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세 번째 만남 (3/13)

3. 세 번째 만남

적당한 운동은 수면의 질을 향상시킨다. 그날 서운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모두 만족스러운 숙면을 취했다. 어찌나 달게 잤는지 온몸이 개운하다 못해 힘이 막 차오르는 기분이다. 서운이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 컨디션이 좋은 건 거의 처음이다.

얼굴에서는 윤기가 흐르고, 온몸에서 생기가 넘쳐흐른다. 그렇게 많이 잤는데 어디 하나 부은 곳도 없다. 물론 몇 군데가 붓긴 했지만 오랜 수면 때문은 아니었다. 하도 빨리는 바람에….

거기까지 생각한 서운이 붉어진 얼굴로 마저 양치를 했다. 어제 한 일을 생각하면 잠옷에 쓸리는 젖꼭지가 따가운 건 물론이고, 이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뭉쳐서 죽을 것 같다. 서운은 어기적어기적 욕실을 나섰다. 평소에 쓸 일이 없었던 근육을 호되게 혹사시킨 대가였다. 오랜만에 맛본 쾌감에 눈이 멀어 겨우 두 번 만난 사람을 눕혀 놓고 열심히 허리를 놀려 댄 결과이기도 했다.

허벅지 통증이 이렇게 생생한 걸 보니 꿈은 아닌 모양이다. 서운은 끙끙거리며 허벅지를 주무르다가도 흐뭇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서운은 정사의 여운에 잠겨 기꺼이 끼니도 걸렀다.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몸이 나른하다는 핑계로 식사를 미루고 미루다 늦은 첫 끼를 먹고 있을 때였다. 서운의 휴대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발신인 안의진. 의진에게서 온 전화였다. 서운은 마침내 의진의 번호를 저장한 것도 모자라 의진의 이름만 보고도 누구보다 활짝 웃고 있었다.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라 그냥 막 웃음이 나왔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다. 서운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제가 듣기에도 막 자다 깬 목소리였다. 일어난 뒤로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의진이 오해할 만도 하다. 서운은 누구보다 친절하게 의진의 오해를 풀어 주었다. 친절함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절로 솟아났다.

“아니요. 오늘 말을 처음 해서요.”

- 그렇군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지금 먹고 있어요. 의진 씨는요?”

- 저도 먹었습니다.

연인끼리 할 법한 평범하고 평화로운 대화였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 다음 달 첫째 주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괜찮긴 한데….”

설마…. 혹시나 싶은 마음에 서운이 말끝을 흐렸다.

- 그럼 그때 어른들이랑 같이 뵙죠.

“어른들요?”

- 네. 상견례 장소는 제가 잡겠습니다. 한정식 괜찮으십니까?

아, 맞다. 얘 나랑 결혼하자고 그랬지. 서운은 의연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괜찮은데 우리 상견례 하면 진짜 결혼해요?”

- 그럼 가짜 결혼도 있습니까?

“…설마 농담한 거 아니죠?”

- 전 농담 안 합니다.

“그거 자랑 아닌 것 같은데.”

- 자랑도 안 했습니다.

“아, 네. 그래서 결혼하자고요?”

- 네, 그렇습니다. 혹시 확인이 더 필요하십니까?

“무슨 확인요?”

- 페로몬과 속궁합 말입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서운이 근육통에 시달리면서도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는 이유, 태초에 페로몬과 속궁합이 있었다. 서운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건 더 확인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 통과인 겁니까?

“…통과가 뭐예요. 프리패스십니다.”

- 다행이군요.

“그, 의진 씨는요?”

서운이 물었다. 아무것도 안 해 줘도 알아서 벌떡벌떡 잘 서던 의진의 주니어를 생각하면 대답은 뻔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게 좋으니까 민망함을 무릅쓰고 대놓고 물어봤다. 다행히 의진은 당황하지 않고 덤덤하게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 예상대로였습니다.

문제는 그다지 모범적인 답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이지도 않았다.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서운이 고민하는 사이 의진이 알아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 서운 씨 페로몬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나더군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다만….

“네.”

- 속궁합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왜요?”

설마 별로였던 건…? 서운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쓰나미도 몰려왔다.

- 속궁합의 기준이 명확하게 잡혀 있지 않아 정확한 말씀을 드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니다. 이쯤 되면 개소리가 분명하다. 서운이 개소리 추격에 나섰다.

“속궁합에 기준이 어디 있어요. 내가 좋으면 좋은 거지.”

- 그런 겁니까?

“아니면 어쩔 건데요. 그걸 어떻게 평균화하려고.”

- 확실히 도출 과정에서 많은 오류가 있겠군요.

그게 문제니. 그래서 납득하는 거야? 여러모로 할 말은 많았으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답은요.” 지금 서운이 알아야 할 건 딱 하나다.

- 중요한 건 서운 씨의 컨펌이지, 저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 저는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습니다. 확인이 필요한 건 서운 씨였지요.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운의 입가는 이미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광대는 위로 올라가다 못해 봉긋 솟았다.

- 서운 씨.

의진이 다시 한 번 서운을 불렀다. “네.” 보이지는 않겠지만 서운이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도대체 밥 먹다 말고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다.

- 결혼합시다.

결혼, 결혼이라. 서운은 결혼이 하고 싶다. 당연한 소리다. 그러니까 선도 보고 부지런을 떨어 댔겠지. 언젠가는 결혼을 하고 싶었는데 그날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것도 집에서 혼자 밥을 먹다 말고 고민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래도 꼴에 두 번이나 봤다고 의진의 무덤덤한 구애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이 알파는 뭘 믿고 이렇게 결혼 타령인 걸까. 나를 믿나? 내 뭘 보고?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의문을 품자면 끝도 없다.

궁금하다. 당연히 궁금하지만 서운은 끝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의진의 생각이 아니니까. 타인의 의견은 그 역할과 한계가 명확해서 감히 내 선택을 책임져 주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건 오직 나만의 몫으로, 서운은 누구보다 자신의 영역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난 이 사람과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서운은 고민했다. 비록 잠옷 차림에 숟가락을 들고 있긴 하지만 최근 몇 년간 가장 진지했다 말할 수 있다.

짧다면 짧은 서운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지금이야 돈도 벌고 그럭저럭 완성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지만 이 모든 건 비교적 최근의 일로 이렇게 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평생이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랬는데, 서운이 평생에 걸쳐 구축해 놓은 평화롭고 안정적인 일상은 겨우 두 번 만난 알파에 의해 순식간에 뒤집혔다.

의진과는 이제 겨우 두 번 본 사이지만 만날 때마다 충격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어서 도저히 방심할 수가 없다. 통화 중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측 불가, 의진과 함께하는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감히 상상조차 안 간다. 지금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불안하다, 서운이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서운은 어느 순간부터 많은 것들에 익숙해졌다. 연애도 해 볼 만큼 해 봤고 이별도 해 볼 만큼 해 봤다. 사회생활을 한 지는 벌써 5년이 넘어가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경험치도 적지 않게 쌓였다.

과거의 서운에게는 심심찮게 찾아오던 가슴 떨리는 설렘이 어른 정서운에게는 더 이상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비단 연애뿐만이 아니라 모든 게 다 그렇다. 평화로운 일상에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느낀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지극히 이율배반적인 평화 속에서 서운은 밥을 먹다 말고 인생의 중대사에 직면했다.

불안감은 여전하다. 당연히 불안한데, 딱 그만큼 설렌다면 내가 드디어 미친 걸까. 서운은 이 감정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충동적이라고 하기에는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의진의 조건을 하나하나 따지게 되고, 이성적이라고 하기에는 기꺼이 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싶다. 이 시대에 꼭 맞는 적당히 속물적인 로맨티시스트가 아닐 수 없다.

잠깐! 잠깐만, 서운아. 어딘가 하자가 있지 않을까? 최소 2년은 만나 봐야지! 이혼보다는 파혼이 낫고, 파혼보다는 이별이 나아! 마지막 남은 서운의 이성이 열심히 서운을 뜯어말렸다. 그럼에도 섣불리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그러죠, 뭐.”

한 손에는 숟가락을,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든 채였다. 옷은 여전히 잠옷 차림이다. 마침내 서운은 의진의 청혼을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합시다, 결혼.”

결정사 환불 가능하려나.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그 순간, 서운은 아주 현실적인 고민을 했다. “감사합니다.” 휴대폰 너머에서는 의진이 감사 인사를 전해 왔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당장은 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서운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 * *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됐냐고 하면 아무 일도 없이 잘 살았다. 아주 잘 지냈다. 인생의 중대사가 한순간에 결정된 것치고는 평소와 똑같은 날들이었다.

인생은 실전이다. 결혼은 결혼이고 당장은 잘 먹고 잘사는 게 더 중요했다. 사실 제일 중요했다. 서운은 그 뒤로 며칠을 더 뒹굴하다가 새로운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기존 클라이언트가 아니라 클라이언트 소개로 진행하게 된 곳이라 작업을 하는 내내 평소보다 배로 신경이 곤두섰다.

고정 클라이언트가 생기면 작업이 수월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고정 클라이언트만 맡다 보면 발전이 없어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자기 계발을 위해서라도 신규 클라이언트 개발에 소홀해서는 안 될 노릇이건만 역시 너무 힘들다. 제대로 된 끼니를 먹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24시간 내내 일만 하는 것도 아니면서 막상 제대로 밥을 챙겨 먹으려고 하면 그 시간이 미치도록 아까운 건 왜일까. 서운은 오늘도 책상 앞에서 식사를 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수정본을 발송하고는 모니터를 노려보며 편의점 샌드위치를 베어 먹었다.

제발 컨펌 좀 해라, 좀. 담당자 말투가 워낙 상냥해서 방심했다. 이번 클라이언트는 한 번에 원하는 걸 얘기하는 법이 없었다. 간접 화법의 극치라고 해야 하나. 서운과 제일 안 맞는 유형이다. 서운은 간접 화법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단도직입적인 사람이었다.

자칫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의진의 태도가 그다지 불쾌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상대방이 지나치게 솔직할지언정 답답한 것보다는 어이가 없는 편이 훨씬 낫다. 어이는 없지만 적어도 대화는 가능하잖아? 서운은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작업한 파일들을 정리했다.

이제 반이나 먹었을까. 거짓말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또 수정 요청인가. 서운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휴대폰은 보지도 않고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도 전화가 계속 울렸다. 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뭐지? 뒤늦게 휴대폰을 확인하니 전화가 아니라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일주일 전인가 이 주일 전인가, 서운이 보험 삼아 설정해 놓은 스케줄 알람이었다.

[상견례 D-2]

아, 맞다. 상견례. 나 상견례 해야 되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동안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서운이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진이 해외 출장을 갔다. 적게는 이틀에 한 번, 많게는 하루에 한두 번씩 주고받던 연락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덕분에 제대로 잊고 있었다. 자신이 곧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상견례까지 이틀, 당장 어른들에게 이 소식부터 알려야 한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제 와서 다시 결혼을 고민할 시간조차 없다. 서운은 부랴부랴 외삼촌 내외에게 연락을 했다.

소식을 전하는 서운도, 소식을 전해 듣는 외삼촌 내외도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갑작스러운 상견례였다. 기함하는 외삼촌 내외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당장은 시간이 없어도 너무 없다. 외삼촌 내외가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상견례 당일이 되었다.

“네가 이해하렴. 네 외삼촌이 원체 속이 좁잖니.”

알람이 하루 전에 울렸으면 여러모로 큰일 날 뻔했다. 서운은 아까부터 창밖만 바라보는 외삼촌의 풀죽은 뒤통수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은 그저 자신이 죄인이다. 갑자기 연락이 와서는 이틀 뒤에 상견례가 있다고 통보를 해 대는 조카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니에요. 제가 백번 잘못했는걸요. 죄송해요, 외숙모.”

“아유,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결혼식 날짜는 제때 알려 줄 거지?”

“…죄송합니다.”

“인사도 생략했으니 결혼식 날짜는 꼭 미리 알려 주기야?”

보통은 상견례 전에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두 사람은 그마저도 모두 건너뛰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일정이 안 맞아서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그냥 상견례 때 인사드리자는 결론이 나왔다. 서운은 바빴고 의진도 바빴으며 결혼 준비 자체가 워낙 급하게 진행돼서 시간상 여유가 많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건 핑계로, 사실은 자신의 결혼 사실을 제대로 잊고 있었던 서운의 죄가 가장 크다.

“아, 애 민망하게 왜 그래? 자기 밥벌이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어머, 누가 뭐랬어요? 괜히 나한테 화풀이야. 사랑하는 조카한테 뺨 맞고 왜 나한테 그래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애 들어.”

“애는 무슨. 서운이가 7살이라도 돼요?”

결국 또 이렇게 되는구나.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아, 피곤하다. 서운은 식당으로 가는 내내 로봇처럼 어색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막상 상견례가 코앞으로 다가오니 잊고 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밤잠까지 설쳤다. 가뜩이나 일 때문에 수면 시간이 불규칙했던 저인데 긴장감과 불편함이 한 번에 몰아치자 이 상황이 꿈처럼 느껴진다. 꿈의 시작은 이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쪽도 네가 오메가인 건 아는 거냐?”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어렵게 꺼낸 한 마디에 제일 먼저 돌아온 반응은 걱정이었다. 알파와 오메가보다는 베타가 압도적으로 많은 세상이니 그럴 만도 했다. “네, 알파예요.” 서운의 대답에 외숙모가 가장 기뻐했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모두 베타다. 메시지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형질의 세계를 이해하고자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던가. 서운은 자신을 키워 준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어떤 사람이니?”

“뭐 하는 사람이냐?”

“혹시 각인도 했니?”

“부모님은 뭐 하시냐.”

서운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겠다며 대답을 얼버무린 건 결코 서운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사실 서운도 잘 모른다. 의진이 어떤 사람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는 서운이 가장 궁금했다.

…나 진짜 괜찮을까.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무책임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잖아. 진짜로 결혼한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래 봤자 겨우 상견례 자리다. 아직은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다. 그런 건 서운이 제일 잘 안다. 서운은 다시금 마음을 추슬렀다. 이혼보다는 파혼이 낫고, 파혼보다는 이별이 낫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느덧 차가 멈춰 섰다. 주차장 직원이 다가와 친히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서운이 비장하게 차에서 내렸다. 곧 상견례가 시작한다.

외삼촌의 성화에 무려 4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밖에 있자니 날이 너무 더워서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서운의 식구들은 ‘안의진’으로 예약된 방을 안내받았다. 여느 상견례 자리가 그러하듯 별채처럼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여기까지는 무난했다.

“방을 잘못 알려 준 거 아니니?”

“기자 회견이라도 한다냐?”

방이 지나치게 큰 것만 빼면. 방 안에 의자가 몇 개나 있는 건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확인해 보고 올게요.” 서운은 황급히 밖으로 나가 직원을 찾았다. 착오가 있었던 거겠지. 서운은 당연히 그렇게 믿었으나 안일한 생각이었다. 이 방은 의진이 예약한 게 맞았다.

돌아온 서운이 침착하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자세히 보니 한쪽만 의자가 세 개고 맞은편에는 의자가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도대체 몇 인석을 준비한 거야? ‘우리는 최대가 세 명이니까 일부러 맞추지 않아도 돼요.’ 분명히 서운이 먼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싶다. 의자 수만 보면 상견례가 아니라 기자 회견장이 따로 없다. 아직 사람이 오지 않아 자리가 더 많아 보이는 텅 빈 맞은편을 바라보며 서운은 미친 듯이 불안해졌다. 아직 상견례는 하지도 않았는데 시작부터 범상치 않다.

“안 되겠어요. 물 좀 더 마셔야겠어요.”

“또? 벌써 몇 잔째야. 진정 좀 해. 당신 지금 얼굴이 허옇게 떴어.”

“당신은 뭐 멀쩡한 줄 알아요? 갓 쪄 놓은 고구마처럼 벌겋게 익어 가지고….”

“사람보고 고구마라니!”

“감자라고 안 한 게 어디예요? 고마운 줄 알아야지, 쯧….”

“가, 감자…!”

평소라면 눈치껏 알아서 물을 떠 왔을 서운도 지금은 외삼촌 내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프로젝트랑 겹치지만 않았어도 지금보다는 더 준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전부였다.

의진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건 둘째 치고(이제 이 사실은 너무 당연해졌다.) 양가 어른들 앞에서 어떤 식으로 입을 맞춰야 하는지 논의된 게 하나도 없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하자니 제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대책이 없고, 적당히 진실을 얼버무리자니 의진이 맞춰 줄지가 의문이다.

…됐다. 바랄 걸 바라야지. 의진이 합의되지 않은 서운의 장단에 맞춰 눈치껏 행동할 리가 없다. 의진에 대해 잘 모르지만서도 이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지금은 그저 끝이 어떻게 나든 간에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상처로 남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물론 서운 자신에게도.

“어머, 먼저 와 계셨네요?”

“만나서 반가워요!”

“와우! 우리 지니 남편 인물 너무 좋다!”

“안녕하세요!”

“아유, 뭣들 하고 있어. 어서들 와요! 기다리시잖아!”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대부분의 천재지변이 그러하듯 그들은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계속 들어왔다. 한 명, 두 명, 다섯 명, 일곱 명…. 인원이 늘어날수록 서운의 정신이 날아갔다. 연령대는 천차만별이었고 형질도 다양했다. 알파와 오메가, 베타가 저마다 요란하게 방으로 들이닥쳤다. 다들 옷차림은 또 어찌나 화려한지 눈이 다 아팠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넋이 나갔다. 넋이 나간 건 서운도 마찬가지였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불청객들은 하나같이 사교성이 좋았다. 서운의 식구들에게 우호적이었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그들에게 떠밀려 일일이 악수를 했다.

“지니 고모예요.”

“지니 둘째 누나입니다.”

“지니 삼촌입니다!”

“지니 셋째 형이에요.”

“지니….”

“지니….”

아니 잠깐만, 지니는 또 누군데? 서운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니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지만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멀쩡히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있는데 갑자기 멀미가 나는 것 같다.

그래서 지니가 누구냐고요. 혼란스러움이 가시지 않는 가운데 마지막 두 사람이 서운의 가족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세요. 지니 엄마예요.”

어? 인사를 한 건 여자 쪽인데 서운의 시선이 멈춘 건 그 옆에 있는 중년 남자였다. 세 사람을 에워싸고 제멋대로 감동에 젖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저 사람만 낯이 익다. 뭐지? 뭘까. 서운은 저 사람을 알고 있다.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틀림없이 알파로 보이는 저 훤칠한 중년 남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지니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아, 그렇구나. 서운은 순식간에 납득했다.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부터 퍽 의진을 닮았다. 아니지, 의진이 이쪽을 닮은 건가. 비단 목소리뿐만 아니라 얼굴도 닮았다. 서운의 손을 마주 잡은 중년 부부의 얼굴에서 선명하리만큼 의진이 보인다. 그래서 더 낯이 익었던 건가. 서운은 대수롭지 않게 제가 느낀 기시감을 떨쳐 냈다.

“계속 서 계실 겁니까? 다들 어서 앉으세요. 큰아버지가 제일 안쪽 자리로 들어가세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와 있는지도 몰랐다. 멀리서 의진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린다. 의진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었나. 그래 봤자 오늘을 포함해서 세 번의 만남이 전부긴 하지만 어쨌든, 서운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 되어 의진을 기다렸다. 의진은 어수선한 사람들을 정리하며 안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물론 순탄해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 지니가 결혼이라니, 큰아버지는 정말이지….”

“어쩜. 지니야, 너무 잘 어울린다. 세기의 커플이야.”

“우리 지니, 언제 이렇게 컸니.”

“고모님도 마저 들어가세요. 다음은 삼촌이 들어가시고, 형님이랑 누님은 이쪽에 앉으시죠.”

아무래도 저 집안사람들의 특징인가 보다. 의진을 포함한 모두가 제각각 제 할 말만 해 댔다. 서운은 그 광경을 멍하게 지켜보다가 외삼촌과 외숙모를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외삼촌 내외는 순순히 서운을 따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넋 나간 눈빛이 모든 걸 말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서운 씨와 결혼할 안의진입니다.”

“아, 아이고. 반가워요. 반갑습니다.”

한차례 소란이 가라앉자 의진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해 왔다. 외삼촌과 외숙모도 얼떨결에 함께 고개 숙여 인사했다. 짝짝짝, 맞은편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다 컸어, 다 컸어.” 감동에 젖은 목소리들도 여전하다. 이제 서운의 차례다.

“안녕하세요. 정서운이라고 합니다.”

짝짝짝짝짝!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환호가 이어졌다. “감사, 합니다….” 열렬한 환호에 서운이 저도 모르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어쩜. 예의도 바르네요.”

“목소리도 좋아요!”

“이렇게 봐도 너무 잘 어울린다.”

“우리 지니가 사람 보는 눈이 있네!”

호의가 뚝뚝 떨어지는 소곤거림이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저런 말뿐인 칭찬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외삼촌과 외숙모는 입이 귀에 걸렸다. 자세히 보니 손뼉도 치고 있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진이 부모 되는 사람이에요.”

의진의 부모가 먼저 운을 뗐다. 베타인 외삼촌 내외와 달리 그들은 전형적인 알파와 오메가 부부였다.

“무슨 말씀을요. 저희가 더 감사하죠. 저는 서운이 외삼촌 되는 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운이 외숙모입니다.”

서운의 외삼촌과 외숙모도 모두 자기소개를 마쳤다. 의진과 같은 친부모가 아닌 외삼촌과 외숙모로 이루어진 가족, 의진의 가족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서운은 내심 긴장한 채 의진 쪽의 반응을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 보인다.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

“인기 많으셨겠어요.”

“아유, 아니에요. 그냥 누구나 있는 정도였죠. 고백받기도 지겹더라구요.”

아하하하! 외숙모의 넉살 좋은 대답에 분위기가 한결 풀어졌다. 여기서 더 풀어질 것도 없어 보였는데,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이거 뭔데. 무서워…. 서운은 의진과 가족들 간의 온도 차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의진은 혼자서만 웃지 않았다. 화가 났다거나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 예의 그 무뚝뚝한 얼굴로 서운을 쳐다보고 있다.

“잘 지내셨습니까?”

“저요?”

“네. 서운 씨 말입니다.”

화기애애하게 농담을 주고받던 어른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단번에 입을 다물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시작한 탓이다. 서운은 의진이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당연히 잘, 지냈죠….”

“다행입니다.”

“하하. 네….”

“…….”

“…의진 씨도 잘 지냈어요?”

“네. 저도 잘 지냈습니다. 시차 적응도 다 끝냈습니다.”

“그것 참… 잘됐네요.”

“네.”

…우리 지금 평범한 연인처럼 보이겠지?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확인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서운 씨. 우리 애가 표현이 많이 부족하죠?”

역시 그래 보이지 않았나 보다. 서운은 저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저는 괜찮은데 저야말로 걱정이에요. 저부터가 살갑지가 않아서요.”

“아니요. 서운 씨는 무뚝뚝하지 않습니다.”

넌 좀 가만히 있으세요. 서운은 부러 의진을 돌아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정색을 할 것 같았다.

“어머, 쟤도 참. 걱정할 필요 없겠는걸요?”

“맞습니다. 서운 씨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알겠으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고요. 제 오메가의 편을 드는 팔불출 알파 덕분에 어른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맴돈다. 외삼촌과 외숙모도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서운만 혼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식은땀을 흘려 댔다. 이런 자리가 처음은 아니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단언컨대 처음이다.

“저희 식구들이 자주 찾는 곳인데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불편한 점이 있으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상 가득 식사가 차려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상견례 장소로 고른 곳이니 당연히 음식도 괜찮겠지,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까지 제대로일 줄은 몰랐다. 그동안 평생 먹어 온 한식은 다 뭐였는지 살면서 처음 보는 음식도 많았다. 평소에도 요리에 관심이 많은 외숙모는 음식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음식이 아니라 구경하라고 빚어 놓은 것 같네요. 너무 예쁘다….”

“보기에만 좋은 게 아니라 맛도 괜찮으니 천천히 다 드셔 보세요.”

말 그대로였다. 음식 하나하나가 입에서 살살 녹는다. 부담스럽지도, 자극적이지도 않은 정갈한 한식이 차근차근 입맛을 돋우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일이 바빠 제대로 된 끼니를 챙겨 먹지 못했던 서운은 단번에 입맛이 살아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미가 났던 것 같은데 싹 다 잊어버렸다.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즐거운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어느새 어른들은 반주를 곁들이고 있었다. 제일 맛있는 술은 역시 정상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 잔이죠, 등산 애호가 외삼촌과 외숙모의 진지한 발언에 의진의 식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주를 권해 왔다.

…보통 상견례에서 반주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전제 조건이 맞지 않는다. 서운과 의진은 첫 만남부터 일반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견례와 비교하기에는 모든 게 다르다. 그래, 일반적이지 않으면 뭐 어쩔 건데. 밥은 맛있고 분위기는 좋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서운은 빠르게 고민을 때려치웠다. 애초에 서운을 제외한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문제였다.

“서운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심 걱정이 더 컸는데 이렇게 좋은 분들과 연을 맺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씀인걸요. 저희 식구들은 다 결혼을 빨리해서 늘 의진이가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나려고 그랬나 봅니다.”

밥만 잘 먹던 서운도 이 대목에서는 내심 눈시울을 붉혔다. 감동해서가 아니라 안심해서. 정말 다행이었다. 의진의 가족이 자신의 가족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걱정하다 못해 악몽까지 꾼 서운이었다. 좀 요란하고 소란스럽긴 해도 그렇게 나쁜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흠흠, 그럼, 의진 군?”

컥. 불린 건 의진인데 사레는 서운이 들렸다. 서운은 간신히 기침을 삼키고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의진은 깔끔한 낯으로 외삼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안 돼.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진과 외삼촌이라니, 대화가 어디로 튈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우리 서운이랑은 얼마나 만났나.”

오늘이 세 번째 만남인데요. 상견례는 이제 시작이다.

“내가 의진 군한테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우리 서운이가 얘기를 해 줘야 말이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진이 대답하기 전에 외삼촌이 선수를 쳤다. “그러셨습니까.” 의진이 의연하게 대답했지만 하나도 믿음직스럽지가 않다. 의진의 화법은 흡사 휴대폰에 내재된 인공지능을 떠올리게 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른에게 불친절한 대상이라는 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럼 간단하게 제 소개부터 올리겠습니다.”

그런 주제에 예의가 없지는 않다. 지난번 만남에서도 느낀 거지만 센스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자기소개를 하려는 듯 의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니? 서운이 소리 없이 외쳤다.

“이름 안의진, 우성 알파로 올해로 서른하나입니다. 위로 형이 둘 있고 누나가 한 명 있는 삼남 일녀 중 막내입니다. 부모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고 첫째 형님과 누님은 알파, 둘째 형님은 오메가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생각보다 유익한 시간이었다. 제일 먼저 서운은 의진의 가족 관계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소개는 진작 받았지만 워낙 사람이 많아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던 의진의 친인척들도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의진은 자신의 학력과 약력을 밝힘으로써 지난 31년간의 인생을 대략적으로 요약, 정리해 주었다. 이전에도 느낀 거지만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할 것 같다. 어느새 서운은 외삼촌 내외와 함께 의진의 프리젠테이션을 경청하고 있다.

의진의 이름과 나이, 형질을 제외하면 모두 다 처음 아는 사실들이다. 의진은 전반적으로 유학 생활이 길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서 식구들이 저렇게 싸고도는 건가. 서운은 제 나름대로 코멘트를 달아 가며 열심히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어쨌든 의진은 현재 서운과 결혼할 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

“올해부터 XX물산 한국 지사에서 근무 중입니다. 그 전까지는 미국 지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외 출장이 잦았구나. 서운은 드디어 의진의 직업을 알게 되었다. 상대방의 직업도 모르고서 결혼을 결정할 수 있었던 건 알파고 같은 의진의 태도 덕이 컸다. 딱 봐도 불법적인 일은 안 할 것 같았지만 대기업 직장인이라니,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어울리지 않는다. 일단 의진이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좀… 용케 안 잘렸네. 회사에서는 좀 다른가? 서운은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

의진을 전혀 모르는 외삼촌과 외숙모는 그저 신뢰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 봤을 명문 학교에 이어 대기업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의진을 바라보는 외삼촌과 외숙모의 눈빛이 이보다 더 너그러울 수가 없었다.

뭐가 됐든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늘 그렇듯 사고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발생한다.

“다음에 다 같이 놀러 오세요.”

네? 어디를요? 갑자기 의진의 큰아버지가 끼어들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나섰다.

“자녀가 두 분이라고 하셨죠?”

“아, 네. 딸 하나, 아들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오시라는 건지….”

“LA요!”

LA가 여기서 왜 나와? 서운의 식구들이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버벅대자 의진이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미국 지사는 LA에 있습니다.”

“아, 그럼 큰아버지와 미국 지사에서 함께 있었던 거예요?”

“네. 미국 지사는 큰아버지가 맡고 계시고 한국 지사는 아버지가 맡고 계십니다.”

기분 탓인가. 어쩐지 엄청난 걸 알게 된 것 같다. 서운은 잠시 생각하기를 중단했다.

“식구가 늘었으니 더 큰 크루저가 필요하겠어.”

“어머, 좋다. 역시 사람은 많을수록 즐겁죠.”

“형님,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다 같이 크루저 파티를 열죠! 언제가 좋으세요, 사돈?”

의진만 그런 줄 알았더니 집안 내력인 모양이다. 큰아버지부터 어머니, 아버지까지 모두 행동력이 끝내줬다. 결혼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는지 당장 크루저 파티부터 계획할 기세였다. 서운은 넋이 나간 외삼촌 내외를 대신해 상황 파악에 나섰다.

“…의진 씨.”

“네.”

“혹시, 정말 혹시나 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말씀하십시오.”

“만약 불쾌하다면 미리 사과할게요. 결혼할… 사이라면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아니요. 서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혹시 아버님 성함이….”

“안 의 자 선 자 되십니다.”

“그, 그럼 설마 아버님 직업이, 아니, 직장이, 직책이, 그, TV에 나오는…?”

“아, 서운 씨도 아시는군요. XX그룹 총수이십니다.”

놀란 외삼촌이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서운은 심장이 떨어졌다.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비단 의진을 닮아서가 아니라 그동안 많이 봐서 그런 기분이 드는 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외숙모는 사돈들과 함께 여행 일정을 짜는 중이었다.

이 결혼 정말 해도 괜찮은 걸까. 서운은 이 모든 게 차라리 꿈이길 바랐다.

“뭐, 뭐라고요? XX그룹?”

“그렇다니까! 그냥 회사원이 아니야. XX가 막내아들이라고! 아니, 그 사람들이 다 XX가 사람들이었다니까?”

그 뒤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화기애애하게 여행 일정을 논하던 상견례 자리는 서운과 외삼촌에 의해 급하게 마무리되었다. 상견례를 마치고 식당에 마련된 작은 정자에 와서야 진실을 알게 된 외숙모의 반응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변을 의식해 한껏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경악으로 물든 표정은 숨겨지지 않았다.

“재, 재벌가네? 재벌가잖아? 재벌가야! 재벌가에서 왜 서운이를….”

“너희 혹시 결혼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 건….”

“각인 안 했고 임신도 안 했으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세요.”

서운도 의아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아닌 건 아닌 거였다. ‘그럼 대체 왜…?’ 서운의 칼 같은 대답에 외삼촌 내외의 의문만 깊어졌다. 사실 이 상황이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누가 뭐래도 서운이다. 그걸 서운을 제외한 모두가 모를 뿐. 서운은 최대한 속마음을 감춘 채 의연한 태도로 일관했다.

“서운 씨.”

“아이고, 깜짝이야!”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

“아, 아이고. 아니요. 아닙니다. 서운이 보러 왔어요?”

“네. 그렇습니….”

“둘이서 편하게! 아주 편하게! 얘기 나누고 와요. 서운아, 우리는 먼저 가 보마. 민영이 학교 끝날 시간이 다 돼서!”

“그래. 민영이 때문이야! 민영이가, 어, 고3이라…. 그, 그럼 우린 가 볼게요. 편하게들 얘기 나눠요!”

의진의 등장에 외삼촌 내외가 황급히 자리를 떴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상대는 의진이다. 그는 멀어지는 외삼촌 내외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래, 예의는 있다니까.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니라…. 서운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의진을 알게 된 뒤로 줄곧 이런 식이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건지 의진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서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말 안 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의진 씨네 집안요.”

“네.”

“귀띔이라도 해 줬으면…!”

“네.”

의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저 얘기해 보라는 듯, 얌전히 서운의 뒷말을 기다리고 있다. 평소라고 말하기도 뭐하지만 평소와 큰 차이가 없는 모습에 서운만 힘이 쭉 빠졌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지금부터 얘기해 봐야 알겠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그런 게 중요합니까?’ 따위의 개소리나 지껄일 것 같다.

“저희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답변이라 서운은 냉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계열사가 많긴 하지만 저희 아버지를 비롯해 누구도 불법적인 일은 하지 않습니다.”

“…제가 감사 나온 것도 아니고 그런 걸 문제 삼겠어요?”

“그럼 어떤 점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걸 몰라서 묻냐. 그러나 눈앞의 알파는 정말 몰라서 물어봤을 가능성이 크다. 서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집안 차이가 너무 크잖아요.”

“집안 차이라 하시면….”

“경제적인 차이요.”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경제적….” 의진이 여상한 어투로 서운의 말을 그대로 따라 읊었다. 그 모습이 퍽 태평해 보여서 서운은 배로 답답해졌다.

“의진 씨.”

“네. 말씀하십시오.”

“…진짜 그거 맞아요?”

“그거가 뭡니까?”

“그… 아버지가 정말 안의선 회장님이에요?”

재벌, 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하는 것조차 어색하다. 서운이 에둘러 물었다.

“네, 친아버지가 맞습니다.”

“아,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덕분에 서운은 의도치 않게 남의 집안 친자 확인을 하고 말았다. 이, 이게 아닌데? 아직 충격이 채 가시지 않아서 깜박했다. 눈앞의 알파는 간접 화법이 안 통한다. 결국 서운은 대놓고 의진의 정체 확인에 나섰다.

“그럼 의진 씨도 XX가 사람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진짜?”

“네, 그렇습니다.”

“아니, 왜…?”

왜라고 물어봤자 돌아올 대답은 뻔하다. 쟤라고 알겠냐.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에 서운의 이성이 자꾸만 제자리를 탈출하려 들었다. 다행히 의진은 그런 서운을 비웃지 않았다. 무시하지도 않았다.

“확실히… 그동안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군요. 좀 더 고민해 본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히려 너무 진지해서 문제다. 의진이 감탄하며 말했다.

“건설적이고 참신한 질문 감사합니다.”

“…의진 씨는 참 고마울 것도 많네요.”

“다 서운 씨 덕분입니다.”

“…제가 또 뭘 했죠?”

“역시 서운 씨는 대단하십니다.”

“…갑자기?”

“갑자기가 아닙니다. 처음 뵀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갑자기 이야기가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역시 한 명이라도 이성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서운은 삼천포로 달려가는 의진을 붙잡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도대체 XX가 사람이 선은 왜 보러 나온 거예요? 재벌은 다 재벌끼리 결혼하고 그런 거 아니었어요?”

“네, 아닙니다.”

“어? 아니야?”

“네, 아닙니다.”

“…왜?”

“왜라고 물으셔도….”

갑작스러운 서술형 질문에 의진의 버퍼링이 길어졌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자 버퍼링을 마친 의진이 다시금 로딩에 성공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긴 하나 서운 씨 말씀처럼 전부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요?”

“네, 그렇습니다.”

의문은 여전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니까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래, 뭐. 생각해 보면 결국 다 같은 사람인데 사람 사는 일이 그렇게 단순할까 싶다. 100%의 확률로 완벽하게 떨어지는 인생사가 어디 있겠어. 겉으로 보이는 단편만으로 전체를 알 순 없을 테다. 알아서 동기화를 마친 서운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의외네요.”

“그렇습니까?”

“당연하죠. 재벌은 다 재벌끼리 결혼하는 줄 알았는데… 근데 결정사에서 재벌도 받아 줘요? 비슷한 조건의 사람이 있긴 한가?”

결혼정보회사는 철저히 상대의 조건과 니즈에 따라 만남을 주선한다. 아무리 회원 풀이 커 봤자 재벌에 맞는 상대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결정사가 뭡니까?”

“결혼정보회사요. 결혼정보회사의 줄임말이에요.”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의진 씨도 결정사에서 선보러 나온 거 아니었어요?”

“저희의 첫 만남을 말씀하신 거라면 아닙니다.”

어떻게 아닐 수가 있지? 혼란스러움은 오직 서운의 몫으로, 의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아는 분께 자제분을 소개받았습니다.”

아, 아니군요. 의진이 빠르게 제 발언을 정정했다.

“소개는 받았지만 만나지는 못했으니 소개를 받을 뻔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 서운은 난감해졌다. 진심으로 난감해졌다. 제가 결정사 회원이라 의진도 당연히 그런 줄 알았다. 재벌이라고 해서 다 같은 재벌끼리 결혼하는 건 아니라지만, 그렇다지만 결혼정보회사가 아닌 지인 소개는 어감이 주는 무게가 다르다. 완전히 다르다. 결혼정보회사보다 더 은밀하고 개인적이며, 동시에 폐쇄적이다.

결국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거잖아. 서운은 우연을 가장해 그들만의 세상에 끼어든 불청객이나 마찬가지다. 진실을 알게 된 서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혹시 어떤 분이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말씀드렸다시피 서류를 확인하지 못해 자세히 알진 못합니다.”

“…그럼 소개해 주신 분은요?”

아는 분의 자제라고 했으니 만남을 알선한 부모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을 테다.

“ZZ 은행장이십니다.”

“…은행장….”

“네, 그렇습니다.”

“지점장…이 아니라 은행장인 거죠?”

“네, 맞습니다.”

하, 하하…. 서운이 웃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렇지. 그 정도 집안은 될 줄 알았다. 재벌이라고 해서 같은 재벌끼리 결혼하는 건 아니라더니, 은행장이 재벌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서운은 비로소 의진과의 차이를 실감했다. 아주 그냥 온몸으로 깨달았다. 생각하는 것도, 그 기준도 모든 것이 다르다.

나와는 모든 게 다른 사람, 서운이 의진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전에도 한 번 얘기했지만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외삼촌 밑에서 컸어요. 키워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서 결혼 준비할 때도 결혼 후에도 도움 받을 생각 전혀 없습니다. 온전히 제 힘으로 할 거고 따로 물려받을 재산도 없습니다.”

최대한 차분하게 얘기한다고 했는데 의진에게도 그렇게 들렸을지는 모르겠다. 서운은 다시 한 번 의진에게 자신의 속사정을 밝혔다. 언제나 숨기기 급급했던, 누구에게도 절대 보여 주지 않으려 들던 자신의 가장 은밀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꺼냈다.

서운이 비로소 의진의 청혼을 받아들인 그때도 서운은 제일 먼저 자신의 가족 관계를 밝혔다. 가족 관계와 성장 배경은 서운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어서 이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판단하는 건 결국 상대의 몫이다. 가족 관계에 있어 서운은 언제나 심판의 대상이다. 그게 그렇게 억울하고 분했다. 서운이 결혼정보회사를 편하게 여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의진이 같은 결정사 회원이었다면 이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의진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제는 서운이 신경 쓰여서 안 되겠다. 저런 집안이라면 서운의 가족 관계를 따지고도 남을 테다.

결혼은 장난이 아니다. 현실이다. 뭐에 홀렸던 건지 흐릿했던 시야가 이제야 돌아온 느낌이다. 서운은 할 말을 마친 후에도 의진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의진은 그런 서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보아 온 그 모습 그대로였다.

“고모님은 첫째 형님과 XX푸드를 운영하고 계시고, 둘째 형님은 XX패션의 이사장으로 계십니다. 첫째 누님은 XX전자 부회장으로 계시고요. 그 외에도 각 부서에 사촌들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건 조직도를 통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메일 주소를 알려 주시면 바로 송부하도록 하죠.”

뭘 또 그렇게까지. 서운은 단번에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히 의진도 순순히 넘어갔다.

“알겠습니다. 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주십시오.”

“네, 뭐…. 근데 이 얘기는 갑자기 왜 하는 거예요?”

“서운 씨가 얘기하셔서 저도 이야기한 것뿐입니다.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하니까요.”

“우리 아직 부부 아닌데요.”

“부부가 될 사이지요.”

“…진짜 나랑 결혼하려고?”

“그럼 가짜 결혼도 있습니까.”

“…재벌들 그런 거 많이 하지 않나?”

“편견입니다.”

의진이 울컥하며 외쳤다. “네, 뭐….” 서운이 세상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의진이 항변하듯 선례를 늘어놓았다.

“저희 부모님은 성악 동호회에서 만나셨습니다.”

“어! 우리 외삼촌, 외숙모도 자전거 동호회에서 만났는데.”

“그렇습니까? 신기하군요.”

“오, 진짜 신기한데요? 혹시 결혼은 몇 년도에 하셨어요?”

“19XX년에 하셨습니다.”

“아, 의진 씨가 막내지. 연도는 한참 다르네요.”

“그럼 연도 말고 날짜로 가시죠.”

“좋아요. 결혼기념일이 언제예요? 우리는….”

거기까지 말하던 서운이 뒤늦게 입을 닫았다. 아, 말렸다. 가긴 어딜 가니. 뒤늦게 제자리로 돌아온 서운이 저 혼자 삼천포에서 뛰놀고 있는 의진을 데려왔다.

“은행장 자제분이 혈혈단신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됐는데 정말 상관없어요?”

“그렇습니다.”

“아니, 대체 왜? 경제력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맞습니다. 중요하지요. 저 역시 경제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저 상관없을 뿐입니다. 서운 씨가 경제적인 차이를 문제 삼으신 것도 사실 제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의진이 똑바로 서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듯 지극히 여상한 어투였다.

“경제력은 제 것으로도 충분하니까요. 배우자의 경제력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아무래도 서운이 의진을 너무 얕본 모양이다. …아, 서운은 여러 차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물론 제 경제력이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가족들에게 입힌 물질적인 피해도 아직 완벽하게 수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이루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판단되어 결혼 요청을 드렸습니다.”

“…네. 그러셨어요.”

“혹시 저로는 부족하시면….”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지장이 없다 못해 넘쳐흐를 판이다. 서운이 빠르게 의진의 헛소리를 끊어 냈다.

“난 경제적으로 의진 씨한테 맞추지 못할 거예요. 제 선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확실하게 못 맞출 거예요. 제가 앞으로 평생 일한다 해도 의진 씨처럼은 절대 못 버는 것처럼요.”

의진의 집안을 알게 된 순간부터 서운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 결혼을 하지 못할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의외로 결정은 쉽게 났다.

“그런 의미라면 상관없습니다. 저한테 맞추실 필요도, 저만큼 버실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하자고 했으니 결혼식 비용도, 결혼 준비 비용도 다 제 쪽에서 지불하겠습니다. 서운 씨는 시간만 비워 주시면 됩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좀.”

“어느 맥락에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네가 하는 소리 다요.”

“전부 다라면 저한테 맞추실 필요가 없다는 부분부터….”

“아, 결혼하자며!”

“네, 맞습니다.”

“결혼 준비를 혼자 한다는 게 말이 돼요?”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개소리다. 정말 개소리인데 묘하게 말이 된다. 법적으로 안 될 건 없으니 저 알파고 같은 알파를 설득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환장하겠네. 서운이 뒷목을 짚었다. 그러자 마침 다른 이유가 생각났다.

“어머님, 아버님은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무엇이 말입니까?”

“이 결혼요.”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서운 씨도 크루저 파티에 같이 가시는 줄 알았는데요.”

“여기서 크루저 파티가 왜 나와요.”

“그것 때문에 저희 결혼식을 최대한 앞당기면 좋겠다고 하셨으니까요. 올해 안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말씀드렸더니 모두 동의하셨습니다.”

“뭐요?”

“장모님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또 언제 장모님이 됐니. 도대체가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다. 진짜 이래도 되는 거야? 은행장 자제분이 혈혈단신 프리랜서 디자이너가 됐는데 결혼해도 괜찮은 거냐고. 서운은 의진에게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직시하게 해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서운이 아무리 문제를 제기해도 의진은 대수롭지 않아 했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나니 슬슬 서운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먼저 백기를 든 건 서운이었다. 원래 말이 안 통하는 상대는 이길 수가 없는 법이다. 서운은 점점 지쳐 갔다. 쟤가 이상한 걸까, 내가 이상한 걸까.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의진을 보고 있자니 어째 스스로가 너무 유난스러운 것처럼 느껴진다.

“크루즈 여행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식을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

“적어도 올해 안으로는 해야겠군요.”

“…….”

“서운 씨?”

“그럼 하면 되죠.”

모르겠다. 뭐가 됐든 위자료는 많이 받겠지. 마침내 서운은 최종적으로 결혼에 동의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서운은 상견례와 동시에 결혼 데드라인이 생겼다. 목표는 올해 안에 결혼하기, 올해가 가기까지 약 4개월 남았다.

* * *

모든 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 네, 서운 씨.

몇 번의 신호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서운은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려놓은 후 익숙하게 마우스부터 움직였다. 이제 컨펌의 시간이다.

“지금 통화 괜찮아요?”

- 괜찮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메일 봤는데 역시 한 가지 메뉴로 통일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 인원을 다 커버하다 보면 분명 실수가 나올 텐데 굳이 우리 쪽에서 여지를 제공하지는 말죠. 이 코스로도 충분해 보여요.”

- 생각해 보니 그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서운 씨는 현명하십니다.

인간의 적응력은 가히 무서울 정도였다. 서운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다음 메일을 클릭했다. 이제는 의진의 개소리에 제법 익숙해졌다. 만남 횟수는 여전히 세 번에 그쳐 있지만 결혼 준비를 하느라 필연적으로 통화가 잦아진 탓이다.

이번 안건은 청첩장 디자인으로, 지난번 업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아예 새로운 업체들에게 시안을 받아 본 참이다. 같은 디자이너로서 되도록 까다롭게 굴고 싶지 않았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실력이 뻔히 보이는데 어쩌라고. 역시 직업병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청첩장은 두 곳이 괜찮네요. 첫 번째랑 밑에서 두 번째 업체요. 의진 씨는 어때요?”

- 저는 상관없으니 서운 씨가 좋은 곳으로 하시죠.

“또?”

- 전부 서운 씨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 소리는 들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된다. 도대체가 취향이라는 게 없는 건지 의진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서운 씨가 원하는 대로 하시죠.’ 아니면 ‘저는 상관없습니다.’. 이쯤 되니 없던 의심도 생겨날 판국이다.

일단 할 일부터 하고. 결혼 준비는 상상 이상으로 손이 많이 갔다. 서운은 오늘도 의진과 함께 차근차근 남은 업무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서 ‘함께’지 사실은 전부 다 서운의 뜻대로다. 서운은 의진이 준비해 온 리스트를 훑으며 고르고 질문만 하면 됐다. 최종 컨펌을 내리면 의진이 그대로 실천에 옮기는 방식이다. 돈 많이 벌면 이런 비서 고용하고 싶네. 서운은 의진의 일 처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 알겠습니다.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없어요. 가구 리스트는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 천천히 생각해 보고 말씀 주십시오. 인테리어를 새로 하고 싶으시면 업체 리스트를 전달해 드릴 테니 말씀만 하세요.

“새집인데 뭘 또 인테리어를 해요. 괜찮으니까 가구만 더 생각해 볼게요. 큰 가구는 다 사 놓으셨던데 자잘한 것들이 없더라고요.”

- 네, 알겠습니다. 아니면 아예 다 새로 사는 것도 괜찮습니다. 서운 씨 취향대로 구입하시지요.

“새 가구 두고 뭘 또 새로 사요. 괜찮으니까 진정해요.”

신혼집은 의진 소유의 단독 주택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부터 결혼을 목적으로 구입한 집이어서 그런지 스케일이 달랐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인데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부터 주기적으로 집 내부를 점검하는 관리인까지 있다. 기본적인 가구들까지 구비해 놓아서 당장 들어가서 살아도 될 정도였다. 서운이 처음으로 경험한 실질적인 빈부 격차였다. 다음으로는 결혼식장이 XX그룹 소유의 호텔이라는 점이 있다. 이 외에도 일일이 세자면 끝도 없다.

그러니까 더 의심스러운 거다. 재벌가 막내아들인데 잘생기고 키도 크고 몸도 좋고 고추도 크고 섹스까지 잘한다고? 이게 가능한 일이야?

어딘가 하자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의심이 간다. 서운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의진 씨. 할 얘기가 있어요.”

- 역시 인테리어를 하는 게 좋을까요?

“안 해도 된다니까요. 그 얘기는 그만합시다.”

- 알겠습니다.

“일단… 기분 나쁘다면 미리 사과할게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 무엇이 말입니까?

“우리 서로에 대한 공증이 필요할 것 같아요.”

- 공증요?

“네. 의진 씨의 혼인 관계 증명서랑 건강 검진 증명서, 범죄 경력 증명서, 신용 인증서를 받아 보고 싶어요. 저도 준비할게요.”

서운은 침착하게 의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설사 결혼이 깨진다고 해도 이런 찝찝한 마음으로 결혼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 본격적인 결혼 준비를 시작한 날부터 줄곧 서운을 괴롭혀 온 의심을 이제 그만 끝내고 싶었다.

- 받으셨습니까?

“뭐를요?”

- 혼인 관계 증명서, 건강 검진표, 범죄 경력 증명서, 신용 인증서 방금 메일로 보냈습니다.

뭐요? 통화 중인 휴대폰만 노려보고 있던 서운이었다. 메일함에 새 메일이 도착했다. 보낸 이 안의진, 메일에는 첨부 파일이 한가득이다.

“뭐야…? 뭔데 이거….”

- 말씀하시기 전에 제가 알아서 보여 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까지야…. 내가 말한 적 있었어요? 이런 건 언제 준비했어요?”

- 맘카페에서 보고 미리 준비해 놨었습니다. 요즘 결혼 전 필수라고 하더군요.

“맘, 뭐요?”

- 정확한 명칭은 ‘오렌지테라스’로, 결혼 준비 중인 사람들은 필수로 가입하는 카페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ZZ동 맘들의 다정한 휴식 공간’으로 불리었으나 육아 외에도 다양한 양질의 정보를 가지고 있어 공식적으로 카페명을 변경했습니다. 이름을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이름은 입에 잘 붙지 않는군요.

뭐지. 방금 엄청난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서운은 예기치 못한 전개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거침없이 손가락을 놀렸다. 서운은 제일 먼저 혼인 관계 증명서를 클릭했다. 서류 속 의진은 초혼이 맞았다. 돌싱이 아니었다.

- 아, 재산 증명서가 빠졌군요. 바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건 안 보내도 돼요.”

- 카페에서는 전부 다 보내야 한다고….

“괜찮으니까 보내지 마요.”

- 네, 알겠습니다.

재벌가 막내아들의 개인 자산 따위 진심으로 궁금하지 않다. 알면 다칠 것 같다. 서운은 멍하게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서류가 여러 장 띄워져 있긴 한데 보고도 못 믿겠다. 불쾌해하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미리 준비해 놨을 줄이야. 당황스러운 건 여전하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서류까지 받아 놓고 저 혼자만 입을 닦을 순 없다. 서운이 침착하게 말했다.

“제 개인 서류들은 준비해서 내일까지 보낼게요. 미리 준비 못 해서 죄송해요.”

-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천천히 준비하셔도 됩니다.

제가 아무리 바빠도 현직에 계신 재벌가 막내 아드님보다 바쁠까요. 서운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알겠다며 통화를 끝냈다. 그러고 보니 의진도 증명서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안 한다. 서운처럼 의도적일 수도 있고, 결혼을 하려면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어서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양쪽 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까. 다만….

“…쟤는 왜 나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거지?”

뒤늦게 궁금해졌다. 아주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서운의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다. D-45, 한 달 반 뒤에 서운은 결혼을 한다. 상대는 서운이 세 번 만난 알파다.

이제 지인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릴 차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