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첫 번째 만남(1권) (1/13)

닳고 닳은 연애

오후네시육분

1권

1. 첫 번째 만남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서운은 들고 있던 만화책을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누워 있어서 허리가 아프던 참이다.

재난에 가까운 폭염을 핑계로 바깥출입을 삼간 지 어언 2주째, 천직이라 여겼던 집돌이 생활도 슬슬 지겨워졌다. 가끔은 냉장고 바지 말고 다른 옷을 입고 싶고, 평소와는 다른 새로운 하루를 보내고도 싶다.

기왕이면 적당히 포멀한 자리가 좋겠다. 어느 정도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하고 적당한 기대감과 설렘이 있는, 그런 외출이 하고 싶다.

이럴 땐 데이트만 한 게 없지. 서운은 평소보다 길게 샤워를 했다. 몸을 씻는 내내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프리랜서인 서운에게 이렇게 각 잡힌 외출 준비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평일 대낮에 웨이팅 없이 인기 맛집에서 식사를 하고, 텅 빈 영화관에서 홀로 여유롭게 영화를 본다. 싱글, 프리랜서, 자취.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서운의 일상은 자유와 평화 그 자체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다. 고정 클라이언트가 생기고 수입이 안정된 건 모두 최근의 일로, 처음 몇 년은 죽어라 일만 했다.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몰아서 온다고, 그때의 서운은 모든 게 다 엉망이어서 영화 한 편 보러 나갈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집 나갔던 마음의 여유도 돌아왔다. 역시, 돈이 최고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 안정적인 수입과 함께 마음의 여유를 되찾은 서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놀았다. 혼자서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열심히 클럽을 다니기도 했다. 숨을 쉬는 것처럼 혼밥을 하고 혼술을 하며 인생을 즐겼다. 혼자서 할 수 없는 것만 빼고 다 하고 놀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데이트다. 다른 건 다 혼자 할 수 있어도 데이트만큼은 불가능하다. 그의 나이 방년 31세, 지인을 통한 소개팅은 할 만큼 했다. 어른들이 주선해 주는 선 자리도 나갈 만큼 나갔다. 서운이 제 발로 결혼정보회사에 찾아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정보를 입력하는 건 처음 한 번뿐이다. 그 후에는 커플 매니저와 매칭 매니저가 알아서 형질과 조건에 맞는 짝을 찾아 준다. 결혼정보회사의 회원이 된 건 서운이 올해 가장 잘한 일이다. 이미 마음에 맞는 짝을 찾아서가 아니라 남성 오메가인 서운에게는 신원이 보장된 알파를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돈값은 했다.

오늘이 벌써 여덟 번째 선 자리다. 소개팅 의상은 계절별로 정해져 있고, 주고받을 대화 역시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아직 만나 보지 않은 여덟 번째 상대도 마찬가지다. 서운의 조건에 가장 부합한 사람이 나올 테니 섣부른 기대나 실망은 금물이다. 처음에는 내가 겨우 이 정도인가 싶어 자괴감도 들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이제 서운은 어떤 사람이 나와도 적당히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끌어갈 자신이 있다.

그랬는데, 역시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서운은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웬 남자에게 회초리를 맞았다.

“지각입니다.”

“제가요?”

“네.”

남자는 카페 입구가 정면으로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당연하게도 서운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남자는 서운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다소 의아했으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선 자리잖아. 미리 사진을 봤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카페에 들어선 서운이 주변을 둘러보기도 전에 다짜고짜 회초리를 휘두르지는 않을 테다. 아니, 그럴 틈조차 주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구X 이미지 검색도 이것보단 안 빠르겠다.

세 번째 선 자리 이후 상대방의 사진을 보지 않는 건 전적으로 서운의 선택이나 어쩐지 괜히 손해 본 기분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신경 써서 나올걸, 내심 후회도 됐다.

이 시장이 저런 매물도 나오는 곳이었어? 남자의 얼굴을 본 순간 서운은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다 잊어버렸다.

“정확히 18분 늦었습니다.”

이상하다. 분명히 제시간에 도착한 것 같은데.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남자의 단호함에 눌려 엉겁결에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네. 18분 기다렸습니다.”

뭐지, 데자뷔인가.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남자의 모습에 거짓말처럼 두근거림이 멎었다. “하, 하하, 그러셨구나….” 서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의자를 밀었다.

18분 전에 도착했다는 남자는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그 자세 그대로였다. 서운이 자리에 앉든 말든 그저 가만히 서운을 쳐다보고만 있다. 키가 160인가. 왜 한 번을 안 일어나? 서운은 웃는 얼굴로 빠르게 남자를 스캔했다.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현실감 없이 생겼다. 어차피 맞선 장소가 다 그게 그거인지라 식전에 들르는 카페 역시 특별할 게 없는데도 남자와 함께 있는 여기가 곧 파라다이스요, 무릉도원이다. 멀리서 봐도 이목구비가 지나치게 선명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가까이에서 보고 있으려니 스크린을 보고 있는 건지 실물을 보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사람 얼굴이 저렇게까지 입체적일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위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운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향한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서운은 궁금했다. 테이블에 가려진 남자의 하체가 미치도록 궁금했다. 마음 같아서는 투시라도 하고 싶다. 설마 진짜 160은 아니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서운은 아무래도 좋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저 얼굴에 저런 어깨면 키가 170이어도 감사할 따름이다. 기왕이면 숫자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편이 좋으니까 서운보다 딱 10cm 작은 167도 괜찮겠다.

“…어….”

“…….”

“…저….”

“네, 말씀하십시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저 혼자 김칫국을 들이켜던 것도 잠시, 최단 시간 최대 효율을 기록한 서운의 스캔은 적반하장으로 끝을 맺는다. 스캔이야 서운도 했지만, 좀 많이 열심히 하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처럼 노골적으로 굴지는 않았다. 적어도 숨기려고 노력은 했다. 남자처럼 대놓고 사람을 쳐다보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남자는 처음 자세 그대로 서운을 쳐다보고 있다. 그 와중에 자세는 어찌나 바른지 서운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이쯤 되면 알아서 시선을 거둘 법도 한데 서운의 질문에도 남자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모른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쳐다보는 것 같다. 정말 뭐가 묻어서 저러나? 그럼 그렇다고 얘기를 하면 되지 사람을 왜 저렇게 쳐다보는지 모르겠다.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서운이었다. 기껏해야 사람을 쳐다보는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쑥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제가 던진 질문이긴 하지만 서운은 누구보다 빠르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게 다 저 눈 때문이다. 남자는 전반적으로 선이 굵고 직선에 가까운 외모를 가졌으나 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미간에서 콧대로 이어지는 선이 지나치게 높고 곧은데, 그 옆에 자리한 두 눈은 한없이 깊고 맑다.

빈말로도 어려 보이지 않는 외모에 한없이 어린 아이 같은 눈을 가진 남자, 짙은 눈썹과 대조되는 촉촉한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서운을 응시해 온다. 서운이 종이였으면 이미 뚫리고도 남았다. 이건 뭐, 눈앞의 남자가 서운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아니요.”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네?”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원하신다면 직접 확인하시겠습니까? 따로 휴대하고 있는 거울은 없으나 휴대폰 카메라를 비춰 드릴 수는 있습니다.”

보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서운의 앞에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어떻습니까?”

“…….”

“확인하셨습니까?”

그건 바로 서운 자신이었다. 남자는 친절하게도 휴대폰 카메라로 서운의 얼굴을 비춰 주고 있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 이게 다 더위 때문이다. 아홉 번째 선 자리는 좀 시원해졌을 때 해 달라고 해야지. 서운은 애꿎은 날씨 탓을 했다.

“…아무것도 안 묻었네요.”

“네, 그렇습니다.”

“…이제 카메라는 끄셔도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다행히 말은 잘 듣는다. 남자가 순순히 휴대폰 카메라를 껐다. …잠깐만, 다행일 건 또 뭔데? 이대로 가다가는 뭔지도 모르고 남자에게 휩쓸려 떠내려갈 것 같다.

서운이 애써 마음을 다잡는데 또다시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뭐 묻은 것도 없는데 아까부터 너무 쳐다보는 거 아니니. 서운이 불편한 마음을 담아 어색하게 웃어 보이자 남자가 돌연 질문을 해 왔다.

“왜 웃으십니까?”

“네?”

“지금 웃으셨잖습니까.”

아…. 기어코 서운의 입에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집에나 있을걸.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더위에…. 서운은 절망하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무것도 안 묻었다니까 좋아서요.”

“그렇군요. 그런 걸 좋아하시는군요.”

“그러게요….”

“한 번 더 보시겠습니까?”

“…한 번이면 충분해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아… 엄마…. 서운은 있지도 않은 엄마를 부르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앞의 남자가 왜 저런 껍데기를 가지고 이 나이까지 결혼을 못 했는지 조금, 아주 조금 알 것 같다.

서운이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앞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서운의 앞에 놓인 것과 같은 컵이 분명한데도 남자는 고작 한 손으로 컵 전체를 그러쥐고 있다. 작은 건 얼굴뿐으로 손도 크고 목도 굵다. 목 굵기에 맞춰 셔츠 깃이 딱 떨어지는 걸 보면 단순한 기성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넓은 어깨를 무리 없이 감싸면서도 몸에 딱 맞는 저 재킷은 또 어떻고, 손목시계 아래로 보이는 불거진 핏줄이 마치 액세서리 같다.

말없이 물을 마시는 남자는 완벽한 어른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려한 굴곡을 이루면서도 조화롭기 그지없는 이목구비는 흡사 조각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 속단하지 말자. 이렇게 잠깐 본 걸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지. 입을 다물자 한 점의 조각으로 돌아간 남자의 모습에 서운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예?”

남자가 진중한 목소리로 돌연 사과를 해 왔다. 사과를 왜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퍽 진정성 있게 느껴진다. 서운은 뭐든 용서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동안 바빠서 서류를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대신 이 자리에서 면 대 면으로 직접 확인하는 걸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조각이 말을 한다. 얼굴만으로도 설득력은 충분한데, 평생 거짓말이라고는 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진중한 목소리로 누구보다 정중하게 서운의 허락을 구해 온다. 무슨 청혼 현장도 아니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대로 서운에게 결혼을 하자고 해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서운은 뭔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일 뻔하다가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남자가 사람을 착각한 것 같다. 저런 건 비즈니스 미팅에서나 할 법한 말이다.

“죄송한데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아요.”

“그럴 리 없습니다.”

“아니요.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선보러 나오신 거 아닙니까?”

서운은 그 질문을 똑같이 돌려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서운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쐐기를 박았다.

“저도 선보러 나왔습니다.”

“…아, 네.”

“남성 오메가는 처음이군요. 반갑습니다. 안의진입니다.”

우성 알파가 저 나이까지 여성 오메가만 고집해 왔다는 건 구시대적 사고에 사로잡힌 꼰대 기질이 난무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남성 오메가에게도 시선을 돌린 것 같은데 어느 쪽이든 좆같은 건 매한가지다. 서운은 조금 성의 없이 자기소개를 했다.

“정서운입니다.”

“정서운 씨, 그럼 지금부터 몇 가지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진솔하게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 미란다의 원칙도 같이 얘기해 주지 그러냐. 서운은 빈정거리면서도 내심 남자의 질문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좀 궁금하긴 했다.

“자녀 계획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 시발. 서운은 사레가 들렸다. 콜록콜록, 몇 번이나 마른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지켜보던 남자가 웨이터에게 물을 주문했다. 서운은 급하게 다시 웨이터를 불러 세웠다.

“얼음물로 주세요.”

냉수로는 부족했다. 서운은 시원하게 얼음물을 들이켰다. 아, 이제 좀 살겠네. 서운이 물 잔을 내려놓자 남자의 시선도 함께 따라 움직였다. 물 잔은 반 이상 비어 있었다. 남자가 말했다.

“치아 관리를 잘하셨나 봅니다.”

“…뭐요?”

“그래서 자녀 계획은 어떻게 되십니까?”

그래, 한번 해보자. 서운은 빠르게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본격적으로 남자를 상대하기에 앞서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몸이 편해야 마음도 편한 법이다. 서운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생각 안 해 봤어요.”

“자녀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아니요.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지금까지 그런 마음이 든 적이 없어서요.”

“자녀 계획이 꼭 무슨 마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겁니까?”

“어, 그럼요?”

서운이 되묻자 남자가 눈썹을 까닥거렸다. 뭐야, 저건 또. 서운은 신경 쓰지 않고 마저 제 할 말을 했다.

“이 사람과 나를 닮은 아이가 갖고 싶다.”

“…….”

“아직은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네요.”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이 궁금했던 적은 있지만 그것뿐이다. 그 사람은 아이였을 때도 귀여웠겠지, 마음은 거기서 그쳤다. 아이를 갖고 싶은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사실은 그쪽에서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지만 서운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를 안 가질 생각은 없어요. 많이 낳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요.”

“그렇습니까.”

“물론 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만 아직은 너무 먼 얘기라….”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럼 다음 질문 하겠습니다.”

뭐가 충분한데? 아니, 그 전에 나 혼자 말하고 끝이야? 서운이 당황스러운 마음을 다잡을 새도 없이 곧바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개인 시간에는 주로 무엇을 하십니까?”

“개인, 뭐요?”

“취미도 좋고, 하루 일과도 괜찮습니다. 서운 씨 혼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남자는 진지했고, 서운은 황당했다. 이건 뭐 선이 아니라 면접에 더 가까웠다. 결혼정보회사에 가입한 이후 많은 우성 알파들과 선을 봐 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사람을 재는 알파는 없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이제는 어느 정도 세상을 겪어 봤다고 생각했는데 스스로를 너무 과신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 너는 점수를 매겨라. 나는 액땜을 하고 아홉 번째 선 자리에 나가마. 서운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그냥 평범하게 보내요. 일이 있을 땐 일을 하고, 일이 없을 땐 쉬고요. 취미는, 그냥 다 말하면 돼요?”

“네. 말씀하세요.”

“이건 취미이자 특기인데, 현질 안 하고 게임하기요. 프리랜서라서 시간이 좀 많거든요. 게임도 좋아하고, 뭐 보는 것도 좋아해요. 영화, 미드, 만화, 다큐 가리지 않고 다 보는 편이에요. 운동은 살기 위해서 가끔 하고, 아, 요리하는 것도 좋아해요. 바쁠 땐 대충 먹다 보니까 일만 끝나면 없던 요리 욕구도 생기더라고요.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아무 계획 없이 누워 있는 거? 가만히 누워 있다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걸 당장 할 수 있을 때 제일 행복한 것 같아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존나 tmi였지만 딱히 멈춰야 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남자는 서운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 보였으니 예의가 아주 없지는 않다.

“더 말할까요?”

“아니요. 충분합니다.”

남자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은 남자에게서 앞뒤로 꽉꽉 채운 양 많은 답안지를 좋아하던 과거 교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서운 씨는 혼자 계셔도 심심하진 않겠습니다.”

“가끔 심심할 때도 있긴 한데, 어쩔 수 없죠. 이제는 혼자 산 지 오래돼서 익숙해요.”

“완벽하네요.”

“예? 제가요?”

“바로 다음 질문 시작하겠습니다.”

“잠깐 주문 좀 하고요. 뭐 드실래요?”

“먼저 주문하십시오.”

“전 아이스 라테 한 잔요. 우, 정 씨는….”

“안의진입니다. 저도 같은 걸로. 아이스 라테 두 잔 주시면 됩니다.”

질문에 정신이 팔려서 정작 이름을 잊어버렸다. 서운은 멋쩍게 웃으며 괜히 물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서운이 듣고 온 남자의 이름은 ‘의진’이 아니었다. 사진만 보지 않았을 뿐 매니저를 통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듣고 온 서운이었다. 이번에도 상대는 우성 알파이고 나이는 39세, 이름은….

“의진 씨.”

“네.”

“혹시, 원래 성함이….”

“개명했습니다.”

“아, 네.”

“서운 씨는 조사를 많이 하셨나 봅니다.”

이걸 조사라고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서운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의진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저도 충분히 조사를 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아, 네. 그러세요. 서운은 그러거나 말거나 반쯤 녹은 얼음을 꺼내 먹었다. 사실 처음부터 얼음이 먹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녹을 때까지 참았다. 저 알파는 하나도 참지 않고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그럼 질문 시작하겠습니다.”

“네. 준비됐어요.”

이건 퀘스트다. 자고로 퀘스트란 깨기 위해 존재한다. 서운은 비장하게 면접에 응했다. 몇 가지 더 등신 같은 질문이 오가고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서운은 곧바로 빨대를 입에 물었다. 역시, 밖에서 마시는 커피가 제일 맛있다. 집에서 내려 마실 때랑은 차원이 다르다. 서운은 맛있게도 커피를 마셨다. 의진의 시선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의진의 커피는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아직 입에도 대지 않은 것 같다. 서운은 머쓱하게 빨대를 내려놓았다. 명색이 선 자리인데 의진의 넘치는 개성이 서운을 자꾸 풀어지게 만들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나. 잠시 고민하던 서운이 다시 빨대를 입에 물었다. 이미 망한 선, 먹는 거라도 맛있게 잘 먹어야 했다.

“마지막 질문 드리겠습니다.”

“오, 네.”

“서운 씨가 생각하는 배우자의 조건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어… 이거 좀 어렵다. 잠깐 생각 좀 할게요.”

“5분 드리겠습니다. 많이는 못 드립니다.”

“아, 예. 4분 안으로 얘기할게요.”

“5분까지는 괜찮습니다.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이 구역의 대인배가 따로 없네. 서운은 빈정거리면서도 주어진 시간 안에 퀘스트를 달성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 바람이나 도박, 폭력같이 비상식적인 건 절대 안 돼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외에는… 그냥, 서로 맞춰 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게 다입니까?”

“조건적인 거야 뭐, 피차 어느 정도는 아니까요.”

결혼정보회사가 우후죽순 생겨나는 이유가 있다. 솔직히, 편하다. 아닌 척 나를 포장하며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도 없고 불확실한 정보에 떨지 않아도 된다. 주선자와 껄끄러워질 일도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앞으로 이 정도로 잘생긴 사람은 못 만나겠지. 서운은 세상 심각해 보이는 남자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동안이세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요. 감사합니다.”

“그래요? 절대 그 나이로는 안 보이는데. 30대 초반으로 보여요.”

그 말에 의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혹시 욕하시는 겁니까?”

“제가요?”

“네.”

“네?”

이건 또 뭐지. 서로의 시선이 엇갈리는 가운데 서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39살이시라고….”

“동안이시군요. 저보다 어려 보이십니다.”

“저 말고 의진 씨요.”

“제가 말입니까?”

“…그렇죠?”

의진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서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서운의 휴대폰이 울린 것도 그때였다. 진동이 연이어 울리는 걸 보니 전화가 온 것 같았다.

“아무래도 조사를 잘못하신 모양입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잘못 알았나 봐요.”

이 정도 안 받으면 그만할 법도 한데 진동이 끊이질 않았다. 혹시 클라이언트인가 싶어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매칭 매니저에게 온 전화였다.

지금 선보고 있는 거 뻔히 알 텐데 전화라니?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서운은 전화를 받을지 말지 잠시 고민했다.

“서운 씨.”

“네.”

“결혼합시다.”

“네. 저 잠시 전화 좀….”

…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서운이 그대로 굳었다.

“결, 뭐요?”

“결혼 말입니다. 결, 혼.”

“아니, 그러니까, 결혼, 결혼을 하자고요? 나랑? 오늘 처음 봤는데?”

“그게 중요합니까?”

“그럼 안 중요해요?”

정서운, 32세. 우성 오메가. 처음 만난 우성 알파에게 청혼받다. 그 와중에도 진동은 끊임없이 울려 대고 있었다. 서운은 전화를 핑계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 * *

- 서운 씨! 지금 어디예요?

“어디긴요. 선보러 나왔죠.”

그런데 또라이가 나왔어요. 매니저의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며 서운은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 네? 두 분 만나셨어요?

“네. 같이 얘기 중인….”

- 지금 알파분한테 연락이 왔는데 서운 씨가 안 나오셨다는데요?

“제가요?”

- 계속 기다리고 계신다고….

그럼 지금까지 나랑 같이 있었던 사람은 누군데?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매니저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정서운 씨?”

누군가 뒤에서 서운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간 곳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서운과 그다지 차이가 없는 키, 조금 커 보이는 품이 맞지 않는 정장까지. 한껏 멋을 냈지만 어딘가 숨길 수 없는 노티가 느껴진다. 지금까지 서운이 만나 온 일반적인 알파의 모습이었다.

“계속 기다렸는데 안 오셔서….”

“혹시 성함이….”

“안형준입니다.”

아, 생각났다. 안형준이었다. 안의진이 아니라, 안형준. 39세, 우성 알파, 모 기업의 과장 2년 차. 한 가지가 생각나니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여기가 서운의 현실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잘생긴 알파가 서운의 상대일 리가 없다. 서운은 빠르게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매니저와 통화를 끝내고 제일 먼저 형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 받아들이면 어쩌겠냐마는 다행히 형준은 흔쾌히 상황을 받아들였다. 알겠으니 어서 빨리 이야기를 나눠 보자며 서운을 잡아끌기도 했다. 언제 봤다고 다짜고짜 팔을 잡아끄는 건지, 알파들은 꼭 손부터 먼저 나가는 경향이 있다. 불쾌하지만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알파들이 다 이렇지 뭐. 서운은 자연스럽게 형준의 손길을 걷어냈다.

의문도 풀렸고, 오해도 풀렸다. 이제 남은 건 의진에게도 이 소식을 전하는 것뿐이다. 오늘의 가장 상위 퀘스트였다.

서운이 다시 카페에 들어서자 의진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붙는다. 그것만으로도 벌써부터 난코스가 예상된다. 의진은 처음 자세 그대로 서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운 씨, 다음 달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 전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시간이 없으니 빨리하시죠.”

서운은 보고를 올리는 부하 직원처럼 의진에게 진실을 밝혔다. 우리는 서로의 상대가 아니다, 오해였다. 서운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형준을 가리켰다. 의진의 시선이 서운을 따라 형준에게 옮겨 갔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서운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으니 의진 씨도 일행분께 따로 연락해 보세요.”

“…….”

“아마 지금쯤 의진 씨를 찾고 있을….”

“그럼 우리 결혼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

…설마 진심이었…. 서운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의진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전 농담 안 합니다. 서운 씨도 그러겠다고 대답하셨잖습니까.”

“예? 제가요?”

“아까 분명히 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설마 녹취라도 해 둔 건 아니겠지. 서운은 무의식중에 의진의 손 언저리를 살폈다.

“의진 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서운 씨, 무슨 일이에요?”

이야기가 길어지자 지켜보던 형준이 다가왔다. 앞 의진, 뒤 형준에게 가로막힌 서운은 치정극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대개 지나가는 조연 1에 불과한 서운이 비로소 주인공 자리를 꿰찬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나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했어야 말이지. 오늘 처음 본 알파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으려니 깊은 현타가 찾아온다.

“서운 씨는 저랑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무슨! 이게 무슨 소리예요, 서운 씨? 결혼을 한다니요?”

아직 선은 보지도 않았는데 내 선 자리 상대가 갑자기 결혼을 한다? 형준도 놀랐겠지만 서운은 더 놀랐다. 서운은 지금 막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접한 참이었다.

“…그러게요. 제가 결혼을 한다네요….”

“말 그대로입니다. 서운 씨, 저는 공항 체크인 시간이 다 돼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브리프케이스를 챙겨 든 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의진에게 향했다.

“한국에는 보름 후에 돌아옵니다. 결혼 준비는 돌아와서 시작하는 걸로 하죠.”

깔끔하게 제 할 말을 마친 의진이 슈트 안쪽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은 곧 서운의 앞에 내밀어졌다.

“조만간 따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 번을 안 일어나기에 160일 줄 알았는데…. 서운의 시선이 끝도 없이 올라갔다. 오르고 올라 의진의 얼굴로 향했다.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선 의진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뒷목이 다 뻐근하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서운이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세상이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세상은 역시 존나게 불공평하다.

“서운 씨?”

정서운, 정신 차려. 알파 얼굴 뜯어 먹고 살 거야? 마지막 남은 이성이 서운을 붙잡았다.

“서운 씨.”

“…….”

“연락처를 알려 주십시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여기요. 여기 있습니다.”

어. 뜯어 먹고 살래. 시발, 내가 일하면 되지! 죽을 때까지 일하면 되지! 서운은 두 손으로 공손히 제 번호를 넘겼다. 서운의 여덟 번째 선 자리는 그렇게 쫑이 났다. 완벽한 파투였다.

* * *

그게 불과 이 주 전의 일이다. 놀랍게도 서운은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물론 매니저는 난리가 났고, 의진은 연락 한 통 없지만 그래도 다 괜찮았다.

서운은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그렇잖아. 내가 또 언제 그런 알파랑 말을 해 보겠냐고. 매니저에게 본심을 털어놓자 매니저는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었다.

“서운 씨. 분명히 저한테는 외모 별로 안 보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죠.”

“그래도 그렇지, 상대 알파분 앞에서 대놓고 번호를 알려 주시면….”

“…그러게요. 제가 그랬네요.”

“그분이 서운 씨 사진 보고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셨는데요.”

“오….”

반응이 심드렁했다. 어차피 남의 일이요, 남의 알파였다. 형준의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도 안 난다. 고작 한 번 봐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직도 의진의 얼굴이 눈앞에 생생하다. 솔직히 그 얼굴에 그 키면 말 다한 거 아닙니까. 몇 번을 다시 생각해 봐도 서운의 결론은 같았다.

그래. 잘했어, 정서운. 잘한 거야. 결국 그놈이고 저놈이고 얻은 건 하나도 없지만 넌 최선의 선택을 한 거였어!

내심 보름 후를 기대했던 것도 잠시, 서운은 착실하게 자신의 일상을 살았다. 연락을 기다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서운은 금세 이 상황에 적응했다. 연락 한 통 없는 잠잠한 휴대폰만큼이나 서운의 마음도 날이 갈수록 차분해져 갔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연락보다는 아홉 번째 선 자리를 기다리며 회원권 연장도 알아봤다.

연애를 하지 않아서 좋은 점은 일상이 평화롭다는 점이다. 마음 쓸 일도, 시간 낭비할 일도 없다. 오로지 내가 전부인 생활,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휴대폰마저 조용하다. 온전히 서운의 힘으로 이룩해 낸 평화였다.

일주일 뒤에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프리랜서라는 직업 특성상 일과 사생활의 구분이 어려워서 한 번 작업을 시작하면 내 생활이 없어졌다. 서운은 그때를 대비해 열심히 현재를 즐기고 있었다.

밤낮이 바뀐 지 오래였다. 오후 늦게 잠에서 깨어난 서운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조금 뒹굴하다가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가 다 지나 있었다. 통상적으로는 곧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배달이나 시켜야지. 오늘은 뭘 먹을까. 서운은 노트북 대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부재중 통화 1건]

[안의진입니다. 통화 가능하실 때 연락 주십시오.]

아주 잠시 휴대폰에 소홀했을 뿐인데 그새 부재중 통화와 새로운 메시지가 남겨져 있다. 서운은 몇 번이나 의진의 메시지를 읽었다. 텍스트로 전해지는 딱딱한 말투, 고지식해 보이는 몇몇 모습들까지. 서운은 자신의 안락한 생활과 개성이 넘치는 의진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괜히 내 손으로 이 평화를 깨트리는 건 아닐까.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인생은 매 순간이 도전이다. 서운은 곧바로 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안의진입니다.

통화는 한 번에 연결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것도 다 타이밍이다. 죽어 있던 연애 세포가 방정맞게 설레발을 떨어 댔다.

“안녕하세요. 정서운입니다. 연락 주셔서 전화드려요.”

- 네, 안녕하십니까.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과연 의진은 뭐라고 할까. 서운은 내심 기대가 되었다.

- 잘됐군요. 오늘부터 결혼 준비를 시작하려 합니다.

“…뭐요?”

- 우선 결혼 날짜부터 정해 볼까요. 다음 달 언제쯤이 좋으십니까. 전 빠를수록 좋습니다.

“잠깐, 잠깐만요. 결혼하자는 거 진짜였어요?”

- 세상에 어느 누가 결혼 얘기로 장난을 칩니까.

너요! 너요, 이 새끼야! 서운이 침착하게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잘됐네요.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만나서 얘기하시죠.”

서운은 의진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 제가 이번 달은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까였다. 뭐 이 새끼야? 서운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러다 결혼식 날 보겠어요.”

- 아,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아니요. 상관없어요. 괜찮습니다.”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상관없다고요. 결혼 안 할 거니까.”

- …분명히 결혼하시겠다고….

“얼굴 한 번 보기 힘들 정도로 바쁜 사람은 결혼도, 연애도 하면 안 돼요. 그거 불법이에요.”

딱 한 번 본, 그것도 이름만 아는 사람과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아니지만, 했다. 해 버렸다. 결혼은 둘째 치고 이 부분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연애도 해 볼 만큼 해 봤고 이별도 해 볼 만큼 해 봤다. 처음부터 아닌 사람과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 불법….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그럼 대략 몇 시간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지요?

“그건 또 뭔 소리예요.”

- 어느 정도 시간을 비우면 되는지 말씀해 주시면 참고해서 일정을 짜 보겠습니다.

“…….”

-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실까요.

“…….”

- 바쁘시면 지난번처럼 1시간 미만으로….

“안의진 씨. 오늘 저녁에 뭐 해요.”

듣다 못한 서운이 의진의 헛소리를 가로막았다.

“괜찮으면 잠깐 만나죠. 길게는 말고 한 2시간 미만으로.”

- 아직 야근 중입….

“시간은 알아서 맞출 테니까 되는지 안 되는지 그것만 말해요. 돼요, 안 돼요.”

모든 건 타이밍이다. 서운은 이대로 의진과의 인연이 끊어져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의진이 순순히 약속에 응했을 때에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어쨌거나 약속이 잡혔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까지 앞으로 3시간, 적어도 한 번은 더 보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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