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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열두 번째 만남 (2)
“어?”
“왜 그러십니까?”
드디어 둘만 남았다. 서운의 가족들이 떠나고 비교적 한산해진 주차장, 이제 좀 얘기를 해 볼까 하는데 의진의 차가 보이지 않는다.
“차 가져온 거 아니었어요?”
국내에서 의진의 차를 타 본 건 몇 번 안 되지만 브랜드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는 터라 서운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져왔습니다.”
삐빅, 가까이에서 경쾌한 알람음이 울려 퍼진다. 돌아보니 의진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차 키를 들고 서 있다. 뭐 어쩌라는 거지. 차 가져왔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건가. 의도는 모르겠지만 재수 없다.
“…혹시 차 바꿨어요?”
“네, 그렇습니다.”
정정한다. 자랑할 만하다. 의진이 차를 바꿨다. 기존의 것과 달리 차 문이 위로 열리는 형태다. 신혼여행에서도 비슷한 차종을 타고 다녔지만 역시 봐도 봐도 신기하다. 서운이 가만히 보고만 있자 의진이 알아서 문을 열어 준다. 오, 서운의 고개가 위를 향하자 의진이 다시금 문을 닫는다. 그러더니 한 번 더 열어 준다.
이러니까 꼭 하와이에 온 것 같다. 피부에 감겨드는 후덥지근한 공기도, 옷자락을 스치는 따뜻한 바람도 전혀 불어오지 않지만 보란 듯이 차 문을 열어 주는 의진은 그때와 다름이 없다. 하와이에서는 어딜 가나 그림 같은 풍경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면, 누룽지 백숙집 주차장에 서 있는 의진의 모습은 지나치게 일상적이다. 코끝을 맴도는 고소한 누룽지 냄새는 덤이다.
진짜 왔구나. 의진이 왔다. 서운은 오감으로 의진의 귀국을 실감했다. 의진이야 일정이 앞당겨진 김에 겸사겸사 들른 걸 테지만 이렇게 익숙한 장소에서 의진을 만나게 되니 어쨌거나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기뻐하던 외숙모와 외삼촌을 생각하면 내심 고맙기도 하다.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은 여전하나 처음처럼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다. 불편하지도 않다. 오히려 안심이 된다. 이게 무슨 기분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마음이 그렇다. 이래서 외숙모가 그런 말을 한 걸까. 붙어 있어야 부부라고,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은 외숙모의 한 마디가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이럴 때도 적용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혼자서 고민하고 불안해할 바에야 어떤 식으로든 함께 부딪쳐 보는 편이 나으니까. 서운도 이게 무슨 기분인지 몰랐다.
확실한 건 나쁜 기분은 아니라는 거다. 서운이 먼저 조수석에 올랐다. 오늘 막 뽑은 건지 새 차 냄새가 진동을 한다. 비어 있는 운전석에는 꽃잎이 떨어져 있었다. 의진이 외숙모에게 준 것과 같은 연한 하늘빛이다.
서운이 꽃잎을 집어 들었다. 생기를 머금은 꽃잎은 보드랍고 촉촉했다. 근방에 꽃집이 있었던가. 이 꽃은 어디에서 온 걸까. 서운이 가만히 꽃잎을 만지작거리는데 어느새 착석을 마친 의진이 안전벨트를 매며 묻는다.
“안전벨트는 매셨습니까.”
당연하게도 서운의 안전벨트는 아니었다. 이번에도 지 것만 맸다. 데자뷔인가,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묘한 기시감에 의진의 롱코트 위로 덧대진 안전벨트를 쳐다보고만 있자 또다시 눈을 질끈 감으며 그런다.
“그렇게 보셔도 소용없습니다. 안전벨트 착용은 의무입니다.”
“…그렇겠지.”
“안전벨트 미착용 시 교통사고 사망률이 12배나 높습니다. 꼭 매셔야 합니다.”
“오, 생각보다 높네요?”
“높은 정도가 아닙니다. 통계에서 12배라는 건 실제로는 훨씬….”
또 시작이다. 서운은 이번에도 알아서 안전벨트를 맸다. 언젠가 의진이 대신 안전벨트를 매 주는 날이 올까. 의진이 에스코트에 능숙해지면 그건 그거대로 어색할 것 같다.
“좋습니다.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어쩌면 조금은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비장하게 시동을 거는 의진을 바라보며 서운은 감히 먼 미래를 상상했다. 역시, 당장은 어떤 것도 그려지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두 사람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의진 씨.”
“네, 서운 씨.”
“…어….”
“말씀하십시오.”
“…음….”
“…서운 씨?”
“어, 그러니까….”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무턱대고 고모님한테 들었다며 지난 이야기를 캐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궁금한 건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다. 알고 싶은 것도, 알아야 하는 것도 너무 많다. 서운이 효율적이라 결혼했다는 의진의 말이 진심이었는지, 그렇다면 대체 그런 이야기는 왜 한 건지 다시 한 번 제대로 이야기해 보고 싶다.
“…일찍 왔네요?”
그래서일까. 순서를 못 정하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알아 가면 좋을지 하나도 모르겠다. 서운은 적당히 무난한 질문을 골랐다.
“네, 그렇습니다.”
운전 중인 의진이 정면을 향해 대답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서프라이즈는 아닙니다.”
“일이 빨리 끝났나 봐요?”
“비슷합니다. 남은 일정을 최대한 서둘러 진행했으니까요. 도로가 막히지 않았다면 제시간에 도착했을 텐데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괜찮다니까. 마침 그 시간에 돌아오는 비행기가 있었던 게 어디예요.”
“아니요. 돌아오는 비행 편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어? 왜요?”
“전용기를 타고 왔으니까요.”
…지금 뭔가 엄청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정작 논란의 주인공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앞만 보고 있다. 아무리 운전 중이라지만 한 번쯤은 서운을 돌아볼 법도 한데 의진은 그저 요지부동이다.
“전용기가 혹시… 비행기 말하는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오… 와….”
“전용기가 있긴 하나 자주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은 데다 논란의 대상이 되기 쉬우니까요.”
여상한 말투가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눈치여서 서운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그래, 그렇구나…. 진심으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급한 일이었나 봐요.” 고작 그렇게 대꾸하는 게 다였다.
“급한 일이라….”
톡톡, 의진의 손가락이 가볍게 핸들을 두드렸다.
“그렇군요. 딱히 의식하진 못했는데 이번에도 지난번 못지않게 급하게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한 달 새에 전용기를 세 번이나 띄우다니 이례적인 일이군요.”
“지난번이요?”
“벌써 기억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제가 주무시던 서운 씨를 깨운 날 말입니다.”
아, 그때! 당연히 기억난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제 이혼하는 거냐며 헛소리를 해 댔지. 그날을 명을 다한 거실 러그는 결국 창고행을 면치 못했다. 그러자 문득 의아해지는 거다. 서운이 물었다.
“왜?”
“한시가 급할 때는 전용기만큼 효율적인 이동 수단도 없으니… 죄송합니다.”
의진이 말을 하다 말고 급하게 사과를 해 왔다. 어? 왜? 갑작스러운 사과에 덩달아 당황해하던 서운이 뒤늦게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앞으로 나랑 얘기할 때는 효율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그래, 그랬었지. 그때 일을 생각하면 여전히 치가 떨리지만 마냥 그때와 똑같지만은 않다.
“죄송,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알겠으면 내 말 잘 들어요. 다시 물어볼 거야.”
“네, 잘 듣고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서운 씨.”
빵빵! 의진의 비장한 목소리 너머로 클랙슨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과는 관계없는 그 소리가 지금은 왜 이렇게 익숙하게 들리는지. 서운의 심장도 아까부터 정신없이 클랙슨을 울려 대고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어요?”
이 관계가 나 혼자만의 확신이 아니라는 무언의 기대감이 서운을 부추겼다. 확실히 평소의 서운답지 않았다. 어렵게 꺼낸 질문에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이혼당하지 않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망설임 없는 대답 그 어디에도 거짓은 느껴지지 않는다. 덕분에 서운은 줄곧 궁금했던 사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왜요? 나 같은 사람 찾기 힘들까 봐? 출장 가기 전에 거처도 정해야 하고 집도 비워야 하는데 자녀 계획도 없고 혼자서도 잘 있는 내가 딱이라서?”
들은 말이 있어서 가는 말이 곱지 않다. 서운 딴에는 회심의 일격이었으나 의진이 전혀 타격감 없는 얼굴로 그런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본래 약속한 상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처럼 가치관이 비슷하고 아주 놀라운 확률로 라이프 스타일도 일치하는 데다 시기적으로 상황마저 잘 맞아떨어진 건 모두 사실이나 이혼하고 싶지 않은 이유에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뭐지. 따지고 보면 결국 같은 말인데 미묘하게 어감이 다르다. 오히려 의진의 쪽이 더 로맨틱하게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뭔데 이거? 당황한 서운이 지지 않고 반박을 제기했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효율적이라서 결혼했다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효율적이지요. 서운 씨와의 결혼이 가장 효율적이었던 건 맞으나 효율적이어서 결혼을 결정한 건 아닙니다.”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이쯤 되니 슬슬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 일어난다. 효율이 무슨 뜻이더라. 내가 효율을 잘못 알고 있었나? 서운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무엇보다 효율적이라는 건 서운 씨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 요인을 아우르는 하나의 표현이지 요인 그 자체는 아닙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서운 씨께 강한 확신을 느꼈으니까요. 무엇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듯 의진이 어딘가 경멸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효율적이어서 결혼을 한다니…. 그건 좀, 너무 비인간적이군요.”
그러더니 슬쩍 서운을 쳐다본다. 운전 중이라 차마 고개를 돌리지는 못보고 룸미러로 힐끗 쳐다보는데, 어쩐지 시선 끝에 원망의 눈빛이 섞여 있다.
“…하지만 서운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요. 전 무조건 서운 씨 뜻에 따를 겁니다.”
뭐 이 새끼야? 졸지에 서운은 효율을 앞세워 결혼을 결심하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었다. 왜 내가 할 말을 저 새끼가 하지? 이거 뭐지, 이거 뭐야? 서운은 억울했다. 억울하고 억울한데 존나 억울해서 이 억울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지, 표현이고 요인이고 결국 그렇게 생각했다는 건 맞잖아? 서운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침착하게 자신의 분노를 재정립해 나갔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그럼 왜 비인간적이라고 한 거지? 그 정도 상식은 있나 본데? 혹시 셀프 디스인가? 저 새끼 대체 뭐 하는 새끼야? 어떻게 생각해도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엄마, 쟤 이상해. 서운은 의진을 처음 본 그날처럼 있지도 않은 엄마를 찾아 헤맸다.
“잠깐!”
“네,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떠올랐다. 아직 의진에게 듣지 못한 말이 있다는 사실이, 서운이 잊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혼하기 싫은 이유는 뭔데요?”
“그건….”
의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문이 막힌 채 묵묵히 운전만 한다. 청산유수처럼 논리정연하게 제 할 말을 쏟아 내던 지금까지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서운은 이 상황이 조금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을 수 없이 찝찝해졌다. 왜 갑자기 말을 못 하는데?
서운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의진이 한참 만에 대답을 내놓았다. 대답 하나는 잘하던 의진이었기에 서운에게도 이 상황이 다소 어색했다.
“…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저거다. 흡사 초등학생 같은 답변이었다. 서운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 듯 의진도 지가 말해 놓고서 어딘가 탐탁지 않은 표정이다.
그래, 그래. 네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 듣는 나는 어땠겠니. 서운이 진심을 담아 비소를 흘리자 의진이 서운을 쳐다본다. 운전 중이라 이번에도 서운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룸미러로 서운을 훔쳐본다. 의진이 웃고 있는(정확히는 비웃고 있는) 서운에게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저는 서운 씨가 저와의 결혼 생활에 만족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제게 이혼하자고 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의진 씨가 하자고 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의진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벌써 잊으셨습니까? 처음부터 확인이 필요한 건 서운 씨였지 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랬나? 잘 모르겠다. 그런 말을 한 것 같기도 한데 그렇다 한들 믿을 수 없는 건 여전하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까지 고작 네 번의 만남이 오고 갔다. 그보다 몇 배의 시간을 함께한 지금도 믿지 못할 소리를 의진은 처음부터 그랬다며 단언을 한다. 감히 자신을 했다.
“물론 저는 서운 씨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사람입니다.”
…네가요? 서운이 반박할 틈도 없었다. 의진이 곧바로 제 의견을 몰아붙였다.
“그러니 서운 씨, 저한테 원하시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불만이나 불평도 좋습니다. 지적도 상관없습니다. 뭐든 좋으니 제게 말씀만 해 주십시오. 명령하셔도 좋습니다. 단, 이혼은 안 됩니다.”
“…….”
“확인해 보니 아닌 것 같다는 무책임한 발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충분히 고민하실 시간을 드렸습니다. 결정을 내린 건 서운 씨 본인이니 책임 또한 서운 씨의 몫입니다. 본인의 선택은 서운 씨가 책임지십시오.”
다소 일방적인 대화였다. 업무 중이라 해도 믿을 법한 냉철한 목소리가 강압적인 형태로 배려의 뜻을 전해 온다.
“자. 그럼 말씀해 보십시오, 서운 씨. 이혼만 빼면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의진이 서운에게 애정을 고한다. 속사정이야 어쨌든 누군가에게 고개 숙여 본 적 없는 지난날의 흔적을 고스란히 매단 채로 감히 사람의 마음을 강요하려 든다. 나 사실 잘못 걸린 거 아닐까. 서운은 처음으로 의진과의 결혼의 무게를 실감했다. 이혼하면 되지, 그런 막연한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얘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긴 아는 걸까. 의진이 말을 마친 후에도 서운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어디에도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고백이다. 동시에 협박이기도 하다. 말이 좋아서 존대지 질 좋은 협박과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질이 좋아서 더 무섭다.
살면서 고백과 협박을 동시에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물론 서운은 이런 남편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효율이 좋아서 결혼을 한 건 사실이지만 이혼은 하기 싫으니까 안 된다니, 결국 위의 개소리를 종합해 보면 시작이 어떻든 간에 내가 좋으니까 이혼만은 싫다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린다.
“우리 지니가 표현이 조금 부족하죠?”
갑자기 불과 몇 분 전에 나눴던 고모와의 대화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건만 지금 다시 저 질문을 받는다면 방금 전과 전혀 다른 대답이 나올 것 같다.
부족하긴요. 존나 차고 넘치는데요. 지금까지 고백을 안 받아 본 것도 아닌데 이렇게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고백은 처음 받아 봤다. 물론 협박도 처음이다. 서운은 배알도 없이 가슴 설레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덜컥 겁이 났다.
이래서 결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한 걸까. 집에서 혼자 밥을 먹다 말고 숟가락을 쥔 채 흔쾌히 결혼을 결정하던 지난날의 제 모습이 떠오른다. 서운이 가장 최근에 지나온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크게는 대학 원서를 넣을 때부터, 작게는 어떤 반찬을 먼저 집을지를 고민할 때부터 서운이 무수하게 마주해 온 선택의 순간은 늘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두고두고 후회되는 최악의 선택도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감히 자신을 한다고, 확신을 한다고. 서운은 고지식할 정도로 앞만 보며 운전 중인 제 남편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의 인생을 다 알지는 못 하지만 이 사람이라고 해서 서운과 크게 다를까 싶다.
여전히 갈 길은 멀고 앞으로 서운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의진도 마찬가지다. 의진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의진도 모를 테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알겠다. 가슴이 설레든 겁이 나서든 심장 박동을 빨라지게 하는 건 매한가지라는 거. 그리고-
“…의진 씨야말로 벌써 잊었어요?”
어쩌면 이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른다. 시작을 해야 끝도 볼 수 있는 거니까, 서운은 그 끝이 조금 궁금해졌다. 알고 싶어졌다. 결혼식 때도 떨지 않던 서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결혼하자고 한 거 후회 안 하게 해 준다니까.”
서운의 목소리를 제외하면 차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의진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의진은 미동도 없이 서운의 뒷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이혼은 너무 이르잖아요.”
이건 서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서운이 말을 마친 후에도 의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한참 만에 입을 연 의진이 격식 어린 감사 인사를 건네 왔다. 그게 뭐야, 어쩐지 긴장이 풀리는 느낌에 서운은 어느 때보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제 할 말을 쏟아 내던 남자와는 딴판인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어서 조금도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운은 빨리 집에 가고 싶어졌다.
* * *
서운의 바람대로 두 사람의 집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배신자!!!!!!!!]
민영에게 메시지가 왔다. 주어는 불분명하지만 그 대상이 의진이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음, 의진 씨?”
“네, 서운 씨.”
“민영이가 의진 씨한테 할 말이 있나 봐요.”
“트위터 말씀이십니까?”
아, 그래. 아직 이게 남아 있었지. 한순간에 찬물을 맞고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다. 분위기를 깨트리는 데 트위터만 한 것도 없어 보인다. 서운은 내친김에 지금 이 자리에서 트위터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트위터는 왜 하려는 건데요?”
“…아직 카페 등급이 복구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물지 않은 상처의 여운에 의진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카페 등급? 그럼 트위터가 맘카페 대신이에요?”
“맞습니다. 정확한 표현이십니다.”
“아니 뭘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결혼 생활에 대한 자문을 얻어야 하니까요.”
안 듣느니만 못한 대답에 서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속된 말로 얼탱이가 없다.
“결혼 생활? 우리 같이 딴따단 한 그거?”
“딴따단이 결혼을 의미하는 거라면 맞습니다. 역시 서운 씨는 표현력도 남다르시군요. 아주 재미있으십니다.”
왈왈, 의진이 짖는다. 그렇구나, 또 짖는구나. 서운은 자연스럽게 개소리를 건너뛰었다. 의진이 자신과의 결혼 생활에 자문을 필요로 한다니, 자문의 대상이 맘카페라는 점은 둘째 치고 네가 왜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묘하게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대체 네가 왜?! 아무렇지 않은 척, 서운이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런 이유라면 트위터는 안 해도 되겠는데요.”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결혼은 나랑 했는데 그걸 왜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요. 나한테 물어보면 되지.”
좋아, 예상대로다. 아무리 의진이라도 이 논리에서 빠져나오기는 힘들 테다. 서운은 의기양양하게 의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싫습니다.”
“어?”
“싫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서운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면 의진이 잘못 들었거나. 그래, 그거다. 의진이 서운의 말을 잘못 들은 거다. 그게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된다. 아에이오우, 라디오는커녕 음악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차 안에서 서운은 입을 풀었다. 한결 또박또박해진 발음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으나 이변은 없었다.
“아니요. 그건 싫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서운 씨여도 안 됩니다.”
여기서 서운은 조금, 아주 조금 충격을 받았다. 성인이 된 후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거절당하는 건 무척 오랜만이다. 무엇보다 가장 환장하겠는 건 제가 왜 거절을 당했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이혼은 당하기 싫은데 함께 상의하기는 싫다니, 뭐 이런 개소리가 다 있어? 그럼에도 의진은 한결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멀어지고,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하면 어느 틈엔가 바로 앞에 와 있다. 이제야 뭔가 좀 진전되나 싶었더니 도대체가 남편 놈의 속을 모르겠다. 서운은 의진에게 운전 중인 걸 다행으로 알라는 협박을 끝으로 굳게 입을 닫았다. 이유도 안 알려 주고 저러니까 제대로 빈정이 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빡치는 건 빡치는 거고 막상 집에 오자 당장 오늘 밤부터 시작되는 금식이 더 걱정이다. 의진이 시동을 끄자 서운은 옆에서 세상 심란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이따 배고플 것 같은데…. 쪽, 의진이 대뜸 입을 맞춰 오기 전까지 서운은 다소 현실적인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황당했다.
“…지금 뭐 해요?”
“입 맞춥니다.”
“갑자기?”
“경우에 따라서는 갑작스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이게 또 왜 이러지.”
고장이라도 난 건가. 서운이 걱정스레 의진을 살폈다. 음, 다시 봐도 잘생겼다. 서운이 시선을 맞춰 오자 의진이 또다시 입을 맞춰 온다. 쪼옥,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입술이 맞붙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눈은 감지 않은 채였다. 방금 전까지, 아니, 지금도 썩 기분이 좋은 건 아닌데 저런 눈으로 쳐다보니까 없던 정분도 나게 생겼다.
쟤는 왜 사람을 저런 눈으로 쳐다보고 그러냐. 서운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의진이 곧장 반응해 온다. 쓸데없이 성능은 좋다. 사양이 좀 시원찮아서 그렇지.
“눈에 뭐가 들어가셨습니까?”
“전혀요.”
“머리가… 더 자라셨습니다.”
“그런가.”
“네. 앞머리도 길어졌습니다.”
“그래요.”
“서운 씨는 위의 털만 잘 자라나 봅니다. 아래는 체모가 옅은….”
“…조용히 안 해요?”
혹여나 누가 들을세라 입부터 틀어막자 의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뭐, 왜. 부러 눈에 힘을 주고 똑바로 노려보자 의진이 순순히 시선을 맞춰 온다. 의진의 입을 틀어막은 손바닥 아래에서 숨결이 만져진다. 입술이 느껴진다. 숨결은 따뜻하고 입술은 보드라워서 운전석에 떨어져 있던 꽃잎을 떠올리게 했다.
서운 씨, 의진이 손바닥 아래에서 서운을 불렀다. 소리가 새어 나오다 말고 손바닥에 부딪쳐 웅얼웅얼 부서져 버린다. 왜요, 서운이 간지러움을 참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언제까지 조용히 해야 합니까?”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요.”
“알겠습니다.”
“…….”
“…….”
“서운 씨.”
“또 왜요.”
“그럼 조용히 입만 맞추는 건 어떻습니까?”
“…….”
“안 됩니까?”
“어. 안 돼요.”
“알겠습니다.”
“…….”
“…….”
“…그게 끝이야?”
“안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막상 또 순순히 포기하니까 그건 그거대로 마음에 안 든다. 잠시 고민하던 서운이 절충안을 제시했다.
“방금 건 진심이 안 느껴졌어요. 다시.”
“서운 씨, 입을 맞춰도 되겠습니까?”
“다시.”
“서운 씨, 입 맞추고 싶습니다.”
“다시.”
“허락해 주십시오.”
“…다시.”
“서운 씨.”
젖은 손바닥 위로 젖은 입술이 닿는다. 의진이 부드럽게 입술을 비비며 서운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느리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살갗이 빨려 들어가다가 그대로 빠져나오기를 반복한다. 서운이 거부하지 않자 의진이 조심스럽게 서운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당연히 서운의 손부터 뗄 줄 알았는데 의진은 무척 의외의 행동을 했다.
의진은 제 입을 틀어막은 서운의 손을 단단히 고정시키고는 본격적으로 서운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힐끔, 힐끔, 틈틈이 서운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서운이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조용한 차 안에 울려 퍼지는 서운의 웃음소리에 의진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서운에게로 향한다.
의식적으로 잡힌 손에 힘을 주자 의진이 재빨리 힘을 풀었다. 괜히 손목을 한 바퀴 돌리고는 다시 의진을 쳐다보자 처음 자세 그대로 기다려 중인 의진이 보인다. 분명히 기분이 별로였던 것 같은데, 왜였지. 왜 그랬더라. 서운이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였다. 차고지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부시다. 의진이 아니면 들어올 일 없는 낯선 공간이 주는 이질감에 괜히 가슴이 떨린다. 환한 대낮, 낯선 공간, 그리고…. 서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고민하는 듯 망설이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서운은 눈을 뜨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차 안에서의 시간은 유독 느리게 흘러갔다. 서운이 다시 눈을 뜨려던 그때, 비로소 입술이 찾아들었다. 입술 바로 앞까지 와 놓고는 마지막까지 망설이는 게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쪽, 마침내 입술이 맞물렸다. 서운이 가만히 있자 의진이 곧바로 두 번째 입맞춤을 시도했다. 쪼옥, 입술과 입술이 완전히 맞물리자 낯간지러운 소리가 난다. 아, 이거 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할 새도 없이 입맞춤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처음의 망설임은 어디 갔는지 정확히 입술을 향해 떨어지는 입맞춤 세례 속에서 서운이 감은 눈을 떴다. 생각났다. 내가 왜 기분이 별로였는지.
덕분에 눈을 뜨고 있던 의진과 제대로 시선이 마주쳤다. 의진의 시선이 천천히 서운을 훑는다. 방금 전까지 닿아 있던 입술에서 입술이 닿을 때마다 가볍게 스치던 코끝으로, 살짝 상기되어 있는 발그레한 뺨으로, 어쩐지 똑바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두 눈으로.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서운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 결과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목소리가 나왔다.
“…그만, 여기까지.”
서운이 의식적으로 창가에 바짝 등을 기댔다. 의진은 가운데 위치한 콘솔박스 때문에 더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애매한 거리에서 서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창가에 기대앉은 등 뒤로 한기가 느껴진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한기 때문인지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이다음은… 맘카페에 물어봐요. 못 미더운 남편한테 물어보지 말고.”
“못 미덥다니 그게 무슨 말씀….”
제 할 말을 마친 서운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빠른 속도로 서운을 따라 내린 의진이 졸졸 서운을 쫓아오며 그런다.
“대화에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군요. 저는 서운 씨가 못 미덥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지니랑 대화를 하다니! 지니랑 대화가 되다니! 신이 나서 외쳐 대던 의진의 고모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서운은 별다른 대꾸 없이 정원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서운 씨, 제 말 들리십니까? 서운 씨?” 의진이 고장 난 로봇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서운을 따라왔다. 시끄러웠다.
“맹세합니다.”
현관 앞에 다다랐을 무렵 의진이 서운의 무반응을 이기지 못하고 돌연 선서를 했다. 오, 서운이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럼 나랑 왜 상의하기 싫은 건데요?”
“믿음에 부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서운 씨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믿어 주시는 만큼, 아니 그보다 더 기대에 부응하고 싶습니다. 요즘은 자기주도학습이 대세니까요.”
언젠가 서운이 했던 개소리가 고스란히 돌아와 서운을 반겨 주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저가 한 개소리는 기억이 나는데 믿음이니 기대니 도통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믿음 비슷한 얘기를 한 것 같기도 한데 이렇게 비장한 의미는 아니었다. 맹세한다.
“무엇보다….”
선서를 선언한 이후 줄곧 비장하던 의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였다.
“…하나도 안 멋있습니다.”
“뭐가요?”
“서운 씨와의 일을 일일이 서운 씨께 상의하는 건 하나도 멋지지 않습니다.”
“…뭐?”
“…서운 씨처럼 늘 멋있는 사람은 절대 모를 겁니다.”
어? 뭐라고? 지금 무슨…. 쏟아진 인풋에 서운이 당황하는 사이 의진은 빠르게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의진이 세상 누구보다 의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안 하게 생겼니 지금….”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학습과 자기 계발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으니까요.”
“뭐라는 걸까….”
“모르는 건 배워야 합니다. 능숙해질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제게는 저희 회원들이 그렇습니다. 좋은 선례이자 훌륭한 스승이지요. 저희 회원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성공적인 결혼 생활은 이어 오지 못했을 겁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난처한 순간은 희대의 또라이를 만났을 때가 아니다.
“최근 카페 활동이 불가능해 조금 실수가 있었지만 대체재도 찾았으니 빠른 시일 안에 기존의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되돌려 놓겠습니다.”
애는 착한데…로 시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다. 어떡하지. 나 어떡하냐, 진짜. 서운은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한 채 말없이 의진을 내려다보았다. 서운이 더 이상 반박해 오지 않자 자신의 어필이 먹힌다고 생각한 건지 의진이 눈까지 부릅뜨며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얼굴로 그런다.
“정말입니다. 맹세합니다. 저도 걸겠습니다.”
그 모습이 쓸데없이 멋있어서 서운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멋있다고, 저게… 멋있다고. 껍데기는 멋있을지 몰라도 알맹이는 턱없이 모자라다. 우리 애가 이렇게 멀쩡한데 이렇게 모자라요! 서운도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몰랐다. 확실한 건 멀쩡한데 모자란 의진만큼이나 서운도 제정신은 아니라는 점이다. 두 사람은 괜히 부부가 아니다.
와, 큰일 났네. 나 어떡하냐. 이 와중에도 남 걱정은 안 된다. 나, 오로지 나. 내가 제일 걱정이다. 어떡하지. 이제는 하다 하다 이런 것까지 귀여워 보인다. 전에도 종종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작정하고 귀여워 보이기 시작한다. 개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 취향일 줄이야, 서운도 몰랐던 사실이다.
어쩌다 저런 걸 호적에 들여서는…. 서운은 심란하게 의진을 내려다보다가 내친김에 집에도 들이기로 했다. 호적에도 들였는데 집에 못 들일 게 있나 싶다.
“일단 들어가죠.”
서운이 현관문을 열었다.
“편한 곳에 앉아요.”
“네, 알겠습니다.”
“화장실은 1층이랑 2층에….”
자연스럽게 집 안내를 해 주려다가 멈칫했다. 아, 여기 얘네 집이지. 또 깜박할 뻔했다. 그러게 작작 집을 비웠어야지.
별다른 죄책감 없이 마저 신을 벗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진다. 쪽, 그러더니 입술에 뭔가 닿았다. 의진이 갑자기 입을 맞춰 왔다. 또, 그랬다. 이번에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 말고 그랬다. 이건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서운이 노골적으로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아까부터 왜 이러지?”
“무엇이 말입니까?”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서운의 얼굴로 입술을 내리려 든다. 러트 사이클인가? 의문이 들다가도 잠깐뿐이다. 정말 러트 사이클이라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다. 서운의 의심스러운 눈빛에 의진의 입술이 방향을 잃고 서운의 입꼬리에 불시착했다. 의진이 서운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싫으십니까?”
“음, 아니. 싫은 건 아니고.”
“그럼 마저 해도 됩니까?”
“왜 하고 싶은지 들어 보고.”
“…먼저 신호 보내셨잖습니까.”
“내가요?”
“네.”
“내가? 언제?”
이번에는 의진이 미심쩍은 얼굴로 서운을 쳐다보았다. 덥석, 커다란 손이 불시에 서운의 허벅다리를 움켜쥐었다. 억! 뭔데?! 서운은 놀랐고, 의진은 억울했다. 의진이 원통해하며 말했다.
“이렇게 하셨잖습니까!”
“내가 언…! 아.”
“기억나셨습니까.”
“그, 렇긴 한데 그게 어떻게 신호야!”
이래서 촌놈한테는 웃어 주지 말라고 했던가. 서운은 서운대로 황당했다. 후, 본격적인 논쟁에 앞서 의진이 길게 심호흡을 했다. 서운은 니트 소매를 걷어 올렸다. 두 사람의 첫 부부 싸움이었다.
“허벅지를 만지셨습니다.”
“거 참, 말 똑바로 합시다. 그게 무슨 만진 거예요! 건드린 거지.”
“만지다와 건드리다의 기준부터 잡고 가시죠.”
“콜. 말로는 설명이 어려우니까 촉감으로 갑시다.”
“좋은 생각입니다. 역시 현명하십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거실 소파에 앉았다. 양옆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앉고는 자연스레 상대방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이게 만진 거.”
“…….”
“지금이 건드린 거. 어때요?”
“큰 차이를 모르겠군요. 제가 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가 만진 거, 두 번째가 건드린 겁니다.”
“코… 아! 아프잖아!”
“죄, 죄송합니다. 많이 아프셨습니까?”
의진은 종종 힘 조절에 실패할 때가 있는데 하필이면 지금이 그랬다.
“다시 해 봐요.”
서운이 의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악력이 느껴진다 싶으면 알아서 제지할 생각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서운의 감독하에 의진이 다시 서운의 허벅지를 만졌다.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개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서운의 허벅지 안쪽을 파고든다.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끈한 열감이 천 아래로 고스란히 퍼져 나갔다.
“아프십니까?”
서운의 허벅지가 떨리자 의진이 의식적으로 손에서 힘을 뺐다. “아, 아니. 안 아픈, 데….” 지레 놀란 서운이 버벅거리며 대답하자 의진이 다시 힘을 주며 서운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 들어갔다.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이 반대 방향으로 벌어지자 커다란 손이 한껏 불어나며 제 크기를 자랑한다. 가뜩이나 큰 손을 작정하고 잡아 벌리자 서운의 허벅지 전체가 뒤덮였다.
의진이 느리게 허벅지를 주물렀다. 서운의 손바닥 바로 아래에서 울퉁불퉁 핏줄이 불거진 의진의 손등이 느껴진다. 어… 이거 좀 이상한 것 같지…? 허벅지 살집을 주무르던 의진이 이제는 손가락 끝에만 힘을 주어 서운의 허벅지 안쪽을 건드려 온다. 움칠, 움칠. 서운은 그걸 또 착실하게 반응하고 앉아 있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어떠십니까.”
“어, 어? 괘, 괜찮네.”
“그럼 이 정도 강도를 기준으로 잡는 데 동의하십니까?”
어, 어. 서운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의진의 손부터 밀어냈다. 그러자 의진이 의기양양하게 얼굴을 들이민다. …설마 티 났나? 서운이 급하게 다리를 꼬았다. 다행히 의진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서운 씨가 이러셨습니다. 만지고, 건드리셨습니다.”
“어….”
“성기도 만지셨습니다.”
“…아.”
“이게 그런 신호가 아니면 뭡니까?”
그러게요, 하마터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뻔했다. 맘카페 의존증 걸린 사람처럼 굴 때는 언제고 이런 건 안 가르쳐 줘도 잘만 안다. “이, 이것 봐요!” 서운이 반전을 노리며 큰소리를 냈다. 불리하면 불리할수록 목소리부터 키우고 보랬다. 외숙모의 지론이었다.
“같이 상의하니까! 어? 이렇게 잘만 풀리는구만 맘카페가 무슨 소용이에요.”
“…역시 서운 씨는 멋있으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의진이 어딘가 침울해 보여서 저절로 마음이 약해진다. 서운이 물었다.
“그렇게 나한테 멋있어 보이고 싶어요?”
이런 질문은 초등학생 때도 안 해 봤다. 조금 쑥스러워지려고 하는데 의진이 세상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다.
“네, 그렇습니다.”
“아….”
“왜 그러십니까?”
“그, 뽀뽀할래요?”
큰일이다. 이 한 몸 바쳐 인류의 종족 번식에 일조하고 싶어졌다. 나 진짜 어떡하냐.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은근슬쩍 의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아주 본능적인 행위였다.
서운의 재빠른 태세 전환에 의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의진은 의진대로 갑자기 얘가 왜 이러나 싶은 눈치다.
“사람이 어떻게 맨날 멋있기만 할 수 있어요. 그럼 로봇이게?”
“서운 씨는 늘 멋있으십니다.”
“…그건 그런데, 하여튼 너무 신경 쓰지 마요. 대신 의진 씨는 맛있….”
거기까지 말한 서운이 재빨리 입을 닫았다. 마지막 남은 이성이 아니었다면 성희롱으로 고소당할 뻔했다.
“제가 맛있으십니까?”
“누, 누가 그런 말을!”
“방금 서운 씨께서 제가 맛있으시다고….”
아씨, 들었구나. 오늘 하루 동안 흑역사를 몇 번째 갱신 중인지 모르겠다. 서운은 수치심에 몸부림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뻔뻔하게 얼굴을 의진에게 들이밀었다. 의진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그래서 뽀뽀 안 할 거야?”
“아니요. 할 겁니다.”
비장한 대답과 함께 의진이 얼굴이 가까워진다. 그러다 멈췄다.
“혀도 넣어도 됩니까?”
“그럼 안 넣으려고 했어요?”
의진의 대답은 들을 새도 없었다. 서운이 먼저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을 가르며 혀를 밀어 넣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마중을 나온다. 주체하지 않고 빠르게 감겨드는 살덩이가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다.
서운은 꼬아져 있던 다리를 풀었고, 의진은 재빨리 서운의 다리 사이로 안착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손발이 착착 맞는다. 몸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맞물린 두 입술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입 안 깊숙이 혀가 얽혀 들었다. 깊어지는 입맞춤에 서운이 알아서 소파에 드러누웠다. 의진도 서운의 혀를 쫓아 함께 기울어졌다.
역시 사람은 등받이가 있어야 한다. 자세가 안정적이니 모든 게 일사천리다. 근 한 달 만의 입맞춤에 서운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혀를 얽어 댔다. 서운에게 체중을 싣지 않으려 최대한 소파를 딛고 있던 의진도 좀 더 얼굴을 내리며 기꺼이 제 혀를 내어 주었다.
마음이 앞서자 자꾸만 힘이 실린다. 쪽쪽, 요령 없이 혀를 빨아 대는 서운 때문에 혀뿌리가 아플 법도 하건만 의진은 아무런 내색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해 보라는 듯 혀끝에 힘을 주어 서운의 혀뿌리를 간지럽히고 있다.
살랑살랑, 혀끝이 춤을 추며 여유롭게 서운의 입 안을 유영한다. 혀뿌리 아래를 길게 핥아 올리기도 하고 톡톡, 입 천장을 두드리기도 한다. 흐, 으응…. 다급한 마음에 혀를 얽어 대기 바쁘던 서운이 작게 칭얼거렸다. 입 안이, 목 안쪽이, 몸속이 간지럽다.
스스로 다리를 벌리며 의진의 허리를 감아올리자 의진이 잠시 멈칫하더니 힘을 주어 서운의 혀를 빨았다. 간지러움 사이로 퍼져 나가는 쾌감에 아랫배가 짜릿하다. 허벅지를 만져질 때부터 힘을 받던 성기가 본격적으로 자기주장에 나섰다.
“잠, 깐만, 의, 진 씨, 나 잠깐….”
“하… 왜 그러십니까.”
“더워….”
한참 만에 입술이 떨어지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더운 숨을 쏟아 냈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더위를 호소하던 서운이 다짜고짜 바지를 벗었다. 복합적인 의미로 열이 올라서 그랬다. 한때는 러그가 깔려 있었던 거실 바닥으로 서운의 바지가 내동댕이쳐졌다. 그 모습을 멍하게 내려다보던 의진이 재빨리 서운의 속옷을 벗겼다. 서운은 이미 알아서 엉덩이를 들고 있었다.
“서운 씨….”
“으응….”
“조금만 더 벌려 주시겠습니까.”
노골적인 요구에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뜨자 뚫어져라 제 아래를 보고 있는 의진이 보인다. 아니, 여기서 뭘 더 어떻게 벌리라고. 서운이 뒤늦게 다리를 오므리려 들자 의진이 서운의 허벅지를 붙잡으며 부드럽게 저지한다.
“여기 좀 보십시오. 체모가 옅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쩌라고요.”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빨아 봐도 됩니까?”
움칠, 몇 번 빨려 봤다고 그 맛을 알아 버린 구멍이 기대감에 부풀어 스스로 개폐 운동을 했다. 뻐끔뻐끔, 조용한 집 안에 서운의 구멍 움직이는 소리가 침묵을 대신했다. 구멍 밖으로 애액이 흘러나오는 탓에 질척이는 소리는 덤이었다. 아, 진짜…. 서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자 의진이 조심스럽게 손목을 붙잡아 온다.
“눈이 부시면 커튼을 칠까요.”
“…괜찮아요.”
“그럼 얼굴은 왜 가리시는 겁니까.”
“그러게요.”
“서운 씨.”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 손등 위로 쏟아지는 정중한 부탁에 서운이 슬쩍 손가락을 벌렸다. 바짝 얼굴을 붙이고 서운의 대답을 기다리던 의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 나 진짜 어떡하지. 서운이 우물쭈물 손을 내렸다. 서운의 얼굴이 온전히 드러나자 의진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진다.
“많이 더우십니까? 얼굴이 붉습니다.”
서운의 손목을 쥐고 있던 커다란 손이 살포시 서운의 뺨 위로 안착했다. 아…. 서운은 몇 번째인지 모를 탄식을 쏟아 냈다. 의진이 느리게 서운의 뺨을 쓰다듬었다.
“니트도 벗겨 드릴까요.”
“…아니요.”
“더워 보이십니다.”
“기분 탓이에요.”
“…그럼 반만 벗으시는 건….”
개수작도 부릴 줄 알고 다 컸다. 서운은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와서 부끄러울 건 없지만 이것까지 벗으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기분이라 벗고 싶지 않다.
의진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서운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이 노골적으로 변했다. 지문이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서운의 뺨을 쓰다듬던 손가락이 눈꺼풀을, 속눈썹을, 콧방울을, 인중을, 입술을 어루만진다.
얼굴 위로 페로몬이 기어 다니는 것 같다. 서운은 제 니트를 부여잡은 채 말없이 허리를 떨어 댔다. 저 혼자 움칠거리던 허리가 의진의 하체와 맞닿았다. 천 너머로 단단하게 발기한 살덩이가 느껴졌다.
아. 서운이 단숨에 의진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멱살을 잡듯 의진을 끌어당긴 서운이 제가 누워 있던 자리에 의진을 모로 눕혔다. 얼떨결에 소파에 드러눕게 된 의진이 서운과 다리가 얽혔다. 다리가 얽혀 불편할 법도 한데 어정쩡하게 소파를 딛고 선 서운은 허겁지겁 의진의 바지 버클을 풀기 바쁘다.
의진은 그런 서운을 내버려 둔 채 입고 있던 롱코트를 벗어 던졌다. 찰칵, 늘 차고 있던 손목시계도 풀었다. 시계는 탁자에 부딪쳐 아무렇게나 바닥으로 추락했다. 마침내 서운의 손아래로 뜨끈하게 열이 오른 날 것의 성기가 만져졌다. 서운이 힘을 주어 의진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식당에서 그랬던 것과 달리 노골적으로 흥분을 유도하는 손길에 의진의 호흡이 가빠졌다.
다시금 혀가 얽혀 들었다. 미친 듯이 서로의 혀를 빨며 정신없이 몸을 비벼 댔다. 서운은 의진의 성기를 쥐고 흔들며 나머지 손으로는 의진의 셔츠 속을 더듬었고, 의진은 서운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한쪽 손으로는 서운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흐, 아, 으응, 허억, 하…. 위아래로 물기 어린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타액이 섞이고 쿠퍼액이 흘러나와 서로의 입술을, 손을 적셨다. 서운의 허벅지 사이도 축축하게 젖었다. 애액이 흘러넘쳐 서운의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마저도 아까운지 기다란 손가락이 다급하게 내려와 흐르는 애액을 쓸어 올렸다. 축축해진 허벅지 사이로 손가락과 애액이 번갈아 서운을 적셔 댔다. 서운이 부르르 몸을 떨며 의진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두툼한 몸이 안정감 있게 서운을 받쳐 주었다. 서운은 무작정 의진에게 몸을 비비며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빨리, 빨리, 더, 더, 더….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 같다. 서운이 적극적으로 허리를 흔들자 서운의 성기를 만져 주던 의진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의진을 내려다보자 집어 던진 롱코트를 끌어와 더듬더듬 무언가를 찾고 있다.
“잠시만….”
저 좆같은 콘돔. 사정감이 분노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서운이 의진의 손에 들린 콘돔을 집어 던졌다.
“그냥 해요.”
“하지만….”
“그냥 박으라고.”
…하아…. 의진이 낮게 탄식했다. 코끝을 스치는 박하 향에 한층 무게가 더해졌다. 서운은 의진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스스로 허리를 내렸다. 축축하게 젖은 입구 위로 뜨거운 살덩이가 닿았다. 하, 으….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망설이는 의진을 대신해 알아서 각도를 맞추려던 서운은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어, 나 내일 건강 검진 있는데. 서운이 멈칫거리자 의진이 재빨리 콘돔을 찾아 팔을 뻗는다. 잠깐, 잠깐만요. 서운의 다급한 목소리에 의진이 열에 들뜬 얼굴로 서운을 올려다보았다. 존나 꼴렸다. 서운이 억지로 성감을 누르며 말했다.
“그, 나, 안 될 것 같은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 내일 건강 검진….”
“…….”
“페로몬 검사도 해야 해서….”
“…….”
“…….”
“…하….”
무겁게 내려앉은 한숨에 잔뜩 짜증이 어려 있다. 처음 들어 보는 낯선 목소리에 서운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건강 검진….”
의진이 짧게 읊조렸다. 막걸리 한 모금도 못 마시게 하더니 정작 본인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건강 검진이… 있었군요.”
“으응….”
“…….”
“…지난번에도 한 번 취소해서….”
“…그렇군요. 기억납니다.”
의진도 알다시피 서운은 일전에 병원 예약을 취소한 전적이 있다. 의진의 깜짝 방문이 격한 섹스로 이어지면서 생긴 착오로, 하물며 이번에는 건강 검진까지 잡아 놓은지라 선뜻 취소하기가 어렵다. 의진의 비서를 통해 집안 주치의에게 연락하는 것도 생각보다 수고스럽다. 괜히 민망하기도 하고.
“확실히 삽입은… 무리겠군요.”
의진이 답답한 듯 넥타이를 잡아 풀었다. 언제나 단정하게 매여 있던 넥타이가 본래의 모습을 잃고 엉망으로 풀어졌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목에는 손목시계 대신 푸른 핏줄이 돋아나 있다. 마지막으로 방금 전까지 서운이 물고 빨았던 박하 향 나는 입술이 신경질적으로 제 입술을 짓씹는 순간, 서운은 빙의했다.
“그럼 손가락은?”
“…손가락이라 하시면.”
“손가락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넣을 수도 있고, 검사받을 때 무리도 안 가고.”
“…….”
“…의진 씨 거, 이기도 하고….”
이 순간 서운이 곧 솔로몬이요, 솔로몬이 곧 서운이다. 의진 씨 거, 라는 대목에서는 부러 아래로 시선도 내렸다.
“어떻게 이런 묘안을…. 서운 씨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뭐, 이 정도야….”
“감히 서운 씨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그건 이따 혼자 알아서 넘고 일단 빨리 넣어 봐요.”
서운이 현기증을 호소하자 의진이 재빨리 손가락에 콘돔을 끼웠다. 몇 번 다녀갔다고 정확하게 입구를 찾아내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다. 중간에 있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입구는 여전히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를 칭찬하듯 의진의 손가락이 느리게 입구 주변을 쓰다듬었다. 움칠움칠, 서운이 기대감에 엉덩이를 떨어 대자 의진이 엉덩이를 토닥이며 동시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큰일 났다. 벌써 좋다. 푹 젖은 내벽이 애액을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을 반갑게 물어 삼켰다. 왜 이제 오냐는 듯 빈틈없이 조여 대는 내벽의 감촉에 엉덩이를 토닥여 주던 의진이 서운의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아…! 서운이 신음하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의진은 그대로 내벽을 몇 번 쑤시다가 서운을 완전히 뒤로 눕게 했다.
손가락 한 개가 두 개가 되더니 순식간에 네 개가 되었다. 퍽퍽! 손가락을 쑤셔 박는 의진의 팔뚝에 자꾸만 힘줄이 돋아났다. 힘을 주지 않으려 해도 미친 듯이 손가락을 물어 오는 내벽 때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아, 응, 어떡, 아! 손가락만으로도 그렇게 좋은지 서운은 아예 대놓고 다리를 벌려 주고 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발기한 성기와 넘치도록 애액을 쏟아 내는 입구가 보인다. 의진의 손목을 타고 흐르는 애액의 감촉에 구멍을 쑤시는 손길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아프진, 않으십니까?”
“응, 응. 안, 아파. 더 세게, 더 세게….”
“…하….”
“더 세…. 아!”
“…….”
“하, 하지 마! 안 돼, 나 안…! 아!”
성기에 닿는 축축한 쾌감에 서운이 발버둥 쳤다. 아래에서는 흐물흐물하게 풀어진 내벽이 거칠게 쑤셔지고, 바로 위에서는 좁은 입 안이 흡입력 있게 성기를 빨아들인다. 방금 전까지 아래에서 가해지는 쾌감이 마냥 좋았다면 지금은 그냥 딱 죽을 것 같았다. 의진에게 구멍을 빨린 적은 있어도 성기를 빨린 적은 없었기에 완전히 방심했다. 발버둥 치는 두 다리와 달리 성기는 착실하게 부피를 키워 가고 있어서 의진이 중간에 입을 뗄 일도 없었다.
중간이 없는 펠라티오였다. 의진은 아무런 요령 없이 무작정 빨아 대기 바빴다. 서운이 완전히 발기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고통에 몸부림쳤을 테다. 다행히 서운은 끝까지 발기한 상태였고,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사정감에 허덕거렸다.
성기에 가해지는 노골적인 쾌감이 모든 감각을 압도한다. 서운이 제 아래에 자리 잡은 의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어깨를 밀어내고 등허리를 두들겨 봐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나, 할 것 같은, 데…! 서운이 헐떡이며 사정의 임박을 알리자 괜찮다는 듯 의진이 좀 더 깊게 성기를 집어삼켰다. 한층 깊어진 입 속에서 부드러운 귀두가 단단한 입 천장에 문질러졌다.
아. 순간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쫀쫀한 내벽이 단번에 수축하며 의진의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서운의 성기를 빨아 올리는 힘도 더욱 세졌다. 이대로 성기가 뽑힐 것 같다. 서운은 끔찍한 상상 속에서 어느 때보다 강렬한 쾌감을 맞이했다.
“어, 어, 안, 돼, 안 돼, 안… 아…!”
의진의 입에다 사정을 한다는 자각마저 한낱 신음에 불과했다. 서운이 발버둥 치며 사정했다. 정액을 토해 내는 와중에도 의진은 착실하게 서운의 성기를 빨아 댔다. 의도는 기특하나 요령 없이 쭉쭉 빨아 대는 통에 도리어 아프기만 했다.
“그, 만….”
“…….”
“아파….”
아무리 밀어내도 꿈쩍도 하지 않던 의진이 비로소 입을 뗐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는 물론이고 입술은 촉촉하게 젖어 있다. 제가 사정한 것도 아닌데 잔뜩 열이 오른 두 눈이 방금 막 사정을 마친 서운의 모습을 천천히 훑는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훑어보는 시선에 서운이 슬쩍 니트를 내려 제 아래를 가리려 들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의진의 입가에 뭔가 묻어 있다. 우윳빛에 가까운 불투명한 액체, 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서운이 제 니트를 끌어 내리며 다급하게 외쳤다.
“으, 아! 여기다, 여기에 뱉어요! 당장!”
“괜찮습니다.”
“…뭐, 뭐야! 어디 갔어! 왜 없어!”
이상하다. 의진의 입 안에 있어야 할 서운의 자손들이 보이지 않는다. 설마…. 의진이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 씨 정액이라면 제가 먹었습니다.”
“…….”
“혹시 컨디션이 별로십니까? 생각보다 맛이 없….”
“으! 악! 악! 아! 으아!”
서운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의진의 입을 막아 버렸다. 꼴에 한 번 겪어 봤다고 의진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얌전히 서운을 올려다보고 있다. 의진이 서운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무어라 웅얼거렸다. 손바닥에 소리가 갇혀서 꼭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이래서야 꼭 웃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정말로 웃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조용히 하고 있을까요?”
“…어.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알겠습니다.”
틀어막힌 입이 불편할 법도 한데 말은 참 잘 듣는다. 이제는 답답하지도 않은가 보다. 알아서 입을 닫은 의진이 그대로 서운과 시선을 맞춰 온다. 그러고는 서운을 본다. 계속 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오롯이 서운을 담고 있다. 사정을 막 마치고 눈이 마주쳤을 땐 의진도 잔뜩 열 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무표정으로 되돌아가 있다. 그런 의진이 어쩌면 조금은 얄밉고 어쩌면 조금은 사랑스럽다.
또다시 누군가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감정도 결국은 소모품에 불과해서 누군가를 사랑스럽다 여기는 감정도, 미워하는 마음도 언젠가는 닳아 없어진다. 그래서였다, 서운이 스스로 결혼정보회사를 찾아간 건. 결혼이 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마음이 닳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이렇게 생생하건만 서운은 어느새 새로운 마음을 덧씌울 준비를 하고 있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서운도 모르는 사이 완전하게 준비를 마친 마음이 자꾸만 서운을 부추겼다. 서운이 결심한 듯 꾸물꾸물 아래로 내려갔다.
“…서운 씨?”
“쉿.”
“뭐 하시는 겁….”
“…….”
“서, 운 씨….”
“…….”
“…하….”
밑으로 내려간 서운이 그대로 의진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한쪽 손으로는 여전히 의진의 입을 틀어막은 채였는데, 덕분에 의진의 신음이 아주 잘 느껴졌다. 흥분을 억누르려는 듯 가늘게 떨리는 숨결이 서운의 손바닥을 간지럽힌다. 아, 이거 좀 묘하네. 이게 뭐라고 괜히 흥분된다.
힐끗 의진을 올려다보자 의진의 고개가 살짝 뒤로 젖혀져 있다.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는 의진의 입술이 보인다. 후, 으…. 서운이 기둥을 핥아 올리자 의진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느리게 신음했다.
반응이 확실하자 덩달아 신이 난다. 서운이 양손으로 의진의 성기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혀끝을 세워 귀두 구멍을 간지럽히자 곧바로 프리컴이 새어 나온다. 싫어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다. 마치 펠라티오를 처음 받아 보는 사람 같다.
서운이 다시 성기를 입에 물었다. 성기 전체가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자 의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서운이 그랬던 것처럼 서운의 어깨를 밀어내지도, 머리카락을 잡아당기지도 못하고서 저 혼자 끙끙대기만 한다.
이러니까 없던 의욕도 되살아난다. 조금 재미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입술을 오므려 기둥을 조이자 의진의 목울대가 꿈틀거린다. 서운은 입술에 힘을 주며 천천히 기둥을 조이다가 불시에 성기를 집어삼켰다.
“윽… 서, 운 씨….”
“…….”
“잠시, 잠시만….”
“…….”
“하, 윽…!”
의욕만 앞섰지 실제로 삼킨 건 반도 안 되는데 의진은 연신 신음을 삼키기 바쁘다. 펠라티오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데 제대로 해 주고 싶어진다. 의진처럼 정액을 삼키는 건 무리고, 직전까지라도 기분 좋게 해 주고 싶다. 서운이 작정하고 바짝 몸을 낮췄다. 상체는 최대한 낮추고 엉덩이는 한껏 치켜들었다.
자세도 잡았으니 재도전이다. 서운이 크게 입을 벌리며 남은 성기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단숨에 목구멍을 찔러 왔다. 케, 켁! 놀란 서운이 콜록거리며 성기를 뱉어 냈다.
“괜찮으십니까.”
놀란 얼굴도 잘생기긴 했는데 가장 놀라운 건 따로 있다. 고추가… 사람 고추가 목 안까지 들어올 수 있는 거였구나….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운을 살피는 의진의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
저 얼굴로 고추까지 크다니, 애정이 샘솟다 못해 폭발한다. 서운이 다시 의진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뿌리까지 다 삼키는 건 불가능하고 입과 손을 동시에 활용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더는, 하… 무리하지 않으셔, 도….”
우으응, 서운이 고집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뭐라고 말도 했는데 성기를 입에 물고 있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다. 대신 의진에게 직접 전해졌다. 입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의진의 말이 무처럼 뚝뚝 잘려 나갔다. 서운은 아예 고개를 주억거리며 성기를 삼켜 내고 있다.
차마 서운을 밀어내지는 못하고 애꿎은 제 허벅지만 쥐어뜯는 의진의 손등 위로 자꾸만 핏줄이 돋아났다. 울퉁불퉁 돋아나는 핏줄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짜릿하기까지 하다. 탄력 받은 서운이 무리하게 목구멍을 열어 성기를 받아 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으면 살짝 귀두를 물리고는 혀를 이용해 기둥을 할짝거린다. 그러다 좀 괜찮아지면 다시 목 안까지 성기를 받아들였다.
“…서운 씨.”
그랬는데, 핥아만 줘도 신음을 내기 바쁘던 의진이 별안간 차가운 목소리로 서운을 불렀다. 호흡이 조금 가쁜 걸 제외하면 평상시와 별다름 없는, 아니, 평상시보다 훨씬 차분하기까지 하다.
“서운 씨는 왜….”
“…….”
“…왜 이렇게….”
이상하다. 별로 안 좋은가? 펠라티오 경험이 없는 건 아니지만 목까지 쓰는 건 서운도 처음이라 조금 자신이 없다. 서운이 성기를 입에 문 채 힐끗 의진을 올려다보았다. 침과 프리컴으로 범벅이 된 입가가 엉망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채.
“…하….”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미 늦었다. 강한 힘이 서운의 머리를 잡아챘다. 두피가 잡아당겨지는 낯선 감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갑자기 농도가 짙어진 알파의 페로몬이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거실 천장이 보인다 싶더니 이내 등 뒤로 푹신한 소파가 닿았다.
이내 커다란 인영이 서운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무섭지는 않았다. 날카롭게 날이 선 알파의 페로몬이 잠깐이나마 수그러들었기 때문이다.
“죄송, 하… 죄송, 합니다.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
“저는, 제가….”
의진의 페로몬이 불안정하게 날뛰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굳어진 얼굴을 풀지 못하는 의진을 바라보며 서운이 대신 입을 열었다. 무리해서 목을 쓴 탓에 목소리가 잔뜩 갈라졌다.
“별로, 흠, 였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싫었어?”
“그럴, 그럴 리가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응.”
“…오히려….”
“응.”
“…너무, …셔서….”
“….”
“…너무 잘, 하셔서….”
서운은 조금 낯선 기분이 되어 멍하게 의진을 올려다보았다.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언뜻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싸늘한 모습이 무척 이질적이다. 지금 내 위에 있는 이 사람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는 걸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짜릿하다. 나를 원하는 타인의 욕망보다 더한 쾌감은 없을 테다.
페로몬은 실체가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 그 자체다. 색이 분명한 알파의 페로몬에 서운의 페로몬이 주체 없이 터져 나왔다. 각자의 욕망을 실은 페로몬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알파와 오메가, 형질이 다른 두 존재가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페로몬이 쏟아져 나온다.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이 한 몸처럼 뒤섞여 온몸으로 스며들었다.내벽 깊은 곳에서는 애액이 울컥울컥 터져 나오고, 꼿꼿하게 일어선 성기는 스스로 쿠퍼액을 토해 냈다. 몸속 깊은 곳까지 무리 없이 찾아든 페로몬이 전신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래, 애무. 처음에는 분명히 애무였다.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페로몬에 먼저 백기를 든 건 오메가였다. 성기는 쿠퍼액을 토해 내다 못해 잔경련을 일으키고 있었고, 애액을 쏟아 내던 내벽은 흥분을 하다 못해 괴로운 지경에 다다랐다. 자극은 있는데 해소가 안 되니 오히려 고문에 가까웠다. 쾌감이 고통이 되고, 고통이 쾌감이 됐을 때 서운은 문득 깨달았다.
이건 애무 차원의 페로몬 교환이 아니다.
노팅의 전 단계이자 상대방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페로몬 샤워였다. 서운에게 쏟아지는 알파의 페로몬이 점점 무거워졌다. 알파의 페로몬을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맡아 본 건 처음인지라 서운은 덜컥 겁이 났다.
“흐, 그만…! 이거, 이상…!”
“하… 서운, 씨….”
“그만, 그만해애…!”
서운이 의진을 피해 엉금엉금 달아났다. 페로몬이며 손길이며 무엇 하나 멈출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러다 제가 먼저 죽겠다 싶다. 의진이 달아나는 서운의 발목을 그러쥐었다. 서운은 그대로 미끄러지듯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디, 가십니까.”
“안, 가. 안 갔어….”
“가셨잖, 습니까….”
“안 그럴, 게. 안 그럴, 아, 아!”
미수로 그친 서운의 탈출로 의진의 페로몬이 한층 거세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이상은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보란 듯이 진해진 페로몬이 서운을 사방에서 짓눌러 왔다. 서운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자신의 오메가에게 소유권을 주장하고자 페로몬 샤워를 시키던 알파에게 제대로 기름을 부은 셈이었다.
의진이 작정하고 페로몬을 쏟아 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제 흔적을 남기려 드는 의진 때문에 서운은 제 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서운의 페로몬이 조금씩 의진에 의해 덧씌워지고 있었다. 마침내 서운의 페로몬이 의진의 페로몬에 완전히 뒤덮였을 때, 의진이 스스로 성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서운은 의진의 아래에 갇힌 채 이 모든 걸 꼼짝없이 받아 내야만 했다.
눈앞의 알파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잡아먹히는 기분이다. 온전히 나를 뒤덮는 알파의 페로몬 샤워를 받으며 서운은 진심으로 의진과 자고 싶어졌다. 이 알파와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다. 오메가의 본능이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