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열세 번째 만남
오메가의 본능, 그건 단순한 성욕과는 달랐다. 말로는 설명이 어렵지만 확실한 건 오메가라고 해서 당연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메가의 삶에 익숙해진 서운에게도 완전히 새로운 감각이었다.
섹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하나가 되고 싶을 건 또 뭐람. 다시 생각해 봐도 낯 뜨겁기 짝이 없다.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착실하게 현관으로 향했다. 몇 걸음 안 걸어도 될 줄 알았는데 집이 워낙 넓다 보니 생각보다 제법 거리가 있다. 아직 잠이 덜 깨서 더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서운 씨, 무리하지 마십시오.”
서운 혼자서는 절대로 일어날 일 없는 이른 아침, 의진이 잠옷 차림의 서운을 내려다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방금 막 자다 일어난 서운과 달리 의진은 일찌감치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아직 활동하실 시간이 아니잖습니까.”
아침부터 맥이는 건가. 그럼에도 틀린 말은 아니어서 서운은 순순히 고개부터 끄덕이고 봤다. 서운은 기본적으로 수긍을 잘한다.
“알아요. 다시 잘 거야.”
“역시.”
“뭐요?”
“무슨 말씀이신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저한테 할 말이 있으신 거군요.”
이상하다. 잠이 덜 깬 건 서운인데 의진이 자꾸만 헛소리를 한다. 아마도 개소리일 게 분명하지만 일단은 끝까지 들어 보기로 했다. 몸에 꼭 맞는 쓰리 피스 정장과 한쪽 팔에 걸쳐진 롱코트가 서운을 관대하게 만들었다.
“음, 그렇…겠지?”
“틀림없이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다 예상대로군요.”
“뭐가 또.”
“검진까지 여유가 있는데도 다시 잠드는 수고를 감안하면서 일찍 일어나셨다는 건 제게 직접 하실 말씀이 있다는 거니까요. 맞으십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이게 이렇게 비장할 일인가 싶다. 하물며 내심 뿌듯해 보이기까지 한다. “좋습니다. 전 준비되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의진이 비장하게 그런다. 이 집에 사람이라고는 단둘뿐인데 같이 있는 애가 시종일관 저러니까 덩달아 서운도 비장해진다. 서운이 비장하게 의진을 배웅했다.
“자, 잘 다녀와요?”
“네. 그러겠습니다.”
“…….”
“…….”
“…….”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응? 다 했는데?”
“…….”
“왜 그래. 왜 또 그래!”
돌연 의진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혹여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다급하게 묻자 의진이 지치지도 않고 헛소리를 한다.
“혹시 제가 못 미더우셔서 말씀하기 힘드신 거면….”
이게 자꾸 왜 이러지.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된 건지 아침부터 오작동을 일으킨다. 서운이 능숙하게 명령 값을 수정했다.
“난 또 뭐라고. 의진 씨 배웅 나온 거잖아요 지금.”
“저를 말입니까?”
“너를 말입니다.”
“…아.”
“오늘 몇 시쯤 와요?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 그거 좀 굶었다고 죽을 것 같아.”
폭풍 같은 밤이 지나고 서운은 오늘 예정대로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간다. 어차피 받을 거 빨리 받고 와야 향후 2년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테다. (나라에서 권장하는 건강 검진 주기는 2년에 한 번이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여서 삽입하는 거 빼고 다 했다. 정말 다, 했다. 서운이 아침부터 제 발로 걸어 배웅을 나온 이유다. 지금 서운은 의진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씀만 하시면 알아서 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뭘 또 그렇게까지….”
“조리 시간도 고려해야 하니 최소 1시간 전에만 말씀 주시면….”
…이 동네 닭발 30분이면 오는데. 이유는 모르겠는데 오늘따라 유독 의진이 의욕적이다. 자진해서 배웅을 나온 서운과 비슷한 맥락일 테다. 뭐, 시키고 나서 얘기하면 되겠지. 서운은 의욕만 앞서는 의진을 대신해 침착하게 퇴근 및 이동 시간을 확인했다. 전날 금식을 했으니 오늘은 맛있는 것도 먹고 의진도 먹을 생각이다. 생각만 해도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혼자 지내기에는 지나치게 큰 신혼집도, 또다시 홀로 남은 서운도 며칠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기분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서운이 움직일 때마다 의진의 페로몬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이 정도로 진한 페로몬 샤워는 서운도 처음인지라 도통 적응이 안 된다.
자고 있을 땐 몰랐는데 의진의 페로몬이 점점 선명하게 느껴진다. 의진이 출근하는 걸 직접 봤는데도 고개만 돌리면 바로 옆에 있을 것 같다. 어떤 상황에서도 악착같이 콘돔을 챙기는 걸 보면 기본적으로 담백한 편인 것 같은데 사람을 이렇게까지 페로몬에 절여 놓을 줄은 몰랐다.
결국 서운은 다시 잠들기를 포기했다. 이대로 잠들었다가는 엄한 꿈을 꿀 확률이 매우 높다. 정작 어제는 꿈도 안 꾸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삽입만 빼고 다 하다 보니 애가 달아서 자꾸만 일정이 길어졌다. 의진이나 서운이나 몇 시간 못 잔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 아침부터 이리 기분이 좋은 걸 보면 신혼은 신혼인가 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이 오다니. 서운은 새삼스레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의진이 아니라 내가, 나부터 이런 마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연애도 해 볼 만큼 해 봤고 이별도 해 볼 만큼 해 봤다. 사랑에 대한 환상은 사라진 지 오래다. 결혼은 하고 싶지만 마음이 닳고 싶지는 않았고,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기보다는 서로간의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싶었다. 결혼과 조건을 내세워 사람을 만나면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안일한 다짐이 무너진 건 언제부터였더라.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눈을 뜬 순간부터 의진의 페로몬이 서운을 따라다닌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면 좀 덜하겠지 싶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서운이 가는 곳마다 알파들이 홍해처럼 갈라진다. 습관처럼 사람을 훑어보기는커녕 서운과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친다.
페로몬 샤워가 원래 이런 거였나. 덕분에 서운은 병원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의진을 알게 된 이후 날마다 상식을 새로 쓰는 중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일상이 조용할 틈이 없다. 병원도 예외는 아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서운 님의 첫 내진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이건 또 뭘까. 가드의 안내를 받아 병원 꼭대기 층으로 올라왔더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저 난리다. 저마다 크기와 형태가 다른 화려한 풍선들과 사람들의 환호성이 서운을 혼란스럽게 했지만 괜찮다. 유부남 정서운은 이제 웬만한 일로는 쉽게 놀라지 않는다. 아마 무엇도 의진의 가족들보다 서운을 놀라게 할 수는 없을 테다. 흠, 으흠!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서운이 목소리부터 가다듬었다.
“안녕하세요. 정서운입니다.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첫인상은 중요하니까. 이제 이 정도 여유는 있다. 서운이 알아서 자기소개를 마치자 병원 관계자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아, 파블로프의 개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박수 소리를 듣고 있자니 놀랍게도 심신에 안정이 찾아온다.
마음이 안정되자 주변이 조금 더 눈에 들어온다. 병원 관계자들 뒤로 서운을 반기는 글자들이 보인다. 개중에 ‘우니’가 있는 걸 보니 일단 의진은 아니다. 서프라이즈 금지 조약에 매여 있는 데다 의진은 우덩이파 일원이다. 서운은 의진을 용의자 선상에서 제외했다. 남은 용의자는 의진의 직계 가족을 포함한 그의 일가친척들 전부다. 존나 많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뵙는 건 처음이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총괄 주치의 김재순 의료원장입니다.”
흰머리가 성성한 의료원장이 유쾌하게 웃으며 악수를 건네 온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직진해 오는 모습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집안 주치의라더니 그 집안과 성향이 비슷할 줄이야. 서운이 예의 바르게 웃으며 내민 손을 맞잡았다. 겨우 그것뿐인데 요란한 반응이 돌아왔다.
“결혼식 이후로 처음 뵙는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의료원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잡은 손을 흔들었다. 사람이 악의는 없는 것 같은데 필터링도 없어 보인다. 이 검진, 괜찮을까. 검사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피곤하다. 제 몸 하나 기댈 곳 없는 프리랜서에게 무료 건강 검진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지라 덥석 예약부터 하고 봤는데 갈 길이 구만리다.
기나긴 환영 인사 뒤에는 간단한 병원 소개가 있었다. 의진의 집안만 이용한다는 대학 병원 꼭대기 층은 엘리베이터부터 시설, 의료진까지 모든 것이 분리되어 있었다. 의진의 가족별로 주치의가 있는 건 물론이고 각 분야별 의료진이 상시 대기 중이다.
서운과 의진의 경제적인 수준 차이는 명백하나 의외로 이를 실감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굳이 나열해 보자면 결혼식장이 자가 호텔이었던 점이나 생애 첫 국적기 일등석, 호텔에 꾸며 놓은 개인 서재, 이번 자전거 사태와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그랬는데, 지금 제대로 느꼈다. 이런 거구나. 이런 거였어. 병원이 이렇게 친절할 수 있다는 건 32년 만에 처음 알았다.
“어깨 근육이 심하게 뭉치신 것만 제외하면 크게 걱정하실 건 없어 보입니다. 특히 치아 관리를 잘하셨군요. 치아 상태가 아주 좋습니다.”
다행히 결과는 좋았다. 직장인의 숙명인 어깨 뭉침은 어쩔 수 없다 치고, 남은 건 당일 결과 확인이 불가한 일부 검사들뿐이다. 다른 것보다 치아 상태가 좋다니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까 전에도 비슷한 칭찬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뭐였지? 기억하기로 출처가 의사는 아니었다. 그땐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다기보다 오히려 황당했다.
“나머지 검사 결과는 이틀이면 다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모레도 오늘 이 시간에 방문하시겠습니까?”
이런저런 설명을 듣다 보니 몇 시간이 훌쩍 갔다. 배가 고파서 점점 의욕을 잃어 가는 서운과 달리 의료원장은 여전히 파이팅이 넘쳤다. “네. 그럴게요.” 서운이 마지막 힘을 다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페로몬 이야기를 해 볼까요. 원래 맛있는 건 제일 나중에 먹어야 하니까요!”
아니요. 전 제일 먼저 먹는데요. 하필이면 의료원장은 페로몬 전문의였다.
“열다섯에 발현하셨군요.”
“네.”
“지니와 같은 해에 오메가 판정을 받으시다니,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동시에 의진의 주치의이기도 하다. 아니 근데 여기서도 지니야? 서운은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 의문은 그 후에 찾아왔다.
“저, 의진 씨는 7살에 발현했다고….”
스쳐 지나간 대화에서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발현 시기가 워낙 특이해서 잘 기억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파, 오메가 발현은 2차 성징을 따라간다. 고로 의진은 평균보다 거의 두 배나 빠른 셈이다.
“맞습니다. 발현은 7살에 했지요. 알파 판정을 받은 건 14살입니다.”
“네?”
“그 전까지는 가족 중 누구도 발현 사실을 몰랐습니다. 발현은 했지만 너무 어려서 페로몬이랄 것도 없었고 본인도 발현 사실을 몰랐습니다.”
“…보통 발현하면 발현열을 겪지 않나요?”
발현을 하면 누구나 발현열을 겪는다. 알파와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신체에 변화가 생기고, 내부에서 시작된 변화가 생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미열로 표출되는 것이다. 의료원장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지니도 발현열을 겪었습니다.”
“…그럼….”
“만으로 약 7년을 겪었군요. 하하하, 지독하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참았냐고 했더니 어른이 되려면 원래 다 이런 건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
“사람이 7년 동안 미열에 시달리면 열반의 경지에 오르는지 아주 꼬마 부처가 따로 없었습니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고, 배가 고파도 고픈가 보다, 몸이 아프면 아픈가 보다… 뭘 해도 반응이 없어서 결국에는 온 가족이 발 벗고 나서야 했죠. 그렇게 말문이 트이나 싶더니 더는 가족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며 유학을 가 버리는 바람에 정말 말문만 트인 상태로 어른이 돼서 돌아왔지 뭡니까.”
내가 이런 얘기를 들어도 되는 건가. 의진의 가족들에게 제일 처음 의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서운은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그때보다 많은 시간이 지난 건 아니지만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서운은 의진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고 싶어졌다. 이렇게 남을 통해 전해 듣는 게 아니라 의진에게 직접 듣고 싶다.
“그나마도 찰스가 아니었다면 러트가 온 후에나 알아차렸을 겁니다. 신문에도 대문짝만 하게 실렸겠지요. <러트에 미친 알파, 난동 피우다 현지에서 체포돼. 알고 보니 재벌 3세?!> 이런 기사 있잖습니까.”
그런 마음과는 별개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감히 자신하건대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제3자에게 들을 만한 가벼운 주제도 아니다. 만약 의진이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서 7년간 혼자 발현열을 견뎌 냈다면 더더욱 그렇다.
필요 이상으로 논리 정연한 주제에 이상할 정도로 감정 표현이 없고 자기가 이혼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 서운은 계속해서 한 사람을 생각했다. 자꾸만 그 사람 생각이 났다.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이를 핑계로 지금까지 무심코 흘려보낸 의진의 뜻 모를 행동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서운을 혼란스럽게 했다.
우리는 정말 서로에 대해 잘 몰랐구나. 서운은 고민 끝에 이 이상 반응하지 않고 적당히 입을 닫았다. 그러자 의료원장이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과연 찰스에게 들은 대로 진중하시군요.”
“예?”
“자,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볼까요!”
찰스한테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주변 사람에게 너무 휩쓸릴 필요는 없으니까. 이런 데 일일이 신경 써 봤자 말 그대로 신경만 쓰인다. 확실한 건 이번 서프라이즈의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다는 점이다. 안씨 집안은 누구보다 서프라이즈를 사랑했다.
“서운 씨에게도 히트 사이클이 오고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주기가 많이 틀어지셨습니다.”
요새 부쩍 쥐가 자주 나고 잠이 늘었다. 식사량도 줄었다. 서운이 의진의 호들갑을 흘려듣지 않고 검진을 받으려 한 이유이기도 하다. “네, 대충은….” 서운이 말끝을 흐리자 의료원장이 모니터 화면을 가리키며 그런다.
“이번 히트 사이클은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약을 원하시면 억제제를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그, 주기가 틀어진 이유부터 여쭤봐도 뭘까요? 지금까지는 항상 규칙적이었거든요.”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단순한 신체 변화일 수도 있고 스트레스에 의한 일시적인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알파의 페로몬에 노출된 것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남은 건 서운 씨의 페로몬이 어떻게 반응했냐는 건데… 정확한 건 페로몬 매칭률 결과가 나와 봐야 알 수 있겠군요.”
결국 정확한 건 모른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전부 다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어서 서운은 괜스레 얼굴을 붉혔다. 다른 것보다 ‘지속적인 알파의 페로몬 노출’이라는 대목이 가장 신경 쓰인다. 그 정도로 많이 한 것도 아닌데 벌써 히트 사이클 주기가 틀어진 걸 보면 페로몬 매칭률은 안 봐도 뻔하다. 자세한 건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왠지 존나 높을 것 같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다음에는 지니와 함께 방문하시겠습니까? 지니도 주기가 틀어졌을 것 같군요.”
“그렇게 할게요. 언제쯤 오면 되나요?”
“페로몬 매칭률 결과가 6주 후에 나오니 그때 뵙도록 하죠.”
6주, 잊지 말고 의진에게 꼭 전해 줘야겠다. “아, 6주 후에는.” 의료원장이 빠르게 뒷말을 덧붙였다.
“정확한 결과를 위해 일주일간은 페로몬 샤워나 노팅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차 범위가 낮긴 하지만 정확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하하하! 처음에는 작은 지니가 온 줄 알았지 뭡니까. 박하 향이 아주 진동을 하더군요!”
“…죄송합니다.”
하하하! 의료원장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근데 나 그렇게 안 작은데.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투덜거린 서운이었다. 물론 속으로만 했다.
자세한 시간은 의진과 상의 후에 정하기로 하고 비로소 모든 검사가 끝이 났다. 배는 고픈데 결과는 좋아서 다행이고, 갑작스럽게 알게 된 의진의 과거에 마음은 무거운데 여전히 서운의 주변을 살랑거리는 의진의 페로몬은 간지럽기만 하다. 진짜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휴대폰을 확인하자 의진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직 병원이십니까?]
[끝나면 연락 주십시오.]
메시지를 읽는데 저절로 음성 지원이 된다. 서운이 피식 웃으며 전화를 걸었다. 아, 통화 가능하냐고 먼저 물어볼 걸 그랬나. 예의상 그게 맞지만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제 그 정도 예의는 차리지 않아도 되는 사이다. 그렇지?
- 네, 안의진입니다.
정말로 소리 내어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알아서 긍정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뭐라고 실없이 웃음이 나온다. 생각해 보면 의진과는 늘 이런 식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생의 크고 작은 타이밍들이 참 잘 맞는다. 우연도 반복되면 인연이라는데 우리의 우연도 인연이 될 수 있을까. 서운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검사는 다 끝나신 겁니까?
“응. 설명도 다 들었어요. 의료원장님이 해 주셨는데 의진 씨를 잘 알고 계신 것 같더라고요.”
- 잘 안다의 기준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알고 지낸 세월로 치면 20년이 넘긴 합니다.
“…완전 오래 알았네요.”
- 그렇습니까. 그래서 결과는 나온 겁니까? 어떻습니까? 원장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서운 씨? 듣고 계십니까?
오랜만에 물음표 살인마가 찾아왔다. “서운 씨? 들리십니까?” 서운이 말이 없자 의진이 그새를 못 참고 추궁을 해 온다. 엘리베이터라고는 해도 통화 음질에는 문제가 없으니 전화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서운은 고민 중이었다. 의료원장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자연스럽게 의진의 이야기를 물어볼까 하다가, 그냥 관두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전화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건 의진에게 직접 듣고 싶다. 이런 전화 통화가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며 체온을 나누고 좀 더 깊숙하게 서로에 대해 알아 가고 싶다. 서운이 모르는 의진의 모습을 더 알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
응, 보고 싶어. 서운은 깨달았다. 어, 그러네. 지금 좀, 보고 싶은 것 같지?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서운도 몰랐던 서운의 마음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 어. 잘 들려요. 방금 뭐라고 했어요?”
- 결과는 어땠는지 여쭤봤습니다.
“아, 결과.”
- …혹시 무슨 문제라도….
그런 거 아… 어? 거기까지 말한 서운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드들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이번에도 서운을 안내해 주려는 모양이다. 나가는 길만 알려 주면 알아서 잘 찾아갈 테지만 그 생각은 속으로만 했다. 절대로 무서워서가 아니다.
개미 한 마리 없는 출입 금지 구역을 가드들에게 둘러싸인 채 걷고 있다. 흡사 연행이라도 당하는 것 같다. 서운은 가드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낮추고 작게 속삭였다.
“의진 씨,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 …설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겁니까.
“어? 뭐라고?”
- 지금 말씀하시기 곤란한 거면….
“서운 님, 주차장으로 안내할까요?”
가드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아, 잠시만요.” 서운은 의진에게 양해를 구한 뒤 가드와 간단하게 대화를 나눴다.
“아니요. 그냥 정문으로 나가면 돼요.”
“기사님이 정문에 와 계십니까?”
“아뇨. 저 혼자 온 거라… 의진 씨.”
- …네. 말씀하십시오. 준비됐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의진의 목소리가 방금 전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지만 서운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가드들이 옆에서 계속 말을 걸어오는 데다 일반 병동이 가까워지니 주변이 시끌벅적해서 소리가 잘 안 들린다. 서운이 급하게 전화를 마무리하며 말했다.
“이따 다시 전화할 테니까 6주 후에 언제 시간 되는지 알려 줘요.”
- 6주 후라 하시면….
“결과 나오, 아, 죄송해요. 6주 남았대요. 검사도 받아야 한다니까 언제 시간 비는지 알려 줘요. 그럼 이따 봐.”
기어코 가드와 부딪친 서운이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제 저 문만 나가면 서운이 아는 일반적인 대학 병원 풍경이 펼쳐질 테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게요.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운은 가드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탈출하듯 출입 금지 구역을 빠져나왔다. 오는 내내 부담스러워서 죽는 줄 알았다. 서운이 정문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접수처가 저쪽이니 정문은… 아, 찾았다.
출입문 위치를 확보한 서운이 걸음을 옮기려는데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요동을 친다. 웅, 우우웅, 웅웅, 우우우웅웅, 아주 난리도 아니다.
전화를 받으려고 했지만 차마 받지 못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지도 못했다. 서운의 시야에 익숙한 사람이 걸렸기 때문이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한때는 서운과 세상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 무려 5년을 만나고 상대방 부모님께 인사까지 드렸지만 하루아침에 서운의 인생에서 사라져 버린 그 사람.
서운의 전 애인이 병원 로비에 서 있다. 옆에는 부인으로 보이는 임산부와 함께였다.
언젠가 그런 상상을 한 적이 있다. 헤어진 옛 연인과 우연히 마주치는, 누구나 한 번쯤 할 법한 그런 쓸데없는 상상. 그조차 너무 오래된 탓일까. 생각보다 훨씬 담담한 조우였다.
살아 있었구나. 대부분의 연인관계가 그러하듯 헤어진 후에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서로의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는데 아쉽게도 두 다리 멀쩡히 살아 있었나 보다. 이처럼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으나 놀랍게도 그 외의 감정은 들지 않았다. 서운이 반사적으로 자리를 피하려다가 굳이 그러지 않은 이유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뭐. 따지고 보면 죄는 저 새끼가 지었다. 서운은 당당하게 제자리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누가 봐도 사이좋은 부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서운 역시 두 사람이 부부라고 확신했다.
당연하지. 모를 수가 없다. 서운의 기억 속에서 남자는 언제나 저런 모습이었다. 서운을 바라보던 눈빛과 서운에게 지어 보이던 표정도 꼭 저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 새끼가 마지막을 잠수로 장식하는 바람에 마음이 떠난 남자의 동태 눈깔 같은 건 경험하지 못했다. 거 참 존나게 고마운 새끼일세. 서운은 습관적으로 남자를 욕했다.
습관. 그래, 습관. 습관이 될 만큼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다. 과거는 미화된다더니 서운도 예외는 아니다. 오랜만에 본 남자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선 배가 나왔고, 배가 나왔으며, 배가 나왔다.
지가 오메가야 뭐야. 덕분에 눈만 버렸다. 자세히 보니 얼굴도 좀 변한 것 같다. 이상하다.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설마 저런 꼴뚜기를 만났을 리가 없다. 서운은 한사코 현실을 부정했으나 마침내 진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남자가 정면으로 돌아선 것이다. 내가 저런 걸 보려고 라섹을 한 건 아니었는데. 서운은 깔끔하게 제 과거를 인정했다.
★축, 꼴뚜기 탈출!★ 함께해서 좆같았고, 다시 만나지 말자! 서운이 미련 없이 돌아섰다. 스멀스멀 떠오르는 안 좋은 기억들은 이쯤에서 묻어 두기로 했다.
여러모로 눈 정화, 마음 정화가 시급하다. 역시 오늘 저녁 메뉴는 연하 남편의 복근이 좋겠다. 자연스럽게 생각이 의진에게 미치자 그제야 휴대폰 생각이 난다.
[부재중 전화 18건]
순간 멈칫했다. 아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럴 테다. 하하, 십팔 건이네. 이때까지만 해도 서운은 별생각이 없었다. 큰일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전 애인을 마주치긴 했지만 그뿐이다. 서운은 이대로 평화롭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부재중 십팔 건은 전부 한 사람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안의진, 안의진, 안의진, 안의진, 안의진…. 모두 의진에게 온 전화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서운은 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삐,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다. 받지 않는다. 음, 바쁘구나. 서운은 대수롭지 않게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마저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저기 있다!”
“찾았습니다!”
“타깃 발견, 타깃 발견!”
주변이 시끄러웠다. 우르르르! 기다렸다는 듯이 덩치들의 발소리가 일제히 한곳으로 몰려든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지 않듯 서운의 시야에 웬 빨간 빛이 걸린다. 정확히 서운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는 이 빨간 불빛을 서운은 알고 있다. 물론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영화에서는 많이 봤다. 주로 총격전을 앞두고 범인에게 표적을 겨눌 때 쓰이더라. 아니면 고양이랑 놀아 주거나.
그렇다면 전자네. 상식적으로 서운이 고양이가 될 확률은 전무할 테다. 침착하게 상황 파악을 마친 서운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타깃 발견했습니다!”
“타깃 포위했습니다!”
“삽살개 발령 클리어! 삽살개 발령 클리어!”
삽살개는 또 뭔데 미친놈들아. 가드들이 순식간에 서운을 에워쌌다. 방금 전 서운을 일반 병동까지 안내해 준 장본인들이다.
문득 서운과 부딪쳤던 가드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서운과 눈이 마주치자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어색하게 목 인사를 건네 온다. 그러면서도 서운을 겨눈 레이저는 치우지 않는다. 너였냐, 레이저가. 이러니까 진짜 범죄자가 된 기분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영화 촬영 중인가?”
“강도라도 든 겨?”
“대박. 나 이런 거 처음 봐!”
무전을 하느라 조용해진 가드들 너머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레이저에 정신이 팔려 있던 서운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생각이 났다는 소리다. 자신이 방금 전에 누구를 만났으며, 불과 50m 근방에 누가 있는지가.
안 돼. 안 된다. 죄지은 건 없지만 이런 꼴은 안 된다. 이건 인간의 존엄성이 걸린 문제다. 서운이 필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정확히는 정면에서 레이저를 겨누고 있는 가드의 그림자에 숨어 보려 했다.
그런데 이 새끼가 서운을 따라 같이 움직인다. 서운이 오른쪽으로 가면 저도 왼쪽으로 움직이고, 서운이 왼쪽으로 가면 저는 오른쪽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서운은 보았다. 틈새로 보이는 눈이 휘둥그레진 꼴뚜기 한 마리. 다행히 서운은 임기응변에 능했다.
“꺄악! 어떡해!”
“사람이 쓰러졌어요!”
“누가 의사 좀 불러!”
풀썩! 서운이 쓰러졌다. 꼴뚜기의 위치를 고려, 신변 보호에 가장 적합한 7시 방향을 향해 쓰러졌다. 서운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의식을 잃어 본 적이 없는데, 로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검진 결과를 생각하면 앞으로도 없게 생겼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저,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바닥은 차구나…. 서운은 병원 로비 한복판에 누워 그런 생각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낙법이라도 배워 놓을 걸 그랬다. 리얼리티를 위해 과감히 몸을 던졌더니 맨바닥에 부딪힌 왼쪽 몸 전체가 욱신거린다. 지금 같아서는 어디든 부러져도 되니까 여기만 좀 벗어나면 될 것 같다.
도대체 왜! 왜 하필 이런 꼴로! 부러진 뼈는 붙지만 무너진 인간의 존엄성은 회복되지 않는다. 전 애인이란 그런 존재다. 뭘 해도 좆같으니까 전 애인인 거다. 서운도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일단 의식부터 확인하고!”
“네, 알겠습니다!”
“서우….”
안 돼! 부르지 마! 내 이름! 부르지 마! 서운이 좀비처럼 펄쩍 뛰어올랐다. 어머, 어머! 어떡해! 발작인가 봐!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잠시나마 찾아왔던 자괴감은 사방에서 더해진 응원의 목소리에 깨끗하게 증발했다. 서운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발끝까지 떨어 줬다. 한층 자신감 있어진 발작 연기에 지켜보던 시민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그러지들 말고 빨리 의사한테 데려가요!”
“사람부터 살려야지!”
“팀장님! 맥박은 정상입니다!”
“좋아! 당장 위층으로 모셔!”
“네! 알겠습니다!”
드디어 탈출하는구나! 서운은 저를 업을 가드를 배려해 최대한 몸에서 힘을 뺐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다. 하나, 둘, 셋… 여섯. 무려 여섯이다. 손이 여섯 개면 최소 세 명이 서운을 들었다는 소리다. 아니, 뭘 또 셋씩이나…. 서운은 어쩐지 기분이 조금 상했다. 정말이다. 조금만 상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는 게 더 시급하다.
난 그래도 업어 줄 줄 알았지…. 공중에서 맨정신으로 공기 저항을 받으려니 멀미가 다 난다. 얼굴을 가린답시고 고개가 완전히 돌아가 있어서 더 그랬다. 삐빅,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접근 금지 구역의 문이 열렸다. 소리로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서운이 조용히 눈을 떴다. 시야는 여전히 흔들리지만 눈을 뜨니까 멀미가 좀 덜 난다. 서운이 멀미의 여파로 힘없이 물었다.
“저희 지금 어디 가나요?”
“당연히 의료원장님께 가야지!”
“혹시 저 때문이면 안 가셔도 될 것 같아요.”
“…뭐?”
“티, 팀장님!”
서운 님이 깨어나셨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가드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서운은 생각했다. 아, 제발 꿈이었으면.
물론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드들의 술렁거림 속에서 서운이 어색하게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역시, 사람은 땅을 딛고 살아야 한다. 멀미 기운이 가시자 서운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어디서 어떻게 봐도 지나치게 멀쩡한 서운의 모습에 모두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누를까요?”
무전기에서 옥상 어쩌고 한 것 같은데.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서운이었다.
다행히 서운의 예상이 맞았다. 최종 목적지는 옥상으로, 어색한 침묵을 뚫고 옥상에 가는 이유를 물었지만 그 이유는 가드들도 몰랐다. 그저 서운을 무사히 모셔 오라는 긴급 지시가 있었다고.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래, 뭐. 가 보면 알겠지. 더 잃을 것도 없다. 서운은 얌전히 옥상으로 향했다. 병원 로비만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신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과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센 바람이 서운을 반겼다. 미세먼지 때문에 살짝 노이즈가 껴 있는 느낌이긴 하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뻥 뚫린다. 그래서 여기는 대체 왜 온 거지. 사람이라고는 서운과 가드들이 전부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탁 트인 풍경과는 별개로 계속해서 텁텁한 모래바람이 불어온다. 아침부터 줄곧 미세먼지 농도 매우 나쁨을 기록 중인 날이었다.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바람은 안 불었던 것 같은데 피부를 스치는 바람이 제법 거세다.
주머니에 있는 마스크를 꺼내 쓸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만뒀다. 어차피 곧 내려가겠지. 서운은 별생각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옥상이 이렇게 넓은데 그 흔한 정원 하나 꾸미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내 누구보다 빠르게 수긍했다. 애초에 정원을 꾸밀 수 없는 환경이었다. 옥상 중앙에 ‘H’ 마크가 떡하니 박혀 있다. 드라마나 영화를 제외하면 서운도 실제로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신기했다.
“곧 도착하십니다.”
“뭐가요?”
그런데 아까부터 바람이 너무 분다. 어째 점점 강해지는 것 같다. 밀려드는 바람에 눈을 뜨기조차 힘들다. 서운이 황급히 마스크를 찾아 끼려는데 가드들은 일찌감치 알아서 몸을 돌리고 있다. 뭐지? 의아함과 동시에 어디선가 요란한 소리가 났다. 어, 이 소리 아는데. 서운도 많이 들어 본 소리였다.
“저기 오시는군요.”
“네?”
“전무님 말입니다.”
헬리콥터, 헬리콥터 소리.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헬기 소리가 자꾸만 가까워진다. 설마…. 서운의 시선이 팀장의 손끝으로 향했다.
“서!”
아, 시발.
“운!”
잠깐만.
“씨!”
네가 왜 거기 있어…? 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두! 그 뒤로도 뭐라고 한 것 같은데 프로펠러 소리에 묻혀 더는 들리지 않았다.
미세먼지와 함께 의진이 날아왔다. 말 그대로 날아서 왔다. 두 사람의 열세 번째 만남이었다.
두두두두! 두두두두두! 이제 막 착륙을 마친 헬리콥터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쉽게 잦아들지 않는 회전날개가 계속해서 바람을 만들어 냈다. 의진의 애정이 가득 담긴 중국발 황사 바람이었다.
“서운 씨! 괜찮으십니까!”
아니! 하나도 안 괜찮다. 콜록, 콜록! 서운은 아까부터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기침을 토해 내고 있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 무방비하게 있다가 된통 당했다. 마스크라도 썼으면 좀 나았을 텐데 눈도 따갑고 목도 아프다. 눈알도 간지러운 것 같다.
“설마…!”
가까이 다가온 이 시대의 헬기남이 격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폐인 겁니까!”
“콜록, 무, 뭐? 콜록!”
뭐라는 거야? 평소보다 훨씬 격양된 목소리에 서운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분개했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길래 6주밖에…!”
저 새끼 지 혼자 선글라스 꼈어! 서운이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얼굴이 붙들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었다. 서운의 얼굴을 낚아챈 의진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눈이 충혈되셨습니다!”
“…그거야….”
네놈이 몰고 온 황사 바람 때문이지 않을까? 당연하게도 지 혼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의진은 알 턱이 없었다.
“이건…!”
서운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의진의 손가락이 다급하게 서운의 눈 밑을 쓸었다.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을 그랬다. 뭐가 단단히 묻었구나 싶어 얌전히 얼굴을 대고 있는데 어째 의진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 같다. “뭐 묻었어?” 서운이 대수롭지 않게 묻자 이제는 의진이 대놓고 손을 떤다.
“그런 줄, 알았는데….”
“뭐야. 왜 이래? 손 떨리는데?”
“…안 지워집니다.”
그러니까 뭐가? 다행히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의진의 선글라스에 커다란 손에 붙들려 있는 서운의 얼굴이 비친다. 서운은 그런 제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비록 황사 바람을 뒤집어쓰긴 했으나 얼굴에 묻은 건 특별히 없었다.
“눈 밑이 이렇게 시커먼데… 안 지워집니다, 서운 씨….”
“…….”
“안색은 또 왜 이렇게….”
잠도 많이 못 잔 데다 12시간 넘게 공복을 유지 중인 서운이다. 불과 몇 분 전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달린 큰일도 겪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진행된 겁니까…!”
서운의 얼굴을 살피던 의진이 탄식을 토해 냈다. 서운의 얼굴도 딱 그만큼 썩어 들어갔다. 지금 하는 짓을 보아하니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썩어 들어가는 서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의진이 의젓하게 외쳤다.
“서운 씨,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없긴 뭐가 없어.”
“저만 믿으십시오!”
“잠깐 기다려 봐요. 생각 좀 해 보고.”
아무래도 이상하다. 잠깐 새에 애가 또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 좀 해 봐야겠다. “당장 정밀 검사부터…!”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 헬리콥터 시동은 꺼진 것 같은데 날개는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의진의 헛소리와 헬리콥터 소음 간의 끔찍한 혼종 속에서 서운은 무언의 결론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다.
“어… 의진 씨?”
“네, 서운 씨.”
“음, 그러니까….”
“말씀하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시면 다 준비해 놓겠습니다.”
“오.”
믿음은 안 가지만 저 마음이 진짜라는 건 알겠다. 우리 애가 심성은 곱거든. 서운은 그런 생각을 하며 비로소 운을 떼기에 이른다.
“설마 내가 곧 죽는….”
“아니요!”
“왜! 뭐가!”
깜짝이야. 의진이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서운의 얼굴을 감싸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의진이 자체 음소거 기능을 작동시켰다.
“…긴 누가 …습니까! 그런 표현은 삼가 주십시오.”
“아니, 진짜 죽는다는 게 아니… 지금 뭐 해?”
“하나도 안 들립니다.”
“…그래 보이네.”
“전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의진이 대놓고 보이콧을 선언했다. 야무지게 양쪽 귀까지 틀어막은 걸 보니 쉽게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수명이 다한다는….”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어… 그럼, 하늘에 간다는….”
“가시긴 어딜 갑니까!”
“…천국?”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습니다!”
“거길 뜨는 건….”
“뜨긴 어딜 뜹니까! 못 뜨십니다!”
“…야 이.”
어쩌라고 이 새끼야. 서운이 말하는 족족 죄다 말대꾸를 해 대니 대화에 진전이 없다. 의진이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건 처음인지라 의문만 깊어진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단 말이지. 이 난리를 종합해 보면 서운의 건강에 큰일이 생긴 것 같은데, 히트 사이클이 앞당겨진 걸 제외하면 서운은 지극히 건강한 상태다. 의료원장조차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진실을 알고 충격에 휩싸일 환자를 대신해 보호자에게 연락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의료원장이라면 구태여 그러지 않을 것 같다. 높은 확률로 본인에게 직접 연락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않을까. 서운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혹시 의료원장님이랑 통화했어요?”
“아니요. 바쁘신지 전화 연결이 안 되더군요. 내려가서 직접 찾아뵐 예정입니다.”
“…그럼 설마….”
“네.”
“…내 얘기만 듣고….”
“네. 듣고 있습니다. 마저 말씀하십시오.”
두두두두두! 두두두두두두! 서운의, 서운에 의한, 서운을 위해 띄워진 헬리콥터 한 대가 덩달아 서운을 독촉하고 나섰다. 의진이라면 서운이 어떤 질문을 해도 솔직하게 대답할 테지만 그래서 더 못 물어보겠다. 설마 이게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살다 살다 벤츠남은 들어 봤어도 헬기남은 또 처음이다. 자세히 보니까 선글라스도 하필 보잉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서운 씨?”
어서 와, 헬기남은 처음이지? 헬기남이 서운을 부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날아온 건지 잘생긴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삽살개 경보부터 난데없는 헬기남의 등장까지, 황당하다. 분명히 황당한데 한편으로는 기분이 막 나쁘지만은 않다. 소, 솔직히 좀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12시간 넘게 이어진 공복과 각종 사건 사고가 이성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일단! 의료원장님이랑 통화부터 해요. 안 받으시면 그때 같이 내려가고.”
설레는 건 설레는 거고 이러다 아사하게 생겼다. 서운이 생존 본능에 못 이겨 상황 정리에 나섰다.
“…후, 올 것이 왔군요. 알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어, 뭐… 그래요. 파이팅…!”
“감사합니다.”
의료원장과의 통화를 앞둔 의진은 어딘가 비장했다. 서운은 응원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으며 줄곧 궁금했던 걸 물었다.
“나 그동안 헬기 좀 구경해도 돼요?”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안전 교육 후 탑승도 가능합니다.”
“…아니요. 당분간 공중은 좀….”
멀미는 가라앉았지만 당분간 땅에서 발을 떼고 싶지 않다. 오늘의 기억이 완전히 흐려질 때까지 한동안은 그럴 테다. 서운은 정중하게 의진의 제안을 거절하고는 조종사의 안내를 받아 헬기를 구경했다.
당연하게도 비행기와는 천지 차이였다. 좋게 말하면 즉각적인 비행에 최적화된, 나쁘게 말하면 멀미에 최적화된 구조다. 안 탄다고 하길 잘했다. 서운은 내심 안도하며 인증샷 남기기에 집중했다. 기왕 찍는 거 선글라스 좀 빌려달라고 할까. 서운이 고민하던 그때, 무언가가 서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억!”
억 소리 난다는 말이 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마침 앉아 있어서 다행이지 서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정작 서운을 이렇게 만든 원흉은 제 덩치도 모르고 서운에게 안기듯이 서운을 안고 있었다.
그래, 그래. 헬기 구석에 처박힌 서운이 화내는 것도 잊고서 제 품에 안겨 든 의진의 등을 토닥였다.
“아무 일도 아니라지?”
짐짓 어른스럽게 묻자 서운의 품에 파묻혀 있는 의진의 정수리가 격하게 흔들린다. 하하, 자연스럽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입니다….”
의진은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마음이 고장 난 로봇 같았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서운 씨.”
“그래, 그래.”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던 걸까. 의진은 모든 게 오해라는 걸 알면서도 서운의 품을 떠날 줄 몰랐다. 제 힘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 힘껏 서운을 끌어안고 있다.
조금 답답하긴 하지만, 이따금씩 숨쉬기가 힘들 만큼 압박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품 안의 커다란 덩치가 안정을 되찾으려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서운은 흉통의 통증을 무시한 채 얌전히 제 몸을 내어 주었다. 격한 끄덕임 후에도 의진은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떨리는 숨과 불규칙한 호흡이 서운의 가슴팍으로 쏟아져 내렸다.
아.
아, 아.
제대로 전해졌다. 전해지고 말았다. 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제 마음을 전해 오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다. 의진은 언제나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서운에게 떨어질 줄 모르는 두 눈은 어떤 상황에서도 서운의 행동만을 좇았고, 서운이 하는 말은 무엇 하나 흘려듣지 않았다.
아, 어떻게 이걸 몰랐지. 대체 왜 몰랐을까. 서운이 힘껏 의진을 마주 안았다. 쿵쿵쿵쿵, 맞닿은 가슴 너머로 의진의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서운은 다시금 힘을 주어 의진을 끌어안았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온몸으로 의진을 받아 냈다.
마주 안은 의진의 뒤로 탁 트인 하늘이 보인다. 하늘은 여전히 희뿌옇고 미세먼지 농도는 매우 나쁨이다. 멀리서는 눈치껏 떨어져 있는 가드들과 조종사가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 민망하고 배고프지만, 피곤하고 황당하지만 역시 나쁜 기분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랑스럽다. 서운은 제 품 안의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온 힘을 다해 이 사람을 사랑해 주고 싶다. 당장 밥부터 먹고 싶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서운이 의진의 떨리는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배고프다. 이제 집에 갈까요?”
“그럼 당장 가까운 곳에서 식사부터….”
“집에 가자, 지니야.”
“…….”
“이러다 네 남편 아사하겠어.”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럼 배고파 죽겠….”
“…긴 누가 …습니까! 그런 부정적인 어휘는 삼가 주십시오.”
“…알겠으니까 집에 좀 가자.”
“그럼 헬기로….”
“그냥 평범하게 가면 안 될까…?”
두 사람은 그길로 병원을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이제 정말 집에 간다. 종일 사건 사고에 시달린 서운이 택시에 오르자마자 맥없이 늘어졌다.
“아이고, 피곤하다.”
서운이 앓는 소리를 하며 의진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택시 안이라 완전히 눕지는 못하고 반만 기대 누웠다.
“어디 아프십니까?”
서운의 머리가 닿자 의진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아니.”
“그럼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
가뜩이나 부드럽지 않은 몸에 힘까지 들어가니 여간 딱딱한 게 아니다.
“…….”
“…….”
“뭐야. 벌써 끝이야?”
“아니요. 고민 중입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진중한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먼저 샌다. 톡톡, 서운이 의진의 가슴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힘 좀 빼 봐요.”
“이렇게 말입니까?”
“오. 좋네. 딱이다.”
“이 정도로 유지하면 되겠습니까?”
“응.”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자세가 한결 안정감 있어졌다. 몸이 편안하니 절로 잠이 쏟아진다. 서운은 의진에게 기댄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건강 검진 한 번 받으려다 이게 다 무슨 봉변인지 모르겠다. 불과 반나절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다소 충격적이었던 의진의 발현 시기부터 서운의 인생에 다시없을 흑역사 적립까지, 다시 생각해도 참 파란만장한 하루다. 의진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이 없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 애인과 마주칠 건 또 뭐란 말인가.
아마도 서운 혼자 알아봤다고 믿고 싶은 그는 다른 사람과 함께였다. 그렇게 변했는데, 과거의 그 사람은 더 이상 사라지고 없는데 헤어짐이 무색하게도 한 번에 알아봤다. 5년이 길긴 길구나. 서운은 잠결에 그런 생각을 했다. 의진을 만나기 전, 지난 연애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어쩌면 꿈을 꾼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리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덕분에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처음으로 남자의 가족을 소개받던 그날, 서운의 연애도 끝이 났다. 남성 오메가에 대한 미약한 편견과 차마 숨겨지지 않는 불만스러운 표정들, 무엇보다 남자의 가족들은 서운의 가족 관계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이를 기점으로 급격히 줄어들던 어른들의 말수와 식사 내내 부모 눈치를 살피기 바쁘던, 서운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남자.
남자와는 그렇게 끝이 났다. 결혼 앞에서 5년이라는 시간은 지극히 무의미했다. 그래도 그렇지, 설마 잠수를 탈 줄은 몰랐기에 서운은 한동안 인간에 대한 환멸과 불신에 시달려야 했다. 연인관계를 떠나 인간적으로 믿고 의지했던 사람이기에 배신감은 쉽게 수그러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도 힘이 든다는 걸 서운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랬던 때가 있었다. 그땐 참 힘들었는데. 사랑했던 기억도, 원망했던 마음도 이제는 모든 게 희미하다. 참 신기하지. 사랑만이 아니라 미워하는 마음도 결국은 닳아 없어지더라. 전 애인의 웃는 낯짝을 보고도 서운이 온전히 괜찮을 수 있었던 이유다. 물론 기분이 막 좋은 건 아니었으나 이조차 오래가지는 않았다. 서운에게 남자는 과거의 오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깨셨습니까.”
“…….”
“이대로 더 주무시겠습니까?”
현재는 바로 이곳에 있다. 바로 여기, 서운의 옆에.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서운은 온 힘을 다해 이 마음을 지켜 나가기로 했다. 함부로 짓밟히지 않도록 누구보다 소중히 아껴 줄 거다. 설령 닳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함께할 거다. 지켜 줄 거다. 서운이 몽롱하게 의진을 올려다보았다. 의진은 여전히 서운에게 한쪽 어깨를 내어 주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어요?”
“도착 시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도착했습니다.”
“…뭐?”
“정확히 42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잠이 덜 깬 서운이 느리게 두 눈을 깜빡거렸다. 줄곧 조용하던 두 사람이 만들어 낸 인기척에 택시 기사가 넉살 좋게 말을 걸어왔다.
“아이고, 이제야 일어나셨네. 아주 달게 주무시더만.”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어째 택시가 미동도 않고 서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지금 기사님이 동영상을 보고 계셨던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에 슬쩍 창밖을 둘러보니 바로 앞에 두 사람의 신혼집이 보인다. 42분 전에 도착했다더니 이 상태로 42분을 보낸 모양이다.
“깨우지!”
잠이 확 달아난다. 택시 기사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보아하니 42분값을 지불하고도 남은 것 같은데 이게 무슨 돈지랄인가 싶다. “혹시 일어나고 싶으셨던 겁니까?” 서운이 헛소리를 하는 의진을 챙겨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물론 표현만 그랬지 실제로 들고 내리진 않았다.
“근데 선글라스 의진 씨 거예요?”
“네, 그렇습니다.”
“잘 어울려요.”
“감사합니다.”
“지금은 왜 안 썼어요?”
“해가 졌으니까요.”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정원을 걸었다. 한낮의 소동이 거짓말처럼 꽤나 평화로운 분위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운을 불안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버거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또 잘 모르겠다. 불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사람이라면 불안해도 괜찮을 것 같다.
이런 마음조차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감정은 결국 닳아 없어진다. 그걸 모르지 않는데도 자꾸만 마음이 커져 간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기어코 사랑이 하고 싶다. 이 사람과 제대로 부딪쳐 보고 싶다. 이 사랑의 끝을 보고 싶다.
의진 씨, 현관 앞에 다다른 서운이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의진을 불러 세웠다. “네, 말씀하십시오.” 의진이 마지막 비밀번호를 입력하며 대답했다.
“…아까는 고마워요.”
“무엇이 말입니까?”
“그냥, 다.”
“답변이 다소 추상적이군요. 구체적으로 한 가지 예시를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건 전혀 예상 못 했는데. 조금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서운은 프로니까. 빠르게 적응을 마친 서운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랑 결혼하자고 해 줘서 고마워요.”
“시기적으로 적절한 예시는 아니군요. 분명히 ‘아까’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새끼가. 여기서 잠깐 1차 위기가 찾아왔다. 당황해서가 아니라 빡이 쳐서. 서운이 의아해하는 의진을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겁니까?”
아무래도 서운이 의진을 너무 얕본 모양이다. 집 안에서도 의진의 이의 제기는 계속되었다.
“시끄러워요.”
“제가 잘못 들은 거라면….”
“…….”
“…….”
“…….”
아, 이거구나. 서운은 비로소 의진의 입을 닫는 방법을 알아냈다. 의진이 자발적으로 닫는 건 아니고 약간의 강제성이 부과되긴 하나 거부감은 전혀 없어 보인다.
쪽…. 서운이 먼저 입술을 뗐다. 부족했는지 의진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바짝 내민다. 귀엽기는. 쪼옥, 한 번 더 입을 맞춘 서운이 마저 신을 벗었다. 조용해진 의진이 서운을 따라 급하게 신을 벗는 게 느껴졌다.
“서운 씨.”
“응.”
“혹시 택시에서 신호를 보내신 겁니까?”
“신호? 무슨 신호?”
“허벅지 신호 말입니다. 제가 모르는 사이에 가슴으로 변질된 건….”
쟤 또 뭐라니. 서운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며 한마디 했다. 이리 와요, 말 하나는 잘 듣는 의진이 의아해하면서도 누구보다 빠르게 서운 앞으로 달려왔다. 서운은 그런 의진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병원 옥상에서부터 생각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앞으로 몸 관리 좀 하려고요.”
“…설마….”
“아니, 아니야. 하지 마. 생각하지 마. 뭐든 다 아니야.”
“….”
“아니라니까? 의진 씨 때문에 하려는 건데.”
“저 때문에 말입니까?”
“그럼. 의진 씨 때문이지. 내가 아프면 의진 씨 어떤 얼굴 하는지 다 알았는데 알면서 어떻게 그래요.”
“…….”
“앞으로는 그런 얼굴 안 하도록 알아서 잘할게요.”
장난스러운 마무리에도 의진의 얼굴은 풀어질 줄 몰랐다. 이게 또 왜 이러지? 요즘 들어 고장이 잦아졌다. 의진 씨? 의진 씨? 서운은 몇 번이나 의진을 부른 끝에 의진과 똑바로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서운 씨.”
“어. 왜 또 그래. 뭐야. 무슨 일인데!”
“…배 많이 고프십니까?”
“지금은 또 괜찮은 것 같고? 일정 수준을 넘어서니까 감각이 없어졌어요.”
“…그럼.”
“응.”
“…….”
“…아.”
“…….”
“…일단 각자 씻고 올까요? 밥은, 배달시키면 되니까….”
이런 눈치는 기가 막히게 빠른 서운이 알아서 상황을 정리했다. “어느 욕실 쓸래요?” 서운의 질문에 의진이 우문현답을 했다.
“괜찮으시면 같이 씻으시는 건 어떠십니까?”
“…….”
“물론… 싫으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그럴 리가요, 솔로몬 폐하. 의진의 배려는 서운이 알아서 거절했다.
“내 남편 똑똑한데?”
“감사합니다.”
서운의 칭찬에 의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주 살짝, 아마 의진을 처음 본 사람이라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테다. 그 미세한 변화를 알아차리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참 웃기지. 마음이 생기니까 이제는 이런 세세한 표정 변화까지 눈에 들어온다. 서운이 몇 년 만에 마주친 전 애인을 한 번에 알아봤던 것처럼 그렇게, 사람 마음처럼 신기한 것도 없다. 동시에 위대하다.
분명히 욕실에서 같이 씻기로 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두 사람은 입술부터 갖다 대고 있었다. 아, 응, 아, 아파, 천천, 히…. 이러다 입술이 찢어질 것 같아서 투정 부리듯 요구 사항을 말하자 의진의 입맞춤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진짜 말은 잘 듣는다. 그래서 좋다. 아니, 그래서 더 좋다.
모르겠다. 그냥 네가 좋아. 서운은 솔직하게 제 마음을 인정했다. 가끔은 좀 등신 같을 때도 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귀여워 보인다. 나 때문에 헬기까지 띄웠잖아. 내가 죽는 줄 알고 헬기를 타고 왔다고!
의진의 입맞춤은 부드러워졌는데 이제는 서운이 난리다. 서운이 이를 내어 의진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극이 셌는지 서운과 맞닿은 의진의 몸이 크게 움칠거린다. 아파하는 기색은 아니어서 한 번 더 깨물었다. 그러고는 혀끝으로 살살 핥았다. 쪽쪽거리며 빨기도 했다. 그 짓을 몇 번 반복하자 의진의 손이 서운의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이러다 욕실까지 가지도 못할 것 같다.
이 알파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서운은 대리석 식탁에 누워 의진과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다시 생각해도 참 황당한 만남이었다. 의진, 씨, 서운이 정신없이 제 바지를 끌어 내리는 의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네. 서운 씨.”
아, 급한 표정. 서운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살짝 풀려 있다. 짜릿하다. 서운이 의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람 인연이 진짜 신기하지… 아….”
“네. 말씀하십시오.”
“않, 아요…?”
의진의 손과 입, 어느 곳 하나 멈출 줄을 모른다. 빠르게 서운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린 의진이 서운의 맨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어느새 젖어 버린 입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의진을 반긴다. 뻐끔뻐끔, 내벽에서 나오는 애액 때문에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렇습니까.”
“의진 씨는, 안 신기해요?”
“어느 부분이 말입니까?”
“우리가 이러고 있는, 나, 아직 안 씻었는…!”
“…….”
“아…!”
“…….”
“으, 응…!”
젖은 입구를 확인한 의진이 망설임 없이 얼굴을 내리고 혀를 가져다 댔다. 할짝, 할짝. 밖으로 새어 나온 애액을 꼼꼼하게 핥는가 싶다가도 불시에 구멍을 빨아 대는 통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서운이 헐떡일수록 구멍을 빠는 압이 거세졌다. 입을 맞출 땐 입술을 뜯어 놓을 것처럼 덤벼들더니 이제는 대상이 구멍으로 바뀌었다. 서운은 차가운 대리석 식탁에 누워 열에 들뜬 신음을 토해 내야 했다.
“저는 별로 신기하지 않습니다.”
한참 동안 구멍을 맛보던 의진이 스스로 바지 버클을 잡아 풀며 말했다. 서운은 식탁에 누운 채로 몽롱하게 의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 예상대로입니다.”
“무슨, 예상….”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서운 씨에게 강한 확신을 느꼈습니다.”
“하, 왜. 가치관이, 잘 맞아서…?”
“그건 그, 다음입니다.”
“다음, 이라니… 아…!”
의진이 서운의 다리를 활짝 잡아 벌렸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껏 벌어진 다리 사이로 촉촉해진 구멍이 다급하게 뻐끔거렸다.
“보자마자 알았습니다. 바로, 알아봤습니다.”
의진이 다급하게 재킷 안쪽을 더듬어 콘돔을 꺼내 들었다. 의진은 어딘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무작정 콘돔을 잡아 찢었다.
“다른 알파보다 제가 먼저….”
다른 알파라니, 두 사람 사이에서 있을 수 없는 단어였다. 의진이 서운의 연애사를 알 리가 없으니 전 애인은 아닐 테고, 의진이 언급할 만한 다른 알파는 기껏해야 한 명이 전부다.
“제가 먼저 서운 씨를 알아봤습니다.”
“그게 무슨….”
“착오든 오해든 실수든 상관없습니다. 서운 씨를 알아본 건 저입니다.”
마음이 급한 탓인지 콘돔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계속 말려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하…. 짜증 섞인 신음과 함께 의진이 말라 버린 콘돔을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찌익, 이내 새 콘돔을 찢은 의진이 빠르게 착용을 마치고 급하게 귀두를 입구에 들이밀었다.
“어, 으, 윽…!”
즈즈즈, 해 준 것도 없는데 저 혼자 단단히 일어선 성기가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입구가 벌어지면서 단단한 살덩이가 내벽을 쑤시고 들어오는 감각이 선연했다. 허억, 헉…! 오랜만에 느껴 보는 압박감에 서운이 의진의 밑에서 헐떡거렸다. 방금 전까지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 다 잊어버렸다.
“이 사람이다. 이 사람과, 하… 결혼, 해야겠다….”
“어, 어…!”
“이 사람이, 내, 오메가구나….”
“아…!”
미끄러운 애액을 타고 알아서 잘 들어오는가 싶더니 중간쯤에서 턱 하고 걸린다. 젖은 내벽이 성기에 찰싹 달라붙어서 진입을 방해하고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내벽을 느낀 의진이 반쯤 밀어 넣은 성기를 그대로 빼 버렸다.
“이, 사람이다.”
“앗!”
퍽! 그러더니 한 번에 좁은 내벽을 꿰뚫으며 밀고 들어온다. 흐, 아아…! 갑작스러운 삽입에 서운의 내벽이 강하게 수축했다.
“서운 씨가, 들어오셨을, 때… 바로… 하… 제가 먼저… 서운 씨, 힘을 조금, 빼 주시겠습니까….”
“으, 잘, 안… 잘 안 빠져….”
“아니요. 하실 수 있습니다.”
“으, 응….”
“천천히….”
의진이 부드럽게 서운을 달랜다. 서운이 저에게 그랬듯이 제 딴에는 열심히 서운의 맨엉덩이를 토닥거린다. 문제는 이미 삽입이 된 상태라 흥분에 못 이겨 힘 조절이 잘 안 됐다는 건데, 본의 아니게 적당한 압으로 엉덩이를 얻어맞은 서운은 새로운 자극에 눈을 뜨게 된다. 이거 뭐야! 생전 처음 겪어 보는 쾌감에 서운의 주둥이가 또다시 이성을 배신했다.
“하, 한 번 더….”
“무엇을, 말입니까…?”
“…엉덩이, 한 번 더 해 줘….”
차마 때려 달라고는 못 했다. 다리로 의진의 허리를 감으며 조르듯이 엉덩이를 흔들자 의진이 풀린 눈으로 서운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찰싹…! 때리는 것도 토닥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손길에 서운의 내벽에서 애액이 터져 나왔다. 애액을 뒤집어쓴 성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힘 있게 내벽을 넓히며 끝까지 밀고 들어갔다. 허억, 하, 읏, 아! 두 사람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서운 씨….”
“응, 응….”
“너무….”
“응….”
“…너무….”
차오르는 성감에 짝짝이로 벌어진 동공에는 오직 서운만이 가득하다. 욕실까지는 차마 가지도 못하고 식탁 위에 눕혀진 서운이 하체를 훤히 내놓고 의진의 아래에서 할딱이고 있다. 벗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상체는 여전히 단정한 니트 차림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에서 난폭한 마음이 치밀어 오른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의진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언뜻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왜 그래….”
“무엇이, 말입니까…?”
“왜 화가 났어….”
의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폭력적인 쾌감을 가라앉히려는 듯 그저 침착하게 심호흡을 할 뿐이었다. 이내 호흡을 가다듬은 의진이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요. 아닙니다. 화가 난 건 아닙니다.”
“그럼, 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의진이 천천히 손을 내려 서운의 배를 쓰다듬었다. 판판한 뱃가죽이 아래만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조심스럽게 불룩 솟은 아랫배를 더듬자 서운이 움칠거리며 구멍을 조여 댄다. 의식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타인의 신체가 낯설어 입구가 절로 조여든 것뿐이었다.
“…서운 씨.”
“응.”
“서운 씨.”
“으응.”
“서운 씨….”
의진이 서운을 부른다. 서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는 의진도 몰랐다. 그저 알고 있는 거라고는 서운의 이름이 전부다.
“왜….”
“…….”
“배, 그만 만져. 이상해….”
“싫으십니까?”
“싫은 건 아닌데….”
“…….”
“…좋아.”
서운이 의진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밑에는 성기에 꿰뚫린 채, 아랫배는 잔뜩 부풀어 오른 채 의진을 보며 웃는다. 삽입은 급하게 이루어졌지만 움직이지 않고 기다려 준 의진 덕분에 삽입이 한결 편안해진 상태였다.
“…어?”
“…….”
“어… 이거, 뭐야….”
“…서운 씨.”
“어, 어어! 의, 진, 페로, 페로몬, 아!”
“…하….”
“흐아, 앗, 아, 안, 돼, 이거, 이상! 아! 아아아!”
알파가 이성을 잃고 무분별하게 페로몬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몸이 이어진 상태에서 페로몬이 쏟아져 내리자 결합부를 통해 안팎으로 페로몬이 밀려 들어온다. 공기 중을 부유하는 페로몬과 의진의 성기가 들어와 있는 내벽으로 끊임없이 페로몬이 쏟아진다. 은근하게 퍼져 있던 쾌감이 강제로 끌어 올려지는 감각은 가히 폭력적이었다.
서운이 강렬한 쾌감을 피해 달아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의진의 성기가 들어와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 아아, 아아아!”
결국 서운은 의진에게 꿰뚫린 채 그대로 갑작스러운 사정을 맞이했다. 페로몬 때문에 몸속이 잔뜩 달궈져서 숨만 쉬어도 오르가슴이 몰려왔다.
강제적으로 맞이한 사정의 여운에 서운의 몸이 덜덜 떨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여운이 가시지 않아 가쁜 숨을 몰아쉬던 서운의 아랫배가 한층 부풀어 오른 것도 그때였다.
“…저도, 좋습니다.”
의진이 허리를 숙이며 서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안, 돼! 거기 있…!”
“…저도….”
“아…!”
의진이 발버둥 치는 서운의 턱을 그러쥐며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허리를 숙이며 한껏 다가온 의진 때문에 자연스럽게 결합부가 깊어졌다. 안쪽 깊은 곳까지 들어찬 성기가 서운의 내벽을 빈틈없이 채웠다. 그것뿐일 텐데 아까부터 계속 아랫배가 빠듯한 느낌이 든다. 분명히 끝까지 다 들어온 것 같은데 뒤늦게 입구가 벌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너무, 좋습니다. 머리가… 이상해지는 기분입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납니다.”
설마…. 먼저 이상 반응을 알아차린 건 서운이었다.
“의진, 씨, 이거, 이상, 아!”
“하….”
“노티, 아! 앗! 아아!”
그렇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의진이 비로소 허릿짓을 시작했다. 강한 허릿짓에 서운은 그대로 식탁 끝까지 밀려났다가 의진에게 붙잡혀 다시금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의진이 서운의 양쪽 어깨를 단단히 그러쥐고는 아래에서 미친 듯이 허리를 쳐올렸다. 퍽! 퍼억! 성기가 강하게 밀려 들어올 때마다 물이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흐아, 아! 아아! 서운의 입에서 끊임없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정사의 열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퍼억! 단단한 살덩이가 망설임 없이 내벽을 때려 박았다. 겨우 그것뿐인데 몸 안쪽이 강제로 사정당하는 기분이다. 실제로 서운은 의진의 아래에서 정신없이 흔들리며 몇 번이고 사정을 거듭하고 있었다. 마치 약에 취한 사람 같았다. 평소보다 흥분한 의진의 강한 허릿짓 탓일 수도 있고, 폭주에 가까운 알파의 페로몬 탓일 수도 있다. 물론 그 이유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어…!”
“…하….”
“어, 어어, 어!”
“후…!”
설마 했던 생각이 확신이 되는 순간 의진이 급하게 성기를 빼냈다. 애액으로 흠뻑 젖어 있는 성기는 콘돔을 낀 채로 잔뜩 부풀어 있었다. 성기가 평소보다 배로 커져 있었다.
노팅이다. 의진이 서운에게 노팅을 하려 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서운의 온몸이 달아올랐다.
노팅은 단순한 신체 증상이 아니다. 육체적인 흥분과 쾌감은 물론이고 상대에 대한 정서적인 유대와 본성에 가까운 폭력적인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 서운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알파를 끌어당겼다. 이대로 더 깊이 닿고 싶었다. 성기가 빠져나간 아래가 지나치게 허전했다.
제 허리를 감아 오는 서운의 다리에 의진이 그대로 서운에게 달려들었다. 이대로 생애 첫 노팅을 하나 싶었는데 의진의 얼굴이 서운의 아래로 향했다.
그러더니 성기 대신 혀를 집어넣고 서운의 구멍을 빨기 시작한다. 쭙, 쭈웁. 질척하게 젖어 있는 아래를 강하게 빨아 올리는 힘에 서운의 구멍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서운은 의진의 머리를 제 아래로 끌어당기며 다시 한 번 사정했다. 도대체 몇 번째 사정인지 셀 수조차 없었다. 연이은 사정으로 더는 정액도 나오지 않았다.
서운이 사정하자 의진이 서운을 내려다보며 스스로 성기를 흔들었다. 콘돔을 집어 던지고는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살덩이를 흔들며 서운의 아랫배에 정액을 쏟아 냈다. 방금 전까지 의진의 성기가 들어 있던 곳이다.
하아, 하아…. 두 사람의 입에서 더운 숨이 쏟아져 나왔다. “…서운 씨.” 사정을 마친 의진이 곧장 운에게 성기를 붙여 왔다. 허벅지에 비벼지는 의진의 성기가 지나치게 단단했다. 한 차례 정액을 쏟아 낸 후에도 크기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서운 씨….”
“…아….”
“서운 씨, 서운 씨….”
서운의 다리가 맥없이 벌어졌다. 서운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유연하게 벌어지는 두 다리를 내려다보다 초점이 사라진 의진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이제는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서운은 끝없이 밀려드는 애정 속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두 번째 정사가 시작되었다.
* * *
“서운 씨, 괜찮으십니까.”
아니. 안 괜찮다. 몇 번째인지 모를 정사를 끝내고 서운은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옷 입을 힘도 없다. 밑에 깔린 이불을 꺼내 덮을 힘도 없다. 복상사를 하든 아사를 하든 오늘이 서운의 제삿날이 될지도 모른다. 핏기 없는 서운의 모습에 의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괜찮다고 해 줘야 하는데 기운이 하나도 없다.
“서운 씨, 앞으로는 무리하지 마시고 충분히 준비되셨을 때 말씀 주십시오.”
“뭐라는 거야….”
“섹스 말입니다. 저는 괜찮으니 서운 씨가 준비되셨을 때 신호 주십시오.”
“…뭔데 그건 또.”
준비는 또 뭐고 신호는 또 뭘까. 뭔지는 몰라도 앞서 나온 섹스라는 단어와 상충을 일으키는 것만은 분명하다. 서운이 이대로 푹 잠겨 있고 싶은 정사의 여운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의진이 눈동자만 굴려 자신을 쳐다보는 서운을 안쓰러워하며 말했다.
“서운 씨의 건강을 생각하면 그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제게 맞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까도 애액 같은 정액을 싸셨잖습니까.”
“그건…!”
그 준비가 그런 뜻이었니. 실제로도 서운이 그런 정액을 싼 건 맞기에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 그치만….” 서운은 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냉철하게 본 안건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나섰다.
“…내가 하고 싶을 때 의진 씨가 안 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힘들어서 그렇지 서운도 좋긴 좋았다. 오랜만의 섹스인지라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의진이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은 건 처음 봤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려드는 의진 덕분에 서운은 많은 걸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선 자리에 나왔다가 상대를 착각해 우연히 자리를 함께한 사이다. 여기까지가 서운이 알고 있던 두 사람의 첫 만남으로, 이 절대적인 사실 관계가 누군가에게는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걸 서운은 몰랐다. 서운은 남들에게 숨기기 급급했던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의진에게는 확신의 시작이 되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운은 몰랐던, 어쩌면 이대로 영영 모를 뻔한 이야기. 나는 뭘 그렇게 자신했던 걸까. 서운은 의진과의 관계를 확신하고 있었다. 의진은 이런 사람이니까, 나랑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니까, 라며 멋대로 추측하고 판단하기 바빴다. 가끔은 서운 혼자만 노력하는 것 같아 초라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관계라는 건 일방향일 수가 없는데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서운은 불현듯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실제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랬다.
“아니요. 그럴 일은 앞으로도 절대 없을 겁니다.”
기껏해야 서운의 마음이 달라졌을 뿐이다. 어딘가 비장하기까지 한 의진의 모습에 서운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사실입니다. 전 항상 하고 싶으니까요.”
“…오….”
“그러니 서운 씨가 원하실 때 편하게 신호 주십시오. 전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이럴 수가. 서운의 인생에 다시없을 최고의 프러포즈였다. 우습게도 가슴이 떨리는 걸 보면 서운의 생각처럼 닳을 대로 닳아 버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이미 닳아 버렸다고 자신했던 것조차 서운의 자만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슴을 적히는 넘치는 애정에 서운이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의진 씨도 참… 내가 그렇게 좋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뭐? 다시 말해 봐.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도대체가 방심할 수가 없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살벌해진 분위기 속에서 의진이 눈치도 없이 역질문을 해 왔다.
“좋아한다의 기준이 어떻게 됩니까?”
저 새끼 아까 섹스 할 땐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서운이 쾌감으로 눅눅해진 기억을 떠올렸다.
“신체적인 쾌감이 아닌 정서적인 차원의 감정은 어떤 식으로 인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감각이라고 표현해야겠군요. 해당 감각을 인지하게 되는 경위가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감각과는 무엇이 다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흠, 서운이 진지하게 의진의 개소리를 경청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듣다 보니까 조금은, 아주 조금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철저하게 의진의 입장에 한해서다.
“그래서 나랑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그럼 맞춤형 교육으로 가면 된다. 정사의 여운은 서운을 누구보다 관대하게 만들었다. 서운의 질문에 의진이 잔뜩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당연한 걸 물으시는군요. 당연히 그렇습니다. 앞으로도 서운 씨와 쭉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게 왜일 것 같니. 서운은 그렇게 물으려다 이쯤에서 적당히 교육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소크라테스도 제자들을 가르칠 땐 든든히 밥부터 챙겨 먹었을 테다. 소크라테스식 교육법은 많은 인내와 체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일단 뭐라도 좀 먹죠.”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메뉴가 있으십니까?”
“기름진 거!”
솟구치는 삶의 의욕에 서운이 아픈 것도 잊고서 냉큼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서운의 허리와 고관절이 우두두둑! 비명을 질러 댔다. 지금 온몸의 관절이 다 부서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서운은 저 혼자 벌거벗고 있는 것도 잊고서 허리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의진이 황급히 서운을 부축했다.
“아니… 안 괜찮은데 일단 밥부터 먹고….”
서운이 그런 의진을 말리며 다시금 식사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다.
“알겠습니다. 그럼 간략하게 카테고리를….”
“응.”
“…….”
“왜 또.”
중요한 대목에서 의진이 고장 났다. 말을 하다 말고 빤히 서운을 쳐다보고 있다. 쳐다보는 것쯤이야 뭐, 하루 이틀도 아니다. “왜?” 서운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의진이 느리게 서운을 위아래로 훑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서운의 몸에는 잇자국과 울혈, 붉은 손자국이 가득했다. 누가 뭐래도 적나라한 정사의 흔적이 담겨 있는 몸이었다.
“역시 서운 씨는 지금 모습이 제일 잘 어울립니다.”
“…어?”
“처음 뵀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도 제 예상이 맞았군요.”
“어, 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당황한 서운이 방금 전의 대화를 곱씹어 보는 사이 의진이 본래의 사무적인 어투로 물었다.
“그럼 지금부터 기름진 음식의 카테고리를 정해 주시겠습니까.”
결혼 후에야 시작된 두 사람의 연애, 바야흐로 신혼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