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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려앉은 밤 (13/20)

7 내려앉은 밤

여섯 살, 아직 부모의 보호가 필요한 이른 나이에 레인의 세상은 절망으로 반전됐다.

이전까지 온갖 아름다운 선의로 가득 찬 세상이 고스란히 뒤집혀 레인은 세상의 절망과 악의를 고스란히 마주했다. 이유 없는 폭력과 경멸, 증오와 살의……. 한 사람의 인간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을 만한 검은 감정과 행동들. 레인은 절망했고 동시에 분노했다. 어떻게든 제 명석한 머리로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고 노력했다.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오직 악의만이 들어찬 행위에 무슨 타당한 이유가 있겠는가. 이유가 없어 결국 영원히 반복될 뿐인데.

절망한 레인은 절망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레인의 인생이 유독 더러운 편이기는 해도, 이 세상에서 그만이 괴로운 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약자가 너무나도 많았다. 최소한 레인은 아프면 약을 받을 수 있었고, 밥을 굶지는 않았으며, 겨울에는 얼어 죽을 일 없이 조금 빳빳해도 푹신한 이불에서 잠든다. 레인이 아이제나흐 공작의 피를 이어받았기에 거리의 부랑자들처럼 배를 곯고 얼어 죽는 최후를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 최악의 상황이 아니다. 절망뿐인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자신의 처지가 발 디딜 곳 없는 낭떠러지에 서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더는 살아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았으니까.

자신의 처지는 불쌍한 이들보다 조금 더 낫다. 레인은 그 한 가지를 소중하게 붙잡았다. 충분히 배부르고 따뜻하게 잘 수 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다. 이 정도면 살아갈 만하다. 자존심을 긁어모은 건 레인의 생존 방식이었다.

연민과 생존 방식이 뒤섞인 사고가 뿌리 깊게 박힌 채 레인은 늘 약자에게 공감했다. 선택에는 타인의 불행에 결코 웃을 수 없는 레인의 선의가 깃들어 있기도 했고, 무의식중의 계산이 들어 있기도 했다.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망나니 도련님이 되었다가는 가문의 위신을 핑계로 딜란에게 레인을 찌를 핑계를 줄 테니까. 약자를 짓밟는 강자는 언제나 혐오의 대상이었다. 남을 짓밟는 사람은 언제나 정해져 있다. 그들은 딜란이었고, 아나벨이었으며, 레스터였고, 카이렌이었으며, 동시에.

유르딘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가져 왔던 모든 생각들의 대척점에 선 인간. 수없이 피를 흩뿌리며 왕국에 참혹한 죽음을 불러온 살인마. 그리고 레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다.

천천히 마무리되는 사고와 함께 꿈속을 헤매던 의식 또한 건져 올려졌다.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이 싸늘했다. 레인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아직도 눈을 감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주변이 온통 새카만 색이었다. 달 없는 밤처럼, 또는 절망처럼. 사방은 빛 한 점 없이 검다. 피를 흘렸기 때문인지 몸이 덜덜 떨렸다. 손을 들어 어떻게든 제 몸을 감싸 안고 있는데 주변이 밝아졌다. 여전히 어둡기는 해도 사물을 분간할 수준은 됐다. 제대로 이곳에 대해 파악하기도 전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레인은 몸을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카이렌?”

이게 미엘일지 카이렌일지 레인은 확신하지 못했다. 의심을 던지는 레인을 보고 카이렌이 불쾌한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카이렌이 레인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 올려 당겼다.

“맞아, 나야. 똑바로 봐.”

이 빌어먹을 성질머리는 카이렌이 맞지 않을까. 레인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카이렌이 거칠게 손을 놓았다. 바닥에 그대로 엎어진 레인은 간신히 팔을 세워 상체만 들어 올렸다.

“네가 왜 여기에…….”

“친구가 왕 해 먹는다기에 그 덕 좀 보려고 왔지.”

내용만 들으면 퍽 좋아해야 할 것 같은데, 카이렌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알 법하다. 레인을 가지지 못하면 차라리 죽여 버리겠다는 놈이 카이렌인데 갑자기 레스터가 레인을 이곳에 영원히 처박아 둘 계획을 세웠으니 화가 났겠지. 어쩌면 레스터가 카이렌의 계획을 도운 건,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마지막 계획에 방해되지 않도록 치워 둘 수 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레인을 여기에 가두고 써 먹는다는 빌어먹을 계획이 성공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반역이라는 패까지 꺼내 든 이상은 카이렌도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저들끼리 제멋대로 계획을 짜서 저를 끼워 넣고 난리다.

“난 네놈들의 소유물도 전리품도 아니야.”

“그럼 뭔데. 아무것도 못 하면서.”

단박에 무시하며 반박한 카이렌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레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이럴 때 카이렌을 거스르면 얻어맞는다. 뒤늦게 제가 긴장했음을 깨달은 레인이 눈을 질끈 감았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결국은 이전과 다를 것도 없다니. 레인이 겁을 먹은 걸 알아챈 카이렌은 잔뜩 구기고 있던 인상을 활짝 폈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기분 나빴다.

“됐어, 화내 봤자 소용도 없고.”

저렇게 간단한 말로 끝낼 집착이 아니다. 사실 재회하자마자 당장 강간당하고 살해당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잔뜩 긴장한 레인의 모습을 감상하던 카이렌은 조금 옆으로 걸어가 탁자 위를 툭툭 쳤다. 고급스럽게 다듬은 목재에 음각으로 포도 무늬를 넣은 탁자는 척 봐도 고급품이다. 이런 지하 감옥 한복판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 레인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탁자와 그 주변을 살폈다. 점점 흐릿해지는 시선을 살피며 카이렌이 웃었다.

“여기, 그립지 않아?”

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여섯 살부터 17년 동안 감옥으로 여겼던 장소. 존재만으로도 끔찍한 악몽인 곳. 아이제나흐 공작가의 별채가 감옥 한복판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여기서 너랑 종종 숨바꼭질을 했었지.”

카이렌의 목소리는 아련한 추억에 젖어 있었지만 레인에게는 그저 끔찍한 공포만이 가득 찬 공간일 뿐이다. 레인은 다가오는 카이렌을 피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치려 드는 레인을 보면서 카이렌이 무언가를 쥐었다. 사냥용 활이었다. 레인이 경악하든 말든 카이렌은 느긋하게 화살을 뽑아 활 위에 걸었다. 레인이 죽지 않는다는 게 밝혀진 이상, 더는 자제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예전처럼 놀자, 레인.”

“……미친 새끼. 그때 그냥 죽여 버릴 걸 그랬어.”

“하하하, 그러게. 그냥 죽여 버리지 그랬어. 응?”

대답하지 못하고 레인의 몸이 휘청거렸다. 간신히 벽을 잡고 섰지만, 출혈 때문인지 정신이 없었다. 간신히 몸을 세우며 레인은 제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서워? 그럼 도망쳐야지, 레인.”

카이렌이 웃었다. 아름답고 근사한,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분명 호감을 보일 만한 얼굴로. 손에 든 건 레인을 꿰뚫기 위한 활일 뿐인데 표정은 정말로 다정해 보였다.

“백을 셀게.”

도망치기를 기다리겠다고? 눈치를 보며 레인이 방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카이렌은 느긋하게 숫자나 세고 있었다. 복도로 빠져나온 레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채와 똑같은 분위기의 복도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다만 기억과 똑같았던 방 안과 달리, 복도는 실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끝없이 길다. 레인은 저를 쫓아오는 듯한 소리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카이렌은 레인을 사냥할 생각이다. 평소에 숨이라도 붙여 놓으려 노력하는 척 자제해 왔던 일말의 한계선조차 비밀이 모두 까발려진 순간 무너졌다. 최악이었다. 레인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카이렌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아까 레스터에게 찔린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아직 움직일 수 있는 게 용할 지경이다. 얼마 벗어나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넘어지고 굴렀다. 레인이 쓰러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카이렌이 숫자를 세던 걸 멈추고 웃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똑똑히 깨닫는 게 좋아, 레인. 넌 날 벗어날 수 없어. 영원히 도망칠 수 없어!”

단둘만 남은 공간에 울려 퍼지며 선언하는 말은 끔찍한 집착이었고, 동시에 세뇌였다. 오랜 세월 고집하며 강조해 온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벗어날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복수를 끝마친다 한들, 레인이 카이렌에게 고통받았던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깊은 상처로 남은 학대는 평생 레인을 사로잡을 것이다. 미엘의 말대로 죽어 사라지는 편이 훨씬 더 평화로웠을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단 한 순간도 빛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희망은 레인을 조롱했다. 희망을 품으면 언제나 고통이 따라왔다. 목적지도 없는 절망만이 이어지는 삶. 이렇게 끝도 없는 괴로움만이 이어질 삶이라면 진작 포기하는 게 옳았을까. 진작 포기했더라면 지금쯤 벌써 편해졌을지도 모르는데. 살아 있어서 괴로웠다. 살아 있어서 많은 사람이 괴로워졌다.

피와 눈물로 젖은 뺨을 닦으며 레인은 갈림길을 돌았다. 복도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다.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도 알지 못한 채, 레인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고통과 절망 이상으로 찾아드는 희망이 싫었다. 어차피 결국은 모든 걸 박탈할 거면서. 이제는 더는 유르딘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찾았다.”

카이렌의 목소리와 동시에 몸을 가르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 어깨에서 느껴졌다. 레인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어깨에는 커다란 산짐승을 잡을 때나 쓰는 거대한 화살이 박혀 있었다. 상처가 뜨거워지며 절로 눈물이 났다. 고통스레 바닥을 기는 레인에게 다가온 카이렌은 레인의 등 위에 발을 올리더니 그대로 힘주어서 느릿하게 화살을 뽑아 들었다.

“아아아아악!”

시야가 어지럽게 일그러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진작에 기절했어야 할 정도로 많은 출혈인데,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용했다. 몸의 한계를 넘었는데도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거나, 아니면 무언가 마법의 영향이거나. 레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자, 카이렌이 느긋하게 활을 들어 올렸다.

“안 도망쳐? 도망치지 않으면 한 발 더 쏠 건데.”

“너……. 너, 으, 큭…….”

“맞고 싶으면 가만히 있고. 얼굴은 쏘기 싫으니까 웅크리지 마. 낮게 노릴게.”

레인은 욕을 씹어 삼키며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도망치는 레인을 향해 카이렌이 화살을 한 대 더 쏘았다. 다리에 박힌 화살을 뽑아낼 생각도 못 하고 레인은 벽에 기댄 채 정신없이 그 자리를 도망쳤다. 비척비척 도망친 레인은 카이렌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입 안이 온통 비렸다. 대체 어디까지 도망쳐야 할까. 도망칠 구석이나 있을까? 아프다 못해 감각은 슬슬 사라지고 있었고 몸은 무거웠으며 상처에서부터 열이 올라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유르딘.”

이런 상황에조차 유르딘이 떠올랐다. 이런 상황이라서 더더욱, 유르딘이 떠올랐다. 레스터가 보여 준 기억 속 유르딘의 모습은 지금의 그와 같은 부분이 하나도 없을 만큼 피폐하고 처절했다. 거리의 부랑아보다도 못한 더러운 행색으로 미친 사람임을 숨기지도 못한 채 복수에 열을 올리며 왕국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던 모습이 자꾸만 걸렸다.

레스터는 시간을 되돌리기 전 유르딘이 끼친 피해만을 말했지만, 레인은 유르딘이 입고 있던 상처에 대해 생각했다. 레스터의 기억 속 유르딘의 얼굴은 불쌍할 정도로 말라 반쪽이 되어 있었고 길고 짧은 수많은 흉터로 난자되어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누군가가 쓰러뜨리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여겨질 정도로 완벽한 검사가 바로 유르딘이었다. 그 유르딘이 보이는 곳에 상처를 입고 스스로를 돌볼 여유도 없을 정도가 되려면 얼마나 자신을 몰아쳐야 가능한 걸까. 그만 생각하려고 해도 레인의 머릿속은 온통 유르딘으로 물들어 있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윽…….”

유르딘이 겪었을 고통 일부만이라도 생각하며 레인은 제 몸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너무 아파서 절로 욕이 나왔다. 그간 두들겨 맞은 덕에 고통에 익숙해진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화살을 뽑은 레인은 조금 전까지 간단하게 살을 갈랐던 화살촉 끄트머리를 노려보았다. 화살을 던져 버리려던 레인은 짧은 화풀이를 하는 대신에 아직 날카로운 화살을 움켜쥔 채 찢어지고 피로 물든 셔츠를 걷었다. 배 위에 레스터가 감옥에서 찌른 흉터가 기괴한 모양으로 남아 있었다. 언제 찔렸냐는 듯이 더는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대신에 칼이 남긴 것과 똑같은 기괴한 상처로 옆구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마력 회로라고 했었지. 이 흉터 자체가.

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눈에 보이는 흉터가 회로라면, 흉터를 지우면 사라질 터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레인의 앞에서 사실을 모두 털어놓은 것인지 모르겠다. 레인은 과거에 낙인을 지우겠답시고 마취도 하지 않고 제 살을 지져 버렸던 인간이었다. 어차피 죽지 않는 몸이다. 살을 도려내는 것 정도야…….

“…….”

물론 아무렇지 않을 리는 없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의문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어쩌면 이대로 레인이 저항할 의지를 꺾은 채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레인은 다시 한번 유르딘의 상처들을 떠올렸다. 얼굴이 그 정도라면 몸은 얼마나 심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곳에 갇혀 얼마나 더 아플까. 당장 닥쳐 올 육체의 고통이 유르딘에게 찾아올 고통에 비할 수 있을까?

유르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살아왔고, 그 마음이 결국은 한 번의 죽음을 불러왔다. 이 이상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해 봤자 상황을 악화시킬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르딘. 마지막 순간에 본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화살을 쥔 레인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뜬 레인은 그대로 상처를 정확하게 화살촉으로 내리찍었다. 상처에 깊게 흠이 났다. 레인은 제 마력이 절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한 번 정도로는 온몸을 감싸고 얽맨 사슬이 풀리는 느낌이 없었다. 화살촉으로 흉터를 모조리 날려 버릴 정도로 살점을 짓이기는 건 절대 쉽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보다가 레인은 손을 뗐다. 한참이 지나서야 레인은 제게 남아 있던 흉터를 새파란 날로 가르고 연결된 마력 회로를 무위로 만들었다. 모든 걸 끝낸 레인은 너덜너덜하게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윽…….”

온몸이 너무 아파서 부서질 것 같다. 상처를 얻는 대가로 마법을 억누르는 사슬을 풀기는 했으나 피가 너무 많이 나서 정신을 유지하기도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지만, 의식을 잃었다가 카이렌에게 발각되면 끝장이었다.

레인은 벽을 손으로 짚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농밀한 마력이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희미하게 내려앉은 어둠은 불길했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마력은 오히려 편안했다. 레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마력이 파랗게 가시화되며 불꽃처럼 반짝인다. 위협적인 색이었으나 레인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오래된 마법진이 레인의 마력에 감응했다고 했고, 이후 레인의 마력을 뽑아서 썼다고 했다. 아무리 마법으로 흐름을 제어했다고 해도 주변 모든 것의 근본은 레인이 지니고 있던 마력이다.

이걸 활용할 수 있을까? 레인은 마력이 흐르는 바닥을 노려보았다. 추측하건대 마력이 이르는 깊은 곳에 놈이 있으리라.

“……레스터.”

레인과 유르딘을 망쳐 놓고 웃음 짓던 끔찍함을 떠올리자, 하나하나 따져 보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일단 벽에 손을 얹은 채 마력을 움직이려 노력했다. 거대한 흐름에 완전히 저항하지 않고, 그 흐름의 일부를 잡아채려 노력했다. 몇 번 시도하기도 전에 아래로 흐르던 마력은 이내 일부가 레인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가 자연스레 다시 바닥을 향해 흘렀다. 뜻밖에 순조로운 성공이었다. 연습할 때 사용했던 마력은 레인이 지닌 마력의 극히 일부였었다. 포크로 자그마한 콩 한 알을 찍어 올리는 것보다 커다란 국자로 다량의 완두콩을 퍼 올리는 게 더 쉬운 것과 같은 원리다. 그러나 이곳을 흐르는 마력 전체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마력을 움직일 수 있을 뿐이었다. 이 공간 전체를 뒤바꾸는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다만 이 힘을 빌려서 단숨에 공간을 넘어 이 흐름이 다다르는 끄트머리까지 도약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공간을 넘는 마법에 대해 이미 이론은 알고 있다. 지금까지 사소한 마법의 제어에 연달아 실패해 시도할 생각조차 못 해 봤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마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옛 시대에도 어려웠던 마법이다. 물길을 타고 가듯 이어진 마력을 쭉 따라가면 되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하기보다야 쉽겠지만, 지금까지 레인이 실패한 마법들보다 몇 십 배는 더 어려운 마법이다. 더욱이 단순히 빛을 밝히거나 불을 옮겨 붙이는 수준의 마법과는 위험성을 비교하는 것조차 우습다. 마법의 대상이 레인의 육신이 된다면 실패는 치명적이다. 스스로 마력 회로를 부수고 벗어나려 했다는 시도가 들통 나면 레스터는 더 완벽하게 레인을 옥죄려 들 터였다.

단 한 번의 기회. 성공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지금까지도 매우 힘들었는데, 괜한 시도로 더한 지옥을 불러오는 게 아닐까. 이렇게까지 해서 뭘 얻겠다고. 레인이 포기하고 온순해진다면 카이렌은 만족하고 그를 곱게 다루어 줄지도 몰랐다. 모든 걸 포기하고 차라리 이제라도 편한 방법을 택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다시 고통스럽기만 한 시절로 돌아가는 건 끔찍했다. 레인에게 삶은 이길 수 없는 투쟁이었다.

게다가 이미 유르딘도 죽었을지 모르지.

“욱…….”

제 상상이 소름 끼쳤다. 조금 나았던 몸이 거짓말처럼 나빠져서 레인은 토했다. 먹은 것도 별로 없어 위액과 함께 입 안에 남아 있던 피가 고여 붉게 바닥에 떨어졌다. 상상만으로도 지옥이다. 유르딘은 어떻게 됐을까. 눈물이 흘렀다. 버티지 말고 진작 죽었어야 했다. 북방에 가기 전에, 아카데미에서, 유르딘의 편지를 받기 전에 목숨을 끊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최소한 이 삶만이 끝나는 걸로 매듭지을 수 있었을 터다. 그랬다면 괜히 유르딘이 레인에게 휘말려 희생할 필요도 없었다. 유르딘이 그렇게 변한 건 본의는 아니었어도 레인 때문이었다.

“……유르딘.”

힘없이 중얼거리는 이름에 얼마나 많은 미련과 후회가 담겨 있는지. 레인은 자조했다.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거짓말쟁이인지. 제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레인은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피에 젖은 몸을 붙잡고 끅끅대며 웃었다.

유르딘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다고? 유르딘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이번에도 역시나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거짓말이다. 이렇게나 보고 싶은데. 한 번만 더 그를 볼 수 있다면 이 목숨 바쳐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보고 싶었다. 유르딘에게 입 맞추고, 유르딘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끔찍한 후회가 레인을 사로잡았다. 만약 이대로 유르딘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는 레인이 자신을 거부하는 순간을 기억에 새긴 채 끝을 맺게 된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리 찰나, 한 순간이라고 해도 레인이 유르딘을 저버려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이미 한 번 잘못했는데…….”

유르딘이 보고 싶어서 최후의 순간에 그를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소원을 빌었다. 그 소원의 대가를 유르딘이 치렀다. 그 마음을 무시한 채 레인은 도망만 치다가 악마의 손을 빌려 기억을 잃었다. 시간을 되돌렸음에도 두 사람은 같은 상황을 번복하며 후회를 반복한다. 똑같이 파멸을 반복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바로잡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 레인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레인이 상황을 해결해야만 했다.

유르딘은 언제나 레인을 믿어 줬다.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상황에서 레인을 믿고 구하려고 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시간을 되돌려 저를 바칠 각오로 레인을 구하려 했다. 언제나 손을 잡아 줬던 유르딘.

초라한 별채에서 혼자서 잠들면서 항상 소망하고 상상했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손을 잡아 주는 온기를 바랐다. 죽어 가는 레인에게 유르딘이 손을 뻗었다. 그만이 줄곧 레인의 손을 잡아 주었다. 하루아침에 영웅에서 살인마로 전락하면서까지 온전히 레인만을 원했다.

유르딘 니제스 렘샤이트는 더 이상 누구나 사랑하는 정의의 기사님이 될 수 없었다. 그가 평생을 갈구해 온 선량한 가치는 레인의 죽음과 함께 부서졌다. 왕국의 영웅은 번지르르한 겉껍데기일 뿐, 속에는 레인을 위해 모든 걸 파멸로 몰아넣을 정도로 미쳐 버린 남자가 들어앉아 있었다. 유르딘은 끔찍한 악인이었다.

레히드 남작은 제 아들이 죽었는데도 복수를 원하기는커녕 레인에게 직접 찾아와 친절하게 경고해 주고 자신을 원망하라고 말했다. 칼이 말했듯이 그는 좋은 사람이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제 아들이 죽은 원인인 레인을 죽일 듯이 노려볼 정도로 증오하는데도 제 감정과 악의를 저울질해 레인의 손을 들 정도의 공정함을 지녔다. 레인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레히드 남작처럼 될 수 없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공정한 남자의 아들이 레인에게 무슨 짓을 했지? 칼 레히드는 입을 다물고 영원히 침묵하는 게 이로울 제 치부를 명예가 손상되는 것을 각오하면서도 아버지에게 알렸다. 칼 레히드 또한 레인에게 한 행위를 제외하자면 남들이 사랑할 만한 호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선량한 인간이 많다. 선량한 가치 또한 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반짝인다. 그러나 그것들이 대체 레인의 무엇을 도와줬느냔 말이다.

하지만 유르딘만은 레인 아이제나흐만을 위한 기사님이었다. 이 세상을 저버리면서까지 레인만을 사랑해 줄 영원한 기사님. 레인 또한 유르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어도 좋았다. 어차피 그가 되살려 준 목숨이었다. 선악의 정의 따위 아무래도 좋다. 이어지는 고통 속에 진작에 미쳐 버려서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된 걸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런 것조차 아무래도 좋았다. 유르딘과 다른 것을 저울질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다. 유르딘이 악인이라 꺼려진다면, 저 자신을 똑같이 바닥으로 떨어뜨려서라도 함께 있고 싶었다.

“유르딘…….”

가볍게 부르던 이름조차 그를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순간 묵직해진다. 레인의 절대적인 가치는 유르딘이었다. 세상의 절대적인 가치, 모든 걸 버려도 얻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

“유르딘, 사랑해요.”

답할 사람이 없는 고백을 속삭인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면 웃으면서, 수줍어하면서, 기뻐하면서, 구원을 얻은 듯이 화답해 주는 유르딘이 보고 싶었다. 상상이 아닌 실체가 필요했다. 팔다리가 잘려도, 이 몸이 두 동강 나도, 설령 갈기갈기 찢어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레인을 구해 주러 올 기사님은 지금 이 순간 곁에 없었다. 지금까지 유르딘이 레인을 구했다. 레인이 유르딘을 구할 차례다. 유르딘. 나의 사랑하는 유르딘.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아.”

의문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다. 자신이 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줄 몰랐던 때도 제 의지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나. 그때의 언령은 기적이었다. 지금은 그때처럼 단 한 가지만을 생각할 수 없었다. 유르딘에 대한 걱정, 레스터와 카이렌에 대한 증오, 실패에 대한 불안감, 온갖 감정과 생각들이 레인의 마음속을 어지럽혔다.

더는 기적에 기댈 수 없었다. 해야만 한다. 최후까지 패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할 수 있다고 믿고 스스로 성공을 거머쥐어야 했다. 돕고 싶다. 구하고 싶다. 다시 한번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다. 당신과 나의 행복한 끝을 원한다. 어린 시절, 당신이 내게 보내 줬던 아름다운 말로 가득한 동화책의 내용처럼.

레인은 간절히 생각했다. 이건 우연이 맞아 떨어지는 기적이 아니다. 제 모든 걸 버려도 좋다는, 무엇을 희생해도 좋다는 강렬한 의지가 마력과 얽힌다. 그렇게 마침내 마법을 자아내고 소망을 이루었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순간, 레인은 레스터의 앞에 서 있었다.

레스터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양손을 바닥에 대고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법 주문이다. 레스터가 중얼거릴 때마다 그에게로 흐르는 마력이 요동치며 온갖 마법을 자아내는 게 보였다. 실체를 알고 있다고는 해도 미친놈처럼 중얼중얼하는 꼴이 정상인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그도 그럴 게 레스터의 몸은 어딘가 이상했다. 몸 반쪽은 창에 꿰뚫린 것처럼 기묘한 암석이 옷을 찢고 솟아나 있었다. 살과 암석 사이는 사막처럼 말라붙어 피가 스며 있다.

인간을 포기한 괴물에 가까운 모습에 레인은 잠시 당황했다. 레인을 가둬 놓고 유르딘에게 복수하고 모든 영광을 그러쥐려던 게 아니었나? 레스터를 증오하는 레인조차 놀랄 정도로 흉측한 모습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레스터가 고개를 돌렸다.

“레인.”

목소리가 두 사람의 것처럼 갈라졌다. 한 목소리는 원래 레스터의 목소리에 가까웠지만 낮게 갈라졌고, 다른 하나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멀리 울렸다. 이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당황하는 레인에게 레스터가 태연스레 말을 건넸다.

“넌 어떻게 또 왔어?”

“……넌 그게 무슨 꼴인데?”

생각보다 평범한 대화였다. 레스터는 강한 마력을 제어하고는 있지만 거대하게 불어난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 보였고, 레인은 회심의 기회를 노리기 위해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다. 찬찬히 레인을 살펴보던 레스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인의 상처를 보고 한 순간에 상황을 파악한 모양이었다.

“도망친 거야?”

“그렇다면?”

“왜 자꾸 도망쳐?”

짜증스레 묻는 레스터의 목소리에 공명하듯 주변의 마력이 흔들렸다. 레스터는 신경질적으로 딱딱하게 변한 손을 들어 쇠처럼 날카로운 손톱을 깨물었다. 날카로운 손톱에 입술에서 피가 났지만, 그는 통증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듯이 보였다.

“구질구질해……. 구질구질해, 구질구질하다고.”

이건 완전히 맛이 간 게 아닐까. 레인은 대꾸하는 대신 레스터를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미엘과 같이 있을 줄 알았더니 없다. 하긴, 미엘도 제 목적을 갖고 레스터와 손을 잡은 놈이니 계속 레스터의 뒷바라지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침 잘 왔어. 짜증 나. 이제 다 제대로 돌아가는데, 짜증 나서 견딜 수가 없다고.”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던 레스터는 한 걸음, 발자국을 뗐다. 레스터가 움직일 때마다 어마어마한 마력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불안정한 움직임을 어떻게든 제어해 보려 애쓰며 레스터가 길게 심호흡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인지 발을 굴리자 견고한 바닥에 금이 갔다. 예리한 살의가 레인을 찔렀다. 레인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도망칠 수 있었던 건 고작 한 걸음뿐이다. 레스터가 레인의 발치를 지그시 내려다보자마자 마법이 시전됐다. 레인은 옴짝달싹 못하고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무슨…….”

당황한 레인을 보고 레스터가 비릿하게 웃었다. 마법의 시전이 지나치게 빠르다. 레스터는 악마의 힘을 빌린 초짜 마법사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나치게 능숙했다. 전에 레인도 사용했던 적이 있는 언령 마법일까? 하지만 고작 레인을 움직이고자 하는 데 그렇게 간절한 의지를 가졌을 리가 없다. 더욱이 눈앞의 레스터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으니까. 이죽대며 다가온 레스터가 레인을 붙잡았다.

“널 괴롭히면 나아질까? 말해 봐, 레인. 다 봤잖아?”

“알 게 뭐야.”

“널 똑같이 그렇게 괴롭히면 나아질까?”

레스터가 채근했다.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감응하듯 레인의 발치에서 갑자기 생겨난 새카만 벌레들이 천천히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몸 위를 뒤덮는 거머리와 벌레는 실재하는 생명체가 아닌 마법의 허상이다. 이 또한 마법이다. 아주 자연스레 주변의 마력이 레스터의 말과 동시에 감응하는 게 똑똑히 보였다. 이 공간이 품고 있는 마법진의 힘이었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마법진의 보조로 레스터는 초보 마법사답지 않게 능숙한 마법을 사용했다.

레인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서렸다. 레스터의 서투름에 기대를 걸어 볼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된다면 레인보다 레스터가 능숙했다. 끔찍하게 생긴 벌레가 몸을 타고 올라와서 살갗을 깨물거나 몸속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레인은 이게 레스터가 유르딘에게 당한 고문의 재현임을 알았다. 환상 속에서 레스터는 금방 죽을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지만, 올라오는 곳마다 가려워지는 건 괴로워도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다. 무심한 반응에 레스터가 혀를 차고 벌레를 없앴다.

“천한 놈이라 그런지 더러운 걸 무서워할 줄 몰라.”

“…….”

익숙한 조롱이다. 고개를 든 레인은 오만상을 찌푸린 레스터를 마주했다. 정작 몸에 벌레가 기어 올라왔던 건 레인인데 두려워하는 건 레스터였다. 고작 벌레들이 두려워서 그럴까? 그건 아닐 텐데. 창백한 낯을 찬찬히 살피던 레인은 이전부터 희미하게 제 안을 맴돌던 의문을 잡아 내던졌다.

“넌 이까짓 게 무서워?”

물론 징그럽기는 하지만 고작 벌레일 뿐인데. 사람 살을 뜯어 먹거나 열린 구멍 속으로 파고들기는 해도 고통으로 치자면 그리 크지는 않았다. 레인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이보다 끔찍한 고통도 레인은 숱하게 겪었다. 딱히 조롱하려던 것도 아닌데 레스터는 레인의 질문을 끔찍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레스터는 순식간에 분노와 증오로 물들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소리겠지! 아버지는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유니는 내 앞에서 잔인하게 죽었어.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기분을 네가 알기나 해?!”

레인은 흥분한 얼굴을 차분하게 마주했다. 그런 태도가 점점 더 레스터의 분노를 불러왔다. 더는 참지 못하고 레스터가 레인의 멱살을 쥐었다.

“언제나, 언제나 그놈의 뒤에 숨어 있던 새끼가!”

“그럼 다시 불러내 봐, 뜯어 먹히는 기분이 어떤가 보게.”

“못 할 줄 알고…….”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너희들이었어.”

레스터와 카이렌이 무서웠다. 너무나도 쉽게 레인을 짓밟는 두 사람의 잔혹한 성정과 강인한 힘이 두려웠다. 복수한다고 말하면서도 너무 무서워서 보일 때마다 숨죽이고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폭력이 레인을 처참하게 짓밟고 절망과 체념을 남기며 뿌리 깊은 공포를 새겼다. 공포는 인간을 간단하게 지배한다. 레인은 공포로 두 사람에게 지배당했다.

“매일 너희들이 찾아와서 나를 때렸지. 주먹으로 때리고, 채찍질하고, 걷어차고, 짓밟아. 불타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 개에 물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 벌레가 무서워? 그걸 먹으라고 한 적도 있었잖아, 너희. 난 도망조차 칠 수 없었어. 매일 너희가 찾아오는 게 무서워서 견딜 수 없었어.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었어.”

“하, 고작…….”

레스터가 레인을 비웃었다. 단순히 고통의 크기만을 따지자면 고작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통이 쌓이고 또 쌓여서 까마득하게 짓눌린 17년의 세월이 있다. 레인은 똑같이 레스터의 비웃음을 되돌려 주었다.

“희망을 품은 적 있지, 레스터? 도망치면 살려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었었지. 너무 힘드니까 그 말을 믿었다가, 이내 끔찍한 방식으로 희망이 짓밟혀 또 절망하고. 내게는 평생이 그랬어.”

“그래서 불쌍하니 봐주기라도 하란 거야?”

반대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혹시라도 일말의 동정이 들지 않게, 계속해서 레스터를 끔찍하게 여길 수 있도록. 레스터는 레인의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했다. 비틀린 살의가 마력을 첨예하게 긴장시켰다. 그런 생각을 모르는 레스터는 계속해서 레인을 윽박질렀다.

“똑같이 재현해 주지. 훨씬 더 잔인하게.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될 거야.”

“아마 너보다는 오래 버틸걸. 네가 왜 그렇게 미쳤는지 몰랐는데……. 다 보고 나니까 조금, 우습네.”

태평한 얼굴로 빈정대며 레인은 레스터를 밀쳐 냈다. 멱살을 쥐던 손은 생각보다 맥없이 풀렸다. 힘없는 손을 보며 레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우스워?”

“우습잖아. 고작 그 정도에 네 인생을 내버릴 정도로 미쳤다고?”

“그 살인마 새끼가 왕국 전체를 어떻게 뒤흔들었는데!”

“고작 몇 달 두려워했을 뿐이지. 몇 시간 정도 아팠을 뿐이고. 난 거의 20년 가까이 두려워했는데.”

두려움의 실체는 우스울 정도로 하찮게 까발려졌다. 레스터가 겪은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겪은 놈이 제 잘못은 생각하지도 않고 레인에게 원망만을 돌리며 망가지는 건 우스웠다.

레인은 항상 모든 게 두려웠다. 언제 어느 때 죽어 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들 때조차 꿈속까지 악몽이 찾아왔다. 한날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레인의 눈앞에서 피를 토하면서 죽었고, 외할아버지와 친척들은 마지막 모습조차 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았다. 평생 손가락질당했다. 많은 일이 레인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었다.

그래도 레인은 비교적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한계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득바득 버텼다. 만약 레스터와 같은 고문을 당했다고 해도 레스터 수준으로 완전히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더욱이 레인에게는 어렸을 적 있었던 일로 몸이 망가지는 평생의 상처가 남았지만, 레스터의 상처는 시간을 되돌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않은가. 게다가 아무것도 없다 못해 바닥 아래를 기던 레인과 달리 레스터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가족과 드높은 명예와 그에 따라올 수많은 재산이 남아 있었다.

“네가 미쳐서 한 짓을 봐. 유르딘을 보자마자 발작하고, 죄 없는 소년을 고문해서 죽이려 들고, 왕국의 수많은 귀족이 알 정도로 기행을 저질렀지. 물론 그 잘나신 계약 때문에 하기도 했겠지. 하지만 애초에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계약을 맺었겠어? 잔뜩 겁을 먹어서는.”

쏟아지는 말들에 잠시 멍해져 있던 레스터가 이를 악물며 부정했다.

“네게는 학대받는 생활이 퍽 맞았나 보지.”

“받아들여, 레스터. 내가 괴롭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 거 아냐.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별개로.”

더 이상 레스터의 말은 레인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평소에 레스터와 카이렌의 눈에는 레인의 발악이 이렇게 보였을까? 궁지에 몰려 어떻게든 저를 보존해 보려는 처참하고 초라한 발악들. 레인은 손을 뻗어 도망치려는 레스터를 붙잡았다. 레스터의 주변을 흐르는 공격적인 마력 때문에 붙잡은 손에서 피가 흘렀지만 기묘한 고양감으로 흥분해서인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너는 이렇게 맛이 갔는데 내가 비교적 멀쩡해 보인다면 차이는 한 가지야. 네가 나보다 약한 거지. 네가 나보다 못한 거야.”

충격과 분노가 더해지는 얼굴을 보며 레인은 쐐기를 박았다.

“네가 나보다 모자란 건 알고 있었잖아. 알고서 나를 미워한 거 아니었어?”

레스터는 레인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후계자라는 자리 외에 레스터는 레인보다 딱히 잘난 게 없었다. 혈통은 두고 볼 것도 없이 레인이 좋았다. 가정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도 교사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칭찬하는 건 레인 쪽이었다. 레스터는 레인이 굴복하기를 바랐다. 무릎 꿇려 패배감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레인이 죽는 순간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레인의 최후조차 레인의 사람인 유르딘이 불러왔다. 끝까지 이기지 못했다. 과거에도, 어쩌면 지금도.

“아버지가 널 선택했다고 생각해? 천만에, 지금도 아버지는 내 힘을 빌린 널 생각한 거야. 내가 없었다면 너 따위를 선택했을까.”

“닥쳐. 아니야.”

“나는 17년 세월을 버텼는데 너는 고작 몇 달의 두려움과 하루의 고문으로 완전히 망가졌다고? 한심해.”

레인의 마지막 말이 레스터를 날카롭게 긁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억센 손이 레인의 목을 움켜쥐고 조른다. 마력이 불꽃처럼 튀며 목에 상처를 남긴다. 레인은 이를 악문 채 레스터의 뒤를 응시했다. 격렬한 감정의 파문만큼이나 레스터가 제어하고 있던 마력 또한 혼란스레 흔들리고 있다. 강대한 마력은 레스터가 정신을 차린 순간 레인을 짓밟으려 달려들 테지만 상관없었다.

당연하지. 이걸 노렸으니까.

칼 레히드는 레인에게 말을 걸어 평정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단검의 원 소유주인 레스터가 칼을 협박해 움직였으리라. 레스터의 방에 자리하던 마법진이 있었지만, 레인의 마법이 무너진 건 1차로 그를 흔들어 둔 칼의 말이었다. 이미 반쯤 미쳐 있던 레스터는 당시의 레인보다도 더 흔들리기 쉬운 상태였다. 고작 이쪽으로 걸어오는데도 마력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상태. 하물며 그가 받아들이고 있는 건 자신의 것이 아닌 레인의 마력이다.

레스터에게 향하던 마력을 제게로 이끌었다. 제어를 잃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마력은 진정한 주인을 찾아 레인에게로 흘러들었다. 이 공간 전체의 마력이 레인을 향해 넘실댔다. 뒤늦게 레스터가 정신을 차리려고 해 봐도 점점 더 혼란에 빠질 뿐이다. 이미 구동되고 있던 마법들의 제어가 자연스레 레스터에게서 레인에게로 이어졌다.

가장 많은 마력을 보내고 있던 건 이 지하 감옥의 바깥이었다. 레스터는 줄곧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저 초라하게 돌로 만든 건물이었던 지하 감옥은 기괴하게 변형되어 높이 솟아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수도에서 가장 높게 치솟은 검은 구조물은 새카매진 밤과 붉어진 달 아래에서 음산하게 빛났다. 지하 감옥을 중심으로 솟아난 수많은 넝쿨이 성을 이곳저곳 얽매고 있었다. 기괴한 변형이었다.

아까까지 귀족들이 가득 차 있던 회의장 한복판이 보인다. 왕이 초라하게 결박당해 있었다. 주변은 온통 귀족과 기사와 병사들의 피가 튀어 아비규환이었다. 살아남은 소수의 귀족은 자비를 구하며 바닥에 덥석 엎드려 있다. 그들이 자비를 구하는 대상은 딜란 아이제나흐다. 왕의 관을 뺏어 쓴 공작은 그 중심에 서서 만족스레 웃고 있었다. 그간의 불안이나 혼란 따위는 말끔히 잊어버린 채 오만한 미소만이 눈에 띈다. 결국 저런 인간이다. 미련을 놓으며 레인은 바깥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유르딘을 찾아보려던 레인의 신경은 갑작스레 저를 붙잡는 레스터 때문에 눈앞으로 되돌려졌다. 일단 한 번 마법을 거두며 레인은 시선을 똑바로 돌렸다. 갑작스레 마법의 제어를 빼앗긴 영향인지 피를 토하면서도 레스터는 필사적으로 레인을 붙잡고 있었다. 마법의 제어를 어떻게든 다시 뺏기 위해서였다. 빼앗는 데 익숙한 뻔뻔한 약탈자들. 아버지도, 레스터도. 레인의 모든 것을 빼앗고 또 빼앗아 끝까지 착취해서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 순간은 다시 모든 게 온전히 레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하하하하…….”

너무 즐거워서 웃음이 나왔다. 레인은 레스터를 꽉 잡았다. 제 진정한 주인을 찾은 거대한 마력이 폭풍처럼 들이치며 레인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레인은 레스터를 밀어내는 대신에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리고 완전히 승자의 위치에 서 있다고 착각하며 오만하게 굴다가 한 순간에 바닥으로 나뒹군 레스터를 향해 웃었다.

“너희가 날 도와준 거야. 너희가 해 왔던 방식 그대로, 내가 승리할 거라고.”

카이렌이 레인을 공격해 마력을 일깨우지 않았다면, 레스터가 악마의 손을 잡고 레인을 죽이려 들지 않았다면, 미엘이 계략을 써서 레인을 이곳에 몰아넣지 않았다면, 레인은 마법의 편린조차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 모든 악의와 악행들이 레인을 일깨우고 이 순간 역전할 수 있는 한 수를 건넸다.

레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레스터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고작 이따위 말 몇 마디로 그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는 없다. 여기서 레스터를 완벽히 끝내 둬야만 한다. 쉽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똑같은 고통을, 완벽한 복수를. 그에게 희망이 오히려 절망으로 변하는 악몽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러자 오래된 마법진으로부터 지식이 흘러들어왔다. 레스터가 마법진의 보조로 간단하게 마법을 발동시켰듯이, 기회는 공평하게 레인에게도 돌아왔다.

두 사람에게로 꿈이 찾아왔다.

꿈속의 레스터는 어린 소년이었다. 악몽은 레인의 삶을 인물만 바꾼 채 똑같이 재현했다. 당하는 대상이 레스터로 바뀌고 레스터의 역할을 대신할 도련님이 대신 생겨났을 뿐 거의 모든 게 같았다. 꿈속의 레스터는 어머니가 죽고 갑작스레 내쳐졌다. 이전부터 아나벨을 아끼던 이의 손에 의해 간신히 살아남았다. 순식간에 별채로 쫓겨난 레스터는 이전과 완벽하게 뒤바뀐 생활 속에 방치됐다. 그리고 폭력이 이어졌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매를 맞고, 도련님의 기분이 좋을 때도 맞고, 도련님의 기분이 나쁠 때도 맞았다.

레스터에게 희망을 품게 하는 건 그를 한 번 구했던 기사의 편지뿐, 레스터는 처음 두 번 정도만 편지를 받다가 이후부터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찢어 버렸다. 그 누구도 제대로 레스터를 돌아봐 주지 않는다. 오히려 도련님의 눈치를 보며 레스터에게 더한 무시와 냉대를 반복할 뿐이다. 아파도 찾아와 걱정해 주는 이가 하나 없다. 스스로 약을 먹고 나아야만 한다. 도련님이 오지 않아 하인들의 사소한 괴롭힘을 받는 게 차라리 행운이다.

지독한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감기에 걸려 콧물을 흘리기라도 했다간 벌거벗긴 채로 눈밭으로 내쫓겼다. 도련님에게 말실수했던 레스터는 욕조에 머리가 처박힌 채 물고문을 당했다. 한 번은 도망을 치려다가 머리채를 붙잡힌 채 끌려왔다. 이후로는 창문을 여는 것조차 감시를 받으며 숨 막히게 살았다. 레스터의 고통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오히려 조롱받았다. 도련님이 나이를 먹을수록 폭력은 점점 더 심해졌다. 도련님의 머리가 커질수록 잔혹성은 수위를 모르고 높아만 졌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도 전에 레스터는 희망을 완전히 꺾었다.

어느 날, 도련님은 잔뜩 얻어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레스터를 내버려 두고 방을 나갔다. 초점이 나간 눈을 한 레스터에게 꿈을 지켜보던 레인이 다가갔다. 악몽 속에 완전히 빠진 레스터는 도련님과 레인을 구별하지 못했다. 가물가물한 시선으로 두려움에 떨면서 레인을 올려다본다. 레인은 레스터를 일으켜 피를 닦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었다. 무척이나 드문, 없다시피 한 다정한 손길에 혼란스러운 눈으로 레스터가 레인을 보았다.

“왜…….”

호의가 오히려 사람을 약하게 만들 때가 있다. 레스터가 눈물을 흘렸다. 이전의 당당한 모습은 흔적조차 없이 그저 힘없고 나약한 모습이다. 레스터가 그대로 일어나 몸을 돌리려는 레인을 붙잡았다.

“내, 내가 대체 뭘 잘못한 건데?”

처절한 질문을 들으며 레인은 거짓말처럼 행동을 멈췄다.

‘네가 뭘 잘못했는데?’

오열하는 레인에게 카이렌이 던졌던 질문이 되돌아왔다. 설마 똑같은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레인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뭘 잘못했느냐고? 수십 수백 가지의 이유를 댈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인은 악의를 쏟아 내는 대신에 부드럽고 상냥하게 웃었다.

“네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래……. 내가 뭘, 뭘 잘못했느냐고……. 고칠게. 고칠 테니까…….”

“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어.”

말을 자르며 레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과거에 카이렌에게 그 말을 들었던 레인은 끔찍하게 절망하며 오열했었다. 차라리 원인 있는 악의가 낫다. 저 자신이 잘못도 없는데 이유 없이 쏟아지는 악의가 더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차라리 뭔가 잘못했다면 자책이라도 할 텐데, 아무 잘못 없이 그저 유린당하는 걸 알아서는. 제 인생이 부서진 게 누군가의 장난으로 유린당했을 뿐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레인이 방을 나가고 나서 레스터는 지겹게 이어지던 생을 창문에 몸을 던져 끊어 냈다.

그러나 이건 악몽일 뿐이다. 악몽 속에서 한 번의 생이 끝나고, 레스터는 다시 한번 악몽 속에서 되살아났다. 이건 고작 레스터가 별거 아니라고 치부했던 레인의 삶을 따라 하는 꿈일 뿐이다. 그 꿈을 버티지 못하고 레스터는 매번 무너졌다. 고작 몇 달 만에 죽어 버릴 때도 있었고, 몇 년을 더 버틸 때도 있었지만 10년을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똑같은 삶을 반복하며 레스터의 정신은 그야말로 박살 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꿈은 꿈일 뿐이기에. 미쳐서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레스터를 버려두고 레인은 그대로 현실로 빠져나왔다. 레스터에게는 몇 십 년이지만 현실에서는 고작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바닥에 쓰러진 레스터의 몸은 온통 식은땀에 젖은 채 계속해서 신음하고 있었다. 꿈에 시달리는 현실의 레스터가 괴롭게 바닥을 기며 목을 긁었다. 차라리 죽여 달라는 듯이 스스로의 목을 옥죄어 보지만, 현실 감각이 없으니 힘이 들어갈 리 없다. 끝낼 수 없는 악몽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앞으로 몇 번의 생을 반복해야 육신의 죽음이 찾아올까. 레인이 잠시 생각하는 몇 초 동안에도 레스터는 몇 번의 죽음을 맞았을 터다. 고작 몇 번, 몇 십 번으로는 부족하다. 몇 천, 몇 만 번이 이어지리라.

고통 때문에 신음하면서 절망에 흐느끼는 레스터의 모습은 익숙한 동시에 너무도 어색했다. 원래대로라면 저 자리에서 고통받았을 자는 레인이었다. 역할이 완벽하게 뒤바뀌었다는 기묘한 만족감이 차올랐지만, 여전히 복수를 달성했다는 성취감과 흥분감이 몸 안을 팽팽하게 돌기에는 부족했다. 과연 이 어설프게 차오른 만족감이 완벽하게 채워질 일이 있을까? 레스터가 영원히 고통받는다고 해도 레인이 받았던 상처가 없던 일처럼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레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아 당혹스럽다.

그러던 와중에 벌벌 떨던 레스터의 손이 허공을 휘젓다가 레인을 붙들었다. 아직 꿈속에 빠져 있으니, 무언가 정확하게 알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상대가 레인임을 알았다면 손을 뻗지 않았을까? 하지만 레스터가 보여 준 환상 속에서, 레스터는 제 원수인 유르딘에게도 애원한 적이 있었다. 약자가 내미는 손길은 언제나 무용하다.

레인도 도와 달라고 빌었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레스터가 레인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해도 그걸 잊고 도움을 청할 정도로 레인은 절박했다. 만약 레스터가 레인을 도와줬다면, 증오도 잊고 유르딘이 아닌 레스터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무시하고 짓밟는 선택을 한 게 레스터였다. 선택이 불러온 결과였다. 레인은 제게 구원을 갈구하는 손길을 짓밟았다.

“……후.”

레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기서 괜히 심란해하며 시간을 오래 끌 필요는 없었다. 레인은 이내 레스터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레인에게는 이미 쓰러진 레스터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남아 있었다. 아직 유르딘을 구하지 못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길게 심호흡한 레인은 피가 흐른 상처에 정신을 집중했다. 상처를 낫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자, 치유 마법에 대한 지식이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흘러들어온다. 레인은 지식을 그대로 행했다. 이 공간에 퍼져 있는 마력이 조금은 어설픈 레인의 마법을 보조한다. 피가 흐르던 상처가 거짓말처럼 아물었을 뿐만 아니라 잔뜩 흘렸던 피 또한 어느 정도 수복된 것인지 창백한 얼굴에 순식간에 생기가 돌았다.

무작정 찾으러 갔다가 또 어떤 위험에 직면할지 모른다. 이 마법진과의 연결이 끊어진 뒤에도 이 지식이 온전히 떠오를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기억해 둔 이상 다시 재현할 자신은 있었다. 레인은 머릿속으로 미리 몇 가지 마법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그렇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지식을 외고 또 외웠다. 모든 마력을 짊어지고 제어할 수 있게 된 레인의 힘은 매우 강력해서 이기지 못할 게 없을 것 같았지만, 만에 하나 마법진의 제어를 잃게 되는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야만 했다.

애초에 이 상황을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확실히 마법진과의 연결은 강력한 만큼 몸에 부담이 간다. 괜히 레스터가 제 몸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변형시킨 게 아니다. 레인 자신의 마력인 만큼 레스터보다야 버티기는 수월했지만 쉽지만은 않다. 흐르는 마력이 아무리 원래 제가 갖고 있던 것이라고 해도 한참을 모아 온 것이니 원래 지닌 양보다 많은 데다가, 몸속에 고여 있을 때와 다르게 지금은 쉼 없이 직접 몸을 드나드니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이대로 제어를 포기하고 마법진을 잠재울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럴 때는 아니었다. 이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니.

레인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게 아니라 마법으로 확장된 시야는 벽을 뚫고 한없이 확장된다. 마법진이 발동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법 때문에 변형된 공간은 원래의 형체에서 완전히 벗어나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기괴하게 확장되고 뒤틀려 있었다. 공간을 억지로 잡아 늘이고 줄이느라 거기에 휘말린 이들이 보였다. 갑작스레 내려온 벽이나 수직으로 꺾여 버린 복도 때문에 깔려 죽거나 떨어져 죽은 기괴한 시체들이 보였다.

마음이 불안하게 덜컥거린다. 시선이 점점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레인은 마침내 공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유르딘을 찾아냈다. 이대로 곧장 곁으로 가면…….

“레인!”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카이렌이 여기까지 쫓아왔다. 쓰러진 레스터와 레인을 보고 상황을 짐작한 얼굴이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이쪽으로 달려온다. 레스터와 똑같은 꼴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걸까? 아니면 놓치느니 차라리 죽을 각오로 붙잡아 보겠다는 걸까. 카이렌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레인은 그와 말을 섞으며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레인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한 사람뿐. 평생 증오한 상대조차 그 마음 앞에서는 빛이 바랜다.

마력을 움직였다. 주변이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어딘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는 카이렌의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이 레인은 유르딘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유르딘이 있는 장소는 텅 빈 공동이었다. 넓게 펼쳐진 공간만큼이나 천장도 높았다. 빛 한 점 없는 압도적인 어둠 아래에서 유르딘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다. 유르딘의 옆얼굴이 시체처럼 파리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넘어질 뻔하면서 레인은 유르딘에게로 달려갔다. 간신히 유르딘에게 도달해 옆에 주저앉고 나서도 온몸이 벌벌 떨렸다. 이미 모든 게 늦어 버렸을까 봐 두려웠다. 조심스레 코끝에 손을 대 보자 희미하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아…….”

작은 한숨이 레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안심하자마자 온몸의 힘이 쭉 풀렸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유르딘의 몸은 강력한 마법에 짓눌린 채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다. 쓰러지기는커녕 다치는 일도 없었던 남자의 부상이니 가슴 아플 수밖에 없었다. 레인은 필사적으로 유르딘을 치료했다. 동요한 탓인지 몇 번이나 마력이 엉망으로 흐르고 마법진의 제어를 놓칠 뻔한 걸 간신히 붙잡았다. 엉망이 된 몸이 조금씩이나마 나아 가는 걸 보면서 레인은 유르딘의 손을 붙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에도 점점 온기가 돌아온다.

“유르딘.”

꺼질 듯이 작은 부름에 호응하듯, 힘들게 찾아온 레인을 환영하듯이 유르딘이 천천히 눈을 떴다. 레인을 발견한 유르딘이 말라붙은 입술을 열었다.

“레인.”

사랑하는 이를 확인한 유르딘의 눈이 서서히 환희에 물든다. 어둠 속에서 레인이 초라하게 밝혀 둔 빛 아래에서도 유르딘의 금발은 눈부시게 빛이 났다. 그 아래 녹음을 닮은 눈은 한결같이 깊은 애정을 품은 채 레인을 가득 담는다. 잘 깎아 만든 조각처럼 아름다운 모습보다 레인을 즐겁게 만드는 건 그가 품은 한결같은 애정이었다.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 아름다워야 할 모습.

유르딘이 천천히 미소 짓는 걸 보면서 레인은 마주 웃었다. 반쪽짜리 웃음이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 간신히 표정만 바꿨을 뿐인 미소는 어색하게 일그러져 있다. 그런 레인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르딘이 몸을 일으켰다. 어설픈 손길로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더니 그대로 바닥을 짚고 손에 들어간 힘을 가늠하다가 상체를 세운다. 마치 처음 해 보는 행동처럼 신중한 움직임이다. 레인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유르딘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천천히 유르딘이 손을 뻗어 레인을 끌어안았다.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시 끌어안지도 못한 채 레인은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만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다. 닿아 오는 손길이 무서울 정도로 끔찍하다.

눈앞의 남자는 유르딘이 아니다.

유르딘이 아닌 것이 다가왔을 때 구별하지 못하면 어쩌나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유르딘과 유르딘이 아닌 자 사이의 차이가 확실했다. 그 차이만큼 레인은 확신했다. 눈앞에 선 남자는 절대로 유르딘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 어떻게 감쪽같이 뒤바뀌었단 말인가? 정말 이 남자가 유르딘이 아닌 게 맞는 걸까? 유르딘을 볼 때마다 견고한 확신이 조금씩 흔들렸다.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유르딘이라고 확신했다. 사라질 때와 같은 모습, 같은 상처, 같은 눈빛……. 모든 게 같다고 생각했는데. 진실을 확인하는 게 두려워 레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레인을 도닥이던 남자는 마침내 인내심이 떨어졌는지 제가 먼저 느릿하게 몸을 조금 떼어 냈다. 남자는 얼굴에 떠오른 가식적인 다정함을 거두고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레인을 살핀다. 레인은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했다. 남자는 천천히 레인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공포에 질린 레인의 상태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부터 들이댄다. 숨결이 닿고, 시선이 맞닿는다. 뭘 품었는지 알 수 없는 깊이 모를 어둠을 품은 시선에 레인은 이를 악물었다.

입술이 맞물리기 직전에야 레인은 남자를 세게 밀쳐 냈다.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난 남자는 한 손으로 턱을 감싼 채 손끝으로 뺨을 쓸었다. 더는 숨길 생각도 없는지, 남자는 유르딘의 얼굴을 한 채로 비열하게 웃었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자는 오직 하나뿐이다. 레인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미엘 데이막.”

떨리지만 확신을 품고 있는 목소리에 미엘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모르는 척하면 좋았잖아. 너나 나나 둘 다 좋고, 일도 간단하고.”

“닥쳐.”

“왜 거부해? 그냥 받아들이면 편할 텐데.”

“닥치라고!”

참지 못하고 소리 지른 레인은 유르딘의 모습을 하고 있는 미엘의 멱살을 붙잡았다. 가짜 따위, 아무리 대단한 마법을 지닌 악마라 한들 지금의 레인이 이기지 못할 리 없었다. 레인의 마력이 마법으로 얽혀 폭발이 일어났다. 그러나 정작 거대한 마력은 두 사람의 몸을 스치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스러졌다. 거친 폭발은 레인의 머리칼만 온통 흩트려 놓았을 뿐이다. 이전에 흘린 피와 먼지로 뒤덮여 있지만 새로 난 상처 없이 멀쩡한 얼굴로 미엘은 낮게 웃었다. 그는 제 멱살을 쥔 레인에게로 고개를 숙인 채 말라붙어 다 뜯어진 입술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익숙한 체온이 입술 위에서 녹아내린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이제 더는 거슬릴 것도 없어. 괴로운 게 싫다면 앞으로는 네게 잘해 줄게. 네가 좋아하는 건 다 알고 있는걸.”

“…….”

“이 몸도 네가 좋아하는 남자의 몸이고 말이야.”

미엘의 말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처음부터 레인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저 믿고 싶지 않을 뿐이다. 처음부터 들었던 유르딘이 맞다는 확신, 그리고 미엘이 눈을 떴던 순간부터 느껴지던 위화감……. 그 모든 게 자연스레 연결되고 앞뒤가 맞는데도 레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자연스레 떠오르는 추론을 부정하며 레인은 고집스레 물었다.

“유르딘은, 유르딘은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됐을까?”

애써 현실을 부정하려 드는 모습이 퍽 귀엽단 듯이 미엘은 되물었다. 레인이 대답하지 못하자 여유롭게 말을 잇는다.

“내가 이 몸을 빼앗았어. 이건 네가 사랑하는 그자의 몸이야. 네 덕이 컸어. 네가 그자를 밀어낸 덕에 정신에 틈이 생겼거든.”

“……그러면 유르딘은…….”

“내게 밀려 몸의 주도권을 빼앗겼어. 네 이복형처럼 영원한 꿈을 꾸고 있을지도 모르지.”

손에서 힘이 빠졌다. 무언가 이 상황을 타개할, 복수할, 무언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싶은데. 미엘의 말이 레인을 조각낸다. 세상이, 레인의 전부가 박살 나 곤죽으로 비벼진 양 사고와 감정들이 어지러이 뒤섞여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지경이 됐다.

다리에도 힘이 풀려 아예 바닥에 쓰러지려는 레인의 몸을 미엘이 끌어안았다. 육욕을 품은 채 망가지는 레인을 즐겁게 바라보는 눈동자는 유르딘과는 어느 한 구석도 닮지 않았다. 그대로 밀쳐 내려고 했지만, 끌어안긴 품 안에서 유르딘의 체향이 났다. 돌아 버릴 정도로 기억과 똑같다. 익숙한 그리움 사이로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났다. 치유 마법은 썼지만 완벽하게 아물지 못한 상처가 유르딘의 몸에 남아 있었다. 미엘이 유르딘의 몸을 무리해서 움직인 탓에 도로 벌어진 상처에서는 피가 뚝뚝 흘렀다. 끝까지 밀어내지 못하고 멍하니 올려다본 얼굴은 미엘의 오만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핏기가 빠져 온통 창백했다.

미엘은 유르딘의 몸을 아껴서 다루지 않는다. 그리 곱게 다룰 이유가 하나도 없다. 멀쩡한 척 굴고 있지만, 감옥 아래로 내려올 때부터 유르딘의 부상이 상당했으니 위험한 상태일지도 몰랐다. 미엘은 괴로워하는 레인의 손을 잡아끌어 피가 흐르는 상처 위로 얹었다. 레인이 놀라서 몸을 떨었다. 행동이 말하는 의미는 명확하다. 따를 이유가 없다. 이건 미엘이 차지한 몸이다. 그러나 동시에 유르딘의 몸이었다. 갈등은 길지 않았고, 실행은 훨씬 더 빨랐다. 레인의 손 안에서 마법이 맺어지고 벌어진 상처가 치유됐다. 미엘이 웃었다. 유르딘의 미소였다. 그걸 보며 레인은 차라리 미쳐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무 절망하지는 마. 아직 완전히 죽어 버린 건 아니니까. 나랑 같이 네 곁에 영원히 있어 줄 거야.”

희망이 절망보다 나쁠 때도 있다. 희망이 남아 있으면 미련이 샘솟아 도피처를 차단한다. 관두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품고 있는 희망이 이루어질 거라고, 그 바늘구멍처럼 작은 희망에 매달린 채 가진 칩을 거는 걸 멈추지 못한다. 미엘의 말을 들으며 레인은 제 처지를 깨달았다. 미엘이 유르딘의 몸을 인질로 잡고 그를 판돈으로 올린 이상, 이미 레인에게 승리의 수는 사라졌다.

“유르딘을 돌려받고 싶어?”

미엘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여유롭고 확신에 찬 목소리는 스스로 질문하면서도 답을 확신하고 있다. 미엘이 쏟아 내는 말은 모조리 뻔한 수작이란 걸 알면서도 레인은 대답하지도 반박하지도 못했다. 침묵하는 레인의 어깨에 손을 얹은 미엘은 다른 한 손으로 레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더니 마치 선생님이 일러 주듯 친절하게 레인의 팔을 들어 허공을 향해 뻗도록 만든다.

“내 말을 잘 들으면 돌려줄게. 자, 위를 봐.”

돌려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레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영원히 이어질 밤처럼 어두운 어둠이다. 그러한 어둠 속에서 레인의 마력에 감응해 허공에서 희미한 빛이 별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작은 덩어리로 떠오른 빛 무리가 허공을 가르더니 원과 직선을 그려 낸다. 빠르게 허공을 오가는 마력의 빛은 이 공간이 기억하고 있는 궤적을 따라간다. 빛이 어지러이 움직일 때마다 정교한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진은 제각각 복잡한 마법을 그려 내고 있었다. 그 마법을 반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건 그럭저럭 알아볼 수 있었다.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는 마법진이 이 공간을 유지하고 있는 마법의 핵심이다. 허공을 가르며 수백 겹으로 쌓아 올린 마법진은 마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레인이 보기에도 엄청났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을 법한 마법진이다.

잠시 혼이 팔려 있던 레인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어떻게든 레인이 유르딘을 도울 방법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지식을 좇으려 드는 순간, 순식간에 마법진에서 지식이 쏟아져 들어온다. 방대한 지식은 오히려 깊은 절망을 불러왔다. 수많은 지식 중에 유르딘에게 도움 될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악마는 깊은 절망을 품은 인간 틈에 파고들어 몸을 차지한다. 주도권을 빼앗긴 순간부터 인간은 몸의 주인이 아니게 된다. 몸을 빼앗긴 인간은 악마와 몸의 주도권을 다투게 되지만, 대부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품고 있던 절망에 압사한다. 깊은 절망을 품은 순간에 레인이 유르딘의 손을 쳐 내 그에게 더한 절망을 선사했다. 악마가 인간의 몸과 완전히 융화하길 시도했다면 돌려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만약 돌려줄 수 있는 상태라 몸을 돌려준다고 해도 원래대로 돌아오리란 보장도 없다. 혼이 나간 빈껍데기가 될 확률도 높았다. 레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긴, 방법이 있었다면 미엘이 가만히 보고 있었을 리 없다. 알면서도 미련스레 집착했다.

마법진이 모든 형태를 그리자마자 레인의 손목을 쥔 미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이계의 문을 열어. 800년 전에 강제로 닫힌 문을 다시 여는 방법을 생각해. 너라면 할 수 있어.”

레인이라면 할 수 있다는 말은 레스터로는 조금 부족했다는 걸까. 레스터가 레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여기에 찾아오는 것까지 미엘은 처음부터 모두 계산했었을까? 미엘의 치밀함과 악랄함에 치가 떨렸다. 레스터는 확실히 자멸한 것이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 과정은 조금 허술하다. 딱 봐도 불안한 상태의 방치다. 회귀한 이후 계속 함께 지내 왔다면 레스터의 상태를 몰랐을 리가 없다. 조금만 신경을 썼어도 레스터의 자멸은 쉽게 막을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 미엘이 레스터와의 계약을 어긴 건 아니다. 모든 걸 파악한 채 주변을 이용했을 뿐.

애초에 이건 이기는 게 불가능한 게임 아닌가? 레인은 미엘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에 대해 모른다. 레인은 미엘 데이막이 가지고 있을 패도, 하물며 게임의 규칙조차도 몰랐으니 예정된 패배였다. 중간의 변수에 약간 당황했을 뿐, 애초에 그는 이길 게임으로 판을 짰다. 간신히 어떻게든 이겼던 그날의 체스와는 다르다. 미엘이 진 건 그때뿐.

“……빚을 졌다고 했었지.”

“체스?”

바로 알아듣는 걸 보니 기억력이 범상치 않거나, 또는 그 일이 중요한 일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미엘의 반응은 후자였다. 미엘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도 참 재수 없게도 웃었다.

“이제 와서 그게 궁금해? 아니면 시간을 벌 생각인가?”

둘 중 어느 쪽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된 거 생각할 시간을 벌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승리했다는 확신이 있으므로 미엘에게는 레인을 상대할 여유가 있었다.

“어차피 이건 네가 이길 게임이었어. 왜 나랑 체스를 두고 내기를 한 거야?”

“나라고 모두 의미를 두고 행동하는 건 아니야. 체스 좋아하니까. 설마하니 질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왜 굳이… 빚이니 뭐니, 그런 말을 했지? 그것까지 이용하려고?”

체스는 장난으로 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친구처럼 지내던 두 사람 사이의 체스 승패에 굳이 빚을 졌다는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미엘은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원의 주체인 너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사람은 다르지. 기억이 허투루 돌아온 건 아니야. 내기의 결과로 되돌려 준 거야.”

“유르딘의 기억을?”

“그놈이 얼마나 성가신데 기억을 살리겠어? 그놈이 제멋대로 기억해 낸 사고지.”

“……사고?”

미엘은 인상을 찌푸릴 뿐 그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내가 내기의 결과로 기억을 살린 건 레스터야. 상황을 알고 있고, 네 근처에 있으며, 내게 협력할 만한 인물인 동시에 권력도 적당히 지니고 있는 상대. 네 아버지를 이용할까도 생각했지만, 그자는 의심이 많아서. 레스터가 만약의 경우에 내가 활용하기에는 최적의 패였지.”

“……빚을 졌다고 했잖아. 그러면 내게 유리하게 해야 하는 거 아냐?”

“계획대로 됐다면 조금 더 온건한 방법을 썼겠지. 매일 얻어맞고 강간당하는 최악의 처지보다는 나아졌을 테니까 빚을 갚았다면 갚은 게 됐을걸.”

“개자식…….”

결국 또 제멋대로 소원 들어주기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뻔뻔하게 지껄이니 욕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딱히 그가 좋아지라고 한 말이 아닌데 미엘은 레인의 욕설에 만족해 배부르게 웃었다. 그러나 느긋한 여유도 잠시였다.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는지 안 그래도 세게 잡혀 있는 손목에 통증이 왔다. 유르딘의 몸이라 그런 것인지 몰라도 힘이 더럽게 셌다.

“대답해 줬으니 마저 하던 일을 할까.”

이대로 모른다고 잡아떼고 싶었지만, 레인의 마력이 마법진과 감응할 때마다 착실히 이계의 문에 대한 지식이 스며들고 있었다. 미엘이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초부터 이 마법진 자체가 그 ‘이계의 문’을 닫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일전에 미엘이 말했던, 레인보다도 강력한 마력을 지닌 옛 시대의 대현자가 이 마법진을 만들었다. 대현자는 악마와 계약해 자신과 주변을 파멸로 몰아넣는 인간들을 안타까워했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이 세계를 인간들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대현자의 소망은 이루어졌다. 인간과 이종족의 세계를 가르기 위하여 세계 전체를 뒤덮었던 대마법은 영원히 세계에 남아 이어진다는 점에서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릴 뿐인 마법보다도 강력했다. 애초에 레인이 손댈 수 있는 수준의 마법이 아니다. 다만 흐름을 바꿔서 잠깐 닫혀 있는 문을 여는 정도는 어떻게든 가능할 법도 했지만, 정보의 끄트머리에서 대현자의 강력한 의지가 읽혔다.

후대의 마법사여, 부디 이 세계의 평화를 깨트리지 말기를.

이 마법을 부수는 것은 레인 혼자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계의 문이 열리면 미엘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힘을 지닌 존재들이 다시 이 세계에 자유롭게 쏟아져 들어온다. 옛 시대에는 대항할 마법사라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조차 없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레인 대신에 미엘이 주문을 외웠다. 이질적인 마력이 흘러들더니 마법진 위에 가느다란 검은 선이 생겨났다. 저 가느다란 선이 미엘이 원래 살던 세계로 향하는 문이라는 걸 마법진과 연결된 레인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닫혀 있는 문은 조금씩 벌어지며 어둠을 토해 낸다. 그러나 아래에 떠오른 마법진이 틈을 계속해서 틀어막는다. 문을 열기 위해서는 레인이 행하는 마법이 필수 불가결했다.

“자, 그럼 이제 문을 열어.”

문을 본 것만으로도 미엘은 잔뜩 흥분했다. 귓가에 닿는 숨이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온 열망과 그리움에 가득 차 흥분해 있었다. 환희. 레인의 절망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자리한 감정이 눈앞에 번뜩이는 마력만큼이나 선연하다. 레인은 주먹을 피가 나도록 꽉 쥐었다. 간신히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승자는 미엘이었다. 패배자인 레인은 선택지가 없다. 승자의 규칙에 지배당해 목줄 묶인 개처럼 끌려갈 뿐이다. 그 시절과 결국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정말로, 그 방법밖에 없나?

레인은 제 손목을 마치 족쇄처럼 붙든 손을 쳐 냈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을 보는 레인에게 서서히 독기가 차올랐다.

“내가 언제까지나 네 뜻대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래, 그래.”

조금도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미엘이 레인을 조롱한다. 개가 주인을 물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그는 결국 레인이 자신의 말을 따를 것을 알고 있었다. 미엘이 봐 온 레인은 그랬다.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는 한 레인은 그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누가 봐도 절망뿐인 삶인데 언젠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소망하고, 유르딘을 본다고 제 인생이 나아질 것도 없는데 그를 목표로 삼았듯이. 유르딘이 제 곁으로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레인은 포기하지 못하고 미약한 희망에 매달리곤 했다.

그러나 레인은 미엘을, 그가 차지한 유르딘의 육체를 노려보았다.

“이대로 널 죽일 거야.”

원래대로라면 떠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가정을 레인은 자연스레 입에 올렸다. 유르딘의 육체를 빼앗은 미엘을, 그 육체까지 통째로 죽일 거라고 선언했다. 미엘은 아주 우스운 소리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레인?”

“그래. 죽고 싶지 않으면 거기서 나와.”

“어디 한 번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

레인 또한 미엘이 제 말을 듣고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가 듣기에도 유르딘의 몸을 되찾기 위한 발악으로만 들리는 말이었으니까. 미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순순히 미엘의 말을 따라 이계의 문을 연다고 해도 그가 순순히 유르딘을 돌려줄 리가 없었다. 미엘의 방식대로라면 이대로 또다시 레인을 질질 끌고 다니며 농락하려 들 게 뻔했다. 지금도 유르딘을 돌려주겠다는 말을 확실하게 끝맺은 적이 없지 않나. 애초에 미엘은 레인을 존중하지 않는다. 협상이라며 들이미는 건 모두 하찮은 말장난뿐이다.

유르딘을 돌려받을 수 없다. 복수는 성공할 수 없다. 레인은 모든 것에 실패한 패배자가 되어 영원히 혼자가 된다. 표독스레 얼굴을 굳히고 이를 악문다. 레인의 마법이 미엘을 스쳐 바닥에 내리꽂혔다. 단단한 바닥은 너무나도 쉽게 반으로 쪼개진다. 스치기만 해서 깊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피가 흐르는 상처가 났다. 대범한 공격에 그제야 미엘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너…….”

“죽인다고 하고 있잖아. 왜 놀라?”

“제정신이야?”

“다음에는 머리를 노릴 거야.”

미엘이 진위를 가늠하기 위해 레인을 관찰하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얼마든지 관찰하라지. 거짓 하나 없는 진심이니까. 모든 게 실패할 거라면 최소한 한 가지는 성공해야 옳지 않겠는가? 애초에 복수를 입에 올리면서 행복을 입에 올리던 어설픔과 무름이 레인의 패인이었다. 유르딘은 레인의 손에 단 것만을 쥐여 주고 이 세상 풍파는 대신 겪으면서 헌신적으로 그를 지켰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유르딘은 곁에 없다. 이제는 혼자 선택해야만 할 때다.

양자택일의 순간 레인이 선택한 건 복수였다. 선택한 순간부터 뒤로 물릴 수 없다. 비록 완벽한 만족이 찾아오지 못할지라도, 복수보다 더 큰 상실에 몸부림치게 되더라도. 레인은 모든 걸 바쳐서 복수를 이룰 생각이었다. 유르딘에게서 보지 않았나. 완벽한 복수란 제 모든 것을 불사를 각오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유르딘은 레인의 전부였다. 그러니 레인은 하나만 버리면 됐다.

“그 몸째로 너를 죽일 거야.”

제가 하는 말이 뻔뻔해서 레인은 허탈하게 웃었다. 유르딘이 해 준 게 얼마나 많은데 죽이려 들다니. 유르딘이 자신을 원망하고 매도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해 줄 유르딘조차 지금은 미엘에게 휩쓸려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의식이 남아 있는지 행방조차 몰랐다. 게다가 유르딘이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레인에게 찬동할 게 뻔했다. 레인이 고통받느니 저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통째로 부숴 버리라고 할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레인이 밀어냈다. 그런 사람을 미엘이 먹어 치웠다. 이건 레인의 복수임과 동시에 유르딘의 복수였다. 죄지은 놈을 모조리 죽이고 저 또한 파멸할 것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레인을 본 미엘이 그제야 진지해졌다. 그는 뒤늦게야 레인을 설득하려 들었다.

“……이계로 향하는 문을 열고 나면 내가 이자의 몸을 돌려줄 거야.”

“내가 그 말을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어.”

“계약할까? 계약은 어기지 못해. 알잖아?”

“내가 망하는 쪽으로 유도할지도 모르지. 이미 레스터의 전적이 있잖아.”

당황해서 하는 말은 진심이 나올 법도 한데 그조차도 기만이다. 레인은 미엘을 비웃었다.

“사기를 치려면 네 본성을 끝까지 철저히 숨겼어야지. 내가 그렇게 만만했어? 날 놀리는 게 즐거웠어? 네 뜻대로 될 것 같았어?”

“……네가 정말로 유르딘을 죽일 거라고?”

“말장난하려 들지 마. 내가 죽이는 게 아니지. 네가 죽이는 거지.”

사실은 그렇게 명확하게 구별하진 못하겠다. 아무리 미엘이 유르딘의 몸을 뺏었다고 해도 육신의 숨통을 끊는 건 레인이다. 하지만 말 한마디에 넘어가 휘둘려서야 이전과 같은 상황의 반복이다.

“어설프게 흔들리려던 게 내 패인이었지. 확실하게 해야 했어. 누군가를 파멸시키려면 나조차 파멸할 각오를 했어야지. 그게 옳았어. 진작 죽였다면 괜찮았을 텐데.”

진작 내가 죽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레인은 뼈저린 후회를 씹어 삼키며 마력을 끌어모았다. 서서히 모이는 마력의 빛에 무표정한 얼굴 위로 그림자가 져서 뚜렷이 표정을 나눴다. 기쁘면서 동시에 슬퍼하는 듯도 한 기묘한 얼굴이다.

“널 죽이고 내 복수를 이룰 거야.”

“미친놈……!”

이를 악문 미엘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내뱉었다. 그러고는 곧장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주 순간이지만 미엘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레인은 당황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미엘에게로 다가갔다. 화가 치미는지 조금 숨이 거칠어져 붉어진 얼굴이 낯설었다. 미엘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탓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유르딘의 표정을 많이 봤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짧은 시간을 유르딘과 공유했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도 채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시간이다. 우리에게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야 했을 텐데, 왜 여기까지 온 걸까.

그저 사랑하고 싶다. 그게 불가능해졌다면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비록 겉모습뿐이라도 붙잡고 있고 싶었다. 레인은 저를 바라보는 미엘에게, 정확히는 유르딘의 몸에 입을 맞추며 손을 맞잡았다. 다정한 미소나 맞닿은 체온과는 어울리지 않는 파괴적인 마력이 레인의 등 뒤로 모이고 있었다. 레인이 이 마법진에서 읽어 낸 공격 마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마법이었다. 인간의 육신 따위는 아무리 단련했다 하더라도 한 순간에 가루로 만들 정도의 힘이다.

미엘이 필사적으로 레인의 손을 떨쳐 내려 했지만, 마법으로 얽힌 손은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데도 떨어질 줄을 모른다. 마력이 모여들며 내는 기괴한 소리에 미엘의 비명이 파묻혔다. 마침내 마법이 완성됐다. 미엘의 표정이, 유르딘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드는 모습까지도 레인은 눈을 떼지 않고 응시했다.

“안녕.”

종말을 고하는 말이었다. 미엘은 최후를 인정하지 못하는 얼굴로 끝까지 마법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레인의 마법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레인은 정작 유르딘에게 작은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하.”

그제야 맥이 풀린 미엘이 잔뜩 굳어 있던 몸을 펴고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손을 얽매던 마법이 풀렸다. 잔뜩 긴장했던 미엘은 휘청거리는 레인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 뒤로 물러났다.

“하, 하하. 하하하…….”

미엘은 여전히 독기 서린 눈을 하고 침묵 속에 서 있는 레인을 조롱했다. 광기의 끝에 맞닿아서조차 레인은 유르딘을 죽일 수 없었다. 레인의 눈이 너무도 미친 사람처럼 번뜩여서 알면서도 잠시 속았다. 미엘은 스스로 안심하기 위해 선언했다.

“넌 못 해.”

“…….”

“못 죽인다고.”

부정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미엘의 말대로다. 어차피 유르딘이 미엘에게 집어삼켜졌고 이제 죽은 거나 마찬가지임을 알면서도 도저히 레인은 유르딘을 죽일 수 없었다. 유르딘은 레인의 복수를 위해 망가졌다. 그런 그를 아예 제 손으로 부수라니, 그런 짓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 대신에.

레인은 새로이 마법을 자아내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만약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죽으려고? 지금의 너는 수백 번은 살아날 텐데.”

언제 평정을 잃었었냐는 듯이 미엘의 태도가 평온했다. 레인은 미엘에게 필요한 존재이지만, 어차피 되살아나는 레인의 죽음은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죽음이 최악의 상황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죽으면 지금 마법진을 제어하던 게 일시적으로 끊어져 레스터가 정신을 차리고 마법진의 제어를 되찾을지도 모른다. 방금 전까지랑은 전혀 다르게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부추기는 미엘의 태도만 봐도 레인의 죽음이 좋게 작용하지 않을 거라는 건 뻔했다.

“괜히 힘 빼지 말고, 레인.”

무게감 없는 충고를 무시하고 높이 들어 올리는 레인의 손 안으로 커다란 마력의 창이 솟아났다. 해 볼 테면 해 보란 듯이 구경하는 미엘을 보면서 오히려 마음을 다졌다. 레인은 서두르지도 않았다. 마치 연극의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란 듯이 마력을 세우고 레인은 그걸 제게 겨눴다. 얼마나 아플까. 고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레인은 위협적인 마력의 창을 제 몸으로 내리꽂았다.

이를 막는 손이 있었다.

피가 튀기 직전에 크고 단단한 손이 레인을 붙들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참담한 일을 본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마력이 레인의 것인데도, 그는 레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위험에 처한 연약한 사람인 양 레인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제 뒤로 숨겼다. 그리고 곧장 남자의 검에서 새카만 빛의 오러가 뻗어 나가 어둠을 갈랐다.

“……무슨…….”

남자가 가른 건 제 몸에서 튕겨 나온 악마였다.

눈 깜빡할 사이에 유르딘의 몸에서 튕겨 나온 미엘은 어깨부터 허리까지 사선으로 난 상처를 움켜쥐며 뒷걸음질 쳤다. 의문에 가득 찬 얼굴을 레인은 비웃었다.

“놀란 얼굴이 보기 좋네.”

“…….”

고통보다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한 충격이 미엘을 몰아붙였다. 확실히 점령했다고 생각한 몸을 도로 빼앗겨 몰리는 상황이 될 줄은, 게다가 제 예상대로만 움직일 줄 알았던 레인이 놀라지도 않고 만족스레 웃을 줄은 상상도 못 한 표정이다.

레인의 자살 시도는 작은 추측에 모든 걸 건 도박이었다. 레인이 미엘을 유르딘의 몸째로 죽이려고 했을 때 레인은 작은 이상을 깨달았다. 남의 육체로 멋대로 들어갈 수 있다면 멋대로 나올 수 있는 것도 당연했다. 필시 살해당하는 대신 몸을 도로 버리고 도망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미엘은 도망치지 않았다. 당황한 표정이 마치 도망에 실패한 모양새였다. 처음부터 유르딘의 육체와 완전히 융화했던 거라면 애초에 도망치는 걸 시도할 필요가 없었을 테고, 그저 잠시 몸을 장악했을 뿐이라면 도망도 자유자재일 테니 도망치지 못하고 당황할 필요도 없을 텐데.

혹시 유르딘의 의식이 남아서 미엘을 붙잡아 두는 건 아닐까?

유르딘은 레인의 적이라면 제 몸을 살라서라도 죽이려 드는 남자다. 아직 의식이 남아서 최소한 몸을 되찾지 못하더라도 레인의 적을 확실히 죽여 둘 수 있도록 도우려던 거라면. 아직 유르딘이 제 몸을 움직일 정도의 힘이 있고, 되찾을 가능성이 있다면? 지나치게 희망적인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레인이 쓸 수 있는 수는 하나뿐이었다.

레인은 유르딘을 믿고 최후의 도박을 걸었다. 이전부터 레인이 다치는 일이라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비극으로 여기는 남자가 유르딘이다. 레인이 제 손으로 죽으려 든다면, 자학에 불과한 미약한 저항보다도 더 강력한 의지를 내세워 분명히 레인을 구하러 오리라고 생각했다.

도박은 성공적이었고, 유르딘은 몸의 주도권을 되찾아 돌아왔다. 레인은 제 오만으로 계약자를 버리고 상처 입은 악마를 노려보았다. 미엘의 피가 바닥에 떨어져 녹아내린다. 허공에 뜬 마법진이 진동하며 낮게 위협적인 소리를 낸다. 상황은 완벽하게 역전됐다. 더는 수가 없다는 걸 깨달은 미엘이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보다 빠르게 유르딘이 미엘에게 검을 내리꽂아 고정했다. 검은 오러가 서린 검에 정통으로 꽂힌 미엘은 괴롭게 비명을 질렀다.

“이……. 빌어먹을……! 너, 너! 감히 내 마력을… 가져갔…….”

그러고 보니 이전까지는 새하얗던 유르딘의 오러가 불길한 빛으로 검게 물들어 있었다. 불길한 마력이 흐르는 오러는 저주가 되어 미엘에게 낫지 않을 고통을 선사했다.

“잠깐 남의 몸을 빌려 쓴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해. 내 몸을 쓴 것치고는 싸게 먹혔군.”

욕설과 저주를 퍼붓기 위해 입을 벌렸던 미엘의 입으로 또다시 유르딘의 검이 처박혔다. 검이 목을 꿰뚫었는데도 인간이 아니라 그런지 미엘은 의식조차 잃지 않았다. 그래도 고통스럽기는 한 모양인지 부릅뜬 두 눈이 붉게 물들고 피가 덩어리처럼 뭉쳐 흘렀다.

“레인, 나머지는 부탁하마.”

호응하듯 주변을 흐르던 마력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법진은 레인이 하고 싶은 바를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또는 마법진이 원래 바라던 게 그것이었던 것처럼, 레인의 마력을 동력 삼아 스스로 움직였다. 복잡한 마법진에서 새하얀 마력이 흘러나와 미엘의 사지를 결박하고 짓눌렀다. 미엘이 있는 바닥만이 검은 늪지대처럼 변해 흐물거리기 시작했다. 불길하게 차오른 새카만 어둠이 미엘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도망치려고 했던 미엘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떠오른다. 벗어나려고 해도 꼼짝할 수 없었다. 수백 년간 인간을 이용해 모아 온 마력까지 끌어다 쓰며 발악했지만, 압도적인 힘을 지닌 마법진은 미동조차 없었다. 미엘은 빛 속에서 허우적댔다. 지금까지 모든 걸 조롱하던 악마답지 않게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발버둥 치던 미엘은 필사적으로 아까 살짝 열어 둔 이계의 문틈으로 손을 뻗었다.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멀어지기만 할 뿐인데도 포기하질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수백 년을 꿈꿨던 순간이다. 허무하게 꿈이 무너지다 못해 두 번 다시 빛을 보지 못할 지경이니 처절하게 발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찬란한 빛이 사방을 밝히는데도 미엘이 끌려가는 어둠 속은 빛 한 점 없다.

“다… 다 됐는데, 이제 와서……! 몇 백 년이나 내가, 내가…….”

피 맺힌 한이 공동을 쩌렁쩌렁 울렸다. 순식간에 하반신이 바닥 아래로 잠기고 이제는 가슴 위만이 남았다. 이미 끌려들어 갈 건 자명해 보이는데도 미엘은 포기하지 못하고 바닥을 잡은 채 버텼다. 유르딘이 미엘에게로 다가가 손을 잘라 냈다. 잘린 손은 연기로 변해 사라지고 미엘은 맥없이 바닥으로 끌려갔다. 미엘의 붉어진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한 번 실패했으면, 네 분수를 알았어야지.”

싸늘하게 속삭이는 유르딘의 말에 미엘은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입까지 바닥 아래로 잠겼기 때문이었다. 빛은 쉴 새 없이 미엘을 뜯어 먹고 바닥 아래로 가라앉힌다. 미엘은 마지막으로 원망스레 제가 이용하려 했던 마법진을 노려보았다. 수백 년간 이 자리에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자리할 마법진이 미엘의 머리 위에서 태양처럼 군림하며 빛났다. 아무리 악마의 수명이 길다지만, 이 마법진이 그보다 먼저 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

끝까지 미련스레 이계의 틈을 노려보며 그저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으로 미엘은 완전히 먹혀 사라졌다. 미엘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요란하게 진동하던 마법진이 멈췄다. 그가 억지로 잡아 벌려 놓았던 이계로 향하는 문 또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두 사람만이 남았다.

“……레인.”

그제야 유르딘이 레인을 불렀다. 상처는 치료했어도 두 사람 모두 누적된 피로와 긴장으로 만신창이였다. 하지만 육체적인 요소보다는 두려움 때문에 유르딘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쉽사리 먼저 다가오지 못하는 유르딘에게 레인이 먼저 다가갔다. 레인은 흠칫 놀라는 유르딘에게 손을 뻗어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유르딘.”

“미안하다, 레인. 나는…….”

죄책감 어린 목소리가 레인을 찔렀다. 그가 제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데도. 뻣뻣하게 굳어 미동도 없는 유르딘 대신 레인이 팔에 힘을 줬다. 얼어붙어 있던 체온이 유르딘과 맞닿아 그제야 녹아내린다. 레인은 끌어안았던 팔을 조금 풀고 그대로 유르딘에게 입을 맞췄다. 유르딘은 뻣뻣하게 서 있다가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이러지 말라는 듯이 힘겹게 속삭였다.

“이제 다 알잖나. 내가… 뭘 했는지…….”

유르딘은 차마 그 뒤의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레인이 모든 걸 알았다. 유르딘이 얼마나 끔찍한 살인마인지, 레인의 복수라는 명목으로 화풀이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 모든 일을 벌이고도 뻔뻔하게 살아갈 정도로 얼마나 미쳐 있는 인간인지, 전부 다 알게 됐다. 유르딘이 지닌 광기의 편린만으로도 평범한 인간은 겁에 질려 도망갈 법했다. 그런 모습을 전부 보고서도 차마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미엘에게 오만하게 검을 내리꽂던 무패의 검사는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차마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는 초라한 남자만이 남는다. 레인은 뻣뻣하게 힘이 들어간 유르딘의 목을 제 손으로 문지르며 속삭였다.

“제 복수를 위해 죽였어요?”

“아니, 내 살인에 네 핑계를 댈 생각은 없어.”

“탓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아니면 죽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절 위해 죽인 게 맞잖아요.”

탓하려는 게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추궁이라 생각한 것인지 유르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면서도 거짓말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내가 죽였다. 참을 수가 없어서 모조리 죽여 버렸어.”

전쟁이 이어지고 쉽게 살인하는 왕국에서조차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는다. 고작 그런 이유로 수천 명을 죽인 유르딘은 진작에 미쳤다. 제가 지닌 광기에 휩쓸려 왕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시간을 되돌렸다 한들 한 번 망가진 인간은 되돌릴 수 없다. 여전히 유르딘은 광기에 물든 채였고, 언제든 잔혹하게 타인을 부수고 살해할 만한 인간이었다. 유르딘은 제가 지닌 가장 큰 두려움을 고해했다.

“기억이 돌아왔을 때 생각했다. 이대로 너를 가둬 두면 좋겠다고. 아무도 없는 곳에 너를 가두고 나만 볼 수 있도록 보호하자며, 너를 강제로 가둬 둘 구체적인 계획을 떠올렸지. 널 마주하고 간신히 참을 수 있게 됐지만 완전히 참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그런 충동을 느꼈어. 네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질 때마다 매번 생각했다. 이 세상의 모두를 죽여 버리면 더는 위험하지도 않을 텐데. 너를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가두고 네 적은 모조리 죽여 없애고 싶다는 생각을 고작 몇 달의 짧은 시간 동안 수천 번은 했을 거다.”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레인을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 유르딘은 다시 갈등한다. 유르딘은 결코 레인을 위한 성자가 아니다. 유르딘 또한 욕망하는 인간이었다. 레인이 저를 봐 주며 사랑한다고 말해 줄 때의 만족을 알게 됐다. 제 품으로 안겨 오는 몸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기억한다. 이렇게 가만히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더는 말하지 못하게 입을 막고 변명하고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싶었다. 제 안에는 여전히 레인의 적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의심 가는 인간조차 모조리 찢어 버리고 레인을 안전한 곳에 가둬 두지 못한 걸 후회하는 괴물이 잠들어 있는데도 레인을 얻기 위해 그를 속이고 기만하고 싶었다.

낮은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담담하게 들리지만, 바로 코앞에서 지켜보는 레인은 고요함 속의 광기를 모조리 대면했다. 그래도 레인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피가 말라붙은 창백한 손끝이 유르딘의 뺨을 위로하듯이 어루만진다. 유르딘의 광기는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안 할 거잖아요.”

“하지만 언제나 나는 그런 생각만을…….”

“결국 못 하실 거잖아요.”

유르딘은 그런 상상을 수천 번은 했노라고 고백하면서도 결국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든 레인이 상처받을 걸 알기에 갈등하면서도 유르딘은 제 욕망과 충동을 억누른다. 마음만 먹으면 더한 짓도 저지를 남자가 레인을 위해서 참고 억눌렀다고 생각하면, 가장 끔찍하게 느껴 왔던 집착과 억압조차 황홀한 애정의 증거가 된다.

“당신이 과거에 저지른 일들, 그리고 지금 와서 하는 생각들……. 그 모든 게 상관없어요.”

과거에 왕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지금은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되지 않았나. 이제부터라도 다시 잘하면 된다. 물론 이런 건 그저 레인의 이기적인 생각일 뿐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레인의 욕망이 이기심보다 훨씬 더 컸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아요.”

레인만을 위한 기사님.

이제는 사라져 버린 과거 때문에 유르딘의 손을 놓을 생각이 없다. 레인을 가로막던 장애물은 대부분 사라져 이제는 자유롭게 살아갈 날만이 남았다. 바닥을 기며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는 게 아니라, 제 욕망을 채우며 마음껏 소망하고 모든 걸 이룰 수 있는 삶이다. 이 시간을 전부 유르딘과 함께하고 싶었다.

“……레인.”

처음으로 유르딘이 움직였다. 더듬더듬 손을 뻗어 레인의 허리에 팔을 가볍게 두른 유르딘은 거기서 더는 힘을 주지 못한 채, 레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 끔찍하지 않아? 네가 겪은 일들을 다 알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그럼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장난스레 던진 질문에 유르딘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인은 유르딘의 귓가에 입을 맞췄다.

“아니잖아요.”

“……레인.”

“사랑해요.”

미련스레 버티고 있던 유르딘에게 저항할 수 없는 말이 떨어졌다. 애초부터 저항하고 싶지 않았던, 어둠 속에서 유르딘이 몇 번이나 상상했던 달콤한 말이다. 유르딘은 더는 부질없이 도망치려던 걸 멈췄다. 유르딘이 레인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을 더했다. 꽉 맞물린 몸이 서로 뜨거워지는 게 만족스러웠다.

“사랑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흘러넘친다.

“이 세상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너를 지키겠어.”

왕국 하나를 몰락시키고 수많은 목숨으로 시간을 되돌렸던 남자가 속삭이는 맹세의 무게를 안다. 한 번 했는데 두 번을 못 하겠는가? 하지만 아까 유르딘에게도 말했듯, 레인은 유르딘의 말이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미 레인도 같은 마음이었다. 유르딘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희생해도 좋았다. 유르딘이 흘리는 눈물이 레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레인은 유르딘을 세게 끌어안았다. 정신을 차리니 저도 울고 있었다.

계속해서 유르딘을 끌어안으며 체온을 만끽한 채 레인은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로 여전히 밤처럼 깊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제는 어둠도 물러날 때가 왔다.

레인은 견고하게 세워진 마력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주변이 무너지기 시작하자 유르딘은 경계하며 레인을 꽉 끌어안았다. 두 사람 주변은 안정적인 데다 레인의 마력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다칠 리가 없지만 설명해도 유르딘은 듣질 않았다. 그가 걱정해 주는 게 싫지 않아서 결국 레인은 유르딘의 품에 얼굴을 묻고 평온이 찾아오길 기다렸다.

마력이 무너짐에 따라 뒤틀린 공간이 제자리를 찾으며 원래의 형태로 돌아간다. 혼란스레 나뉘었던 공간은 합쳐지고, 갑작스레 솟아나 왕궁에 절망을 불어넣고 수도 사람들을 공포로 떨게 한 불길한 탑이 어둠과 함께 녹아내린다. 마침내 지하 감옥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유르딘을 찾아 깊은 바닥으로만 내려갔다고 생각했는데 뒤틀린 공간을 바로잡고 나니 두 사람은 건물의 옥상에 서 있었다. 바닥에 새겨진 희미한 원과 그 위에 여전히 떠올라 있는 마법진을 보건대, 여기가 마법의 중점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레인은 고개를 들었다. 주변은 여전히 조금 어두웠다. 그래도 따로 불을 밝힐 필요는 없어 보였다. 저 끄트머리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서서히 온 세상을 데우며 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곧 완전히 밝아질 것이다. 더는 어둠 속을 헤매며 절박하게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

기나긴 밤을 건너, 마침내 아침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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