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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야 (3/20)

2 백야

여름이 채 지나가기 전에 북방에서 승전보가 들려왔다. 몇 년에 걸쳐 이어진 기나긴 전쟁의 끝이 보이는 대승이었다.

영토 대부분을 라인셀에 빼앗긴 카니예는 사실상 몰락의 길을 걷게 됐고, 카니예와 연합한 펠든 왕국 또한 항복의 의미로 왕국에 두 개의 성을 넘기며 큰 피해를 입은 채 종전 문서에 서명했다. 라인셀은 대륙 북부를 호령하는 거대한 왕국으로 발전했다. 이번 대승은 이견이 없이 유르딘의 공이 가장 컸다. 전설적인 무용담에 왕국이 소란스레 들끓었고, 왕족들부터 거리의 천민들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유르딘의 무위에 대해 자랑스레 떠들었다.

남은 건 전쟁의 발단이 됐던 북방의 야만족을 소탕하는 일뿐이었다. 카니예-펠든이 연합하며 전쟁의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때부터 겁을 집어먹은 야만족들은 산속에 틀어박혀 있다가, 전쟁이 격해지자 몇 번인가 후방에서의 기습을 시도했다가 대패한 후로는 꼼짝 않고 제 둥지에 틀어박힌 채 침묵했다. 카니예의 패잔병들이 야만족과 합류하였으나 소탕은 시간문제였다. 야만족의 본거지는 좁은 산세 덕에 많은 병력이 진입할 수도 없다. 때문에 군대는 일부만을 남기고 모두 퇴군하기로 했다.

왕은 영웅이 된 유르딘에게도 귀환 명령을 내렸으나, 유르딘은 고지식하게 총사령관으로서 끝까지 책임지겠다며 북부에 남았다. 많은 사람이 유르딘의 느린 귀환에 대해 실망했겠지만, 가장 실망한 건 레인이었다. 그래도 곧 돌아오겠거니 생각했으나 생각보다 전투는 지지부진하게 흘러갔다. 수십 년을 산에서 살아와 지형에 빠삭한 야만족들은 남은 카니예군과 협공해 치고 빠지는 방식으로 군에게 야금야금 타격을 주며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유르딘의 무위는 확실히 대단했으나, 아예 산사태를 일으킬 작정으로 검기를 휘두르지 않는 이상에야 산에 숨어 있는 적들을 일망타진할 방법이 없었다.

몇 달이 지나 겨울이 되고 레인이 수많은 일들을 겪으며 마침내 마지막 수업을 들을 때까지도 유르딘은 북부에 남아 있었다. 레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직접 유르딘을 찾아가기로 했다. 지금이라면 레스터나 카이렌의 반대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추수가 끝나고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음 한 해를 준비해야 할 중요할 시기를 맞아 후계자 수업을 본격적으로 받기 위해 각자의 영지로 떠났다. 레인이 하는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반대하는 아나벨 또한 이복동생과 함께 레스터를 따라 영지로 가 버렸다.

마침 국왕이 예상보다 길어지는 전쟁에 추가로 물자를 보급하고 북부에 남아 지쳐 있는 병사 중 일부를 수도로 귀환시키는 대신 그들을 대체할 병사를 보내기로 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레인은 그곳에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병사로서 가려는 건 아니고 물자를 관리하는 쪽에 한자리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 지원이었다.

레인의 예상대로 딜란은 흔쾌히 지원을 허락했다. 레스터가 정당한 후계자로 인정받고 영지로 떠난 덕에 레인에 대한 경계심도 많이 사라졌고, 유르딘과 연락을 주고받는 레인을 접점으로 써먹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 또한 깔려 있었다. 지금만은 레인을 이용하려 드는 속내가 기꺼웠다.

그저 작은 자리를 얻어 가려던 계획은 예상보다 규모가 커져, 레인은 왕을 직접 알현하게 됐다.

몇 년 전 왕위를 물려받은 젊은 국왕 리처드 알쳄 아그리스는 개혁을 위해 자신과 뜻이 맞는 능력 있는 젊은 인재를 원하고 있었다. 국왕은 베델 후작의 피가 섞인 레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는커녕,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아카데미에서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낸 인재가 졸업하자마자 저택에 틀어박혀 칩거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물론 속내까지 같은지는 알 수 없겠지.’

레인은 삐딱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후, 국왕의 명이 정식으로 내려오자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왕은 북부로 올라가는 물자 중 마법 물품의 관리를 총괄하는 역할을 레인에게 맡겼다.

현 시대에 남은 마법 물품들은 대부분 생활 편의를 위한 것으로 군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사치품에 속하는 만큼 비쌌다. 마법 물품은 전 세계적으로 희귀하지만, 라인셀에서는 특히나 더 귀했다. 마법 물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설계도대로 도구를 만들 장인과 완성된 도구에 마력을 불어넣을 마법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라인셀은 마법사의 수가 적어서 최후 공정을 완료할 수 없었다. 마법 물품 대부분을 타국의 수입에 의존하는지라 귀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귀중품의 관리를 레인에게 맡긴 것이다. 출발 날짜가 며칠 남지 않아 이미 인사 배치가 끝난 상황이라 레인이 할 일은 없었고, 사실상 감투 하나 쓴 정도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해도 아직 이십 대의 젊은 레인에게 일을 맡긴 건 기대의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왕이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은 젊은 귀족 청년에게 펄쩍 뛸 정도로 기쁜 일이겠지만, 레인으로서는 왕의 기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난생처음으로 당당히 제 자리를 거머쥐고 유르딘의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레인과 달리 공작가의 분위기는 나름 들떴다. 내버려 둔 자식이 알아서 국왕의 신임을 얻어 오니 기쁠 만도 했다. 레인은 매일같이 제 앞에 쌓이는 보양식과 약재를 꾸역꾸역 먹었다. 성질 같아서는 필요 없다고 모조리 물리고 싶었으나 길이 험한 북부까지 가는 길에 몸이라도 상해 유르딘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하루에 한 번 고위 신관을 직접 저택으로 불러 축복을 받고 나니, 레인은 여섯 살 때 이후로 가장 건강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덩달아 지난여름부터 느끼던 불규칙한 통증과 어지럼증도 훨씬 완화되어 레인은 나름 편안한 마음으로 북방으로 떠나게 됐다.

북방으로 향하는 길은 예상보다도 훨씬 끔찍했다. 마차에는 충격 완화용 마법이 걸려 있었으나 아예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라 마차에 탄 지 세 시간쯤 지나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잘 깔린 대로를 걷는 것도 그랬으니 길이 험해지고 나서는 딱 죽을 것 같았다. 결국, 레인은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드는 쪽을 선택했다. 레인은 마차에 짐짝처럼 실린 채 북부로 향했다.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사건이 벌어졌다. 폭발음에 이어 함성과 요란하게 병장기를 맞부딪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마차를 지키던 기사도 레인에게 꼼짝 말고 가만있으란 말을 건네고 전투에 돌입했다. 레인은 마차에 난 작은 창을 덮고 있는 커튼을 조심스레 살짝 치워 밖을 살폈다. 굉장한 혼전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바깥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조금 전 레인에게 말을 건넨 기사의 목소리였다. 미처 뭔가를 판단할 새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밀랍 같은 피부색의 야만족 둘이 레인을 발견하고 소름 끼치게 씩 웃었다.

“쓸 만한 전리품이군.”

야만족의 시선이 기분 나쁘게 레인의 얼굴과 몸, 고급스러운 복식을 차례로 훑었다. 옆에 놓아둔 단검을 잡았지만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은 레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끌려가 맥없이 죽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레인이 각오를 모두 다지기도 전에 야만족의 몸이 기울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옆에 서 있던 자가 놀라서 고개를 다 돌리기도 전에, 그자 또한 머리가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검술에 조예가 없는 레인이 보기에도 엄청나게 깔끔한 솜씨였다.

“레인?”

무너지는 몸 뒤에서 몇 번 들어 본 적도 없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굴보다도 필체가 익숙한 사람. 너무나도 직접 보고 싶었던 사람.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

유르딘이다.

그는 엉망이 된 전장 한복판에서 그 누구보다 많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모두 남의 피고, 유르딘은 상처 하나 없다. 왕국의 영웅이라는 것은 즉, 전장의 학살자라는 말과도 같았다. 휘영청 높게 뜬 달빛과 여기저기 흔들리는 불빛 아래 화려한 금발이 눈부시게 빛났다. 형형하게 주변을 옥죄던 살기는 레인을 확인한 순간 단숨에 녹아 버려 속에 숨어 있던 다정함만이 남는다. 그 기적적인 변화를 아마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라고, 레인은 현실감이 들지 않는 머리로 멍하니 생각했다. 그렇게 활자 속의 유르딘은 현실이 되어 레인의 앞에 섰다.

“레인, 괜찮나?”

다정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인 무심한 손길로 시체를 마차 밖으로 던진 유르딘은 전장이 주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레인이 안에 있는 줄 알았다면 훨씬 더 온건한 방법으로 죽였을 텐데, 전장과 거리가 먼 아이 앞에서 쓸데없이 잔혹한 피를 흘렸다는 후회가 들었다. 물론 몇 년 만에 마주한 레인은 더는 아이라 부를 수 없는 훤칠한 청년이었지만, 유르딘의 안에서 레인은 언제나 지켜 줘야 할 보호의 대상이었다.

유르딘은 레인의 뺨에 튄 피를 닦아 주려다 피가 범벅 된 제 손을 보고 도로 거뒀다. 매일 펜이나 잡고 무거운 것이라곤 식기 외에 들어 본 적 없는 레인의 부드러운 손과 달리, 어린아이 키만 한 검을 가볍게 들고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유르딘의 손은 거칠고 단단했다. 아무리 무패에 가까운 전적을 자랑하는 기사라지만, 전장에서 몇 년을 보냈는데 상처 하나 없을 수는 없었다. 크고 작은 흉터들이 난 손이 저를 만지려고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레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다친 데는 없고?”

“아, 네…….”

레인이 멍하게 대답했다가 바로 후회했다. 병약한 몸으로도 독하게 살아온 레인 아이제나흐답지 않은 어리숙한 대답이었다. 유르딘에게 당당하고 떳떳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서 노력했는데, 넘쳐흐르는 감정 앞에서 레인의 다짐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첫사랑의 열병에 앓던 어리숙한 청년만이 남는다. 레인의 속상한 속내를 모르는 유르딘이 입술을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위험하니까 여기서 꼼짝 말고 있어라.”

유르딘이 나가고 마차의 문이 닫혔다. 유르딘의 뒷모습을 끝까지 주시하던 레인은 그제야 멈췄던 숨을 내뱉었다. 무려 몇 년 만의 재회였다. 별다른 걸 한 것도 아니고 얼굴만 봤을 뿐인데도 가라앉아 있던 기대감이 먹먹하게 차올랐다. 그리움과 애정과 다정함, 진실로 순수하고 비틀리지 않은 곧은 애정은 오랫동안 레인이 포기해 왔던 것들이다. 사막을 헤매다 샘을 발견한 여행자처럼 레인은 짧은 순간에 보여 준 유르딘의 마음을 게걸스레 삼켰다. 이미 기대치가 바닥까지 내려가 쪼그라들고 말라붙은 마음에는 그 작은 애정조차 한도 초과였다. 넘치는 마음에 절로 눈물이 나서 레인은 울지 않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얼굴도 몇 번 마주하지 않은 상대고 그저 편지 교류를 통해 키워 온 마음일 뿐이라며 자기 자신의 애정을 깎아내렸었다. 정작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무감각하게 넘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고작 글자 몇 자에도 설렜는데 진짜 유르딘을 보니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이 시끄럽게 울렸다.

“유르딘, 유르딘……. 유르딘.”

레인은 아무도 없는 마차에서 진득한 감정을 담아 그를 불렀다. 레인이 자각하지 못하고 외면했을 뿐,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쌓인 친애와 연모의 감정은 헤아릴 수 없이 깊어서 이름을 부르며 감정을 퍼내도 줄어들지 않는다. 커다란 호수의 물을 손으로 퍼내려 하는 격이었다. 그렇게 깊다. 그렇게 사랑한다. 그렇게나 나는 당신이 이 세상의 전부다.

그러나 어차피 전하지도 못할 마음이다.

가치가 없다. 의미가 없다. 이 마음을 전한다고 해도, 만에 하나 유르딘이 받아 준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다. 동생에게 백작 위를 넘겨줬지만, 지금까지의 공을 보건대 수도에 돌아가면 유르딘은 제대로 된 작위를 받을 것이다. 약혼조차 하지 않았으니 결혼 적령기를 맞은 아가씨들과 나이 차가 제법 났음에도 불구하고 왕국 최고의 신랑감이다. 왕국의 영웅이자 권세 높은 귀족 가문의 새로운 수장이 될 유르딘 니제스에게 반역자 베델의 피가 섞인 아이제나흐의 천덕꾸러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이 비참해질 뿐인 사실을 머릿속으로 나열하며 레인은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괜한 짝사랑에 설레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기대하면서 초조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만에 하나라도 제 마음을 알아챈 유르딘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참고 억누르는 것은 익숙하니까 이번에도 별문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레인의 의지대로 쉽게 가라앉던 마음은 한참을 술렁이며 진정할 줄을 몰랐다.

끊임없이 술렁이는 레인의 심정과 반대로, 대치하던 바깥의 상황은 유르딘의 등장으로 빠르게 정리됐다. 대적할 수 없는 적이 보이자마자 야만족들이 곧바로 도주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도주하는 적들을 신경질적으로 도륙했을 유르딘이지만, 이번에는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보급품이 급했고, 그보다 더 중요한 레인이 있다. 적을 쫓지 말고 주변을 경계하라고 명령한 유르딘은 제 차림을 점검했다. 피가 묻은 경갑을 벗고 최대한 피를 씻어 내고 나서야 비교적 말끔한 몰골로 마차로 들어갔다.

“레인?”

레인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한 박자 늦게 유르딘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고 있는 레인과 마차 안이 피가 범벅이 된 모습을 보고, 유르딘은 레인이 피 때문에 질색하고 있다는 미묘한 오해를 했다.

“내가 안을 너무 더럽혔군. 마차를 옮기는 게 낫겠다. 짐마차뿐이니 성에 연락해서…….”

지나치게 과감한 결단력에 레인이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네? 아뇨. 그러실 필요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

“하지만 안색이 나쁜데.”

“이건 그냥, 여기까지 오는 길이 험했어서 그렇습니다. 차라리 빨리 가서 쉬는 게 낫지요. 니제스 경도 피곤하실 텐데요.”

“나는 괜찮다만……. 하긴 그래, 최대한 빨리 성으로 가서 편히 쉬는 게 낫겠지.”

유르딘이 마부에게 명령하자 멈춰 있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습격당한 보급품을 추스르기도 전일 텐데, 출발하는 데 한순간의 고민도 없었다. 직접 돌보지 않는 대신에 유르딘은 마차에 난 작은 창을 연 채, 마차와 함께 걷는 부하 기사에게 이것저것 명령하기 시작했다.

레인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유르딘의 옆모습을 정신없이 응시했다. 남들이 말하는 유르딘은 인간 한계의 꼭대기에 선 훌륭한 남자였다. 왕국 제일의 검사, 대륙에서 단둘뿐인 소드 마스터. 유르딘을 이르는 호칭은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일견 불리해 보였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건 유르딘의 공적이었다. 몇 년간 이어진 전투에서 유르딘의 신기에 가까웠던 검술은 호사가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레인의 안에서 유르딘은 아직 어린 레인을 동정해 몇 년이나 신경 써 준 다정한 남자일 뿐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공적을 들으면서도 용서 없이 적을 죽이는 기사와 유르딘이 묘하게 겹쳐지지 않았는데, 오늘에서야 둘이 한데 섞여 겹쳐졌다. 처음 보는 모습이 낯설고 두렵다기보다는 이전보다 더 설렜다. 이 이상 설레면 안 될 것 같아서 레인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아예 내렸다.

명령을 모두 내리고 창을 닫은 유르딘이 마침내 이쪽을 돌아봤다. 빤히 시선이 느껴졌으나 레인은 고개를 드는 대신 더더욱 숙였다. 시선을 마주했다가는 달아오른 감정을 들킬 것 같아서 두려웠다. 이러다가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본적으로 레인은 남을 밀어내는 데에만 익숙했지 살갑게 대하는 법을 몰랐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면서 적당히 부드럽게 대할 자신이 없었다.

레인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유르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를 아예 나갈 정도로 화났나 싶어서 급히 고개를 들자 웃는 얼굴과 마주쳤다. 유르딘은 레인의 옆자리에 털썩 앉더니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쓰다듬었다.

“뭘 그렇게 낯을 가려. 몇 년 전에 봤던 것보다 더 어려워하는구나. 편하게 대해도 돼.”

“아뇨, 전, 그게.”

연모의 감정을 품은 이상 평생 유르딘을 편하게 생각할 날은 오지 않는다. 레인의 심정을 까맣게 모를 유르딘은 그저 시원스레 웃었다.

“어색해할 거 없다니까. 사적인 자리고, 네가 원한다면야 예전처럼 손을 잡고 다니거나 끌어안고 자도 좋아.”

“네? 아니, 대체 어, 언제 이야기를…….”

농담이랍시고 아주 오래전 이야기를 끄집어 온 유르딘 때문에 레인의 얼굴이 한계까지 붉어졌다. 어머니를 잃고 보살펴 주던 유모도 모두 다 사라져서 외로움에 떨던 레인은 유르딘이 오면 한껏 어리광을 부렸다. 유르딘에게는 추억일 뿐이지만, 레인에게는 현실처럼 다가왔다.

“그 정도로 오래 본 사이지 않나. 편하게 대하거라.”

유르딘이 그렇게 말해 준다고 편해질 심정이었으면 애초부터 시선을 피하고 앉아 있지도 않았다. 끝끝내 레인이 어색해하자 결국 유르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히 쉬어라. 나는 좀 나가 있을 테니까.”

화들짝 놀라 레인이 반사적으로 유르딘을 붙잡았다. 조금 놀란 눈으로 돌아보는 유르딘과 눈이 마주치자 레인은 제풀에 깜짝 놀라 호되게 덴 사람처럼 소맷자락을 놓았다. 그럴싸한 변명을 생각해 내지 못한 레인은 얼결에 솔직한 감정을 내뱉었다.

“가지 마세요.”

유르딘이 제 옆에 있어 주었으면 했다. 함께 대화를 나누고 다정하게 대해 줬으면 했다. 유르딘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며 다정한 마음을 나눠 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솔직했지. 간신히 가라앉았던 얼굴이 다시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가지 마세요, 라니. 어릴 때 수준의 솔직함과 유치함이다.

“아니 그게……. 피곤하실까 봐, 그, 나가지 말고 조금 쉬시라고…….”

“음…….”

“저 때문에 나가실 필요 없고, 그게, 저, 그간 뵙고 싶었는데 이대로 나가시면 섭섭하기도…….”

“그래?”

변명하려고 덧붙인 말은 최악이었다. 평소 욕이나 비난을 할 때면 매끄럽게 돌아가던 머리는 얼간이처럼 멈췄고, 혀는 뻣뻣하게 굳어서 자꾸만 말을 더듬게 만든다. 변명이 아니라 이건 어리광을 넘어선 생떼지 않은가. 멋대로 지껄이는 입을 꿰매 버리고 싶어졌다. 수치심에 죽고 싶어 하는 얼굴을 한 레인을 배려한 것인지 유르딘은 필사적으로 웃음기를 참고 있었다. 배려가 고맙기는 한데, 그 필사적으로 참는 얼굴이며 목소리 끝에 남은 웃음기가 묘하게 더 부끄럽게 만든다. 간신히 웃음을 참아 낸 유르딘은 도로 레인의 옆자리에 앉았다.

“훌쩍 커서 이젠 완전히 어른이 됐나 싶었는데 여전히 귀엽구나.”

“귀, 귀엽다니…….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요.”

“듣기 조금 거북했나? 내가 널 워낙 어릴 때부터 봤다 보니……. 전에 봤을 때는 너무 약해 보여서 걱정스러웠는데, 지금은 무척 잘 자랐어.”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는 레인의 나이에 맞지 않는 응석에 기뻐하는 듯도 보였다. 그래, 유르딘이 조금이라도 우울해하는 것보다야 즐거워하는 게 낫지. 레인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영혼 없이 대답하는 레인을 재밌단 듯이 바라보던 유르딘의 얼굴에 천천히 어른스러운 다정함이 더해졌다. 푸른 눈이 아득한 그리움을 띠었다.

“네가 이곳에 온다는 말을 듣고 기대가 컸다. 사실 여기 남기로 했을 때 널 떠올리기도 했어. 네가 여기까지 와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기쁘다. 네가 무척 자랑스러워.”

잠시 놀랐던 레인의 얼굴에 이내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왕의 신임을 받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유르딘이 칭찬해 주니 뒤늦게야 의미가 생겨났다. 왕이 레인에게 힘을 실어 준 건 레인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고, 그 능력은 모두 레인의 노력에서 기인했다. 한때는 이 노력이 뭐가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을 딛고 필사적으로 한 노력이 이 순간 보답받아, 노력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자신감이 들자 이후로는 레인도 조금 더 편하게 유르딘과 대화할 수 있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마차는 성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몇십 년 전부터 카니예의 수호벽 역할을 하던 성은 섬세한 예술품처럼 아름답던 왕국의 성과는 달리 투박하면서도 견고했다. 수많은 전투에 휩쓸리면서도 커다란 상처 하나 나지 않은 단단한 성은 마법이 남아 있던 옛 시대의 유산이었다. 라인셀 부근에는 이 성처럼 옛 시대의 건축물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다. 라인셀의 왕궁부터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옛 시대의 건축물이었다. 하나같이 고위 마법이 걸린 성이라지만, 이 시대의 인간은 그 마법의 편린조차 알아내기 힘들었기에 그저 잘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성 정도의 취급만 받고 있었다.

어둠 속의 성을 둘러보던 레인은 왕국 수도에서 이곳까지 가져온 보급품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행렬의 후미에 있는 보급품 마차에는 큰 피해가 미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마법 도구는 섬세하고 비싼 물건이다. 작은 피해라고 해서 소홀히 처리할 수는 없었다. 레인이 유르딘에게 인사하고 보급품을 내려놓는 쪽으로 가려고 하자 유르딘이 레인을 붙잡았다.

“니제스 경?”

“이곳의 총사령관으로서 명령하마.”

유르딘의 말에 레인은 바싹 군기가 들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 레인이 귀엽단 듯 웃은 유르딘은 레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곳 일은 내게 맡기고 오늘은 내일을 위해 이만 푹 쉬도록 해라.”

“네? 하지만 그럴 수는…….”

“명령이라고 했지?”

“잠깐이면 끝납니다.”

“명령이래도. 괜찮다. 여기서 알아서 할 테니까.”

유르딘의 손끝이 레인의 미간을 꾹 눌렀다. 장난스러운 손짓과는 달리 얼굴에는 미미한 걱정이 어려 있다. 하긴, 멀미에 시달린데다 난리까지 겪어서 피곤함에 몸이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지고 있으니 안색이 말이 아닐 터다. 레인은 유르딘의 배려를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래. 그럼 올라가자.”

자연스레 앞장서는 유르딘을 보고 레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직접 안내해 주시려고요?”

“물론.”

“바쁘실 텐데…….”

“괜찮아. 얼마나 걸린다고.”

레인이 거듭 거절하는 것보다 유르딘이 빨랐다. 그는 더 듣지 않고 레인의 손을 잡았다. 얼떨결에 레인이 따라 걷자 이내 자연스레 손을 놓았지만, 유르딘이 손을 잡아 온 순간 확 달아오른 얼굴은 쉽게 식을 줄을 몰랐다. 실내인데도 레인은 괜히 코트 깃을 여며 붉어진 얼굴을 가렸다.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피해를 보았으니 바쁠 게 분명한데도 유르딘은 레인을 위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높은 계단을 올라갈 때는 다시 손을 잡고 이끌었다. 소중하게 아껴 주는 느낌이 낯설었지만 동시에 머리끝까지 아찔해질 정도로 좋았다.

도착한 방은 성에서도 위층, 비교적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미리 벽난로에 장작을 넣어 놨는지 문을 열자마자 훈훈한 열기가 풍겼고 호화롭지는 않아도 이것저것 신경 써서 꾸며 둔 태가 나는 방이었다. 침대를 보자마자 순식간에 외면하고 있던 피로가 몰려왔다. 유르딘은 레인의 안색을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뜨거운 물을 준비해 두라고 했다. 여긴 수도 시설이 낙후된 편이라 직접 길어 와야 하거든.”

“감사합니다.”

“졸려 보이는데……. 씻을 수 있겠나?”

“네, 괜찮아요.”

“씻다가 잠들면 안 된다.”

몇 번을 신신당부하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유르딘의 눈이 반짝였다.

“이러지 말고 내가 씻겨 주고 갈까?”

“…네?!”

좋은 생각이라는 양 가볍게 말하는 유르딘의 태도에 레인이 기함했다.

“어린 시절에 한 번 씻겨 준 적이 있잖나.”

“그, 그랬었나요?”

“그랬지. 하인이 시원찮아서 내가 씻겨 준 건데, 결국 내가 더 시원찮아서……. 눈에 비누가 들어가는 바람에 잔뜩 울었잖나.”

“기억 안 나는데요.”

“싫은 기억이라 잊었나? 이제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인을 보고 유르딘이 소리 내서 웃었다. 레인은 그제야 농담이란 걸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유르딘을 만나고 대체 몇 번째 부끄러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르딘의 앞에 서면 폭력과 강간을 독하게 버텨 내던 독종 레인 아이제나흐는 사라지고, 첫사랑의 열병에 빠진 어리버리한 청년만이 남는다. 잠시 레인을 부드러운 눈으로 응시하던 유르딘의 얼굴이 천천히 레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레인의 이마 위로 조금 거친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바로 코앞에 부드럽게 미소 띤 얼굴이 보인다.

“하인에게 중간중간 한 번씩 들여다보라고 해 두마. 감기 걸리니까 꼭 머리 말리고 자고.”

레인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르딘은 마무리 인사 대신 레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쓰다듬고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확실히 일의 마무리가 급하기는 했는지 빠르게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린다.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레인은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이건 무슨 여섯 살 난 애 취급…….”

이마에 키스해 주는 것도, 어릴 때 이야기를 꺼내며 장난을 치는 것도, 어린 시절 유르딘을 처음 봤던 시절과 같았다. 확실히 싫은 건 아닌데 부끄러웠다. 얼마나 얼빠지게 굴었으면 여섯 살 난 애처럼 대한단 말인가. 자기 자신의 얼빠진 행동을 반성하며, 다음에 봤을 때는 최소한 얼간이처럼 말을 더듬지는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레인은 한참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비척비척 욕실로 걸어 들어갔다가 뿌연 거울에 비친 제 표정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몹시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오른 얼굴은 레인 본인에게도 새로웠다. 부정적인 감정의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은 얼굴이 낯설다. 이렇게도 웃을 수 있었구나. 유르딘의 앞에서는 평범하게 웃는 사람이 될 수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거울 속의 레인이 조금 더 환하게 웃는다. 한결 편안한 심정이 되어 레인은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신경 써 준 태가 많이 나는 욕실에서 레인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 편하고 느긋한 목욕을 즐겼다. 여기가 전쟁과 죽음에 가까운 곳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시의 눈길로 갑자기 튀어나와 레인을 바닥에 처박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저 좋기만 했다. 피곤한데도 잠을 찾으며 간신히 씻고 나오니 견딜 수 없는 맹렬한 수마가 몰려왔다. 유르딘이 당부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아 간신히 수건을 잡고 나왔지만, 침대에 앉아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몇 번 털다가 결국 그대로 엎어져 잠이 들었다.

불편한 자세로 설핏 잠들었던 레인은 누군가가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릴 리 없는데. 들려서는 안 되는데. 순간적으로 레인은 완전히 당황해 이성적인 사고를 이어 가지 못하고 초조한 생각들을 떠올렸다. 문을 잠갔던가? 레인은 함부로 문을 잠글 수 없었다. 허락받지 못한 행동이다. 카이렌은 잠든 상태의 레인을 애무해 깨우는 걸 제법 좋아했다. 카이렌을 기다리지 않고 잠든 건 얼마든지 너그러이 용서했지만, 자기가 방으로 들어오려고 했을 때 문이 잠겨 있어 행동이 저지받는 건 용서하지 않았다.

제법 거칠게 두드리는 걸 보니 화가 난 게 틀림없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가서 문을 열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문을 열면 쏟아질 폭력이 자연스레 상상됐다. 머리채를 잡힌 채 그대로 벽에 머리를 처박히거나 강압적으로 밀어붙여 들어와 끔찍하게 때려 붓는 쾌감. 팔을 부러뜨리듯 뒤로 꺾어 억압하고 명치를 때리고 머리를 짓밟고 배를 걷어차는 폭력.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레인은 지금 얻어맞고 있는 듯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쉽게 떠오를 정도로 익숙하다고 해서 가볍게 견뎌 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폭력은 사람을 죽을 때까지 깎아내릴 수 있는 칼날이었다. 그래도 견뎌 낼 수 있을 터였다.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왔듯이.

레인은 긴장한 채로 눈을 떴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려다가 주변을 보고 멈췄다. 제대로 불을 끄고 자지 않아 어스름하게 밝혀진 방 안이 몹시 낯설다. 그제야 레인은 자신이 북방으로 왔으며, 카이렌은 왕국 남부 제 가문의 영지에 있어서 찾아오려야 찾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에서 깨어나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듣고 반사적으로 지레 겁을 집어먹은 몰골이 한심하고 우스워 저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이 샜다. 지친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카이렌이나 레스터, 아이제나흐 공작가에 대해 한순간이나마 잊고 있었는데 거짓말처럼 악몽이 되살아났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기억들을 외면하며 레인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누구십니까?”

“문 열어.”

다짜고짜 명령에 가까운 말이 들려와 레인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기억에 없는 목소리다. 레인은 직위상으로는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속사정이야 어떻든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차남이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 레인을 상대로 밤에 찾아와 다짜고짜 명령을 내리는 저 미친놈이 대체 누구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목소리가 젊은 걸로 봐서 딱히 지위가 높을 것 같지도 않다. 레인이 대답하지 않고 문만 노려보고 있는데 다시 한번 상대가 문을 두드렸다.

“빨리 문 열라고.”

“누구야?”

“발터 플랑.”

그제야 레인은 상대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발터 플랑. 아카데미 출신, 즉 레인과 같은 학교 동기인 기사의 목소리였다. 아카데미의 검술 학부에서 수업을 듣다가 기사 작위를 임명받고 지원군에 합류했다고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과 교류가 없는 레인이 발터에 대해 알고 있는 이유는 그가 카이렌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카이렌의 비위를 맞추며 비굴하게 굴던 모습은 친구라기보다는 부하에 가까워 보이긴 했다. 실제 하는 일도 카이렌의 하인에 가까웠다.

카이렌과 레인의 관계는 비밀로 되어 있지만, 부지가 넓긴 해도 한정된 공간인 아카데미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있는데 비밀을 완벽하게 지켜 나가기는 힘들었다. 카이렌은 아무도 모르게 일을 처리하려 들기보다는 믿을 만한 몇몇에게 알려 두고 그들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비밀을 지켰다. 무슨 일이 생기면 카이렌의 힘으로 손쉽게 치워 버릴 수 있는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학생이나 곳곳에 침투한 하인들이 활용 대상이었다. 가끔 밖에서 급하게 일을 치를 때 감시인을 세워 두기도 했는데, 덕분에 발터도 두어 번 정도 두 사람의 정사를 간접적으로 봤었다.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절대로 만나고 싶은 상대가 아니다. 레인은 무시하고 다시 자려고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얼마나 벌려 주고 다녔는지 까발려지기 싫으면 문 열어.”

겁을 집어먹고 반사적으로 문을 열려고 하다가 멈췄다. 발터가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레인이 아직 아이제나흐 가문의 일원인 이상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절대 말하지 못한다.

레인은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몇 번 더 문을 두드리던 발터가 간단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제야 문을 잠그지 않았단 게 기억났다. 아무리 졸렸어도 문은 잠그고 잤어야 하는 건데, 워낙 피곤하다 보니 그대로 잠들었다. 평소에 카이렌 때문에 문을 잠그지 않는 게 습관이 된 탓도 있었다. 발터가 들어오고 나서야 문은 뒤늦게 잠겼다. 의기양양하게 들어온 발터는 잔뜩 경계하는 레인을 가소롭다는 듯이 보며 이죽였다.

“카이렌도 참 웃기는 놈이야. 이런 놈이 뭐라고 감시를 해 달라고 하지?”

그새 레인이 북부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손을 쓴 모양이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카이렌이었다면 쏟아지는 폭력에 짜증이나 분노 따위는 사그라지고 공포만이 남겠으나 지금 눈앞에 선 상대는 카이렌이 아니었다. 레인이 당하는 광경을 본 많은 사람들은 레인이 순하고 겁이 많을 거라고 착각하지만, 오히려 레인의 본성은 그 반대였다. 레인은 주눅 드는 대신 싸늘한 눈으로 발터를 노려보았다.

“감시라고?”

“네가 어디다 엉덩이를 들이밀고 다니는지 감시해 달라고 했지.”

“카이렌이나 할 법한 더러운 생각이군. 그럴 생각 없으니 꺼져.”

“네가 뭘 하고 다녔는지 퍼뜨렸으면 좋겠어? 고분고분하게 굴어야지. 카이렌 말 한마디면 아무 데서나 벌려 주는 새끼가 뭘 그렇게 튕기실까.”

발터는 손을 들어 레인의 뺨을 쓸었다. 역겨운 손길이었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행복했던 기분이 단숨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손을 쳐 냈지만, 발터는 앙탈을 본 듯한 가벼운 태도로 웃어넘기며 레인의 허리를 잡아끌었다. 레인은 버티지 못하고 속절없이 발터에게로 끌려갔다. 고간을 걷어차 주려는 시도는 바로 제압당해 억눌렸다. 하반신을 비벼 오는 발터의 움직임이 끔찍해 몸부림쳤지만, 오히려 발터를 자극하는 꼴만 됐다. 발터는 잔뜩 흥분한 숨을 내쉬며 레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지 말고 나한테도 한 번 대 주는 건 어때? 그렇게 매일같이 갖고 논 걸 보니 네가 그렇게 잘하는가 보지?”

더러운 모욕에 레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걸 즐겁게 웃으며 바라보는 발터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 비밀도 지키고, 카이렌에게도 좋게 말해 주지.”

대단한 제안이라도 한다는 듯이 발터는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레인이 자신의 제안을 거부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레인이 피식 웃음을 흘리자 그 의미를 오해한 발터가 능글맞게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이 맞닿기 전에 손바닥으로 가로막은 레인은 연인처럼 다정하게 발터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대로 웃는 얼굴에 홀려 잠시 넋을 놓은 발터에게 사근사근 속삭였다.

“지랄하고 있네. 아카데미에선 카이렌 옆에 찰싹 붙어서 쓸 만한 거 한 점 안 떨어질까 비굴하게 바닥을 기던 개새끼가, 뭘 믿고 날 건드리려고?”

발터가 눈을 깜박였다. 독설과 정반대되는 마치 유혹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가 레인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한발 뒤늦게 이해하고 얼굴이 시뻘게지는 발터를 레인이 주저 없이 걷어찼다. 넋이 나가 손에서 힘이 빠진데다가 레인에게 얼굴이 잡혀 있어 이번에는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발터는 실전을 경험한 기사였고, 레인은 교양으로 배우는 검술조차 익히기 힘든 병약한 일반인이다. 짧은 틈을 타 레인이 도망치는 것보다 발터가 정신을 차리고 레인을 붙잡는 게 빨랐다. 발터는 신경질적으로 레인을 잡아 침대로 몰아붙이고 위로 올라탔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얼굴이지만, 일말의 이성은 남아 있는지 얼굴을 피해 가슴과 배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 정도로 강한 충격에 레인의 몸이 축 늘어졌다. 발터는 입술을 핥으며 레인의 옷을 그대로 쥐어뜯고는 순식간에 드러난 맨살을 쓰다듬으며 비열하게 웃었다.

“애원이라도 하면서 아까처럼 아양이라도 떨어 봐. 그럼 내가 봐줄지도 모르잖아?”

살면서 레인은 하지 말라는 애원을 수백 수천 번을 했다. 악의를 품은 가해자의 본질은 어차피 다 똑같았다. 피해자에 공감해 그만둘 거였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터다. 레인은 애원하는 대신에 조소했다.

“내가 하지 말라면 안 할 거야? 어차피 내가 뭐라고 말하든 할 거면서.”

“뻣뻣하게 나오시는군.”

“그럼 내가 너 같은 개새끼 비위 맞춰 주면서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이라도 할 줄 알았어? 별것도 아닌 주제에, 이런 짓을 하면 네가 뭐라도 될 것 같아? 한심한 개새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터의 주먹이 레인의 명치를 내리찍었다. 화가 끝까지 난 얼굴로 그는 레인의 머리채를 잡고 머리를 침대 헤드에 내리찍었다. 씨근거리며 성질을 내던 발터는 레인의 몸을 뒤집었다. 수치스러운 꼴이 됐지만 더는 저항할 힘도 없었다. 애초에 성질을 긁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 하지만 이런 행위가 익숙한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현실은 시궁창일지라도 최소한 유르딘이 있는 이곳에서만큼은 꿈을 꾸고 싶었다. 유르딘에게 쓴 편지 속의 ‘레인’처럼 밝고 그늘 없는 레인 아이제나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꿈은 꿈일 뿐이고, 이게 현실이었다. 레인은 북방까지 와서도 도망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꿈을 꿨다. 뜨거운 손길을 느끼며 레인은 끓어오르는 분노 위에 습관처럼 체념을 덮어씌웠다. 타올랐던 분노는 관성적인 우울로 싸늘하게 식는다. 냉정해진 이성은 이 상황을 합리화하려 노력한다. 괜한 소란을 피우다가 누군가가 찾아와 이상한 소문이 돌게 되는 것보다야 낫다. 상대가 바뀌었을 뿐 이건 언제나 하던 일이다. 아무리 끔찍해도 참고 견디면 언젠가 끝난다.

저항을 포기한 레인을 본 발터의 입가에 승리감 어린 미소가 자리 잡았다. 레인의 말대로 발터는 카이렌의 주변을 맴돌며 뭐 하나 떨어지는 게 없을까 어슬렁거리던 비굴한 개였다. 그래도 카이렌에게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 하던 레인보다는 자신의 처지가 낫다고 위안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식간에 입장이 역전됐다. 카이렌의 남창에 불과한 레인 아이제나흐가 가문의 힘을 업고 일개 평기사인 발터보다 높은 자리를 받았다는 사실에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 카이렌에게 명령에 가까운 부탁을 받았을 때는 다 때려치우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차라리 잘되었다. 아무리 당해도 수치심 때문에 입을 다무는 레인의 성격상 카이렌에게 이 일을 말할 확률은 전혀 없었다. 후환이 없다. 이대로 레인을 강간하고 카이렌의 소유물을 빼앗았다는 정복감과 성취감을 채우고 싶다는 저열한 욕망이 들끓었다. 남색 하는 취미는 없었지만, 눈앞의 레인 정도면 성별을 따질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이 세상의 더러운 면은 하나도 모를 법하게 고고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천박한 욕망으로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었다.

발터는 레인의 하의를 벗기고 그대로 엉덩이를 벌려 침을 뱉었다. 그대로 박으려던 발터가 뭔가를 발견하고 멈췄다. 그는 고개를 내리고 레인의 허벅지 안쪽을 손으로 쓸었다.

“이건 뭐야. 흉터?”

일부러 지져 버리지 않고서야 생길 수 없는 커다란 화상 흉터가 허벅지 위를 온통 뒤덮고 있었다. 흉터를 만지자마자 조금 전까지 완전히 포기한 채 축 늘어져 있던 레인의 몸이 펄쩍 뛰었다. 침대를 기어 도망치려 드는 레인의 발목을 발터가 죽 잡아당겨 끌었다. 얻어맞을 때도 흔들리지 않던 태연자약한 표정에 금이 가고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손 치워……. 비켜.”

“싫은데.”

“싫어……! 싫어, 손대지 마!”

애원한다고 들어줄 리 없다는 걸 뼈저리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레인은 이성을 잃은 채 소리쳤다. 평정이 깨진 레인을 보며 발터가 만족스레 웃었다. 시체처럼 늘어진 상대를 안는 것보다는 이렇게 팔팔한 상대를 꺾어 놓는 게 좋았다. 크기가 커서 그렇지, 그냥 평범한 화상 흉터 같은데 왜 이렇게 난리를 치는 것인지 몰라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걸 빌미로 능동적으로 움직여 보라고 협박할지, 아니면 끝까지 소리치고 발악하는 상대를 찍어 누를지 발터가 저 혼자만 즐거운 상상을 하던 때.

누군가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레인을 방으로 올려 보낸 후 유르딘은 고생한 부관을 더욱 몰아쳐 가며 간신히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고 레인을 한 번 더 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늦었다. 유르딘에게야 레인이 자신이 보살피던 아이 같고 친숙했지만, 레인 또한 유르딘을 똑같이 편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괜히 늦은 시간에 가 봤자 신경만 쓸 테니 내일 가고자 마음먹었다가, 레인이 오는 길 내내 상태가 나빠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며 잠만 잤다는 기사들의 말을 듣고 결정을 번복했다.

독 때문에 몸이 상해 원체 약한 아이였다. 아이제나흐 공작도 슈리아도 작은 키는 아닌지라 겉보기엔 훤칠하게 자랐지만, 당장 쓰러질 법한 안색이며 소매 아래 드러난 비쩍 마른 손목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안 그래도 레인이 북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전부터 온갖 좋다는 약을 모두 공수해 둔 상태였다. 원기회복용 약재부터 사소하게는 감기약, 복통약, 두통약에 먼 미래를 위한 정력에 좋다는 특산품까지 몸에 좋다는 것은 모조리 끌어모은 후 독의 감식까지 마쳐 두었다. 몸에 좋다는 걸 다 긁어모으다 보니 목록이 좀 이상해진 감이 있지만 어쨌든 하나같이 먹어서 나쁘지 않을 것들이다. 자고 있다면 잠깐 약만 먹이고 재우는 게 내일을 위해 나을 것 같아서 유르딘은 미리 준비해 둔 약을 챙겨 레인의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레인의 방에 도착했을 때 유르딘을 맞아 준 건 다투는 소리였다. 정확히는 레인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소리였다. 앞뒤 따질 거 없이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방 안에서 거짓말처럼 소리가 멎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대로 조용해졌다고 믿을 수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보다 수배는 청각이 예민한 유르딘은 강제로 억눌린 레인의 울음 섞인 신음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유르딘은 다른 생각들을 잊고 문고리를 돌렸다. 레인이 온다고 하여 특별히 장인을 불러 달아 두었던 잠금장치지만 이 상황에는 장벽이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야 장벽이지 유르딘에게는 별것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문손잡이가 우그러졌다. 유르딘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레인은 창백하게 질린 채 남자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남자가 우악스럽게 더러운 손으로 짓누르고 있다. 남자가 미처 변명하기도 전에 유르딘은 남자에게 다가가 레인에게서 거칠게 떼어 내고는, 그대로 멱살을 잡아 벽으로 던져 버렸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벽면에 붙어 있던 액자들마저 충격에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레인.”

새하얗게 질린 레인이 벌벌 떨고 있었다. 물기 어린 푸른 눈동자가 잔뜩 겁에 질린 기색으로 유르딘을 담았다.

레인은 절망했다. 결국, 유르딘에게 못 보일 더러운 모습을 보여 버렸다. 레인의 추악한 일면을 마주했으니 유르딘도 이제 실망하고 경멸할지도 모른다. 유르딘이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항상 당해 오면서 타인을 지나치게 경계하게 된 레인은 감정적인 공포에 떨었다.

유르딘은 레인의 공포와 떨림을 다르게 해석했다. 애초에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강간당할 뻔한 피해자를 걱정하지, 탓할 리가 없었다. 유르딘은 레인의 위에 올라탄 남자가 한 일 때문에 레인이 겁을 집어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울면서 입이 틀어막혀 있던 레인의 상황을 본 사람으로서 자연스레 내릴 만한 판단이었다.

유르딘은 이불로 레인의 몸을 가려 주고 충격에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발터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어떤 놈팡이인가 했더니 얼굴 본 적 있는 기사였다. 제법 전도유망한 녀석이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누가 한 소린지 몰라도 눈이 삔 게 틀림없었다. 당장에라도 죽일 듯한 살기에 발터는 온몸이 욱신거리는 걸 꾹 참고 재빨리 바지춤을 여미고 일어났다.

“오, 오해이십니다. 저… 저 녀석이 대 주겠다고 먼저 유혹했습니다. 니제스 경,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닥쳐라.”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자르는 말에 발터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경의 이름은 뭔가?”

“…발터 플랑입니다. 니제스 경, 저는 다른 뜻이 아니라…….”

“나는 경의 발언을 허락한 적 없다.”

서슬 퍼런 말에 발터는 입을 다물었다. 뭐라 변명하든 소용없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새파랗게 질린 발터에게 유르딘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설령 경의 말이 사실이라 하여도 거부의 의사를 표현한 순간에 물러나는 게 옳다. 조금 전에 경이 저지르려던 행위는 명백한 강간 미수이며, 동시에 하극상이다. 이곳이 전장 위였다면 하극상은 바로 목을 칠 수도 있는 중죄란 건 알고 있겠지.”

생각보다 유르딘이 강경하게 레인의 편을 들고 있었다. 애초에 유르딘이 들어온 순간이 빼도 박도 못하게 강간 직전이었던 터라 변명할 말도 없었다. 카이렌과의 일을 들먹여 레인에게 흠집 내고 누명을 씌우려 해도 이미 무리였다. 하극상이라니.

카이렌은 레인을 감시하기 위해 최대한 도와주겠다고 말했었지만, 유르딘 니제스는 카이렌이라는 뒷배로 해결될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강간하려고 했던 일이 걸리면 집착 심한 카이렌이 아예 발터를 죽이려 들 게 뻔했다.

이쯤 되니 레인이 문제가 아니라 제 출셋길과 함께 인생마저 막히게 생겼다. 발터는 잔뜩 울상을 지으며 뭐라 더 변명해 보려 했지만, 찍어 누르는 강한 살기만 돌아와 제대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돌아가서 처분을 기다리라는 말에 발터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하고 욱신거리는 몸을 붙잡은 채 꼬리 내린 개처럼 처량하게 반쯤 기면서 방을 나갔다.

이제 방에 남은 사람은 얼어붙어 있는 레인과 여전히 분이 사그라지지 않은 유르딘뿐이었다. 분노가 격렬하게 타올라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발터를 족치러 가고 싶었지만, 유르딘은 우선순위를 알았다. 중요한 건 레인이다. 만에 하나 벌이 두렵다고 발터가 탈주라도 하면 가중 처벌 할 수 있으니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다. 차라리 도망쳐라. 직접 쫓아가서 불구로 만들어 줄 테니까. 흉포한 감정을 누르며 유르딘은 다정한 남자로 돌아왔다.

“레인, 괜찮나?”

“…니제스 경.”

“이제 괜찮으니까……. 진정해라.”

부드럽게 달랬지만 레인은 유르딘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추한 꼴을 보일 수 없다는 생각에 이불 속에서 간신히 옷을 추슬러 입기는 했지만 엉망이 된 몰골을 원래대로 완벽하게 되돌릴 수는 없었다. 들켰다는 사실이 레인의 기분을 진창에 처박아 지금은 유르딘의 다정한 말조차 귓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무지 진정할 줄을 모르는 레인을 난처하게 바라보던 유르딘은 몸을 숙이고 시선을 맞췄다.

“레인, 잠시. 겁먹지 마라. 잠깐만, 네 상태가 안 좋은 거 같아서 확인하려는 것뿐이니까.”

시선이 맞닿으니 차마 매정하게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발터를 대할 때와는 딴판인 다정한 얼굴을 마주하니 아주 조금 두려움이 가셨다. 레인이 승낙의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유르딘은 슬며시 그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시원한 손이 기분 좋아서 그대로 기대려는데 유르딘이 손을 떼어 냈다. 아쉬운 마음에 작은 탄식이 흘렀다. 유르딘 또한 안타까운 탄식을 흘리며 혀를 찼다.

“이런, 열이 있잖나.”

아무리 두꺼운 태피스트리를 벽에 걸어 한기를 막고 난로를 때고 난방 마법을 걸어도 돌로 만든 북방의 성이 품은 한기를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며칠간의 강행군, 젖어서 체온을 뺏어 가는 머리칼, 조금 전 갑작스레 받은 충격까지. 레인이 앓아누울 이유는 차고 넘쳤다. 레인에게 누워서 편히 쉬라고 말하려던 유르딘은 조금 전 레인이 이 방에서 끔찍한 일을 당할 뻔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같은 공간은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데서 자다가는 악몽이라도 꿀 것 같다.

잠시 고민하던 유르딘은 다시 한번 레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유르딘은 뭔지도 모르고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레인을 이불째로 말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레인이 할 수 있는 생각의 범주를 뛰어넘은 행동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마치 공주님처럼 조심스레 안긴 자세 때문에 레인은 유르딘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댄 꼴이 됐다. 유르딘이 거기까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레인이 자신의 처지를 잊게 하는 데 이만큼 좋은 충격 요법이 또 없었다. 잡다한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맞닿은 체온만이 강렬하게 인지됐다.

“자, 잠, 잠깐만요, 유르딘. 무슨……?”

잠들기 전, 더는 더듬지 말아야지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이런, 이제야 이름으로 불러 주는구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유르딘의 숨이 머리 위에 닿아, 레인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뱃속이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감각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성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도 아니면서 지금까지 레인의 유르딘에 대한 짝사랑은 육욕이 배제된 순수한 경애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에 육욕을 품기에는 레인이 너무 어렸었고, 제 마음을 자각한 후에도 편지만을 나눴으니 사랑은 있었으되 만질 수 없는 실체는 없어 육욕이 배제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눈에 보이는 넓은 어깨가, 듬직하게 받쳐 주는 가슴이, 단단한 손이 레인을 안고 있었다. 욕망을 혐오하던 자신이 집요한 자극 없이도 이렇게 간단하게 욕망을 품을 줄은 몰랐다. 강렬한 충동은 다행히 금세 사그라들었다.

“니제스 경…….”

“굳이 정정할 필요는 없는데……. 난 네가 날 이름으로 불러 주는 편이 좋아.”

유르딘은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친근하게 건넨 말이겠지만, 연인 사이에서도 나올 수 있는 말은 또다시 레인의 심장을 들었다가 놨다. 레인은 침착하기 위해 유르딘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노력하며 말을 돌렸다.

“어쨌든 내려 주세요. 이대로는 무겁고…….”

“날 너무 무시하는구나, 레인. 널 안고 성을 열 바퀴는 돌 수 있는데 말이다.”

“그……!”

레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아까처럼 좀 진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말만 잘하던 혀가 또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레인은 작은 신음만 흘리며 새빨개진 얼굴을 가렸다. 더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유르딘은 쿡쿡 웃으며 레인의 결 좋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니제스 경.”

무척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거늘, 레인은 육식 동물에게 덜미를 잡힌 초식 동물처럼 잔뜩 굳어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유르딘은 레인을 부드럽게 도닥였다.

“긴장하지 말아라.”

“하지만 니제스 경…….”

“유르딘이래도.”

장난스레 말하는 유르딘을 보며 레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직접 불러 보고 싶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마음껏 친밀하게 유르딘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고 싶었다. 전할 수 없는 고백은 속으로 삼켰지만, 이름을 부르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유르딘의 말 한 마디에 레인의 기준은 가볍게 무너진다.

“유르딘.”

짧은 이름 세 글자를 내뱉는 목소리가 마구잡이로 떨렸다. 유르딘, 그 이름이 마치 신의 이름인 양 조심스럽게 내어놓는 얼굴에 긴장이 서려 있었다. 차마 꺼내 놓을 수 없는 애정을 꾹 눌러 담은 채 레인은 유르딘을 마주했다. 완전히 숨길 수 없어 미미한 열기에 잠긴 레인의 푸른 눈을 마주하는 순간 유르딘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다행히 영문을 모를 두근거림은 찰나였다. 레인은 긴장해서 유르딘의 가슴에 맞닿아 있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했다.

“유르딘, 제가… 기분 나쁘거나 하진 않으신 거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르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가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다. 유르딘은 한 손을 들어 레인의 머리를, 뺨을 다정하게 쓸었다.

“당연하지. 네게 기분 나쁠 게 뭐 있나.”

“하지만 제가 아까 못난 꼴을 보여서요.”

“못난 꼴이 아니다. 자책할 필요 없어.”

“하지만 제게 실망하실까 봐…….”

“내가 네게 실망할 리가 없잖나.”

반복되는 레인의 자책과 자기 비하를 단호한 말로 끊어 내며 유르딘이 레인의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대었다. 편지로는 언제나 밝은 이야기만 보냈지만, 그 편지만큼 레인의 삶이 밝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유르딘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한창 걱정 없이 자랄 나이에 눈치 볼 것이 많았을 레인의 삶이 고스란히 보여 안쓰러웠다.

“너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걸.”

다정한 말에 레인이 화들짝 놀랐다. 아주 오래전, 레인은 자신을 처음으로 강간하던 카이렌에게 외치던 피맺힌 절규를 떠올렸다. 레인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 묻어 둔 말은 그대로 얌전히 가라앉는 듯하다가도 시시때때로 사소한 순간에 다시 떠오르며 레인을 난도질했다. 레인의 삶은 부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주변의 모든 사람이 레인을 탓하고 미워해서 정말로 제가 뭔가를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완벽하게 균형을 잡지 못해 저 자신을 무의식중에 자책하는 인간으로 자라났다. 그런 삶이었는데 유르딘이 처음으로 레인을 긍정해 주었다.

멍하니 유르딘을 바라보던 레인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고 기어이 넘쳐흘러 아래로 떨어졌다. 레인은 아예 유르딘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흐느끼는 레인을 보며 유르딘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천천히 그를 안은 손에 힘을 더해 꽉 안아 주었다.

레인은 자신을 지켜 주고 구원해 주는 품 안에서 한참을 정신없이 울었다. 그간의 서러움이 한 번에 몰려온데다가 열까지 올라 반쯤 이성이 날아간 채로 유르딘에게 응석을 부렸다. 유르딘이 침대에 데려다줬을 때는 어디인지 판단할 정신도 없었다. 그저 유르딘의 손을 꽉 잡고 훌쩍였다.

“이번에는 어디 가지 마세요.”

굉장히 절실하게 그를 붙잡았다.

미쳤었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레인은 수치심에 죽어 버릴 것 같았다. 그 말을 듣고 유르딘이 정말로 나가지 않고 잠들 때까지 손을 잡아 주고 다정하게 위로해 준 건 좋았지만, 역시 부끄러웠다. 그래도 못 보일 꼴을 다 보이고 나니 유르딘을 대하는 게 한결 편해졌다. 더는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거 하나는 다행이었다.

이후 레인은 꼬박 사흘 정도를 내리 앓았다. 처음 하루 정도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간신히 죽만 먹고 잠들었다. 둘째 날에야 뭔가를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들었는데, 자기가 누워 있는 곳이 유르딘의 방이란 걸 들었을 때는 또다시 기절하고 싶었다. 이틀이나 방을 점거하고 주인을 내쫓은 셈이다. 레인이 머물 새로운 방이 준비가 안 됐다고 해서 결국 조금 더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아팠던 첫째 날보다 이틀째가 더 고역이었다. 사방이 유르딘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충동적으로 벽에 걸린 옷가지에 얼굴을 묻어 보니 유르딘의 체향이 강하게 풍겼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자신이 너무 변태처럼 느껴져 자책하고 이불로 기어 들어왔다. 욕망에 머릿속이 불타오를 것만 같았다. 망설이다 바지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뭔가를 하기 전에 심한 자괴감이 들어서 자책하며 도로 뺐다.

이틀째 밤이 되어서야 그의 방이 마련되어, 레인은 유르딘을 마주하기 전에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당장은 유르딘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었다. 불을 끄고 가만히 누워서 유르딘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행히 그날은 유르딘이 레인을 찾아오지 않았다.

발터에게 당할 뻔한 일 이후로 유르딘은 레인의 안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심지어 레인에게 전속 호위 기사를 붙여 주겠다고 하는 통에 사양하느라 애를 썼다. 기사라니. 수도에서 가져온 물품을 관리하고 추가로 점검하는 게 레인의 일이었지만, 오는 길에도 별로 할 일이 없었고 도착하고 나서는 더더욱 할 일이 없어졌다. 그도 그럴 게 마법 물품에 관한 것은 마법에 무지한 레인이 관리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이미 군에는 몇 년간 유르딘의 휘하에서 능숙히 일을 해 오던 마법사가 있었다. 실제로 병상에서 일어난 레인을 찾아온 마법사는 아주 짧은 통보만을 했다.

“수도에서 온 물건은 모두 확인했고, 기존에 있던 물건들도 제가 마력을 보충하는 것 외에 필요한 게 없습니다. 따로 이상이 없다면 2주에 한 번 보고하겠습니다.”

무뚝뚝한 마법사가 한 말은 그게 전부였다. 원래 마법사가 알아서 잘하던 일에 끼어들기도 뭐해서 레인은 그러라고 말했다. 그런 처지다 보니 레인이 할 만한 일이 많지 않았다. 레인이 완고하게 버티자 유르딘도 한발 물러섰다. 전담 호위로 붙이지는 않고 만약의 경우에 레인의 호위를 최우선으로 맡을 수 있도록 배속해 둘 테니, 어디 나갈 일이 생기면 꼭 기사를 대동하라는 것이었다. 레인은 그쯤에서 타협하기로 했다.

그렇게 찾아온 기사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어딘지 낯이 익은 얼굴이라고 생각하면서 레인은 남자와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십니까. 국왕 전하의 영광스러운 검, 푸른 아일렛단의 기사, 지스킬 마이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마이어 경. 레인 아이제나흐입니다.”

“총사령관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아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몸은 괜찮으십니까?”

“보시다시피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십시오.”

방 안으로 들어온 지스킬은 무례하지 않은 정도로 레인의 방을 살피고 자리에 앉았다. 호위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눈 후 한동안은 평범한 화제가 오갔다. 말주변이 없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대화에 능숙한 지스킬은 레인이 단답형으로 대답해도 화제가 끊이지 않게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갔다.

찻잔이 반 이상 비워질 정도로 오랫동안 대화가 오가는 동안, 레인은 지스킬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전쟁터에 나온 지스킬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는 했지만, 두 번 가 본 게 다라고 했다. 한 번은 조부의 장례 때문에, 다른 한 번은 약혼 때문에 갔었다고 하는 그의 목에는 약혼반지를 끼워 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죽 늘어놓던 지스킬이 생각하던 말이 있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지스킬은 식은 차를 한 번에 입에 털어 넣고 말을 이었다.

“사실 레인 님의 호위는 만약의 경우에 플랑 경이 맡기로 했습니다만……. 플랑 경은 지금 지하 감옥으로 끌려간 상태입니다.”

“지하 감옥이라고요?”

레인은 놀라서 눈을 깜박였다. 그도 그럴 게 벌써 일주일 이상이 지났다. 아무리 보통 사람보다 튼튼한 기사라고 해도 12월 지하 감옥의 냉기를 쉬이 견뎌 내지는 못할 터였다. 하루 이틀 처벌받을 거라고 생각했지, 설마하니 귀족가 출신에 견습도 아닌 정식 기사인 발터가 일주일씩이나 감옥에 들어가 있을 줄은 몰랐다.

“네. 채찍 열 대를 맞고 앞으로 한 달간 지하 감옥에서 지내다가 일반 병사들과 함께 오를렘의 순찰 업무를 맡게 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겨울이 끝난 다음에는 수도로 돌아갈 예정이라더군요.”

“…그렇습니까.”

레인은 애써 웃음을 삼켰다.

4주, 즉 한 달 후면 북부에는 호된 겨울이 찾아와 눈이 성인 남자의 키만큼이나 쌓인다. 그런 시기에 오를렘의 순찰 업무라니. 오를렘은 이곳 성에서 남쪽 옛 왕국과 카니예의 국경선에 자리한 마을로, 기존 왕국령에 속해 있는 땅이라 문제가 일어날 확률이 한없이 낮았다. 문제가 없다는 말은 공을 세울 수 없다는 말과도 의미가 같다. 감옥, 쓸데없는 순찰, 그다음 곧바로 수도 귀환. 무의미한 궤도로 발터 플랑의 능력은 의심받을 게 뻔했다. 애초에 왕국군 총사령관인 유르딘의 눈 밖에 난 것부터가 기사로서 성공하기는 이미 틀린 거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확실히 속이 시원하긴 한데……. 눈앞의 지스킬 마이어는 뭘 얼마나 알기에 대놓고 개운해하란 듯이 일련의 정보를 줄줄 읊는단 말인가? 눈앞의 의뭉스러운 놈을 빤히 응시하자 지스킬이 시원하게 웃었다.

“저도 그놈은 싫었거든요.”

저도, 라는 건 레인도 싫어하는 쪽으로 단정 지어야 할 수 있는 말이다. 레인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제가 플랑 경을 싫어할 거라고 단정하십니까?”

“발터 플랑과 다툼이 있으셨던 거 아닙니까? 나쁜 의도로 말한 건 아닙니다. 그냥 추측이지요.”

“추측 말씀이십니까.”

“네. 플랑 경이 지금까지 한 업무 자체에는 별문제가 없었던 데다가, 게다가 니제스 경께서는 아군에게 채찍이나 매를 잘 쓰지 않는 분이시지요. 공론화되지 않은 문제를 강경하게 처벌하시는 것도, 체벌을 가하는 방식도, 니제스 경치고는 다소 감정적인 처벌이십니다. 니제스 경께서 감정적이 될 만한 존재가 이번에 오신 아이제나흐 님밖에 더 있겠습니까?”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내리깔았다. 유르딘이 레인 때문에 감정적이 됐다는 말이 퍽 로맨틱하게 들려서 설레고 부끄러웠다. 유르딘의 앞이 아닌지라 가까스로 표정 관리가 되는 게 다행이었다. 지스킬도 딱히 레인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정황상 아이제나흐 님께 플랑 경이 뭔가 무례를 저지른 게 아닐까 싶어서요.”

여기까지 정확하게 추측했는데 부정하는 것도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플랑 경이 제게 조금 무례한 언행을 하는 걸 니제스 경이 보고 도와주셨습니다. 하극상은 중죄라고 하시며 화를 내시더군요.”

“하극상입니까? 하긴 플랑 경은 원래부터 성질이 불같았지요. 언젠가 사고 칠 줄 알았습니다. 플랑 경은 상급자나 동료들에게는 깍듯하고 성실해도 일반 병사나 사용인들에게는 조금 난폭한 편이어서요. 아이제나흐 님에게까지 심한 무례를 끼치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지요.”

이미 저질렀는데, 그 무례. 걱정스레 말하는 지스킬에게 레인은 부드럽게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전부터 아이제나흐 님의 일이 조금 신경이 쓰였었으니까요.”

“전이라니요?”

레인의 삶에서 과거는 좋았던 기억이 별로 없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날카로워졌지만 지스킬은 개의치 않는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정말 기억을 못 하고 계시는군요. 그럴 만도 하지만요.”

“네?”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지난여름에 한 번 만났는데요.”

지스킬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스며 있었다. 지난여름이라니……. 만난 적이 있던가? 레인은 지스킬의 얼굴을 한참 동안 찬찬히 뜯어보았다. 서글서글한 인상, 다정한 목소리, 굳이 무시해도 될 부분까지 신경 쓰는 오지랖. 간신히 기억났다. 카이렌에게 강간당한 후 방치된 채로 몸이 아파 움직이지 못할 때, 레인을 기숙사의 방까지 옮겨 준 그 남자였다.

“아. 전에 아카데미에서 만났던가요? 아팠을 때 절 도와주신…….”

“네, 맞습니다. 다행히 알아보시는군요.”

“그때는 감사했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했네요.”

지스킬은 기쁜 듯이 웃었지만, 레인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내심 조금 불편해졌다. 한두 번 보고 말 사이면 모를까, 앞으로는 자주 봐야 할지도 모르는 사이인데 아픈 모습을 들킨 게 꼭 약점을 잡힌 것처럼 느껴졌다.

최대한 거리를 둬 보려고 했으나, 첫 만남 이후 지스킬은 레인이 보일 때마다 반가운 얼굴로 다가와 인사하고 잔뜩 대화를 나누고 갔다. 어색하게 밀어내며 데면데면하게 굴었지만, 지스킬은 성격이 어마어마하게 좋아서 넉살 좋게 잘도 말을 이어 갔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이어지다 보니 결국 레인도 지스킬과 인사를 주고받고 대화를 하게 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에 초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사석에서는 말을 놓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무시무시한 친화력이었다. 지스킬은 주로 아침 이른 시간이나 해가 진 저녁때 찾아와서 레인과 놀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지스킬의 친구라는 기사 하나까지 추가되어 두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됐다.

미엘 데이막이라고 하는 그 기사는 같은 연배의 기사 중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검의 귀재라고 했다. 말수는 적었지만, 묵묵하면서도 성실한 미엘이 레인은 어딘가 마음에 들었다. 세 사람은 마치 친구처럼 지냈다. 난생처음 또래 친구가 생긴 기분이라 조금 어색하기는 해도 기분 좋았다.

성에 도착하고 열흘 후, 레인은 유르딘에게 처음으로 생일 선물을 직접 건네받았다. 유르딘이 워낙 바쁜 몸인지라 깊은 밤에만 잠깐씩 레인을 찾았는데, 자주 찾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목도리를 받아 든 레인은 기분이 날아갈 듯이 행복했다. 은빛 여우 털로 만든 목도리는 보기만 해도 휘황찬란하고 무척이나 따스했다. 생각 같아서는 벽에 걸어 두기만 하고 싶었으나 유르딘이 가끔 스쳐 지나갈 때마다 춥지 않으냐고 묻는 통에 매일같이 하고 다니게 됐다.

할 일이 없던 레인은 낮 동안에는 간단한 서류 작업을 도우며 마법 도구뿐만 아니라 군의 식량과 무기와 같은 물자에 대한 관리 전반을 살폈다. 곧 눈이 내리면 군은 꼼짝없이 성안에 발목이 묶이게 된다. 그나마 눈이 덜 올 때는 치워서 길을 뚫지만, 심하게 올 때는 열흘 내내 눈이 내리며 완전히 고립될 때가 있었다. 그때를 대비해 군량을 포함한 물자를 비축해 둘 필요성이 있었다. 사실 그것도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일은 아닌지라 여전히 시간은 남아돌았다.

결국, 뭘 할지 고민하며 성을 돌아다니던 레인은 서고에 틀어박히는 것을 택했다. 온갖 장르의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지만, 레인이 선택한 책은 평소에 손도 대지 않던 마법 관련 도서들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마법사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마력으로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비를 내리는 마법사의 이야기는 언제나 레인을 설레게 만들었다. 강력한 마법사는 이미 사라진 옛 시대의 유물일 뿐이지만, 이전에 비해 약해졌다고 해도 희귀한 직업이다. 레인이 다니던 아카데미에도 마법 관련 학부가 있었지만, 관련 수업을 듣는 사람은 마법사가 될 자질을 갖춘 극소수뿐이었다. 평민이 제일 많은 학부가 마법 관련 학부이기도 했을 정도로 자질만 있다면 출신이나 성분을 따지지 않고 출세하기 쉬웠다.

할 수만 있다면 마법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지만, 마력을 측정하는 테스트의 결과 레인의 마력은 처참할 정도로 적다는 게 판정되었다. 테스트하기 전날 카이렌에게 심하게 얻어맞고 몇 번이나 기절했다 깨어나 당일에는 열이 펄펄 끓는 최악의 상태였던지라 다음에 한 번 더 테스트하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지만, 몸 상태와 마력 측정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말을 듣고 포기해야 했다.

그 후로 약간의 박탈감으로 흥미롭게 읽어 내려가던 마법 관련 도서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기왕에 마법 도구의 관리를 맡게 되었으니 다시 한번쯤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흥미가 있었던 분야이니만큼 레인은 제법 빠른 속도로 책을 독파해 나갔다.

정신없이 책을 읽느라 서고에 누가 들어오는 줄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다가, 한참 만에야 제 앞에 선 그림자를 알아채고 화들짝 놀라 책을 집어 던졌다.

“유, 유르딘?”

허공으로 날아간 책을 낚아챈 유르딘은 책 표지로 시선을 옮겼다. 레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평소와 달리 지금 읽고 있던 책은 잠깐 머리를 식힐 겸 집어 든 그림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여섯 살 난 아이나 읽을 법한 책을 읽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지만, 유르딘은 딱히 비웃거나 하지 않았다.

“음……. 요즘 서고에서 살다시피 한다기에.”

“네. 당분간은 할 일도 없어서요.”

“그래. 하긴 한가할 법도 하지. 한가할 때는 이런 책도 나름 재미가 있겠고.”

유르딘은 책 표지를 힐끗 보고 레인에게 돌려줬다.

“어릴 때 읽던 책이라, 간만에 보여서 그립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머리 식히며 읽었어요.”

“그렇구나.”

유르딘은 다정하지만 조금 무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책에는 조금의 관심도 주지 않는 대답이 작은 가시처럼 뾰족하게 레인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릴 때 읽던 책은 레인의 가장 소중한 물건들을 모아 둔 상자 가장 깊은 곳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유르딘이 어린 시절 보냈던 책 중 하나였다. 위대한 마법사가 세상을 위해 수많은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이야기. 레인은 글자 하나, 귀퉁이의 작은 그림 하나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책이었지만 유르딘은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 책을 수백 번 읽은 것은 레인뿐이고, 유르딘의 입장에서 십수 년 전 보냈던 책에 대해 기억하기는 어려우리라. 조금 시무룩하게 가라앉는 기분을 애써 감추는데, 유르딘은 알아채지 못하고 가볍고 들뜨기까지 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레인, 휴일에 시간 있으면 함께 마을에 나가지 않겠나?”

“시간이야 있지만, 저는 별 도움이 안 될 텐데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심심한 것 같아서 놀러 나가자고.”

“…놀러요?”

왕국의 자랑스러운 영웅이자 군의 총사령관인 유르딘이,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애송이인 레인과 나란히 마을로 놀러 가는 그림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레인이 몹시 혼란스러워하며 눈을 깜박이자 유르딘은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래. 필요한 게 있으면 사고, 맛있는 것도 먹고. 마침 작은 축제가 열린다더구나. 구경 좀 하고 돌아와도 좋겠지.”

“저랑 축제를요?”

언제 가라앉았냐는 듯이 마음이 순식간에 붕 떴다. 잔뜩 들뜬 질문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유르딘이 작은 신음을 흘렸다.

“음, 하긴 나랑 있으면 재미가 없겠지. 친구들이랑 가고 나랑은 다음에 가도…….”

“아뇨, 갈게요!”

급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이니 유르딘은 반은 의외란 듯이, 반은 놀랐단 듯이 레인을 본다. 너무 정색했나. 민망해진 레인은 뒤늦게 변명을 붙였다.

“여기서는 친하게 어울리는 녀석도 없고요. 어차피 일도 바쁠 테고.”

“마이어 경과는 마음이 잘 맞지 않나?”

“그런 건 아닌데, 휴일에 개인적인 용건이 있다고 들어서요.”

지스킬이 오해를 받을까 봐 레인은 잽싸게 변명을 덧붙였다. 휴일을 맞아 동료 기사들과 놀러 나가기로 했다며, 함께 가자고 꼬시던 지스킬의 얼굴이 기억난다. 그때는 나가기 귀찮다며 가차 없이 거절했었는데 유르딘의 제안은 한 번에 덥석 물다니. 지스킬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유르딘과 함께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갈게요.”

“그래, 그러자.”

유르딘은 웃으며 레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쁨에 마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휴일 전날, 레인은 잔뜩 설레서 잠을 설쳤다. 이 밤이 끝나면 유르딘과 마을에 가서 전지적 레인 기준의 데이트를 하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이런저런 일이 벌어지는 상상이 레인의 의지에 반해 멋대로 이어졌다. 새벽 늦은 시간이 돼서야 레인은 간신히 잠이 들었다가 유르딘이 왜 약속 시각에 늦었냐고 화내는 꿈을 꾸고서야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혼비백산해 정신없이 시간을 확인했지만, 아직 여유가 꽤 남아 있었다. 맥이 탁 풀렸다. 조금 자서 머릿속이 멍했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조금 더 잘지, 아니면 일어날지를 고민하며 어중간하게 졸다가 지스킬을 맞았다. 레인은 퀭한 얼굴로 지스킬에게 오늘 일정을 통보했다. 유르딘과 만나기로 했으니 오늘 호위는 필요 없다는 말을 전하며 조금 조마조마한 심정이 됐다. 지스킬과의 약속을 걷어차고 유르딘과 약속을 잡은 것에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스킬은 기분 나빠하는 대신 어제 온갖 망상을 하며 밤을 새운 레인보다 다섯 배쯤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니제스 경과 외출이라니, 단둘이?”

목소리에 경악이 깔려 있어 순간적으로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조금 이상하게 보이려나, 아니면 혹시 흑심이 들켰나? 순간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지만.

“와, 와……. 나라면 좋아서 죽을지도 몰라. 미친, 장난 아니다. 와……. 와, 진짜.”

별로 그런 식으로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순수한 감탄과 경악이 넘실댄다. 아니, 오히려 다른 의미로 경계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유르딘 니제스는 왕국민들의 우상이었다. 유르딘은 질색했지만 커다란 사내놈들이 유르딘의 손짓 한 번 말 한 마디에 좋아 죽으며 쓰러지는 상황이었다. 평범한 사람들도 그 지경이니 검 좀 쓴다는 사람들은 더 심했다. 지스킬이 유별나게 특이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같이 국력이 비슷비슷한 나라들 사이에 낀 라인셀의 특성상 언제나 전쟁이 잦았다. 평화로울 때도 국경 지방에서는 소규모의 전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그 전투가 없을 때마저도 산짐승이나 몬스터가 종종 마을을 습격했다. 라인셀은 몬스터의 수 또한 다른 나라보다 많은 편인지라 평화로울 날이 없었다. 무력은 언제나 필요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왕국은 출중한 검사를 반겼다. 평민이라도 공을 세우면 단승 작위나마 기사직을 받는다. 작위를 받으면 왕실에서 녹봉이나 토지를 받고, 정말 드물게는 승작해 계승할 수 있는 남작 위를 받고 영지까지 받는 경우도 있었다.

왕국에서는 이러한 출세를 계획적으로 이용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했기에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평민들은 기사 작위의 단꿈을 꿨다. 부유하지 않으면 글공부를 하기도 어려운 평민들이 그나마 쉽게 출세할 길이 검이다. 때문에 왕국민들은 어린 자식이 혹여 검에 재능이 있을까 일제히 검을 쥐여 줬고, 어린 소년들은 다들 검을 휘두르며 다녔으며 소녀들은 어릴 때부터 다채로운 검술을 구경했다. 물론 대부분의 아이는 제게 재능이 없단 것을 확인하고 검을 내려놓지만, 어린 시절 한 번씩은 다들 검을 휘두르다 보니 다들 검이 친숙했다. 검과 친숙하게 자란 사내들은 우수한 검사에 열광했다. 라인셀은 명실상부한 검사의 나라라 불릴 정도다.

그런 라인셀 왕국에 자타공인 대륙 최강의 검사가 나타났다. 그가 바로 유르딘 니제스였다. 검술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왕국에서 골머리를 썩이던 북부 왕국들을 검으로 제압한 영웅이기까지 했다.

어쨌든 화를 내지 않는 상황에 안도하며 옷을 갈아입는데, 지스킬이 레인을 만류했다. 유르딘을 만나러 가는데 너무 수수하게 입는다며, 최소한 그의 격에 맞춰야 하지 않겠느냐고 흥분해서 떠들어 댔다. 설득에 넘어간 레인은 지스킬과 함께 몸단장했다. 그러나 자신을 제대로 치장해 본 적 없는 두 사람이 멀쩡하게 치장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30분 뒤 레인은 머릿기름을 너무 발라 엉겨 붙은 머리에, 과하게 커다란 코트를 입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대로 나가려던 레인을 구원한 건 우연히 아침 식사를 치우기 위해서 온 하녀였다. 노련한 중년의 하녀는 못 볼 걸 본 얼굴을 하더니, 레인에게 머리를 다시 감고 올 것을 부탁했다. 레인은 기꺼이 하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녀에게 머리를 맡겼다. 최소한 자신이나 지스킬보다는 낫겠거니 싶어서 부탁한 건데, 하녀는 상상 이상으로 능숙해 저택의 어지간한 시녀들보다 나은 솜씨로 레인을 바꿔 놓았다. 변한 모습을 보고 지스킬이 입을 딱 벌렸다.

“너 예쁜 건 알았는데……. 이건 진짜 장난 아니다. 반할 것 같아.”

“미친놈.”

말은 저렇게 해도 지스킬은 얼마 전 약혼한 영애에게 첫눈에 반해 시시때때로 펜던트 속의 초상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전에 비슷한 말을 들었을 때는 조롱에 가까웠는데 순수한 칭찬이란 것을 알고 있으니 괜히 쑥스러워서 면박을 줬다. 어색한 기분에 레인은 지스킬 대신 자신을 도와준 하녀에게 웃어 보였다.

“당신, 이름이 뭐였지?”

“라사 켈슨입니다.”

“그렇군, 라사. 고마워. 능숙한 솜씨네. 전에 무슨 일을 했지?”

“예전에 귀족가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한 라사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한마디 덧붙였다.

“이전에 슈리아 님을 모셨었습니다.”

라사의 말에 놀란 레인이 멈춰 섰다. 라사. 라사 켈슨. 레인은 제 기억을 뒤지며 눈앞의 여자를 빤히 응시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갈색 머리카락에 같은 색 눈, 부드럽기도 억척스럽기도 한 인상. 특이한 점 하나 없는 평범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길을 걸으면 열에 하나꼴로 만날 수 있을 법한 얼굴이지만, 확실히 그녀가 눈에 익은 듯도 했다. 사실 너무 어릴 때 일이라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았다.

“레인, 늦겠는데.”

“알았어. 음, 나중에 조금 더 이야기하지. 오늘은 고마웠어. 상으로 이만 쉬도록 해.”

레인의 말에 라사가 정중하게 몸을 숙이고 물러났다. 방을 빠져나오며 레인은 어머니의 시녀들에 대해 생각했다. 후작가나 공작가의 안주인을 모시는 시녀쯤 되면 데려가려고 하는 곳도 많았다. 그런데 무려 아이제나흐 공작가 안주인을 모시던 시녀가 이런 보잘것없는 성에서 청소하는 하녀 일이나 하고 있다니.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반역자와 연관된 사람이라며 공작가에서 해고된 후 제대로 된 일을 찾지 못한 걸 수도 있었다. 만약 어머니와 연관되어 불행해진 거라면 도와주고 싶었다.

일단 라사에 대한 생각을 접어 둔 채, 레인은 빠르게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유르딘은 중앙계단이 있는 홀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유르딘의 뒤로 조금 악취미적인 벽화가 그려진 게 보인다. 옛 시대의 벽화답게 악마의 목을 베어 내는 용맹한 검사와 마법사, 그리고 수많은 병사로 이루어진 토벌대의 용맹함을 강조한 그림이었다. 유르딘이 옛 시대에 태어났다면 분명 저러한 영웅이지 않았을까. 그는 언제 어디서나 영웅이 될 만한 자였다. 미리 내려와 레인을 기다리던 유르딘은 레인을 보자마자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었다.

“오늘 아주 멋지구나, 레인.”

“감사합니다.”

얼굴에 열기가 확 올라 번졌다. 순식간에 다른 잡다한 생각들이 모두 사라졌다. 레인은 만족스레 웃으며 유르딘의 모습을 살폈다. 찬란한 오전의 햇살이 부서져 내린 금발은 탁한 빛깔 하나 없이 밝고 맑았다. 평소에는 적당히 내렸던 앞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기자 선이 뚜렷하고 시원스러운 이목구비가 한결 뚜렷하게 드러났다. 왕국의 영웅이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한량이었다고 해도 인기가 많았을 미남이었다.

멋지시네요. 별것도 아닌 칭찬 한마디를 하고 싶었는데, 끝까지 말이 나오질 않았다. 괜히 마음을 들킬 것 같아서 칭찬의 말은 물론이고 그냥 간단한 말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결국 레인은 어물어물 웃으며 유르딘의 뒤를 따랐다.

승마를 배우지 못한 레인을 배려해 함께 탄 작은 마차 안에서, 레인은 제 무릎이 유르딘의 무릎에 닿을 때마다 접촉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썼다.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는 건 자극이 너무 강했다. 애초에 카이렌과 둘이 마차에 오르면 자연스레 행위를 이어 갔기에 그쪽으로 쉽게 연상됐다.

아무 말도 없는 레인에게 중간중간 유르딘이 말을 걸어왔지만, 긴장 속에서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결국, 그 어색한 상태를 심한 멀미로 인해 말하는 것도 힘든 것으로 판단한 유르딘이 힘들면 누우란 말과 함께 아예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마을에 도착했다. 눕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앉아 긴장하는 동안 정말로 멀미가 심해졌기에 창백하게 질린 레인을 유르딘이 걱정스레 살폈다.

“괜찮나, 레인?”

“네. 죄송해요.”

“죄송할 필요는 없어. 조금 더 좋은 마차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일단 내리자. 내려서 바람이라도 쐬면 좀 낫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먼저 내려간 유르딘이 자연스레 레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귀족 영애를 에스코트하는 모양새에 고개를 저었지만 유르딘은 씩 웃더니 레인의 손을 덥석 잡아당겼다.

원래 레인은 남이 자신을 멋대로 만지는 것을 가장 끔찍하게 여겼다. 뜨겁거나 차가운, 또는 미지근한 손이 제 몸을 만질 때면 닿은 피부를 벗겨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기존의 혐오감은 언제나 그렇듯이 유르딘 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다시 태어난다. 증오와 혐오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던 레인의 세상은 유르딘에 의해 다시 쓰인다. 유르딘이 살렸고, 살아가게 한 목숨이다. 유르딘이 함께해 준다면, 그가 응원해 준다면, 작은 관심 한 조각이라도 준다면 레인은 뭐든 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 못 할 것 하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완벽한 기분이었다. 기분은 정말로 그랬다.

“으…….”

이 세상에는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수없이 많았다. 레인은 손을 들어 창백해진 얼굴을 가렸다. 산책로로 이용되는 마을 외곽의 평탄한 숲길을 조금 걷다가 쓰러져 버렸다. 아주 느릿한 속도로 잠깐 걸었을 뿐인데 순간 어지럽나 싶더니 어느새 유르딘의 품 안에 있었다. 몇 초 정도의 짧은 기절만으로도 유르딘이 기겁하기에는 충분했다. 유르딘은 곧장 레인을 안아 들고 마차로 돌아와서 레인을 눕혔다.

누워서 쉰 지도 얼추 몇 분은 됐고 이제 멀쩡한데도 유르딘의 강렬한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져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릴 때 망가진 몸은 아직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조금만 무리해도 툭하면 쓰러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가볍게 해낼 일도 레인에게는 무리인 일이 많았다. 아파서 앓아눕고 쓰러지는 게 일상이라 오히려 병을 숨기는 게 쉽기도 했다.

이곳에 와서 몸도 마음도 편하게 지내다 보니 상태가 호전되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지나친 자신감이었던 모양이다. 무리하지 말고 힘들다고 진작 말할 걸 그랬다는 후회 반, 걱정해 주는 게 기쁘다는 기쁨 반이 섞여 엉망진창이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무리시켜서.”

한참 만에 입을 뗀 유르딘의 목소리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레인은 그제야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고 유르딘의 표정을 살폈다. 신이 나서 날뛴 건 레인인데 죄책감은 유르딘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었다. 레인은 최대한 태연한 척 몸을 일으켰다.

“아뇨, 제가 괜히 무리해서 그래요. 이젠 괜찮아요.”

“확실히 안색은 원래대로 돌아왔다만……. 의원에게 한번 보이는 게 낫지 않겠어?”

“나중에 필요하면 그럴게요. 이 정도까지 무리한 적은 별로 없어서, 쓰러질 줄은 몰랐어요.”

“무리라고?”

산책이 무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얼굴로 솔직하게 당황하는 유르딘의 반응에 레인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적을 잡기 위해 사흘 밤낮으로 잠복하면서도 날아다니는 기사들을 일상적으로 봐 온 유르딘에게 있어서 고작 한 시간도 안 된 산책으로 지치는 레인은 신비로울 정도로 연약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유르딘은 심각한 얼굴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그럼 일단 돌아가…….”

“아뇨, 괜찮아요. 멀쩡한데.”

“…자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 그렇게 말할 것 같았지.”

유르딘이 씩 웃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무척 어른스러운 모양인데 유르딘의 일만 되면 아이처럼 구는 게 퍽 귀엽게 느껴졌다. 조금 충동적으로 유르딘은 레인의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머리에 닿자 그 아래서 몸이 작게 움츠러드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천천히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던 유르딘은 레인의 귓가며 목이 붉게 물든 것을 발견했다. 수줍은 걸까. 어쩐지 레인이 품은 열기가 유르딘에게도 옮겨붙는 것만 같아서 그대로 손을 떼어 냈다.

“무리하지 말고 해 지기 전까지만 돌아보자. 그리고 돌아가면 매일 운동을 하는 거야.”

“…운동이요?”

레인이 금세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말고 다음부터. 무리한 걸 시킬 생각은 없어. 네 몸이 그럴 만한 상태도 아니고 말이다. 매일 잠깐씩 걷기라도 하자.”

아무리 유르딘의 제안이라지만 레인은 몸을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산책도 싫었다. 하지만 유르딘은 제 뜻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뭐든 기초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수 있는 법이다. 휘하의 기사들은 짧은 명령으로 성을 몇 바퀴씩 돌게 시키지만, 당연히 레인에게 그런 강압적인 방법을 쓸 생각은 없었다.

“며칠간은 마이어 경에게 도와 달라고 하고, 음.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나도 한가해질 테니 시간 내서 같이 산책하자.”

“유르딘이랑요?”

“그래. 눈이 내리면 저쪽이나 우리 쪽이나 움직일 수가 없어. 암묵적인 휴전 상태가 되는 거지. 매일 잠깐 시간을 내는 정도라면 문제없을 거다.”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나 싫었는데 순식간에 마음이 뒤집혀서 레인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르딘의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네가 나를 좋아해서 기쁘구나. 나를 조금 더 어색해할 줄 알았거든.”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말에 레인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붉어진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나가요, 이제.”

어색하게 말을 돌린 레인은 도망치듯이 마차를 빠져나갔다. 새빨개진 귀 끝을 보며 유르딘은 웃음을 삼키고 레인을 따라나섰다.

작은 마을이지만 생각보다 돌아볼 곳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저택은 영주관뿐이고 마을 내 가구의 수도 적었으나 번화가만은 마을 규모에 비해 훨씬 컸다. 영주관이 있고, 북부에서 활동하는 규모 있는 상단의 지부가 이 마을에 들어선 후 여러 가게가 들어섰다. 야만족 토벌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으나 상황이 소탕 작전에 가까운지라 위협을 느끼는 사람도 적었다. 오히려 장기간 주둔하던 군대의 병사며 기사들이 마을로 휴가를 나와 돈을 쓰면서 번화가는 제법 안정적이었다. 거기에 마을 축제가 겹치기까지 했으니 무척이나 활기찼다.

돌아다니는 내내 레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 줄을 몰랐다. 싸구려 장식품을 구경하거나 향신료를 잔뜩 뿌린 자극적인 길거리 간식 따위를 먹는 일은 평소라면 넌더리가 났겠지만, 유르딘과 함께하니 즐거웠다.

사실 유르딘과 함께라면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 가둬 둬도 좋았으리라. 두 사람은 열심히 축제를 돌아다녔다. ‘열심히’라는 건 물론 어디까지나 레인의 기준이고 유르딘에게는 제법 따분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레인은 삼십 분을 돌아다니면 한 시간 이상을 쉬어야 했다. 하지만 짜증 나고 답답할 수 있는 상황에도 유르딘은 귀찮은 티를 내지 않고 쉴 때마다 레인의 어깨나 다리를 주물러 주며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단단한 손길이 자상하게 레인의 다리를 감쌀 때마다 달아올랐다.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다 마을 광장에 자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했다. 마을에서 제일 좋은 레스토랑이라지만 레인의 입맛에는 야채는 숨이 너무 죽어 있었고 생선이 조금 비린데다가 후식은 지나치게 달기만 했다. 평소라면 먹는 둥 마는 둥 했을 저급한 식사를 깔끔하게 비웠다. 마음이 들떠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식사를 하던 중에 광장 중앙에 무대를 세우는 것을 보았다. 유르딘은 추우니 안으로 들어갈 것을 종용했으나 레인이 고집을 부려 모여든 관객들의 앞줄에 섰다. 레인이 추울까 봐 목도리를 몇 번이나 둘러 준 유르딘은 어린 시절처럼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레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기분이 되어 연극을 감상했다. 전문 배우가 아닌 아마추어들이 어설프게 대사를 읊고 연기하는 삼류 연극이었다. 이야기 속의 기사가 마왕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하는 뻔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공주 역을 맡은 여배우가 예쁘장했던 덕에 테라스에는 물론 무대 주변을 둘러싼 관객이 제법 있었다.

“기사님,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기사님께서 절 구해 주신 덕에 저는 괴물로 전락하지 않고 인간으로 남아 사랑을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뻔하고 진부한 대사를 외우면서 여주인공은 추운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말하는 본인조차 신경 쓰지 않는 대사가 레인에게는 제 인생을 축약해 놓은 말인 양 가슴에 와 박혔다.

연극이 끝나자 무대 뒤에서 커다란 모자를 든 소년이 나와 관객들 앞을 돌았다. 관객들은 대화 반 관람 반의 불성실한 태도답게 돈을 내는 이가 많이 없었다. 개중 가장 집중해서 봤던 레인은 드문드문 쏟아지는 동화 사이로 은화를 몇 닢 던졌다. 수도의 번듯한 극장에서 조금 더 제대로 된 연극을 볼 수도 있는 금액에 소년이 활짝 웃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소년이 지나가자 유르딘이 작게 속삭였다.

“통 크게 쓰는구나. 마음에 들었어?”

“네. 아주요.”

“그래, 그렇다면 다음에는 좀 더 제대로 된 곳에서 괜찮은 걸 보자.”

레인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유르딘은 레인에게 다음이라는 단어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유르딘이 있었기에 레인은 구질구질한 삶 속에서도 미래를 꿈꾼다.

사랑하는 유르딘. 당신에게 이 마음 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레인은 마음을 전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이야기 속의 공주는 아름답고 건강하며 기사에게 왕위를 줄 수 있었다. 줄 것이 있어서 당당하게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천덕꾸러기인 레인은 유르딘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레인은 정체불명의 병마저 앓고 있었다. 레인은 유르딘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지 뺏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사람인 이상 욕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다행히 레인은 포기에 익숙했다. 그러니 유르딘이 다정하게 웃어 주는 지금의 관계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만족하기로 마음먹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판대에서 소박한 선물을 샀다. 지스킬에게 줄 사탕 봉지, 오늘 수고한 하녀 라사에게 줄 나무 빗, 유르딘에게 줄 만년필까지. 사실 조금 더 제대로 된 물건을 사고 싶었지만 제대로 된 가게들은 닫혀 있어 별수가 없었다. 마차에 올라 유르딘에게 만년필을 선물하자 그의 얼굴에 놀람과 기쁨이 차례로 스며든다.

“고맙다, 레인.”

“괜찮아요. 별거 아니고……. 그냥 잘 써 주시면 돼요.”

별것 아닌 물건을 유르딘은 소중한 보물처럼 챙겨 넣었다. 쉽게 망가지지 않는 도구는 레인보다 오래 유르딘의 곁에 남아 줄 것이다.

축제에서 돌아온 레인은 곧장 라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성 내부에 들어온 하녀들은 보안을 위해 행적을 모두 조사해 두어서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레인의 예상대로 라사는 슈리아를 모셨다는 이유로 어느 가문에서도 받아 주지 않아 여기까지 흘러오게 된 기구한 처지였다. 라사의 조부모님 대부터 죽 베델 후작가에서 일을 해 왔고 라사 또한 어릴 때부터 베델 후작가에서 일을 했다. 어린 나이에 슈리아를 모셨고 자연스레 결혼할 때도 따라와 곁을 지켰다.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으니 베델 후작가가 반역의 죄를 덮어썼을 때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다행히 슈리아가 죄를 사면받으며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이후로 제대로 써 주는 사람이 없어서 왕국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춥고 황량한 북부까지 흘러왔다.

약간의 미안한 마음을 담아 레인은 라사를 곁에 두었다. 사정을 알아본 것에 대해 별다른 내색을 하지는 않았으나 라사는 레인의 결정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충분히 이해하는 듯했다. 가끔 라사는 레인을 그리운 눈으로 보기도 했다. 어머니인 슈리아의 흔적을 찾는 걸지도 몰랐다.

유르딘의 일을 제하고서라도 북부의 생활은 즐거웠다. 지스킬이 거의 매일같이 찾아왔고, 친구인 미엘 또한 가끔 찾아왔다. 라사는 그걸 두고 친구분들과 사이가 좋으시다고 평했다. 친구라니, 레인의 인생에서 처음 존재한 그 단어는 몹시 간지럽고 마음 따스해지는 울림이었다.

축제에 다녀오고 사흘 후부터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 온 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성은 순식간에 온통 하얀색으로 뒤덮였다. 수도도 겨울에는 눈이 꽤 내리는 편이었지만, 북부는 상상 그 이상의 강설량을 자랑했다. 눈이 심하게 내려 말이나 수레가 다닐 수 없게 되자 그나마 맡던 일도 그다지 필요 없게 됐다. 보고서는 꼬박꼬박 레인에게 올라오지만 확인하고 결재 도장을 찍으면 끝나는 일이라 휴가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인은 몹시 한가해졌지만, 반대로 병사들은 죽을 만큼 바빠졌다. 아무리 전투가 일어나지 않는다지만 왕국군의 거점인 성을 눈 속에 파묻힌 채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매일같이 눈이 내렸고, 병사들은 매일 성 주변의 눈을 치웠다. 끝나지 않는 끔찍한 굴레였다. 병사들은 눈을 악마의 똥가루라고 욕하며 가끔 분에 차 소리를 질렀고, 평소라면 엄히 다스렸을 그들의 상관들도 같이 짜증 나 있었기 때문에 함께 소리 지르고 욕했다. 성격 좋은 지스킬과 무뚝뚝한 미엘조차도 날씨와 끔찍하게 내리는 눈에 대한 욕을 열 번은 더 할 지경이었다. 신입 기사인 지스킬은 선임 기사들처럼 병사를 관리 감독하는 일을 맡지 못하고 매일같이 병사들과 함께 눈을 치우고 있었으니, 끔찍할 만도 했다.

유르딘이 자신은 곧 한가해진다고 말한 의미를 자연스레 깨닫게 됐다. 기사들도 연배가 있거나 기사직과 별도로 귀족 작위가 있는 등, 소위 짬 있고 높으신 분들은 이 끔찍한 눈 지옥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 하물며 군의 총사령관이자 왕국의 영웅인 유르딘이 고작 눈과 씨름하는 시시한 일을 할 리가 없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이틀 정도만 손수 지시를 내려 체계를 갖추고 나니 유르딘 또한 금세 한가해졌다.

마을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레인은 매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유르딘과 함께 산책을 시작했다. 그나마 따뜻한 날은 바깥 공기를 쐬며 성안의 삭막한 정원 주변을 돌았다. 그러나 대부분 끔찍하게 춥고 눈이 내려 나갈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아무리 운동이 중하다지만 병약한 레인이 바깥에 오래 방치됐다가는 감기로 쓰러질 게 뻔했다. 대체할 장소는 금방 찾았다. 두 사람은 성 최상층의 복도를 뱅뱅 돌기 시작했다. 고위급 인사의 숙소나 작전실이 자리한 최상층은 어지간한 사람들의 출입이 통제되어 적막함을 유지했기에 두 사람이 느긋하게 걷기에 적합했다.

성안에서의 산책을 마치면 레인은 항상 서고로 향했다. 처음에는 서고까지 바래다주고 작별 인사를 나누던 유르딘은 레인이 서고에 커다란 목적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간다는 것을 안 후로 함께 서고에 들어갔다. 좁은 서고에서 두 사람은 책을 읽고 읽은 책에 관해 토론하거나,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처음에는 레인과 유르딘, 둘 모두에게 어색한 시간이었다. 유르딘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레인과 무슨 대화를 해야 할지 몰랐고, 유르딘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레인은 깜짝깜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 세웠다. 하지만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있는 두 사람 간의 긴장은 오래가지 않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자 긴장은 봄이 온 양 녹아내렸다.

서로 조금 더 편한 사이가 될 무렵, 유르딘이 성의 빈방에서 커다란 소파와 흔들의자를 가져다 서고에 들여놓았다. 그 무렵부터 서고는 완전히 두 사람만의 공간으로 자리 잡혔다. 처음에는 책만 놓여 있던 서고 안에 차츰 두 사람의 물건이 쌓여 갔다. 자주 쓰는 컵, 화로, 두툼한 담요와 쿠션, 필기구 따위가 공간을 채우자 서고가 아니라 사람 사는 방처럼 변했다. 그 무렵부터 레인은 편지로 다 적을 수 없었던 유르딘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선대 니제스 백작은 슬하에 2남을 두었는데, 그중 장자가 유르딘이었다. 보통 장자가 작위를 계승하기에 유르딘 또한 자연스레 어린 나이에 후계자의 자리를 받았다. 그러나 유르딘은 후계자의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전쟁터를 떠돌았다. 동생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동생이 니제스가를 더 훌륭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유르딘은 니제스가를 사랑했다. 부모님은 정략결혼으로 맺어졌지만, 결혼 후 순식간에 서로에 대한 사랑에 빠져들었다. 정부나 애인 같은 것도 두지 않고 서로에게만 충실했다. 그렇게 완벽하게 맺어졌으니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은 것도 당연한 일이다. 니제스가의 형제들은 저잣거리의 아이들처럼 이익 관계를 따지지 않고 가족에 대한 애정으로만 맺어졌다.

애정을 기반을 둔 감정으로 대책 없이 후계자의 자리를 내줬으니 유르딘 또한 스스로 출세할 길을 모색해야 했다. 다행히 어린 시절부터 검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렇다고는 해도 전쟁터는 유르딘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영웅이라고 해 봤자 결국에는 살인마. 더욱이 군 내부에는 은밀한 비리가 만연했고, 아무리 군법으로 험하게 다스린다 한들 정복지에서의 행패는 비일비재했다. 좌절하는 대신 유르딘은 목표를 세웠다. 언젠가 자신이 저 꼭대기에 앉게 된다면 썩어 빠진 군을 바꾸어 나가리라고 결심했다. 마침내 총사령관이 된 유르딘은 천천히 하나하나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굉장하시네요.”

레인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언제나 체제에 꺾일 뿐인 레인으로서는 스스로 바꾸어 나간 유르딘이 마치 신처럼 보였다.

“별거 아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제가 보기에는 지금도 충분히 대단한데요.”

레인도 하인들이 푸념하는 것을 몇 번 들었을 뿐이지만, 검사와 왕국을 지키는 군에 열광하는 풍조치고는 수도에서 기사나 병사의 이미지는 썩 좋지 않았다. 평민 상대로는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다가 뒷돈을 받고서야 해결해 주는 일도 다반사라고 들었다. 젊은 국왕의 치세하에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지만 아직까지는 갈 길이 멀었다. 그에 비하면 이곳의 군대는 마을의 평판도 좋았고 규율도 잘 잡혀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기는 했지.”

드물게 부끄러워하면서도 유르딘은 레인을 똑바로 보았다.

“네가 보내 준 편지가 많은 도움이 됐어.”

“…제 편지요?”

“그래.”

레인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열심히 써 봤자 유르딘이 제대로 읽을까 고민하면서도 혹시나 그가 걱정할까 봐,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 열심히 꾸며서 적었던 편지들이 기억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행적 정도만 레인과 일치할 뿐 소설처럼 꾸며 낸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 없이 허망할 뿐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차라리 일개 기사로 남의 명령을 받을 때가 편했어. 내 결정이 타인의 목숨을, 인생을 바꾼다고 생각하니까 걱정도 많이 되고……. 고민도 많이 했지. 그러던 중 네 편지를 받았어.”

어설프게 써 내려갔던 첫 편지는 레인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유르딘에게 편지를 받았다는 게 너무도 기뻐서 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마구 써 내렸다. 자신을 구해 주고 또 잊지 않아 준 유르딘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가득 담아 적어서 뭐가 그리 급했는지 바로 보내 버렸다. 다음 날 조금 자제해서 쓸걸,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이불을 몇 번이나 걷어찼는지.

“고작 편지 한 장일 뿐인데 네가 너무 기뻐해 줘서, 지금까지도 고마웠다고 말해 줘서, 내게 힘내라고 응원해 줘서……. 기뻤다. 조금씩 힘이 났어. 네가 그곳의 이야기를 전해 줄 때마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섰지. 지금이라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별거 아니었는데요.”

“그래도 고맙다, 레인.”

레인이 겪었던 이야기는 지어낸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과 감정들만은 모두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다. 유르딘이 레인에게 도움을 줬듯이 레인 또한 유르딘에게 도움을 줬다고, 그 마음들이 제 마음의 등대가 되어 주었다고 유르딘은 고백하고 있었다.

천천히 차올라 이 마음을 가득 메우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지금까지 애써 갈무리해 두었던 애정이 넘쳐 올라 표면으로 드러났다. 드글드글 끓는 감정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눈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제 말이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쁠 줄은 몰랐다. 그 상대가 유르딘이어서야, 너무도 기쁜 마음에 레인은 도무지 제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유르딘은 그런 레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레인은 편지에서 자신이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고, 유르딘은 어리석게도 그걸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레인은 편지 속의 밝고 그늘 없는 청년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언제나 다정하게 대해 주는 데도 레인은 유르딘이 화낼까 봐 걱정하는 사람처럼 항상 제 속내를 숨겼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남을 경계하고 처음 간 장소에서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만약 편지 속의 청년처럼 행복한 시간만을 보냈더라면, 레인이 지금처럼 음울한 기색을 품은 채 자라났을 리가 없다.

물론 레인이 지속적인 강간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지만, 분명 힘든 일이 많았을 거라고 유르딘은 어렴풋이 짐작했다.

유르딘은 레인에게 드리운 어둠을 걷어 내고 싶었다. 그늘 아래에서 시든 채 자라던 그에게 구름 한 점 없는 햇볕을 선물하고 싶었다. 레인이 원하기만 한다면 평생이라도 그에게 화창한 나날만을 가져와 머리 위에 흩뿌리고 싶다. 지켜 주고 싶다. 누군가를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은 언제나 갖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특정한 한 명이 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는 다 자라 어엿한 청년이 된 레인에게는 예전의 어린 모습이 없는데도 보호하고 싶었다.

아직 구체적인 형태가 잡히지 않았으나 봄바람처럼 보드랍고 따스한 마음이 유르딘의 안을 어지럽혔다. 자꾸만 실없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근엄한 척 잡아 내리며 유르딘은 레인의 머리칼을 살살 손으로 쓸었다. 결 좋은 머리칼이 손안을 가볍게 간지럽히는가 싶더니 이내 휙 빠져나갔다. 앞을 보고 있던 레인이 고개를 꺾어 들어 유르딘을 똑바로 본다. 새하얀 얼굴 위에서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아름답게 휘었다.

그 행동에 갑작스레 놀라 유르딘은 손을 떼어 냈다. 형체 없는 마음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유르딘은 진정하려 애쓰며 다른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안 그래도 십팔 년 전, 베델 후작가가 어이없는 누명을 뒤집어썼을 때부터 생각해 오던 게 있다. 그때는 막연히 뜬구름 잡는 생각이었으나 충분히 힘이 생긴 지금은 한번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노려 볼 법도 했다. 레인의 즐거운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닌지 걱정하며 유르딘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너는 항상 그곳의 생활이 즐겁다고 말했지만, 적은 것만큼 즐겁지는 않았겠지.”

“아뇨. 그게…….”

레인이 당황해서 변명하려는 것을 유르딘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탓하려는 게 아냐. 걱정하고 있는 거야. 내가 조금 더 신경을 써 줬어야 했는데. 많이 힘들었겠구나.”

“아…….”

아까까지는 그저 즐거워하던 얼굴에 염려가 차올랐다. 괜히 말을 꺼냈나 후회했지만, 언제나 달고 좋은 말만 늘어놓아서는 현실을 바로 볼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레인은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다.

“힘든 정도는 아니에요.”

어쩔 줄 몰라 하며 무너지려는 표정에서 유르딘은 레인의 거짓을 읽었다. 유르딘의 짐작보다 더 많은 일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장 추궁하고 싶은 마음을 유르딘은 애써 억눌렀다. 어차피 이곳은 유르딘의 관할 안이다. 레인을 힘들게 할 것들이 없으니 천천히 보듬어서 말할 준비가 됐을 때 물어도 된다. 일단 중요한 건 레인을 추궁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환경이 좋지 않다면 더 나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그래.”

“네?”

유르딘이 하는 말이 이해 가지 않는다는 듯이 레인이 눈을 깜박였다.

“예전부터, 네 어머니와 외가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반역죄인걸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왕권의 강화를 위해 반역죄는 왕국에서 가장 금기시된 죄로 분류된다. 반역죄에 연루된 인물이라 사람들은 레인이 비난받는 게 당연하다고 느꼈다. 가끔은 레인 자신조차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길 정도로 큰 죄다. 하지만 유르딘의 태도는 여전히 굳건했다.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지금의 국왕 전하께서는 선왕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을 만한 분이야. 조금 더 힘을 키우고 증거를 모은다면 뒤집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지. 다만 그렇게 되면…….”

베델 후작가는 멸문했지만, 레인은 당시 선왕의 자비에 빌어 간신히 살아났다. 그런 레인을 아이제나흐 공작가가 계속 아들로 인정하고 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보호받았다. 하지만 단기간에 끝날 리 없는 아이제나흐의 고발 과정에서 레인 또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르딘의 시선이 걱정스러운 빛을 담고 레인을 응시한다.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유르딘 대신 레인이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실지 알아요. 저는 괜찮아요.”

“레인.”

“가장 수상한 자는 제 아버지, 즉 공작이죠. 어머니가 돌아가실 당시 전 어렸었지만, 그래도 당시 어머니의 모습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억울해하고 계셨어요. 죄를 고발한 사람이 억울해서 목숨을 끊지는 않았겠죠. 베델 후작가가 멸문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나벨은 당당하게 본채로 들어왔고, 레스터는 저를 제치고 후계자가 됐지요. 누가 가장 이득을 본지는 명확해요. 아나벨 혼자서 할 수는 없었겠죠. 고작 몰락귀족 따위가 베델 후작가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테니, 범인은 공작이겠죠.”

깊은 추리조차 필요 없이 몇 가지 사실만을 안다면 너무나도 뻔하게 사실 관계를 추론할 수 있다. 이렇게나 천박하고 단순한 진실인데 이십 년 가까이 아이제나흐의 위광에 거짓으로 가려져 있다.

유르딘의 앞에서는 줄곧 언제나 유순하게 깜박였던 눈동자가 증오를 품고 새파랗게 빛났다. 아주 오랫동안 짓눌려 왔으나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새파랗게 벼려져 날카로운 증오였다.

“후작가의 누명을 밝혀내고 공작을 죽일 수 있다면…….”

딜란 아이제나흐가 단두대에 오르고, 화형대에 묶이고, 거대한 짐승의 앞에 서는 상상을 한다. 너무도 짜릿해서 소름이 돋고 손이 벌벌 떨렸다. 단 한 번도 생각한 일이 없고, 단 한 번도 입에 담은 적이 없는 말이다. 하지만 입 밖에 꺼내놓는 순간,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이 그것을 갈망해 왔음을 레인은 깨달았다.

몸에 흐르는 피의 절반이 딜란의 것이지만,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실감해 본 적이 없다. 저를 사랑해 준 적 없이 오히려 어머니를 파멸로 이끈 아버지. 피만 줬을 뿐 아버지라 부를 가치도 없는 개 같은 씨발 놈. 그런 남자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짓지도 않은 죄로 모욕당하다가 결국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러나 반대로 공작은 여전히 파렴치한 낯짝을 빳빳이 세우고 살아가고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불공평하다지만, 있어서는 안 될 지나친 비극이다.

누군가는 자연스레 패륜을 떠올리는 레인이 끔찍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레인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죽일 수 있다면 저는 어떻게 되어도 좋아요.”

누군가를 파멸시킬 생각을 할 때는 응당 자신이 파멸할 가능성도 생각해 두어야 한다. 더욱이 그토록 증오하는 아이제나흐라지만, 레인은 충분히 그 후광 또한 누렸다. 이 자리에 있는 것부터가 제 가문 덕분이다. 능력이 뛰어나다 한들 레인이 평민이었다면 아무 반발 없이 자리에 오를 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후작 위를 되찾는다 한들 이름뿐인 귀족으로 남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좋았다. 이 어그러진 비극을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있었다. 이 일은 유르딘에게 득이 될 것이 없다. 유르딘이 아무리 잘난 기사라고 해도 정치적 입지는 보잘것없었다. 새로이 작위를 수여받는다고 해도 아이제나흐 공작가에 대적할 정도는 못 된다. 거기에 이미 이십 년 가깝게 지나간 일인지라 증거도 증인도 세월 속에 묻혔을 터다. 딜란이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 리도 없다. 생각만 해도 힘겨운 가시밭길이다.

언제나 유르딘이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그는 레인에게 희망과 삶을 준 사람이었다. 그렇게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었다. 유르딘을 위해서는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유르딘을 위해서라면 그만두라고 말해야 했다. 타인의 복수심을 위해 삶을 바칠 만한 사람이 아니다. 왕국 제일가는 검사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영광된 길을 걸어야 할 사람이다.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유르딘을 말릴 수 없었다. 유르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딱딱한 얼굴로 레인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제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로 비장한 레인의 각오와 증오는 유르딘에게 고스란히 닿았다.

레인은 유르딘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레인을 돕겠다고 말하는 걸까? 처음부터 유르딘은 어머니를 찾아왔다가 레인을 구했다. 지금도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를 위해 하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지만, 동시에 자신이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덜어졌다.

“어머니도 그걸 원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초라하게 내뱉는 말이 보잘것없고 비겁했다. 고인을 들먹이며 부추기는 것은 비열한 짓이란 걸 알면서도 레인은 유르딘이 제 복수를 이뤄 주길 바랐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말에 유르딘이 인상을 찌푸렸다. 화가 났을까?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던 유르딘은 손을 뻗어 레인의 손을 단단하게 붙잡았다.

“나는 슈리아가 아니라, 네 생각이 궁금했던 거야.”

손에 쥔 검 한 자루로 왕국을 호령하는 단단하고 강인한 손이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도 조심스레 움직였다. 유르딘은 허락을 구하듯 아주 조심스레 레인의 손을 잡아당겼다. 힘을 쭉 빼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르자, 유르딘은 레인의 손을 잡아당겨 손등 위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레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너무도 긴장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슈리아가 아니라, 네 생각.”

“…….”

“네가 원하는지가 중요해.”

“저는…….”

쉽고 간단한 답이 곧장 나오지 않고 턱 막혔다. 유르딘의 강렬한 시선이 레인을 얽매고 있었다. 다른 그 무엇을 투영하지 않고, 반영하지도 않고, 오직 레인만을 보는 눈빛. 레인의 답만을 구하며, 오로지 그 대답만으로 움직이겠다는 강렬한 의지. 오직, 레인만을 위하는 말.

원해요.

당신의 그 시선이 언제나 내게만 꽂혀 있기를 원해요. 동정이 아니라 애정으로써 날 갈구하기를 원해요. 사랑하기를 원해요. 사랑받기를 원해요. 소유하기를 원해요. 소유받기를 원해요. 당신이라면 나를 부숴서 당신의 틀에 맞춰 욱여넣어도 좋아.

당신을 원해.

그러나 결국 레인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유르딘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조금 전까지 그를 이용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주제에 너무나도 비열했다. 잠깐 멈칫하며 빠져나가려는 손을 붙잡았던 유르딘은 이내 놓아주었다. 레인은 맞닿았던 열에 화끈거리는 손을 거두고 침착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쿵쾅거리는 가슴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욕심이 커져 괴물처럼 날뛰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바라는 것 없는 삶을 살아왔던 주제에 이제는 탐욕스럽게 모든 것을 원하고 있었다. 어찌할 줄 모르는 레인 대신 유르딘이 입을 열었다.

“네 뜻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날 믿으렴. 내가 알아서 잘해 줄 테니까, 그러니 너는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아라.”

“유르딘.”

“내게는 네가 제일 우선이야.”

레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저 극단으로 치닫는 레인을 붙잡기 위한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제멋대로 상상하게 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온통 유르딘에 대한 열기로 가득 찼다. 만에 하나 실패하거나 중간에 관둔다고 해도, 레인을 신경 써 주는 유르딘의 마음 덕에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이제나흐 공작가를 칠 계획을 세웠지만,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논의는 한없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전쟁 중인 북부였다. 당장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야 할 때였다.

사실 그렇다고 해도 생각만큼 눈앞의 일에 열중하지는 않았다. 눈이 내리고 나서 직접 발로 뛸 필요성이 줄어들자 유르딘은 제법 한가해졌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전보다 한가해졌다는 의미였지, 하루 대여섯 시간을 빼서 놀아도 될 정도로 한가로워지진 않았다. 하지만 유르딘은 실컷 놀았다. 부관인 베른이 일 좀 하시라고 잔소리를 하는 것을 무시하고 실컷 놀았다. 열 살 차이 나는 어린애랑 노는 게 뭐가 재밌겠냐만은, 놀랍게도 재미있었다.

레인이 유르딘을 관찰할 때, 유르딘 또한 레인을 관찰했다. 아주 예전부터 알고 지냈지만 정작 가까이 지낸 시간은 많지 않아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제한적이었다.

관찰하다가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레인이 몹시 귀엽다는 사실이었다. 뭐가 귀엽냐면, 일단 생김새도 귀엽지만 제 성질을 꾹 누르고 유르딘의 앞에서 순한 양처럼 구는 게 제일 귀여웠다. 가만 보면 얌전한 외모와 달리 성격이 마냥 유약하지는 않았다. 어머니인 슈리아도 예쁘고 순하게 생겨서 자존심이 세며,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는데 레인이 딱 그랬다.

사실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았다.

슈리아는 귀족가의 영애치고는 날래고 잽싼 편이었다. 아니, 그냥 또래들 중에서 손꼽히게 잽쌌다. 유르딘과 함께 사내애들처럼 검을 들고 휘두르다가 혼쭐이 난 적도 있었다. 승마를 좋아해 부모님의 만류에도 결혼 전까지도 꿋꿋이 마차 대신 말을 타고 다녔다. 언제나 날듯이 사뿐사뿐 경쾌하게 걸었던 슈리아와는 달리 레인의 걸음걸이는 느렸다. 조금만 빨리 걷거나 달리면 숨이 차고, 심하게 움직이면 전에 나갔던 때처럼 쓰러지기 일쑤였다. 레인은 애초에 몸이 약해 승마를 배우지 못해 말을 탈 줄도 몰랐고 나가서 움직이며 노는 것도 즐기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사랑받고 모자람 없이 자란 슈리아는 참을성이 없었다. 정확히는 참을 필요성을 느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오래 기다리는 일을 싫어해서 기다리다가 조금만 지쳐도 다른 대안을 찾고는 했다. 무언가 포기해도 슈리아에게는 대체재가 산더미처럼 많았다. 반면에 레인은 답답할 정도로 인내심이 깊었고 제 감정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처럼 숨기는 데에 익숙했다. 누군가에게 요구하는 일은 하인에게조차 거의 없다시피 했다.

부모와 자식이 똑같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두 사람의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기질의 다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르딘의 눈에는 두 사람의 성장 배경의 차이로 느껴졌다. 막연하게 머물던 후회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언제나 밝게 웃지 못해 어딘가 그늘진 미소를 짓는 레인의 모습을 볼 때면, 유르딘은 과거의 제 선택에 대해 후회했다.

그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레인을 아이제나흐에서 빼냈어야 했던 걸까. 무리를 해서라도 레인을 옹호했다면 그 아이에게 더 나은 길을 제시할 수 있었을까? 유르딘은 과거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번뇌했다.

하지만 유르딘이 아무리 고민한다 한들, 이미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선택의 주사위는 굴려졌으며, 이미 지나간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당시에 들일 수고의 몇 배에 이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레인의 맑은 눈에 순식간에 분노와 증오가 들어차는 것을 보며 유르딘은 가슴이 저미는 슬픔을 느꼈다. 자신이 어찌 되어도 좋으니 아이제나흐를 부수고 싶다고 말하는 순간에는 절망마저 느껴졌다. 순수하게 웃지는 못하면서 순수하게 증오할 줄은 아는 레인을 보며, 유르딘은 제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아이제나흐를 부숴 주겠다고 결심했다. 레인은 아무것도 희생할 필요 없었다. 레인을 위해, 유르딘 니제스는 모든 것을 다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유르딘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맹목적으로 뭐든지 내줄 준비를 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명백했다.

복수를 갈망하며 타오르는 레인의 곧은 눈동자를 보면서 유르딘은 차마 느끼지 말아야 했을 감정을 느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강렬한 감정이었다. 풋풋한 첫사랑과 비교할 수도 없이 강렬한, 한순간 영혼이 감정에 꿰뚫려 버린 듯한 감정에 유르딘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제 감정을 인정한 유르딘은 머리를 쥐어 싸고 혼자 한참을 고민했다. 자신보다 열한 살 연하, 심지어 친구의 아들에게 마음이 끌리는 게 옳은가? 옳을 리가. 차라리 어릴 때부터 꾸준히 봐 왔더라면 이런 감정을 품지 않았을 텐데 어른이 되어서 만나다 보니 그런 사실이 머릿속에서 흐려졌다. 아니, 이런 생각은 비열한 변명일 뿐이다. 유르딘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자기 일만 아니라면 형편없는 쓰레기, 씨발 놈 정도로 결론 내리고 끝냈을 텐데. 이번에는 그 형편없는 쓰레기에 씨발 놈이 본인이었다. 답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답은 있는데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혼자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 유르딘은 결국 바쁘게 일하고 있는 부관을 찾았다. 일에 파묻힌 베른은 퀭한 눈으로 유르딘을 응시했다. 아주 조금 미안해졌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다짜고짜 앞자리에 앉은 유르딘은 불쑥 본론을 꺼냈다.

“베른, 넌…….”

“네?”

“너보다 열 살쯤 많은 남자가 네가 좋다고 하면 어쩔……”

“상상하기도 싫은데요.”

질문이 다 끝나기도 전에 베른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대답했다. 단호한 대답에 유르딘이 미간을 좁히자 베른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덧붙인다.

“하지만 유르딘 님은 아직 젊고, 잘생기시고, 왕국의 영웅이고, 레인 님도 유르딘 님이 좋으신 것 같으니 괜찮지 않을까요.”

“어떻게 알았지?”

베른은 유르딘의 경악이 아주 우습단 얼굴이었다.

“아주 신방을 차려 놓고 둘이서만 노는데 모르면 병신이죠.”

“…그 정도로 티가 났나.”

“아, 물론 이 사실을 아는 저나 눈치챈 거고 다른 데 소문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입단속도 계속할 테니 안심하시고, 이제라도 아셨으면 잘해 보세요.”

“잘하긴 뭘 잘해 봐. 그럴 생각 없어.”

“아니, 왜요?”

놀리나 싶어 쳐다봤지만, 베른은 진심으로 이유를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름의 상식은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그것도 아니다. 유르딘은 한숨을 쉬며 말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억지로 나열했다.

“왜냐니……. 일단 우리는 나이 차이도 너무 많고, 레인 정도면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거잖나.”

“많다고 해도 뭐……. 열 살이잖아요? 세대 차이는 나지만 부모뻘은 아니라고요. 뭐, 이 경우에는 슈리아 님과 유르딘 님이 친구 사이이기는 하셨지만……. 나이만 놓고 보면요. 십 년 차 정도야 유르딘 님이야 워낙에 건강하시니 오래 사실 테고. 더 좋은 사람이요? 유르딘 님보다 좋은 조건이면 국왕 전하나 왕녀님 정도밖에 없는데요. 국왕 전하는 유부남이시고, 왕녀님은 너무 어리세요. 아, 아이제나흐 소공작도 포함이려나요? 하지만 그는 형제인걸요. 결국 유르딘 님이 제일이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산더미인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무관인 유르딘이 논리로 무장한 문관 베른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베른의 말이 맞더라도 넙죽 이해할 수는 없었다.

“나 말고, 여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릴 수도 있는 거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레인 님도 유르딘 님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잘되면 두 분 다 좋지 않겠어요?”

“글쎄, 그건…….”

반박하려던 유르딘은 레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눈치가 지독하게 없는 게 아니라면 레인의 감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이곳에 도착한 이후 레인은 한결같이 유르딘만을 봐 왔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 언제나 레인의 시선은 유르딘을 좇았고, 유르딘과 닿을 새면 지나치게 긴장해 경직됐다. 눈빛은 달았으며 말은 부드러웠다.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르딘에 대해 최소한 깊은 애정이 있는 건 확실했다.

유르딘이 레인에게 손을 내밀기만 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지금 이상으로 충분히 깊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잘 풀려서 연인이 된다면, 그다음에는?

라인셀 왕국에서는 동성 간의 연애를 허용할 뿐 결혼은 인정되지 않는다. 임신을 하지 않으니 간편하다는 점을 들어 남자 정부를 두는 경우도 성행했는데, 동성 간의 연애는 딱 그 정도의 인식이었다. 귀족들의 유흥이나 매춘. 순수한 애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레인이 뭐가 부족해서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들키면 손해일 연애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일이 무사히 끝나고 수도로 돌아가면 레인은 분명 나쁘지 않은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레인에게 유르딘의 연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상황이 달라진다. 인정받을 수 없는 관계다. 두 사람의 나이 차, 재산, 사회에서 쌓은 명성, 어느 것이든 레인이 부족했기에 레인은 유르딘의 정부라는 꼬리표를 달기 쉬웠다. 하필 레인이 처음으로 임무를 맡아 향한 곳이 유르딘이 있는 북방이기에, 애초부터 레인이 유르딘을 노리고 접근했다는 식의 추잡하고 근거 없는 뒷소문까지 나올 수도 있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유르딘의 태도는 단호했다. 베른으로서는 오랜 시간 정착하지 못하고 전장을 떠돈 주인에게 남자든 여자든 마음의 안식처를 주고 싶었지만, 당장은 밀어붙일 때가 아닌 게 눈에 보였다.

“네. 그래도 뭐, 너무 단정 짓지 말고 당분간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곧 바빠지실 것 같으니까.”

베른도 유르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원래부터가 유르딘은 연애관이 엄격했다. 정략결혼은 질색해서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겼음에도 아직 약혼조차 하지 않았다. 군에 오래 있다 보면 흔히들 하는 매춘은 물론이고, 현지에서만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연인 관계도 극도로 혐오했다. 잘생기고 키도 크고 유능하고 잘난 유르딘에게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나 전쟁터를 떠돌다 보니 오래 만난 사람이 없었다.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된다. 그토록 연애에 조심스러웠으니 지금도 신중할 수밖에 없다.

제 마음에 확신이 서지 않는 문제는 붙어 있을 때보다 떨어졌을 때 오히려 더 명확한 결론이 날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일이 들어왔는데 참으로 때를 잘 맞춘 감정 자각이라 생각하며 베른은 조금 전까지 보던 서류를 유르딘 쪽으로 밀었다. 유르딘은 시큰둥하게 서류를 집어 들었다. 사실 안 봐도 뻔했다. 레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 고작 며칠만 지난 것 같았으나, 이미 몇 달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겨우내 미칠 듯이 내리던 눈발은 이제 제법 가늘어졌고, 슬슬 잘 닦인 길로 다니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놈들이 또 날뛰기 시작했나 보군.”

“놈들도 오래 쉬었으니 몸이 근질근질할 때가 됐죠. 직접 가 보시겠습니까?”

“가 봐야지. 놈들도 이제 수가 적어. 발악해 봤자지.”

“네. 이쪽은 맡기시고 잘 다녀오세요.”

베른은 씩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레인 님도 성심성의껏 돌봐 드리죠.”

놀려 먹을 건수를 잡은 얼굴이었다. 유르딘과 베른은 주종 관계로 맺어져 있었지만, 긴 시간 함께 전장을 누비며 다져 온 전우애 덕에 평소에는 친밀한 친구에 가까운 사이였다. 주인의 권위를 내세워 한마디 해 줄까 하던 유르딘은 그래 봤자 제 꼴만 우스워질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했다. 결국, 한숨만 내쉬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잘 부탁한다.”

당분간 만나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그간 마음 정리가 되길 바라며 유르딘은 마음을 다잡았다.

***

잿빛 하늘에 구름이 끼지 않고 조금 맑아지던 날, 유르딘은 레인에게 당분간의 작별 인사를 하고 성을 떠났다. 전도유망한 기사이던 지스킬을 포함한 몇몇 기사들 또한 함께 성을 비웠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한 번에 자리를 비우니 순식간에 주변이 휑해졌다. 모처럼 조용하고 한가로워진 시간을 레인은 사색으로 보냈다. 여러 생각이 복잡하게 얽혀서 풀릴 줄을 몰랐다.

마음이 꽉 막힐 때, 레인은 체스 판을 꺼내 홀로 체스를 즐겼다. 혼자 체스의 말을 움직이며 레인은 생각을 정리했다. 왕뿐만 아니라 귀족들의 유르딘에 대한 신임은 하늘을 찌른다. 왕국 전체가 유르딘의 존재에 열광했고 모두가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건 유르딘이 정치에 손을 대지 않고 적만을 물리칠 때의 이야기다.

레인이 놓은 나이트가 퀸을 잡았다. 깔끔한 한 수였다. 정치판은 이 체스판처럼 쉽고 명료하지 않았다. 이권과 욕망, 허울 좋은 명분 등의 온갖 요소들이 한데 뒤엉켜 혼란스레 굴러간다. 그 진창에 구르며 유르딘의 명성에 흠이 갈지도 모르고 추락할지도 모른다. 퀸을 잡은 나이트는 제 역할을 충분히 마쳤으나 비숍에게 먹혀 결국에 거꾸러진다. 유르딘은 이런 일회용의 시시한 말과는 달랐다. 말리지 않겠다면 최소한의 손실로 승리를 거머쥐는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유르딘이 판에 남은 최후의 승자여야 레인의 승리 또한 의미가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좋은 수네.”

머리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미엘이 체스판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엘은 떠나지 않았던가? 분명 기사단의 정예를 모아서 적의 본거지를 친다고 들었는데. 같은 연배 중에 제일가는 검의 귀재라는 미엘이 빠지다니 조금 의외였다. 레인은 눈을 깜박이며 미엘을 응시했다. 지스킬이 혼자 남아서 심심하겠다느니 하는 말을 했었던 것도 같은데. 미엘이 남는 것을 몰랐나? 아니면 갑작스레 다른 일로 돌아온 걸까?

궁금했지만, 레인은 차마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지스킬과 함께 셋이서 대화를 나눈 적은 있어도 둘만 남은 적은 없다. 지스킬과 달리 미엘은 아직 조금 불편한 상대였다. 그러나 미엘 쪽은 훨씬 더 친근한 태도로 레인을 향해 웃어 보였다.

“미안. 아무리 노크해도 말이 없길래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들어왔어. 무례를 용서해 줘.”

“내가 너무 생각에 깊이 빠져 있기는 했지. 괜찮아.”

미엘이 체스 판 귀퉁이를 손으로 두드렸다.

“혼자 두는 거면, 나랑 같이 둬도 될까?”

“둘 줄 알아?”

“조악한 솜씨지만, 조금은.”

적당히 상대하다 끝낼 생각이었는데 미엘은 겸손과 달리 뜻밖에 체스를 잘 뒀다. 레인이 지금까지 상대한 사람 중에 제일 잘 뒀다. 초반에 방심했던지라 첫판은 허무하게 져 버렸다. 그다음 두 판은 필사적으로 상대해 내리 이겼다. 결과적으로는 2승 1패, 레인의 승리였다.

“…졌군.”

졌지만 즐거운 얼굴로 미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만의 승부가 즐거웠던 건 레인도 마찬가지라 따라 일어나 악수를 나눴다.

“원래 내기가 걸리지 않은 체스는 안 하는데.”

“난 내기 체스는 안 해.”

“그래도 한 판 빚졌지. 나중에 갚을게.”

“갚겠다면야 사양은 안 해.”

고작 체스 한 판에 빚이니 뭐니 심각해지는 미엘이 우스워서 웃음이 나왔다. 미엘 또한 따라 웃었다.

“고민은 풀렸어?”

“뭐?”

“고민 있는 얼굴이길래. 뭔지는 몰라도 간단하게 생각해. 닥친 문제부터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해답이 보일 거야.”

곧장 답하지 못하는 레인의 어깨를 격려하듯 두드린 미엘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유유자적하게 방을 나갔다. 덕분에 고민도 제법 명쾌하게 풀렸다.

유르딘을 승리로 이끌 방법도 중요하다. 그러나 당장 닥친 문제는 레인의 건강이었다. 공작을 쓰러뜨리는 일은 어찌 되든 장기전으로 흘러갈 터였다. 이곳 북부로 오는 길에는 신관의 축복 덕인지 거의 아프지 않았지만, 슬슬 그 효력이 다하는 것인지 가끔 어지럼증이 느껴지곤 했다. 당시에는 이대로 내버려 둬서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심정이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살아서 유르딘의 곁을 지키며 공작을 죽인다는 목표가 생겼다.

다만 치료 방법이 고민이었다. 만약 치료할 수 없는 병이라면 유르딘의 말을 거절하고 조용히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을 작정이었다.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해도 괜히 자신이 병을 참고 있었다는 걸 유르딘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유르딘이 걱정하지 않고 폐가 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다.

레인은 라사를 불러 조용히 쓸 만한 의원을 불러 달라는 뜻을 전했다. 그리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깊은 밤, 라사는 성에 있는 의원 중 자신과 친분이 있다는 자를 데리고 왔다. 라사가 일이 있다며 물러난 후 진료가 시작됐다. 노년의 나이에 가까운 의원은 침착한 태도로 레인에 대한 진찰을 시작했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갈수록 당황했다.

레인의 한심하단 눈초리를 받으며 찔리는 표정을 짓던 의원은 기다려 달라며 방을 나가더니 잠시 후 이상한 도구를 가져왔다. 이상한 구슬과 보석이 줄줄이 꿰여 있는 도구를 들이대는 몰골이 아무리 봐도 돌팔이의 향기가 났지만, 일단 잠자코 있었다. 레인의 가슴 위로 올려 둔 도구에서 불길하게 시커먼 빛이 번쩍였다. 레인은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장난질은 그만하지.”

“아니, 아닙니다! 이건 마법적인 질병을 진단하는 도구입니다.”

“마법적인 질병이라고?”

“아이제나흐 님의 증상은 마력 과다증이고요.”

의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마법이 활발하게 사용되던 고대라면 모를까, 마법이 훨씬 퇴화한 지금에 와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게 마법 질병이었다. 게다가 마력 과다증이라니. 마법과는 연관도 없는 레인이 마력 따위를 과다하게 가지고 있을 리도 없었다. 레인은 불신을 숨기지 않은 채 물었다.

“이건 아무에게나 발병하나?”

“민간 사례는 주로 몇몇 독초나 마력초를 먹은 평민들 사이에서 많이 발병하는 걸로 나와 있습니다만 드뭅니다. 워낙 성분이 강해서 대부분은 죽으니까요. 아이제나흐 님의 경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의원이 눈치를 보면서 말했지만, 레인에게는 짐작 가는 일이 있었다. 여섯 살 때 먹었던 독. 한 번 독을 먹였으니 두 번이 불가능했겠는가? 레인이 신경질적인 표정을 짓자 의원은 눈치를 잔뜩 보면서 설명했다.

“마력 과다증은 보통 말씀드린 독초를 과다 섭취하면서 발생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몸에는 일정량의 마력이 존재하지만, 필요 이상의 마력이 존재하게 되면서 마법사도 아닌 아이제나흐 님에게는 해소할 길이 없어 독으로 작용하지요. 원래 이 병은 마법으로 치료했다고 하니, 옛 시대라면 모를까 지금 이 시대에는 완치할 수 없는 병입니다만……. 그, 그래도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치료 방법이 없다며?”

“완치가 힘들 뿐이지 증상을 완화하는 건 가능합니다. 마력이 많아서 인체에 무리가 가는 거니 과하게 맴도는 마력을 흐트러뜨리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될 겁니다. 따로 약을 지어 드시는 게 좋겠지만, 여기선 보기 힘든 약재가 들어가서요. 당장 써먹을 만한 방법으로는……. 이 근방 숲에서 나는 로인 잎을 차로 끓여 드시면 효과가 날겁니다. 로인 잎에 약간의 중독성이 있기는 합니다만 엄청난 양을 섭취해야 중독되는 것이니……. 하루에 차 한 잔 정도의 분량만을 드시면 부작용 없이 증상이 완화될 겁니다.”

희귀한 질병이라면서 의원은 준비해 둔 것처럼 매끄러운 답변을 내놓았다.

“잘 아는군. 쉽게 볼 수 없는 병이라면서.”

“마법에 관심이 조금 있어서요.”

레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대의 마법은 수준이 낮다. 제대로 된 마법을 행할 수 있는 자가 적으니 편법으로 조악한 마법을 정통 마법으로 대신했다. 마력을 품은 특정한 광물이나 식물을 재료로 써서 보조하면 마력이 부족한 자라도 간단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런 하급 마법사의 대부분이 의원이나 약제사였는데, 식물에 대해 비교적 많은 지식을 지닌 이들이기에 함께 공부하기도 쉬웠다.

원래 마법사의 정확한 정의는 직접 마력을 일으켜 마법을 맺고 발현할 수 있는 자를 뜻했으나 지금은 하급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들을 포함해 마법사로 통칭했다. 사실 후자도 수가 많지는 않았다. 마력이 없는 일반인이 마법을 다루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실제로 쓰는 자가 드물어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런 귀한 인력이 이런 작은 성에서 평범한 의원으로 지내고 있다니, 혹시 첩자인가? 하급 마법사가 부릴 수 있는 마법 중에는 인간의 정신에 간섭하는 종류를 포함했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으로 정신을 혼란하게 만드는 정도지, 누군가의 기억을 조작하는 수준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의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레인은 품은 생각을 감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쨌든 고맙군. 나가 봐.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고.”

레인은 의원에게 금화를 건네주고 내보낸 레인은 곧장 서고로 가서 책을 뒤졌다. 마력 과다증에 대한 설명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마법이 일상적이던 시대에서는 제법 흔한 질병이었다. 의원이 말한 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실수로 독초를 먹고 걸리기도 했지만, 다소 강제적인 방법으로 마력을 키우려던 마법사들이 가장 많이 걸렸다. 과욕을 부리던 자들이 걸리던 질병. 그리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에 불안이 스치고 갔지만, 레인은 피어오르는 서늘한 감정을 애써 외면했다.

괜한 불안이 드는 것은 병 때문이다. 레인은 곧장 창고로 가서 물자를 담당하는 병사에게 로인 차를 받아 왔다. 이걸 마시고 증상이 호전되면 조금 더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군에 보급할 정도로 대중적인 차이니 위험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병사가 추울 때 마시면 몸이 훈훈해진다며 넉넉하게 챙겨 줬을 정도다.

레인은 일단 의심을 거뒀다. 아무래도 조금 예민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 없으니, 유르딘의 부관에게라도 의원에 대해 조사해 두라고 말해 둬야겠다 싶었다. 일단 차 한 잔을 마시고 나서 생각하자.

차를 마셨다. 뜨끈한 기운이 온몸에 퍼져서 나른하다. 굉장히 지나치게, 나른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길 틈도 없이, 레인은 테이블 위에 엎어져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카이렌이 나왔다. 다정한 척 웃으며 레인을 때리고 짓밟고 강간하는 평소의 카이렌이었다. 꿈속의 레인도 얻어맞고 고통스러워하는 평소의 레인이었다. 수도에 있을 때 레인은 멀쩡한 날이 드물 정도로 거의 매일같이 아팠다. 온몸에 뜨겁게 열이 올랐고 몸을 덮은 이불마저 무거웠다. 육신이 무거워 벗어 버리고 싶었다.

카이렌은 그런 사정을 단 한 번도 봐준 적이 없다. 이불을 치워 내며 미소 지으며 입을 맞추고 레인의 다리를 벌린다. 억지로 쏟아붓는 쾌감에 레인이 신음하면 카이렌은 목을 조르거나 때렸다.

천박한 모습이 예쁘고, 잘 조이는 게 착하다고 칭찬했다.

천박한 모습이 예쁘고, 잘 조이는 게 착하다고 욕했다.

아니, 칭찬인가? 욕이다. 지독한 모욕이다. 그런 게 칭찬일 수 없었다. 욕이다. 지독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격한 증오에 휩싸인 채 카이렌에게 달려들었다. 꿈이라서 그런 건지 카이렌의 몸은 쉽게 뒤집혀 레인의 아래로 내려갔다. 꿈이라도. 꿈에서라도 카이렌을 죽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레인은 곧장 카이렌의 목을 졸랐다.

죽어 버려.

몇 번이고 필사적으로 외치며, 카이렌의 목을 졸랐다. 그러자 카이렌의 눈이 뒤집히더니 이내 거품을 물고 죽어 버렸다. 죽였다. 내가 죽였어. 죽여 버렸다고! 신이 난 레인은 신중하게 카이렌의 가슴 위에 심장을 댔다. 심장이 뛰질 않는다. 진짜로 죽었다.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다고. 난 이제 자유야.

‘그럴 리가 없잖아?’

분명히 평범한 시체였던 카이렌의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고체도 액체도 아닌 것이 레인에게 가득 스며들었다. 입도 없는 주제에 카이렌이었던 것은 끊임없이 레인의 귓가에게 악몽을 속삭였다.

‘넌 내 거야. 못 벗어나. 내가 길들였잖아? 넌 내 거야. 내 거라고. 영원히 내 것이야.’

레인은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열이 오르고 있다. 올 겨울은 무탈하게 넘어간다 싶었는데 테이블에 엎어져서 잔 탓에 기어이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라사가 앓고 있는 레인을 발견해 의원을 불렀다. 전날 본 의원이 아니라 다른 의원이 잠깐 다녀갔다.

감기였다. 원래 몸이 약한 레인은 약한 감기에도 열흘 이상씩 침대 신세를 졌다. 이번에는 훨씬 더 오래갈 것 같았다. 약을 먹고 나니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무거운 몸은 깨어 있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깨어 있는 중에도 정신이 흐려서 제대로 된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다행히 라사가 항시 레인의 곁에 머물며 그의 수발을 들었다. 정신을 차리면 라사의 도움을 받아 식사하고 약을 먹었다. 라사는 열과 성을 쏟아 레인을 살폈다. 라사가 레인의 모든 것을 살폈다. 몸을 닦아 주고 화장실에 가는 걸 도와주며 온갖 궂은일을 자청했다.

종종 레인이 아파하면 라사는 안타까워하며 꼭 끌어안아 주었다. 라사가 레인을 위로하고 다정하게 보듬어 줄 때면 모든 고민이 녹아내려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간간이 잠결에 의원이 다녀가는 소리를 들었다. 의원이 다녀가고 나면 특히나 더 어지러웠다. 약을 독한 걸 쓰는 모양이지. 레인은 의문을 길게 이어 나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다시 잠들었다.

거의 보름 가까이 앓고 나서야 레인의 열이 내렸다. 열은 내렸는데도 정신이 뚜렷하게 돌아오질 않는다. 어째서인지 열이 올랐을 때 이상으로 계속 어지러웠다. 어쩌면 너무 오래 앓았던 탓일지도 모른다. 카이렌이 빗속에서 강간했을 때나 물에 처박았을 때도 이보단 멀쩡했는데, 병 때문에 더 아픈 걸까. 어쩌면 악몽에 시달린 탓일지도 모른다.

카이렌. 줄곧 옆에 있던 유르딘이 사라지자마자 악몽이 다시 레인에게 스며들었다. 유르딘이 있던 자리에 카이렌이 있었더라면. 상상조차 싫은 가정이 너무도 자연스레 이어졌다. 카이렌이라면 도착한 첫날부터 피가 튄 마차에서 창백하게 질린 레인을 상대로 강간했을 터였다. 발터 플랑이 오는 게 아니라 직접 와서 레인을 밤새도록 안았겠지. 그 이전에,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더 시달렸겠지. 낮 동안에는 레인의 안에 구슬 따위를 넣어 두거나 약을 먹여 뒀다가 밤이 되면 신음하며 매달리는 그를 즐겁게 강간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온종일 그런 일을 당했으면 레인도 결국 좋다고 신음을 내뱉었을 텐데. 아, 너무도 끔찍한데 그쯤 되면 강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기억을 통째로 도려내고 싶다. 카이렌은 레인이 지쳐 볼품없을 때 더더욱 발정했다. 한계까지 몰아붙여져 숨이 막힌 레인이 꼴사납게 버르적거리거나 살겠다고 본능적으로 매달리는 데에 희열을 느꼈다. 죽을 것같이 괴롭다가도 카이렌이 안아 주면 레인 또한 흥분해서, 잔뜩 조르고…….

퍽. 레인은 제 머리를 벽에 처박았다. 퍽, 퍽. 조절하지 않은 격한 소리가 이어졌다. 기억 속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널 지배하는 거야, 레인.’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말.

‘넌 말을 잘 못 알아들으니까, 알기 쉽게 직접 몸에 체득시켜 줘야지. 나도 말로 하고 싶은데, 네가 말로만 해서는 안 듣잖아. 기르는 개도 너보다는 말을 잘 듣던데, 넌 개만도 못하네.’

조롱하던 목소리가 선명하다.

‘괜찮아. 상벌은 확실히 할 테니까. 잘 맞고, 잘 견디면, 박아 줄게. 넌 박히는 거 좋아하잖아.’

저는 마음대로 패는 주제에, 레인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면 화를 내던 미친 새끼. 벽에 머리를 처박던 레인의 몸이 힘없이 무너졌다. 이러다 흉이 지면 또 벌을 받는다. 레인은 카이렌을 증오했지만, 그와 별개로 카이렌을 거역할 수 없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은 함께 있었다. 어린 시절, 카이렌이 장난스레 레인의 목에 목줄을 달고 끌고 다닐 때부터 레인은 카이렌의 개였다. 개는 주인의 명을 따른다. 주인이 자해하지 말라고 명했다. 벌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게 들킨다면 분명 벌을… 아니, 그놈은 지금 여기 없잖아?

레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 한 번 죽고 싶어서 자해해 본 적이 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카이렌에게 들켜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심하게 맞았다. 아, 그 후에 강간당한 기억이 없으니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인 것 같았다. 진심으로 죽으려고 한 건 아니었기에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카이렌이 너무도 심하게 화를 내서, 이후에는 레인이 조금만 오래 칼에 눈길을 주기만 해도 끔찍하게 때려서 자해할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카이렌은 여기에 없었다. 그 빌어먹을 새끼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짓을 해도, 말릴 방법이 없었다. 엿이나 먹으라지. 일탈하는 해방감에 설렌 레인은 정신없이 칼을 찾았다. 짐을 뒤집고 마구 헤집었으나 칼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작은 단검 하나조차 없었다. 끔찍했다. 이 몸을 후벼 팔 단검조차 없다니.

실망한 레인은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끔찍한 상황이었다. 누군가가 어서 칼을 가져다줬으면 했다. 도와줄 사람이 누가 있지?

유르딘. 그래, 레인에게는 유르딘이 있었다. 유르딘이 도와줄 거야. 어서 와 줘. 날 죽여, 아니 살려 줘. 당신이 날 언제나 살렸잖아. 죽을 것 같아. 어떻게 좀 해 줘. 그러나 유르딘은 곁에 없었다. 사실, 그는 레인이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유르딘, 유르딘이 보고 싶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유르딘은 아니었다. 레인은 눈물 젖은 눈을 깜박이며 상대를 불렀다.

“라사?”

“레인 님.”

라사의 부드러운 손길이 레인의 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레인은 고통에 일그러진 눈으로 라사를 응시했다. 입에서는 제대로 된 말 대신 형태가 없는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가여우시게도……. 이제 괜찮아요. 곧 편해지실 거예요.”

부드럽게 속삭이며 라사가 레인에게 잔을 건넸다. 로인 차의 향이다. 북쪽에 오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마셔 본 적 없는 차인데 어째서인지 몹시 익숙했다. 뿌연 시야 속에서 내밀어진 잔을 붙잡았다. 따스한 향을 들이켜고 그대로 홀린 듯이 입안에 쏟아부었다. 원래 마시던 것보다 맛이 진해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라사는 끝까지 차를 먹였다. 한 잔을 모두 비우니 순식간에 정신이 흐려졌다. 균형을 잃은 몸이 자꾸만 고꾸라진다.

라사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레인의 소매를 걷고 주사기로 무언가 약을 놓았다. 뭔가 불길했다.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최대한 움직여 고개를 저었지만, 라사는 레인의 얼굴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약물은 천천히 레인의 몸 안에 파멸을 선고하듯 내리꽂혔다. 파멸은 달콤하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익숙한 기분이었다. 아팠던 내내 라사가 안아 주면 이렇게 기분이 좋았으니까. 그 기분이 약물 때문이었나? 언제나 다정하던 라사의 눈이 조금 차가워 보여 위화감이 들었다. 생각… 생각을, 해야 하는데.

약 기운이 몸 전체에 돌았다.

레인의 생각은 거센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맥없이 허물어지고 휩쓸렸다. 꿈과 현실이 뒤섞여 제멋대로 부유했다. 꿈속에서 어머니가 죽었고, 때로는 레인이 클 때까지 살아 있었고, 주변에 있던 모두 죽어 혼자 남아 레인 홀로 버티다가 강간당했고, 때로는 아무런 불행조차 모르는 채 자랐고, 경멸당했고, 때로는 사랑받다가 배신당했다. 망상 속에서조차 레인은 행복을 붙잡을 수 없었다.

누군가 악몽에 시달리는 레인을 부르며 어깨를 흔들었다. 레인은 느릿하게 눈을 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초점이 잘 맞지 않는다. 유르딘. 유르딘을 보고 싶은데……. 눈앞의 상대가 유르딘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서서히 흔들리던 상이 또렷하게 맺힌다.

그제야 유르딘이 보였다. 얼마 만의 유르딘인지, 너무 반가워서 끌어안고 싶었다. 손을 휘저어 상대를 붙잡으려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이상하게 오늘의 ‘유르딘’은 다정하지 않았다. 레인을 사랑해 주지는 않을지언정,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한 유르딘인데. 오늘의 ‘유르딘’은 아이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다정하게 어깨나 다리를 주물러 주지도, 말을 걸지도 않는다.

왜? 순간 의아해했지만, 답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금방 나왔다. 애초에 혼자만 사랑할 뿐인 관계였다. 어느 순간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유르딘의 다정함이 식는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레인의 삶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은 너무나 많았기에 포기는 익숙했다.

익숙했지만, 사실은 언제나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레인도 욕망하며 소망하는 인간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는데 단 하나의 소중한 것마저 잡을 수 없는 걸까? 그리 생각하니 서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서러움에 울고 있자니, ‘유르딘’이 손을 뻗어 레인을 매만졌다. 노골적인 의도가 느껴지는 ‘유르딘’의 끈적한 손길에 레인이 웃었다.

당신도 원해요? 나도 당신을 원하고 있어요. 유르딘. ‘유르딘’. 당신을 안고 싶어요. 당신에게 안기고 싶어요.

‘유르딘’의 손이 레인의 몸을 더듬었다. 레인은 유르딘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단단한 손이 맞는데, 이상하게 피부에 닿는 감촉은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얇고 주름져 있었다. 제정신이라면 유르딘이 아님을 쉽게 알았겠지만, 레인은 정상이 아니었다. 푸른 눈이 이지를 잃고 잔뜩 흐려져 있다.

“조금 더 벌려서 잡고 있어 봐.”

‘유르딘’이 명령했다. 레인은 그저 ‘유르딘’의 의도에 따라 착실히 다리를 벌렸다. 사실 아파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지만, 유르딘이 원한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언제든지 몸을 내줄 수 있었다. 훅 더운 숨이 얼굴 위로 끼치는가 싶더니, ‘유르딘’이 입을 맞춰 왔다. 담배 냄새가 가득한 입맞춤은 이상하게도 조금 불쾌했다. 불쾌하다니, 안 돼. 유르딘인데. 이 사람이 사랑하는 나의 유르딘인데. 위화감이 느껴졌다. ‘유르딘’, 당신은 유르딘이 맞지요? 불안감에 레인은 손을 뻗어 ‘유르딘’의 목을 끌어안았다. 비웃는 듯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 비웃지 말아요. 사랑해 주세요. 당신만은 나를 사랑해 줘요. 증오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경멸하지 말고……. 그저 동정에 기인한 감정이라도 좋으니까 미워하지 마요. 레인은 필사적으로 입을 맞췄다. 그제야 ‘유르딘’은 레인을 칭찬하며 머리며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버석버석한 손가락이 레인의 가슴과 배, 성기를 쓸어내리고는 이내 구멍을 지분거렸다. 손가락을 두어 개 억지로 쑤셔 넣어 몇 번 앞뒤로 움직이던 ‘유르딘’은 흥분한 숨을 내뱉으며 손가락을 빼고 성기를 들이밀었다. 들어갈 리가 없다. 그러나 이내 몸을 가르는 끔찍한 통증이 이어졌다.

“아, 아악! 아, 흐윽, 흐…….”

너무나도 아팠다. 빌어먹게도 아팠지만 유르딘이라면 참을 수 있었다. 유르딘이라면 참을 수…….

“…아, 아. 아아. 아, 아…….”

참을 수, 있었다. 너무나도 괴롭지만 참아야 했다. 사랑받고 싶어. 유르딘이 마음껏 사랑해 줬으면 했다. 레인의 몸을 얼마든지 편한 대로 사용해도 괜찮으니까, 작은 관심과 애정이라도 계속 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오늘의 ‘유르딘’은 뭔가 부족했다. 상대의 몸과 틈새 없이 꽉 맞닿은 체온은 뜨거운데 왜 이렇게 춥고 외로운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왜 그랬지?”

‘유르딘’이 레인의 허벅지 안쪽에 난 화상 상처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고통 속에서 눈물이 흘렀다. 왜 이렇게 무심한 질문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화가 치밀었다. 대답하지 않고 엉엉 울자 유르딘의 허리 짓이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성기가 자꾸 아픈 곳만을 무식하게 찔러 토할 것 같았다. 한참을 울다가 레인은 의식을 잃었다.

다시 잠이 든 레인은 가장 끔찍한 날의 꿈을 꿨다.

레인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얼마 전, 카이렌은 제 영지로 떠나기 전에 레인을 찾아왔다. 그는 다짜고짜 레인을 비어 있는 모드가의 저택으로 끌고 갔다. 카이렌이 레인을 저택에 끌어들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레인은 불길함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놈에게 굴종하지 않고 버텨 내겠다는 나름의 각오를 하고 갔지만, 그곳에서 카이렌이 준비하고 있던 일은 레인의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숨 막히는 지하실 안에 시뻘건 화로가 타오르고 있었다. 화로에 반쯤 꽂혀 새빨갛게 달궈진 낙인은 무시하려 해도 눈에 띄었다. 낙인이 사용되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더 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않고 가축이나 재산으로서 부리는 노예제가 남아 있던 시절의 유물이었다.

카이렌은 느릿하게 낙인을 불 속에서 잡아 뺐다. 모드 가문의 인장을 몸에 남기는 낙인이었다. 낙인을 든 채 카이렌은 레인을 살피고 가늠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정장으로 무장한 카이렌과 달리 레인은 지하실에 끌려 들어오자마자 낯선 사내들에 의해 옷이 벗겨진 채였다. 두 사람의 차이는 복장에서부터 극명하게 나타났다.

이미 노예나 다를 바 없는 처우를 받고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레인은 귀족이었다. 귀족으로서의 자긍심이랄 게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레인은 귀족이었다. 아니, 귀족이기 이전에 사람이었다. 사람이라면 사람에게 이럴 수는 없다.

“사랑스러운 레인.”

사랑이라니. 이런 끔찍한 감정이 사랑일 리 없다. 강간하고, 때리고, 제 소유물로 낙인찍는 강압과 폭력이 사랑일 리가 없었다. 감히 사랑 따위를 입에 올리는 가증스러운 놈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싶었다.

“나의 레인.”

레인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카이렌이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물건 따위가 아니었다. 죽은 듯이 납작 엎드려 살았다고 해도, 레인은 살아 있었다. 살아서 의지를 갖고 카이렌을 증오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카이렌의 눈동자에 진득하게 들어찬 감정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강렬한 집착과 애정이었다. 증오스러운 감정들. 어린 시절, 레인을 개 취급 하며 저택이며 정원을 돌아다니던 때부터 지금 이 순간, 아카데미에서 거의 매일같이 안은 것으로도 모자라 레인의 몸에 낙인을 남기려 하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변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레인이 저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해도, 카이렌이 제멋대로 휘두르면 언제나 꺾이는 건 레인이었다. 항상 그랬고, 이번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레인이 비척거리며 카이렌에게 다가가 무릎 꿇은 채 애원하듯 무릎에 뺨을 비볐다. 비굴한 개처럼 굴종하며 카이렌에게 사정했다.

“카이렌, 제발……. 이러지 마. 부탁이야. 이건, 이건 아니잖아.”

“뭐가 아니야? 내 것에, 내 것이라는 징표를 찍는 건데.”

“…나는.”

나는 네 소유물이 아니야.

울컥해서 나온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가는 카이렌이 당장에라도 낙인을 지질 것 같아서 레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카이렌이 몸을 숙여 레인과 시선을 맞췄다. 시체처럼 딱딱하게 굳은 레인의 뺨을 사랑스럽단 듯이 단단한 손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것 봐. 지금도 대답 못 하고, 계속 반항하고. 당분간 내가 네 곁에 많이 못 있어 줄 텐데 내가 없는 사이에 네가 아무한테도 꼬리 치고 다니면 어떡해?”

“안 쳐. 그럴 리가 없잖아. 난 네게만 안길 거야. 다른 사람이랑 하는 건 정말 싫어……. 카이렌, 제발.”

카이렌이 이 거짓말을 믿으리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레인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카이렌은 맹목적인 말을 내뱉을 때 가장 너그러웠다. 그저 마음이 동해서 그만두면 성공이었고, 최소한 미루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레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애원하는 레인을 본 카이렌의 눈에 깃든 것은 가학심이었다.

“그럼 시험해 볼까? 정말 다른 사람과 하는 게 싫다면 느끼지도 않겠지.”

카이렌이 눈짓하자 주변에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사내들이 성큼 다가왔다. 레인은 욕망에 가득 찬 얼굴들을 죽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모르는 얼굴들이다. 카이렌이 평소에 쓰는 하인이 아니라 오늘만을 위해서 고용한 뜨내기들이었다. 제 고용주가 무슨 생각을 가지도 있는지도 모르는 얼간이들.

“내게 보여 줘, 레인.”

“하하…….”

레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애초에 작정하고 일을 벌이려던 게 틀림없다. 포기한 채 고개를 숙이자 손 여럿이 튀어나와 레인을 성급하게 만지고 주물렀다. 레인은 흐릿한 눈으로 카이렌을 노려보았다. 소유욕과 집착이 뒤섞인 끔찍한 얼굴이 이쪽을 바라보며 즐기고 있다. 레인의 비극도, 슬픔도, 카이렌에게는 유흥이었다. 물론 카이렌은 레인이 남의 손을 타는 것을 끔찍하게 증오하는 인간이었으나, 유흥에 사용한 일회용 도구 따위에 질투하는 인간은 없다.

그날 레인은 윤간당한 후 낙인이 찍히고, 또다시 카이렌에게 엉망진창으로 강간당했다. 또한, 모드가에 들어갔던 네 사람의 신원은 행방불명으로 처리됐다.

“더러워.”

그날, 레인을 안던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정말로 그랬다. 더럽고 역겨웠다. 역겨워서……. 이런 주제에 차마 유르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모두 다 죽여 버리고 싶지 않아?”

새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누구의 목소리지? 처음 듣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익숙한 목소리다. 아주 오래전부터 들어 온 목소리. 하지만 레인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도통 구별할 수가 없었다.

“모두 다 죽여 버리고 싶지?”

모두 다 죽여 버리고 싶었던가? 이 세상에 쓰레기가 너무도 많았다. 죽이고 싶은 사람은 넘쳐흐른다. 하지만 생각은 극단으로 흘러가기 전에 자꾸만 알아서 멈춰 선다.

“세상이 밉잖아.”

부추기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세상이 밉지만, 그는 세상을 증오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다. 사랑하는 유르딘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유르딘이 보고 싶었다.

“멍청이. 쉬운 길을 돌아서 가는군.”

그리고 레인은 아주 기나긴 꿈에서 깨어났다.

정신이 들었을 때, 레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몸이 자꾸만 축축 늘어지고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간단한 동작마저 쉽지 않아서 레인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끊임없이 밀려온다. 귀에 제대로 들어오는 말은 하나도 없었지만, 레인은 그들이 자신을 모욕하고 깎아내리며 경멸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높고 낮은 말들이 제각기 사방에서 검고 차가운 파도처럼 닥쳐와 레인의 몸에 증오와 경멸의 물거품을 남기며 부서지고 물러난다.

익숙한 일이다.

지난 15년, 경멸은 레인을 늘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늘 겪던 일이니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파도가 아무리 거세게 밀려와도 결국에는 바다로 돌아간다. 구름이 껴서 잠시 그늘이 진다고 짜증을 낼지언정 진지하게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이치다. 레인은 그 지긋지긋하고 익숙한 것들이 자신을 마음대로 휘젓다가 결국에 제자리로 돌아가거나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수많은 경멸이 레인의 뒤를 따랐지만, 그중에 진득하게 깊이 있는 감정은 몇 없었다. 레인을 진심으로 미워하는 자는 공작 부인인 아나벨, 그리고 레스터 정도뿐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그저 다들 남들이 경멸하니까, 죄인의 자식이라고 말하니까, 아이제나흐가 버린 아이니까, 남들을 따라서 관성적으로 레인을 미워했다. 가벼운 경멸 따위에 상처 받지 않는다. 지레 겁먹을 필요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은 그저 새삼 상처받을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레인.”

쏟아지는 말을 자장가 삼아 잠들려던 레인의 정신이 번쩍 뜨였다. 꿈에서조차 그리던 유르딘의 목소리였다.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뛴다. 레인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으나, 이상하게도 유르딘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세상이 온통 뭉그러져 보였다. 모든 게 가만있지 않고 정신없이 흔들린다.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유르딘.”

“마약을 했나?”

“유르딘?”

유르딘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전히 생각이 정리되질 않았다. 혀가 꼬여 수없이 부른 이름조차 어눌한 발음으로 튀어나왔을 뿐이다. 사방에서 경멸이 쏟아진다. 언제나 그렇듯이, 레인은 경멸받아 마땅한 인간이었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유르딘 또한 사람일 뿐인데, 왜 레인에게 다정하게 대한단 말인가? 모두가 레인을 경멸한다. 모두가 돌을 던진다. 그렇다면 유르딘 또한 레인을 증오하고 경멸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가?

조각조각 난 이성이 얼기설기 기운 결론을 내린다. 레인은 웃었다. 사리에 맞다 하더라도 미움받고 싶지 않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리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웃기 시작하자 주변의 소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게 잦아들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필사적인 감정만이 차올라 레인은 울듯이 웃었다. 반복해서 눈을 깜박이자 색이 뭉그러지던 시야가 순간이나마 또렷하게 돌아온다.

그리고 눈앞에 선 유르딘의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평소처럼 다정한 표정이 아니라 몹시 괴로운 기색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그가 레인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이 입술을 달싹이던 유르딘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게 입을 닫았다.

그리고 그대로 유르딘이 몸을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듣지 않은 채 등을 돌렸다. 주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사실만은 이해했다.

레인은 유르딘에게 버려졌다.

버려졌다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충격 때문인지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상황이 조금 더 명확하게 눈에 들어온다. 사방에 성난 얼굴의 기사들이 서 있었다. 기사들은 유르딘이 나가자마자 거친 손길로 레인을 침대 아래로 끌어 내렸다. 내려오다가 무언가에 걸려 레인은 넘어졌다. 돌아보니 피를 토하고 죽은 노인의 시체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피로 범벅된 시체는 몹시 기묘한 몰골이었다. 바지와 속옷을 반쯤 내리고 죽은 노인의 성기가 정액으로 번들거렸다. 역겨운 모습이라고 생각하다가, 레인은 자신도 옷을 제대로 입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혀를 차고 레인의 몸을 시트로 말아 둘러멨다. 레인은 그대로 성난 사람들에게 붙잡혀 감옥으로 끌려갔다. 쳐 죽일 놈, 반역자의 핏줄, 더러운 창부 따위의 모욕이 쏟아졌지만, 레인은 왜 갑작스레 그런 모욕이 쏟아지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인으로서는 그저 긴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이다.

차디찬 지하 감옥에 내던져진 레인은 시간이 조금 지나자마자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은 격통에 시달렸다. 온몸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아픈 것이야 병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복해서 뒤틀려 죽어 가는 어머니의 환상을 보거나,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카이렌의 환상을 보거나, 물을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채워지지 않고 목이 타는 것처럼 아픈 증상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의원이 와서 아파하는 레인을 한참 살피더니 처방할 수 있는 게 진통제뿐이라며 버텨 보라는 개소리를 하고는 그냥 가 버렸다. 레인은 온갖 의문 속에서 끔찍한 하룻밤을 보냈다.

마침내 레인이 사정을 알 수 있었던 것은 하룻밤이 지났을 때였다. 감옥으로 지스킬이 찾아왔다. 그는 창살을 붙든 채 필사적인 얼굴로 속삭였다.

“난 널 믿어. 네가 그런 게 아니란 것을 믿어. 뭔가 음모가 분명해. 그렇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무슨 소리냐고 묻는 레인에게 지스킬이 힘겹게 설명했다.

성 한쪽이 무너지는 커다란 폭발이 있었다. 설계가 견고했던 덕에 성 전체가 무너지진 않았지만, 엄청난 폭발에 화재가 번져 백 명에 가까운 기사와 병사들이 그대로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심한 화상으로 신음하는 이들 또한 수백이었다. 생사가 오락가락한 자들도 있으니 사망자는 더 늘어날 터였다. 분명 누군가의 고의적인 공작이었다.

사건을 조사한 끝에, 마침내 범인을 잡았다. 범인은 지독한 고문 끝에 배후를 실토했다. 범인이 지목한 배후는 레인 아이제나흐였다. 자신이 관리하는 마법 도구의 일부를 쉽게 폭발하는 불량품으로 바꿔치기한 다음에 창고에 불을 지르도록 지시해 커다란 화재를 일으켰다.

범인은 레인이 범행을 저지른 배경까지 모조리 자백했다.

레인 아이제나흐는 베델 후작가의 일로 원한을 품고 왕국에 복수하기를 원했다. 레인은 성에서 쫓겨난 발터 플랑과 결탁해 그를 통해 외부와 접선했다. 접선한 외부의 세력과 마법 도구를 비밀리에 반입할 계획을 세웠으나 발터가 중간에 겁에 질려 발을 빼려 하자, 독을 먹여 발터를 살해하고 시신을 산에 버리도록 했다. 불쌍한 발터 플랑은 뼈와 옷가지 일부만이 돌아왔다.

그러는 한편 레인은 천박한 버릇을 고치지 못해 자신과 협력하는 의원을 유혹해 몸을 섞었다. 계획이 성공 단계라고 자만하며 마약에 취해 축배를 들었다. 약 또한 같은 의원이 제공했다. 어제 죽어 나자빠져 있던 노인이 바로 그 의원이었다. 의원에 대한 사실은 지금까지 레인 아이제나흐에게 협박당해 협력하던 라사가 증언했다.

모든 설명을 마친 지스킬이 곧장 제 말들을 부인하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 애초에 네가 왜 발터와…….”

레인은 지스킬의 말에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꿈이 떠올랐다. 아팠던 내내 제대로 의식이 없었다. 그사이에 누군가가 함부로 레인에게 약을 먹인 걸까? 하지만 의식 불명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레인이 발터와 결탁한 증거가 나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가 이어졌는데, 어떻게?

아니, 그 의원은 마법 도구를 다뤘으며 희귀한 마법 질병에 대해 책도 보지 않고 설명을 읊을 수 있는 마법사였다. 로인 차를 처음 마시기 전만 해도 레인은 그를 의심했었다. 그자가 마법사라면, 레인에게 약을 주사하던 라사와 한패라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다. 정교한 조작은 불가능하지만, 의식이 제대로 없는 레인에게 서명을 남기게 해 증거를 조작하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기사들이 찾은 증거는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제 모두 끝났다. 유르딘은 모든 증거를 믿고 레인에게 실망해 감옥으로 보냈다. 총사령관인 유르딘이 레인을 죄인으로 인정한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 그리고 유르딘에게 버림받은 이상, 레인의 세계 또한 막을 내렸다. 저항할 의지가 꺾여 절망만이 남는다.

지스킬이 뭐라 계속 말을 걸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인은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약의 금단 증상 때문인지 계속 괴로웠지만, 차라리 그 고통이 기꺼웠다. 절망스러운 생각이 이어지느니 차라리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되기를 바랐다.

지스킬이 보낸 것인지, 싸늘한 지하 감옥 안으로 두꺼운 이불과 푸짐한 식사가 때마다 들어왔다. 추위에 벌벌 떨며 이불은 기꺼이 뒤집어썼지만 식사만은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몸이 음식을 받지 않는다. 먹은 것을 죄다 토한 레인을 본 간수가 욕을 하며 오물을 치웠다. 한동안 듣지 않던 욕설들이다. 레인은 절망 속에서 고개를 저었다. 증오와 경멸 섞인 말은 익숙하니까 아무렇지도 않았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해프닝일 뿐이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다.

아니.

버틸 이유가 남지 않은 지금에 와서는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사실은 괴로웠다. 순간마다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증오와 경멸과 혐오와 같은 그 모든 음습한 감정들은 익숙해질 수 있는 성질의 감정들이 아니었다. 거센 해일처럼 밀려와 모든 것을 부수고 집어삼키는 재해였다. 늘 레인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싹조차 움트게 하지 않는 어둠이다. 그런 절망이다. 파멸로 내달리는 참혹함이다. 레인을 휘젓고 깎아내려 닳아 사라지게 하는 칼날이다.

괴로워. 아파. 듣고 싶지 않아. 싫어. 익숙해진 적 따위 한 번도 없었다. 익숙한 척 자신마저 속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마저 속였을 뿐이다. 아무렇지 않다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면 레인은 단 하루도 멀쩡하게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늘 끔찍했고, 죽어 버리고 싶었다. 레인의 세계에는 죄다 살인자뿐이었다. 별다른 악의 없이 뻗는 손가락질이 살인자의 칼날처럼 레인을 찌르는지도 모르는, 최저 최악의 살인자만이 레인이 있는 세상에 가득했다. 레인에게 평범한 일상 따위는 없었다. 모조리 악몽이었다. 모든 시간이 지옥의 형벌이었다.

모두가 싫었다. 공작이나 카이렌, 레스터는 물론이고 제가 그리워하던 것들마저도 사실은 조금씩 다 싫었다. 베델가의 피를 이은 것이 싫었다. 멍청하게 거꾸러진 외가가 싫었다. 모든 증오의 시발점이 된 어머니가 싫었다. 살지 못하고 죽을 결심을 한 어머니가 싫었다. 레인을 죽이려 한 어머니가 싫었다. 결국, 제대로 죽이지도 못하고 혼자 죽어 버린 어머니가 싫었다. 자신을 이 세상에 혼자 남겨 두고 간 어머니가 미웠다.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왜 나를 함께 데려가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유르딘 또한 미웠다. 어머니와 레인을 떼어 놓고 괜히 레인을 살려서 살아가게 만든 유르딘이, 편지를 보내서 삶의 마침표를 치워 버린 유르딘이, 제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게 한 유르딘이, 결국 자신을 버린 유르딘이…….

“으……. 끅, 흐윽……. 우으윽…….”

싫어야 하는데, 여전히 싫지 않았다.

사랑했다. 애정을 버리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나도 어리석게 느껴졌으나, 어리석음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미련하고 질척한 애정이 여전히 남아 유르딘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유르딘에게 버림받은 것이, 유르딘이 사랑해 주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등을 돌려도 유르딘이 레인을 사랑해 준다면, 사랑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외면만 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는데.

단 하나뿐인 소망은 참혹하게 버려졌고, 남은 것은 지하 감옥에서 초라하게 죽어 가는 죄인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할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육체적인 고통이 괴로운 사고를 덮었다. 매 순간 괴로웠고 매 순간 죽을 것 같았다. 끔찍하게 괴로운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레인은 차가운 감옥 안에 덩그러니 놓인 이불 속에 틀어박힌 채 홀로 죽어 갔다. 얼마나 아파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죽여 줬으면.

어마어마하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일주일, 한 달, 혹은 그 이상이 지났을지도 모르겠다. 그 긴 시간 동안 욕을 하는 간수 외에는 아무도 레인을 찾지 않았다.

그러다가 피를 토했다. 기침에 섞여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온몸의 피를 다 쏟아 내듯 어마어마한 피가 빠져나왔다. 또 토하는 줄 알고 욕을 하던 간수가 혼비백산해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레인은 노곤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피곤하고 지쳤지만, 더 이상 괴롭지는 않았다. 바라 마지않는 순간이 왔음을 레인은 깨달았다.

레인 아이제나흐의 인생은 이제 곧 끝난다.

레인, 아이제나흐.

이름 두 자 외에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그 이름조차 곧 잊힐 만한 한심한 인생이었다. 레인은 천천히 죽어 가는 머리로 자신의 일생을 단정 지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한심한 삶에서도 단 하나의 미련이 있다면 기억 속에 짓눌려 박제된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결국, 레인에게 실망하고 배신당했다고 믿으며 등을 돌린 그의 뒷모습이 힘겨웠던 자신의 인생보다도 더 무겁게 마지막 남은 숨을 짓눌러 왔다. 그의 등을 돌려, 자신을 다정하게 봐 주는 눈을 마주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다시 한번만 자상하게 제 이름을 불러 주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지쳤어…….”

가당찮은 소망이었다. 삶의 끝자락에 와서는 레인의 생명과 함께 사그라지는 보잘것없는 소망이기도 했다. 피가 섞인 숨을 내뱉으며 레인은 한스럽게 중얼거렸다. 애초에 제가 괜한 욕심을 부려서 최악의 결과를 만들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지 말자. 꿈도 소망도 하늘에 뜬 별처럼 레인에게는 잡히지 않는 허상일 뿐이다.

마침내 레인은 미련을 접었다. 영원히 빛날 듯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 있는 남자의 모습을 천천히 지웠다. 점점 저물어 가는 의식 속에서 찌꺼기 같은 미련이 가라앉았다. 그래. 더는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태어나서 그저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애초에 저는 태어나서는 안 되는 목숨이었다. 제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분명 기뻐하겠지.

멀리서 낯익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레인은 더는 귀를 기울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죽음에 더없이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두 번의 밤을 건너다 1부 마침

2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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