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열한 번째 만남
아, 가을이다.
창밖 풍경을 보니 이제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다. 하와이는 지금도 여름 같겠지. 서운은 버석한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또다시 하와이를 떠올렸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하와이의 풍경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하와이, 참 좋았지. 곳곳에서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여유가 넘쳐흘렀고 놀 거리도, 먹을 것도 많았다. 서운에게는 그랬다.
한때 결혼 이틀 만에 이혼을 결심했던 서운은 신혼여행지에서 누구보다 잘 먹고 잘 놀다 왔다. 일명 호캉스 겸 신혼여행이었다.
결혼 둘째 날 이후 서운이 마사지를 받거나 선베드에 누워 여유를 만끽하는 동안 의진은 일을 했다. 존나게 했다. 그러다 출출해진 서운이 의진을 호출하면 두 사람은 밥을 먹으러 갔다. 하와이 지사 직원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레스토랑 추천 목록은 백전백승이었고, 결국 서운은 볼살이 뽀얗게 오른 채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물론 기내식도 먹었다. 의진이 자고 있는 서운을 미친 듯이 깨운 덕분이었다.)
그러다 혼자 노는 게 심심해지면 서운은 의진을 불러 내 함께 해변을 걸었다. 간단한 레저 스포츠도 즐겼다. 해양 액티비티 자체는 재미있었지만 한 번 하고 그만두었다. 재미있다고 해서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더라. 결혼식 직전까지 쉴 틈 없이 바빴던 서운에게 필요한 건 휴가이지 운동이 아니었다.
이쯤 되자 서운은 서재에 틀어박혀 있는 의진이 더는 나쁘게 보이지 않았다. 비록 신혼여행까지 가서 일을 했긴 하나 의진은 서운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덕분에 서운은 자신의 입맛대로 완벽하게 놀고먹는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나중에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서운은 완벽하게 적응했다. 초반에는 못내 걱정도 됐으나, 의진은 제가 일을 한다고 해서 서운을 한심하게 보거나 눈치를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서운을 대단히 여겼다. 신혼여행 초반에 있었던 일이다.
“일어나셨습니까?”
“…나 잤어요?”
“네. 주무셨습니다.”
“언제 잠들었지….”
“제법 됐습니다. 제가 아는 것만 해도 2시간 10분이나 됩니다.”
“…아, 네.”
멀쩡한 침대를 두고 소파에 구겨진 채 잠들었다. 그것도 조식을 먹고 방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잤다. 무슨 짐승도 아니고…. 서운은 더듬더듬 입가 주변을 문질러 보았다. 충분한 숙면과 풍족한 식사로 매끈매끈 광이 나는 피부가 만져졌다. 다행히 침은 안 흘린 것 같았다.
와, 나 진짜 쓰레기처럼 보였겠다. 뒤늦게 일어날 채비를 하는데 테이블 위에 아까는 없던 노트북이 놓여 있다. XX전자 로고가 박혀 있는 걸 보니 의진의 노트북이었다. (서운의 건 가져오지도 않았을뿐더러 XX전자의 경쟁사인 YY전자 제품이다.) 언제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재가 아니라 여기서 일을 하고 있었나 보다.
…설마 계속 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어제 피곤했다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나. 그러기에는 어제 하루도 너무 잘 먹고 잘 잤다. 서운의 복잡한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의진이 사뭇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서운 씨는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뭐가요, 또.”
“이렇게 본능적이신데 이성을 놓지 않고 일상을 유지해 오신 거 아닙니까. 정말 훌륭하십니다.”
이게 욕이야, 칭찬이야. 어느 쪽이든 찝찝한 건 매한가지지만 적어도 이제는 안다. 저건 진짜다. 쟤는 진짜야! 의진은 진심이었다.
그럼 된 거 아닌가? 잠이 덜 깬 이성적인 사고가 능숙하게 서운을 달랬다. 야, 더 생각하지 마. 대단하다잖아. 훌륭하다잖아!
그럼, 그럼. 뭐가 됐든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서운은 하늘 높이 일어선 뒷머리를 달고서 한껏 우쭐거렸다. 칭찬은 서운도 춤추게 한다.
“알아요.”
“자기 객관화까지, 역시 대단하십니다.”
“아니,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짝짝짝! 갑자기 의진이 손뼉을 쳤다. 손뼉은 또 얼마나 잘 치는지 박수 소리 한 번 우렁차다.
“겸손함까지 갖추시다니요.”
“그, 그런가?”
“그렇습니다. 소파에서 주무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간단하게 요기라도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힘들진 않았는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남들이라면 불편해서 중간에 깼을 겁니다.”
서운은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박수를 받았다. 룸서비스 메뉴판도 받았다. 별로 배 안 고픈데…. 서운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착실하게 메뉴를 살폈고, 시켰다. 그래.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서운은 본격적으로 나태해졌다.
생각해 보니 하나 더 있다. 이날을 기점으로 의진이 동기화됐다. 대체 사람을 뭘로 보는지 서운이 조금 심심해 보인다 싶으면 (혹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룸서비스 메뉴판을 가져다주기 바빴다. 밥 먹고 왔는데 또 뭘 먹어요. 그렇게 말해 놓고 막상 룸서비스가 도착하면 마음이 또 그게 아닌지라 서운은 열심히 맛을 봤다.
그러고는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함께 산책을 나갔다. 그런 날들이었다. 만남 횟수는 여전히 다섯 번에 멈춰 있었지만 종일 붙어 있다 보니 나름대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주로 음식 얘기이긴 했지만 어쨌든.
서로 아무 말 대잔치를 하며 해변을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 걷게 됐다. 마지막 날 밤에는 손도 잡았다. 노을 지는 해변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마음이 벅차올라서 서운이 먼저 잡았다. 섹스도 한 마당에 놀라기는 왜 놀라는지, 처음에는 관절 인형처럼 뻣뻣하게 굴던 의진도 조심스럽게 서운의 손을 마주 잡아 왔다. 손길만 조심스러웠지 서운의 손을 움켜쥐는 악력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서운은 저도 모르게 쌍욕을 했다. 사람이 놀라면 욕 좀 할 수 있지. 서운은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냥 좀 놀라서….”
“그렇지만 욕하셨잖습니까.”
“…에이. 그게 무슨 욕이에요. 감탄사지.”
“분명히 씨발이라고 하셨….”
“어, 별똥별이다!”
어머, 별똥별이래! 어디 어디? 자신의 허물을 덮고자 서운이 급조해 낸 구라에 주변에 포진해 있던 한국인 커플들이 미어캣처럼 열심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행히 의진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유는 달랐다.
“이상하군요. 지금은 유성이 잘 보이는 시간대가 아닙니다. 정확히 어떤 빛을 띠고 있었는지요? 위치는 어디쯤이었습니까?”
“어, 잘 기억이…. 여긴 하와이니까 더 잘 보이는 거 아닐까요?”
“유성의 종류나 관측자의 위치와 상관없이 일반적으로 유성이 가장 잘 보이는 시간은 보통 새벽 1시입니다.”
“아, 네.”
“물론 확률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유성체가 지구 공전 속도보다 빨리 지구를 쫓아와 대기권에 진입할 경우 저녁 시간에도….”
다시 말하지만 뭐가 됐든 좋은 게 좋은 거다. 서운의 신조이기도 했다. 그날 서운은 의진과 손을 잡고 오래도록 하와이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엽서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BGM도 함께했다. 서운이 쏘아 올린 별똥별로 시작한 천체 이야기였다.
맞잡은 두 손의 온기는 따스했고,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닷바람은 적당히 미지근했다. 두 사람은 해가 저물고 캄캄한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행성이니 위성이니 별자리이니 서운은 관심도 없는 천체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의진의 목소리가 조금 들떠 있어서, 그냥 계속 그러고 싶었다. 서운의 몇 안 되는 신혼여행다운 기억 중 하나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한국, 서운은 평일 대낮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신혼, 단어만 들어도 설레는 시기. 남들은 눈만 마주쳐도 밥상을 뒤엎기 바쁘다던데 정작 서운은 매일매일 집 밖을 배회하고 있다.
이게 다 날씨 때문이다.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한국 날씨는 자꾸만 사람을 집 밖으로 기어 나오게 만든다. 청명한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고, 남이 만들어 준 커피는 언제나 옳다. 아직은 고민 끝에 아이스를 주문하게 되지만 따뜻한 커피의 계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11월 말만 돼도 지금보다 훨씬 추워지겠지.
겨우 한 달 후의 일이건만 지금은 그저 멀게만 느껴진다. 서운은 멍하게 날짜를 가늠해 보았다. 11월 말이면 민영의 수능도 끝날 테고 외숙모의 생신도 다가온다. 그리고 또….
- 서운아!
“네. 외숙모.”
- 잘 챙겨 간 거지? 빠트린 건 없고?
우리 외숙모도 양반은 못 된다. 전화를 받는 서운의 옆자리에는 커다란 김치 통들이 즐비해 있었다. 이 김치 통들을 카페 안까지 들고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서운은 다시금 김치 통 개수를 확인했다. 총 세 통이다. 무려 세 통이나 된다. 이 정도면 남아 있던 묵은지를 모조리 꺼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물며 한 통은 총각김치라 마음이 더 무거웠다. 묵은 총각김치, 민영이가 좋아하는 건데….
“다 챙겼어요. 총 세 통 맞죠?”
흉기나 다름없는 이 김치 통들은 외숙모가 준비한 회심의 선물이다. 정확히는 생일 선물로, 배달은 서운이 맡았다.
- 응, 맞아. 무거웠지. 안 다치게 잘 가져간 거지?
“그럼요. 바로 현관 앞에 있어서 들기 편했어요. 그냥 두셨으면 제가 알아서 꺼냈을 텐데. 무겁지 않으셨어요?”
- 얘는, 당연히 네 외삼촌 시켰지. 아침에 그거 좀 들었다고 그새 또 허리 나갔잖니. 그놈의 척추뼈는 유리로 만들어졌는지 원….
아, 외삼촌이 또…! 이놈의 생일이 뭐라고 벌써 몇 명이 피해를 입은 건지 모르겠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이게 다 서운 한 명 때문에 생긴 일이다. 서운은 한층 더 무거운 마음으로 괜스레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 그나저나 사돈댁 입에도 맞아야 할 텐데 걱정이네. 몸에 좋은 것만 먹고 살았을 텐데 괜한 짓 하는 거 아니겠지?
“그럼요. 엄청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 그럼 다행이지만… 괜히 네 얼굴에 먹칠할까 봐….
“그럴 리 없으니까 그런 말씀 마세요.”
전화 통화여서 다행이다. 적어도 표정 관리를 할 필요는 없으니. 서운은 애써 속마음을 감춘 채 열심히 외숙모를 안심시켰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재벌가에 김치 선물이라니, 과연 좋아할까. 외숙모 앞에서야 당연히 그럴 거라고 한껏 큰소리쳤지만 사실 서운도 잘 모른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결혼한 지인이 들려준 고구마 백 개 먹은 이야기나 인터넷에서 본 대환장 시가 스토리만 떠오른다. 하필이면 상대가 상대인지라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고마워하는 척이라도 할 테니 최소한의 상식을 기대하는 수밖에. 신혼여행을 다녀왔을 땐 의진이라도 옆에 있었지, 역사적인 나 홀로 시가 방문을 앞둔 서운의 마음이 무거웠다.
- 기껏 초대까지 받았는데 아쉽게 됐네. 여민영 이놈의 기지배는 왜 학부모 상담을 이제야 말해서는….
“상담은 잘 받으셨어요?”
- 아직. 방금 막 도착했어. 아침에 한 소리 했다고 나와 보지도 않는다. 얘를 어쩜 좋니?
“예민한 시기잖아요. 제가 잘 달래 볼게요.”
- 어휴, 말도 마라. 아주 폭군이 따로 없어. 고3이 벼슬이지, 벼슬. 집안 식구들이 죄다 여민영 눈치 보기 바쁘다니까? 서운이 너도 자식 생기면 알 거야. 자식만큼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없어요.
민영에게는 미안하지만 대화 주제가 바뀌어서 다행이다. 덕분에 서운은 민영의 얘기만 하다가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통화까지 마치고 나니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심 오지 않기를 바랐던 약속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자리가 불편한 것도 불편한 건데 김치 통을 들고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하다.
서운을 심란하게 만든 묵은지 세 통의 배달지는 바로 한남동, 의진의 본가다. 서운은 오늘 의진의 고모 생신 파티에 간다. 의진의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외숙모를 대신해서. 참고로 의진 없이 혼자 간다. 걔 지금 한국에 없다.
그 시발놈 진짜로 장기 출장 갔다. 둘이 같이 뭐라도 좀 해 보나 싶었는데 그럴 틈도 없이 떠났다.
서운은 비장하게 카페를 나섰다. 인생 뭐 있냐. 못 먹어도 고! 나에겐 위자료가 있다! 이제 결전의 시간이다.
* * *
국물까지 꽉꽉 눌러 담은 묵은지 세 통의 위력은 대단했다. 서운은 그림 같은 정원을 등진 채 연신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인사를 드리긴 했지만 그땐 밖에서 만났다. 이런 집인 줄 알았으면 입구에서 택시를 돌려보내지 않았을 테다. 뭔 놈의 집이 이렇게 큰 건지 저택 입구에서 다시 한참을 들어가야 현관이 나왔다. 안까지 들어가 달라고 해야 했는데. 후회해 봤자 이미 늦었다. 택시는 떠났고, 서운의 발 옆에는 김치 세 통이 놓여 있었다.
누가 보면 히트 사이클이라도 온 줄 알겠네. 서운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한 번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어른들을 만나는 자리는 언제나 긴장된다. 비단 의진의 가족이어서가 아니라 외삼촌과 외숙모에게 누가 되면 안 된다는 서운 본인의 중압감 때문에. 어쩌면 피해 의식인지도 모르겠다.
부모 없이 자란 가정 교육 제대로 못 받은 애. 이제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어릴 때처럼 상처받진 않겠지만 이건 자존심 문제다. 적선하듯 지나가며 내던진 값싼 동정에 일일이 마음을 다치던 어린 정서운은 없다 이거야.
서운은 조금씩 머리가 커지면서 어른들 앞에서는 특히 예의 바르게 보이기 위해 애썼다. 속사정이 어떻든 간에 표면으로는 조금도 흠집 잡히고 싶지 않았다. 상견례 때야 끽해야 파혼이라는 심정으로 후루룩 해치웠다지만 지금은 무게가 다르다. 저의 자존심뿐만 아니라 저를 키워 준 외삼촌 내외의 희생과 노력이 걸려 있다. 무엇보다 서운 자신이 무너지는 경험 따위는 지난 한 번으로 족하다. 서운이 의진을 만나기 훨씬 전의 일이다.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조각들이 박혀 있는 웅장한 현관문이 유독 거대해 보인다. 제아무리 크고 대단해 봤자 겨우 현관문일 뿐인데 이 문을 열기가 왜 이리 두려운 건지. 마음 놓고 울 곳이 없어 샤워기 아래에서 머리를 감으며 엉엉 울던 어린 날의 자신은 더는 찾아볼 수 없는데도 처음은 늘 어렵고 무섭기만 하다.
그래도 괜찮다. 결국 이 또한 지나갈 테니. 어른이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은 세상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고,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점이다.
괜찮아. 난 괜찮을 거야. 서운은 어른스럽게 스스로를 타일렀다. 주눅 들 거 없어. 위축되지 마. 설사 그런 마음이 든다 해도 절대로 다른 사람 앞에서 티 내지 마.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어머!”
외마디 비명과 함께 깃털 꽂힌 베레모를 쓴 미모의 중년 여성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우, 와… 뮤지컬 보는 줄 알았네. 비현실적인 광경에 멍하게 서 있던 것도 잠시, 머릿속에서 왕왕 경고음이 울려 댔다. 인사! 어른을 만나면 인사부터!
허둥대는 머릿속과 달리 서운은 깍듯하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생존 본능이 이루어 낸 쾌거였다.
“안녕하세요, 고모님. 그동안 잘 지내셨….”
“세상에!”
그리고 씹혔다. 쾅! 거대한 현관문은 보이는 것만큼이나 묵직한 소리를 냈다. 의진의 고모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굳게 닫힌 현관문 너머에서 고모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서운이가 왔어!”
그럼 난 줄 알고 닫았다는 건데. 그게 더 이상하다. 뭐지, 뭘까. 내가 실수라도 한 걸까?
덜컥 겁부터 먹었으나 다행히 불안은 오래가지 않았다. 쾅! 문이 열리고, 그들이 나왔다. 불안을 뛰어넘는 대혼돈 시대가 찾아왔다.
“서운이 왔구나!”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잘 지냈어요?”
“오랜만에 보니까 더 반갑네!”
“아버지! 큰아버지! 서운이가 왔어요!”
“뭐? 벌써? 윤 기사한테 아무 연락도 못 받았는데?”
“서운 씨! 반가워요!”
시끄럽다. 제일 처음 든 생각은 그거였다. 미묘하게 의진을 닮은 알파와 오메가들이 튀어나와 앞다투어 서운을 반겨 주었다. 이리 반겨 주시니 감사하긴 한데 꼭 이런 식으로 반겨 줘야 하나 싶다. 키는 하나같이 왜 이렇게 큰지 서운은 어느새 안씨 집안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서운도 작은 키가 아닌데 저보다 머리 하나는 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려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이 집은 오메가도 크다.
“어머나, 이게 다 뭐야?”
“아, 저희 외숙모가 보내는 선물….”
“사돈도 참. 아무것도 준비하시지 말라니까 이리 귀한 걸.”
“서운이가 선물을 준비했다고?”
“그렇대요!”
“짐이 이렇게 많은데 혼자 왔어요? 윤 기사는 어쩌고?”
“아, 그냥 택시 타고 왔….”
“세상에! 기사도 없이 혼자 여기까지!”
“서운이가 혼자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그렇대요!”
“서운이가 왔어?”
“윤 기사한테 연락받은 사람?”
산만하다. 좀 많이, 산만하다. 서운은 한 명인데 사방에서 물음표 살인마들의 질문 폭격이 쏟아진다.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수준이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인사도 못 드렸다. 못 드렸는데… 모르겠다. 다 모르겠고, 일단 제 인사나 좀 받아 주면 좋겠다. 기왕이면 김치 통부터 받아 주면 더 좋고.
지니 이 새끼는 왜 막내로 태어나서는. 하필 시가 식구들이 전부 다 손윗사람들이어서 먼저 말을 끊기도 어려웠다. 모두가 제각각 제 할 말만 해 대는 상황, 상견례 날처럼 중간에 나서서 제재하는 놈이 없으니 소란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도와줘요, 기X지니! 서운은 비로소 시발놈의 부재를 실감했다.
“잠깐, 이게 뭐야? 다들 알고 있었어?”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환영식을 멈춘 건 오늘의 주인공, 의진의 고모다. 그는 어딘가 못마땅한 얼굴로 서운과 가족들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싸늘한 시선에 지레 놀란 서운이 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어른들은 서 있는 자세부터 사소한 말버릇까지 모든 걸 눈여겨보았다. 그 귀결은 당연하게도 ‘가정 교육’이다. 고모가 말했다.
“손님이 더 온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당연하지. 서프라이즈니까!”
예? 서프라이즈요? 서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프라이즈 선물이 되어 있었다. 신이 난 가족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미리 얘기하면 그게 서프라이즈니?”
“맞아, 맞아!”
“짜잔! 우리가 준비한 선물, 서운 씨야!”
“누나,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해요, 고모!”
옛말에 씨 도둑질은 못 한다더니. 서프라이즈를 좋아하는 것도 집안 내력인 모양이다. 유전자 한 번 강력하다. 믿고 싶지 않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서운의 외숙모도 한패인 것 같다.
모두가 서프라이즈의 성공을 자축하는 가운데 고모의 굳은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서운만 그리 느낀 거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 눈에도 그래 보이는 것 같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모두가 하나둘 웃음을 멈추고 고모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게 이번 서프라이즈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서운도 같이 봤다. 아니, 대체 내가 왜? 세상 억울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째 느낌이 안 좋았다.
“…너무 좋잖아! 이리 와요, 내 선물! 으음! 와 줘서 고마워요! 생일 선물 잘 받을게요!”
여기서 서운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의진의 고모도 안씨 집안 핏줄인 걸 깜박했다. 서운은 다짜고짜 어깨를 붙들린 채 양쪽 뺨에 베쥬를 받았다. 지금 내 뺨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안이 벙벙했다. 모니터에서나 본 베쥬를 동양인과, 그것도 오늘부로 정확히 세 번 본 시가 쪽 손윗사람과 했다.
짝짝짝! 이유는 모르겠는데 난데없는 박수 세례도 받았다. “세상에! 나 진짜 놀랐어!”, “우리가 한 수 당했네!”, “이야, 우리 써니, 제법인데?”, “역시 아가씨한테는 못 당하겠어요.”, “우리 고모가 최고다!”. 고모의 기습 서프라이즈에 서운을 제외한 모두가 감동 받은 것 같았다.
이쯤에서 서운은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잘 모르는 이상한 분들보다는 내가 아는 이상한 놈이 더 낫다. 여러모로 장기 출장을 떠난 우리의 정리 요정이 유난히 생각나는 밤이다.
“우리 집에 온 걸 환영해요!”
아, 존나 퇴근하고 싶다. 서운의 인생에 다시없을 화려한 신고식이었다.
“어쩜!”
“어떻게 김치에서 이런 맛이!”
“정성이 들어간 김치는 역시 다르네요.”
신고식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채로 외숙모의 묵은지가 생일 파티의 서막을 열었다. 서운은 내심 안도하면서도 여전히 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운이 준비한 건 대환장 시가 스토리를 향한 반격 자세지, 이런 난리 통이 아니다.
광활한 대리석 식탁 한가운데 놓인 익숙한 김치 통, 그리고 사람들. 모두가 교과서에 나올 법한 우아한 자세로 묵은지를 맛보는데 제발 좀 그냥 먹기만 하면 좋겠다. 그래 봤자 김치일 뿐이거늘. 세상에 없는 산해진미를 먹어도 이러지는 않을 테다. 혹시 신종 괴롭힘인가? 듣고 있는 서운만 미칠 것 같다. 하필이면 식탁 센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더 미치겠다. 황송하게도 서운은 오늘의 주인공인 고모의 옆자리를 하사받았다.
의진의 가족들은 밥도 없이 묵은지를 먹고 있었다. 제발 밥도 같이 먹어 줬으면. 보고 있는 서운의 입 안이 다 짜다. 이런 서운의 바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듯 총각김치를 음미하던 의진의 아버지가 이내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크흡!”
그러더니 울었다. 아니, 대체 왜? 안의선 회장의 어깨가 들썩거린다. 서운의 어이도 함께 들썩거린다. 그러니까 대체 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지식인 기능을 실행시키던 그의 인공지능이 다시 한번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행복하군요.”
네? 갑자기요? 곧이어 다른 가족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갑자기 또 왜들 이러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럴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최고다. 하, 하하…. 서운은 적당히 말을 아끼며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가족들은 저마다 감상에 젖어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가족끼리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생일을 축하하는 삶이라니.”
“정말 행복해요.”
“역시 인생은 돈이 전부가 아닌 것을.”
“지니가 아니었으면 평생 모를 뻔했어.”
“지니가 우리 집안 복덩이야.”
“우리 집안 복덩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럼, 그럼. 맞는 말이다. 가족끼리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생일을 축하하는 삶, 행복하지. 행복한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다. 영 적응되지 않는 분위기에 어색하게 눈동자만 굴려 대고 있는데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졌다.
“서운 씨, 우리와 가족이 되어 줘서 고마워요.”
“서운 씨처럼 좋은 사람이 지니의 동반자라니, 정말 기뻐요.”
의진도 그렇고 이 집안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매사에 진지한 모양이다. 이런 식의 노골적인 칭찬에는 영 면역이 없는지라 여러모로 어색함이 가시질 않는다.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니, 아니에요. 저야말로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실망하시지 않도록 잘… 아니, 노력하겠습니다.”
총체적 난국이다. 말도 더듬고 쓸데없는 추임새까지 덧붙였다. 이러면 어른들이 싫어할 텐데….
서운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도리어 찬사가 터져 나왔다. “…어쩜, 겸손하기까지!” 예? 제가요? 덕분에 듣는 서운만 민망해졌다.
“저 아이가 우리의 가족이라니, 우리는 정말 복이 많네요.”
“아무래도 복덩이가 늘어난 것 같죠?”
“덩이! 서운이 애칭으로 덩이 어때요?”
“귀엽다. 그치만 우니도 좋은 것 같아!”
“둘 중 뭐가 더 좋을까?”
“서운이가 골라 줄래?”
아니, 잠시만요. 얘기가 왜 이렇게 된 거죠. 민망하다는 핑계로 저들의 대화를 적당히 흘려들었더니 자연스럽게 난관에 봉착해 있다.
특정 형용사와 똑 닮은 이름 때문에 어려서부터 온갖 놀림에 시달려 온 서운은 이름을 바꿔 부르는 행위에 무척 예민하다. 거짓말 안 하고 ‘서운이가 서운하대’ 따위의 말장난은 백 번도 넘게 들어 봤다. 지금이야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뭐가 됐든 ‘덩이’는 안 된다. 안 된다고!
“서운 씨 덕분에 우리 미숙이처럼 좋은 사람과도 가족이 되고, 미숙이가 가족들을 위해 직접 담근, 이렇게 귀한 선물까지 받아 보고…. 나 정말 행복해!”
때마침 의진의 고모가 울먹이지 않았더라면 서운은 그대로 이성을 놓았을 테다. 덩이는 아니야. 진짜 아니라고! 고모는 감격에 젖어 외숙모의 김치 통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서운은 아직도 저 김치 통이 이 집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사돈께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귀한 걸 세 통이나 주시다니요.”
“새 차는 어때요?”
“이번에 딸이 수능 본다면서요. 대학 선물도 같이 준비하는 건 어때요?”
또, 또, 또. 또 앞서간다. 김치와 자동차가 대등한 것도 놀라운데 뭘 또 대학 선물까지. 계속 보다 보니까 약간 패턴을 알 것 같기도 하고. 서운은 이들을 말리는 대신 자연스럽게 주의를 환기했다.
“고모님, 저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 한 마디로 한바탕 소란이 이어졌다. 뒤늦게 고모의 생신 사실을 알게 된 서운이 의진에게 물어 둘이 함께 준비한 선물이었는데, 가족들 모두가 하나같이 서운을 말렸다.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사실 우리끼리는 선물을 주고받지 않아요.”
“돈으로 된 선물은 더더욱.”
“카드도 포함이에요.”
서운과 의진이 준비한 선물은 신용카드였다. 전적으로 의진의 의견을 따른 결과였다. 의진은 매년 가족들에게 자기 명의로 된 신용카드를 만들어 선물한다고 했다. 갖고 싶은 걸 가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는 편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정말 그걸로 될까 싶었지만 사는 세계가 다른 집이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외숙모의 김치 선물이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받지 않는다고. 영문을 모르는 서운과 달리 가족들은 태연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우리 나름의 노력이니 혹여나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다신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거든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었다. 의진의 가족을 둘러싼 온갖 추측과 루머가 아닌 진실 그 자체, 이들만이 알고 있을 가장 은밀한 이야기. 어느새 옛 추억에 젖어 든 의진의 큰아버지가 이야기를 보탰다.
“벌써 10년이 훨씬 더 된 이야기구나. 그땐 TV만 틀면 선이가 나왔지.”
“아, 맞아요. 집에서는 못 보는 아버지가 뉴스에는 매일 나오셨죠.”
“그랬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구나. 검찰 조사 때문에 선이가 집에 못 들어오는 날이면 지니를 앉혀 두고 뉴스부터 틀어 줬는데….”
다르다. 어느 집에나 하나씩 존재하는 옛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데 그 무게가, 차원이 다르다. 지레 놀란 서운이 알아서 입을 닫은 건 당연한 처사였다. 놀란 것도 놀란 건데 서운 역시 이 일을 알고 있어서 더 말을 아끼게 됐다. 모를 수가 없었다. TV만 틀면 어디서나 안의선 회장의 이야기를 떠들어 대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물론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그걸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지니한테는 아닌가 봐요.”
“오히려 자기 때문에 우리가 극심한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죠.”
“그러니까 말이에요. 중요한 건 돈이 아닌 것을….”
“그래도 조금씩 변하고 있잖아요?”
“그럼, 그럼! 비록 정말로… 출장을… 가긴 했지만….”
이 대목에서 모두의 시선이 서운에게 집중됐다. 기분 탓인가, 다들 진심으로 서운에게 미안해하는 눈치다.
그러게요. 서운은 속으로만 대답했다. 진짜 갔다, 걔. 알다시피 신혼여행 첫째 날에 이혼의 위기가 닥쳐왔으나 어찌어찌 지금에 이르렀다. 장기 출장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떠났다. 신혼여행을 다섯 번째 만남으로 치면 그래도 열 번은 보고 갔구나 싶다. 아무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서운을 만나기 전부터 예정된 출장이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의진은 국경을 오가며 출장 중에 있고, 서운은 서운대로 자신의 일상을 살고 있다. 혼자이나 혼자가 아닌, 전보다 조금 소란스러워진 그런 일상. 그 중심에는 의진이 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1시간 20분 동안 간단하게 업무를 본 뒤 오전 운동을 마치고 회의 장소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회의 시간은 약 4시간 소요될 예정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얘도 양반은 못 된다. 지 생각하는 줄 어떻게 알고 딱 맞춰서 메시지를 보내 놨다. 오늘 서운의 저녁 일정을 알고 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좀 이르다. 의진의 장기 출장 전날, 가면 정신없을 테니 자기 전에 연락이나 한번 하라고 했더니 출장 내내 한국 시간에 맞춰서 이렇게 생존 신고를 해 온다.
이러니까 마냥 미워할 수 없는 거다. 서운은 자조적인 기분이 되어 의진의 지난 메시지를 훑어보았다. 확실히 처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간략해졌다. 처음에는 거의 보고서 수준이었다. 사실 여기서 더 줄여도 좋을 것 같다.
“서운아?”
“아, 죄송합니다.”
인간의 적응력이 이렇게 무섭다. 더 줄여도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메시지가 오면 한 줄 한 줄 다 읽어 보게 된다. 이 짓을 벌써 한 달째 하는 중이니 습관이라면 습관이 됐다.
“혹시….”
“설마…?”
“지니…?”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네, 맞아요. 의진 씨한테 연락이 와서….” 의아해하면서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자 모두 미어캣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어쩐지 감격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식탁 가득 음식이 차려지고 있는데도 모두가 서운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궁금해하는지는 알겠는데 그들이 원하는 핑크빛 신혼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건 힘들어 보인다. 의진이 보내온 메시지에는 그의 하루 일정표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오늘 함께 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혼자인 서운을 배려한 사과 메시지와 함께. 안부 연락보다는 생존 신고에 더 가까웠다. 그럼에도 반응은 엄청났다.
“세상에, 이럴 수가!”
“지니랑 사적으로 연락을 하다니!”
“업무 외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다니!”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보면 피로 적힌 연서라도 받은 줄 알겠다. 가족들의 요란한 반응에 서운은 조금 얼떨떨해졌다.
“지니와 대화를 하다니!”
“지니와 대화가 되다니!”
“지니 말을 들어 주다니!”
“…그거야 당연히….”
놀리는 것도 아니고 듣자 듣자 하니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 서운이 조금 불쾌해지려는 찰나 의진의 고모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당연하다니요. 우리는 실패한 걸 서운 씨가 해낸 건데 그게 왜 당연해요.”
실패, 라고 했다. 실패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쉬이 잊힐 만한 것이 아니어서 고작 한 번 들은 것뿐인데도 존재감이 선명했다.
“우리는 그 당연한 걸 못해서 한참을 돌아왔어요. 돈과 명예, 많은 걸 지불해야 했죠. 평생 지우지 못할 오명도 얻었어요.”
실패에 이어 이제는 오명까지 나왔다. 당황한 것도 잠시, 부정적인 단어들이 연달아 나오니 앞선 대화에 이어 대충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재벌가 최초로 회장직에서 쫓겨난 인물, 계열사 하나를 통으로 말아먹은 XX그룹의 몰락. 지금의 영광에 비하면 다 지난 과거의 일이건만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번에는 의진의 삼촌이 말했다.
“그런데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그렇겠죠.”
“…….”
“슬프지만 누구를 탓하겠어요. 기회를 놓친 건 우리인 것을. 그래서 서운 씨에게 더 고맙고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진의 가족들은 상견례부터 지금까지 서운에게 무조건적인 호감을 표시해 왔다. 객관적으로 차이가 큰 두 사람의 결혼도 반대하지 않았다. 서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단하다니요?”
“대단하죠. 지니를 알아봐 줬잖아요.”
대답은 의진의 어머니가 했지만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인 듯했다.
“지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줬잖아요.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잖아요. 우리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그때의 우리는 욕심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아이에게 귀 기울여 주지 않았어요. 그저 바쁘기만 했죠.”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가벼운 듯 무거운 이야기에 서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감히 제가 이 선을 넘어도 되는 건지,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괜찮은 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 진짜 출장을 갈 줄이야…. 정말이지 우리 젊었을 때랑 똑같지 뭐예요.”
“우리가 어떻게든 말려 보려 했는데….”
“보고 자란 게 순 우리뿐이라….”
“서운 씨한테는 우리가 정말 면목 없어요.”
다행히 무거운 이야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대화가 제자리를 되찾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서운도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지니를 이해해 주다니…! 관대하다 못해 자애롭기까지 한 서운의 반응에 가족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서운이 저도 모르게 진심을 중얼거렸다.
“…두 번은 없겠지만.”
“그, 그럼!”, “당연하죠!”, “당연히 그래야…!”. 의진의 가족들이 서운의 눈치를 살피며 야단을 떨어 댔다. “누, 누가 당장 지니한테 연락을…!” 밉지 않은 소란 속에서 누군가 그렇게 외친 것 같기도 하다. “…그러지 말고… 둘이 직접 통화를 하게 하면….” 가족들의 은밀한 속삭임은 곧 실천으로 이어졌다.
“보고 싶네요, 우리 지니.”
“지니 얼굴 다 잊어버리겠어요.”
그 얼굴이 잊힐 수 있는 얼굴인가요. 평생 그 힘으로 살아가려던 서운만 어리둥절했다.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리가 연락하면 용건부터 묻기 바쁘니….”
“그것도 아니면 순 업무 얘기….”
그러니까 나보고 다리 좀 놔 달라는 것 같지?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서운이었다. 뭐, 어려울 것도 없나. 다른 일도 아니고 고모 생신인데 설마 전화를 거절할까 싶다. 서운은 열화와 같은 성화에 힘입어 의진에게 보낼 메시지를 작성했다.
[많이 안 바쁘면 잠깐 통화 안 할래요?]
[영상 통화로.]
영상 통화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지만 지금은 가족들과 다 같이 있으니 영상 통화가 더 좋을 것 같다. 정작 서운은 의진이 출장에 가 있는 동안 통화 한 번 한 적이 없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구태여 전화를 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서면 생존 신고 덕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막상 의진의 이름으로 전화가 걸려 오자 조금 놀라고 말았다. 휴대폰에 뜬 이름 석 자가 새삼 낯설다. 너무 오랜만이라 괜히 어색하기도 하다. 서운은 티 나지 않게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모두의 환호 속에서 전화를 받았다.
- 서운 씨.
통화는 잡음 하나 없이 깔끔하게 연결되었다. 언제나 그랬듯 의진은 오늘도 셔츠 차림이었다. 화면 가득 한 달 만에 보는 낯익은 얼굴이 서운을 응시하고 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 무슨 일 있으십니까?
목소리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다. 그래서 그런가. 기분이 이상했다. 시선을 피하는 법 없는 올곧은 눈동자와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정중한 말투, 처음 봤을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잘생긴 얼굴까지 전부 그대로인데 서운은 저 혼자 가슴이 울렁거려서 괜히 헛기침을 해 댔다.
어디서 박하 향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올망졸망 서운을 지켜보던 가족들은 숨을 죽인 채 저들끼리 소리 없는 요란을 떨어 대고 있다. 척하면 척이지. 이제는 안다. 저건 딱 봐도 서프라이즈를 계획 중인 모양새다.
…못 봤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서운은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잘 모르는 이상한 분들보다는 내가 아는 이상한 놈이 더 낫다.
- 서운 씨?
그래. 이놈.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장기 출장을 떠난 시발놈이 보인다. 그럼에도 서운은 잘 지냈다. 예상했던 결과다. 세상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으니까. 서운은 서운의 일상을 살았다. 그랬는데….
좀, 반가운 것 같지? 비로소 눈이 마주치자 내내 긴장하고 있던 어깨에서 조금씩 힘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거 참 누구 남편인지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네. 은혜로운 얼굴이 주는 본능적인 만족감과 내가 아는 이상한 놈이 주는 정서적인 안정감의 콜라보였다.
비록 신혼여행 이후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이이긴 하나 그래도 남편이라고 오랜만에 보니 반갑긴 하다. 음, 아닌가. 사실 좀 많이 반가운 것 같기도 하고.
“…안녕, 남편.”
마침내 서운이 웃었다. 한 달 만의 조우였다.
오랜만의 조우에도 서운은 바빴다. 긴장은 되지만 배는 고프니 밥은 먹어야겠고 중간중간 리액션도 해 가며 묻는 말에 대답까지 하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 서운 씨.
하물며 서운은 혼자도 아니다. 조금 한산해진 틈을 타 벼르고 벼르던 게장을 맛보려는데 이제는 쟤까지 난리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건 의진의 얼굴로, 물 잔을 지지대 삼아 비스듬히 누워 있는 휴대폰 화면 가득 의진의 모습이 보인다. 가족들과 인사도 나눴고 고모에게 축하도 드렸는데 어째서인지 통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식사 중간에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언제 전화를 끊어야 할지 모르겠다. (서운의 뒤로 보이는 본가 주방을 알아본 의진 때문에 서프라이즈는 실패로 돌아갔다. 가족들의 상심이 컸다.)
- 방향이 틀어졌습니다.
“또?”
- 휴대폰이 미끄러진 것 같은데 다시 세워 주시겠습니까?
대리석 식탁 안 되겠네. 휴대폰 케이스를 안 씌워 놔서 그런가, 지 혼자 미끄러지고 지랄이다. 서운은 투덜거리면서도 게장을 집지 않은 손가락으로 휴대폰 위치를 조정했다. 의진의 모습이 조금 더 똑바로 보인다. 서운은 곧바로 게 다리를 집어 들며 물었다.
“됐어요?”
- 화면이 왼쪽으로 치우쳤습니다. 오른쪽 방향으로 삼십 도만 더 틀어 주십시오.
삼십 도가 어느 정도지. 서운이 다시 휴대폰 각도를 틀었다.
“이만큼?”
- 너무 돌아갔군요. 다시 왼쪽 방향으로 돌려 주십시오. 십 도 정도면 충분합니다.
“십 도… 이거다!”
- 아닙니다. 다시 오른쪽으로.
“오른쪽….”
- 아직 모자랍니다.
“…….”
- 조금 더 틀어 주십….
“그만. 나 게장 먹어야 되니까 의진 씨가 알아서 틀어요.”
흐름이 끊기니까 영 먹을 맛이 안 난다. 물론 기분만 그랬다. 와앙, 서운은 의진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한입 가득 통통한 게살을 베어 물었다. 와, 맛있어. 진짜 맛있어! 보통 간장게장은 미약하게나마 비린 맛이 남아 있기 마련인데 비리기는커녕 맛만 좋았다. 양념게장은 또 어떻고. 게를 해체하는 서운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 이모님. 계십니까?
서운의 바로 앞에서 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게장에 영혼을 빼앗긴 이후로 밥그릇에 고개를 처박고 있느라 어차피 얼굴은 안 보였다. 목소리가 들리니까 꼭 같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모님이 누구지? 의아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뒤쪽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의진의 본가에 상주하며 집안일을 도맡고 계신 직원분이었다.
“네, 전무님. 여기 있습니다.”
- 돌아갈 때 간장게장과 양념게장 좀 챙겨 주십시오. 간장게장을 더 잘 드시니 간장게장 위주로 챙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컥! 놀란 서운이 게장을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렸다. 설마 간장게장을 더 잘 드신다는 사람이….
“어머, 서운아. 괜찮니?”
“괜찮, 콜록!”
- 서운 씨, 괜찮으십니까? 누가 물 좀 갖다주십시오.
하나도 안 괜찮다. 또다시 저에게 관심이 집중되자 도리어 기침만 거세졌다. 이를 놓칠세라 의진이 지구 반대편에서 적극적으로 훈수를 두고 나섰다. 예상대로 별 도움은 안 됐다.
- 참고로 얼음물로 갖다주셔야 합니다. 서운 씨는 얼음물만 드시니까요.
“젊은 애는 역시 다르네.”
“뭐가 어쨌다고?”
“서운이는 얼음물만 마신대요!”
“얼음을 좋아한대?”
이쯤 되면 다들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닐까? 제발 그만 닥쳐 줬으면 좋겠다. 기침 때문인지 민망함 때문인지 서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얼음물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대단히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저런 정보를 얻은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뭐, 굳이 따지자면 지금은 얼음물이 더 마시고 싶긴 하다.
마침 목도 말랐던지라 서운은 시원하게 얼음물을 들이켰다. 얼음도 먹고 싶었지만 그건 참았다.
- 이것 보십시오.
의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래 봤자 11cm짜리 화면 속에서 그러고 있어서 별로 폼은 안 났다. 뭐래. 서운이 코웃음을 쳤다. 결혼하자마자 장기 출장을 간 놈이 당당할 것도 많다.
“이렇게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미리 준비해 둘 것을….”
“미안하다, 덩이야.”
“우니야, 미안하구나.”
잠깐. 지금 은근슬쩍 들려서는 안 될 단어가 들린 것 같은데. 시종일관 비즈니스 미소를 유지하던 서운의 낯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 덩이, 우니가 뭡니까?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의진이 먼저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옳지! 잘한다, 내 남편! 서운의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렸다.
“서운이 애칭이란다.”
“복덩이의 덩이!”
“서운이의 우니!”
- 혹시 서운 씨 의견도 반영된 겁니까?
아니! 안 그랬어! 내 생각은 어떤지 물어봐 놓고 결국 내 얘기는 듣지도 않았어! 서운은 당장이라도 제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싶어서 입이 간질간질했다. 엉덩이도 같이 들썩들썩했다. 동시에 휴대폰 너머로 보이는 의진이 바로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 그러게. 그래서 어떻게 결론이 났더라?”
- 서운 씨 의견은 반영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잘한다, 내 남편! 서운은 마음속으로 의진에게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이건 뭐 기X지니도 아니고 2D 영상 홀로그램 수준이지만 확실히 이렇게라도 의진이 함께 있는 편이 더 낫구나 싶다.
- 서운 씨는 어떤 애칭이 더 좋으십니까?
응, 다. 다 싫어! 서운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전 사실….”
“사실?!”
“…둘 다….”
“둘 다?!”
초롱초롱, 서운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순수하기 그지없다. 서운은 조금, 아주 조금 미약한 죄책감을 느꼈다. 어째 내가 냉혈한이 된 것 같은 이 기분. 분명히 나쁜 사람들은 아닌데 따라가기가 어렵다. 사실 굳이 따라가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 그렇군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휴대폰이 의기양양하게 인간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머나.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누군가 말했다. “역시 부부끼리는 통하나 봐요!” 사방에서 설레발이 더해졌다. 그, 그런가? 서운은 무력하게 분위기에 휩쓸렸다.
- ‘우덩이’ 어떻습니까? 우니와 덩이를 합친 합성어입니다.
야, 이 시발놈아! 서운은 오랜만에 쌍욕을 했다.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고, 대신 눈으로 했다. 저 시발놈을 어떻게 족치지. 하물며 옆에 있지도 않아서 육탄전도 불가능하다. 붙어 봤자 서운이 지겠지만 그래도 한 대는 칠 수 있지 않을까.
- 서운 씨께서 둘 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 제가 직접 의견을 내 보았습니다.
“…….”
- 다른 사람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송구하군요.
“…….”
- 그럼 앞으로 우덩 씨라고 불러 드리면 될까요?
하, 하하…. 하, 하….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서운의 웃음소리가 자꾸만 끊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서운의 이성도 끊어졌다.
탁! 서운이 휴대폰을 뒤집어 의진의 얼굴을 식탁에 처박았다. 할 수 있는 게 겨우 이런 것뿐이라 더 빡이 치긴 했지만 일단은 뭐라도 하고 봤다. “서운 씨? 화면이 안 보입니다. 서운 씨? 서운 씨.” 오류를 감지한 의진이 곧바로 의문을 제기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운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래, 우덩아. 편하게 말해 보렴.”
본격적으로 우덩이로 불리기 시작하자 타격이 장난이 아니다. 저 시발놈 가만 안 둔다, 내가. 서운은 비장하게 퀘스트에 임했다.
“아무래도 의진 씨가 제 뜻을 오해한 것 같습니다.”
둘 다 마음에 든다는 말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하, 하하…. 부정적인 언사에는 반드시 미소가 동반되어야 한다. 안 좋은 얘기도 웃으면서 밝게 하면 무게가 달라지는 법, 서운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야심차게 단계를 밟아 나갔다. “다행이다….”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면 필시 그랬을 테다.
“심플하게 하나로 부르는 게 더 좋은 거구나!”
“우리가 애칭으로 부르는 게 싫다는 건 줄 알고….”
“정말 다행이네요.”
서운은 지금 선택의 기로에 있다. 어차피 혼자 사는 세상, 무엇이든 제 소신대로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적당히 현실과 타협할 것인가.
“…저는.”
“저는?!”
오랜만에 먹은 게장은 참 맛있었다. 막내 사촌 동생이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어 집에서는 절대로 먹을 수 없는 음식, 게장. 혼자서는 사 먹기가 영 애매할뿐더러 일반 식당에서는 잘 팔지 않는 음식, 게장.
서운의 앞에 산처럼 쌓여 있는 꽃게가 보인다. 처음에는 식탁 중앙쯤에 놓여 있던 게장이 왜 지금은 서운의 밥그릇 앞에 와 있는 건지. 마침 양손 가득 게장으로 추정되는 보따리를 짊어진 직원이 뒤쪽으로 지나갔다. 아니다. 한 명 더 지나갔다. 마찬가지로 양손 가득 짐이 한 보따리다.
이모님, 산적도 담으셨지요? 저희 애가 산적도 잘 먹더라고요.
네, 사모님. 말씀하신 것들 다 챙겼습니다.
감사해요. 음식이 입에 맞는지 잘 먹네요. 늘 좋은 음식 감사드려요.
스쳐 지나가는 대화에 마음이 움직인다. 주위의 시선 때문에, 혹은 보험금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철저하게 호칭을 유지해야 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호적상 외숙모라 불리는 엄마와 외삼촌이라 불리는 아빠,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사촌 동생들. 그럼에도 그들은 서운의 가족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을 저희 애라 부르는 의진의 가족들도 아마 그러지 않을까.
“…우니, 가 더 좋아요.”
“어머나!”
“그랬구나!”
“지니랑 짝꿍이네!”
서운 씨. 서운 씨? 그럼 우덩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서운 씨. 화면만 안 보일 뿐이지 소리까지 꺼지는 건 아니어서 의진이 끈질기게 우덩이의 행방을 물어 왔다. 서운은 못 들은 척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다행히 시간은 멈추지 않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잘만 흘러갔다. 이대로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모의 생신 파티도 비로소 막을 내렸다. 덕분에 서운이 가족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땐 완연한 밤이 찾아와 있었다.
올 때는 택시를 타고 왔지만 가는 길은 말로만 듣던 윤 기사님이 직접 동행해 주기로 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서운은 무너지듯 시트에 기대앉았다. 무거운 몸과 달리 후식으로 나온 포트와인 때문에 입 안은 온통 달았다. 처음 막 도착했을 때 가족들의 서프라이즈에 놀라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 점이 영 마음에 걸린다. 서운은 달콤한 여운을 즐기는 대신 마지막까지 자신의 행동을 곱씹기 바빴다.
의진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부담이 덜했을 텐데. 한 달 동안 의진 없이 잘만 살았는데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니까 끝도 없이 생각난다. 제 딴에는 이혼 위기까지 넘겨 가며 뭔가 시작해 보고자 다짐을 다졌건만 그런 보람도 없이 남편 놈이 장기 출장을 가 버렸다. 그 점이 못내 자존심 상하면서도 한 달 만의 재회가 계속해서 의진을 생각나게 한다.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하는 의진 때문에 영상 통화도 결국 끊어야 했다. 서운은 고민 끝에 의진에게 또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제 한 달 남았네요.]
[진짜 한 달 뒤에 와요?]
진짜 한 달 뒤에 오지 그럼 뭐 가짜일까. 어째 의진의 답장이 눈앞에서 그려지는 것 같다. 서운은 잠시 의진의 답장을 기다리다가 시차를 깨닫고는 알아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의진이 메시지를 볼 때쯤이면 여기는 한밤중일 테다.
[난 이제 집에 가는 길이에요.]
[그럼 미팅 잘하고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요.]
[밥도 잘 챙겨 먹고!]
[그럼 잘 때 연락해요. 안녕.]
감정에 앞서 연락을 한 것치곤 꽤나 무난한 마무리였다.
그렇게 생각했건만 이로부터 정확히 6시간 후 서운은 한 통의 국제전화를 받게 된다. 당연하게도 서울은 한밤중, 아니, 새벽녘이었다.
의진에게 영상 통화가 걸려 왔다.
-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그럼 안 잤겠니. 자다 깬 서운이 온 힘을 다해 비아냥거렸다. 아쉽게도 목이 잠겨서 속으로만 해야 했다. 도대체 지금이 몇 시야. 간신히 고개를 돌려 협탁 위의 전자시계를 확인해 보니 한창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 맞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출장을 간 후에도, 출장을 가기 전에도 이런 시간에 연락이 온 적은 없었다. 다시 말해 상호 간에 합의되지 않은 시간대에 연락이 온 건 지금이 처음이다.
“…무슨, 일이에요….”
서운은 억지로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어두운 시야를 밝혀 줄 무드 등도 켰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내심 긴장되었다.
- 서운 씨, 화면이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카메라에 문제가 있는 것 같군요.
…어, 나 이거 알아. 어젯밤, 대리석 식탁 위에 엎어져 있던 휴대폰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 잠이 덜 깬 서운이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이거 영상 통화예요?”
- 네, 그렇습니다.
“…왜?!”
- 무엇이 말입니까? 아, 이제 보이는군요. 서운 씨는… 숙면하고 계셨나 봅니다.
무의식중에 휴대폰을 얼굴 앞으로 가져왔다가 의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씨, 그건 또 언제 봤대. 이리저리 흔들리는 휴대폰 너머로 잔뜩 솟아 있는 서운의 뒷머리가 보였다. 은은한 호텔 조명 아래에서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던 의진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킨 것도 그때였다.
아, 잘생겼어. 자다 일어나서 봐도 잘생겼다. 은혜로운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씩 잠이 깬다.
- 서운 씨, 또 화면이 안 보입니다.
“그렇겠죠. 카메라를 껐으니까.”
- 카메라는 왜 끄셨습니까?
“자다 말고 무슨 영상 통화야. 그냥 말로 해요.”
- 전 자고 있지 않았….
“의진 씨 말고 나요.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서운은 본격적으로 의진을 감상하기 위해 무릎 위에 베개를 올려놓았다. 이 베개로 말할 것 같으면 서운이 잘 베고 있는 의진의 베개로, 본래의 주인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처음에는 너무 넓어서 잠이 오지 않던 이 커다란 침대도 이제는 둘이 쓰면 불편할 지경에 이르렀다. 서운은 다시 혼자 지내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자신의 옆이 아닌, 낯선 호텔 방에 있는 의진의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 전 지금 잘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2시간 30분 전에는 저녁을 먹었습니다.
“아… 네. 그래서요?”
그래서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연락한 거지. 서운은 졸린 눈을 비비며 의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낮에는 점심도 먹었으니 결과적으로 오늘은 세끼를 다 챙겨 먹었군요.
“…네….”
- 그리고 일정도 다시 확인해 봤습니다.
설마 일정이 앞당겨진 건…? 순간 잠이 확 깬다. 서운은 내심 긴장하며 의진의 뒷말을 기다렸다.
- 귀국까지 딱 한 달이 남았더군요.
역시 그럴 리가 없다. 서운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것 참 우연이네요.”
- 무엇이 말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할 말이 뭔데요?”
- 이상입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서운은 애써 현실을 부정했다. 잘 때 연락하라고 한 건 서운이 맞지만 정말 그것 때문에 전화를 한 건 아닐 거다. 서운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 끼니를 모두 챙겨 먹은 것을 제외하면 오전에 보내 드린 일정표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였습니다. 혹시 일정표가 필요하신 거면 다시 한번 전달드리겠….
그럼 그렇지, 메시지에 담겨 있는 서운의 은근한 마음이 의진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건 너무 고난이도 퀘스트다. 서운은 익숙하게 오류 수정에 나섰다.
“아니, 됐어요. 안 보내도 돼요.”
- 알겠습니다. 카메라는 계속 그대로 두실 겁니까?
서운이 말하는 것만 잘 듣는 주제에 의진은 아까부터 계속 카메라 타령이다. 이러니까 꼭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잖아.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운이 부러 능글맞게 물었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조금 억울할 것 같다.
“왜요.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요?”
- 네, 보고 싶습니다.
“…어?”
- 서운 씨가 보고 싶으니 카메라를 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메라를 꺼 놓았으니 서운이 보일 리 없는데도 의진의 시선은 여전히 서운을 향해 있다. 이러니까 꼭 눈이 마주친 것 같잖아. 서운은 애써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방금 전 의진의 대답은 말 그대로 ‘눈으로’ 보고 싶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 아, 분하다. 설렐 뻔했잖아.
솔직히 말하면 사실 설렜다. 설렜어, 쟤한테 설렜다고! 어쩐지 자존심 상한다.
-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도 많다. 서운이 웅얼웅얼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그걸 또 들었는지 의진이 금세 말을 맞춰 온다. 하여튼 말은 잘한다. 서운이 힐끗 의진을 쳐다보았다. 처음부터 서운을 보고 있던 의진과 눈이 마주쳤다. 카메라를 켜고 나니 이제는 시선을 피할 곳이 없어 서운은 그냥 의진을 쳐다보고 있었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검푸른 새벽이 내려앉은 방 안은 고요했고, 은은한 무드 등 불빛은 따뜻했다. 조용할 틈이 없었던 전날과는 사뭇 다르다.
언젠가는 이 사람이 집을 비우면 외롭다고 느끼는 날이 올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외로움이 새삼스러울 나이는 이미 지났으니까. 먼저 침묵을 깬 건 의진이었다.
- 살이 빠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요?”
- 네. 목이 더 가늘어지셨습니다.
“그런가?”
- 못 느끼셨습니까?
“어… 잘 모르겠는데….”
육안으로 보일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 서운은 슬쩍 잠옷을 들춰 자신의 맨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이렇게 봐서는 잘 모르겠다.
-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가 잘못 봤나 봅니다.
“…그런 거겠지?”
- 그렇지 않을까요.
원래 30대가 되면 건강에 관심이 많아진다. 걱정도 많아진다. 결국 서운이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드 등도 최대 밝기로 켜고, 내친김에 양반다리까지 하고 앉았다. 서운이 얼굴 가까이 휴대폰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밝은 데서 봐도 그래요?”
- 잘 모르겠습니다. 서운 씨 눈밖에 안 보입니다.
“이러면?”
- 그림자가 져서 잘 안 보이는군요.
“아, 답답하네. 잠깐만요. 지금은 어때요? 잘 보여?”
- 이제 잘 보입니다.
서운은 아예 휴대폰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계속 휴대폰을 들고 있을 땐 몰랐는데 손이 자유로워지니 이제야 알겠다. 가벼워! 편해! 팔도 안 아파! 몸이 편해지니 삶의 질이 절로 상승한다. 서운이 뻐근한 손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요새 쥐가 자주 나긴 하거든요.”
- 그렇습니까?
운동을 1도 안 하니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식사량도 좀 줄었나.”
어제 게장을 양껏 못 먹었다. 아마 자리가 불편했던 탓이 클 테지만 당장은 그런 이성적인 생각 따위 들지 않았다.
- 큰일이군요. 식사는 제때 하십니까?
일어나자마자 먹는 식사를 아침으로 쳐준다면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긴 하나 문제는 서운이 아침을 먹는 시간이 오전이 아니라는 데 있다.
- 평균 수면 시간은 얼마나 되십니까?
“…….”
- 하루에 몇 분 이상 운동에 투자하십니까?
본격적으로 서운의 상태를 점검하려는 듯 의진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보통의 현대인들이 그러하듯 대답은 엉망진창이었다. 내일 예약 잡아 놓겠습니다, 하고 의진이 짐짓 심각한 어투로 말했다.
- 검진받으러 가시죠.
“그 정도는 아니….”
- 날 때는 순서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 없습니다.
그, 건 그렇지. 맞는 말이다. 심지어 서운보다 어린 놈이 저러니까 더 신빙성 있다. 서운은 진지하게 자신의 증상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별일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별일도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때요? 출장 가기 전이랑 지금이랑 좀 다른 것 같아?”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하다. 서운은 의진에게 의견을 구했다.
- 이렇게 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휴대폰을 더 틀….”
- 벗어 보십시오.
“어?”
- 상의만 벗으셔도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게다가 서운이 잠옷 안에 티셔츠를 받쳐 입은 걸 생각하면 굳이 벗지 못할 것도 없다. 서운은 대수롭지 않게 잠옷 상의를 벗었다.
“티셔츠 입어서 잘 안 보이려나?”
- 아니요. 티셔츠가 얇아서 다 비치는군요. 잘 보입니다.
“어?”
- 서운 씨 젖꼭지가 비칩니다.
헉. 놀란 서운이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리다 말았다. 가슴을 가리고 있는 게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말았는데 듣고 나니 못내 신경이 쓰인다. 이 옷이 그렇게 얇았나? 볼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혼자 있다 보니 이전에 입던 옷들을 그대로 입고 있어서 몰랐다.
“…뭐 해요?”
어째 좀, 민망하다. 의진이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어서 더 그랬다. 민망해서 던진 질문에 의진이 진지하게 응수해 왔다.
- 이전과 비교해서 서운 씨 허리가 어땠는지를 가늠해 보고 있었습니다. 양손으로 움켜쥐면… 이 정도 되는 것 같군요.
네가 내 허리 사이즈를 어떻게 아냐고 하기에는 짚이는 데가 많다. 손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두 사람의 성 경험이 이를 증명한다. 의진은 어느새 양손으로 서운의 허리 사이즈를 가늠하고 있었다. 손이 큰 탓인지 평범한 사이즈일 서운의 허리가 유독 가늘어 보였다.
- 이것밖에 안 되십니까?
“…그걸 나한테 물으면….”
- 서운 씨는 뼈대 자체가 가는가 봅니다.
“아닌데. 나는 그냥 평균일걸?”
- 그렇지만 손도 작으시잖습니까. 한 손에 다 들어와서 놀랐습니다.
“그건 네가 큰 거고요. 나 손 별로 안 작아요.”
- 키도 작으십니다.
“…의진 씨 싸움 잘해요?”
- 누군가와 싸워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188cm가 넘는 알파인 건 생각 안 하니. 서운은 조금 울컥했다.
“알파라고 다 큰 것도 아닌데 의진 씨는 다 커서 좋겠어요. 키도 크고 어깨도 넓고 고추도 크….”
- …….
“…고….”
- …….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왜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걸까. 침묵을 깨고 의진이 물었다.
- 제 고추가 큽니까?
아, 시발. 결국 한 건 했구나. 의진의 정직한 물음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알려 주었다. 그래. 어차피 엎질러진 물, 최대한 간결하고 신속하게 해치운다. 서운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커요.”
- 그렇군요. 좋은 의미입니까?
“당연히 좋은 거지! 작은 걸 어디다 써요.”
너무 진심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의진은 이대로 순순히 수긍하는 듯했다. 역시나, 서운의 착각이었다. 서운의 남편은 보통 놈이 아니다. 이상한 놈이다.
- 서운 씨는 큰 고추를 좋아하시는군요.
“하, 하하. 다다익선이 괜히 있는 말이겠어요.”
- …서운 씨.
“왜요.”
- 이 경우 다다익선은 큰 고추가 아닌 여러 개의 고추를 뜻합니다.
“…아.”
-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게 맞으십니까?
기분 탓인가. 낮게 깔린 목소리가 제법 음산하다. 서운은 얌전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실수했어요. 정정합니다. 다다익선 말고 거거익선(巨巨益善)으로 가죠.”
- …….
서운이 선보인 희대의 애드립에도 의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서운은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듯한 고독감에 몸부림쳐야 했다.
“의진 씨…?”
- 죄송합니다. 제가 모르는 사자성어가 나와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실례지만 거거익선의 뜻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개드립은 부가 설명이 붙는 순간 망한다. 고로 서운의 개드립은 망했다.
“…그냥 내가 갖다 붙인 거예요. 다다익선이랑 라임 맞춰서 클 거의 거로 거거익선.”
-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서운 씨께서 작사에도 재능이 있으신지는 몰랐군요.
“…뭘 또 재능까지.”
- 아닙니다. 라임에 맞춰 가사를 지으시는 걸 보니 랩에도 소질이….
“그만, 거기까지. 이제 다른 이야기 하죠.”
서운이 끝을 모르고 뻗어 가는 의진을 제자리에 돌려놨다. 물론 보람은 없었다.
- 그럼 다음 질문 드리겠습니다. 서운 씨에게 큰 고추의 기준은 어떻게 됩니까?
“…그놈의 고추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요?”
한 놈 떠나보내니 이번에는 고추가 왔다. 첩첩산중이었다.
- 아, 죄송합니다. 서운 씨가 먼저 고추 얘기를 꺼내셔서 싫어하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앞으로는 자중하겠습니다.
“그것 참 고맙네요.”
- 그럼 마저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또.”
- 서운 씨가 생각하는 큰 남성기의 기준이 어떻게 됩니까?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다. 의진의 입에서 고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자다 깨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덕분에 서운은 조금 초연해졌으며, 초연해진 서운의 입은 자연스럽게 막말을 토해 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의진 씨가 제일 크니까 의진 씨를 기준으로 하죠.”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자 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아서. 의진이 알 수 없는 얼굴로 말없이 서운을 쳐다보았다. 미묘한 침묵 속에서 의진이 선뜻 입을 열었다.
- 그렇군요.
“음, 네….”
- …제가 기준이 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영광까지야….”
- 아니요. 영광입니다. 기준이 있다는 건 반대로 기준 미달인 사람도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렇긴 하죠.”
- …….
“…의진 씨?”
- 네, 말씀하십시오.
선뜻 입을 열긴 했는데…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다. 말투도 좀, 딱딱한 것 같은데….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화제를 돌려 버렸다. 물리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 사이를 생각하면 ‘지금 질투하는 거예요?’ 같은 귀여운 잔망은 가당치도 않다.
“근데 그건 왜 물어본 거예요? 의진 씨도 눈이 있으면 알 거 아니에요.”
- 남성기를 얘기하시는 거라면 남성기 칭찬은 서운 씨에게 처음 들어 봤습니다.
사우나만 가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서로의 알몸이다. 친구들끼리 그런 얘기 안 하나? 잠시 의아했지만 의문은 금세 소강되었다. 아, 그럴 만한 친구가 없…. 서운은 빠르게 납득했다.
- 기준점을 여쭤본 이유는 서운 씨에게 질문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뭔데요?”
- 삽입할 때 보면 서운 씨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지던데 아프진 않으십니까?
미안하다는 말 취소. 하나도 안 미안하다. 한 치의 부끄럼 없이 똑바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의진과 달리 이번에도 민망함은 서운의 몫이다. 서운은 의진 대신 침대 모퉁이를 바라보았다. 대충 넘어가 보려 해도 하필이면 영상 통화라 어떻게 피할 길이 없다.
“안, 아픈 건 아닌데…. 뭐… 괜찮, 흠, 아요.”
- 역시 그러셨군요. 상호 간의 신체적, 정서적 만족도가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는 행위에 고통이 수반되었다니 송구합니다.
“아니, 뭐… 송구할 것까지는….”
- 아닙니다.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늦었지만 지금부터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방법? 무슨 방법? 놀라서 절로 고개가 번쩍 들렸다. 아니, 고추가 큰 걸 뭐 어떡하라고. 줄이기라도 할 거야?
그러다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세상에는 성기 축소 수술이라는 기술도 존재한다. 설마 싶지만 무엇이든 예방해서 나쁠 건 없다.
“‘No pain, No gain’ 몰라요?”
무엇보다 의진의 취미는 개소리다. 서운은 황급히 예방 접종에 나섰다.
“사람이, 어? 거저먹으려고 하면 안 되지. 뭐든 그만한 고통은 수반되는 거예요.”
확실히 의진의 성기가 버거운 건 사실이지만 삽입 초반만 제외하면 장점만 남는다. 오메가인 서운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분이 좋아질수록 내벽에서 애액을 내보내는데, 기분이 좋아지려면 일단 안이 꽉 차는 포만감과 내벽을 자극하는 쾌감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의진은 서운과 궁합이 좋은 편이다.
좋다뿐일까, 좋아도 너무 좋았다. 어느 정도냐면 서운이 의진과의 첫 잠자리에서 알아서 의진의 위에 올라탈 정도다.
…생각하니까 하고 싶네. 두 사람의 잠자리는 신혼여행이 마지막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밥상을 뒤엎기 바쁘다는 신혼에 알파 페로몬도 못 맡아 본 지 어언 한 달이 넘어간다. 의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섹스 안 하고도 잘만 살았는데 애매하게 물꼬가 트이니 해소되지 못한 욕구가 애매하게 서운을 괴롭힌다.
“괜히 허튼 생각 하지 말고 있는 거나 잘 간수해요. 남들은 없어서 난리구만.”
- 네, 잘 간수하겠습니다. 역시 서운 씨는 현명하십니다.
“…또요?”
- 그렇습니다. 덕분에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서운 씨는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남다릅니다. 저는 기껏해야 전희에 더 공들일 생각밖에 못 했는데…. 정말 멋있으십니다.
있었다. 성기 축소술보다 훨씬 일반적이고 훨씬 정상적인 해결 방법이. 그동안 쟤만 이상한 줄 알았는데 나도 평범하진 않은 것 같다. 서운은 애써 진실을 외면했다.
- 그럼 결과적으로 참을 만하신 겁니까?
“응. 계속 아픈 건 아니고 처음에만 조금 아파요. 한, 5점 만점에 2점 정도?”
- …그렇군요.
의진의 얼굴이 또다시 심각해진다. 이게 그렇게 진지할 일인가 싶다가도 고민하는 의진을 말리지는 않았다. 무언가를 고민한다는 건 그만큼 애정이 있다는 거니까. 음담패설인 듯 음담패설 같지 않은 대화가 조금 민망하긴 하지만 서운은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로 한다.
이게 다 나를 위해서다. 행복한 섹스 라이프를 꿈꾸는 서운의 얼굴이 못내 음흉했다.
“이참에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봐요!”
여기서 서운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바로 의진의 출신과 성향이다. 의진은 물음표 살인마 집안의 일원으로, 학구열 또한 높았다.
- 구멍을 빠는 것과 핥는 것, 둘 다 좋다고 하셨는데 정말 동일하게 같은지가 궁금합니다.
- 좋다고 하신 것과 달리 해당 행위에 대한 거부감을 보이시는 이유도 궁금하군요.
이런 걸 두고 기억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집착이 강하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서운은 질문 한 번 만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 지금까지 3번은 성기 자극과 전립선 자극으로, 3번은 전립선 자극만으로 사정하셨습니다. 둘 중에서 더 선호하시는 사정 방식이 있습니까?
- 덧붙이자면 후자가 더 사정 시간이 길었습니다. 사정 시간도 쾌감과 관련이 있는지요?
- 상대적으로 상체와 관련된 전희가 적은 편인데 이에 동의하십니까? 이대로도 괜찮은지 아니면 상‧하체 균형을 맞추는 편이 더 좋을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 어느 순간부터 세게 해 달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세게 삽입당하고 싶은 시점이 있는 건지요?
- 또 하나, 삽입당하면서 혀를 빨리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말하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듣고 있는 서운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었다. 무드 등 전구가 주황빛이라 다행이다. 하마터면 저 순수한 물음표 살인마에게 얼굴색이 이상하다며 내내 시달릴 뻔했다.
자다 일어나서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정신이 번쩍 드는 현자타임이 반, 동시에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한테 관심이 많구나, 라는 애매한 반쪽짜리 감동이 서운을 덮쳤다. 상식적으로 이게 감동 받을 일인가 싶다가도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아 금방 포기했다.
내가 섹스 하면서 키스하는 걸 좋아하나. 서운도 몰랐던 사실이다. 그런 세세한 것까진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데다 알려 준 사람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상대의 반응을 살피지 않아도 섹스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사실 섹스의 원리 자체는 단순하다. 넣고, 흔들고, 싼다. 이렇게까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일일이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민망하기도 하고. 서운은 착실하게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의진에게 못 이겨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요즘은 자기주도학습이 대세래요.”
- 자기주도학습 말입니까?
“네. 말 그대로 학습자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공부를 하는 건데….”
- 네.
“의진 씨도….”
- 네, 말씀하십시오.
“…직접 확인하면….”
되도 않는 추파를 던지는 서운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었다. 서운은 쑥스러워하면서도 끝까지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더, 공부가 되지 않을까….”
- …….
“…요? 어떻게 생각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서운은 떨리는 마음으로 의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마침내 의진의 입술이 열렸다.
- 서운 씨는….
“으응.”
- 정말… 대단하십니다.
“또?”
- 한 가지 주제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분야를 접목시키는 유연한 사고.
“어?”
- 타인의 성장을 고려한 세심한 배려까지.
“예?”
- 감동적이군요.
“갑자기?”
- 서운 씨의 거시적인 안목에 진심으로 감동 받았습니다.
어, 이게 아닌데. 개수작이 교과서급 교훈으로 되돌아왔다.
“그게 아니라….”
- 반성합니다. 저도 서운 씨처럼 현명하고 유연한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까….”
- 가르침 감사합니다.
당황한 서운이 급히 정정에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의진은 이미 훌륭하게 자아 성찰을 마친 후였다. 의진이 감동받은 얼굴로 서운을 우러러보며 말했다.
- 역시 서운 씨는 현명하십니다.
아…. 서운에게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서운에게 죄가 있다면 한 달 가까이 떨어져 있는 남편 놈과 그렇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먹여 줘도 못 받아먹는 남편 놈이 문제일까, 아니면 그런 놈하고 결혼한 내가 문제일까. 잠시 고민해 봐도 결론은 같았다.
이런 줘도 못 먹을 새끼. 서운의 플러팅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애매하게 달아오른 몸도, 맥없이 끝나 버린 회심의 플러팅도 모두 허무하기 그지없다.
“…이제 그만 자죠.” 세상의 모든 현타와 조우한 서운이 알아서 대화의 끝을 알렸다. 졸리십니까, 의진이 물었다. “네, 뭐. 졸리네요.” 서운은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며 의진은 보지도 않고 고개부터 끄덕거렸다.
- 진료는 내일모레로 예약해 놓겠습니다. 자세한 건 제 수행 비서가 연락드릴 겁니다.
아, 맞다. 건강 얘기하다 이렇게 된 거였지. 서운은 목 끝까지 이불을 덮은 채 심드렁한 얼굴로 말없이 고개만 까닥였다.
- 별일 아닐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그럼 잘 자요.”
- 서운 씨도 좋은 밤 되십시오.
“응.”
- …….
“…….”
- …….
“왜요?”
인사까지 마쳤는데 의진은 전화를 끊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할 말이 남았나 싶어 기다려 봤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할 말 있어요?”
- 아니요. 아닙니다. 늦은 시간에 실례했습니다. 이만 주무십시오.
싱겁기는. 서운이 잘 고정해 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의진도 전화를 끊으려는지 휴대폰 너머 화면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래서 보였다. 보고 말았다.
앞섶이 좀, 두둑했던 것 같…지? 쓸데없이 재빠른 손가락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는 바람에 더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의진 역시 서운처럼 잠옷 차림이었던 점, 바지가 얇아서 부풀어 오른 앞섶이 유독 눈에 띄었던 점을 제외하면 평범한 전화 통화였다. 서운도 반쯤 발기한 것만 빼면. 시발.
내가 잘못 봤겠지. 서운은 대수롭지 않게 영상 통화의 여운을 털어 냈다. 서운의 남편은 서운이 알아서 떠먹여 주는 개수작조차 스스로 뱉어 내는 놈이다. 그런 놈이 기특하게 발기했을 리가 없다. 만약 발기했다 해도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 어차피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잘 풀려 봤자 폰섹 정도? 어차피 만남은 한 달 뒤가 될 테니 당장 달라지는 건 없다는 소리다.
이처럼 서운을 번뇌에 들게 한 새벽의 해프닝에도 서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숙면을 취했다. 전날의 시가 방문으로 기가 쪽쪽 빨린 것도 모자라 중간에 한 번 깼더니 잠이 아주 솔솔 왔다.
서운은 점심시간이 다 지나서 간신히 눈을 떴다. 그것도 자의로 일어난 건 아니었다. 어디선가 자꾸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어쩔 수 없이 깼다.
발신인 외숙모, 서운의 외숙모에게 전화가 오고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지금 일어난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서운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할 수 있어, 정서운! 가자! 서운은 어느 때보다 비장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 오빡!
깜짝이야. 귀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이런 식으로 서운을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다.
“어, 민영아.”
막 자다 깬지라 평소보다 3배는 발랄하게 전화를 받자 민영이 확성기 역할을 자처했다. “엄마! 아빠! 오빠 전화 받았어!” 곧이어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엉켜 들렸다.
- 서운아! 넌 알고 있었냐? 아니, 오늘 아침에! 사돈이!
- 좀!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지금 바쁘니? 일하는 중이야?
“아니요. 괜찮으니까 말씀하세요. 무슨 일 있어요? 괜찮은 거예요?”
사돈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가슴이 다 철렁했다. 함께 식사를 한 지 아직 24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외삼촌 내외에게 연락이 간 모양이다. 참 신속하다고 해야 하나.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알 수가 없어 순식간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행히 서운이 걱정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조금 결이 달랐을 뿐.
- 글쎄, 사돈이 감사하다면서 자꾸 뭘 준다 그러기에 거절했더니 아예 가게로 주문을 했지 뭐니.
“주문요?”
- 그래! 주문! 그걸 또 네 외삼촌은 좋다고 받았단다. 어휴, 정말이지 감당도 못할 거면서 대체 어쩌려고 저러는지!
- 오빡! 형부도 옆에 있어? 이따 바꿔 주면 안 돼? 같이 영통 하자!
- 여민영! 너 독서실 안 가? 점심 먹고 간다며!
- 아, 토요일인데! 나도 좀 쉬자!
영통이라니. 시끄러운 와중에도 유독 한 단어가 귀에 꽂힌다. 자연스럽게 의진과의 불미스러운 통화가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 버렸다. …이런 줘도 못 먹을 새끼. 다시 생각해 봐도 결론은 같았다.
“주문이 몇 건이나 되는데요?”
주변이 여전히 소란스러웠지만 할 건 해야 했다. 서운은 본격적인 상황 파악에 나섰다. 외숙모가 이러시는 걸 보면 한두 건이 아닌 것 같았다.
- 오천! 오천 개! 사돈이 오천 개를 주문했어! 그것도! 너, 그거 알지! 그, XYZ 브랜드의 WW479 모델! 비싸서 우리 동네에서는 팔리지도 않는! 감상용으로 한 대 들여 놨다가 네 외숙모한테 한 달을 넘게 혼난 그 자전거! 그걸로 오천 개를 주문했어!
아, 이건 또 뭔데.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이다.
* *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긴급회의가 열렸다. 장소는 몇 년 전까지 서운이 살았던 외삼촌의 집으로, 참석 인원은 외삼촌 내외와 서운까지 총 세 명이다. (민영은 결국 독서실로 쫓겨났다.)
“아니… 주문이 들어왔는데 그럼 안… 해?”
“그럼 하려고 했어요? 동네 자전거 가게가 그걸 어떻게 감당하려고! 서운아, 네 외삼촌 좀 말려 봐라. 내가 정말 미치겠다!”
어느 때보다 심각한 분위기였으나 외삼촌도 외숙모도 모두 이해가 갔다. 내 손으로 꿈의 자전거를 정비하고 싶은 순수한 열정과 혹여나 일이 잘못되어 가족에게 안 좋은 영향이라도 미칠까 걱정하는 현실의 충돌,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쉽지가 않다.
“…기한은 언제까지예요?”
“어머, 얘가! 너까지!”
그러니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이럴 때 섣불리 어느 한쪽 편을 들었다가는 끝이다. 서운이 침착하게 대꾸하자 외삼촌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거래처랑 먼저 통화해 보고서 다시 연락드리기로 했다.”
“그럼 정확히 언제까지라고 정해진 건 없는 거예요?”
“그래. 아직은.”
“…만약 급한 거면요? 저희가 맞출 수는 있어요? 아니, 그보다 거래처에 그 정도 물량이 있긴 해요? 통화는 해 보신 거예요?”
외삼촌이 크게 허리를 다치신 이후에는 서운이 틈틈이 가게 일을 돕곤 했는데, 그때의 경험이 이런 식으로 도움 될 줄은 몰랐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외숙모의 얼굴이 험악해져 갔다. 서운도 마찬가지였다.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다 보니 점점 확신이 든다. 아니다. 이건 아니야. 감히 일개 동네 가게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얘기 끝났네. 당장 전화해요.”
“그, 연락 주기로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면….”
“그놈들이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몇천만 원짜리 자전거를 산처럼 쌓아 놨겠어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 제정신 아닌 놈 우리 집에도 한 명 있지?”
“…내가 언제 산처럼 쌓아 놨어. 가게에 딱 한 대만 놨구만….”
“됐고, 전화해요. 이러다 나중에 가서 못 한다 소리 나오면 그게 무슨 망신이에요? 당신이야 그렇다고 치고 서운이는. 서운이는!”
맞는 말이다. 잘 풀리면 모두에게 좋겠지만 반대의 경우 가장 난처해지는 건 누가 뭐래도 서운이다. 외삼촌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지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아마 못 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테다.
“올해는 귤이 일찍 나왔더라.”
외숙모가 대뜸 바구니 가득 귤을 담아 왔다. 이 이상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사 표시였다.
“그, 거래처 연락 올 때까지만이라도….”
“어떠니. 생긴 건 이래 보여도 제법 달지?”
“네. 맛있어요. 외삼촌도 드실….”
“출근 안 해요? 여씨 아니랄까 봐 여민영이랑 똑같네.”
외삼촌이 터덜터덜 현관으로 향했다. 허리를 삐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신발을 신는 자세가 영 엉거주춤하다. 이게 다 묵은지 때문이다.
서운은 외숙모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나 그랬듯 외숙모는 이번에도 서운을 말리지 않았다. 유독 느릿느릿 신을 신는 외삼촌에게 서운이 먼저 말을 걸었다.
“허리는 괜찮으세요?”
“그럼. 괜찮지. 별거 아니다.”
“파스 사 왔는데 잠시만요. 붙여 드릴게요.”
기껏 사 와 놓고 정신이 없어서 꺼내 볼 생각도 못 했다. 귤을 먹다 말고 파스를 꺼내 오니 서운을 바라보는 외삼촌의 두 눈이 그렁그렁하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외숙모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서운아, 어떡하면 좋니. 널 저렇게 사랑하시는 분이 겁도 없이 주문을 받았단다.”
“하, 하하…. 흔치 않은 기회이긴 해요. 저 같아도 욕심났을 거예요.”
“파스 잘 붙었네. 이제 나가면 되겠어요.”
번복은 없었다. 고저 없는 음산한 목소리에 외삼촌이 호다닥 집 밖으로 튀어 나갔다. 외삼촌의 동선을 따라 싸한 파스 냄새가 났다. 언뜻 박하 향 같기도 했다. 외삼촌이 떠난 후에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어휴, 선물 주면 다신 안 볼 거라고 으름장을 놓길래 김치나 들려 보냈더니 이게 무슨 난리라니. 차라리 차를 받을 걸 그랬나 봐. 오천 개면 대체 얼마니, 그게?”
“차요? 설마 자동차요?”
“그래! 자동차! 있는 집 사람들은 원래 다 이렇다니? 무서워서 무슨 말도 못 하겠다.”
그러게요. 저도 궁금하네요. 불과 하루 전만 해도 같이 간장게장을 먹던 사람들이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들, 그래도 조금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가소로운 생각이었다.
이 사태를 의진도 알고 있을까. 대충 시차를 계산해 보니 그쪽은 이제 막 아침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건 서운도 마찬가지지만 환한 대낮에 혼자서 빈집을 지키고 있으려니 지금이 꼭 아침 같다.
함께 귤을 까먹던 외숙모는 약속이 있다며 집을 비웠고, 민영은 독서실에 갔다. 막내인 영민은 1박 2일 태권도 캠프를 떠났으니 저녁이 될 때까지 서운은 쭉 혼자일 테다.
서운은 오랜만에 조용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한때는 서운도 가족들과 함께 이 집에 살았다. 그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서운의 옛날 방은 민영의 동생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 뒤에 바로 독립을 했으니 혼자 산 지도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본가에는 더 이상 서운의 공간이 남아 있지 않다.
새삼스럽기는. 서운은 텅 빈 집 안을 서성이다 외숙모가 챙겨 준 귤 박스를 집어 들었다. 신혼집이나 본가나 서운 혼자인 건 매한가지지만 본가에 혼자 있으려니 영 불편해서 안 되겠다. 여기서 지낸 시간이 무색하게도 마치 주인 없는 집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서운은 이제 그만 우리 집에 가고 싶어졌다. 돌아가 봤자 서운을 반겨 줄 사람은 없지만 적어도 서운이 한 달 뒤에 반겨 줄 사람은 있다. 법적으로 ‘서운의 것’인 사람으로, 현재 장기 출장 중인 서운의 남편 놈 되시겠다.
외숙모가 남은 귤을 모두 가져가라며 신신당부를 하는 바람에 돌아가는 길은 꼼짝없이 택시를 타게 되었다. 묵은지 세 통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귤 박스가 추가된 셈이다.
팔이며 다리며 안 쑤시는 곳이 없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서운은 뒤늦게 근육통에 시달려야 했다. 진심으로 이제 그만 쉬고 싶다. 어제부터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 서운 씨!
얘는 왜 자꾸 영상 통화를 걸어? 이제야 서운의 연락을 본 건지 택시 안에서 의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서운은 투덜거리면서도 재빠르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흠, 흠. 목소리도 가다듬었다.
- 죄송합니다. 메시지를 지금 봤습니다.
휴대폰 너머에서 의진이 다급하게 외쳤다. 여기까지는 뭐, 서운의 예상대로였다.
“아, 괜찮아요. 그럴 것 같았어. 오늘 행사 있다고 했잖….”
- 아니요. 제 불찰입니다. 이 시간에, 그것도 서운 씨가 통화 가능 여부를 물어봐 주신 적이 거의 없어서 연락이 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확인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에이, 거의 없기는. 그 정도는 아니다.”
- 아니요,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도 고모님 생신 때를 제외하면 사실상 전무합니다.
“설마.”
- 아니요, 확신합니다.
“그, 그럼 지금은 통화 가능한 거죠?”
자기 불리한 건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서운이 급하게 말을 돌렸다. “네, 그렇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화제를 돌리는 데 성공한 서운은 의진에게 오전에 있었던 자전거 사건을 얘기해 주었다. 아침에는 의진에게 귀띔이라도 받으려 연락했다면 상황 파악이 끝난 지금은 특별한 목적도, 이유도 없었다. 두 사람 모두의 일이니까, 그래서 얘기했다.
- 그렇군요.
그래도 그렇지,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긴급회의가 열렸던 서운의 가족과 달리 의진은 지나치게 덤덤했다. 아니, 대체 왜? 이번에도 당황한 건 서운이었다.
“그게 다예요?”
- 무엇이 말입니까?
“방금 내 말 못 들었어요? 그 자전거가 얼마짜리냐면-.”
- 네, 들었습니다. 대중적인 모델이 아니니 수입이 시급하겠군요. 총 수량이 오천 대면 운반비 지출이 클 텐데 저희와 계약한 선박을 이용하시겠습니까? XX물산과 계약된 운송 업체가 있습니다.
맥락이고 뭐고 당장 선박부터 소개시켜 줄 기세라 일단 진정부터 시켰다. 서운은 이제 웬만한 일로는 쉽게 당황하지 않는다.
“대충 계산해 봐도 십억이 넘어요.”
- 총매출이 말입니까, 아니면 순매출이 말입니까?
이 새끼가. 이 와중에도 의진은 쓸데없이 사리 분별에 능했다. 일은 더럽게 잘할 것 같더라니. 답답한 마음에 서운의 목소리가 절로 커졌다.
“둘 다요! 총매출이든 순매출이든 억 단위인 건 똑같잖아요. 우리가 선물한 건 김치 세 통이 다인데 이건 말이 안 돼요.”
- 거래는 상호 합의를 기반으로 성사됩니다. 계기는 김치 세 통이었을지라도 두 분이서 그렇게 결정을 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계기가 너무 소박한 거 아니에요?”
- 가치라는 건 결국 상대적이니까요. 화폐 가치도 상대성 앞에서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김치라고 해서 다를 건 없지요.
틀린 말 하나 없는 냉철한 대답이었다. 서운은 어쩐지 할 말이 없어졌다.
- 무엇보다 저희는 거래 당사자가 아니니 해당 거래에 관여할 수 있는 권리는 없습니다.
“그걸 몰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 그럼 왜 하신 겁니까?
“그야 당연히….”
- 네, 말씀하십시오.
“…당연히….”
지니와 대화를 하다니! 지니와 대화가 되다니! 여기서 갑자기 의진의 가족들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잠시 고민해 봐도 의진을 설득할 만한 근거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이게 이런 식으로 의견이 갈릴 만한 일이야?
서운은 당연히 의진도 저와 같은 생각일 줄 알았다. ‘확실히 거래 규모가 말이 안 되는군요’라며 맞장구를 쳐 올 줄 알았다.
그래, 의진의 말이 맞다. 모든 건 상대적이다. 가치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의진의 말은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당장 두 사람만 해도 동일한 상황 앞에서 이렇게나 의견이 다르다. 세상 사람이 모두 저 같을 수 없다는 건 서운도 안다. 알지만, 모를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의진은 일반적이지 않다. 어떻게 십억의 가치가 절대적이지 않을 수가 있어. 서운은 진심으로 의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는 경제적으로만 다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생각하는 것부터 차원이 다르다. 저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 서운은 다시 한 번 의진과의 거리를 실감했다.
이쯤 되니 비단 자전거가 문제가 아닌 듯싶다. 서운은 답답한 마음에 여러 차례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래서 뭐라고 할 건데? 막상 의진에게 얘기를 꺼내자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 일단 기다려 보죠.”
아, 뭐지. 뭔가 좀 찝찝한데.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쯤에서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했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데 도저히 생각이 안 난다.
- 네, 알겠습니다. 운송 업체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 주십시오. 바로 연락해 놓겠습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의진의 말대로 두 사람은 결국 제3자에 불과하다. 여기서 이래 봤자 서운이나 의진이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대신 거래 당사자들과 좀 많이 관련이 있을 뿐. 이 거래가 몰고 올 후폭풍의 중심에 있기도 하다.
당분간 외삼촌 연락만 기다리게 생겼다.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기분에 서운이 푸념하듯 말했다.
“아, 피곤하다. 난 이제야 집에 가는 길이에요. 자다 말고 호출당해서 불려 왔거든요.”
- 호출을 당하셨습니까?
“응. 아버님 연락받고 많이 놀라셨는지 지금 바로 좀 보자고 하시더라고요. 덕분에 아침부터 자다 일어나서….”
정확히는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었지만 서운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자다 일어났으면 그게 아침이지 뭐. 이상 서운의 지론 되시겠다.
- 그렇, 군요…. 저희 때문에 서운 씨가 이른 아침에 기상을….
“…그렇게 이른 시간은 아니긴 한데….”
- …죄송합니다, 서운 씨.
의진이 대뜸 사과를 해 왔다. 그러더니 세상 비통한 얼굴로 그런다.
- 결국 저희에게도 이런 일이….
“뭐가요?”
-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결혼 전부터 매뉴얼을 짜 놓았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시월드와의 갈등은 중간 매개자인 제가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
여기서 시월드가 왜 나와? 서운은 당황했다. 의진의 대화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다. 이상하다. 나 그래도 언어 영역은 잘했는데…. 서운이 방금 전의 대화를 곱씹어 보는 사이 의진이 뒷말을 덧붙였다.
- 참고로 시월드는 ‘시(媤)’ 자가 들어간 사람들의 세상을 뜻하는 신조어로, 시가 식구들 전부가 이에 해당합니다. 물론 한 명도 가능합니다.
오늘도 쓸데없이 친절한 의진이었다. 서운은 아직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 서운 씨의 잠을 깨우는 물리적 손실을 끼쳤으니 이를 최대한 배상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조치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아버지께 연락을 드려야겠군요.
…어, 잠깐만. 나 알 것 같은데. 악의 없는 개소리를 정성껏 들은 보람이 있다. 마침내 서운은 맥락 파악에 성공한다.
“어디서 본 건 많아 가지고…. 이게 뭐라고 시월드에 갖다 붙여요?”
- 하지만…!
“하지만 아니야. 시월드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아서 판단할 테니까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 서운 씨께 물리적 손실을….
“그게 무슨 손실이에요!”
이래서 연애를 글로 배우면 안 된다.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다. 결혼 생활을 글로 배웠더니 인지 부조화가 상상을 초월한다. 서운은 엄하게 오작동을 다스렸다.
“대답.”
- …그런 겁니까?
“그런 거예요.”
- …….
“…….”
-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순순히 굴복할 줄이야. 이 이상 서운에게 대들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저 혼자 풀이 죽은 눈썹이 사랑스럽다. 귀엽게 굴기는. 어쩐지 놀리고 싶어졌다. 서운이 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의진 씨가 시월드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 무엇이 말입니까?
“맘카페에서 결혼하자마자 장기 출장 가면 이혼감이라는 얘기 안 해 줬어요?”
- …예?
“상식적으로 결혼하자마자 상의도 없이 장기 출장 가는 새ㄲ… 남편이 어디 있어. 백퍼 이혼감이지.”
- 그게 무슨….
“못 믿겠으면 맘카페에 물어봐요.”
의진이 맹신해 마지않는 맘카페를 들먹이자 의진의 눈동자에 지진이 났다. 저러다 쓰나미까지 나겠네. 서운이 웃음을 참는 것도 모르고 의진의 얼굴이 점점 심각하게 굳어져 간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타이밍 좋게 택시 기사가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의진 씨, 나 짐이 있어서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은데.”
- …….
“의진 씨?”
- …….
“의진 씨!”
- 네! 서운 씨! 무슨 일이십니까!
일은 네가 있는 것 같은데요. 우렁찬 대답과 달리 의진은 어딘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침부터 일정이 빡빡하더니 슬슬 바빠지려는 모양이다. 서운은 이만 의진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이만 끊는다고요. 행사 잘 다녀오고. 아침부터 고생이 많네요.”
- 네, 행사 씨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네?”
- 아, 아닙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방금 뭔가 엄청나게 버벅거린 것 같은데. 서운은 전화를 끊으려다 말고 다시 의진을 쳐다보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누가 봐도 재벌 3세처럼 보이는 완벽한 슈트 차림의 알파가 있었다. 하하, 내가 잘못 들었겠지!
그렇게 서운은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끊었고, 외숙모가 챙겨 준 귤 박스와 함께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그 후 서운은 여느 때처럼 평범한 저녁 시간을 보냈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한 별일 없는 하루였다. 그래도 피곤한 건 피곤한 거여서 서운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한낮의 소란은 숙면에 아주 좋은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꿈인 줄 알았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어디서 시선이 느껴진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주변이 산만했다. 커다란 무언가가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거리기도 하고, 어정쩡하게 서운의 주변을 맴도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짜증 난다. 서운이 크게 몸을 휘둘렀다. 퍽! 근처를 맴돌고 있던 무언가가 서운의 발에 맞았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랬더니 말을 한다. 심지어 좋아하는 것 같다. 뭔데, 이건 또…? 서운이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디서 많이 본 잘생긴 알파가 쓰리 피스 정장 차림으로 서운의 눈앞에 서 있다. 이게 웬 떡이지. 장난스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잠시, 서운은 금세 현실로 복귀했다.
“…이제 저희 이혼하는 겁니까…?”
어제까지만 해도 지구 반대편에 있던 의진이 다짜고짜 그런다. 서운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런 줘도 못 먹을 새끼가. 서운은 다시 눈을 감았다. 한 대 치길 잘했다.
* * *
“와씨! 깜짝이야!”
깜짝 놀랐다. 근 한 달 동안 혼자 살던 집에 아침부터 다른 사람이 와 있는 것도 어색한데 커다란 덩치가 욕실 문 앞에 떡하니 서 있어서 더 놀랐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서운이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괜히 내가 놀라서…. 나 방금 샤워해서 좀 습할 텐데 괜찮아요? 2층 욕실 쓸래요? 위치 알려 줄까?”
그래도 화가 나지 않는 건 자다 일어난 서운과 달리 정장을 갖춰 입고 저를 내려다보는 의진 때문이다. 하물며 그냥 정장도 아니고 베스트에 타이까지 맸다.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놀라움도 잠시, 자연스럽게 2층 욕실을 안내해 주려던 서운이 문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사진에서 서운은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서운의 결혼식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옆에는 어디서 많이 본 알파가 서운과 같은 턱시도를 입고 서 있다.
아, 맞다. 나 결혼했지. 결혼 한 달 차에 한 달 동안 독수공방했더니 자꾸 결혼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서운은 2층으로 향하다 말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의진이 서운을 졸졸 따라오며 물었다.
“2층 가시려는 거 아니었습니까?”
어. 그랬지. 너 안내해 주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불청객이 아니라 법적 동거인이었다. 하물며 의진이 직접 구입한 집이니 집 안 구조 정도야 서운보다 더 잘 알 테다. 서운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어딘지 알잖아요. 여기 있을 테니까 갔다 와요.”
“어디를 말입니까?”
“화장실 가려던 거 아니야?”
“네, 아닙니다.”
그러더니 의진이 냉큼 서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보통은 마주 보고 앉지 않나? 두 사람이 바짝 붙어 앉아 있으려니 가뜩이나 넓은 소파가 텅텅 남아돈다. 이 정도면 거의 공간 낭비 수준이다.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어디에 앉을지는 개인 자유니까. 아무래도 의진은 이 자리에 앉고 싶은 모양이다.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옆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의진이 신혼여행에서 서운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것처럼 저도 의진을 배려해 친히 제 자리를 내어 주었다. 물론 그때의 서운은 의진과 가까이 있고 싶었던 것뿐이지만 어쨌든, 서운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다.
“…어?”
“왜 그러십니까?”
“어? 아니….”
그런데, 의진이 이상하다. 기껏 자리를 비켜 줬더니 혼자 편하게 앉지 않고 또다시 서운과의 거리를 좁히며 옆에 찰싹 붙어 온다. …얘가 왜 이러지. 서운은 의심스럽게 의진을 쳐다보았다. 설마 내 옆에 앉고 싶어서 이러나.
남들에게는 평범한 애정 행각에도 설마 싶은 의심이 드는 건 의진의 평소 행실 때문일 거다. 의진의 옆자리에 앉았다가 통째로 몸이 들린 전적이 있는 서운이기에 의진의 행동이 영 미심쩍다.
“음… 의진 씨?”
“네, 서운 씨.”
“…….”
“말씀하십시오.”
서운은 의진에게 할 말이 많았다. 자신의 단잠을 깨운 의진의 개소리와 갑작스러운 귀국까지, 궁금한 것도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오늘이 귀국 날이에요? 한 달 뒤에 온다며? 어제까지 아무 말도 없었잖아. 샤워까지 하고 나왔건만 서운은 아직도 이 상황이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랬는데… 가깝다. 의진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서운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가만히 의진을 쳐다보았다. 너무 가까워서 이대로 숨소리마저 들릴 것 같다. 서운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 듯 의진도 아무 말 없이 서운을 쳐다보았다.
어제도 택시 안에서 영상 통화를 하긴 했지만 영상과 실물은 다르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고, 스치듯이 맞닿은 부위에서는 미세한 온기가 느껴진다. 의진의 허벅다리에 서운의 무릎이 닿아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간지러움이 전신에 피어오른다. 딱 꼬집어 어디가 어떻게 간지러운 건지는 모르겠으나 뭐든 시원하게 벅벅 긁어 버리고 싶다. 조금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 그도 그럴 게 퍽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서운은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괜히 소파 가죽이나 만지작거렸다.
우웅, 간질간질한 감각 사이로 짧은 떨림이 전해졌다. 강도가 세진 않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웅! 가까운 곳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근원지는 의진이었다. 서운에게도 느껴지는 진동을 의진이 모를 리가 없다. 묘하게 굳어 있는 의진을 대신해 서운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의진 씨, 전화 와요.”
“…아닐 겁니다.”
“쟤는 아니라는데?”
우웅! 대답이라도 하듯 또다시 진동이 울리자 의진이 마지못해 휴대폰을 꺼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받아요. 업무 연락일까 싶어 배려해 줬더니 의진이 금방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단순 알람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꺼 놨으니 이제 조용할 겁니다.”
의진의 말대로 더는 아무런 진동도 울리지 않았다. 방해꾼도 없겠다, 지금이야말로 대화를 시작할 때였다. “어, 그럼….” 서운이 먼저 운을 떼긴 했으나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당장 어제만 해도 의진이 오늘 한국에 온다는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다. 그것도 그거지만 이혼은 또 무슨 소리인지, 의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밥은 먹었어요?”
그래서 그랬던 것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평범한 안부 인사에 의진이 돌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제 끼니를 생각해 주시다니…. 서운 씨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음… 이런 상황이 뭔데요?”
“이혼입니다.”
“아, 이혼. 나랑 이혼하고 싶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 보인다. 서운이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그런데요?”
“이혼은… 서운 씨가 하고 싶어 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오, 내가?”
“…네. 맞으십니까?”
그랬었지. 결혼 2일 차에도 그랬고 불과 어제도 그랬다. 뭐가 됐든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서운이 바로 대답하지 않자 의진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눈알 굴러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서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맘카페에 물어봤구나.”
“…왜 대답 안 하십니까.”
“사람들이 그래요? 이혼감이라고?”
“아직 대답 안 하셨습니다.”
“뭐라고 물어봤어요? 댓글은? 많이 달렸어? 나도 보여 주면 안 돼?”
“제가 먼저 물어봤으니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우선입니다.”
이럴 수가. 지니가 업그레이드되었다. 심지어 일전에 서운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응용하는 고난이도 기술까지 선보였다. 좀 더 놀리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서운은 이쯤에서 적당히 물러나기로 했다. 업그레이드된 보람은 느끼게 해 줘야 다음에도 열심히 업그레이드해 오지 않을까. 단잠을 깨운 불청객의 등장에도 서운은 하나도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처음에 장기 출장 간다고 했을 땐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거든요. 신혼여행 둘째 날에는 진짜 확 이혼해 버릴까 했어요.”
“…….”
“아무렇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인… 의진, 씨? 지금 입술에서 피 나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계속 말씀하십시오.”
“피 나잖아!”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 같으면 신경이 안 쓰이겠냐! 웬 커다란 애가 코앞에서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겠냐고. 하물며 그놈이 남편일 때는 더더욱 사정이 달라진다.
“아깝게….”
결 좋은 입술에 생채기가 났다. 조심조심 상처 주변을 더듬는 손길에 의진의 입가가 크게 움칠거렸다.
“아파요?”
“아닙니다.”
역시 대답 하나는 잘한다. 서운의 손가락이 확신을 가지고 의진의 입술을 더듬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폭신폭신한 아랫입술을 눌러 보기도 하고, 지문을 세워 결 따라 입술 전체를 훑어보기도 했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죠?”
서운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조금씩 의진의 입술이 벌어진다. 입가를 더듬는 간지러운 손길에 의진이 반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장기 출장도 그렇고… 그냥 다.”
서운이 부드럽게 의진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아, 마침내 의진이 입술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훌륭히 제 할 일을 끝낸 서운의 손가락이 그대로 의진의 입가에서 떨어져 나왔다.
의진의 시선이 다급하게 서운의 손가락을 좇았다. “의진 씨?” 서운의 재촉에 의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시 마주한 의진의 눈동자가 꿈에 잠긴 것처럼 몽롱하게 풀어져 있다. 어…. 의진과 시선이 마주친 서운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의진이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 어… 그러니까… 나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요?”
“없습니다.”
“숨기는 건?”
“있었습니다.”
“뭐?!”
“결혼식 날 아버지가 서운 씨께는 비밀로 하고 축….”
“그건 넘어가죠. 그때 말고는 없어요?”
“네. 없습니다.”
“앞으로도?”
“네, 그렇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제게는 서운 씨의 만족이 최우선입니다. 앞으로도 서운 씨께 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겁니다. 맹세합니다.”
뭘 또 맹세까지.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멋대로 풀어지는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다시 묶어 놓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의진의 해독 능력은 이미 검증되었다. 의진은 타인에게 관대하지 않은 서운을 핑크색 포스트잇 몇 장으로 한없이 관대해지게 만든 엄청난 전적이 있다.
“…그 말 꼭 지켜요.”
“전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사에 쓸데없이 진지해서 서운의 말 한마디도 허투루 흘려듣지 않는다.
“두고 보면 알겠지.”
“네, 지켜봐 주십시오.”
사는 세계가 다르고 가끔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데도 어쩐지 그 자체로도 괜찮다는 안일한 생각마저 들게 하는 사람, 이게 내 남편이라고. 서운은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멍하게 의진을 쳐다보았다.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는 서운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의진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똑바로 서운을 바라보며 기다렸다는 듯이 줄곧 궁금했던 걸 묻기에 이른다.
“그래서 서운 씨는 이혼이 하고 싶으십니까?”
“…듣자 듣자 하니까 아까부터 왜 이렇게 이혼 타령이에요?”
의진의 갑작스러운 귀국부터 영문 모를 이혼 타령까지, 어쩐지 조금 불쾌해지려고 한다. 서운이 들으란 듯이 투덜거렸다.
“오늘 온다면 온다고 언질이라도 해 주지,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게 뭐야.”
“죄송합니다. 일정이 갑작스럽게 변경되어서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음부터는 꼭 사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얘기 없었잖아요.”
“네, 맞습니다. 서운 씨와 통화를 할 때까지만 해도 이럴 예정이 아니었으니까요. 한국행을 결정한 건 약 12시간 전입니다.”
못해도 비행기만 10시간은 탔을 거다. 그럼 정말 긴박하게 일정을 변경했다는 소리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서운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그 정도면 비상사태 아니야?”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서운 씨는 저와 이혼이 하고 싶으십니까?”
어… 어? 서운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저와 이혼하고 싶으신지 물었습니다.” 의진이 기계처럼 정확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얘 지금…. 서운은 간신히 상황 파악에 나섰다. 내가, 내가 이혼감이라고 해서… 진짜로 이혼당할까 봐… 그래서….
거기까지 생각한 서운은 이 이상 생각하기를 멈췄다. 아니, 더는 머리가 안 돌아간다.
“서운 씨, 왜 그러십니까?”
“…….”
“어디 아프십니까?”
서운은 말없이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얼굴의 열기가 터질 것처럼 뜨거웠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서운은 당장이라도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황당한데 귀엽고 복장이 터지는데 귀엽다. 어이가 없는데 귀엽고 기가 막힌데 귀엽다. 그냥 기승전 다 귀엽다. 뭔데, 이거. 이거 대체 뭔데! 귀여워 보이면 다 끝장이라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나 잠깐 물 좀….”
서운이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 관리가 안 돼서 바로 의진의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솔직히 좀 창피하기도 하고. 그때였다.
“억!”
서운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다시 소파에 엎어졌다. “괜찮으십니까?” 다짜고짜 서운의 무릎을 붙잡을 땐 언제고 놀란 의진이 뒤늦게 서운을 살핀다. 서운은 소파에 한쪽 무릎을 대고서 어정쩡하게 엎어져 있었다. 한쪽 무릎은 여전히 의진에게 잡힌 채였다.
서운이 경험한 알파들은 대부분 손이 먼저 나가는 경향이 있는데, 의진도 결국 그런 건가 싶었다. 서운은 얼굴을 붉히던 것도 잊고서 누구보다 강력하게 제 안위를 걱정하고 나섰다.
“뭐 해요! 고꾸라질 뻔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기계처럼 사과를 해 오면서도 무릎을 잡은 손은 놓지 않는 꼴이 아무리 봐도 계획범죄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네? 의진 씨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그냥….”
“그냥?”
의진이 그답지 않게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더니 대답 대신 천천히 손을 뻗어 온다. 의진이 조심스럽게 서운의 무릎을 매만졌다. 손바닥으로 툭 불거진 무릎뼈를 둥글게 쓰다듬는 손길이 영 어색하다. 의진이 서운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닿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서운이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보이는 건 오랜만에 보는 제 남편으로,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서운 씨와 계속 닿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습니다. 놀라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면서도 서운의 무릎을 만지는 손길은 멈추지 않는다. 서운은 그런 의진을 제지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 어, 음 따위를 반복하며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파에 무릎을 박고 엎어지면서 생겨난 분노는 알아서 소강된 지 오래였다. 서운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말로 해요. 그, 막 잡지 말고.”
“알겠습니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서운의 무릎을 만지던 의진이 조심스럽게 그러쥐었다. 서운의 다리가 천천히 의진 쪽으로 끌어당겨졌다. 의진은 서운의 무릎을 끌어와 다시 제 허벅다리에 붙이고 앉았다.
어색해지면 말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는 서운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추, 출장은 이제 다 끝난 거예요?”
“아니요. 아직입니다. 예정대로 11월 말에 귀국합니다.”
“아…. 그럼 다시 언제 나가요?”
“5시간 20분 뒤에 출국합니다.”
어?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서운이 두 눈만 끔뻑거리자 의진이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5시간 14분 뒤군요.”
“…설마 오늘 바로 간다는 소리예요?”
“네, 그렇습니다.”
“너무 촉박한데?”
“확실히… 그렇군요.”
무릎에 올려 있던 손이 어느덧 허벅지로 올라왔다. 손바닥이 지나는 자리마다 잊고 있던 간지러움이 단숨에 피어올랐다. 의진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운 씨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어? 뭐, 뭔데요?”
“전에 말씀하신 자기주도학습 말입니다. 직접 확인하라고 하셨던….”
아, 네. 제가 그랬죠. 제가 그랬습니다. 서운이 횡설수설 대답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의진이 스스로 타이를 풀며 말했다. 와, 나…. 서운이 꿀꺽 침을 삼켰다. 절로 군침이 도는 광경이었다.
“혹시….”
“응.”
“…지금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언뜻 하와이에서의 첫날밤이 생각났지만 곧 번잡한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완전요.”
거사를 앞두고 다른 생각은 하면 안 된다. 뭐가 됐든 좋은 게 좋은 거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한 몸이 되어 소파 위를 뒹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사람의 체온에 한 것도 없이 열감이 치솟았다.
입술에 상처 났던데. 걱정은 머릿속으로만 했다. 사람은 입술에 상처가 난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서로의 입술이 맞물리고, 자연스럽게 혀가 얽히었을 때 서운은 깨달았다. 난 키스를 좋아하는구나.
고작 입술이 닿은 것뿐인데 이렇게 좋은 걸 보면 좋아하다 못해 환장하는 게 틀림없다. 서운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비틀어 더욱 깊은 입맞춤을 유도했다. 서운의 리드에 의진이 순순히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감각이 극대화된 예민한 살덩이가 만나 정신없이 서로를 물고 빨았다. 서운은 의진의 혀를 빨며 정신없이 손을 움직였다. 의진의 뒤통수를 마구 헤집기도 하고, 있는 힘껏 끌어안기도 했다.
의진도 마찬가지였다. 서운을 끌어안고 소파 위로 쓰러진 의진이 부지런히도 손을 놀려 댄다. 서운의 티셔츠가 가슴 부근까지 말려 올라갔다. 헐렁한 파자마 바지는 엉덩이 밑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마저 서운의 바지를 벗기려던 의진이 돌연 손을 멈추고 입술을 뗐다.
가늘게 이어지는 타액 너머로 열에 들뜬 서운의 얼굴이 보였다. 서운이 떨어져 나간 입술을 쫓으려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의진이 그런 서운을 내리누르며 말했다.
“서운, 씨.”
“으응.”
“…속옷은 왜 안 입으셨습니까.”
바지를 내린 것뿐인데 손바닥 아래에 부드러운 맨살이 감기었다. 의진이 서운의 엉덩이를 크게 쥐었다 놓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방금 전까지 물고 빠느라 살짝 도톰해진 입술이 따끈한 열을 내며 서운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짓눌렀다. 하, 아…. 서운이 의진의 아래에서 작게 헐떡거렸다. 비몽사몽으로 욕실에 가느라 여분의 속옷을 챙겨 가지 않은 것뿐이지만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이 세상을 구한다.
“…이럴까 봐.”
내친김에 허리를 들어 의진의 손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몇 번 문질렀더니 곧바로 양쪽 엉덩이가 잡혔다. 터트리기라도 할 듯 세게 움켜쥐는 통에 조금 아프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조차 짜릿하다. 서운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알아서 의진의 허리에 양다리를 감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의진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진다. 불규칙적으로 흩뿌려지는 숨결이 서운의 목을 타고 밑으로 내려왔다. 이번에도 곧장 하체로 내려갈 줄 알았던 의진은 서운의 티셔츠를 코끝으로 걷어 올리며 가슴이 훤히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의진의 양손은 여전히 서운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였다.
무릎으로 소파를 디딘 채 살짝 상체를 일으킨 의진이 가만히 서운을 내려다보았다. 감상하는 시선이 너무 적나라해서 서운은 조금 창피해졌다. 서운 씨, 탁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서운을 불렀다. 서운은 대답 대신 의진을 올려다보았다. 몽롱하게 풀어진 눈동자가 저를 훑고 있었다.
“그동안 상체 애무에 소홀했던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걸 꼭 지금 해야겠니…? 서운이 눈으로 말했다.
“처음으로 서운 씨와 영상 통화를 한 날,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뭐가요, 또.”
“서운 씨는 흥분하지 않아도 젖꼭지가 봉긋하게 솟아 있더군요.”
갑작스러운 발언에 의진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있던 서운의 다리 힘이 풀어졌다. 의진이 어렵지 않게 양팔로 서운의 다리를 추켜올리며 다시금 제 허리를 감게 했다.
“덕분에 옛 생각이 나더군요.”
“무슨…?”
“첫 섹스 날 서운 씨가 제 위에 올라타셨잖습니까.”
“…그, 랬죠.”
그래, 그랬었지. 서운은 마지못해 대답하며 슬쩍 의진의 시선을 피했다.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의진의 입으로 듣고 싶지는 않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테다. 이런 서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진의 입방아는 계속되었다.
“그때부터 젖꼭지가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빨아 보고 싶게 생겼더군요.”
“…의진 씨, 그만 좀….”
“빨아도 보고 깨물어 보고도 싶었는데 페로몬에 홀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의진의 목소리가 탄식에 젖어 있어서 서운은 괜히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오늘따라 의진의 장난이 지나치다.
“첫날밤까지 그랬지요.”
아, 설마 장난이 아닌 건가. 의진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다시 생각해도 참 안타깝습니다.”
허리를 숙인 의진이 서운의 젖꼭지에 입술을 비비며 말했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입술이 젖꼭지에 비벼지자 부들부들한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한 서운이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젖꼭지도 그렇고 아래 구멍도 그렇고 서운 씨는 온몸이 빨아 보고 싶게 생겼습니다.”
움칠, 서운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진지하게 낯 뜨거운 소리를 지껄이는 의진 때문에 이대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다.
“그리고….”
“…….”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아주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가…. 외부의 자극으로 빳빳하게 일어선 젖꼭지가 축축한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 으! 충분히 예상 가능한 자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운은 크게 놀라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이럴 줄 알고 입까지 막고 있었는데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수치심을 빙자한 쾌감은 서운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세다.
“아프십니까?”
서운의 발버둥에 의진이 입술을 떼고 물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서운은 냉큼 고개부터 끄덕이고 봤다. 내가 나를 잃어버릴 것 같은 거대한 쾌감에는 영 익숙하지 않았다.
의진이 서운의 가슴에 턱을 대고서 가만히 서운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익숙지 않은 감각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서운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의진은 어딘가 웃는 얼굴로 서운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방금 전까지 발버둥 치던 서운은 어디 가고, 얌전히 제 손길을 받아들이는 서운이 보인다. 평소에는 그렇게 어른스러우면서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다. 서운은 보기보다 엄살이 심했다.
“‘No pain, No gain’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기억 안 나요.”
“괜찮습니다. 제가 기억합니다.”
“자, 잠! 아!”
곧바로 젖꼭지가 깨물렸다. 아릿한 감각에 얼굴을 찡그리자 할짝거리며 살살 젖꼭지를 핥아 올린다. 간지럽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하고. 복합적인 쾌감에 슬며시 허리를 물리려 들자 이제는 아예 힘을 주어 젖꼭지를 빨아들인다. 어, 어…! 빠는 힘이 강해질수록 신음도 한층 커졌다. 당연하게도 싫어서 나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못 한 가슴 애무를 다 하려는 건지 의진은 보란 듯이 서운의 가슴에 얼굴을 처박았다. 입술이나 혀가 아닌 손으로도 만져 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손바닥에 감기는 엉덩이의 감촉이 지나치게 좋았다. 혀끝에 걸리는 봉긋한 젖꼭지가 기분 좋아 의진은 어느 순간부터 계속 젖꼭지를 빨아 댔다. 계속된 압력에 젖꼭지가 부어오를수록 혀끝에 걸리는 감촉도 한층 좋아졌다. 구멍만큼이나 조그만 유륜만으로는 부족해서 나중에는 젖꼭지 주변의 가슴살을 그러모아 물고 빨기를 반복했다.
“…서운 씨. 잠깐 다리 좀 풀어 주십시오.”
“왜, 왜….”
하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왜 멈추냐고 난리다. 의진이 자신에게 따라붙는 서운을 억지로 떼어 냈다.
“바지가 다 젖었습니다.”
“…….”
“이대로는 불편하실 테니 벗겨 드리겠습니다.”
자기한테 불리한 건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서운이 말없이 다리를 풀어 의진을 도왔다. 철썩, 흥건하게 젖은 잠옷 바지가 민망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저런 민망한 소리가 난 걸 보니 소파 뒤로 떨어진 것 같았다. 소파 앞에 기껏 러그를 깔아 놨더니 왜 하필 떨어져도 맨바닥에 떨어진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아!”
멈춰 있던 입술이 다시 젖꼭지로 향했다. 퉁퉁 부은 젖꼭지가 예민하게 외부의 자극을 알렸다. 쪼옥, 의진이 맛있는 소리를 내며 다시 가슴을 빨았다. 걸리적거리는 바지도 없겠다, 이제야말로 양껏 가슴을 맛보려는 것 같았다.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이 정도는 아닌, 데….”
두 사람 모두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서운이 맨다리라는 사실이었다. 줄줄 흘러내리는 애액을 제 한 몸 바쳐 열심히 막아 주었던 것도 모르고, 한 사람은 바지를 벗겼으며 한 사람은 알아서 다리를 풀어 주었다.
서운의 하체와 맞닿은 의진의 허벅다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소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운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의진이 고개를 내려 서운의 하체를 들여다보았다. 내벽에서 흘러나온 애액으로 아랫도리가 엉망으로 젖어 있었다.
“서운 씨. 역시 빨고 싶습니다.”
“…그, 그런 말 좀….”
“빨아도 됩니까?”
“…혀만, 혀만 쓰는 거면.”
“한국 가면 빨아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제가요?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한데 벌써 한 달도 더 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이번에도 기억은 의진이 했으니까.
아! 의진이 축축하게 젖은 입구에 얼굴을 박자 서운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터졌다. 그새 젖꼭지에 익숙해진 의진이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구멍을 빨아들였다.
“아, 으응…!”
서운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소파 가죽을 벅벅 긁어 댔다. 성기에서 회음부로 이어지는 부근에 의진의 코가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지금 의진이 어디에 얼굴을 박고 있는지가 실감이 나서 더욱 참을 수가 없어졌다.
넘쳐흐른 애액을 맛보며 입구 주변을 핥던 의진이 구멍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두툼한 혀가 애액을 타고 구멍으로 쑥 밀려 들어왔다. 서운이 더는 참지 못하고 의진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뭐라도 잡으면 좀 나을까 싶었는데 쓸데없이 의진의 고갯짓만 더 선명해졌다. 의진의 고개가 뒤로 밀린다 싶으면 혓바닥이 내벽을 핥으며 구멍 밖으로 빠져나갔고, 고개가 앞으로 향한다 싶으면 두툼한 혀가 내벽에 길을 내듯 밀고 들어왔다.
죽을 것 같았다. 서운은 혀가 구멍을 드나들 때마다 맥없이 애액을 쏟아 냈다. 이 사실을 구멍에 혀를 집어넣고 있는 의진이 모를 리가 없다. 수치심을 동반한 쾌감은 남은 이성을 모조리 앗아 갔다. 서운이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질렀다.
“어, 어! 안…!”
“…….”
“아, 어떡, 아, 아아…!”
한 번도 만져 주지 않은 성기는 이미 스스로 벌떡 일어나 있었다. 발기하다 못해 땡땡하게 부어오른 성기가 이리저리 아프게 흔들렸다. 서운이 본능적으로 성기에 손을 가져갔다. 앞과 뒤를 동시에 자극받고 싶어 하는 오메가의 본능이었다.
“안 됩니다.”
서운의 애액인지 자신의 타액인지 모를 액체로 입술을 적신 의진이 서운을 방해하고 나섰다.
“성기 자극과 내벽 자극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시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싫, 어. 할래. 지금 할 거야.”
“이번에는 내벽 자극으로 사정하시고 다음번에 동시 자극으로 사정하십시오.”
싫어, 싫어. 서운이 정신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의진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니요. 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항상 첫 번째에서는 성기와 내벽 자극으로 사정하셨으니 이번에는 순서를 바꿔 보려 합니다.”
“싫어…! 내가 왜…!”
“서운 씨가 말씀하셨잖습니까. 이게 다 자기주도학습의 일환입니다. 그러니….”
본인 입으로 하신 말씀은 확실하게 책임지십시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다던 의진의 말이 생각났다. 만약 그 말대로라면 서운은 제가 한 말을 몸으로 책임져야 했다.
의진이 무슨 질문을 했더라. 질문은 총 몇 개였지. 언뜻 생각나는 것만 해도 3개는 넘는다. 그 경우의 수만 따져 봐도 서운이 5시간 14분 동안 몇 번의 사정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서운에게는 어떠한 여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 모르겠고 지금 당장 사정이 하고 싶다. 빨리 허전한 뒤를 채우고 귀두까지 차오른 정액을 남김없이 쏟아 내고 싶었다. 한시가 급한 서운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진은 이제야 재킷을 벗고 있다. 몸이 단 와중에도 서운은 충실하게 본능을 따랐다. 이번에는 서운이 의진을 저지했다.
“다 벗을 거야?”
“…….”
“…재킷만 벗으면 안 돼?”
의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콘돔을 꺼내 놓을 뿐이었다. 찌익, 의진이 콘돔 포장지를 찢으며 바지 지퍼를 내렸다. 안타깝게도 불룩하게 솟아오른 앞섶 때문에 한 번에 내려가지는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진이 옷 속에서 최소한의 성기만 꺼내 놓았다. 기다렸다는 듯 밖으로 나온 성기는 손쓸 틈도 없이 아랫배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의진이 억지로 콘돔을 씌우자 핏줄이 불거진 성기가 꿈틀거리며 몸부림을 쳤다. 서운의 구멍도 함께 꿈틀거렸다. 내벽에서 또다시 꿀렁꿀렁 애액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삽입이 한층 수월해졌다. 중간에 기둥이 잠깐 걸리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가장 수월한 삽입이었다. 성기가 뿌리까지 꾸역꾸역 밀려 들어간 후에도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이라고는 가슴 위로 말려 올라간 티셔츠가 전부인 서운은 소파에 등을 붙이고 누워 있었고, 의진은 그런 서운에게 성기를 박아 넣은 채 무릎으로 소파를 딛고 서 있었다. 서운의 다리는 잔뜩 벌어져 의진의 양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는데, 의진은 타이를 풀고 재킷을 벗어 던진 것만 제외하면 여전히 정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의진을 올려다보는 서운의 눈이 잔뜩 풀려 있다. 의진은 그런 서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한참 만에 허릿짓을 했다. 철썩! 허릿짓 한 번에 결합부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애액이 너무 많이 나온 것도 이유였지만,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애액으로 적셔진 서운의 엉덩이가 가죽 소파에 쩍쩍 달라붙어서 나는 소리였다.
철썩, 철썩! 엉덩이가 가죽 시트에 눌러 붙을 때마다 의진과 기묘한 엇박자를 만들어 냈다. 서운의 양 발목을 움켜쥔 의진의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으, 앗!”
갑자기 서운의 몸이 들렸다. 놀란 서운이 매달리듯 안겨 오자 의진이 서운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소파 밑으로 내려온 의진이 서운을 일으켜 제 다리 위로 올렸다. 서운의 등 뒤로 소파 기둥이 느껴졌다.
“어, 윽, 너무, 깊….”
“하… 아프십니까?”
“아, 니, 아픈 건, 아닌, 앗!”
귀두 끝에 걸려 있던 서운의 엉덩이가 기둥 전체를 집어삼키며 단번에 아래로 처박혔다. 예상대로 고통은 없었다. 내벽 전체에 퍼져 있는 질척질척한 애액이 온몸으로 알파의 성기를 받아들인 덕분이었다.
하, 아, 하아, 하아…. 서운은 아래가 꿰뚫린 채 의진의 다리 위에서 작게 헐떡거렸다. 아래가 아픈 건 아니지만 너무 깊게 삽입된 성기 때문에 아랫배가 불편하다. 이러다 배에 구멍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한 건 서운만이 아니었는지 의진의 시선이 밑으로 향했다.
의진은 아무 말 없이 서운을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서운의 아랫배를 보고 있었다. 판판한 아랫배가 배꼽을 기점으로 가운데만 툭 불거져 있다. 명백한 삽입의 흔적이었다.
서운의 허리를 쥐고 있던 커다란 손이 천천히 서운의 아랫배를 덮었다. 움칠, 저도 모르게 겁을 먹은 서운이 반사적으로 구멍을 조였다. 통증은 없었지만 거북할 정도로 아랫배가 가득 찬 느낌이라 가벼운 손길에도 지레 겁이 난다.
서운이 무서워하는 걸 알았는지 의진이 손바닥을 거두고 손가락 끝을 세워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더듬었다. 손끝의 지문이 알알이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손길이었다.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슬쩍 허리를 띄우면 허리를 잡고 있는 커다란 손이 다시금 서운의 자세를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의진은 그 상태로 한참 동안 서운의 아랫배를 쓰다듬고 있었다.
“…신기하군요.”
마침내 의진의 손가락이 아랫배를 지나 더욱 은밀한 곳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한계까지 벌어진 입구가 간신히 성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작은데도 다 들어가다니요.”
“당연, 하지. 아기도, 키울 수 있는데 뭐, 든…! 아! 거기, 계속 만지면…!”
주름이 펴진 입구를 쓰다듬으며 결합부를 더듬던 의진의 손길이 한순간에 멎었다. 생각해 보면 다소 이상했지만 서운은 그저 자신을 괴롭히던 은근한 자극이 사라진 데 안도하기 바빴다.
“…기….”
의진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소파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의진의 다리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서운이 뒤늦게 고개를 들어 의진을 쳐다보았다.
마주친 의진의 동공이 위험하게 풀려 있다. 은은하게 주변을 감싸고 있던 박하 향이 폭발하듯 짙어진 것도 그때였다. 억지로 내벽을 잡아 벌리고 있던 성기가 안에서 더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갑자기 의진의 페로몬이 폭발적으로 새어 나왔다. 온몸이, 배 속이 알파의 페로몬으로 젖어 들어간다. 알파의 페로몬을 집어삼킨 내벽이 강제로 달궈지기 시작했다. 반강제로 몸속을 애무당하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아기….”
아. 알아차렸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흥분으로 의진의 동공이 잔뜩 확대되어 있었다. 곳곳에 페로몬이 넘실거렸다. 의진을 따라 통제를 잃어버린 서운의 페로몬도 함께였다.
퍽! 가구점 직원 몇 명이 힘을 모아 간신히 옮겨 주었던 묵직한 가죽 소파가 맥없이 뒤로 밀려났다. 의진은 한쪽 손으로는 소파를 짚은 채 서운의 허리를 잡고서 미친 듯이 허리를 쳐 대고 있었다. 어, 어! 아, 윽! 하으, 아! 서운은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정신없이 아래를 꿰뚫렸다.
소파가 자꾸 밀려나서 기대 누울 만한 곳도 없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의진의 허벅다리와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커다란 손이 전부다. 그마저도 멈출 줄 모르는 허릿짓 때문에 반은 공중에 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서운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반사적으로 구멍을 조이며 두 사람을 연결해 주는 의진의 성기를 붙잡으려 들었다. 그럼 의진은 서운의 허리를 억지로 잡아 누르며 귀두 머리까지 성기를 빼냈다가 단숨에 허리를 쳐올렸다. 철퍽! 더는 가죽 소파에 엉덩이가 들러붙지 않는데도 결합부에서는 계속 젖은 소리가 났다. 젖은 살끼리 부딪치는 음란한 소리에 귀가 멀 것만 같다.
모든 게 하나같이 자극적이다. 하다못해 눈앞에 보이는 광경만 해도 그랬다. 당장 사무실에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옷차림으로 눈이 풀린 채 정신없이 허리를 쳐 대는 꼴이라니. 그에 비해 서운은 입으나 마나 한 얇은 티셔츠를 걸치고서 아랫도리를 훤히 내놓고 있다. 정갈하게 잠겨 있는 단추들이 튕겨 나갈 것처럼 베스트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사정감이 더욱 심해졌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히듯이 계속되는 삽입에 성기는 수도 없이 쿠퍼액을 뱉어 내는 중이었다.
곧 사정할 것 같다. 너무너무 싸고 싶은데 이렇게 계속 아래가 들쑤셔지면서 동시에 사정해 본 적은 없었다. 퍽! 또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히며 깊게 꿰뚫렸다. 아, 으응…! 서운이 허리를 비틀며 신음하자 이번에도 의진이 단단히 서운의 허리를 붙잡았다.
좋은데 괴롭다. 쉴 틈 없이 밀려드는 폭력적인 쾌감에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했다. 서운이 의진의 옷을 마구 잡아당겼다.
“나, 그만! 내려, 놔아…!”
“가만히, 계십시오. 떨어, 하… 집, 니다…!”
단번에 거절당했다. 싫, 어. 못 해, 이 자세로는, 못 해. 안 돼, 아, 안, 아! 서운의 신음이 끝도 없이 올라갔다. 위에서는 의진이 서운의 허리를 잡아 누르고, 밑에서는 단단하게 일어선 성기가 단번에 내벽을 들쑤시며 밀려 들어온다.
죽을 것 같다. 내 몸이 내 몸 같지가 않다. 아래가 빨리고 젖꼭지가 깨물리는 건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단단하게 근육이 일어선 몸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아, 아아!”
“후, 으….”
“응, 아! 죽을 것, 같, 아, 아!”
결국 서운은 신음도 내지 못하고 의진에게 매달린 채 순식간에 절정을 맞았다. 한 번도 만져 주지 않은 성기가 색이 짙은 정액을 쏘아 올렸다.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눈앞이 새카맣게 점멸하는 강렬한 쾌감이었다. 이런 섹스는 처음이었다.
끝났다. 사정을 마친 서운의 몸이 맥없이 늘어졌다. 의진이 서운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서운은 의진에게 몸을 기댄 채 간신히 고개를 들어 의진을 쳐다보았다.
아. 의진의 동공이 여전히 몽롱하게 풀어져 있었다. 배 속을 가득 메운 바짝 일어선 성기도 마찬가지였다. 의진은 아직 사정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아, 안 돼. 더는, 못 해. 나 진짜…! 아!”
“역시 서운 씨는, 하….”
“아, 안에 하지 마. 그거, 하지 마아…! 앗!”
“엄살이… 심하신 것, 같습니다….”
서운은 곧바로 갓 사정한 성기를 자극당하며 내벽을 들쑤셔졌다. 방금 전에는 내벽만으로 사정했으니, 이번에는 성기와 전립선 자극으로 사정해야 한다는 의진의 논리 때문이었다.
경우의 수는 아직 많이 남았다.
* * *
결과는 처참했다. 기분 좋게 발바닥을 간질이던 보드라운 러그는 정체 모를 액체로 축축하게 젖었고, 군데군데 털이 엉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의진보다 더 많이 서운과 맨살을 부대껴 왔을 가죽 소파는 유독 한 부분만 반질반질 윤기가 돌았다. 구입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소파가 벌써 닳았을 리는 없으니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말이 좋아서 반질반질이지 뒤로 한껏 밀려나 있는 소파는 누가 봐도 급하게 뭔가를 닦아 낸 기색이 역력하다. 도대체 뭘 흘렸던 건지 반짝반짝 빛이 난다. 오메가 애액의 위엄이었다.
소파 주변이 어수선한 것만 빼면 전반적으로 정리가 잘된 집이었다. 사실 집이 너무 넓어서 웬만큼 어지른 걸로는 티도 안 났다. 집 안 어디를 가도 채광이 잘되고, 시야까지 탁 트였다. 서운도 일이 없을 때는 주로 거실에 나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오늘도 그런 하루가 될 줄 알았건만 서운은 거실에 나와 있지 않았다.
걔 지금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 시트에 얼굴을 처박고 엎드려 있는 통에 깨어 있는 건지 잠이 든 건지 분간이 가진 않으나, 알몸으로 침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누워 있는 걸 보니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침실로 들어서던 의진이 멈춰 선 것도 같은 이유였다. 서운은 말 그대로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일어나서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만리장성 노역에 끌려갔다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물론 지도 좋아서 끌려간 거긴 한데 등허리에 나 있는 커다란 손자국과 벌겋게 달아오른 엉덩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유발하게 만들었다.
여러모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광경이었다. 고로 의진은 오해했다. 의진이 다급하게 서운에게 달려갔다.
“서운 씨! 괜찮으십니까!”
컥! 덕분에 서운은 자다 말고 목덜미가 붙잡혔다. 아마도 맥박을 확인하려던 것 같은데 놀란 의진이 힘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모양이 좀 이상해졌다. 얘 지금 뭐 하니…? 잠깐 잠들었을 뿐인데 남편에게 목덜미를 붙들렸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눈꺼풀까지 뒤집어 보고 있다. 존나 로맨틱하네, 진짜…. 서운이 다 갈라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놔라….”
“정신이 드십니까!”
“놓으라고…!”
그럼 뭐 죽었겠니. 목이 아파서 제대로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귀찮은 마음을 가득 담아 대충 손을 휘젓자 서운의 생사를 확인하던 엉성한 손길도 떨어져 나갔다. 지금이 대체 몇 시인지, 그래서 휴대폰은 어디 있는 건지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더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이대로 한숨 푹 잤으면. 서운은 다시 눈을 감았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등허리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촉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다시 잠들었을 테다.
“아, 안 돼! 더는 못 해! 나 안 해!”
인간의 생존 본능이란 가히 위대했다.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서운이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양팔로는 엑스 자를 만들어 가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한껏 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온갖 유난은 다 떨었는데 정작 의진은 보송한 샤워 가운을 들고서 멀뚱멀뚱 서운을 쳐다보고 있다.
“감기 걸리실까 봐….”
“…아.”
“…뭐라도 덮고 주무셔야 할 것 같아서….”
하하하, 그렇구나.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했는데 내가 오해를 했구나? 아까부터 계속 알몸이긴 했지만 서운은 이제 와서 좀 쑥스러워졌다. 절대로 쪽팔린 건 아니다. 서운은 당당했다.
“뭐 해요? 나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야?”
“맞습니다.”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화제를 돌리자 의진이 공손하게 샤워 가운을 내밀었다. 그 꼴이 어딘가 낯설지 않다. 어, 나 이거 알아. 부장님에게 결재를 받으러 가던 서운이 딱 이랬다.
그래, 뭐. 사람이 완벽할 수 있나. 대신 섹스가 완벽하니까 됐다. 서운은 순순히 샤워 가운을 받아 들었다. 여전히 힘이 없는 건 매한가지라 침대에 앉은 채로 꾸물꾸물 가운을 입는데, 잠깐 허리 좀 들었다고 밑이 빠질 것 같다.
“으….”
“괜찮으십니까?”
얕게 흘러나온 신음에 의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묻는다. 서운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의진의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역시 진료를 앞당기는 게…!”
“이러고 병원을 어떻게 가요. 됐고, 이리 와요. 입혀 줘.”
“무엇을 말입니까?”
“가운을 말입니다.”
명령어를 입력했는데도 의진은 요지부동이었다. 말 그대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다. “뭐 해요?”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 건가 싶어 빼꼼 고개를 들며 묻자 의진이 후다닥 침대로 올라왔다. 매트리스가 워낙 좋아서 그런지 커다란 덩치가 올라오는데도 아무런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좋은 침대를 두고 거실 바닥 위를 굴러다녔으니 자원 낭비가 따로 없다.
다시금 본래의 무표정을 되찾은 의진은 아침에 만났을 때처럼 한결같이 깔끔한 모습이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체액으로 젖어 버린 정장 대신 셔츠부터 넥타이까지 새로 싹 갈아입었다. 그런 의진에 비하면 지금의 서운은 망나니가 따로 없으나, 저 혼자 일방적으로 물고 빨리던 거에 비하면 알몸으로 드러누워 있는 지금이 훨씬 덜 창피하다.
힘 조절을 못 해서 서운의 몸 곳곳에 손자국을 남길 때는 언제고 샤워 가운을 입히는 손길은 지나치게 조심스럽다. 덕분에 깜빡 졸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눈을 뜨자 의진이 어떻게 서운의 허리를 들어 올릴지 몰라 우왕좌왕 고민하고 있었다. 가운 하나 입히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의진을 말리거나 다그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지켜만 봤다.
서투르다.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다른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없어 보인다. 나름 로맨틱하다면 로맨틱한 상황에서 서운은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제부턴가 상대의 호의를 마냥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되었다. 스쳐 지나가는 말투 하나로, 의미 없는 습관적인 행동 하나로 쉽게 사람을 판단하며 이를 기반으로 멋대로 상대의 호의에 가치를 매긴다.
만약 의진이 더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 사달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테다. 이렇게 좋은 집과 완벽한 껍데기를 가지고도 이런 식으로 밖에 쓸 줄 모르는 사람, 그래서 답답한데 그래서 결혼했다.
의진은 적당히 닳고 닳은 서운이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다. 지금만 해도 하루아침에 의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세상 똑똑해 보이는 얼굴로 가운 하나 제대로 입힐 줄 모르는 건 또 어떻고.
나의 섣부른 예측과 판단을 빗겨 가는 이 사람이 좋다. 한 번 제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그다음은 놀라울 정도로 쉬웠다. 응, 좋아. 좋아해. 네가 좋아. 서운은 아주 오랜만에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을 했다. 불확실한 미래나 형태가 없는 걱정은 잠시 넣어 두고 오로지 제 마음만 봤다.
“다 됐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비장하게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의진이 보인다.
“리본은 마음에 드십니까?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정석대로 묶어 봤습니다.”
쓸데없이 진지하기는. 평소라면 그렇게 웃어넘겼을 텐데 지금은 어쩐지 웃음이 안 나온다. 서운이 말했다.
“좋아요.”
“만족하신다니 다행입니다.”
…어, 나 지금…. 말할 때는 몰랐는데 말하고 나니까 알겠다. 서운은 지금 리본 얘기를 한 게 아니다. 의진이 뿌듯해하는 건 보기 좋지만 정작 리본은 보지도 않았다.
“추우십니까?”
“어? 어, 좀, 네, 춥네요.”
서운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꾸물꾸물 이불 속을 파고 들어갔다. 딱히 추운 건 아니었는데 가운까지 입고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으려니까 한결 포근하고 좋다. 심리적으로 안정감도 있고. 따뜻하니까 더 졸리네. 창피한 마음과는 별개로 본능에 충실한 몸이 또다시 하품을 하자 의진이 얼른 주무시라며 침대를 내려갔다. “어디 가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서운이 물었다.
“공항 갑니다.”
“뭐요?”
“아직 12분 정도 여유가 있으니 러그를 치워 두고 가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진짜 나 때문에 온 거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들으니까 더 좋다. 아니, 몇 번을 들어도 좋을 것 같다. 서운이 빤히 의진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저 알파와 닿고 싶었다. 지금 가면 또 한 달 후에나 볼 텐데 딱 붙어서 쪽쪽거리지는 못할망정 러그를 치우러 간다는 남편 놈을 제 옆에 붙잡아 두고 싶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어, 어.”
“말씀하십시오.”
너요, 이 줘도 못 먹을 새끼야. 서운은 그때부터 대충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불 덮어 줘.”
“네, 알겠습니다.”
“조금만 내려 줘요. 답답해.”
“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내 휴대폰은 어디 있대요?”
“전화해 보겠습니다.”
서운의 휴대폰은 침대 옆 협탁에 있었다. 덕분에 바로 찾았다. “찾았습니다!” 이번 미션도 훌륭하게 소화해 낸 의진이 잔뜩 뿌듯한 얼굴을 했다. 거짓말 안 하고 10초도 안 걸렸다. 아씨, 뭐가 이래? 서운은 작정하고 좀 더 고난이도 미션을 지시했다.
“목이 아픈데….”
“역시 병원을….”
“아니. 물 좀 떠다 줘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이쯤 되니 어째 잡일꾼 같다. 이번에는 그냥 솔직하게 옆에 있으라고 말해야지. 쑥스러운 마음에 괜히 이불을 펄럭이는데 옆에서 뭔가 반짝거리며 빛난다. 고개를 돌려 보니 휴대폰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다. 서운과 의진의 휴대폰으로, 화면이 불이 들어온 건 의진의 휴대폰이었다. 무언가 계속해서 알람이 울리고 있는데 소리나 진동은 꺼 둔 것 같았다.
중요한 연락이면 알아서 소리를 켜 놨겠지 싶어 별 감흥 없이 고개를 돌리려던 참이었다. 시선 끝에 뭔가가 걸렸다. 서운의 손이 자연스럽게 휴대폰으로 향했다. 남의 휴대폰을 멋대로 열어 본다는 자각도 없었다. 저절로 손이 갔다. 불가항력이었다.
휴대폰은 잠겨 있지 않았다. 덕분에 서운은 너무 쉽게 카페에 접속했다. 의진이 결혼 전부터 도움을 받고 있는 전설 속의 맘카페였다. 이게 진짜 존재하는 거였다니, 어쩐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서운은 떨리는 마음으로 화면을 훑어보았다.
‘결혼 한 달 차 신혼부부 이혼 가능성 문의.’
제목만 봐도 알 것 같다. 이건 의진이 쓴 글이 맞다. 틀림없다. 존나 맞다. 맘카페에 물어본 거 맞네! 우연히 엿보게 된 비밀스러운 내면에 작게 희열이 일었다.
글 제목도 제목인데 댓글은 또 뭐 이렇게 많이 달렸나 싶다. 아니지, 어쩌면 이 정도 댓글 수는 일반적인 건지도 모르겠다. 서운은 이 카페의 분위기를 모른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그랬다.
물 한 잔만 떠 오면 될 것을 침실을 나간 의진은 아직도 소식이 없다. 서운은 반쯤 닫힌 방문과 잠금 하나 걸려 있지 않는 휴대폰 사이에서 고민하다 재빨리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 뭐. 설마 이혼이라도 당하겠어? 이런 일로 이혼하자는 새끼는 내 쪽에서 사양이다. 합리화도 다양했다. 서운은 그렇게 맘카페에 입성한다.
이게 뭐지. 서운은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다른 나라 언어도 아니고 모르는 단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한 건 서운만이 아닌 듯 댓글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은달: 출장을 2개월이나?.. 너무 길다. 그래두.. 신혼인데.. 되도록 안 가는 게 낫지 않나..
└ 중복아이디시러: 이미 간 거 아니에요?
└ 은달: 아니죠.. 결혼 한 달 차인데 출장은 2개월짜리잖아요..
└ 망고망고애플망고: 네~ 그러니까 지금 출장 중인 것 같아요~>
└ 은달: 숫자상.. 말이 안 되잖아요.. 결혼 한 달 차인데 어떻게 2개월짜리 출장을 다녀와요..ㅎㅎ
└ 하느룸: ?? 무슨 말씀인지..
└ 아이스커피: 아니.. 저기요... 그걸 누가 몰라요... 아 답답하네;;;;
└ …
└ …
훌훌한잔62: 출장 간다고 다 이혼하면 어느 부부가 남아 있을까요.. 걱정 말고 잘 다녀오세요~ ㅎㅎ
호랭쓰야: 저희 아내도 출장이 잦은 직종이었는데 돈은 많이 벌지만 이렇게 떨어져서는 못 살겠다며 과감히 그만뒀습니다.
└ 쿠킹쭌: 혹시.. 어느 직종이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저도 요새 너무 고민이라.. ㅠㅠ
└ 호랭쓰야: 쪽지 드렸습니다.
kahhhhh: 출장을 2개월이나 간다구요? 결혼 5일 만에…? 신혼여행은 다녀오신 거죠?
└ 지니4321: 네. 다녀왔습니다.
베이킹믹스: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봐요.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왜 여유와 돈을 다 가질 순 없는지.. ㅠㅠ 윗윗분 말씀대로 출장 간다고 이혼하는 게 말이 되나요.. 배우자에게 어떻게 얘기를 꺼냈고, 그래서 배우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떨어져 있었던 만큼 돌아오시면 배로 잘해 주세요.
└ 겨울낙새: 222 다른 댓글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요즘 회원 관리가 안 돼서..
└ 내나이가어떻다: 3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요~! 이해해 주실 거예요. 잘 다녀오세요. 파이팅!
└ 아모르파리나잇: 진정 현명한 답변... 이래서 내가 우리 카페 못 끊습니다 ㅠㅠ
└ 고고헤븐: 경험자로서 말씀드리면..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는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어찌나 서운하던지.. 말씀 잘하셨으리라 믿습니다.
혼란스러움은 잠시, 현실적인 조언이 뒤따랐다. 그래, 뭐.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아직 중요한 사실이 등장하지 않았다. 서운은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에서 의진의 출장 소식을 접했다. 이런 음흉한 새끼, 어떻게 그것만 쏙 빼놓고!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서운의 손가락이 드릉거렸다.
다행히 스크롤을 몇 번 내리기도 전에 모든 오해가 풀렸다. 서운의 생각처럼 의진은 음흉한 사람이 아니다. 의진의 리댓글이 모든 판도를 바꿔 놓았다.
후드티는후를좋아하지?: 당연히 배우자 마음이 제일 중요하죠. 배우자 반응이 어땠나요?
└ 지니4321: 이혼은 안 해 보고 싶냐고 했습니다.
└ 후드티는후를좋아하지?: 출장 간다고 했더니요..?
└ 지니4321: 네.
└ 후드티는후를좋아하지?: 심각한데… 지니 님이 어떻게 얘기하셨길래…? 이런 얘기를 할 때는 분위기나 상황도 중요해요.
└ 지니4321: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에서 얘기했습니다.
└ 후드티는후를좋아하지?: ? 네..?
└ 탐색하는전: ???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 허니허니유채허니: 출장을 2개월이나 가는데 그걸 신행 가는 비행기에서 처음 말했다?
└ 지니4321: 네, 그렇습니다.
└ 허니허니유채허니: 와아~ 말할 줄 안다고 말을 막 하셨네요~ 그러라고 있는 입이 아닐 텐데~ ㅎㅎㅎ
└ 기다리지마세요: 세상에….
└ 카롱쓰: 뭐라구요???
└ 안경닦이사지마: 하… 그래서 배우자가 이혼하고 싶냐고….
└ 아이엄맨: 와 진짜 이런 사람이 있네요;;;;;
└ 우리개완전뭄: 아직 이혼 안 당한 거 보니까 배우자가 보살이네요;;;;
└ 행복이엄마아이디: 그런 중요한 일을 배우자한테 상의도 없이 결정하면 어떡해요..
└ 지니4321: 결혼 전에 결정된 일이라 상의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 돈많백소취: 저기요??? 필요가 없다니요???
└ 순ㅅ순: ????????????
└ 캡틴아메리카노: 완전체다! 완전체가 나타났다!!!!!!
└ 며꾸라지: 필요가 없다고?? 아니 그럼 뭐 결혼은 필요해서 하나??
└ 눈감아김민지: 역대급......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더위야오지마: 제가 지금 뭘 본 거죠..?
└ 어쩌란말이냐트위스트: ㅋㅋㅋㅋㅋ미쳤다ㅋㅋㅋㅋ 필요가 없었댘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지니4321: 결혼은 할 수 있는 영역에 해당하는 일이니 응당 해내는 것이 맞습니다. 필요해서 하지 않았습니다.
└ 어거스트: 이게 뭔 개소리죠..? 제가 이해력이 딸리는 건가요;;
└ 딸바주스: 와... 진심........ 역대급이다............
└ 우유아저씨: 저희 대꾸해 주지 말아요. 어그로니까 바로 신고방으로 갑시다.
└ 띵똥땡똥: 지니4321 배우자분.. 도망쳐요 ㅠㅠㅠㅠㅠㅠㅠㅠ
└ 지니4321: 왜 도망을 쳐야 합니까?
└ 월간메들리: 그걸 몰라서 묻니.......
└ 멸망버튼누르기: 대환장^^!!!!!!
♥유진이♥: 결혼 5일 만에 2개월 출장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걸 신혼여행 가는 비행기에서 말했엌ㅋㅋㅋㅋㅋㅋ 이 정도면 사기결혼이 아니냐
└ 섭씨100도: 222222222222 사기결혼 수준..
└ 연호야제대하자: 위장결혼일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 지니4321: 사기결혼 아니고 위장결혼 아닙니다.
└ 연호야퇴사하자: 그건 네 생각이겠지요.^^
└ 휘핑크림석가탑만큼: 사기꾼이 자기소개 할 때 사기꾼이라고 하나요 ㅠㅠㅠ
씨겸사주: 저 배우자분 어떡해요 ㅠㅠㅠ 이혼도 안 해 줄 것 같은데 ㅠㅠㅠㅠ
└ 우리의현이: 2 이분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말씀 한 번 참 잘하시네. 그래서 프로필 사진 본인이에요?
└ 박복한박실장: 윗분ㅡㅡ 공지 확인하고 오세요. 저희 카페 친목 금지입니다.ㅡㅡ
└ 서울지검입니다: 33333 절대 안 해 줄 것 같다.. 지금 배우자 아니면 결혼이나 할 수 있었을까..
└ 티끌모아티눈: 44 진심으로 걱정돼요 ㅠㅠㅠㅠㅠ
└ 키보드좀뺏어조: 5555 어떡해 ㅠㅠㅠㅠㅠㅠ
└ 서바이벌다이어리: 6666666 말이 통해야 이혼도 하죠.....
└ …
└ …
└ …
└ …
└ 닭따리: 1919191919191919
보리보리머리쪼리: 그래도 꼴에 이혼은 하기 싫은가 보네ㅎㅎㅎㅎㅎㅎㅎㅎ
└ 뽀메라녀: 당연히 싫겠죠. 저래서 다시 결혼이나 할 수 있겠어요? ㅋㅋ
젤리대장: 상의할 필요가 없었다는 부분이 킬포^^! 저 미친 당당함
└ 념념: 진짜 이 세상 당당함이 아니다...
└ 무기한여행중: 왜 저렇게 당당하죠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젤리대장: 그쵸 나만 그렇게 느낀 거 아니죠? 너무 당당해 ㅋㅋㅋㅋㅋㅋㅋ
우정2: 다시 보니까 애초에 출장을 2개월이나 간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됨. 어느 회사에서 직원 출장을 2개월이나 보냄? 그것도 해외로.
└ 안새맘: 222 생각할수록 수상하네요 ㄷㄷㄷ
└ blackintheroom: 33333333 이거 진짜임. 사회생활 해 보신 분들 아시겠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요.
└ 찡이의방: 와 개소름............
└ 춘식도티르: 미친 진짜 사기결혼인가 봐 ㅠㅠㅠㅠㅠ
└ 군용맘마: 5555555555555555
└ 더블샷: 소름 돋았어요... 어떡해.....
└ 찬혁맘232: 제가.. 올해로.. 말하면 다들 아는 중견 기업.. 11년 차인데.. (자세한 건.. 패쓰.. 직급은 임원입니다..) 해외 근무도 아니고.. 해외 출장을 2개월씩이나..? 불가능합니다.. 대기업 임원이면 모를까..
└ 조화로운삶: 대기업이라고 쉬운 거 아니에요. 저런 기회도 흔치 않은 데다 어느 임원이 지사까지 옮겨 다니며 실무를 보나요..
└ ㅇㅅㅇ=3: 사장 아들인가 보죠..... 실무 뛰는 대기업 사장 아들...
└ 핸드크림만바르면손씻고싶어: ㅋㅋㅋㅋㅋ진짜 그 정도는 되어야 말이 될 듯ㅋㅋㅋㅋㅋㅋ
└ 사용중인닉네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심각하게 보다가 여기서 터졌네요
└ 꾸닥꾸닥: 그러게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쿨워터레몬머리: 사장 아들이면 인정!! ㅋㅋㅋㅋㅋㅋ
└ 세상에나쁜인간은있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실무 뛰는 대기업 사장 아들ㅋㅋㅋㅋㅋㅋㅋ
└ 닳닳연: ㅋㅋㅋㅋㅋㅋㅋ 스토리의 개연성을 확보했습니다!
└ 힝구잉구봉구: 그럼 말은 되지만 어쨌든 이혼하는 걸로.. ㅠㅠ
└ 펌킨파이: 무조건 이혼해야죠. 사장 아들이면 뭐해요. 돈이 전부도 아니고..
아트상자사장: 배우자분.. 안전 이별하세요...
└ 112가몇번이지: 222 진짜 걱정돼요 ㅠㅠㅠ 요즘 미친 사람들이 많아서 ㅠㅠㅠㅠ
└ 건강이최고: 3333 안전이별 제발 ㅠㅠㅠ
그래. 이래야 정상이지. 애초에 댓글이 만선을 이룰 수밖에 없는 글이었다. 중간중간 달리던 의진의 리댓글도 어느 순간부터 자취를 감췄다. 비행기에 있느라 못 봤겠지. 서운은 어렵지 않게 의진의 지난 24시간을 유추해 냈다. 의진이 비행길에 오른 동안 입소문은 빠르게 번져 나갔고, 종국에는 모두가 입을 모아 의진의 이혼을 외치기에 이르렀다. 어쩐지 좀 통쾌한 것 같기도 하고. 댓글을 확인하는 서운의 입가가 신나게 씰룩거렸다.
“서운 씨. 물 가져왔습니다.”
논란의 주인공, 의진이 얼음물을 들고 나타났다. 컵은 또 뭐 저렇게 큰 걸 가져온 건지 저 큰 잔에 얼음이 가득 들어 있다. 보기만 해도 뼈가 다 시리다. 일단 떠다 준 성의가 있으니 입술이라도 축이려는데 급하게 내려놓은 의진의 휴대폰에 새로운 알람이 떴다.
“…어….”
이럴 수가. 당황한 서운이 의진과 휴대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얼음물은 이미 뒷전이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의진이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 게…. 옆에 있어서 우연히 봤는데….”
서운은 망설였고, 의진은 얌전히 서운의 뒷말을 기다렸다. 뒤이어 충격적인 소식이 뒤따랐다.
“…강등됐어요.”
“…예?”
“의진 씨 강등됐다고요. 그, 경고 2회 누적이라 강등…됐다고 알람이….”
서운은 모른다. 의진이 활동 중인 ‘오렌지테라스’는 청첩장과 혼인 신고서 등으로 기혼임을 증명해야지만 특별 회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만큼 철저하게 회원 관리를 하고 있지만 며칠 전에 시행된 카페 5주년 이벤트 때문에 기존 회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당분간 무기한 특별 회원 등업을 연기한다는 공지도 올라왔다. 그랬는데….
“괘, 괜찮아요?”
“…….”
“의진 씨!”
의진이 강등됐다. 친구 하나 없이 모든 걸 인터넷에 의존해 오던 새내기 남편의 하늘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