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Meteor shower on the cruise!
“와아!”
민영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바다다!”
그야말로 끝내주는 날씨였다. 하늘은 높고 푸르른데 고스란히 햇살을 머금은 바다는 예쁘게도 반짝거린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마음이 들뜨는 풍경에 민영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여민영, 20세, 베타, 예비 재수생. 민영은 2주 뒤에 재수 학원 개강을 앞두고 있다. 상견례 자리에서 계획된 크루즈 파티를 오늘까지 미뤄지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크루즈 파티 좀 해 보겠다고 결혼까지 서둘렀건만 민영의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유기한 대기, 수능도 끝났겠다 의진도 곧 한국으로 돌아오겠다 이제야말로 떠나 보려 했더니만 민영이 수능을 시원하게 말아먹는 바람에 무기한 대기,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사돈, 맥주 한 잔 더 하시겠어요?”
“좋죠!”
“돌고래는 언제 나와요?”
“엄마! 나 사진! 사진 찍어 줘!”
마침내 꿈에 그리던 크루즈 파티가 시작되었다. 한파가 몰아치는 한국과 달리 이곳 호주는 청량한 여름 하늘을 자랑하고 있어 서운과 의진의 가족 모두가 잔뜩 신이 났다. 의도한 거긴 하지만 호주의 최대 국경일인 Australia Day와 일정이 제대로 맞물리는 바람에 크루즈 안팎으로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다.
“오빠도 사진 찍어 줘?”
“괜찮아.”
“형부는요?”
“저도 괜찮습니다.”
“아하….”
“…….”
“…….”
분명히 축제 분위기인데… 두 사람을 바라보는 민영의 표정은 그러지 못하다. 민영을 의식한 서운이 눈치껏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진 씨 민영이랑 찍은 사진 없죠? 둘이 같이 찍어 줄까요?”
“서운 씨가 원하신다면….”
“…의진 씨가 편한 대로….”
두 사람이 철저하게 서로의 눈치를 살핀다. 비행기에서부터 계속 이랬다. 아무래도 이 신혼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뭐야, 둘이 아직도 존댓말 써?”
“…어쩌다 보니….”
“이참에 놓으면 되겠네!”
어쩔 수 없지, 내가 나서 주는 수밖에!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민영이 적극적으로 징검다리를 자청하고 나섰다.
“서운 씨가 저보다 연장자이신데 제가 함부로 말을 놓을 수는….”
“…우리가 나이 차이가 나면 뭐 얼마나 차이 난다고. 놓고 싶으면 놔요. 난 상관없어요.”
“저도 상관없습니다. 서운 씨가 좋으신 대로 하시죠.”
이러는 거 보면 마냥 싸운 것 같진 않은데 말이지. 민영은 의아해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그럼 호칭이라도 바꾸면 안 돼요?”
“호칭 말입니까?”
“응! 지금은 너무 딱딱하잖아요.”
“…확실히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군요.”
민영의 말에 의진의 얼굴이 한껏 진지해진다. 한편 호칭과 존대에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서운은 별다른 대꾸 없이 의진의 반응만 지켜보고 있었다.
“서운이 형…?”
“…어우.”
취소, 방금 한 말 다 취소다.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지금의 호칭과 존대가 훨씬 좋다. 비교도 안 되게 좋다. 서운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자 의진이 곧바로 호칭을 정정했다.
“서운이 형님…?”
“아우님, 그만하시게.”
덕분에 분위기만 더 나빠졌다. “아, 뭐야!” 콧등에는 선명한 선글라스 자국을 매달고서 민영이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그래서 화해는 언제 할 건데?”
“…싸운 건 아닌….”
“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싸우지 않았으니까요.”
대답 하나는 잘하는 의진이 서운을 대신해 빠르게 반박했다.
“무엇보다 저희에게 싸움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엥?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싸우지 않았다는 건 서운도 동의하지만 저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서운과 민영을 번갈아 쳐다보며 의진이 기다렸다는 듯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96.72%의 페로몬 매칭률을 자랑하니까요. 일반적인 알파, 오메가 부부의 페로몬 매칭률이 약 77%인 걸 감안하면 저희의 수치는 기적에 가깝습니다. 어떻습니까, 페로몬 매칭률이 무려 96.72%인 알파와 오메가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신 소감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민영은 베타다. 알파니 페로몬이니 허구한 날 떠들어 대 봤자 1도 공감이 안 된다는 소리다. 수치를 아는 서운은 말없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놀랍지 않으십니까? 페로몬 매칭률 96.72%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올해 3분기에 열리는 알파-오메가의 페로몬 매칭률과 성생활의 만족도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학회에서….”
“네, 네. 행복한 사랑 하세요.”
“감사합니다. 발표될 예정… 민영 씨, 어디 가십니까? 민영 씨?”
존나 괜한 걱정을 했다. 야무지게 선글라스를 내려쓴 민영이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만하고 이리 와요.”
“하지만 아직 얘기가….”
“이리 와.”
“네, 알겠습니다.”
서운이 쫓아가려는 의진을 붙잡아 제 옆에 내려놓았다. 진짜 얘는 수치를 모른다. 한껏 목소리를 낮춘 서운이 붉어진 얼굴로 의진을 다그쳤다.
“그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돼요? 이러다 영민이한테까지 말하겠네.”
“방금부로 민영 씨께도 소식을 전했으니 이제 영민 군에게만 이야기하면 되긴 합니다.”
“11살 앞에서 성생활 어쩌고 하기만 해라.”
“그 부분만 빼고 얘기하면….”
“…….”
“…네, 알겠습니다.”
의진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운이 손쓸 새도 없이 이루어진 일방적인 폭로전은 유일한 미성년자 여영민을 보호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니 다시 어색한 기운이 맴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어디선가 알싸한 박하 향을 닮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은 여전히 청량하고 상쾌하기만 한데 두 사람은 말이 없다. 리조트를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이 호화스러운 크루즈 위에서 조용한 건 두 사람뿐으로, 그런 것치고는 둘이 찰싹 붙어 앉아 있다. 괜히 서로의 눈치만 살피며 말 그대로 말만 안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크루즈 파티 전으로 돌아간다. 의진이 장기 출장에서 돌아와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신혼 생활을 시작한 지 6주가 되던 날이다.
Meteor shower on the cruise!
의진이 출장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해가 바뀌고 새해가 시작되었다. 서운은 한 것도 없이 그새 한 살을 더 먹었으며, 이제야 좀 신혼 생활을 즐겨 보나 했더니 벌써 결혼 2년 차가 되었다. 이래서 한국식 나이 계산법이 욕을 먹는 거다.
물론 말로만 그렇지 두 사람은 누구보다 열심히 붙어먹고 있었다. 진정한 신혼이었다.
“…잠깐!”
“네, 서운 씨.”
밀착해 있는 두 개의 몸이 억지로 틈을 벌리며 떨어졌다. 간신히 의진을 떼어 낸 서운이 어색하게 물었다.
“그, 오늘도 하려고?”
“무엇을 말입니까?”
목적어가 불분명한 문장에 의진이 단번에 의문을 표했다. 그래 놓고 손은 본래의 목적지를 찾아 슬그머니 서운의 바지 안을 더듬는다. 이쯤 되니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서운도 헷갈린다. 서운이 단호하게 의진의 손을 빼냈다.
“네가 지금 하려는 거요.”
“오늘은 힘드십니까?”
“…우리 다음 주에 검진 있잖아요.”
“…아.”
6주 뒤에 예정되어 있던 페로몬 검사가 임박해지자 두 사람의 불같은 신혼 생활에 제동이 걸렸다. 두 사람의 페로몬 매칭률 결과뿐만이 아니라 간단한 수치 확인이 이루어질 예정이라 서로의 페로몬에 영향을 미치는 과도한 성행위는 금물이다.
“적어도 보름은….”
“…원래는 일주일 아닙니까?”
의진이 예리하게 서운의 오류를 지적했다. 귀신같은 놈. 한 가지 다행인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지라 그다지 놀랍지는 않다는 거다.
“그렇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하하하! 처음에는 작은 지니가 온 줄 알았지 뭡니까. 박하 향이 아주 진동을 하더군요!”
발성은 어찌나 좋던지, 그리 말하며 요란하게 웃어 대던 의료원장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다시금 떠오르는 낯 뜨거운 추억에 서운이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렇습니까.”
“으응.”
“보름….”
“응….”
“…보름….”
“…….”
물론 서로의 페로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이라면 괜찮겠지만 두 사람은 무려 페로몬 매칭률 96.72%에 빛나는 알파와 오메가로,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환상의 궁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런 둘이 좋다고 붙어먹는데 적당히가 가능할 리가.
고로 두 사람은 사이좋게 금욕을 했다. 못한다고 생각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인지라 가벼운 스킨십도 최대한 자제했다.
“서운 씨, 5일 남았습니다.”
“오, 시간 빠르….”
“…앞으로 5일….”
근데 좀 무서운 것 같지…?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의진은 아까부터 거실 소파에 엎드려 있는 서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쟤 지금 눈이 좀 위험한 것 같은데. 소파에 엎드린 채 혼자 잘 놀고 있던 서운이 주춤주춤 몸을 일으켰다. 의진의 시선이 그대로 서운에게 따라붙었다.
“아, 맞다. 의진 씨.”
“네, 서운 씨. 말씀하십시오.”
“나 호주 갈 때 환전해 가려고 하는데 의진 씨는 환전 안 해요?”
양가가 참석하는 크루즈 파티가 실현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두 사람은 곧 호주로 떠난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만큼 일정을 잡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관건은 의외로 민영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검사 당일에 결과만 듣고서 바로 호주행 비행기를 타게 생겼다.
이렇게 들으면 굉장히 피곤할 것 같지만 생각보다 부담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용 수단이 전용기다. 그리고 서운은 전용기를 가지고 있는 의진에게 환전 여부를 물었다. 전혀 생각도 하지 않은 듯 의진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환전 말씀이십니까?”
“응. 현금도 필요할 거고 애들 선물도 사 줘야 하니까….”
“아,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금액을 말씀해 주시면 전부 현찰로 준비해 놓….”
“아니, 아니에요. 이 정도는 그냥 내가 준비할게요.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니까 신경 쓰지 마요.”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역시나, 환전은 신경도 안 쓰고 있다. 그래, 내가 괜한 걸 물었지. 알면서도 물어본 건 단순한 호기심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행 준비를 어떻게 할까, 하는 아주 사소한 의문.
이들은 5일 뒤 전용기로 대륙을 횡단해 바다에서 크루즈 파티를 할 예정이다. 이 성대한 여행을 앞두고 의진 쪽에서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당연해진 가운데 서운은 저 혼자 은행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빈말로도 비용 부담은 같이 못 하겠으니 제 나름대로 성의를 표할 생각이다.
“그럼 은행에 가셔야 합니까?”
“응. 공항은 너무 정신없을 것 같아서요.”
요즘은 모바일 환전 신청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서운은 가까운 지점에서 미리 원하는 금액을 환전해 둘 예정이다. 정확히는 은행에 가서 신청해 둔 돈만 찾아오면 될 테지만. 그 편이 훨씬 편하다.
“괜찮으시면 제가 거래하는 은행을 추천해 드리죠.”
상대방의 호의가 이렇게 부담스럽기도 쉽지 않을 텐데. “아니! 괜찮아요.” 서운이 단칼에 의진의 호의를 거절했다.
“액수가 많은 것도 아니고. 됐어요.”
“제가 거래하는 은행으로 가시면 기다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돈만 찾아오면 되는 거라 오래 안 걸려요.”
“…그렇습니까.”
“응.”
“…환율 우대는 얼마나 받으십니까?”
“어?”
“서운 씨가 얼마를 받으시든 그보다 더 해 드릴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오.”
여기서 조금 혹했다. 이를 눈치챈 의진이 열심히 서운을 밀어붙였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의진 씨도 같이 가는 거예요?”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하지. 서운이 흔쾌히 의견을 번복하자 의진이 단번에 반응을 보인다. 서운의 한 마디에 사르륵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가 사랑스럽다. 귀엽기는, 서운은 당연한 수순처럼 입을 맞추려 다가가다 그대로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마저 하십시오.”
“음, 다음에.”
“각도가 안 맞으시는 거면….”
“아니, 6일 뒤에 할게요.”
“5일입니다!”
“…어, 어. 그래.”
역시 눈이 좀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서운이 빠르게 위험 지대를 벗어났다. 여러모로 자기 몸 하나는 참 잘 챙기는 서운이었다.
이처럼 난데없는 금욕 위기가 있긴 했으나 두 사람은 별 탈 없이 남은 5일을 보낼 수 있었다. 문제가 생긴 건 여행 당일로, 의진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일찍 눈이 떠진 서운이 쓸데없이 부지런을 떨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식으로 은행 본점에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구나 그렇겠지만 서운도 한때는 로또 당첨을 꿈꿨다. (정작 산 적은 없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긴 했지만 어차피 시차 적응도 해야 하니 미리 몸을 피곤하게 해 주는 것도 도움이 될 테다. 그렇게 적당히 주변을 돌아보며 시간을 때우려던 서운은 은행에서 다급하게 달려 나온 사람들에게 이끌려 그대로 VVIP 전용 접견실로 이동하게 된다.
“안녕하십니까. ZZ은행 은행장 송명호라고 합니다.”
일찌감치 그곳에 와 있던, 딱 봐도 어디서 한자리 하실 것 같은 지긋한 중년의 신사가 서운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인자하고 무게감 있는 목소리와 달리 속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부지런히 서운을 위아래로 훑어본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본능 같은 거였다.
의진이 원래 선보기로 했던 오메가가 어느 은행장 자제였더라.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다.
“전무님께 연락받았습니다. 전무님은 따로 오신다고요.”
“네. 제가 서두르는 바람에 조금 있다가 올….”
“저런….”
은행장이 퍽 안쓰러운 얼굴로 측은하게 서운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겉모습은 적당히 꾸며낼 수 있어도 원래 내실을 숨기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그는 뜻 모를 소리를 하며 서운을 다독거렸다.
“신혼부부 페로몬이 그래서야 짝 있는 오메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네?”
“저도 오메가 자식이 있는 부모로서 마음이 좋지만은 않군요.”
“지금 무슨 말씀….”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소탐대실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은행장이 또다시 서운의 말을 끊어 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서운의 말은 들을 생각조차 없었던 것 같다. 그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사랑까지 바라서야 되겠습니까. 주제에 맞지 않는 꿈은 독이나 다름없으니 지금처럼 그 자리에서 원하시는 바 꼭 이루어 내길 바라겠습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서운은 순수하게 이 상황이 신기했으며, 동시에 빡이 쳤다. 도대체 안의진 이놈은 은행장한테 무슨 얘기를 한 거야? 여기서 서운이 무어라 반박해 봤자 은행장은 애초에 귀 기울일 생각조차 없을 거다. 그 사실이 서운을 더 열받게 했다.
어떡하지, 어떡할까. 서운은 말없이 은행장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웃어 보였다. 속에서는 천불이 일었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평정을 유지했다. 감정적으로 나가면 지는 거다, 지는 거라고.
서운이 부글거리는 제 속을 가라앉히는 사이 누군가 올라와 의진의 방문 소식을 전했다. 예정보다 12분이나 빠른 방문이었다. 이에 은행장은 내심 놀란 듯했으나 서운을 의식하며 끝까지 인자하게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옛말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이러쿵저러쿵 입 아프게 서운이 나서서 떠들어 댈 것도 없었다. 의진이 나타나자 은행장의 얼굴이 점점 썩어 가기 시작했다. 직접 보여 주니 이리 편한 것을! 서운에게는 일상인 의진의 변화가 타인에게는 여전히 충격적인 모양이다.
덕분에 서운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은행을 나올 수 있었다. 소액 환전도 무사히 마쳤다. 지금은 검진을 기다리며 의진과 여유롭게 점심을 먹는 중이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여기 맛있네.”
역시 뭐라도 더 할 걸 그랬나, 서운은 뒤늦게 아쉬워졌다. 의연하게 넘기려 해도 인자하게 웃으며 서운을 까 내리던 은행장의 얼굴이 계속 생각난다. 배운 놈이 더 상스럽다더니 은행장에게 한 수 배웠다.
의진의 본래 상대가 어느 은행이었는지는 여전히 잘 생각나지 않지만 구태여 물어볼 것도 없다. 보나 마나 그 은행이겠지, 다시 생각해도 열받지만 한편으로는 은행장이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제 자식이 바람을 맞은 것도 모자라 그 뒤에 의진이 바로 결혼 소식을 전해 왔으니 내가 다 빼앗은 것 같겠지. 하물며 그 상대가 나 같은….
“의진 씨.”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운은 저도 모르게 의진을 부르고 있었다.
“그 선 자리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만날 일이 있었을까?”
만약이라는 가정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괜히 물어보고 싶어진다. “확률 말씀이시군요.” 그러자 의진이 포크를 내려놓고는 세상 진지한 얼굴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의진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확률적으로 어렵지 않을까 싶군요. 서운 씨와 저와의 생활 패턴 및 생활 반경을 고려했을 때 저희가 우연히 마주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무님이 전무하단다. …어쩐지 열받네. 서운은 말없이 고기를 씹어 삼켰다.
“물론 일말의 가능성은 있습니다. 스탠리 밀그램의 6단계 분리 이론에 따르면 여섯 명만 건너면 전 세계와 연결될 수 있으니까요. 저와 서운 씨의 지인을 비교하다 보면 저희가 우연히라도 만날 수 있는 확률을 계산할 수 있을….”
“아.”
일말의 가능성 좋아하네. 듣다 못한 서운이 고기로 의진의 입을 막아 버렸다. 입술 앞에 뭔가 들이미니까 얼떨결에 받아먹기는 했는데 막상 먹으면서 생각해 보니 이 행위가 못내 당황스러운 눈치다.
그래, 저런 놈이 밖에서 멀쩡하게 배우자 얘기를 하고 다닐 리가 없지. 오히려 이야기를 너무 안 해서 사람들의 오해를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의진은 고기를 씹다 말고 냉큼 서운의 접시에 제 몫의 고기 조각을 덜어 주었다. 현대판 품앗이였다.
지가 은혜 갚은 까치야 뭐야. 배우자를 앞에 두고 일말의 가능성을 운운하는 것도 모자라 먹여 줄 생각은 하지도 않는 남편 놈이 황당하면서도, 당연하게 가장 큰 조각을 넘겨주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절로 난다.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전혀요.”
그래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일말의 가능성은 무슨, 차라리 물어보지 말 걸 그랬다. 서운은 의진이 덜어 준 스테이크를 말없이 썰었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은행장의 헛소리를 잘라 내려는 듯 열심히 썰었다.
“정말 엄청나지 않습니까!”
의진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두 사람은 출국 전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좋아 보이던 의진의 기분은 두 사람의 페로몬 매칭률이 무려 96.72%라는 결과를 접한 뒤로 몇 배는 더 좋아 보인다. 상담과 검사를 모두 끝내고 로비로 내려가는 길, 사방이 틀어막혀 소리가 울리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운이 작게 대꾸했다.
“…그러게요.”
어쩐지 더럽게 좋더라. 민망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매칭률이 좋을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높게 나올 줄은 몰랐다. 속궁합이 안 좋을 확률이 겨우 3.28%라니, 나쁠 건 없지만 그만큼 민망하기도 하다.
“제가 연구 대상의 일원으로 논문에 수록되는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처음이어서 다행이네요.”
“하물며 평균보다 약 18%나 높다니요! 오차 범위를 고려해도 엄청난 격차임이 틀림없습니다!”
진짜 쟤는 수치를 모른다. 엘리베이터에 두 사람만 있는 게 아닌데도 경호원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다. 서운은 의진을 챙겨 들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이게 다 서운 씨 덕분입니다.”
“나는 또 왜….”
“서운 씨가 안 계셨다면 저 혼자서는 절대 이뤄 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겠지. 매칭률이 괜히 매칭률이 아니다. 알파든 오메가든 혼자서는 매칭이 불가능하다. 서운은 당연한 소리를 지껄이는 의진을 챙겨서 경호원을 따라 일반인 출입 통제 구역을 걸었다.
출발 전에 잠시 편의점에 들러 민영에게 부여받은 퀘스트를 수행해야 한다. 대학병원 편의점은 구성이 좋을 수밖에 없어서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한정판 상품들도 잘 들어와 있다. 여기라면 민영이 얼마 전부터 애타게 찾고 있는 모 브랜드의 한정판 젤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저희가 알파 오메가 연구에 참여하게 되다니요. 후손은 물론이고 인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이게 다 서운 씨 덕분입니다!”
“그래, 그래. 도대체 몇 번을 말하는….”
…쾅!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고장 난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던 의진조차 하던 말을 멈추고 서운을 쳐다보고 있다. 의진이 무슨 소리를 해도 무표정을 유지하던 경호원들도 하나같이 놀란 얼굴로 서운을 돌아보았다.
“…그, 벌, 레가… 하, 하하. 벌레가 있어서….”
경호원이 문을 열어 주기 무섭게 몸을 날려 출입문을 봉쇄하는 데 성공한 서운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의진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비장하게 말했다.
“서운 씨, 제가 잡아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래도 살인은…!”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벌레만도 못한 전 애인이 문 앞에 있을 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서운은 진심으로 놀랐다. 같은 병원을 다니고 있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덕분에 올해 들어 가장 놀란 것 같다. 물론 잘못은 저 새끼가 했지만 그래도 놀라는 데는 장사 없다.
그래, 죄진 것도 아니고 내가 뭐 어때서! 서운은 침착하게 스스로를 다스렸다. 지난번에는 여러모로 제 꼴이 당당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정말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혹시 몰라서 아침부터 존나 준비하고 왔다. 하물며 지금의 서운은 혼자도 아니다.
서운이 당당하게 출입문을 마주 보고 섰다. “벌레는….”, “괜찮아요. 죽은 것 같아.”, “그렇군요.”. 의진도 서운의 옆에 섰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서운이 걸음을 내디뎠을 땐.
“…어?”
아무도 없었다. 전 애인 놈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잘못 봤나, 서운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되어 편의점이 보이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마주쳤다. 어느 때보다 제대로,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우당탕탕!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각종 음료수와 푸딩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마도 서운보다 더 놀랐을 그가 허둥지둥 바닥의 내용물을 주워 올리기 시작했다.
데구르르, 음료수 하나가 서운의 발 앞으로 굴러왔다. 서운은 가만히 발밑의 음료수를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이거 마시는구나,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하다.
음료수를 한 번, 서운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본 남자가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서운 쪽으로 다가왔다. 최소한의 양심과 상식이 있다면 이 상황에서 말을 걸진 않겠지만 좁혀지는 거리감이 못내 불쾌하다. 그때 커다란 무언가가 서운의 시야를 가려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경호원이 대신 음료수를 주워 주며 서운의 앞을 막아섰다. 덕분에 남자는 서운에게 다가오다 말고 엉거주춤 뒤로 밀려나야 했다. 남자는 음료수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서운을 힐끔거렸다. 하긴, 서운을 만난 것도 충분히 놀랍겠지만 한편으로는 서운이 수상해 보일 만도 하다. 출입 금지 구역에서 튀어나온 것도 모자라 옆에는 경호원까지 대동하고 있다.
“서운 씨.”
흠칫, 서운을 부르는 목소리에 남자가 서운보다 더 놀랐다. 아마 이보다 더 확실한 확인 사살은 없을 테다. “민영 씨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의진이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
“지금 공항에 도착하셨다는군요.”
“벌써요?”
“그렇습니다. 서운 씨와 연락이 안 돼서 제게 따로 연락 주신 것 같습니다. 이미 도착하셨다니 공항에 연락해서 게이트를 열어 놓도록 하겠습니다.”
의진의 말에 뒤늦게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민영에게 잔뜩 메시지가 와 있었다. 많이도 보내 놨네, 서운은 대수롭지 않게 다시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의진이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한다.
“왜 읽고 씹으십니까?”
“뭐?”
“민영 씨가 그러시는군요. 아, 지금 또 보내셨습니다. 잠수 타지 말라고 하시는군요.”
의진이 하도 진지하게 말해서 순간 무슨 말인가 했다. 잠수, 잠수라…. 서운이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음료수를 다 줍고도 괜히 서운을 힐끔거리던 남자가 지레 놀라 뒷걸음을 친다.
비겁한 새끼. 가족들이 결혼을 반대했다면, 서운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그렇게 말해 주는 게 나을 뻔했다. 가족들을 만난 후 남자는 깨끗하게 증발해 버렸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고 메시지를 보내도 읽지 않았다. 설마 입원이라도 한 건가 싶어 미친 척 회사에 전화를 걸어 볼까 고민하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참 끔찍한 기억이다.
“잠수는 무슨, 난 그런 쓰레기 같은 짓 안 해요.”
함께해서 좆같았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다시금 되살아나는 그때의 기억에 서운이 이를 악물었다.
“…혹시 화나셨습니까?”
덕분에 의진만 놀랐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라고는 했지만 의진은 믿지 않는 눈치다. 정말 아닌데,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만약 손가락이 열 개 다 부러지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연락해요. 잠수는 절대 안 돼.”
“네, 명심하겠습니다.”
놀라긴 했는지 대답에 바짝 군기가 들어 있다.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던 경호원 하나가 갑자기 의진에게 말을 걸어왔다.
“전무님, 대화 중에 죄송하지만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의진이 경호원과 함께 서운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얘기하는 동안 먼저 편의점에 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경호원들이 서운을 에워싸고 있어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뭐지, 이 광경 지난번에도 본 것 같은데. 서운은 데자뷔처럼 병원 로비 한복판에서 경호원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필요하신 건 젤리뿐이십니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의진이 심각한 얼굴로 돌아왔다.
“음, 일단은?”
“정확한 제품명을 알려 주시면 공항에서 받으실 수 있도록 따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우선 저희는 공항으로 이동하시죠.”
“…무슨 일 있어요?”
“이동하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거구나, 분위기가 제법 심각하다. 서운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의진을 따라 순순히 주차장으로 향했다. 경호원이 같이 있으니 마치 첩보 영화라도 찍는 것 같다. 긴박하게 두 사람을 실은 차가 병원을 막 빠져나가는데 의진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운전 중인 의진이 블루투스로 전화를 연결했다. 덕분에 서운에게도 통화 내용이 다 들렸다. 아주 잘 들렸다.
- 신원 확인했습니다. 아무 문제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근거는?”
- …그게….
말씀하세요, 의진이 망설이는 경호원을 다그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운은 의진의 통화 상대가 아까 그 경호원인지도 몰랐다.
- 과거 서운 님과 교제한 사이로, 우연히 서운 님과 마주치고는 놀란 마음에 계속 서운 님을 쳐다봤다고 합니다. 본인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뭐요, 시발? 차 안에 적막이 맴돌았다. 서운도, 의진도, 하물며 경호원조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운은 자신의 과거가 블루투스로 실시간 중계되는 현장에 나와 있다. 주인공 역에 정서운, 유일한 관객은 안의진으로 서운의 현 남편 되시겠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의진이었다.
“두 사람이 교제했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 단순한 추측이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얘기하세요.”
- 중간에 임신한 아내가 왔는데… 서운 님을 닮으셨습니다.
“…….”
“…….”
아…. 이번 침묵은 유난히 더 무거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서운은 제 귀로 듣고도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존나 디스X치도 아니고 사실과 추측이 교묘하게 섞인 찌라시가 당사자 앞에서 재생되고 있다.
-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싶어 저희끼리 투표도 해 봤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왔습니까?”
- 투표 결과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서운 님과 닮았다는 의견입니다.
연예인들이 스캔들이 나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이번에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갔다. “이목구비가 하나하나 닮았다기보다는 서운 님이 웃지 않으실 때의 느낌과 굉장히 유사….” 서운이 순식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가드의 말이 사실입니까?”
운전 중인 의진이 앞을 보며 물었다. 서운이 일방적으로 끊어 버린 전화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표정은 물론이고 어조나 목소리까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다. 서운은 잠시 고민했으나 결론은 생각보다 빠르게 났다.
“…어, 맞아요.”
서운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으니까, 이럴 때 숨기면 오히려 상황이 더 이상해진다. 문제는 의진의 반응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
“…….”
“…….”
“…….”
“…그게 끝이야?”
“그럼 뭔가 더 있어야 합니까?”
의진이 반응이 없다. 놀라울 정도로, 아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그…건 아닌데….”
“네.”
“…그런 건 아니지만….”
“네.”
그래도 그렇지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니니. 고작 이런 일로 소란이 벌어지길 바란 건 아니지만 막상 반응이 너무 없으니 이건 또 이거대로 기분이 묘하다.
“그럼 구매를 원하시는 젤리의 상품명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 어, 이름이… 잠깐만요.”
“천천히 알려 주셔도 됩니다.”
의진이 여유롭게 말했다. 젤리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허둥지둥 인터넷을 검색하는 서운과는 무척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무척 낯설어서 서운도 더는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주제가 주제인지라 의진이 먼저 물어보지 않는 이상 서운이 나서서 이야기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다 끝난 과거의 일로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은데 이렇게까지 무반응일 건 또 뭔가 싶다. 어차피 다 끝난 일이니까 신경 안 쓴다 이건가, 아니면 내가 누굴 만났어도 자기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지 괜히 삐딱한 마음이 든다.
그 후 의진도 딱히 말을 걸어오지 않아서 두 사람은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어색한 침묵을 유지했다. 의진은 원래 운전 중에 딴짓을 하지 않으므로(대화도 딴짓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조차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 먼저 와 있던 가족들을 만나고 나니 비로소 여행이 실감이 난다. 의진의 가족들이 합류하면서 인원이 배로 늘어나자 분위기는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단체로 패키지여행을 떠나는 듯한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서운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이 여행은 가족 여행으로, 한밤중을 제외하면 서운과 의진 둘만의 시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양가 식구들과 함께 하는 크루즈 파티는 이미 시작되었다.
“…날씨 좋다.”
그리고 지금이다. 서운이 멍하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갈매기 소리가 좀 시끄럽긴 한데 이마저도 이국적이라 좋았다. 호주의 갈매기는 유난히 크고 목청도 좋았다. 약간 펠리컨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다.
“그렇군요. 습도가 낮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서 여러모로 쾌적한 날씨입니다.”
“어, 진짜. 쾌적하다는 말이 딱인 것 같아요.”
“네, 그렇습니다.”
“…….”
“…….”
이상하지. 의진의 말대로 싸운 것도 아닌데 괜히 분위기가 어색하다.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의진이 아까부터 휴대폰에 집중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바빠요? 일하는 거야?”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의진이 단칼에 서운의 질문을 쳐 냈다.
“피곤하진 않으십니까?”
그러고는 뜬금없이 화제를 돌린다.
“어제 잘 자서 괜찮아요. 의진 씨는?”
쓸데없이 일찍 일어났던 서운은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덕분에 시차 적응은 하루 만에 끝냈는데 의진이 언제 잠들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저도 괜찮습니다.”
“아, 의진 씨도 바로 잤어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래요? 안 자고 뭐 했는데?”
“…….”
“…의진 씨?”
“…괜찮으시면 마사지를 받으러 가시겠습니까?”
…갑자기 웬 마사지? 헛소리를 하도 자연스럽게 해서 서운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헛소리의 주인공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휴대폰을 힐끔거리고 있다.
“지금요?”
“네, 지금 가야 합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신호라도 있는 건가. 마사지야 언제나 환영이지만 이건 너무 뜬금없다.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보려면 사방이 노출되어 있는 갑판보다는 단둘이 있을 수 있는 마사지실이 훨씬 낫다. 크루즈에 마사지실이 웬 말이냐고 하기에는 수영장부터 영화관까지 없는 게 없다. 마사지실 정도면 소박한 축에 속한다.
웬일로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다 했지. 서운은 의진의 안내를 받아 마사지실에 도착했다. 직원이 외국인이라 조금 당황했지만 의진이 알아서 통역을 해 주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우리 같이 받는 거 아니었어요?”
“네, 아닙니다.”
어쩐지 잘 풀린다 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서운이 황당해하며 쳐다보자 의진이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한다.
“어차피 마사지 중에는 휴대폰 확인이 어려우니 두고 가시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너나 잘하세요. 그런 주제에 서운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 꼴이 제법 수상해서, 아니, 너무 대놓고 수상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문제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게요.” 서운은 일단 순순히 의진의 말을 듣는 척했다. 사물함에 휴대폰부터 던져 놓고 옷을 갈아입으려 하자 의진이 이만 쉬시라며 급하게 탈의실을 나간다.
…저렇게 대놓고 수상해도 되는 건가. 서운은 옷을 갈아입는 대신 마사지사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쏘리, 아 돈 워너 겟 어 마사지. 마사지사가 무어라고 대답했지만 호주식 발음이 생소해서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일 안 하면 좋지 뭐. 서운은 휴대폰을 챙겨 슬그머니 마사지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수상한 남편 놈을 추적할 차례다.
* * *
의진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일단 크루즈가 존나게 넓었고, 또 존나게 넓었다. 결국 서운은 민영이 찬스를 이용하기에 이른다.
[형부 지금 3층에 있대]
[더 물어보면 티 날 것 같아서 이 이상 안 물어봤어]
[그럼 ㅅㄱ]
3층이란 말이지. 그래도 선택지가 많이 줄어들어서 다행이다. 서운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수영장처럼 오픈된 장소에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상대적으로 폐쇄적인 공간을 찾아야 한다. 의진이 왜 저러는지는 일단 찾고 난 후의 일이다.
설마 바람이라도 피우는 건 아니겠지. 호주에 도착한 뒤로 내내 휴대폰을 달고 사는 것도 모자라 뜬금없이 마사지를 권하던 의진을 생각하니 별생각이 다 든다. 그래서 서운의 전 애인과 마주치고도 아무런 타격이 없었던 거라면? 은행장도 그 사실을 알고 진심으로 서운을 동정한 거라면?
…죽일까. 서운은 진심으로 살기를 느꼈다.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의진을 찾아 헤매는 서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제 와서 딱히 숨길 생각도 없었기에 서운은 객실 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히며 의진을 찾아다녔다. 그새 다른 층으로 간 건가, 잠시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크루즈에는 계단이 하나뿐이라 어떻게든 서운의 눈에 띄게 되어 있다. 서운은 인내심을 가지고 나머지 객실을 확인했다.
그러다 결국 의진을 발견했다. 여기는 무조건 아니겠지 싶어 일말의 기대도 없었던 영화관에 의진이 있었다. 영화관은 2층과 3층을 뚫어서 만든 구조였는데, 2개의 층을 이어서 만든 만큼 실제 영화관처럼 크고 웅장한 느낌을 주었다.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알싸하고 시원한 좋은 향기도 났다.
그 중앙에 의진이 있었다. 의진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업무를 보는 것처럼 보이는 이 광경은 서운이 스크린을 확인함으로써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스크린에는 서운의 전 애인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서운은 홀린 듯이 영화관에 들어갔다. 서운이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봐도 스크린은 그대로였다. 오히려 선명하게 잘 보이기만 한다. 여기에 영화관 특유의 울림이 더해지니 의진의 목소리가 유독 생동감 있게 들린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통화 내역은 제가 말씀드린 대로 정리해서 메일 주시면 됩니다. 병원 방문 기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좋습니다. 카드 내역서는 언제 전달 가능하십니까?”
어쩐지 수상해 보인다 했더니 실제로도 수상한 짓을 하고 있다. 서운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정중앙에 앉아 있는 의진은 아직까지 서운을 보지 못한 듯하다. 덕분에 서운은 대놓고 의진의 통화 내용을 엿들을 수 있었다.
“내일도 이 시간에 연락 주시죠. 시간 비워 놓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기간은 연 단위로 부탁드립….”
“…….”
“…니….”
“…….”
“…….”
“의진 씨.”
“…네, 부르셨습니까.”
의진이 조신하게 대답했다. ‘…세요? 여보세요?’ 통화 상대를 잃어버린 휴대폰이 한국 땅 어딘가에서 외롭게 울부짖었다. 힐끗, 서운이 휴대폰을 쳐다보자 의진이 잽싸게 전화를 끊는다.
통화 내역과 병원 방문 기록, 거기다 카드 내역서까지. 의진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이게 대체….”
아무렇지도 않아 할 때는 언제고 도대체 왜? 갑자기 머리가 아프려고 한다. “어디 아프십니까?” 서운이 머리를 짚자 의진이 누구보다 빠르게 반응해 온다. 서운은 대충 고개를 내저으며 의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의진이 기다렸다는 듯 제 손을 건네 왔다.
“아니, 이거 말고.”
휴대폰 줘요, 서운이 단호하게 말하자 의진이 잽싸게 제 휴대폰을 내놓는다. 일방적으로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 화면에는 ‘○○ 흥신소’와의 통화 기록이 떠 있었다.
“…설마 내 뒷조사라도 한 거예요?”
“아닙니다!”
의진이 강하게 반박했다. 그래 봤자 설득력은 없었다.
“부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로, 저희의 신뢰 관계에 해가 되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맹세합니다.”
“그럼 이 흥신소는 뭔데요?”
“…서운 씨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따로 확인할 게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뒷조사라고 한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진은 꿋꿋이 항변을 이어 나갔다.
“서운 씨는 믿지만 다른 사람은 못 믿습니다.”
“아하.”
“그저 유비무환으로….”
“응.”
“…몇 가지 확인을….”
“…….”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듯이….”
어째 들으면 들을수록 계획범죄에 가깝다. 즉흥적으로 흥신소를 찾아갔다고 하기에는 동기가 지나치게 구체적이다.
“일단… 저 사진이나 좀 내려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말 하나는 잘 듣는 의진이 곧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영사실에 사람이 있었는지 바로 사진이 내려갔다. 스크린이 꺼진 영화관은 한층 더 어두웠고, 적막했다. 이러니까 꼭 진짜 영화를 보러 온 것 같다.
“그래서, 확인은 잘했어요?”
“아직 다 못 했습니다.”
의진이 당당하게 사실을 고했다. 음, 그래. 자신감 있는 태도가 아주 보기 좋았다. 서운이 좀 더 직접적으로 물었다.
“뭐가 궁금한 건데요?”
“궁금한 건 아닙니다. 확인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서운 씨가 어떤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서운 씨의 알파 취향은 어떤지, 저에게 부족한 점은 무엇인지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
“바꿔 말하면 학습 자료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군요.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뒷조사를 하셨다? 아주 그럴싸한 포장이었다. 목소리는 또 어찌나 당당한지 깜빡속을 뻔했다.
“그럼 통화 내역이랑 카드 내역서는 왜 알아본 건데요?”
“…병원 방문 기록을 보니 두 분의 만남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더군요.”
맞는 말이다. 아마 전 애인은 모르겠지만 서운은 어제부로 전 애인과 두 번이나 마주쳤다. 서운과 마주친 당사자도 모르는 걸 의진이 알고 있을 줄이야, 알게 된 경위는 물어보나 마나 뻔하다. 거기까지 말한 의진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왜 같은 병원에 다니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도 계속 우연히 마주칠 생각이셨습니까?”
“뭐?”
“그쪽에서 음료수는 왜 떨어트린 겁니까? 혹시 둘만 아는 신호라도 되는 겁니까?”
지금 무슨…! 서운의 거센 반발에도 의진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끝나기는커녕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았다.
“휴대폰은 왜 자꾸 들고 다니십니까? 어디 연락 올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니면 따로 기다리시는 연락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건 너고! 서운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억울한데 의진이 억울해할 틈을 안 준다.
“그래서 섹스도 피하신 겁니까? 병원에서 권장하는 성행위 자제 기간은 일주일입니다.”
“피하긴 뭘 피했다고 그래! 우리 겨우 보름 안 했거든요!”
“보름은 이미 지났습니다. 오늘부로 정확히 16일째입니다.”
이 새끼가 진짜,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의진의 콧대가 새삼 얄밉다. 서운의 전 애인과 마주치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더니 안 보이는 곳에서는 열심히 막장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나 믿는다며.”
내가 그렇게 신용이 없나? 서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막장 드라마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돈이라도 받으면 억울하지는 않지, 심지어 무급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서운 씨를 믿습니다.”
“…이게?”
믿어서 이 정도라니, 안 믿으면 큰일 날 뻔했다. 서운은 조금 오싹해졌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면 부부 사이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저는 누구보다 서운 씨를 믿습니다. 서운 씨 주변 사람을 믿지 않을 뿐이지요. 한 가지만 더 여쭤봐도 됩니까?”
“뭔데 또. 어디 들어나 봅시다.”
“혹시 뱃살이 있는 편이 더 취향이십니까?”
제가요? 모함에 가까운 개소리였다. “키를 줄일 수는 없으니….” 의진이 지치지도 않고 끔찍한 소리를 했다.
얘를 어떡하면 좋지. 서운은 고민했다. 서운이 여기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앞으로가 달라질 테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두 사람의 미래가 달려 있다.
“…사실은, 지난번에 검진받으러 갔을 때도 봤어요.”
흠칫! 서운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의진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여기서 같이 감정적으로 나가면 개싸움밖에 안 된다. 서운은 침착하게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땐 나 혼자 우연히 본 거라 또 만나게 될 줄 몰랐어요.”
“…….”
“의진 씨한테 아무 얘기도 안 한 건… 앞으로 몇 번을 마주쳐도 나랑 아무 상관 없는 사이니까 굳이 얘기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금방 까먹기도 했고. 우리가 그날 일이 좀 많았잖아?”
서운이 그렇게 가까이에서 헬기를 본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가능하다면 두 번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의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서운의 말을 곱씹고 있는 듯했다. 의진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럼 그분을 보고서 왜 놀라신 겁니까?”
“놀라지 그럼 안 놀라겠어요.”
“서운 씨 앞에서 음료수를 떨어트린 건 단순한 실수인 겁니까?”
“그 새끼도 놀랐겠지.”
“휴대폰은 왜 자꾸 챙겨 다니시는 겁니까?”
“너나 잘하, 아니, 원래 그랬거든요!”
“…….”
“못 믿겠으면 내 것도 조사해 보든가.”
“…아닙니다. 저는 서운 씨를 믿습니다.”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몇 가지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간신히 불신의 조각을 삼켜 낸 의진이 비장하게 물었다.
“섹스를 보름이나 피하신 건 왜 그러신 겁니까? 일주일이 아닌 보름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으셨던 겁니까?”
그래, 아닐 줄 알았다. 의진은 서운의 생각보다, 아니, 본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서운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의진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서운의 전 애인과 마주친 충격이 꽤나 큰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서운은 이제야 알았다.
서운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영화관에는 당연히 두 사람밖에 없었고, 영사실에는… 아무도 없길 바랄 뿐이다. 있어도 눈치껏 알아서 나가겠지, 서운은 일단 저질러 보기로 했다.
서운은 부르고 있어도 늘 부르고 싶은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의진 씨.”
“말씀하십시오.”
“지니야.”
“…….”
“의진아.”
“…….”
“의진아, 대답해야지.”
“네, 네!”
당황한 의진이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혼을 내는 것도 아닌데 군기가 바짝 들어 있다. 서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진을 마주 보고 섰다. 영화관 좌석에 앉아 있던 의진이 그대로 서운을 올려다보았다. 서운이 의진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으며 속삭였다.
“자기야, 나 못 믿어?”
“믿, 믿습, 믿네다!”
이건 또 왜 이래? 잠시 오작동의 기미가 보였으나 심각한 오류는 아닌 듯하다. 서운이 엉덩이를 움직여 의진에게 좀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의진은 그런 서운을 멍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앞으로 의진 씨 불안하지 않게 내가 더 잘할게요.”
“서운 씨는 이미 제게 잘해 주고 계십니다.”
“더 잘할게. 지난 일은 신경 쓰지 말아요.”
“신경 안 썼….”
“마음 쓰지도 말고.”
“서, 서운 씨….”
“…입 벌려 봐.”
“…….”
“빨리, 응….”
“…하….”
약 16일 만의 입맞춤이었다. 서운은 가볍게 의진의 입술을 깨물며 살짝살짝 혀를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의 혀끝이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서운이 의진의 혀를 가져와 혀끝을 가볍게 빨았다. 쪼옥…, 행위에 비해 쓸데없이 소리만 컸다. 불 꺼진 영화관에 두 사람이 쪽쪽거리는 소리가 과장스럽게 울려 퍼졌다. 의진은 아까부터 계속 하체를 들썩거리고 있었다. 서운의 허리를 움켜쥐었다가, 서운의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서운의 뒷목을 그러쥐기를 반복했다.
“지난번에… 응… 주치의, 선생님이 페로몬 조심하라고 하셔서….”
“하… 네….”
“여유롭게 잡은, 아….”
허리에서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의진이 아프다 싶을 정도로 서운의 허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의진, 씨, 나 손….” 붙잡힌 허리가 아파 서운이 얼굴을 찡그리며 의진의 손을 떼어 냈다.
“아프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의진이 제 허벅지 위에 걸터앉아 있는 서운을 올려다보며 곧바로 사과해 왔다. 서운이 위에서 의진을 내려다보는 건 무척 오랜만인지라 괜히 가슴이 설렌다.
…어차피 우리밖에 없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을 땐 이미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서운은 의진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와 똑바로 땅을 딛고 섰다.
“서운 씨? 어디 가십… 서, 서운 씨….”
“응.”
“…갑자기, 이러시면….”
“시어? 하디 마?”
싫어? 하지 마? 다짜고짜 의진의 다리 사이를 파고 들어가 빛의 속도로 성기를 끄집어낸 서운이 귀두를 입에 문 채 물었다. 말을 한답시고 혀를 움직였더니 의진의 허벅지가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제자리에서 튀어 오른다.
“아, 아니요. 싫은 건 아닌….”
“…….”
“아니, 나… 아….”
“…….”
“하, 윽….”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의진에게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온다. 하긴, 그동안 한 짓이 있는데 보름이면 오래 안 하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런 오해를 할 줄이야. 서운은 참회하듯 길게 혀를 내어 요도 구멍을 핥아 주었다. 깔짝대며 구멍을 핥아 대자 의진의 허벅지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반응 한 번 끝내준다. 서운은 의진의 반응에 힘입어 목구멍 깊숙이 성기를 집어삼켰다.
“아…!”
의진이 외마디 신음과 함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몸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까지 핏줄이 단단하게 섰다. 서운은 한쪽 손을 올려 의진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울룩불룩한 핏줄이 심장처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언제 만져 봐도 기분 좋은 감각에 서운이 힘 있게 성기를 빨아들였다.
“윽….”
반응은 바로 왔다. 서운의 머리 바로 위에서 헐떡이는 거친 숨소리가 난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쾌감에 의진의 허리가 자꾸만 앞으로 기울어졌다. 허억, 허억…. 서운은 의진의 숨소리에 맞춰 성기를 압박했다. 세게 입술을 오므려 기둥을 조이다가도 숨을 깊게 들이마셔서 성기 전체에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의진의 성기가 빠르게 쿠퍼액을 뱉어 냈다. 영화관에서 나는 냄새 때문인지 몰라도 비린 맛보다는 알싸한 박하 향이 더 강하게 났다.
“…서운 씨, 그만하십시오.”
왜? 한참 성기를 빨던 서운이 눈만 올려 의진을 올려다보았다. 꿈틀, 눈이 마주치자 의진의 성기가 다시 한번 크기를 키운다. 이러다 목구멍을 찔릴 것 같아 서운이 반사적으로 성기를 뱉어 냈다.
마침내 서운의 입 안에서 탈출한 성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제자리를 찾아간다. 아랫배에 바짝 올라붙은 성기는 침과 쿠퍼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어 어쩐지 맛있을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입 안에 남아 있는 박하 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서운은 멍하게 의진의 성기를 쳐다보았다.
“할 것 같습니다.”
벌써? 놀란 것도 잠시, 의진의 상태를 보고 나니 조금은 이해가 간다. 의진은 눈이 다 풀린 채로 커다란 몸을 구겨 가며 연신 헐떡이고 있었다. 귀엽기는, 서운은 멍해진 머리로 다시금 의진의 하체에 얼굴을 묻었다. 헉…! 불시에 성기가 빨리자 의진이 신음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서운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뒤통수를 전부 가리는 커다란 손의 감촉에 서운이 호응하듯 성기를 깊게 밀어 넣었다. 단단하고 커다란 살덩이가 억지로 입술을 벌려 대자 자연스럽게 구역질이 난다. 결국 이럴 것 같더라니, 단단하게 발기한 의진의 성기가 서운의 목구멍을 찌르고 말았다. 콜록, 콜록! 서운이 작게 기침하자 의진이 급하게 서운의 얼굴을 떼어 냈다.
“괜찮아. 좀 더 해 줄게요.”
“아니요, 안 그러셔도 됩니다.”
“해 주고 싶….”
“입 말고 서운 씨 구멍에 싸고 싶습니다.”
“…….”
“허락해 주십시오.”
서운의 정면으로 침에 젖어 번들거리는 성기가 꼿꼿하게 일어나 서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어? 뒤늦게 의진의 말뜻을 알아차린 서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영화관 내부가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여, 여기서?”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그럼 일단 나가….”
“지금 하면 안 되는 겁니까?”
드물게도 의진이 서운을 조르고 나섰다. “지금? 바로?” 서운이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의진의 성기가 위아래로 꺼덕거렸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누구 들어오면….”
“영사실 직원은 이미 내보냈습니다.”
“청소하러 들어오면….”
“제가 와 있는 걸 알 테니 함부로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먼저 바지를 벗기신 건 서운 씨입니다.”
그건 그랬다.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서운이 입을 다물자 의진이 초조하게 서운을 쳐다본다.
“서운 씨, 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야 서운도 차고 넘친다. 이 이상 고민할 틈도 없이 의진이 서운을 일으켜 다시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서운 씨.”
“…….”
“서운 씨, 서운 씨….”
의진이 애타게 서운을 부르며 목덜미에 제 얼굴을 비볐다. 목덜미에 닿는 의진의 숨이 뜨거웠다.
“…터질 것 같습니다.”
“…….”
“미칠 것 같습니다….”
허억, 헉…. 의진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서운의 허리를 움켜쥔 손길에서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어디선가 자꾸만 박하 향이 난다. 그것도 가까이에서, 서운과 아주 가까운 곳에서 선명한 박하 향기가 난다.
…영화관에서 나는 냄새인 줄 알았는데. 서운은 몽롱해진 머리로 뒤늦게 이상 반응을 감지했다. 이건 영화관 냄새가 아니다. 페로몬이다. 의진에게서 페로몬이 천천히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알파와의 잦은 페로몬 공유로 히트 사이클이 앞당겨진 서운이다. 공유는 둘이서 했으니 의진이라고 해서 주기가 멀쩡할 리가 없다. 검사 결과 의진도 러트 주기가 훨씬 앞당겨져 있었다. 하필이면 크루즈 파티를 앞두고 있어, 의진은 미리 러트 대비용 억제제를 처방받았다. 그게 불과 하루 전의 일이다.
“의진 씨 혹시 약 안 먹었어요?”
“먹었, 습니다.”
“몇 번 먹었어.”
“한 번….”
“한 번?”
의진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약은 2시간 15분 후에….” 흐려진 말꼬리에서 열기가 훅 끼쳐 왔다. 평소보다 앞당겨진 러트 주기, 상대적으로 길었던 금욕. 억제제를 처방받았다고는 하나 의진은 이제 겨우 하루 치를 복용한 상태다. 서운은 그런 의진에게 올라타 자진해서 펠라티오까지 해 줬다.
…내가 불을 지폈구나. 내가 일을 키웠어. “서운 씨….” 서운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사이 의진이 무작정 서운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각도가 맞지 않아 의진이 입술이 서운의 코와 뺨, 눈두덩 곳곳에 안착했다. 교묘하게 입술을 피해 가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어린애 같은 입맞춤이 쏟아진다. 의진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서운에게 꾹꾹 입 도장을 찍어 댔다.
“…한 건, 저입니다….”
“뭐…?”
“제가, 서운 씨랑 결혼했습니다.”
러트가 온 알파는 원래 다 이런 건가. 서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제 품을 파고드는 의진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확실히 힘 조절을 못 하긴 하지만 그건 평소에도 마찬가지니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서운이 놀란 건 러트가 온 의진이 평소보다 솔직하다는 점이다. 단순한 의사 표현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에 훨씬 솔직한 느낌이다.
“서운 씨를 만지고 싶습니다.”
의진이 서운에게 밀착하며 자신의 하체를 비벼 댔다. 얇은 여름옷 너머로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의진의 성기가 느껴졌다. 뜨거웠다.
“서운 씨의 엉덩이를 만지고 싶습니다. 손이 꽉 차도록 서운 씨의 엉덩이를 주무르며 나머지 손으로는 서운 씨의 가슴을 만지고 싶습니다. 바짝 일어선 젖꼭지를 입 안에 넣고 깨물고 싶습니다. 빨고 싶습니다.”
의진은 그렇게 말하며 서운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움찔, 천 너머로 뜨거운 숨이 느껴지자 서운의 젖꼭지가 바짝 일어섰다. 의진이 손가락으로 서운의 가슴을 덧그리며 말했다.
“그럴 때마다 서운 씨가 어떤 소리를 내시는지 아십니까? 어린 짐승 같은 소리를 내십니다. 그러다 자극이 강해지면 흐느끼는 소리를 내시는데, 서운 씨가 흐느끼면 좀 더 우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서운 씨를 깨물게 됩니다.”
의진이 가슴을 더듬던 손길을 멈추고 옷 위로 솟아오른 서운의 젖꼭지를 가볍게 깨물었다. 어차피 옷을 입고 있어서 크게 아프지는 않았으나 천 위로 느껴지는 치아의 감촉이 지나치게 선명해서 맨살일 때보다 더 이상한 느낌을 주었다. 물론 이상한 건 이것뿐만이 아니다.
“서운 씨의 구멍을 빨고 싶습니다. 다리 사이에 촉촉하게 젖어 있는 작은 구멍을 빨고 핥고 싶습니다. 하루 종일 그 짓만 하라고 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저 입, 의진의 저 입이 문제였다. 의진은 아까부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낯 뜨거운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정작 말하는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듣는 서운은 금방이라도 얼굴이 터질 것 같다.
“서운 씨는 서운 씨의 구멍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이제 그만 좀….”
서운의 만류에도 의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의진이 양손으로 서운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이렇게 작아서 손가락은 들어갈까 싶다가도 막상 넣으면 안에서부터 유연하게 벌어집니다.”
“의진 씨, 그만….”
서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무어라 대꾸하는 것조차 민망하고 또 민망하다.
“손가락은 물론이고 뭐든 다 삼켜 내니 기특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의진의 손가락이 서운의 엉덩이 사이를 가르고 들어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구멍 위를 더듬었다. 아…! 갑작스러운 자극에 서운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비틀었다. 의진이 서운의 구멍을 문지르며 말했다.
“게다가 언제 넣어도 뜨겁고 촉촉해서 서운 씨에게 성기를 넣을 때마다 그대로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입니다. 정말이지 너무, 너무 좋습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건 살면서 처음입니다. 평생 서운 씨 안에 파묻혀 있고 싶을 정도입니다.”
서운이 바지를 입고 있는 걸 알면서도 당장 손가락을 쑤셔 넣을 것처럼 마구잡이로 손목을 놀려 댄다. 의진이 손목을 쳐올릴 때마다 서운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낯 뜨거운 언사에 조금씩 몸속이 젖어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서운 씨의 구멍을 빨지 못하겠지요. 그건 싫습니다. 그래서는 안 될 일입니다. 서운 씨, 저는 서운 씨의 애액을 한 방울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 귀한 애액을 흘려 버리는 건 자원 낭비나 다름없습니다. 제가 서운 씨의 구멍을 빠는 일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발버둥 치는 서운 씨의 엉덩이를 붙잡고 구멍에 혀를 집어넣는 기분이 어떤지 아십니까?”
“…내가 어떻게, 응… 어떻게 알아….”
서운이 제 아래를 문지르는 의진의 손가락을 피해 이리저리 허리를 비틀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의진은 서운의 허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입구를 문지르는 손길도 마찬가지였다. 의진이 노골적으로 서운의 구멍을 꾹꾹 짓누르며 말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맛있는 건 먹어 보지 못했습니다.”
…아, 서운이 작게 탄식했다. 기어코 몸 안에서 애액이 흘러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적나라한 말과 노골적인 행동이 사방에서 서운을 자극하고 있었다.
“서운 씨가 그러셨지요? 제가 맛있다고 말입니다.”
푹! 의진의 손가락이 서운의 엉덩이 사이를 들쑤셨다. 엉덩이 사이로 흘러나온 애액 때문에 천이 피부에 달라 달라붙어 끈적하게 늘어졌다.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저도 알 것 같습니다.”
의진이 서운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저도 서운 씨가 맛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먹어 본 것 중에서 가장 맛있습니다.”
밑에서는 계속해서 서운의 구멍을 문지르고 있었다.
“서운 씨, 넣고 싶습니다.”
의진이 그대로 서운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아! 서운의 입에서 고통 어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서운 씨를 제 페로몬으로 덮어 버리고 싶습니다.”
까드득, 목덜미를 깨물고 난 뒤에도 계속해서 서운을 잘근잘근 씹어 대는 통에 목 아래에서부터 홧홧하게 불이 이는 것 같다.
“서운 씨….”
깨물린 목덜미가, 짓씹힌 살갗이 아프다. 따갑다. 뜨겁다. 서운이 인지하는 감각은 분명히 통증인데 왜 자꾸 엉덩이 사이가 젖어 드는지 모르겠다.
…하아…, 서운이 대답 대신 뜨거운 숨을 뱉어 냈다. 아까부터 노골적으로 서운을 향해 쏟아지는 의진의 페로몬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서운은 말없이 의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건지 의진의 정수리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라 있다. 서운이 보름 만에, 아니, 16일 만에 느껴 보는 의진의 체온이었다. 아마 어린 의진은 평생을 이 미열 속에서 살았으리라.
“바지….”
“네.”
“…바지 벗겨 줘….”
아, 더는 모르겠다. 아니, 못 참겠다. 서운이 의진의 머리카락에 마구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하…. 의진이 다급하게 서운의 바지를 벗기기 시작했다. 서운이 입고 있던 얇은 여름용 면바지가 속옷과 함께 벗겨지다 말았다. 서운은 한쪽 다리에 속옷과 바지를 매단 채로 의진의 허벅지 위로 되돌아왔다.
“아, 읏….”
“…….”
“아…!”
의진이 서운의 맨엉덩이를 양손 가득 그러쥐었다. 이러다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악력이 거셌다. 세게 만지면 세게 만지는 대로 탱탱하게 감겨드는 촉감이 좋은지 의진은 노골적으로 서운의 엉덩이를 주물러 댔다. 이러면 틀림없이 제 손자국이 남을 텐데도 의진은 결코 손을 떼지 않았다.
잇자국이든 울혈이든 손자국이든 뭐든 상관없다. 서운의 몸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서운, 씨, 다리 사이가 축축합니다….”
“…….”
“벌써 젖으신 겁니까?”
“누구 때문, 인… 으….”
실컷 서운의 엉덩이를 더듬던 의진의 손목 위로 축축한 액체가 묻었다. 서운의 몸속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애액이었다. 의진은 잠시 제 손목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손목에 묻은 애액을 핥아 먹었다.
“그, 그걸 왜 먹어요!”
“맛있으니까요.”
꼼꼼하게 마지막 남은 애액을 핥던 의진이 아쉬운 얼굴로 서운의 아래를 쳐다보았다. 서운이 반사적으로 티셔츠를 끌어 내려 반쯤 발기한 성기를 가렸다.
“그런 거 먹는 거 아니야….”
“왜 먹지 말아야 합니까?”
“…그야 당연히….”
“이렇게 맛있는데 왜 먹으면 안 되는 겁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다. 서운이 머뭇대자 의진이 틈을 놓치지 않고 서운의 티셔츠를 걷어 올린다. 서운의 가슴팍을 훤히 드러내 놓고 다시금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다. 기다란 손가락이 마음껏 서운의 다리 사이를 헤집었다. 서운의 다리가 자극을 이기지 못하고 벌벌 떨렸다.
“안이 너무, 부드럽습니다….”
애액이 너무 많이 나와서 손가락 두 개가 한 번에 쑥 밀려 들어갔다.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앉은 채로 손가락을 받아 내려니 느낌이 이상해 서운은 몇 번이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부드러운데 쫀득하고, 탄력이 느껴집니다.”
자세도 자세인데 의진의 적나라한 부가 설명 때문에 기분이 더 이상해지려고 한다.
“그, 런 건 안 알려 줘도 되는….”
“축축하고….”
“아…!”
의진이 제멋대로 손가락을 벌려 가며 내벽 안에서 가위질을 했다. 기다란 손가락이 여린 점막을 마구 들쑤실 때마다 서운의 허리가 저절로 튕겨 올랐다.
“…맛있습니다.”
의진이 멍하게 서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맛있습니다, 서운 씨….”
“그런, 말 좀….”
“더 먹고 싶습니다. 매일매일 먹고 싶습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의진이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얼굴로 말했다. 철퍽철퍽, 의진의 손이 아래를 헤집을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저 말고 다른 사람도 먹어 본 겁니까?”
“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의진이 단번에 손가락 네 개를 서운의 아래에 처넣으며 물었다. 그 반동에 끈적한 애액이 의진의 손목까지 튀었다.
“다른 사람도 서운 씨의 애액을 먹어 봤습니까?”
“무, 슨! 아!”
“그 사람도 먹어 본 겁니까? 그 사람만 먹어 봤습니까? 설마 다른 사람도 먹어 봤습니까?”
의진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퍽, 퍼억! 아래에서는 마치 성기를 박아 넣는 듯한 거친 추삽질이 이어졌다.
“아, 읏! 잠, 아! 의진, 아!”
“서운 씨, 대답해 주십시오. 정말 그랬습니까?”
질문만 놓고 봐도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질문만 해 놓고 정작 대답할 틈은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벽을 마구 잡아 벌리는 거친 손길에 서운의 벌어진 잇새로 계속해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
이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의진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한껏 찌푸려진 미간이 낯설고 어색하다. 의진의 페로몬이 불규칙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불공평합니다.”
의진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래 놓고 서운의 아래를 쳐올리는 손길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
“이런 건 불공평합니다….”
“아까부터, 왜 이, 아!”
성기보다는 작지만 그만큼 세밀한 자극이 가능한 손가락이 빠르게 내벽을 비벼 댄다. 이러다 겨우 손가락만으로 사정할지도 모른다.
“의, 진 씨, 나 잠까…!”
서운이 몰려드는 사정감을 피해 허리를 곧추세웠다.
“어디 가십니까.”
“아!”
퍽! 의진이 도망치는 서운의 어깨를 붙잡아 그대로 내리꽂았다.
“그 사람에게 가는 겁니까.”
“흐, 으, 아, 아아…!”
의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더는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다. 서운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온몸을 떨어 댔다. 바짝 일어선 서운의 성기가 맥없이 정액을 뿜어내고 있었다.
“벌써 싸셨습니까?”
“…흐, 으….”
서운이 흐느끼는 신음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갑작스러운 사정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이건 확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진이 셔츠에 묻은 서운의 정액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군요. 확률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야 알겠다는 듯, 손가락으로 서운의 정액을 길게 늘어트리며 홀린 듯이 중얼거린다.
“확률로 따지면 저희가 만날 가능성은 전무하니….”
“…아…!”
의진이 서운의 내벽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서운이 사정을 하고도 당연하게 내벽에 머물러 있던 의진이 마침내 손을 빼낸 것이다.
“저에게 불리하군요.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의진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끈적한 애액이 딸려 나온다.
“제가 왜 서운 씨를 늦게 만나야 합니까?”
의진이 낮게 읊조리며 손가락에 묻은 애액을 꼼꼼하게 제 성기에 펴 발랐다.
“조금만 더 서운 씨를 빨리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
“…제가 제일 먼저… 어떻게든….”
“…….”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의진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치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았다.
“서운 씨….”
의진의 손이 급하게 서운의 티셔츠 안으로 거칠게 밀려 들어왔다. 서운의 맨등을 어루만지고 판판한 아랫배를 쓰다듬다가 가슴의 돌기를 꼬집는다.
더는 생각하기 싫다는 듯 의진이 서운의 젖꼭지를 입에 넣고 빨기 시작했다. 쪽, 쪼옥, 쪽…, 혀로 톡톡 건드리다가도 입술에 힘을 주며 젖꼭지를 빨아 올린다. 가볍게 이를 세워 깨물기도 했다.
“어…!”
“…….”
“어, 윽…!”
그 밑에서는 자연스럽게 삽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애액을 뒤집어쓴 성기가 축축하게 젖은 입구를 벌리며 꾸역꾸역 내벽을 밀고 들어간다.
처음부터 앉은 자세로 삽입을 하자 못내 버거운 듯 서운이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즈즈, 즈즈즈… 입구의 주름이 팽팽하게 늘어나는 감각에 서운의 맨살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서운, 씨….”
“으, 응….”
“너무, 너무 뜨겁습, 니다….”
그러고 보니 콘돔도 안 했다. 의진의 성기가 생으로 서운의 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 윽, 천천, 히… 의진 씨, 천천히….”
서운이 의진의 어깨를 짚고서 파들파들 몸을 떨었다. 러트의 기운이 남아 있는 알파의 성기는 평소보다 훨씬 크고 단단해서 아래가 쪼개질 것 같았다.
“천천히, 하… 천천, 히….”
의진이 서운의 말을 따라 하며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었다. 내벽의 돌기가 성기에 달라붙어 진입을 방해하는 감각이 선연하다. 제 말대로 천천히 밀려 들어오는 성기의 감촉에 서운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온몸의 감각이 아래에 집중되어 있었다.
“아…!”
“하….”
어느 지점을 지나자 성기가 내벽 안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졌다. 의진이 무방비하게 풀어진 눈으로 서운을 쳐다보았다. 서운은 익숙하게 의진의 시선을 받으며 조금씩 몸에서 힘을 풀었다. 자신을 받아들이려는 오메가의 노력을 알아차린 의진이 점점 호흡을 빨리했다.
“움직여도 됩니까…?”
“…조금만 있다가….”
“…못 참겠습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의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운의 허리를 고쳐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알파의 페로몬이 초조하게 일렁인다. 의진은 아까부터 자신의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떠들어 대는 소리만 봐도 이미 제정신이 아닌데 이제 와서 허락 아닌 허락을 구하고 있다. 서운까지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어 놓고 이제야. 서운은 말없이 의진의 손을 제 엉덩이로 가져왔다.
“아!”
서운의 손이 의진의 손에서 채 떨어지기도 전에 의진이 바로 축축한 내벽 속에 성기를 박아 넣었다. 서운이 저를 받아들여 줬다고 생각했는지 시작부터 허릿짓이 거칠기 짝이 없다.
“어, 어어! 잠! 아!”
영화관에 서운의 새된 신음이 울려 퍼졌다. 음향 시설이 잘되어 있는지 서운의 목소리가 끝도 없이 메아리쳤다.
실제 영화관이 아닌 걸 알면서도 당장이라도 누군가 들어와 두 사람을 보고 비명을 지를 것 같다. 놀란 서운이 제 입을 틀어막았으나 의진이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의진이 바짝 귀를 세우며 보란 듯이 허리를 쳐 댔다.
“소리, 후으… 소리를 더, 내 주십시오….”
“아, 앗! 아!”
“더, 더….”
“하, 아, 하윽…!”
의진의 허릿짓에 맞춰 서운의 신음이 함께 박자를 탔다. 제가 내는 소리에 놀란 서운이 내벽을 강하게 수축했다. 성기를 터트릴 듯이 조여 대는 내벽의 감촉에 의진이 이를 악물며 성기를 처올렸다. 의진의 위에 올라탄 서운의 몸이 맥없이 흔들렸다.
“…왜…?”
그러다 갑자기 멈췄다. 허억, 허억, 허억…. 의진이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깊게 심호흡을 했다.
“콘돔이, 없습니다.”
“…….”
“방에… 방에 있습니다….”
이제 정신이 돌아온 걸까, 줄곧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던 의진이 드디어 서운이 알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제아무리 의진이라도 크루즈에서 섹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나 보다. 악착같이 콘돔을 고수해 오던 의진을 생각하면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하물며 이 사실을 행위 중간에 깨달은 걸 보면 반쪽짜리 러트여도 러트는 러트인 모양이다.
“그냥, 해….”
“…하지만….”
“하고 싶어, 빨리….”
덕분에 서운도 완전히 흥분했다. 서운이 초조하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말 확실합니까?”
“어?”
“책임질 수 있으시냐고 물었습니다.”
서운의 채근에 의진이 정색을 하며 책임을 운운한다. 서운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자 의진이 서운의 허리를 단단히 고쳐 쥐며 그런다.
“저는 서운 씨가 아기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결혼 후 두 사람 사이에서 2세 이야기가 나온 건 처음이다. 햇수로는 2년 차가 되었지만 결혼한 지 반년도 안 된 신혼부부에게는 아직 자녀 계획이랄 게 없었다. 있다면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나눈 이야기가 전부다.
“서운 씨가 아기를 가진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서운 씨가 저희의 아기를 가져서 제 페로몬에 둘러싸여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지 의진이 거침없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동시에 서운의 내벽에 가득 들어차 있는 의진의 성기가 조금씩 부풀었다.
“누가 봐도 저 오메가는 짝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의진, 씨, 이거….”
“그러니 준비가 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 어어…!”
“그동안, 많이 공부했습니다. 노팅도, 하… 각인도, 임신도… 서운 씨만 괜찮으시면….”
꿈틀꿈틀, 의진의 성기가 서운의 안에서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운의 아랫배도 점점 튀어나왔다.
알파에게 노팅이란 지극히 본능적인 행위다. 개인의 이성과 통제력을 벗어나는 행위인 만큼 본인이 직접 경험해 보지 않는 이상 노팅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서 감히 평균을 운운하기도 어렵다.
덕분에 두 사람은 지금까지 노팅을 피해 왔다. 자신의 노팅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의진은 최대한 노팅을 자제해 왔다.
하지만 페로몬 매칭률이 96.72%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알파의 성향이 어떻든 간에 상성이 잘 맞을 수밖에 없다. 의진이 누구보다 검사 결과에 기뻐한 이유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인정받았다. 의학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수치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그들의 사이를 인정받은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인지한 알파의 성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의진, 의진 씨! 이거…! 어!”
“…….”
“아, 윽, 이상, 이거 이상해…!”
“하….”
“앗! 아! 아아!”
퍽! 퍼억! 의진이 그대로 서운을 들어 올려 아래로 내다 꽂았다. 노팅을 앞두고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가 무자비하게 여린 내벽을 짓이겼다. 쿵! 쿵! 서운의 몸이 크게 들썩일 때마다 의진이 서운의 어깨를 잡아 눌러 추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서운의 발목에 걸려 있는 벗다 만 바지와 속옷이 맥없이 나풀거렸다.
“서운 씨, 서운 씨….”
“응, 응…!”
“하, 뇌가… 녹는 것 같습니다….”
퍼억! 다시 한 번 성기에 꿰뚫린 서운이 부들부들 온몸을 떨어 댔다. 처음에만 해도 의자에 앉아 있던 의진은 어느새 반쯤 일어선 채로 추삽질을 하고 있었다. 서운의 등이 앞좌석 등받이에 닿았다. 여전히 안정감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조금이라도 등을 기댈 곳이 생기자 한결 안심이 된다. 그렇게 생각한 건 서운만이 아닌지, 의진이 서운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치고서 본격적으로 허리를 쳐올렸다.
퍽! 퍼억! 철벅! 살과 살이 부딪치면서 애액이 튀기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영화관에 울려 퍼지는 난잡한 소리가 점점 서운의 이성을 갉아먹었다. 오로지 저를 향해 쏟아지는 의진의 페로몬도 한몫했다.
“잠, 깐! 잠깐, 만! 나, 떨어져! 떨어져…!”
“안, 떨어집니다….”
“떨어질 것, 같…!”
“이렇게 꽉, 물고 있는데, 후으… 어떻게 떨어집니까….”
“앗…!”
“절대, 안 떨어집니다. 못, 떨어집니다…!”
구멍이 다물릴 틈도 없이 성기가 내벽을 미친 듯이 쑤셔 댔다. 서운은 아래를 꿰뚫린 채 반쯤 공중에 떠 있었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의진이 전부다. 서운은 의진이 박는 대로 정신없이 흔들렸다. 이러다 뇌까지 함께 흔들릴 것 같다.
잔뜩 부은 전립선이 거칠게 비벼지고 아래가 쪼개질 듯이 성기가 밀려 들어오자 급격하게 사정감이 몰려왔다. 서운이 사정감에 몸부림치자 의진이 더 강하게 허리를 치고 들어왔다. 으으응…! 서운이 발끝이 곱아 들며 제 배 위에 뿌연 정액을 토해 냈다. 벌써 두 번째 사정이었다. 의진의 셔츠에도 서운의 정액이 튀었으나 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운이 사정하며 내벽이 경련하자 의진이 허릿짓을 멈췄다. 그러고는 경련하는 내벽을 음미하듯 잘게 안을 쪼개기 시작한다. 사정 후에도 계속되는 규칙적인 추삽질에 서운이 의진의 등을 잡아 뜯었다. 뇌가 이미 다 녹아 버린 것 같았다.
“…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게 성기가 부피를 늘리더니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단단하게 입구를 틀어막고 줄어드는 내벽을 억지로 잡아 벌리며 서운의 몸속에 길을 만든다.
“아, 아윽…!”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서운이 본능적으로 몸을 빼내려 들었다. 그런 서운의 어깨를 붙잡은 의진이 서운을 아래로 잡아 누르며 더 깊은 곳까지 성기를 쑤셔 박았다. 말 그대로 박아 넣었다.
“어어, 어, 어…! 어…!”
그리고 무언가를 쏟아 낸다. 안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느낌이 났다. 서운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내는 애액과는 다르다. 그보다 훨씬 더 양이 많고 어딘가 묵직한 느낌이다.
후으…, 의진이 짧게 신음하며 의자에 완전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자세가 안정되자 자연스럽게 서운을 제 몸에 기대게 한다. 꿀렁꿀렁, 서운이 움직이자 배 속에서 낯선 소리가 들린다. 서운의 아래가 정액으로 가득 채워지면서 나는 정액이 출렁거리는 소리였다.
이런 게 노팅이구나. 이런 게 노팅이었어. 서운은 차마 의진을 보지 못하고 민망함에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발기가 덜 풀린 자신의 성기와 서운이 토해 낸 액체로 범벅이 된 의진의 셔츠와 바지가 눈에 들어온다. 도저히 눈 둘 곳이 없었다.
맞물린 결합부는 빈틈없이 부풀어 오르고 내벽 안의 성기는 억지로 길을 내며 제 흔적을 남기려 든다. 내 몸인데 내 몸 같지 않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서운의 판판한 아랫배가 간간이 꿈틀거리며 외부의 침입자를 알리려 들자, 이를 나무라듯 의진이 서운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서운 씨 배가 계속 움직입니다.”
“…그거야….”
“제가 계속 싸고 있어서 그런 거군요.”
사정의 쾌감이 얕게 지속되는지 의진의 목소리에 열기가 가득했다. 사정을 마친 서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기였다.
“얼마나 싸면 아기가 생길 수 있을까요.”
다시금 마주한 의진의 눈은 동공이 완전히 풀려 있어서 어딘가 위험하게 느껴졌다.
“…난, 아직은….”
“그럼 언제가 좋으십니까?”
“조금 더, 있다가….”
“알겠습니다. 올해는 너무 이르신 거지요.”
서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기에 틀어 막힌 입구가 쓰라리고 장기를 압박해 오는 몸 안의 성기가 버거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힘들었다.
“지금 당장 아기를 키우고 싶은 건 아닙니다.”
의진이 자신의 정액으로 꿀렁거리는 서운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전 그저….”
좀 더 밑으로 내려온 의진의 손가락이 두 사람의 결합부를 더듬었다. 응…! 서운이 예민하게 반응하자 의진이 손장난을 멈추고는 서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서운 씨를 임신시키고 싶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의진은 진심이었다.
“그뿐입니다.”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진심, 의진이 두 사람의 결합부를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아기가 너무 금방 생기면 안 될 텐데 말이죠.”
이 또한 의진의 진심이리라. 서운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 끝까지 들어찬 정액 때문인지 입 안에서 정액 맛이 났다. 두 사람의 첫 노팅이었다.
* * *
서운이 다시 갑판으로 나왔을 땐 어느새 하늘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한낮의 태양 대신 하늘을 차지한 건 희미한 달빛으로, 이제 곧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어? 화해했네?”
서운을 발견한 민영이 빠르게 달려왔다. 서운이 엉거주춤하게 대답했다.
“…싸운 건 아니었다니까.”
차라리 싸우는 게 더 나을 뻔했다. “뭔가 있긴 있었구만?” 민영이 어른스럽게 서운을 타박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닌지라 무어라 대꾸하기 어려웠다.
“어른들이 오빠랑 형부 안 보인다고 찾으러 간다는 거 내가 다 뜯어말렸어.”
“…너밖에 없다. 고마워, 민영아.”
“화해했으면 됐어.”
민영에게 큰 빚을 졌다. 조금 과장 보태서 동생이 아니라 은인에 가까운 수준이다.
“근데 웬 목도리? 안 더워?”
정확히는 목도리가 아니라 손수건이지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가, 감기 기운 있어서! 나 감기 걸렸잖아!”
서운이 필사적으로 자신의 질병을 알리고 나섰다. “…어, 그래. 좋겠네….” 서운의 설레발에 부응하듯 민영이 축하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어, 형부다!”
“네, 민영 씨.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십니까.”
잠시 자리를 비웠던 의진이 나타났다.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확인한 서운이 파리한 안색으로 마저 선베드에 몸을 누였다. 이미 해는 지고 없지만 똑바로 서서 하늘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노팅, 그것도 첫 노팅을 침대가 아닌 영화관 의자에서 치렀다. 이곳이 호주가 아니었다면, 하필이면 오늘이 호주의 최대 국경일이 아니었다면 서운은 숨 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테다. 서운이 끙끙거리며 힘겹게 자세를 틀었다.
“여기 있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의진은 쟁반 가득 음식을 들고 있었다. 똑바로 서 있을 힘도 없는 서운을 위한 특별식이었다. “어머, 언제들 나왔니?” 말없이 사라졌던 신혼부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어른들이 하나 둘 서운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종일 밖에 있었던 건지 영민은 그새 얼굴이 까맣게 탔다. 외삼촌도 마찬가지였다.
“때맞춰서 잘 나왔구나. 이제 곧 불꽃놀이가 시작한단다.”
사실은 살려고 나왔어요. 서운은 속으로 대답하며 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감자튀김도 드십시오.”
의진은 옆에서 그런 서운을 보좌하고 있었다. 노팅을 하면 원래 좀 사람이 변하는 건지 서운은 이번 노팅으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의 의진을 만날 수 있었다. 힘들긴 힘들었지만, 아니, 더럽게 힘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제대로 러트가 온 의진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벌써 1월도 다 지났네요.”
“그러니까요. 시간이 어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 모르겠어요.”
어둠이 찾아온 바다는 하늘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넓고 깊어서 어딘가 장엄한 느낌을 주었다. 본래 인간의 본능이 다 그런 건지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불꽃놀이 기다리는 동안 다 같이 신년 계획이나 말해 볼까요?”
과거를 돌아보았으니 다음은 미래를 얘기할 차례다. 청중들의 반응도 아주 좋았다.
“좋죠!”
“누구부터 얘기하지?”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민영이 비장하게 앞으로 나왔다. 모두가 민영의 신년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알은척하지는 않았다.
“내 인생에 삼수는 없다악!”
짝짝짝짝, 예상했던 반응에 모두가 엄숙하게 박수를 올렸다. 악을 쓰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민영은 한참을 씩씩대다가 자리로 돌아왔다.
“다음은 누가 할까요?”
“민영이가 지목해 줄래요?”
“그럼 다음은… 형부!”
민영의 지목에 의진이 두 번째 타자가 되었다. 버거를 먹는 서운의 옆에서 수발을 들고 있던 의진이 여유롭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십 개의 눈동자가 의진에게 향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익숙한 의진이 특유의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의 신년 계획은.”
“저희?”, “아, 우니랑 같이 얘기하는 건가 봐요.”. 곳곳에서 추가 설명이 뒤따랐다. 서운은 그때까지만 해도 별생각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애초에 듣고 있지도 않았다. 체력 소모가 원체 컸던지라 당장 눈앞의 수제 버거가 더 소중했다.
“올해는 임신하지 않기입니다.”
“…어머.”
“컥!”
“…헐.”
서운의 손에 들려 있던 감자튀김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끼룩, 끼룩! 위에서는 갈매기가 지치지도 않고 우렁차게 울어 댔다.
“야 이 미친….”
놈아…. 서운은 생각했다. 모두의 앞에서 남사스러운 개소리를 지껄인 의진이 더 문제인지, 아니면 어른들 앞에서 쌍욕을 한 제가 더 문제인지. 확실한 건 둘 다 문제가 없지는 않다는 점이다. 원래 부부는 닮는다.
펑! 퍼엉! 어색한 침묵 속에서 호주의 최대 국경일인 Australia Day를 기념하는 성대한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화려하게 밤하늘을 수놓은 불꽃들이 마치 유성우 같다. 끝내주는 타이밍이었다.
모두가 하던 것을 멈추고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 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미어캣이 생각난다. 저마다 높낮이가 달라서 더 그래 보인다.
그래, 그날도 그랬지. 서운은 의진과 손을 잡고서 오랫동안 바라보았던 하와이의 밤하늘을 떠올렸다. 그래 봤자 겨우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굉장히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서운 씨.”
함께 하늘을 보고 있던 의진이 고개를 돌려 서운을 돌아보았다. 모두가 앞을 보고 있는데 의진만이 유일하게 서운을 바라보고 있다.
의진의 등 뒤로 색색으로 물든 밤하늘이 보인다. 화사하게 색을 입은 어둠은 더 이상 어둡지 않다.
“이러니까 꼭 하와이 생각이 나는군요.”
펑! 펑, 펑! 또다시 불꽃이 터진다. 불꽃이 피고 질 때마다 의진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괜찮으시면 다음에도 함께 여행을 가 주시겠습니까?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습니다. 서운 씨만 계시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자는 그림자조차 색을 가지고 있어서 어디에 있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어둠을 밝히는 수만 개의 불꽃처럼, 바다에 번진 출렁이는 불빛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눈에 들어온다.
하늘이 쉴 새 없이 반짝거린다. 서운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수천 개의 별똥별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서운은 그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별똥별에게 소원을 빌었다.
“…응, 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행복하기를, 서운은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이 행복을 영원히 지켜 내기로. 의진이 서운의 손을 잡아 왔다. 따뜻했다.
+ 비하인드 스토리, 운수 없는 날
그날은 유독 아침부터 재수가 없었다. 수년째 ZZ은행의 은행장을 역임 중인 그는 출근길에 5중 추돌사고에 휘말렸다. 하필이면 있기도 딱 중간에 있어서 앞차를 박은 것도 모자라 뒤차들에게 제대로 샌드백 취급을 당했다. 완전히 샌드위치가 따로 없었다. 결국 그는 뒷목을 움켜쥔 채 병원으로 이송되기에 이른다.
며칠 뒤에는 신문사 인터뷰가 잡혀 있다. 그는 인터뷰를 의식해 지난주부터 관리를 받고 있었는데, 인터뷰를 며칠 앞두고 목에 깁스를 차게 되었다.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경찰에게 불법 유턴이 걸려 한바탕 입씨름을 했다. 제가 누구인지 은근하게 밝히기까지 했는데도 경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여튼 요즘 젊은 놈들은 유도리가 없어서 문제다.
“XX물산 안 전무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오후가 돼서야 회사에 도착한 그는 뜻밖의 선물에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한때는 사위가 될 뻔한 XX그룹의 막내아들은 다른 3세들처럼 지저분한 소문이 있지도, 더러운 사생활을 가지고 있지도 않아서 그가 일찌감치 사윗감으로 찜해 놓은 알파였다.
비록 지금은 돈에 눈이 먼 영악한 오메가가 안 전무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지만 애초에 수준이 맞지 않으니 오래가지는 못할 테다. 그는 인생을 길게 볼 줄 아는 사람으로, 지금부터 안 전무의 재혼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기분 좋게 미래의 사위가 보내온 카드를 열어 보았다.
[은행장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저와 의진 씨를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서운. 안의진 드림.]
이럴 수가! 맹랑한 도발에 카드를 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는 필시 반반한 얼굴로 안 전무를 조종하던 영악한 오메가의 짓일 테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에게 보란 듯이 호주산 100% 천연 꿀을 보내올 리가 없다.
이런 괘씸한…!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맞이했다, 두 번째 교통사고 후유증을. 애초에 그는 목만 다친 게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허리를 삐끗하고 만다.
운 한 번 더럽게 없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