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네 번째 만남 (4/13)

4. 네 번째 만남

본인도 예상하지 못한 자신의 결혼으로 서운은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의진이 주도적으로 결혼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조차 어려울 뻔했다. 실질적인 준비는 의진이 다 하는데도 왜 이렇게 정신이 없는지. 오전에는 일을 하고 낮에는 틈틈이 의진이 보내온 자료들을 살핀다. 저녁에는 지인들을 만나 결혼 소식을 알린다. 결혼도 두 번 할 건 못 되는구나, 서운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클라이언트에게는 모바일 청첩장을 돌렸다. 공적으로 만난 사이라는 건 이럴 때 좋았다. 서운의 결혼 소식에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으니까.

그에 비해 지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고 털어놓는 일말의 과정 없이 청첩장 들고 나타난 서운 덕분이었다.

“너 설마….”

“좋은 소식이라도 생긴 거야?”

응. 아니야. 각인 안 했고 임신도 안 했어. 서운은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앵무새처럼 같은 말은 반복했다. 그 짓도 한두 번이지 슬슬 신물이 날 때쯤 청첩장 미션의 끝이 다가왔다. 서운은 처음으로 자신의 좁은 인간관계에 감사했다.

마지막 청첩장은 대학 동기들이 장식했다. 일대일 만남을 선호하는 서운이 주기적으로 참석하는 몇 안 되는 단체 모임이었다. 워낙 인원이 많은지라 약속을 잡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럼에도 꽤 많은 인원이 참석해 서운을 놀라게 했다.

“만나는 사람 있었어?”

“지난번에 봤을 땐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이거지. 예상한 반응이었다. 갑작스러운 결혼, 하물며 서운은 오메가이기까지 하다. 말은 안 해도 꽤나 궁금했을 테다. 서운은 익숙하게 모범 답안을 준비했다.

“맞아. 만난 지 얼마 안 됐어.”

“오, 설마 좋은 소….”

“각인 안 했고 임신 안 했다. 선보고 만난 거라 얘기가 빨리 됐어.”

“너 선봤었어?”

“야, 말을 하지! 나 아는 사람 중에 진짜 괜찮은 사람 있는데.”

“빨리도 말한다. 자, 다음 질문.”

선을 본 정도가 아니라 결정사 회원이었다. 참고로 환불은 아직도 못 받았다. 딱히 숨길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이 사람들을 믿지 못한다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라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사회인이 된 뒤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적당히 갈무리하는 데 익숙해졌다. 아마 모두가 그럴 테다.

“나! 나!”

“콜. 질문하세요.”

“상대는 알파인가요?”

“그렇습니다.”

“역시 오메가는 알파랑 결혼하는구나.”

“우와. 나 알파랑 오메가 결혼식은 처음이야.”

“신기하다. 하객들도 알파, 오메가가 많겠지?”

알파와 오메가는 베타에 비해 그 수가 현저히 적다. 그 때문인지 형질이 다른 존재를 향한 막연한 호기심 같은 게 있었다. 베타 친구들의 유별난 반응이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이유다.

“난 오메가도 대학 와서 처음 봤잖아. 나한테는 정서운이 오메가 1호다.”

“와, 그거 참 영광이네. 그 영광 돈으로 줬으면.”

“주잖아, 축의금!”

“뭐래.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잊지 마라. 나는 네 아들 돌잔치도 갔다.”

“너 베타도 만나 봤지.”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는데 멀리 있던 동기 하나가 질문을 던져 왔다. 서운을 제외한 동기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베타였다. 응, 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알파랑 만나는 게 더 나아?”

“뭐, 그렇지. 아무래도 상성이 맞으니까.”

“그걸 어떻게 아는데?”

“페로몬으로 알지.”

“신기하다. 그럼 상대가 열성이면 진짜 매력이 없고 그래? 넌 어느 쪽이야? 네 남편은?”

어, 이건 좀 예민한 문제인데. 순간 동기들이 서운의 눈치를 살폈다.

페로몬은 알파와 오메가의 존재 이유다. 알파와 오메가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가장 사적이고도 은밀한 영역이기도 했다. 사회에서 만난 알파와 오메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서운이 편하게 느껴지는 건 사실인지라 이 무례함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무례한 질문인 건 맞았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만약 서운이 열성 오메가였다면, 혹은 의진이 열성 알파였다면 동기의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을 테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떠나서 내심 서운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기들의 시선에 한없이 작아졌겠지.

그러니 괜찮다. 어차피 우리는 적당히 속물이다. 어릴 때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 서운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왜. 목걸이라도 하고 다닐까? 그게 그렇게 궁금해?”

“어? 아니….”

“야, 야. 그만해. 어차피 남의 남편인데 우성이면 어떻고 열성이면 어때.”

“그래. 자기들끼리 잘 살면 되지.”

이 이상 나설 필요도 없었다. 다른 동기들이 알아서 눈치껏 상황을 무마시켰다. 하하하, 잠시 동안 어색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이럴 때는 술만 한 게 없지. 서운은 모두에게 반주를 제안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만장일치로 모두가 기쁘게 잔을 받아 들었다. 금세 분위기가 살아났다. 그 순간 정말 뜬금없게도 서운은 의진을 떠올렸다.

맨정신이 아닐 때 하는 섹스는 싫다고 했다. 하물며 첫 관계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고. 어색한 분위기를 지우려 와인을 권하던 서운에게 의진은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두 사람의 첫 경험은 아주 맨정신에 이루어졌다.

확실히 일반적이진 않다. 서운은 의진 같은 사람을 처음 보았다.

“서운이의 결혼을 축하하며!”

“동기 사랑 나라 사랑!”

짠! 잔 부딪치는 소리가 유독 경쾌하다. “이러니까 우리 새내기 때 생각난다.” 누군가의 한 마디가 시초가 되어 곳곳에서 그리운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가장 찬란했던 시기를 함께 보낸 사람들이다. 때로는 그것만으로도 모임을 유지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서운도 즐겁게 추억 여행에 동참했다. 자신과 의진이 우성인지 열성인지는 끝끝내 밝히지 않은 채로.

“그래서 결혼이 언제라고?”

깜빡했다. 만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청첩장을 안 주고 있었다. 서운은 뒤늦게 각자의 이름이 적힌 청첩장과 카드를 건넸다. 청첩장을 열어 보는 순간 비로소 퀘스트가 시작된다. 서운은 알아서 준비 태세를 갖췄다.

“와, 호텔?”

“오, 정서운.”

“호텔 코스 요리 먹어 보나요.”

이럴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서운은 별다른 대꾸 없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안의선? 많이 들어 본 이름인데….”

“XX인가 거기 회장이 이름이 안의선 아니야? 그, 예전에 쫓겨났다가 돌아온 기업 총수.”

정확했다. 그 기나긴 서사를 저 한마디로 정의하다니, 서운은 내심 감탄했다. 역시 마지막 퀘스트는 차원이 다르다.

“남편은 뭐 하는 사람이야?”

“어때? 결혼할 사람은 딱 보면 느낌이 와?”

“얼마나 만났어?”

“연애 스토리 좀 풀어 봐. 완전 궁금하다.”

“사진 없어?”

“몇 살이야? 우리보다 연상이랬나?”

“남편 소개 안 해 줄 거야?”

“애칭 있어?”

XX물산에서 근무 중인 XX그룹 막내아들이야. 첫인상…이 강렬하긴 했는데 나도 아직 이 결혼이 실감이 안 나서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총 세 번 만났고, 나도 아직 세 번밖에 못 봐서 연애 스토리는 없어. 세 번 봤는데 사진은 있겠니. 없어. 그러고 보니까 그쪽이 나보다 한 살 어리네? 잊고 있었는데 상기시켜 줘서 고맙다. 아직 그 정도 사이는 아니라 소개는 못 시켜 줄 것 같아. 그래도 결혼식 때는 볼 수 있을 거야. 걔도 올 거거든. 아직 말도 안 놨는데 애칭이 있을 리가.

이게 말이여 막걸리여. 서운은 이번에도 가장 무난한 질문들을 선별해 가장 무난한 답변을 만들기로 했다.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다 보면 거짓말을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가 된다. 서운이 의도하는 바였다. 타인에게 내 모든 걸 다 내보일 필요는 없다.

“우리보다 한 살 어려. XX물산 다니고.”

“오, 연하남!”

“정서운 능력 좋은데?”

내 말이. 이렇게까지 좋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 말은 속으로만 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다.

“뭐야. 애칭 뭐냐니까 왜 모른 척해.”

“있네, 있어.”

“특별히 오늘만 들어 준다. 뭔데 그래? 시원하게 말해 봐.”

이대로 잘 넘어가나 했더니 이상한 데서 트집이다. 그래도 애칭 정도면 뭐, 난이도 하 수준이다. “없어.” 서운이 솔직하게 답했다.

“와, 숨기니까 더 궁금하네.”

“아, 뭐냐니까.”

물론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진짜 없는데…. 서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기억해 냈다.

“지니…?”

애칭은 애칭이었다. 서운이 아닌 의진의 가족들이 부르는 애칭. 생각보다 시시했는지 동기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뭐야. 램프의 요정이야?”

“혹시 남편이 지니 닮았어?”

“궁금하다. 사진 없어?”

“응. 웨딩 촬영도 안 했어. 와서 봐.”

“헐. 웨찰을 안 했어? 왜?”

“어차피 당일에 스냅 찍는데 뭐. 사진 찍는 거 싫어.”

“하긴. 그것도 그렇다. 결혼 준비할 것도 많은데 일일이 다 할 필요 없긴 하지.”

“그러니까. 뭐 그렇게 할 게 많은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많이 생략했어.”

“오, 남편도 그렇게 하재?”

“응. 마음대로 하라던데.”

“멋있다. 다 맞춰 주고. 이해심이 좋은가 봐.”

그걸 이해심이 좋다고 해야 하나. 뭐, 아니라고도 못하겠지만 어쩐지 좀…. 잠시 고민하던 서운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시작으로 의진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서운은 차근차근 퀘스트를 수행해 나갔다. 적당히 무난한 질문들을 골라 무난한 답변을 했다.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동기 한 명이 최종 보스 전을 준비했다.

“아, 이 사람이랑 결혼해야겠다.”

밑밥부터 범상치가 않다. 하필 또 논술 학원에서 강사로 근무 중인 친구였다. 서운은 내심 긴장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결심하게 됐는지 서술하시오!”

드디어 나왔다. 이 질문이 나왔다는 건 퀘스트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의미다. 물론 이번에도 대답은 정해져 있지만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몇 번이고 곱씹어 보게 된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 같아서.”

의진이 정말 그런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서운이 본 의진은 그랬다. 제가 모르는 모습이 있을지언정 일부러 숨긴다거나 거짓을 말하지는 않을 것 같다. 고작 세 번 만난 주제에 뭘 알겠냐마는 5년을 사귀고도 하루아침에 잠수 이별을 당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심지어 상대방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정식으로 프러포즈까지 받은 후였다. 다행이라면 서운의 가족들에게는 따로 인사를 드리지 않은 상태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조상님이 도왔다.

아, 다시 생각해도 빡치네. 제법 시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빡은 치지만 덕분에 교훈은 얻었다.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된다. 믿을 건 존나 나밖에 없다는 거? 그래서 서운은 그냥 자신의 감을 믿기로 했다. 의진과 연애는 힘들어도 결혼은 괜찮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오히려 결혼 준비를 하면서 더 느꼈다.

“사람에 따라서 재미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음, 진솔한 것 같아. 없는 말은 안 하고 자기가 말한 건 꼭 지키고…. 물론 재미없는 건 팩트인데 나름 웃기긴 해. 어이가 없어서 그렇지.”

“와, 정서운. 안 그런 척하더니 벌써부터 남편 자랑하냐?”

“왜. 자랑할 만하네. 멋있잖아.”

“…이제 다른 얘기 하자. 무슨 얘기 할래.”

“정서운 쑥스러워하는 것 좀 봐.”

“날까지 잡아 놓고 뭘 내외하냐?”

쑥스러워서가 아니다. 찝찝해서 그렇다. 내가 뭐라고 남을 평가하나 싶어서. 아직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서 그런지 의진 몰래 뒷말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서운은 괜스레 술을 홀짝였다.

누구 전화 온 것 같은데. 어디서 진동이 느껴진다며 동기 하나가 테이블 위를 더듬거렸다. 저마다 자신의 휴대폰을 찾아 곳곳으로 시선을 내렸다. 서운도 그중 하나였다. 시선을 내리자 서운의 휴대폰이 열심히 울어 대고 있었다. 발신인 안의진, 의진에게 온 전화였다. 이 시간에 의진에게 전화가 오다니. 드문 일이다. 아니, 기실 처음이나 마찬가지다. 서운은 의진에게 보내 놓은 자신의 마지막 메시지를 떠올렸다.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메일 확인이 늦을 수도 있어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 주세요.]

오늘의 안건은 예복이었다.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옷에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다. 서운은 자리에서 곧장 전화를 받았다.

- 늦은 시간에 갑자기 죄송합니다.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돈을 주는 클라이언트도 이렇게 예의를 차리진 않는다. 그래서 싫냐고? 그럴 리가. 이제는 이 편이 훨씬 편하다. 확실히 의진의 화법에 많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네. 가능해요. 무슨 일 있어요?”

- 어떤 일 말씀이십니까?

“뭔 소리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오, 남편 전화 왔나 봐. 서운의 휴대폰에 뜬 이름을 확인한 동기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쳐다보는 시선이 못내 부담스럽다. 이를 알 리 없는 의진은 평소와 같이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 낮에 말씀 주신 예약 건은 모두 잘 끝났습니다. 지금은 제 개인적인 불찰로 결혼 준비에 차질을 빚어 이 점 사과드리고자 전화드렸습니다.

“사과요? 뭐야. 무슨 일 있었어요?”

- 죄송합니다, 서운 씨.

“뭔데요.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요.”

- 맘카페를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맘, 뭐? 서운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쓸데없이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차분히 뒷말을 이어 나갔다. 주변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래서 더 잘 들렸다. 사건의 경위는 이러했다.

- 밀린 자게를 복습하다가 알게 됐습니다. 청첩장을 나눠 주는 자리는 단순히 청첩장을 나눠 주는 자리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럼?”

- 지인들에게 미리 배우자를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아, 그래. 그렇지. 실제로 많이들 그러니까. 그런데 그게 왜? 이렇게 진지할 일이야? 서운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과연 의진이 친구에게 청첩장을 받아 본 적이 있었을까? 만약 한 번도 없다면?

생각해 보니 의진은 청첩장이 나오고도 그 흔한 저녁 약속 한 번 잡지 않았다. 매일매일 연락을 하진 않지만 서운과 연락이 닿을 때면 의진은 언제나 회사에 있었다.

완벽한 워커홀릭이다. 중증도 이런 중증이 없다. 여러모로 설마, 싶지만 의진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단 친구가 없는 건 확실해 보이니까.

- 다만 자게에서만 언급되는 걸 보니 공식적인 절차는 아닌 듯합니다. 아, 참고로 자게는 자유 게시판의 줄임말입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요.”

설마 내가 모를 줄 알았던 건가. 서운은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 아, 역시 알고 계셨군요. 대단하십니다.

“…대단할 것도 많다. 큰일도 아니네요. 괜찮아요. 인사를 꼭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바쁘면 당연히 못 할 수도 있는 거지. 신경 쓰지 마요. 나도 안 했잖아.”

의진은 얼마 전에 또 해외 출장을 다녀왔다. 밤에는 여전히 해외 지사들과 화상 회의를 한다. 도통 시간이 맞지 않아 예복도 각자 맞추기로 한 둘이니 오죽할까.

-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먼저 여쭤보기라도 했어야….

“괜찮다니까. 어차피 식장에서 보잖아요. 그때 실컷 인사해요.”

“어, 우린 하나도 안 괜찮은데!”

“아직도 출발 안 하셨어요? 아, 기다리다 목 빠지겠네.”

안 돼! 하지 마! 그런 농담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대화 내용을 눈치챈 동기들이 사방에서 장난을 걸어왔다. 당황하는 서운이 재미있는지 종국에는 불러서는 안 될 마법의 주문을 외치기에 이른다.

“지니 씨!”

“보고 싶어요, 지니!”

이름이 불리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인지상정, 지니가 말했다.

- 죄송합니다, 서운 씨. 기다리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지금 바로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1시간 50분 정도는 있을 수 있을 것 같군요.

마침내 요정이 소환되었다.

딱히 취한 적도 없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술기운이 모두 사라졌다. 잔뜩 신이 난 친구들과 달리 서운은 혼자 불안에 떨어야 했다. 모르면 몰랐지 의진에 대해 아는 이상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의진은 시한폭탄이다. 그것도 인공지능을 갖춘 주체적인 시한폭탄. 일은 존나게 잘하는데 사회성이 좀 희한하게 발현되었다. 상견례 자리에서 크루저 파티를 계획하던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아웃풋이다.

- 32분 후에 도착합니다.

예고한 32분은 이미 넘었다. 서운은 이야기를 잘 나누다가도 계속해서 출입문을 힐끗거렸다. 이를 눈치챈 동기들이 야유의 목소리를 보냈다.

“야, 집중 좀 해. 보고 싶어 죽겠지, 아주?”

“그런 거 아니거든.”

“고객님. 지금 영혼이 없으세요.”

“아니, 이상하잖아. 올 때가 지났는데….”

“도로 막히나 보지. 금요일이잖아.”

오늘은 금요일, 하물며 약속 장소는 사람 많고 차도 많은 강남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신경이 쓰인다. 그렇다고 전화를 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운전 중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핑계다. 사실은 편하게 전화를 걸 만한 사이가 아니어서 그렇다. 당장 몇 주 뒤에 결혼을 할 사이긴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정서적인 거리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두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기도 했다.

“서운아, 전화 왔….”

“여보세요!”

정서운 장난 아니네. 좋아 죽나 봐. 동기들이 대놓고 숙덕거렸다. 다 들리거든? 서운은 민망해하면서도 통화에 집중했다. 서운 씨, 낮고 정중한 목소리가 서운의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는 모양이었다. 조금 숨이 찬 것만 빼면.

- 차가 밀려서 9분 늦게 도착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운전 중이어서 이제야 전화드립니다.

“아, 밀렸구나. 괜찮아요. 금요일이라 그런가 봐요.”

- 맞습니다. 금요일은 야근하기 좋은 날이니까요. 저만 그런 게 아니더군요. 지금 주차해 놓고 올라가는 중입니다.

네? 그런 날이 있어요? 미국 지사에서 근무했다면서 누구보다 한국인 마인드인 건 왜죠.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굳이 하지 않았다.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냥 그러고 넘어갔다. 감히 자신의 식견으로 의진을 이해하기에는 저와는 너무 다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그냥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이구나.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왼쪽으로 돌자마자 있어요. 우린 인원이 많아서 제일 안쪽 테이블에 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출입문이 열렸다. 멀리서 봐도 키가 큰, 정장 차림의 훤칠한 남자가 들어섰다. 계단이라도 뛰어 올라왔는지 너른 가슴이 위아래로 들썩거린다. 남자는 서운을 바라보며 똑바로 걸어왔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셔츠의 가슴 부근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어느새 동기들의 시선도 한곳을 향해 있었다.

성큼성큼 서운의 일행에게 다가온 남자가 답답한 듯 타이를 조금 풀었다. 헐…. 누군가 옆에서 작게 탄식했다. 서운은 멍하게 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진은 제일 먼저 서운에게 사과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서운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할 뻔했다. 가신 줄 알았던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나 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운이 동기들에게 의진을 소개했다. 의진이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안의진입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 와…. 아니에요. 별말씀을!”

“반갑습니다, 지니 씨!”

“반가워요!”

짝짝짝! 갑자기 동기들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어, 나 이거 알아. 상견례 때도 봤는데. 서운은 영문도 모른 채 의진과 함께 박수갈채를 받았다. 누구보다 이 상황을 어색해할 줄 알았던 의진은 꽤나 익숙하게 사람들의 환대를 받고 있었다. 마치 기자 회견에 참석한 재벌가 사람 같았다.

의진이 손을 올리자 동기들이 저도 모르게 박수를 멈췄다. 서운은 이 상황이 미치도록 어이가 없었다. 이거 뭐야. 무서워…. 능숙하게 청중들을 진정시킨 의진이 다음 수순을 밟았다.

“그럼 간단하게 제 소개부터 올리겠습니다.”

나 이것도 알아. 상견례 때도 똑같이 했던 것 같은데. 이대로 내버려 뒀다가는 제 형질부터 가족 구성원들의 형질, 각종 학력과 약력을 모조리 읊을 기세였다. 서운은 기자 회견장에 난입한 난봉꾼처럼 급하게 의진의 소개를 중단시켰다.

“내가 다 했으니까 일단 앉아요. 앉아서 해.”

“그러셨습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와, 서로 존댓말 쓰나 봐.”

“일단 한 잔 받아요! 야, 자리 좀 땡겨 봐.”

“뭐지? 잠깐 우리 회사 부사장님을 본 것 같은데….”

“나는 상무님….”

정신이 하나도 없다. 물가에 아이를 내놓아도 이러지는 않을 것 같다. 애는 어깨에 들춰 멜 수라도 있지. 서운은 난장판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했다. 의진을 앉히고, 술잔부터 들이미는 동기들에게 차를 가져와서 안 된다며 방어진도 쳤다.

“엄청 챙기네.”

“보기 좋다, 야!”

“잘 어울려요!”

미친놈들아, 그만해. 그만하라고! 서운은 못내 이 상황이 억울했다. 인풋이 들어오면 아웃풋을 내야 하는 옆자리의 요정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인사성 한 번 바르다. 동기들도 저마다 허리를 숙여 왔다. 적당히 술기운이 올라온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사회생활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쩐지 서운은 조금 슬퍼졌다. 다들 고생이 많구나. 나만 남의 돈 벌어먹기 힘든 게 아니었어.

“지니 씨!”

컥. 냉수를 마시던 서운이 사레가 들렸다. 데자뷔처럼 상견례 날이 떠올랐다. 들었을까? 못 들었겠지? 서운은 진심으로 의진이 듣지 못했기를 바랐다.

“지니 씨가 우리보다 한 살 어리다고 들었어요.”

“훠우, 연하남!”

미치겠다. 저 미친놈들 왜 저렇게 업 됐어! 서운은 데굴데굴 눈동자만 굴려 대며 의진의 눈치를 보았다. 다행히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맞습니다. 제가 서운 씨보다 한 살 어립니다. 서운 씨와 동갑이십니까?”

“네. 대학 동기거든요.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서로 편하게 부릅시다. 사회에서 한 살 차이면 친구지!”

“뭐?!”

“깜짝이야! 왜?”

따지고 보면 이상한 광경은 아니다. 술기운에 힘입어 친구의 배우자와 스스럼없이 지내고자 하는 광경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렇긴 한데, 역시 좀 그렇다. 서운은 저도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네. 그러십시오.”

“뭐요?”

깜짝이야…. 서운의 요란한 반응에 애꿎은 동기들만 놀랐다. 내가 더 놀랐거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의진 때문에 서운은 더 놀랐다. 이 중에서 아무렇지 않은 건 의진뿐이다. 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정말 내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은 걸까. 놀랍게도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근데 넌 왜 아직도 지니 씨랑 말 안 놨어?”

“지니 씨가 서운이 부르는 애칭은 없어요?”

겪어 본 적 없는 고난이도 질문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방심하면 끝이야. 서운은 비장하게 퀘스트에 임했다.

“예의가 아니기에 놓지 않았습니다. 애칭은 없습니다. 혹시 필요하십니까?”

반응 속도 한 번 쓸데없이 빠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서운과 의진을 제외한 모두가 적당히 취해 있다는 점이다. 서운은 동기들이 이상한 기운을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보완에 나섰다.

“하, 하하. 그런 건 차차 만들어요. 시간 많잖아.”

“그렇군요. 명심하겠습니다.”

“뭘 또 명심까지… 다들 조심 좀 해 줘. 보다시피 우리가 아직 좀 많이 풋풋해.”

“풋풋하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질문은 둘만 있을 때 한 번에 받을게요.”

서운은 옆자리의 의진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가히 복화술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의진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이유는 알고 저러는 걸까. 아마 모를 거다. 역시 의진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예의도, 사회성도, 눈치도 다 희한하다. 웃긴 게 또 마냥 없지는 않다. 이쯤 되면 공평한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지니 씨는 왜 지니가 됐어?”

“이름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이름이 진으로 끝나시던데.”

“에이, 뭐야. 겨우 그거야?”

응. 겨우 그거 맞는데 그놈의 지니 타령 좀 그만해 주면 안 되겠니? 서운은 한 시간 전의 자신을 매우 치고 싶었다.

“맞습니다. 제 이름의 끝 글자를 따서 그렇게 부릅니다.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이름 짓는 걸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신기하군요.”

“엥, 아버님?”

“뭐가 신기한데요?”

“저희 식구들끼리 부르는 이름을 다들 어떻게 아셨습니까?”

“여기요!”

서운이 번쩍 손을 들었다. 의진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미약하게나마 분산되었다. 서운이 우렁차게 외쳤다.

“저희 메뉴판 좀 갖다주세요!”

“오, 정서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술이 떨어지면 쓰나. 하, 하하….”

서운만 아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서운은 동기들에게 메뉴판을 넘겨줌으로써 완전히 시선을 분산시켰다. 그러고 보니 저녁은 먹었나? 서운이 뒤늦게 의진을 쳐다보았다. 의진과 눈이 마주쳤다. 서운은 뒤늦게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어색해졌다.

먼저 입을 연 건 의진이었다. 기분 탓인가, 그는 어딘가 감탄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서운 씨 친구분들답습니다.”

“뭐가요?”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저희 가족 비화까지 알고 계시다니 놀랍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잠시 고민했으나 사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저 알파는 농담 같은 건 하지 않는다. 자기 입으로도 그렇게 말했고, 실제로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서운은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전에 서둘러 해명에 나섰다.

“사실 내가 얘기했어요. 의진 씨 애칭이 뭐냐고 물어보는데 지니…가 생각나서요. 멋대로 얘기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사실 전달은 중요한 문제이니 이해합니다.”

“…그런, 심각한 건 아닌데… 네, 뭐…. 저녁은 먹었어요?”

“네. 먹었습니다.”

“아, 네. 잘했어요.”

“…….”

“왜요?”

돌연 의진이 입을 다물었다. 추가 주문을 하느라 사방이 소란스러운데 의진은 혼자서 조용히 서운을 보고 있었다. 의진은 기본적으로 인풋에 따른 아웃풋이 확실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대화가 끊어진 적도, 대화 도중에 일방적으로 서운을 쳐다보고 있는 것도 모두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이 모든 건 오늘을 포함한 네 번의 만남을 토대로 한다.

“서운아. 와인 괜찮아?”

“어, 어. 괜찮아. 다 골랐어?”

“진작 골랐지.”

힐끗, 동기들이 의진을 쳐다보았다. “둘이 진짜 잘 어울려.”, “장난 아니다, 야,”, “알파, 오메가 커플은 다 이런 거야?”. 두 사람이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저마다 훈훈한 덕담을 건네 온다.

쟤네 술 더 마셔도 괜찮으려나. 서운은 별다른 감흥 없이 매우 현실적인 생각을 했고, 의진은 감사하다며 묵례를 했다. 그에 동기들 몇몇이 엉겁결에 함께 고개를 숙였다. 다시 봐도 참 웃픈 광경이었다. 서운은 금세 동기들의 칭찬을 잊어버렸다.

“와, 이게 대체 몇 병째야? 술값은 다 같이 나눠서 내자. 밥 맛있게 잘 먹었어.”

“신경 써 줘서 고맙….”

“계산은 제가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따 카드를 맡겨 놓고 가겠습니다. 카드는 다시 만나 뵐 때까지 서운 씨께서 맡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와씨, 멋있다! 요정님 멋있어요! 괜히 지니가 아니네! 램프의 요정, 안지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쯤 되면 진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닐까, 수치심은 온전히 서운의 몫이었다. 서운은 민망함에 붉어진 얼굴로 침착하게 중재에 나섰다. 술에 취할 겨를이 없었다.

“맘…페에서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안 그래도 돼요. 내 친구들이고 내가 먹은 거니까 내가 낼게요. 의진 씨는 여기 와서 물 한 잔도 안 마셨잖아요.”

“물을 마시면 계산해도 괜찮은 겁니까?”

“당연히! 아니지. 어려운 자리 나와 준 걸로 충분해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기다리시는 줄 알았다면 더 빨리 왔을 겁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서운 씨.”

“왜요.”

“그럼 서운 씨도 식사하신 겁니까?”

“당연하죠. 내가 다 먹었는데.”

“잘하셨습니다.”

“…뭐가요?”

“다 드신 것 말입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왜? 혼란스러운 서운과 달리 의진은 무척이나 뿌듯해 보였다.

“자! 지니 씨도 한잔해야죠!”

“차 가져왔다니까. 지금도 일하다 온 거라 다시 가 봐야 돼.”

“아, 그래? 엄청 바쁜가 보다.”

“그럼 입술만 축이시는 건 어때요? 한 모금 정도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운전해야 된다니까?”

“확실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군요.”

네? 뭐라고요? 놀란 서운이 의진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아직 의진에 대해 잘 몰랐던 모양이다. 살아 있는 FM이라 여겼던 의진이 저렇게 말할 줄이야. “자, 그럼 잔부터 받으시고!” 동기 하나가 적극적으로 의진에게 새 잔을 건네주었다. 군말 없이 와인 잔을 받아 든 의진이 곧바로 잔을 내려놓으며 여상하게 물었다.

“와인 정보를 알 수 있을까요.”

“이거요? 뭐라더라. 내가 시킨 게 아니라… 야, 이게 어떤 와인이랬지?”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도수입니다. 법으로 규정하는 음주 운전 단속 기준은 혈중 알코올 농도 0.03%부터이니 정확한 계산을 위해 주문하신 와인 도수부터 확인하겠습니다.”

그렇게 묻는 의진은 어딘가 결연해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온몸에서 비장함이 뿜어져 나온다. 그럼 그렇지. 결국 한 건은 하는구나. 서운은 의진의 행동을 궁금해하는 대신 덤덤하게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된다고,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서운은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 의진이 떠나기 11분 전에 일어난 일이다.

“혈액 1㎗를 기준으로 알려 주시면 됩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저마다 흔들리는 동공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지, 알지. 그 마음 잘 알아. 이제 그만 요정님을 램프로 불러들일 시간이다. 서운은 능숙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냥 마시지 마요.”

“일단 도수 확인부터….”

“어유, 아니에요, 아니에요! 음주 운전 하면 안 되죠!”

“그럼! 큰일 나지!”

“자, 잔 이리 주시고. 지니 씨는 그냥 물로 짠만 해 줘.”

“도수 확인만 해 주시면….”

“어이구, 잔 깨질라. 잔 이리 줘요. 착하지, 옳지 잘하네.”

두 살배기 아이가 있는 동기가 알아서 상황을 정리했다. 서운과 의진의 네 번째 만남에서 있었던 일이다.

* * *

이대로 아무 일 없이 결혼식장에 들어섰다면 좋았을 텐데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처음부터 일정이 빠듯한 결혼이었다. 하필이면 서운이 맡은 프로젝트와 시기가 완전히 겹쳐서 더 그랬다.

덕분에 결혼 준비는 거의 의진 혼자 다 했다. 물론 결혼 준비만 한 건 아니다. 일도 하고 출장도 다녀오고 야근도 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서운을 위한 정기적인 브리핑을 잊지 않았다. 어디 저런 비서 없나. 솔직히 좀 고용하고 싶었다.

결혼을 늦추고 싶지 않아 한 건 의진이었으니 책임도 본인이 지는 게 맞지만 확실히 미안하긴 했다. 서운은 초반에는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으나 서운이 사과를 하면 의진은 반박했다. 싸웠다는 건 아니고, 말 그대로 반박을 했다. 서운이 사과할 필요가 없는 근거를 5개씩 제시했다. 아, 아닌가. 4개였던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서운은 점점 결혼 준비와 멀어져 갔다. 자신의 결혼을 실감할 일도 거의 없었다. 청첩장에 적힌 제 이름을 봤을 때, 지인들에게 청첩장을 나눠 줄 때, 외삼촌 내외에게 한복을 선물할 때를 제외하면 서운의 일상은 지나치게 평소 같았다. 예복을 맞추러 갔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냥 내 돈으로는 절대 사 입을 일 없는 비싼 맞춤옷을 사러 간 느낌?

대신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결혼은 결혼이고 당장은 내 밥줄이 더 중요하다. 서운은 바빴다. 먹고사느라 존나게 바빴다. 서운은 의진이 결혼 준비를 하는 내내 새 클라이언트와 씨름 중이었다. 결혼의 낭만이나 사색의 여유에 잠겨 있을 시간 따위 없었다.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남 일이 아니다. 상견례 전에 받아 놓은 1차 컨펌은 3차 시안에서 싹 엎어 버린 지 오래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 안 맞는다. 새 클라이언트 담당자는 간접 화법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안 든다고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기왕이면 원하는 방향도 함께 제시해 주면 좋으련만 그저 웃는 이모티콘으로 모든 걸 일축해 버리기 일쑤다.

[저보다는.. 서운님이 더 잘 아시겠죠..^^ 디자이너잖아요~~]

[알아서.. 잘 좀 해 주세요~~^^]

[서운님~ 이런 느낌 말구요..^^ 좀 더 엣지 있게….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걸 알면 내가 독심술사지 디자이너겠냐. 프로젝트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수정 요청이 끊이지를 않는다. 메신저 창이 반짝이거나 휴대폰이 울리거나 새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뜰 때마다 습관적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못내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서운의 손가락과 입은 그렇지 않았다.

[담당자님~~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

[수정본 전달 드립니다.. ^^]

가장 환장하겠는 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담당자의 말투가 옮았다는 점이다. 어느 순간부터 서운은 물결과 온점 없이 메시지를 입력하지 못하는 병에 걸렸다. 수치스러웠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대단히 설렌다거나 특별히 막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날이 불안하다거나 우울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우울해할 시간이 없었다. 결혼 전에 많이들 겪는다는 메리지 블루, 결혼 전 우울증조차 보기 좋게 서운을 비껴간 것이다. 서운은 이 사실을 결혼식 날짜까지 한 자릿수 남겨 둔 어느 날, 새벽 3시에 일러스트 창과 씨름을 하던 도중에 깨달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현타가 왔다는 소리다.

수정 요청에 시달린 디자이너 똥은 개도 안 먹는다더니 딱 그 짝이다. 이러다 신혼여행을 가서도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돌리며 저 좆같은 물결과 온점을 찍어 댈 판이다. 끔찍하다. 서운은 당장 이 불결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이때 서운은 저도 모르게 Ctrl+Z를 누르고서 작업 파일이 날아간 줄 알고 쌍욕을 했다.) 당연한 소리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식 전에는 끝내야겠다. 그래 봤자 며칠 안 남긴 했다.

“미안해요. 메시지 지금 봤어요. 무슨 일이에요?”

마침내 결혼식까지 남은 날짜를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게 됐을 무렵, 의진에게 연락이 왔다. 공식적인 브리핑은 이틀 전에 마감했으니 이틀 만에 연락이 온 셈이다. 밤낮이 바뀐 서운에게 큰 의미 있는 숫자는 아니었다.

- 아닙니다. 저야말로 바쁘신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인데요.”

의도한 건 아닌데 말투가 냉랭하기 그지없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살짝 신경이 곤두선 상태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새벽에 현타 아닌 현타를 맞은 날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 아마 의진도 느꼈을 테다.

- 서운 씨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네. 얘기하세요.”

- 상황에 따라 변동될 수 있지만 약 25분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말씀드린 시간은 최대한 넘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무슨 질문을 하는데 25분씩이나 걸리는 거지. 짜증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어차피 지금도 담당자 컨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괜찮아요. 뭔데요?” 서운은 대답과 함께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이러다 갑자기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자세 좀 신경 써야 하는데. 그런 현실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50일을 기준으로 답해 주십시오. 현재 시간 오후 5시 33분, 지금부터 질의 시작하겠습니다. 예상 소요 시간은 약 25분으로 종료 예정 시간 5시 58분입니다.

언뜻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서운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무 편한 자세로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 1번.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지. 서운은 내심 긴장했다.

- 불면증이 생기고, 자다가 자주 깨십니까?

“예?”

- 예,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위 증상의 정도를 5점 척도를 기준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뭔지는 모르겠는데 장난으로 대답하면 안 될 것 같다. 어느새 서운은 진지하게 답변을 고민하고 있었다. 최근에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그런지 자다가 자주 깨긴 한다. 불면증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하루 종일 모니터만 보다가 자려고 불을 끄면 잠이 잘 안 오긴 했다.

“불면증은 3점, 자다가 자주 깨는 것도 3점요.”

- 답변 감사합니다.

애매할 땐 무조건 3점이지! 타다닥, 서운이 대답을 마치기 무섭게 휴대폰 너머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의아할 새도 없이 곧바로 다음 질문이 날아왔다.

- 2번. 피로감과 무기력증이 생기셨습니까?

“네.”

- 5점 척도로….

“둘 다 5점요. 완전 5점. 꽉 찬 5점.”

진심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자기 계발이고 뭐고 당분간 신규 클라이언트 작업은 안 받을 거다.

이번에도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서운은 얌전히 3번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 3번. 사소한 것으로부터 자기 비난과 죄책감이 드십니까?

아니요. 그럴 리가. 존나 아니다. 원래 세상은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남 탓이다. 번복되는 수정 요청에 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분노만 남았다. 서운이 울분을 토해 내듯 대답했다.

“아니요!”

- 처음으로 아니요가 나왔군요. 바로 4번으로 넘어가겠습니다. 4번, 외출이 싫어지고 일이 손에 안 잡히십니까?

그 뒤로도 계속해서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방적인 질문에도 서운은 그저 열심이었다. 사실 일을 하고 있을 땐 일 빼고 다 재밌다.

어느덧 질문이 10번에 다다랐다. 서운은 그제야 이 괴상망측한 질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질문 10번은 이러했다.

- 예비 신랑이 미워지고 서운한 감정이 드십니까?

심리테스트인 줄 알았는데 우울증 자가 진단 체크리스트인가 보다. 아, 가장 중요한 단어를 빼먹었다. 그냥 우울증 말고 ‘결혼 전 우울증’, 이름 하여 메리지 블루 체크리스트. 그렇지 않고서야 여기서 저 질문이 왜 나오는데. 생각해 보니까 질문 1번부터 이상하긴 했다. 어이가 없었다.

- 서운 씨? 들리십니까?

“네. 잘 들려요.”

- 대답이 없으셔서 질문을 못 들으신 줄 알았습니다.

“잘 들었어요. 예비 신랑이 미워지고 서운한 감정이 드냐면서요.”

결정의 시간이다. 지금 서운에게는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첫 번째는 고도의 비꼬기 전술이다. 결혼 준비도 안 하면서 맨날 뭐가 그렇게 바쁜데? 일은 너 혼자 해? 나도 일해! 힘들어도 내가 더 힘드니까 징징거리지 마. 두 번째는 말 그대로 서운이 메리지 블루를 앓고 있어서, 메리지 블루 증세를 보이는 서운을 정확히 진단하고자 직접 체크리스트를 준비했다는 가설이다.

“의진 씨.”

- 네. 말씀하십시오.

“이거 어디서 봤어요.”

- …무슨 말씀이신지 잘….

“맘카페야? 맞죠?”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히 두 번째다. 의진은 비꼬거나 돌려 말할 사람이 아니니까. 서운은 자신이 보아 온 의진을 믿기로 했다. 지금까지 총 네 번 본 사이지만 어쨌든.

침묵은 곧 긍정이다. 봤네, 봤어. 맘카페에서 봤구만. 인풋과 아웃풋이 확실한 남자라 참 알기 쉽다. 10번 문항까지 와서야 눈치챘다는 사실이 못내 자존심 상한 건 비밀이다.

- 원 출처는 맘카페가 맞으나 고증이 명확하지 않아 정확한 자료는 아닙니다.

“오, 정확하지 않은 자료다?”

- 죄, 죄송합니다.

이럴 수가. 의진이 말을 더듬었다. 뭔데, 이거? 재밌잖아? 서운이 새로운 취미에 눈을 뜬 순간이었다.

-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제가 임의로 진행했습니다.

“임의로 진행하셨다?”

- 고증을 요청했는데 제 댓글에만 리댓을 달아 주지 않아서…·. 아, 리댓은 댓글의 답글이라는 뜻의 신조어입니다.

“나도 그 정도는 알거든요.”

인정한다. 약간 욱했다.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내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나. 이건 이쯤 해 두고. 서운은 새로운 먹잇감에게 발길을 돌렸다.

“댓글 뭐라고 달았는데요? 고증해 달라, 막 이렇게 썼어요?”

-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활동 내역 확인 후 정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냥 대충 얘기해 줘도 되는데…. 카페에 접속하는 중인지 의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마침내 자신의 활동 내역을 확인한 의진이 직접 쓴 댓글을 읊어 주었다.

- 안녕하십니까. 소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본 자료의 출처가 나와 있지 않아 문의드립니다. 명확한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 어떤 전문의에게 고증을 받았는지 본문에 기재 바랍니다.

“…진짜 그렇게 썼어요?”

- 더 있습니다. 또한….

“알 만하네. 그래서요? 결국 씹혔어요?”

- 네, 그렇습니다.

“아이고.”

말만 아이고지 얼굴은 이미 웃고 있다. 작성자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 틀림없이 또라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온라인은 원래 오프라인이랑 좀 달라요. 문화가 다르거든요. 온도 차가 좀 있어요.”

-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커뮤니티 처음 해 봐요?”

- 네, 이번이 처음입니다.

“많이 놀랐겠네.”

- …맞습니다. 조금 놀랐습니다.

“그런 커뮤니티는 친목 위주 아닌가? 일단 말투가 너무 딱딱하면 위화감이 들 거예요.”

-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기분 탓인가. 목소리에 힘이 없다. 풀이 죽은 것 같기도 하고. 기계 오류를 눈치챈 서운이 물었다.

“왜요. 누가 뭐라고 했어요?”

- …….

“어? 어? 진짜 뭐라고 했나 본데? 왜 그래요. 악플 달렸어요? 말투가 왜 그따위냐고 그래? 존나 로봇인 줄 알았대?”

- 그렇게 심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딘가 울컥한 의진이 재빨리 반박했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착하구나. 서운은 뒷말은 속으로만 했다.

- …않았으나….

“뭐야. 뭔데. 빨리 말해요. 나 현기증 나.”

- …신고당했습니다.

…아…. 서운이 탄식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이변은 없었다. 서운은 맘카페 회원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 어그로성 댓글로 몰려서…. 아, 어그로는 영단어 aggro에서 기인한 온라인 용어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올리는 자극적이고 악의성 짙은 콘텐츠나 그러한 행위를 의미합니다.

서운이 30대인 건 맞지만 ‘아직’ 30대다. 어그로 뜻을 모를 리가 없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아무 소리 없이 의진의 설명을 듣고 있었던 건 어그로라는 영단어가 실제로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방금 알았다. 서운은 누구보다 빠르게 자신의 무지함을 모른 척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활중 먹었어요?”

- 활중은 경고 3회 누적 시에만 적용되는 강도 높은 패널티입니다. 저는 경고 1회라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경고 1회가 2회가 되고, 2회가 3회가 되고…. 뭐 그런 거 아니겠어요?”

- 아니요. 두 번은 안 당할 겁니다. 제 인생에 경고 2회는 없습니다.

“그렇겠죠. 당연히 그렇겠지. 활중 당하는 사람들은 뭐, 일부러 당하나…. 다들 경고 1회가 2회가 되고, 2회가 3회가 되고….”

- 아닙니다!

의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낄낄낄, 서운은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재미있어졌다.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고 본격적으로 의진을 놀리려는데 생각지도 않은 복병이 튀어나왔다.

- 1분 남았습니다.

“뭐가요?”

- 현재 시간 오후 5시 57분입니다. 예정 종료 시간까지 1분 남았습니다.

아, 네. 그러세요. 서운은 짜게 식었다. 동시에 뒤늦게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타이밍 좋게 모니터 하단의 메신저 창이 깜박깜박 알람을 울려 댔다. 퇴근까지 3분이 남은 담당자가 서운에게 새로운 일거리를 안겨 주고 이대로 퇴근하려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전화를 끊어야 할 시간이다. 길다고 생각했던 25분이 이렇게 순식간에 지나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의진 씨.”

- 네.

“고마워요.”

- 무엇이 말입니까?

“내가 평소랑 달라 보여서 그런 거 아니에요?”

평소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기로 했다. 그딴 게 중요했으면 이 결혼은 하지도 못했다. 확실히 서운은 의진에게 익숙해졌다.

“신경 써 줘서 고맙고, 미안해요. 나도 같이 알아봤어야 했는데 의진 씨만 믿고 손을 놨어요.”

- 저를 믿으십니까?

“예? 뭐요?”

- 저를 믿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정정한다. 아니다. 아니었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진 못했다. 예수님인 줄…. 서운이 대답했다.

“5점 척도로 대답할까요?”

-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점이에요.”

애매해서가 아니라, 정말 3점이어서 3점이라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3점이나 의미는 다르다. 그렇습니까, 의진이 서운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른다. 그래도 진심은 언젠가 통한다. 추상적인 것보다는 뭐든 구체적인 형태를 선호하는 서운이지만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두 사람은 곧 결혼한다. D-1, 마침내 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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