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4/5)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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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규는 바닥에 걸레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태훈이 여름이 빨리 오는 것 같다며 선풍기도 사라고 했을 때 구입했기에 망정이었다. 선규는 선풍기를 가장 세게 틀어 놓고 앉아서 땀을 식혔다. 닦아도, 닦아도 어디서 먼지가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선규는 사 올 때만 해도 파랗던 걸레가 회색이 된 걸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녁 전까지는 정리를 마치고 샤워도 해야 했다. 선규는 나름 이사 턱을 내기 위해 손님을 초대했다. 하지만 태훈이 음식은 알아서 준비해 가겠다며 음식은 사지 말라고 전했다. 그 선택 역시 백번 나았다. 이 근처 음식점들의 맛이 어떤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주문했다가 손님의 입맛만 버리면 안 되니까.

“아…… 샤워부터 하자.”

선규는 선풍기를 꺼놓고 욕실로 향했다. 옷을 벗고 목욕을 하려는데 걸레의 때가 눈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지금 빨지 않으면 안 돼. 다 씻고 나서 빨려면 힘들다고. 결국 선규는 손빨래를 한 뒤에 샤워를 시작했다. 한결 나았다.

선풍기 앞에서 잠시 늘어져 있던 선규는 천천히 할 일들을 정리했다. 맥주는 큰 걸로 몇 병 사다 두었고, 음식은 태훈이 가져온다고 했지. 택배도 다 받았고. 이제 전화만 하면 된다. 그는 여전히 선풍기 앞에서 멀어지지 않은 채 휴대폰을 집었다.

“여보세요. 네, 저 주선규입니다. 안녕하셨어요?”

선규는 마치 상대방이 앞에 있는 것처럼 활짝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선규 씨! 겨울도 아닌데 웬일이야!

“꼭 겨울에만 연락드리란 법 있나요. 여기도 벌써 더운데 제주도는 오죽할까 싶네요.”

―여기도 너무 더워. 그래도 작업해야 하는데 별수 있겠어?

전화를 받은 사람은 포근한 목소리로 선규의 안부를 물었다. 그들은 몇 마디 가볍게 주고받으며 일상에 대해 말하고, 들었다. 양조장에 납품을 하던 곳인지, 이번 겨울엔 어떻게 해야 하느냔 질문을 던졌다. 선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이제 자신이 아닌 김 과장과 통화하는 게 좋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전화한 건 다름이 아니라요. 하귤 문의를 좀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하귤? 있기야 있는데…….

“주문 가능할까요? 지금은 많이 필요하진 않은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제가 준비 중인 게 있어서요.”

―특별히 많이 나가는 상품이 아니라서 주문하면 바로 보내 줄 수 있기야 하지. 이제 수확 들어갈 참이거든.

“첫 수확 중에 괜찮은 걸로 부탁드릴게요. 주소는 메시지로 보내 드릴까요?”

상대방은 궁금증이 담긴 목소리였으나 얼른 그 기색을 지웠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해서 모든 것을 말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모든 인간관계가 시간과 깊이가 비례하는 법은 아니니까. 그녀는 선규에게 좋은 걸로 알아서 보내 줄 테니 걱정 말라고 대답하며 전화를 끝냈다.

선규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짐 속에 있는 노트를 떠올렸다. 그 안에는 지난날의 선규가 고안해 낸 술 레시피가 전부 적혀 있었다. 실제로 빚어 본 것은 몇 가지 안 되지만 다들 맛이 나쁘진 않았다. 문제는 아주 좋지도 않았단 점이지만.

그중에도 가장 선규의 마음에 드는 게 있었다. 아직 한 번도 빚어 보진 않았으나 왠지 마음이 가서 언젠가는 만들어 보고 말리라 생각했던 게 있었다. 바로 하귤로 빚은 것이었다. 물론 다른 과일들도 들어가지만 어디까지만 깔끔한 향과 맛을 위한 것일 뿐, 주된 재료는 하귤이었다.

본래 하귤은 시어서 생과로 먹기보단 마멀레이드나 잼으로 많이 만드는 편이었다. 일반 조생귤과는 다르게 겉껍질도, 속껍질도 보다 두꺼워서 손도 많이 간다. 그럼에도 하귤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소비자에게 신선함을 주지 않을까 싶었다. 이젠 판매용이 아니기 때문에 소비자를 염려할 이유야 줄어들었지만.

다른 건 다 주문했으니 이제 하룻밤 재미있게 놀고 내일부터 서서히 시작하면 되는 건가. 선규는 눈을 끔뻑이며 발로 선풍기를 껐다. 마침 손님에게서 거의 다 왔다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집들이도 처음인 데다가 지인을 집에 초대한다는 것 자체가 10년 넘은 일인지라 선규는 많이 들떴다. 그의 얼굴에선 미소가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고 실장은 불만 가득한 얼굴의 태훈을 보며 고소하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직원에게서 커다란 쇼핑백을 몇 개 받아 든 태훈의 표정은 가관도 아니었다. 온 얼굴에 이 세상 불만을 다 담고 있었다.

“나 하나로 충분하지 않냐고. 너희 선규랑 별로 친하지도 않잖아!”

“야, 무슨 말이 그래? 내가 너랑 선규를…… 어? 그리고 선규가 나 직접 전화까지 걸어서 초대한 거거든?”

“주선규 진짜……. 고 실장, 너는 이거 가겠다고 업무 날짜를 바꾸냐?”

“저도 상운 씨랑 똑같은데요? 선규 씨가 직접 전화해서 시간 괜찮으면 와달라고 했다고요. 어떻게 안 갈 수가 있겠어요?”

태훈은 이마를 짚었다. 나지도 않은 땀을 닦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좋은 음식을 잔뜩 준비해 간 뒤 와인도 한 병 사서 선규와 뜻깊은 시간을 보내려던 게 태훈의 목표였다. 지금까지 매일매일이 그런 하루였지만 오늘은 또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방해꾼들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상운과 고 실장 모두 당연히 태훈의 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 아니냐며 차도 놓고 왔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어. 태훈은 차에 오르는 동안에도 시끄러운 대화에 귀를 틀어막고 싶어졌다. 내 행사는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란 말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태훈은 거의 해탈의 경지에 오른 얼굴로 시동을 걸었다.

“그나저나 방 되게 빨리 구하셨네요? 여러모로 볼 게 많아서 쉽게 구해질지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내가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됐다. 말을 말자.”

“선규가 독립을 할 줄은 몰랐네. 가업 잇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사연이 길다, 길어.”

“언제든 꼭 만들어 보고 싶은 술이 있었는데 여름 목전이라 시작해도 될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앞으로 많이 바빠지면 자주 못 볼 것 같다고도 하시고.”

“너랑 그런 문자도 주고받았다고?”

“그럼 안 돼요?”

신호를 기다리던 태훈이 놀란 표정으로 고 실장을 돌아보았다. 고 실장이 어디 좋게 대답할 사람인가. 그는 장난 섞인 말투로 태훈을 놀리듯 되물었다. 고 실장은 그간 선규와 따로 주고받은 문자가 있다는 정보만 흘려 놓고 그 내용에 대해선 말해 주지 않았다. 태훈의 표정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뒷좌석에서 듣고만 있던 상운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떴다. 고 실장은 태훈과 선규에 대해서, 그러니까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건가? 괜히 물어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없고.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고,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거지. 태훈이 쏟아부은 수년간의 구박이 아주 효과 없진 않았나 보다. 상운은 말을 하기 전 먼저 고민하다가 태훈의 눈치를 살폈다.

“야, 왜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이냐. 금방 도착이니까 좀만 참아라.”

“그런 거 아냐!”

“그럼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상운은 고개와 손을 저은 뒤 태훈에게 문자를 보냈다. 언제든 확인하겠지. 상운이 그 관심사에서 멀어질 즈음 태훈의 차는 오피스텔 건물 옆의 주차 공간으로 들어갔다. 각자의 사연이야 어찌 됐든, 모두 이 만남 덕분에 살짝 들뜬 얼굴이었다. 태훈과 상운이 음식과 선물을 나눠 들고 있는 사이 고 실장은 손뼉을 치며 마트를 다녀오겠다며 무리에서 멀어졌다.

“그냥 가도 괜찮을 거라니까 저러네.”

“네 마음이랑 고 실장님 마음이랑 같냐. 그나저나 내가 보내 놓은 문자 좀 봐 봐.”

“뭔데 그래. 손도 부족한데.”

태훈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곤 상운이 보내 놓은 문자를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씨익 웃었다.

“나에 대한 건 아는데 선규가 걱정이긴 하네. 자기 입으로 말한 적은 없으니까.”

“알아? 어쩌다가?”

“올라가면서 이야기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태훈은 고 실장이 레스토랑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에도 어머니가 레스토랑에 직접 왔었지. 그러곤 해선 안 될 말들을 마구잡이로 해대는데 밖에 고 실장이 있었거든. 그래서 싫으면 나가도 좋다고 했는데 이만큼 연봉 챙겨 주는 곳 없다고 안 가더라. 태훈의 짧고도 간단명료한 설명에 상운은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은 현관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상운이 벨을 누르자 선규가 나오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상운은 내심 그의 인상이 변한 것에 놀라며 음식과 자신이 미리 준비해 온 선물을 내밀었다.

“우와. 레스토랑에서 가져온 거예요?”

“어. 얘네 초대했다는 말은 왜 안 했어.”

“전 고 실장님이 했을 줄 알았어요. 왜 같이 안 오셨어요?”

“아무것도 준비를 안 해서 마트라도 다녀오겠대. 금방 올 거야.”

“그냥 올라오셔도 되는데. 선배, 오랜만이에요.”

상운은 두 사람의 대화를 주시하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든 인사에 화들짝 놀랐다. 벌써 저렇게 가까워졌단 말이지. 그는 내심 뿌듯해하며 선규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규는 상운이 사 온 디퓨저를 꺼내 향을 맡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향이 진짜 좋네요. 고마워요, 선배.”

“왠지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걸로 사 왔어. 네가 좋다니 다행이다.”

“웬일로 상운이 네가 센스 발휘 좀 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내 이름 앞에 센스가 호로 붙는 거 몰랐어?”

누구도 안 믿을 소리에 선규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디퓨저를 선반 위에 올려 두었다. 작업도 할 겸 넓은 식탁을 사서 공간은 좁았지만 네 사람이 편히 앉을 자리가 있으니 차라리 나았다. 선규와 태훈이 음식을 펼쳐 놓는 동안 상운은 원룸을 둘러보았다.

“오늘 아침에 온 거야?”

“좀 쉬었다가 오후에 왔어요. 와서 계속 청소하기 바빴죠.”

“힘들었겠네. 어쩐지 바닥이 번쩍번쩍하더라고.”

“놀리기는.”

태훈은 손을 흔들며 과장했다. 그사이 고 실장이 누른 차임벨이 맑은 소리를 냈다. 선규는 재빨리 현관으로 나갔다. 누가 봐도 그의 뒷모습은 즐거움이 담긴 듯했다. 태훈은 선규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사람이 살면서 하루 전체를 보람차고 행복하게 보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니까.

“짠! 집들이엔 당연히 휴지랑 세제 아니겠어요? 쌓아 둬도 금방 없어지는 생필품으로만 준비했습니다!”

“우와,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진짜 고마워요, 고 실장님.”

“두루마리 휴지에 티슈까지, 너무 완벽하지 않나요?”

“얘네가 오늘따라 진짜 센스가 좋네. 선규 등에 날개 붙여 주려고 작정했어?”

“날개 붙여 주는 방법이 이렇게 쉬워서야 되겠습니까?”

선규는 태훈과 고 실장의 대화에 고개를 살짝 젖힐 정도로 웃어 댔다. 상운이 그 대화에 끼어들며 태훈에게 제대로 날개가 될 만한 선물을 해주라고 일갈했다. 고 실장 역시 맨날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웬 말이냐며 상운을 거들었다.

“야, 나는 내가 선물이야.”

“우웩. 진짜 매너 꽝이다.”

“그러니까요. 집들이할 때 꼭 이런 노 매너 한 명씩 있더라고요.”

태훈은 두 사람의 공격에도 끄떡없었다. 그들 사이에서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던 선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생글거렸으니까.

한바탕 손님맞이를 하고 나니 온몸에서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그나마 태훈이 준비해 온 음식들을 그대로 펼쳐 놓기만 했기에 치울 게 별로 없었다. 그마저도 상운과 고 실장이 가고 난 뒤 태훈이 먼저 치워 놓는 바람에 선규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오늘 고마워요. 덕분에 진짜 편하게 집들이했네요.”

“쟤네 말대로 나는 음식이나 가져와야지.”

“고 실장님은 말만 존댓말 쓰지, 공격력이 장난 아니시던데.”

“걔는 그 재미로 출근하잖아.”

태훈은 선규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귓불을 입술로 꾹 눌렀다. 몇 시간 동안 이렇게 닿고 싶어도 식탁 아래에서 발장난을 치는 것 외엔 닿을 수 없으니 답답했다. 태훈은 그것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선규의 목덜미를 핥고 맨살을 쓰다듬으며 체온의 부족을 달래려 했다.

“이러고 싶은데 참느라 혼났어.”

“나……도요.”

“그렇게 대답해 주길 바랐어. 고마워.”

별게 다, 라는 선규의 말은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태훈은 그대로 선규의 입술을 삼켰다. 부드러운 입맞춤은 오늘 하루가 정말 꿈은 아닌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꿈일 리가 없었다. 등을 감는 태훈의 손은 너무도 따스했고, 선규의 입술을 핥는 혀와 입술에선 강한 집착이 느껴졌다.

혀를 얽고 있던 태훈은 서서히 그를 놓아주며 볼을 입술로 깨물었다. 야릇함을 품은 손가락 끝이 간지럽히듯 뒷목을 스쳤다. 선규의 숨은 태훈의 어깨 위를 흘러 가슴으로 타고 들어갔다.

“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거야.”

“그래요. 나한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응? 집주인한테 말 안 하면 누구한테 해.”

“태훈 씨가 나한테 항상 하는 말…… 있잖아요. 뭐든지, 태훈 씨가 원하는 대로 해요. 하고 싶은 대로.”

태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것을 본 선규는 다시 한번 태훈의 말과 행동을 따라 했다. 입술 깨물지 말라니까, 라며 엄지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훑었다. 표정과 여유는 전혀 달랐으나 그것을 받는 사람의 표정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선규는 자신도 지금의 태훈과 같은 표정을 지었을까 싶었다.

약간의 긴장과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태훈의 표정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선규의 손을 내려다보는 나른한 눈매에서 짙은 애정이 느껴졌다. 선규는 다시 한번 그의 입술 위에 짧게 입 맞추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왜 도망가.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이제 할 거잖아요.”

“오늘은 진짜 끌어안고만 잘게. 정말이야.”

이런 순간의 말은 확실히 믿을 만했다. 선규가 다시 품에 찾아들자 태훈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오늘 같은 날에는 적당히 눈치 있게 굴어야지. 태훈은 다디단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잘 알까. 선규는 자신의 속내를 들어갔다가 나온 것처럼 구는 태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좋은 의미들을 전부 끌어다가 부여하고 싶은 날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선규에겐 오늘이 그날이었고, 이렇게 태훈과 단둘이 남으면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여기 옥상에 올라가면 미니 정원 있대요. 말이 미니 정원이지, 건물주가 이것저것 키우는 건가 봐요.”

“그래? 가볼까?”

“네. 좋아요. 냉장고에 스파클링 와인 작은 거 있어요. 그거 가져가서 마셔요.”

“갔다 와서 같이 샤워할까?”

선규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빛났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태훈은 휴대폰을 챙겼다. 선규는 냉장고에서 파티용 미니 와인을 챙긴 뒤 태훈의 옆에 섰다.

올라가서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건물 자체가 이 주위에선 가장 높은지라 사방으로 시야가 트였다. 게다가 조악한 파라솔이 아닌 선셰이드가 설치되어 있어서 낮에도 쉬기 좋아 보였다. 태훈은 옥상까진 전혀 생각 못 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첫 번째 집으로 이사를 잘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며칠 전에 잠깐 비 와서 그런가, 의자는 못 앉겠다.”

“그냥 서서 마셔도 괜찮아요. 바람 엄청 부네요!”

“그렇게 좋아?”

“당연한 말을.”

하긴, 처음 태훈의 집에 왔던 날만 생각하더라도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선규였다. 탁 트인 건물 옥상에 올라오니 꼬리 안 달린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옥상 전체를 돌아다니며 사방을 구경하던 선규는 태훈이 와인을 건네자 시원하게 한 모금 넘겼다.

“매일이 이랬으면 좋겠어요. 맑은 하늘 위를 떠다니는 기분이라.”

“그렇게 될 거야.”

“오늘 다른 재료도 주문했어요. 수확하면 보내 주신대요.”

“진짜 뭔지 안 가르쳐 줄 거야?”

선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면에 있어서 그의 고집은 대단했다. 아는 곳에 해뒀단 말에 그저 좋은 게 오길 바란다는 말 이외에 태훈이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선규는 태훈에겐 무슨 일이 없었는지 묻는 눈빛이었다. 태훈 역시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켜곤 입을 열었다.

“옆 매장은 아직 안 나갔더라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방식이 좀 특이하잖아.”

“꼭 외식 기업처럼 하죠.”

“그래, 맞아. 보고 배운 게 그런 거라서. 하여튼 그런 식으로 늘려 볼까 해. 기존에 너한테 말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그래요? 어떻게 하려고요?”

“나도 비밀이야. 오픈할 때 보여 줄게.”

“아……. 나는 만들면 바로 마실 수 있게 해주지만 매장은 다르잖아요.”

선규의 말꼬리가 주욱 늘어졌다. 벌써 취기가 오른 것 같진 않은데 확실히 분위기라는 게 이렇게 중요한가 보다. 태훈은 선규가 아쉬워하는 상황을 견딜 만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선규의 눈꼬리가 조금 처지자마자 태훈은 그럼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주겠다며 다음을 약속했다.

선규는 좀 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다. 하지만 말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인물은 아니었기에 이번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무엇이든 넘어갈 수 있는 날이었다.

“올해가 반 정도 남았잖아요. 그래서 남은 6개월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뭘 하고 싶은데?”

“우선 내가 원하는 맛이 나는 술을 만드는 거고, 다른 건…… 성격을 조금 바꾸는 거예요.”

“성격? 어렵네. 불편한 거 없으면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 굳이 바꿀 필요 있나.”

“불편해요. 너무 못났다고 느낄 때가 많아서.”

선규의 말에 태훈은 더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의 웃음은 어디에 내려놓은 것인지, 건조한 표정의 선규가 태훈의 앞에 서 있었다. 선규는 몸을 반쯤 돌려 다른 방향의 하늘을 보며 태훈의 이름을 불렀다. 태훈은 지금 이 순간 대답을 하는 것보다 그가 하는 말을 기다리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다.

정적 속에서 눈을 감고 있던 선규는 다시 한번 태훈의 이름을 불렀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을 방긋거리더니 이내 입꼬리를 당겨 싱긋 웃었다. 그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한 티가 역력히 나자 괜히 태훈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는 선규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괜히 손을 한 번 털었다.

“좋아해요, 태훈 씨.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아주 많이 좋아해요.”

벽에 기대 있던 태훈은 선규의 손목을 잡았다. 선규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지 괜히 목을 울렸다.

“이 말을 얼른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오래 걸렸어요. 늦은 만큼 더 자주 말해 주고 싶은데 입술이 떨어지질 않아서…….”

“답지 않게 왜 그렇게까지 조급해하는 거야. 난 네가 언제 말해 주더라도 기뻐할 단 한 사람이잖아.”

“고마워요. 전부 다.”

“나야말로.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아주 많이 좋아해. 앞으로도 더 잘 느낄 수 있게 해줄게.”

이미 알고 있는 것인데도 왜 이렇게 가슴이 뛰는 걸까. 태훈도 선규도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이 그대로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선규가 한 발자국씩 떼며 걸어올 때마다 태훈은 목이 타들어 감을 느꼈다. 이것은 단순한 갈증이 아니었다. 태훈의 앞을 향해 걸어오던 선규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태훈의 팔을 당겼다. 태훈은 재빨리 몸을 당겨 선규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 갔다.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서로의 몸을 꽉 안은 채로 오랜 시간 동안 입술을 마주했다. 스위트 와인 향과 묵직한 향수 냄새가 섞인 향긋한 키스였다.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말과는 달리 두 사람은 샤워하는 내내 서로의 몸을 쓰다듬었다. 특히나 선규는 약간의 술기운과 하늘보다 더 높이 떠 있는 기분 덕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굴었다. 깊은 키스를 하는 동안 태훈의 엉덩이를 쓸며 그를 자극했다.

태훈 역시 선규의 몸을 끌어안고 가슴 아래부터 몸을 밀착시켰다. 선규의 다리 사이에 허벅지를 세우곤 그의 몸을 당겼다. 옅은 신음이 터질 때까지 선규의 엉덩이를 지분거렸다. 선규는 태훈의 몸을 끌어안고 어깨에 이를 박으며 끙끙거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오늘 선규는 이 기분을 온몸에 두른 채로 곤히 잠들고 싶어 했으니 얼마든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참이었다.

침대 위에 눕자마자 이불 속에 배어 있던 햇살 냄새가 태훈을 맞이했다. 선규는 괜히 현관과 창문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는 침대에 눕기 전 조명 리모컨을 찾아 들고 다가왔다.

“아, 폭신폭신하고 좋다. 얼른 이리 와.”

“새 이불 냄새 좋죠. 오늘 볕이 좋아서 잠깐 밖에다 널어 놨었거든요.”

“그때 보니까 베란다에 볕은 잘 들어오더라. 빨래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옛날 집에서도 아주머니가 이불 널자고 하면 얼른 가지고 나갔어요. 이불이 바짝 마른 냄새를 좋아해서.”

선규는 이불을 얼굴로 끌고 가 코를 묻었다. 옛날 집. 과거면 다 옛날이 되고 그런 거지. 이사를 하고 집을 옮기면 마음을 누군가 들쑤신 것처럼 엉망이 되진 않을까 걱정했다.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선규는 침착했다. 심지어 태훈과 함께 있으니 충만한 기분마저 들었다.

태훈은 선규의 턱을 살짝 잡아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선규가 슬며시 웃었다. 약 몇 달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아직도 변하고 싶다니. 심지어 그 이유가 나에게 좀 더 열렬한 고백을 하기 위함이라니. 태훈의 얼굴 위로 감동이 느리게 퍼져 나갔다.

“내일 일찍 나가야 해요?”

“아니. 천천히 가도 돼. 느긋하게 준비하고 갈 거야.”

“매일 태훈 씨 집에서 해주는 밥 얻어먹었으니까 내일 아침엔 내가 해줄게요.”

“여긴 네 집이라 이거야? 고맙긴 한데, 꼭 그러지 않아도 돼. 오늘 일하느라 힘들었잖아.”

“아니, 괜찮은데…….”

말과는 달리, 선규는 무거운 눈꺼풀을 계속 힘들게 올리고 있었다. 태훈은 따뜻한 손으로 그의 이마와 눈가를 덮어 주었다. 손이 스르륵 내려가자 눈꺼풀도 닫혔다. 그와 함께 선규가 입술을 내밀어 그의 손바닥 가운데에 키스했다. 그 간지러운 숨결과 감촉에 태훈의 얼굴엔 절로 미소가 퍼졌다.

따스한 밤이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 * *

Mulbora직 타싸X재업X교환X요게X

태훈은 천천히 볼륨이 커지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늘 알람보다 10분 정도 먼저 눈을 뜨기 때문에 조금은 놀랐다. 게다가 늘 새벽에 두세 번은 깨는데 지난밤은 깨지도, 꿈도 꾸지 않은 채 깊게 잠들었다. 선규를 안고 잠들었던 건 평소와 같은데 뭐가 달랐을까. 어찌 됐든 숙면 덕분에 몸이 가벼웠다. 태훈은 비어 있는 옆자리를 보곤 빠르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에서 나온 태훈은 팔을 쭉 펴며 쉬고 있던 근육들을 깨웠다. 방 밖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태훈은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주방 앞엔 심각한 표정의 선규가 서 있었다. 요리가 잘 안 되나. 선규는 금방 태훈을 돌아보며 표정을 풀었다.

“일어났어요?”

“응. 뭐가 잘 안 돼? 표정이 제법 심각한데.”

“시키는 대로 했는데 국 맛이 영 별로예요.”

“어디 한번 먹어 볼게. 음…… 나쁘지 않은데? 내 입맛엔 맛있는데.”

“진짜요? 아냐, 태훈 씨가 전에 그랬잖아요.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고.”

“아무렴. 맛없으면 맛없다고 가차 없이 이야기하는데?”

태훈은 욕실로 향하며 선규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렸다. 선규는 그 행동이 괜히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주 어린 시절을 지나고 나니 누군가 잘했다며 엉덩이를 귀엽다는 듯 두드리는 일은 없었으니까. 선규는 잠시 떠오른 과거 기억을 한편에 내려놓고 다시 요리에 집중했다.

아침마다 태훈 씨는 이걸 어떻게 준비한 거야. 반찬도 자주 바뀌던데. 선규는 마지막 요리를 끝내며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때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훈은 바로 식탁 세팅을 시작했다.

“계란말이가 되게 맛있어 보이는데.”

“모양 이상하다고 놀리는 거죠.”

“아냐. 들어간 게 많아서 진짜 맛있어 보여. 나 진짜 밥 차려 주는 사람 타박하는 못된 놈 아닌데.”

선규의 말에 당황한 태훈은 장황하게 자신을 변호했다. 선규가 만들어 주는 식사를 처음 먹는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놀릴 리가 있겠는가. 누구든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이태훈은 아니었다. 그는 선규와 앉자마자 잘 먹겠다고 인사하며 수저를 들었다.

선규는 슬며시 태훈의 눈치를 살폈다. 늘 밥은 없던 식욕도 불러일으킬 정도로 맛있게 먹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더했다. 자신의 얼굴만 보고 있는 선규에게 얼른 식사 안 하고 뭐 하냐며 손짓했다.

“선규 너 요리에 소질 있나 봐. 손으로 만드는 건 뭐든 잘하는 거 아냐?”

“너무 과장이 심하네요.”

“이래 봬도 요식업 하는 사람의 말인데 안 믿네.”

“나한테는 늘 너무 후하잖아요.”

“너도 이제 좀 뻔뻔해졌나 봐. 그런 말도 곧잘 하고.”

태훈의 말에 선규는 입술을 안으로 말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선규는 지난날들을 잠시 곱씹었다. 느긋한 식사를 끝내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시자 슬슬 태훈이 가봐야 할 때가 다가왔다. 선규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시간을 확인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손이 휴대폰으로 가고 있었다.

선규가 휴대폰을 눌러 보는 사이 옷을 갈아입고 있던 태훈이 갑자기 뒤를 돌았다. 선규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나 진짜 잘 잤어. 갑자기 이런 말 하니까 조금 웃기다.”

“나도요. 매트리스가 괜찮은 것 같아요.”

“나보고 여기 자주 와서 자라는 계시인 것 같아. 안 그래?”

태훈의 근거 없는 말에도 선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규는 계속 태훈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현관 앞에 선 태훈이 그의 뺨에 가볍게 입 맞추고 문고리를 잡자 선규의 표정이 묘해졌다. 태훈은 다시 문을 제대로 닫은 뒤 선규의 앞으로 다가왔다.

“왜 그런 표정이야. 사람 발걸음 안 떨어지게.”

“아니,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요.”

“음, 이따가 전화로 물어보려고 했는데 지금이 좋겠다. 저녁에 내가 여기로 올까, 아니면 오피스텔에 가 있을래?”

“오피스텔로 갈게요.”

“그래. 이따 봐.”

장소만 바뀐 것뿐인데 왜 이리 마음이 울렁거릴까. 선규는 닫힌 현관을 보며 가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는 몸을 돌리자마자 얼른 할 일들을 마치고 태훈의 집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한 태훈은 옆에 세워진 차를 보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번호를 보니 누나 차가 맞긴 한데. 유진은 태훈에게 연락 없이 찾아오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어서 재빨리 들어왔지만 그녀는 여유롭게 차만 들이켜고 있었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지나가는 길에 잠깐 왔어. 차나 한 잔 얻어 마시려고.”

“어디 보자. 차는 알아서 좋아하는 걸로 마신 것 같고, 이제 용건이 나올 때인데.”

“용건까진 아니고 궁금해서 와봤어. 누나랑 조카까지 대동한 연애 사업이 어떻게 된 건가 싶어서.”

태훈은 유진의 질문에 멋쩍게 웃었다. 그 얼굴을 본 유진의 눈이 커진 거야 당연했다. 근래에 태훈이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수줍은 얼굴을 한 적이 있나. 아니,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론 정말 없는 듯했다. 유진은 몇 번이고 눈을 끔뻑이며 태훈이 무슨 설명이라도 더 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웃기만 할 뿐 어떠한 부연 설명도 없었다.

“아니, 왜 웃기만 하고 말을 안 해.”

“잘됐으니까 웃지.”

“그때, 그 젊은 사람 맞지? 엄청 친절하더라. 애들한테도 잘해 주고.”

“우리 선규가 그래.”

유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우리 선규? 유진은 그래도 마저 해야 할 칭찬은 다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좋은 말은 옮겨 줄수록 좋은 법이니까. 같이 갔던 학부모도 선규가 너무 애들에게 잘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었다. 그 칭찬을 들은 태훈은 자신이 좋은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기뻐했다.

유진의 기억 속 태훈은 칭찬을 받아도 들을 만한 소리를 들은 것뿐이란 태도로 일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나사 하나 아니, 몇 개는 빠진 사람처럼 굴고 있으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너 그 사람 진짜 많이 좋아하는구나?”

“말이라고. 오죽하면 누나랑 은율이한테 핑곗거리 좀 만들어 달라고 했겠어.”

“잘됐다니까 다행이네. 아버지 만난 건 어떻게 됐어?”

“그것도 잘 풀렸어. 웬일이시래, 한 발자국 물러서 주시고.”

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성정이 나이 든다고 어디 갈 사람은 아니었다. 대단한 심경 변화가 일어날 만한 사건이 터지지도 않았다. 본가와 관계된 일 모든 게 다 물 흐르듯 이어지고 있었다. 어쨌든 아들을 보고 싶어 하던 어머니를 이유로 들기엔, 그 자식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다며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사람에 가까웠기에 신기할 정도로 잘 풀리긴 했다.

“누나. 깊게 머리 쓰려 하지 마. 노인들 변덕은 아무도 못 맞춰.”

“내가 깊게 생각할 게 뭐 있니. 그런데 말이야…….”

“안 돼. 눈 반짝이면서 그런데, 라고 붙이지 마.”

“야.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그래.”

“아까부터 계속 틈만 나면 선규 이야기만 하고 있잖아. 그 뒤에 나오는 게 뭐겠어.”

“귀신같은 놈. 촉만 더럽게 좋은 놈.”

유진은 사실을 욕으로 표현하기 기술을 펼쳤다. 위로 치켜뜬 눈과 씰룩거리는 입술이 그 욕에 효과를 더했다. 모든 의중을 태훈이 파악한 마당에, 유진은 숨길 게 없어졌다. 선규 씨 만나서 밥 한 끼 먹어 보고 싶다는 말에 태훈은 가차 없이 손을 저었다.

“부담 줄 생각 하지도 마.”

“밥만 먹는 거야. 그냥 이야기하면서.”

“이럴 줄 알고 내가 손 안 벌리려고 했는데. 때 되면 내가 어련히 알아서 같이 먹자고 하겠어?”

“누가, 네가? 믿을 만한 말을 해라. 무슨 네가 같이 밥을 먹자고 해.”

유진은 태훈을 향한 불신의 눈매를 숨기지 않았다. 남매가 서로의 연인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태훈이 먼저 말하는 법도, 유진이 물어보는 일도 없었기에 누굴 만나는지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유진의 레이더에 제 발로 들어간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태훈은 가까운 미래엔 셋이서 식사 약속을 잡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었다.

* * *

점심으로 시리얼을 비우자마자 선규의 휴대폰이 반짝거렸다.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선규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하귤 수확을 시작했으니 이번 주 안에 택배가 갈 거란 내용이었다. 이 문자까지 받고 나니 정말 새로운 막이 하나 열리는 게 느껴졌다.

선규는 하루 종일 주방을 쓸고 닦고, 소독했다. 그 뒤론 태훈과 함께 사 온 커다란 유리통을 소독하느라 또 바삐 움직여야 했다. 공장에서 만드는 술이 아닌, 양조장에서 직접 술을 만들 때마다 해오던 일인데 고작 몇 주 쉬었다고 벌써 힘들었다. 물론 양조장에서야 다른 이들과 함께한 이유도 있겠지만 혼자 이거 몇 개 닦았다고 지치다니. 선규는 바닥에 무너지듯 앉아서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의 체력이 약간 실망스러울 정도였다.

세수 한 번 해야겠는데. 선규는 지친 얼굴로 화장실 문만 쳐다볼 뿐 쉽게 몸을 일으키질 못했다. 딱 15분만 쉬어야지. 선규는 온몸을 늘어뜨린 채로 다짐했다.

하나 엉덩이 붙일 만하면 일이 생긴다던 어른들의 말이 맞았다. 잠시 쉬었다가 세수도 하고 차가운 물 좀 마시고 다시 할 일을 해야겠다는 계획이 무색하게 초인종이 울렸다. 주문해 놓은 다른 재료들이 온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 것과는 달리, 선규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내가 할 일은 이것뿐인가. 택배 기사가 놓고 간 박스를 열어 보자마자 선규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믿을 만한 곳에서 주문한 제품들인지라 상태는 최상등품에 가까웠다.

“향 진짜 좋네.”

선규는 강아지처럼 킁킁거리며 여러 내용물들을 확인한 뒤 냉장, 냉동 보관용을 분리했다. 바삐 움직이던 그는 문득, 아버지의 그늘에 대해서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이들 중 선규와 출발선이 비슷한 또래가 몇이나 될까. 이렇게 질 좋은 재료들을 쉽게 구하고,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일련의 과정들이 들어찬 사람은 확실히 아주 많지는 않을 터였다.

이 꿈을 가지게 된 건 가업 때문이었고, 이렇게 시작할 수 있는 건 가업 덕분이었다. 선규는 그 작은 차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전화를 거는 업체마다 선규에게 안부를 건네며 특별히 더 좋은 거 보내 주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응원의 말 역시 아끼지 않았다. 으레 하는 인사말이라고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테지만 이렇게 쌓여 있는 택배 상자를 보니 그래선 안 되는 것들이었다.

선규는 다시 벽에 편히 기댔다. 상품을 잘 받았다는 인사와 함께 다음에도 잘 부탁드린다는 말들을 몇 곳에 보내 놓으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래, 이제 시작인데 쉬는 것만 생각할 순 없지. 선규는 어깨에 힘을 바짝 주고 움직였다. 자신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 특히 태훈에게 제대로 된 결과물을 보여 주고 싶었다.

태훈은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자마자 뛰어나오는 인영에 슬며시 웃었다. 선규는 늘 오후까진 제집에서 작업을 하다가 태훈이 업무와 운동을 마치고 오는 시간 즈음에 태훈의 오피스텔로 왔다. 잠도 자고 가면 좋으련만 어찌나 칼 같은지, 늦은 밤이 되면 제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태훈이 아쉬움을 표현할 때마다 선규는 이번 주만 자주 확인할 게 있어서 그렇다며 난처해했다.

물론 태훈이 그것을 보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밤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해야겠다는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선규의 집에 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문 앞에서 순순히 갈 사람인가. 그것 역시 아니었다. 몇 번이고 찬장을 열어 보려 했지만 선규의 철벽 수비 앞에서 태훈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조금 늦었네요.”

“사고가 나서 도로가 막히더라고.”

태훈이 사고를 언급하자 선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태훈은 사실을 그대로 말하다가 자동차 사고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떠올렸다. 태훈은 얼른 가벼운 접촉 사고 같았다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곤 제 앞에 서 있는 선규의 몸을 뒤에서 안으며 손을 붙잡았다.

“손끝이 조금 부었네.”

“오늘 계속 재료 다듬었거든요. 좀 손이 많이 가는 거라.”

태훈은 선규의 손을 그의 어깨 위로 당기며 그 끝에 아직도 들러붙어 있는 향을 마셨다. 선규는 그제야 태훈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넘어가게 될 줄이야. 선규는 어물쩍 태훈의 기지에 넘어간 자신이 좋은 의미에서 우스웠다.

“라임 향 비슷한 게 나네. 유자는 흔하니까 안 가르쳐 주진 않았을 것 같고. 레몬으로만 술을 빚긴 어려울 거고.”

“와. 태훈 씨가 다르게 보이네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또 까먹었어?”

“요리보단 사업 두뇌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그래서, 이렇게 애걸복걸하는데 아직도 가르쳐 줄 마음이 없어?”

선규는 자신의 손을 뒤덮고 있는 태훈의 손을 잡아 내렸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모르는 척하기는 어렵고, 이를 어쩐다. 선규는 태훈의 눈을 마주하곤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태훈은 눈을 곱게 휘어 가며 매력적인 미소로 선규를 꾀어내고 있었다.

“미인계 쓰는 건 반칙이에요.”

“너무하네. 가진 거라곤 얼굴이랑 이거밖에 없는데.”

태훈은 다시 선규의 손을 잡아 자신의 아랫배 근처로 가져다 댔다.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나 선규는 그 손을 밀쳐 내지 않았다. 겹쳐 잡은 두 사람의 손은 태훈의 빳빳한 셔츠 위를 천천히 타고 올라갔다. 태훈은 다시 선규의 손을 잡아 그 끝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하귤이에요.”

“어? 여름 귤?”

“우리나라는 많이 안 먹는 편이에요. 일본에선 나츠미깡이라고 하는데, 잼으로 많이 먹거든요. 껍질이 단단해서 마멀레이드도 많이 하고요.”

나른하게 풀려 있던 태훈의 시선이 변했다. 당연히 들어 본 적 있는 재료였다. 작년 여름 시즌만 해도 C 코스의 디저트로 하귤 마멀레이드를 얹은 푸딩을 내놨었다. 태훈은 그제야 이 향의 정체를 알겠다는 듯 다시 한번 선규의 손끝에 묻어 있는 향을 들이켰다.

“아, 이제야 궁금증이 풀렸어!”

“주된 재료는 그거예요. 아주 달진 않으면서 상큼한 맛을 내고 싶은데 잘될지 모르겠어요.”

“잘할 수 있어. 주선규잖아.”

선규는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보장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나 방금 전 태훈은 마치 선규의 이름이 대단한 개런티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말해 주었다. 선규는 태훈이 이렇게 말해 준 것으로도 충분했다.

오늘 하루 종일 배송 받은 하귤을 다듬었다. 껍질이 좀체 벗겨지지 않아 작업을 마치고 나니 손톱 밑이 아렸다. 그뿐인가. 하얀 속껍질을 최대한 제거하느라 얼마나 진을 뺐는지 모른다. 선규의 머릿속은 그저 이거 얼른 끝내고 태훈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원하던 행복을 손에 넣었고.

“나한테만 미리 알려 줘서 고마워.”

“음, 이건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태훈 씨한테만 말한 건 아니에요.”

“뭐? 그럼 누……구냐고 물어볼 것도 없네. 고 실장밖에 더 있겠어.”

약간의 투정이 담긴 태훈의 목소리에 선규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 실장을 질투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선규가 어떻게 생각하든 태훈은 그가 고 실장과 어떤 내용의 문자를 주고받았을지 너무도 궁금해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집들이를 하던 날 자신을 놀리던 고 실장의 목소리와 표정이 오버랩됐다. 아아, 얄미운 녀석.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태훈을 맞이한 건 밝게 웃고 있는 고 실장의 얼굴이었다. 환한 미소임에도 불구하고 태훈은 이거 왠지 불안한데,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태훈의 촉은 엇나가지 않았다.

“대표님. 제가 선규 씨랑 문자 주고받는 것까지 질투하셔서 어쩝니까, 진짜.”

“야. 선규가 그래?”

“그럼요. 오늘도 당연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으니 이런 말도 나온 거 아니겠어요?”

“뭐라는데. 넌 뭐라고 했고.”

“제가 사생활도 보고해야 하나요?”

“……고 실장. 보고할 것도 없는데 따라 들어오지 마.”

태훈의 등 뒤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차라리 소리가 컸다면 나았을 수준의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태훈이 고개를 홱 돌리며 노려보자 고 실장은 턱을 치켜들었다. 대표님이 뭐 어쩔 건데요, 라는 뜻이 아주 확실하게 전해지는 행동이었다.

한 명의 성인이 사회생활을 하며 다른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는 거야 매우 당연했다. 태훈은 선규와 연이 닿아 있는 모든 이들을 질투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고.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들 중, 심지어 자신과 만날 수 있게 해준 상운과도 아주 가끔 연락하는 선규가 고 실장과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 여기까진 괜찮아. 태훈은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벌써부터 고 실장의 눈빛 때문에 기가 빨리고 있었다.

질투의 원인은 연락 자체라기보단 태훈 자신이 모르는 분야가 대화 주제란 점이었다. 둘이서 문자를 보내는 게 아니라 태훈의 앞에서 대화하더라도 알아들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은 약간의 무력감을 동반했다.

“진짜 우울한 표정 짓고 계시네. 이야기해 봤자 뭐 했겠어요. 술 이야기나 했겠죠.”

“바로 그거야. 내가 우울한 이유가.”

“와…….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하나. 진짜 참사랑이시네.”

참사랑. 고 실장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태훈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그렇긴 하지. 태훈은 어깨를 펴고 의자에 편히 기댔다. 거드름을 피우는 표정은 덤이었다.

“맞다. 상운이가 그 이야기 하더라. 네가 내 성향 아냐고. 그래서 알고 있는 데다가 싫으면 그만두라 했다는 일화도 이야기해 줬어.”

“돈 많이 줘서 안 나간다고 대답한 것도요? 그 말이 일품 대답이었는데.”

“너 일품 기준이 진짜 이상하다.”

태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 실장은 상운이 그런 걸 신경 쓰고 있는 줄은 몰랐다고 대답했다. 집들이 초반에는 분명 말조심을 한다고 입단속을 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자 혓바닥에 모터를 단 상운이 중요한 몇 마디를 던졌다. 고 실장은 태훈의 곁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직원답게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물론 그게 아니었어도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내 앞에서는 상관없는데 선규 앞에서는 조심해 줘.”

“선규 씨랑도 다 깠는데요? 아, 지금 표현이 너무 저렴했나.”

“응. 아주 많이 저렴했어. 그런데 선규가 먼저 이야기했어? 그럴 성격은 아닌데.”

“제가 또 한 믿음직하죠.”

고 실장이 얄미운 표정으로 두 팔을 으쓱거리는 횟수만큼 태훈의 얼굴이 다채롭게 구겨졌다. 이것 역시 놀라운 일이긴 했다. 이상하게도 이런 점에 대해선 질투심 따위 조금도 들지 않았다. 물론 태훈이 성향을 오픈한 영향이 크겠지만 선규가 고 실장에게 말해 줄 줄은 몰랐다. 백번 양보하여 언젠가는 말할 사이가 될 예정이었다고 치더라도, 빠르긴 했다.

이건 좋은 변화인가. 태훈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들을 확인하며 10분 전과는 다른 생각을 펼쳤다. 마음을 닫고 살던 사람이 어떻게든 변화를 주기 위해 여는 걸 나쁘다고만 볼 순 없었다. 언젠가 그것 때문에 상처를 입게 될 거란 말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의 선규에게 필요한 건 따스한 눈빛과 손길이니까.

“재료가 뭔지 엄청 궁금해하셨다면서요.”

“듣고 꽤 놀랐어. 감귤로 술 빚는 건 들어 봤어도 하귤은 조금 다르니까.”

“맞아요. 과육 자체의 맛이 판이하긴 하죠. 그런 면에선 선규 씨도 대단하고.”

“네가 보기엔 어떨 것 같아?”

“맛을 봐야 알죠. 속단하고 싶지 않네요.”

일에 있어선 누구보다 칼 같은 고 실장이 조금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훈을 똑바로 보는 눈엔 묘한 뜻도 담겨 있었다.

“혹시라도 겨울 즈음을 생각하고 계시는 거면 우선 접어 두세요.”

“티 많이 났어?”

“원하는 맛이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법인 데다가 알맞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공장 찾는 것도 보통 일 아닌 거 아시잖아요.”

태훈은 제 속내를 들킨 게 여간 민망했는지 슬쩍 고 실장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선규가 내고 싶은 맛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데 레스토랑에서 팔 수는 있을까, 따위를 생각하기엔 너무 일렀다. 게다가 음식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서 판매량이 저조해진다면 선규만 상처받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메뉴 자체를 선규의 술에 맞출 수도 없고.

고 실장은 긴 연설을 늘어놓고 사무실을 나섰다. 술에 대한 설명과 장인 정신에 대한 장황한 설교에 태훈은 하마터면 넋을 놓을 뻔했다. 홀에서 준비 중이었던 지배인의 부름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사무실에 홀로 남은 태훈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얼른 컴퓨터를 켰다. 인터넷 창에서 그가 들어간 곳은 다름 아닌 서점 사이트였다. 무엇을 검색했겠는가. 당연히 술에 관한 책들이었다.

제3장

-2-

시작은 탁주였다. 아직 제대로 증류를 할 도구가 마땅하지 않았기에 탁주를 선택한 이유도 있었지만 감을 잡고 싶었다. 선규는 오늘도 집을 나서기 전, 커다란 유리통이 든 하부장을 확인했다. 습도계와 온도 모두 잘 유지되고 있었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것이 이제 슬슬 발효가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그 향도 선규의 마음에 쏙 들었다.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 선규가 도착한 곳은 역시나 태훈의 집이었다. 요즘은 마치 학교와 독서실, 집만 오가던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마저 들었다. 선규는 택배 기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선규는 중간중간 잠시 멈출 때마다 기다려 주었고, 택배 기사는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곤 같은 층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이름을 물어 왔다. 선규는 어색한 말투로 태훈의 이름을 댔고 택배 기사는 커다란 박스를 현관 앞에 내려 주었다.

“뭘 샀길래 이렇게 무거워.”

선규는 헥헥거리며 박스 위의 인포를 읽어 보았다. 그것을 확인한 선규의 눈가가 곱게 휘었다. 술, 술, 술. 온통 술에 관한 책들뿐이었다.

* * *

여름은 생각보다 빨리 깊어졌다. 맑은 하늘과 잘게 부서지는 햇살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며칠뿐이었다. 더위는 평년보다 2주나 빨리 시작됐고, 선규의 발등엔 불이 떨어졌다. 미리 예상했던 습도와 기온이 더 올라간다면 발효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시도 때도 없이 하부장을 열어서 확인했다.

그렇게 약 한 달의 시간이 찰나에 흘러갔다. 그사이 태훈의 사업 확장 역시 빠르게 진행됐다. 일찍 찾아온 더위는 태훈의 계획에도 변화를 주었다. 그래도 이쪽은 좋은 의미의 변화였다. 인테리어 시공을 위해 발라 놓은 페인트나 본드가 금방 마르니 다음 작업 역시 수월해졌다. 다만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빨리 가야 해요?”

“더 자, 선규야. 나 금방 둘러보고 다시 올게.”

“무슨 공사를 이 새벽부터……. 여기로 오지 말고 집으로 와요.”

“지금 시작해야 더울 시간에 쉬니까. 그때면 다 마르기도 하고. 하여튼 알겠어. 거기로 갈게.”

선규는 아직 잠이 깨지 않은 얼굴로 현관 앞에 섰다. 태훈은 그를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역시나 이 집이 문제였다. 게다가 선규 역시 자신의 일 때문에 조금 예민해져 있던 터라 깊은 잠을 자지 못한 모습이었다. 평소엔 태훈이 조용히 움직이면 깨지 않았는데 오늘은 바로 눈을 떴으니 말이다.

시공 업자와 인부들은 하루하루가 돈인 사람들이다. 그러니 일당을 받은 날에 최대한 많은 일을 하려 했다. 누군가는 일부러 일을 천천히 해서 일당을 더 늘리려 한다고들 하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었다. 장마가 오기 전에 많은 사업장을 돌며 일하면 그 사람들이 나중에도 부르곤 하니 열심히 하는 게 장기적으로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태훈의 성격상 일을 맡겼다고 해서 느지막이 가서 훑어볼 사람이 아니었다. 업체가 일을 시작할 거라는 시간보단 두 시간가량 뒤에 가서 식사도 챙겨야겠다며 일찍부터 나섰다. 홀로 남은 선규는 잠이 부족했는지 다시 침대로 향했다.

차에 오른 태훈은 인테리어를 맡긴 소장과 통화를 한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태양빛이 작열하고 있었다. 금방 도착한 태훈은 퀭한 얼굴의 고 실장을 보자마자 웃음을 금치 못했다.

“고 실장. 이래서야 여기 관리 잘할 수 있긴 하겠어?”

“지금 제 능력을 의심하십니까.”

“얼굴에 힘주지 말고 그냥 하품해. 내가 나온다니까 뭐 하러 너까지 나와선.”

“여긴 제가 단독으로 통솔하게 될 매장이니까요!”

“의욕 풀 차징이네. 나야 잠깐 집에 가면 된다지만 넌 어디 있을 건데.”

“선규 씨가 놀러 오라고 하던데요?”

고 실장의 대답을 들은 태훈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물론 고 실장이 선규의 집에 가는 이유야 뻔하고, 태훈이 관여할 수 있는 범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고 실장이 얄미워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고 실장은 괜히 큭큭 웃다가 가서 몇 가지 도움만 주고 출근할 거라며 태훈에게 거짓 위로를 건넸다.

주문해 뒀던 술에 대한 책을 받은 날, 선규는 제 분야에 관심을 보인 태훈에게 감동한 듯했다. 태훈이 물어보는 것마다 자세하고 재미있게 설명해 주었는데, 그 설명 속에는 술을 업으로 여기며 살아온 삶이 느껴졌다. 이렇게나 좋아하는 일이니, 고 실장을 따로 불러서 상의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맞긴 한데.

“선규 씨가 여기 인테리어랑 콘셉트 엄청 궁금해하더라고요. 하귤에 대한 복수예요?”

“처음엔 단순 와인 바인 것처럼 말해 놨거든. 콘셉트 바뀐 거 알면 괜히 부담스러워할까 봐.”

“부담스러울 게 뭐가 있어요.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주종을 놓기 위해서 바꾼 것뿐인데. 그걸 굳이 선규 씨의 일에 국한시킨 것도 아니고요.”

“말이야 쉽지. 선규가 그렇게 받아들일지는 모르는 거잖냐.”

고 실장은 태훈의 대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받아들인다 해도 나쁠 거야 없지 않나. 자극받아서 좋은 술 만들면 선규 씨에게도 좋은 일이고, 그걸 상품화해서 가게에 내놓으면 우리에게도 좋은데. 고 실장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게 생각했다.

레스토랑 옆에 준비 중인 매장은 와인 바, 였지만 온갖 주종을 다 파는 펍으로 변경된 지 오래였다. 거기에 맞춰 실내 인테리어를 구상하고 지금 시공 중이었다. 처음엔 와인 바를 생각했기에 레스토랑과 비슷한 이미지로 가려 했다. 하지만 매장의 정체성을 바꾸면서 전혀 다른 분위기로 계획했다. 태훈과 고 실장은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샘솟는 사람들처럼 인테리어 소장과 빠르게 콘셉트를 정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수고 많으십니다. 자, 시원한 거 드시면서 하세요.”

“일찍 나오셨네요?”

“예, 소장님. 거의 다 끝났네요.”

“이번 금요일이면 아예 싹 끝날 겁니다.”

“너무 덥긴 해도 날씨 덕을 보긴 했네요. 다들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콘셉트를 명확하게 정해 주신 덕분에 금방 진행했죠.”

소장과 태훈은 의례적인 인사를 주고받은 뒤 너른 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선규가 말해 준 것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레스토랑에 처음 왔던 선규가 태훈의 이미지와 많이 달라서 놀랐다던 순간이 떠올랐다. 이 매장에 들어온다면 나랑 잘 어울린다고 하려나. 태훈은 깔끔하고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리는 구분이 없었지만 주종은 섹션별로 나누어 벽면에 진열하기 위해 맞춤 장이 들어온 상태였다. 직원들 역시 전문성을 위해 오픈일에 맞춰 교육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태훈은 매장 안을 한번 둘러보곤 고 실장과 함께 가림막 바깥으로 나왔다.

“오늘 주방 가전 시공 전부 끝나면 이제 진짜 오픈까지 얼마 안 남은 거네요.”

“금요일에 어떻게 해서든 작업 마무리 짓고 토요일 하루는 베이크 아웃 해야겠어. 본드 냄새가 조금 나네. 약품 몇 개 뿌린다고 날아갈 것 같지도 않고.”

“알겠습니다. 엄청 좋다는 제품으로만 시공했는데도 이러네요.”

“페인트든 뭐든 제 기능을 못 하면 좋아도 말짱 도루묵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됐고, 지금 선규네 집으로 갈 거지? 같이 가.”

자기 차로 향하던 고 실장은 태훈의 차에 올랐다. 가는 길에 요깃거리도 잔뜩 샀다. 고 실장은 뭘 그렇게 많이 사느냐고 놀랐지만 태훈의 속은 달랐다. 선규가 혼자서 아침을 제대로 챙겨 먹었을 것 같진 않았다. 처음엔 놀라던 것과는 달리 고 실장은 태훈의 옆에 딱 붙어선 제가 먹고 싶은 것들도 열심히 주워 담았다.

“왔어요? 두 사람 다 많이 피곤하겠어요.”

“그만큼 저녁에 일찍 자야죠, 뭐. 우선 우리 밥부터 먹어요!”

“여러 가지 종류별로 포장해 왔어. 아침 안 먹고 나왔지?”

선규는 대답 없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태훈은 입매에 힘을 주곤 못마땅하단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됐든 지금 시간에 먹으면 아침 겸 점심이라 괜찮다며 고 실장이 얼른 음식들을 꺼냈다. 먹어야 기운을 내서 일도 하죠. 고 실장은 자연스레 태훈의 어깨를 밀곤 그 옆에 선규가 앉게끔 만들었다.

“하귤은 다른 도수로 계산해서 다 담그지 않았어요? 오늘도 뭐가 많네요.”

“그냥 제가 마실 거 하나 담그려고 준비 중이었어요.”

“선규 씨가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네요. 많이 마시는 것 같지는 않던데.”

고 실장의 말에 선규는 눈을 크게 떴다. 어쨌든 양조장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데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다는 말이 우습게 다가왔다. 선규는 과거의 태훈이 그랬던 것처럼 언제 매장의 콘셉트에 대해 알려 줄 것이냐며 오늘도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태훈은 그저 오픈일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태훈이 이렇게 대답하는데 고 실장이라고 별수 있겠는가. 그 역시 선규의 눈빛에 어색한 미소만 띨 뿐이었다.

식사는 가벼운 이야기들과 함께였다. 물론 그 안에는 각자의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선규는 목을 몇 번 가다듬더니 태훈과 고 실장을 불렀다. 약간의 긴장감이 서린 목소리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레스토랑에 갈 때까지 시간 있으니까 한 잔 마셔 볼래요? 태,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오늘? 오늘 마셔 봐도 되겠어?”

“저야 영광이죠! 오늘 그것 때문에 저 부르셨구나!”

고 실장은 손뼉까지 치며 반겼다. 선규는 그런 관심이 부끄러웠는지 괜히 머리를 만지며 하부장을 열었다. 그 안에선 확실히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몇 주 전만 해도 발효로 인해 큼큼한 냄새가 나더니 금세 빛깔 고운 술이 된 것이다.

“완전 걸러 낸 건 아니에요. 지금은 제대로 된 도구도 없고……. 위에만 살짝 떠서 드릴게요.”

“어차피 계속 집에서 이렇게 작업하실 거면 증류기 하나 사는 건 어때요?”

“조금만 고민해 보고요.”

“여기에 증류기까지 두면 너무 좁지 않겠어?”

선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컵에 약간의 술을 담아냈다. 태훈과 고 실장은 컵을 받자마자 진한 향을 음미했다. 상큼한 향이 코를 찔렀다. 고 실장은 입술 끝만 살짝 적신 뒤 천천히 향과 맛을 느꼈다. 새콤달콤한 맛이 온 입안에 풍겼다. 잘 닦아서 데친 하귤 껍질도 그 향에 일조한 듯했다.

태훈 역시 혀를 굴리며 술맛을 봤다. 하나 아무리 그 감상을 길게 내려 해도 맛있다, 너무 좋다, 이외의 단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깊은 애정이 그의 머리를 바보로 만든 게 틀림없었다.

“어……때요?”

“좋네요.”

“그게 다예요? 태훈 씨는요?”

“나도 좋다는 말 외엔 할 말이…….”

“집에서 빚은 술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엔 정말 좋은 술이에요.”

고 실장이 컵을 내려놓고 선규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태훈은 저 미소가 전초전임을 알아차렸다. 선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 실장은 어차피 택시 탈 거 한 잔 더 마셔 보겠다며 조금 더 따라 냈다. 이번엔 굳이 향을 맡아 보지 않고 다시 한번 오랜 시간 동안 입에 머금고 있었다.

“맛만 보면 탁주 같지 않아요. 특유의 텁텁함이 없어요. 이건 진짜 선규 씨 기술이 좋은 거죠.”

“칭찬 먼저 해주시니까 더 불안하네요.”

“불안해할 거 없어요. 정말 맛이 좋거든요. 여기다가 만약 증류기까지 두셔서 맑게 만들면 색도 진짜 곱겠어요. 단맛이 너무 강하지 않아서 더 좋은 것 같아요. 젊은 층은 쓴맛도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요. 그것도 잘 중화시켰고요. 그런데요, 선규 씨. 이렇게 잘 만들어서 대체 뭘 할 거예요?”

고 실장이 선규를 부르며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선규는 그의 눈을 마주한 채로 입을 꽉 다물었다. 만들고 싶어서 만들었잖아요. 그 뒤는 어떻게 할 거예요. 이걸로 뭘 하고 싶은 거예요. 고 실장은 추궁하듯 물었다. 그것은 선규도 매일 고민하고 있던 것 중 하나였다.

술을 잘 만드는 거야 실패한다 해도 몇 번이든 도전할 생각이었다. 그 뒤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다른 양조장에 이걸 넘길 수도 없고, 외주 제작 업체를 찾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선규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자 고 실장이 그를 채근하듯 불렀다.

“계속 생각 중이었어요. 하지만 고 실장님도 아시잖아요. 이게 그렇게까지 완벽한 술은 아니라는 거요.”

“왜요? 전 지금으로도 좋은 것 같은데요. 상업적인 면에서요.”

“고 실장, 어디서 나 모르게 칼 갈고 왔어?”

“새로 오픈하는 매장은 제 관리 감독하에 있습니다. 물론 최종 결정권자는 대표님이지만요. 이게 무슨 뜻이겠어요?”

“한 달 전만 해도 나한테 겨울 즈음을 생각하고 있는 거면 관두라며.”

“이렇게까지 잘빠질 줄 알았나요. 잘된 거 알았으면 얼른 다른 곳보다도 먼저 접근하는 게 옳은 거 아니겠어요? 안 그래요, 선규 씨?”

고 실장은 선규의 팔을 붙잡았다. 선규와 눈이 마주치자 고 실장은 자신과 단둘이 진지하게 대화를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다시 웃었다. 무서운 미소였다. 태훈은 괜히 선규에게 겁주려는 듯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화이팅, 하고 작게 읊었다.

레스토랑에서 늘 들어오는 방에 온 자리 잡은 선규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 찼다. 가업을 위해 바로 입사하다 보니 남들처럼 면접을 많이 볼 일도 없었던 선규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선규는 얼음이 든 예쁜 유리컵을 햇빛 아래쪽에 두었다. 시원한 공간에 있다 해도 작열하는 태양빛을 그대로 받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나 보다. 얼음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 방금 물을 다 비웠는데도 컵 바닥엔 물이 맺혔다. 얼음이 낸 소리와 비슷할 정도로 맑은 소리가 문 앞에 퍼졌다.

“오래 기다리셨죠. 통화가 길어졌네요.”

“아니에요. 별로 기다리지 않았어요.”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지난번의 그 미소가 고 실장의 얼굴 위에 얇게 깔렸다. 이게 무섭다는 그 얼굴이구나. 어젯밤 태훈에게 고 실장과 업무 관련 약속을 잡았다고 전했다. 태훈은 뭐든 선규 네가 원하는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면서 넌지시 고 실장의 웃는 얼굴을 조심하란 말을 했다.

고 실장이 선규에게 호전적인 미소를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그날도 분명 웃는 건 좋은 거라고 대답했을 터였다. 하지만 선규는 이미 고 실장의 무섭게 웃는 얼굴을 봐버렸다. 오늘도 저 얼굴로 나를 압박하리라 예상은 했지만 벌써부터라니. 선규는 얼음이 녹은 물로 입술을 축였다.

“선규 씨 계획부터 듣고 싶어요.”

“제 계획이요?”

“언젠가는 원하는 맛으로 완성할 술이었잖아요. 그다음은요? 철진 양조에 있을 때엔 양조장을 통해서 출시할 가능성이라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해요.”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어요. 다른 곳에 외주 제작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제가 만들어서 파는 것 역시 수량이 적어서…….”

“그럼 외주를 맡기지 않는 이상 대량 생산은 불가능한 거네요. 애초에 하귤로 만든 술이니까 다른 계절엔 먹어 볼 수도 없고.”

선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 실장이 한 말은 선규가 계속 고민하던 것들 중 하나였다. 기성품용으로 제작한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막막했다. 지금까지 양조장 아들로 살아온 게 도움이 되었다면, 이 문제에 있어선 그 점이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저는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납품 계약을 맺고 싶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을 못 잡으시는 것 같네요.”

“고 실장님 말이 맞아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가졌을 뿐, 그 뒤론 어떻게 해야겠다는 결정을 못 내렸으니까요. 사실 지금도 제가 생각하던 맛과는 멀어요.”

“그 정도는 저도 계산하고 있습니다.”

“아시니 다행이네요. 그런데도 왜 저와 이렇게 만나고 계신 거예요? 시간 낭비잖아요.”

“술을 좀 맛없게 만들지 그러셨어요. 처음에 맛보기로 준 술이 그렇게 맛있으면 나중에 완성품은 어떻겠어요? 저는 지금 만드신 거라도 내놓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다고요. 그건 선규 씨의 만족도를 위해 개인적으로 작업하시고 지금 이건 우리한테 좀 주세요.”

“아, 제 탓이에요?”

이제야 긴장이 풀린 선규는 다시 물을 들이켰다. 고 실장의 웃는 얼굴도 이제야 조금 자연스러워졌다. 고 실장은 진심으로 선규의 술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웃는 얼굴 뒤로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선규는 또 고 실장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더 물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언제부터 이 만남이 면접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크흠. 그럼 오피스텔을 작업실로 쓰실 생각은 없습니까?”

“……누가 질문으로 넣으라 한 건지 정말 잘 알겠네요.”

고 실장은 선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입가는 웃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태훈이 넣었을 게 분명한 질문을 기계음처럼 읽은 고 실장의 표정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까지도 함께 사는 것을 포기 못 했을 줄이야. 선규는 고개를 저으며 그럴 생각은 없다고 대답했다.

“아쉽군요. 물론 이 질문자가 아쉬워할 거란 소리였습니다.”

“네,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미치겠어요. 무슨 이런 걸 꼭 물어보라고 해, 진짜.”

“제가 혼낼게요. 그다음은요?”

“이건 진짜 중요한 질문인데요. 완성된 술을 철진 양조를 통해 기성품으로 제작할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 질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선규는 느리게 눈을 끔뻑거렸다. 살짝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연 선규는 고개를 저었다. 고 실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알겠다는 대답을 했다.

그곳을 통해 제작하는 게 가장 안전하고 좋은 방법이란 걸 선규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물론 주 대표가 쉽게 허락하지 않겠지만 또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곳에 넘기느니 여기서 만들라고 한 뒤에 선규를 쥐어짜 댈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주 대표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헛된 꿈속에서 시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더는 고난 속에 자신을 밀어 넣으며 희망 고문 하고 싶지 않았다. 선규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 *

선규는 티셔츠를 걸치자마자 거울 앞에서 여러 번 목 주위를 확인했다. 그 뒤에 서 있던 태훈은 팔짱을 끼곤 안 보인다며 입술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내가 데려다주면 안 돼? 안 들어가고 밖에 있을게.”

“태훈 씨가 뭐 하러 굳이 기사 노릇을 해요. 오늘은 푹 쉬다가 레스토랑에 다녀와요.”

“내일이 펍 오픈일이라 어제 중요한 거 다 마치고 왔어.”

꽤나 결연한 말투였다. 팔짱을 끼고 거울 속 선규를 보는 태훈의 눈엔 언뜻 서운함도 비치는 듯했다. 병원에 간다고 어머니와 만나는 일 따위 절대 벌어질 리 없다는 건 선규가 더 잘 알았다. 말 그대로 태훈이 굳이 고생하는 게 싫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혼자 다녀왔다간 삐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같이 가요. 그 대신 갈 때엔 내가 운전할게요.”

“왜― 아, 아냐. 알겠어. 나 금방 준비할 테니까 기다려.”

“천천히 해요. 금방 가니까.”

태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려다가 다시 선규의 앞으로 다가왔다. 볼과 이마에 몇 번이고 입술 도장을 찍은 뒤 다시 걸어갔다. 이런 와중에도 선규는 왜 입술엔 안 하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얼굴을 붉혔다.

금방 깔끔한 차림으로 나타난 태훈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선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꽉 잡은 선규는 차에 가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기도가 꽤 효과가 있었는지 주차장에 내려갈 때까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태훈의 차 앞에서야 두 손을 놓은 선규는 오랜만에 운전한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 생각해 보니까 올 때에 내가 하는 게 더 좋은 거 같네. 둘 다 하면 더 좋겠지만.”

“왜 이렇게 먼 곳을 같이 가고 싶어 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운동을 하러 가도 좋고, 책 읽으면서 쉬어도 될 텐데.”

“네가 병원에 찾아가는 건 상관없는데, 너 혼자 오는 게 싫어서.”

태훈은 음악을 켜며 대답했다. 선규는 운전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 대답을 듣게 되리라곤 생각 못 했다. 이번에도 적당히 장난치는 대답이 날아올 거라 생각하고 있던 선규는 조심스레 에어컨을 세게 켰다.

오늘따라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 짧게 느껴졌다. 태훈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가기 때문이리라. 엄청난 태양빛이 쏟아졌지만 그마저도 괜찮게 느껴졌다.

“1층 로비에 카페가 있어요. 거기서 기다려요.”

“카페도 있는데 지금까지 같이 가자는 말을 무시했다니.”

“왜인지 알면서 자꾸 찌르면 너무 아파요, 태훈 씨.”

“알겠어. 여기 있을 테니까 내려올 때 전화해.”

선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선규는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태훈은 멀리서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팔짱을 꼈다. 매번 이렇게 스트레스받으면서도 굳이 어머니를 찾는 이유가 뭘까. 자신은 절대 선규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돌아섰다. 시원한 음료를 주문한 뒤 자리에 앉는 와중에도 선규의 손이 아른거렸다. 하얗게 질린 손은 오랫동안 태훈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병실로 올라온 선규는 문을 열자마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침대 앞 의자에 주 대표가 앉아 있었다. 주 대표 역시 놀란 눈치는 마찬가지였다. 그 가운데에 어설픈 수를 쓴 어머니만 웃고 있었다.

“여기 계신 줄 몰랐습니다. 안녕하셨어요.”

“선규야, 어서 와. 밖에 꽤 덥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주 대표는 자신의 부인을 쳐다보며 물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고, 짜증 났다는 걸 표현하기 위한 말에 가까웠다. 선규는 차분하게 마음을 다스리며 가지고 온 것들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지난번에 양갱 생각난다 하셔서 사 왔어요. 지금 드실래요?”

“조금만 이따가 먹을게. 지금은 괜찮아. 이사 간 곳에선 잘 지내고 있니?”

“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나 곧 집으로 가려고. 그럼 선규 얼굴 매일 볼 줄 알았는데.”

선규는 어머니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주 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선규를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선규가 무얼 하고 있든 신경도 안 쓸 텐데 오늘따라 그 시선이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선규는 여러모로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고 여기며 한숨을 삼켰다.

“술을 만들고 있다고.”

“예? 아, 예. 아버지.”

“정말이니, 선규야? 그럼 더더욱 집에 들어와야지. 왜 밖에서 고생을 사서 해.”

선규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마 태훈이 따지고 온 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한 듯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주 대표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으니. 선규는 죄인인 양 고개를 못 든 채 다른 의자에 앉았다.

“선규야. 너는 할 말 없니? 맨날 나만 떠드는 것 같네.”

“저야 늘 비슷해서요. 나중에 집에 한번 갈게요. 남은 짐도 가지러 가야 해서.”

어머니는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아들도 아니었으면서 오늘따라 왜 이런담. 선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젠 볼 눈치도 없었다. 어머니는 다음엔 병원이 아니라 집에서 볼 수 있겠다며 다시 한번 은근한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선규는 찾아뵙겠다는 대답으로 넘겼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고문과도 같았던 시간이 느리게 기어가자 선규는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고 앉아 있어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고.

“벌써 가려고? 왜, 더 있다 가.”

“퇴원하시기 전에 또 올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가 뭐라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선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대표를 향해서도 인사를 꾸벅꾸벅 해댄 선규는 얼른 1층으로 내려갔다. 카페에 놓인 잡지를 보던 태훈은 음료를 반도 비우지 않은 상태였다. 선규는 그가 무슨 일 있느냐고 묻기도 전에 손을 잡아채선 밖으로 나왔다. 차로 향하는 발걸음은 보다 가벼워져 있었다.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니지?”

“아버지가 계시더라고요.”

“뭐? 아무도 안 오는 줄 알고 온 거 아니었어?”

“그러게요. 하여튼…… 얼른 가요, 우리!”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데 무리하는 건가. 태훈은 묘하게 들뜬 선규를 보며 의문을 품었다. 그것은 금방 해결됐다. 선규는 차에 오르자마자 깊은 숨을 쉬며 더는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말해 주었다. 전에도 몇 번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태훈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계속 안 와도 되는 것인지 물었다.

“내 얼굴 안 보고 사시면 갑자기 화병이 나는 일도 없겠죠.”

“……선규야.”

“정말이에요. 그 집에선 모든 원인이 나였으니까. 또 아프시면 이번엔 내가 말을 안 듣고 집에 오지 않은 탓이라고 할 거예요.”

이 병원과도, 그런 집과도 진짜 안녕을 고할 때가 왔어요. 선규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말을 이었다. 태훈은 알겠다며 선규의 손을 겹쳐 잡은 뒤 차로 향했다.

병원 건물의 입원실에서 주 대표는 이렇게 차 안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건조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가벼운 차림의 태훈은 다시 한번 거울을 확인했다.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곤 옷에 어울릴 만한 시계를 찼다. 손목을 몇 번 털어 낸 뒤, 소파에 앉아 있는 선규를 돌아보았다. 그는 대체 무엇이 그렇게 심각한지 태훈의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찾아보며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증류식으로 술 받을 수 있는 기계 알아보는 중이었어요. 가정에서도 쓸 수 있는 걸로요.”

“이 정도면 아주 크지도 않고 괜찮네. 고 실장이랑 만난 건 어떻게 됐어?”

“고 실장님이 이야기 안 했어요?”

“응. 뭐든 고 실장이 결정 내린 뒤에 결재 올리라고 했거든. 네가 만든 걸 라인업에 넣고 싶어서 안달 났다는 것만 알지.”

“대량은 아니고요, 주말에만 소량 납품하는 걸로 결정했어요. 하귤주는 엄청 짧게 내놓을 거고 더위 꺾이면 고구마 나오잖아요. 그걸로 고구마술 빚을 거예요.”

“전에 마셔 봤던 거? 그거 진짜 맛이 좋더라.”

“고구마는 구하기도 쉽고 또 술도 금방 빚거든요! 태훈 씨도 좋았다고 하니까 얼른 해봐야겠다.”

선규의 눈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특히나 태훈이 맞장구를 쳐주자 더욱 신이 났는지 맛이 좋았느냐고 되물어보기도 했다. 그럼 얼른 술을 만들어야겠다고 말하는 이유가 자신이라니, 태훈은 갑자기 몰려오는 부끄러움 때문에 얼른 뒤를 돌았다.

“태훈 씨, 준비 다 끝났어요?”

“응. 이제 슬슬 가자.”

일요일 오전, 태훈과 고 실장이 열심히 준비해 온 펍 오픈 파티로 향하는 선규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선규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이곳의 실내 인테리어야말로 선규가 태훈을 보며 느꼈던 것들이었다. 내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구나. 선규는 입안을 살짝 깨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깔끔한 외관부터 내부까지, 누가 보면 펍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때, 괜찮아?”

선규는 태훈의 물음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굴렸다. 태훈은 선규가 살짝 들뜬 게 보여서 기분이 좋았고, 선규는 이곳을 보는 것 자체가 좋은 듯했다.

오전엔 지인들과 함께 오픈 파티를 하고, 늦은 오후부터 정식 영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레스토랑을 자주 찾는 사람들은 물론, 유동 인구가 많은 편이라 관심이 쏠려 있었다. 어제 외관을 공개하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여긴 뭐 하는 곳인지 잠시 서서 확인하기도 했다. 태훈은 애써 긴장감을 덜어 내려 애쓰며 선규의 뒤를 따라다녔다.

선규는 맥주 탭 앞에 서서 직원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선규가 누구인지 모르는 직원은 당연히 긴 설명을 늘어놓았다. 선규는 슬며시 웃으며 그의 설명을 들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긴 했지만 오픈 첫날부터 직원을 향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오셨어요? 저쪽에 유진 씨 와 계시는데.”

“뭐? 못 온다고 했는데?”

“유진 씨……? 태훈 씨 누나분이요?”

선규가 되묻자 고 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쪽으로 손짓했다. 그 순간 태훈은 눈가를 손으로 덮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유진은 구석의 테이블에 앉아 태훈과 선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렇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니 진짜 태훈 씨랑 닮았네. 선규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유진의 앞으로 향했고, 등 뒤엔 태훈의 한숨이 퍼졌다.

“선규 씨! 오랜만이에요. 여기서 만나니까 더 반갑네요.”

“안녕하셨어요? 은율이는 안 왔나 봐요.”

“여기에 뭐 하러 오겠어요. 친구네 애들이랑 수영장 갔어요. 이태훈, 나 보는 눈이 왜 그래?”

“못 온다며.”

“원래 내가 데리고 가려 했는데 지난번에도 신세졌다고 이번엔 친구가 가겠다더라고. 내가 온 게 싫어? 불만이야?”

“그럴 리가 있겠어. 왜 테이블에 술밖에 없어. 여기 사이드 디시도 좋아.”

“네가 가서 알아서 챙겨 와.”

유진의 미소에 태훈은 혀로 입안을 훑었다. 불안한데. 왜 선규랑 단둘이 남으려고 저러는 거야. 태훈이 자리를 떠나지 않자 유진은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슬슬 네 손님들 오고 있지 않느냐며 몰아내기까지 했다.

선규는 어색한 미소를 띤 채로 유진의 앞에 앉았다. 확실히 닮았어. 선규는 실례인 줄 알면서도 유진의 미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그렇게 봐요, 선규 씨?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죄송해요! 웃는 얼굴이 태훈 씨랑 많이 닮으셔서 저도 모르게…….”

“그런 소리 많이 들었어요. 나랑 쟤랑 많이 닮긴 했죠. 오빠랑은 별로 안 닮았는데.”

“맞다. 형도 있었죠. 이야기할 일이 별로 없어서 자꾸 까먹네요.”

선규는 들고 온 맥주를 조심스레 들이켜며 유진의 잔을 보았다. 아직 제 술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정말 누군가 주문을 하긴 할까. 괜한 걱정이 선규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 선규의 얼굴을 보고 있던 유진은 다시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생글거렸다.

아무리 봐도 의외란 말이지. 이태훈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이런 사람이었다니. 유진은 다시 술을 들이켜며 선규의 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별다른 대화가 오가지 않은 채 술만 줄어드는 건 별로 좋지 않았다. 이런 곳처럼 다양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에선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선규 씨가 마시는 건 무슨 맥주예요?”

“그냥 밀맥주요. 향이 정말 좋아요. 이따가 가져다 드릴까요?”

“제가 마실게요. 그때에도 느꼈지만 너무 착하셔.”

“그렇지도 않아요.”

유진이 가벼운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녀는 선규가 부담스러워할 만한 주제는 꺼내지 않았다. 선규는 대답하는 와중에도 유진의 배려를 느꼈다. 유진은 날씨가 너무 갑자기 더워졌다며 지금 펍을 연 건 꽤 괜찮은 선택 같다는 말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공통분모는 태훈뿐이니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얘는 한 번 마음먹으면 진짜 하는 애더라고요. 웃기죠. 30년 넘게 봐왔으면서 매번 진짜 하네, 라며 놀라는 게.”

“그런 사람이 흔치는 않으니까요.”

“집을 진짜 나갈 거라고도 생각 못 했고, 그 나이에 사업을 시작할 거라고도 생각 못 했는데. 난 여전히 내 동생에 대해 잘 모르나 봐요.”

“정말 잘 아는 사람이야말로 몰랐다는 생각을 한 번씩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유진은 시원한 술을 한 모금 넘기며 물었다.

“무슨 뜻이에요?”

선규 역시 남아 있던 맥주를 마셨다. 가벼웠던 대화에 약간 무거운 추가 매달렸다.

“상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야말로 속단하기 쉽잖아요. 쟤는 저래, 얘는 이래. 정말 끊임없이 지켜봐 주는 사람이야말로 이런 면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네요. 아, 이제야 이야기 좀 하나 싶었는데.”

태훈의 그림자가 테이블 위에 지자 유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장난이란 것을 알지만 태훈은 방금 전 유진이 한 말에 움찔거렸다. 이야기 좀, 이라니. 지금까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는 안주로 먹을 만한 것들을 내려놓으며 유진을 흘끔거렸다.

“앉으라고 하고 싶은데 누가 저기서 손 흔든다. 우리 이 대표님 바빠서 어째야 하나. 애인 얼굴도 못 보고.”

“선규 부끄러워하니까 그런 말 하지 마.”

“내 말보다 네 말을 더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유진의 말이 맞았다. 선규는 유진의 말에는 조금 당황할 뿐이었지만 태훈의 말에는 귀는 물론, 목까지 붉게 물들였다. 이곳이 펍이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얼굴 붉어지는 사람들이야 적지 않을 테니까.

태훈이 인사를 위해 다시 테이블을 떠났다. 유진은 그런 태훈의 모습이 꽤 웃겼는지 한참이나 픽픽 웃었다. 선규는 유진의 몫까지 맥주를 가져오며 다시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유진은 자연스레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내가 선규 씨랑 또 만나고 싶다 했거든요.”

“저랑요? 저 만나 봤자 재미도 없는 사람인데.”

“지금 엄청 재미있는데요? 아, 잠깐만요. 오빠. 무슨 일이야.”

유진은 오늘 처음 보는 표정을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겠지만 선규는 곧바로 태훈의 형을 떠올렸다. 처음 보는 그녀의 굳은 표정에 선규까지 긴장했다. 그녀는 금방 전화를 끊자마자 혀를 한 번 찼다.

이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유진은 그 집안에 자신 역시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쓴 생각을 했다. 평소 태훈에게 관심도 없는 큰오빠가 오픈 행사는 잘되고 있느냔 전화를 할 줄은 몰랐다. 태훈에게 하면 될 것이지만 연락 끊고 사는 동생에게 아무렇지 않게 연락할 정도의 뻔뻔함은 없나 보다.

“태훈이 형이 전화를 했네요. 오빠를 이렇게 부르니까 좀 어색하네요.”

“아,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아뇨. 여기 오픈 행사 잘되고 있냐고 묻네요. 언제부터 이렇게 관심이 많으셨나 몰라.”

유진은 비꼬는 의도가 가득한 말을 하며 선규가 건넨 술을 마셨다. 선규가 불편해할 텐데 계속 이런 분위기로 있고 싶지 않은 마음 반, 답답함을 털어 버리고 싶은 마음 반이었다. 유진은 멜론 콘 하몽을 한입에 넣었다. 아침부터 좋은 일이 있다 싶었는데 기분 잡쳤네.

“오빠랑 사이가 별로 좋은 편은 아니거든요. 웃기지 않나요? 태훈이 집 나올 때만 해도 인연 끊자고 말하던 사람이 왜 이러는지.”

“아…….”

“태훈이도 제 형은 별로 안 좋아해요. 어렸을 때부터 툭하면 별것도 아닌 걸로 때리고 구박해서. 나한테는 안 그러더니 막내 태어나고 나니까 뭔가 달랐나 봐요.”

“질투였을까요. 여동생이 귀여움받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막내 남동생은 조금 달랐다거나.”

“그럴지도요. 어렸을 때야 그게 먹힌다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그러면 꼴불견이죠. 하여튼 도움 안 돼. 이렇게 좋은 곳에서 선규 씨랑 한잔하니까 기분 좋았는데.”

유진은 잔을 내밀며 살짝 웃었다. 선규는 잔을 살짝 부딪치며 매장 안을 돌아다니는 태훈을 응시했다. 고 실장과 함께 인사를 하던 태훈은 선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활짝 웃었다. 지금 좋으니 다 된 거라 믿고 싶었다. 아마 태훈도 그리 여기리라.

“아까 이야기하는 거 들어 보니까 선규 씨 술도 여기 들어올 거라고 하던데.”

“네. 지금은 아니고 다음 주말부터요. 양이 굉장히 적을 거라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잘 안 될까 봐 겁나기도 하고요.”

“다음 주요? 분명 대박이 날 테니까 오픈 시간부터 와서 기다려야겠네.”

“에이, 아니에요. 밤에 오셔도 남아 있을걸요. 아니다. 제가 한 병은 빼놓을게요!”

“매장에서 팔아 줘야 좋은 거죠. 그리고 선규 씨가 정성스레 만든 좋은 술에는 그만큼 값을 치르는 게 당연한 거니까.”

유진은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말을 하며 절인 올리브를 하나 집어 먹었다. 선규도 따라서 안주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러니까, 그렇게 정성스레 열심히 만든 것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곳에서 자신의 술이 잘 나간다면 그건 자신에게도, 태훈에게도 좋은 일이 터였다. 그러니 더 잘하고 싶었다.

선규는 가슴 가득 차오르는 욕심을 맥주 한 잔으로 가라앉혔다.

기분 좋은 취기였다. 선규는 레스토랑 안의 사무실로 들어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았다. 오픈 행사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됐다. 선규는 행사의 막바지에 먼저 밖으로 나왔다가 그대로 사무실에 들어왔다. 여기로 온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펍은 다 좋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유진을 혼자 두고 싶진 않아서 자리를 더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의 지인도 도착했다. 선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고 태훈과 함께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이곳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자도 보내 놨으니 일이 끝나면 이곳으로 오리라.

“선규 씨. 여기 있었네요. 취해서 자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고 실장님이 자리 비워도 되나요?”

“이제 정리 중이거든요. 세 시간 뒤가 정식 오픈이니까 시간은 충분해요.”

“오늘 태훈 씨는 닫을 때까지 있는 거예요?”

“아뇨. 오픈하면 조금만 보다가 가실 거예요. 선규 씨도 오늘은 일하지 말고 쉬어 두세요. 앞으로 얼마나 바쁘겠어요.”

“에이…….”

고 실장은 선규의 술이 당연히 잘 나갈 것처럼 과장해서 표현했다. 민망해진 선규는 그가 들고 왔던 물을 마시며 얼굴의 열을 식혔다. 고 실장은 선규의 술이 당연히 잘 나갈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선규는 그 점이 꽤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으며 손만 저었다. 실장은 어깨를 쭉 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이제 진짜 시작이네요, 고 실장님.”

“그러게요. 이런 기회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워낙 일을 잘하시니까요. 그만큼 애정도 깊으시고요.”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은 사람이 날 믿어 줄 때의 감정, 아세요?”

선규는 갑작스런 화제 전환에 고 실장의 눈을 마주했다. 그 역시 술을 아주 안 마신 것은 아니었기에 양 볼을 살짝 물들인 채로 말했다. 선규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 실장은 슬며시 웃었다.

“여기서 일하는 동안 진짜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런 거 많이 느꼈어요.”

“태훈 씨가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나요?”

“많이 까칠하긴 한데 일 처리는 진짜 잘하시고. 장난기가 많아서 쉽게 다가갈 수 있나 싶지만 대화 몇 마디만 해도 벽이 만리장성보다 길고 높다 싶었어요.”

“그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그런 분이 실수할 때에 혼내질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해주는데 어떻게 해서든 여길 계속 다니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고 실장은 다른 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그의 얼굴은 매장 하나를 담당하게 된 데에서 오는 감회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은 태훈을 향한 신뢰와 뒤섞여 있었다. 선규는 고 실장의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와중에도 태훈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태훈 씨는 자신을 믿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구나. 나도 그중 한 명이었고.

“작년이었나. 지나가는 말로 와인 바 이야기를 했어요. 그때만 해도 분명 별 관심 없어 보였거든요.”

“대답은 그렇게 해놓고 이런 걸 다 생각해 두고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요! 나쁘진 않겠네,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할 땐 언제고…….”

“고 실장님, 여기 맡게 돼서 엄청 좋으신가 봐요.”

고 실장은 진심으로 벅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순히 레스토랑 업무를 돌보는 것과는 천지 차이일 정도로 일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행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게 다 그런 법 아니겠는가.

고 실장과 선규는 앞으로 내놓게 될 술들에 대해서 주제를 바꾼 뒤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손님들의 배웅을 마치고 돌아온 태훈은 자신만 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입술을 쭉 내밀었다.

“나만 빼고 아주 분위기 좋네.”

“나이가 몇인데 질투를 하세요.”

“칠순이 넘는 나이여도 질투할 수 있어.”

“고생 많았어요. 태훈 씨.”

선규는 태훈을 달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 옆을 손으로 두드리며 활짝 웃었다. 그게 잘 먹히는 걸 보며 고 실장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태훈이 저렇게 팔불출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고 실장이 조용히 나가자마자 태훈은 선규의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아침에 함께 이동한 이후로 이렇게 둘만 남은 게 처음이었다. 바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얼굴 보는 게 어려워서야. 태훈은 그의 어깨 위에 날카로운 콧대를 부비며 앓는 소리를 냈다.

“오피스텔로 얼른 가고 싶어.”

“난 그래도 오늘 되게 좋았는데 태훈 씨는 별로였어요?”

“일이 잘돼서 기쁜 거랑은 다르지. 난 닿지 못해서 안달인데 우리 주선규 씨는 누나랑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고.”

“누나가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하시더라고요.”

선규의 대답에 태훈은 금방 허리를 세웠다. 태훈의 놀란 표정에 선규 역시 덩달아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지금 뭐 잘못했나. 태훈은 선규의 팔을 붙잡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선규는 대답하는 와중에도 보고 싶고 둘만 있고 싶었다고 할 걸 그랬나, 짧게 후회했다.

“누나라고? 우리 누나랑 그렇게 친해졌어?”

“뭐예요, 그거 때문에 놀란 거였어요? 제가 어색해하니까 그냥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 달라 하셨어요.”

“야. 나는 편하게 해달라고 해도 태훈 씨라는 호칭이 네 입에서 나오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데!”

“지금 호칭 때문에 삐진 거예요?”

태훈은 누가 봐도 서운하단 얼굴을 한 채로 삐진 건 아니라 대답했다. 선규는 목을 살짝 젖혀 가며 크게 웃었다. 누나를 누나로 부른 것뿐인데 왜 그러느냐는 놀림 가득한 말은 덤이었다. 태훈은 이 이상 말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귀여웠는데. 선규는 약간의 아쉬움을 달래며 다시 태훈의 손을 잡았다.

질투하긴 했지만 좋은 일이었다. 선규가 조금이나마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는 건 태훈도 바라던 일이었으니까. 마음을 터놓는 것까진 어려워도 그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생기는 것인데 싫을 리가 없었다.

고등학생 때 그 작은 마을에서, 그런 게 다 소문났으니 선규에게 동네 친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심지어 대학은 졸업한 지 한참이나 지나서 이런 일을 겪고야 말았다. 그나마 상운이 진화해 줬다곤 해도 여전히 누군가는 떠들고 다니고 있겠지. 주위에 아무도 없으면 이런 인간들에게 에너지를 빼앗기고 만다. 그러니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도 꽤 중요한 일이었다.

“이따가 오픈하면 좀 더 보고 갈 거죠?”

“응. 너랑 놀다가 식사하고 갈 거야. 나 기다려 줄 거지?”

“음. 봐서요.”

선규는 이렇게 말하면 태훈이 또 귀엽게 흘겨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눈빛이 아닌 뜨거운 입술이 먼저 닿았다. 입술을 빨아들이는 그 힘에 선규는 얼른 태훈의 목을 끌어안았다. 단단한 태훈의 어깨에 닿는 손끝에도 힘이 실렸다.

태훈은 선규의 입술을 훑으며 살짝 웃었다. 그 미소에 선규 역시 옅게 웃으며 태훈의 몸을 더 당겼다. 태훈은 선규의 허리를 좀 더 제 쪽으로 힘주어 당겼다. 자연스레 태훈의 허벅지 위에 앉은 선규는 태훈의 귓불을 쓸며 키스에 응했다.

“장난치는 게 너무 귀여웠어.”

“나한테는 귀엽다의 기준도 너무 후하네요.”

“내가 너한테 그렇지, 뭐.”

태훈은 선규의 뒷덜미를 쓸었다. 선규는 고개를 살짝 비틀며 태훈의 입술을 핥았다. 태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진하게 엉겨 붙었다. 선규의 허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끈적해졌다. 선규는 거친 숨을 쉬며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태훈의 나른한 시선에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 같았다. 선규는 얼른 그의 어깨 위에 이마를 대며 시선을 피했다.

“고역이네. 여기서 끝내기 너무 아쉬워.”

“이따가…… 같이 갈 거잖아요.”

“응. 오늘은 밤새 네 살 내음 맡고 싶어.”

“나도 그래요.”

태훈은 솔직한 선규의 대답에 그의 귀를 혀로 핥았다. 움찔거리는 등도, 제 몸을 꽉 잡고 있는 손도, 전부 자극적이었다. 태훈은 선규의 깊은 등골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뜨거운 숨이 퍼지자 선규는 그 간지러운 감촉에 눈을 질끈 감았다.

태훈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선규를 옆에 앉혔다. 뜨겁게 달아오른 선규의 시선이 태훈의 얼굴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진짜 여차하면 여기서도 할 수 있는 사람이야.”

“뭐예요, 그게.”

“뭐긴 뭐겠어. 그렇게 쳐다보면 큰일 난다는 뜻이지.”

태훈은 선규의 등부터 엉덩이를 부드럽게 매만지며 귓가에 대고 말했다. 선규는 졌다는 듯 태훈과 이마를 마주하곤 입술 도장만 찍었다. 이 사무실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오피스텔로 가겠다는 것과는 달리 두 사람이 도착한 건 처음 만났던 호텔이었다. 여기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한 사람은 선규였다.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던 태훈은 별 뜻 없다는 부연 설명에 생각을 멈추었다.

라운지로 향하는 발걸음에 태훈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날과 다를 바 없는 동선이었다. 물론 식사를 한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머릿속에 무슨 계획이 있는 건지 안 알려 줄 거야?”

“사실 별 뜻 없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그럴 줄 알았어.”

“오늘은 내가 태훈 씨 좀 넘어오게 만들려고요.”

“세상에. 너무 고마운 말이긴 한데 그건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너라면 늘 할 수 있는 거잖아.”

태훈의 말에 선규의 귓가가 붉어졌다. 내가 넘어가는 건 오직 너라는 열렬한 고백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오늘은 호기롭게 굴려고 했는데, 벌써부터 난관에 봉착하다니. 선규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태훈을 올려다보았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따뜻한 커피를 테이블 앞에 두고 서로를 응시했다. 커피를 마실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치 그날을 흉내 내기 위한 하나의 소품처럼 놓여 있을 뿐.

“우리 그날 무슨 이야기 했더라. 나는 계속 대답만 하고 태훈 씨가 많이 물어봤었잖아요.”

“그랬지. 네 표정을 보니까 궁금한 게 하나씩 생겨서.”

“표정이 왜요?”

“상처받은 작은 동물 같았어.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눈을 살짝 위로 치켜뜨곤 잔뜩 경계하고 있었지.”

선규는 제가 하려던 말과 행동들보다 지금 태훈이 하는 말이 더 흥미로웠다. 그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태훈에게 계속해 보라 말했다. 태훈은 커피로 입술만 축인 뒤 선규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 냈다. 그때와 지금 사이의 간극에 몸이 달아오르면 이것도 중증이려나. 태훈은 선규 모르게 끓어오르는 마음을 쓴 커피와 함께 넘겼다.

“나에 대해서 궁금하긴 한데 물어보진 못하겠다는 게 보여서 귀여웠어.”

“내가 그랬구나. 신기하긴 했어요. 그냥…… 태훈 씨가 되게 커 보였거든요. 나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벌써 자리 잡은 것도 그렇고.”

“침대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동경에 가까웠다는 거네.”

“그건 모르겠어요.”

태훈은 선규의 대답에 다시 커피 잔으로 가던 손길을 멈추었다. 선규는 살짝 웃으며 테이블 아래로 마른 다리를 뻗었다. 종아리를 훑는 움직임에 태훈의 울대뼈가 오르내렸다.

“재킷을 벗을 때에 셔츠 위로 드러나는 몸이 되게 근사했거든요.”

태훈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선규의 손을 붙잡았다. 선규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날과 완전 뒤바뀌었네요, 우리. 선규의 말에 태훈은 초조한 미소를 건네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태훈과 선규의 입술이 진하게 닿았다. 서로를 탐하는 그 몸짓은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태훈의 품에 갇혀 옴짝달싹못하던 선규는 지금 그의 몸을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자극하기 바빴다. 방도, 분위기도, 두 사람의 관계도 바뀌었지만 변하지 않은 게 있었다. 그건 선규를 몰아붙이는 태훈의 입술과 손길이었다.

“흐으…… 태훈 씨, 더 꽉…….”

더 세게 안아 달라는 선규의 신음 섞인 말에 태훈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태훈의 입술이 살짝 멀어지자 선규는 감겨 있던 눈을 떴다. 태훈은 그의 앞에서 매혹적으로 웃으며 아랫입술을 빨았다. 그 감촉에 선규는 고개를 살짝 내밀며 따라 움직였다.

태훈은 다시 진한 키스를 퍼부으며 선규의 허벅지 위에 사타구니를 문질렀다. 선규의 목에서 좀 더 진한 신음이 울렸다. 선규의 엉덩이를 쥐고 자신의 다리 위에서 흔들던 태훈의 손길에 힘이 실렸다. 선규는 시원한 방 안의 온도가 점차 뜨거워짐을 느끼며 태훈의 가슴을 쓸었다.

“선규야. 더 꽉 안아. 나를 좀 더.”

태훈의 말에 선규는 팔에 힘을 꽉 주었다. 허겁지겁 태훈의 목덜미를 찾아든 입술은 그의 살을 핥으며 야릇한 소리를 냈다. 태훈은 선규의 엉덩이를 받쳐 들곤 침대로 향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처음 선규와 잠자리를 가졌던 날이 떠올랐다. 상처받은 눈매와 우울이 덕지덕지 붙은 말투로 줄곧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걸 우회적으로 드러내던 모습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나중에서야 그게 형의 기일이 다가와서 그런 것임을 알았을 때 찾아든 연민이란.

태훈은 선규를 눕히자마자 거칠게 셔츠를 벗었다. 마음 같아선 다 뜯어내고픈 심정이었으나, 아쉽게도 여긴 호텔이었다. 재빨리 하의를 탈의한 선규는 태훈의 셔츠를 아래에서부터 풀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안으로 말며 웃었다.

“귀여운 짓 하다가 왜 웃어.”

“민망해서요.”

“드디어 다 벗었네. 이런 날에는 눈치껏 편한 옷으로 입었어야 했는데, 안 그래?”

“중요한 일이 있었잖아요.”

선규는 다가오는 태훈을 덥석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태훈은 그의 볼을 살짝 깨물며 선규의 등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피부에 얕은 손길이 닿자 더욱 진하게 얽히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요즘 두 사람 모두 바쁜 데다가 예민해진 선규를 달래 주듯 안고 자는 게 태훈의 일상이었다. 담백하게 안고 자는 것도 좋았다. 물론 그게 좋았다고 해서 지금의 행위를 그만둘 생각 따위 추호도 없지만.

“앗, 잠깐만…….”

“왜. 벗어야 뭐든 할 거 아냐.”

태훈은 선규의 발목을 붙잡곤 속옷과 얇은 바지를 한 번에 벗겨 냈다. 매끈한 피부가 드러나자 태훈은 발목부터 서서히 손을 올렸다. 커다란 손으로 종아리를 감싸듯 쥐고 올라가자 선규의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태훈은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선규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태훈은 몸을 숙여 선규의 허벅지를 입술로 깨물었다. 축축한 입술과 혀가 닿자 허벅지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태훈은 그런 선규를 놀리듯 더욱 깊은 곳을 입에 담았다. 양손은 허벅지 아래를 살살 굴리듯 매만지며 간지럽혔다. 선규는 그 감각에 간헐적으로 숨을 참았다가 뱉으며 바르작거렸다.

“흐아― 간지러워……!”

태훈이 전하는 자극에 선규의 납작한 배가 진한 긴장으로 뒤덮였다. 놀리기라도 하듯 선규의 성기 기둥을 혀로 핥던 태훈은 그대로 다시 위로 올라와 아랫배부터 자국을 남겼다. 서서히 올라오는 감촉에 선규는 태훈의 목과 머리를 매만졌다.

“태훈 씨…… 키스해요, 우리―”

선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입술은 태훈에게 먹혔다. 태훈은 부드럽게 선규의 입안을 휘저으며 동그란 엉덩이를 쥐었다. 그러곤 마치 성교하듯 자신의 성기를 엉덩이 골 사이로 부볐다. 선규의 신음이 서로의 입안을 오가다 사라졌다.

젖은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얽히는 소리가 야하게 퍼졌다. 선규는 발기한 태훈의 성기가 금방이라도 제 아래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 대신 삽입한 것은 긴 손가락이었다. 안을 허겁지겁 벌리는 손길에서 태훈 역시 얼마나 급한지 느낄 수 있었다. 선규는 땀이 밴 태훈의 살을 매만지며 계속 입술을 내밀었다.

“으흐…… 천천히 해요.”

“밤은 기니까?”

그간 장난을 안 친다 싶었다. 선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은 태훈은 선규가 미소 짓자 혀로 아랫입술을 훑으며 손가락 개수를 늘렸다. 선규는 방금 자신이 천천히 하라 말했던 것과는 다른 행동에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오늘 태훈을 말리기란 어려워 보였다.

태훈의 성기는 흉흉하게 부푼 채로 그가 팔을 흔들 때마다 꺼떡거렸다. 태훈은 눈만 내리깐 채 선규의 아래를 응시하며 몇 번이고 입술을 축였다. 선규는 흥분이 담긴 신음을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은 시야 위로 밝은 빛줄기가 터졌다.

“허윽, 읏……!”

“선규야, 눈 떠. 나 봐야지.”

선규는 태훈의 부름에 눈을 뜨며 떨리는 신음을 질렀다. 굵은 귀두가 몸 안으로 들어오자 허리와 엉덩이가 바짝 조여 들어갔다. 태훈은 삽입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성기에 들러붙는 내벽에 낮게 목을 긁었다.

태훈이 천천히 움직이며 선규의 자극점을 짓눌렀다. 골반을 꽉 쥐고 있는 손에 힘이 잔뜩 실렸다. 점점 거세지는 태훈의 몸짓에 선규의 시야가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천장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태후, 흐으…… 읏, 하아…….”

“너무 조이는데, 나 죽겠어. 선규야.”

“으응, 흣, 안아…… 줘―”

선규는 애처롭게 팔을 뻗으며 말했다. 태훈은 그를 품에 안아 체온을 나눠 주었다. 태훈의 뜨거운 살결이 닿자 선규는 그의 피부 위에 입술을 문지르며 몇 번이고 이름을 불렀다. 선규는 숨을 헐떡이며 태훈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태훈은 빠르게 허리를 쳐올리며 선액을 흘리는 선규의 성기 위에 배를 문질렀다.

“태훈 씨― 흐읏, 응…… 아―!”

오늘은 늘 뱉어 내던 천박한 말조차 없었다. 태훈은 매서운 눈매로 선규의 얼굴 위에 입술을 찍어 내리며 뜨거운 숨을 귓가와 목덜미에 흩뿌렸다. 엉덩이 아래를 살짝 받친 채로 태훈이 쳐올릴 때마다 땀에 젖은 살이 철퍽거렸다. 선규는 그사이 저도 모르게 사정하며 아래를 조였고, 태훈의 움직임이 더 야만스러워진 거야 당연했다.

선규의 신음이 다시 입술 사이로 먹혀 들어가자 태훈은 선규의 다리 사이를 더 파고들었다. 조금 더 깊은 곳까지 성기가 박히고, 내벽을 전부 긁어 대자 선규는 울듯이 신음했다. 하지만 신음과 함께 엉덩이를 조여 대니, 태훈의 움직임만 더욱 거칠어질 뿐이었다.

“흐읏, 응, 태훈 씨…… 아, 어떡, 해…….”

“괜찮으니까, 나 안아. 꽉 잡아.”

태훈의 목소리에 선규는 살짝 풀린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들었다. 매서운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와 동시에 태훈이 자신의 안에 사정하는 게 느껴졌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던 미간 사이가 살짝 풀어졌다. 선규는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단 한 번의 사정으로 두 사람의 깊은 욕망이 다 채워졌을 리 없었다. 태훈은 선규의 귓가를 혀로 핥으며 다시 허리를 흔들었다.

기운이 빠진 선규는 이불만 살짝 쥔 채로 태훈이 흔드는 대로 움직였다. 태훈 씨는 대체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 거지. 선규는 신음을 참지 않으며 목이 울리는 대로 내뱉었다. 태훈이 그 모습에 더 흥분하는지도 모른 채. 태훈은 선규의 가슴을 간지럽히던 손을 느리게 내리며 온몸을 훑었다. 태훈이 남긴 흔적들이 가득한 살결은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다.

“으응, 태훈 씨…… 나 이제, 하윽, 힘들어…….”

“이제 그만할게, 진짜로.”

태훈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며 성기를 빼낼 듯이 뒤로 움직였던 허리를 거세게 박았다. 선규의 잇새로 다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태훈은 자신의 정액이 들러붙은 선규의 구멍과 제 성기를 보며 고개를 살짝 뒤로 젖혔다. 지쳐서 늘어진 선규의 몸은 음란함을 가득 매단 채 신음 사이로 태훈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움직일 때마다 딸려 나오는 정액은 태훈이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잔뜩 벌어진 선규의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로 튀었다.

선규는 정말 지쳤는지 태훈의 몸짓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젖은 앞머리와 붉은 양 볼이 태훈의 시야에 박혔다. 아까까지만 해도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태훈은 흥분이 남긴 흔적들을 눈으로 쫓으며 선규의 허벅지를 꽉 붙잡았다.

부드러운 선규의 피부는 계속 이어지는 마찰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하얀 손은 매트리스 위를 더듬다가 태훈이 자극점을 일부러 거세게 짓누를 때마다 힘이 바짝 들어갔다. 안 그래도 자극이 충분한데, 이렇게 놀리듯이 굴 때마다 선규의 입술 사이로 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몇 번이고 안고 싶었어.”

“그냥 해도…… 하아, 읏, 응…….”

“허벅지를 붙잡고, 넣어 달라고 하는 널 상상했어. 그거만 생각해도 좆이 금방 부풀었거든.”

태훈은 느리게 움직이며 선규의 귓가에 지난 시간을 고백했다. 그가 하는 말에 선규의 아래가 바짝 조여들었다. 태훈은 몸을 숙여 선규의 입술을 핥았다. 입술로 간지럽히는 감촉에 선규는 얕은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라옴을 느꼈다.

“난 몰랐, 는데― 읏, 하아…….”

“상상이 현실보다 더 대단하다는 거, 분명 거짓말일 거야.”

태훈은 입술 위에서 말하며 느릿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느리게 빼낸 성기가 끝까지 박히자 선규는 짧은 신음을 질렀다.

선규에게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침대 안에서 자꾸 안기는 선규를 깨워 뜨겁게 얽히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태훈은 욕실로 향했고, 자신이 움직이는 것도 모른 채 잠든 선규를 볼 때마다 묘한 자괴감에 시달렸다. 선규는 하루 종일 머리 쓰고 몸 움직이느라 세상모르게 자는데 자신은 들끓는 성욕 때문에 이러고 있다니, 싶어서.

태훈은 다시 속도를 조금씩 올리며 선규의 입술을 삼켰다. 선규는 태훈의 목을 끌어안으며 허벅지로 그의 허리를 문질렀다. 그 감촉에 태훈은 목을 울렸다. 선규의 배 위는 이미 그가 사정한 정액이 들러붙어 있었다. 이제 더는 사정할 수도 없다는 듯 바짝 선 성기는 선액조차 뱉어 내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태훈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선규의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사정도 안 하고 간 거야?”

“아냐, 하읏― 아니야…….”

태훈은 선규를 달래듯 고개를 끄덕이며 콧대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태훈이 잘게 허리를 흔들며 깊은 곳에 사정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선규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아랫입술을 핥았다. 태훈은 성기를 빼내며 다시 한번 선규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부턴 살을 섞지 않아도 서로를 품을 수 있는 시간의 시작이었다.

* * *

태훈은 선규의 허리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그가 얼른 문을 열길 기다렸다. 맑은 도어록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태훈은 선규의 목덜미 아래에 입을 맞추며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왔다. 집 안은 제습기가 열심히 돌아간 덕에 습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택배 몇 시에 온다고 했지?”

“5시에서 7시 사이에 온대요.”

“그럼 이거 먹고 치우면 딱 맞겠다.”

선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훈과 먹기 위해 사 온 피자 박스를 열었다. 두 사람은 손을 씻는 그 찰나에도 장난을 치기 바빴다. 태훈은 선규에게 물을 튀겼고, 선규도 지지 않았다. 요란스러운 손 씻기를 한 뒤에 식탁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제 취향껏 소스를 뿌린 뒤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 밤에 가져다주면 직원이 알아서 셀러에 넣어 둘 거야.”

“고 실장님한테 들었어요. 너무 바빠서 이번만 가져다 달라고 사정하는 거 있죠. 다음에는 직접 오신다고.”

“나 있는데 뭐가 걱정이래. 그나저나 내일부턴 진짜 시작이네?”

시작. 선규는 살짝 혀를 굴리곤 피자를 크게 한입 물었다. 태훈은 그런 선규를 잠시 응시하다가 시선을 돌렸다. 귀엽기는. 태훈은 입가에 미소를 걸친 채 고 실장의 보고를 떠올렸다. 펍은 꽤 성공적이었다. 레스토랑의 고정 손님들이 찾아 준 덕분도 컸고 입소문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렇게 순풍을 맞아 항해 중인 펍에 선규의 하귤주를 내놓는다면 분명 반응이 좋을 터였다.

“그래도 너무 떨려요. 별로라 그러면 어쩌죠.”

“내 입맛은 별로 안 믿으니까 어쩔 수 없어도 고 실장 안목까지 무시하면 큰일이지.”

“그건 그런데…… 좋은 쪽으로 기대했다가 더 크게 실망하게 될까 봐 무서워요.”

“실망도 삶의 일부인데 어쩌겠어.”

선규는 태훈의 말에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한없이 선규의 어깨를 토닥일 줄 알았던 태훈은 이렇게 한 번씩 현실적인 말을 하곤 했다. 힘을 북돋아 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적당한 때에 이런 말을 해주는 것 역시 중요했다. 선규는 오히려 이런 말에 순응하며 현실성을 깨닫곤 했으니까.

선규에게 가정이라는 허울뿐인 울타리는 여러모로 모순적인 존재였다. 가업에 뛰어든다는 명목하에 수십 장의 이력서를 보내는 일도, 좌절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주 대표의 뜻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절망을 맛보았다. 그 절망과 이번의 실패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모르는 거 아냐. 하지만 술이 안 나간다면 그건 전적으로 나와 고 실장의 문제야.”

“잘못 만든 제가 문제지 왜 두 분이 문제예요.”

“너는 잘못 만들지 않았어. 타겟팅이 잘못된 거지. 안 그래? 적절한 곳에 네 술이 놓이게끔 어련히 알아서 결정했겠어? 그걸 고민할 틈도 없이 채간 건 나와 고 실장이야. 우릴 탓해.”

태훈은 덤덤하게 말하곤 피자를 크게 베어 물었다. 선규는 그의 말을 여러 차례 곱씹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의 말대로 생각해서 마음이 조금 편해질 수 있다면 차라리 그러고 싶었다. 선규는 태훈을 따라 크게 한입 씹으며 입매에 힘을 주었다.

식사를 거의 마쳐 갈 즈음 벨이 울렸다. 택배 아저씨는 오늘 시킨 건 대체 무엇이냐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선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물건을 안으로 질질 끌고 들어왔다. 증류기와 포장 기계까지 늘어놓자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선규는 뒷머리를 툭툭 치며 박스를 열어 보았다.

“일반 가정용 증류기보단 훨씬 크고, 공장에 있던 것보단 작네.”

“그걸 집에 놓을 순 없으니까요. 가정용으로 증류했다간 24시간 일해도 부족할 거예요.”

“그렇긴 해. 이거 다 소독해서 연결하면 되나? 오늘 밤까지 다 될지 모르겠네.”

“그러게요. 배송이 이렇게 늦어질 줄은…….”

“걱정 마. 내가 도와줄게.”

태훈은 점차 일그러지려는 선규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선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훈을 바라보았다. 태훈은 그의 볼을 한 번 쓰다듬고는 얼른 식탁부터 치워야겠다며 일어났다. 선규가 박스를 하나씩 열어 보는 동안 태훈은 식탁 위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선규는 그런 태훈의 등을 잠시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업에 뛰어드는 선규를 위해 사업 신고부터 모든 절차를 태훈이 처리했다. 정신을 놓고 일만 하다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빼먹은 것에 대해 말할 때마다 태훈은 무슨 말인지 물어 왔다. 선규가 당황한 낯으로 설명할 때마다 그거 준비 다 끝냈다는 말만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른다.

“태훈 씨 말이 맞아요. 가오픈이나 다름없으니 부담 안 가지고 시작하려고요.”

“잘 생각했어. 진짜 중요한 건 가을에 나오는 술이니까.”

“이건 어차피 내가 계속 개발하려면 필요하던 것들이에요. 집에 두고 써야 하는 거니까…….”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잘 알겠네. 가을부터는 방식을 바꿔 보겠다는 거지?”

태훈이 커다란 박스 속에 포장된 것들을 하나씩 해체하며 물었다. 선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형 양조장을 찾고 또 뒤져 가며 알아낸 곳이 있었다. 그곳 역시 자체 개발한 술을 내고 있었으나 그보단 외주 제작 위주로 돌아가는 곳이었다. 선규와 비슷한 소량 주류 제작자들을 위한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다행이네. 고구마는 금방 만드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더니.”

“이건 가오픈 주로 잠깐 공개하고 다음부턴 양을 늘려서 들어오는 게 좋겠대요. 고 실장님도 원하는 업체 찾아서 다행이라고.”

선규가 살짝 웃으며 이야기하는 동안 박스 해체를 끝낸 태훈이 볼에 뽀뽀했다. 동의의 의미와 함께 닿고 싶은 마음을 적당히 표현한 것이었다. 선규 역시 마주 보고 웃으며 그에게 입술 도장을 찍곤 기계 소독을 시작했다.

소독을 위해 정수를 한 번 돌리는 동안엔 자그마한 포장 기계를 뜯었다. 이건 어디에나 둘 수 있는 크기의 압축 실링 기계인지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수 가동을 끝낸 뒤의 열기가 물기를 날리자 선규는 커다란 통을 하나씩 꺼내 왔다. 미리 한 번 걸러 놓은 술들의 도수는 전부 세 가지였다. 태훈과 함께 두 통을 비워 내고 나니 다시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맑은 술이 떨어지는 것을 응시했다. 사방이 고요하니 똑, 똑, 맑은 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선규는 태훈과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았다. 태훈이 선규의 어깨에 살짝 기댔다. 그가 전하는 온기에 선규의 눈이 살짝 감겼다.

“집에 있을 때, 심심하면 발효실 가서 독에 이렇게 기대 있었어요. 그럼 막 뭐가 끓으면서 터지는 소리가 나요. 진짜로.”

“그 엄청 큰 항아리?”

“네. 뽀글 뽀그르르― 톡!”

“그게 뭐야.”

선규는 소리를 흉내 냈고 그것을 들은 태훈은 작게 웃으며 선규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독에 기대 앉아 있었던 날, 주 대표에게 얼마나 혼났던가. 독에 지속적으로 사람이 기대 있으면 온도가 올라간다는 이유 때문에 천둥 같은 고함을 견뎌야만 했다. 왜, 네가 뭔데 거기서 청승을 떨고 있느냐고 말이다. 가족들이 선규를 외롭게 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선규는 이 말만큼은 태훈에게 하지 않은 채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잠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던 두 사람은 통이 비워지자 좀 더 높은 도수의 술을 부어 두었다. 그 뒤엔 제대로 소독해 둔 병에 하귤주를 담고 실링한 뒤 박스에 담았다.

“도수만 적혀 있네. 이 술 이름은 없는 거야?”

“정식 메뉴가 아니라서 금방 들어갈 텐데요. 하귤주라고 해도 충분할 텐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이쪽에선 하나의 과일로 술을 빚으면 이미지 선점을 위해서 특별한 이름보단 과일 이름을 그대로 써요. 그 앞에 양조장이나 제조자의 이름을 붙이죠.”

태훈은 선규의 설명에 눈을 크게 뜨고 앞으로 다가왔다. 상자에 마지막 병을 넣던 선규는 그의 시선에 담긴 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분명 원하는 게 있는 눈치였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술 이름 앞에 회사 이름을 붙인다고 했지. 선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여기 이름 제대로 지을 새도 없어서 우선 네 이름만 따다가 등록했잖아. 그것도 바꿀 겸.”

“아직 생각해 둔 게 없어서요. 그리고 메인 주류로 정하기엔 판매 기간도 너무 짧고요.”

“생각해 둔 게 없어? 그럴 때에 좋은 방법이 있잖아. 누군 애인 이름 붙이기도 하더라고.”

“훈……규는 너무너무 아니네요. 태선, 이건 완전히 대표로 고희 넘은 노인이 나올 것 같고.”

“야, 진짜 너무하네. 태선 나쁘지 않은데.”

“조금만 기다려 봐요. 진짜 잘 지어서 알려 줄게요. 이번엔 너무 급했잖아요.”

선규는 태훈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태훈은 입술을 쭉 내밀고 서운하단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흘끔거리며 태훈의 표정을 확인한 선규는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뭐든지 선규의 의사가 먼저인 태훈이지만 어째 이번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고 실장은 유리병 안에 든 맑은 금색의 술을 보며 생글거렸다. 요 며칠 고 실장에게 엄청나게 혼이 난 직원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고 실장은 눈 밑에 다크 서클을 잔뜩 달고 있었다.

“색이 진짜 너무너무 예뻐요. 어쩜!”

“이건 따로 가져온 고 실장님 술이에요. 가져가서 드세요.”

“진짜요? 그럼 사양 안 할게요. 저 진짜 이날만 기다린 거 아시죠?”

“그럼요. 시간 다르게 두고 제조한 거 금요일마다 걸러 내면 이만큼씩 나올 거예요.”

선규의 말에 고 실장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그는 턱에 힘을 주곤 병의 개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생각보다 적네요.”

“적다고요? 전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선규 씨는 걱정이 너무 많으셔. 이거 다 나가고도 남죠. 확실히 하귤주에 대한 프리미엄은 붙겠네요.”

“꼭 그러려던 건 아니지만……. 잘 나가야 프리미엄이죠. 아니면 그냥 안정 추구권인 거고요.”

선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옆으로 다가온 직원은 고 실장의 말에 따라 비워 놓은 냉장실에 하귤주를 하나씩 채워 넣었다. 홀에선 끊임없이 주문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선규는 홀 쪽을 흘끔거리며 바깥을 살폈다. 이제 저기서 이 술을 주문하는 사람도 볼 수 있으려나. 이 생각을 하자마자 등골을 타고 긴장이 자리 잡았다. 온몸이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선규는 태훈이 레스토랑에서 올 때까지 기다릴 요량으로 자리를 잡았다. 다들 각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웃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던 사람들도 무언가를 더 말하다가 금세 웃곤 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은 술자리를 가지고 있으니 나쁜 일들을 하나씩 풀어내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곧 직원이 선규에게 추천 와인이라며 한 잔을 건넸고 선규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 들었다. 고 실장이 아마 가져다주라 한 것이리라. 선규는 향을 음미하며 같이 가져다준 핑거 푸드와 와인을 천천히 들이켰다. 술 때문에 긴장한 마음을 술로 푸는, 웃기고도 묘한 밤이었다.

* * *

건물 앞에 선 선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긴장으로 인해 어깨도 뻣뻣하게 굳었다. 선규는 어깨를 살짝 돌리며 펍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아직 한산했다. 선규는 자신을 알아보는 직원들에게 손을 저어 가며 구석으로 향했다.

아늑한 느낌을 주는 구석 자리는 얼른 앉지 않으면 금방 차곤 했다. 특히나 밤이 깊어지면 긴 이야기를 나누고픈 사람들이 이 자리를 찾았다. 선규는 오늘 자신이 금방 일어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직원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그걸로 드릴까요?”

“아뇨, 아뇨! 저 그냥 시원한 맥주 아무거나 주세요. 흑맥주만 아니면 돼요.”

“아……. 알겠습니다.”

“고 실장님한테 저 왔다고 말씀 안 하셔도 돼요!”

“왜요?”

선규는 등 뒤에서 들리는 고 실장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방금 레스토랑에서 온 모양인지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선규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반대편에 앉은 고 실장은 과일 좀 가져다 달라는 말을 하곤 눈을 끔뻑거렸다.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이제 숨 좀 쉬는걸요. 각오했던 수준이기도 하고요.”

“레스토랑에서 오시는 거예요?”

“네. 여기 온다고 대표님께 말씀 안 하셨나 봐요? 전혀 모르시는 것 같던데.”

“네. 갑자기 온 거라.”

선규는 고 실장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곧 직원은 전용 잔에 담긴 시원한 맥주 한 잔과 각종 과일이 담긴 큰 접시를 들고 왔다. 고 실장은 직원에게 여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가보라고 말했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선규는 술을 한 모금 넘기곤 설탕을 뿌려 구워 낸 자몽을 하나 집었다. 계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던 갈증이 일순 해소됐다. 물론 그 시원한 기분은 얼마 가지 못했다.

“궁금해서 와보신 거죠? 얼마나 잘 나가나.”

“참아 보려 했는데 잘 안 되네요. 개시되긴 한 건가요?”

“그럼요.”

선규는 천천히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밝은 황금빛의 술은 보이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이 비슷한 색의 음료를 마시고 있긴 했으나 선규는 다른 술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가게를 연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다들 이 더운 날엔 맥주를 더 많이 찾으니까. 선규는 점점 고개를 숙이며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걱정 많은 거 알아요. 하지만 어디 걱정한다고 걱정거리가 사라지나요? 게다가 오늘이 첫날이잖아요.”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거랑 감정적으로도 의연한 거랑은 다르니까요. 계속 들어오는 사람들이 뭘 주문하는지 보게 되고 그러네요.”

“나름 홍보도 했는걸요. 저녁 시간이 지나고 나면 꽤 주문 들어올 거예요.”

“으아아― 그전에 가야겠어요.”

“여기까지 왔는데 첫 손님도 안 보고 가려고요?”

“없을 수도 있잖아요!”

고 실장은 눈썹 끝을 살짝 떨어뜨린 채로 웃었다. 선규는 엄청 긴장한 채로 손님 한 명 한 명의 테이블을 응시하고 있는데 귀엽다고 하면 안 되겠지. 고 실장은 얼음물을 들이켜며 어떻게 해야 선규의 걱정을 덜어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선규는 고 실장의 고민마저 날려 버리려는 듯이 손을 저었다. 궁금해서 와보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서 전혀 모르는 이의 평가를 듣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좋은 말이 나올지, 아닐지도 알 수 없으니 더 무서웠다. 아직은 준비가 부족했다.

“여기 계속 계셔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뭐든 편하게 하세요. 안 그러면 제가 또 일 이야기 꺼낼지도 모르니까.”

“차라리 그게 낫겠어요. 다른 일에 집중하면 이건 신경 안 쓰일 테니까요.”

“아니, 그걸 별로 원치 않으실 줄 알고 꺼낸 말이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고 실장은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선규의 잔이 금방 빈 걸 확인한 고 실장은 직원에게 가벼운 맥주를 한 잔 더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선규는 속이 타는지 목이 타는지도 모른 채 그것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지간히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선규와 고 실장은 잘 익은 복숭아를 하나씩 먹으며 다음 주류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했다. 가을이 점점 깊어질 즈음에 마시는 다디단 고구마술은 반응이 나쁘기 어려운 주종이었다. 다만 그것과 같이 내놓을 메뉴가 조금 애매했다. 상큼한 것을 내놓을 수도, 그렇다고 가게의 분위기와 전혀 맞지도 않는 부침개를 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글쎄요. 저도 마땅한 게 떠오르질 않네요. 사실 그냥 마셔도 괜찮은 메뉴라. 양조장에서도 딱히 특별한 메뉴와 곁들여서 먹은 기억이 없어요. 납작 고로케 정도면 모를까요.”

“혹시 마땅히 어울리는 걸 알고 계시나 해서 여쭤 봤어요.”

“여기선 여러 가지 술을 팔잖아요. 그러니 그 주종 하나에만 맞출 수도 없고……. 더 전문적인 분들과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아참. 다음 술부터는 외주 제작으로 생산량 늘린다고 하셨죠? 업체 언제 가기로 하셨어요?”

“다음 목요일에 가보려고요. 태훈 씨가 같이 가준다고 해서요.”

고 실장은 선규와 대화하며 내심 놀랐지만 아무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선규는 이제 정말 양조장에서의 일들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아픔을 먼저 생각하기보단 다른 이들처럼 과거의 일들 중 하나를 꺼내 보는 사람이 되었다.

태훈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하여 말하지 않았지만, 한때 고 실장과 연락을 주고받던 직원이 뭐라 했던가. 굳이 알고 싶지 않아도 모두가 선규에 대해 수군거렸고, 그 이야기를 무시하려 치면 너도 그런 사람이냐며 물어 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했다. 선규는 철진 양조의 일의 중심에 있지만 가장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는 말은 고 실장의 뇌리에 깊게 박혔다.

이제 본인을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고 실장은 얼음을 콱 깨물며 분노와 함께 떠오르는 얼굴을 삼켜 버렸다. 그때, 펍의 문을 열고 태훈이 들어왔다. 짙은 남색의 린넨 셔츠는 잘 태워진 태훈의 피부를 한결 매끄러워 보이게끔 만들었다. 고 실장이 한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선규 역시 서서히 몸을 돌렸다.

“어……!”

선규가 알은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훈은 생글거리며 웃을 뿐, 이쪽으로 걸어오지 않았다. 좀체 일어나기 어려운 행동에 고 실장도, 선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훈이 하는 양을 주시했다. 태훈은 가운데의 넓은 테이블 끝자락에 앉았다. 뒤이어 다른 이들이 오자 너른 테이블을 흘끔거렸다. 그들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태훈과는 한 칸을 떼고선 무리를 지었다.

태훈은 이미 그들이 이곳으로 갈 것을 알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온 손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리를 옮기자며 옆의 펍으로 가보잔 말을 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태훈은 무리보다 먼저 펍으로 들어와, 일부러 넓은 자리의 구석을 차지한 것이었다.

고 실장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 봐도 이 매장의 매니저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이 와서 주문을 받자 무리의 시선이 태훈에게 꽂혔다. 고 실장은 영업용 미소를 걸고 가볍게 인사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그거 주세요. 어제 홍보로 올리셨던 거요.”

“하귤주 말씀이시죠? 잔으로 드릴까요, 병으로 준비할까요?”

“병으로 주세요. 사이드 디시는 이걸로 주시고요.”

태훈은 대충 아무 메뉴나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선규는 구석에 앉아 태훈의 행동을 모두 눈에 담고 있었다. 태훈은 일부러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반응아, 와라. 태훈이 눈을 질끈 감자 고 실장이 금방 술부터 꺼내 왔다. 눈치 하나는 진짜 빠르단 말이지. 태훈은 가볍게 눈짓한 뒤 맑은 색의 술을 잔에 따라 냈다. 술은 맑은 소리와 함께 투명한 잔을 채워 갔다.

“오늘 처음으로 개시하는 술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요.”

“제가 처음인가요?”

“예.”

고 실장은 짧게 대답하며 입술을 한껏 위로 끌어 올렸다. 두 사람의 귀엽고도 발칙한 연기는 효과가 있었다. 태훈의 옆에 앉은 자들이 손을 들어 다른 직원을 불렀다. 그러곤 태훈의 술을 가리키며 무엇인지 물었고, 직원은 간단한 설명과 함께 ‘이곳이 아니면 맛보기 어려움’을 강조했다. 고 실장이 정해 준 매뉴얼대로 줄줄 읊는 직원을 보던 태훈은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 광경을 모두 보고 있던 선규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태훈은 당장이라도 그를 품에 안고 싶은 것을 참느라 용을 써야 했다. 옆 무리의 주문이 끝났다. 그들의 테이블 위로 맥주 두 잔과 하귤주가 서빙됐다. 선규는 아랫입술을 살짝 씹으며 그 병과 태훈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응시했다. 그들이 잔에 술을 따르는 것을 본 태훈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선규야. 거기 있었어?”

“네?!”

“난 너 없는 줄 알고 여기 앉았잖아.”

태훈은 술병과 안주를 들고 선규의 앞으로 향해 갔다. 저들에게 집중하는 건 여기까지로 충분했다. 그들의 여러 가지 감상을 듣는 것도 좋겠지만 오늘은 좋은 기억만 품어도 되는 날이었다. 걸어오는 태훈에게 집중하자 선규의 귀에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태훈 씨.”

“처음으로 맛보게 해주겠다며.”

“이미 그렇게 해줬는걸요. 분명 그때 그게 처음이었는데.”

“그것도 처음이고, 이것도 처음이지. 안 그래?”

태훈의 말이 맞았다. 판매를 위해 나온 술들 중엔 분명 저것이 처음이었다. 이런 식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줄이야. 선규는 여러 가지 기분이 뒤섞인 눈으로 태훈이 들고 있는, 제가 만든 술병을 응시했다. 태훈은 그런 선규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선규의 두 눈동자가 금방 태훈의 눈과 마주했다.

“고마워요. 아까 내가 주문 안 하길 정말 잘했다 싶어요.”

“나도 고마워. 아주 영광이야.”

“그리고 덕분에 다른…… 테이블에서도 주문이 들어온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말이 그렇게 애매해. 내 덕이 맞는데.”

조금 뻔뻔하기까지 한 태훈의 말에 선규는 눈을 휘어 가며 웃었다. 두 사람 가까이로 고 실장이 다가왔다.

“분위기가 아주 좋은데 실례 좀 하겠습니다.”

“알면서 굳이 지금 오다니.”

“지금 오지 않으면 당장 가실 것 같아서요. 대표님 덕분에 매장 한가운데에서 홍보를 하고 있는 셈이 됐네요.”

다른 안줏거리를 내려놓는 고 실장의 말에 태훈이 눈 한쪽을 찡긋거렸다. 화려한 조명의 빛이 쏟아지는 한가운데에 여러 사람이 황금빛의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펍의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쯤은 머물다 갈 광경이었다.

태훈은 선규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선규는 반 정도 차 있는 맥주잔을 아주 살짝 마주 댔다. 태훈은 선규가 보란 듯이 잔을 비우곤 입술에 맺혀 있는 단 한 방울의 술까지 혀를 내어 삼켰다. 그것을 본 선규의 몸 안에 응어리져 있던 긴장이 사르르 녹아 자취를 감췄다.

* * *

잠에서 깬 선규는 쏟아지는 햇볕에 잠시 눈을 찌푸렸다. 분명 커튼을 제대로 친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볕이 쏟아지는지 잠시 생각하던 선규의 얼굴이 붉어졌다. 거칠게 방 안을 휘젓고 다니며 태훈과 관계하던 중 태훈의 어깨를 잡으려 팔을 뻗었다가 헛짚고 말았다. 태훈이 갑자기 무릎을 세운 까닭이었다. 앞으로 거의 고꾸라지다시피 한 선규가 커튼 자락을 잡아 흔들다가 이렇게 됐다.

지난밤을 떠올리던 선규는 고개를 저으며 태훈의 품을 파고들었다. 태훈은 잠결에 선규의 머리카락 위에 입술을 부비며 단단한 팔로 그를 당겨 안았다. 그 손은 점차 아래로 내려가는가 싶더니, 허리를 꾹꾹 눌렀다.

“으음, 너무 세요.”

“미안. 마사지해 주려다가 더 아프게 했네.”

“그 정도는 아니고.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어요.”

“식사는 어쩌지. 여기 냉장고에는 뭐가 없을 텐데.”

“나가서 사 먹고 갈까요?”

태훈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규가 일어나려 하자 먼저 몸을 일으킨 그는 자신이 준비하는 동안 조금 더 누워 있으라며 허리를 다독였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선규가 아니었다. 태훈이 욕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자마자 일어난 선규는 주방으로 향했다. 당연히 그가 열어 본 곳은 하부장이었다.

면포 위에 슬며시 코를 가져다 댄 선규는 시큼한 냄새를 맡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 술도 당연히, 잘되었다. 제주에 이렇게까지 비 소식이 없는 여름은 처음이었다. 많은 이들이 무더위 속에서 지쳐 갔지만 선규에게는 기쁜 소식이 딱 하나 있었다. 하귤이 계속 익어서 생각보다 2주 정도는 더 술을 생산할 수 있었다.

기쁜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선규의 술은 예상보다 잘 나갔고, 다음 술이 들어오기 전에 동이 났다. 주말마다 납품을 받기로 한 게 아쉽다는 고 실장의 연락에 선규의 뒷목이 벌겋게 익을 정도였다. 그는 모두가 자신을 너무 띄워 줘서 큰일이라 말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기뻤다. 감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나 샤워 끝났어. 들어가서 씻어.”

“네. 아참, 올 때에…… 집 근처에 가봐야겠어요. 다른 길만 타면 되더라고요.”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무슨 일 있어?”

“김 과장님, 기억나세요? 그분께 이 술 가져다 드리고 싶어서요.”

태훈은 잠시 갸웃거리다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작게 손뼉을 쳤다. 좋은 인상의 남자는 늘 선규의 근처에 있었다. 하도 선규가 그를 신경 쓰는 듯해서 기분 나빴던 때도 있었다. 지금이야 전부 지난 일이 되었지만.

선규가 씻으러 들어간 사이 태훈은 선물할 때 쓰던 박스와 맞춤 쇼핑백을 꺼내 놓았다. 아주 잠시 두 개씩을 꺼내야 할지 고민했으나 그건 태훈이 정할 일이 아니었다. 거기까지 가면서 굳이 김 과장님만 언급한 걸 보면 선규는 이미 결정을 내린 걸로 보였다.

두 사람의 외출 준비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술을 하나만 꺼냈다. 그는 태훈이 미리 꺼내 놓은 박스에 술을 담아 둔 뒤 태훈과 함께 오피스텔을 나섰다. 선규는 차에 오르자마자 뒷좌석에 술을 내려놓곤 조수석에 올랐다.

“우선 밥은 뭐 먹을까. 가는 길에 유명한 곳이라도 있나.”

“난 배고파서 아무거나 다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도 첫 식사인데 든든한 걸로 먹어야지.”

태훈의 차는 이 근방에서 유명한 갈비탕 가게 앞에서 멈추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두 사람은 빈속을 따뜻한 국물로 달랜 뒤 공장으로 향했다. 날씨는 더웠지만 하늘이 어찌나 맑은지, 가는 내내 태훈과 선규의 입에선 하늘 봐, 구름 봐, 라는 말이 나왔다.

선규의 말대로 공장은 그렇게까지 먼 곳에 있진 않았다.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선규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자 대표가 나와 악수를 청했다. 공장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고, 대표의 나이도 적어 보이진 않았다. 태훈은 주위를 둘러보며 대표와 선규의 뒤를 따랐다.

“규모가 작진 않네요. 아니, 생각보다 훨씬 더 크네요.”

“이 일 처음 시작했을 때에 제일 막막한 게 공장 구하는 일이었죠. 저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제 술이야 라인 하나면 충분하죠. 더 좋은 술을 마시고 싶어 하는 주당이 안 만들면 누가 만들겠어요.”

공장 대표는 호방하게 웃으며 사무실로 안내했다. 그 안에는 미리 전달받았던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비밀 유지 등 중요 내용에 대해선 이미 법무사를 통해 긴 상담을 했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태훈은 계약서를 몇 번이고 흘끔거렸다.

사인을 마친 선규는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외로 금방 모든 것이 끝났다. 가을에 나오는 술부터는 여기서 제작되는군. 태훈은 다시 한번 공장을 둘러보았다. 언젠가 선규도 원하는 시설을 갖춘 공장을 갖게 되리라. 태훈은 그때에도 선규의 옆에 딱 붙어 있어야겠다는 귀여운 다짐을 하며 차로 향했다.

“의외로 간단하네. 정말 별거 없이 끝났어.”

“그러게요. 되게 잘되어 있지 않았어요? 모든 시스템이 마음에 들었어요. 발효실 같은 경우 아예 나눠 놨으니까 내 칸은 나만 쓸 수 있는 것도 좋고.”

“그게 제일 마음에 들더라. 네가 24시간 여기 있을 수도 없는데 그 정도 보안 장치는 있어야지.”

“주말에 여기 한 번씩 오면 기분 전환도 되고 좋을 것 같아요.”

선규는 생글거리며 조수석이 아닌 운전석으로 향했다. 태훈은 그에게 운전을 맡겼다. 김 과장의 집으로 바로 갈 거란 말에 태훈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선규는 긴장이 되는지 계속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시험의 연속 같은 기분이 들어요. 고 실장님이랑 태훈 씨에 이어서 손님들, 그리고 김 과장님까지.”

“나는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그런가. 난 김 과장님이니까 다른 의미에서 더 긴장이 되는데.”

“그냥…… 그분은 네가 그걸 가져온 것만으로도 기뻐할 것 같단 말이지.”

선규는 태훈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맞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선규가 살던 동네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규는 이런 양조 공장이 회사 근처에 있을 거란 걸 꿈에도 몰랐다며 멋쩍어했다. 누구도 그에게 손가락질한 적 없었으나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며 민망해했다.

두 사람이 타고 있는 차는 철진 양조를 스쳐 지나갔다. 운전을 해야 하는 선규도, 그의 옆에 앉아 있는 태훈도 굳이 그곳에 뭐가 있는지 언급하지 않았다. 차는 금방 단독 주택 앞에서 멈추었다. 선규는 제법 긴장한 얼굴로 벨을 눌렀다.

“오셨습니까. 더운데 얼른 안으로 들어오시죠.”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저랑 편하게 대화하기로 약속했으면서 또 그러시네요.”

“그게 원 익숙하질 않아서……. 이 대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예. 그러게요.”

김 과장은 선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집에 남아 있던 때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사직서를 내려놓던 그 밤, 나가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까 봐 무섭다던 눈물 젖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김 과장은 거실 소파를 안내하며 얼른 주스를 한 잔씩 내왔다.

“아주머니는 어디 가셨나 봐요.”

“애들 자취방에 가본다고 아침 일찍 나갔네요. 못 봐서 서운해하던 눈치였는데.”

“뵐 일이 또 있겠죠. 그리고 이거.”

선규는 조금 긴장된 얼굴로 쇼핑백을 내밀었다. 김 과장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오늘 하루 종일 조용히 있던 태훈이 목을 가다듬었다. 이젠 자신이 선규를 치켜세울 차례였다. 태훈은 선규의 술 개발과 비슷한 시기에 이뤄진 사업 확장에 대해 늘어놓았다. 짧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김 과장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

“반응이 꽤 좋습니다. 벌써 다 나갔어요. 주말에나 가져갈 텐데 고 실장이 얼마나 구시렁거리는지.”

“그런, 그런 일이 있다고는 왜 말을 안 했습니까. 이렇게 좋은 소식을…….”

“이거 전해 드리면서 하려고 했어요. 나중에 한번 드셔 보세요.”

“나중이라니요. 지금 당장 마셔 봐야죠.”

선규는 민망하다며 손을 저었지만 태훈이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며 저지했다. 김 과장은 얼른 잔을 가지고 와 조심스레 혀를 적셨다. 그 이후엔 당연히 온갖 칭찬이 쏟아졌다. 그 재료로 잘 만들어 낼 줄 알았다는 말에 괜히 태훈의 어깨가 으쓱거릴 정도였다.

선규는 눈물을 아주 조금 비췄다. 안 울고 싶었는데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라며 장난 섞인 말을 하자 김 과장은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머릿속 선규는 몇 달 전에 멈춰 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김 과장은 술을, 두 사람은 주스 잔을 비우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저녁이라도 먹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닙니다. 김 과장님도 내일 출근하셔야 하잖아요.”

“아저씨, 또 연락드릴게요.”

“저…… 집에는 안 가볼 건가요?”

김 과장은 어렵게 입을 뗐다. 그 순간 누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초인종이 울렸다. 어차피 나가려고 했던 태훈과 선규는 김 과장과 함께 대문으로 향했다. 김 과장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모두 잘 아는 인물이었다. 주 대표는 집에서 나오는 선규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오랜만에 뵙네요.”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들렀습니다.”

주 대표의 시선이 세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선규는 꽤 의연한 표정을 지은 채로 한 발자국 앞에 섰다. 주 대표의 시선은 태훈의 얼굴에 꽤 오랫동안 머물렀다. 태훈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것 외에 더 하고 싶은 인사말 따위, 전혀 없었다.

“전에 집으로 가서 찾아뵙겠단 말은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뭐?”

“딱히 가지고 나와야 할 짐도 없고요. 수고로우시겠지만 다 버려 주세요.”

김 과장에게 따로 볼일이 있었는지 무언가를 들고 있던 주 대표의 손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선규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선규는 돌아서며 김 과장에게 인사한 뒤 주 대표에게도 묵례를 했다. 태훈은 조심스레 김 과장의 뒤편을 돌아서 밖으로 나왔다. 그는 차 앞에 서 있는 선규의 등을 토닥이며 차 안에 올랐다. 선규는 시동이 켜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얼른 안으로 들어왔다.

태훈은 선규가 안전벨트를 착용하기 위해 살짝 몸을 비튼 순간 재빨리 그 집 앞을 벗어났다. 차를 노려보던 주 대표가 집 안으로 사라진 것을 보았다. 선규는 크게 한숨을 쉬며 편히 기대어 앉았다. 태훈은 말없이 그의 손을 겹쳐 잡았다. 차가워진 손은 태훈의 온기를 금방 앗아 갔다.

“다 됐어요, 이제.”

“그래? 다행이네.”

“뜻하지 않은 만남이긴 했지만요. 차라리 집에 안 찾아가고 이렇게 끝낸 게 다행인 것 같아요.”

“네가 좋으면 그걸로 된 거지.”

선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훈의 손을 꽉 잡았다. 얼음장 같았던 손은 금방 따뜻해진 채로 태훈의 손에 얽혔다. 태훈은 그 손을 살짝 당겼다. 그는 선규의 손등 위에 아주 조심스레 입술을 내렸다. 늘 그래 왔듯 기분 좋은 입맞춤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선규의 표정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는 식사하는 동안에도, 잠깐 레스토랑에 갔을 때에도 연신 웃는 얼굴이었다. 태훈은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선규를 살폈지만 어느 순간부턴 그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선규는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데 자신은 안절부절못한다면, 그를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샤워를 하고 나온 태훈은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새롭게 자리 잡은 물건을 보고 피식거렸다. 언젠가 자신이 사주었던 인형이 놓여 있었다.

“그거 짐에 없길래 버린 줄 알았는데.”

“설마요! 버릴 리가 있겠어요.”

“아니면 집에 놓고 온 줄 알았어.”

“그것도 당연히 말이 안 되죠. 가방에 가장 먼저 챙겼는데.”

“인형 선물해 주겠다고 하니까 비웃던 주선규는 어디 갔어?”

태훈의 말에 선규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선물 받을 때만 해도 태훈을 흘겨봤지만 당장 그날 저녁부터 인형을 안고 자지 않았던가. 게다가 집을 나오며 여행하는 동안에도 인형과 함께였다. 그래서 더더욱 이 집에 인형을 꺼내 둘 수가 없었다. 그 작은 솜뭉치에 담아 둔 응어리가 너무도 많아서.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니, 오늘부터는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한 순간 보기에도 역한 감정들이 일순 사라졌다. 지금은 서로를 보지 않고 사는 게 답이겠거니 싶었다. 남들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지만 자신과 가족들은 눈에서 멀어지는 게 나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선규와 어머니의 관계가 그러했듯이.

“얘 때가 좀 낀 거 같은데.”

“맨날 만져서 그런가.”

“그랬어? 어쩐지 좀 꼬질꼬질해졌어.”

“맨날 얘 끌어안고 울어서 사실 눈물도 좀 먹고 그랬네요. 여행도 같이 다녀왔는데 빨아 주지도 않았어요.”

“얘가 나보다 낫네. 눈물도 닦아 주고.”

선규는 낮은 목소리로 큭큭거렸다. 태훈은 그런 선규의 볼을 몇 번 찌른 뒤 침대에 편히 누웠다. 선규도 재빨리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건물 밖에선 소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것들은 열대야와 함께 벽과 창문에 붙은 채로 녹아 흘렀다. 선규는 태훈의 허리를 안은 채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들 덥지도 않은가. 이 열대야에도 저렇게 나와 있는 거 보면 에너지가 넘치나 봐요.”

“그러게. 창문을 닫았어도 소리가 들어오네.”

“더워도 다들 갈 곳은 다 가나 봐요. 여행도 많이들 가고.”

“여행은 날씨가 좀 식으면 가고, 내일은 시원한 곳에 다녀올까.”

태훈은 고개를 숙여 선규의 새카만 눈을 마주했다. 선규는 어딜 갈 생각인지 물었지만 태훈은 그저 네가 좋아할 만한 곳, 이라는 짧은 대답만 할 뿐이었다. 태훈의 대답을 들은 선규는 머리를 굴렸다. 시원하면서도 내가 좋아할 만한 곳이라. 하지만 답을 알아내기도 전에 잠이 먼저 찾아들었다. 깊은 생각을 하기엔 너무도 피곤한 하루였다.

식탁 앞에 앉은 고 실장은 보다 많은 술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선규와 고 실장은 그것을 한 상자씩 들고 그의 차에 실었다. 선규는 바로 가보겠다는 고 실장에게 바쁘지 않으면 시원한 커피 한 잔 마시고 갈 것을 권했다. 고 실장은 사양하지 않았다.

“요즘 가을 메뉴 때문에 바쁘겠네요.”

“네. 이제 최종 결정을 해야 하니까요.”

“무슨 메뉴가 있는지 살짝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아직 정해진 건 아니지만…… 양도 나오고, 조개도 나오고, 오리도 나오고.”

고 실장의 대답에 선규는 파안대소를 했다. 헤드 셰프가 알아서 정하지 않겠느냐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표정은 꽤 귀엽기까지 했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고 실장은 선규가 내려 준 커피를 마시다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번뜩였다.

“어제 상운 씨가 왔었어요. 대표님한테는 연락 안 하고 오셨다더라고요. 선규 씨 술 드시곤 바로 엄지손가락 내밀었죠.”

“선배도 왔었구나. 제가 주위 사람들 덕을 톡톡히 보네요.”

“같이 오신 지인분들도 맛있게 잘 드셨어요. 왠지 이 이야기 들으면 좋아하실 것 같아서.”

“고마워요. 선배한테 선물용으로 보냈는데도 직접 신경을 써줬네요.”

선규는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커피 잔에는 방금 그의 입술이 닿았던 곳에 커피 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 끄트머리는 벌써 에어컨 바람에 말라 갔다. 고 실장은 시간을 확인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서 오픈 준비를 해야겠다는 말에 선규는 더는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다시 홀로 남은 선규는 어젯밤 태훈이 한 말을 떠올렸다. 분명 오늘 어딘가를 가자고 했는데 아침에 나갈 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주말엔 중요한 예약 손님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기 어렵다고 했으니 외출을 한다면 오늘뿐인데. 선규는 의아함을 담은 눈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하지만 태훈으로부터 온 문자는 없었다.

태훈은 빈말은 안 하는 사람이니 혹시 모르니까. 선규는 느긋하게 외출 준비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매만지고 있을 즈음 태훈이 오피스텔로 들어왔다. 그는 준비를 거의 마친 선규를 보자마자 볼과 입술에 짧은 키스를 했다. 쏟아지는 입술 세례에 선규는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태훈의 몸을 안았다.

“금방 잠들길래 신경 안 쓰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그렇게까지 무신경한 사람이었어요? 그건 조금 충격인데요.”

“당연히 아니지. 어젠 너무 피곤했을 테니까 해본 말이야.”

“그래서 어디 가는 건데요?”

선규의 질문에 태훈은 검지를 위로 가리켰다. 선규는 그제야 태훈이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선규의 미소를 본 태훈은 그가 모든 것을 이해했으리라 생각하며 손을 잡아 이끌었다. 금요일 오후인지라 차가 조금 막혔지만 생각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했다. 두 사람의 눈앞엔 100층이 넘는 건물이 서 있었다.

“하늘이 엄청 맑아. 지금 봐도 멋있을 거고, 금방 해가 지면 그건 그것대로 멋있겠지.”

“여기 한번 와보고 싶었어요.”

“얼른 들어가자.”

선규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태훈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조금만 높은 곳에 가도 버릇처럼 창밖을 내다보는 선규에게 아주 좋은 장소였다. 선규는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는 동안에도 전광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견학 온 아이처럼 구는 게 귀여워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었다.

안내에 따라 전망대에 도착한 선규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태훈은 너무 높아서 그가 무서워하는 건 아닌지 돌아봤지만 그런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놀라움 하나만을 품고 창밖을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선규야, 저쪽으로 가자.”

선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태훈의 어깨를 붙잡았다. 투명한 스카이 데크 아래로 모든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태훈도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 들어 깊은 숨을 쉬며 창가로 다가갔다. 그 옆에 선 선규의 숨소리가 유독 잘 들렸다. 태훈은 그의 뻣뻣한 뒷목을 눌러 주며 씨익 웃었다. 그제야 선규의 얼굴 위에도 미소가 피었다.

“왜. 너무 높아서 무서워?”

“아뇨. 태훈 씨 말대로 너무 높으니까 무섭다는 생각조차도 안 들어요. 아까 봤어요? 오늘 날씨가 좋아서 야외 전망대에도 갈 수 있대요.”

“거기도 보고 위로 가자. 여기에 왔으니까 맨 위에 있다는 라운지도 가봐야지.”

선규는 짧게 대답하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다시 태훈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선규의 시선을 느낀 태훈이 입 모양으로 왜, 라고 물었다. 지금 이 자리에선 말하기 어려운 탓에 야외 전망대만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엔 이미 다른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태훈과 선규는 그들 사이에 끼어 막힘이 보다 적은 시야를, 넓게 펼쳐진 경치를 만끽했다.

“네가 기뻐하니까 나도 좋네. 별생각 없이 온 건데.”

“세상이 작다는 말, 옛날에는 맞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내 세상이 작았던 거죠. 나는 그보다도 훨씬 작고, 세상은 이렇게나 넓고.”

“맞아. 우린 정말 작은 존재지. 그러니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네가 원하는 대로 산다고 큰일 안 나.”

선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해내야만 한다는 강박은 발아래의 호수에 던졌다. 그 누구도 선규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혼자 정해 놓은 길을 따라 가야 한다는 마음은 강물에 던졌다. 이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태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먼저 끊어 놨으면서 말도 안 되는 땜질로 인연을 이어 가려는 사람들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았다. 지금으로도 충분했다. 선규와 함께 내일은, 다음 주에는, 다음 달에는 무얼 할지 느슨한 계획을 세우는 게 가장 행복한 일이니까.

“야경까지 보려면 라운지로 가야겠다. 지금은 자리 넉넉할 거야.”

“좋아요. 얼른 가요!”

선규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통해 올라가자마자 근사한 공간이 펼쳐졌다. 직원은 두 사람이 올라오자마자 창가의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생맥주와 커피를 동시에 말했다. 직원이 가자마자 두 사람은 눈을 마주한 채 소리 없이 웃었다.

태훈과 선규의 앞에는 방금 전에 본 것과는 또 다른 경치가 펼쳐졌다. 이제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맑은 하늘 곳곳을 장식하고 있던 구름 조각이 점점 주황빛으로 물들어 갔다. 어딘가는 타들어 가는 색이었고, 어딘가는 예쁜 색소를 넣은 솜사탕 같았다. 선규는 턱을 괸 채로 시선을 던졌다.

“해 지니까 더 멋있네.”

“그러게요. 이제 어둠 속에서 빛이 반짝일 차례예요.”

“우리 나중에 이사 갈 때엔 높은 층으로 갈까?”

태훈의 말에 선규는 무심코 대답할 뻔했다. 다시 한번 그의 질문을 곱씹어 보니 우리라는 말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태훈은 선규의 시선을 받아 내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노을이 선규의 양 볼도 물들였다. 선규는 다가오는 직원을 보며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크림 같은 거품이 올라와 있는 생맥주를 받아 들자 태훈은 커피 잔을 내밀었다.

“선규가 내 꼬임에 넘어오는 그날까지. 건배.”

“커피 잔으로 그게 뭐예요. 그리고 지금도 같이 사는 거나 다름없는데…….”

태훈은 매끄럽게 미소 지으며 맥주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분위기는 몇 번이고 마셔 본 맥주에 또 다른 맛을 선사했다. 두 사람은 기분이 이렇게 중요하다며 천천히 각자의 잔을 비웠다. 그사이 밤이 짙어졌고 낮에 본 것과는 전혀 다른 야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백색과 주황색의 조명들, 그사이에 톡 튀어나오는 보라색 혹은 파란빛에 한참 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두 사람은 원 없이 구경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에 먼저 오른 태훈은 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선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태훈의 옆에 선 선규는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둘만 남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높은 층이 좋긴 한데 꼭대기는 싫어요.”

“아…… 선규야.”

“다, 다른 사람 타겠어요.”

태훈의 손을 꽉 붙잡고 말하던 선규는 엘리베이터가 잠시 멈추자 얼른 그 손을 놓았다. 그럼에도 살짝 닿아 있는 팔은 떨어뜨리지 않았다. 태훈은 살짝 주먹을 쥐며 그가 남긴 온기를 손 안에 품었다.

태훈과 선규가 만난 이후로 끝은 없이 시작만이 시작되는, 그런 나날이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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