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열두 번째 만남 (8/13)

8. 열두 번째 만남

충격에 빠진 의진을 어르고 달래 윤 기사에게 실려 보낸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다.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됐냐고 하면 언제나 그랬듯 서운은 별일 없이 지냈다. 용돈 벌이 삼아 시작한 외주 건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긴 하지만 이 정도야 뭐 일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서운 본인에게는 별일이 없다. 일은 서운의 지인들에게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고스란히 서운에게 돌아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운 본인은 별일이 없는데 타의에 의해 누구보다 소란스러운 일상을 보내게 된 것이다.

우선 첫 번째, 민영이 수능을 망쳤다. 수능 날부터 방에서 나오지를 않더니 벌써 며칠째 두문불출 중이다. 집안 분위기가 최악으로 치달은 건 당연하고,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여러모로 걱정이 크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머리가 아픈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외삼촌이 자전거 발주를 마쳤다. 기존에 얘기한 것처럼 몇천만 원짜리 자전거 오천 대가 아닌 백만 원짜리 자전거 천 대를 진행하기로 했다. 이렇게 보면 거래 규모가 대단히 줄어든 것 같지만 총매출액은 여전히 십억에 달한다. 그나마 앞자리가 줄어든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쉽게 동의는 못 하겠다.

돈 십억이 다행이라니, 도대체 어느 세계 말인가 싶다. 덕분에 서운은 중간에서 열심히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단가와 수량을 낮춰 가며 끊임없이 거래를 제안해 오는 의진의 가족과 꿈의 모델과는 한 걸음 멀어졌지만 마냥 거절하기에는 사업적으로 욕심이 나는 서운의 가족, 그 사이에 서운이 있다.

그래서 더 미치겠는 거다. 차라리 서운이 당사자이면 모르겠는데 애매하게 관계가 걸쳐 있으니 신경만 쓰이고 정작 간섭할 수는 없다. 희망 고문이 이런 걸까. 신경은 신경대로 쓰이고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사방에서 진행 상황을 알려 주기 바쁘다. 그나마 서운과 입장이 비슷한 의진도 전혀 서운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럼 이전 모델이 더 좋으신 거냐며 헛소리나 지껄여 댔다. 어디에도 서운의 편은 없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당장 다음 주에는 외숙모의 생신 파티가 있다. 올해는 특별한 초대 손님도 있다. 서운의 결혼으로 맺어진 새로운 인연, 바로 의진의 고모 되시겠다. 의진은 아직 출장 중이라 못 온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이처럼 어느 때보다 가족에 의한, 가족을 위한, 가족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서운이지만 오늘만은 예외다. 서운은 저녁에 있는 대학 동기 모임을 앞두고 며칠 전부터 잔뜩 들떠 있었다. 오랜만에 기분 전환할 생각을 하니 동기 사랑이 절로 끓어오른다.

“…민영이가 영민이를 때렸다고요?”

아침부터 걸려 온 외삼촌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속 편하게 동기 사랑 나라 사랑에 젖어 있었을 테다. 사고 소식을 알리는 외삼촌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져 있었다.

- 그래. 그것도 애 얼굴을 때려서 큰일 날 뻔했지 뭐냐. 민영이 엄마는 영민이랑 아직 병원이고 난 짐 챙기러 집에 들렀다. 민영이 이건 학교는 제대로 간 건지….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눈가가 찢어져서 두 바늘을 꿰맸다고 하는데 다행히 눈에는 이상이 없다고. 불행 중 다행이었다.

- 민영이가 아무 얘기 없더냐?

“전혀요.”

- …서운이 너한테 연락을 안 했다고?

“네. 지금 처음 들어요.”

다시 한 번 휴대폰을 확인해 봐도 민영이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당연히 서운에게 연락을 했을 줄 알았는지 외삼촌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럼 밤새 민영이 혼자 있었던 거예요?”

- 그, 럴 거다. 학교는 가야 하니 집으로 돌려보냈는데….

민영이 초등학생도 아니고 혼자 집에 가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래 봤자 겨우 열아홉이다. 눈가가 찢어진 거면 피도 많이 났을 텐데 살면서 타인의 피를 본 적이나 있었을까. 하물며 그 대상이 저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었으니 제가 때려 놓고도 많이 놀랐을 테다.

“저한테 연락 주셨으면 제가 같이 있었을 텐데요.”

- 아니다. 좋은 일도 아니고… 신혼집에 함부로 사람 들이면 복 나가.

확실히 들어 본 적 있는 말이다. 그렇지만 동의는 못 하겠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아름다운 신혼집에서 서운은 오늘도 혼자니까. 내일도, 모레도 계속 혼자일 예정이다. 반대로 서운이 본가에 가는 방법도 있지만 이 역시 거절당했다.

- 의진 군도 없는데 너까지 집 비우면 쓰냐. 연락 안 왔으면 됐다. 의진 군이랑 사돈네는 별일 없지?

“네, 뭐….”

-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다. 사람이 돈만 많으면 뭐하냐. 가정이 평화로워야지.

…돈도 많고 가정도 평화로우면요? 대상이 대상인지라 으레 건네는 통상적인 안부 인사조차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

- 오전에 용달 보냈으니까 오늘 중으로 도착할 거다. 자세한 건 사돈네 비서한테 일러뒀으니 서운이 네가 더 신경 쓸 건 없을 거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사돈 간의 거래가 불법도 아니고 서로 뜻만 맞는다면야 못할 이유는 없다. 하물며 서로 합까지 잘 맞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니에요. 외삼촌이 더 고생하셨죠. 민영이한테는 제가 따로 연락해 볼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런데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건 왜일까. 서운은 끝까지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외삼촌을 의식해 밝은 목소리를 돌려주었다.

-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 서운이 네가 언제 이렇게 컸는지….

“하하, 글쎄요. 한 10년 전에?”

- 속 한 번 안 썩히고 혼자 쑥 커서는… 다 컸다고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너 키울 때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지난밤의 일이 충격이긴 했나 보다. 외삼촌의 목소리가 금세 촉촉해졌다. 외삼촌은 원형 탈모에, 서운은 스트레스 위염에 시달렸던 민영의 사춘기 때도 영민과 허구한 날 싸워 댔지만 피를 보지는 않았다. 유난스럽다면 유난스러웠던 사춘기 때도 이 정도로 싸운 적은 없다.

뭐가 됐든 이제는 어떻게든 연락을 해 볼 때가 됐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내내 서운의 모든 신경이 휴대폰에 쏠려 있었다. 의진과는 시간이 맞지 않아 영상 통화 대신 짧게 메시지를 주고받은 상태였다. 이제 연락 올 사람이라고는 민영이 전부건만 휴대폰은 여전히 잠잠하다.

서운은 꽤나 무거운 마음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결혼 후 처음 모이는 자리인지라 도저히 빠질 수가 없었다. 청첩장을 돌려놓고 다음 모임에 나타나지 않으면 먹튀 오해를 받기 십상이니까. 타의에 의한 강제성에도 불구하고 서운이 오늘 모임을 기다린 이유는 딱 하나다.

기분 전환, 이 시간만큼은 가족들 생각 좀 안 하고 싶다. 서운은 빠른 걸음으로 약속 장소에 들어섰다.

“새신랑 등장이오!”

“이야, 새신랑!”

“어우, 얼굴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나만 좋냐. 너희도 좋거든. 한 달 만이네. 다들 잘 지냈어?”

곳곳에서 인사를 건네 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한껏 반가움이 묻어나 있다.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까지 동기 모임이 유지되는 이유가 있다. 오랜만에 만나면 반갑고, 자주 봐도 반갑다. 서운의 갑작스러운 결혼으로 단기간에 두 번이나 모이게 된 지라 대화의 중심에는 서운이 있었다.

“결혼하니까 어때? 좋아?”

“그렇지 뭐.”

“아, 나도 다시 신혼 때로 돌아가고 싶다.”

“잘생긴 남편이랑 사는 건 어떤 기분이야…?”

가벼운 안부 인사 사이로 갈무리하지 못한 진심이 튀어나왔다.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표정에 약속한 것처럼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런 사람들이었지. 괜히 대학 시절을 함께 보낸 게 아니다.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지고 주문한 음식이 도착하면서 술자리가 점점 무르익었다. 이제 그만 가족들에게 벗어나나 싶었는데 예상대로 의진과 안의선 회장에 관한 질문이 주를 이뤘다. 다행히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기에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재벌가도 선을 보는구나.”

“그러게. 당연히 자기들끼리 결혼할 줄 알았어. 어느 집안 차녀, 어느 집안 차남 이렇게.”

실제로도 그렇지만 서운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의진과 서운이 첫 만남에서 서로 상대를 착각했다는 건 서운의 친한 지인들만 알고 있다. 관점에 따라 운명이 될 수도 있고, 불편한 진실이 될 수도 있는 이 이야기의 장르는 아직 서운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확실한 건 ‘그러니까 만날 수 있었겠지. 그게 아니면 가당키나 했겠어?’ 따위의 삼류 영화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점이다.

“나도 앞으로는 선 들어오는 거 받아 볼까 봐. 괜히 거절했네.”

“너한테도 선이 들어와? 너희 형도 결혼 아직이지 않냐.”

“순서 상관없으니 누구 하나라도 먼저 가란다. 형이 먼저 가면 좋겠는데 만나는 사람 없는 눈치야. 서운이 넌 처음부터 다 알고 나간 거야?”

“뭐를?”

잠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서운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잠깐 새에 모두의 관심이 제게 집중되어 있었다. 민영에게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그, 지니 씨 집안이나… 사진이나….”

“아.”

“지니 씨도 다 알고 나온 거지?”

“우리 집안이나 내 사진 이런 거?”

“어, 뭐. 그렇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고, 이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지어내야 하는지 그 경계조차 희미하다. 서운의 동기들은 모르겠지만 의진이 나온 건 일반적인 선 자리가 아니다. 서로의 부를 답습하기 위한 은밀한 친목, 그들만의 세상. 그곳에서 서운은 이방인이나 마찬가지다.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약 서운의 집이 은행장 집안이었다면 의진의 가족이 이렇게까지 거래를 밀어붙였을까. 서로 호의를 표현하는 방식도 지금보다 훨씬 대등하지 않았을까. 그동안 서운이 모른 척해 온 불편한 진실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글쎄. 잘 모르겠다.”

“어?”

“만나자마자 자녀 계획을 물어봐서 그런 건 별로 생각 안 해 봤네. 그럴 틈이 없었어.”

그렇다 한들 절대로 티 내고 싶지는 않다. 서운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자녀 계획? 첫 만남에?”

“와, 첫눈에 반했나 봐.”

“야… 반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저건? 지니 씨 장난 아니네.”

첫눈에 반했냐니, 그건 아닐 테다. 서운은 감히 확신했다. 실제로 의진은 서운과의 결혼을 결심한 이유로 가치관을 꼽았다. 지극히 무난한 답변으로, 사실 큰 감동은 없으나 별다른 불만도 없다. 기어코 머리를 든 불편한 진실에 마음 한편을 내어 준 지금도 그렇다. 왜냐하면.

발자국이 찍힌 구겨진 포스트잇과 군데군데 번져 나간 잉크 자국이, 날씨와 시간대를 막론하고 서운을 따라다니는 시원한 얼음물과 아이스 라테가,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된 어설픈 배려가 싫지 않으니까. 아니, 좋으니까.

벌써 몇 주 전이 되어 버린 의진의 갑작스러운 귀국으로 서운은 제 마음에 확신이 생겼다. 오랜만에 찾아온 설렘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 의진과 뭔가 해 보고 싶다. 시작하고 싶다. 의진을 믿어서가 아니라 이런 마음이 드는 나를 믿어서, 그래서. 처음부터 의진의 대답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내 마음이 어떠냐는 거니까. 비록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만한 거창한 애정사는 못 되지만 그럼에도 서운은 괜찮았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아, 그래서 집들이는 언제 해? 만난 김에 다음 모임 날짜도 정하자.”

“좋지! 다들 읽씹 좀 적당히 해라, 진짜.”

“그럼 다음에는 서운이네 집에서 모이는 거?”

“오, 진짜 집들이하는 거야?”

“…글쎄. 일단 남편한테도 물어보고.”

혼자 사는 집이 아니니 의진의 의사도 물어봐야겠지만 의진이라면 결국 서운이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다.

“뭐?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서운의 대답에 동기 하나가 돌연 큰소리를 냈다.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설마 막 눈치 주고 그러는 건 아니지?”

“눈치? 무슨 눈치?”

“지니 씨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돈이 전부도 아니고!”

아무래도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것 같다. 서운은 한순간에 돈이 없어 핍박받는 남편이 되었다.

“야,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지니 씨 좋은 사람 같던데 갑자기 왜 그래.”

“너희는 아무렇지도 않아? 지금 돈 있다고 서운이한테 유세 부리는 거잖아!”

“나 아무 소리도 안 했다.”

“어우, 쟤 어떡하냐. 오자마자 달린다 했다. 잔 좀 뺏어 봐.”

아무리 술김이었다지만 도대체 이 결혼이 어떻게 보이기에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서운은 조금 씁쓸해졌다. 다행히 다른 친구들의 무마로 상황은 그렇게 정리되는 듯했다.

“지금 집들이가 문제겠냐. 우리랑은 차원이 다르더만. 자전거 복지로 기사 뜬 거 봤어? 아무 날도 아닌데 갑자기 자전거 천 대를 돌리는 클라스! 나도 받고 싶더라. 팔면 완전 꽁돈 생기는 거잖아.”

잔잔한 수면에 파동이 일어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어…? 놀란 서운이 잔을 든 자세 그대로 굳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이를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어, 어. 봤어. 완전 개이득이지! 중고나라 박 터지겠더라.”

“야, 그걸 어떻게 파냐?”

“왜 못 팔아?”

“뻔히 기사 다 났는데 중고나라 올려 봐라. 저 XX푸드 다닙니다! 신원 인증이지.”

“기사가 났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어? 너 몰랐어?”

서운의 물음에 도리어 반문이 돌아왔다. “뭐야, 뭔데!”, “나도 몰라.”, “나도!”, “뭔 소리야 대체?”. 서운만 모르는 건 아닌지 몇몇 동기가 서운과 함께 의문을 표해 왔다.

“다들 뉴스 좀 보고 살아라. 아까 기사 떴잖아. 직원 건강을 생각하는 착한 기업인가 뭔가로 천명한테 자전거를 돌린단다.”

“그게 뭐가 착해? 자전거 주는 게 착한 거야?”

“자전거는 병풍이고 우리가 직원 건강을 이만큼 생각한다 이거지. 기업 복지 관련 기사였어.”

“참나, 별… 퍽도 생각해 준다. 건강 생각하면 야근을 덜 시켜야지 자전거가 뭐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니야. 다른 것도 더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 뭐였지?”

“자전거가 좀 강렬하냐. 안 그래도 욕 엄청 먹더라. 왜 그 미친 야근으로 XX푸드 퇴사한 블로거가 저격글 올려서 말 많았잖아. 그거 덮겠다 이거지. 댓글이 다 욕이야.”

“그러게 왜 하필 자전거냐고.”

“아!”

누군가의 별 뜻 없는 질문에 동기 하나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더니 똑바로 서운을 가리키며 말했다.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서운에게 집중되었다.

“서운이네가 자전거 가게 하잖아!”

“뭐?”

“진짜?”

“서운아, 사실이야?”

“…어머….”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괜찮은 걸까. 확실히 고유명사나 다름없는 대기업을 친구의 가족으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을 테다. 당사자인 서운도 여태 적응 중에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닌데도 마음이 가라앉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저에게 쏟아지는 동기들의 시선 속에서 서운은 조금, 아주 조금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질문에도 태연하게 대꾸하던 서운이 돌연 입을 닫자 동기들은 그제야 서운의 눈치를 보았다. 하필이면 제대로 정곡을 찔리는 바람에 오히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마 사실대로 얘기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다. 우습게도 이 모든 건 김치 세 통에서 시작됐다.

다시 생각해 봐도 일반적인 상식은 아니다. 김치 좀 받았다고 이렇게 큰돈을 돌려주는 것도 모자라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업 홍보에 활용한다. 원래 다 이런 걸까. 자신과는 사는 세계가 다른 사람들이라서? 의진만 해도 이번 거래에 관해서 아무런 의구심도 느끼지 못했다. 적선하듯 무리한 거래를 제안해 온 의진의 가족도, 끝내 거래를 받아들인 서운의 가족들도 그렇다. 불안과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건 오직 서운뿐으로 아무도 서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과연 의진도 기사가 나온 걸 알고 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서운에게 전해 주지 않은 건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일 테다. 의진은 묻는 말에 대답은 잘하지만 서운이 묻기 전까지는 자기가 먼저 얘기해 주는 법이 없다. 그것뿐일까, 자신의 감정조차 표현하지 않는다. 실제로도 서운은 의진에게 자신에 대한 그 어떠한 표현도 들어 보지 못했다.

적어도 서운을 싫어하지 않는 건 알겠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서운과 결혼을 결심한 이유로도 가치관을 꼽았지 서운이 좋아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비슷한 말도 못 들어 봤다.

어떻게 가게를 나왔는지 모르겠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동기들이 사과를 해 왔지만 서운의 굳은 얼굴은 풀릴 줄 몰랐고, 거짓말처럼 민영에게 전화가 왔다. 핑계도 좋지, 서운은 집안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국에는 적당히 웃으며 친구들의 무례에 쓴소리를 한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서운이 택시에서 내렸다. 민영은 홀로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었다.

“민영아!”

서운을 쳐다보는 민영의 얼굴이 말이 아니다. 눈두덩이고 얼굴이고 퉁퉁 부었다. 수험생 대우를 톡톡히 받아 통통하게 올라붙었던 볼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서운이 다가오자 민영이 참아 왔던 눈물을 쏟아 냈다.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시원하기까지 하다.

언제나 그랬다. 민영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서운과는 정반대다. 민영이 익숙하게 안겨 왔다. 이러니까 꼭 어렸을 때 같다. 동생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날마다 투정을 부리던 그때처럼 민영이 울었다.

“여, 여영민, 이, 포켓몬, 잡으러, 가자고 해서, 시, 싫다고, 했는데, 계속, 귀찮게 굴어서, 흐윽, 가라고, 가방, 휘둘렀, 끅, 는, 데, 인형 고리가, 빠졌, 끅!”

“민영아, 괜찮아. 그만 말해. 숨 쉬고. 응?”

“피, 나는데, 흐, 어, 엄마가, 화를 안 냈어. 내가 그랬는데, 막, 아무 말도, 안 했, 흐, 어, 오빠, 나, 어떡, 해. 나 재수 못 하겠, 는데, 수능, 진짜, 못, 허어엉….”

“괜찮아. 괜찮아, 민영아.”

“아침마다 기도하러 갔는데, 절도 갔는데, 맨날 나 데리러 독서실까지 와 줬는데, 내가 먹고 싶은 건 다 해 줬는데, 나 어떡해? 너무, 미안한데, 나 진짜 재수 못 하겠어. 이상한 대학도 가기 싫어어…. 내가 제일 등신 같, 흐, 오빠아…. 난 왜 이렇지? 나 왜 이래? 다 나 때문에…. 여영민 다쳤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흐어어어어엉! 민영이 운다. 서럽게 운다. 한때는 서운이 미워했던, 한때는 서운이 두려워했던 민영이 운다. 그 작은 몸을 마주 안으며 서운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괜찮다고, 미안하다고. 울고 싶으면 실컷 울라고.

서운의 옷자락이 젖어 들었다. 축축해진 가슴에 서운은 덩달아 울고 싶어졌다. 언제나 그랬듯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띰즈!”

그길로 민영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코맹맹이가 서운의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운을 붙잡고 한바탕 울어 젖히더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 모양이다.

“뭐라고?”

“오빠 딥 띰즈 가태!”

얘가 대체 뭐라는 걸까. 생각은 차차 하기로 하고 일단 안으로 들여보냈다. 의진이 곧바로 출장을 가는 바람에 민영을 비롯한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집들이도 아직 하지 않았다.

“오빠 진짜 여기 살아…?”

“응. 그럴걸…?”

“미친…. 오진다….”

서운의 신혼집은 2층짜리 단독 주택으로, 앞뒤로는 정원이 있으며 위로는 3층이나 다름없는 탁 트인 테라스가 있다. 본격적인 집 구경은 아직 시작도 안 했건만 민영은 이미 감동받은 눈치다.

오늘 민영은 서운의 집에서 자고 간다. 외삼촌 내외에게는 따로 연락해 뒀다. 나머지 집 구경은 차차 하기로 하고 우선은 민영을 욕실에 집어넣었다.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해서 등 뜨뜻한 곳에 배불리 누워 있으면 알아서 적당히 낙관적으로 변한다.

“일단 씻고 나와. 밥 먹자.”

“우리 뭐 먹어?”

“뭐 먹고 싶어.”

“치킨!”

“뿌X클로?”

“어!”

이대로 씻으러 가나 했더니 민영이 문밖으로 얼굴을 내민다.

“오빠 나 닭발도….”

“알았어. 엽X은 안 시켜도 돼?”

“헐. 시켜, 시켜! 베이컨이랑 치즈랑 당면 추가해서!”

둘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이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서운이 신중하게 가게 리뷰를 살피는데 민영이 또다시 욕실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집에 클오 없어?”

“클오?”

“클렌징오일! 클워도 괜찮아.”

“없는데…. 화장했어?”

“아니? 비비만 발랐는데?”

…그래, 그렇구나. 서운은 욕실 수납장을 뒤져 결혼식 날 메이크업 숍에서 받은 클렌징 샘플을 찾아냈다. 내친김에 신혼여행지에서 사 온, 그러나 지금까지 한 번도 쓸 일 없었던 입욕제까지 꺼내 주자 민영은 욕실에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도대체 뭘 하는지 안에서 카메라 셔터음이 끊이질 않는다.

민영이 다시 나왔을 땐 가장 늦게 주문한 닭발까지 모두 도착한 후였다. 정말로 다 시킬 줄 몰랐는지 자리에 앉는 민영이 내심 미안해하는 눈치다. 저에 대한 호의를 당연해하지 않는 모습이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하게 한다. 마냥 애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크긴 컸구나 싶다. 서운은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어른의 혜안을 발휘했다.

“불으니까 당면부터 건져 먹어.”

“응, 응! 잘 먹겠습니다! 오빠도 얼른 먹어!”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다. 오랜만에 먹는 자극적인 음식이 견디기 힘들었는지 민영의 젓가락질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진다. 그동안 불규칙하게 끼니를 거른 티가 났다.

“으, 아! 매워! 아씨, 이게 이렇게 매웠어?”

“민영아. 걱정은 배부르고 등 따실 때 하는 거야.”

열아홉의 나는 어땠더라. 이제는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서운은 이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갈 어린 동생에게 쥬시쿨을 건네주었다.

“춥고 배고플 때 하는 생각은 믿지 마.”

“…….”

“내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너 먹고 싶은 거 사 줄 수 있는 돈은 있으니까 일단 배부르게 먹고 같이 고민… 민영아?”

흐, 흐어어, 으어어엉…. 쥬시쿨로 입 안을 식힌 민영이 그새 닭발을 뜯다 말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밥은 먹어야겠는데 눈물은 나오고, 따뜻할 때 하나라도 더 먹어야겠는데 위는 쪼그라들었고. 서러운 이유가 차고 넘친다. 민영이 울면서 닭발을 뜯었다. 저 집이 닭발 맛집이구나. 서운은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했다.

“나, 이제, 끅, 다신, 안 굶을 거야. 짜증 나…. 따뜻할 때 먹어야 되는데… 오빠 고마워…. 그리구 미안해애….”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천천히 먹어. 쥬시쿨 더 줘?”

“안 돼. 물배 차…. 흐어어….”

훌쩍, 훌쩍. 민영은 연신 눈물을 쏟아 내면서도 입과 손을 멈추지 않는다. 한쪽 볼에는 곱창을 욱여넣고 빠르게 새 치킨을 집어 든 민영이 눈물 어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엄마가 오빠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빠도 이제 오빠 가정이 있으니까 전처럼 막 연락하면 안 된다고….”

내 가정, 내 가정이라. 어쩐지 몇 번이고 곱씹게 된다. 내 가정이라는 단어가 주는 여운은 쉽게 사라질 만한 것이 아니어서 서운은 오랫동안 여운에 잠겨 있어야 했다. 우는 민영을 달래 가며 저녁을 먹이고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낼 때까지도 그랬다.

서운은 오랫동안 자신의 가정을 꿈꿔 왔다. 어쩌면 남들보다 간절하게, 어쩌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자신의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타인과 가족이 되어 가는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겠지만 겨우 그 정도 각오도 없이 결혼에 임한 건 아니다. 여기서 서운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 그렇군요.

이런 남편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다예요?”

- 물론 아닙니다.

대답은 잘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나쁜 분위기는 아니었다.

- 저라면 기사를 더 빨리 냈을 텐데 말이죠. 이슈는 이슈로 덮는 편이 가장 좋습니다.

“어?”

- 플랫폼도 그렇습니다. 저라면 그 블로거가 있는 포털 사이트에 제일 먼저 기사를 띄웠을 겁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묻어 버렸겠죠. 이미 회자가 된 검색어와 포스팅을 내리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의진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전거 기사를 화두에 올린 건 서운이 맞지만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랬다면 서운도 동기들과의 일화를 입에 올리지 않았을 거다. 서운은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자신이 느꼈던 당혹스럽고 초라한 기분을 설명하려 애썼다.

“음, 의진 씨. 그게 아니라….”

- 네, 서운 씨.

“그러니까….”

- 네.

“…나는….”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이게 이렇게 설명할 일이야? 어쩐지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다. 의진과 처음 자전거 이야기를 할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 서운 씨,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먼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응. 뭔데요?”

- 자전거 말입니다. 이참에 장인어른 명의로 물류 센터를 세우는 건 어떻습니까? 자전거의 부피를 생각하면 물류 센터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더군요.

“…뭐요? 무슨 센터?”

- 물류 센터 말입니다. 마침 제가 봐 둔 부지가 있습니다.

의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서운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 아, 아닙니다.

역시 그렇지? 네가 생각해도 개소리지? 물론 서운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갔다.

- 세금을 생각하면 장모님 명의가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날이 밝는 대로 담당 세무사를 소개해 드리겠….

“잠깐, 잠깐만요. 그게 다 무슨 소리예요? 얘기가 왜 그렇게 돼?”

- 무엇이 말입니까?

의진이 묻는다. 너야말로 왜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고개까지 갸웃거리며 서운에게 묻는다.

- 혹시 조건이 별로이십니까?

- 자전거 운송에 관한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보다는 서운 씨가 더 자전거 사업에 일가견이 있으실 테니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 배움이 필요할 때 더 뛰어난 사람이 부족한 사람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것만큼 효율적인 방법은 없으니까요.

아, 그렇구나. 깨달음의 순간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의진과의 견해 차이가 극에 달하자 비로소 모든 게 명확해진다. 의진은 서운과 전혀 다른 세계에 있었다.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 신고를 마친 지금 이 순간에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실제로도 서로 전혀 다른 대륙에 있으니 비단 비유적인 표현만은 아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랑 대화가 된다고 생각했을까. 서운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도대체 나는 이 사람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있었던 거지. 동시에 허무해졌다.

“의진 씨, 잘 들어요.”

네, 의진이 대답했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대답 하나는 더럽게 잘한다.

“앞으로 나랑 얘기할 때는 효율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비즈니스도 아니고 부부 관계에서 효율을 따지면 어떡해요. 지금도 봐. 서로 핀트가 안 맞잖아.”

- 그렇습니까?

“당연하죠. 부부잖아.”

서운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이것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부부니까, 가족이니까, 함께 우리의 가정을 이뤄 나갈 사람이니까. 서운은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정에 대한 애정이 큰 사람이었다. 서운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의진 덕분이다.

- 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서운 씨와의 결혼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 서운이 멍청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서운은 틀림없이 제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 그동안은 출장이 잦아 호텔에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했으나 장기 출장 이후에는 한동안 출장 갈 일이 없어 보다 안정적인 거처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신혼집 인테리어가 끝나가고 있긴 했지만 제가 혼자 살 수는 없었습니다. 신혼집에는 신혼부부가 살아야 하니까요.

신혼부부가 살아야 한다는 신혼집에서 서운은 벌써 한 달 넘게 혼자 사는 중이다. 개소리는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난다. 의진의 개소리가 절정으로 향해 달려갔다.

- 그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거처를 정해야 한다면 아예 결혼을 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니까요. 결혼은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에 해당하는 일이니 해내지 못할 것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가치관과 비슷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가치관, 서운에게도 제법 익숙한 단어였다. 의진이 서운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유일한 이유, 가치관. “네, 그렇습니다.” 서운이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중얼거렸는지 의진이 이를 놓치지 않고 흔쾌히 맞장구를 쳐 왔다.

- 결혼 의사가 있되 당장 자녀 계획은 없어야 하며 혼자서도 잘 계시는 분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보통은 혼자 시간을 보내는 상황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더군요. 아주 난처했습니다.

서운은 몇 번이고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익숙한 목소리로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저 사람은 서운이 아는 그 사람이 맞았다. 난 도대체 저 사람의 어떤 모습을 보고 있었던 걸까, 서운의 가슴이 불쾌하게 두근거렸다.

- 그러다 서운 씨를 만나게 된 겁니다. 저와 가치관이 비슷한 분은 서운 씨가 유일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믿을 수 없는 건 의진이 진심이라는 점이다. 그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서운에게 제 본심을 들려주고 있었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 같아서.”

“진솔한 것 같아.”

역시 서운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언젠가 서운이 했던 말처럼 의진은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 맞았다. 서운은 의진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조금 서투르긴 해도 언제나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 사실 출장만 줄었다 뿐이지 한국 지사에 완전히 자리 잡기 전까지는 야근이 확정된 상황이었습니다. 서운 씨는 혼자서도 잘 계실 것 같아 믿음이 가더군요. 실제로도 이 부분은 지금도 아주 잘해 주고 계십니다. 제 예상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셈이죠.

우리가 지금까지 한 건 대체 뭐였을까. 서운은 뿌듯하게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의진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남들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서운에게는 즐거웠던 의진과의 대화가, 서툴고 어색하지만 함께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의진과의 관계가 알고 보니 서운 혼자 쌓아 올린 모래성이었다. 제아무리 모래를 단단히 다져 봤자 파도 한 번에 그대로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을 서운은 하와이에서 보았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모래성도 그렇게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뿐만 아니라 당장 자녀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여러모로 서운 씨가 가장 적합했습니다. 시기상으로도 완벽했지요.

생각해 보니 신혼여행을 떠나는 비행기에서도 서운은 의진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다. 의진은 서운을 가리켜 ‘마땅한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절대로 유쾌한 표현은 아니었지만 설마 하니 이런 비화를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때부터였구나. 처음부터 이 사람에게 사랑은 중요한 게 아니었어. 서운은 마침내 이야기의 끝에 다다랐다.

- 물론 이렇게까지 상황이 맞아떨어질 줄은 저도 몰랐으나… 그래도 제가… …를 알아봐서… …착오라고 하셨지만….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의진의 개소리가 이어졌다. 서운은 듣지 못했지만 아마 그랬을 거다. 서운은 이날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으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걸 몸소 체험했다. 다만 사람마다 충격을 표현하는 방법은 달랐다.

“…야.”

- 약속 시간을 지키는 건 사회생활의 기본으로… 부르셨습니까?

서운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고, 하얗게 질린 얼굴도 본래의 혈색을 되찾았다. 고로 서운은 지금 매우 이성적인 상태다.

“야 이 개새끼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성적으로 존나게 열받았다. 서운은 착실하게 제 분노를 표출했다.

“네가 인간이야? 네가 사람이야?!”

- 인간 맞고 사람도 맞습니다. 혹시 저한테 화나신 겁니까?

“사람이면 사람 말을 해야지 왜 자꾸 개소리를 하는데!”

- 개소리의 정확한 기준이 어떻게 됩….

“아아악!”

넌 지금 휴대폰 속에 있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서운이 그대로 휴대폰을 집어 던졌다. 이 와중에도 바닥에 던질 생각은 하지도 않는 스스로가 너무 하찮고 대견했다. 아직 단말기 할부가 안 끝났다. 서운은 누구보다 돈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었다. 상처는 아물어도 날린 돈은 돌아오지 않는다.

- 서, 서운 씨!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프신 겁니까? 지금 병원에, 의사를, 서운, 서운 씨? 서운 씨!

안락하게 침대 위에 착지한 서운의 휴대폰이 제대로 오작동을 일으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운은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목적지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25-3번지, 이름 하여 서울가정법원 되시겠다.

- 서운 씨? 제 말 들리십니까? 서운 씨!

두 사람의 세 번째 이혼 위기였다.

* * *

인생은 타이밍이다.

서운은 어느 때보다 이 말의 위력을 실감하는 중이다. 서운이 세 번째 위기를 맞이한 그날, 하필이면 공휴일이라 이혼 접수가 불가능했다. 반강제적으로 이틀간의 유예 시간이 주어졌다. 그동안 민영은 수능 후 처음으로 부모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눴으며, 일요일에는 서운도 함께 민영의 재수 학원을 알아보았다. 월요일에는 외삼촌의 자전거가 도착해 마지막 점검을 치렀다. 이를 빌미로 후속 기사를 내는 건 아닌지 내심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에는 영민이 실밥을 제거했다. 다행히 흉터가 크게 남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다다음 날에는 수정 요청이 왔다. ‘_REV_9’ 서운은 말없이 파일 제목을 수정했다. 무려 9번째 수정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끝까지 가 보자! 이제는 서운도 오기가 생겼다.

그러자 금세 주말이 찾아왔다. 두 사람의 이혼도 자연스럽게 미뤄졌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어느덧 의진의 귀국이 가까워졌다.

- 서운 씨.

이름이 불리자 서운이 심드렁하게 의진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휴대폰 화면에 보이는, 영상 통화 속의 의진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씨버러버 중이다.

-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셨습니까.

의진이 깍듯하게 안부 인사를 건네 왔다. 서운이 의진에게 쌍욕을 한 그날 이후 의진의 태도가 한층 공손해졌다. 그날 정말 굉장했었지, 서운은 다시금 당시의 기억을 회상했다.

- 죄송합니다.

한참 만에 서운과 연락이 닿은 의진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사과였다. 무표정한 얼굴은 그대로인데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의진이 서운에게 거듭 사과를 해 왔다. 서운은 아무런 대꾸 없이 의진을 쳐다보았다. 영상 통화에 대한 의진의 집착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 정말 죄송합니다, 서운 씨.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당장 시정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돼요.”

- 아닙니다. 잘못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려 주시면 바로 고치겠….

“필요 없어요.”

- …다시,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응. 필요 없다고.”

공휴일에 가로막혀 서운의 법원행이 막 좌절된 참이었다. 서운은 진심으로 의진의 사과가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의진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가 사는 세계에서는 그게 당연한 이치일 테니 계속 그렇게 살면 된다. 굳이 이 세계의 논리를 이해할 필요는 없다.

- 서운 씨, 저는 처음 해 보는 일에는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립니다.

서운은 곧바로 전화를 끊을 생각이었다. 의진이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그랬을 테다.

- 이럴 땐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한 번만 가르쳐 주십시오.

- 한 번만 가르쳐 주시면….

- 서운 씨.

- 서운 씨….

- …서운 씨, 제발….

이상하다. 의진은 정말 이상하다. 서운이 가장 효율적이어서 결혼을 결심했다는 그는 때때로 서운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것처럼 군다. 이혼당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막상 그의 집안을 떠올려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실제로 의진의 집안에서 이혼과 재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서운과 의진의 결혼은 언론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 앞으로는 서운 씨와 이야기할 때 효율적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 물류 센터 이야기도 다시는 꺼내지 않겠습니다.

- 다른 요구 사항은 없으십니까?

이상한 사람, 서운에게 의진은 여전히 예측이 불가한 사람이다. 의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몰랐던 것처럼 서운은 의진이 이렇게까지 사과해 올 줄 몰랐다. 이럴 거면 대체 왜 얘기한 거야?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사자의 면전에 대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진 않을 테다.

- …혹시 제가 개처럼 행동한 겁니까? 그래서 개새끼라고 하신 거면….

아, 맞다. 얘 상식 없지. 진지하게 개소리를 늘어놓는 의진을 바라보며 서운은 도리어 차분해졌다. 상대적 의진 효과였다.

효과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게다가 타이밍마저 좋았다. 기다렸다는 듯 공사다망한 날들이 이어지면서 서운의 심란한 마음도 한층 가라앉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정법원에 갈 수도 있었지만 서운은 더 이상 그러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차피 의진이 한국에 없어서 당장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랬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로 마음 써 봤자 그게 바로 낭비요, 에너지 소모다. 그렇게 생각하자 서운은 적당히 괜찮아졌다. 몇 안 되는 어른의 장점 중 하나였다. 아무렇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회복 속도가 빨라진다. 물론 대가는 분명히 존재했다.

“일정이 앞당겨졌다고?”

- 네, 그렇습니다.

“…….”

- 서운 씨?

“응.”

- 귀국 일정이 앞당….

“어, 들었어요.”

서운이 시큰둥해졌다. 잠시나마 서운을 들뜨게 만든 크고 작은 설렘에도 더는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다. 매일 밤마다 걸려오는 영상 통화도 전처럼 기다리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대화를 끌고 나가지도, 통화를 길게 이어 나가지도 않았다. 서운은 적당한 선에서 의진을 대했다.

그래도 이건 좀 예상 밖이다. 일정이 당겨졌다니, 그럼 더 빨리 돌아온다는 건가. 어쩌면 서운을 위해 외숙모 생신 파티에 맞춰 일정을 조정한 건지도 모른다. 서운은 가만히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은근슬쩍 마우스를 움직여 달력을 띄웠다. 마침 외주 담당자 연락을 기다리던 참이라 컴퓨터 앞에 있었다. 서운이 아닌 척 물었다.

“그럼 언제 오는데요?”

- 금요일 오후 5시 10분에 도착합니다.

“…원래도 금요일 도착 아니에요?”

- 요일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금요일 도착은 동일하나 대신 시간대가 다릅니다. 예정보다 2시간 45분 일찍 출발할 예정입니다.

장난하냐. 서운은 가차 없이 컴퓨터 달력을 껐다. 그럼 그렇지, 대체 뭘 기대한 거야. 세상에서 효율을 가장 중요시하는 인간이 고작 집안일 때문에 일정을 조율할 리가 없다. 서운은 조금 자조적인 기분이 되어 남은 기대를 모두 지워 버렸다. 애초에 기대가 많지도 않았지만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기대했으면 실망만 커질 뻔했다.

물론 의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서운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평소보다 훨씬 부산스럽게 굴었으며, 내심 기대하는 눈빛이다. 도대체 뭘 잘했다고 저러는 걸까. 물론 얼굴은 늘 잘하고 있긴 하다.

“아, 2시간 45분. 와, 엄청 앞당겨졌네요.”

서운이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저절로 그런 목소리가 나온다. 역시 기침과 사랑과 빡침은 숨길 수 없다. 숨기고 싶어도 숨겨지지 않는다.

-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네.”

- …….

“…….”

- …그런데.

“응.”

- 서운 씨는….

의진이 서운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정답이다. 확실히 처음보다 눈치가 많이 늘었다. 그럼에도 서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을 고했다.

“아닐걸요.”

뭔가 이상하다. 흔들리는 의진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얘기만 들으면 이보다 더 긍정적일 수가 없는데 보이는 건 전혀 그렇지 않으니 동기화에 오류가 온 모양이다. 서운은 말없이 그런 의진을 지켜보았다. 사실은 의진이 서운을 생각해서 더 일찍 올 줄 알았다는 속 얘기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저 남 일처럼 멀리서 이 상황을 관망했다.

- 어머님 생신 파티는…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잠시 고민하던 의진이 나름대로 답을 제시했다. 오답이긴 하나 놀랍게도 정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진이 놓친 게 있다면 딱 하나, 바로 해석의 다양성이다. 의진이 외숙모의 생신 파티에 참석해 주길 바란다기보다는 날 위해 비효율적인 상황을 감수하는 의진이 보고 싶은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의진의 불참은 차라리 잘된 일이다. 좋은 모습만 보여 줘도 모자랄 판에 가족들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다. 서운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일부러 안 오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요.”

- …그렇습니까.

“응.”

- …서운 씨.

“왜요.”

- 혹시 저한테 화나신 건….

“이제 그 얘기는 끝! 그만합시다.”

- …알겠습니다.

의진과 통화를 하는 와중에도 외주 담당자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이번이 벌써 13번째 최종안이다. 오늘은 컨펌이 나야 할 텐데…. 액수가 적어서 너무 우습게 봤다. 볼펜이랑 노트는 9번 만에 제작에 들어갔는데 전단지가 아직도 컨펌이 안 났다.

하필이면 클라이언트도 재수 학원이다. 수능 성적 발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시기상으로 보면 대목이 맞긴 하다. 나중에 민영이를 등록시키면 할인 좀 해 주려나. 서운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새로 고침을 눌렀다. 새로 온 메일은 여전히 없었다. 대신 메신저 창이 깜박였다. 의진과는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 장모님은 어떤 선물을 좋아하십니까?

어디서 단체로 교육이라도 받고 오는 건지 담당자들은 메일로 수정 요청을 하는 법이 없다. 개인 메신저로 말하면 수정 요청이 수뎡 요청이라도 되는 줄 아나. 정규 퇴근 시간을 넘긴 지 오래였지만 사장을 제외하면 피차 야근 중인 건 마찬가지기에 서운은 제법 다정하게 답장을 보냈다. 물론 얼굴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결국 14번째 최종안을 만들게 생겼다.

- 서운 씨?

“아, 지금 수정 요청이 와서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 제가 방해했군요. 죄송합니다. 당장 끊으셔도 됩니다. 먼저 끊으시겠습니까?

무어라 대답할 틈도 없이 깜박이는 메신저 창이 다시금 서운에게 손짓해 왔다. 아쉽지만 이만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서운은 이쯤에서 통화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그럼 끊을게요.”

- 네,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일하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대로 전화를 끊으려던 서운이 멈칫거렸다. 하여튼 상식은 없는데 쓸데없이 예의만 바르다. 서운은 잠시 머뭇대다가 의진을 따라 말뿐인 안부 인사를 건넸다. 배알이 있으니 진심은 조금만 보탰다. 정말이다.

“…오늘도 일 잘하고. 그, 밥 좀 잘 챙겨 먹어요. 토스트 좀 그만 먹고.”

별 얘기 안 한 것 같은데 별안간 의진이 입을 다물었다. 말없이 서운을 쳐다보는 통에 서운은 고스란히 의진의 시선을 받아야 했다. 언제 봐도 잘생겼지만 소리 내어 웃거나 인상 한 번 쓰지 않는 무표정에서는 쉽게 감정을 읽기가 어렵다. 잠깐의 침묵 끝에 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충고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식단에도 신경 쓰겠습니다.

“아니, 뭐 충고랄 것까지야….”

- 사진으로 보고드릴까요?

음식 항공사진이라도 찍어 보내겠다는 건가. 의진에게는 미안하지만 정말 못 찍을 것 같다. 벌써부터 그려지는 어설픈 음식 사진에 서운이 작게 웃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의진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의진이 또다시 서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 무엇이 말입니까?

도리어 의진이 반문을 해 오는 통에 대화는 실없이 끝이 났지만 그날부터였다. 짧다면 짧지만 그만큼 강렬한 의진의 사진 공격이 시작된 건. 서운은 의진이 귀국할 때까지 매일 아침 초고화질의 음식 사진을 받게 되었다. 화질은 또 왜 이렇게 좋은지 뮤슬리에 있는 이름 모를 곡식의 씨눈까지 보였다.

의진의 귀국까지 D-1, 서운은 오늘도 의진의 사진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과일과 단백질 셰이크가 찍혀 있는 한 장의 사진이었다. 장난하나. 저걸로 끼니가 된다고? 시간이 없어서 최대한 간편하게 먹었다고 하는데 저래서야 돈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래도 말은 잘 들어서 시킨 대로 토스트는 안 먹었다.

저렇게 먹을 바에야 차라리 토스트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서운은 잠결에 대충 사진만 확인하고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대망의 외숙모 생신 파티가 있는 날이다.

“식당을 몇 군데 알아봤어요.”

- 어머, 그래?

“다 평은 좋으니까 외숙모 좋으신 곳으로 가요. 한 번 쭉 보시고 말씀 주세요.”

외숙모가 원한다면 상견례를 한 식당만큼 좋은 곳에 갈 의향도 있다. 서운은 꽤나 비장하게 외숙모의 생신 파티를 준비했다. 전체 비용의 90% 이상을 보탠 의진 덕분에 결혼 자금이 제법 남아서 그 정도 여유는 된다.

서운아, 한참 동안 서운이 보내온 링크를 훑어보던 외숙모가 서운을 불렀다.

- 다 비싼 데지?

“아니에요. 그 정도는 괜찮….”

- 이렇게 비싼 데는 안 가도 돼.

“…진짜 괜찮아요. 저 그 정도는 벌어요.”

- 네가 못 번다는 소리가 아니야. 이렇게 비싼 밥은 내가 못 먹어.

“그래도 상견례 때는 잘 드셨….”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뱁새는 뱁새처럼 살아야지 황새 쫓아가려면 끝도 없다, 너? 멀쩡한 가랑이만 찢어지는 거야.

아. 서운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줄곧 의진과의 집안 차이를 의식하던 게 이런 데서 표가 나는 것 같았다.

덕분에 서운이 통장 잔고까지 확인하며 비장하게 준비한 외숙모의 생신 파티는 결혼 전과 다름없이 치러질 예정이다. 결혼 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의진의 고모가 보낸 윤 기사의 차를 타고 이동하게 됐다는 점 정도다. “…돈이 좋긴 하다.” 외숙모가 나지막하게 귓속말을 했다. 원체 성량이 좋아서 큰 효과는 없어 보였다. 모두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서운의 가족은 아무 탈 없이 식당에 도착했다.

예약해 둔 방으로 들어가니 일찌감치 의진의 고모가 와 있었다. 방금 도착했다는 그의 손에는 어디서 많이 본 XX전자 태블릿 피시가 들려 있다. 얼굴을 제외하면 의진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닮은 점이 아주 없지는 않다. 서운은 내일이면 돌아올 의진을 떠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아유, 뭘. 나야말로 시간 내 줘서 영광이네요.”

꽤나 화기애애한 시작이다. 외삼촌은 아직도 영 적응이 되지 않는지 의진의 고모가 저에게 말을 걸 때마다 흠칫흠칫 놀랐다. 아빠 왜 저래? 민영은 대놓고 킬킬거리다 외숙모에게 허벅지를 꼬집혔다.

“이건 선물.”

“뭐어? 그냥 빈손으로 오라니까!”

“빈손이지. 거창한 건 아니고 우리 계열사들 식사 회원권이에요. 푸드 말고 마트나 전자 쪽도 할인되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이걸로 결제해.”

“이런 걸 우리 줘도 돼?”

“그럼. 나도 내 집에 있는 거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꼭 써 주면 좋겠어. 이번에 오픈한 프리미엄 레스토랑들 괜찮거든.”

“헐. 그럼 블랙 스테이크에서도 쓸 수 있어요?”

민영이 두 눈을 반짝이며 어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의진의 고모가 흔쾌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거긴 80%나 되니까 꼭 이 카드로 써 줘요.”

“대박! 엄마, 엄마! 우리 내일 가자!”

저 카드… 회원권이 아니라 그냥 신용카드 같지…? 의진의 고모가 회원권이라며 건네준 카드는 의진이 서운에게 준 것과 같은 색을 띠고 있다. 색만 같으면 다행이게, 언뜻 보이는 로고 위치나 디자인도 거의 같다. 아직 음식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체기가 올라온다. 서운은 침착하게 냉수를 들이켰다.

“우리 사돈어른 생신은 언제예요?”

“저, 저 말입니까?”

“5월이야. 자전거 타기 딱 좋은 날에 태어났지?”

“어머, 정말 그러네요. 5월에도 초대해 주시면 그때는 사돈어른 선물을 준비해 올게요!”

찡긋! 의진의 고모가 별안간 윙크를 했다. “커, 컥! 가, 감사합….” 기다렸다는 듯이 외삼촌이 사레에 들렸다. 아무래도 서운의 적응력은 외숙모를 닮은 것 같다. 사레에 잘 들리는 건 외삼촌을 닮았다.

“아유, 대체 언제 나온담. 여기가 꼭 이렇다니까. 이럴 거면 예약을 왜 받는지 모르겠어.”

밑반찬은 일찌감치 동이 났고 음식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가서 확인해 보고 올게요, 서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집이라 문도 미닫이로 되어 있었다. 화기애애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미닫이문을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아, 이 방이 맞군요. 안내 감사합니다.”

“아이고, 고맙기는. 잘생긴 총각이 말도 예쁘게 하네.”

…네가 왜 여기 있어? 서운은 잠시 제 눈을 의심했다. 눈만일까, 귀도 의심했다. 어디서 많이 본, 실제 만남보다 휴대폰으로 더 자주 접한 씨버러버가 서운의 바로 앞에 있다. 하물며 사운드까지 생생하다.

“서운 씨.”

의진이 서운을 부른다. 아, 서운이 대답하듯 작게 탄식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의진에게 이름이 불리자 아무 생각도 안 든다. 의진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예정일은 내일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 법도 하건만 당장은 이성보다 본능이 더 앞섰다. 의진이 앞에 있다. 의진이 왔다. 의진이 돌아왔다. 의진이…. 머릿속이 온통 의진으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진짜 의진이 왔다.

“서운….”

탁! 당황한 서운이 저도 모르게 문을 닫았다. 미닫이문이 닫히자 엉성한 창호지 너머에서 의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씨?”

깜짝이야. 순간 욕한 줄 알았다. 하필이면 끊겨도 거기서 끊길 건 뭐니.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문을 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예상치 못한 만남, 오랜만의 조우, 그리고 롱코트. 억지로 멀리했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 건 한순간이었다.

미친 롱코트! 서운의 본능이 외쳤다. 의진이 롱코트를 입었다. 제 앞에서 미닫이문이 닫힌 의진만큼이나 지켜보던 가족들도 당황했다. 가족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밖에 형부 온 거 아니야?”

“저, 서운아…?”

집 나간 남편 놈이 돌아왔는데 롱코트를 입었어요! 어디다 말은 못 하겠고 서운 혼자만 답답했다. 후! 짧게 심호흡을 마친 서운이 힘차게 미닫이문을 열었다. 롱코트를 입은, 오랜만에 보는, 한 달 주기로 보는 남편 놈이 보인다. 마침 기다리던 음식도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기는. 원래대로라면 의진은 본래 일정보다 2시간 45분 앞당겨진 금요일 오후 5시 10분에 입국할 예정이다. 그런데 왜 지금 온 거지?

꾸벅 사과 인사를 마친 의진이 외숙모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건넸다. 풍성한 꽃송이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꽃다발은 모서리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어머, 뭐야 이거. 서프라이즈야?”

“선물은 제가 멋대로 골랐으니 마음이 들지 않으시면 매장에 가셔서 직접 바꾸시면 됩니다.”

뒤이어 의진이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시계로 특히 유명한 브랜드의 제품이다. 은근하게 현금을 선물한 고모와 달리 의진은 아예 대놓고 비싼 브랜드 제품을 골라 왔다. 선물마저 참 의진다웠다.

“뭐야, 뭐야! 형부 못 온다며!”

“어? 어. 그럴, 텐데….”

“서프라이즈야? 대박이다!”

갑작스러운 귀국도, 외숙모의 선물도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다. 자신의 가족들과 안부를 나누며 외숙모의 생일을 챙기는 의진은 지나치게 현실감 없었다.

“서운 씨.”

그러나 현실이다. 어, 어? 이름이 불린 것뿐인데 서운이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이게 다 롱코트 때문이다.

“서운 씨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 고모님이랑 민영이 사이….”

서운의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의진이 빠르게 자리를 둘러보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더니 민영이 옆에 구겨져 앉는다. 한껏 롱코트를 추스르더니 커다란 어깨를 구겨 가며 굳이 굳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의진의 허벅지가, 발이, 팔이, 온몸이 밥상 밖으로 흘러넘친다. 왜 저래. 흡사 대가리를 숨긴 꿩 같았다.

“형부 뭐 해요?”

인생에서 대학 말고는 두려운 게 없는 민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의진의 고모도 내심 궁금한 눈치다.

“자리에 앉았습니다.”

“근데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저기 넓잖아요.”

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답했다. 의진의 시선이 우두커니 서 있는 서운에게 향한다. 이보다 더 확실한 의사 표현은 없었다.

…헐…. 민영은 대놓고 언짢아했으며, 외숙모와 의진의 고모는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외삼촌은 아닌 척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서운의 얼굴이 민망함에 붉게 물들었다. 다시 봐도 서운의 남편은 참 요령이 없었다.

“영민이가 모서리에 앉아야겠다. 민영이가 영민이 자리로 오고.”

“…어. 당장 갈게.”

“싫어! 나도 형아 옆에 앉을 거야!”

하루아침에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게 생긴 영민이 대놓고 투정을 부렸다. 뭐래, 민영이 가소로운 얼굴로 한참 어린 제 동생을 번쩍 들어 친히 자리를 옮겨 주었다. “우에엥, 싫어! 형아 옆에!” 영민이 한껏 성을 냈지만 소용없었다. 새로운 아기의 등장이 영민의 투정을 상쇄시켰다.

“서운 씨, 얼른 오십시오.”

기어코 서운의 옆자리를 차지한 큰 아기가 신이 나서 서운을 찾는다. 그 모습을 영민이 아니꼽게 흘겨보고 있었다. 하, 하하…. 서운이 어색하게 웃었다.

의진이 돌아왔다.

기다린 보람이 있다. 누룽지 백숙은 여전히 맛있었다. 가족들 모두가 신나게 수저질을 하는 사이 서운은 혼자 티 나지 않게 백숙을 깨작거리고 있다. 입에서는 맛있는데 영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원인은 딱 하나다. 서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남편 놈 때문이다. 그간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막상 의진을 보니까 배알도 없이 반가우려고 그런다. 진짜 배알도 없지, 의진의 깜짝 등장으로 쓸데없이 분위기만 더 좋아졌다. 입이 하나 더 늘었다는 핑계로 녹두전도 주문했다.

“저희 막걸리 한 병 주세요.”

갓 구운 전을 한 입 베어 먹으니 절로 막걸리 생각이 난다며 외숙모가 빠르게 호출 벨을 눌렀다.

“아, 한 병이면 되나? 너희도 마실 거지?”

너희, 이제는 의진과 자신이 함께 불리는 일상이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 너희에서 이성을 맡고 있는 서운이 대답했다.

“전 내일 건강 검진이 있어서요. 의진 씨는요?”

“전 식전에 받았습니다. 일반적인 검진 주기는 2년에 한 번이니 다음 검진은 1년 9개월 뒤가 되겠군요.”

내가 개떡같이 물어본 거니, 아니면 네가 개떡같이 알아들은 거니. 서운은 오랜만에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서운이 말이 없자 이를 멋대로 오해한 의진이 곧바로 자기 어필에 나섰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기억하지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대신 기억하니까요.”

“이건 또 뭔 소리지….”

“제 건강 검진일 말입니다. 서운 씨께서 혼인 관계 증명서와 건강 검진 증명서, 범죄 경력 증명서, 신용 인증서를 요청하셨을 때 미리 받….”

“두 병! 두 병 시키죠! 저희 막걸리 두 병 주세요!”

속았다. 아니, 방심했다. 최근 들어 업데이트가 잦았던지라 본래 이런 놈인 걸 깜박했다. 서운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적극적으로 주문해 가며 의진의 말을 끊어 버렸다. 의진의 서류를 받아 본 건 여전히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 중 하나지만 다른 사람들, 그것도 양가 어른들 앞에서 떠들어 댈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네. 막걸리 두 병요.”

“네, 네. 벌써 맛있겠다, 그쵸.”

그러니까 그만 닥쳐 줬으면 좋겠다. 범죄 경력 증명서의 여파를 떨쳐 내기 위해 괜히 너스레를 떨자 의진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진다.

“안 됩니다, 서운 씨. 검진 전 음주는 피하셔야 합니다.”

어? 서운은 순식간에 술주정뱅이가 되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멀뚱멀뚱 의진을 쳐다보자 의진이 돌연 시선을 피한다.

“그렇게 쳐다보셔도 안 됩니다.”

“뭐가요?”

“…음주는 절대 금물입니다!”

의진이 허공을 향해 외쳤다. 서운이 있는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겠다는 무언의 의지까지 느껴진다. 얘가 또 왜 이럴까. 서운이 심각하게 의진의 안색을 살폈다. 의진은 여전히 옆모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진짜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검진 2~3일 전부터는 음주와 기름진 음식은 모두 피하셔야 합니다.”

“나도 알….”

“오늘은 저녁 9시부터 금식입니다.”

“나도 안….”

“금식 중에는 물, 껌, 사탕도 드시면 안 됩니다.”

나도 알아 이 새끼야. 서운이 말했다. 보는 눈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속으로만 했다. 서운의 입술이 아쉬움에 달싹거렸다.

“어머, 어머. 남편 챙기는 것 좀 봐. 의진이가 우리 서운이를 잘 챙기네.”

예? 이게요? 외숙모가 반색하며 의진을 콕 집어 칭찬했다. 늘 동생들을 챙기는 입장이었던 서운이 반대 입장이 되자 그 모습이 퍽 신기한 모양이다. 칭찬은 의진도 춤추게 한다. 자리가 좁은 탓에 한껏 구겨져 있던 의진의 어깨가 지금은 그렇게 의기양양할 수가 없다. 의진의 자신감이 배로 증가했다.

“의진이 말 들어. 내일 건강 검진도 있는 애가 무슨 술을 마신다고 그러니?”

“그래, 서운아. 오늘은 좀 참아야지 안 되겠다. 어떻게, 사이다라도 시킬까?”

그러니까 마실 생각 없었는데요. 외숙모와 외삼촌이 진지하게 서운을 말렸다.

“헐. 오빠 진짜 마시면 안 되겠다. 다른 건 몰라도 술은 절대 금물이래.”

“긍물이 뭐야?”

“…금물이 뭐냐면….”

그새 검색이라도 해 본 건지 민영이 심각한 얼굴로 그런다. 서운은 그 와중에 영민의 눈높이에 맞춰 단어 뜻풀이도 해 줘야 했다. “…절대 하면 안 된다는 뜻이야.” 다른 건 거두절미하고 간략하게 뜻풀이를 해 주자 도리어 영민의 눈이 커진다.

“근데 형은 왜 하려고 그래?”

“…아니, 안 해. 안 마셔. 안 마신다고.”

“아유, 착하다. 그럼 우리 우니는 사이다로 같이 짠 할까요?”

대미는 의진의 고모가 장식했다. “우니가 누구야?” 청중들이 술렁거린다. “서운 씨를 부르는 애칭입니다.” 이번에는 의진이 나서서 뜻풀이를 해 줬다.

“오빠가 왜 우니야? 설마 이름 끝자리 딴 거야? 서운이의 우니?”

“네, 그렇습니다.”

“헐, 그게 뭐야. 누가 지었어요? 완전 센스 없….”

“저희 가족들이 지었습니다.”

“…던 센스도 살아나네! 나, 나도 앞으로 그렇게 불러야겠다! 우니, 우니, 정서우니! 서우니 서운하니!”

가족, 한국 사회에서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불문의 존재. 간접 패륜의 위험에 처한 민영이 필사적으로 인공호흡에 나섰다. 똥 다음으로 말장난을 제일 좋아하는 초등학교 저학년은 덩달아 신이 났다.

“서운하니! 서운하니!”

영민이 제 누나를 따라 신나게 코러스를 넣었다. 서운이가 서운하대! 서운은 이 소리를 초등학생 때부터 들어왔다. 저 개소리가 아직도 먹힐 줄이야. 역시 클리셰는 영원하다.

아, 피곤하다. 출근도 안 했는데 퇴근이 하고 싶다. 서운은 급격히 피로해졌다. 의진이 오늘 오는 줄 알았으면 건강 검진을 내일 오전으로 잡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면 이런 수모는 겪지 않아도 됐을 테다.

아, 아니지. 애초에 검진을 내일로 차일피일 미룬 건 나구나. 그렇지만 여기에는 의진의 탓도 크다. 중간에 있었던 의진의 갑작스러운 귀국(이라 쓰고 섹스라고 읽는다)만 아니었어도 서운은 검진을 미루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섹스는 좋았다. 최고였다. 그럼 됐지 뭐. 서운은 더 생각하기를 멈췄다. 친엄마나 다름없는 외숙모 생신날 미성년자인 사촌 동생들 앞에서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제가 한 잔 따라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머, 좋지!”

그사이 주문한 음료가 도착했다. 외삼촌 내외는 처음으로 사위에게 술을 받았다. 한껏 신난 외숙모와 달리 서운과 의진을 바라보는 외삼촌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서운이…, 우리 서운이가 언제 이렇게….” 뒷말은 끝내 이어지지 않았으나 무슨 말이 나올지는 뻔했다. “네, 말씀하십시오.”라며 의진이 외삼촌을 재촉하긴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별일은 아니었다. 사고는 그 후에 일어났다.

“형부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드물게도 민영이 정색을 했다. 어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서운이 깜짝 놀라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민영은 잔뜩 굳은 얼굴로 의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의진의 손을 보고 있었다. 채워진 건 서운의 컵뿐인데 의진의 손에 들린 사이다 병은 벌써 바닥을 보인다.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걸 다 오빠한테 주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민영 씨도 드시는지 몰랐습니다.”

“나도! 나도 먹을 거거든요!”

영민이 지지 않고 씩씩거렸다. 사이다 한 병을 세 명이 나눠 마셔야 하는 상황,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의진이 자기 식대로 해결에 나섰다.

“그럼 한 병을 더 시….”

“아니. 두 병은 필요 없어요.”

마침내 서운이 참전했다.

“사이다는 어차피 첫입이 제일 맛있거든요.”

“옳소! 사이다는 첫입이 제일 맛있다!”

“맛있다!”

아마 한 번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테다. 이건 아는 사람만 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의진은 내버려 두고 서운은 민영과 영민의 컵을 가져와 제 몫의 사이다를 나눠 주었다. 정확한 삼등분을 위해 조금씩 사이다를 나눠 따르는 손길이 어느 때보다 신중하다. 이를 지켜보는 민영과 영민은 허리를 낮추다 못해 이미 식탁에 반쯤 엎드려 있다.

“그렇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뭐가요, 또.”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거군요.”

“내가 언제?”

“방금 그러셨잖습니까.”

아무래도 서운이 의진에게 인생의 교훈을 안겨 준 모양이다. 서운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역시 서운 씨는 대단하십니다. 사이다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으시다니요. 정말 멋지십니다.”

의진이 감탄하며 손뼉을 친다. 또, 친다. 갑작스러운 박수 소리에 대화를 나누던 어른들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더는 혼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어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도 그다지 민망하지는 않다.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진 군이 손뼉 치는데?”

“네, 뭐… 취미예요.”

그렇다고 쪽팔리고 싶다는 건 절대 아니다. 서운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다시 한 번 밑으로 손을 뻗었다. 손뼉을 치고 있는 의진을 닥치게 할, 아니, 멈추게 할 요량이었다. 맹세컨대 다른 의도는 없었다.

의도가 어쨌든 서운은 또다시 의진을 붙잡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놀랐다. 잡은 놈도 놀랐고 잡힌 놈도 놀랐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 차마 서로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영민이 있었다. 손뼉을 치다 말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 버린 의진이 이상한 듯 영민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자, 의진 군도 한잔하지.”

외삼촌이 의진에게 술을 권해 왔다. 사위와의 술자리라는 그의 로망이 실현되려는 가운데 의진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의진 군?”

“…….”

“의진 군…?”

“저, 저희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

“저, 정말입니다!”

목청 좋은 건 집안 내력인 모양이다. 성량은 또 어찌나 좋은지 서운은 순간적으로 의진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이처럼 누구도 물어본 적 없는 우렁찬 고해성사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수저 오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식탁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아…! 누군가 짧게 탄식했다.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대충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무 짓도 안 했다는 건 방금 전까지 존나 무슨 짓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다. 물론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닌데 그건 분명히 사고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양가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의도적으로 남편 고추를 만지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럼 뭐해. 일은 이미 벌어졌다. 불은 서운이 질렀고, 그 위로 의진이 냉큼 기름을 들이부었다. 여러모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어머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외마디 감탄사가 적막을 깨트렸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의진의 고모였다.

“어쩜. 우리 지니, 우니 신혼 맞구나?”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신혼이 주는 상징적인 의미에 서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필이면 지은 죄가 있어서 더 그랬다. 방금 전까지 쥐고 있던 의진의 고추가 손바닥 아래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네, 맞습니다. 신혼의 기준을 놓고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나 저희는 고민할 것도 없이 명백한 신혼에 해당합니다. 서운 씨, 더우십니까? 얼음물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고추의 주인이 긴밀하게도 서운을 챙긴다. 고마운데, 진짜 고마운데 좀 닥쳐 줬으면 좋겠다. 의진이 서운을 챙기자 영민도 질세라 서운을 챙기려 들었다.

“형아 왜 그래?”

“어, 어?”

“얼굴이 빨개.”

“그, 그래?”

“형아 부끄러워?”

“야, 이거나 먹어.”

“와! 닭 다리!”

민영이 눈치껏 영민을 처리했다. 확실히 19살은 다르구나 싶다. 내심 고마워하며 급하게 생수를 들이켜는데 민영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여자애면 좋겠다.”

컥! 서운은 오랜만에 사레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옆에서 들리는 의진의 목소리가 마치 꿈같다.

“어머, 어머. 세상에, 세상에!”

이거 꿈이지. 누가 꿈이라고 해 줘. 오랜 침묵을 깨고 외숙모가 박장대소를 했다. 외삼촌은 저 혼자 벌컥벌컥 막걸리를 들이켜고 있다. 저러면 사레들리는데…. 제 코가 석 자인 서운이 외삼촌의 기도 걱정을 했다. 세상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이고, 귀여워라. 그래, 그래. 둘이 오랜만에 보는 거였지? 내가 눈치도 없이 신혼부부를 붙잡아 뒀네.”

“아니,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외숙모.”

“으유, 아니긴. 안 숨겨도 돼. 금슬 좋은 거, 그거 평생 간다? 밥만 다 먹으면 더 있겠다고 해도 알아서 쫓아낼 테니까 손은 이따 잡고 밥부터 먹자.”

손 안 잡았는데요. 고추 잡았는데요. 서운은 이대로 지구 내핵으로 꺼지고 싶었다.

“이게 다 몸에 좋은 거니까 일단 먹자. 의진이도 많이 먹고. 많이 먹어야 힘도 잘….”

“…….”

“…쓰….”

숨 쉬듯 자연스러운 섹드립이었다.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지 외숙모는 끝내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콜록, 콜록! 외삼촌은 역시나 사레에 들렸다. 어머나, 의진의 고모는 낯간지러운 추임새를 넣었다.

“네,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 와중에 의진은 정중하게 외숙모를 재촉하고 지랄이다. 꺼질 때 꺼지더라도 얘는 같이 데리고 가야 할 것 같다. 서운이 눈치껏 의진에게 신호를 보냈다. 아까처럼 다짜고짜 고추를 붙잡을 수도 있으니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 의진의 허벅지를 건드렸다.

반응은 바로 왔다. 움찔! 의진이 눈에 띄게 놀라더니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입도 같이 굳었다. 이거구나! 앞으로 자주 써먹어야지. 서운은 그렇게 잘못된 알고리즘을 습득한다.

“미숙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다 같이 건배!”

의도치 않은 섹드립으로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다. 의진의 고모의 선창을 시작으로 경쾌하게 술잔들이 부딪쳤다. 사방에서 달달한 막걸리 냄새가 난다. 중간에 잠시 사고가 있었으나 오늘은 웬일로 의진도 술잔을 받았다.

의진은 두 사람의 첫 섹스에서 일찌감치 술을 거절한 전적이 있다. 신혼여행에서도 그 흔한 반 주 한 번 곁들이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의진이 술을 즐기지 않는 건 확실하다.

“다 안 마셔도 돼요.”

서운이 어른들 몰래 속삭이자 의진이 정중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그런다.

“괜찮습니다. 세 모금까지는 안전합니다.”

“안전할 건 또 뭔데?”

“법으로 규정하는 음주 운전 단속 기준은 혈중 알코올 농도 0.03%부터이니 이 정도는 기준 미달입니다. 도수도 다 확인했습니다.”

아, 그래. 이런 놈이었지. 대학 동기 모임에서 있었던 혈중 알코올 농도 사건을 깜박했다. 일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운은 알아서 상황 정리에 나섰다.

“의진 씨 차 가져왔어요?”

부러 또박또박하게 소리 내어 말하자 가족들의 시선이 의진에게 꽂힌다. “네, 그렇습니다.” 이를 알 리 없는 의진이 정직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상황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차 가져왔으면 마시면 안 되지. 대리 부르면 된다고들 하지만 운전대는 남한테 맡기면 안 돼.”

“네, 알겠습니다.”

외삼촌의 지론에 의진이 순순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차를 가져왔으면 애초에 잔을 받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서운이 의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우리 집 억지로 술 안 권하니까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이로써 서운은 배알이 없음이 확실해졌다. 의진이 그런 서운을 빤히 쳐다보았다.

“또 왜요.”

그러자 대꾸 없이 톡, 서운의 허벅지를 건드린다. 만진 건 아니고 손가락 끝으로 서운의 허벅지를 톡톡, 건드려 온다. 방금 전 서운이 의진에게 한 것과 같은 동작이었다.

…내가 못할 말을 했나?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서운은 이제 웬만한 일로는 쉽게 당황하지 않는다. 이 정도로는 서운의 관심을 끌 수 없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의진의 깜짝 방문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럼 공항에서 바로 온 거니?”

“네, 그렇습니다.”

“아이고, 피곤해서 어떡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공항에는 예정대로 도착했으나 차가 많이 막히더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예정대로? 내일 5시 도착 아니었어요?”

그래서 건강 검진도 내일 오전에 예약을 잡아 둔 거였다. 의진이 집에 오면 이른 저녁이겠지 싶어 일부러 맞춰 잡은 건데 이게 무슨 소린가 싶다.

“세상에, 우리 지니가 서프라이즈를…!”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모의 감동 어린 목소리에 의진이 강력하게 서프라이즈 의혹을 반박하고 나섰다.

“일정이 다소 급박하게 앞당겨지긴 했으나 저는 분명히 서운 씨께 미리 명시해 드렸습니다.”

“어? 언제요? 난 처음 듣는데.”

“한국 시간으로 새벽 3시 경에 메시지 드렸습니다. 혹시 못 받으셨습니까?”

서운이 휴대폰을 꺼내자 의진이 긴장한 얼굴로 힐끗 곁눈질을 한다. 그런 연락은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과연 의진의 말대로 새벽 3시에 보내온 메시지가 있긴 하다. 서운이 아침에 받아 본 단백질 셰이크 사진과 같은 메시지다. 맨정신에 다시 보니 초고화질의 음식 사진 밑으로 텍스트가 주절주절 놓아져 있다. 내용을 보아하니….

“…그러네. 얘기했었네.”

“그렇습니다. 서프라이즈 금지 조약에 위배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누나, 조약이 뭐야?” 영민이 민영에게 물었다. “그건 또 뭔 소리예요?” 서운은 의진에게 물었다. 서운의 질문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진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역시 서운 씨는 기억 못 하실 줄 알았습니다.”

“뭐요?”

“이럴 줄 알고 미리 영상 녹취를 해 두신 거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진정한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욕이냐 칭찬이냐. 이것은 남편 놈이다. 의진의 휴대폰 화면 위로 언뜻 복슬복슬한 토끼 귀가 스쳐 지나갔다.

“보시면 바로 기억나실 겁니다.”

의진이 곧바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부부간에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와 서운이 의진에게 바라는 점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던(의진은 서운에게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그 영상이었다. 서프라이즈 금지 조약도 여기에서 나왔다. 촬영지는 하와이다.

- 어, 뭐 해요. 앞에 봐요.

서운이 말릴 새도 없었다. 영상이 재생되었다. 커다란 토끼 귀와 핑크 볼터치를 장착한 서운이 영상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 저기요, 저 말고 앞을 보시라고요.

- 서운 씨, 토끼 귀가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 알아요. 장난 아니지.

- 네, 장난 아닙니다.

오늘이 내 수치사 날인가. 외숙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인데 점점 의미가 변질되는 것 같다. 서운은 당장 휴대폰을 빼앗았다. 다섯 번째 조약은 3분 18초부터라는 의진의 항변은 깔끔하게 묵살했다.

“어머, 왜 그러니. 더 보여 주지 않고. 아주 귀엽게들 노는구나.”

“와씨, 오빠 귀여운 척 오진다. 괜히 우니가 아니네. 우니 클라스 좀 보소.”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이 이상 쪽팔릴 것도 없어 보인다. 의진과 함께 있는 이곳이 바로 지구 내핵이다.

“마침 딱 만났네요!”

그 소란에도 음식이 들어가긴 하더라. 어느 정도 식사를 끝내고 화장실을 핑계 삼아 계산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서 통화 중이던 의진의 고모가 반색하며 알은척을 해 왔다.

“우리 우니한테 인사하려고 기다렸지요.”

급한 전화는 아니었는지 통화는 금방 끝이 났다. 한 손에는 휴대폰을, 품 안에는 태블릿 피시를 들고 있는 걸 보니 금방이라도 자리를 떠날 기세다.

“벌써 가시게요?”

서운이 예의 바르게 물었다. 의진의 가족과 이런 식으로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이번이 처음인지라 서운은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했다.

“아쉽지만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바쁘실 텐데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숙모가 정말 좋아하셨어요.”

“우니는?”

“네?”

“우니는 어땠는데요?”

차라리 주변이 시끄러우면 좀 낫겠는데 오늘따라 고요하기 그지없다. 갑작스러운 애정 공세가 당황스러우면서도 설레는 얼굴로 서운의 대답을 기다리는 의진의 고모를 무시할 수가 없다.

“…당연히 좋죠.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모님. 이렇게 따로 뵈니까 더 좋아요.”

“어머나… 쏘 스윗….”

정서운, 우성 오메가, 32세, 사회생활 6년 차. 이 정도야 껌이다. 서운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비즈니스를 했다. 약간 과장이 보태지긴 했지만 뭐, 거짓말은 아니니까. 의진의 가족을 대할 때는 대부분 다대일인 경우가 많아서 몰랐는데 지금처럼 일대일인 편이 훨씬 덜 부담스럽다.

…고 생각했는데 의진의 고모가 다짜고짜 손을 잡아 왔다.

“우리 지니한테 우니 같은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물며 서로 가치관까지 비슷하다니….”

고모의 발언에 서운은 대단히 언짢아졌다. 의진과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오해를 받는 것도 치욕스러우나 의진이 자신과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생각나서 새삼 빡이 친다.

“정말 멋져요!”

“…그게요?”

“그럼요! 가치관이 비슷하다는 건 서로 대화를 나눠야지만 알 수 있잖아요!”

나누기야 했는데 그걸 정말 대화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까지 우리가 뭘 한 건지도 모르겠다. 서운이 대답을 망설이자 의진의 고모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우리 지니가 표현이 조금 부족하죠?”

“…의진 씨처럼 의사 표현이 확실한 사람도 없을걸요.”

“…의사 표현은 좀, 확실하긴 하죠.”

끄덕끄덕, 서운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의진의 고모가 다시금 대화를 이어 나갔다.

“사회적 상호 작용에 조금 서투르긴 해도 절대로 남을 속이거나 다른 뜻이 있는 애는 아니….”

“…조금요?”

“…조금 많이?”

“…….”

“…….”

그러니까 그 ‘조금’이라는 단어가 문제인 것 같은데요. 잠시 서운의 질타 어린 시선이 이어졌다. 돌아온 건 의외의 반응이었다.

“다 우리 잘못이에요.”

“네?”

“우리가 아이에게 조금 더 귀 기울이고 아이의 성장을 눈여겨봤다면 지금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잠깐, 잠시만요. 효율? 효율요? 한층 심각해진 분위기에 진지하게 고모님 말씀을 경청하던 서운이 반사적으로 얼굴부터 구기고 봤다. 효율이라니, 이제는 듣기만 해도 치가 떨린다. 이를 알아차린 의진의 고모가 단번에 의문을 표했다.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음.”

“…….”

“…….”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제가 괜히 마음 써서 그래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운은 적당히 대답을 얼버무리면서도 적당히 솔직했고, 끝까지 예의가 발랐다. 그래서 더 확신이 생긴다. 지니 때문이겠지, 당연히 지니 때문일 테다. 의진의 고모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유추해 냈다.

“만약 지니 때문이라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아니요. 그런 게….”

“당연히 지니가 잘못했겠죠. 우니 잘못일 리가 없잖아요.”

정말 그럴까. 서운은 갑자기 모든 게 아득해졌다. 사실은 내가 정말 잘못된 선택을 한 거라면? 그런 거라면? 서운은 당연하게 제 편을 들어 주는 의진의 고모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했다.

“…고모님은 왜 이 결혼을 허락하셨어요?”

막연하게 궁금하기는 했어도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서운은 이 변화가 무척 새삼스러우면서도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 내심 불안에 떨어야 했다.

“왜기는요.”

앞뒤 맥락에 맞지 않는 질문이 당혹스러울 법도 한데 의진의 고모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거침없는 답변이 그가 누구보다 진심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효율적이어서요.”

그래도 그렇지, 설마 여기까지 효율 타령을 해 댈 줄은 몰랐다. 움칠, 순간 서운의 입술이 크게 달싹이다 간신히 제자리를 찾았다. 두 손이 의진의 고모에게 잡혀 있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을 내뱉을 뻔했다. 가족이 다 똑같은 소리를 하다니, 유전의 힘은 놀라웠다.

“운명적인 만남에 상황까지 잘 맞아떨어지는 데다 대화마저 잘 통한다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나요?”

안씨 일가에게 효율이란 어떤 존재일까. 아무래도 이 집안사람들은 유전적으로 단어 선정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의진의 고모가 윙크를 덧붙이지 않았다면 그렇게 단정 지을 뻔했다.

“물론 그게 다가 아니지만요.”

“…사람이 여기서 더 효율적일 수가 있나요.”

“음? 지니한테 못 들었나요?”

“제가 지닌 효율성이라면 충분히 들었습니다.”

“그렇게만 말하던가요?”

“그럼요?”

서운이 되묻자 의진의 고모가 단번에 난처한 얼굴을 했다.

“…지니도 참. 그런 중요한 얘기를 빼놓다니….”

못 말린다는 듯 애정 어린 한숨이 뒤따랐다. 당장이라도 무슨 말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의진의 고모가 더 빨랐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대신 얘기해 주고 싶지만 지니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니까요. 남들보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스스로 해내리라고 믿어요.”

“저는 처음 해 보는 일에는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립니다.”

확실히 가족은 가족인 모양이다. 의진의 고모는 의진과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의진에게 들었을 땐 마냥 이상하게 느껴지던 저 말이 지금은 왜 이렇게 따뜻하게 들리는지. 의진의 고모가 마저 뒷말을 이어 나갔다.

“지니는 뭐든 다 늦었어요. 말도 늦게 뗐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법도 너무 늦게 배웠어요. 보다시피 지니가 우리랑 나이 차이가 좀 많이 나잖아요? 부끄럽지만 다들 한창 바쁠 때라 지니한테 신경을 많이 못 썼어요. 그땐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어딘가 원망스러운 어조였다.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겠어요.” 의진의 고모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아아, 서운은 어쩐지 위로가 하고 싶어졌다. 죄는 의진이 지었지 의진의 고모와는 무관하니까. 그렇게 서운은 나서서 의진을 칭찬하기에 이른다.

“의진 씨 대단하네요. 남들보다 느렸다는 건 남들보다 더 노력했다는 증거잖아요.”

따지고 보면 마음에 없는 말은 아니긴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의진에게 조금 다른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머나… 유 아 쏘 스윗….”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있어도 너무 있었다. “음, 그래. 지니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놓치면 우리가 손해니까….” 저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던 의진의 고모가 갑자기 목소리 톤을 달리하며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지니가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제 의사를 표현한 적이 딱 두 번 있어요. 그게 뭔지 우니도 알고 있나요?”

그런 걸 제가 알 리가요. 서운은 진실을 말하는 대신 어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나는 유학이에요. 지니가 열다섯에 유학을 갔거든요. 처음에는 이제야 하고 싶은 일이 생겨서 그런 줄 알고 모두가 기뻐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는 생각에 자진해서 후계자 코스에 뛰어든 거였지 뭐예요. 오명은 얻긴 했지만 그렇게 큰 손해도 아니었는데….”

오명이라면 역시 그 얘기겠지. 재벌가 최초로 회장직에서 쫓겨난 그분, 계열사 하나를 통으로 말아먹은 XX그룹의 몰락.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서운에게도 낯설지만은 않은 주제다. 한때는 텔레비전만 켜면 안의선 회장의 이야기만 나오던 시절도 있었다.

“잘못이 있다면 우리에게 있죠. 바쁘다며 집에 잘 오지도 않던 가족들이 하루아침에 저만 따라다니고 뉴스에서는 연신 몰락이니 뭐니 떠들어 대고 있으니 지니가 혼란스러울 밖에요.”

아…. 서운이 조용히 탄식했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의진만큼은 예외일 줄 알았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난 이 사람을 정말 모르는구나. 의진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지 혼란스러워하던 서운의 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서운은 의진을 모른다. 비단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그렇다.

그건 의진도 마찬가지일 테다. 서운이 의진을 모르듯 의진도 서운을 잘 모른다. 두 사람은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보지도 않았고,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나 혼자 너무 떠들었네요. 놀라진 않았나요?”

“…조금이요.”

이래서 의진의 고모도 ‘조금’이라고 대답한 걸까. 많은 의미가 내포된 서운의 대답에 의진의 고모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말을 아끼는 서운의 모습이 특히나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럼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죠?”

“아, 네.”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의진의 고모가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서운은 내심 긴장하며 고모의 뒷말을 기다렸다.

“우니도 알겠지만 우리 지니는 대상을 막론하고 호불호랄 게 없어요. 마음 아프게도 후유증 탓인지 모든 감각에 둔하죠. 그런 아이에게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우리의 기쁨이자 모두의 바람이에요. 그런 우리가 반대를 하다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후유증이라니? 뜻 모를 소리에 대화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애초에 모든 걸 다 얘기할 생각은 없었는지 당황해하는 서운을 알면서도 의진의 고모는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갔다. 고모와의 대화가 절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평생 가르쳐 주지 못한 걸 첫눈에… 아, 미안해요. 잠시 실례할게요.”

정확히는 가다 말았다. 멋대로 잡을 때는 언제고 의진의 고모가 말을 하다 말고 대뜸 잡은 손을 놓았다. 손목에 찬 XX전자의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그대로 품 안의 태블릿 피시와 휴대폰을 번갈아 꺼내 드는 모습이 어째 익숙하다.

빠르게 태블릿 피시를 훑어본 의진의 고모가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서운과는 여전히 바깥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채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대화가 중간에 끊어졌다는 사실조차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나예요. 확인했으니 바로 보고 들어가세요. 응, 지금 당장.”

뮤지컬 배우를 떠올리게 하는 커다란 리액션과 다정다감한 말투에 가려져서 몰랐다. 두 사람은 닮았다. 의진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서 외모를 제외하면 닮은 점이 없다고 생각했던 의진의 가족이, 의진의 고모가 지금은 누구보다 의진과 비슷하다. 웃지 않으면 한없이 차가워 보이는 얼굴은 당연하고, 언제 어디서나 빠르게 업무에 집중하는 모습마저 의진을 닮았다.

가족이라는 게 그렇다. 필연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좋은 의미로도 그렇고 나쁜 의미로도 그렇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없듯 결국 의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돈이 많든 적든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지금까지는 막연히 서로 닮지 않은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의진이 가족들을 닮지 않은 게 아니라 지금의 모습을 닮지 않은 것뿐이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니까, 그런 건 막내인 영민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고모와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회사 일로 자리를 뜨는 의진의 고모를 바라보며 서운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과연 과거에는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의진을 생각하면 대충 상상이 간다.

서운은 고모와의 대화를 곱씹으며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처음 보는 광경이 서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이 뭐 해?”

의진과 민영이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있다. 심지어 집중하고 있는 것 같다. 오셨습니까, 서운의 등장에 의진이 반색을 표했지만 서운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휴대폰 액정 위로 보이는 파랑새 한 마리, 의진의 휴대폰에 트위터 어플리케이션이 설치되고 있었다. 출처는 보나 마나 뻔했다.

“여민영 너 또 뭘 하려고…!”

“뭐! 왜! 내가 그런 거 아니거든? 형부가 먼저 가르쳐 달라고 했단 말이야!”

“맞습니다. 제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의진이 민영의 편을 들고 나섰다. “이것 봐! 내 말 맞잖아!” 의진을 등에 업은 민영이 한껏 의기양양해졌다. 그래 봤자 도긴개긴이다. 서운이 미심쩍게 물었다.

“트위터는 왜?”

“형부 아직도 등급 복구 못 했다며. 트위터는 그런 거 필요 없다고 알려 준 것뿐이다 뭐. 형부도 이제 트위터로 넘어오면 다신 커뮤 못 할걸요? 등업도 필요 없고 공지도 없어요.”

“그렇습니까. 제가 직접 운영해 보는 건 처음이라 긴장되는군요.”

잘들 논다. 서운이 자리를 비운 동안 뭘 하고 있을까 했더니 이러고들 있었나 보다.

“넌 뭘 또 납득하고 있어요? 여민영,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

“내가 뭐!”

“전 애가 아닙니다.”

“맞아! 형부가 왜 애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차. 저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차라리 애면 낫지. 그 말은 속으로만 했다. 꼴에 이 대 일이라고 의기양양해진 두 놈을 보고 있으려니 유치하게도 승부욕이 생긴다. 아씨, 이기고 싶어. 승부욕에 눈이 먼 서운이 한국 사회에 최적화된 필살기를 꺼냈다.

“나보다 어리면 다 애다, 왜.”

“와, 진심?”

“…….”

“나이 부심 실화?”

“어머, 셋이 아주 사이가 좋네?”

세 사람의 유치한 다툼을 오해한 외숙모가 막걸리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서운이 왔으니까 다들 일어나자. 여민영 너도 형부 그만 귀찮게 하고 얼른 일어나.”

“내가 언제! 형부가 먼저 알려 달라고 했다니까?”

서운에게는 덤앤더머로 보이는 두 사람이 외숙모의 눈에는 민영의 일방적인 치댐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외숙모가 들은 척도 안 하고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번에도 의진이 민영을 감싸고 나섰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너희는 바로 집으로 갈 거지?”

“외숙모… 저희 그렇게 바로 안 가도 돼요.”

무슨 상상을 한 건지 대답하는 서운의 얼굴이 붉었다. 의진은 어느새 얌전히 입을 다물고 외숙모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민영과의 동맹은 이미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어머, 얘는. 부부가 붙어 있어야 부부지. 벌써부터 떨어져 있어 버릇하면 안 좋아. 여민영, 빨리 안 일어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민영 씨, 어서 일어나십시오.”

“…헐. 이거 뭐야? 나 지금 먹버 당한 거?”

“…민영아, 말 좀….”

“형아, 지당이 뭐야?”

민영과 의진의 얄팍한 우정도 그렇게 쫑이 났다. 의진이 앞장서서 식당 문을 나섰다. “아이고, 애달아 죽네, 죽어.” 빠르게 멀어져 가는 커다란 뒷모습을 바라보며 외숙모가 놀리듯이 웃었다. 서운은 마냥 기뻐하지도, 싫어하지도 못한 채 말없이 웃고 있었다. 억지로 굳혀 놓은 마음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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