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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약속 (11/20)

5.5 약속

슈리아 아이제나흐는 간만에 자신의 손님 맞을 준비를 했다. 손님을 맞는다고 해도 크게 특별할 건 없었다. 평소와 똑같이 드레스를 차려입고 가볍게 장신구를 달고 시계를 보는 것으로 슈리아의 준비는 끝난다. 나머지는 슈리아를 모시는 하녀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어릴 적의 슈리아는 탑에 갇혀서 자신을 구하러 올 기사를 기다리는 공주님이 아니라, 검을 들고 용을 무찌르는 기사님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 슈리아는 몹시 날렵했다. 예닐곱 살에 저택 2층 높이의 나무를 자유롭게 올랐고 아홉 살에는 자신보다 서너 살 많은 사내아이들을 목검으로 모조리 꺾어 두었다. 차라리 갑갑한 라인셀을 떠나 카니예로 가서 여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사이가 지극히 나쁜 타국의 왕실에 충성하는 기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라 포기했다.

이상적인 귀족가 영애로 자라나 완벽한 귀족가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슈리아는 가끔 자신의 다른 미래를 상상했다. 상상 속 슈리아는 아이제나흐 공작 부인이 아니라 이름을 날리는 기사 슈리아 베델이다. 그러나 슈리아가 원하는 이야기의 주연이 될 기회는 끝이 났다. 딜란 아이제나흐의 아내로, 레인 아이제나흐의 어머니로 기억될 삶이다. 바라던 삶은 아니지만 슈리아는 나름 만족했다. 딜란은 자상한 남편이었다. 그리고 레인, 사랑하는 레인은 완벽한 아들이었다. 그 아이를 낳고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며 슈리아는 수많은 위안을 받았다. 자신을 쏙 빼닮았으나, 그보다 훨씬 더 사랑스러운 것들로 이루어진 아이였다. 밝고 쾌활한 성격의 레인이 활짝 웃을 때면 슈리아의 입가에도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멀리서 까르르 아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슈리아는 창문을 열고 아래 자리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꽃이 만개한 정원에는 네 살 난 아들 레인과 제 남편 딜란이 함께 놀고 있었다. 현 공작의 몸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그가 하던 일이 딜란에게 넘어오기 시작해 피곤할 텐데도 딜란은 레인과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지 않았다. 레인이 소리를 내며 딜란에게 달려들자, 그는 엄살을 부리며 주저앉았다. 쓰러지는 시늉을 하는 딜란을 보고 레인이 놀라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니 그가 갑자기 왁 소리를 내며 일어나 레인을 꽉 끌어안았다. 말랑한 뺨에 얼굴을 비비자 레인이 발버둥을 쳤지만 딜란은 놓아주질 않았다.

“나 참, 저렇게 놀아 주지 마시라니까.”

슈리아가 짧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님이 오면 레인을 소개해 주고 싶었기에, 슬슬 딜란도 일을 하러 가라고 하고 레인은 옷을 갈아입힐 작정이었다. 저택을 나서 정원으로 향하던 슈리아는 정원 입구의 나무 뒤에 숨어 딜란과 레인 두 사람을 몰래 살펴보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레스터였다. 레스터는 뺨을 발그레하게 붉힌 채 두 사람을, 정확히는 레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레스터의 모습을 목격한 건 처음이 아니었다.

“아니, 저 천것이 또…….”

뒤에서 라사가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슈리아가 제지하려 했지만, 레스터가 이쪽을 발견하는 쪽이 빨랐다. 얼굴이 희게 질린 레스터는 반대쪽으로 도망가 버렸다.

“너무 그러지 마. 어린애잖아.”

“아나벨이 별채에서 뭐라고 떠드는지 아시잖아요? 얼쩡거리지 못하게 해야 돼요. 흠씬 두들겨 패거나…….”

“안 돼. 그래도 하지 마.”

레인은 레스터의 존재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 아이제나흐 공작이 아나벨과 레스터의 존재를 혐오했기 때문에 공작이 정정하던 시절에 두 사람은 별채 밖으로 나와 보지도 오지 못했다. 아나벨은 비교적 신분이 천하고 가진 게 없어 공작가의 저택에서 쫓아내면 갈 곳이 없었다. 어차피 사생아는 가문을 이을 수 없다지만, 멀쩡히 아내가 있는데 정부와 사생아를 저택에 두는 건 일반적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화를 내도 슈리아는 말없이 아나벨을 감내하기로 마음먹었다. 슈리아가 보기에 기본적으로 아이에게 다정한 성품인 딜란이니, 제 아이나 그 어머니를 쫓아내지 못하고 별채에 두는 건 당연하게 느껴졌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가끔은 질투도 나고 화가 났다. 그러나 ‘투기하지 말라’. 왕국은 여성에게 많은 걸 강요한다. 검을 잡은 여자를 바라지 않듯이, 질투하는 여자 또한 왕국은 환영하지 않는다. 슈리아는 자신을 억눌렀다.

화를 낼 자격을 가진 건 당사자가 아닌 그녀의 아버지였다. 아나벨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라는 의원의 말을 믿고 결혼을 마지막까지 성사시킨 베델 후작은 아들인 레스터가 태어나자 노발대발했었다. 아이제나흐 공작 또한 아나벨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인 줄 알고 호언장담했던지라 당시에 혼인 관계를 맺고도 두 가문 사이가 몹시 나빠질 뻔했다. 다행히 슈리아가 아들을 낳아 불편한 공기는 일단락됐지만, 공작은 불화의 싹이었던 레스터를 특히나 끔찍하게 여겼다.

정식 후계자인 레인에게 피가 반 섞인 사생아 따위를 형제라고 들이밀 필요 없다는 게 공작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아이제나흐 공작가에 살며 레인을 모를 수는 없었기에 레스터는 레인에 대해 잘 알았다. 이번처럼 훔쳐보는 일도 몇 번이나 있었다. 공작이 알게 되면 분명 크게 화를 낼 텐데. 주의를 줘야 하나, 아니면 형제를 보러 오는 것뿐인데 놔둬야 하나 고민하며 한숨을 쉬는데 딜란이 레인을 안고 다가왔다.

“슈리아.”

“엄마!”

레인이 딜란의 품에서 바둥대다가 딜란의 품에서 폴짝 뛰어 내려와 슈리아의 드레스에 얼굴을 묻으며 끌어안았다.

“레인, 똑바로 서야지.”

“아직 어린데 천천히 배워도 괜찮아.”

“당신이 무르니 저라도 엄해야지요.”

슈리아가 웃으며 답하자 딜란은 고개 숙여 슈리아의 뺨에 입을 맞췄다. 레인이 눈치 없이 끼어들었다.

“나도. 나도 할래.”

“그래, 그래.”

딜란은 레인을 안아 들고 한쪽 뺨에 입을 맞췄다.

“당신도 참.”

슈리아는 핀잔하면서도 레인의 반대쪽 뺨에 입을 맞췄다. 곧 딜란이 일을 하러 가고, 슈리아는 레인의 한 손을 잡았다. 그러나 정원을 지나 저택으로 들어가는 길부터 레인은 졸기 시작했다. 결국, 레인은 시종의 등에 업힌 채 계단 위로 올라갔다. 씻기려고 했는데 계단을 오를 때부터 꾸벅꾸벅 졸던 레인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잠이 들어 버렸다.

“어머, 오늘은 빨리 자네.”

“꽤 일찍부터 주인님과 뛰어노셨으니까요. 지금 깨우시면 잠투정이 심하실 텐데…….”

“으응, 그럼 됐어. 재워 둬. 대신 일어나면 말해 줘. 아이를 보여 주고 싶으니까.”

레인의 방을 나오던 슈리아는 드레스 자락에 레인이 흙을 묻힌 걸 발견했다. 손으로 털어도 완전히 지워지질 않는다. 손님이 오니 갈아입는 게 당연하겠지만……. 오늘 올 손님을 생각해 볼 때 굳이 갈아입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때마침 손님이 도착했다는 전갈을 들어 슈리아는 손님을 초대한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 한복판에서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반 뼘은 더 커진 듯한 소년을 발견했다. 차양이 만든 그늘에서도 소년은 화사하게 빛난다. 이제 열다섯 살, 빛나는 게 당연한 나이다. 그는 태양과도 같은 소년인 동시에 슈리아의 소중한 유년의 추억이었다. 슈리아가 있는 쪽을 돌아본 소년이 활짝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에요, 니제스 군. 이제 니제스 경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사로 호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제 견습이나마 기사 작위를 받아서요.”

유르딘이 자신만만하게 씩 웃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슈리아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처음 봤을 때는 슈리아의 반 토막만 한 어린아이였는데, 어느새 슈리아보다도 더 커 버렸다. 아직 성장기임을 고려할 때 제법 장신인 딜란보다도 더 커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사를 나눈 슈리아는 주변의 사용인들을 물리고 자리에 앉았다. 물렸다고는 해도 시야에 들어올 정도의 거리에 있었으나 이성 간에 둘만 만날 수 있는 것도 딜란의 파격적인 배려이긴 했다. 남들에게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슈리아는 마음 편하게 웃었다. 자연스레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나온다.

“유르딘 꼬맹이, 제법 컸다고 기사 흉내나 내고 말이야.”

“참 나, 흉내라니. 난 이제 진짜 기사라고.”

“견습은 어디다 떼어 먹었니? 사고 쳐서 쫓겨나지만 말렴. 기억나? 너 어릴 적에 멧돼지 잡겠다고 뛰쳐나갔다가…….”

“그 이야기 좀 그만해, 그건 열 살 때라고!”

슈리아가 깔깔 웃었다. 열 살 때 유르딘은 멧돼지를 잡겠다며 산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밤을 꼬박 지새우고도 발견되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유르딘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나 그는 정말로 멧돼지를 잡았다. 지형지물을 이용했으니 온전히 검술로 잡은 건 아니었으나 성인도 잡기 힘든 걸 당당히 잡은 건 너무나 믿기지 않는 무용이라 반쯤 헛소문처럼 왕국을 떠돌았다.

유르딘 니제스는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유르딘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슈리아가 검을 완벽하게 포기하고 얌전히 신부 수업을 받기 시작한 계기가 유르딘이었다. 예의 멧돼지 사건이 있었던 후, 슈리아는 아무리 그래도 열 살짜리 꼬맹이가 열일곱 살인 자신과 상대가 되겠느냐며 대련을 요청했다. 예상과 달리 다섯 합도 채 나누지 않았을 때 검을 놓치고 어이없이 져 버렸다. 그 후로 부모님의 반대에도 몰래 수련하던 검을 완전히 버리고 숙녀로 남는 편을 선택했다. 남을 이기는 게 지극히 당연한 유르딘은 그 일을 금방 잊은 모양이지만, 슈리아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언제나 슈리아는 유르딘이 부러웠었다. 하지만 질투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재능이라 자신의 속내를 숨겼다. 게다가 유르딘은 좋은 친구였다.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부모님 사이에서 자란 유르딘은 차별 없는 선의와 배려를 배웠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여성의 몸으로 검을 휘두르는 슈리아와 어울린 덕분에 익숙해져서인지 여자가 검을 휘두른답시고 무시하지도 않았다.

슈리아의 세계에는 온갖 선의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슈리아가 자신을 일정 부분 숨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에 그녀가 검을 계속 배우려 했다면 모두가 손가락질했을 게 뻔했다. 심지어 부모님조차도 검을 휘두르는 딸을 좋아하지 않는다. 슈리아는 차마 남편인 딜란에게조차 검을 좋아한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유일하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르딘이 소중한 친구인 건 당연했다. 단지 이성이라 자주 만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시녀가 잠에서 깬 레인을 데리고 찾아왔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제 엄마가 있는 정원까지 도도도 달려온 레인은 유르딘에게 낯을 가리는 기색도 없이 웃으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니스 경?”

혀 짧은 발음으로도 제법 또박또박 말한 것까지는 좋은데, 성 한 글자를 빼먹었다. 레인을 데려온 시녀가 몸을 숙여 속삭였다.

“니제스 경이에요, 도련님.”

“니-제-스-경?”

길게 말을 늘이는 레인이 귀여워서 유르딘은 작게 웃었다. 레인이 유르딘을 보며 마주 웃는다. 불같은 성질의 아이제나흐 공작이 레인만 보면 평생을 선량하게 산 인자한 노인처럼 방긋방긋 웃는다더니, 그럴만한 귀여움이었다.

“맞아, 레인. 이리 와.”

작게 웃으며 슈리아가 유르딘 대신 대답했다. 레인은 슈리아에게 달려갔다. 옆에 놓인 아이용 의자에 앉히려고 했지만, 레인이 딴 데 정신을 파는 쪽이 조금 더 빨랐다. 레인은 정원 한쪽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고양이를 보더니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슈리아가 기르는 고양이는 그런 레인이 익숙한지 재빨리 도망쳤다. 놀겠다는 건지 멀리 도망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잡히지도 않는 고양이를 쫓아다니느라 주변은 난장판이 됐다. 굉장한 소란에 슈리아가 난처하게 웃었다.

“미안. 하여간 말썽이야.”

“괜찮아, 애들은 뛰어놀아야지.”

“너도 애면서.”

“저 정도로 애는 아니잖아.”

두 사람의 시선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레인을 좇았다. 유르딘은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많이 컸네.”

“애들은 몇 달만 지나도 크는걸. 레인은 2년 만에 보니까, 엄청 컸지.”

“흠.”

어느새 한 마리의 고양이가 더 다가왔고 정원은 점점 더 난장판이 되고 있었다. 짧게 이야기 몇 마디를 나눠 가며 레인을 보고 있던 유르딘이 인상을 쓰며 슈리아를 톡톡 쳤다. 그러더니 보이지 않게 누군가를 가리킨다.

“근데 저 시녀는 누구야? 아까 레인을 데려왔던 저 갈색 머리.”

갑작스러운 질문에 슈리아가 몹시 흥미로워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관심 가니?”

“그런 거 아냐. 그냥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는 것 같아서.”

“잘생긴 기사님이라 관심이 가나 보지. 미엘은 레인이 태어났을 때쯤 유모와 함께 저택에 들어온 시녀야. 이래저래 유모를 돕고 있어. 참고로 미혼.”

그런 게 아닌데, 슈리아는 정말 쓸데없는 사족까지 붙이면서 설명했다. 괜히 놀릴까 봐 유르딘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후로는 딱히 시녀가 유르딘을 보는 기색이 없었다. 착각이었을까? 미엘이라는 시녀는 분명 유르딘을 눈엣가시를 보는 양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일개 시녀가 유르딘을 적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미엘이라는 이름을 곱씹어 봐도 워낙 흔한 이름이라 생각나는 게 없었다. 유르딘은 지나친 의심이었겠거니, 가볍게 넘겼다.

그러던 중 고양이를 쫓다가 앞으로 구른 레인 때문에 소란이 일었다. 여린 풀이 자라난 정원이라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레인은 아프지도 않은지 바로 벌떡 일어나 나비를 쫓기 시작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났던 슈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하여간, 은근히 잘 넘어져……. 누굴 닮았는지.”

“그러게, 네 아들인데. 아버지를 닮았나?”

“그이도 몸을 제법 쓴다고.”

“너만큼은 아니겠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 어지간한 얼간이들보다 백배는 나았는데.”

“너한테는 졌잖아. 무려 네가 내 반 토막만 할 때 말이야.”

“나 같은 천재한테 이긴다는 게 무리 아니야?”

슈리아는 어이가 없어서 짧게 웃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 반박할 길이 없었다.

“남자아이라는 걸 알았을 때 조금 기대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딱히 재능이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아이제나흐 공작이면 누군가의 호위를 받을 테고.”

기왕 재능이 있을 거면 슈리아가 아닌, 레인 스스로가 흥미를 가지는 쪽에 있는 게 좋았다. 가끔 우울해질 때면 슈리아는 레인이 장성한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의 아이는 그녀와 달리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쥘 수 있을 것이다. 공작 위를 원하지 않는다는 경우의 수도 있기는 했지만, 다행히 레인은 적절히 제 아버지를 닮아 순한 얼굴과 달리 제 것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아예 제 자리를 내치지는 않으리라. 대단한 자리에 올라 타인의 위협과 경계를 받으며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아프기도 했지만……. 거기까지 생각하던 슈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유르딘, 네가 레인을 지켜 줄래?”

“나처럼 대단한 기사가 호위나 하라고?”

유르딘이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 치자 슈리아가 입술을 삐죽댔다.

“할 수도 있지 뭘 그러니.”

“난 대단한 영웅이 될 거야. 나라에서 제일가는 기사가 되어서 사랑하는 사람 한 명만 지킬 거야.”

자신이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고 느꼈을 때부터 유르딘은 결심했다. 왕국 제일, 아니 대륙 제일의 기사가 될 것이라고. 그런 다음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깊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그 사람만을 지켜 주고 싶었다. 진지한 다짐이었는데 슈리아는 듣자마자 기절할 듯이 웃었다.

“으하하핫!”

“왜, 왜 웃어?”

“아니, 그냥 좀 생각이 귀여워서.”

“난 진지한데.”

아무리 봐도 우습게 보고 있다. 유르딘이 인상을 팍 찌푸리자 슈리아는 힘겹게 웃음을 멈췄다.

“그래, 그럼 그냥 우리 레인을 사랑해도 되잖아.”

“농담하지 말고 그만 놀려.”

“그래, 그래.”

얼마나 웃었는지 슈리아의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농담이라고 해도 심했다. 네 살 난 레인은 열다섯 살 난 유르딘의 허리까지도 오지 않았다. 그런 어린애랑 애인이 되는 파렴치한 놈은 왕국의 영웅으로는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영지에 틀어박혀 욕심 많고 색을 밝히는 변태 영주 정도로나 어울린다. 만족스레 유르딘을 놀려 먹은 슈리아는 너그러이 화제를 돌렸다.

한참을 대화를 나누다가 슈리아가 우아하게 볼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유르딘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화장실에 간 것 같은데, 예전에는 잘도 말하고 당당하게 다니더니만 공작 부인이 됐다고 얌전을 빼는 모양이다.

그렇게 슈리아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고양이와의 술래잡기를 만족스레 끝낸 레인이 다가왔다. 엄마가 사라졌으니 어색해할 법도 한데, 어색은커녕 뻔뻔스럽고 당당하게 유르딘을 잡아당기더니 무릎을 차지하고 앉았다.

“고양이는 못 잡았어?”

“잡았는데 졸린가 봐요. 자라고 했어요. 나도 이따가 잘 거예요.”

“너 되게 못 잡더라. 너희 엄마한테는 말 안 했지만, 과도도 제대로 못 잡을 것 같아.”

장난스레 속삭이자 조금 토라진 얼굴로 볼을 부풀린다. 빵빵한 볼을 쿡 찌른 유르딘은 조막만 한 손을 매만졌다.

“괜찮아, 넌 귀한 아이니까. 검을 잡지 않아도 누군가가 지켜 줄 거야.”

잘 이해가 가지 않는지 레인이 눈만 깜박였다.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자 삐진 적 없다는 얼굴로 헤헤 웃는다. 유르딘은 비밀 이야기를 하는 사람처럼 레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희 엄마가 너 지켜 주라던데. 지켜 줄까?”

“아빠가 그랬는데, 아빠가 엄마랑 날 지켜 준댔어요. 아빠처럼 지켜 주는 거예요?”

“좀 다른데……. 비슷하다고 치자.”

“응. 그럼 지켜 줘요.”

제대로 이해했다기보다는 그냥 좋다니까 그러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아무리 똑똑해도 어린애가 뭘 알겠는가. 유르딘은 아까 쓰다듬느라 헝클어진 레인의 머리를 정돈하며 다시금 쓰다듬었다. 마음을 접었어도 슈리아는 유르딘의 첫사랑인 데다 지금은 소중한 친구이기도 했다. 레인의 기사까지 되어 주진 못하더라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지켜 줄 마음은 차고도 넘쳤다.

두 사람 모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나눈 약속이었다. 후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소한 약속. 그러나 약속은 오랜 시간을 지나, 다시 맺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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