온기가 옮겨 갔다. 태훈은 이런 순간이 가져다주는 기쁨이 갈수록 더욱 커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다 그만두려 했어요. 어차피 집 나왔는데 술이 웬 말이냐 싶기도 했거든요.”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지.”

“어차피 이렇게 될 거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나 싶기도 하고. 그 순간 태훈 씨가 한 말이 생각나더라고요.”

“나? 무슨 말?”

“다 포기했다던 말이요. 그러니 편해졌다고. 나도 그러기로 했어요. 집에서 인정받는 거, 그거 하나만 포기하자.”

“내가 그랬나.”

“나는 왜 그게 안 됐을까요. 왜…… 사랑받고 인정받겠다는 헛된 기대를 포기하지 못했을까.”

“헛되지 않아. 기대하는 게 당연하잖아.”

선규가 끄덕이자 태훈은 목 뒤에 입을 맞추며 그를 당겼다.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는 이런 기분이 좋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늘 깊은 우울 속에서 산다고, 그러니 이런 상태는 나에게 좋지 않다고 여겨 왔다. 결이 다른 기분이란 것을 알지만 안락함을 주는 고요에 선규는 눈을 감았다.

“자는 거야?”

“아뇨. 유영하는 중이에요.”

“그럼 조금만 더 쉬고 있어. 샤워하고 나와서 금방 맛있는 거 해줄게.”

태훈의 말에 선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은 마치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되는 듯, 감긴 선규의 눈꺼풀 위에 입술을 내렸다. 선규는 까만 시야와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유유히 헤엄쳤다.

* * *

크림색 셔츠와 짙은 녹색의 슬랙스를 입은 태훈은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오늘부턴 레스토랑에서 여름 시즌 메뉴를 시작하는 날이었다. 태훈이 직접 홀에 나가는 일은 드물기에 정장을 갖춰 입는 일 역시 자주 오지 않았다.

오늘은 정장을 입어야겠다는 생각에 꺼내 놨으나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메뉴인데 옷차림이 너무 더워 보여. 태훈이 정장을 다시 집어넣자 선규가 옆으로 다가와 저 옷들을 골라 준 것이었다.

“다녀올게. 계약서 잘 확인하고.”

“걱정 말아요.”

“같이 갈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계약서 들고 레스토랑으로 갈게요.”

선규는 파일을 들고 가는 모습을 흉내 냈다. 그 모습을 본 태훈은 새삼 몇 달 사이 달라진 선규의 행동에 대해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내려와 차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

처음 만났던 그날,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어적이었던 선규는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펴지 못했다. 물론 지금이라고 어깨를 당당히 펴고, 할 말을 다 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린 일 때문에 의사 표현만큼은 명확하게 하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태훈은 복잡한 감정을 혀로 차내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긴장한 얼굴의 직원들이 태훈을 맞이했다. 그는 분기별로 한 번씩 찾아오는 날인데 뭘 그렇게 떠느냐며 몇 마디 하곤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작 본인 역시 긴장했으면서 말이다.

한편 집에 혼자 남은 선규는 약속한 시간보다도 이르게 나왔다. 여유롭게 커피 한 잔 마시고 부동산으로 갈 생각이었다. 걷기 좋은 날씨이니 테이크아웃을 해서 나와도 좋을 듯싶었다. 캐리어를 펼친 선규는 제 옷들이 사라진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뭐야, 다 어디 갔…….”

더 놀랄 필요도 없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선반 위에 티셔츠가 놓여 있었다. 태훈의 옷장을 열어 본 선규는 그 안에 걸려 있는 바지와 셔츠를 발견했다.

집을 보러 가기 위해 밖에서 만났던 날이었다. 밖에 나와서 보니 셔츠에 눈에 띄는 주름이 있는 걸 발견한 선규는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누르며 조금이라도 펴보려 했다. 그걸 보곤 옷을 다 걸어 둔 모양이었다. 밖에 나갈 일이 없어서 외출복이 있는 캐리어는 거들떠도 안 봤는데 이렇게 해놨을 줄이야.

선규의 마음은 금세 포근함에 둘러싸였다. 태훈의 집에 온 이후로 매일매일 이렇게 설레고 좋은 일들뿐이었다. 그것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선 자신도 나름의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간 나름 용기를 내온 순간들은 이런 배려에 비하면 너무도 작아 보였다. 태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테지만.

선규는 옷장에서 오늘 태훈이 입은 옷과 비슷한 색으로 꺼내 입은 뒤 부동산으로 향했다. 분명 자신의 차림을 보면 태훈은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리리라. 선규의 걸음걸이는 그의 기분을 한껏 담은 채 튀어 올랐다.

오후부터 개시된 메뉴는 생각보다 더 잘 나갔다. 그로 인해 모든 직원들의 사기가 높아졌다. 사무실 안에 있던 태훈은 고 실장의 보고를 받으며 이번에도 성공했음을 감지했다. 다시 문 위에 경쾌한 노크 소리가 퍼졌다.

“들어와. 이번엔 무슨 일이야.”

“우리 대표님이 좋아하실 만한 소식을 또 들고 왔죠.”

“오늘 들을 거 다 들은 것 같은데.”

“밖에 선규 씨 와 있어요.”

태훈은 고 실장의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암요, 이럴 줄 알았죠. 고 실장은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훈의 뒤를 따랐다. 올 때마다 들어가는 방을 치우던 직원들이 나오자 먼저 들어가려던 선규는 태훈을 발견하곤 작게 손을 흔들었다.

귀여운 짓을 했네. 발목이 드러나는 짙은 녹색의 치노 팬츠와 아이보리색의 맨투맨 티셔츠라니. 태훈과 비슷하게 입고 나오려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태훈이 방의 입구 쪽으로 손짓하자 선규가 먼저 들어갔다.

“고 실장. 음식은 30분 뒤부터 가져다줘.”

“네. 알겠습니다. 차라도 준비할까요?”

“괜찮아.”

선규는 방문이 닫히는 사이로 고 실장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가며 인사했다. 태훈은 문을 닫자마자 선규를 끌어안았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몇 번이고 닿았다 떨어진 입술 사이로 웃음이 퍼졌다.

“계약 잘 하고 왔어?”

“네. 열흘 뒤에 들어가는 걸로 했어요.”

“열흘 뒤? 허…….”

선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태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선규는 태훈의 손을 잡고 테이블을 향했다. 오늘도 따뜻한 햇볕이 창가를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테이블 위를 노니는 빛들은 이 방의 분위기를 좀 더 따스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기야, 지금의 선규에겐 뭐든 좋게 느껴지리라.

“열흘 뒤부터 내가 쓸 가구가 들어가는 거지, 내가 들어간다고는 안 했는데요?”

“나 놀리는 재미에 눈을 뜬 것 같네.”

“네. 요즘은 이게 제일 재미있어요.”

“얼마든지 해. 하고 싶은 만큼.”

뭐든지 다 하라고만 하네. 말리지도 않고. 선규는 테이블 위에 놓인 태훈의 손을 응시했다. 술래잡기를 하듯 손가락을 놀려 그 옆으로 가서 건들자, 한 번에 붙잡혔다. 태훈은 손에 힘을 주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뒤 그 끝에 키스했다.

“조금만 이따가 이사하라고 해도 기어이 계약하고 온 이 못된 손.”

태훈이 장난치며 손끝을 핥자 선규의 얼굴이 금방 달아올랐다. 이번엔 내가 놀릴 수 있는 차례인가. 태훈은 선규의 손가락 끝을 애무하듯 빨고 혀를 내어 핥았다. 뾰족한 혀끝이 손가락을 간지럽히자 선규는 입술에 힘을 주어 꽉 다물었다.

손가락을 핥는 태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하나의 장면이 떠올랐다. 선규는 얼른 그 자극적인 모습을 잊고자 했지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자신의 두 다리 사이에서 움직이던 태훈의 몸과 위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떠오를 때마다 진하게 남아 깊게 각인됐다.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야?”

“왜……요.”

“표정이 너무 야해서.”

태훈이 손을 잡고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자 선규가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났다. 그는 태훈의 앞으로 다가갔고, 태훈은 알겠다는 듯 의자를 뒤로 뺐다. 허벅지 위에 앉은 선규는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내렸다.

태훈은 붙잡고 있던 선규의 손을 잡아당기며 몸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다. 진한 키스와 가벼운 입맞춤은 고 실장에게 말해 놓은 30분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집에 들어온 태훈과 선규는 답지 않게 곡소리를 내며 소파 위로 무너지듯 앉았다. 분명 선규의 침대 하나만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백화점을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다. 태훈은 선규의 귀에 대고 침대가 버텨야 할 일이 많으니 좋은 걸로 사주겠다고 장난을 쳤고, 선규의 얼굴은 식을 줄을 몰랐다.

“가전제품은 하나도 못 샀네.”

“그러게요. 그건 모레에 사야겠다.”

“이것도 나름 재미있긴 하네. 너 방 구하는 거 아니었으면 해볼 일도 없었을 텐데.”

태훈은 선규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채 말했다. 선규의 날카로운 턱 선을 훑던 손가락 끝은 점점 목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불거진 울대뼈를 간지럽히던 손은 셔츠를 파고들 거란 생각과는 달리 툭 떨어졌다.

“야한 장난 치면 오늘은 미움받을 것 같은 얼굴이야.”

“잘 아네요. 태훈 씨는 대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 거예요.”

“너 보면 없던 기운도 솟아나.”

“그런 말도 되게 잘하고.”

선규는 민망함에 시선을 돌렸다. 선규도 열심히 마음을 표현하려 하지만 아직 태훈을 따라가려면 멀었다. 그는 괜히 손부채질을 하며 다른 이야깃거리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것을 캐치해 낸 태훈은 알아서 대화 주제를 바꿨다.

“전에 아버지 만나고 왔다 했잖아.”

“아, 네. 그거 잘된 거예요?”

“응. 내일 계약서 갱신할 거야.”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럼. 매출 중 가져가는 비율 많이 낮췄어.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맞기까지 했는데…….”

“그건 어머니가 한 일인 데다가 미안해서 낮춰 줄 분은 아니야. 안 꺾일 놈인 거야 알고 있었지만 이러다간 휘어지지도 않겠구나 싶은 거겠지.”

태훈의 눈동자에 순간 쓸쓸함이 묻어났다. 자신의 입으로 이해받고 사랑받길 포기했다고 해서 외로움도 느끼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그럼 그 사업 할 수 있겠네요?”

“머리를 많이 굴려 봐야지. 매장이 벌써 나갔을 수도 있고.”

“많이 바빠지겠어요.”

“그래도 너 볼 시간은 있어. 걱정 마.”

선규는 제 속내를 다 들킨 기분이 들어 얼굴을 붉혔다. 바빠지면 볼 수 없겠단 생각을 하자마자 태훈이 이렇게 대답할 줄이야. 태훈은 몸을 일으키곤 선규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의 어깨를 끌어안자 선규는 머리를 기댔다.

선규는 창밖에 펼쳐진 야경에 시선을 꽂았다. 태훈이 해준 일과가 떠올랐다. 그는 오늘 밤에도 선규가 침대에 누우면 이 블라인드를 하나씩 내리며 다가올 것이다. 멋들어진 미소를 얼굴 위에 걸고서.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면 해줄게요.”

“일 그만두기 전에, 왜 나 피했어?”

선규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태훈은 딱히 화가 났거나 그를 취조하려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선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태훈의 눈을 보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지. 적당히 자를 수 있을 만한 곳이 없었다.

“이상한 말을 들어서요.”

“누가 뭐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내가 태훈 씨한테 지저분한 짓을 하고 있다고 오해를 하셨더라고요.”

태훈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선규가 이렇게 표현할 정도면 주 대표가 어떤 말을 했을지 눈에 훤했다. 극도로 보수적인 데다가, 선규를 그저 장남을 죽인 놈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니 얼마나 가시 같은 말을 쏟아 냈을까. 차마 남의 아버지에게 욕을 할 순 없으니 애꿎은 입술만 괴롭혔다. 주먹이라도 쥐고 있으면 그마저도 선규의 눈에 들어갈 게 뻔했으니까.

“지저분한 짓이라. 뭘 잘못 알고 계시네. 내가 너 꼬신 건데.”

“하하…….”

“처음 만난 날부터 장난 아니었잖아. 안 그래? 지금도 그렇고.”

“아, 안 돼요. 오늘은 진짜 피곤해요.”

태훈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몰아내기 위해 선규의 허벅지를 쓸었다. 선규는 그의 장난에 적당히 대응하며 지금의 대화를 묻는 데에 일조했다. 태훈의 시선이 선규의 콧날 위에 앉았다. 가지런한 속눈썹 위에 살포시 앉았던 먼지는 몇 번의 깜빡임 속에서 흩어졌다. 태훈은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 일을 어떻게 해서든 갚아 주고 말리란 작은 다짐을 했다.

* * *

약속한 10일이 다가왔다. 그사이 태훈과 선규가 한 건 쇼핑과 체온을 나누는 행위뿐이었다. 후자엔 섹스만큼이나 서로의 살결을 품에 안고 한없이 많은 시간 보내기가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직 선규는 가지 않고 짐만 들어오는 것이지만 태훈의 표정은 아침부터 울상이었다.

“오늘 당장 가는 것도 아닌데 얼굴이 왜 그래요.”

“너무 우울해. 티 안 내려고 해봤지만 그게 안 된다고.”

“티 안 내려고 해본 거였어요? 몰랐네요.”

“나 진짜 장난칠 기분 아니야.”

“가는 건 아직 4일이나 남은 데다가 가도 여기 문턱 닳아지게 드나들 텐데.”

“진짜 그럴 거지?”

태훈은 선규의 허리를 살짝 붙잡으며 말했다. 현관 앞에서 헤어지는 데에만 몇 시간이나 걸리게 생겼다. 선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이런 일로 태훈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있겠는가. 태훈은 볼에 입을 맞추며 오늘 들어오는 가구 확인 잘 하라며 집을 나섰다.

이런 일상, 당연히 좋지. 선규는 닫힌 문을 보며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쉬었다. 하고 싶은, 해야 하는 일을 위해 적당한 선에서 포기할 줄도 알아야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선규는 태훈과의 일상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한 발자국 물러난 것이지만.

선규는 느지막이 준비를 마친 뒤 계약한 원룸으로 향했다. 가스와 수도 확인 등 해야 할 일들이 꽤 많았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섞여 가구를 배치하고 정리 좀 하고 나니 시간이 꽤 많이 흐른 뒤였다. 선규는 태훈에게 다 끝났다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 그는 부재중 전화에 떠 있는 이름을 보자마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머니였다. 갈 때도 아닌데 왜 전화하셨지. 선규는 크게 숨을 들이쉰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 저예요.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

―선규야. 회사를 그만두다니, 이게 다 무슨 소리니? 네가 집을 나갔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누가 그러던가요?”

―승혁이 엄마 알지? 어제 다녀갔는데 그때 그러더라.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다고.

“아…… 나중에 가면 말씀드리려 했어요.”

―갑자기 왜 그랬어. 무슨 일 있었니?

“아뇨. 별일 없었어요.”

숨이 턱 막혔다. 선규는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갈수록 어머니 앞에서 거짓말하는 횟수만 늘어나는군. 선규는 목이 메자 괜히 헛기침을 하며 자신을 숨기려 들었다. 어머니는 얼른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고 싶다는 말만 반복했다. 금방 가겠다는 선규의 대답을 종용하는 눈치였다. 자주 찾는 편도 아니었으면서 대체 왜 이러지. 선규는 눈치껏 요즘 많이 바빠 시간이 날 때 찾아뵙겠단 대답만 남겼다.

―일도 그만뒀다면서 뭐가 그렇게 바빠.

“다른 일을 찾느라요. 집도 구해서 정리하느라 많이 바빠요.”

―세상에, 너는 어쩜 그런 일을 말 한마디 없이…….

뭘 하든 관심 없었던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우스웠다. 선규는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까지 했다. 아무렴 어머니의 앞에서 조소하는 얼굴을 보여 줄 순 없으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선규는 눈을 감고선 어머니가 무슨 말을 더 할지 듣기만 했다. 선규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속이 답답해진 어머니가 전화를 먼저 끊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태훈은 식탁 위의 조명만 켜놓은 채 술을 홀짝이는 선규를 발견했다. 그는 살짝 풀린 눈으로 태훈을 맞이했다.

“혼자 한잔하는 중이었어?”

“네. 태훈 씨도 마실래요?”

“좋지. 그런데 안주가 이게 뭐야. 간단한 거라도 만들어 줄게.”

“아니에요. 그냥 이거면 되는데.”

“어차피 저녁도 먹어야 하잖아. 기다려. 금방 할 수 있어.”

태훈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냉장고를 뒤적거렸다. 마땅한 재료가 없어서 야채를 잔뜩 썰어 넣은 부침개라도 할 생각이었다. 등에 선규의 시선이 닿아 따끔거렸다. 야채를 채 써는 동안 선규는 신기하다는 듯 몸까지 앞으로 내밀고 태훈의 손을 관찰했다.

넉넉하게 두른 기름에 전이 익어 가는 소리가 났다. 프라이팬 쪽을 보던 선규는 뒤집개를 들고 있던 태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태훈은 입술을 살짝 내민 채로 집중하고 있었다. 알맞은 때가 됐는지, 한 번에 전을 뒤집곤 꽤 만족스럽단 표정까지 지었다. 선규는 그런 태훈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안 먹어도 된다는 거 진짜 맞기는 해?”

“내 위는 아니었나 봐요.”

“여기서 눈이 떨어질 줄 모르길래 물어봤어. 배 많이 고팠나 봐.”

“그것도 그거긴 한데……. 태훈 씨 요리하는 게 오늘따라 신기해서요.”

“별게 다. 먼저 먹고 있어.”

태훈은 커다란 접시에 담긴 전을 내밀었다. 두 번째 반죽을 올려놓고 불을 조금 줄인 태훈은 얼른 선규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규는 태훈의 잔을 채우곤 얼른 제 것을 내밀었다. 태훈이 선규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잔을 채웠다. 맑은 분홍빛의 술이 투명한 잔에 가득 찼다.

“내일은 어머니한테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늦게 들어올 것 같으니까 기다리지 마요.”

“갑자기?”

“낮에 전화하셨더라고요. 회사 그만뒀냐고 물으시길래 그렇다고 했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말하면 되겠다 싶어서 다녀오게요.”

“저녁에 데리러 갈까?”

“무슨 그런 고생을 사서 하려고. 요즘 일도 바쁜데 집에서 푹 쉬고 있어요. 난 어차피 택시로 왔다 갔다 하니까 괜찮아요.”

흐음. 태훈은 일부러 콧소리를 내며 턱을 괴었다. 술을 넘기던 선규는 태훈의 손가락을 잡고선 괜히 간지럼을 태웠다. 태훈은 선규가 무얼 하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선규는 몸이 흔들리는 것인지, 시야가 흔들리는 것인지 정확히 모른 채 태훈의 손만 응시했다.

“이따가 같이 씻어요.”

“내일 어머니께 간다며.”

선규는 술기운과 뒤섞여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며 그래도 괜찮다고 말했다. 태훈은 방금 전까지 가만히 있던 손을 순식간에 움직였다. 그는 선규의 손을 옴짝달싹못하게 만들었다. 괜찮다고 한 건 너야. 태훈의 목소리에 선규는 술잔을 한 번에 비웠다.

낮은 수납장을 짚고 선 선규는 뜨거운 숨을 뱉어 냈다. 고개를 들면 거울이 자신을 그대로 비추고 있어서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수납장 위에 있던 로션을 짜낸 태훈은 손가락 두 개를 넣고선 이리저리 찔러 댔다.

사실 요 며칠 사이 눈만 맞으면 살을 섞기 바빴다. 그렇기에 선규의 아래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지만 태훈은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한 얼굴을 보는 게 너무도 즐거웠다. 아, 이런 걸 알면 많이 화내겠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과는 달리 태훈의 엄지는 구멍 부근을 간지럽히고, 다른 손은 아랫배를 넓게 쓰다듬으며 슬슬 성기를 자극해 댔다.

“하으…… 태훈 씨, 침대로 가면…… 읏……!”

“잘 안 들려, 선규야.”

태훈은 선규의 뒤에 바짝 붙어선 귓가에 속삭였다. 귀를 타고 들어오는 뜨거운 바람에 선규는 구멍을 바짝 조이며 몸을 떨었다. 태훈의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선규는 이제 그만 침대로 갈 생각에 바짝 힘주고 있었던 다리를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태훈의 단단한 두 팔이 그를 옭아맸다.

“안 돼, 여긴 너무…… 허윽!”

“고개 들어.”

태훈은 천천히 제 성기를 삽입했다. 그와 동시에 날아드는 말은 꽤 강압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선규의 턱을 살짝 감싼 손길은 부드럽기만 해서 선규는 그 간극에 오히려 흥분했다. 뒤에서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선규의 몸을 붙드는 팔은 어찌나 강한지, 절대 벗어날 수 없었다.

한 팔은 어깨와 쇄골을 타고 올라 선규의 턱을 붙잡았다. 다른 한 팔은 선규의 아랫배를 지탱하듯 잡아 세웠다. 태훈의 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제 얼굴을 보게 된 선규는 눈을 꽉 감았다.

“눈 떠. 선규야.”

“읏, 이거, 이상해요…….”

“네 표정을 봐. 이상하단 얼굴 아니잖아.”

철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젖은 살들이 부딪쳤다. 수납장을 짚고 있던 선규는 천천히 손을 떼고 태훈의 팔을 붙잡았다. 신음은 짧게 끊어지며 쉼 없이 흘러나왔다. 태훈은 선규를 약 올리듯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 역시 선규가 빠르게 움직여 달라고 말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선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눈을 떴다. 그 앞엔 양 볼이 상기된 자신이 헐떡이고 있었다. 태훈의 팔을 붙잡고 성기를 바짝 세운 모습은 지극히 자극적이었다. 태훈은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겨서 사나운 눈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턱을 당긴 채로 거울 속 선규를 응시하며 목덜미를 빨아 대는데, 그 모습은 너무도 색정적이었다.

“태후, 흣…… 아―!”

“네가 봐도, 엄청 야한 표정이지?”

태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선규의 눈에는 자신보다도 뾰족한 혀를 내어 자신의 귓바퀴를 핥는 태훈의 모습이 더 야했다. 붉은 입술과 매끄러운 피부는 뒤에서 쳐올릴 때마다 흔들렸다가 다시 하나로 모이며 시야에 콱 박혔다.

선규가 반쯤 넋을 놓은 채로 거울을 응시하자 태훈은 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태훈의 성기가 드나드는 걸 느끼며 신음하는 자신을 저렇게까지 볼 줄이야. 태훈은 선규의 아랫배를 더욱 힘주어 끌어당기며 속도를 높였다.

함께 샤워를 하고 나온 터라 젖은 피부는 두 사람의 살이 부딪칠 때마다 더욱 음란한 소리를 냈다. 태훈은 시선을 잠시 아래로 내렸다. 선규의 하얀 엉덩이 사이를 드나드는 제 성기는 잔뜩 부푼 채 열을 내고 있었다. 아. 태훈은 갑자기 선규가 조여드는 통에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뭐가 좋았길래, 그래…….”

“아냐…… 으응, 흣―”

“너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갈 거 같은데.”

태훈이 그렇게 말하며 아랫배에 있던 손을 슬그머니 위로 올렸다. 온몸을 훑어 내리듯 느리게 움직이는 젖은 손에 선규는 눈을 몇 번이고 깜빡거렸다. 선규는 가슴을 간지럽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살짝 뒤로 내밀었다.

그 행동에 태훈은 낮게 목을 긁으며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선규는 몰아치는 사정감을 참지 못했다. 뿌연 정액은 수납장은 물론, 거울까지 튀었다. 선규는 그것을 보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선규야. 눈 떠야지.”

“흐윽, 아아…… 어떡, 해…….”

“뭘 어떡해. 원하는 게 있으면, 말을 해.”

선규는 태훈의 말에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선규는 제 앞에 흐트러진 정액과 그것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야만적으로 움직이는 태훈이 신경 쓰였다. 선규는 무언가를 애원하는 사람처럼 제 어깨를 감싸 안고 있는 태훈의 팔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태훈은 금방 고개를 드는 선규의 성기를 보며 입매를 당겼다. 선규는 그 미소가 무얼 뜻하는지 알기에 거울 속 시선을 피했다. 태훈은 선규가 줄곧 자신을 보고 있었음을 깨닫곤 웃음을 흘리며 어깨 위에 제 흔적을 남겼다. 아까도 내 얼굴을 보다가 흥분한 건가. 귀엽기는. 태훈은 선규의 몸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선규는 자신을 옥죄는 그 힘이 마음에 들었다. 무너지지 않게 받쳐 주며 쳐올리는 태훈의 허리와 허벅지도 좋았다. 그것을 고스란히 행동으로 드러냈다. 살짝 내밀고 있던 엉덩이를 이제 슬쩍 태훈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엉덩이까지 흔들고.”

“태훈 씨…… 나, 이상해……―”

“좋으면 그렇게 돼. 나처럼 미치게 좋으면.”

선규는 확실히 지금의 자신이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였다면 태훈의 말에 고개를 저었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대체 어떤 것에 이렇게까지 자극을 받은 걸까. 선규는 태훈의 움직임에 맞춰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고, 또 구멍을 조였다.

선규의 흥분을 그대로 담은 몸짓에 태훈은 그대로 녹아내렸다. 이성이 전부 휘발된 사람처럼 선규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그의 고개를 돌려 진득하게 입 맞추었다. 선규의 가슴과 배를 세게 끌어안은 태훈은 자신의 성기를 깊게 박아 넣으며 사정했다.

그때였다. 선규는 태훈이 사정하자 그대로 손을 뻗어 태훈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쓸었다. 빼지 말라는 듯 입 맞추는 와중에도 혀를 얽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었다.

“너 진짜 어쩌려고 이래.”

“태훈 씨…….”

선규는 밭은 숨을 쉬며 태훈의 볼과 턱 아래에 이마를 부볐다. 태훈은 천천히 움직이며 선규의 안을 헤집었다. 태훈의 성기가 슬슬 다시 부풀었다. 붉게 달아오른 성기에 정액이 엉킨 채 딸려 나왔다. 태훈은 늘 보던 모습인데 오늘따라 야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선규 탓이리라.

“옆으로 조금만 돌아봐.”

“시, 싫어요…… 흣, 또 이상한……!”

“아냐. 내가 여태까지 말한 거 너도 다 좋아했잖아.”

사실이긴 했다. 선규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발걸음을 뗐다. 태훈이 다시 선규의 턱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옆으로 살짝 고개가 돌아가자 거울에 보이는 모습에 선규는 눈을 감았다. 이럴 줄 알았어!

“봐, 네 엉덩이가 내 좆 삼키는 거.”

“그……만―”

“너한테 미쳐서, 싸지른 정액이 들러붙어 있어.”

“허윽, 읏…….”

“더 세게 움직이면 거품처럼 변해선 네 구멍을 더 음란하게 만들지.”

태훈의 입에서 적나라한 말들이 쏟아질 때마다 선규의 성기가 꼿꼿하게 섰다. 태훈은 얼굴 위로 피어나는 웃음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움직이며 선규의 엉덩이를 한 손으로 간지럽혔다. 선규의 몸은 한껏 예민해진 터라 그 작은 손길에도 어깨를 움찔거렸다.

“얼마나 좋았으면 여기도, 아래도 바짝 세웠을까.”

“하지…… 마, 요― 아윽…… 그러지, 마아……―”

태훈은 바짝 솟은 유두를 손가락 끝으로 굴리며 귓불을 빨았다. 선규는 더는 참을 수 없는지 나오는 대로 교성을 뱉었다. 비음이 섞인 신음은 태훈의 움직임을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태훈이 거세게 잡은 곳마다 붉은 자국이 올라왔다가 사라졌다. 선규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음란한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고, 선규는 다시 엉덩이와 허리에 힘을 주었다.

뜨거운 신음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는 한참이 지나도 꺼질 줄을 몰랐다. 거울 앞에서 다시 절정을 맞이한 두 사람은 진득하게 키스하며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선규는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태훈의 정액에 움찔거렸다. 이내 그것을 끌어모으듯 움직이는 손길에 허리를 떨며 걸음을 뗐다. 태훈은 선규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셔 박으며 침대로 향했다.

침대 헤드에 기댄 태훈은 평소보다도 꽤 나른한 얼굴이었다. 그야 제 아랫배 위에 올라탄 선규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평소였다면 누워 있는 선규를 태훈이 안아 올려야 할 법한 자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닿아 있던 입술이 살짝 떨어졌을 때, 선규가 손에 힘을 실어 가며 태훈을 헤드 쪽으로 밀었다. 태훈은 이런 쪽으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로 선규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선규는 태훈의 성기 위에 구멍을 맞추곤 높은 헤드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태훈은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태훈의 어깨 위에 손이 올라가자 선규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는지 얼굴을 붉혔다.

“대체 왜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냥요……. 이제 나 진짜 놀리지 마요.”

태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뒤로 기댔다. 선규는 한 손으로 태훈의 성기를 잡자마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늘 그래 왔듯 태훈이 엄지로 입술을 쓸었다. 선규는 살짝 풀린 눈으로 그 엄지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곤 혀로 핥았다. 태훈은 당장 그를 품에 안고 허리를 흔들고 싶은 마음을 낮게 울리는 신음 하나로 덮어 둬야 했다.

선규는 허벅지에 바짝 힘을 주고선 천천히 태훈의 성기를 삽입했다. 마른 허벅지 위가 단단해졌다. 태훈은 조심스레 그 허벅지 위를 쓸었다. 이번엔 간지럽히기 위한 게 아니었음에도 선규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는 이미 태훈이 싸지른 정액이 흘러 나와 엉망이었다.

“하, 너무 커요…… 으응, 안 돼― 움직, 이지 마요.”

“넣기 힘들어 보여서 도와준 건데.”

선규는 고개를 저었다. 살짝 튕겨 오르던 태훈의 허리가 잠잠해졌다. 태훈은 선규의 얼굴에서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제 흉흉한 성기를 삼키기 위해 한껏 벌어진 허벅지와 그 위에 묻은 정액, 그리고 오물거리며 뿌리를 향해 가는 저 엉덩이와 음란한 구멍. 태훈은 손가락 끝으로 그의 엉덩이를 간지럽히며 고개를 들었다.

“흐으…… 읏!”

태훈의 부푼 귀두가 선규의 전립선을 스치자 그의 신음이 조금 더 커졌다. 방금 전까지 흥분과 함께 짓이겨진 곳인지라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선규는 기어이 뿌리까지 삽입한 뒤에 태훈의 눈을 마주했다. 태훈의 날 선 눈매는 선규를 잡아먹을 듯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선규는 태훈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뒤로 살짝 빼고 있던 허리와 엉덩이에 힘을 주며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이자 태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선규는 태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질 때마다 묘한 쾌감에 불타올랐다. 아, 이래서 태훈 씨가 나한테 그랬던 거구나.

“흐아……― 태훈 씨, 좋아, 요?”

태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표정 위에 다 드러났으리라. 태훈은 성기를 바짝 세우곤 들썩이는 선규의 몸을 끌어안고 짐승처럼 박고 싶었다. 태훈은 낮게 목을 울리며 선규의 등부터 엉덩이까지 느리게 쓸었다. 선규는 태훈의 귀두가 내벽을 긁고 지나갈 때마다 목을 울렸다. 신음이 보다 커졌다.

“선규야. 키스해 줘.”

“으응…… 잠시, 만…….”

태훈은 조심스레 선규의 뒷덜미를 감쌌다. 선규는 순순히 이끌려 왔다. 입술과 혀가 닿자마자 태훈은 선규를 집어삼킬 것처럼 입술을 빨았다. 그는 다른 한 손으로 선규의 허리를 끌어안고 허리를 튕기기 시작했다. 위로 쳐올리는 강한 힘과 정신을 쏙 빼놓는 키스에 선규의 신음은 목 안에서만 야릇하게 울릴 뿐이었다.

포개져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 선규는 다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태훈이 위로 쳐올릴 때엔 아래로 움직이며 그의 성기가 더욱 깊게 박히게끔 움직였다. 위로 몸을 뺄 때엔 빠져나가는 태훈의 성기가 아쉽다는 듯 구멍을 꽉 조이며 붙들었다. 태훈은 양손으로 선규의 엉덩이를 쥐곤 목을 긁어 대는 소리를 냈다.

“요망한, 엉덩이네.”

“으응…… 하, 태훈 씨― ”

선규가 목을 뒤로 살짝 젖히며 사정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사정보다도 전립선의 자극이 좋은 듯 허리를 움직였다. 태훈은 선규의 몸을 당겨 안으며 그의 유두를 빨며 혀를 굴렸다. 선규의 떨리는 신음이 태훈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태훈은 더욱 깊게 선규의 몸을 탐하며 그 가장 깊은 곳에 제 흔적을 남겼다.

선규는 태훈을 품에 안으며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훈은 선규의 입술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똑같이 몇 번이고 대답해 주었다.

결국 선규가 어머니에게 간 건 이튿날이 아닌 이틀 후였다. 선규가 집을 옮기는 날이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만 남았으니 태훈이 못마땅해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태훈은 집을 나서는 순간에도 몇 번이나 택시 타고 편하게 다녀오라는 말을 할 뿐이었다. 그는 일찍 오라거나, 안 갔으면 좋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선규는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며 병원으로 들어섰다. 다만 그 준비라는 게 완벽한 것은 아니었기에 병실 문을 열기 전까지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해야 했다.

“저 왔어요. 어머니.”

“왔니? 날씨가 꽤 더워졌지?”

“아…… 예. 그래도 병실은 시원해서 다행이에요.”

늘 그래 왔듯, 선규는 어머니에게 고개 숙여 인사만 한 뒤 냉장고로 향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머니의 부름에 멈춰야만 했다. 평소 같았다면 금방 정리하고 앉겠다며 사양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응?”

“별일 없었어요. 그냥…… 더는 그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졌을 뿐이에요.”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네가 양조장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해왔니. 온갖 나랏말을 다 공부해 가며 홍보 책자까지 만들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어머니.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양조에 관련된 일을 그만둔 게 아니에요. 그 회사를 그만둔 거죠.”

“무슨…… 뜻이니, 선규야?”

“철진 양조는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대표님 뜻이 그렇습니다. 늘…… 그래 왔지만요.”

선규는 마지막 말을 어렵게 뱉어 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머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선규는 마음속에 떠다니는 말들을 전부 꺼내 놓으려다가 멈추었다. 어머니에게 말한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으리라. 그녀 역시 한쪽 눈은 감은 채로 어쩌다 한 번 만나는 선규만 반가워하는 사람이 아닌가.

“아버지랑 척진다고 너한테 좋을 거 하나 없다. 너도 알잖아.”

“그날 말씀드렸지만 이미 집도 구했어요. 그리고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척지고 산 지 10년도 넘은 거.”

“…….”

“지금이 너무 좋아요. 왜 계속 그곳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요.”

“나중에 내가 집에 가보고 싶다 하면 보여 줄 거니?”

선규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말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 원룸에 절대 오지 않으리라. 그다지 궁금하지 않으니까. 선규는 입술을 짓이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마치 지난번에도, 그전에도 그래 왔던 것처럼 가져온 간식거리와 옷가지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게 전부였다.

* * *

고 실장은 사무실을 나서는 태훈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훈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무슨 일이냐 물었다.

“기분이 좋은 얼굴인지 아닌지 헷갈려서 그래요.”

“아마…… 좋은 얼굴일걸?”

“아마? 왜 아마도, 인데요. 불안하게.”

“결과가 몇 시간 뒤에 나올 거라서.”

“그 말 들으니까 더 미치겠네요. 사고치지 마세요.”

“우리 어머니도 안 해주는 말을 고 실장이 해주네. 사고 안 쳐.”

태훈은 가볍게 손 인사를 하곤 차로 향했다. 이틀 뒤의 이사는 선규에게 있어서 또 다른 시작이었다. 태훈은 그 시작에 있어서 중요한 것을 해결하고 싶었다. 좀 더 깔끔한 시작을 원치 않는 사람은 없을 테니.

태훈이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철진 양조 앞이었다. 지난 몇 달간 선규의 얼굴을 보기 위해 이곳의 문턱이 닳아지게 드나들었던 게 떠올라서 픽픽 웃었다.

“이 대표님. 어제 갑자기 연락 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레 연락드렸는데도 흔쾌히 만나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들어오시죠. 혼자 오신 것 같으니 차 좀 내오지.”

태훈은 뒤에 서 있던 사람에게도 가볍게 묵례를 한 뒤 주 대표를 따라 들어갔다. 태훈의 속을 모르는 주 대표는 꽤나 호의적으로 굴었다.

“오늘에야말로 비법을 알아 가려 온 겁니까?”

“저는 주 대표님 비법 몰라도 그만이죠. 게다가 꽤 유능한 사람도 옆에 두게 됐고요.”

“그 무슨……?”

“선규 말입니다. 지금 저희 집에 있거든요.”

평소와는 다르게 날 선 태훈의 태도에 적잖이 놀란 주 대표는 이어지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어차피 아들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이니, 나와 함께 있다는 게 놀라운 걸까. 태훈은 아까 인사를 건넨 사람이 놓고 간 차를 조심스레 마셨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아서 정정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주 대표님.”

“오늘 이 대표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주 대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언성을 살짝 높이자 바깥에서 무슨 일이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훈은 태연자약한 얼굴로 주 대표를 올려다보며 아무 일도 없다고 대답했다. 주 대표는 큰 눈을 부라리며 태훈을 노려보았다. 저런 눈을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나는 잘 알지. 태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선규를 꾀어낸 건 접니다. 여기 처음 오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니까요.”

“그 애 이야기는 그만하시죠!”

“아뇨, 전부 해야 합니다.”

“이 대표!!”

“선규는 누구보다 열심히 해왔어요. 그건 주 대표님도 부정하지 않으시겠죠.”

“당신이 뭘 안다고……!”

“선규가 왜 제 집에 있겠습니까.”

기어이 말까지 놔버린 주 대표는 태훈의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태훈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도 똑같은 사람이니까요. 이 이야기 듣고 나니 이 대표 같은 사람이었다면 양조장을 물려주네 마네 하던 기억을 다 지우고 싶으시죠?”

“이런 건방진!”

“저는 주 대표님 놀리려는 게 아닙니다. 선규가 당신에게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면서도 이곳에 남아 있던 이유는 형인 주선일 씨 때문이었습니다.”

“선일이에 대해 함부로 입에 담지 마세요. 이건 내 경고입니다.”

“선규에 대해선 얼마든지 떠들어도 되고요? 아, 됐습니다. 어차피 이 이야기만 하고 나갈 생각이니까요.”

“아니, 당장 나가는 게 좋겠군요.”

“선규는 이 양조장에서 자신이 만든 술을 정식 판매 품목으로 만들고 싶다는 형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남아 있던 겁니다. 다른 일을 할 줄 몰라서 여기 있던 게 아니라고요.”

태훈의 말을 들은 주 대표가 조용해졌다. 이 말 한마디로 바뀔 사람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천하의 몹쓸 인간이었다. 선규 자체가 아니라 죽은 선일의 뜻을 잇고자 했던 선규의 꿈만을 원하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셈이 되니까.

“이제 죽은 형의 꿈이 아닌 선규만의 꿈을 이룰 수 있게 제가 도울 겁니다. 뭐, 찾아온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건 앞서 말씀드렸던 제가 선규 꼬신 거라는 내용이지만요. 그것만 말하고 가면 재미없으니 다른 것도 알려 드린 셈이죠.”

“자네 정말 못 배워먹은 인간이로구만!”

“못 배워먹은 인간이지만 계약서 무서운 건 잘 알죠. 함부로 계약 파기할 생각 같은 건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보셨듯이 막돼먹은 놈이라 물불 안 가리는 편이라서요.”

태훈은 마지막 인사라며 느리게 묵례를 한 후 주 대표의 방문을 열었다. 그 앞에 있던 사람의 창백한 낯이 태훈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바로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선규는 이런 방식을 싫어할지도 모른단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크게 혼이 나더라도 일을 저질러야겠단 결심이 섰다. 이제 작두질을 끝냈으니 새로운 시작 앞으로 가볼까. 태훈은 평소보다 엑셀을 좀 더 밟으며 이동했다.

떨어지는 발걸음에 진흙이 들러붙지 않도록. 태훈은 선규와 먹을 야식을 준비하는 내내 입술에서 힘을 빼지 못했다. 집중할 때 나타나는 버릇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의식적인 행위에 가까웠다. 뜻을 담아 기원하는 것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태훈은 입매를 일자로 만들며 괜히 기지개를 켰다.

마침 집에 돌아온 선규는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잘 다녀왔느냔 인사를 하려던 태훈은 살짝 부은 선규의 눈을 보곤 입을 다물었다.

“뭐 만들고 있던 거예요?”

“그냥 야식이나 먹으려고. 너도 저녁 제대로 안 먹었을 것 같아서.”

“어떻게 알았지. 대충 주스 사 먹고 끝냈는데.”

“내가 신경 안 쓰면 주선규가 그렇지 뭐.”

태훈은 선규에게 장난을 치자마자 이틀 전 밤을 떠올렸다. 확실히 아니긴 하지. 선규는 씻고 나오겠다며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나눴기에 눈이 부어서 와. 태훈은 속상함과 짜증을 섞어 혀를 찼다.

금방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선규는 그답지 않게 약간 오버하며 얼른 먹고 싶다고 말했다. 태훈은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추며 요리를 내왔다.

“생각보다 더 늦었네.”

“그냥 생각 좀 하다가 집에 들렀어요. 사놔야 할 거 많은데 들어가는 날 바삐 움직이기 싫어서요.”

“각방살이 준비에 아주 열심이셔. 아, 됐어. 이제 이 이야기는 그만해야지.”

“진짜로요? 더 들어 주려고 했는데.”

“지겨울 만큼 했잖아. 이제 투정 안 부릴게.”

태훈은 양손을 살짝 들며 미소 지었다. 선규는 그 자세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 가지런한 손끝을 잠시 응시하곤 포크로 음식을 집었다. 오늘의 야식 역시 맛이 좋았다. 태훈은 저녁 식사를 했음에도 꽤 많이 먹었을 정도였다. 그 대신 오늘은 늘 한 잔씩 마시던 술이 없었다. 이런 날도 있는 법이었다.

“오늘 집에 일찍 왔어요?”

“아니. 나도 좀 늦었어. 급하게 잡은 약속이 있었거든.”

“무슨 약속이요?”

“주 대표님이랑 만났어.”

선규는 눈을 크게 떴다. 포크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그는 설명이 더 필요하단 눈빛을 보냈다. 태훈은 물을 마시는 와중에도 선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것은 선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훈은 몇 번 목을 가다듬었다.

이번에는 무슨 폭탄이지. 선규는 그의 아버지가 태훈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닐지 괜한 걱정을 했다. 자신이 여기에 와 있단 걸 알 리 없고, 관심도 없을 텐데 업무에 위해를 가한 건가 싶기도 했다. 선규는 나쁜 쪽으로 상상력이 너무 좋았다.

“내가 너 꼬신 거라고 말하러 갔었어.”

“……네?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죠?”

“오해를 좀 하신 거 같다고 했지. 내가 엄청 꼬셨다고.”

태훈은 긴장을 지우기 위해 괜히 팔을 벌려 가며 오버했다. 그렇다고 선규의 눈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태훈에 대한 파악을 마친 선규에겐 그가 지금 얼마나 긴장했는지 다 보였다. 정말 기분 좋을 때 나타나는 미소와 긴장을 숨기기 위해 걸쳐 놓는 미소의 차이는 꽤 컸다.

선규는 일부러 심각한 척을 하며 다시 컵을 쥐었다. 태훈의 동공이 흔들렸다. 내가 이걸 뿌릴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선규는 괜한 상상을 하며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매를 가리기 위해 물을 마셨다. 선규가 아무 말이 없자 태훈은 다시 헛기침을 하며 성대를 긁었다.

“왜 그랬어요, 태훈 씨.”

“너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내가 화가 안 나겠어? 그리고 사실 정정해 주러 간 거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잘못했어. 내가 너무 나간 거 알아. 그런데 말이야, 하나의 의식이었다고.”

“의식이요? 무슨 의식?”

“새롭게 시작하는 거잖아. 신발에 묻은 흙은 털고 새집에 들어가야 할 거 아냐.”

태훈은 답지 않게 그럴싸한 말을 하는 와중에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선규의 앞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커다란 태훈의 덩치가 숨겨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선규는 그런 태훈의 모습을 보다가 결국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에 태훈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왜 고개를 숙이는 거예요.”

“네가 화낼 것 같아서……긴 한데 너는 왜 웃는 거야.”

“태훈 씨가 귀여워서요.”

“그게 뭐냐. 웃은 이유가 그거라는 게 말이 돼?”

선규는 웃음을 참기 위해 애쓰느라 태훈의 투정 어린 말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태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선규의 웃는 얼굴에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털며 웃고 말았다. 대체 왜 웃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긍정의 힘을 가진 웃음은 금방 전염되었다.

“처음에는 진짜 태훈 씨가 귀여워서 웃었어요.”

선규는 이제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고 있었다. 물론 슬퍼서 흘린 눈물이 아니라 정말로 웃겨서 흘린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 앞에서 그 말을 하고 있을 태훈 씨를 상상하니까 너무 웃긴 거 있죠. 정확히 뭐라고 했어요?”

“정확한 건 기억 안 나는데. 처음엔 선규 꾀어낸 거 저라고 했어. 나중엔 감정이 격해져서 꼬셨다고 한 것 같아.”

가까스로 웃음을 멈췄던 선규는 다시 입가를 가려야만 했다. 그래도 이번엔 금방 진정이 됐다. 태훈은 선규가 원 없이 웃는 것을 보며 잘 해결된 것인가 잠시 고민했다. 선규는 다시 포크를 들고 하던 식사를 계속했다.

“주선규 씨, 내 행동에 대한 감상은 없는 건가요?”

“웃음으로 충분하지 않았어요?”

“듣고 보니 그러네. 그걸로도 충분하긴 해.”

“고마워요. 태훈 씨 아니면 누가 나를 위해서 그렇게 말해 주겠어요. 그래도 사업에 지장이 갈까 봐 무섭네요.”

“그 점에 대해서도 제대로 말했으니까 걱정 마. 적어도 계약 기간은 제대로 지킬 테니까.”

“어머니는 계속 아버지랑 척지면 좋을 거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선규는 아직도 웃고 있는 얼굴로 낮의 일들을 말했다. 어머니와의 짧은 대화, 그리고 병실을 나서기 전까지 이어진 네가 숙이면 된다, 그러면 봐줄 것이다, 하는 말들. 태훈은 눈썹을 구기다가 선규가 볼까 싶어 얼른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선규가 할 말은 거기까지였다.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나왔어요. 그리고 집에 가서 청소도 해놓고 마트에 미리 주문해 놨던 물건도 받아 두고.”

“맞다. 커다란 유리통도 사야 한다며. 그런 건 직접 가서 싣고 오는 게 낫겠지?”

“안 그래도 부탁 좀 하려 했어요. 내일 안 바쁘면 같이 나갈 수 있을까 싶어서요.”

“나야 시간 괜찮지. 그런데 보통 장인들은 발효시키는 작업 같은 거 항아리에 하지 않아? 그것도 어디서 구해 온 좋은 걸로 말이야.”

“내가 장인인가요. 살균하기 쉽고, 기온 일정한 곳에 잘 넣어 두면 뭐든 발효 잘 되는 유리통이 편해요. 관찰하기도 좋고.”

선규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다는 눈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태훈이 물어봐 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그냥 지나칠 태훈이 아니었다. 일찍 왔다면서 오늘 한 일은 그걸로 끝이냔 질문에 선규는 슬며시 웃었다.

“재료 샀어요.”

“어떤 재료? 술 만들 재료?”

“네. 우선 누룩은 시중에 파는 걸로 주문해 놨어요. 그리고 과일이랑 향신용으로 쓸 것도 사고.”

“뭐야, 완전 바빴네.”

“방에서 손가락으로 샀죠.”

선규는 마우스를 누르는 흉내를 냈다. 무슨 재료인지 다 가르쳐 줄 수는 없지만 얼른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양 볼에 홍조를 띠었다. 확실히 선규는 술을 빚는 일련의 과정들을 너무도 사랑하고 있었다. 양조장을 떠나서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하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저렇게 생기가 넘치면서 새로운 직업은 무슨.

태훈의 작은 무용담과 선규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는 꽤 오래 이어졌다. 두 사람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선규는 천장 위에 박힌 빛 조각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오늘따라 몰래 들어온 빛이 밝았다.

“달이 밝은가 봐요.”

“오늘 달은 못 봐서 모르겠네. 왜?”

“천장에 들어온 빛이 오늘따라 새하얘서요. 집에서 한 번씩 잠이 안 올 때엔 방 밖을 나갔어요. 그 주위엔 아무것도 없으니까 잠이 올 때까지 달이나 보는 게 전부였죠.”

태훈은 선규가 말하는 집이 철진 양조의 그 한옥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더는 그곳을 버틸 수가 없어서 나왔다곤 하지만 평생의 기억마저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로 누워 있던 태훈은 선규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쿵, 쿵, 큰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고 있었다.

큰일을 앞두면 아무리 무신경한 사람이라도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거기다가 선규는 갑작스레 제 미래를 향한 핸들을 꺾었으니 긴장을 더 하면 더 했지, 덜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것뿐인가. 선규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태훈 앞에서 많이 경계를 낮췄을 뿐이었다. 커다란 집에서 늘 봐오던 사람들만 보며 30년 조금 안 되는 세월을 살아온 선규가 홀로 사는 것에 바로 익숙해질 수 있을까. 태훈은 별별 걱정을 다 했다.

“태양은 맨 눈으로 보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달은 똑바로 보고 있어도 눈이 아프지 않아서 좋았어요.”

“듣고 보니 그러네. 그 점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바로 볼 수 있어서 좋다는 거.”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달이 더 예뻤어요, 내 눈엔.”

“그건 나도 그래. 초승달도 예쁘고 보름달도 예쁘지.”

태훈의 대답에 선규가 몸을 돌렸다. 선규가 모로 눕자 태훈은 그의 가슴 위에 있던 손을 거두지 않고 자연스레 허리를 감았다. 천장에 있는 빛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오늘 선규의 눈동자가 더 빛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처음 만난 태훈 씨는 분명 태양이었는데 양조장에 찾아온 날부터 달로 변한 것 같아요.”

“너무 로맨틱하네. 나 방금 또 반한 것 같은데.”

선규는 태훈의 말에 입술 안쪽을 아주 살짝 깨물었다. 태훈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듣고 보니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선규는 태훈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그의 몸 가까이로 다가갔다. 약간의 틈 사이로 따뜻한 공기가 자리를 잡았다. 태훈은 선규의 목부터 허리까지 부드럽게 쓸었다.

“이사 선물은 뭐 해줄까?”

“아뇨, 괜찮아요.”

“그런 것들 있잖아. 내 돈 주고 사긴 뭔가 아쉽고 남이 선물해 줬으면 좋겠다 싶은 거. 그런 거 말해 봐.”

“태훈 씨한테 이사 선물 받으면 왠지 이 집에 오기 망설여질 것 같아요. 어떤 느낌인지 알겠어요?”

“형언하긴 어려운데, 무슨 뜻인지 알겠어.”

너무 본격적이라 이건가. 태훈의 예상이 맞았다. 선규는 말이 이사일 뿐이지 사실 태훈이 집에서 쉬고 있을 때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모호한 경계가 좋겠다고 생각해 왔는데 왠지 이사 선물을 받으면 그러기가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편히 드나드는 게 아니라 서로에게 완전한 이방인이 되는 기분이랄까.

“아무 때나 와요, 태훈 씨.”

“네가 말 안 해도 그러려고 했어. 나는 굳이 말 안 해도 되지?”

태훈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선규의 머리카락을 느끼며 느릿하게 물었다. 이제 슬슬 잠이 오나 보다. 선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짧게 대답하곤 눈을 감았다. 선규의 눈이 먼저 닫히는 것을 본 태훈도 무거운 눈꺼풀을 쉬게 해주었다.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낸 이들은 빠르게 깊은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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