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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락한 고립 (18/20)

안락한 고립

레인은 서른 살이 됐다. 그리고 나름 기념할 만한 서른 살 생일을 레인은 제 집무실에서 맞았다.

일이 많았다. 레인은 빌어먹게 바빴다.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적당히 쉬엄쉬엄 해 가면 될 텐데, 레인은 점점 일 욕심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반쯤 강제로 떠맡았던 마법사단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고, 아카데미의 명예 교수직을 맡은 후로는 가끔 강연을 나가기도 했다. 과로하다가 한계에 다다를 때면 치료 마법을 연거푸 쏟아붓고, 더 이상 마법도 듣지 않을 무렵에야 쉬는 레인을 보며 가장 큰 불만을 가진 건 당연하지만 유르딘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군.”

마법이 상용화되고 라인셀이 기사와 마법의 강국이 되면서 벌어진 몇 번의 전쟁에서 대승해 대륙 북부의 유일한 왕국이 된 후로 유르딘은 있지도 않은 부상을 핑계로 기사단장 자리에서조차 물러나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상호간에 바쁠 때는 레인이 얼마나 바쁜지 짐작하지 못했지만, 쉬면서 레인만 보고 있으니 얼마나 과로하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결국 유르딘은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참고 참던 유르딘의 불만은 레인이 서른 살의 생일날에도 집무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유르딘을 안고 뒹굴려다가 코피까지 흘리자 폭발했다. 코피는 금세 멎었지만 손수건으로 코를 막아 주며 유르딘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가둬 버리고 싶어. 널 힘들게 하는 다른 놈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

평소라면 오싹한 흥분만을 불러일으켰을 독점욕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레인은 본능적으로 이게 정말로 위험한 상태임을 알아차렸다. 원래도 레인의 안위가 걸리면 살짝 돌아 버리는 남자가 아니던가? 설마 제법 안정된 지금에 와서 대량 학살 따위를 저지르지야 않겠지만, 그보다 덜한 건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는 남자가 유르딘이었다.

그보다 덜한 게 뭐가 있을까. 국왕 암살? 말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가능성이 영 없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지난번에 설치한 왕궁 대단위 방어 마법 결계에서 레인은 유르딘을 교묘하게 대상에서 제외해 뒀으니 거기에도 걸리지 않는다. 뭐, 이전부터 담 넘기를 즐기는 유르딘이 레인의 일터로 찾아오기 편하라고 한 배려였지만……. 이러다가 국왕 암살에 손을 보태게 될 수도 있었다.

화가 난 유르딘을 안고 토닥이며 레인은 제게 휴가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한 번 결심한 레인은 지체하지 않고 곧장 휴가를 준비했다. 일 처리가 빠른 만큼 휴가 제출도 빨랐다. 레인이 휴가를 내겠다고 하자마자 들뜨기 시작한 유르딘에게 이번 준비도 알아서 할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시라고 말한 레인은 마법사단에 휴가를 내며 동시에 떠날 섬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단의 핵인 레인이 뜬금없이 유례없는 장기 휴가를 내겠다니, 마법사단의 입장에서는 날벼락도 그런 날벼락이 없었다. 로빈과 셀리나, 마지막에는 왕까지 찾아와 레인을 만류했다. 그러나 한 번 결심한 레인을 말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왕을 마주한 채 레인은 찻잔에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우아하게 웃었다. 왕은 속으로 침을 삼켰다. 몇 년 전만 해도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에 불과했는데, 베델 공작가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마법사단을 이끄는 레인에게는 마치 과거의 유르딘과 같은 기백이 느껴졌다. 찻잔을 내려 두며 레인은 여상한 투로 입을 열었다.

“블루벳 왕국의 마법사단은 1년에 30일의 유급 휴가가 주어진다더군요. 그에 비해 저는 작년에 휴일을 제외하면 일주일의 휴가를 썼을 뿐이지요. 어찌 생각하십니까, 전하?”

목소리만 나른하지 내용은 완전히 협박이었다. 하도 자주 얼굴을 맞대다 보니 가까운 사이가 된지라 이런 식으로 제법 막 나가는 협박을 말할 수 있는 거겠지만, 지금까지 계속 레인과 유르딘을 접해 온 왕은 이게 반쯤은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요즘은 유르딘의 기세도 덩달아 흉흉해져서 가끔 뒤통수가 따가울 때도 있었다. 왕인 자신보다 레인이 더 바쁠 지경이니, 슬슬 휴가를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룬 게 사태를 키웠다.

“……공의 휴가를 60일로 늘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였네.”

“60일요.”

고작, 이라는 단어가 말끝에 맺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왕은 재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올해는 작년에 휴가를 못 썼으니, 한 계절쯤 쉬다 와도 좋겠지.”

여기로 들어오기 전에 부디 레인의 휴가 요청을 조금이라도 물려 주십사 애원하던 부단장들의 얼굴이 생각났지만, 왕은 어쩔 수 없이 레인의 편을 들었다.

그렇게 레인은 일을 시작한 이후 가장 긴 휴가를 받았다. 레인이 휴가를 떠난 적이 없으니 레인에게 몰려 있는 일을 분산하고 미리 처리해 두느라 생각보다 휴가가 늦춰지기는 했지만, 덕분에 여러 가지로 느긋하게 준비할 수 있었다.

무려 90일의 휴가다. 반쯤 억지로 받아 낸 휴가이긴 해도 자신이 없는 동안의 일이 걱정되기는 했던지라, 레인은 마법사단에 제가 없는 동안 사고를 치면 두고 보자는 가벼운 경고를-마법사단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협박을- 한 후에 휴가를 신청한 지 석 달 만에 휴가지로 떠났다. 섬까지는 작은 배로 갔다. 짐을 챙길 최소한의 하인들만이 함께 배에 올랐다.

“제법 괜찮죠?”

“그래. 멋있구나.”

간편하게 베델 공작령이나 렘샤이트 후작령으로도 갈 수 있었지만 레인이 택한 곳은 왕국 남부의 작은 섬이었다. 지난번에 왕궁을 수리하며 대단위 방어 마법을 걸었을 때 무리한 레인에게 왕이 상으로 내려 준 아름다운 장소이지만, 받아 놓고 바빠서 레인도 와 본 적은 처음이었다.

왕국령에서도 최남단에 위치한 섬은 사시사철 여름에 가까운 기후인지라, 봄에 오니 너무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게 날이 딱 좋았다. 새하얀 백사장이 섬의 전면에 깔려 있고 뒤로는 작은 언덕이 자리한 섬은 10분이면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았지만, 그 작은 크기 덕에 지금까지 섬을 소유했던 귀족들이 아기자기하게 꾸미는 게 가능했다. 덕분에 섬 이곳저곳에 오래된 아름다운 꽃나무며 조각상들이 산재해 있었다.

백사장을 정면에 둔 별장은 이번에 레인이 기존 별장을 새로 수리해 한쪽에 창을 크게 내서 안에서도 바다가 고스란히 보였다. 따스한 남쪽에 자리한 별장이라도 밤에는 추워질 때가 있으니 난방 때문에라도 하지 못하던 짓이었으나, 마법 한 번으로 별장 안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 수도 있는 레인에게 그런 건 문제 되지 않았다. 별장 뒤에는 아예 커다란 냉동 창고를 만들어서 뭐든 간단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레인은 새 집으로 이사 온 사람처럼 신이 나서 별장 안을 돌아다녔다. 깔끔하게 정돈된 주방이나 간단하게 책을 볼 수 있게 만든 서재, 바다 쪽으로 나 있어 맑은 날에는 바깥으로 나가서 식사할 수 있게끔 꾸민 테라스, 별장 앞 나무에 걸린 나무 그네 따위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역시 푹신한 침대와 커다란 욕조였다.

이곳저곳에 마법의 흔적이 가득했다. 대륙에서 가장 강하고 능숙한 마법사인 레인이 아니었다면 완성하지 못했을 완벽한 휴양지였다. 일에 바쁜 와중에도 특별히 신경 써서 살핀 섬이다. 대리인을 보내 별장 수리와 함께 여러 가지를 맡기며 상세한 보고를 받았기에 처음 봤음에도 익숙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비교적 가벼운 차림새였던 레인은 아예 별장에 겉옷을 던져두고 얇은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유르딘을 모래사장 쪽으로 잡아끌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레인은 유르딘을 잡아끌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유르딘은 기겁했다.

“레인, 다 젖잖아.”

“왜요? 바다에 왔으면 좀 젖어야죠.”

젖는 건 다 좋은데……. 워낙 얇은 옷인지라 몸이 그대로 비쳐 보이지 않는가. 레인이라면 마법으로 옷을 말릴 수도 있겠지만 아직 사용인들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지나치게 무방비했다. 당황해서 뒤쪽을 돌아보는데 짐을 내린 사용인들이 그대로 배에 오르는 게 보였다.

“무슨…….”

유르딘과 눈이 마주친 사용인이 몸을 숙여 인사하고 배는 그대로 섬을 떠나 출발했다. 배가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레인이 갑자기 물을 뿌렸다. 회심의 공격에 유르딘이 고스란히 물을 맞고 눈을 깜박이는 걸 보며 레인은 즐거워했다.

“성가신데 아예 벗고 수영하는 게 나을까요? 유르딘, 항상 운동 좀 하라고 했잖아요. 이 기회에 좀 하죠.”

“레인, 대체…….”

어리둥절한 유르딘의 얼굴을 보고 레인이 웃었다. 즐거워하는 소리가 둘만 남은 바닷가에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이 섬에 저희 말고는 아무도 없을 거예요.”

“없다고? 그러면…….”

“별장에는 자동으로 청소되는 마법을 걸어 두었고, 물론 먼지 정도만 청소되니까 어느 정도는 저희가 치워야겠지만 넓지 않으니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몇 가지 간단한 음식을 만들어 보존 마법을 걸어서 통째로 보관해 놨으니 데워 먹으면 되고요. 일단 식재료도 있으니까……. 적당히 고기 같은 거 구워 먹어도 되고요. 필요한 건 일주일에 한 번씩 배가 들어오니 그때 부탁하면 될 거예요.”

유르딘이 물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허리 정도만 잠길 정도였지만, 레인은 아예 잠수까지 했던지라 머리카락이 젖어 물이 뚝뚝 떨어졌다. 레인은 빙그레 웃으며 유르딘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가볍게 손바닥을 얹은 채 손가락만 움직여 젖은 셔츠 위를 더듬던 레인은 유르딘의 양 뺨을 쥐고 가볍게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체온으로 덥혀진 젖은 물방울이 레인에게서 유르딘으로 어지러운 열기와 함께 전해졌다.

“당신 입버릇이잖아요, 둘만 있는 공간에 가둬 버리고 싶다는 거.”

유르딘의 눈동자가 커졌다. 레인과 유르딘, 단둘만의 공간. 유르딘 자신이 꺼냈을 때는 다분히 위험한 범죄로밖에는 들리지 않던 그 말이 레인의 입에 오르며 달콤한 연애 행각으로 뒤바뀐다. 레인은 눈을 크게 뜬 채 숨도 쉬지 못하는 유르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가 떨어졌다. 여전히 이마를 맞댄 채 레인이 사랑스럽게, 위험한 말을 속삭인다.

“90일간 여기에 가둬 줘요. 당신만을 위한 레인이 될 테니까.”

스스로 내뱉으면서도 조금 부끄러운지 레인의 귀 끝이 조금 붉어졌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인데, 일 따위보다 중요한 사람인데 두 번째 순위로 미뤄 뒀다니. 보상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앞으로의 90일간 레인은 온전히 유르딘만을 위해 시간을 쓸 생각이었다.

“……나는.”

똑바로 선 채 유르딘이 주먹을 꾹 쥐었다. 지금쯤 유르딘이 무슨 생각을 할지는 레인의 눈에 훤히 보였다. 레인이 왜 이리 위험한 말을 하는지에 대한 걱정, 스스로를 자제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는 갈등. 레인을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이 낼 결론은 뻔했다.

“필요 없어요?”

“그럴 리가.”

유르딘이 레인의 허리를 홱 끌어안고 덤벼들었다. 물속에서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한 레인을 붙잡은 유르딘은 한 팔로도 넉넉히 레인을 받친 채 입을 맞췄다. 젖어 버린 셔츠가 제대로 벗겨지지 않자 사정 봐주지 않고 곧장 홱 뜯어 버리는 것을 보니 흥분해도 단단히 흥분한 모양이었다. 약하게 소름이 돋은 피부 위에 유르딘의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따뜻한 곳이라 해도 아직 초봄인지라 물은 조금 차가웠기에, 유르딘의 열기가 닿자 거기에 더욱 매달리게 된다.

레인이 유르딘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자, 유르딘은 눈앞에 보이는 레인의 목을 물었다. 조금 세게 이를 박아 넣는 감각에 따끔한 통증이 쾌감으로 승화되어 전신에 내달리며 순간적으로 시야가 아득하게 물들었다. 레인은 태연한 척 유르딘의 귓가에 대고 잘게 웃었다.

“여기서부터 서두를 건 없잖아요.”

“못 기다려.”

“사실 저도 그래요.”

90일간 온전히 가두고 손에 넣으라는 레인의 말 덕분일까, 유르딘은 몹시 즐거워 보인다. 유르딘이 이렇게까지 제 욕망을 선연히 드러내는 것은 간만이었다. 유르딘은 언제나 레인을 위하며 배려를 우선으로 한다. 사실 레인에게 숨기고 있는 취향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제법 오랜 세월을 알아 왔으나 유르딘은 저를 숨기는 데에 익숙했다. 레인은 정말로 유르딘에게 제 모든 것을 줄 각오를 다졌다.

“원하는 게 있으시면 말만 하세요. 음, 때리셔도 괜찮아요.”

“그런 말은 농담으로라도 하지 마.”

얼굴을 확 찌푸리는 것을 보니, 역시나 그런 취향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비교적 가볍게 회상할 수 있는 카이렌이 언제나 레인을 때리며 흥분했던지라, 레인은 폭력과 성적 충동이 연관된다고 무의식에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면 그거 말고라도 뭐든 해도 괜찮아요.”

“뭐든?”

“네, 뭐든.”

“…….”

이 말에는 부정을 하지 않는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지? 짐작 가는 게 없었다. 온갖 매니악 한 행위부터 가학적인 행위까지 레인의 머리를 스쳤으나 짐작 가는 게 없었던 데다가 유르딘이 제게 해로운 짓을 할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레인은 질문하는 대신 유르딘에게 제 몸을 맡기는 쪽을 택했다.

시작할 때는 분명 해가 머리 위에 떠 있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물속에서 하다가 몸이 차가워질 무렵에 나와 백사장에서, 별장으로 돌아와 테라스에서. 이렇게 많이 한 적도 간만이라 머리가 핑 돌았다.

레인은 어지러운데 그에 비해 유르딘은 어째 더 생생해진 것 같았다. 나이를 대체 어디로 먹고 있는 거지. 유르딘은 레인과 재회한 순간부터 그대로 시간이 멈춰 버린 듯이 나이를 먹지 않았다. 유르딘의 말로는 머리카락이나 손톱도 매우 느리게 자라서, 손톱을 바싹 깎는 편인데도 1년에 한 번 정도 다듬으면 끝이라고 했다. 한때는 심각하게 여기며 연구를 해 봤지만, 건강하기 짝이 없는 유르딘의 몸에 연구를 포기했다. 미엘의 힘을 일부 흡수한 이후로 수백 년이나 살아온 악마의 영향을 받아 그런 것이라는 가정은 거의 기정사실로 자리 잡았다. 아마 유르딘은 평범한 사람보다는 오래 살 터였다.

옛 시대의 대마법사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두세 배는 너끈히 살아갔음을 생각해 볼 때, 그 시대의 기준으로도 마력이 많은 레인이 오래 살 것은 뻔했으니 잘된 일이기야 하지만 갈수록 체력이 넘치는 유르딘과 달리 레인은 여전히 체력이 부족했으므로 이럴 때는 힘겨웠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일으키려 하니 유르딘이 레인을 제지했다.

“가만히 있어, 옮겨 줄게.”

“아뇨, 괜찮아요. 저보고 마법만 쓰지 말고 이럴 때는 움직이라면서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오늘은 됐어. 내가 하고 싶어. 마음대로 해도 괜찮다고 했잖아.”

레인은 순순히 유르딘의 손길을 따랐다. 레인을 안고 들어온 유르딘은 욕조에 레인을 앉힌 채 꼼꼼히 씻기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온몸을 씻기는 내내 레인은 손 하나 까딱할 필요 없었다. 유르딘의 손길은 정성스럽고 생각보다 담백해, 내심 성적인 쪽으로 흐르리라고 생각했던 레인이 당황할 정도였다. 정말로 시중드는 게 하고 싶었단 말인가? 노예제가 폐지되기 전의 아주 옛날, 목욕조차 노예에게 시중을 맡겼다는 귀족들이 이런 심정으로 맡겼을까 싶을 정도로 편안했다. 조금쯤은 덜 편해도 될 텐데.

괜히 혼자 긴장하고 있던 레인은 유르딘이 제 다리 사이를 거품으로 문지를 때, 기어이 발기하고야 말았다. 더 이상은 절대로 무리라고 말한 지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 쥐어짜 낼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흥분한 몸이 부끄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흥분이었다.

“……유, 유르딘. 보지 마요.”

당황해서 유르딘의 얼굴을 가리려고 했지만, 유르딘이 레인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는 게 빨랐다. 저지하려고 했으나 안 그래도 여전히 아까 정사의 잔열이 남아 있는 몸에 쏟아지는 지나친 자극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레인은 유르딘과 받아 둔 욕조의 뜨거운 물이 싸늘하게 식을 때까지 다시 한번 격렬한 정사를 치르고 나서야 욕실을 빠져나왔다. 이제는 정말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운도 없어서 유르딘의 품에 축 늘어져 있었다. 유르딘은 레인에게 하얀 가운을 입히고 양말을 신겨 준 후에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에 도착해 미리 사용인들이 만들어 놓고 보존 마법을 걸어 둔 음식을 데워 먹었다. 조금 싸늘했던 음식이 금세 따스하게 김을 모락모락 피워 내는 것을 보며 유르딘은 작게 감탄했다.

“이런 건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그래도 한계는 있어요. 수분이 제법 날아가는 편이라 종류에 한계가 있고요. 당분간은 비슷한 걸로 먹겠지만, 조금 질리면 요리사 정도는 상주시켜 봐요.”

“아냐. 그럴 필요는 없어.”

유르딘이 딱 잘라 말했다. 유르딘이 안 질려도 제가 질릴 것 같은데요. 레인은 그 말은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유르딘과 함께라면 매일 스튜만 끓여 먹어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으니까. 평생은 조금… 무리지만, 90일 정도라면 충분히 할 만했다.

식사를 마치고 잘 준비까지 마무리 짓고 침대에 누웠으나 곧장 잠은 오지 않았다. 같은 침대에 누웠으니 평소라면 또 한참 뒹구는 게 옳겠지만, 오늘은 바깥에서 잔뜩 무리를 한지라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다. 유르딘이 받쳐 주는 베개에 몸을 기대며 레인은 손을 뻗었다.

“저 책 좀 보고 싶어요. 저쪽 검은 가방 속에 있을 텐데…….”

“여기까지 와서 책을 보려고?”

“일하는 게 아니라 가벼운 걸로 가져왔어요.”

조금 못마땅해하면서도 유르딘은 가방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레인의 말대로 그리 두껍지 않은 소설책이 들어 있었다. 시리즈인 것 같은데, 1권이다. 유르딘이 기억하기로는 2년쯤 전에 할텐 백작이 레인이 좋아할 것 같은 책이라면서 선물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지금은 3권인가 4권까지 나왔을 텐데. 같은 책은 잘 안 보는 레인이니 이 책도 처음 보는 것일 텐데, 정말 어지간히도 시간이 없었겠구나 싶었다.

유르딘은 책을 들고 레인에게로 다가왔다. 레인은 책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유르딘은 책을 들고 레인의 뒤로 돌아가 끌어안은 채 침대에 안착했다. 레인을 제 품에 감싸이도록 한 유르딘은 책을 펼쳐 들었다.

“……유르딘? 책장 정도는 제가…….”

“마음대로 하라며.”

“…….”

굉장히 당당한 태도로 유르딘은 책을 가볍게 읽으며 편하게 읽을 것을 종용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이렇게까지 마음대로 할 줄은 몰랐지. 유르딘의 유별남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이쯤 되면 솔직히 조금 감탄스러울 지경이다.

“당신도 참 대단하네요.”

“고마워.”

“칭찬이 아닌데……. 음, 뭐 아무래도 좋겠죠.”

“읽다가 불편하면 그냥 줄게. 한 번 정도는 해 보고 싶었거든.”

한두 페이지 읽다가 넘겨받겠지. 레인의 막연한 생각과 달리 유르딘은 너무도 책을 잘 넘겼다. 레인의 시선이 페이지 끄트머리로 갈 때쯤에 절묘하게 책장을 넘기는 게 앞으로도 계속 부탁하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가끔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도 귀찮아서 알아서 넘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유르딘이 넘기는 솜씨가 딱 레인이 바라던 것과 같았다. 정말로 실현될 줄은 몰랐지.

소설은 재미있었다. 유쾌한 내용인지라 웃음 나올 구석이 꽤 많았다. 유르딘도 레인과 함께 책을 읽는지, 가끔가다 그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레인의 정수리를 간지럽힐 때도 있었다. 책의 내용 이상으로 지금 상황이 즐겁고 편안했다. 유르딘에게 몸을 기댄 채 읽다 보니 페이지가 반도 넘어가지 않았는데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레인은 수마에 저항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잘 자, 레인.”

유르딘이 다정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레인은 안락한 잠에 빠져들었다.

***

레인이 마련해 준 섬은 천국이었다. 7년 전, 한창 여유 없이 몰려 있을 때 이대로 레인을 데리고 도망쳐 둘만의 장소에서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상상해 왔던 그 이상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당시 상상 속의 레인은 유르딘을 두려운 눈으로 보며 거절했지만, 현실의 레인은 유르딘을 다정다감한 눈으로 보며 이 안락한 행복을 맘껏 누리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지난 7년간, 처음에 맡기 싫어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레인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레인은 확실히 욕심이 있는 성격이었다. 권력에 대한 욕심, 제 손에 쥐고 있는 것에 대한 욕심. 욕심은 불안으로 직결되어 빼앗길까 봐 손에 쥐고 계속해서 달리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레인은 이미 가진 것에는 비교적 만족하는 상태였지만, 어린 시절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빼앗겼던 기억 때문인지 베델 공작이 되고 나서도 불안을 완전히 놓지는 못했다.

그간 넓어진 세계만큼 레인이 알고 지내는 사람도 늘어 갔지만, 여전히 레인은 남을 쉽게 신뢰하지 않았다. 레인의 휴식처는 유르딘과 그가 믿는 극소수의 사람들뿐이었다. 7년간 유르딘이 꾹 참은 이유는 레인이 원하는 걸 존중해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코피를 흘리면서까지 생일날에 일하는 걸 보니 그제야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레인에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지금 쉬고 있는 것 외에 앞으로도 정기적인 휴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유르딘은 레인을 완벽하게 이 안락한 시간에 적응시켜, 최소한 매년 휴가를 나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지난 사흘간은 레인을 위한 봉사의 날들이었다. 첫날과 둘째 날에 잠깐 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레인에게 찰싹 달라붙어 쉴 새 없이 안았다. 예전에는 그럭저럭 잘 따라 주더니만, 레인도 나이를 먹었는지 사흘째에는 서먹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지나치게 무리시켰다는 자각은 있었고, 단지 잠자리만 하는 게 목적은 아니었던지라 사흘째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적인 휴가를 즐기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어 레인의 손을 잡고 해변가를 산책했다. 해가 조금 더 떠올랐을 때는 예전에 이 섬을 소유했던 누군가가 만들어 둔 낚시터에서 낚시를 했다. 유르딘이나 레인이나 썩 좋은 낚시꾼은 아니었다. 심지어 초심자의 운조차 따라 주지 않아, 하루 종일 낚시를 했으나 소득이 없었다. 수면 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인은 바다 위에 전격을 흘려서 물고기를 기절시켰다.

“간단하죠?”

새하얗게 배를 드러내며 기절한 물고기를 보며 약간 음산하게 웃는 레인의 모습을 레인의 휘하에 있는 마법사단이 목격했다면 몹시 두려워했겠지만, 유르딘이 보기에는 그저 사랑스러워 보였다. 기절한 물고기 중 작은 놈들은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고 몇 놈만 잡아서 주방으로 돌아왔다.

아침과 점심은 간단하게 때웠다. 특히나 점심은 낚시를 한답시고 간단하게 샌드위치만 먹었기 때문에 몹시 배가 고팠다. 유르딘은 과일을 꺼내 간단한 요기만 하고는 앞치마를 두르고 식칼을 든 채 주방에 섰다.

“네가 바쁠 동안 요리를 배웠거든.”

“요리를 왜 배워요? 사용인들이나 하는 일이잖아요.”

가만 보면 레인은 집 안에서 괴롭힘 당하며 자랐던 것치고는 사소한 부분에서 완벽한 귀족의 사고방식을 추구할 때가 있었다. 오히려 레인에 비해 귀하게 자란 유르딘은 종기사로 지낼 적에 홀로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경험 덕에 간단한 청소나 요리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레인은 정리를 넘어선 간단한 청소조차 할 줄 몰랐다. 유르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레인이 귀족가의 자제로 태어나 어린 시절의 약한 몸으로 집안일까지 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졌을 테니까.

“원래 간단한 조리 정도는 할 줄 알았어. 신참 기사 시절에 기사들끼리 소규모 정찰을 나갔다가 부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야영하다 보면 요리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때야 뭐, 아무거나 때려 넣고 스튜를 끓이거나 손질한 고기를 굽는 수준이긴 했다만.”

“지금은 왜 배웠는데요?”

뭔가 의심 가는 게 있는지 레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마 의심대로일 거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야 언젠가 둘만 떠나게 되면 해 줄 요량으로 배웠지.”

레인이 기가 찬지 삐뚜름하게 웃었다. 유르딘이 손에 물을 묻히고 사용인들의 일을 하는 게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전 떠나게 되더라도 재산 단단히 챙겨서 사용인 많이 거느리고 살 건데요. 유르딘이 굳이 이런 일 할 필요는…….”

“오늘은 쓸모 있잖아? 앞으로도 쓸모 있을 거고.”

“그건 그렇지만요.”

“원래 먹던 것에 조금 질렸잖아?”

내색은 안 했지만 입이 짧은 레인은 보존을 위해서 잔뜩 만들어 둔 똑같은 음식에 질린 게 티가 났다. 아침에는 접시를 반 정도밖에 비우지 않았다. 막 잡은 생선에 미리 준비된 재료까지, 완벽했다.

“요즘 평민들 사이에는 아내를 위해서 요리해 주는 게 널리 유행한다더군.”

“아, 아내…….”

레인의 얼굴이 잠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휘휘 돌아갔다.

“전 아내도 아닐뿐더러, 일단 저희는 평민이 아닌데요. 그래도 뭐……. 일단은 납득했어요.”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인 채 하는 말이 너무 귀엽다. 유르딘은 크게 웃지 않으려 애쓰며 칼을 들었다. 따로 배우기 시작한 이후 유르딘의 요리 솜씨는 일취월장했다. 원래부터 유르딘은 몸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손재주도 제법 좋았다. 처음에는 주인이 요리를 배운다는 말에 대경실색하던 주방장도 이제는 감탄하며 완성한 요리를 칭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조금 못마땅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레인도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흥미롭게 지켜보기 시작했다.

“도와 드릴까요?”

“칼은 만지지 말고.”

최대한 일을 시키지 않으려고 결심했었지만, 일을 거든다기보다는 순전히 호기심이 가득한 말이었기에 유르딘은 그러라고 승낙했다. 여기 들어온 재료들은 일차적으로 손질을 마친 데다가, 유르딘이 칼로 몹시 능숙하게 손질해 두어서 레인이 할 것은 별로 없었다.

유르딘은 가장 안전한 게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레인에게 국자를 건넸다. 커다란 냄비에 넣고 끓이고 있는지라 튈 걱정이 별로 없는데도 레인은 유르딘을 따라 앞치마까지 착용하고 진지한 얼굴로 부글부글 끓는 냄비를 신중하게 저었다. 방심하면 눌어붙을 수도 있기는 했지만, 사실 저렇게 열심히 저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몹시 집중한 레인이 귀여워서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웃었다가는 당장에 관둘 게 뻔했기 때문에 꾹 참았다.

주방에 고소하게 퍼지는 냄새를 맡으며 레인의 진지한 표정도 조금씩 풀어졌다.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네요. 정말…….”

“그렇지?”

“확실히 요즘은 유르딘을 보는 시간도 너무 부족했죠.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에요.”

유르딘이 반색하며 묻자 레인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유르딘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이해하는 얼굴이었다. 알고 있으면 진작 좀 쉬면서 나와 붙어 있지 그랬느냐. 조금 치졸한 말은 밀어 두고 유르딘은 공격하기 쉬운 사람에게 주목했다.

“왕이 너를 너무 부려 먹어.”

“저는 대체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저 이상으로 술식에 정통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마력이 저만 못하니까.”

최근 유르딘이 제일 많이 욕하는 대상은 왕이었다. 사실상 레인에게 무리한 일정을 초래한 주범이 아닌가. 레인의 애매모호한 변호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마음이 풀리는 것은 아니었다.

“네 마력이 조금 부족했어도 좋았을걸.”

“에이, 그러면 전 15년 전쯤에 이미 죽었을걸요?”

삽시간에 유르딘의 얼굴이 까딱하게 얼어붙었다. 레인은 애매하게 웃으며 국자를 든 채 유르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농담이에요, 농담. 결국 살았잖아요.”

지난 7년의 세월 동안 레인은 예전의 괴로운 이야기들을 농담처럼 꺼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괜찮아졌다. 여전히 유르딘은 그런 농담이 적응되지 않았지만, 레인은 조금 괜찮아졌을 무렵부터 일부러 익숙해지기 위함인지 그때의 이야기들을 꾸준히 늘어놓고는 했다. 유르딘도 완벽하게 적응할 수는 없었지만, 한숨 쉬고 얼굴 한 번 쓸어 버리고 털어 낼 수 있을 정도로는 괜찮아졌다.

“그래도 그런 말 좀 하지 마.”

“알았어요.”

요리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하다 보니 재미를 붙인 레인이 뭔가 더 하고 싶어 하기에 온갖 요리를 식탁이 가득 찰 정도로 했기 때문이었다. 요리하는 시간만 해도 몇 시간이었고, 느긋하게 포도주를 곁들이다 보니 저녁 식사는 한없이 길어졌다. 식사를 마쳤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씻기 시작했을 때는 레인은 이미 졸고 있었다. 수도에서는 하루 네댓 시간만 자도 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긴장이 풀리니 편안하게 졸릴 때 그대로 조는 것 같았다. 레인을 푹신한 침대 위에 눕히고 유르딘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잠깐 나갔다 올게.”

“음……. 네, 기다릴게요.”

졸던 레인이 힘겹게 눈을 뜨고 말했다.

“못 기다릴 것 같은데……. 무리하지 말고 자라.”

레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유르딘은 별장을 빠져나왔다. 지난 이틀간은 소홀했지만, 레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날 때면 항상 습관처럼 하는 일과였다. 지붕 위에 올라가 섬 전체를 한 번 훑어보고, 미리 보았던 침입하거나 숨어 있기 쉬운 곳에 가서 사람의 흔적이 남지는 않았는지 살핀다. 있지도 않은 누군가의 접근을 경계하는 것은 유르딘의 오랜 버릇이었다.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해서, 처음에는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보던 레인도 이제는 자연스레 이해했다. 필요성을 이해했다기보다는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유르딘을 보고 기행을 받아들인 것에 가깝지만 말이다.

반 시간쯤 지났을 때에야 유르딘은 다시 별장으로 돌아왔다. 어느새 레인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잠들어 있었다. 유르딘은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들어와 레인을 끌어안았다.

“으응…….”

레인이 작게 잠꼬대하며 체온이 있는 쪽으로 달라붙었다. 레인은 몸이 조금 차가운 편이라 온기를 무척 좋아했다. 잠을 자고 있다가도 유르딘이 침대로 들어오면 그쪽으로 붙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7년 전, 레인이 제자리를 찾아가 위협을 모두 치워 낸 뒤에도 한동안 레인은 여전히 악몽에 시달렸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반드시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 무렵 유르딘이 금기로 여기고 절대 하지 않던 짓 중에 하나는 자고 있던 레인에게 갑자기 다가가지 않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다가도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다가오면 레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유르딘은 지하실을 찾았고 거기에서 아직 살아 있던 카이렌 모드에게 화풀이를 했다.

7년의 세월 동안 상처는 조금씩 나아졌다. 레인은 더 이상 밤중에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았고 제게 닿아 오는 온기를 끔찍한 것이 아닌 안락한 것으로 인식했다. 유르딘 또한 해묵은 증오에 매달리지 않았다. 광기에 물들어 만들어 두었던 지하실은 깔끔하게 청소된 채 비워진 지 오래였다. 그 차이와 변화를 깨달을 때마다 거듭 레인이 더욱더 사랑스러워져서, 유르딘은 잠들어 있는 레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다시 눈을 감고 잠들려고 해 봐도 어쩐지 오늘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유르딘은 몸을 일으켰다. 침실 안은 마법석을 여러 개 걸어 놓고 수호 결계로 쓰고 있었는데, 활성화된 마법석에서 나는 은은한 빛 덕분에 방 안은 완전히 어둡지 않았다. 잠깐 주변을 돌아보던 유르딘은 시선을 내려 레인을 살폈다. 레인은 유르딘이 복장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부터 내색은 안 했지만 항상 셔츠 한 장만 입고 잠을 잤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 흐트러진 옷 사이로 레인의 살결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유르딘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레인.”

작게 불러 보아도 연인은 아무런 답이 없다. 하고 싶어졌다고 얌전히 잘 자는 사람을 깨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유르딘은 한숨을 쉬고 주먹을 꾹 쥐었다. 하지만 입맞춤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유르딘은 레인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고, 레인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맞대어 가볍게 비볐다. 수도에서는 버석하고 거친 감촉일 때도 많았는데 잘 쉰 덕분에 말캉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유르딘의 입술에 유혹적으로 달라붙는다. 유혹이라니, 저 혼자 발정하고 있을 뿐이면서. 자책하며 가까스로 참으며 일어나려는데 레인이 유르딘의 입술을 핥았다. 유르딘은 불에 댄 듯이 놀라 몸을 일으켰다.

“레인?”

“…….”

잠결에 뭔가 닿아 오길래 한 반사적인 반응일 뿐이었는지, 레인은 여전히 잠든 채 말이 없었다. 유르딘은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레인에게로 손을 뻗었다. 원래 제법 예민한 레인인데 유르딘이 만져도 반응이 없다. 아까부터 안고 있었지만 손바닥 좁은 면적에 닿는 살결이 어쩐지 더 부드럽게 느껴져서 유르딘은 뺨 위로 올렸던 손을 천천히 미끄러트렸다. 뺨에서 목으로 타고 내려온 손이 아까부터 벌어져 있던 셔츠를 헤집어 열었다. 애초부터 단추도 한 개만 대충 잠그고 잔 탓에 순식간에 셔츠는 벌어져 하얀 살결을 드러낸다.

예전에는 비쩍 마르기만 했던 몸이다. 유르딘의 심정 같아서는 자신 정도로 건장한 몸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근육질 잡힌 몸을 만들어 주고 싶었지만……. 레인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워낙에 싫어하는 데다 소질 자체도 없었다. 유르딘이 어르고 달래서 종종 그나 지스킬을 상대로 간단한 호신술이라도 배우고, 산책이라도 꾸준히 하게 된 덕분에 예전보다는 더 건강해졌다. 물론 유르딘에 비하면야 여전히 가느다랗게만 보이는 몸이지만, 예전보다야 근육이 붙은 몸은 늘씬하고도 탄력 있게 쭉 뻗어 있어서 더욱더 매혹적이었다. 집요하게 훑어보던 시선이 레인의 유두에서 멈췄다. 갑자기 조금 추워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까의 접촉에 조금 흥분해서인지 몰라도 유두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제법 뾰족하게 서 있었다.

레인은 워낙 가슴으로도 잘 느꼈다. 손으로 문지르면서 잡아당기거나 빨아 주면 그것만으로도 흥분해 성기를 세웠다. 가슴을 애무하는 것만으로도 사정할 수 있을 것처럼 느꼈다. 바로 어제만 해도 그랬다. 바다가 보이는 창문에 손을 짚고 있는 레인의 뒤에서 박으며 바짝 선 유두 끝을 잡아당겨 주니 더는 못 버티겠다고 달콤하게 울면서 사정했다. 상상만으로도 유르딘은 제 성기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긴장된 흥분 속에 이성이 조금씩 가라앉고 본능적인 욕망이 꿈틀거리며 빠져나온다. 유르딘은 손을 뻗어 레인의 유두를 만졌다.

“……으응…….”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신음이 레인의 입에서 흘렀지만, 여전히 깨지는 않는다. 잠든 상대로 이 무슨 파렴치한 짓인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유르딘은 유두를 만지던 손을 아래로 미끄러트렸다. 바싹 깎은 유르딘의 손톱이 유륜을 스치고 허리를 더듬자 레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못 견디겠다는 듯이 신음했다. 딱딱한 손 안에 부드럽게 달라붙는 살결의 감촉에 유르딘은 자꾸만 떠오르는 충동에서 저항하기 힘들었다.

잠든 상대로 이러는 것이 파렴치한가? 어차피 연인 간이다. 유르딘도 잠들었을 때 레인이 저를 더듬는 것을 느끼며 깬 적이 여러 번이었다. 고작 만지는 것뿐이라면 파렴치하다는 표현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제 욕망이 만지는 것 이상의 행위에 닿아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유르딘은 제 생각을 외면한 채 몸을 숙였다. 매끄러운 살결에서는 저항할 수 없이 달콤한 향이 났다. 살짝 솟아올라 있던 유두를 입 안에 넣고 굴리자 따뜻하고 축축한 안쪽에서 바짝 섰다. 이만 물러나야 할지 더 움직여야 할지 머리는 확신을 못 한 채 몸은 본능에 충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유르딘은 레인의 몸을 애무하는 것을 즐겼다. 레인은 귀찮지 않느냐며, 적당히 해도 된다고 말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레인의 안에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그만큼이나 애무하는 것도 좋아했다. 아직 이성의 편린이라도 남아 있을 때 침착함을 붙잡고 레인이 흥분하는 모습들을 제 머릿속에 새겨 두는 것이 좋았다. 깨어 있을 때만큼 적극적인 반응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제 아래에서 반응하는 연인의 몸을 탐닉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새하얀 뺨은 어느새 조금 붉어져 있었고, 유르딘이 더듬을 때마다 레인은 잠든 채로도 천천히 성기를 세웠다. 만지지도 않았는데 흥분한 레인의 것이 유르딘의 다리에 슬쩍 닿아 오자 도저히 참기가 힘들어졌다. 정말로 잠들었는지 확인해 봐도 잠들었을 뿐인데.

넣고 싶다. 유르딘은 레인의 벌어진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꽉 닫힌 구멍 사이를 더듬자 허리 아래로 빠듯한 충동이 몰린다. 이 안에 들어갔을 때의 감각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레인의 몸에 비해 제 것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큰데도 어떻게든 빠듯하게 받아들여, 점점 쾌락에 물들어 가며 능숙하게 삼키는 그 음란하고도 사랑스러운 감각을 생생하게 떠올린다. 언제나 상상보다는 현실이 더 황홀한 그 감각.

유르딘은 손을 뻗었다. 사용인이 없다 보니 시트만 갈고 자잘한 물건들은 대충 탁자 위에 올려 둔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향유를 손 위로 부어 미끌거리는 손을 비벼 체온으로 적당히 데우면서 유르딘은 어설프게 갈등했다. 정말로 이대로 넣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시선은 한 번도 레인에게 떨어지지 않아서 참으로 조악한 변명에 불과했다. 유르딘은 질척하게 젖은 손가락을 레인의 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으…….”

레인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연이은 정사 덕에 무리 없이 매끄럽게 들어가는 손가락을 밀어내듯 레인이 저도 모르게 힘을 주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유르딘은 안으로 밀어 넣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면서 레인을 살폈다. 원래 잠자리에 예민한 레인치고는 지나치게 깨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서 유르딘은 레인의 얼굴에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호흡이 약간 거칠어지긴 했지만, 지극히 평온하다. 그 상황에 안심하면서도 유르딘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몸을 바싹 붙인 채 유르딘은 레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레인……. 해도 괜찮아?”

“읏, 흐으……. 응…….”

낮은 신음이 마치 호응처럼 유르딘의 귀에 달라붙었다. 사실 그냥 호응처럼 듣고 싶다. 결국 유르딘은 견디지 못하고 손가락을 빼고 성기를 레인의 구멍 입구에 맞췄다. 닿게 되니 망설임은 짧았다. 유르딘은 레인의 안에 제 것을 천천히 밀어 넣었다. 요 며칠 실컷 했던 덕분인지 생각보다 수월하게 안으로 진입했다.

“후…….”

유르딘은 만족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아직 제대로 된 행위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만족감이 벌써부터 차올랐다. 물론 여기까지 했는데 맥없이 사정하고 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약간의 죄책감은 휘발된 지 이미 오래였다. 생각 같아서는 빠르게 움직이며 안쪽 깊은 곳까지 레인이 느끼는 곳을 눌러 가며 박고 싶었지만, 레인이 깨어나지 않은 것을 생각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깊숙한 곳에 제 성기를 박아 넣은 채 잘게 움직이며 찔러 대기 시작하자 레인의 성기는 완전히 발기했다.

“흐으…….”

어쩔 줄 모르며 움찔거리던 레인의 몸이 그대로 얌전해지는가 싶더니만, 천천히 레인이 눈을 떴다. 여전히 몽롱하게 잠에 취해 있으면서도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눈이 사랑스러웠다. 잠에서 막 깨어나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듯이 눈을 깜박였던 레인은 자신이 유르딘에게 박혀 있음을 깨닫고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르딘?”

잠긴 목소리로 믿기지 않는지 유르딘을 부르더니만, 아래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꿈일 리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유르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레인의 허벅지를 붙잡아 다리를 벌렸다. 완전히 빠져나올 듯이 성기를 빼자 안쪽이 딸려 나올 것처럼 유르딘의 성기를 강하게 죈다. 그대로 다시 유르딘은 안쪽으로 세게 밀어 넣으며 강하게 내벽을 찍어 눌렀다.

“아, 앗!”

레인이 상황을 파악하는 것보다도 신음을 내뱉는 게 빨랐다. 미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틈도 없이 곧장 강압적인 쾌감이 쏟아진다. 지금까지 참았던 것을 한 번에 풀어 놓듯이 유르딘의 허리 짓은 빨랐고, 그만큼 강렬했다. 레인은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 정신이 번쩍 든 얼굴로 유르딘을 보다가 이내 쾌락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렸다.

“유, 유르……. 흐윽, 앗! 아, 대체…….”

“해도 좋다며.”

“아, 하으, 읏, 그건……. 아, 아!”

레인의 인식으로는 준비 과정도 없이 갑작스레 성기가 들어와 꿰뚫려 있었을 뿐인데. 갑작스레 제 몸을 파고들어 있는 성기에 놀라움보다는 쾌락이 컸다. 오히려 평소보다도 훨씬 더 반응이 빠르다. 성기가 안쪽을 휘저을 때마다 머릿속도 함께 휘젓는 양, 기분 좋다는 생각 외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걸 보는 유르딘 또한 흥분했고 여유가 없는 상태였지만, 본능에 휩쓸려 그저 박기만 하는 대신에 허리를 쳐올려 느긋하고 뭉근하게 안쪽에 비벼 돌렸다. 안을 쾌락으로 휘저어 짓뭉개는 것 같다고 레인은 생각했다.

“흐, 으윽……. 하, 앗, 으응, 아!”

“하아, 하……. 윽…….”

잠들어 있던 사고와 줄곧 반응하고 있던 육체는 한 몸이 아닌 양 여전히 조금은 유리되어 있었다. 비현실적인 감각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유르딘을 붙잡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이나 여유가 하나도 없어 손톱을 세웠다. 살갗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감각은 레인이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었다. 미묘하게 어긋난 균형 속에서 단숨에 쾌감의 극점까지 오른 레인의 성기가 하얗게 정액을 토해 낸다. 평소보다도 지나치게 빠르다. 레인이 느끼기로는 짧은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레인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사랑스러워, 레인.”

“하으, 아니이……. 아, 윽, 잠, 잠깐, 흐아, 읏!”

충격받은 사정은 조금도 봐주지 않고 유르딘은 계속해서 거칠게 박아 넣고 있었다. 비스듬하게 들어 올린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리는 광경이 여전히 비현실적이었다. 이대로라면 또 금방 가 버릴 것 같다. 레인은 유르딘을 붙잡은 채 도리질치기 시작했다. 사정에 의한 쾌감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한번 거세게 들어오는 성기가 폭력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언제나 레인은 유르딘의 앞에서 솔직하게 쾌감을 드러냈지만, 이렇게 단번에 조금의 꾸밈도 없이 저를 모조리 드러내는 듯한 감각은 드물었다.

자꾸만 도리질치는 레인을 여전히 움직이며 물끄러미 보던 유르딘이 레인의 배에 튄 정액을 손으로 문질러 닦아 냈다. 손끝에 묻은 정액이 유르딘의 입 속으로 사라진다. 평소라면 레인이 하지 말래서 안 했을 짓을 태연하게 행하며 유르딘은 즐겁게 웃었다. 가볍게 입술을 핥은 유르딘은 몸을 숙여 레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러면 그만할까?”

“……읏.”

그것을 원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 굳이 물어보는 게 얄미워 레인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러나 유르딘은 레인이 제 시선을 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턱을 강하게 잡아 돌렸다. 흐릿한 어둠 속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눈동자는 레인 앞의 다정한 유르딘보다는 타인을 쓰러트리고 지배하는 유르딘에 가까웠다. 여전히 다정한 손길과 조금은 강압적인 행동의 간극에 레인은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의 충족감과 쾌감을 느꼈다.

지배와 굴종, 누가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내어주는 전부. 속박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며 레인은 역으로 그에 대한 충족감을 배웠다. 어느새 유르딘에게서 떨어져 허공을 배회하는 손길조차 용납하지 못하고 깍지 낀 채 강하게 내리누르는 손길부터 눈빛까지 모든 게 레인을 만족시켰다.

“흐아……. 아, 아, 앗……. 응, 읏!”

이어서 터져 나오는 신음은 모조리 유르딘의 입 안으로 삼켜졌다. 레인이 도리질 치던 것을 멈추자 유르딘의 손은 아래로 내려가 레인의 허벅지를 잡고 조금 힘겨울 정도로 벌려서 당겼다. 아래를 가득 채우는 성기의 감각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기절할 지경이다. 잠깐이라도 멈추지 않으면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유르딘은 그런 심정을 전혀 짐작도 못 하는 사람처럼 외려 더욱 빠르게 움직이며 레인의 성기를 붙잡아 흔들었다. 사정 후에 잠시 축 처져 있던 성기가 레인의 정액과 향유가 뒤섞여 미끌미끌한 유르딘의 손 안에서 금세 부피를 키워 갔다. 레인은 유르딘의 목을 팔로 끌어안았다.

“유르딘……. 유르, 딘. 으, 흑…….”

“레인.”

“안에, 싸 줘요……. 얼른, 응, 읏, 어서. 가득…….”

정사에는 익숙한 레인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은 한없이 낯선 것처럼 어설프기 짝이 없게 목덜미를 가볍게 핥다가 갑작스레 깨물었다. 살을 문 입 안에서 신음이 울리는 게 고스란히 들렸다. 더욱더 기분 좋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쾌감을 견디기가 힘들 지경이라 그 어설픔이 외려 음란하게 느껴졌다. 유르딘은 결국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떼며 레인의 안쪽 깊숙한 곳에 박아 넣은 채 사정했다. 사정하는 순간, 안쪽이 강하게 조여 와 절로 목구멍에서 신음이 끓었다.

“큿…….”

“흐아, 아. 아…….”

유르딘뿐만 아니라 강하게 앞과 뒤를 자극받은 레인 또한 절정에 달하며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신음을 흘렸다. 레인은 끝나지 않는 쾌감에 몸을 벌벌 떨었다. 고여 있던 눈물이 기어이 아래로 흘러내려 떨어진다.

“아흐, 으, 읏…….”

지나치게 느껴서 도리어 이상한 기분이었다. 레인이 울먹이자 유르딘은 레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괜찮아, 레인.”

다시 온순해진 남자가 쉼 없이 레인에게 키스하며 부드럽게 달랬다. 오래 울지는 않았다. 조금 생소한 감각이기는 했으나 아주 기분이 좋았으므로. 다만, 하나 걸리는 게 있었으니…….

“당신은 왜 또 세우는 거예요…….”

사정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유르딘의 성기가 빳빳하게 서서 레인을 찌르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니 유르딘은 난처하게 웃으면서도 레인에게 몸을 붙였다.

“무리시키지 않을게, 레인.”

“읏…….”

이미 이 한 번도 무리였다고 말하기에는 유르딘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다디달았다. 아주 잠깐인 휴식을 마치며 레인은 유르딘을 끌어안았다.

일찍 자려고 한 게 무색하게도, 자려고 누웠을 때는 해가 떠올라 날이 밝아져 있었다. 두꺼운 암막 커튼을 치고서 나란히 누워 레인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자는 사이에 할 줄은 몰랐어요. 사실 좀 피곤한 것 같아서 깊게 자려고 수면제를 먹었었는데.”

“미안……. 미안하다.”

“미안할 필요 없는데요. 음, 아주 좋았는걸요. 간만에 색다르게 불타올랐네요.”

어떻게 이렇게 좋을까 싶을 정도로 간밤에는 많이 느꼈다. 유르딘과의 정사야 언제나 기분 좋았지만, 안 해 보던 짓을 해 보니 또 새롭게 좋았다. 레인의 말을 가만히 듣던 유르딘이 몸을 홱 들어 레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동안은 아니었고?”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 그냥 색다른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는 거죠.”

“…….”

“진짠데요? 더 하면 뼈가 삭을 것 같아요, 유르딘.”

“약한 소리 하기는.”

유르딘은 실없는 소리를 다 듣겠다는 양 웃으며 내려갔다. 하지만 정말 레인은 진심이었다. 레인도 벌써 서른이고, 유르딘은 마흔을 넘겼다. 보통의 경우라면 슬슬 어린 애인에게 버거움을 느끼며 정력에 좋은 거라도 챙겨 먹을 나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유르딘은 7년 전에 박제된 외모 그대로 지나치게 여전한 정력을 자랑했고 레인은 종종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래도 몸은 조금 힘들지만 여전한 애정을 확인받으니 기분은 좋았다.

“아직 나흘째라니……. 엄청 오래 지난 것 같은데 말이죠.”

“빨리 돌아가고 싶어?”

“설마요. 1분 1초가 아주 색다르게 느껴지는데요. 일에 파묻혀서 살 때는 시간에 쫓기기만 했는데……. 겨울에는 당신이나 제 영지에 가서 머무를까요? 이 정도로 자유롭지는 않겠지만…….”

유르딘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노골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감정에 레인이 따라 웃었다. 하긴, 서른 평생을 각자 다른 의미에서 남들보다 배는 치열하게 달려왔으면 슬슬 쉬면서 갈 때도 되었다. 아직 한창 나이니 일을 완전히 놓지야 않겠지만, 느긋하게 사는 삶도 제법 좋을 것 같고.

레인은 가볍게 유르딘과 입을 맞춘 후 그를 끌어안고 나란히 누웠다. 아직 한참이나 남은 겨울 휴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솔솔 잠이 왔다. 유르딘은 레인의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 올리고 부드럽게 도닥였다.

“그럼 이제 자, 레인.”

“……자면 또 할 거예요?”

“아, 안 해.”

“해도 되는데.”

“쉬어야지.”

“하면 못 쉬어요.”

“안 할 거야.”

무리시켰단 자각은 있으니 또 안 할 걸 알면서도 레인은 유르딘을 놀렸다. 유르딘이 한참은 연상인데도 워낙 잘 넘어가서 미안해하니까, 이렇게 한 번 놀릴 기회를 잡으면 집요하게 놀려 보게 된다. 레인은 유르딘의 가슴에 기댄 채 큭큭 웃다가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레인을 안심시켜 준다. 예전부터 그러하듯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잘 자요, 유르딘.”

“……잘 자.”

낮고 부드럽게 떨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레인은 눈을 감았다.

안락한 고립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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