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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섯 번째 만남 (1) (5/13)

5. 다섯 번째 만남 (1)

나는 어떤 사람과 결혼하게 될까?

늘 궁금했다. 서운은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부터 결혼에 관심이 많았다. 정확히는 동경했다. 결혼이라는 제도를, 결혼이 가지는 의미를. 어린 서운의 눈에 비친 결혼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서운은 어릴 때 부모님을 사고로 잃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운이 너무 어렸던 탓에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서운이 기억하는 최초의 기억도 전부 다 외삼촌 내외로부터 시작된다. 비록 호적은 합쳐져 있지 않지만 서운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가족과 함께였다. 서운에게는 호적상 외숙모라 불리는 엄마가 있으며, 외삼촌이라 불리는 아빠가 있다.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촌 동생들도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서운이 불쌍하다 말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친척 집에 얹혀사는 불쌍한 애. 부모님이 안 계신 건 사실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서운은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친척 집에 얹혀산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이곳이 곧 서운의 집이고 이들이 곧 서운의 가족이었으니까.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서운이 동경한 건 온전한 자신의 의지와 선택으로 가족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지 지금의 가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서운은 그저 궁금했다. 자신이 선택한 배우자와 둘이서 함께 만들어 나갈 가족이 어떤 모습일지, 늘 꿈꿔 왔다.

비록 다른 사람 눈에는 이런 스스로가 한없이 불쌍해 보일지라도 서운은 남들만큼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다 자부할 수 있다. 물론 혹자에게는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세계 인구의 90%가 베타인 마당에 서운은 오메가, 그것도 남성 오메가이기까지 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서운은 이미 출생부터 글러 먹었다. 무엇이? 평범한 인생이.

“정서운!”

어린 서운은 몰랐다. 제 결혼식이 이렇게 개판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조건만 놓고 보면 모자람 하나 없는 완벽한 결혼식이었다. 식장에 도착한 서운이 본능적인 위화감에 뒷걸음질 쳤을 정도로 곳곳에서 돈 냄새가 풀풀 났다.

그럼 뭐하나. 여기가 바로 전쟁터였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았다간 죽는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서운은 비장하게 퀘스트 수행에 나섰다.

“왔어? 일찍 왔네. 와 줘서 고맙다.”

“밖에! 밖에!”

“어. 밖에. 많이 놀랐지? 일단 진정하고. 심호흡 한 번 해.”

“밖에…!”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자, 한 번 더.”

일반적으로 신랑 대기실에서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거듭 심호흡을 유도하자 잔뜩 흥분해 있던 지인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 갔다. 서운은 그제야 정상적인 대화를 시도했다.

“길 많이 막혔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봤어?”

글쎄, 뭘까. 짚이는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어서 감히 유추도 안 된다. 호텔 안팎으로 경호원이 쫙 깔린 거? 오늘 하루 우리가 호텔을 전세 낸 거? 잠입을 시도한 취재진이 경호원에게 끌려 나간 거? 호텔 로비에 우리나라 사회면에 나오는 사람들이 휠체어도 없이 하하 호호 웃으며 돌아다니는 거? 아니면 내 남편 될 사람이 존나 잘생긴 거? 참고로 턱시도를 입은 의진은 당장 혼인 신고를 하고 싶은 비주얼을 자랑했다.

그거면 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결혼은 존나 해야 했다. 서운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악착같이 정신 줄을 붙잡고 있었다. 분명 객관적으로 대단한 집안이긴 했으나 애초에 의진만 보고 결혼을 승낙한 서운이다. 아직까지는 껍데기가 주는 은혜로움이 더 컸다. 의진의 집안은… 차차 생각해야지. 일단 결혼부터 하고.

“안, 의선! XX그룹 회장!”

아, 그거였구나. 역시 짚이는 곳이 너무 많다. 서운이 능숙하게 응대에 나섰다.

“아, 놀랐지? 나도 처음에는 놀랐는데 곧 괜찮아져. 근데 정확히 뭐에 놀란 거야? 혹시 또 노래 부르셔?”

“노래? 웬 노래?”

“취미가 성악이신데 동호회 지인들이 오시면 자꾸 노래를 부르시더라고. 안 부르셨으면 됐어.”

그나마 다행인 건 안의선 회장이 다른 재벌 총수에 비해 언론 노출이 적다는 점이다. 원래 그랬던 건 아니고 최근 들어 더욱 그렇게 됐다. 그럼, 그럴 만도 하지. 벌써 오래전 일이긴 하나 총수직에서 쫓겨나고 계열사 하나를 통으로 말아먹는 등 유례없는 이슈 메이커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제는 잠잠해질 때도 됐다. 아니, 잠잠해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안의선 회장 개인이 브랜드네임보다 더 이슈가 됐던 것도 거의 십여 년 전이다. 그 때문인지 서운보다 윗세대가 아니고서야 보통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하던데, 이번 지인은 평소에 뉴스를 잘 챙겨 보는 모양이다. 뭐가 됐든 뒤늦게 저 혼자 포털 사이트 인물 검색을 하다 소리를 지르며 달려올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좋아, 한 큐에 끝내자! 서운은 침착하게 지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이게 뭐야! 안의선이 왜 여기 있어? 왜 신랑 측에서 인사를 받고 있는데? 너 설마 XX그룹 사람이랑 결혼해?”

“그…렇지? 네가 봐도 그런 것 같지?”

“야, 이게 무슨…! 왜 말 안 했어! 너 진짜야? 진짜 XX그룹이랑…. 이게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게 말이다. 도대체 이 소란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일단은 흥분을 가라앉히는 게 급선무다. 서운은 눈짓으로 사진 기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촬영부터 들어가겠습니다. 친구분, 신랑님께 좀 더 가까이 붙으시고. 좋아요, 스마일! 한 번 더! 스마~일!”

찰칵, 찰칵! 요란한 셔터음이 대기실의 소란을 잠재웠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서운이 구축해 낸 지인 대응 매뉴얼이었다.

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촬영에 집중한다. 놀란 건 놀란 거고 사진은 별개의 문제니까. 남의 결혼 앨범에 내 못 나온 사진이 영구적으로 남는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서운은 오늘만큼은 즐거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 아주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그 뒤는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노골적으로 전후 사정을 궁금해하는 지인들에게는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핑계 삼아 축객령을 내렸고(연기를 할 필요도 없다. ‘회장님!’ 단 한 마디면 된다), 해명을 요구하기는커녕 제 풀에 놀라기 바쁜 지인들에게는 영혼 가득한 리액션을 아끼지 않았다. 황금 같은 주말, 귀한 시간을 내어 준 지인에 대한 예우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잘못 산 건 아니었는지 다행히 후자의 경우가 훨씬 많았다. 서운은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좁고 깊은 인간관계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다 끝났어?”

이제 올 만한 사람들은 다 왔다. 결혼식까지 몇 분 남지 않은 상황, 보스몬이 등장했다. 서운의 사촌 동생 민영이었다.

“이제 사람들 더 안 와?”

“늦게 올 수도 있고, 더 안 올 수도 있고.”

“헐. 왜 남의 결혼식에 지각을 하고 지랄이야. 문 닫아 버려.”

식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줄곧 뿔이 나 있더니 민영의 태도가 사뭇 공격적이다. 평소에는 문제 삼은 적 없지만 지금은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너무 많다. 뭐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서운은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알아들은 게 분명한데도 민영은 여전히 심통 난 얼굴이다.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서운은 더 이상 민영을 타박하지 않았다.

“닫긴 뭘 닫아. 남의 결혼식인데 늦으면 뭐 어떻다고. 어른들한테 인사는 다 했어?”

“그럼. 다 했지. 겁나 했지. 이럴 때만 친한 척이야. 올해 민영이가 몇 살이라고? 공부는 잘하니? S대 가야지. 반에서 몇 등이나 하니? 한 번에 붙어야 한다…. 짜증 나.”

수능을 겨우 한 달 반 앞둔 대한민국 고3은 마음속에 화가 많다.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여러모로 서운의 잘못이 컸다.

“어쩔 거야. 오빠만 아니었으면 2월까지 존버할 수 있었는데 오늘 싹 다 만났잖아.”

“그러네. 나 때문이네. 어떡할까. 우리 민영이 뭐 하고 싶어.”

“우리 민영이는 무슨. 나만 빼고 상견례 하니까 좋았어? 짜증 나. 나만 몰랐어. 오빠 결혼인데 내가 제일 늦게 알았어!”

서운해할 만도 하지.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민영에게는 정말 급박하게 결혼을 알리게 됐다. 사실 결혼 자체가 급박하게 이루어졌으나 차마 진실을 얘기할 순 없었다.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가 직접 업어 키운 사촌 동생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다. 딱히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줄 필요는 없으니까. 사촌 동생이든 지인이든 배우자든 누구에게든. 서운은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구분이 명확한 사람이다.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사촌 동생도 예외는 아니다.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게.”

“어. 알았어. 다음 결혼식 때는 그러지 마. 그땐 나도 상견례 따라갈 거야.”

크흠, 큼! 급식이의 당돌한 발언에 서운의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던 헬퍼분이 사레에 들렸다.

“하, 하하. 민영아 그건 좀….”

이를 지켜보던 사진 기사가 구석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사진 찍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서운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누구보다 단시간에 요주의 인물로 등극한 민영이었다. 역시 보스몬다웠다.

“근데 오빠, 혹시 임….”

“각인 안 했고, 임신 안 했어. 어른들이 그러셔? 사고 쳐서 결혼하는 거라고?”

“응. 진짜 아니야?”

“어. 아니야. 아기 생기면 제일 먼저 얘기할 테니까 그런 얘기는 흘려들어. 공부 얘기도 신경 쓰지 말고.”

“정말? 진짜지? 꼭이다? 절대 어기면 안 돼! 나한테 제일 먼저 얘기하기야!”

“응. 약속.”

아무리 어른스러운 척해도 애는 애다. 기약 없는 약속 하나에 툴툴대던 민영이 금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빠, 오빠. 오늘 개 멋있는 거 알아? 오져, 진심. 오빠 때문에 내 가오가 산다, 진짜!”

돌아온 건 좋은데 어째 수위가 아슬아슬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는 수준이다.

“하, 하하. 고마워. 가오가 산다니 다행이네….”

“어! 존나 살아! 오빠, 여기 봐 봐.”

“응. 왜 그러는….”

“아씨, 얼굴 존나 작네. 좀만 앞으로 가. 어, 스탑.”

분명 제가 입은 건 새하얀 턱시도인데 휴대폰에는 웬 토끼 한 마리가 뀨잉뀨잉 눈을 빛내며 커다란 귀를 팔랑거리고 있다. 이렇게? 서운이 앞으로 몸을 내밀자 민영이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취한다.

질보다 양, 일단 찍어 놓으면 반드시 한 장은 건진다. 끝없는 셀카 타임이 이어졌다. 토끼부터 고양이, 또다시 토끼(이번 토끼는 귀가 조금 더 컸다), 앙증맞은 볼터치 효과를 동반한 고양이 수염과 하트 모양 블러셔까지. 온갖 필터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영 어색해하던 서운도 나중에는 점점 능숙하게 자세를 잡아 갔다.

“잠깐만.”

“아, 왜. 시간 없어. 빨랑 찍어.”

“아까 그 필터 다시.”

“이거?”

“어. 이제 찍어.”

“…….”

“…….”

“미친. 오빠 인생샷 나왔는데? 와, 오졌고요. 이거 프사 해라.”

“해킹당한 줄 알 것 같은데. 일단 보내 줘.”

“오키. 이제 영상 찍자. 토끼 콜?”

“콜. 귀 큰 애로.”

“콜.”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사람은 없다고, 뷰티 필터는 혁명이다. 서운은 어느새 셀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존나 신세계였다. 필터 속 민영이 왼손으로 주먹을 쥐고서 귀여운 척을 하자 서운은 오른손을 들어 합을 맞췄다.

아, 존나 센스. 민영이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반대쪽 주먹을 내밀어 왔다. 서운도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반대쪽 주먹을 갖다 대었다. 당연히 빗나갔다. 띠로링! 두 사람은 첫 촬영이 끝나자마자 결과물부터 확인했다. 아직 첫 번째 영상인지라 조금 어색한 감이 있었다. 다시! 곧바로 촬영이 재개되었다. 서운이 재빨리 포즈를 취했다.

“오늘은 서운 오빠 결혼식 날! 소감이 어떠신가요?”

갑자기요? 두 번째는 인터뷰 콘셉트였다. “어…. 너무 얼떨떨하고…,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황스러움은 잠시, 서운은 열과 성의를 다해 촬영에 임했다. 인정한다. 솔직히 좀 재미있었다. 영상 속 서운은 연예인 뺨 쳤다. 이 정도면 봐 줄 만한데? 서운은 한껏 귀엽고 잘생기고 예쁘고 멋있는 척을 해 댔다.

“서운 님. 전무님 오셨습니다.”

네? 누구요? 꼭두새벽부터 지금까지 줄곧 함께였지만 사레가 들린 때를 제외하면 헬퍼의 목소리를 들은 건 지금이 처음이다. 서운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전무님이 누구인지는 다음 문제였다.

“서운 씨.”

아. 시발. 그쪽이 전무님이셨어요? 서운은 결혼식 당일에 남편 될 사람의 직급을 알게 되었다. 존나 유레카였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당장 혼인 신고를 하고 싶어지는 비주얼이 서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운이 어색하게 웃으며 볼에 집어넣은 바람을 뺐다. 의진의 시선이 홀쭉해진 서운의 뺨으로 향했다.

“헐. 미친 개존잘…. 와꾸합 오지네….”

서운과 마찬가지로 볼에 바람을 한가득 집어넣고 있던 민영이 옆에서 바람 빠진 쇳소리를 해 댔다. 아, 지금 좀, 수치스러운 것 같지? 아니, 수치스럽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했군요.”

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서운이 소리 없이 외쳤다.

“아직 2분가량 여유가 있으니 마저 찍으셔도 됩니다.”

“아, 아니요. 이제 그만해도….”

“형부도 같이 찍어요!”

넌 언제 형부가 됐어? 따라갈 수 없는 미친 친화력이다. 놀란 건 서운만이 아니었는지 잠시 눈썹을 까닥이던 의진이 정중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시발, 거절했어! 그게 더 수치스러웠다.

“아니요.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두 분처럼 숙련되지 않아서 방해만 될 것 같군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 오늘은 두 분끼리 찍으시는 편이 더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하지 마! 숙련 같은 소리 하지 마! 서운은 이번에도 속으로만 외쳤다.

“웬 숙련. 그냥 찍으면 되지! 셀카는 찍을수록 늘어요. 서운 오빠도 처음에는 사진 진짜 못 찍었어요.”

“그렇습니까?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서운 씨는 대단하시군요.”

하지 마! 겨우 이런 걸로 대단하다는 얼굴 하지 마! 이번에는 소리 내어 말할 뻔했다. 다행히 민영이 선수를 쳤다.

“다 제가 가르쳤죠. 형부도 할 수 있어요! 제가 가르쳐 줄게요.”

“감사합니다.”

“근데 형부 지이이인짜 잘생겼다. 와,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잘생겼어! 원래 알파는 다 이래요?”

“무엇이 말입니까?”

“와ㄲ, 얼굴요! 다 형부처럼 잘생겼어요?”

“같은 알파라고 해서 생김새가 다 똑같지는 않습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민영 씨도 아름다우십니다.”

“헐. 아름다, 뭐요? 와씨, 미쳤네.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돼요?”

“민영 씨도 아름다우십니다. 서운 씨랑 닮으셨습니다.”

“헐. 미친. 오빠 들었어? 오빠 닮아서 아름답다잖아! 와, 형부 그렇게 안 봤는데 벌써부터 팔불출 각?”

그럼.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데 안 들릴 리가. 아주 잘 들리니까 다들 좀 닥쳐 줄래…? 성스러운 신랑 대기실, 시한폭탄 둘이 모였다.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었다.

“서운 씨. 이제 들어가실까요.”

손목시계를 확인한 의진이 정중히 서운을 불렀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이제 서운은 정말로 결혼을 한다. 오늘까지 포함해 총 다섯 번 본 알파와 식장부터 들어가게 생겼다.

그 정도면 많이 봤지 뭐. 서운은 의진과 함께 신랑 대기실을 나왔다. 파이팅! 뒤에서 민영이 우렁차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래, 파이팅. 힘내자. 힘내서 국적기 비즈니스 석도 한번 타 봐야지. 결혼식이 끝나면 서운은 신혼여행을 간다. 눈앞의 알파, 자신의 남편이 될 의진과 함께.

“의진 씨.”

“네. 말씀하십시오.”

“직급이 어떻게 돼요?”

“전무입니다.”

그렇구나. 겨우 두 마디 정도 나눴을 뿐인데 주변이 온통 소란스럽다. 이제 들어가면 더하겠지? 아니, 차라리 들어가면 나으려나.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서운이 꿈꾸던 평범한 결혼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는 것 정도다.

글렀네, 글렀어. 기껏 신랑 대기실로 대피해 있었건만 앞으로는 숨을 곳도 없을 것 같다. 언론에 공표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 찬 당부에 너무 방심했다. 애초에 남의 결혼을 공표하네 마네 떠들어 대는 것부터가 일반적이지 않은 거였는데. 당장 옆의 알파는 또 어떻고. 크지 않은 회사를 다닐 때에도 감히 전무님과 겸상을 할 기회는 없었다.

“의진 씨.”

“네. 서운 씨.”

“나 좀 긴장되는데 어떡하지?”

“걱정 마십시오. 오전에 연습하신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동선이 기억나지 않으시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시면 잠깐 연습 영상을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최대한 천천히 걷고 있겠습니다.”

당장 헬퍼를 부를 기세여서 얼른 말렸다. 이럴 땐 그냥 손이나 잡아 주면 된단다, 지니야. 섹스는 했지만 손은 잡아 본 적 없는 사이, 서운은 잠시 갈등하다 냉큼 의진의 손을 잡았다. 손이 붙들릴 줄은 몰랐는지 의진의 눈썹이 크게 요동쳤다. 뭐야, 저게.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겨서가 아니라 잘생겨서. 역시 이 결혼은 해야 한다. 서운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아직 서로 잘 모르지만….”

전무님, 곧 입장하실게요. 카운트 시작합니다. 10, 9….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헬퍼의 목소리도, 주변의 소란스러움도, 날카로운 시선들도 다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어색하게 맞잡은 손안의 온기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서운이 씩 웃으며 말했다.

“결혼하자고 한 거 후회 안 하게 해 줄게요. 먼저 가 있어요. 곧 들어갈게.”

딱히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시선이 따라붙었다. 서운이 처음 카페에 들어섰을 때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정체 모를 시선이 오랫동안 서운에게 머물렀다. 신랑 입장을 알리는 효과음이 호텔 로비를 가득 채운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전무님, 지금 입장하시면 됩니다. …전무님? 전무님! 전무님, 지금 입장하셔야…! 의진이 식장에 들어선 건 여러 차례 이름이 불린 후였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했다.

신랑 안의진, 신랑 정서운. 두 사람은 결혼했다. 호텔 전체를 빌린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 * *

30대가 되면 경조사가 많아진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예가 결혼식이다. 좁고 깊은 인간관계 탓에 많은 결혼식을 가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남들만큼은 가 봤다. 일반적으로 결혼식이 어떻게 진행되고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지, 서운 나름대로 보고 들은 평균치가 있다는 소리다.

그 평균, 오늘부로 다 깨졌다. 일단 결혼식이 너무 길었고, 중간중간 서운도 몰랐던 사실들이 튀어나왔다. 특히 식전 축하 공연을 놓고 할 말이 많다. 밴드가 공연을 한다고 하면 누구나 축가 한 곡 정도를 떠올리지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축하 공연을 생각하진 않는다고.

살다 살다 축하 공연이 있는 결혼식은 처음이다. 심지어 축하 공연만 다섯 곡을 했다. XX전자 광고 모델답게 마지막 곡은 CM송으로 장식했다. 축가를 다섯 곡이나 부르는 것도 모자라 결혼식장에 울려 퍼지는 CM송이라니, 처음 의진에게 브리핑을 받았을 때도 딱히 내키진 않았으나 의진의 집안을 생각해 컨펌을 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결과적으로 축가도 아니었다. 축가는 따로 있었다.)

후회한다. 그때의 경솔한 결정을. 이렇게 신날 줄 알았으면 나머지 네 곡도 싹 다 CM송으로 바꿀 걸 그랬다. 역시 제일 좋은 노래는 내가 아는 노래라고, 막상 익숙한 CM송이 울려 퍼지자 절로 어깨가 들썩거렸다.

하객들의 반응도 엄청났다. 물론 휠체어를 애용하는 그분들은 끝까지 점잔을 떨어 댔지만,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하객들은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열렬한 호응으로 앵콜 공연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서운이 몰랐던 또 다른 사실 하나, 본식 중간에 인터미션이 있었다. 이때 하객들에게 아이스크림이 서빙 되었는데, 서운은 이 아이스크림을 후식으로 알고 있었다. 못내 당황스러웠지만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서운의 실수가 컸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결과적으로 아이스크림이 맛있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주례는 생략하고 부모님의 덕담으로 대신했다. 여기까지는 아주 흔한 경우이나 문제는 덕담을 여섯 명이서 했다. 의진에게 브리핑을 받았을 때도 평범하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겪어 보니 이 시간이 참 길었다. 인터미션을 이때 넣었어야 했다.

서운의 외삼촌 내외와 의진의 부모님, 그리고 의진의 큰아버지 내외 모두가 1인 1덕담의 시간을 가졌다. 서운이야 외삼촌 내외가 부모님 대신이라지만 의진은 큰아버지 내외까지 총 네 분이 덕담을 준비해 온 셈이다. 함께 미국 지사에 있어서 그런가, 서운의 생각보다 훨씬 사이가 좋은 것 같았다.

외삼촌은 서운의 배냇저고리를 들고서 단상에 올랐다. 등장부터 불안 불안 했는데 역시나, 끝끝내 눈물을 보이며 외숙모에 의해 급하게 수거되었다.

말 그대로 개성 넘치는 시간이었다. 외삼촌부터 시작해 의진의 식구들까지, 누구 하나 특색 없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 차례는 의진의 큰아버지였는데, 그는 서운의 외삼촌만큼이나 감정에 북받쳐 보였다. 막상 큰아버지가 눈물을 글썽거릴 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중간에 몇 가지 착오가 있긴 했으나 결혼식 자체는 매우 성공적으로 흘러갔다. 길고 긴 예식에도 하객들 대부분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함부로 일어서지 못한 걸 테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이 자리의 주인공은 서운은 슬슬 지쳐 갔다. 앞에는 웨딩 촬영용 카메라가, 뒤에는 수많은 사람이 예식 내내 서운을 지켜보고 있다. 누군가는 축하의 의미를 담아, 누군가는 탐색의 의미를 담아. 곳곳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피해 의식인가. 어쩌면 서운 본인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정도로 말이 안 되는 결혼이긴 했다. 서운이 보기에도 그러니 타인의 눈에는 오죽할까. 그러니 지금 오늘 서운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해 보여야 했다.

물론 행복하다. 감사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괜히 흠 잡히고 싶지는 않다. 동정받고 싶지도 않다. 나를 불쌍히 여기는 건 오직 나여야만 한다. 만약 의진과의 결혼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과거의 나를 탓할 일이지 다른 사람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탓하지 말아야지. 앞으로도 내가 믿을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남편도 결국 남이다. 믿을 수 있는 건….

“서운 씨.”

아, 놀랐다. 어느새 두 번째 축가가 끝나 있었다. 이상한 얼굴 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서운은 대답 대신 의진을 올려다보았다. 역시, 다시 봐도 잘생겼다. 어째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서운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상념을 떨쳐 내려 들었다.

“사실 서운 씨께 말씀드리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다.”

“뭔데요?”

“죄송합니다. 제 선에서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세 번째 축가로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예정되어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이 저마다 악기를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 남편 될 사람은 저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고 한다.

비밀, 좋다 이거야.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밀은 있다. 대단히 특별한 비화가 있지 않아도 남에게 알리지 않은 내 모든 것이 곧 비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서운은 비밀이 많은 사람이다. 최대한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사람들을 대하며, 타인과 나의 경계가 뚜렷해 그마저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서운이 그런 사람인 건 맞지만 적어도 결혼식 당일, 그것도 결혼식 중간에 협박하듯 들먹거릴 비밀은 없다. 적어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딴 게 있어선 안 된다.

이제 빼도 박도 못 한다 이건가. 지금 와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저의가 뭐지. 서운은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준비하는 찰나에 수천 가지 상상을 했다.

뭐지? 뭘까. 알고 보니 애가 있나? 이 결혼은 연막이고 사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거면… 어떡할까. 죽일까? 아니지.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분노는 잠깐이고 돈은 영원하니 위자료를 받자. 존나게 뜯어내는 거야. 다시는 이런 쓰레기 같은 짓 못 하도록 거하게 뜯어내야지. 인생은 실전이야, 좆만아! 어디서 감히!

언제나 그렇듯이 사건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일어난다. 의진의 쓰레기 설이 서운의 머릿속에서 기정사실로 된 그때,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도 연주가 귀에 들어오는 걸 보면 누군지는 몰라도 엄청난 분들이 오신 게 틀림없다.

아무렴 그랬겠지. 대단하고 대단하신 재벌가이신데. 순식간에 전투력이 만렙을 찍었다. 서운은 하객들을 등지고 의진을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그러니까, 등 뒤였다.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노랫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인생은 아름다워.”

엄청난 환호성이었다. 노래가 시작되자 하객들이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한 서운과 달리 의진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운 씨, 음악 소리에 파묻혀 의진의 목소리가 유독 작게 들렸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됐고, 그냥 죄송할 짓을 하지 마. 노랫소리가 너무 커서 마음껏 빈정거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이런 얘기는 조용한 곳에서 각 잡고 해야 한다. 결혼식 끝나면 얘기 좀 해요, 대신 그렇게만 말했다. 서운은 어떻게든 의진과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다행이다. 천만 다행이야. 잘했어, 과거의 나. 정말 잘했어.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기 짝이 없다. 이때의 서운이 조금만 덜 냉정했더라면 인생 통틀어 가장 큰 흑역사를 세울 뻔했다. 의진이 말했다.

“아버지 부탁이라 차마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이 뭘 부탁하셨는데요?”

“그대라는 사랑의 축복, 인생은 아름답지.”

“인생은 아름답지!”

“인생은 아름답지!”

이상하다. 무대에는 오케스트라 연주자들밖에 없는데 노랫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심지어 하나도 아니다. 둘, 셋, 아니, 다섯.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겠다. 대박! 와씨, 아저씨 멋있어요! 잔뜩 흥분한 민영이가 돌고래 소리를 냈다. 이게 무슨…? 서운이 뒤늦게 뒤를 돌았다.

“나만의 그대, 사랑하는 우리, 함께하는 미래.”

그리고 깨달았다. 아, 내가 너무 세상을 만만하게 봤구나.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턱시도 차림의 중년의 신사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서운과 의진, 둘만을 위한 찬가를 부르고 있었다. 의진의 아버지 뒤로 보이는 하객석 곳곳에는 두더지처럼 코러스가 솟아 있었다. 얼굴이 보이는 거리는 아니었으나 안 봐도 알 것 같다. 아버님의 성악 동호회 친구분들이다.

“죽을 때까지 함께해.”

“죽을 때까지!”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함께해.”

“죽어서도 함께!”

“죽어서도 함께!”

결혼식의 마지막은 안의선 회장과 그의 동호회 지인들이 준비한 서프라이즈 축가로 장식됐다. 의진이 말하지 못한 비밀의 정체였다. 서프라이즈는 대성공이었다. 서운은 문자 그대로 놀랐다. 진짜 존나게 놀랐다.

여운에 젖을 틈도 없었다. 서운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의진을 추궁했다.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반복한 끝에 이 이상 서프라이즈는 없다는 확답을 받아 냈다.

그래, 그럼 됐다. 서프라이즈 두 번이면 오던 히트 사이클도 날아갈 것 같다. 서운은 안도하며 의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안의선 회장의 노랫소리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서운은 애써 이를 무시했다.

“와. 나 라운지 처음 와 봐요.”

“이용해 보시고 괜찮으시면 앞으로도 편하게 이용하십시오.”

결혼식도 끝났겠다, 보는 눈도 없겠다. 진정한 자유가 도래했다. 불과 며칠 전에 마감을 끝낸 서운에게 더 이상 두려운 건 없었다. 처음 들어와 본 공항 라운지는 신기했고, 곧 탑승할 생애 첫 비즈니스석도 무척 기대된다. 공항이 주는 설렘과 비로소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까지, 무엇 하나 싫은 것이 없었다. 비로소 둘만 있게 된 의진을 포함해 모든 것이 다 설렜다.

게다가 비즈니스석이 아니라 일등석이었다. 하긴. 그렇지. 비즈니스석을 탈 리가 없겠구나. 서운은 그제야 의진과의 거리감을 실감했다. 잔뜩 들뜬 저와 달리 신혼여행을 떠나는 비행기 일등석에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서는 더더욱 느꼈다.

근데 얘 진짜 왜 나랑 결혼했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륙의 순간에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순식간에 고도가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양쪽 귀가 먹먹해졌다. 서운은 억지로 마른침을 삼키며 압력에 적응하려 애썼다.

좌석이 넓어서 그런가, 바로 옆자리에 있는 의진이 유독 멀어 보인다. 넓은 내부도, 누워 있다시피 한 자신의 자세도 무엇 하나 익숙하지가 않다.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서운의 시선이 마침내 의진에게 향했다. 해외 출장이 잦다더니 비행기 안에서도 편안해 보인다. 의진은 그새를 못 참고 태블릿 피시를 꺼내고 있었다. 아니지, 안내 방송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 거니 참을 만큼 참은 건가. 서운이 먼저 말을 걸었다.

“바빠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냥 심심해서요. 바쁘면 됐어요.”

“7분 정도는 괜찮으니 말씀하십시오.”

“아, 7분. 와, 7분. 엄청 기네요.”

“어서 말씀하시겠습니까? 오늘은 오전을 통으로 날려서 시간이 많지 않군요.”

거슬리는 포인트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서운은 기분이 좋았고 상황이 주는 특별함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서운은 방금 막 결혼식을 마쳤으며 신혼여행을 떠나는 비행기에 있다. 이 정도 거슬림이야 뭐, 가뜬했다. 서운이 물었다.

“의진 씨는 왜 결혼이 하고 싶었어요?”

왜 나랑 결혼하고 싶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좀, 너무 노골적이잖아. 가뜩이나 필터링이 안 되는 사람인데 어떤 대답이든 서운만 쑥스럽고 서운만 부끄러울 것 같다. 물론 서운의 착각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뭐요? 목적어 넣어서 똑바로 말해 봐요.”

“죄송합니다. 제 설명이 부족했군요. 딱히 이유를 생각해 보진 않았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음, 그렇지. 그럴 수 있다. 결혼은 인간의 권리이자 특권이니 당연히…는 무슨. 저게 말이야, 막걸리야. 희대의 개소리를 직면하고 나니 정신이 혼미해진다. 서운은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결혼하고 싶은 이유는 없다. 해야 하니까 했다. 뭐, 이런 거예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제가 결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는 결혼에 대한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뭐라는지 모르겠으니까 좀 자세히 말해 봐요. 뭐요? 할 수 있는 일?”

“네, 그렇습니다. 결혼은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에 해당하는 일이니 응당 해내는 것이 맞습니다. 한국 지사로 돌아와 줄곧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는데 마침 서운 씨를 만나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기한을 넘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아, 마땅한, 사람… 아…. 기한은 또 뭔 소리야. 유통기한이라도 있어요?”

“굉장히 문학적인 표현이군요. 재미있습니다.”

쟤 지금 뭐라니. 지금 서운은 세상에서 가장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분명했다. 서운이 희대의 개소리에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의진이 선수를 쳤다.

“곧 장기 출장을 떠납니다. 중간중간 지사를 옮겨 다녀야 해서 거주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마침 상황이 딱 맞았군요.”

“…….”

“이제 3분 정도 남았습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3분이면 컵라면이 익는 시간이다. 짜장을 돌리고 카레를 돌릴 수도 있는 시간, 그 시간 동안 이혼을 논하는 건 너무 섣부른 결정일 테다. 그래. 침착하자, 정서운. 마감도 끝냈겠다, 앞으로 시간 많잖아. 신혼여행 동안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거야. 서로 대화도 하면서 좀 더 알아 가면서 그렇게.

“이혼은 안 해 보고 싶어요?”

그러나 우리의 주둥이는 언제나 이성을 배반한다.

“의진 씨 말대로면 이혼도 할 수 있는 영역에 해당하는 거 아닌가?”

개소리를 이길 수 있는 건 개소리뿐이다. 서운도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서운의 당당한 개소리에 의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글쎄요. 이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무어라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와, 이혼은 왜 차별해요? 의진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이 참 편협하네.”

왈왈, 왈왈왈! 서운이 짖었다. 개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약간 자괴감이 들었지만 다행히 많이는 아니었다.

“아니요.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빠르게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분 끝났을 것 같은데.”

“아직 1분 40초 정도 남았습니다.”

“…의진 씨.”

“네, 서운 씨.”

“진심이에요?”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인생의 중대사를 1분 40초 안에 결정하겠다 이거잖아요. 컵라면도 3분은 익혀야 하는데 너무하네. 난 꼬들한 면 좋아하지만 그래도 3분은 기다려요.”

너만 짖을 줄 알아? 나도 짖을 줄 알아! 쾌감이 자괴감을 넘어섰다. 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서운이 혀를 끌끌 차자 의진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후, 개소리의 끝을 한숨으로 마무리하자 의진이 들고 있던 태블릿 피시를 내려놓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서운 씨만 괜찮으시다면 제대로 자리를 갖춘 후에 정식으로 이야기 나누고 싶군요.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그래요, 그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선호하시는 양식이 있습니까?”

“양식? 뭔 양식…. 하, 회의록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그냥 말로 해요. 나도 없이 갈게요.”

“알겠습니다. 시간은 내일 오전 11시 어떠십니까?”

“우리 조식 안 먹어요? 11시면 딱 배부를 시간이라….”

서운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의진도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가 편하십니까? 서운 씨 편하신 시간에 맞추겠습니다.”

“음. 언제가 좋지. 한 4시 어때요?”

“좋습니다. 그럼 그때 뵙지요.”

“콜. 그럼 나 잠깐 눈 좀 붙일게요. 완전 피곤하다.”

“알겠습니다. 좋은 꿈 꾸십시오.”

“의진 씨도 일 잘하고 있어요. 돈 벌어야지.”

“네. 그러겠습니다.”

개소리를 열정적으로 짖어 댔더니 급격히 피로가 몰려온다. 일등석은 원래 다 이런 건지 아니면 서운이 꼭두새벽부터 시달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에 감겨드는 시트의 감촉이 지나치게 안락하다. 비행기에서 이렇게 두 다리를 쭉 펴고 있을 수 있다니, 감동적이다.

이런 게 돈맛이구나. 감동적이다 못해 아주 그냥 짜릿하다. 너무 맛들면 안 되는데, 이혼할지도 모르는데…. 냉철한 이성과 달리 솔직한 몸은 안락함에 잠겨 가고 있었다. 목 끝까지 담요를 덮어 놨더니 잠이 솔솔 쏟아진다. 의진은 뭘 하고 있을까. 이혼 브리핑 준비 중이려나.

타닥, 타다닥, 타다다닥. 잠결에 의진을 떠올리는데 요란한 키보드 소리가 서운을 방해했다. 웬 키보드 소리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의진의 모습이 보인다. 의진을 자주 본 건 아니지만 새삼 익숙한 광경이다. 잊지 못할 두 번째 만남에서도 의진은 노트북과 함께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녹취도 하지 않았나. 이번에는 녹취하지 말자고 해야지. 일단 그때 것부터 지우고…. 서운은 키보드 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누군가 서운의 눈가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떼어 주었으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카락을 떼어 내 주고도 괜스레 서운의 얼굴을 머물던 조심스러운 손길은 서운의 뒤척임 한 번에 금세 날아가 버렸다.

덕분에 서운은 고대하고 고대하던 일등석 기내식을 먹지 못했다. 기내식을 놓친 것도 기함할 만한 일인데 하물며 그 기내식이 생애 첫 일등석 기내식인 경우에는?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아무래도 이혼은 신혼여행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 돌아가는 비행기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내식부터 먹어야지. 그래도 푹 자고 일어난 덕분에 컨디션 하나는 좋았다. 역시 세상은 공평했다.

속전속결로 입국 심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한국과는 다른 이국적인 공기가 느껴진다. Welcome to Hawaii! 신혼여행의 성지에 두 사람이 왔다. 오늘까지 총 다섯 번 본 두 사람은 남은 6박 8일 동안 함께 먹고 잘 예정이다.

“어서 오십시오, 전무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편안한 비행 되셨습니까?”

“네. 정확히 7개월 만에 뵙는군요. 서운 씨, 이쪽은 하와이 지사 박 상무입니다.”

공항에는 하와이 지사 사람들이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다. 당연하게도 서운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으나 의진이 알아서 설명을 덧붙여 주니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서운 님, 안녕하십니까. 찰스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정서운입니다. 저야말로 반겨 주셔서 감사해요. 반갑습니다.”

하하하, 찰스는 또 누구람.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궁금하진 않은지라 적당히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데 의진이 옆에서 슬쩍 귀띔을 해 온다.

“찰스는 큰아버지의 영어 이름입니다.”

“오.”

“이 외에도 질문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기X지니도 아니고 뭘 또 그렇게까지…. 큰 감흥은 없었으나 알겠다는 의미로 적당히 웃어 보이자 내심 뿌듯한 얼굴로 한 발 물러선다. 그래, 뭐. 확실히 묻는 말에 대답은 잘할 것 같다. “하와이는 시차가 얼마나 돼요?”, “하와이는 북태평양 중심부 우측에 있어 우리나라보다 19시간이 느립니다.”. 내친김에 성능을 시험해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온다. 역시, 성능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서운은 만족스럽게 테스트를 마쳤다.

“와, 완전 여름이네.”

“그렇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8월 초순과 비슷합니다.”

폭염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초가을 날씨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단숨에 몰려드는 한여름 열기에 숨이 다 막힌다. 밥만 못 먹었지 푹 자고 일어나 제 손으로 캐리어 하나 끌고 있지 않은데도 그랬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중을 나온 박 상무보다 어린, 의진과 서운보다도 어려 보이는 한국인 직원이 오늘의 짐꾼을 도맡았다. 서운의 짐도 그에게 들려 있었다. 저 사람은 더 덥겠지. 서운이 제 짐을 챙겨 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여기부터는 제가 들….”

“아닙니다, 사모님! 제가 하겠습니다. 이리 주십시오.”

누구요? 사모, 님? 예상치 못한 공격에 어안이 벙벙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직원은 가히 필사적인 몸짓으로 다시 서운의 캐리어를 빼앗아 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또 이해가 간다. 그냥 전무도 아니고 회장 아들이니 어렵고 불편할 수밖에. 최근에야 언론 노출을 자제하고 있다지만 어른들 중에서 의진의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다.

하루아침에 총수직에서 쫓겨나고 계열사 하나를 통으로 말아먹으며 재벌가 역사상 전례 없는 웃음거리로 전락했던 그였다. 그가 다시 회사를 일으켜 제 직함을 찾아가는 과정을 서운은 뉴스에서 보았다. 다시 회사를 일으킨 것도 놀랍지만 그런 사람이 결혼식 축가를 불러 주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정말 몰랐다. 서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의진에게 향했다. 의진은 박 상무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네, 전무님. 맞습니다. 그럼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마침 지난 분기에….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언어 환경이 바뀌자 유난히 한국어가 귀에 쏙쏙 박힌다. 못해도 띠동갑은 되어 보이건만 정중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건 박 상무이고, 무표정한 얼굴로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는 건 의진이다. 낯설고 불편한 광경이다. 아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서운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닌데도 어쩐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서운의 시선을 느낀 건지 의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박 상무에게 그랬듯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다. 서운은 그런 의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그럼 이만 호텔로 가시겠습니까.”

“그럴….”

“여기 있습니다, 전무님.”

서운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박 상무가 품 안에서 차 키를 건네주었다. 의진이 직접 운전대를 잡는 걸 보니 회사 사람들이 동행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서운 님, 타시지요.”

“아, 네. 감사합니다.”

“무슨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박 상무가 손수 차 문을 열어 주며 그런다. 평범하게 사회에서 만났다면 나이로 보나 직급으로 보나 틀림없이 서운의 윗사람이었을 그가 지금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기 바쁘다. 비행기 일등석부터 과분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의 태도까지, 의진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테다.

당장 눈앞의 차만 해도 그랬다. 차 문이 위로 올라가잖아…? 신기하고 또 놀라웠다. 이런 차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다. 서운이 차에 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박 상무가 다급하게 물었다.

“서운 님, 혹시 차에 무슨 문제라도….”

탁! 갑자기 의진이 차 문을 닫았다. 헉! 막내 직원은 엉겁결에 큰 소리를 냈고, 박 상무는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러더니 다시 차 문을 연다. 이번에는 의진이 직접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한 번 더 차 문이 위로 올라갔다. 오오. 서운이 감탄하자 의진이 또다시 차 문을 닫았다. 다시 열었다. 그 짓을 두 번 정도 반복했다.

“혹시 뚜껑도 열려요?”

“톱 말씀이십니까? 열립니다.”

“오! 열어 봐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우웅, 흡사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 같다. 활짝 젖혀진 뚜껑 안으로 하와이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와! 절로 감탄이 나오는 광경이었다. “우리 빨리 타요!” 흥분한 서운이 의진을 재촉했다. 서운에 이어 의진도 후다닥 탑승을 마쳤다.

“지니, 달려!”

도대체 불편한 마음은 어디 간 걸까. 중동이라도 간 걸까.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재빨리 선글라스를 꺼내 쓴 서운이 잔뜩 신이 나서 외쳤다.

“안전벨트는 매셨습니까.”

이럴 땐 그냥 네가 대신 매 주면 된단다, 지니야. 그렇게 말하는 것도 웃겨서 서운은 알아서 벨트를 맸다. 찰칵, 벨트의 이음새가 맞아 들면서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의진이 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차 뚜껑을 활짝 열고 끝없이 펼쳐진 해안 도로를 달렸다. 옆으로는 거대한 물결이 마르지 않는 파도를 이루고, 앞으로는 새파란 하늘과 회색빛의 아스팔트 도로가 만나 명백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늘과 땅, 그리고 바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 완벽한 구별에 시야가 절로 탁 트인다.

피부에 닿는 햇살은 뜨거웠지만 날이 습하지 않아 바람은 시원했다.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히고, 아름다운 이국적인 풍경이 시야를 화려하게 물들인다. 모든 감각이 알알이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다. 서운이 한껏 양팔을 벌렸다. 지금 이 순간의 공기와 냄새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눈을 감고 팔을 뻗자 가까이에서 바다가 느껴진다. 아무리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비릿한 짠 내음과 일렁이는 파도 소리가 서운을 조금씩 들뜨게 했다. 가슴속을 굴러다니는 돌멩이 같은 감정은 감히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조금 더 자유롭게 이 감각을 만끽하고 싶다. 그러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조수석에 서서 바람을 맞고 싶었던 서운의 바람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옆자리 사람이 무슨 일이 있어도 안전벨트를 못 풀게 해서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은 채로 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이국적인 공기가 사방에서 서운을 감싸 안았다. 평지를 달리고 있을 뿐인데 산 정상에 오른 것처럼 가슴이 마구 부풀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사람처럼 마음도 부풀었다. 제멋대로 서운의 가슴속을 헤집고 다니던 자그만 돌멩이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서운 씨, 위험합니다. 팔을 조금 더 내려 주십시오.”

이 좋은 풍경을 앞에 두고도 의진은 서운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양손으로 정직하게 핸들을 잡고 있는 주제에 룸미러로는 계속 서운을 흘긋거리기 바쁘다. 서운이 언제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설지 몰라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웃겼다. 기계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도, 그러면서도 핸들에서는 두 손을 떼지 못하는 것도 전부.

나 결혼했구나. 서운은 그제야 자신의 결혼을 실감했다. 서운에게 남편이 생겼다. 가족이 생겼다.

* * *

해야 하는 일도, 정해진 일정도 없다. 두 사람의 신혼여행은 완벽한 자유 여행을 표방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전적으로 서운의 뜻이 컸다. 결혼식 날까지 컨펌이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쫓기듯이 일정을 짜고 싶진 않았다. 일생에 단 한 번뿐인, 평생토록 기억될 신혼여행이다. 어느 여행보다 즐겁고 신나야 했다.

나한테 이렇게 로맨틱한 면이 있었다니, 서운도 이런 스스로가 낯설었다. 굳이 따지자면 서운이 로맨틱해서가 아니라 그간의 개고생으로 노는 데 한이 맺힌 것뿐이었으나 굳이 그런 걸 따질 만큼 서운은 그다지 냉철하지 못하다. 비교적 냉철한 이성을 가지긴 했는데 그걸 배반하는 즉흥적인 양면성도 가졌다.

뭐가 됐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서운은 그동안 의식적으로 기대감을 억누르려 애썼다. 인천공항 라운지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미 그른 것 같긴 하지만 분명히 노력은 했다. 그 노력, 북태평양으로 둘러싸인 해안 도로에서 깨끗하게 날려 먹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서운의 신남이 최고점을 찍었다. 국적기 일등석을 타고 여행을 왔는데 자동차는 문이 위로 열리고 호텔 방은 오션뷰를 겸비한 스위트룸이다.

미쳤다. 이건 미쳤어! 서운은 의진과 호텔 직원을 버려둔 채 창가로 걸어갔다. 유리창이 있다는 걸 잊어버릴 만큼 투명하고 깨끗한 하늘이,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와씨, 어떡하지? 너무 신나는데? 방이 워낙 넓어서 직원이 나가는 소리도 안 들렸다. 비로소 의진과 둘만 있게 되자 미약하게 남아 있던 경계심이 깨끗하게 날아갔다. 서운이 외쳤다.

“바다예요!”

“네. 바다입니다. 정확히는 북태평양입니다. 해변 이름은….”

인공지능이라서 그런가. 켠 적도 없는데 지 멋대로 켜져 있고 난리다. 서운은 알아서 스위치를 껐다.

“우리 진짜 여기서 묵어요? 한국 갈 때까지?”

“그렇습니다. 혹시 호텔이 마음에 안 드시면 언제든지….”

“마음에 안 들어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와, 어떡하지. 너무 좋다, 진짜.”

서운은 솔직하되 솔직하지 않다. 뭐든 적당히, 딱 필요한 만큼만 솔직하다. 마냥 어리지 않은 나이 탓도 있지만 기본 성정 자체가 그렇다. 성장 배경 때문일 수도 있고, 가정 환경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서운도 이런 스스로가 낯설었다. 내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역시 돈이 최고다. 쇼 미 더 머니! 자본주의 만세! 덕분에 서운은 이 모든 걸 돈의 노고로 돌리고 만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처사였다. 이 사람 때문이야, 따위의 로맨틱한 감상에 빠지기에는 두 사람은 이제 겨우 다섯 번 봤다. 일단 결혼은 했으니 법적 남편이긴 한데…. 글쎄, 결혼을 했다는 건 이혼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니 안심하기엔 이르다. 게다가 혼인 신고도 안 했다. 아니지. 결혼식은 올렸으니 이 정도면 사실혼인가.

의식의 흐름은 냉철하기 짝이 없는데 당장 너무 신이 난다. 서운은 창밖의 풍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 장관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데 유리창이 너무 넓어서 렌즈에 다 담기지 않는다. 서운은 요리조리 자세를 바꿔 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어 댔다.

찰칵! 찰칵! 찰칵! 조용한 호텔 방에 셔터 소리가 요란했다. 가뜩이나 혼자만 신나 있었는데 카메라 촬영음까지 더해지니 이보다 더 민망할 수가 없다.

“서운 씨.”

혼자 민망해하고 있던 차에 이름이 불려서 깜짝 놀랐다. 언제 다가온 건지 바로 뒤에 의진이 와 있었다. 아, 아니구나. 내가 온 거구나. 전체 샷을 찍겠답시고 열심히 뒷걸음질 친 결과다.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당연히 괜찮죠. 뭔데요?”

차고 넘치는 게 시간이다. 남은 6박 8일 동안 서운은 눈앞의 알파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 사실이 못내 어색해서 서운은 대답과 동시에 의진과 거리를 두고 섰다. 딱 그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멀어졌다. 의진이 말했다.

“기간은 어느 정도가 좋으십니까?”

“네? 무슨 기간요?”

“아닙니다. 서운 씨가 원하시는 만큼 머물다 오시는 걸로 하죠. 한국과는 시차가 있으니 필요하신 게 있으면 박 상무에게 연락하시면 됩니다.”

“어? 진짜? 진짜 그래도 돼요?”

“네. 됩니다.”

“어, 근데… 의진 씨 바쁘지 않아요? 너무 무리하는 거면….”

내가 도대체 뭘 들은 거지. 머릿속에 지폐 다발이 날아다녔다. 이게 진짜 가능한 일이었어? 전례 없는 돈지랄에 냉철한 이성 세포가 한 아름 죽어 나갔다. 이 결혼 존나 찬성일세! 죽어 나간 이성 세포를 짓밟으며 누군가 외쳤다.

“전 상관없습니다. 서운 씨 편하신 대로 하시죠.”

“그래도… 무리 안 해도 되는데….”

“무리하는 거 아닙니다. 저는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 있을 테니 천천히 오시죠. 귀국일만 미리 알려 주시면 됩니다. 항공편에 맞춰 기사를 대기시켜 놓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네가 그렇지. 내가 대체 무슨 기대를 한 거야. 화도 안 난다. 그냥 어이가 없다. 속된 말로 얼탱이가 없다. 개소리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할 수 있다니, 역시 배움에는 끝이 없다. 서운은 이렇게 또 하나 배웠다.

“아, 네. 알겠어요. 생각해 볼게요.”

“호텔을 옮기고 싶으시면 옮기시면 됩니다.”

“아, 네.”

“다른 차를 타 보는 건 어떠십니까? 다음 차도 오픈카로 준비할까요?”

“네, 뭐.”

“알겠습니다. 박 상무에게 연락해 놓겠습니다.”

어떡하냐 진짜. 인공지능 성능이 너무 좋다. “아니. 하지 마요. 좀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할게요.” 서운은 침착하게 의진을 타일렀다. 상무님과 막내 직원의 평온한 퇴근길을 망치고 싶지 않다.

“말씀만 하시면 바로….”

“괜찮아요.”

“박 상무 연락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서운 씨가 원하실 때 얼마든지….”

“괜찮다니까? 지니야, 그만해. 멈춰. 진정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결론에 다다를 수 있는지 여전히 이해는 가지 않지만 말은 잘 들으니 됐다. 서운이 빠르게 화제 전환에 나섰다.

“일단 짐 정리부터 하죠.”

“알겠습니다. 다 되면 응접실에서 뵙죠.”

“콜. 이따 봐요.”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캐리어를 끌고 흩어졌다. 서운은 침실로 향했고, 의진은 서재로 향했다. 서재? 스위트룸에 서재가 있어? 서운은 침실로 가다 말고 도로 돌아 나와 의진을 쫓았다. 차마 대놓고 집적거리지는 못하고 멀찍이서 기웃거리기만 했다.

서재는 외국의 작은 고서점처럼 꾸며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분위기였는데, 방 한가운데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회장님 의자도 보였다. 책장 곳곳에 책도 꽂혀 있었다. 당연히 전부 외국책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한국어로 된 책들이 섞여 있다. 웬 한국어책이지. 궁금하다. 궁금한데 의진은 열심히 짐만 풀고 있다. 노트북부터 태블릿 피시, 세 대의 휴대폰이 금세 책상을 채워 나갔다. 저러다 일까지 할 기세다.

“와, 서재가 있네?”

결국 서운이 먼저 알은척을 했다. 누가 들어도 연기하는 티가 팍팍 났지만 다행히 상대는 의진이다. 어차피 쟨 모른다.

“둘러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돼요?”

“원하신다면.”

흔쾌히 허락받았다. 예상했던 바라 놀랍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의진은 늘 서운에게 호의적이다. 받아들이는 포인트가 조금 남달라서 그렇지 부정적인 언사는 들어 본 적 없다. 그러게. 정말 그러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의진이 달리 보인다. 서운은 자연스럽게 책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연기했다.

“한국어책이 있네요?”

“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꽤 유명한… 어, 이거….”

그럴 거라 생각은 했는데 새 책이 아니다. 심지어 너덜너덜하다.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사람 손을 탄 기색이 역력하다. 개중에는 대학 교재로 보이는 책들도 있었다. 이거 설마…. 의진이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 책들입니다. 모두 학부 때 보던 책들입니다.”

“이걸 다 어떻게 들고 왔어요? 안 무거웠어요?”

“확실히 무겁더군요. 그래서 아예 서재에 갖다 놓았습니다. 자주 보던 책들만 추려서요.”

“…여기 호텔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런데…?”

“하와이 지사에 올 때마다 이 방에서 지냈습니다. 학부 때부터 왔으니 제법 오래됐군요.”

다르다. 차원이 다르다. 왜냐고 물어볼 필요도, 더 궁금한 것도 없다. 아, 그렇구나…. 그걸로 대화는 끝이 났다. 서운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홀로 침실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서운을 들뜨게 만들었던 커다란 침대도, 고풍스러운 침실 인테리어도 모두 그대로인데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진다.

침실 안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저 혼자 내팽개쳐진 서운의 캐리어가 보인다. 해변에서 신을 쪼리부터 수영복, 파인애플 튜브 따위로 빵빵하게 들어차 있는 서운의 캐리어와 달리 의진의 캐리어는 간소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짐을 서재에 푸는 것만 봐도 그랬다. 짐을 풀자는 말에 제일 먼저 전자 기기부터 꺼내던 그다. 이래서야 신혼여행인지 해외 출장인지 헷갈릴 정도다.

서운은 하와이가 처음이고 국적기 일등석을 타 본 것도 처음이다. 이런 호텔에 와 본 것도, 스위트룸에 묵어 보는 것도 다 지금이 처음이다. 서운이 저답지 않게 잔뜩 들떠 호텔 방 사진을 찍어 댈 때 의진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 문이 올라가는 자동차를 발견하고 신기해할 때는 또 어떻고.

와, 진짜 바보처럼 보였겠다. 여기에 기내식 얘기까지 했으면 정말 부끄러울 뻔했다. 서운은 묵묵히 짐 정리를 했다. 캐리어가 말끔하게 비워지자 마음도 한결 정리되었다.

“정리는 다 끝내셨습니까?”

“네.”

서운이 짐 정리를 마쳤을 때 의진은 일찌감치 응접실에 나와 있었다. 정확히는 응접실에서 태블릿 피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상 노는 게 아니라는 건 누가 봐도 알겠다. 의진이 태블릿 피시에서 손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피곤하실 텐데 조금 쉬었다가 식사하러 가시겠습니까?”

기내식도 못 먹고 비행시간을 내리 굶었다. 사실은 당장 배부터 채우고 싶었다. 그랬는데, 저렇게 말하니까 별로 먹고 싶지가 않다. 바빠 보이기도 하고. 어쨌든 서운은 순순히 의진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래요, 그럼.”

“6시 30분 어떠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네.”

“그럼 이따 뵙죠. 이번에도 응접실에서 뵙겠습니다.”

의진이 다시 서재로 돌아가자 서운은 혼자 응접실에 남겨졌다. 텅 빈 응접실에 혼자 서 있으려니 다시금 배가 고파 온다. 아, 그렇구나. 밥이 먹기 싫은 게 아니라 쟤랑 같이 먹기 싫은 거였어. 이 기분으로는 뭘 먹어도 마음만 불편할 테다.

혼자가 된 서운은 즐거운 마음으로 본격 호텔 방 탐방에 나섰다. 의진이 있어서 보지 못했던 방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서재 빼고 다 들어가 봤다.)

방 등급별로 웰컴 푸드도 다른 건지 가짓수가 엄청나다. 서운은 웰컴 푸드를 먹으며 6시 30분까지 휴대폰 게임을 했다. 그냥 시간이나 죽이려고 시작한 건데 하다 보니 엄청나게 집중해 버렸다. 어느 정도였냐면 의진이 와 있는 것도 몰랐다.

“깜짝이야. 기다렸어요? 말을 하지.”

“아닙니다. 집중하시는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걸로 배려해 주지 말라고. 뷰티 셀카에 이어 휴대폰 게임까지, 어째 일관성이 없진 않다.

서운은 휴대폰 게임을 마무리하고는 의진과 함께 호텔을 나왔다. 아는 곳이 있다며 그곳으로 가도 되냐고 묻기에 그러자 했다. 어디가 됐든 비싸고 좋은 곳이겠지. 맛이 없어도 눈 호강은 할 테다. 서운은 군말 없이 의진의 리드를 받았다. 여러모로 여행 일정 안 짜길 잘했다,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 가며 하와이 맛집을 알아봤으면 도리어 우스운 꼴만 날 뻔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이대로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노을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에 숨이 다 막혔다. 해가 저물어도 바람은 여전히 따뜻했고, 줄곧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었더니 오히려 딱 좋았다.

자연보다 더한 창조물은 없다. 이 풍경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하와이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은데 옆에 앉은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미지수다. 모르긴 몰라도 의진에게는 이조차 흔한 일상이 아닐까. 서운은 혼자 조용히 마음을 삭였다. 아름다운 석양을 앞에 두고도 저 혼자 속으로만 감상해야 했다.

“이제 곧 도착합니다.”

“아, 네.”

“석양이 잘 보이는 자리로 예약해 놨습니다.”

“오….”

서운이 영혼 없이 대답했다. 조금씩 속력이 줄어들고, 멀리서 레스토랑으로 보이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레스토랑이 가까워질 때쯤 의진이 말했다.

“서운 씨가 좋아하시면 좋겠군요.”

…어….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의진을 쳐다보았다. 의진은 양손으로 핸들을 움켜쥔 채 앞만 보고 있었다.

“사실 저도 처음 가 보는 곳이라 맛이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조금 의외다. 당연히 제가 자주 가던 곳으로 데려갈 줄 알았는데. “괜찮아요. 맛있겠죠.” 이번에는 조금 더 영혼을 담아 대답하자 의진이 진지하게 대꾸해 왔다.

“첫 식사 자리이니 확실한 곳으로 모시는 것이 맞으나 레스토랑은 제가 가 본 곳이 없어서 추천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뭐 어때요. 나 지금 배고파서 다 맛있을 거예요. 괜찮아요.”

“배가 고프셨습니까?”

“…뭐, 그냥 좀? 의진 씨는 레스토랑은 왜 안 가 봤어요?”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흘려 넘기고 역으로 질문을 던진다. 몸에 배어 있는 사회생활 처세술이 알아서 서운을 방어하고 나니, 그러고 나니 불쑥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아, 이거 너무 캐묻는 것 같았나.

그치만 이상하잖아. 호텔 스위트룸에 자기 짐을 가져다 놨을 정도로 자주 오면서 레스토랑은 왜? 다행히 의진은 불쾌한 기색 없이 선뜻 대답을 내놓았다.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필요성? 뭔 필요성?”

“레스토랑까지 가야 할 필요성 말입니다. 이동은 물론이고 음식이 나오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니까요. 여러모로 비효율적입니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의구심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두 사람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미리 언질을 받은 건지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한껏 두 사람을 반겨 주었다.

바다 냄새는 물론이고 돈 냄새가 풀풀 나는 외관이다. 주변 경치만 봐도 벌써 가격대를 알 것 같은데 내부로 들어오니 안은 더 잘 꾸며 놨다. 아니, 샹들리에가 저렇게 클 일이야…? 무서워서 밥이 넘어갈까 싶다.

바다를 닮은 이국적인 눈동자의 지배인이 두 사람을 자리로 안내했다. 과연 의진의 말대로 석양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였다. 와! 서운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무리 맛없는 음식이 나와도 기꺼이 돈을 내고 싶어지는 풍경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안 들 리가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하와이 지사 직원들의 87%가 이곳을 추천하더군요.”

그건 추천이 아니라 설문 조사 같은데. 어쩐지 박 상무와 하와이 지사 직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서운은 그대로 의진을 쳐다보다가 마저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럼 오늘 여기 온 것도 비효율적인 거 아니에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서운 씨가 식사를 하셔야 하니까요.”

“의진 씨는 그동안 어떻게 했는데요?”

“식사 말씀이십니까?”

“네.”

“룸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하와이는 학부 때부터 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습니다. 그때 막 경영을 배우기 시작한지라 시간이 없었습니다. 살면서 가장 바쁜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서운의 뒷말은 빠르게 준비된 애피타이저에 파묻혔다. 무슨 음식이 이렇게 예쁜지 애피타이저가 아니라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유리 세공 같다. 배가 고픈 것도 고픈 건데 무슨 맛이 날지 궁금해서라도 먹어 보고 싶어진다. 서운은 제가 하려던 말도 잊고서 냉큼 애피타이저를 퍼 올렸다.

“하와이가 이렇게 아름다웠군요.”

의진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림같이 아름다운 애피타이저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서운이 홀로 감탄하던 하와이의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서운은 이제 막 애피타이저를 입에 넣은 참이었다. 의진과 시선을 마주하는 서운의 한쪽 볼이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의진의 시선이 느리게 서운을 훑었다.

이상하지. 갑자기 갈증이 났다. 마침 서운의 자리에만 얼음물이 마련되어 있었다. 얼음물, 그러고 보니 처음 의진을 만났을 때도 얼음물을 마셨다. 냉수로는 부족해서 부러 직접 주문했었다. 나중에는 얼음물도 부족해서 얼음을 꺼내 먹었던 것 같다.

“서운 씨가 아니었으면 평생 모를 뻔했습니다.”

갑자기 왜 그때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지금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기가 어려워 서운은 컵 안의 얼음으로 시선을 내렸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도 많네요. 서운이 작게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의진이 대답했다. 최고의 저녁 식사였다.

* * *

그래서였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서운은 의진에게 해변에서의 밤 산책을 제안한다. 나름의 데이트 신청이었다. 태연한 척 굴었지만 우습게도 조금 긴장했다. 신혼여행까지 온 마당에 겨우 이 정도로 긴장할 게 뭐가 있겠냐마는 그러기에는 서운이 지나치게 어른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이 거절당할 수 있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적당히 도망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이든 무언가와 정면으로 맞서 싸울 열정도, 조금이라도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는 상처를 감내할 용기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지금도 그렇다. 허울 좋은 말로 그럴싸하게 포장해 봤자 사실 다 핑계다. 그냥 쪽팔려서 그랬다. 일전에 까인 전적이 있는지라 두 번 연속은 사양하고 싶다. 그럼에도 먼저 산책을 제안한 건 지금이라면 거절당해도 그렇게까지 기분 더러울 것 같진 않아서. 결국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었다는 소리다.

다시 생각해도 지난번의 거절은 황당하기만 하다. 한 번 봤는데 대뜸 결혼을 하자기에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더니 바빠서 안 된다며 서운을 깠다. 개새끼. 근데 그날 만나서 잤다. 그러네. 황당하네. 아무래도 제일 황당한 건 서운 본인인 것 같기도 하고.

다행히도 이번에는 의진이 데이트 신청을 수락했다. 다만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 같다.

“좋습니다. 식사 후 가벼운 운동은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만들어 줍니다.”

“아, 네.”

“꾸준한 운동은 혈액 순환에도 도움이 됩니다.”

“뭐, 그거야….”

“산책 시간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십니까?”

응, 아니야. 거기까지. 기껏 밥 잘 먹고 나니 슬슬 오작동의 기미가 보인다.

“글쎄요. 파트너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을까?”

“파트너의 능력이라 하면….”

“재미있으면 오래 있고 싶겠죠.”

“…….”

“재미없으면 뭐… 휴대폰 게임이나 해야지. 의진 씨는 일하면 되겠네.”

약간의 대화와 맛있었던 저녁 식사가 의진과의 거리감을 모호하게 만든다. 여기에 규칙적인 파도 소리와 이국적인 공기까지 더해지니 저 혼자 세워 놓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아, 너무 친한 척했나. 슬쩍 의진을 살피니 차에서 내리고 있을 뿐인데 어느 때보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정도 친한 척은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고추만 크고 속은 안 넓은 모양이다. 그래, 뭐. 그러면 고추만 큰 걸로. 서운은 눈치껏 알아서 방향을 틀었다.

“장난이에요. 바쁘면 그냥 올라갑시다. 호텔 미니바에 있는 거 먹어도 돼요?”

“원하시는 만큼 드시면 됩니다. 혹시 벌써 재미가 없으신 겁니까?”

“아예 없진 않고 좀 신기하긴 해요. 근데 뭐가요?”

가끔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긴 한데 막상 대화에 지장은 없는 걸 보면 새삼스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내가 제일 이상한 건지도 몰라. 혼란스러웠다.

서운 씨, 의진이 알아서 호텔로 향하는 서운을 불러 세웠다.

“확실히 그동안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습니다.”

본인 얘기구나. 단번에 알아들었다. 분위기만 봐서는 고해성사가 따로 없는데 놀랍게도 하나도 안 놀랐다. …놀란 척이라도 해 줘야 하나. 서운은 잠시 갈등했다.

“없지만….”

“없지만?”

“…아직 해변에 가지 않았으니 무효입니다.”

“오?”

뭐지. 인공지능의 진화인가.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서운이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서자 의진의 얼굴이 한층 심각해진다. 끼긱, 끼기긱, 어디선가 부품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당연히 개소리다. 역시, 제일 이상한 건 나인지도 모르겠다. 서운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눈앞의 알파가 처음으로 귀엽게 느껴졌다.

“해변으로 장소를 옮겨서 제대로 시작하시죠.”

“오오.”

“다만 제게 익숙지 않은 분야라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30분 정도 시간 괜찮으십니까?”

“와, 의진 씨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서운이 대뜸 언성을 높였다. 놀랐는지 의진의 눈썹이 작게 요동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인 서운이 엄하게 호통쳤다.

“사람이 왜 이렇게 통이 작아요. 한 300분은 불러야지.”

“그게 무슨 말씀입….”

“뭐 해요. 산책 안 해?”

말과 행동이 다르니 동기화가 안 되는 모양이다. 서운이 앞장서서 의진에게 손짓했다. 그런 서운을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던 의진이 뒤늦게 서운을 뒤따랐다. 어둠을 머금고 찬란하게 빛나는 밤의 북태평양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는 신으나 마나인 얇은 여름용 스니커즈 밑으로 단단하게 압축된 부드러운 모래 알갱이가 밟힌다. 주위는 온통 파도 소리로 가득했다. 철썩철썩,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배부른 마음이 덩달아 함께 일렁인다.

발등으로 넘쳐흐르는 모래의 감촉도 전혀 불쾌하지 않다. 당장이라도 신발을 벗어 던지고 맨발로 해변을 거닐고 싶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아직 그 정도로 편한 사이는 아니니까. 그렇지만 결혼은 했다. 뭔데, 이거.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서운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재미있으십니까?”

얜 또 뭐야. “아니요, 전혀.” 서운이 빠르게 반박했다. 기분 탓인가, 의진의 눈썹이 살짝 밑으로 처졌다.

“어렵군요.”

“뭐가요? 재미있게 하는 게?”

“네, 그렇습니다. 괜찮으시면 서운 씨께서 알려 주시겠습니까? 서운 씨가 알려 주신 대로 하겠습니다.”

특별히 이상한 소리를 한 건 아닌데 어쩐지 찝찝하다. 서운에 대한 배려가 넘치는 것 같다가도 정작 제일 중요한 나사가 빠져 있는 것 같다.

알려 주는 대로 하겠다니, 다시 생각해 봐도 듣기 나쁜 답변은 아니지만 마냥 좋지만도 않다. 서운은 잠시 고민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릴지, 진지하게 곱씹을지를 고민하다가 적당한 온도의 답변을 내놓았다.

“알려 주긴 뭘 알려 줘요. 그냥 편하게 걸어요. 억지로 뭐 안 해도 돼요.”

“억지로 하는 거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고. 부담 갖지 말고 친구랑 걷는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서운 씨는 친구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네.”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친구 사이가 아니니까요.”

그렇지. 친구는 아니긴 한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진의 확고한 태도에 조금 안심했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 제대로 알고 있구나 싶어서, 적어도 자각은 하고 있구나 하는 소박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저희는 부부입니다.”

우습다. 고작 이런 거에 안도하는 사이라니. 그런데 결혼은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사이인가 싶지만 분명한 건 나쁜 기분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 좀, 너무 소박한가? 정말 이래도 되나? 서운은 대답 대신 괜스레 톡톡 모래를 건드렸다. 그 가벼운 발 장난에 해변의 모래가 부서졌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쏴아아.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 자락이 침묵을 메꿔 주었다. 그런 서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의진이 돌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서운이 말릴 틈도 없었다.

“서운 씨도 부담 갖지 마십시오.”

커다란 손이 서운의 발치 앞에 모래를 가득 쌓아 올린다. 요령 없이 무작정 높게 쌓아 올리던 모래성은 서운의 발이 멈춰 있는데도 저 혼자 금방 무너졌다 다시 쌓이기를 반복했다.

“저는 처음 해 보는 일에는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립니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의진은 두 번째 만남에서도 서운에게 비슷한 말을 했다. 다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까 역시 이상하다. 두 번이나 들었더니 이번에는 더 이상하게 들린다.

“대신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에 해당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니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가르쳐 주십시오.”

의진의 등 뒤로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검푸른 수평선이 보인다. 완전히 어둠에 잠겨 든, 그러나 단 한 번도 본연의 모습을 잃어 본 적 없는 푸른 물결이 서운을 향해 밀려온다. 끝도 없이 영원처럼 밀려온다. 서운은 멍하게 의진을, 그 뒤로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의진은 여전히 모래사장에 무릎을 꿇고 있어서 흡사 프러포즈라도 하는 것 같다.

서운을 올려다보는 흔들림 없는 두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서운이 물었다.

“뭐든지?”

“네, 그렇습니다. 뭐든 상관없습니다. 서운 씨가 원하시는 걸 말씀해 주십시오. 서운 씨가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어느새 서운의 발밑으로 어엿한 모래성 하나가 세워졌다. 작지만 단단하게 모습을 갖춘 조그만 모래성이 더 이상 무너지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게 뭐야.”

“무엇이 말입니까?”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같이 하나씩 맞춰 나가면 되지.”

“그런 겁니까?”

“응. 그런 거예요.”

서운도 의진을 따라 자세를 낮췄다. 시야가 낮아지니 한없이 작아 보였던 모래성이 새삼 커 보인다.

“…그래도 됩니까?”

비행기 안에서 내내 태블릿 피시를 쥐고 있던 커다란 손은 모래투성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서운도 손바닥 가득 모래를 퍼 올려 의진의 모래성에 제 손길을 보탰다.

“그래도 돼요.”

“그렇군요.”

생각해 보니 이렇게 맨손으로 모래를 만져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대학생 때야 엠티를 핑계 삼아 잘도 돌아다녔지만, 사회인이 된 후에는 생각보다 기회가 별로 없었다. 보통 남들 놀 때 같이 휴가를 쓰다 보니 사람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하게 됐고, 프리랜서가 됐을 땐 수입이 안정될 때까지 미친 듯이 일에만 매달렸다.

“결혼이란 참 신기하군요.”

서운이 합세하자 모래성의 너비가 한층 늘어났다. “뭐가요?” 서운이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물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흩어지는 감촉이 재미있어서 자꾸만 모래성을 증축하게 된다. 의진이 서운을 따라 모래성을 토닥거리며 신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 함께 맞춰 갈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게 왜? 어, 거기 파였다. 너무 세게 하지 마요. 힘 빼고 살살 토닥여 봐.”

“집단의 일원으로서 개인에게 주어진 할당량을 생각하면 더 뛰어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편이 더 효율적이니까요. 이렇게 말입니까?”

뭐라는 거야. 누가 사업가 아니랄까 봐 모래성 만들다 말고 효율 운운하고 있다. 아니지, 정말로 효율을 따지는 사람이었으면 나랑 결혼은 안 했을 테니 마냥 그런 건 또 아닌가. 덕분에 서운만 혼란스러워졌다.

“웬 효율. 누가 들으면 합병이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합병을 원하는 회사가 있으신 겁니까?”

아니, 그럴 리가. 보통은 없을 거란다. 서운이 모래성을 다독이며 말했다.

“나 말고 의진 씨 말이에요. 결혼 얘기하다가 갑자기 웬 효율이야. 일 얘기 하는 줄 알았잖아요.”

“그렇습니까. 주의하겠습니다.”

대답조차 한없이 사무적이다. 이것만 들으면 남편이 아니라 부하 직원이 따로 없다. 의진의 가족을 생각하면 왜 의진 혼자 결을 달리하는지 도대체가 모를 일이다.

“와, 엄청 뚱뚱해졌다. 그쵸.”

“그렇군요.”

“…더 크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좀 욕심나는데?”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의진에 대한 의문은 파도 자락 사이에 넣어 두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모래성을 만들었다. 모래성도 둘이 같이 만드니 확실히 속도가 붙는다. 오랜만에 하는 모래 장난에 서운은 다리가 저린 것도 잊고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로 옆에서 어느 커플의 낭만적인 프러포즈 현장이 실시간으로 펼쳐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제야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신혼여행의 성지라는 표현이 괜히 만들어진 건 아닌 듯 사방이 커플 천지다.

부부인지 단순한 연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와는 다르게 다들 사랑하는 사이일 테다. 당연히 그렇겠지. 서운과 의진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한 연인의 프러포즈 현장을 지켜보았다. 파도 소리가 시끄러워서 말소리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무릎을 꿇고 제 연인을 올려다보는 사랑에 빠진 눈빛이 모든 설명을 대신했다.

…Yes!

마침내 울먹이는 목소리가 사랑을 담아 ‘Yes’를 외쳤다. 짝짝짝! 지나가던 이들이 제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의 박수를 보탰다. 서운도 함께 손뼉을 쳤다. 서운이 치자 의진도 따라 쳤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될까. 프러포즈의 여운에 잠겨 달콤한 립 키스를 주고받는 연인들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하고 싶으십니까?”

“뭐가요?”

“혹시 키스가 하고 싶으신 거냐고 물었습니다.”

뭐 이 새끼야? 너무 당황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서운이 잘못 들었다고 하기에는 의진의 개소리가 지나치게 선명하다.

“키스가 하고 싶으신 거면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전 괜찮습니다.”

“뭔 개소, 아니, 뭔데 이거?”

“키스하는 커플을 보고 계셨잖습니까.”

“그래서요.”

“전 괜찮으니 키스가 하고 싶어지시면 편하게 말씀 주십시오. 저희도 할 수 있으니 부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운은 분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의진에게 이런 오해를 받았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분노했다. 물론 가장 열받는 건 따로 있다.

“왜 내가 하고 싶으면, 인데! 의진 씨가 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저는 키스하는 커플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뭐가 됐든 곳곳에서 사랑을 맹세하는 연인들의 속삭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두 사람의 밤 산책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마지막에 조금 삐끗하긴 했지만 이만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데이트였다.

“지금 뭐 해요?”

호텔로 돌아온 의진이 서재로 향하기 전까지는 그런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하다. 황당해하는 서운을 뒤로한 채 의진이 멀끔한 얼굴로 개소리를 했다.

“밀린 업무를 보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오전을 통으로 날리는 바람에 일정이 뒤로 밀려났습니다.”

이대로 혼인 신고 날려 버리기 전에 날렸다는 소리 그만해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한 번은 참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는 지켜보기로 했다. 서운이 제 입으로 결혼은 둘이 같이 맞춰 가는 거라던 기특한 소리를 지껄인 게 불과 1시간 전이다. 비록 결혼은 했지만 서운은 의진을 잘 모르고, 의진 역시 서운을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였다. 서운은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의진이 정말로 결혼 생활보다 일을 더 중요시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지금이 특별하게 바쁜 건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알 수 있을 테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닌데도 어쩐지 울화통이 치민다. 보란 듯이 마사지도 받고 오고 혼자 거품 목욕도 하고 휴대폰 게임까지 했는데 의진은 쭉 일을 하고 있다. 진짜 일만 했다. 존나 했다.

이게 무슨 신혼여행이야! 열은 열대로 받는데 돈맛을 본 몸은 정직하게 늘어진다. 서운은 누구보다 마사지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의진의 돈으로 받은 마사지는 정말 좋았다. 처음으로 가격 생각 안 하고 미니바를 이용한 경험도 짜릿했고, 호텔은 말할 것도 없이 좋다. 저녁 식사도 맛있었다. 밤 산책과 모래성 만들기도 즐거웠다. 마사지를 받아 매끈해진 손바닥 아래에는 의진과 만들었던 모래성의 감촉이 아직 선명하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침대에 늘어져 있는 서운의 가슴속에서 잊고 있던 돌멩이 하나가 부지런히 소음을 내며 굴러다닌다. 그도 그럴 게 이제 곧 잘 시간이 되어 가는데도 의진은 서재에 처박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서운이 혼자 마사지를 받으러 가든 미니바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든 의진은 상관도 하지 않았다. 신혼여행까지 와서 혼자 마사지를 받고 나 홀로 거품 목욕을 하는 남편은 아마 서운밖에 없을 테다.

원래 재벌은 다 이런가. 이래서야 없던 편견도 생겨날 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한없이 울컥하다가도 식당에서 석양을 바라보던 의진과 친히 모래를 쌓아 주던 의진을 생각하면 저절로 마음이 관대해지기를 반복한다.

아, 이게 뭔데 진짜. 서운은 고민 끝에 침실을 나왔다. 불이 켜진 서재를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미니바로 향했다. 머리 쓰면 배고프니까, 서운은 미니바에서 의진에게 줄 간단한 스낵과 병맥주를 챙겼다.

의진이 신혼여행까지 와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테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빈손으로 서재를 방문했다. 들고 갔다가 거절당하면 민망하니까, 일단은 여기에 놓고 분위기 봐서 다시 갖다주면 될 테다.

서운이 용기 내어 의진의 서재를 두드렸을 때 의진은 여전히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남들보다 배는 바빠 보이건만 의진은 인생에서 가장 바빴던 시기를 학부 때로 뽑았다. 밖에서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빴다는 건가. 무슨 놈의 인생이 그럴 수가 있는지 감히 상상도 안 된다.

“의진 씨, 바빠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 것 같잖아. 말문이 막힌 서운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뇨, 일은 없는데….”

“그렇습니까.”

“…음, 아직 많이 남았어요?”

“줄곧 자리를 비웠더니 처리해야 할 일이 많군요.”

“…아.”

“아직 안 주무셨습니까. 주무시는 줄 알았습니다.”

기분 탓인가. 어쩐지 쫓아내는 것 같다. 자존심도 상하고 재수도 없고. 좀, 그렇다. 서운은 모난 마음에 의진에게 돌멩이를 던졌다.

“안 그래도 그만 자려고요.”

“그렇습니까. 오늘 하루 고생 많으셨습니다. 좋은 꿈 꾸십시오.”

야 이 시발 놈아. 노곤노곤하게 풀어진 몸이 가까스로 쌍욕을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을 막아 냈다. 돈으로 사람의 마음은 살 수 없어도 관대함은 살 수 있는 걸 보니 돈이 좋긴 좋다.

서운의 원래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서운은 의진에게 휴식을 권하러 왔다. 많이 바쁠 테니 가볍게 맥주나 한잔하면서 좀 더 서로에 대해 알아 가고 싶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진의 책상은 저 혼자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노트북과 태블릿 피시, 휴대폰 세 대에 이어 이제는 각종 종이 뭉치까지 추가되었다. 와, 보기만 해도 지치네. 서운은 서류 더미 속에 파묻힌 의진을 바라보다가 이 이상 무언가 시도하기를 멈췄다. 첫날밤에 남편을 혼자 재우려는 놈이다. 저런 놈한테 무슨 말을 해 봤자 에너지 낭비다.

“…설마 안 잘 건 아니죠?”

그래도 꼴에 남편이라고 걱정이 되는 걸 보니 정이 무섭구나 싶다. 이래서 못생긴 놈한테 빠지면 답이 없다고 하는구나. 하긴, 못생겼는데 정들어 봐. 진짜 답이 없다.

“아.”

“네?”

“죄송합니다.”

“…혹시 내가 무슨 소리 했어요?”

설마 제가 그쪽보고 시발놈이라고 했나요? 그렇게 묻지는 못하고 애매하게 돌려 물었다.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의진이 곧바로 사과를 해 왔다. 헐. 진짜 했나 봐. 서운은 당황했다.

“급한 건 45분이면 마무리됩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뭐 그럼 다행인데…. 그냥 의진 씨 안 잘까 봐….”

“아닙니다.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막상 또 저렇게 순순히 사과를 해 오니 여러모로 할 말이 없어진다. 감히 확신할 순 없지만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어질 만큼 진중함이 넘쳐흐르는 사과였다.

그래, 뭐. 내일이면 이혼 브리핑도 할 테니까 뭐든 성급하게 단정 짓지 말자. 서운은 거듭 사과를 해 오는 의진을 뒤로한 채 홀로 침실로 향했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충분한 고민 끝에 이루어져야 하는 법이다.

침구에서 나는 깨끗한 냄새가, 부드럽게 전신에 감겨드는 포근한 촉감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진짜 며칠 더 있다 갈까? 서운은 그런 고민을 하며 설핏 잠이 들었다.

“…응… 뭐야….”

“일어나셨습니까.”

주변이 산만해서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앞에서는 커다란 무언가가 흐릿한 시야를 어지럽히고,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발등에는 자꾸만 물방울이 튄다. 의진이었다. 언뜻 봐도 급하게 씻고 나온 기색이 역력했다. 벌써 45분이나 됐나 보네. 방해꾼의 정체를 확인한 서운이 다시 이불 속을 파고 들어갔다.

“…거기서 뭐 해요?”

네가 왜 거기 있어…? 샤워 가운만 입은 의진이 물기를 머금고 제 몸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을 테다.

차갑다. 잠이 덜 깬 서운의 뺨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머리도 제대로 못 말리고 나왔나 보다. 45분 좀 어기면 어때서.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서운이 미약하게 인상을 쓰며 옆으로 누워 있던 몸을 똑바로 했다.

서운의 위에 올라타 있는 의진과 똑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의진의 얼굴에 그림자가 져 있다. 침실 밖에서 흘러들어 오는 희미한 서재 불빛이 선명한 이목구비 아래 짙은 음영을 남겼다.

“45분입니다.”

“아, 그래요. 그래서요?”

“이제 잘 시간입니다.”

“아, 네. 주무세요.”

…어? 잠깐만. 무언가를 감지한 서운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네, 알겠습니다.” 의진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서운 씨.”

“네, 네?”

“옷을 벗겨도 되겠습니까?”

환장하겠네. 잠이 확 깬다. 자다 말고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다. 서운이 끔뻑끔뻑 의진을 올려다보았다. 벌어진 샤워 가운 사이로 탄탄한 가슴 근육이 보인다. 살짝 물기가 맺혀 있어서 더 탐스러워 보인다. 아씨, 잘생겼어. 서운의 무의식이 말했다. 존나 잘생겼어. 섹시해! 잠도 덜 깬 주제에 무의식만큼은 세상 시끄러웠다.

“…완전요.”

에라, 모르겠다. 서운이 스스로 이불을 젖혔다. 일단 할 건 하고 생각하자. 두 사람의 역사적인 첫날밤이었다.

“옷을 다 입고 계셨군요.”

그러는 의진은 서운의 위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밖에서 흘러들어 오는 희미한 응접실 불빛에 의지해 의진의 가슴 근육을 훔쳐보던 서운이 화들짝 놀라 대꾸했다.

“그럼 의진 씨는 잘 때 다 벗고 자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서운이 저답지 않게 수줍어하며 얼굴을 붉혔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다 벗은 게 더 좋습니다.”

“어휴, 그럼요. 그 마음 잃지 않았으면….”

“서운 씨는 왜 다 입고 계십니까?”

전 또 왜 걸고넘어지죠. 의진은 제 할 말을 마치고는 일일이 서운의 잠옷 단추를 풀고 있었다. 혼자 있을 때야 목 늘어난 티셔츠가 곧 잠옷이지만 꼴에 신혼여행이라 신경 써서 챙겨 온 잠옷이었다. 이렇게 걸리적거릴 줄 알았으면 티셔츠로 가져올 걸 그랬다. 벗기기 쉬우라고.

“어차피 곧 벗을 텐데요. 서운 씨께서 그러셨잖습니까.”

그 얘기였구나. 그랬다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운 본인이 한 말이다.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더욱 기억난다. 두 사람의 첫 섹스이자 두 번째 만남에서 있었던 대화다. 저 혼자 맨몸이었던 서운이 민망함에 못 이겨 급조해 낸 논리적인 개소리였다.

그걸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그 때문인지 이번에는 의진이 맨몸에 가운만 걸치고 있다. 누가 봐도 목적이 뚜렷한 차림새다. 하필이면 맨살이 젖어 있어서 더 그래 보인다. 어… 좀, 민망한 것 같지? 지금 하는 일 빨리 좀 끝내고 얼른 떨어지면 좋겠는데 단추를 푸는 의진의 손놀림은 더디기 짝이 없다. 서운이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털기 시작했다.

“다, 단추가 참 많죠?”

“네, 많군요.”

“…잘못 샀네.”

서운이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의진이 서운의 잠옷 단추를 끄르다 말고 면밀하게 옷 상태를 살폈다.

“옷 자체에 하자는 없어 보입니다.”

“오. 다행이네요.”

“그럼 마저 벗기겠습니다.”

네, 차라리 빨리 좀 벗겨 주세요. 반나체인 의진과 아무 짓도 안 하고 붙어 있기만 하니까 그게 더 민망하다.

서운의 잠옷 상태를 확인하느라 이리저리 움직인 탓인지 의진의 샤워 가운이 한껏 벌어져 있었다. 그 안으로 보이는 건…. 꿀꺽, 서운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 감사한 광경이 정말로 서운 때문이라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시키는 건 참 잘한다 싶다. 시키는 것만 잘해서 문제지만. 아니지. 시키는 거라도 잘해서 다행이다 싶기도 하고.

“…속옷도 입으셨군요.”

“…그랬겠죠?”

“전 안 입었습니다.”

“…그래 보이네요.”

벌어진 가운 새로 근육이 불거져 갈라진 허벅지가 보인다. 참 고맙고,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나 싶고…. 제대로 작정하고 왔구나 싶어 민망함만 거세진다. 민망함에 몸부림치던 서운이 또다시 입을 털었다.

“그, 일은 잘 끝냈어요?”

“아니요. 끝내지 못했습니다.”

“…어?”

“…….”

“그럼 여긴 왜… 아!”

“아프십니까?”

깜짝이야. 다짜고짜 허리에 손이 닿아서 놀랐다. 서운이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계속해요.”

서운의 허락이 떨어지자 허리를 더듬던 의진의 손이 조금씩 아래로 향한다. 아무리 봐도 ‘그’ 분위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음, 의진 씨?”

“네, 말씀하십시오.”

“일 안 끝났는데 이래도 돼….”

“…….”

“…….”

“…….”

서운이 한 일이 있다면 의진이 잠옷 바지를 벗기려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그만 엉덩이를 들어 주었을 뿐이다. 방금 좀, 너무 친절했던 것 같지…? 그간의 경험으로 축적된 서운의 매너 엉덩이가 제대로 실력 발휘를 했다. 자연스럽다 못해 아직도 반쯤 공중에 들려 있는 자신의 엉덩이에 서운도 놀랐다. 아마 의진은 더 놀랐을지도 모른다.

“…나 허리 아픈데.”

그렇지만 모른 척하기로 했다. 안 그러면 지가 어쩔 건데. 서운이 어정쩡하게 들려 있는 엉덩이를 어필하자 의진이 황급히 나머지 작업에 착수했다. 탈의에 다소 시간이 걸렸던 서운의 상의와 달리 하의는 빠른 속도로 벗겨졌다.

고로 서운은 나체가 되었다. 잘 자다 말고 갑자기 나체가 되어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한기가 찾아온다. 이불을 덮은 채로 에어컨을 켜 놓고 자는 사치스러움을 누려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그러게.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지? 우리가 자기로 했었나?

신혼부부에게 섹스란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지만 의진과 서운은 경우가 다르다. 당장 의진만 해도 신혼여행 와서 밥 먹고 산책한 거 빼곤 내내 일만 하고 있다. 서운이 잠들기 직전에도 의진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생각이 났다. 일하는 사람을 찾아가 안 잘 거냐며 추근거리던 45분 전의 자신이.

“…설마 안 잘 건 아니죠?”

“급한 건 45분이면 마무리됩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뭐 그럼 다행인데…. 그냥 의진 씨 안 잘까 봐….”

“아닙니다.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아, 시발. 그거구나. 수수께끼가 풀렸다. 범인은 45분 전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에 있었다.

자신이 먼저 안 잘 거냐고 물어보긴 했지만 맹세컨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오해다. 분명히 오해인데 그 한 마디에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않고 시간 맞춰 달려온 저 새끼가 제일 이상하다. 진짜, 이상하다. 이건 이상하다는 말로 밖에 설명이 안 된다.

그 이상한 새끼 지금 막 옷 벗었다. 그런데 왜 자꾸 웃음이 나지. 그때나 지금이나 다시 봐도 훌륭한 몸매다. 없던 인류애가 막 솟아난다. 그래, 뭐. 살다 보면 오해도 하고 그럴 수 있지. 서운은 아마도 저만 알고 있을 이번 사건의 진실을 제 속에 덮어 두기로 했다.

내가 좀 이상해 보이면 어때. 쟤도 이상한데. 저의 한 마디에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못하고 달려온 이상한 애가 물었다.

“서운 씨?”

“어, 어?”

“역시 피곤하십니까?”

“…전혀요.”

비단 정신 승리가 아니라 어차피 해명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제 와서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 봤자 저만 더 이상해진다. 스스로 이불을 열어젖히다 못해 알아서 엉덩이까지 들어 준 서운이다. 그냥 깔끔하게 이 상황을 즐기는 편이 더 나아 보인다.

서운이 힐끔 의진을 내려다보았다. 서운은 침대 헤드에 반쯤 기대 있고 의진은 침대에 무릎을 딛고 서 있으니, 의진의 얼굴이 내려다보일 리가 없다. 서운이 본 건 의진의 또 다른 자아였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의진의 성기가 반쯤 일어서 있다. 물론 옷을 벗기긴 했지만 그래도.

뭐야.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니 광대가 멋대로 씰룩거린다. 서운 씨, 가까이 다가온 의진에게 촉촉한 보디워시 냄새가 난다. 설렌다. 감정적인 이유가 아닌 원초적인 기대감 때문에. 네, 이 순간 누구보다 관대해진 서운이 세상 다정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빨아 봐도 됩니까?”

뭐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의진의 시선이 너무 한곳을 향해 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다리 사이로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스며들었다. 추웠다. 겉은 추운데 속은 뜨겁다. 부끄럽지도 않은지 서운의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엉덩이 사이가 절로 움찔거렸다. 서운이 슬쩍 다리를 오므리며 말했다.

“뭐, 뭐를요?”

“서운 씨 구머….”

“잠깐!”

서운이 급하게 의진의 말을 가로막았다. 잠자리에서 빼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노골적인 어휘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싫으십니까?”

“시, 싫은 건 아닌데 다음에요.”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안 싫다. 그래도 그렇지, 아직은 너무 이르다.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도 비슷한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의진은 빨아 봐도 되냐고 물었고, 서운은 다음에 하자고 했다. 그걸 기억하는 건 서운만이 아니었다.

“다음이 정확히 언제입니까? 지난번에도 똑같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러게요.”

“역시 피곤하신 거면….”

“아까부터 뭐라는 거야. 하나도 안 피곤하거든요.”

피곤하기는. 비행기에서 기내식도 안 먹고 5시간을 내리 잤다. 하와이에 도착해서도 밤 산책과 마사지가 유일한 신체 활동이었다. 내가 괜찮다는데 네가 왜 난리인지 의진이 난데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비행기에서 계속 주무셨잖습니까.”

“그랬죠.”

“벌써 도착했냐고도 하셨습니다. 더 자고 싶다고도 하셨고요.”

내가 그랬다고? 그건 좀 가물가물하다. 그치만 그 정도는 누구나 하지 않나. 하물며 비몽사몽일 땐 더더욱. 딱히 부정하진 않지만 긍정도 하지 않는 서운이 의아했는지 의진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괜찮으셨던 겁니까?”

“뭐가요?”

“비행기에서부터 줄곧 피곤해하셔서 첫날밤을 보내는 건 무리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뭐요?!”

앞으로는 무서워서 낮잠도 못 자겠다. 겨우 낮잠 좀 잤을 뿐인데 엄청난 오해를 샀다.

“키스도 안 하고 싶어 하시고….”

“내가 언제!”

“해변에서 결국 안 하셨잖습니까.”

서운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의진이 더 억울해하며 그런다. 그러니까 결국 의진 나름대로 서운을 배려해 줬다는 건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도 고맙지가 않다.

그래도 신혼여행이라는 자각은 있구나. 또다시 예의 그 소박한 안도감이 몰려온다. 확실히 예의나 눈치가 없는 건 아닌데 좀 부족하다. 과한 것 같기도 하고. 사람이 중간이 없다.

“배려해 준 건 고마운데…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나한테 직접 물어봐요.”

“서운 씨는 그 편이 더 나으십니까?”

“서운 씨는? 그게 뭔 소리지. 다른 사람은 안 그렇대요?”

의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잠시 잊고 있었다. 의진이 어딘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피곤할 때 배우자가 잠자리 신호를 보내오면 그렇게 짜증이 난다고 하더군요. 자신의 몸 컨디션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 없는 배우자는 배우자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맘카페에서 그래요?”

“그렇습니다. 요즘은 자게 복습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어 그때그때 연어가 가능합니다. 아, 연어는 인터넷 용어로, 밀린 게시물을 복습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동안 연어라고는 먹는 연어밖에 몰랐는데 이렇게 또 하나 배웠다. 어째 의진의 인터넷력이 점점 올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이제 모든 의문이 풀린 건지 의진은 더 이상 같은 주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언제쯤 빨아 봐도 되는 겁니까?”

“그 빤, 다는 소리 좀….”

“다음에는 빨아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의진은 서운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다. 서운이 그랬던 것처럼 서운의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운 씨.” 의진이 오므린 다리를 부드럽게 잡아 벌리며 정중하게 서운을 불렀다. 둘이서 별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나눈 지가 제법 되었는데도 의진의 성기는 그대로였다. 조금 더 커진 것 같기도 하고. 서운의 얼굴이 다 홧홧해졌다.

“빨아 보고 싶습니다.”

“…그, 소리 좀….”

“…좋은 냄새가 납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의진이 자세를 잡고 들어와 서운의 허벅지에 입술을 묻었다. …서운 씨. 다시 한 번 이름이 불리고 피부 위로 숨결이 흩어졌다.

“달콤하고….”

“…응….”

“맛있는, 냄새가….”

의진이 서운의 허벅지 안쪽에 얼굴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쪽, 허벅지 안쪽에 의진의 입술이 닿았다. 쪽, 쪼옥…. 여린 살결에 입술이 부딪치는 소리가 생생하다. 자다 말고 옷이 벗겨지더니 이제는 다짜고짜 허벅지 안쪽에 키스가 퍼부어진다.

다른 애무가 없다 보니 허벅지 안쪽에서 느껴지는 자극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의진의 입술이 점점 허벅지를 타고 내려왔다. 이러다 정말 엉덩이 사이를 빨리게 생겼다. 자꾸만 하체에서 힘이 빠진다. 서운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그럼 혀만….”

왈칵! 의진이 고개를 든 그때 내벽에서 애액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구멍 밖으로 새어 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간발의 차였다. 하마터면 민망한 상황이 발생할 뻔했다.

“혀…만 쓰는 건 괜찮은데 빠는 건 안 돼요. 그건 진짜 다음에.”

“다음이 언제입니까?”

“한국 가서요.”

6박 8일 동안 같이 있어야 하니 언제 또 붙어먹을지 모른다. 싫어서가 아니라 아직은 좀 많이 창피하다.

“아!”

그리고 핥아졌다. 츄웁…, 입구를 핥아 오는 부드러운 혀의 감촉에 또다시 애액이 쏟아져 나왔다. 여러 차례 애액을 토해 낸 내벽은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 다행히 입구 밖까지 새어 나온 애액은 없어도 지금 안을 만지면 속이 아주 축축할 테다.

아, 또다. 또다시 아래가 핥아졌다. 이제 의진은 뾰족하게 혀를 세워 일일이 입구 주름을 핥고 있다. 가렵고 간지럽다. 직접적인 자극 없이 계속해서 입구 주변을 핥아 오는 통에 저절로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덕분에 의진의 얼굴이 서운의 다리 사이에 갇혀 버렸다.

불편하겠지. 불편할 테다. 알면서도 자꾸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아래를 핥는 데 방해되는지 기어코 의진이 고개를 들어 서운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묘하게 서운을 올려다보는 자세다.

언제나 단정하던 머리카락은 서운의 허벅지 사이에 눌려 잔뜩 흐트러져 있고,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 있다. 의진의 타액과 서운의 내벽에서 흘러나온 애액 때문일 테다.

아, 어떡하지. 어떡하면…. 서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자꾸만 애액이 나와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의진이 서운의 양다리를 붙잡았다.

“다리를 조금 더 벌려 주시겠습니까.”

목소리는 정중했으나 의진은 이미 서운의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활짝 열어젖혀진 제 다리가 남의 몸처럼 낯설다. 서운은 차마 똑바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자세는 좀, 창피했다.

“핥는 데 방해됩니다.”

“…….”

“아니면 아예 자세를 바꾸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바꿔요. 바꿉시다.”

뭐든 지금보다는 낫겠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명백한 서운의 실수였다. 의진은 서운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역시 이 자세가 훨씬 안정적이군요.”

“…….”

“그렇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안정적이긴 하다. 좀 심하게 안정적이어서 그렇지.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69를 하게 생겼다.

성 경험이야 당연히 있지만 69는 별로 해 본 적 없다. 이성을 잃고 자제력 없이 흐트러지는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좋은 걸 몰라서가 아니까 너무 좋으니까 피하고 싶은 거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그런 모습까지 보여 주고 싶지는 않다.

눈앞에는 발기한 의진의 성기가 있고 엉덩이 뒤에는 의진의 얼굴이 있다. 처음 잔 날 기승위까지 튼 사이긴 하나 69는 차원이 다르다. 역시 못 하겠다. 서운이 백기를 들려는 순간이었다. 의진의 혀가 더 빨랐다.

“아…!”

“…….”

“잠, ㄲ…! 어, 어, 어…!”

이건 반칙이다. 뾰족하게 세워진 혀가 입구를 비집고 내벽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분명히 빠는 건 안 된다고 했는데…! 서운의 허리가 급격하게 무너졌다.

무너지는 서운의 허리를 단단하게 받친 의진이 나머지 손으로 서운의 입구를 한계까지 잡아 벌렸다. 아까부터 저 혼자 애액을 토해 내는 작은 구멍이 한껏 벌어졌다. 츕… 츄웁…. 의진의 혀가 구멍을 오갈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났다.

“아, 응, 아…!”

본격적으로 내벽이 핥아지기 시작하자 저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서운의 상체가 완전히 무너졌다. 서운은 개처럼 엉덩이를 치켜세운 채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래를 빨렸다. 익숙하지 않은 성감에 페로몬이 자꾸만 흐트러진다. 서운은 끙끙거리며 양팔을 버둥거렸다. 말려야 하는데 몸에 힘이 안 들어간다. 지금도 서운의 허리를 받치고 있는 의진이 아니었다면 아예 드러누웠을지도 모른다.

“아, 안 빤다고…!”

“네. 빨지 않았습니다.”

“지금, 빨잖, 아!”

아흐윽…! 의진이 구멍에 혀를 집어넣다 말고 아프지 않게 서운의 엉덩이를 깨물었다. 축축하고 부드러운 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감각이었다. 아, 어떡…! 아! 서운이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더 해 달라는 건지 하지 말라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모양새였다.

“서운 씨는 보기보다 엄살이 심하신 것 같습니다.”

“내가 언, 앗! 아! 아! 그, 그만! 아!”

그러더니 진짜로 빨렸다. 의진이 자신의 타액과 서운의 애액으로 질척해진 입구를 깊게 빨아올렸다. 전신에 번개가 쳤다. 기울어진 척추가 바짝 서고 난데없이 눈물이 날 것 같다.

쪼옥, 쪼오옥…. 의진이 조금 더 압을 주어 애액을 빨아 먹기 시작했다. 허리 아래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다.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열감에 외설적인 소리가 더해지자 더는 말이 제대로 안 나온다. 서운은 정신없이 신음했다. 의진의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빠는 겁니다.”

“아으, 앗!”

“지금이… 핥은 거.”

“아흐으…! 으응…!”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응, 응…!”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고 봤다. 정신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서운 씨, 평소보다 낮아진 목소리가 부드럽게 서운을 불렀다. 응, 응…! 서운은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히 허리를 받쳐 주던 의진의 손이 조심스럽게 서운의 허리를 잡아 내렸다. 서운은 그대로 침대에 눕혀졌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핥는 것과 빠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기분 좋으십니까?”

“…….”

“서운 씨.”

바로 뒤에서 체온이 느껴졌다. 뜨거운 열기와 시원한 박하 향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쿵, 쿵, 쿵, 알파의 페로몬을 감지한 오메가의 몸이 본능적으로 페로몬을 풀어냈다. 효과는 완벽했다.

“…하….”

의진이 뒤에서 바짝 몸을 붙여 왔다. 잘근잘근 귓바퀴를 깨물어 대며 서운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들이켠다. 상대의 페로몬을 들이마시려는 것이다. 서운 씨,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필이면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통에 서운은 속절없이 애액을 토해 내야 했다.

“서운 씨.”

목덜미로 내려온 입술이 부드럽게 서운을 채근했다. 갈무리되어 있던 페로몬이 자꾸만 풀어진다.

“…다….”

서운이 웅얼웅얼 대답했다.

“다, 좋아….”

“…그렇습니까?”

“으응….”

“…저도….”

응…! 뒷말은 입구로 밀려 들려오는 손가락과 함께 먹혀들어 갔다. 한껏 젖어 든 구멍이 연신 쿨쩍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수축하는 내벽을 억지로 잡아 벌리는 소리였다.

“사실 그날… 찾아봤습니다.”

“…뭐, 를…!”

“남성 오메가의 체온이 더 높은 건 아닐까, 남성 오메가가 애액이 더 많이 나오는 건 아닐까… 하고….”

“…아…!”

“찾아봤는데….”

“으, 응….”

“…그런 얘기는 어디에도 없더군요. 서운 씨가 유독 뜨겁고 잘 젖으시는 모양입니다.”

쿨쩍, 쿨쩍! 어조는 평이한데 아래는 난리가 났다. 손가락은 순식간에 세 개가 되어 서운의 내벽을 빠르게 드나들었다. 서운은 옆으로 돌아누운 채 의진의 가슴과 등을 맞대고 있었다. 뒤에서는 단단한 가슴이 서운의 상체를 받쳐 주고 있었으나 하체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서운의 골반을 쥐고서 바쁘게 내벽을 넓히고 있었다.

아, 좋아. 더는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서운은 끙끙거리며 저에게 주어지는 모든 쾌감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손가락이 더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위의 다리를 들어 올리기도 했다. 이를 알아차린 의진이 골반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 서운의 다리 한쪽을 들어 올렸다.

애가 탄다. 이대로 뒤에서 비스듬히 쑤셔 주면 좋겠다. 서운이 몽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의진을 쳐다보았다. 계속 서운을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곧바로 의진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서운이 의진을 재촉했다.

“빨, 리….”

“더 빨리할까요?”

“아니, 손, 말고….”

서운이 뒤로 손을 뻗어 의진의 성기를 더듬었다. 한 번도 만져 준 적 없는데 저 혼자 빳빳하게 일어서 있는 성기의 감촉을 확인하니 서운의 마음이 급해졌다. 서운은 의진의 품에서 벗어나 스스로 입구를 맞추려 들었다.

“안, 됩니다. 아직 콘돔을….”

예상치 못한 서운의 반응에 의진이 손가락을 빼내고 서운의 허리를 잡아 내렸다. 손가락에 끼워진 콘돔도 벗지 않은 채였다.

“성병, 없잖아요. 건강 검진 증명서, 확인 했는, 데….”

“…….”

“그냥 넣어. 응?”

어차피 주기가 맞지 않으면 임신도 안 된다. 서운은 오로지 쾌감을 위해 자신의 페로몬을 풀었다. 그런 서운을 말리던 의진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빳빳하게 일어선 성기가 조금씩 내벽 안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하….”

뒤에서 연신 뜨거운 숨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 박하 향에 잠식될 것 같다. 두툼한 귀두가 한껏 내벽을 잡아 벌리며 들어온 그때, 갑자기 성기가 빠져나갔다. 아…! 기분 좋은 압박감이 사라지자 서운의 허리가 크게 뒤틀렸다. 줄곧 서운의 등을 받쳐 주던 단단한 몸이 사라졌다. 찌이익, 뒤에서 포장지가 찢겨 나가는 소리가 났다. 손가락에 끼워진 콘돔을 내던지고, 오메가의 애액으로 질척하게 젖어 있는 성기에 간신히 콘돔을 씌운 의진이 곧장 서운의 뒤에 따라붙었다.

“서운 씨.”

뒤에서 서운을 부르는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져 있었다. 의진이 한 손으로 서운의 골반을 그러쥐며 말했다.

“세게 하겠습니다.”

권유가 아닌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런데도 거부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 어. 세게 해. 막 해 줘.”

“…하….”

“빨리, 빨, 아, 아…!”

오히려 좋았다. 퍽! 단번에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한쪽 다리가 들려 있어서 뒤에서 비스듬하게 성기가 꽂혀 들어오는 각도였다. 그렇게 젖어 있는데도 막상 성기가 들어오자 일순 숨이 막혔다.

“아, 으…!”

“아프, 십니까?”

“으, 아니, 윽, 잠, 깐….”

여기서 조금이라도 아프다고 하면 의진은 당장이라도 성기를 빼 버릴 것 같다. 그래,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서운은 입술을 짓씹으며 압박감을 참아 냈다. 성기가 깊숙이 들어오는 자세 때문인지 마치 처음 관계를 맺는 것처럼 아래가 쪼개지는 것 같다. 서운은 압박감에 몸부림치면서도 어떻게든 의진을 받아 내려 들었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허리 아래 가늘게 떨고 있는 두 허벅지가 보인다. 그 사이로 자리를 잡은 건 굵고 단단한 살덩이로, 더는 들어오지 말라는 듯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성기를 잘라 먹을 듯이 조여 댄다. 얌전히 제 허리를 내어 주고 있는 바깥 사정과는 전혀 다르다. 과하게 수축하는 내벽에 의진도 서운의 이상 반응을 알아차렸다.

“서운 씨, 아프신 거면….”

“아, 니. 안 아파. 빼지, 마.”

“…뺀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빼면, 안 돼….”

“하지만….”

“안 아프게 해 주면 되잖아….”

역시 서운은 아픈 게 맞았다.

“응? 빨리….”

“…….”

“나 안 아프게 해 줘….”

이를 알면서도 의진은 차마 성기를 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의진의 성기가 쫀쫀한 내벽 속에서 기어코 부피를 키웠다.

“어? 어, 어…!”

“…하, 아….”

“어, 으, 앗!”

퍽! 예고 없는 허릿짓이 시작되었다. 뒤에서 쳐올리는 강한 힘에 서운의 상체가 밀려나자 의진이 뒤에서 단단하게 서운을 감싸 안았다. 자세가 안정되니 추삽질에 더욱 속도가 붙는다. 퍼억! 퍽! 억지로 벌려진 입구가 아프다고 느낄 새도 없었다. 서운의 안으로 계속해서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뒤에서 비스듬히 여린 속을 쪼아 대자 아래에서 전해지던 불편한 감각이 조금씩 그 형태를 달리한다.

역시, 예상대로다. 움직이지 않고 차근차근 내벽을 늘리는 게 훨씬 더 버겁고 힘들다. 서운은 온몸으로 몰아치는 의진을 받아 내며 점점 고통을 잊어 갔다. 고통이라니, 애초에 제가 아프긴 했던가. 작정한 듯 힘을 주어 내벽 깊은 곳을 찔러 대는 의진 때문에 서운의 입에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서운, 씨.”

“응, 응…!”

“지금은, 안 아프십, 니까….”

“어, 어. 하나도, 안, 안 아프… 아!”

“하… 잠, 시만… 너무 조이시면….”

“모, 몰라, 나 어떡, 응, 아!”

하릴없이 신음하던 서운이 돌연 의진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의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였다.

“키, 스….”

“…….”

“키스, 하고, 싶…! 응!”

입을 맞추고 싶었다. 가볍게 입술이 맞물리고 혀를 빨아 올리며 페로몬을 교환하고 싶다. 서운의 애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진은 입맞춤 대신 사과를 돌려주었다.

“죄송, 합니다.”

“아, 앗!”

“입을 헹구지, 않았… 하….”

“아, 키스, 키스 하고 싶, 어….”

“안, 됩….”

“아, 왜애…! 그냥 하면, 아…!”

안 된다는 말을 들으니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다. 서운은 서러운 쾌감에 몸부림치며 계속 키스를 졸랐으나 의진은 끝내 입맞춤에 응해 주지 않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입맞춤이 시작된 건 두 사람이 모두 사정한 후였다. 사정을 하자마자 별안간 서운을 버려두고 침실을 나가 버린 의진은 서운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입술부터 붙여 왔다.

고대하던 입맞춤에서는 치약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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