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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 사랑하는 균열 (12/13)

외전 2. 사랑하는 균열

그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도 늘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항상 똑같은 메뉴의 아침 식사를 한다. 그의 아침 메뉴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바삭한 토스트와 설탕을 넣은 따끈한 우유다. 룸서비스치고는 다소 단출한 모양새지만 그 옆으로 업무용 휴대폰과 태블릿 피시, 조간신문들이 함께 하고 있어 차린 것에 비해 외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식사를 마친 그는 곧바로 출근 준비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깨끗하게 세탁된 셔츠를 입고 타이를 맨다. 그는 패턴이 없고 색감이 화려하지 않은 무난한 스타일을 선호한다. 회의가 있거나 중요한 약속이 있는 날에는 조끼도 챙겨 입는다. 날이 추우면 그 위에 코트와 머플러를 걸치기도 하지만, 1년 중 대부분을 실내에서 보내는지라 날씨는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슈트 차림을 고수한다. 여기에는 그의 가족들 영향이 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주름 한 점 없는 슈트 차림의 가족들을 보고 자랐다. 카메라 밖에서도, 집 안에서도 그들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배가 고파도 정해진 장소 외에서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불필요한 대화는 되도록 하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함부로 자신의 상태를 타인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린 눈에 비친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그는 저 혼자만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이상하다 여겼다. 그는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배가 고파도 음식을 재촉하지 않고, 몸이 아파도 아픈 티를 내지 않으면 자신도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이제 그는 어엿한 가족의 일원이다.

그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한다. 간혹 기상 악화나 예기치 못한 사건 사고로 평소보다 통근 시간이 더 걸릴 때가 있는데, 그는 이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아예 1시간 일찍 출근하는 방법을 택했다. 고로 그의 정식 출근 시간은 언제나 같다.

출근 후에는 업무로 바쁜 시간을 보낸다. 업무 내용은 날마다 다르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남들보다 1시간 더 많은 오전 업무 시간을 마치고 나면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도시락을 먹는다. 점심 메뉴는 아침에 챙기지 못한 단백질과 섬유질, 그리고 비타민 등이 추가된 건강식으로, 식단은 격주에 한 번 바뀌고 어떤 메뉴든 그는 남기는 법이 없다. 불평도 하지 않는다. 편식도 하지 않고 음식 알레르기도 없다. 좋아하는 음식도 없다.

식사를 마치면 그는 간단한 휴식을 취한다. 원활한 신진대사 촉진을 위해 운동도 한다. 체력이 곧 경쟁력이다. 그는 절대로 운동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운동 내용은 컨디션에 따라 달라지지만 그조차 크게 다르지는 않다. 운동의 마무리는 언제나 스트레칭으로,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면 업무에 복귀할 시간이다.

그의 오후 업무 시간은 언제나 바쁘다. 회의, 보고, 결재의 연속이다. 그의 완벽한 가족들은 아주 오랫동안 이 길을 걸어왔다. 그가 아니었다면 완벽했던 가족들의 커리어에 흠집이 생길 일도 없었을 테니 그의 책임이 막중한 셈이다.

그는 일을 한다. 그리고 바쁘다. 정신없이 바쁘다. 자신이 가족들에게 입힌 금전적인 손해를 생각하면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그는 규칙적인 식사를 위해 정해진 시간에 저녁을 먹는다. 업무상 저녁 만찬이 있을 때는 밖에서도 먹지만 대부분의 식사는 회사에서 이루어진다. 저녁 식사 메뉴는 점심과 같은 곳에서 시킨 도시락이다. 그는 이번에도 남기는 법이 없다.

그의 퇴근 시간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언제나 그렇다. 자정을 넘길 때도 있고 넘기지 않을 때도 있다. 몇 시가 됐든 그는 호텔 방에 돌아오자마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다. 배가 고플 때는 간단하게 과일을 먹기도 하지만 각종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과일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다.

먹다 남은 과일은 밀어 두고 그는 마저 업무에 집중한다. 가끔은 시차 때문에 업무 보고를 받거나 화상 회의를 할 때도 있다. 그의 밤은 낮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다시 아침 해가 떠오르면 그는 언제나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출근을 한다. 일을 한다. 운동을 한다. 일을 한다. 퇴근을 한다. 일을 한다. 출근을 한다.

그의 규칙적인 일상에 균열이 일어났다.

사랑하는 균열

짧은 출장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던 길이었다. 그는 면세점 앞을 지나다 말고 어느 매장 앞에 멈춰 섰다. 이제 와서 그가 면세점 사업에 흥미가 생긴 건 아니다. 익숙한 향기에 이끌려 잠시 걸음을 멈췄을 뿐이다.

그의 돌발 행동에도 수행 비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침착하게 자신이 맡은 바를 다하고자 했다.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 수행 비서가 재빨리 보고를 올렸다.

“진한 풍미가 매력적인 초콜릿 전문 브랜드입니다. 국내에서는 아직 유통되지 않고 있어, 해외를 찾는 한국 관광객들에게 특히 인기입니다. 다소 까다로운 보관법에도 불구하고 초콜릿 마니아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는….”

과연, 그는 진지하게 수행 비서의 말을 경청했다. 출장 중에도 시장 조사를 게을리하지 않는 제 상관의 모습에 수행 비서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역시 그의 상관은 대단했다.

“종류가 총 열세 가지군요.”

“네, 전무님.”

“종류별로 하나씩 다 사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말씀하십시오, 전무님.”

“낱개 말고 박스로 사세요.”

다음은 디저트 산업인가! “네, 전무님!” 수행 비서가 비장하게 계산대로 뛰어갔다. 5개 국어에 능통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처음으로 상관을 모시고 출장길에 오른 수행 비서에게 미션이 주어졌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직구가 어렵다?”

“네, 그렇습니다. 맛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제품 결이 무너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다.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현관 앞에서 브리핑을 하고 있다. 호텔 현관이 아닌 그가 일찌감치 점찍어 놓은 신혼집의 현관이다. 그는 더 이상 호텔에서 지내지 않는다. 그에게도 돌아갈 집이 생겼다.

“보이십니까? 박스 겉면에도 나와 있듯 실제로도 이렇게 제품에 결에 나 있습니다.”

그는 수행 비서에게 들은 것보다 더욱 자세하게 해당 브랜드 가치를 설명 중이다. 그런 그를 그의 배우자가 말없이 쳐다보고 있다. 제 눈앞에 놓인 초콜릿 열세 박스를 한 번, 출장을 보내 놨더니 초콜릿 열세 박스와 함께 돌아온 남편 놈을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는 중이다. 초콜릿은 박스 하나하나가 아이스박스에 담겨 개별 포장 되어 있었다. 즉, 부피 한 번 엄청났다. 일렬로 쌓아 올리면 그의 배우자의 키를 넘어설지도 모른다.

“이상입니다. 질문 있으십니까?”

마침내 브리핑이 끝났다. “네!” 돌아온 질의응답 시간에 그의 배우자가 번쩍 손을 들었다.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하십시오.”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예요?”

아주 예리한 질문이었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에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보관하기 어려운 거 보니까 왠지 금방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오, 차갑다.”

“…….”

“맞아요?”

아뿔싸, 브랜드 가치에 눈이 멀어 정작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신입도 하지 않을 초보적인 실수에 그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그새 초콜릿을 꺼내 구경 중이던 그의 배우자도 어렵지 않게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

안타깝게도 그의 배우자에게는 그다지 놀라운 광경이 아니었다.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그의 배우자가 능숙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아, 여기 적혀 있네요. 와, 비싸 보이는데 오래 먹지도 못하고 뭔가 치사하다.”

유통기한은 길지 않았다. 남은 기간 안에 열세 박스를 다 먹으려면 못해도 하루에 한 박스는 먹어야 할 테다. 그의 배우자가 남은 초콜릿을 박스에서 꺼내며 말했다.

“외숙모랑 민영이한테 빨리 나눠 줘야겠어요. 어머님, 아버님도 단 거 좋아하세요?”

“가족들 선물은 따로 있습니다.”

어? 그의 배우자가 아이스박스를 해체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지자 배우자의 맨목덜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시선도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매끈한 목덜미에서 초콜릿 향기가 나는 것 같다.

“그럼 이거 다 내 거야?”

“네, 그렇습니다.”

그의 배우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또다시 초콜릿 열세 박스를 한 번, 그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볼 뿐이다.

설마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 때쯤 그의 배우자가 활짝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그의 배우자가 웃는다.

“잘 먹을게.”

그를 보며 웃는다. 두 눈은 사르륵 접히고 입꼬리는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다. 만약 이때 배우자가 질문을 해 왔다면 그는 필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테다. 그는 배우자가 웃을 때마다 세상이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배우자를 알게 된 뒤로 쭉 그래 왔다.

그는 익숙하게 심장이 내려앉는 감각을 무시했다.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현상은 업무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검사 결과 심장에는 아무 이상도 없으니 크게 신경 쓸 만한 일은 못 된다.

“근데 너무 많이 사 온 거 아니에요? 이걸 어떻게 다 먹어.”

“다 못 드십니까?”

“뭐요?”

그가 놀라워하며 묻자 배우자가 단번에 눈을 치켜떴다. 허, 참나. 기가 막힌 듯 추임새가 절로 들어간다. 그로서는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격동적인 반응에 그는 퍽 흥미로운 얼굴로 배우자의 뒷말을 기다렸다.

“내 페로몬이 그렇다고 해서 초코에 막, 환장하지는 않아요. 의진 씨도 그렇잖아.”

그의 배우자가 질문을 던졌다. 한 번도 그가 생각해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의 배우자는 언제나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 준다. 그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글쎄요. 생각해 본 적 없군요.”

“박하 안 좋아해요?”

“지금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진중한 대답을 내놓자 그의 배우자가 빤히 그를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올려다보는 눈빛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의 배우자가 그와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난 좋아하는데.”

“…박하 말씀입니까?”

“응.”

그의 배우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던 그는 잠시 생각하는 것도 잊고서 배우자의 얼굴을 따라 부산스럽게 시선을 옮기기 바쁘다.

“좋아해요.”

“…그렇습니까.”

“응, 박하 제일 좋아. 너무 좋아.”

배우자가 웃는다. 그를 올려다보며 웃는다. 아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아, 민영이도 초콜릿 좋아하는데 하나 줘도 돼요?”

“제가 서운 씨께 드린 거니 서운 씨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보다 뽀뽀해도 됩니까?”

“어?”

“혀도 넣고 싶습니다.”

“…지니야.”

“네, 서운 씨.”

신나게 남은 초콜릿 박스를 열어 보던 그의 배우자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는 어딘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런 거 일일이 물어보지 말라고 그랬지.”

“죄송합….”

“자.”

그러더니 알아서 눈을 감는다. 그의 말을 끊는 것도 모자라 친히 입술까지 내어 준다. 쪽! 그가 급하게 고개를 내려 자신의 배우자에게 입을 맞췄다. 이틀 만에 하는 입맞춤에도 입술이 비껴가는 법이 없다. 이틀짜리 출장을 핑계로 전날까지 열심히 붙어먹은 결과다.

쪽, 쪽! 이번에는 배우자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춰 왔다. 다음은 당연한 수순처럼 혀를 밀어 넣으려는데 그의 배우자가 입술을 맞붙인 채 작게 속삭였다.

“…이제야 좀 실감이 나네.”

서로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바로 앞에서 나른하게 흩어지는 숨결에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뭐 해….” 그 모습이 퍽 재미있는지 배우자가 웃으며 그의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는 입술이 깨물린 채로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두 눈과 마주했다.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깜빡이며 찬찬히 그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그는 타인의 눈동자에 비친 자기 자신과 눈이 마주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이 또한 그의 배우자가 아니었다면 평생 경험해 보지 못했을 테다.

배우자의 속눈썹이 스치는 곳곳이 다 간지럽다. 볼 언저리에서 시작된 간지러움은 가슴 안쪽까지 전이되어 온몸을 다 간지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배우자를 내려다보며 심장을 벅벅 긁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 들고 벅벅 긁었을 테다.

“우리 지니, 잘 다녀왔어?”

속삭이는 목소리에 부드러운 숨결이 실려 온다. 아, 또다. 가까이에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 공항에서 그의 발길을 사로잡았던 달콤한 초콜릿 향기였다.

그는 본래 초콜릿을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모든 게 다 그렇다. 7년 가까이 이어져 온 미열 때문인지 그의 감각기관은 놀라울 정도로 무디다. 가장 직관적으로 감각을 끌어낼 수 있는 미각이나 후각조차 그에겐 아무런 감흥도 불러오지 못했다. 그랬는데.

“선물 고마워요. 잘 먹을… 으응….”

그랬던 때가 있었던가. 지금의 자극이 너무 강렬해서 과거의 기억은 이렇게나 아득하다. 그는 허겁지겁 배우자에게 혀를 밀어 넣었다. 배우자의 다리 사이로 자신의 허벅지도 집어넣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체온이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는 배우자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몸이 반쯤 밀려나는데도 배우자에게선 놀라는 기색조차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몸에서 힘을 빼며 그가 편하게 자신을 받쳐 안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의, 진 씨, 신발, 신발 안 벗… 응….”

“죄송, 합니다….”

“죄송할 건, 없는데… 아….”

“…하….”

“으, 응….”

깊어진 입맞춤에 서로를 더듬는 손길이 급해졌다. 그는 제 팔뚝 위에 걸쳐져 있는 배우자의 엉덩이를 세게 주무르며 뚜벅뚜벅 침실로 걸어갔다. 그가 걸을 때마다 두 명분의 체중이 실린 묵직한 발소리가 났다.

“…서운 씨.”

“응….”

“오늘은 어떻게 할까요.”

침대에 배우자를 내려놓은 후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배우자에게 의견을 구하는 일이다.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우자에게 맞추고 싶었다. 배우자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앞으로도 이 사람과 쭉 함께하고 싶다. 그 진중한 물음에 배우자가 노골적으로 그의 몸을 훑어 내렸다.

“오늘은….”

“네.”

“다 벗어요.”

마침내 배우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재빨리 탈의를 시작했다.

“넥타이만 빼고.”

배우자가 은근하게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배우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거의 성 경험이 전무했던 그로서는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간극이었다. 난폭한 마음과 묘한 기대감이 교차하며 흥분을 부추겼다. 하…! 그는 벨트를 잡아 던지며 허겁지겁 배우자에게 달려들었다. 아직 셔츠를 벗지 않은 채였지만 셔츠는 어차피 그의 영역이 아니다. 배우자는 제가 직접 그의 셔츠를 벗기는 걸 좋아했다.

그의 허벅지에 올라탄 배우자가 능숙하게 셔츠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배우자는 직업 특성상 정장 셔츠를 입을 일이 많지 않은데도 단추를 푸는 일에 무척 익숙해 보였다. 배우자가 처음으로 그의 셔츠를 벗겼을 때부터 그랬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하체를 들썩거리며 배우자의 손길을 방해했다. 그와 하체를 맞붙이고 있던 배우자가 삐끗, 손이 엇나갔다. 그 사실이 못내 통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가 탄다. 그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배우자의 허리를 세게 움켜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현관에서부터 줄곧 눈이 가던 매끈한 목덜미에 날카롭게 이를 세우기도 했다.

“아…!”

“아프십니까?”

잇자국이 선연한 목덜미에서는 어김없이 단내가 났다. 고통 섞인 신음에 배우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그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셔츠는 완벽하게 벗겨져 있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건 넥타이뿐으로, 그의 배우자가 골라 준 화려한 패턴의 넥타이다.

그의 치졸한 방해에도 무사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배우자가 자국 없이 매끈한 반대쪽 목덜미를 들이밀며 말했다.

“괜찮, 으니까… 조금만 살살….”

“…하….”

“앗! 살, 살 하라니까….”

“죄송, 합니다…. 조절이….”

간신히 안정적인 박자를 유지하던 그의 호흡이 단번에 거칠어졌다. 그는 찢어 내듯 배우자의 옷을 벗겨 냈다. 배우자의 체온이 남아 있는 얇은 잠옷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마침내 그의 손이 배우자의 엉덩이 사이로 향한 순간. 배우자가 촉촉한 입구를 귀두 끝에 가져다 대며 슬쩍 웃어 보였다.

“이럴까 봐 미리 풀어 놨지….”

입구는 배우자의 애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완전히 일어선 그의 성기 위로 배우자의 애액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가자 흐물흐물 녹아내린 내벽이 만져졌다.

어떻게 이런 게 있을 수가 있지? 그의 눈앞이 새카맣게 변했다. 배우자의 애액을 뒤집어쓴 성기가 그대로 쿠퍼액을 토해 내며 핏줄을 꿈틀거렸다.

“바로 넣, 어! 윽, 잠까, 아!”

퍽! 그의 성기가 내벽 깊은 곳까지 한 번에 밀려 들어갔다. 미리 내벽을 풀어 놨다고는 하나 갑작스러운 삽입이 버거웠는지 배우자의 허리가 연신 떨리고 있었다. 배우자의 허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도 잘게 떨리었다. 너무 흥분해서일 수도 있고,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배우자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그랬다.

“…엽기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배우자가 웃는다. 목덜미에는 양쪽 가득 잇자국을 달고서, 아래에서는 커다란 성기에 꿰뚫린 채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웃는다. 허억, 허억, 허억…. 치밀어 오르는 흥분에 그가 짐승처럼 헐떡거렸다. 가만히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던 배우자가 느릿하게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커다란 몸이 순순히 이끌려 오자 배우자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뒤로 대화는 없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혀를 빨았다. 예민한 점막이 비벼지고 서로에게 얽혀 들면서 본격적인 추삽질이 시작되었다.

“왜 자꾸, 음, 깨물어….”

대화가 재개된 건 전적으로 배우자에 의해서였다.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배우자가 듣기 좋게 그를 나무랐다. 그는 배우자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서 정신없이 허릿짓을 하고 있었다.

“싫으, 하아, 싫으십니까?”

헐떡이는 그의 입술 바로 아래 배우자의 젖꼭지가 봉긋 서 있었다. 하도 깨물리고 빨려서 꼿꼿하게 일어선 젖꼭지는 유륜 주변에 잇자국이 가득했다. 목덜미도, 어깻죽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틀 전에 제가 남겨 놓은 흔적이 아직 다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그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조급하게 굴었다.

“싫은 건 아닌, 아! 또…!”

“젖꼭지가, 바짝, 후으… 섰습니다.”

“너 때문이잖, 아, 앗!”

“너무, 야합니다. 너무 야합니다, 서운 씨….”

그는 같은 말을 반복하며 미친 듯이 허리를 쳐올렸다. 어, 어어! 아! 아아! 배우자의 신음도 끝을 모르고 높아졌다. 교성에 가까운 신음 사이로 초콜릿 향기가 한층 더 깊어졌다.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침실 밖의 초콜릿보다 훨씬 달콤하고 선명한 향기였다. 이틀 만에 맡는 배우자의 페로몬에 그는 불현듯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이틀이라니, 이틀이나 됐다니! 그는 무려 이틀이나 자신의 배우자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조급함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깨달았을 뿐이다.

한 번 인지하자 두 번은 쉬웠다. 이유 있는 조급함이 다급하게 그를 몰아세웠다. 떨어져 있었던 건 겨우 이틀인데 사정은 일주일 치를 했다. 그의 배우자는 욕실에서 나온 뒤 급격히 말을 잃었다. 설마 욕실에서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눈치다. 그는 공손하게 배우자를 침대에 눕혔다. 이불이랑 시트는 진작 갈아 놨다. 결혼 후 그는 침대 시트 갈기의 달인이 되었다.

“…아!”

“무슨 일이십니까!”

기진맥진한 채로 침대에 누워 있던 그의 배우자가 돌연 소리를 질렀다. 배우자의 목은 일찌감치 쉬어 있었다.

“그거! 초코! 지금 먹으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

“가져와요!”

배우자가 거침없는 손길로 침실 문을 가리켰다. 갑작스러운 명령어에 그가 뭔지도 모르고 침실을 뛰쳐나갔다. 다행히 침실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선물로 사 온 초콜릿이 들려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초콜릿 열세 박스가 그를 반겨 준 덕분이었다.

그는 살면서 한 번도 침대에 누운 채로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 음식이 초콜릿인 경우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그는 침대 위에서 초콜릿 포장을 뜯었다. 방금 막 아이스박스에서 꺼내 온 초콜릿은 아직도 차갑게 굳어 있었다.

“빨리, 빨리.”

“아직 차갑습니다.”

“초콜릿은 원래 차가운 게 맛있어요.”

“그런 겁니까?”

그가 배우자에게 초콜릿을 건넸다. 침대에 코코아 가루를 흘리지 않으려는 신중한 손길에도 초콜릿을 가져가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 그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여기 있습니다.”

“아.”

기다렸다는 듯 그의 배우자가 냉큼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맛이 어떠십니까?”

그는 초조하게 배우자의 평가를 기다렸다. 배우자가 단번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이 세상 맛이 아닌데요?”

“그, 그 정도로 처참한 겁니까.”

“의진 씨가 한번 먹어 봐요. 진짜 장난 아니야.”

이번에는 그의 배우자가 그에게 초콜릿을 먹여 주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초콜릿 선물을 한 건 물론이고 그는 한 번도 침대에서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었으나 그 기록, 방금부로 깨졌다. 모조리 다 깨졌다. 그는 어색하게 초콜릿을 씹었다. 당연하게도 초콜릿 맛이 났다.

“맛있지!”

그러나 코코아 향이 나는 페로몬을 가진 그의 배우자는 그가 사 온 초콜릿이 무척 마음에 드는 듯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와 한껏 상기된 뺨이 배우자의 기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네, 맛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도 좋았다. 침대 위에서 배우자와 함께 나눠 먹는 초콜릿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했다.

* * *

그의 일상은 회사 일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고로 그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그가 처음으로 타인에게 초콜릿 선물을 하고, 침대 위에서 초콜릿을 먹는 이변이 일어나긴 했어도 결국은 그의 출장에서 기인한 일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그가 출장을 가지 않았다면 초콜릿을 사 오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날도 그는 어김없이 어제와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출근을 했다. 오전에는 회의가 잡혀 있었다. 그는 회의 직전까지 업무를 보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회사 중역들과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은 그의 사무실보다 아래층에 있다. 사실 그에게는 모든 회의실이 다 그랬다. 그의 사무실은 본사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있다. XX그룹이 지향하는 수평적인 조직 문화에 따라 전용 엘리베이터는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출입구 기준 가장 왼쪽에 위치한 금색 엘리베이터는 언제나 비어 있어서 그는 언제나 금색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큰아버지를 비롯한 그의 가족이 회사를 찾을 때도 모두가 약속한 것처럼 금색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그는 모르겠지만, 아마 앞으로도 알 길이 없지만 사내에는 금색 엘리베이터를 둘러싼 암묵적인 룰이 있다. 정말 급할 때가 아니고서야 함부로 이용하면 안 된다는 무언의 규칙이다. 물론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날도 그는 회사 중역들과 함께 금색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멈추지 않았으면 그대로 회의실에 다다랐을 테다.

“헉!”

사내 핵심 인사들로 가득 찬 금색 엘리베이터를 멈춰 세운 직원은 한눈에 보기에도 어린 티가 났다. 쯧…! 크흠! 회사 중역들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티를 내자 앳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직원이 허리 숙여 사과를 했다. 따지고 보면 사과할 일은 아니었으나 중역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박 인턴! 엘리베이터 잡아 놓으라니까 뭐 하고 있… 죄, 죄송합니다.”

사과가 배로 불어났다. 인턴이라 불린 이보다는 직급이 한참 위로 보이는 직원이었다.

“미리 주의 주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죄송합니다.”

“흠, 흠!”

“그럼 살펴 가십시오.”

“잠시만.”

그의 한 마디에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중역들을 비롯한 모두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엘리베이터 밖의 직원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급해 보이시는데 같이 타시죠.”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먼저 내려가시….”

“좁아서 그러십니까?”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탑승 인원에 비해 공간 낭비가 심했다. “모두들 뒤로 한 발자국씩 오시죠.” 그가 말했다. 하, 하하…. 곧바로 중역들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딸꾹! 어디선가 딸꾹질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이러니까 정말 모두가 탈 수 있군요!”

“전무님께서는 배려심도 깊으십니다.”

“역시 전무님이십니다!”

“여기서 더 탈 수도 있겠습니다, 하하!”

중역들이 한 걸음씩 물러서자 충분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시야가 확보되자 ‘그것’이 더 눈에 잘 들어왔다. 역시, 그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타시죠.”

“정말 괜찮….”

“어허, 전무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딸꾹! 힐난에 가까운 어조에 또다시 딸꾹질 소리가 났다. 인턴은 조용히 제 입을 틀어막으며 사수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겨우 두 사람의 등장에 엘리베이터 내 평균 직급이 급격하게 낮아졌다.

“몇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 전무님!”

사수로 보이는 이가 우렁차게 대답했다. 중역들이 언뜻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의 시선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웃는 얼굴을 해 보였다. 그가 먼저 말을 건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뭡니까?”

“예?”

“그 볼펜 말입니다.”

두 사람은 조그만 업무용 다이어리를 들고 있었다. 두 개의 다이어리에는 맞춘 것처럼 동일한 핑크색 볼펜이 끼워져 있었는데, 덕분에 토끼 한 마리가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귀가 커다랗고 두 눈이 동그란 핑크색 토끼였다. 그가 어디서 많이 본 토끼이기도 했다.

“아, 이거 팝업 스토어에서 샀어요.”

“저희 팀원들이랑 다 같이 맞췄습니다.”

“토낑이 팝업 스토어가 열렸습니까?”

…얘 이름이 토낑이였어? 네, 맞아요…. 두 사람이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캐릭터 이름을 꿰고 있는 것도 모자라 팝업 스토어 여부를 묻는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들떠 있다. 네…, 인턴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썹이 까닥거렸다.

“그렇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그럼 마저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네….”

“그 볼펜은 무슨 색입니까? 색은 총 몇 가지인지도 궁금하군요. 볼펜은 종류가 한 가지입니까? 혹시 볼펜 말고 다른 제품들도 있습니까? 있다면 카테고리가 어떻게 됩니까?”

대화는 회의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사실 대화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모양새였다. 이들의 대화는 그가 토낑이 팝업 스토어 URL을 확보한 후에야 비로소 끝이 났다.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오늘 점심은 됐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비서에게 점심 도시락을 취소하도록 하는 일이었다. 그가 참석한 회의 관련 지시가 쏟아져 나와도 모자랄 판에 점심 도시락이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도 비서는 프로의 모습을 유지했다.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토스트라도 준비할까요?”

“아니요. 자리를 비울 예정이니 괜찮습니다.”

비서가 알기로 오늘 제 상관에게는 아무런 외부 일정이 없다. 배우자와 점심 약속이 있지도 않다. 그럼 대체 왜? 제 상관을 회사 밖으로 이끌어내는 가장 유력한 후보들이 사라지고 나니 남는 건 의문뿐이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비서가 결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그는 그새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가 여상하게 서류를 넘기며 대답했다.

“잠시 백화점에 다녀오려 합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제가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아니요. 직접 확인해야 하니 제가 가도록 하죠.”

설마 수행 비서 말대로 초콜릿 브랜드 수입을 염두에 두고 계신 건가. 비서의 추측에 확신이라도 심어 주듯 그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귀신같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비서가 초콜릿 브랜드 공부를 시작한 그때, 그는 혼돈의 중심에 있었다.

“저기요, 아까 줄 서신 분 맞아요? 옷 색깔이 다르신 것 같은데.”

“밀지 말라고요! 어차피 못 들어가요!”

“행사 마지막 날인 오늘 인파가 몰려 매장이 매우 혼잡하오니 원활한 진행을 위해 잠시 입장 제한이 있겠습니다. 지금부터 대기하시면 40분 후에 입장이 가능하며, 품목 상관없이 1인당 구매 제한이 있으니….”

“저기요! 저희 지금 28분째 대기 중인데 여기서 40분을 더 기다리라는 거예요?”

“정말 죄송합니다, 고객님. 보시다시피 매장 규모가 협소해 모든 인원을 소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면….”

“뭐요? 아니, 구매 제한이 무슨 소리예요? 부탁받고 온 사람은 어떻게 하라고!”

“지방에 사는 사람은 차별하는 겁니까!”

여기가 바로 아비규환이요, 지옥이었다. 그는 전쟁터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평균을 웃도는 신장 덕분에 그는 저 혼자 위로 껑충 솟아 있다. 그는 침착하게 아래의 상황을 관망했다. 일단 그의 앞으로 총 27명의 경쟁자가 있다. 뒤의 상황은 중요하지 않으니 뒷줄은 따로 세어 보지 않았다.

경쟁자의 유형은 다양했다. 그처럼 점심시간을 포기하고 달려온 직장인부터 교복 입은 학생들, 자식 등쌀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줄을 선 부모들까지. 확실한 건 모두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점이다. 그는 입장 제한이 풀리기까지 37분간 누구보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토낑이 브랜드를 매입하는 편이 더 빨랐을 테지만 당시에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다. 군중 심리라는 게 그렇다. 내 몫의 물건이 남아 있기만을 바라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함께 불안에 떨며 전우애를 다졌다.

“저기요, 여기 줄 선 거 안 보여요?”

“…여기서도 줄을 서야 합니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줄 서시라고요.”

물론 물욕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기껏 매장에 입성했더니 이제는 계산 줄이 그를 반겨 주었다. 이렇게 직접 줄을 서서 물건을 구입해 본 적이 없는 그에게는 이 상황이 무척 생소하기만 했다.

또다시 천년 같은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계산 줄에 서 있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입장 대기에 걸렸을 땐 이러다 품절이 되면 어쩌나 싶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남들보다 얼굴 하나는 올라가 있는 그가 위에서 진지하게 계산 현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그런 그를 수상히 여긴 다른 손님이 새치기를 시도했다.

“계산 안 하실 거면 좀 비켜 주세요.”

계산 줄에 서 있는 그의 손에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아서 할 수 있는 대범한 시도였다.

“아니요. 계산합니다.”

“계산하신다구요?”

“네, 그렇습니다.”

잡지 화보에 등장할 법한 정장 차림의 그는 가방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재킷 주머니조차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지 않다. 손님은 그를 의아하게 여기면서도 더는 끼어들지 못하고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는 계산대에 다다를 때까지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다. 여기에는 매장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감을 뽐낸 그의 탓이 컸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봉투 필요하세요?”

마침내 그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물건을 건네는 대신 질문을 시작했다.

“구매 제한이 정확히 어떤 겁니까?”

“네?”

“개수에 대한 제한인 겁니까.”

“네, 네?”

“동일 품목의 경우 특정 개수 이상 구입이 불가능한 건지, 아니면 품목에 상관없이 동일 제품 구매 시 개수 제한이 있는 건지를 물었습니다.”

직원은 잠시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침착하게 고객 응대에 나섰다. 본래 서비스업이란 다양한 종류의 인간상과 마주하게 됨을 뜻한다.

“품목이라 하시면 문구 인형처럼 제품 카테고리를 말씀하시는 거 맞으세요?”

“그렇습니다.”

“품목 제한은 없고 동일 제품 구매 시 개수 제한은 있습니다, 고객님.”

“그렇군요.”

“고객님, 아직 결정 못 하신 거면 잠시 후에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지금 하시면 됩니다.”

그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채로 재킷 안쪽에서 카드를 하나 꺼냈다.

“여기 있는 물건들 하나씩 다 포장해 주십시오.”

미션 클리어! 그는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그날 그는 평소보다 일찍 퇴근을 했다. 그의 배우자에게 저녁 약속이 있는 오늘이 기회였다. 집에 도착한 그는 본격적인 작업에 앞서 배우자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작업의 효율성을 고려했을 때 목표 시간에 맞춰 작업 시간을 분배하는 편이 가장 효과적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배우자는 한 번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휴대폰을 힐끗거리며 포장 비닐을 벗겼다. 일일이 포장을 벗기는 것도 일이다. 심지어 앞으로 벗겨야 할 비닐이 더 많이 남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배우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 응, 나예요. 전화했었어?

“네. 정확히 23분 전에 전화드렸습니다.”

- 전화 온 지도 몰랐네. 왜 전화했어요?

무려 23분 동안 전화가 온 걸 몰랐다니, 왜 전화했냐니! 배우자의 충격 발언에 부지런히 포장을 벗기던 그의 손길이 멈췄다.

“왜 모르셨습니까?”

- 어?

“그리고 용건이 있어야만 전화드려야 하는 겁니까? 전에는 분명 용건이 없어도 연락해도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시원하게 제 할 말을 쏟아 낸 그는 불퉁하게 배우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하하, 그랬지. 맞네, 내가 잘못했네.” 돌아온 건 달콤한 웃음소리였다. 그는 잠시 숨 쉬는 것도 잊고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배우자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배우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달콤하게 속삭였다.

- 우리 지니 놀랐어?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 알았어, 그럼 다시 얘기할게요. 너무 시끄러워서 전화가 온 지도 몰랐어요. 아예 진동으로 바꿔 놔야겠다.

“확실히 그 편이 더 효율적일 것 같군요.”

- 하여튼 효율 되게 좋아해. 오늘은 언제 퇴근해요? 이따 데리러 갈까?

“퇴근했습니다. 이미 집입니다.”

- 어? 진짜?

“네, 그렇습니다. 서운 씨는 언제쯤 귀가하실 예정입니까?”

음, 지금이 몇 시지…. 휴대폰 시간을 확인하려는 듯 잠시 배우자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 집에 가면 한, 11시 20분쯤 될 것 같아요.

11시 20분! 그가 재빨리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처음 해 보는 일에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기에 배우자의 귀가 예정 시간이 매우 적절하게 여겨졌다.

미션! 11시 20분까지 모든 준비를 완료하라! 마침내 최종 명령어가 입력되었다. 남은 건 진격뿐이다.

“좋습니다. 그럼 끊겠습니다.”

- 뭐? 끝이야?

“그렇습니다. 제 용건은 끝났습니다.”

- …뭐야. 자기야말로 용건 있어서 전화한 거였네!

“…그렇군요.”

역시 그의 배우자는 대단했다. 날카로운 눈썰미와 예리한 통찰력을 모두 지녔다. 죄송합니다, 그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리고 마지막 확인에 나섰다. 바쁜 현대인에게 더블 체크는 필수다.

“그럼 11시 20분에 오시는 겁니다.”

- 더 일찍 갈 수도 있….

“아니요! 11시 20분에 오십시오.”

- 뭐?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 뭐?! 너 지금 뭐 하… 야!

말 하나는 잘 듣는 그이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목표를 향해 달려갈 일만 남은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제일 먼저 나머지 포장 비닐을 벗겼다. 그러고는 물건을 품목별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토낑이 볼펜은 문구로, 토낑이 우산은 잡화로, 토낑이 세안 밴드는 미용 용품으로, 토낑이 귀걸이는… 잠깐, 그의 배우자가 귀를 뚫었던가. 이대로 난관에 봉착하는 듯했으나 다행히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아무것도 뚫려 있지 않은 귓불은 매끈하고 보드라워서 깨무는 맛이 좋았다. 느리게 귓바퀴를 핥다가 살짝 귓불을 깨물면 배우자의 귓바퀴에 소름이 돋아났다. 조그만 자극에도 쉽게 반응하는 몸은 언제나 뜨겁고 달콤해서 그는 정신없이 배우자에게 달려들곤 했다.

늘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그였고, 그를 받아 주는 건 배우자였다. 그의 배우자는 온화하면서도 뜨겁고 부드럽지만 단단한 사람이어서 달려드는 그를 버거워하면서도 밀어내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그가 어떤 실수를 해도 마찬가지다. 그의 배우자는 그를 내치지 않는다.

그는 또래보다 말이 늦었으며 글도 늦게 배웠다. 옹알이는 가족 중 누구보다 빨랐다고 하는 걸 보면 천성이 그런 건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보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런 주제에 발현은 남들보다 몇 배나 빨랐다. 그 사실을 그도 모르고 가족들도 몰랐다. 덕분에 그는 제가 살아온 시간만큼 발현열을 겪어야 했다. 고작 1℃, 어려서 체온이 높은 그에게 미열이 불러온 이상(異常)은 어린애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그의 시계를 느려지게 만들었다. 그는 처음 해 보는 일에는 남들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누구에게나 당연한 감각 체계를 한 번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는 남들과 다르다.

그의 배우자는 그런 그가 이상하다 말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그의 말에 난처한 듯 웃어 보이다가도 다시금 그에게 귀를 기울여 준다. 바라봐 준다. 들어 준다. 받아 준다. 그가 이해가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말해 준다. 그를 보며 웃어 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배우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첫눈에 자신의 배우자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빼앗길 뻔했다. 간발의 차이로 자신의 배우자를 다른 알파에게 빼앗길 뻔한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이 착오든 오해든 실수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사실은 그가 다른 알파에게 배우자를 빼앗았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빼앗기다니, 감히 누구를 빼앗긴다는 말인가. 상상만 해도 뒷골이 저리고 손끝이 차갑게 식는다. 그는 남들보다 느리지만 누구보다 이성적이다. 그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완전하게 내 것을 지켜 낼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이루어 낸 물질적인 업적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니 설사 빼앗겼다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다. 그럼 다시 빼앗아 왔겠지. 어떻게 생각해도 결론은 늘 같다.

아, 이런. 어느 순간 찾아온 익숙한 감각에 그가 자신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계속 배우자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그의 아랫도리가 묵직해져 있었다. 다행히 처음 있는 일은 아닌지라 그는 익숙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진정시켰다. 말초 신경의 자극에 의한 혈관의 팽창은 성욕을 가진 인간에게 일어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가 자신의 배우자를 떠올리면 일어나는 증상이기도 하다.

회사에서는 쉽게 진정이 되곤 했는데 배우자의 흔적으로 가득한 집에서는 진정에 시간이 더 걸렸다. 결국 그는 작업 중간에 예정에 없던 명상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역시, 여유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 두길 잘했다. 그의 계획은 완벽했다.

“안의진!”

그가 배우자의 이른 귀가라는 변수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예정보다 45분이나 이른 귀가였다. 그의 배우자가 집에 왔다.

“오셨습니까.”

“너, 허억, 뭐 하고 있었어!”

현관에 들어선 배우자는 급하게 뛰어온 기색이 역력했다. 호흡이 딸려 연신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그를 비롯한 집 안 곳곳을 둘러보기 바쁘다. 그가 배우자 몰래 뭔가를 숨겨 놨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역시 그의 배우자는 눈치가 빨랐다. 그는 배우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기대되었다. 그는 부푼 기대를 안고서 집 안을 탐색하는 배우자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쉽게도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없잖아?”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잘 보십시오.”

“…진짜 뭐라도 숨겨 놨어요?”

“네, 그렇습니다.”

“뭐?!”

“어서 찾아보십시오.”

그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이 배우자의 눈에는 당당하게 외도를 고하는 시발놈처럼 보였다.

“아니. 안 찾을 거야. 육체노동을 동반한 서프라이즈는 금지인 거 잊었어요?”

“…아니요. 잊지 않았습니다.”

“그럼 직접 말해 봐요. 뭔데 또?”

배우자에게 직접 말할 것! 배우자로부터 명령어가 입력되었다. 그는 순순히 배우자의 발밑을 가리켰다. 배우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어? 토낑이다!”

그곳에는 핑크색 털 실내화가 있었다. 심지어 배우자도 모르는 사이 이미 신고 있었다. 앞코에는 토낑이 인형이 달려 있는 겨울용 실내화였다. 참고로 여름용도 있다.

“이거 우리가 쓰는 뷰티 어플 걔 맞죠? 와! 캐릭터로 나왔나 봐.”

배우자가 단번에 반색을 표했다. 빡치는 와중에도 반가운 건 반가운 거였다. “그렇습니다.” 그가 뿌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깐, 설마…. 그제야 배우자가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숨겨 놓은 ‘사람’을 찾느라 몰랐다. 기분 탓인지 주변이 핑크색으로 변한 것 같다. 아니, 변했다. 모던하고 시크한 분위기의 집 안 곳곳에 토끼 필터가 씌워져 있었다. 두 사람이 애용하는 토낑이 필터였다.

“이, 이게 다 무슨….”

“마음에 드십니까? 참고로 아직 더 있습니다.”

“…그게 가능해요?”

“네, 가능합니다.”

사실이었다. 욕실에는 토낑이 욕실화, 토낑이 칫솔, 토낑이 치약, 토낑이 샤워볼 등이 있고, 배우자의 작업실에는 토낑이 볼펜, 토낑이 수첩, 토낑이 마우스 패드, 토낑이 노트북 파우치 등이 있다. 하이라이트는 침실이다. 침대 한가운데 토낑이 인형이 놓여 있었다. 크기는 또 어찌나 큰지, 무슨 장승이 서 있는 줄 알았다.

“마음에 드십니까.”

그의 물음에도 배우자는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눈치다.

“이게 다 뭐예요?”

“토낑이입니다.”

“나도 눈 있거든요.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줘.”

“우연한 계기로 토낑이의 팝업스토어 소식을 알게 되어 오늘 점심시간에 직접 방문했습니다. 다행히 마지막 날에 소식을 알게 되어 무사히 굿즈를 사수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온라인 판매는 미정으로 2차 팝업스토어 역시 계획에 없다고 합니다.”

“와, 토낑이 엄청난 애였네.”

“그렇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엄청났습니다. 얼마 전에 서운 씨께서 보여 주신 좀비 드라마를 방불케 하더군요.”

다시금 떠오르는 낮의 참상에 그의 얼굴이 절로 비장해졌다. 오오, 그의 생생한 공방 후기에 배우자가 호응을 아끼지 않았다.

“그 정도였어요?”

“네, 엄청났습니다. 무차별한 끼어들기와 고성까지, 무질서의 끝이었으나 그래도 소득은 있었습니다.”

“소득?”

“팝업스토어에서만 구할 수 있는 한정판 인형입니다.”

그가 세상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한정판이라는 토낑이 인형은 과장 조금 보태서 배우자의 몸통만 했다. 배우자가 조심스럽게 토낑이 인형을 만져 보았다. 실제로 토끼를 만져 본 적은 없지만 상상만큼이나 부드러웠다. 다정한 손길로 인형을 어루만지던 배우자가 손길만큼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점심은 먹고 간 거예요?”

“아니요. 먹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밥 먹을 때나 쉬면서.”

“죄송합니다. 비상 상태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마저도 제 뒤로 줄줄이 품절 사태가 발생해 조금만 늦게 갔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뭡니까.”

그가 품절 대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건 비밀이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배우자는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생애 첫 땡땡이가 토낑이 굿즈 줄 서기….”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혹시 마음에 안 드십니까?”

그러면서도 그의 질문에는 한사코 고개를 내젓는다. 그는 초조하게 배우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의 배우자는 현명하고 배려심이 깊으며 마음까지 따뜻해서 그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다.

“…고마워요.”

배우자가 토낑이 인형을 끌어안은 채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정한 시선에 마음이 간지러웠지만 그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가 물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응. 너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당연하지. 어떻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어요.”

“사람의 취향이란 지극히 주관적으로, 사람마다 개성이 다른 근거….”

“어허.”

배우자가 인형 귀로 그의 입을 가로막았다. 보드라운 털이 입술에 와 닿자 그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하하, 싫었어?” 배우자가 웃으며 인형 대신 제 입술을 들이밀었다.

아. 그는 냉큼 배우자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할짝할짝, 배우자의 입술을 핥기도 하고 가볍게 깨물기도 했다.

“으응… 살살….”

마침내 아무런 구멍도 뚫려 있지 않은 귓불을 입에 물었을 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어 깨물고 말았다. 몇 번이고 진지하게 고민해 봤지만 배우자만 보면 왜 이렇게 마음이 조급해지는지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날 그의 배우자는 토낑이가 그려진 잠옷을 입고 토낑이 수면 안대를 끼고서 토낑이 인형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배우자가 잠든 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자신의 배우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 처음으로 점심시간을 넘기고 회사에 복귀했으며, 점심 식사와 오후 운동도 건너뛰었다. 회사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의 규칙적인 일상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물건으로서의 효율이 전무하다고 생각하는 인형을 구입하고, 백화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뒤섞여 줄을 서기도 했다. 토낑이 굿즈를 사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퇴근도 서둘렀다.

이상하다. 이상한 일이다.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꾸만 퇴근 시간이 빨라지고 회사에 나가지 않는 주말이 늘어나고 있다. 아직 출근 시간은 사수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언제 깨질지 모른다.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그는 아주 늦게서야 자신의 일상을 지배한 균열을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아서, 오히려 가슴이 벅차올라서 그는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여담, 그는 몰랐던 이야기

오랜만의 가족 모임이었다. 매일 새벽같이 귀가하는 민영(여민영, 2n세, 대학생, 베타) 때문에 도통 시간을 내지 못하던 가족들이 오랜만에 두 사람의 집을 찾았다.

“…이게 뭐야?”

제일 먼저 민영이 물었다. 외삼촌과 외숙모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영민만이 세상 시큰둥했다. 못 본 새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진지하게 두 사람의 안위를 걱정하던 외숙모가 불현듯 떠오른 가능성에 반색하며 외쳤다.

“혹시 태몽…!”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대체 집 꼴이 왜 이래? 토끼신이라도 들렸어?”

다시 한 번 집 안을 둘러본 민영이 아연실색했다. 선물 받았어, 토낑이 슬리퍼를 신은 서운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은 덤이다.

“오빠 잘 생각해 봐. 이건 선물이 아닐지도 몰라.”

“선물 맞아.”

“말도 안 돼. 심즈 같던 집이 이게 무슨 꼴이야….”

“왜, 귀엽잖아.”

“이게? 진짜 내 형부지만 우리 형부는 중간이 없어.”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몇 년간 제 형부의 만행을 고스란히 지켜본 민영이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서운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귀여운 거란다. 계속 현관에 계실 거예요?”

“오빠는 무슨 말만 하면 다 귀엽대. 형부 덩치를 봐! 완전 조각상이구만.”

“그래, 그래. 뭘 이렇게 사 오셨어요.”

“별거 안 샀어. 과일은 제철 과일을 먹어야 돼.”

마침내 가족들이 토끼굴에 입성했다. 의진은 모르는, 그가 도착하기 전의 일이다.

* * *

한 번 인지하고 나니 두 번은 쉬웠다. 균열은 매 순간 일어나고 있었다.

어느 평범한 주말이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업무에 필요한 각종 전자 기기와 종이 서류가 테이블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왜?”

그런 그의 옆에는 그의 배우자가 있다. 그의 배우자는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보고 있었다.

“먹고 싶어요?”

그의 시선을 오해한 배우자가 그에게 팝콘을 내밀었다.

“맛있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입 안으로 갓 튀긴 팝콘이 밀려 들어왔다. 바삭! 튀기긴 또 어찌나 잘 튀겼는지 씹히는 소리가 일품이다. 그는 꼼꼼하게 팝콘을 맛봤다. 아주 성실하고 진지하게 팝콘 맛을 봤다. 그의 배우자가 맛있냐고 물었으니 응당 이에 상응하는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바삭하군요. 씹히는 맛이 아주 좋습니다. 무엇보다 소금기와 기름기가 모두 적당해 느끼하지 않으면서도 고소한 맛과 짠맛이 잘 어우러지는군요.”

“와,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여기 거 진짜 맛있지 않아요?”

바삭! 이번에는 그의 배우자가 팝콘을 집어 먹는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양 볼이 볼록하게 솟아오르다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그가 계속해서 배우자를 쳐다보고 있자 알겠다는 듯 배우자가 다시 그에게 팝콘을 내민다.

“아.”

그는 냉큼 팝콘을 받아먹었다. 딱히 팝콘이 먹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배우자가 그러라고 하니 그는 따를 뿐이다. 이를 오해한 배우자가 퍽 흐뭇한 얼굴로 그런다.

“잘 먹네. 앞으로 팝콘은 여기 걸로 갈아타야겠다.”

그러더니 다시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린다. 바삭바삭, 입술을 오물거리며 배우자가 부지런히 팝콘을 먹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영화에 집중한 눈치다. 그는 그런 배우자를 바라보았다. 구경했다. 감상했다. 어떻게 저런 게 있을 수 있을까, 그는 아무리 봐도 자신의 배우자가 신기했다.

“방해돼요? 끌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TV는 백색 소음의 대표적인 예로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됩니다. 전 괜찮으니 계속 시청하십시오.”

말실수라도 한 걸까. 그가 생각하기에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오류도 느껴지지 않건만 그의 배우자는 스크린 대신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가만히 그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그의 배우자가 냉큼 거리를 좁히며 그에게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배우자에게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기분 좋게 풀어져 있는 은은한 페로몬 향기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 냄새가 난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것도 잊고서 깊숙하게 배우자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팝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맛있는 냄새가 났다.

“의진 씨는 뭐 보고 있었어요?”

그의 배우자가 그에게 질문을 해 왔다. 배우자가 그에게 궁금한 점이 생긴 것이다. 그는 재빨리 자신이 들고 있던 태블릿 피시를 배우자에게 보여 주었다.

“…어우….”

화면을 확인한 배우자가 본능적으로 미간부터 찌푸리고 봤다. 숫자와 그래프, 그리고 영어가 아닌 희한한 언어가 한데 섞여 그의 배우자를 반기고 있었다.

“지난 분기 북유럽 시장 보고서입니다.”

“오….”

“한 번 보시겠습니까?”

“음, 뭐… 네. 볼게요.”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의 배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의 배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최선을 다해 보고서를 설명했다. 관련하여 간략하게 글로벌 이슈를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최근 국제 유가가….”

“오.”

“비슷한 일례로 서유럽이….”

“그랬구나.”

“작년 분기 대비….”

“오오.”

“동남아시아에서는….”

“아하.”

그는 회사에서 업무 브리핑을 할 때보다 열과 성의를 다해 배우자의 궁금증을 해결하고자 했다. 다행히 그의 배우자가 아낌없이 호응을 보내오는 걸 보면 그의 답변이 마음에 든 듯하다.

“이제 끝?”

“네, 그렇습니다.”

“그랬어. 우리 지니 발표도 잘하네.”

마침내 브리핑이 끝났다. 그의 배우자가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그는 또다시 심장을 꺼내 벅벅 긁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는 배우자에게 얌전히 머리를 내어 준 채 프레젠테이션을 마무리했다.

“질문 있으십니까?”

“네!”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하십시오.”

“그래서 언제 끝나요?”

그의 배우자에게 다음 질문이 들어왔다! 그는 남은 자료를 대충 훑어보고는 신속하게 답변을 내놓았다.

“약 1시간 10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오, 딱이다. 나도 영화 1시간 30분 정도 남았대요.”

딱이라니, 둘 사이에 약 20분의 오차가 존재하지만 그는 동의의 뜻을 담아 고개부터 끄덕이고 봤다. 결혼 생활 n년 차, 이제 그는 눈치가 많이 늘었다.

“의진 씨도 일 다 하고 나도 영화 다 보면 마트 안 갈래요?”

“가겠습니다.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응. 우리 과자 사야 돼.”

“알겠습니다.”

“팝콘도 더 사자.”

“네, 그러겠습니다.”

“그럼 이따 봐요.”

“네, 1시간 30분 후에 뵙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옆에서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바삭바삭, 그의 배우자가 다시 팝콘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마저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약속한 시간 안에 모든 업무를 마치려면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닌데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자신의 배우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응?”

그가 배우자를 쳐다보면 그의 배우자는 어김없이 그를 바라봐 준다.

“왜. 팝콘 줄까?”

입가에는 팝콘 부스러기를 달고서, 영화를 보던 것도 모두 잊고서 그렇게 그를 바라봐 준다.

“아.”

그의 배우자가 또다시 팝콘을 먹여 주었다. 그는 이번에도 순순히 팝콘을 받아먹었다. 그의 배우자가 먹으라고 하니까, 그래서 먹었다. 그가 묵묵히 팝콘을 씹고 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배우자가 웃으며 그런다.

“말을 하지. 그렇게 먹고 싶었어요?”

“…….”

“다 먹었어요?”

“네, 다 먹었습니다.”

“다시 아.”

바삭! 배우자가 팝콘을 먹여 주면 그는 팝콘을 받아먹었다. 먹여 주고 받아먹는 행위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배우자의 시선이 더 이상 스크린을 향하지 않고, 그가 태블릿 피시를 손에서 완전히 내려놓았을 때 그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캐러멜 맛도 있었습니까?”

알고 보니 팝콘이 두 가지 맛이 있었다. 그의 배우자가 실수로 캐러멜 맛을 주지 않았다면 그는 끝까지 모를 뻔했다.

“…아.”

“…서운 씨….”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건 그의 배우자였다. 적응력과 임기응변 하나는 끝내주는 그의 배우자가 빠르게 기지를 발휘했다.

“디, 딩동댕! 정답입니다!”

“…….”

“맞추신 분께는 상품이 나갑니다.”

그의 배우자가 능청스럽게 캐러멜 팝콘을 건넸다. 자세히 보니 캐러멜 팝콘은 일반 팝콘과 색이 달랐다. 처음부터 모든 게 의도된 계획범죄였다.

“삐졌어?”

“아니요. 삐치지 않았습니다.”

“근데 왜 나 안 봐.”

“…….”

“의진 씨.”

“…말씀하십시오.”

“지니야.”

“…부르셨으면 얘기를….”

“남편아.”

“…네.”

마침내 두 사람이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배우자는 그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무척 재미있어하는 희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캐러멜은 내가 다 먹어서 처음부터 거의 없었어. 감질나게 먹으면 안 먹느니만 못하니까, 그래서 안 준 거야.”

“…그런 겁니까?”

“그러엄. 당연하지!”

강력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꼴이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수상했으나 그는 배우자의 손길에 순순히 제 얼굴을 내어 주었다. 그의 배우자가 그렇다면 그런 걸 테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끝나고 같이 마트 갈 거지?”

“…네, 갈 겁니다.”

“가면 캐러멜 팝콘 사 줄게요.”

“…감사합니다.”

…귀엽기는…, 쪽! 그의 배우자가 아니고서야 들어 볼 일 없는 어색한 칭찬과 함께 맞닿은 입술에서는 달콤한 캐러멜 맛이 났다. 맛있었다. 그날 두 사람은 마트에서 팝콘을 털어 왔다.

그러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하여 금일 오후에는 수행 비서가 동행할 예정입니다. 최대한 외부 노출을 피하기 위해 본관 지하에서 바로 접견실로 이동하는 루트로, 전무님이 이용하실 지하 5층은 전날부터 통제 중이니 카메라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결혼이라는 건 원래 다 이런 건가? 팝콘과 함께한 주말이 지나고 다시 월요일 아침, 그는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출근을 했다. 앞에서는 비서가 오늘 일정을 보고하고 있지만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건 전혀 다른 목소리다.

“…벌써 가?”

평소보다 이르게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유독 일어나기 힘들었는지 그의 배우자가 눈도 뜨지 못하고 더듬더듬 그의 허리를 붙잡아 왔다. 잠이 덜 깬 배우자의 손바닥은 따뜻하고, 허공을 내젓는 손길에서 잠기운이 묻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나다 말고 배우자에게 허리를 붙잡힌 그가 어정쩡한 자세로 말했다.

“아니요, 벌써는 아닙니다. 지난주에도, 지지난 주에도 모두 똑같은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

“서운 씨? 주무십니까?”

“응….”

“…주무시면서 말도 하실 줄 아십니까?”

“으응….”

역시 그의 배우자는 대단했다. 그는 잠시 동안 자신의 다재다능한 배우자를 구경했다. 허리를 붙잡은 손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마침내 그가 자유의 몸이 된 뒤에도 그는 쉽게 침대를 뜨지 못했다. 그러자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배우자가 별안간 질문을 던져 왔다.

“또 언제 쉬어…?”

“이번 주말에 쉽니다.”

“…말고….”

“평일 말씀이십니까?”

“응….”

“…언제 쉴까요?”

“내일….”

“네, 알겠습니다. 일정 조율 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

“서운 씨?”

그의 배우자는 대답이 없었다. 애초에 잠에서 깬 적도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그에게 당장 내일 회사에 가지 말라는 무리한 부탁을 할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거절하지 않은 건 눈앞의 이가 그의 배우자이기 때문일 테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으니 응당 그래야 한다. 그에게는 배우자의 만족이 최우선이다.

“서운 씨, 주무십니까.”

“…응….”

“서운 씨.”

“음….”

뒤척이는 숨소리, 잠에 젖어 나른하게 흩어지는 숨결. 그게 자꾸 생각이 났다. 저 혼자 출근 준비를 하고 회사에 오는 동안, 아니, 회사에 도착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전무님?”

그래, 그는 처음으로 회사에 가고 싶지 않아졌다. 결혼이라는 건 원래 다 이런 건가. 결혼을 하면 원래 다 이렇게 되는 건가. 덕분에 그는 일생일대의 난제에 직면하기에 이른다.

“그래요. 수고했어요.”

…식사가 포함된 일정인지라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실지 여쭤봤는데. 비서가 재정비를 마치기도 전에 상관이 선수를 쳤다.

“황 비서님, 잠시 개인적인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개인적인 질문이라니! 드디어 일이 터진 건가, 비서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얼마든지요, 전무님. 오늘 대화는 절대 비밀 엄수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그가 감사의 의미를 담아 짧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고는 물었다.

“제가 귀엽습니까?”

쨍그랑! 비서의 손에 들려 있던 태블릿 피시가 바닥으로 수직 하강했다.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전무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

이번 분기에 출시된 XX전자 태블릿 피시의 장점 중 하나다. 외부 충격에 강하고 방수 기능도 된다. 비서는 재빨리 태블릿 피시를 주워, 프로답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갈무리하고자 했다.

“아니면 혹시 제가 아기 같습니까?”

와장창! 이번에는 액정이 정면으로 바닥에 떨어졌다. 보호 필름에 사방으로 금이 갔다. 비서가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 피시를 주워 들었다. 역시, 제 상관은 이상하다.

“서운 씨께서 자꾸 제게 귀엽다 하시는데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원래도 이상했는데 결혼을 하더니 더 이상해졌다. ‘…그러시군요.’ 워커홀릭인 상관을 만나 n년째 독수공방 중인 비서가 어금니를 짓씹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네….”

“오늘 아침에는….”

“네에….”

“후… 아닙니다. 처음 겪어 보는 일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군요.”

“…그러시군요.”

“황 비서는 아직 미혼이죠?”

“그렇습니다.”

“대상에 맞지 않는 질문을 했군요. 사과드립니다.”

“…아닙니다.”

예, 예. 그러시겠죠. 비서가 속으로만 대답했다. 제 상관이 결혼을 한 지도 벌써 몇 년이 지났건만 왜 점점 더 이상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다시 업무 이야기로 돌아가죠.”

그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이쯤에서 사담을 마무리하고자 했다. 비서 역시 기다리던 바였다. 지금이야말로 상관에게 식사 일정을 확인할 차례다.

“내일 일정 확인 부탁합니다.”

“점심 식사는… 예?”

“내일은 쉬어야겠습니다.”

“아, 내일, 내일 말씀이십니까. 알겠, 습니다. 우선 일정 확인 후에… 다시….”

큰일이다. 제 상관이 드디어 미친 모양이다. 시간이 아깝다며 출장 가는 길에 선을 보러 가던 사람이 몇 년 전부터 꼬박꼬박 연차를 챙겨 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대놓고 결근을 통보한다. (연차는 이미 다 썼다.)

비서가 황급히 일정을 확인하는 동안에도 그는 멍하게 사무실 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건 개인 휴대폰으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네, 서운 씨. 말씀하십시오.”

- 지금 통화 가능해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전화를 받는 그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다. 비서는 말없이 제 상관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 봤자 그가 바로 볼륨을 높이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는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이 들려도 너무 잘 들렸다.

- 출근 잘했어요?

“네, 잘했습니다. 서운 씨도 잘 주무셨습니까.”

- 응. 완전 잘 잤어. 근데 언제 나갔어요? 오늘은 인사도 못 했네.

역시 그의 배우자는 줄곧 잠들어 있던 것이 맞았다. 그는 배우자와 통화를 하면서 급하게 메모를 갈겨썼다. 그리고 손짓으로 비서를 불러 제가 쓴 메모를 확인하도록 했다.

[내일 일정 확인됐습니까?]

메모를 확인한 비서가 태블릿 피시로 소리 없이 다음 날 일정을 보고했다.

[오전에 회의가 세 건, 오후에 마케팅 관련 프레젠테이션이 한 건, 저녁에 화상 회의가 한 건 잡혀 있습니다.]

보고를 받긴 받았는데 액정 필름에 온통 금이 가 있어서 알아보기가 조금 힘들었다.

[조정하세요.]

마침내 해독에 성공한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업무 지시를 내렸다. 배우자와는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 …서 잠깐 나왔는데 괜찮으면 점심 같이 먹을래요?

“네, 좋습니다. 어디로 모시러 갈까요?”

- 내가 회사 앞으로 갈게요.

전무님, 오후에 식사가 포함된 일정이 있습니다! 비서가 소리 없이 외쳤다. 당연하게도 비서의 외침은 누구에게도 닿지 못했다.

- 이번에도 1층 카페 앞에 있을게요.

“제 사무실로 올라오셔도 됩니다.”

- 아니에요. 일하는 곳이잖아.

“…아.”

- …….

“…죄송합니다. 그땐 제가….”

- 아니야, 나도 좋았… 흠흠, 그냥 1층에 있을게요. 거기로 와.

“알겠습니다. 그럼 1층 카페 앞에서 뵙겠습니다.”

뭐지, 방금 굉장히 too much information을 들은 것 같은데. 비서가 떨리는 손으로 태블릿 피시를 움켜쥐었다. 아무리 외부 충격에 강하다 해도 전자 기기를 떨어트리는 건 마음이 용납하지 않는다.

“식사 마치시면 바로 이동하실 수 있게 차량 준비해 놓겠습니다.”

“좋습니다.”

통화를 마치고 한결 부드러워진 그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호팀에도 미리 연락해 놓겠습니다.”

“경호 인원 세 배로 늘리고 사복 가드는 카페 안팎으로 따로 배치하세요. 지난번처럼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저희가 떠난 후에 처리하시면 됩니다.”

“네, 주의하겠습니다.”

배우자의 방문을 앞두고 몇 가지 준비를 하다 보니 어느새 모니터가 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는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빈말로도 절대 아이 같다 할 수 없는 성인 남성의 얼굴이 보인다. 젖살은커녕 날카로운 턱 선과 또렷한 이목구비가 어떻게 봐도 아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귀엽다는 건 아기나 어린 짐승에게 쓰는 표현이다. 도대체 그의 배우자는 왜 그에게 귀엽다고 하는 걸까. 그는 진심으로 배우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아기에 가까운 건 그가 아니라 그의 배우자다.

그의 배우자는 따뜻하다. 아이만큼이나 따뜻한 몸을 가졌다. 특별히 체온이 높은 것도 아닌데 그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한때 가족 대신 그의 유년 시절을 함께한 1℃의 온기가 그의 배우자에게 옮겨 간 건지도 모른다. 물론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

배우자와 아기와의 공통점은 얼마든지 더 있다. 그의 배우자는 졸리면 자고 배가 고프면 먹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뻐하고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웃는다. 심지어 잘 때는 그가 사 준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잔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으로 냅다 던져 버리기는 하지만 관찰 결과 고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고로 그가 새벽마다 바닥에 떨어진 인형을 주워다 놓는 건 그만 아는 비밀이다.

그리고 웃는다. 그의 배우자는 아기만큼 잘 웃는다. 그를 보면서도 웃고 TV 프로그램이나 다른 사람을 보면서도 웃는다. 그의 배우자가 웃을 땐, 특히나 그를 보며 웃어 줄 땐 세상이 일그러지는 기분이다. 그의 세계가, 그를 둘러싼 공기가 일그러진다. 무너진다. 부서진다. 그의 배우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다.

그날 그는 출장 일정에 맞춰 출국 전에 간단히 선을 보러 갔다. 비행기 시간이 있어서 처음부터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자리였다. 상대방에게 차가 막혀 조금 늦는다는 연락이 왔을 때도 그가 자리를 뜨지 않은 이유다. 상대방이 오든 오지 않든 그가 그곳을 떠나는 시간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는 카페 입구가 정면으로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는 차가웠고, 창밖의 햇볕은 뜨거웠다. 뉴스에서 매일같이 기록적인 폭염을 떠들어 대는 한여름이었다. 한낮의 더위를 느껴 볼 일 없는 그에게는 그다지 현실감 있는 계절은 아니었다. 오히려 실내 어디를 가도 에어컨 때문에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어 있어서 안부 인사로 폭염 소식을 전해 오는 사람들에게 괴리감만 들었다.

그리고 ‘그’가 나타났다. 쿵! ‘그’가 카페에 들어선 순간 어디선가 거대한 굉음이 몰려와 그를 강타했다. 셔츠 너머로 전해지던 인위적인 한기도, 시야를 어지럽히던 이질적인 햇빛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이야. 그는 첫눈에 자신의 배우자를 알아보았다. 쉽게 더위가 가시지 않는지 한낮의 열기를 간직한 양 뺨이 살짝 붉었으나, 카페 안을 둘러보는 두 눈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혼자서만 여름을 비껴간 사람 같았다.

그 이질적이고도 오묘한 공기에 사람들이 힐끔힐끔 그의 배우자를 쳐다보았다.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배우자는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무심한 낯으로 카페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뭐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렇게 서 있었다.

움직여야 하는데, 이대로 그의 배우자가 카페를 나가 버리기 전에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하는데 온몸이 얼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가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입술이 말라붙어서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다 그의 배우자가 웃었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카페 직원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쿵! 쿵! 쿵! 이를 알아차린 그의 맥박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극심한 갈증이 일고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었다. 서늘한 두 눈 아래 감춰져 있는 달콤한 온기가 단숨에 그를 사로잡았다. 그가 기억하는 배우자와의 첫 만남이다.

“지금 나가십니까?”

그가 사무실을 나오자 비서가 곧장 알은체를 해 온다. 그의 유능한 비서는 제 상관만큼이나 공과 사가 명확해서 함부로 상관의 사생활에 관심을 표하지 않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경호팀에 비상이 걸렸다.

“네. 바로 1층으로 갑니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지금 전무님 내려가십니다. 현재 엘리베이터 탑승 전입니다.”

예정보다 이른 외출에도 비서는 당황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니요. 사모님은 제시간에 오실 겁니다.” 그저 침착하게 수화기 너머로 상황을 보고할 뿐이다. 몇 년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출근부터 퇴근까지 그가 늘 이용하는 금색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간다. 암묵적으로 이용이 금지된 금색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일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지만 그뿐이다. 평소보다 배로 늘어난 경호 인원이 단번에 이해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제 갈 길을 찾아갔다.

약속 시간까지 아직 18분이나 남았다. 지금부터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그는 회사 정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카페 자리에 앉아 휴대폰으로 간단하게 업무를 본다. 내일 일정이 갑작스럽게 변경되어 오늘 처리해야 할 업무가 배로 늘어났으니 일분일초도 허투루 쓸 수 없다. 그는 기계적으로 서류를 확인하고 파일을 열어 본다. 동시에 자신의 배우자를 생각한다.

오늘 그의 배우자는 어떤 음식을 먹고 싶어 할까. 지난번에 추천받은 프랑스 가정식은 양이 적어서 배우자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 오후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 예정인지도 물어봐야겠다. 후식으로는 뭐가 좋을까. 퇴근길에는 무얼 사서 가면 좋을지 잊지 말고 물어봐야 할 테다.

그리고 얘기해야지. 식사를 모두 마치고 주문한 아이스 라테가 나오면 그의 배우자에게 얘기하는 거다. 내일 회사를 쉬게 되었다고, 회사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 그의 배우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기뻐해 줄까. 좋아해 줄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다. 닿고 싶다. 만지고 싶다.

아, 삶이란 얼마나 다채로운가. 그는 매일같이 쏟아지는 감각의 홍수에서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의 하루는 더 이상 규칙적이지 않다. 이제 그는 손꼽아 주말을 기다리며, 퇴근 후에는 퇴근 후의 일상이 생겼다. 전보다 궁금한 게 많아졌으며 업무 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난다. 쿵, 쿵, 쿵. 향기가 진해질수록 그의 심장도 요동을 쳤다. 이제 그는 페로몬으로 자신의 배우자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각인의 효과였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사방이 달콤한 향기로 가득하다. 회전문 너머에 그의 배우자가 있다. 그에게 오고 있다. 그러자 문득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왜 이제야 왔냐고.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지각입니다.”

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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