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다섯 번째 만남 (2)(2권) (6/13)

2권

6. 다섯 번째 만남 (2)

배고프다. 기름진 고칼로리 음식이 먹고 싶다. 지금 당장.

제일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수면욕을 이기는 극심한 허기에 서운이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카탈로그에나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호텔 침실로, 누운 자세 그대로 부엌 싱크대를 볼 수 있는 서운의 방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깨달았다. 아, 나 결혼했지.

간밤에 얼마나 달게 잤는지 신혼여행 중인 것도 깜빡했다. 하와이가 이렇게 가까운 곳이었나요. 여독도, 시차 적응도 없다. 꿈도 한 번 안 꾸고 아주 잘 잤다. 하다 하다 배가 고파서 깰 정도이니 말 다했다. 이래서 사람은 운동을 해야 한다. 서운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실실 웃었다. 허리 아래가 묵직한데도 그냥 막 웃음이 난다.

서운은 오늘부로 결혼 2일 차가 되었다. 아직 얼떨떨하긴 한데 허리 아래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면 간밤의 일이 꿈은 아닌 모양이다. 골반이 부서질 것 같은데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있다니, 인간의 뇌가 얼마나 간사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간사한 뇌는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어. 다 맞춰 가면서 사는 거지. 옳소, 옳소! 서운은 열심히 북을 쳤다. 장구도 쳤다. 누가 보면 오메가가 아니라 성인군자인 줄 알겠다. 아무렴 어떨까, 서운은 주린 배를 움켜잡고 수줍게 침실 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응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실도 텅 비어 있다.

이 순간 차갑게 식어 있던 침대 옆자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지 않는 걸 보면 이제 남은 곳은 딱 하나다. 바로 서재.

설마 둘째 날에도 저러고 있을까 싶었는데 서운의 예상이 맞았다. 신혼여행 2일 차, 의진은 아침부터 일을 하고 있다. 이래서야 전날과 다를 바가 없다. 기껏해야 전날과 달라진 게 있다면 딱 하나, 바로 서운의 발현 사실이다. 서운은 간밤에 이 구역의 성인군자로 발현했다.

사람이 일에 좀 미칠 수도 있지! 가만 보면 일만 하는 것 같아도 은근 할 건 다 한다. 특히 시키는 건 더 잘한다. 말을 좀 이상하게 들어서 그렇지 말도 잘 듣는다. 됐네, 됐어. 서운은 조용히 서재를 벗어났다. 일단 좀 씻어야겠다. 씻고 밥부터 먹자고 해야지.

서운이 샤워를 마친 후에도 의진은 처음 자세 그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저러다 서류 더미에 파묻히게 생겼다. 똑똑, 서운은 그제야 노크 아닌 노크를 했다.

“바빠요?”

서운의 목소리에 의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반응 속도 좋고, 주인을 닮아 혼자서 벌떡벌떡 잘만 서던 의진의 분신이 생각나 저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겨우 하루 만에 의진을 향한 서운의 내적 친밀도가 최고도를 찍었다.

“아닙니다. 바쁘지 않습니다. 잠자리는 편안하셨습니까?”

“너무요. 너무 잘 자서 코 골았을 것 같아.”

“맞습니다. 조금 고셨습니다.”

“…아.”

“그리 크지 않아 참을 만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그게 그렇게 비장하게 대답할 일이니. 크지 않았다니 다행이긴 한데 기왕 쪽팔린 거 차라리 시원하게 골 걸 그랬다.

“많이 안 바쁘면 같이 아침 먹으러 갈래요? 먹었으면 나 혼자 가고.”

서운은 아무렇지 않은 척 본론을 꺼냈다. 최대한 쿨해 보이려고 안 해도 되는 말까지 덧붙였다.

“저도 식사 전이니 함께 가시죠. 식사 시간은 언제가 좋으십니까?”

“지금 당장요. 나와요. 밥 먹으러 가게.”

서운의 단호한 대답에 의진이 서둘러 일어났다. 서류 더미에서 탈출한 의진은 아침부터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었다. 존나 고마웠다.

“아, 배고프다. 지금 가면 조식 진짜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호텔 조식 말입니까?”

“응!”

서운이 신이 나서 대답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게 들떠 있었으나 알면서도 잘 제어가 되지 않았다. 서운에게 호텔 조식은 해외여행, 그것도 별이 여러 개 달린 호텔에 묵어야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아마 의진은 이해하지 못할 테다.

그럴 만도 하지. 아마 평생이 가도 모르지 않을까. 서운은 아침을 맞이해 한껏 흐트러진 경계를 다잡으려 애썼다.

“호텔 조식은 이미 종료되었습니다.”

“어?”

“벌써 오전 11시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시죠. 추천받은 브런치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경계를, 다잡아야 하는데….

“서운 씨? 안 오십니까?”

“의진 씨.”

이건 아니다. 진짜 아니다. 서운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곧장 의진을 불러 세웠다. 방 한가운데 멈춰 선 서운의 얼굴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지켜보는 의진도 덩달아 긴장한 기색이었다. 서운이 말했다.

“내가 알아서 잘 해야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부탁 좀 할게요.”

“네, 서운 씨. 말씀만 하십시오.”

“앞으로 내가 식사 시간 놓치고 자고 있으면 깨워 줘요.”

“예?”

“특히 비행기나 호텔에서는 무조건 깨워요. 내가 절대 깨우지 말아 달라고 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이런 얘기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더는 안 되겠다. 서운은 기내식과 호텔 조식 앞에서 잠시 사회적인 체면을 내려놓기로 했다. 어차피 그런 거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꼭 무슨 일이 있어도 깨워 드리겠습니다.”

비웃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서운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의진도 진지하게 응해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한발 더 앞서 나가기까지 했다.

“기내식과 호텔 조식을 좋아하시는군요. 몰랐습니다.”

“네, 뭐.”

“미리 말씀하셨으면 깨워 드렸을 텐데요.”

“괜찮아요. 일단 우리 밥부터 먹….”

“내일부터는 조식 마감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깨워 드리겠습니다.”

“네, 알았….”

“참고로 기내식의 경우 이번처럼 탑승 시간 내내 주무시지만 않으면 편하신 때에 식사가 가능합니다.”

“알았다니까? 우리 밥 안 먹어요?”

한껏 배가 고팠던지라 결국 언성이 높아지고 말았다. 의진이 추천받은 브런치 레스토랑은 차를 타고 가야 해서 두 사람은 급한 대로 룸서비스를 시키기로 했다. 워낙 배가 고파서 그런가, 음식 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다 맛있어 보인다. 고민하던 서운이 이 호텔의 단골손님인 의진에게 메뉴 추천을 부탁했다.

“이 호텔은 뭐가 맛있어요?”

인정한다. 첫날밤을 함께 보낸 사이인지라 저도 모르게 친한 척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지,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의진이 빤히 서운을 올려다보았다.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은 서운을 빤히, 민망하리만큼 쳐다본다. 누가 보면 못 할 짓이라도 한 줄 알겠다. 옆에 가서 메뉴 추천 좀 해 달라고 한 게 그렇게 잘못이야? 이제 와서 다시 일어나기도 민망한지라 서운은 어색하게 눈동자만 굴려 댔다.

“아.”

“어?”

“그렇군요.”

“뭐가, 또.”

“이해했습니다. 이 자리에 앉고 싶으셨던 거군요.”

개소리와 함께 의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딱히 의진에게 기대 있었던 건 아닌데 워낙 가까이 붙어 있었던지라 애꿎은 서운만 넘어질 뻔했다. 그런 서운을 붙잡은 건 서운이 알고 있는 커다란 손이었다.

밤새 서운의 몸을 만지던 커다란 손이 서운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그대로 몸이 들린다 싶더니 어느새 서운은 의진이 앉았던 소파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의진은 그새 다른 소파에 앉아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팔걸이는 불편하니 편히 앉으십시오. 제가 비켜 드리겠습니다.”

“…아, 네.”

“어떠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네, 뭐… 고맙네요.”

“별말씀을요.”

의진이 어딘가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뭐. 고맙다. 고맙긴, 한데… 됐다. 메뉴나 고르자. 서운은 이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고 메뉴판에 집중했다. 학부 때부터 왔다고 했으니 전 메뉴를 다 먹어 보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했건만 이번에도 서운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겨 나갔다.

“토스트만 먹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혹시 알레르기 있어요? 닭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알레르기나 뭐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럼 혹시 채식주의자냐고 묻기에는 전날 먹은 저녁 메뉴가 너무 해산물과 고기다. 게다가 분명 본인 입으로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는다고 그랬다. 서운이 혼란스러워하자 도리어 의진이 의문을 제기해 왔다.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요. 안 되는 건 당연히 아닌데, 좀, 놀라서요.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그냥 나라면 안 그랬을 것 같거든요. 나는 기내식도 좋아하고 호텔 조식도 좋아하니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얘기한다고 했는데 잘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물론 놀란 건 사실이지만 따지고 보면 안 될 것도 없으니까.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호텔 스위트룸에 제 짐을 갖다 놓을 만큼 자주 왔지만 외식 한 번 해 본 적 없고, 매 끼니를 룸서비스로 때웠지만 시켜 본 메뉴는 토스트가 전부다. 그래, 뭐. 얼마든지 가능은 하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그렇지. 하물며 토스트는 종류도 하나다.

“그러셨군요. 괜찮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어, 고마워요. 괜찮으면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돼요?”

“글쎄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흔쾌히 대답한 것치곤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다. 오히려 궁금증만 더해졌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니, 그게 더 이상하다.

“추천이 필요하시면 사람을 부를까요?”

“괜찮아요. 알아서 고를게요.”

“알겠습니다. 고민되는 메뉴가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오, 골라 주려고?”

“아니요. 선택은 본인이 해야 후회도 없습니다.”

존나 솔로몬 납시었다. 예이, 예이. 서운은 한껏 빈정거리며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뭔 놈의 메뉴가 이렇게 많은지 메뉴판 한 번 길쭉하다. 하긴, 이 맛있는 메뉴들을 두고 주구장창 토스트만 시켜 먹은 놈한테 뭘 바라냐.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서운의 착각이었다.

“대신 선택의 범위를 넓혀 드릴 수는 있습니다.”

의진은 그렇게 말하며 서운이 고민하던 메뉴들을 모조리 주문했다. 놀란 서운이 의진을 말리려 들자 의진이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드시고 싶은 만큼 드시고 나머지는 남기십시오.”

어떡하지. 아무래도 결혼을 존나 잘한 것 같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아직 누군가를 속단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실제로 서운은 요 며칠간 자본주의의 끝을 경험하고 있었다. 처음 맛본 돈의 맛은 달콤했고, 생애 첫 룸서비스는 짜릿함 그 자체였다.

영화에서 본 것처럼 트롤리 여러 대가 은색 쟁반에 음식을 가득 싣고 줄줄이 나타났다. 절로 눈이 돌아가는 호화스러운 광경에 서운의 입이 떡 벌어졌다. 별다른 감흥 없이 음식을 내려다보는 의진과 달리 서운은 제대로 신이 났다. 어느 때보다 적극적인 서운의 주도하에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완전 맛있는데요?”

서운은 감탄하며 햄버거 해체 작업에 몰두했다. 끼익, 급한 마음에 칼이 미끄러지면서 듣기 싫은 소음을 냈다. 으, 소름 끼쳐. 기분 나쁜 감각에 서운이 반사적으로 나이프를 내려놓자 의진이 서운의 접시를 가져갔다.

“이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뭐가요?”

그럴 줄은 알았지만 역시나 칼질이 능숙하다. 서운이 조져 놓은 햄버거가 먹기 좋게 잘려 나가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의진이 서운에게 접시를 돌려주며 말했다.

“토스트가 가장 쉽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니까요.”

“아… 그렇겠네요.”

서운이 한 템포 느리게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어쩐지 어감이 이상하다.

“손이 많이 가지 않아 편리하죠, 여러모로 가장 효율적입니다.”

먹는 것까지 효율을 따져 대다니, 이래서 대기업 놈들은 안 된다. 그렇게 웃어넘기면 될 텐데 서운은 그러지 못했다. 바로 전날에도 의진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참이다. 뛰어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교육시키는 편이 더 효율적이지 않냐는 효율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모든 건 상대적이다. 서운에게는 다소 생소한 의진의 사고방식도 그의 집안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아는데, 이렇게 효율을 따져 대는 사람이 왜 서운과 결혼한 건지는 영 이해가 안 된다. 서운은 다시 한 번 의진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의진 씨.”

“네, 서운 씨. 말씀하십시오.”

물어볼까 말까. 서운은 잠시 고민했다. 막상 물어보려니 비행기에서 있었던 희대의 개소리가 생각나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왜 나랑 결혼했어요? 서운의 질문에 의진이 개소리나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을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으로 봐서는 영 퍼센트에 가깝다.

서운에게 첫눈에 반했다거나 이미 사랑하고 있다는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다. 그런 건 가당치도 않다. 애초에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다. 서운이 의진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맞지만 아직은 성애에 더 가까운 감정으로 사랑까지는 아니다. 아마 의진도 그럴 테다.

이상하지. 참 이상하다. 섹스도 하고 결혼도 했는데 사랑은 아니다. 계절이 다섯 번 돌아가는 동안 사랑을 하고 사랑해서 섹스를 한 사람과는 결혼까지 가지도 못했는데 네 번 본 남자와는 결혼을 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든다. 나만 해도 이런데 의진이라고 해서 다르겠어? 서운은 긍정적으로 체념했다.

의진의 의중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은 것도, 그 사람이 궁금해지는 것도 일종의 애정 표현이다. 그 애정, 지금은 의진이 잘라 준 햄버거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의진도 서운에게 호감이 있는 건 확실하니까. 그거면 됐다. 서운이 고민을 끝내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우리 이제 뭐 할까요?”

“원하시는 일정이 있으십니까?”

“밥 먹고 해변 안 갈래요? 하와이까지 왔는데 바다에 발이라도 담가야지!”

“네, 그러십시오.”

이때까지만 해도 서운은 별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처지가 실망스럽지도 않았고, 우울하지도 않았다. 비록 지금은 먹기 좋게 잘린 햄버거가 애정 표현의 전부이나 창밖으로 펼쳐진 이국적인 풍경과 안락한 호텔 방은 서운을 충분히 들뜨게 했다. 서운은 처음 와 본 하와이가 퍽 마음에 들었다. 하와이가 신혼여행지로 손꼽히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선크림은 가져왔어요?”

“아니요.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하와이 오는데 선크림을 안 가져왔어요? 내 거 빌려줄 테니까 같이 써요.”

“괜찮습니다. 서운 씨 쓰십시오.”

“햇빛 엄청 세던데 괜찮겠어요?”

“네, 괜찮습니다. 저는 호텔에 있을 예정이니까요.”

멈칫, 부지런히 접시 위를 노닐던 서운의 포크가 멈췄다. 하와이 해변을 거닐 생각에 한껏 올라가 있던 서운의 입꼬리가 순식간에 추락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서운은 애써 불길한 생각을 떨쳐 냈다.

“왜요? 의진 씨는 왜… 호텔에 있어요?”

“아직 오후 업무가 남았습니다.”

현지 시간 기준입니다, 의진이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추가 설명이고 지랄이고 이제 막 토스트 한 조각을 입에 넣은 의진은 도저히 식사 중인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조차 서운과 정반대였다. 냅킨으로 입가를 한 번 닦고는 당장이라도 서재로 들어가 버릴 것 같다. 서운이 침착하게 물었다.

“그렇게 바빠요? 아까는 많이 안 바쁘다며.”

“오전 업무는 모두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마저 오후 업무를 보시겠다?”

“네, 그렇습니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저 얼굴과 저 몸매와 저 재력으로 지금까지 왜 혼자인 걸까 궁금했는데 정답이 바로 여기 있었다. 저런 껍데기만 훌륭한 워커홀릭 새끼.

성인이 되고 나서, 아니, 사회인이 된 뒤로 서운이 이렇게까지 열이 받은 건 단언컨대 오늘이 두 번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첫 번째라 하기에는 의진이 조금 약하다. 5년을 만나고 부모님께 인사까지 시켰으면서 잠수 이별을 안겨 준 서운의 전 애인에 비하면 의진은 양반이긴 하다. 대신 그냥 양반은 아니고 가짜 족보로 양반이 된 본투비 상놈 되시겠다.

일단 진정하자. 서운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저 잘난 양반의 멱살을 잡아챌지도 모른다.

“오후 4시에는 어디에서 뵐까요?”

그런 서운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의진이 곧바로 서운에게 말을 걸어왔다.

“4시에는 왜요? 쉬는 시간도 있나 보지?”

“따로 쉬는 시간을 두고 있진 않습니다. 4시에 서운 씨와 이혼 브리핑이 예정되어 있어 여쭤본 것뿐입니다.”

아, 시발. 맞다, 이혼. 덕분에 서운은 잊고 있던 비행기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제 그러셨잖습니까.”

그래, 그랬지. 태초에 장기 출장이 있었다. 하하하! 서운이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막 나온다. “햄버거가 입에 잘 맞으시나 봅니다.” 의진이 앞에서 개소리를 했다. 하하하하! 서운이 다시 한 번 크게 웃었다. 그냥 계속 웃음이 나왔다. 한바탕 웃어 젖힌 서운이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래요. 합시다, 이혼 브리핑.”

“장소는 어디가 좋으십니까?”

“멀리 갈 거 없이 그냥 호텔에서 하죠.”

“네, 알겠습니다.”

외삼촌, 외숙모. 죄송합니다. 저 이혼해요. 서운은 대충 식사를 끝내고 그대로 호텔 방을 뛰쳐나왔다. 이혼까지 약 4시간, 마지막 자유를 즐겨야 한다.

호텔 방을 나서는 서운의 손에 무언가 들려 있었다. 의진의 신용카드였다.

비록 이혼을 목전에 두고 있기는 하나 서운은 지극히 이성적이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라 탈이다. 돈, 돈을 써야 한다. 서운의 이성이 외쳤다. 겨우 이틀간의 결혼 생활로는 받을 수 있는 위자료가 한정적일 테니 다른 돈이라도 써야 한다. 너무 많이 쓰면 나중에 청구당할 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사치스러운 편이 좋겠다.

고로 쇼핑은 안 된다. 서운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고민 끝에 고른 선택지가 바로 호텔이다. 내가 언제 또 이런 호텔에 묵어 보겠어. 오후에 이혼을 하면 당장 호텔부터 옮겨야 할 테니 해변은 나중에 봐도 된다. 서운은 계산에 능한 사람이므로 이번 기회에 호텔 내 모든 부대시설을 이용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참고로 의진의 신용카드는 상호 동의하에 가져왔다. 절대로 훔치지 않았다.

서운은 제일 먼저 호텔 라운지에 갔다. 포부는 거창했지만 위(胃)의 사정은 그러지 못했다. 입맛도 없는 데다 방금 막 브런치를 먹은 터라 음식은 더 이상 당기지 않는다. 서운은 괜히 와인을 한 잔 깔짝거리다가 금방 라운지를 나왔다. 제한된 시간 안에 모든 부대시설을 이용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다음은 마사지다. 서운은 어제에 이어 또다시 마사지를 받았다. 어제도 받았지만 좋은 줄 알고 받으니까 더 좋다. 전날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허리에 마사지를 받으며 서운은 자신의 허리를 이렇게 만든 알파 놈을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서운도 공범이긴 하지만 어쨌든, 서운은 의진을 생각했다.

서운은 의진에게 호감이 있다. 그러니까 결혼했지. 애정도 있다. 한평생을 남으로 살아온 만큼 둘이 함께 맞춰 나갈 의향도 있다. 하지만 맨땅에 헤딩은 싫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사람에게 아까운 노력을 쏟고 싶지는 않다는 소리다.

어쩌면 의진도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보면 마냥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서운은 의진과 함께한 얼마 안 되는 지난 시간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의진은 제일 먼저 자녀 계획에 대해 물었다. 서운이 혼자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도 물었다. 예의상 건네는 안부 인사도, 불필요한 인사치레도 없었다.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대화, 그리고 결혼. 지금까지 두 사람의 만남은 결혼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가장 효율적인 날들이었다.

어, 그러네. 효율적, 의진이 좋아하는 효율성이 서운에게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의진이 자신과 결혼한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당장 자녀 계획은 없으나 결혼 의사는 충만한 혼자서도 잘 노는 30대 오메가, 심지어 가족 관계도 단출하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그게 결혼의 이유라면 조금은 상처일 것 같다. 마사지에 취한 몸은 자꾸만 늘어지는데 마음은 점점 차가워진다. 서운은 마사지가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돈 쓰려면 빨리 일어나야 하는데, 머릿속으로 생각만 했다.

마지못해 일어난 서운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호텔 방이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TPO에 맞는 옷차림을 위해 수영복으로 갈아입으러 갔다. 이런 호텔에서 묵으면서 수영장 한 번 안 가 보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지금의 서운은 누구보다 이성적이다.

의진과 마주치면 어떻게 할지 행동 강령까지 짜 놨건만 정작 호텔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서재에서 일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의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운이 나가자마자 의진도 바로 방을 비운 모양이다.

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서운은 서재를 나와 곧장 침실로 향했다. 서운이 걸을 때마다 발밑이 바스락거리며 울어 댔지만 개의치 않았다. 텅 빈 호텔 방 따위엔 조금도 있고 싶지 않다. 서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 방을 나왔다. 성큼성큼 앞만 보고 걸어가는 서운의 발밑에 뭔가 붙어 있었지만 서운이 알 길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이다. 서운은 마침내 수영장에 왔다. 제아무리 화려한 스위트룸도 한낮의 수영장이 만들어 내는 생기와는 비교가 안 된다. 확실히 밖에 나오니까 기분도 한결 나아지는 것 같다.

풀에는 전문적인 수영 실력을 뽐내는 사람들도 있고, 한가롭게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저마다 인종도 다르고 형질도 다른 사람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여유로워 보인다. 서운은 괜히 위축되는 기분을 숨기려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비어 있는 선베드를 발견해 어색하게 몸을 누이고 나니 여기가 바로 천국이요, 지상낙원이다. 서운이 야심차게 챙겨 온 래시가드와 쪼리가 비로소 빛을 발했다. 의진은 선크림도 가져오지 않았으니 수영복도 챙겨 오지 않았을 테다. 어떻게 하와이에 오면서 선크림이랑 수영복을 안 가져올 수가 있지, 언뜻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서운은 이만 의진의 생각을 떨쳐 냈다. 뭐가 됐든 이제는 서운과 관계없는 일이다.

서운은 선베드에 누워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편한 자세를 찾아 열심히 제 한 몸을 뒤집어 대는 서운은 위에는 긴팔 래시가드를 입고 밑에는 수영복 바지를 입었다. 그러니까 이런 건 챙긴 기억이 없다.

…이게 뭐지. 발치에서 웬 핑크색 종이 쪼가리가 펄럭인다. 자세히 보니 포스트잇이다. 서운의 쪼리 밑창에 웬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다. 포스트잇이야 떼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하필 한국어다. 하와이 호텔에서 한국어로 적힌 포스트잇을 밟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서운은 선글라스를 벗고 자세히 포스트잇을 들여다보았다.

뵙겠습니다, 란다. 하와이 호텔 수영장에서 한국어로 된 포스트잇을 발견했는데 ‘뵙겠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겁나 신경 쓰인다. 미친 듯이 신경 쓰인다. 고작 포스트잇 주제에 자기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글씨는 또 어떻고, 인쇄기로 찍어 낸 것 같은 정갈함이다. 누가 썼는지 안 봐도 뻔하다.

뭘까. 이게 대체 뭐지. 서운은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봐도 답은 하나다. 이 정체 모를 포스트잇은 서운과 함께 방에서 딸려 나왔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서운은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다. 누군가를 꼭 닮은 포스트잇 따위 잊고 선베드에 누워 하와이의 햇살을 즐기려고 했다.

그치만 신경 쓰인다. 물에 들어갈 생각으로 휴대폰까지 놓고 왔더니 당장 연락할 방법도 없다. 서운은 편안한 선베드에 누워 불편하게 몸을 뒤척이다 끝끝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글이 적힌 포스트잇을 찾아서, 그 대장정의 시작이었다.

“지각입니다.”

의진의 뒤로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배경은 전혀 다르지만 저 말투하며 저 시선까지, 저절로 의진과의 첫 만남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로도 의진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그날처럼 자리에 앉은 채 서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전에 본 모습 그대로 셔츠에 슬랙스 차림이었다. 래시가드 아래 쪼리를 신고 있는 서운과는 천지 차이다.

“정확히 8분 늦으셨습니다.”

저 새끼가 진짜. 서운은 방금 전까지 팔자에도 없는 방탈출 게임을 하다 온 참이다. 누가 포스트잇 아니랄까 봐 떼어지기는 어찌나 잘 떼어지던지 서운의 동선을 따라 사방팔방 흩어져 있던 포스트잇 때문에 한참을 고생했다.

좆같은 포스트잇, 이게 다 포스트잇 때문이다. 포스트잇이 이렇게 잘 떼어지지만 않았어도, 아니, 핑크색만 아니었어도 서운이 신혼여행까지 와서 방탈출 게임을 할 필요는 없었을 테다.

“네. 좀 늦었습니다.”

온 걸 다행으로 알아라. 서운은 당당하게 지각을 시인하며 의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타고난 성정이 그런 건지 아니면 가정환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서운은 기본적으로 눈치가 빠르다. 묘한 데서 인내심도 강하다. 취미 중 하나가 현질 안 하고 게임하기일 정도니 말 다했다. 서운이 이런 사람이길 망정이지 서운이 아니었으면 의진은 이대로 바람을 맞을 뻔했다.

그나마 나니까 알아서 찾아왔지 다른 사람은 가당키나 했겠냐고.

기껏 마사지까지 받았는데 뒷목이 다 뻐근하다. 루프탑에 올라오기 전까지 서운은 계속 바닥을 보고 다녔다. 의진이 붙여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핑크색 포스트잇은 서운의 동선을 따라 바닥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제대로 된 꼴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밟히고 밟혀서 무참히 구겨져 있었다. 그걸 일일이 주워서 하나하나 펼쳐 본 것도, 퍼즐을 맞추듯 빠진 조각을 찾아 호텔을 뒤지고 다닌 것도 모두 서운의 몫이었다. 고생도 이런 개고생이 없었다.

“포스트잇을 늦게 봤거든요.”

“그러셨습니까.”

“…언제 준비한 거예요? 아침에는 없었잖아요.”

개고생의 다른 이름은 이벤트였다. 의진이 서운 몰래 야심차게 준비했을 첫 번째 서프라이즈 이벤트, 결과는 대실패다. 서운의 이름이 적혀 있는 포스트잇은 엘리베이터 바닥에서 발견됐고, 일부는 끝까지 찾지 못했다. 그대로 다른 손님의 발걸음을 따라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의진은 운이 좋았다. 서운이 의진의 행방이 적힌 포스트잇을 발견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서운이 끝까지 포스트잇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의진은 혼자서 루프탑을 지키고 있었을 테다.

그냥 그렇게 둘 걸 그랬나, 잠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두 사람은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루프탑에 와 있다. 정확히는 의진이 먼저 왔고, 서운은 이제 막 도착했다. 미리 얘기를 해 놓은 건지 서운이 오자마자 아이스 라테와 얼음물이 준비되었다.

아. 그래. 기억난다. 처음 의진을 만난 날도 아이스 라테와 얼음물을 마셨다.

서운은 시킨 적 없는 커피가 투명한 유리잔에 담겨 있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비추고, 투명한 유리잔 위로 세상의 모든 파란색이 스쳐 지나간다. 서운이 좋아하는 커피와 하와이의 아름다운 하늘이 전부 한 잔의 컵에 들어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별것 아닌 한 잔의 커피에 울컥, 마음이 움직인다. 문득 서운은 이 모든 게 꿈처럼 느껴졌다. 포스트잇을 찾아 호텔을 돌아다닌 것도, 신혼여행까지 와서 저 혼자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도, 자신의 결혼도 전부 다. 그중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의진의 존재 그 자체다.

“서운 씨가 나가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

“부부 사이에도 분위기는 중요하니까요. 결혼을 했다고 해서 이런 일에 소홀해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누가요? 이제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맘카페에서 봤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 혼자 바닥에 떨어진 포스트잇을 주우러 다니며 얼마나 의진을 욕했던가.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딴 걸 이벤트라고 준비했냐며 속으로 한껏 빈정거렸다. 이 정도면 그냥 순수하게 엿 먹이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했다.

“마음에 안 드셨습니까?”

“…뭐….”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

“다음에는 꼭 마음에 드실 만한 이벤트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의진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 묵묵히 포스트잇을 찾아다닌 이유. 기어코 루프탑에 올라온 이유.

“혹시 어떤 점이 부족했는지 말씀해 주시면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왜요?”

어쩌면 우리가.

“성공적인 이벤트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이벤트를 왜 했는데요?”

어쩌면 우리도.

“부부 사이에도 분위기는 중요하다고….”

“…….”

“…안 중요한 겁니까?”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서운은 기꺼이 의진이 벌여 놓은 개판에 뛰어들었다.

“중요하죠. 중요한데….”

막상 제 입으로 말하려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운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속마음을 토해 냈다.

“효율적이진 않잖아요.”

“…….”

“이런 거 안 해도 됐을 텐데 굳이 왜 그랬냐는 말이었어요.”

서운은 더 이상 운명 같은 사랑을 믿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도 믿지 않는다. 사랑이 거듭될수록 남는 건 사랑해서 생긴 무언의 흉터로, 상처 없는 사랑은 없다.

“확실히 그렇군요.”

“…….”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편이 낫다. 어차피 영원한 사랑은 없으니까. 굳이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적으로 호감이 가고 믿을 수 있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면 된다.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가족이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자.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아니, 그냥 지금 말해요.”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라….”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되잖아요. 듣고 싶어.”

그런데도 또다시 시작하고 싶어지는 거다. 서운은 오랜만에 찾아온 설렘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의진과의 결혼을 받아들인 것도 비슷한 이유다. 만약 이 설렘이 저만의 것이 아니라면, 의진 역시 그렇다면 이대로 의진과의 인연을 끊어 내고 싶지 않다.

조금 더 노력해 보고 싶다. 서운은 애써 긴장을 숨기며 의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생각나는 것부터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의진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과적으로 서운의 요구를 받아들인 셈이다.

“이벤트 관련 후기를 분석한 결과 이런 식의 이벤트가 부부 관계에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더군요.”

그야 그럴 테다. 모범 답안에 가까운 형식적인 대답에 서운은 조금 김이 샜다.

“이제 저희도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으니 저희에게도 이벤트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네.”

“그래서….”

“…….”

“…….”

“…….”

의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비록 개소리를 지껄일지라도 기계처럼 막힘없는 완벽한 화법을 구사하는 의진임을 생각하면 꽤나 생소한 광경이었다. 특정 사실이나 확정된 의견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의진은 서운이 보기에도 퍽 어색해 보였다.

“의진 씨?”

“…정정하겠습니다. 저희가 아니라 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진 씨한테요?”

“그렇습니다. 저희의 결혼은 서운 씨의 승낙으로 이루어졌으니 결혼 생활 또한 서운 씨가 만족하셔야 유지될 수 있습니다. 즉, 제게는 서운 씨의 만족이 최우선으로, 본 이벤트는 제가 서운 씨에게 잘 보이기 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서운은 말없이 의진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의진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서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걸 준비했다고, 서운은 잠시 제 귀를 의심했다. 만약 서운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호텔 바닥을 나뒹굴던 같잖은 핑크색 포스트잇은 의진이 준비한 회심의 이벤트가 맞다.

결혼식 때문에 오전 시간을 통으로 날렸다는 헛소리를 지껄일 때는 언제고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헛짓거리를 했단다. 신혼여행까지 와서 종일 서재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면서, 애초에 같이 나갈 생각도 없었으면서 내 만족이 최우선이란다.

그걸 믿으라고? 서운은 제일 먼저 의심부터 하고 봤다. 그렇잖아, 지금의 의진은 앞뒤가 안 맞는다. 그런데도 서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는 건 상대가 의진이기 때문이다.

“나한테 잘 보이고 싶다는 사람이 신혼여행까지 와서 그렇게 일만 했어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은 응당 해내는 것이….”

“…….”

“…맞, 습니….”

익숙하게 개소리를 늘어놓던 의진이 눈치껏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슬쩍 서운을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싫으셨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네, 말씀하십시오.”

“…….”

“…….”

“…….”

“서운 씨?”

의진의 부름에도 서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이고 뭐고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서운은 이 상황이 못내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황당함에 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다 못해 눈앞의 알파가 귀여워 보일 지경이니 말 다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게 나타난 걸까. 서운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연애도 해 볼 만큼 해 봤고 사회생활도 해 볼 만큼 해 봤지만 서운에게 의진은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예측 불가인 사람.

아, 그래. 생각났다. 그래서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지. 어쩌면 의진은 서운의 인생에서 가장 큰 도박인지도 모르겠다.

“아, 벌써 4시군요.”

맞은편에서 짧게 알람이 울렸다. 미리 설정을 해 놓은 건지 의진이 능숙하게 알람을 껐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고는 서운에게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며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낸다. 설마…. 서운의 시선이 다급하게 테이블로 향했다.

“지금부터 이혼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의진은 기어코 XX전자 로고가 찍힌 노트북을 꺼내 놓았다. 눈치도 없이 180°로 펼쳐지는 XX전자 신제품을 바라보며 서운이 말했다.

“안 해도 돼요. 필요 없어요.”

어차피 이혼은 언제라도 할 수 있다. 서운의 단호한 태도에 의진이 노트북 전원을 켜다 말고 서운을 쳐다보았다.

“필요 없으십니까?”

“네.”

“…그렇군요.”

그러더니 다시 내려놓는다.

“알겠습니다.”

그게 다였다. 정말로 준비를 해 온 것도 놀라운데 하지 말란다고 그걸 또 순순히 접는다. 서운은 그런 의진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의진의 등 뒤로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태양을 등지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하와이는 훨씬 아름다웠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푸른 절경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넘실거린다. 주위에서는 이국적인 언어가 들려오고 코끝을 스치는 공기마저 어딘가 이질적이다.

루프탑이라니, 인공지능이 제법이다. 이건 뭐 장소가 다했다. 서운은 다시 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진은 처음 자세 그대로 서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저 눈. 저 눈이다. 서운과 똑바로 시선이 마주치고도 흔들림 없는 두 눈을 보고 있자니 결심이 선다. 다시 한번 닳고 닳은 연애를 시작해 볼 결심이, 누군가를 다시금 마음에 담고 싶어지는 용기가 생긴다.

“대신 본인 얘기나 해 줘요.”

아마 서운은 이날의 결심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몇 시간 뒤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지금 서운은 눈앞의 알파가 무척 알고 싶어졌기 때문에. 서운은 의진의 마음이 알고 싶어졌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해졌다.

“제 얘기 말입니까?”

“네. 의진 씨 얘기요.”

“이혼 브리핑은….”

“안 궁금해졌어요.”

“…그러십니까.”

“응.”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정확히 저에 대해 어떤 점이 궁금하신 건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 나랑 결혼했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의진이 눈썹을 까닥거렸다. 뭘 얼마나 봤다고 처음 봤을 때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서운은 느긋하게 의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인공지능을 닮은 우리의 요정님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으면 대답이 느려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꼴에 남편이라고 제법 아는 게 많아졌다.

약간의 텀을 두고 의진이 대답했다.

“그건….”

당신이 알고 싶어진다. 연애의 시작이었다.

“저와 가치관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딱히 뭔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놀란 서운이 물었다.

“누가요? 제가요?”

“네, 그렇습니다.”

“대체 누가 그런 막말을…!”

너무 놀라 속마음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다행히 서운은 반응속도가 빠른 사람이다.

“제가 어디까지 말했어요?”

“대체 누가 그런 막말을,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아, 별말 안 했구나. 서운은 안도하며 아이스 라테를 마셨다. 맛있었다. 평정심을 되찾은 서운이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방금 농담한 거죠?”

“전 농담 안 합니다.”

“아니, 내가 어디가 어때서요?!”

그리고 실패했다. 서운은 의진을 만난 이후 처음으로 성을 냈다. 의진이 어딘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화나셨습니까?”

“화내는 게 아니라.”

“화나신 것 같습니다.”

“…화 안 났으니까 자세히 좀 말해 봐요. 내가 닮았어요? 의진 씨랑?”

“그렇습니다. 외모가 아니라 가치관이 닮았습니다. 서운 씨는 저랑 다르게 생기셨습니다.”

지금 내가 큰소리 좀 냈다고 고새 돌려 까는 건가? 어째 의심스러운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알아요, 다른 거. 의진 씨는 잘생겼잖아요.”

서운은 그렇게 말하며 얼음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얼음물은 시원했지만 이어진 의진의 발언에 속이 시원하려다 말았다.

“제가 잘생겼습니까?”

“뭐요? 지금 어그로 끄는 거예요?”

“그런 적 없습니다.”

어그로에 민감한 의진이 눈에 띄게 발끈했다가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물론 곧잘 듣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오, 알면서도 그랬다? 그런 게 어그로 아닌가?”

“아닙니다!”

그런 보람도 없이 의진이 곧바로 반박에 나섰다.

“서운 씨는 한 번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서 여쭤봤습니다.”

당연하지. 그런 얘기를 어떻게 본인한테 해. 서운의 속을 알 리 없는 의진이 다시금 같은 말을 물었다.

“제가 잘생겼습니까?”

이게 그렇게 진지할 일이야? 놀랍게도 의진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어떻게든 서운의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속으로는 수도 없이 해 온 생각이니 말로 못 할 것도 없지만 어쩐지 쑥스럽다. 섹스까지 해 놓고 고작 이런 말이 쑥스러울 줄이야. 서운은 조금 생소한 기분이 되어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잘생겼어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뭘 또 다행이기까지.”

“장점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제 얼굴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의진이 그새 다른 질문을 장전하고 나섰다. “아, 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서운은 어느새 다음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운 씨는 저와 결혼하신 걸 후회하십니까?”

“…우리 어제 결혼하지 않았어요?”

“네. 맞습니다.”

“아니, 뭐 한 게 있어야 후회도 하죠. 하와이까지 와서 한 거라고는….”

떡밖에 안 쳤다. 물론, 첫날밤을 그냥 보내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하는데…. 의진의 질문에 서운만 혼란스러워졌다. 의진이 멈추지 않고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런 말씀은 왜 하신 겁니까?”

“뭐가요, 또.”

“이혼 안 할 거니 따로 브리핑은 안 해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 말인즉슨 처음부터 이혼을 염두에 두고 브리핑을 요청하신 걸로 해석됩니다.”

제법이다. 방심하고 있다가 제대로 정곡을 찔렸다. 서운은 태연한 척 얼음물을 들이켜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의진은 그런 서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확인 사살에 나섰다.

“그것도 하와이로 출발하는 비행기에서 그러셨습니다.”

“아, 그랬어요?”

“네, 그러셨습니다.”

“하, 하하. 그랬구나…. 근데 얘기가 왜 이렇게 됐지? 분명히 내가 먼저 물어본 것 같은데. 왜 나랑 결혼했냐고.”

안다, 유치한 거. 아는데, 나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조금도 하고 싶지 않다. 이혼의 책임이 전적으로 상대방에게 있지 않은 이상 내가 먼저 이혼 이야기를 꺼내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럼 내가 어제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데. 그게 뭐였지?

죄송합니다, 서운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의진이 사과를 해 왔다. 제가 순서를 어겼군요, 란다. 말 하나는 참 잘 듣는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서운 씨는 저와 비슷한 가치관을 가지고 계셔서 결혼하기에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요, 그거.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그런 생각을 한 건지 들어나 봅시다.”

“딱히 짓이라고 할 만한 일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서운 씨는 현명하십니다.”

“…그거 참 다행이네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명확하게 구분해 이성적으로 행동할 줄 아시죠.”

“제가요?”

“그렇습니다. 언제라도 아이를 가질 수 있지만 아이를 갖고 싶은 이유가 선행되어야 하는 점, 현질 안 하고 게임 하기와 아무 계획 없이 누워 있기 등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있지만 일이 있을 땐 일을 우선시한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기억난다. 저건 분명 서운이 한 말이 맞다. 맞긴 한데 별생각 없이 한 말을 저렇게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하물며 서운을 판단하는 척도로 쓰일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렇구나. 당연한 소리지만 의진도 사람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종합해 남을 판단하며 이 사람과 인연을 이어 나갈지 말지를 가늠하는 그런 어른. 서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텐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제가 남을 재는 건 이렇게 당연히 여기면서 자신 역시 반대의 입장이 될 수 있다는 건 왜 자꾸 잊어버리는 걸까.

바로 그겁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진이 경쾌하게 뒷말을 이어 나갔다.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는 본능을 절제하는 이성의 유무입니다. 저희처럼 페로몬의 영향을 받는 알파와 오메가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덕목이지요. 이러한 측면에서 저는 저와 비슷한 서운 씨에게 강한 확신을 느꼈습니다.”

“무슨 확신요?”

“이 사람이다.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

어쩐지 대단한 말을 들은 것 같다.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 왔지만 이런 말은 살면서 처음 듣는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아니, 정말 아닌 거 맞아?

본능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간지러운 감각에 서운이 느리게 눈꺼풀을 깜박였다. 의진은 여전히 똑바로 서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얘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긴 하는 걸까. 의진에게는 엄청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얼굴 뚫어지겠네.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의진에게는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다. 서운은 괜스레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서운의 손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저는 결혼이 처음입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의진이 곧바로 냅킨을 건네주었다. 서운은 냅킨을 받아 들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알아요. 초혼인 거.”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처음 해 보는 일에는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립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서운은 냅킨을 움켜쥔 채 가만히 의진을 쳐다보았다. 서운이 손을 닦지 않자 의진이 의아해하며 묻는다.

“냅킨에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요. 전혀요.”

그러자 멀뚱히 서운을 쳐다본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서운을 의아해하면서도 제가 닦아 주겠다는 선택지는 없는 알파, 진짜 알파고냐고.

“…증거가 필요해.”

서운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증거 말입니까?”

“네, 증거. 증거가 필요해요.”

사람의 마음을 꺼내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지 못하니까 더 가치 있는 걸 테지만 지금으로서는 일절 도움이 안 된다. 대신 서운은 지금 자신이 느낀 감정과 이 마음을 고스란히 남겨 두기로 했다. 이건 내가 선택한 거야, 라는 무언의 각오를 담아 이 순간을 기록해 두고 싶었다.

“이리 와요.”

무엇보다 결혼 생활에 대한 확실한 증거 자료가 있어야 나중에 위자료라도 톡톡히 받을 테다. 서운의 부름에 의진이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내 옆으로.”

“네.”

오란다고 토 한 번 달지 않고 냉큼 옆으로 건너온다. 하여튼 말은 잘 듣는다. 잘 듣는데 진짜 말만 잘 듣는다. 서운은 옆에서 멀뚱히 저를 내려다보는 의진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요. 좀 더 가까이. 옳지. 더 붙어 봐요.”

조금씩 서로의 거리가 줄어들더니 마침내 서운의 휴대폰 카메라에 두 사람의 모습이 잡혔다.

“영상으로 찍으시는 겁니까?”

“네. 싫어요?”

“아니요. 탁월한 선택입니다. 영상은 목소리와 실제 모습을 모두 담을 수 있어 증거 자료로 완벽합니다.”

그런 것까지 고려한 건 아니었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서운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잘 어울리네요.”

“별말씀을요. 서운 씨가 더 잘 어울리십니다.”

“알아요.”

두 사람은 카메라 속에서 사이좋게 토끼 귀를 달고 있었다. 일전에 민영이 알려 준 뷰티 어플 효과였다. 커다란 토끼 귀를 달고 있는 제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지 의진은 서운의 칭찬에도 로봇처럼 뻣뻣하게 굴었다. 알아서 눈 크기 키워 주니까 너무 그렇게 부릅뜨지 마요, 꼴에 한 번 해 봤다고 서운이 의진을 리드했다. 시키는 건 잘하는 의진이 곧바로 눈에서 힘을 뺐다. 영상미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일단 연습 한 번 가죠.”

“알겠습니다.”

“시작할게요.”

두 마리의 토끼가 열심히 커다란 귀를 흔들어 댔다. 일부러 흔든 건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귀가 알아서 뽀짝뽀짝 움직인다. 연습 끝에 의진의 표정이 한결 자연스러워지자 서운은 본격적으로 대본을 짰다.

“두 사람이 공통으로 지켜야 하는 의무부터 설명하고 각자 서로에게 바라는 점을 얘기하죠.”

“좋습니다.”

대본은 금방 완성되었다. 말이 거창해서 그렇지 부부 간의 도리야 사실 뻔했다. 외도 금지, 도박 금지, 폭력 금지, 사채 이용 금지 등 두 사람은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결혼에 지장을 주는 범법 행위에 무엇이 있는지를 토론했다.

마지막은 대망의 개인전이 장식했다. 원활한 결혼 생활을 위해 서로에게 바라는 점을 이야기하는 시간, 서운은 비장하게 카메라를 노려보았다. 뷰티 어플에 익숙하지 않은 의진을 배려해 서운이 시범을 보이기로 했다.

“그럼 나부터 할게요.”

“네.”

흠흠, 서운은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그랬다. 촬영 버튼을 누른 동시에 서운이 입을 열었다. 마치 이 시간만 기다려 온 사람 같았다.

“첫째, 잠자리 다음 날 아침에는 되도록 곁에 있기. 아, 출근은 예외예요. 질문은 다 끝나고 한 번에 받을게요. 둘째, 집에서 일을 하는 건 자유지만 이 경우 상대에게 미리 양해를 구할 것.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 두는데 상대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게 아니라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무슨 뜻인지 알죠? 모르겠으면 질문은 끝나고 한 번에 받을게요. 셋째, 야근하면 야근한다고 미리 연락하기. 넷째, 상대방의 신체적인 노동을 요하는 이벤트는 자제하기. 너무 놀라게 하는 것도 안 돼요. 예를 들면, 그, 아버님 축가라든가…. 앞으로 이런 건 꼭 얘기해 줘요. 아, 이걸 다섯째 항목으로 하면 되겠구나. 다섯째, 부부가 동반하는 가족 행사는 미리미리 얘기해 주기. 여섯째….”

일곱째…. 열째…. 열두째…. 항목이 끝도 없이 추가되었다. 찍다 보니 영상 재생 시간이 모자라서 몇 번 더 찍었다.

마침내 서운의 차례가 끝나고 의진의 순서가 되었다. 파이팅! 속 시원하게 제 할 말을 끝낸 서운이 의진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의진은 그런 서운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뷰티 필터를 잔뜩 뒤집어쓴 제 모습이 영 어색한지 묘하게 얼굴이 굳어 있다.

“안의진입니다. 서운 씨에게 바라는 점은….”

고로 서운은 의진이 뷰티 어플을 어색해한다 생각했다. 알고 보니 의진은 토끼 귀를 달고 있는 제 모습이 어색한 게 아니었다.

“…없습니다. 이상입니다.”

서운해서 그랬나 보다. 야, 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서운은 물끄러미 자신을 쳐다보는 의진을 피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았지만 나쁘지 않은 결혼 2일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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