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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선물(5권 외전) (16/20)

두 번의 밤을 건너다 5(외전)

생일 선물

레인은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다. 레인 어릴 적에 슈리아가 키우던 것과 같이 혈통 좋은 고양이는 아니고, 그냥 길에서 주워 온 평범한 얼룩 고양이였다. 아직 어린 새끼인데 매일 혼자 돌아다니는 게 하필 레인의 눈에 띈 게 계기였다. 주변 상인에게 물어보니 어미가 죽어서 상인이 주는 우유로 연명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레인은 충동적으로 고양이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다분히 충동에 따른 행동이었으나 레인에게는 고양이 한 마리는 건사하고도 남을 재력이 있었다. 그 재력에는 앞으로 바빠질 레인 대신 고양이를 키워 줄 만한 사람을 대거 고용할 수 있는 금화도 포함됐다.

처음에 꼬질꼬질한 고양이가 저택에 입성하는 것을 본 집사는 기겁했다. 차마 주인에게 말은 못 해도 왜 이런 더러운 고양이를 데려왔어야 했느냐고 눈빛으로 말하는 게 뻔히 보였다. 그러나 고양이를 뽀득뽀득 씻기고 나니 고양이는 다른 고양이와 비교해 봐도 제법 생김새가 빼어나게 귀여웠다. 게다가 본능적으로 제 누울 자리를 파악한 건지 성질도 순했다. 순식간에 고양이는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요즘은 집사가 쉬는 시간마다 고양이를 쫓아다니며 멸치를 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아무리 귀여워도 모든 사람을 꼬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양이에게 조금도 넘어가지 않은 남자, 유르딘은 못마땅한 눈으로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난폭한 녀석인데.”

“아직 어려서 그래요.”

순하다고는 해도 아직 어리고 장난 많을 시기였다. 아직 발톱을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는 어린 고양이는 놀다가 흥분할 때마다 종종 레인에게 상처를 냈다. 고양이가 할퀸 자국 위로 치료 마법을 쏟아붓는 레인의 얼굴은 몹시 너그러워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레인이 남을 향해 저런 얼굴을 하는 게 고양이를 제일 마음에 들지 않게 만드는 이유였다.

“왜 하필 고양이지?”

“고양이가 싫으세요?”

“경비견이나 사냥개가 낫지 않나.”

그런 크고 험한 놈들을 상대로라면 귀여워는 해도 너그러운 눈빛을 보내지는 못할 터다. 그러나 레인은 별생각 없이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동물을 필요로만 키우는 건 아니잖아요. 게다가 음, 옛날에 키우던 고양이가 생각났어요. 어머니가 키우는 고양이인데 혹시 아세요?”

“얼핏 본 적이 있어. 그 어미 고양이랑은, 후작저에서 몇 번 놀기도 했고.”

유르딘은 동물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눈앞에 놓고 보니 몹시 귀여운 생김새의 고양이를 지나칠 수 없어서 슬쩍슬쩍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준 기억이 났다. 슈리아는 작고 귀여운 동물을 좋아해서 공작가로 들어올 때 그 고양이의 새끼를 한 마리 데려왔었다.

“네. 그 고양이가 갑자기 생각나더라고요. 지금에 와서야 이름도 기억 안 나지만……. 어릴 때는 꽤 찾았는데, 그 고양이는 어떻게 됐을까요. 통 보이지를 않았어요. 도망친 거라면 좋겠지만……. 아나벨은 털 달린 짐승을 싫어했으니 죽임당했을지도 몰라요. 더욱이 어머니의 고양이었으니 미워할 만도 하고……. 잘 도망갔으면 좋으련만. 잊고 살았는데 얠 보다 보니까 옛날 그 녀석이 생각나서요. 그래서 키우고 싶었어요.”

레인의 목소리가 머나먼 과거의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았다면 안타깝지 않겠지만, 억지로 깨져 버려 파편처럼 마음에 박힌 기억. 이제는 빛바랜 추억이 되었다고 해도 결코 잊을 수 없고, 지워지지도 않는 시린 기억에 대한 회고였다.

“찾아볼까?”

“벌써 옛날 일인데요. 거의 20년 가까이 지났는데, 길고양이가 됐어도 진작에 죽었겠지요. 그냥 생각나서 말한 거예요.”

그리 말하며 레인은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꾸벅꾸벅 졸던 녀석은 잠깐 반항했으나 이내 레인의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태평하게 자기 시작하는 녀석의 색은 흰색과 갈색이 섞인 놈으로 유르딘의 기억 속에 있는 새하얀 고양이와 닮지 않았다. 그래도 단지 같은 고양이라는 이유만으로 감회가 새로운 걸까.

잠시 레인 품 안의 고양이를 질투했던 유르딘은 반성했다. 고양이를 선물할까? 잠깐 떠올렸던 유르딘은 그 생각을 기각했다. 지금도 고양이에게 제법 살뜰하게 시간을 쓰고 있는데 여기서 더 늘어났다가 고양이가 침대에까지 따라 올라오면 감당할 수가 없었다. 질투를 안 하기로 하긴 했지만, 이 이상으로 방해받는 것은 사양이다. 고양이는 기각이다.

대신 다음 날 유르딘은 소소하게 고양이가 좋아한다는 수제 장난감 따위를 선물했다. 유르딘에게 있어서 동물은 필요에 의해 키우는 짐승일 뿐이었던지라, 직접 손으로 깎아 만든 장난감의 존재는 심히 충격적이었다. 어쨌든 레인은 기뻐했다.

간단한 선물을 주고 유르딘은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곧 레인의 생일이었다. 원래부터 고민하고 있기는 했지만, 레인이 대놓고 말한 뒤로는 더욱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신경 쓰이는 정도만이 아니라 자나 깨나 오직 그 생각만 했다.

베델 공작이 되어 어머니와 함께 살던 본채로 돌아온 후, 레인은 부쩍 옛날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베델 공작저는 그 시절에 가까운 분위기로 꾸며지고 있었다. 레인이 추억을 좇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안쓰러움을 버릴 수 없었다.

아픈 마음을 달래 주기 위해 추억에 가까운 물건을 선물해야 할지, 아니면 아픈 기억을 위로해 줄 새로운 물건을 선물해야 할지, 정확히 어떤 물건을 선물해야 할지, 레인은 어디에 신경을 쓸지, 오만 가지를 고민하다 보면 평소에 없던 두통이 생겨나 유르딘을 괴롭혔다.

고민하던 와중에 그란델이 유르딘을 1년간 부려 먹기로 한, 그란델 명칭 ‘유르딘 니제스 렘샤이트 사용권’의 권리를 내세워 저택으로 불렀다. 백작저에 와서도 걱정은 떠날 줄을 몰랐다. 처음에는 반갑게 맞이했던 동생이지만 형의 표정이 펴질 줄 모르는 것을 보더니 걱정스레 염려를 보내왔다.

“형, 무슨 고민 있어?”

“응.”

어지간해서는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형이 대번에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을 보고 그란델은 몹시 긴장했다. 저런 일은 레인이 베델 공작이 되며 끝났던 게 아니었나? 그란델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한 채 유르딘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 좋은 일이야?”

“그런 건 아닌데…….”

“뭔데?”

“레인의 생일 선물을 뭘로 줄지…….”

괜히 긴장했다. 한 번에 맥이 풀리며 짜증이 치솟았다. 그란델은 제 긴장감을 보상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인기가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라 오히려 많았고, 연인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몇 있었는데 왜 레인을 상대로는 연애를 해 본 적도 없는 풋내기처럼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레인이 그렇게 매력적인가? 물론 잘생겼다, 라는 단순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외모기는 했다. 성격도 단점이 있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을 감안할 때 대단히 좋았다. 능력도 있고. 좋아할 만한데, 까지 생각했다가, 형이 제 생각을 알게 되면 지난번처럼 도끼눈을 뜰 것 같아서 관뒀다.

그란델은 한숨을 쉬며 한 손을 내저었다.

“아, 네. 고민 많이 하세요.”

“난 심각해.”

그러시겠지. 진짜로 유르딘이 심각해 보여서 핀잔주기도 힘들었다. 말없이 누군가가 유르딘의 고민하는 모습만 본다면 전장에서의 전술을 고민하는 중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조언이 어려운 것도 아니니, 그란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별장이나 섬 같은 거라도 사 주든가.”

“그것도 줄 생각인데, 조금 더 괜찮은 걸……. 그뿐이면 성의 없어 보이잖아. 마음이 담겨 있는……. 그런 거 없나?”

“중증이네. 내가 이런 멍청이를 데리고 전전긍긍했다니.”

가지가지 한다. 더 이상은 참기 힘들었다. 그냥 무시하고 일어나려니 유르딘이 그란델을 붙잡아 억지로 잡아 앉혔다. 그란델은 어이없어하면서도 착실하게 의자에 착석했다.

“그란델, 넌 뭘 줘?”

“꽃이랑 보석?”

“별로 성의는 없군.”

자기는 요상한 걸로 고민하는 주제에 그란델의 정성 넘치는 선물을 폄하하다니! 그란델은 기가 막혀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형이고 뭐고 삿대질을 했다.

“뭐라고? 내가 얼마나 성심성의껏 고르는데! 보석이 얼마나 취향을 타는지 형 같은 무심한 인간이 알겠어? 가지고 있는 옷, 취향, 유행, 모든 걸 따져 봐야 한다고! 그 과정에서 정성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알아?”

“그런가……. 그렇군.”

진지한 얼굴로 납득하는 유르딘을 보며 그란델은 인내를 꼭꼭 씹어 집어삼켰다. 그냥 좀, 형이 사랑에 미쳐서 맛이 갔을 뿐이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어. 바보 같은 형을 가르치고 이끌어 주면 되는 거다. 형의 우위에 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란델의 생각을 대충 눈치챈 유르딘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지만, 도움을 구해야 하는 쪽은 유르딘이었던지라 별말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그렇다고 정말 꽃이나 보석으로 주려는 건 아니지?”

“왜?”

“레인이 관심 있어?”

“……없었던 것 같은데.”

“이래서 연애 안 해 본 인간은 안 된다니까.”

“…….”

유르딘이 그란델을 노려보았다. 방금 전의 시선은 형이라고 해도 조금 무서웠다. 그란델이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자니 유르딘은 원래의 진지한 태도로 돌아왔다.

“좋아하는 건 알아. 책이야. 하지만 워낙 책을 많이 사들이고 있어서, 겹칠지도. 희귀본 같은 걸 구해 볼까도 했는데, 지금은 딱히 마땅한 매물이 없더군.”

“뭘 좋아하는데?”

“다 읽어. 의외로 소설 같은 것도 좋아하고, 최근에는 마법 관련 서적을 사들이는데 이건 일 관계로 사는 것 같아서 선물이라기에는 애매하고.”

그란델이 잘 면도된 턱을 손으로 쓸었다. 그란델도 책에 그럭저럭 관심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니제스 백작가의 장서를 풍족하게 채우는 것이 즐거웠기 때문이다. 잠깐의 생각을 마친 그란델이 여유롭게 웃었다.

“할텐 백작이라고 알아?”

“이름은 들어 본 것 같군.”

“책을 수집하기로 유명해. 형의 열렬한 추종자거든. 희귀본을 구입하고 싶다고 연락하면 어지간한 책은 팔아 줄걸. 원한다면 연락 넣어 줄까?”

“그래.”

유르딘은 고민도 없이 덥석 대답했다. 그란델이 알기로 유르딘은 제 추종자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남자들. 근육 덩치들이 저를 쫓아오면 아주 피곤하다며 질색을 하고 싫어했다. 그런 유르딘이 1초의 고민도 없이 답하다니, 역시 사랑이 대단하다 싶었다.

그다음에 유르딘은 제 권력과 위치를 이용해 지스킬을 불렀다. 유르딘의 집무실로 들어온 지스킬은 겁먹고 얼어붙었다. 노려보는 기세가 제법 심각하여, 무언가 지난번 보고에 빠진 게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하게 됐다. 다행히 그 오해는 곧 풀렸다.

“……레인의 선물요.”

“그래.”

어째서 존경스러운 상관은 레인의 일만 되면 눈이 뒤집혀서 앞뒤 안 재어 보고 달려드는 걸까. 절로 한숨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꾹 참으며 지스킬은 아부용 웃음을 입에 걸었다.

“솔직히 말하면 렘샤이트 후작께서 주시는 물건이라면 뭐든 좋아할 것 같은데요. 걔도 은근 집요한 데가…….”

“…….”

딱히 욕이 아니라 가감 없는 진실을 말한 것뿐인데 유르딘의 눈빛이 너무 무섭다. 지스킬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그, 제 말은 레인이 워낙 후작님을 사랑하여서.”

“베델 공작.”

“네?”

“베델 공작이라고 불러야지, 마이어 경.”

“네.”

곧장 대답은 했지만 기가 찼다. 저거 질투지? 고작 친구를 상대로 질투하는 겁니까? 유르딘 니제스 렘샤이트, 무적의 기사님이? 할 수만 있다면 제 머리를 내려쳐서 방금 전의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었기에 지스킬은 간신히 정신 줄 붙잡고 대답했다.

“책요?”

“역시 그건가.”

레인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뻔하게 떠올릴 법한 선물이기는 하다. 몸이 약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도 싫어하고, 매일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딱히 뭐를 줘야 할지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썩 도움이 안 된다는 유르딘의 눈빛은 조금 마음이 아프다. 연인과 관련해서 조금 깨는 면도 있지만 유르딘은 지스킬을 포함한 왕국 검사들의 영웅이었다. 어떻게든 저 눈빛을 바꿔 놔야겠다는 굳은 의지 아래 지스킬이 말을 쥐어 짜냈다.

“무난한 선물이긴 하지만요, 가끔 보면 레인, 아니 베델 공작께서는 따로 즐기는 법을 몰라서 혼자 즐기기 쉬운 책을 취미로 붙이신 건가 싶을 때도 있어서요. 체스도 제가 앞에 있는데 혼자 두는 체스를 시작하더라고요.”

“음……. 그렇군.”

유르딘이 조금 납득하는 얼굴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스킬은 기세가 올라 신나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뭐, 요즘에는 그럭저럭 같이 즐기게 됐지만. 승부욕이 있어서 카드 같은 것도 재미있어하고요. 재미있어하는 것 같길래 나중에 슬쩍 도박장에라도 데려가 볼까 했는데…….”

“안 돼.”

“불법적인 도박장 이야기가 아니라 어디까지 건전한…….”

“안 된다고 했다.”

“……네.”

지스킬이 말한 것은 당연히 합법적인 도박장의 이야기였다. 왕가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음지에 숨을 바에야 차라리 양지로 끌어내자는 취지에서 몇 십 년 전에 설립되었다. 걸 수 있는 돈의 규모가 적고 불법적인 도박장처럼 담보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도 아닌지라 가볍게 즐기러 가는 사람도 은근히 많았다.

그러나 유르딘은 그런 곳에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검의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자라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고 이후로도 착실하게 기사의 길만 걸은 유르딘에게, 도박장이라는 장소는 합법이든 불법이든 타락의 온상 정도로 느껴졌다.

지스킬은 다음 날 헛소리를 한 대가로 연병장 50바퀴를 돌았다.

주변인에게 정보를 얻었으니 이제 선물을 준비할 때였다. 연말에 워낙 일이 많아 시기를 놓쳤으니 거창한 것을 준비할 새는 없었다. 그래도 유르딘은 최선을 다했다.

그란델의 소개로 할텐 백작을 만나 왕국에서 제법 유명한 소설이라던 ‘용사 아스테어의 모험’ 초판본 전권을 사들였다. 그 대가로 유르딘은 하루 종일 할텐 백작과 대화하고 제 무용담을 이야기하고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할텐 백작은 유르딘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며 기절이라도 할 듯이 열광했다.

올해로 서른 살인 젊은 할텐 백작은 제법 유쾌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작위를 물려받아 비교적 이른 나이에 백작이 된 이래로 가문을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당시의 젊다 못해 어린 나이를 생각해 봤을 때 제법 유능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할텐 백작은 과욕을 부리지 않고 현상 유지 정도에만 힘쓰며 좋아하는 책을 수집하는 데 열중했다. 유르딘에 대해서도 흥분했지만, 책에 대해서 말할 때도 굉장히 열정적인 게 레인과도 친하게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사실 누군가를 레인에게 소개하는 게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유르딘은 여전히 레인을 가두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고 있었으며, 타인의 시선이 레인에게로 닿을 때면 불안과 충동에 휩싸였다. 이러한 감정이 언제 종식될 것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말마따나 고양이에게도 질투하는 것을. 하지만 이제 막 베델 공작으로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레인에게 유르딘 외의 사람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레인이 초대장을 보낼 귀족의 명단을 고민할 때 슬쩍 할텐 백작을 포함한 몇몇 귀족의 이름을 끼워 넣었다. 첫 단추를 끼워 넣는 것만 도와주면 레인이 알아서 잘해 나갈 수 있을 것을 믿었다.

그리하여 생일날, 유르딘은 손수 고른 청금석 박힌 커프스 링크와 수십 송이의 꽃, 소설의 전질, 그리고 맞춤 제작한 호신용 단검을 함께 선물했다. 그란델과 지스킬의 조언을 십분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마지막 단검은 제가 좋아하는 것을 끼워 넣었을 뿐이지만. 한 번에 몇 년 치의 푸짐한 선물을 받은 레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청 신경 쓰셨네요.”

“기대하겠다고 하길래. 마음에 들어?”

레인은 긴장한 채 말을 기다리는 유르딘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좋네요. 마음에 들어요. 이 보석은 제 눈 색을 조금 닮았네요. 꽃은 몇 송이는 말리고 몇 송이는 마법을 걸어서 방에 둘게요. 소설은 저 이거 엄청 좋아하는 책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초판은 묘사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궁금했거든요. 그리고 단검은 제가 이걸 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소중히 간직할게요.”

속사포처럼 대답한 레인의 뺨이 조금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순간, 레인이 미간을 접었다.

“하지만 뭔가 모자란 것 같은데.”

“…….”

모자라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뭔가 필요하다는 신호를 보냈는데 눈치채지 못하고 넘긴 게 있는 걸까? 고심하는 유르딘을 보며 레인은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그제야 의도를 깨닫고 유르딘이 레인에게 다가갔다.

레인 아이제나흐에게 가장 필요한 것, 최고의 선물은 유르딘 니제스 렘샤이트 본인이었다. 언제나 불변하는 법칙이었다. 팔을 들어 올린 레인의 허리를 붙잡고 입술을 맞댄다. 레인은 들어 올린 팔로 유르딘의 목을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입맞춤을 즐겼다. 숨이 얽히고 맞붙은 몸에 열기가 옮아 붙으려 할 때쯤, 유르딘은 힘겹게 레인을 떼어 냈다.

곧 연회가 시작된다. 레인이 베델 공작이 된 후, 처음 맞는 생일 연회인데 엉망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레인은 유르딘의 양 뺨을 손으로 움켜쥔 채 아쉽단 듯이 뜨거운 숨을 내뱉었다. 단추 하나까지 모두 채워 단정한 차림에 흐트러진 얼굴이 색스러웠다. 유르딘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욕망을 마주하며 레인이 속삭였다.

“너무 늦지 않게 이곳으로 돌아올게요. 유르딘도 적당히 빠져 있어요.”

“오늘은 네 생일이잖나. 주연이 빠지면…….”

“전 일단 체력이 약하다고 되어 있잖아요?”

이제는 제법 건강해졌지만 아직 대외적으로 그런 사실이 알려지진 않았다. 정말로 타당한 핑곗거리였다.

“똑똑해.”

“그렇죠? 음, 일단 길로쉬 남작이 제 빈 자리를 맡아 주기로 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길로쉬 남작은 딜란의 6촌으로, 딜란에게 밉보여 아이제나흐 영지 끄트머리로 추방당했다가 이번에 레인이 영지 관리인으로 불러온 인사 중 하나였다. 제법 명망 높은 귀족으로 얼마 전부터 레인의 일을 돕기 시작한지라, 대신 자리를 봐주는 데에 손색이 없었다.

유르딘은 여러모로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밤에 꽉 채워진 옷을 풀어 헤치고 벗길 것을 기대하며 레인의 옷매무새를 점검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슬슬 각자의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방에서 나가야 했으나 이따가 함께할 시간을 알기에 아쉬움은 덜했다. 방을 나가기 전, 유르딘은 선물 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꽃다발을 들고 레인에게 다가갔다.

“가장 중요한 것을 빼먹었지. 생일 축하해, 레인.”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박이던 레인이 이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레인의 미소가 아름답게 눈이 부시게 번지며 유르딘을 행복으로 물들인다. 오늘은 레인의 생일인데 마치 자신이 커다란 선물을 받은 것 같다. 그리 생각하며 유르딘은 마주 환하게 웃었다.

생일 선물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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