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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3. Beyond the boundary (13/13)

외전 3. Beyond the boundary

“재수생이 죄수생은 아니잖아.”

여민영, 베타, 20세, 풋풋한 재수생.

“배달 음식 한 번을 못 먹게 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

현재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모 기숙학원에 감금되어 있는 중. 서운과 크루즈에서 대서양을 만끽하던 지난날은 어디 가고 지금은 상담실 의자와 물아일체가 되어 반쯤 흘러 내려와 있다.

“맞네. 그러네.”

외삼촌 내외의 명을 받아 차로만 1시간 40분을 넘게 달려온 서운이 아낌없이 동조했다. 입소 3개월 만에 정기 외출을 거부한 민영 때문에 냉장고가 딸려 있는 리무진까지 대동됐다.

“다 먹었으면 버블티 줄까?”

“저번에는 또 뭐라고 했는지 알… 버블티?”

“흑당 버블티 먹어 보고 싶다며.”

민영이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규칙적인 생활 덕분인지 기숙학원에 들어가기 전보다 얼굴색이 좋아졌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은데. 자식 걱정에 마음 편할 날 없는 외삼촌을 떠올리며 서운이 보냉 가방을 꺼냈다.

“허얼. 오빠, 내가 진짜… 효도할게. 효도한다, 내가! 정서운 님, 만수무강하세요.”

온갖 호들갑은 다 떨어 대며 민영이 경건하게 흑당 버블티를 영접했다. 아무리 봐도 억지로 밝은 척하는 것 같진 않은데 말이지. 학원에 대한 불만(주로 배달 음식 주문 금지 조항을 놓고)은 끝도 없지만 친구들과 문제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조오온맛. 오빠, 이거 미쳤는데? 개맛있어!”

“지금이라도 나갈까? 더 맛있는 거 사 줄게.”

“…….”

“싫어?”

“…싫은 건 아닌데….”

민영이 기운 없이 버블티 빨대를 우물거렸다.

“불안해….”

“우리 민영이 뭐가 그렇게 불안할까.”

“…3일 뒤에 모고 있단 말이야.”

기운 없어 보이는 건 얼굴만으로, 쫀득한 펄들이 빨대를 타고 위로 쭉쭉 올라간다.

“외출 안 나간다고 다 공부하는 건 아니지만… 불안하잖아. 지난달 모고도 잘 못 봤는데….”

심란한 건 심란한 거고,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다 이거지. 서운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런 건 어릴 때 그대로다.

“엄마랑 아빠한테 얘기하면 안 돼? 그럼 또 엄청 걱정한단 말이야.”

그걸 걱정하는 애가 정기 외출을 다 마다했니. 서운은 걱정 말라며 민영을 다독였다. 민영에게는 큰 고민일 테지만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재수생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일반적인 고민에 서운도 한시름 걱정을 덜었다.

“오빠는 단어 어떻게 외웠어? 나 진짜 똥멍청이인가 봐. 단어가 안 외워져. 어떡해?”

“난 공부한 지 너무 오래돼서…. 이거 한번 써 볼래?”

놀라게 해 주려고 일부러 가방 안에 숨겨서 가져왔다. 전자 제품임이 확실한 브랜드 로고에 민영이 물고 있던 버블티 빨대를 뱉었다.

“의진 씨가 너 주라고 챙겨 줬어. 아직 미발표 제품이라니까 친구들한테는 얘기하지 말고. 시중에 나온 것보다 3단계나 업그레이드 됐대. 요즘은 다 이걸로 공부한다며?”

“흐엉, 형부! 사랑합니다…! 제가 많이, 진짜 사랑합니다…!”

“나는 효도고 형부는 사랑이니….”

“와씨, 미쳤다. 어떡해? 나 형부랑 통화할래! 당장 할래!”

민영이 박스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다. 좋아할 줄은 알았지만 의진이 단번에 사랑으로 승격하자 조금, 아주 조금 배신감이 든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서운은 꼰대 같은 생각을 하며 소식 없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당연하지만 전화도, 메시지도 무엇 하나 와 있지 않다. 서운은 괜히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새카만 액정 화면이 거슬렸다.

“어떡하지. 형부 바빠서 안 될 것 같은데.”

“잠깐만 하는 것도 안 돼? 10분만, 아니, 5분만!”

“…걔 지금 한국에 없어.”

“엥?”

서운은 익숙하게 의진의 부재를 알렸다.

“해외 출장 갔다.”

“또?!”

결혼 6개월 차, 의진이 또 해외 출장을 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Beyond the boundary

“이런 거 만들려면 바쁘긴 하겠다.”

민영이 의진을 두둔하고 나섰다. 혹여라도 불통이 튈까, 죄 없는 태블릿 PC는 안전하게 대피시켜 놓은 상태다.

“걔 전자 아닌데.”

“그, 그래도 바쁘겠지!”

글쎄. 차라리 전자 쪽이면 이해가 더 쉬웠을까. 물산은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이 없다 보니 의진이 얼마나 바쁜지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업계가 달라서 그런가, 물어보면 기쁜 듯이 일 얘기를 들려주긴 하는데 그래 봤자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냥 열심히 얘기하는 의진이 귀여운 맛에 듣는다.

“형부 언제 오는데?”

“내일.”

“금방 오네!”

“뭐….”

떠나기는 어제 아침에 떠났으니 겨우 2박 3일짜리 출장인 셈이다. 결혼을 하자마자 한 달짜리 장기 출장을 떠나던 시절에 비하면 발전이 없진 않다며 웃어넘길 법도 한데 서운의 반응이 영 시큰둥하다.

웃어넘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최근 들어서 계속 이런 식이다. 전처럼 의진이 한 달짜리 장기 출장을 가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 대신이랄지 일상적으로 자잘하게 바빠졌다. 크루즈 여행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번 달에는 출장만 네 번 다녀왔다. 한 회당 2박 3일씩 네 번이나 집을 비웠는데 서운에게 큰 감흥이 있을 리가. 이제야 드는 생각이지만 둘이서 함께 보내는 시간도 미묘하게 줄어들었다.

자잘하다, 미묘하다. 단어 어디에도 설득력 따위 느껴지지 않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서운의 느낌적인 느낌을 제외하면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다. 어느 부부가 둘이서 보내는 시간을 재 두겠냐고. 의진의 경우 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더더욱 시간 계산이 어렵다. 새벽에 들어오는 날도 허다하고 정규 퇴근 시간을 어기는 건 일도 아니다. 이번 달은 유독 출장이 잦아서 서운도 이제야 확신 아닌 확신이 든 참이다.

요즘 부쩍 바빠졌단 말이지. 서운은 곰곰이 의진과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한국은 오후 2시가 다 되어 가니 의진은 이미 한밤중일 테다. 전화를 끊으면 바로 자러 가겠다고 했으니 지금쯤 정말로 자고 있지 않을까. 서운은 민영을 만나기 직전까지 의진과 통화를 했다. 의진의 해외 출장이 멈추지 않는 한 두 사람의 영상통화는 계속될 예정이다.

“그만 자요.”

- 서운 씨….

“왜 자꾸 불러.”

마음 약해지게. 서운은 꿋꿋하게 냉랭한 태도를 유지했다.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됐으면서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의진을 위해서. 내 건 내가 챙겨야지. 서운은 부쩍 의진의 건강 관리에 관심이 많아졌다.

- 아직 도착하려면 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의진 씨 피곤하잖아요. 내일, 아니, 오늘도 일찍 일어나야 한다며.”

-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서운 씨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분명히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일 텐데 왜 기분이 나쁘지. 여러모로 의진은 변함이 없었다. 변한 건 서운이다.

“싫은데. 신경 쓸 건데.”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다 이거야. 당황했는지 의진의 눈동자가 부산스럽게 굴러다녔다. 이런 식의 악의 없는 말 몇 마디에 기분이 상하기보단 상대방의 몸 상태가 더 걱정되는 것도 변화라면 변화다.

“내가 신경 안 쓰면 누가 쓴다고.”

- …그것도 그렇군요.

“그렇지?”

- 그렇습니다. 역시 서운 씨는 현명하십니다.

그래, 그래. 뭐가 그렇게 맨날 현명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온갖 이유를 붙여 대며 사랑을 말해 오는데 이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테다. 그거 알아? 네 눈을 보고 있으면 뭐든 다 믿고 싶어져. 요즘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든 건 순전히 회사 일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그 외의 가능성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서운의 개인적인 바람과는 별개로 의진에게 연락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자러 간 사람이 어떻게 연락을 할 수 있겠어. 의진이 또 밤을 새울까 봐 어르고 달래서 전화를 끝낸 것도 서운이고, 어떻게든 전화 통화를 이어 가려 되지도 않는 개수작을 부리던 것도 의진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의진의 마음이 변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뭐야, 표정이 왜 그래. 벌써 막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겠어?”

“…그런가?”

분명히 그럴 텐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서운은 다시 한번 제 기분을 곱씹었다. 이건 찝찝하다는 말 외에는 표현이 안 된다. 기분이 더럽다고 하기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기자니 그건 또 아닌,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상태.

아무래도 이상하단 말이지. 얼굴에서 티가 났는지 민영이 금세 알은척을 해 온다.

“엥, 그게 뭐야. 둘이 싸웠어?”

“아니. 우리 안 싸워.”

“알잖아. 형부가 결혼을 인터넷으로 배워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야.”

“진짜 안 싸운다니까.”

“가끔 좀… 어그로를 끌긴 하지만….”

민영이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태블릿 PC를 생각해서라도 제 형부의 편을 들고 싶은 모양인데 의진의 지난 행보를 생각하면 여러모로 녹록지 않아 보인다.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이렇게 편들어 줄 거면서 싸우기는 왜 싸웠대.”

“안 싸웠다니까. 난 애랑 안 싸운다.”

“형…부가 아기 같은 매력이 있긴 하지. 대신 얼굴은 안 아기 같아서 더 좋잖아!”

“…안 아기가 무슨 말인가 했네.”

“몸도 안 아기 같고…. 형부는 몸이 막, 두껍더라. 원래 알파는 다 그래? 오빠 같은 건 번쩍번쩍 들 것 같아.”

나 같은 게 뭔데? 하마터면 나잇값도 못 하고 스무 살짜리 친척 동생에게 따져 물을 뻔했다.

“그래도 오빠들은 좋겠다. 서로 다 알 수 있잖아.”

“알 수 있다니?”

“페로몬이 있잖아! 페로몬으로 다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베타인 민영은 여느 베타들처럼 알파와 오메가에 관심이 많았다. 실제로도 페로몬에 의한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성은 대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토픽이다. 개중에서도 상대방의 페로몬에 영속되는 각인 증상은 낭만적이면서도 자극적인 서사를 모두 끼얹을 수 있어 막장 드라마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각인이 흔한 건 드라마나 영화 속 세상뿐으로, 실제로 각인을 경험한 알파와 오메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새끼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구나, 이 새끼 마음이 떴는데? 이건… 다른 사람의 페로몬? 이런 거! 얼마나 좋아!”

그래, 좋겠지. 내가 시청자라면. 듣기만 해도 끔찍한 가정에 서운이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사랑하는 사람의 변심을 온몸으로 알아차려야 한다니, 이보다 더 잔인한 이별 통보는 없을 거다. 거짓으로 사랑을 말할 수는 있어도 페로몬에 묻어나는 자신의 마음까지 속일 수는 없을 테니까. 일명 페로몬의 역효과였다.

서로 마음이 통할 때야 아무 문제가 없지만 감정이란 본디 살아 있는 유기체와 같아서 늘 같은 모습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렇잖아.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어떻게 마냥 같을 수 있겠어. 물론 서로의 감정이 비슷할 땐 아무 문제 없지만, 어느 한쪽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리하는 순간 상대방의 변심한 페로몬은 그저 폭력일 뿐이다. 드라마에서는 영원한 사랑의 맹세로 그려지는 각인이 현실에서는 축복받은 저주라 불리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알파와 오메가의 본능에 지배당하는 삶. 각인은 특수한 경우이니 제외하더라도 알파와 오메가가 페로몬의 영향을 받는 이상 베타보다 본능적이고 감정적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다. 요즘이야 약만 먹어도 러트나 히트 억제가 가능하지만 알파와 오메가는 본능적으로 페로몬을 쫓게 되어 있다. 느껴지는 걸 어떡하라고. 본능적이고 감정적이라는 편견이 마냥 편견은 아니라는 소리다.

실제로 서운이 만나 왔던 알파들도 대부분이 그랬다. 개중에는 서운의 히트 사이클을 자신이 직접 치료해 주겠다며 약을 먹지 말라던 새끼도 있었다. 존나 조물주세요? 약 먹으면 멀쩡해지는 걸 네 새끼가 왜요? 다시 생각해 봐도 한 대 더 팰 걸 그랬다.

우리 지니는 그런 새끼들이랑 비교가 안 된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의식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의진에게 다다른다. 서운은 본능적으로 의진의 페로몬을 떠올렸다. 서운과 달리 하나도 달지 않으며 따뜻하기보다는 차가운 느낌에 더 가까운 가슴 시린 박하 향. 그런 시원한 향은 좋아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연이 없을 줄 알았다.

“…보고 싶긴 하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진심이 새어 나왔다. 의진을 알게 된 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았건만 이제는 의진이 없는 시간이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서운은 조금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자신의 결혼 사실을 실감했다.

“오빡! 얘네 이혼했대!”

민영은 그새 태블릿 PC를 개시했는지 커다란 화면 가득 연예인 알파, 오메가 부부의 이혼 기사를 띄워 놓고 있다.

D-1, 의진의 귀국까지 하루 남았다.

적당히 평범하고 적당히 평화롭다.

서운이 느끼는 찝찝함은 비교적 최근으로, 서운의 결혼 생활은 지극히 순조로웠다. 곳곳에서 느껴지는 봄의 새싹이 그랬고, 안정적으로 자리 잡은 서운의 일상이, 의진과의 결혼 생활이 그랬다. 보통은 생활 습관의 차이로 신혼 초부터 싸움이 마르지 않는다는데 의진과는 그럴 일도 없었다. 처음부터 의진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서운 씨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서운 씨가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쟤는 진짜 자아가 없나? 무조건적인 배려도 처음에나 좋았지 이제는 진지하게 걱정되는 수준이다. 아닌데. 자아 있던데. 가끔, 아주 가끔이지만 의진은 종종 고집을 앞세운 개수작으로 서운을 당황시키곤 했다. 그마저도 서운에게 한정된 고집이긴 하지만 어쨌든, 서운은 잘 지내고 있었다. 이것만큼은 명백한 사실이다.

드라마에서 보던 재벌가의 텃세도, 주변의 시기 어린 이간질도 없다. 와인 잔을 들고 다녀야 할 것만 같은 재벌 3세들의 모임 자리에도 불려 나가지 않는다. 듣자 하니 이런 모임이 있긴 한 것 같은데 의진부터가 참석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있어 서운도 저절로 나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런 데도 안 나가면 친구들은 언제 만….”

“네.”

“…아.”

“듣고 있습니다. 마저 말씀하십시오, 서운 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제 만나기는. 의진은 친구를 안 만난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친구가 없어서 못 만난다. 덕분이랄지 서운은 철저하리만큼 의진과의 생활을 보장받고 있었다. 재벌가에 들어가면 매일 가족 모임에 불려 다니고 밤마다 비즈니스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거 아니었어?

응, 아니었어. 서운이 남몰래 걱정했던 사생활 침해도 일절 없다. 보는 서운이 더 신기할 만큼 의진은 언론에 노출되는 일이 없으며, 그의 배우자인 서운 역시 완벽한 일반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많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뉴스며 신문 사회면에 얼굴을 비추는 의진의 가족들과는 천지 차이다. 이조차 의진에게 뭐라도 더 해 주고 싶어 하는 가족들의 배려라는 건 알지만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제 영화관 같은 곳은 못 가는 건가. 처음 의진의 집안을 알게 됐을 땐 내심 그런 걱정도 했거늘 그럴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직후이니 벌써 몇 개월 전 일이지만 두 사람은 놀이공원도 다녀왔다.

놀이공원에 가 본 적이 없다는 의진 때문에 충격을 받아 충동적으로 결정한 외출이었다. 연애는 건너뛰고 냅다 결혼부터 했으니 사실상 두 사람의 첫 데이트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도저히 대충 넘어갈 수가 없어서 서운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의진과 나란히 동물 머리띠도 했다. 여기서 먹는 건 다르다며 의진에게 친히 놀이공원표 추로스와 구슬 아이스크림도 맛보여 줬다.

“맛있지!”

“아이스크림 맛이 나는군요.”

“아니, 맛있냐고.”

“네. 이건… 설탕 맛이 납니다.”

“맛있냐니까?”

“단맛입니다.”

“야 이….”

의진이 맛있게 먹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결과적으로 서운은 즐거웠다. 영화에서처럼 놀이공원 전체를 빌려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대신 두 사람은 평범하게 줄을 서고 자신들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바이킹 꼭대기에서는 만세를 해야 한다는 상식 아닌 상식도 가르쳐 주었으나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의진은 바이킹을 타는 내내 양손이 하얘질 때까지 안전대만 쥐고 있었다. 보다 못한 서운이 손을 잡아 주려 했지만 의진이 안전대를 놓지 않아서 실패했다. 그날 의진은 여러 차례 손에 쥐가 났고, 서운은 그럴 때마다 말없이 의진의 손을 주물러 줬다.

“서운 씨, 괜찮습니다. 이제 그만하셔도 됩니다.”

“괜찮기는. 아직도 하얗잖아요. 아프진 않고?”

“네, 통증은 없습니다. 손바닥이 조금 저릴 뿐입니다. 손가락은 아직 감각이 없어서 잘 모르겠군요.”

“…….”

도대체 뭘 얼마나 세게 잡고 있었으면 이렇게 될 수 있는 건데? 앞으로는 그냥 범퍼카나 회전목마를 타야 할 것 같다. 비행기는 잘 타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롤러코스터나 바이킹은 예외인 모양이다. 두 사람이 놀이공원에 오지 않았다면 끝까지 몰랐을 새로운 발견이었다.

소소하지만 의진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 가는 순간들이 좋다. 결혼 후 서운에게 일어난 또 다른 변화였다. 의진과 함께 보내는 일상들이 소중해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천천히 배워 나가는 의진을 지켜보는 게 좋았다.

하나둘 탑승 줄이 줄어들고 특정 길목을 따라 거대한 인파가 모여들었다. 눈칫밥으로 먹고 살아온 서운은 알 수 있었다. 이건 딱 봐도 퍼레이드 구경 줄이었다. 의진을 보아하니 놀이기구는 더 타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두 사람은 내친김에 퍼레이드를 구경했다. 좋은 자리는 이미 꽉 차 있어서 뒤에서나 봐야 했지만 의진에게는 무리 없이 보였을 테다.

어차피 뒤쪽이라 잘 보이지도 않았기에 서운은 작정하고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의진을 구경했다. 모두가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무표정하게 우뚝 솟아 있는 의진은 무척 이질적이었다. 사람들의 즐거운 환호 소리와 요란한 퍼레이드 음악도 의진을 만나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누군가 실수로 의진과 부딪치기라도 하면 동심에 젖어 있다가도 금세 현실로 돌아와 허둥지둥 사과부터 하기 바빴다. 주말에도 회사에 갔다 오느라 완벽한 정장 차림을 한 웃지 않는 성인 남자는 모험과 신비의 세계에서 영원히 환영받지 못할 것 같았다.

괜찮아. 너는 내가 환영해 줄게. 서운은 단단하게 의진의 손을 고쳐 쥐었다. 평소라면 어떻게든 반응을 보였을 의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퍼레이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찌나 가만히 서 있는지 의진이 정말로 로봇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야간 퍼레이드 특유의 화려한 불빛이 이쪽을 비추거나 거대한 조형물이 색색의 조명을 빛내며 가까이 다가오면 맞잡은 의진의 손이 움찔거렸다. 반응이라고는 그게 다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시작이야.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의진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서운은 감히 미래를 꿈꿨다. 우리는 우리만의 세상을 만드는 거야. 이 사람을 더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의진의 빈 공간을 하나하나 채워 주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너를 위해서, 너를 사랑하는 나를 위해서. 의진과 함께하는 일상의 행복들이 더 늘어나기를 바랐다.

그게 벌써 몇 개월 전이다. 세상은 여전히 놀 거리로 넘쳐나고 날씨마저 봄이 오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시간만 없다. 서운은 넘쳐 흐르는데 의진이 시간이 없다.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이렇게까지 시간이 안 날 일인가? 서운은 침착하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의진과 처음 놀이공원에 갔을 때만 해도, 그래, 그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출장은 한 달에 두 번이 최대였고 요즘처럼 새벽 퇴근이 잦지도 않았다. 매 주말마다 칼같이 출근을 하지도 않았다고.

그러게. 대체 언제까지 바쁠 건데? 네 남편이랑은 언제 놀 거야? 제가 생각해도 꽤나 낯 뜨거운 투정에 서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와, 방금 진짜 창피했다. 나랑은 언제 놀 거냐니, 정서운 당신은 성인입니다. 서운은 스스로를 다그치며 비장하게 출입문 앞에 섰다. 계절이라도 타는 건가, 지금까지 혼자서 잘만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하물며 의진의 일중독을 몰랐던 것도 아닌데.

서운은 이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고 기계적으로 출입문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아무리 보안 때문이라지만 비밀번호 한번 더럽게 길다. 안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알아서 열리겠지만 정작 서운은 한 번도 인터폰을 써 본 적이 없다. 집에 누가 있어야 말이지. 물론 가사도우미는 예외다. 결혼 초에는 되도록 사람을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막상 살아 보니 도저히 불가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푸릇푸릇 새순이 돋아난 정원에서 봄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오후의 햇살이 묻어 있어 한층 더 따뜻하고 포근했다. 서운을 닦달하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조금이나마 덜어지는 듯했다.

“오셨습니까.”

“어?”

햇살 때문이 아니었나. 터덜터덜 집 안으로 들어서는 서운을 반겨 주는 사람이 있다. 서운이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일정이 당겨져서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서운 씨도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의진의 말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의진은 여전히 정장 차림이었다. 참, 고마웠다. 서운이 허둥지둥 신을 벗으며 말했다.

“이런 걸로 서프라이즈 하지 말라니까. 잠깐 원단 좀 보고 왔어요.”

“죄송합니다. 출발 전에 미리 연락을 드렸는데 도착해서 보니 전송에 실패했더군요. 한 번 더 확인하지 않은 제 불찰입니다.”

분명히 말로는 죄송하다 하는데 페로몬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 어제도 영상통화를 해 놓고 어찌나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이대로 서운이 뚫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춤을 추듯 일렁이는 의진의 페로몬에 슬리퍼로 갈아 신는 서운의 동작이 빨라졌다.

“불찰은 무슨. 됐어요. 통신사가 잘못했네.”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늦게 온 것도 아니고 일찍 온 건데요 뭐. 그래도 엇갈리기 싫으니까 앞으로는 제대로 알려 줘요.”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원단은 무슨 일로 보신 겁니까? 갖고 싶으십니까?”

“시장조사차 갔다 왔어요. 보통 원단 시장에 색이 제일 먼저 도니까…. 잘 다녀왔어요?”

“네, 잘 다녀왔….”

“…….”

“…습니다.”

다 신었다. 의진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서운이 의진을 끌어안았다. 순간 의진의 페로몬이 확 솟구치는가 싶더니 의진이 어설프게 서운의 등을 마주 안아 온다. 아, 진짜 왔어. 의진이 왔다. 서운이 익숙하게 의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기분 탓인가.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서운이 은근슬쩍 의진을 더듬었다. 그러니까 출장 좀 작작 가자. 회사도 가지 마. 나 이번에 계약금 들어오는데 그거 다 너 줄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투정을 삼키며 있는 힘껏 의진을 반겨 주었다.

“다녀왔냐는 인사를 이제야 하네.”

“…그렇군요.”

대답하는 의진의 페로몬이 불규칙하게 일렁거린다. 서운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따뜻하기 그지없는데 서운에게 꽂히는 알파의 페로몬은 어딘가 서늘하기만 하다. 그래, 이 냄새. 의진의 향기다. 서운은 깊게 의진의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몇 번이고 들이마시기를 반복하다가 서운이 먼저 의진의 품을 빠져나왔다. 여태 들고 있던 샘플 원단들을 대충 소파에 내려놓고 입고 있던 재킷도 벗었다.

“언제 왔어요?”

“15… 12분 전에 도착했습니다.”

의진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서운에게 향해 있는 두 눈은 움직일 줄을 모른다.

“12분 동안 혼자 뭐 하고 있었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그랬겠지. 물으나 마나 한 걸 물었다. 얇은 니트 차림이 된 서운이 원단 옆에 고이 재킷을 놓아두며 말했다.

“나갔다 왔으니까… 일단 씻을까요?”

“네, 그러십시오.”

너 또 거기서 뭐 하는데. 서운은 재킷을 내려놓았는데 의진은 도리어 태블릿 PC를 주워 들고 있다. 서운이 욕실로 가지 않고 빤히 의진을 쳐다보고 있자, 의진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의진 씨야말로 거기서 뭐 해요?”

“잠시 확인할 게 있….”

“같이 씻는 거 아니었어?”

“어석, 네! 같이 씻습니다!”

우당탕탕! 태블릿 PC가 보기 좋게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떨어질 거면 러그 위로 떨어질 것이지. 부딪치는 소리 한 번 요란하다.

“깨진 거 아니에요?”

놀란 서운이 뒤를 돌아보려 하자 의진이 잽싸게 서운의 시야를 가리며 그런다.

“아니요, 안 깨졌습니다.”

확인하는 척도 안 하니. 날이 갈수록 의진의 개수작 레퍼토리가 늘어나고 있다. 집은 또 왜 이렇게 넓은지, 의진이 소박하게 지었다는 단독 주택은 서운에게는 여전히 넓디넓어서 욕실까지 가는 길이 험난하기만 했다.

“의진 씨…. 천천, 히…!”

뒤에서 밀어붙이는 놈이 있을 땐 더더욱 그렇다. 서운은 의진에게 떠밀려 욕실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은은하게 남아 있는 물 냄새와 박하 향이 어우러지자 의진의 페로몬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서운은 정신없이 의진의 페로몬에 휘둘렸다. 며칠 떨어져 있었다고 이럴 일인가. 물 냄새는 둘째 치고 떨어져 있는 사이 의진의 페로몬이 더 진해진 것 같다. 그런 서운의 페로몬에 의진이 더 휘둘리고 그래서 서운이 더 휘둘리는 행복한 악순환이 벌어졌다. 허억, 허억…. 서운에게 달려드는 의진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알겠, 알겠습니다….”

“아…! 알겠다며…!”

“…….”

“잠깐, 지니야, 잠…! 아!”

“서운 씨, 서운 씨….”

의진의 페로몬이 정신없이 밀려들었다. 고작 그거 못 봤다고 정신을 못 차리는 의진이, 온몸으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 오는 의진이 사랑스럽다. 지금보다 더, 더, 더 마음껏 사랑하고 싶어.

찝찝하기는 무슨! 서운의 니트가 바닥으로 던져지고 두 개의 성기가 천 너머로 비벼진 순간 서운의 정체 모를 불안감도 함께 날아갔다. 이 감정이 진짜가 아닐 리가 없잖아. 서운을 제 것으로 적시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알파의 페로몬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어디 갔었어. 왜 이제 왔어.

가기는 지가 가 놓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기껏해야 원단 시장에 다녀온 게 전부인 서운은 본래의 페로몬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선명한 박하 향을 뒤집어써야 했다. 일단 페로몬 샤워부터 시키고 보는 의진의 성급한 손길에도 성감은 착실하게 찾아와 두 사람의 페로몬을 한 몸처럼 녹여 냈다.

사방에서 달콤한 치약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의진의 박하 향만큼 익숙해진, 두 사람의 페로몬이 녹아든 결과였다. 페로몬도 성격을 따라가는지 누구와 붙여 놔도 무난한 결괏값을 낳는 서운이지만 하필이면 박하를 만나서 극강의 호불호를 자랑하는 민트초코가 되었다.

민트초코, 줄여서 민초. 언제 낳을진 모르겠지만 순식간에 태명을 정해 버린 것 같다. 모든 것을 토해 내고 기절하듯 잠이 든 서운의 주변으로 달콤한 치약 냄새가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익숙하고 다정한, 달콤한 냄새. 정말이지 평화로운 한때였다. 애초에 틀어진 적도 없지만 비로소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서운 씨.”

“…….”

“서운 씨, 잠시만 일어나 보십시오.”

“…으, 응….”

누가 업어 가도 모른다는, 섹스 직후의 단잠에 빠져 있던 서운이었다. 자신의 팔을 흔들어 대는 다급하고 익숙한 손길에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운 씨, 서운 씨.”

“왜….”

“저녁 식사는 부드러운 걸로 준비하라고 할까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서운은 보드라운 베갯잇에 얼굴을 묻으며 의진을 찾아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안 먹어도 돼….”

“안 됩니다. 뭐라도 드십시오. 드시고 싶은 음식도 없으십니까?”

“…의진 씨는, 뭐 먹고 싶은데….”

그런데 이상하지. 언제나처럼 자신의 옆에 누워 있어야 할 커다란 놈이 만져지지 않는다.

“전 이미 먹었습니다.”

우리 지니… 배 많이 고팠구나…? 뒤늦게 눈을 뜨자 멀끔하게 차려입은 의진의 모습이 보인다. 왜 또 정장 차림이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 서운 씨만 드시면 됩니다.”

“뭐요?”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전 출근 전에 미리 먹었으니까요.”

어이가 없어서 잠이 다 깬다. 서운이 이불 속에서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자 의진이 잽싸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온다. 서운을 일으켜 주며 은근슬쩍 허리와 엉덩이를 쓰다듬는데… 이런 개수작도 다 부릴 줄 알고 많이 컸단 말이지. 흐뭇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서운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

“출근요? 지금 밤 아니에요?”

“맞습니다. 귀국 후에 바로 집으로 오느라 이제야 출근을 하게 되었군요.”

“뭐…?”

“다녀올 테니 식사 꼭 챙겨 드십시오.”

의진은 당장이라도 회사에 달려갈 기세였다. 쟤 지금 진심인가? 서운이 다급하게 의진을 붙잡았다.

“지금 가면 또 언제 오는데?”

“…글쎄요.”

지금까지 들어 본 적 없는 애매한 대답이었다. “어…?” 서운은 당황했고, 의진은 진지했다. 의진이 고민 끝에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3시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군요.”

“3시가… 설마 새벽 3시야?”

“그렇습니다.”

이쯤 되면 회사에 뭐라도 숨겨 놓은 게 아닌가 싶다. 아마 숨겨 놓긴 했을 거다. 서류와 데이터를 꼭꼭 숨겨 놨겠지. 그만하면 다행일 테다.

설마 정말로 마음이 변한 건 아니겠지. 몇 시간 전의 확신은 어디 가고 지금은 불신만 가득하다. 참다못한 서운이 처음으로 제 안의 불만을 토로했다.

“요즘 좀 심하지 않아요?”

“무엇이 말입니까?”

“너무 바쁘잖아요.”

“…죄송합니다.”

토로한 건 좋았는데… 고개까지 떨궈 가며 곧바로 사과를 해 오는 의진의 모습에 맥이 다 빠진다. 그것뿐일까, 어딘가 침울해 보이기까지 한다. 서운의 주변을 맴돌며 있는 힘껏 알랑거리던 의진의 페로몬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어? 갑자기?”

“정말 죄송합니다….”

얘 설마 일부러 이러나? 맥이 빠지다 못해 이제는 괜히 미안해지려고 한다. 애초에 네가 잘한 건 없긴 하지만 죄송할 것까지야….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서운은 어느새 의진을 달래고 있었다.

“아니, 뭐… 굳이 따지면 회사 잘못이지 의진 씨 잘못은 아니잖아요.”

“아닙니다. 제가 집중력이 흐트러진 탓이니까요. 이제는 확실히 업무에 지장이 가는군요.”

“집중력이? 왜? 무슨 일 있어요?”

“아니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럼?”

“정확한 이유는 저도 확실히 모릅니다. 확실해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얘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서운은 의진과 스무고개를 시작했다.

“어디 아프다거나….”

“아픈 곳은 없습니다.”

“회사에서 크게 사고를 쳤다거나…?”

“그럴 리가요.”

그 와중에 그런 건 아니란다. 어딘가 자부심이 느껴지는 단호한 말투였다. 기도 안 찼다. 덕분에 서운은 다시 본래의 의도를 상기해 낼 수 있었다.

“괜찮은 거예요?”

“무엇이 말입니까?”

“의진 씨요. 의진 씨 괜찮냐고. 아직 시차 적응도 못 했을 거 아니야.”

내 건 내가 챙겨야 한다. 지니야, 나랑 오래오래 살아야지. 기왕이면 건강한 채로 살다 가야 할 거 아니야. 유병장수라는 악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축 가라앉아 있던 의진의 페로몬이 기운을 되찾고 살랑살랑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걱정해 주시는 겁니까?”

“…당연한 소리를 뭐 그렇게 새삼스럽게 해요.”

“당연하다니요. 당연하지 않습니다.”

의진이 정색하며 반박에 나섰다. 예상치 못한 혈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운 씨는 그런 말씀 안 하시지 않습니까.”

“안 하기는. 나도 할 때는 해요.”

“아니요? 안 하십니다.”

“…아닐걸?”

“아닙니다.”

“아닌….”

“그런 적 없습니다. 서운 씨가 착각하신 겁니다.”

내가 그 정도로 걱정하는 티를 안 냈다고? 일말의 여지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의진이 거듭 강조했다. 확실히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갑자기 얘기가 왜 이렇게 됐더라. 단호하다 못해 서운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듣고 있던 서운만 머쓱해졌다. 서운이 아닌 척 진심을 중얼거렸다.

“그런 소리 할 시간도 안 줘 놓고….”

“시간 말입니까?”

“어, 시간. 요새 매일… 바쁘잖아요. 설마 내일도 출근해요?”

출장, 그것도 해외로 출장을 다녀왔으니 내일은 무조건 쉬지 않을까. 하물며 돌아온 당일에 출근을 하겠다고 저러고 있으니 틀림없이 그럴 테다. 서운이 안일하게 던진 소리에 의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내일도 출근한다고? 왜?!”

“왜냐고, 하시면….”

의진이 대답을 망설였다. 서운이 너무 당연한 걸 물어서 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뒤통수라도 맞은 기분에 서운이 격분했다.

“그놈의 회사는 의진 씨 없으면 안 굴러가요? 사람을 부려 먹어도 유분수지!”

“부려 먹힌 적 없습….”

“뭐 그딴 회사가 다 있어?”

“죄, 죄송합니다.”

뭔데 이건 또. 회사 욕을 했더니 의진이 재깍 사과를 해 왔다. 그러더니 세상 비장한 얼굴로 그런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아, 맞다. 그 회사 쟤 거지. 의진과 싸울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훌륭하게 저격에 성공하고 말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뭘까. 얜 정말 뭘까.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서운이 떨떠름하게 의진을 올려다보았다. 서운을 엿 먹이려고 일부러 저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저 말이 진심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다.

오늘은 이대로 집에 있을 줄 알았더니 기어코 회사에 가겠다고. 서운은 탄식했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곧바로 집으로 오느라 못한 일을 하러 간다는데 이 이상 화를 내기도 애매하다. 무엇보다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 의진이 피곤하지 않은 건 서운이 제일 잘 안다.

가지 마. 서운은 이번에도 진심을 가장한 투정을 삼키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지금 가면 언제쯤 온다고?”

“3시 도착 예정입니다.”

대답은 잘하네. 무려 새벽 3시에 퇴근을 하시겠단다. 제가 한 말은 칼같이 지키는 의진이니 의진은 분명히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집에 올 테다. 그래. 정진해라, 해. 서운이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온몸이 시큰거려서 더는 똑바로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그러네. 이번은 유난히 더 아픈 것 같지? 원래도 능숙한 건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의진이 더 힘 조절을 못 하고 있다. 자기도 알긴 아는지 조심한답시고 중간에 호흡을 고르곤 하는데 큰 도움은 되지 않고 있다. 손자국은 물론이고 키스 마크는커녕 가끔은 멍까지 들어 있다.

아이고, 삭신이야. 허리는 그렇다 치고 팔다리는 왜 아픈 건지 어깨며 뱃가죽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 의진이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서운도 나중에야 알아차릴 때가 많아서 따로 얘기한 적은 없지만 확실히 통증의 정도가 강해졌다.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의진에게 한 번은 일러둬야 할 것 같은데… 서운이 힐끔 의진을 올려다보았다. 서운이 눈꺼풀을 깜빡이자 서운을 내려다보던 거대한 그림자가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서운 씨?”

“…아니에요.”

오늘은 피곤할 테니까 다음에, 다음에 얘기하자. 누군가와 함께하는 다음이 당연한 관계라니, 서운은 이럴 때마다 의진과의 결혼을 실감하곤 했다.

“서운 씨.”

“응.”

“이제 나가 봐야 합니다.”

“알았어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잘 다녀와.”

기어코 가는구나. 서운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의진을 배웅했다.

“인사는….”

“…방금 한 건 인사가 아니야?”

“구두로 하는 인사 말고….”

아. 바로 이해했다. 출근은 출근이니 받을 건 받겠다 이건가. 넌 귀여워서 봐주는 줄 알아라. 한번 통증을 인지했더니 더는 일어설 힘이 없어 서운이 누운 채로 의진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요.”

“네.”

쪽, 쪼옥! 그러고는 찐하게 뽀뽀했다. 부러 혀는 쓰지 않고 입술로 입술을 깨물었더니 의진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귀엽기는, 서운이 정장 바지에 감춰진 탄탄한 엉덩이를 두들기며 친히 의진을 배웅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습관적으로 엉덩이까지 두드리고 말았다.

“다녀와요. 힘들면 바로 퇴근하고.”

“퇴근 말입니까?”

“나 이번에 계약금 들어와요. 안 쓰고 있을 테니까 나랑 같이 쓰자. 우리 놀이공원 백 번은 더 갈 수 있어.”

“…….”

“인간적으로 계산은 하지 말지?”

어떻게 알았지? 의진이 잔뜩 놀란 얼굴을 하기에 보다 못한 서운이 의진을 재촉했다.

“빨리 가기나 해요. 그래야 빨리 오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서운도 알고 있다. 의진은 정확히 새벽 3시에나 돌아올 테다. 더 이르지도, 더 늦지도 않고 새벽 3시에 맞춰 정확히 귀가하겠지.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까? 홀로 남겨진 두 사람의 신혼집에서 서운은 생각했다. 그날 의진은 새벽 3시에 귀가했다.

* * *

정확히 새벽 3시에 귀가한 의진이 해가 뜨기가 무섭게 회사로 튀어 나간 평범한 아침이었다. 잠결에 의진을 배웅해 준 뒤 서운은 본격적인 고민에 빠져 있었다.

감정 소모야말로 최고의 에너지 낭비다. 지금까지 서운은 매사에 적당히 마음을 쏟으며 살아왔다. 주로 사람 관련된 일에만 그랬지만 어쨌든, 서운은 인간관계에 한해서 적당히라는 말을 좋아했다. 돈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일만큼은 적당히 하지 않았다. 그저 열심히 했다. 같은 이유에서 결혼을 해도 일을 그만두진 않을 거라 다짐했고 실제로도 그러고 있다.

이만하면 감정 소모는 충분하지 않나.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것 자체가 서운에게는 무척 어색한 일이었다. 민영을 비롯한 가족들이야 처음부터 서운의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지만, 법적인 가족이 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의진이 서운의 경계를 무너뜨릴 줄은 몰랐다.

무서워. 새벽에 돌아온 의진의 인기척을 느끼며 서운은 처음으로 의진이 무서워졌다. 아무리 퇴근이 늦어도 반드시 서운에게 돌아올 사람, 오늘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다음은 있다. 그럼에도 이 사람과 보내지 못한 오늘이 아쉽다니, 어떻게 이런 마음이 들 수가 있지. 덕분에 서운은 밤새 잠을 설쳐야 했다.

적당히는 무슨,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음이 기울다 못해 완전히 넘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이란. 도대체 언제부터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서운은 답지 않게 넘쳐나는 자신의 마음이 두려웠다. 제 마음을 손에 쥔 의진이 제멋대로 자신을 휘두를까 봐 겁이 난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휘둘리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를 잃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도 서운은 착실하게 나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 윤 기사님만 만나면 알아서 목적지에 도착해 있을 테다.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줄 알았던 윤 기사와의 만남도 어느덧 열 손가락을 넘어간다. 개인적인 볼일에 기사를 대동하고 다니는 일은 평생 없으리라 자신했는데 막상 해 보니까 이게 생각보다 편하더라. 오늘처럼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땐 더더욱 그렇다.

원단 시장처럼 대중교통이 더 편한 경우를 제외하면 서운은 제법 자연스럽게 윤 기사를 호출하게 됐다. 6개월에 열 번 남짓이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지만 절대로 없을 거라 단언하던 처음을 생각하면 엄청난 발전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지금의 범람에도 익숙해지지 않을까. 의진이 확장해 놓은 서운의 세상은 도저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이대로 영영 되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래, 영원. 네 눈을 보고 있으면, 너와 함께 있으면 뭐든 다 믿고 싶어져. 터무니없게도 영원을 믿고 싶어진다. 서운이 답지 않게 의진을 찾아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서운에게는 서운의 일이 있듯 의진에게도 의진의 일이 있다. 들어 봤자 서운이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서운은 지금까지 의진의 회사에 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내왔다. 간혹 TV나 인터넷에서 의진의 회사 이야기를 떠들어 대도 서운은 적당히 남의 일처럼 흘려듣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서운의 일은 아니니까, 의진과 의진의 가족이 알아서 할 문제지 자신의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저 사람들이 내 가족이라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런 서운이 의진의 회사에 가고 있다. 정확히는 점심시간에 맞춰 의진을 만나러 가는 중이다. 서운은 여전히 의진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모르고 들어 봤자 제대로 알아들을 자신도 없지만 바로 전날 평소와 다른 의진의 모습을 봤더니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

집중력이 떨어졌다고? 신혼여행 가서도 일만 하던 애가? 서운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비행기에서 이혼을 결심했던 자신의 파란만장한 신혼을, 물론 지금도 신혼이기는 하다.

사실은, 뭐. 요새 별로 못 보기도 했고. 그러니까 결론은 의진이 보고 싶다는 얘기다. 이런 식으로 회사에 찾아가는 건 단연코 처음이지만 결혼까지 했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다. 괜찮…겠지? 서운은 내심 초조해하며 의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아니요. 회사 밖입니다.

“뭐? 왜!”

그리고 까였다. 정확히는 실패했다. 점심시간을 핑계로 평일 대낮부터 의진을 만나 보려 했건만 의진은 회사가 아니란다. 회사에 꿀단지라도 숨겨 둔 것처럼 칼같이 튀어 나가 놓고 정작 회사가 아니라니?

- 점심시간이니까요…?

“…아.”

듣고 보니 그렇네. 서운은 빠르게 수긍했다. 의진의 대답이 조금만 늦었어도 윤 기사님 앞에서 추태를 보일 뻔했다.

-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일은, 아니고… 혹시 점심 먹으러 간 거예요?”

- 아니요. 점심은 이미 먹었습니다.

“벌써? 왜!”

네 말대로 이제 막 점심시간인데? 서운이 의아해할 새도 없이 의진이 친절하게 자신의 일정을 보고했다.

- 오늘은 병원에 가야 해서 업무를 보면서 미리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점심 메뉴는 퀴노아와 병아리콩, 구운 연어를 곁들인….

“잠시만, 병원? 병원은 왜요? 의진 씨 어디 아파요?”

-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아픈 곳은 없습니다. 통증은 아니니까요. 일상생활이 다소 불편할 뿐입니다.

“아픈, 뭐? 불편하다고? 이게 다 무슨 소리인데!”

- 일종의 검진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검진을 왜 받으러 가냐고!”

무엇 하나 속 시원한 대답이 없다. 답답함에 못 이긴 서운의 목소리는 커져만 가는데 휴대폰 너머의 의진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 아직 확실하게 증상이 나온 건 아닌지라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야, 이…!”

그걸 말이라고 하니.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했다. 어떡하죠, 윤 기사님. 얘 지금 회사에 없다는데요. 헛소리를 정성스럽게 하는 걸 보니까 진짜 병원에 가긴 가야 할 것 같아요. 창밖으로 의진이 없는 의진의 회사 건물이 보인다. 앉아서는 절대로 꼭대기 층을 볼 수 없는 거대한 고층 빌딩이 빌딩 숲 한가운데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그래 봤자 세상 쓸데없다.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기사를 대동한 대형 세단 뒷좌석에 안락하게 구겨져 있던 서운이 생각했다.

- 불확실한 사실을 전해 드릴 바에야 검진 후 전문가의 소견을 바탕으로 말씀드리는 편이 낫겠군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니, 안 돼요.”

기자들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서운이 단칼에 의진의 개소리를 가로챘다.

“금방 갈 테니까 병원에서 딱 기다려요.”

- 끝나면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합….

“가요, 그럼. 대신 집에 오면 내가 없을걸.”

-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의진이 즉각 대답했다. 6개월이나 데리고 살았더니 그새 눈치가 제법 늘었다. 서운은 더 들을 것도 없이 의진과의 통화를 끝냈다.

“병원으로 모실까요?”

잠자코 듣고 있던 윤 기사가 눈치껏 물었다. 아, 다 들렸겠구나. 뒤늦게 부끄러워진 서운이 조신하게 말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말씀을요.”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할 일은 해야지. 서운을 태운 차가 병원으로 향했다.

다음은 실전이다.

“오랜만입니다, 서운 씨!”

언제 봐도 요란한 환영 인사였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의료원장을 비롯한 담당 의료진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줄지어 나와 있었다. 마지막 검진이 크루즈 여행 당일이었으니 무려 3개월 만의 방문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서운은 따로 병원에 올 일이 없었다.

오랜만이긴 하네. 순수하게 반가운 마음이 들다가도 한편으로는 자주 보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이 있다. 서운이 의료원장의 손을 마주 잡으며 살갑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잘 지내다마다요! 무사무탈이야말로 최고의 복이지요. 지니는 안에서 검사 중입니다.”

검사라니, 정말로 어디가 아프긴 아픈 모양이다.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예의 바르게 웃고 있던 서운의 얼굴이 조금씩 무너졌다.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불길한 상상을 끝도 없이 불러왔다.

“페로몬 추이를 확인하는 것뿐이니 걱정 마십시오.”

“정기 검진인 건가요?”

“정기 검진과는 다릅니다. 이건 의사의 권유로 진행되는 검사니까요. 이번에야말로 확진이 가능하겠군요.”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의사 권유는 뭐고 도대체 뭘 확진한다는 건지 서운으로서는 무엇 하나 전해 들은 바가 없다. 의진이 어디가 아팠나, 진지하게 고민해 봐도 도저히 짚이는 구석이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의진은 여느 때처럼 혈기왕성했다. 그건 서운이 제일 잘 안다.

유럽 출장을 다녀온 당일에도 무리 없이 섹스를 하고 새벽까지 일을 한다. 의진은 서운이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체력이 좋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극악에 가까운 스케줄을 소화해 낼 순 없을 테다. 워커홀릭인 의진이 지금까지 이혼당하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다 서운에게 쓰니까, 서운과 보내는 시간을 피곤해하지 않으니까. 사실은 무리하고 있었던 걸까. 의진이 자발적으로 병원을 찾을 때까지도 서운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병원과 관련해서 의진이 입버릇처럼 해 오는 말이 있다. 의진의 병간호로 가족들이 사업에 소홀해지면서 자신이 가족들에게 금전적인 손해를 끼쳤다는 개소리였다. 손해는 무슨, 그 어린애가 방치되어서 혼자 몇 년을 앓았는데 늦게라도 잘 해 줘야지 그럼! 서운은 절대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다. 이건 의진과 가족들의 문제니까, 서운은 서운대로 의진과의 관계에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이래서야 나도 가족들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 말로만 의진을 걱정했지 의진이 혼자 병원을 찾기까지 서운은 무엇 하나 도움을 주지 못했다. 돕기는커녕 애처럼 투정을 부리기 바빴다.

의료원장의 흰 가운을 내려다보며 서운은 시끄럽던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워 냈다. 이젠 아무래도 좋으니 의진이 건강하기만 하면 좋겠다. 의진이 언젠가 애정이 식어서 서운을 상처 입힌다 해도 이대로 보내고 싶지는 않다. 아직 이 사람을 마음껏 사랑하지 못했다.

“곧 끝날 때가 됐군요. 이만 들어가실까요?”

“…아니요. 전, 나중에… 의진 씨한테 들을게요. 저한테 비밀로 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지니가 비밀이라고 하던가요?”

확실히 비밀이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러네, 없잖아? 저 혼자 심각하던 서운이 땅굴을 빠져나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뭐라더라, 불확실한 사실을 전할 바에야 나중에 얘기하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것 참 곤란하군요. 서운 씨도 함께 들으셔야 하는….”

“저도 같이요?”

“그렇습니다. 지니 혼자만의 일이 아닌….”

“그렇죠! 그렇네. 의진이는 이제 홑몸이 아니니까 제가 같이 있어야겠네요!”

“지라….”

“알겠습니다. 보호자는 어느 쪽에 앉으면 되나요?”

그런 거라면야. 서운이 단번에 태세를 전환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의진스러운 화법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 모른 척 넘어가기로 했다. 당황한 의료원장의 얼굴도 서운이 알아서 못 본 척했다.

의진의 의견은 둘째 치고 서운에게는 의진을 보호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다. 답지 않게 억지를 부리며 진료실에 들어온 것까진 좋았는데 막상 들어오고 나니 더더욱 진정이 안 된다. 걱정하지 말라는 의료원장의 위로를 흘려들으며 서운은 초조하게 의진의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혼자서 병원에 왔을 의진을 생각하면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마냥 서 있는 것도 모두 다 불편하기만 했다. 넌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혼자서 병원에 다녔던 걸까. 서운은 빙글빙글 진료실 안을 돌아다니며 하릴없이 의진을 기다렸다. 자리를 권하는 의료원장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서운 씨.”

아침에도 봤는데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채혈을 했는지 의진의 셔츠 소매에 살짝 구김이 가 있었다. 이를 발견한 서운의 미간도 왈칵 구겨졌다.

“오셨습니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서운의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꼈는지 의진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혹시 어디가 안 좋으신 건…!”

“나 말고 너요!”

“자, 자. 사랑싸움은 나중에들 하시고 지금은 제 이야기부터 들어 보시죠. 일단 들어 보시면 여느 때보다 열정적인 사랑싸움이 가능하실 겁니다.”

“저희는 싸우지 않았지만… 좋습니다. 말씀하시죠.”

좋을 것도 많다. 뭐에 꽂힌 건진 모르겠으나 의진이 단번에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의진을 오랫동안 지켜본 의료원장은 의진을 다루는 실력이 가히 수준급이었다.

“각인하셨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그렇습니다. 각인을 한 오메가가 옆에 있으니 억제제가 듣지 않는 것도 당연하지요.”

의료원장과 의진이 차분하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직 서운만이 이들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각인을 했다고? 역시 그랬다니? 서운은 영화 속 주인공들을 바라보듯 멍청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런 두 사람이 심각하게 보고 있는 의료원장의 모니터에는 균일함과는 거리가 먼 괴상한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 어디까지 치솟을 셈인지 오른쪽으로 갈수록 그래프가 끝도 없이 올라간다. 문외한인 서운이 보기에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억제제의 단계를 높이는 건 어떻습니까?”

“지금도 부작용에 시달리고 계시니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요즘도 한 가지에 집중하기가 어려우십니까?”

“네. 확인해 본 결과 약 1시간 단위로 편두통이 찾아옵….”

“잠깐, 잠시만요. 각인? 각인을 했다고? 의진 씨 나한테 각인했어요?”

듣다 못한 서운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갑작스럽게 끊어진 대화가 당황스러울 법도 한데 의진은 착실하게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하고 봤다.

“네, 그렇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서운이 의진의 대답을 똑같이 따라 했다. 제 귀로 듣고도 믿기지가 않아서 직접 소리 내어 말해 봤다.

“네.”

그런 서운을 바라보며 의진이 눈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넌 또 뭘 끄덕이니…. 서운은 침착하게 시선을 돌려 복장 터지는 귀여움으로부터 벗어났다.

“네, 각인 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의료원장이다. 각인 하셨습니다…? 도돌이표처럼 따라오는 의료원장의 대답도 똑같이 따라 해 봤다. 역시, 믿기지 않았다.

각인, 각인을 했다고. 서운이 한참 만에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각인…! 각인을, 했… 각인을 했어요? 나한테?”

의진이 서운에게 각인을 했다.

“대체 언제… 진짜 각인, 진짜 각인이야?”

각인이라니, 영원한 사랑의 맹세라니. 그런 건 영화나 드라마에서 존재하는 거 아니었어?

각인 같은 건 평생 인연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서운이 다른 사람에게 각인을 하는 건 물론이고, 서운 자신이 각인의 대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럼 가짜 각인도 있습니까?”

“장난치지 말고!”

“제가요?”

의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운에게 되물었다.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에 서운이 소리 없이 분개하자 지켜보던 의료원장이 말을 보탰다.

“두 분께서 말씀 나누는 중에 죄송하지만 의사 소견을 보태자면 상상 각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로 가짜 각인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성립이 불가합니다.”

“그렇다고 하는군요.”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 서로 알고 지낸 세월이 거짓은 아닌 듯 의진과 의료원장은 환장의 호흡을 자랑했다.

“각인을… 각인은 대체 언제 했어요? 억제제 부작용은 또 뭐고!”

한 차례 호흡을 가다듬은 서운이 본격적인 취조에 들어갔다. 이대로 잠자코 앉아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다간 제 명에 못 살지도 모른다.

“각인 시기와 억제제 부작용 중 어느 것부터 대답하면 될까요? 순서를 정해 주시면 감사하겠….”

“아! 으! 아!”

“지니야, 순서대로! 이럴 땐 순차적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서운이 다시 한번 분개하는 사이 의료원장의 아낌없는 코칭이 이어졌다. 순차적으로 들어가면 된다! 명령어가 입력되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시작은 억제제 때문이었습니다. 십 년 넘게 복용해 온 억제제가 갑자기 부작용을 일으키더군요. 병원에 오게 된 것도 대체용 억제제를 처방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나 원장님도 처음부터 각인을 염두에 두진 않았습니다. 억제제가 듣지 않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니까요. 반면 각인이 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저희가 페로몬 매칭률 96.72%에 빛나는 알파와 오메가라도 해도 각인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명령어를 입력받은 의진이 알아서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지. 익숙한 알고리즘에 서운도 조금씩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뭐, 그렇긴 하죠. 페로몬 매칭률이 높다고 해서 다 각인이 되는 건 아니니까.”

“맞습니다! 서운 씨가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런데도 각인이 된 걸 보면 페로몬 매칭률이 대단하긴 한 모양입니다. 그렇잖습니까? 일반적인 알파, 오메가 부부의 페로몬 매칭률이 약 77%인 걸 감안하면 저희의 수치는 그야말로 기적입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알파 오메가 연구 논문에 수록될 정도이니 자부심을 가질 만합….”

“그만, 거기까지. 그래서 처음 병원에 온 게 언제쯤인 거예요?”

쟤는 꼭 페로몬 매칭률 얘기만 나오면 저러더라. 서운이 삼천포로 질주하는 의진을 붙잡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벌써 3개월 전이군요.”

“3개월, 전이면….”

“정확히는 크루즈 여행에서 돌아온 3일 뒤가 첫 내진이었습니다.”

3개월, 3개월이라고. 의진의 대답은 명쾌하기 짝이 없는데 서운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다는 건 의진이 무려 3개월 동안 혼자서 억제제 부작용을 견뎌 왔다는 소리다.

“서운 씨도 아시겠지만 호주에서 제 러트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잖습니까. 추측하건대 크루즈에서 각인이 된 것 같습니다.”

“…크루즈에서….”

“맞습니다. 러트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유력합니다. 처음 억제제가 듣지 않았을 땐 알레르기를 의심했지만 검사를 해 보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가장 유력한 원인은 억제제와 충돌하는 알레르기의 발현이었기에 정확한 사유를 알아내기까지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됐습니다. 설마하니 각인이 원인일 줄은 몰랐지 뭡니까.”

여느 때처럼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병원과 함께한 지난날을 회상하는 의진은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였다. 이번에도 그러지 못한 건 서운이었다.

“밝혀지기까지 3개월이나… 걸린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3개월….”

“네, 말씀하십시오.”

“3개월 동안 혼자서….”

“아니요. 혼자는 아니었습니다. 원장님의 판단하에 검사를 진행했….”

“나한테는 언제 얘기하려고 했어요?”

이 와중에도 사실을 정정하려 드는 의진의 말을 가로채며 서운이 물었다.

“왜… 왜 지금까지 말을 안 했어? 왜, 혼자서…! 왜 또 그렇게…!”

이래 놓고 잘도 사랑 타령을 했지. 3개월, 무려 3개월이다. 서운은 3개월 동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의진이 억제제 부작용에 시달리는지, 제게 각인을 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는 거라고는 의진이 요즘 부쩍 바빠졌다는 것 정도. 고작 그 정도가 다였다.

아니, 아니구나. 하나 더 있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둔통에 서운은 불현듯 중요한 사실을 상기해 냈다. 확실히 최근 들어서 페로몬 조절이 안 되는 것 같았지. 힘 조절도 마찬가지다. 각인의 영향으로 의진의 러트가 불규칙해졌고 억제제가 잘 듣지 않는 상태라면 이 모든 게 단번에 이해가 된다.

“확실하지 않았으니까요. 저도 확진을 받은 건 지금이 처음입니다.”

“확진이 문제가 아니라! 뭔가 이상했을 거잖아. 억제제 부작용도 있었다면서!”

“그건… 맞습니다. 일상에 지장이 가더군요. 억제제 부작용이 점점 쌓이다 보니 업무 효율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최근 10일간은 수면 장애가 와서 기존의 일상을 유지하는 데 무리가 왔….”

수면 장애! 수면 장애가 왔단다. 하다 하다 수면 장애까지 왔었다고! 서운은 허리의 둔통도 잊고서 튀어 오르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운 씨, 진정하시고 그만 앉아 보시지요. 요즘 같은 세상에 각인이라니 얼마나 로맨틱합니까.”

아, 맞다. 여기 우리 둘만 있는 거 아니었지. 의료원장의 흐뭇한 첨언에도 서운의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로맨틱하기는. 세상에 이딴 각인 고백이 어디 있다고! 각인 한 번 하려다가 없던 초상도 치를 판이다. 서운은 의료원장을 붙잡고 가장 중요한 사실 확인에 나섰다.

“선생님, 그럼 건강에는 아무 이상 없는 거죠?”

“그렇고말고요! 각인으로 인한 불안정한 러트 주기를 제외하면 지니는 아주 건강합니다. 불안정한 건 주기뿐으로 정자는 매우 건강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넌 뭘 또 뿌듯해하고 있는데!”

이만하면 많이 참았지. 기어코 서운의 입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의진이 서운에게 각인을 했다.

“혹시 화나셨습니까?”

그길로 의진을 끌고 집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내내 말이 없던 서운이 점심까지 마다하자 의진이 확신에 찬 어조로 물었다.

“아니.”

아쉽게도 정답은 아니었다. 의진의 예상과 달리 서운은 의진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아주 조금 빡이 치긴 했지만 서운을 이토록 고민하게 만든 데에는 다른 이유가 더 크다.

“그럼….”

“…….”

“…서운 씨 페로몬이 왜….”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서운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의진을 올려다보았다. 언뜻 보면 한없이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롤러코스터도 제대로 못 타는, 바이킹보다 놀이공원 퍼레이드를 더 좋아하는 눈앞의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너 진짜 괜찮아? 나로도 괜찮아? 서운은 당장이라도 의진에게 묻고 싶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아직도 의진에게 보여 주지 못한 것들이 훨씬 많은데 서운이 곧 의진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너의 세상을 비워 둔 채 우리 둘만의 세계에 가둬 놓고 싶지는 않았어.

왜 혼자 그러고 있었어? 왜 또 혼자 참고 있었어? 서운이 고작해야 의진의 회사에 찾아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사이 의진은 혼자 병원에 갔다. 심지어 초진도 아니고 3개월 동안 부지런하게 병원에 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모를 수가 있지. 의진이 아픈데, 몸이 좋지 않다는데 왜 내가 몰라줬을까. 지금까지 느껴 본 적 없는 무거운 죄책감이 서운을 짓눌렀다. 요즘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몸은 괜찮은 거냐고 왜 한 번을 제대로 물어보지 않은 걸까. 애정에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말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서운이 자의적으로 걸어 들어간 책임의 굴레가 끊임없이 서운을 책망했다.

“의진 씨.”

“네, 서운 씨.”

“…각인 말인데요.”

“네.”

“…….”

“서운 씨?”

“…잠시만.”

비장하게 의진을 부른 것까진 좋았으나 거기까지였다. 서운은 그대로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자신이 세워 놓은 타인과의 경계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득해서 작은 상처 하나에도 균형을 잃고 바닥에 처박힐 것 같았다. 불안하게 일렁이는 서운의 페로몬을 느낀 건지 의진이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어디가 안 좋으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닌데….”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서운이 오메가로 발현한 지도 어언 20년이 다 되어 간다. 갓 발현한 초창기도 아니고 서운이 페로몬 조절에 실패했을 리가 없으니 이건 전적으로 의진의 탓이다. 서운에게 각인을 한, 서운이 자기 자신보다 우선시되는 의진이 지닌 굴레. 서운조차 인지하지 못한 미약한 페로몬에 의진의 세상이 좌지우지된다.

“저는 언제라도 상관없으니 서운 씨가 원하실 때 말씀하시면 됩니다.”

서운을 내려다보는 한결같은 눈동자가 격정에 잠겨 있었다.

“부탁도 좋고 충고도 좋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전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전부 다?”

“서운 씨가 원하신다면 뭐든지.”

무엇에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기계 같은 남자가 비로소 사람처럼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 서운은 의진이 가진 유일한 격정이었다.

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서운은 더 이상 제자리에 멈춰 있지 않았다. 아득히 멀게만 느껴졌던 이곳이 더는 낯설지 않았다.

“…회사에 병가 내자.”

가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의진의 회사고 뭐고 그냥 다 모르겠고, 더는 이러쿵저러쿵 마음을 재고 싶지 않았다. 지 회사인데 그거 며칠 안 나간다고 설마 잘리겠어? 내심 그런 마음도 있었다. 서운은 처음으로 갑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병가…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병가는 왜….”

“억제제 안 들으면 러트로 병가 낼 수 있잖아요.”

“법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요.”

“제가 병가를…?”

“어, 너요.”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듯 의진은 쉽게 서운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몇 번이고 말해 줘야지. 서운이 좀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약만 세 번 바꿨으면 됐지, 어차피 안 듣는 거 억제제 먹지 말고 나랑 러트 보내요.”

“러트를, 서운 씨와….”

“응. 나랑 보내. 그럼 되잖아. 원장님도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하셨고.”

“…….”

“사실… 나도 러트는 겪어 본 적 없어서 잘 모르긴 하지….”

“서운 씨도 러트는 처음이신 겁니까?”

만…. 의진이 다짜고짜 서운의 말을 끊어 버렸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의진의 페로몬이 솟구치듯 터져 나왔다. 급하게 갈무리했다고는 해도 바로 곁에 있던 서운이 이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어딘가 위협적인 알파의 페로몬이 흉흉한 궤적을 그리며 서운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갈무리한 게 이 정도라니, 가히 놀라웠다.

깜, 짝이야…. 서운은 그제야 의진의 상태를 실감했다. 각인의 영향으로 러트가 불안정해진 알파, 심지어 억제제도 제대로 듣지 않는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의진의 모습에 서운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나도 같이 러트를 겪는 건 처음이긴 한데… 음, 알죠? 러트만, 처음인… 어… 으음, 그러니까….”

혹여나 의진이 오해할까 쓸데없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의진이 냉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병가 내겠습니다. 몇 주 정도 내면 좋을까요.”

“무슨 러트를 몇 주씩이나 해요. 한 3일이면 되지 않나?”

“…….”

“…좀 짧은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침묵하던 의진이 냉큼 대답했다. 억제제 없이 러트를 보내는 건 저도 처음이면서 감히 확신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요? 그럼 5일?”

“깔끔하게 일주일 어떠십니까.”

“콜. 지금 바로 연락하자.”

“알겠습니다.”

결재가 필요 없는 직장인의 삶이란 이런 걸까. 5분도 안 돼서 병가를 표방한 의진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두 사람의 첫 휴가였다.

“우리 이제 뭐 하지?”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 그 안에 모든 걸 다 끝내야 한다. 의진의 휴가가 결정되자 덩달아 서운만 다급해졌다. 휴대폰으로 급하게 국내 여행지를 검색하며 서운이 물었다.

“어디 놀러 갈까?”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시간이 턱없이 모자라다. 그간 부족했던 둘만의 시간도 가져야 하고 각인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도 나눠야 하는데 의진에게 좋은 추억도 만들어 주고 싶다. 억제제 부작용과 불안정한 러트로 고생한 만큼 충분한 휴식도 취해야 하니 관광지보다는 휴양지가 더 좋겠다. 그런 서운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의진이 즉각 대답을 내놓았다.

“네, 좋습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푹 쉬러 가자.”

“네, 그러십시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어디든 좋습니다.”

“바다는 자주 갔으니까… 이번에는 산으로 가 볼까? 산림욕도 하고 피톤치드도 마시고.”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렇게 하시죠.”

“…….”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설마 이것도 각인 때문인가. 뭐만 하자면 그저 다 좋단다.

“다 좋다고 하면 어떡해.”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서운 씨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아, 그래. 쟤 원래 저랬지. 서운은 빠르게 의심을 거둬들였다. 이제 와서 각인을 의심하기에는 의진은 처음부터 저랬다.

“맨날 편하신 대로 하래. 나한테 효도하지 마요.”

“효도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혹시 기분이라도 상한 걸까. 의진이 답지 않게 정색하며 서운의 말을 딱 잘라 끊어 냈다.

“효도해야 하는 대상에게 발정하면 그건 패륜이지 않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

“그래도… 패륜은….”

“…이리 와요.”

헛소리에는 따뜻한 손길이 약이다. 거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서운이 건방진 자세로 의진을 불렀다. 정자세로 앉아 있던 의진이 냉큼 무릎을 굽혀 가며 서운과 눈높이를 맞춰 왔다.

“더 가까이.”

“네.”

“…….”

“…….”

“의진아.”

“네, 서운 씨.”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지?”

입술이 닿을 거리에서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자니 무척 새삼스러운 기분이 든다. 이 사람이 나한테 각인을 했다고. 억제제 부작용에 시달리며 혼자 병원에 다녔을 의진의 지난 3개월을 생각하면 각인 사실이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다행히 서운의 속상한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제도 보셨잖습….”

“그만.”

“네.”

가까스로 감성을 지켜 낸 서운이었다. 서운은 본격적으로 의진의 얼굴을 주무르며 그간의 궁금증을 쏟아 냈다.

“몸도 안 좋으면서 출장은 왜 그렇게 많이 다녔어.”

“…많다고 생각하셨습니까?”

“…….”

“서운 씨, 페로몬이….”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말해요. 일단 들어나 봅시다.”

순간 서운의 페로몬이 분노로 요동치면서 대화가 중단될 뻔했으나 두 사람은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의진의 솔직한 답변 덕분이었다.

“보통은, 그러니까 서운 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 정도가 평균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업무 효율이 떨어져서… 국내에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의 한계…를 느끼고… 직접 출장을 가는… 다소 비효율적인… 선택, 을 하게 되었습니다. 송구합니다.”

결국 다 억제제 부작용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부작용의 증상인 편두통, 이유 없는 떨림, 수면 장애, 어지러움, 시야 얼룩 등을 생각하면 부쩍 잦아진 의진의 야근도 덩달아 설명이 된다. 근데 그게 그렇게 수치스러울 일이야…? 무표정한 얼굴은 평소와 똑같은데 어조나 목소리에서 어딘가 분한 기색이 느껴진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운은 알 수 있다.

조금 신기한 기분이 되어 의진을 빤히 쳐다보는데 의진의 목 언저리에 닿아 있는 손가락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신호가 전해진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서운의 손가락 아래에서 의진의 맥박이 열렬한 구애를 보내오고 있었다.

“심장 엄청 빨리 뛴다….”

“그렇습니까.”

“이것도 각인 때문이에요?”

“증상의 일환이기는 합니다.”

“언제부터 이랬어.”

“글쎄요. 각인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

“서운 씨를 보고 있으면 늘 이랬으니까요.”

로맨스 영화에 나올 법한 대사였다.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 주고 싶은 눈먼 달콤함에 서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서운이 웃자 기다렸다는 듯 의진의 맥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운이 부드럽게 의진의 얼굴을 감싸 쥐며 속삭였다.

“의진 씨가 그러면 농담으로 안 들리는데.”

“농담이 아니니까요. 전 농담 안 합니다.”

저 소리에 설레는 날이 올 줄이야. 서운은 자신의 처지에 못내 탄식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딱딱한 애정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전히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른한 충만감에 페로몬이 한껏 젖어 들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익숙하고 편안한 향기가 두 사람을 에워쌌다. 두 사람의 페로몬을 사이좋게 섞어 놓은 달콤한 박하 향기였다.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이렇게 편할 수도 있는 거였나. 전에 없던 안락함을 느끼며 서운의 눈꺼풀이 깜박깜박 감기었다. 전날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몸이 계속해서 서운을 꿈속으로 인도했다. 수마의 직전까지 의진과 시선을 마주한 채 서운은 생각했다.

“의진 씨 닮았으면….”

조금은 충동적이고, 조금은 본능적으로.

“의진 씨 닮은 아기는 좀… 보고 싶네….”

너에게 줄 수 있는 모든 애정을 담아서. 서운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 아마 그대로 쭉 잠들었다면 제법 깊게 잠들 뻔했다.

서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억지로 잠에서 깨어났다. 오래 잠이 든 건 아니지만 서운이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의진은 여전히 서운의 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파에 반쯤 기대어 엎드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의진 씨?”

“서운 씨… 죄송합니다….”

의진이 소파 언저리에 얼굴을 비비며 괴로운 듯 몸부림쳤다. 서운이 누워 있는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커다란 등이 괴로움에 들썩거렸다. 설마 부작용 때문에? 서운은 자다 일어난 것도 잊고서 벌떡 일어나 의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은… 아!”

그러고는 단숨에 뿌리쳤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의진을 뿌리치고 말았다. 잠깐이지만 서운의 손길이 닿은 의진의 어깨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주변의 공기도, 의진의 페로몬도 모든 게 다 한계까지 가열되어 있었다.

“서운 씨….”

의진이 힘겹게 서운의 이름을 불렀다.

“서운 씨, 서운 씨….”

“…….”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하는데.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의진의 목소리에도 서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 당연한 지식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을 때의 괴리감이란. 기어코 서운을 일어나게 만든 흉흉한 페로몬이 의진을 뾰족하게 감싸고 있었다. 의진이 러트가 왔다.

“…괜찮, 아요?”

물으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는 건 헐떡이듯 들썩이는 의진의 등을 보면서 알았다. 러트 주기가 불규칙해졌다고 해서 이렇게 바로 러트가 올 줄은 몰랐던지라 서운은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의진이 너무 괴로워 보여서 러트가 마치 심각한 질병처럼 느껴졌다.

“벼, 병원… 빨리 병원에…. 119가 몇 번이었지…?”

“…으….”

“의진 씨? 정신이 들어요?”

“하, 아….”

“…어?”

“아… 서운 씨….”

서운이 횡설수설하던 와중에도 의진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러트가 결국 발정기라는 사실은 그대로 잊어버렸을 거다. 탁, 탁, 탁. 의진의 달뜬 숨소리 너머로 익숙한 마찰음이 반복되고 있었다.

“서운 씨….”

소파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의진이 멀어진 서운의 체취를 쫓아 소파 가까이 몸을 붙여 왔다. 의진이 몸을 움직이는 찰나에 서운은 보았다.

“죄송, 합니다… 서운 씨, 죄송합니다….”

의진이 자위를 하고 있었다. 탁, 탁, 탁, 탁! 커다란 손이 단단하게 곧추선 성기를 쥐고 흔들며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 서운도 그제야 러트의 본질을 깨달았다. 서운은 지금 발정기가 온 알파를 보고 있었다. 의진은 거의 이성이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자, 잠깐! 뭐 하는…!”

그러지 않고서야 맨정신으로 서운의 발을 핥을 수는 없을 테다. 서운이 본능적으로 발을 빼내려 들자 의진이 한쪽 손으로 서운의 발목을 그러쥐었다. 의진이 힘 조절에 능숙하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서운이 제일 잘 알지만, 사실은 그조차 어느 정도 정제된 악력이었다는 건 지금에야 알았다.

“좋은, 냄새가….”

“의진, 씨! 잠깐만!”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그, 그마, 아…!”

어깨를 밀어내 봐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서운의 만류에도 의진은 정신없이 서운의 발을 핥아 댔다. 서운의 발에 얼굴을 처박고서 서운의 발 곳곳에 혀를 내리기 바빴다. 뜨거운 혀가 발가락 사이를 가로지르며 질척한 흔적을 남기자 이를 덧그리듯 의진은 몇 번이고 같은 부위를 핥고 또 핥았다. 푸르게 돋아난 맥박을 따라 발목까지 발등을 한 번에 핥아 올리기도 했다.

타인의 손길은 물론이고 자신의 손길조차 익숙하지 않은 부위였다. 발가락에서 전해지는 축축한 열기에 서운의 몸이 자꾸만 뒤틀렸다. 이제는 숨만 쉬어도 의진의 욕정 어린 페로몬이 느껴졌고, 눈을 감으면 발목을 그러쥔 단단한 손과 서운의 발을 핥아 대는 뜨거운 혀가 느껴졌다.

눈을 감고 감각을 무시하려 해도 성기를 쥐고 흔드는 반복적인 마찰음이 계속해서 서운을 따라다녔다. 도저히,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통증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기어코 바지 밑단이 올라가는가 싶더니 이 이상 맨살이 나오지 않자 의진이 바지째로 서운의 종아리를 깨물었다. 신음과는 확연히 다른 고통 섞인 비명에 의진의 등허리가 경련하듯 튀어 올랐다.

서운의 흔적을 쫓아 마구잡이로 얼굴을 비벼 댄 여파로 의진의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아직 갈아입지 않은 정장이 무색할 만큼 잔뜩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아프, 셨습니까.”

“많이는, 아닌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서운 씨, 제가 어떻게… 저는, 서운 씨가….”

의진이 횡설수설하며 다시금 소파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성을 찾기가 쉽지 않은지 의진은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서운의 이름인지 신음인지 모를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의식적으로 소파에 얼굴을 박아 댈 뿐이었다. 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의진의 목덜미에 혈관이 바짝 곤두서 있었다.

“의진 씨, 고개 들어 봐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돌연 결심이 섰다. 서운이 부드럽게 의진을 타일렀다.

“아닙, 안 됩니다….”

“괜찮으니까 들어 봐. 응?”

“…….”

“의진아.”

움찔, 기껏해야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각인의 영향인지 의진의 뒷머리가 예민하게 곤두섰다. 지니야, 서운이 한 번 더 소리 내어 의진의 이름을 부르자 의진이 비로소 꾸물꾸물 고개를 들었다. 아직 확신은 없는지 못내 머뭇거리면서도 서운의 말대로 착실하게 시선을 맞춰 온다.

셔츠는 잔뜩 주름이 가 있을지언정 단추는 목 끝까지 걸어 잠갔고, 숨이 조금 거칠긴 해도 두꺼운 흉통을 안정감 있게 감싸 안은 베스트도 그대로 입고 있다. 넥타이도 제대로 매고 있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나 나른하게 풀어진 눈매, 잔뜩 곧추선 핏대를 제외하면 의진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간신히 버클만 풀어 헤친 바지 사이로 보이는 올라붙은 성기가 아니라면 충분히 그래 보였을 테다.

그래, 저건 평소에도 저랬으니까. 평소보다 조금 더 여유가 없을 뿐이다. 서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진을 향해 몸을 숙였다. 아니, 숙이려고 했다.

“안 됩니다, 서운 씨….”

혼자서 꼿꼿하게 쿠퍼액을 흘려 대는 성기가 아플 법도 한데 의진은 한사코 서운의 손길을 거부했다. 이것 봐라? 서운으로부터 한 발자국 멀어진 의진을 내려다보며 서운이 비장하게 양팔을 걷어 올렸다. 원래 사람이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리 와요.”

“저 지금 이상합… 아, 안 됩니다, 서운 씨….”

“시끄러워. 가만히 있어요.”

“서, 서운 씨…!”

자고 있는 서운의 앞에서 자위를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뭐가 안 된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나마도 크게 반항하지는 못하고 서운이 다가오면 그만큼 엉덩이를 뒤로 빼는 게 고작이다. 결국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서운이 비장의 카드를 내밀었다. 의진의 미약한 반항도 단숨에 끝이 났다.

“좋아요?”

“아….”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었다. 서운은 조금 더 힘을 주어 의진의 성기를 자극했다. 발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성기의 감촉이 무척 생소했다.

“대답해야지.”

“네, 네….”

“의진아, 좋아?”

“좋습, 네, 좋습니다….”

성기가 밟히자 꼼짝도 하지 못하는 의진을 지켜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였다. 서운은 소파에 앉아 있는 반면 의진은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어서 의진을 내려다보는 시각적인 자극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발을 애무당한 것도 처음이지만 발로 애무를 해 주기도 이번이 처음이다. 요령이 없어 발바닥으로 성기를 짓누르는 게 고작이건만 의진의 반응은 어느 때보다 서운을 춤추게 만들었다. 서운이 발가락으로 성기를 훑기라도 하면 의진의 허벅지가 경련하듯 떨어 댔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데도 옆으로 퍼지지 않는 허벅지는 서운이 저도 모르게 발에 힘을 주는 불상사를 낳기도 했다.

“하, 아…!”

다행히 의진은 서운이 주는 고통까지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발바닥 아래에서 터질 듯이 꿈틀거리는 성기는 꼭 살아 있는 하나의 생물 같았다. 서운은 용기를 내어 발바닥으로 예민한 귀두를 문질렀다. 손바닥에 비하면 조금은 거칠게 느껴질지 몰라도 쿠퍼액이 나와 있어서 아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 서운, 씨….”

“으응. 나 여기 있어.”

“서운, 서운 씨….”

어떡하지. 아무래도 이상한 취미에 눈을 떠 버릴 것 같다. 서운의 발 따위야 치워 버리면 그만인데 서운의 발에 성기를 짓밟힌 채 끙끙거리는 의진이, 정확히는 오매불망 서운만 올려다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의진이 사랑스럽다. 아, 이거 뭔데. 괴롭히고 싶잖아. 서운이 발가락에 힘을 주어 의진의 성기를 꼬집듯이 쥐어짜자 의진의 입에서 탄식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의진의 성기가 한계까지 부풀었다. 이를 뻔히 알면서도 서운은 판에 박힌 질문을 했다.

“싸고 싶어?”

“네, 네….”

“싸게 해 줄까?”

“네….”

“음….”

“…서운 씨….”

의진이 순하게 서운을 졸랐다. 본능적으로 쾌감을 좇아 허리를 잘게 쳐올리다가도 서운을 보고는 기꺼이 허릿짓을 멈춘다. 러트라며, 발정기라며. 어쩐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서운이 의진을 향해 손짓했다.

“키스해 주면 싸게 해 줄게.”

“네.”

기다렸다는 듯 의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에는 베스트와 넥타이까지 갖춰 입고서 아래에는 핏줄이 불거진 성기를 내놓고 있는 의진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적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이 상황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서운이 홀린 듯이 의진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운지 서운을 코앞에 두고도 망설이는 의진의 넥타이를 붙잡아 제 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각도가 맞지 않아 서운의 볼에 안착한 의진의 입술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이렇게 됐으면서 왜 또 혼자 참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은 입맞춤으로 대신했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서운이 의진의 입술을 핥으며 속삭였다.

“제대로 해야지 이게 뭐야….”

“…혀 넣어도 됩니까?”

“그딴 거 묻지 말랬지….”

“죄송합….”

“…….”

“…….”

“…….”

“하….”

“응….”

두 사람의 입술이 완전히 맞물렸다. 혀가 섞이고 타액이 오가며 페로몬이 흘러들어 왔다. 서로의 페로몬에 절여진 혀가, 입 안이 달았다. 의진이 그대로 서운의 위에 올라탔다. 서운은 기꺼이 의진을 마주 안으며 의진의 셔츠 속을 더듬었다. 근육의 움직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커다란 등이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입 속을 유영하는 혀도, 서운의 얼굴을 움켜쥔 커다란 손도 전에 없는 온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의진이 닿는 곳 하나하나가 짜릿해서 미칠 것 같았다.

“입으로 해 줄까…?”

달려드는 의진을 간신히 떼어 내며 서운이 물었다. 의진이 서운의 위에 올라타던 순간부터 본능적인 허릿짓이 이어지고 있었다.

허리 아래 사정이 무색하게도 의진은 대답이 없었다. 서운이 의진의 등을 은근하게 쓸어내리며 다시 한번 물었다.

“싫어?”

“아니요. 싫지 않습니다.”

“그럼.”

“싫지는, 않지만….”

“…바로 넣고 싶어?”

왈칵, 뭘 상상한 건지 의진의 성기가 지치지도 않고 몇 번째인지 모를 쿠퍼액을 뱉어 냈다. 여기까지 와서 뭘 망설이는 걸까. 서운이 대답을 재촉하듯 의진의 귀두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축축하고 끈적한 액체가 서운의 손끝을 적시며 성기의 감각을 예민하게 끌어올렸다. 하, 아…. 이내 의진이 온몸으로 화답하며 웅얼웅얼 진심을 토해 냈다.

“다, 하고 싶습니다….”

“다?”

“네….”

“그게 뭔데?”

“입으로도 하고….”

“응.”

“넣고도 싶습니다….”

“그랬구나….”

“아, 서운 씨….”

얘 진짜 귀여워서 어쩌지. 작정하고 기둥 전체를 쓸어 주자 의진이 울듯이 신음했다. 서운이 더는 참지 못하고 의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몸을 굴려 서운이 앉아 있던 소파 자리에 의진을 앉혀 버렸다.

“아…!”

자진해서 거실 바닥으로 내려간 서운이 곧장 허리를 숙여 의진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쾌감 때문인지 망설임 때문인지 의진의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가기에 온 체중을 실어 의진의 다리를 억지로 잡아 눌렀다. 몸에 힘을 주고 버티는 만큼 의진의 성기를 세게 빨아올리자 일순 의진의 숨이 멈췄다.

“갠차느, 니까 그냐 해….”

서운이 의진의 성기를 빨며 우물거렸다. 고집스럽게도 의진은 여태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런 의진을 달래듯 서운이 의진의 귀두에 쪽쪽 입을 맞추며 온전한 발음으로 말했다.

“하고 싶은 만큼 다 해도 돼.”

“…….”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되니까….”

“그래도 됩니까?”

깜짝이야. 의진이 대뜸 허리를 곧추세우는 바람에 성기가 강하게 목 안쪽을 찔러 왔다. 콜록, 콜록! 놀란 서운이 반사적으로 몸을 빼자 의진이 단번에 서운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깊은 삽입에 놀란 건 사실이나 곧장 입 안을 빠져나간 덕분에 타격은 미미했다.

서운보다 서운을 더 걱정하는 의진이니 의진이 얼마나 놀랐을지 가늠도 안 된다. 서운은 의진을 대신해 자신의 안위를 알리고 나섰다.

“나 괜찮….”

“제가 하고 싶은 만큼,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되는 겁니까?”

의진이 보기에도 서운이 퍽 괜찮아 보이는 모양이다. 의진은 생각보다 서운의 안위에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전혀 다른 곳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그 또한 서운의 일부이긴 하지만 전적으로 서운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평소와는 뉘앙스가 전혀 달랐다.

응, 괜찮아. 너라면 다 괜찮아. 서운의 얼굴을 감싸 쥔 커다란 손은 한 곳도 빠짐없이 뜨끈하게 열이 올라 있어서 알 수 없는 기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서운은 기꺼이 의진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응.”

얼굴을 묻은 채로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안정감과는 거리가 먼 알파의 흉흉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 위험한 냄새…. 본능적으로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어 댔지만 상관없었다.

“그렇게 해 줘.”

더는 혼자 참지 마. 서운은 누구보다 의진의 방종을 바랐다.

그런 서운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은 걸까. 의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처음 자세 그대로 서운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갑작스러웠다. 서운은 어느새 의진에게 밀쳐져 바닥과 등을 맞대고 있었다. 바닥에 깔아 놓은 러그 덕분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일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리는 소파에 반쯤 걸쳐져 있어서 완전히 드러누운 건 아닌 희한한 자세 탓도 컸다.

“어, 어…?”

“…….”

“의진, 의진 씨? 의진…!”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났다. 의진이 한 손으로 서운의 양다리를 잡아 올리더니 그대로 바지를 벗겨 버렸다.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는 중간 과정도 없었다. 그저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서운이 입고 있던 얇은 슬랙스가 발목 밖으로 뜯어져 나갔다.

언뜻 천이 뜯어지는 소리가 났지만 안타깝게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서운의 다리가 양옆으로 활짝 벌어졌다.

“잠깐, 잠깐만! 뭐 하는, 아!”

이내 엉덩이 사이에서 느껴져서는 안 될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다. 의진이 서운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정신없이 구멍을 핥고 있었다.

“의진 씨! 잠깐…! 잠…!”

“…….”

“으, 아, 앗…!”

중간중간 밖으로 새어 나온 애액을 꼼꼼히 핥아 올리며 걸신들린 사람처럼 서운의 구멍을 빨아 댄다. 평소에도 의진이 곧잘 하던 애무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하필이면 서운이 바닥과 등을 맞대고 있어서 의진이 자신의 구멍을 핥는 모습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건만 거꾸로 뒤집힌 채 덜렁덜렁 크기를 키워 가는 자신의 성기를 마주 봐야 하는 건 퍽 괴로운 일이었다.

“서운 씨는, 왜….”

서운의 다리 사이로 의진의 집중한 얼굴이 떠올랐다.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겁니까…?”

그러고는 다시 사라졌다. 의진은 서운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서 세상의 진미를 음미하고 있었다. 느리게 구멍을 핥아 오는 혀가 뱀처럼 느껴졌다. 지나친 자극에 서운이 저도 모르게 발버둥을 쳤다.

“의진, 씨! 혀, 그만! 그, 앗…!”

“하… 서운, 씨….”

그마저도 다리가 허공에 들려 있어서 쉽지 않았다. 다행히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는지 의진이 아예 서운의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쳐 놓았다.

“불편하십니까…?”

“혀, 혀! 혀 빼고, 혀 빼고 말하면… 아…!”

덕분에 서운은 고스란히 의진의 애무를 받아 내야 했다. 안정적인 자세에 힘입어 의진의 혀가 더 깊은 곳을 핥아 왔다. 쪽쪽거리며 맛있게도 구멍을 빨아 대는 통에 속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았다. 허리는 바닥에서 반쯤 떠 있는 데다 다리는 의진의 어깨에 걸쳐져 있으려니 의진의 끈질긴 애무를 피할 길이 없었다.

“앗!”

“…….”

“왜, 깨물어. 따갑잖아….”

“미칠 것, 같… 하….”

“아! 또…!”

할 거면 하나만 할 것이지 의진은 틈틈이 서운의 엉덩이를 깨물어 가며 집요하게 다리 사이를 핥아 댔다. 속은 간지러운데 밖은 따끔거리니 안팎으로 가해지는 상반된 감각에 쾌감만 극대화된다. 아래가 축축하게 적셔질수록 서운의 성기도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더는 한계였다.

“서운 씨…. 서운 씨….”

“어, 어…! 의진! 아! 나, 허리! 윽, 허리… 아픈, 아!”

“하… 아….”

“천천, 히…! 의진 씨, 천천히, 천, 아! 앗!”

그런 서운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눅눅하게 풀어진 구멍을 잡아 벌리며 의진의 성기가 밀려 들어왔다. 마지막 정사가 바로 전날이건만 꾸역꾸역 내벽을 비집고 들어오는 단단한 이물감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의진이 나서서 콘돔을 찾지 않은 것도, 의진에게 제대로 러트가 온 것도 이번이 다 처음이다. 당장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꿈틀대는 의진의 성기가 진입과 동시에 내벽을 자극해 왔다. 러트 때문인지 자세 때문인지 평소보다 압박감이 몇 배는 더 심했다.

말 그대로 배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다리 사이가 쪼개지는 듯한 감각을 견디며 서운은 가까스로 밀린 숨을 몰아쉬었다. 삽입이 쉬웠던 적은 없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치다. 힐끗, 용기를 내 의진과 연결되어 있는 적나라한 광경을 마주하자 눈에 띄게 불룩해진 아랫배가 시각적인 확신을 안겨 준다. 서운의 판판한 아랫배가 가운데만 툭 불거져 있었다.

설마…. 성교육 시간에 배운 교과서적인 지식이 서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운이 아는 한 러트를 맞이한 알파의 성기가 부풀어 오르는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이다.

설마 이대로 노팅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미지의 세계에서 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 서운을 덮쳐 왔다. 아프겠지, 아플 거야. 서운은 덜컥 겁부터 먹었다.

“의진, 아!”

겁에 질려 뭐라도 해 보기도 전에 서운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퍽, 퍽! 퍼억! 위에서부터 찍어 누르는 힘에 의진의 성기가 꽂히듯이 들어와 서운의 내벽을 엉망으로 쑤셔 댔다.

“아! 윽! 의진, 씨! 이거 너무, 아, 아!”

“…하….”

“천, 천천히! 아! 어떡! 아, 윽! 응…!”

서운은 숨을 쉬는 것도 잊고서 의진의 밑에서 정신없이 흔들렸다. 박자를 맞춰 보려 해도 도저히 의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서로를 어루만지는 다정한 손길도, 부드럽게 주고받는 따뜻한 입맞춤도 없었다. 성기가 드나들며 내벽을 들쑤시는 원초적인 추삽질이 행위의 전부였다.

마치 짐승의 교미 같았다. 자신의 밑에서 흔들리는 서운을 내려다보며 허릿짓을 이어 가는 의진의 얼굴이 그랬고, 서운이 정면으로 마주한 의진의 러트가 그랬다. 이렇게까지 누군가에게 원해진 적이 있었던가. 막연한 두려움이 순수한 쾌감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얇은 막 하나 없이 알파의 페로몬에 절여진 내벽은 어디를 어떻게 찔러도 쾌감만을 유도해 냈다. 러트를 향한 막연한 두려움도, 아랫배가 터질 것 같은 거대한 압박감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의진을 잠식한 열기가 서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상해. 이런 건 이상하다. 단계를 뛰어넘은 비정상적인 쾌감은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기묘한 이질감을 안겨 주었다. 방금 전까지 서운을 겁먹게 만들었던 아래의 통증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쾌감을 제외한 온몸의 감각이 마비라도 된 것 같았다. 의진의 성기가 제 안을 빠져나가는 찰나조차 견디기가 힘들었다. 대체 왜? 러트가 온 건 의진일 텐데 이제는 서운에게 발정이 온 것처럼 보였다.

두근쿵두근두근쿵쿵두근쿵두근쿵두근쿵쿵쿵두근쿵두근두근두근쿵쿵쿵쿵쿵쿵두근두근쿵쿵쿵쿵쿵두근쿵두근두근쿵쿵쿵쿵쿵쿵쿵쿵쿵쿵두근…. 이제는 하다 하다 환청까지 들렸다. 심장이 두 개라도 되는 것처럼 소리가 겹쳐 들렸다.

“아… 어, 으! 아, 아…!”

쾌감도 배가되었다. 서운의 입에서 짐승 같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의진의 페로몬이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서운을 덮쳐 왔다. 서운의 얼굴을 쓰다듬고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말려 올라간 니트 아래로 훤히 드러난 젖꼭지를 빨아 댄다. 엉덩이가 들린 채로 허리가 반쯤 접혀 있는 서운이 안쓰럽지도 않은지 서운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단단히 허리를 잡아 누르며 무자비하게 성기를 내리꽂는다. 의진의 손은 두 개뿐이니 두 가지 행위가 동시에 일어날 수가 없는데도 어느 게 현실이고 어느 게 상상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쾌감이 가시지 않는 걸 보니 의진은 후자를 택한 모양이지만 어째서인지 서운은 의진의 욕망에 낱낱이 공명하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의진이 어떤 마음을 하고 있는지, 의진이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싶은지가 피부로 느껴졌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 한 번도 만져지지 않은 서운의 성기가 저 혼자 울컥울컥 쿠퍼액을 토해 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단숨에 사정감이 치솟았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았다. 이성을 잃은 서운이 스스로 허리를 흔들었다.

“아, 응! 좋, 아! 너무, 아!”

“저도, 저도 좋습니다. 아, 서운 씨. 아….”

반은 자의로, 반은 타의로 서운의 사타구니에서 끊임없이 애액이 흘러나왔다. 의진의 성기가 빠듯하게 들어차 있는데도 그 틈새를 비집고 애액이 물처럼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삽입이 한층 수월해지자 의진이 성기를 뿌리까지 빼냈다가 단숨에 박아 넣었다. 이 이상 들어갈 곳이 없는데도 어떻게든 서운에게 자신을 새겨 넣으려는 것 같았다. 그 절박한 몸짓에 두 사람 모두에게서 천박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지, 지금 좋아. 아! 그렇, 게! 더, 더, 더… 아!”

“이렇, 게 말입니까?”

철퍽! 의진이 소파에서 반쯤 일어선 채로 서운의 다리 사이에 성기를 쑤셔 박았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서운의 아랫배로 애액이 다 튈 정도였다. 원래대로라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렸을 테지만 양다리가 의진의 어깨에 걸쳐져 있어서 애액이 도로 서운의 아랫배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 외설적인 광경에 의진의 허릿짓이 자꾸만 거칠어졌다. 철썩, 철썩!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으, 응! 아래, 로! 밑에서, 밑으로…!”

“구체적으로, 하, 말씀해 주시면….”

“모, 모르겠, 아! 앗! 지금, 도 좋아. 아!”

“…아….”

“어, 그, 그거! 으, 응…!”

“아, 서운 씨….”

“응, 응…!”

“다, 좋다고 하시면….”

“좋, 아. 네가 제일! 응…! 좋아.”

“하… 아…!”

“의진, 아… 의진아아….”

서운이 아이처럼 의진에게 매달렸다. 자신을 붙잡고 개처럼 허리를 박아 대는 의진의 손등을 긁어 대며 몇 번이고 헛손질을 했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절대로 의진에게 닿을 수가 없는데도 지치지도 않고 그랬다.

“아, 아, 아…!”

“하, 윽…!”

“하아, 아….”

답지 않게 매달린다 싶더니 서운이 별안간 정액을 뿜어 댔다. 누구 하나 만져 주지 않았는데도 저 혼자 사정을 맞이한 서운의 성기가 경련하듯 떨고 있었다. 더는 한계였다. 의진이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성기를 박아 넣었다. 아! 사정의 여운에 잠길 새도 없이 서운의 성기가 금세 모양을 갖춰 갔다.

그런 서운을 내려다보는 의진의 눈매가 깊어졌다. 페로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다 이런 마음을 안고 사는 걸까.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무너진 서운을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을 더 망가뜨리고 싶어진다. 난폭한 마음에 쫓기는 의진의 허릿짓이 다급해졌다.

“서운 씨, 서운 씨, 서운 씨….”

“으, 응. 나, 여기 있, 아!”

“제가, 어떻게 해야….”

“으응…! 아, 지니, 야….”

“어떻게, 하면… 하….”

“어, 어…? 의, 의진, 아! 이, 거, 뭐야! 아, 윽! 아, 아파! 아프, 아!”

쾌감에 잠겨 한껏 신음하던 서운이 단번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야말로 끔찍한, 끔찍한 통증이었다. 이런 아픔은 어디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노팅이다. 크루즈에서의 경험이 본능에 가까운 확신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아래에서부터 무언가 차오르는 느낌에 서운이 짧게 몸서리쳤다. 노팅이, 원래 이런 거였나…? 사람의 신체가 아닌 딱딱한 쇳덩이에 아래가 꿰뚫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성기가 드나들던 입구가 완전히 틀어막히고 서운의 아랫배가 기괴하게 부풀었다.

“하, 아….”

크루즈에서의 노팅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의진에게 완전히 러트가 찾아왔다는 점이다. 만족스러운 신음과 함께 의진의 정액이 홍수처럼 내벽에 쏟아졌다. 이러다 입 밖으로 의진의 정액을 토해 낼 것 같았다. 잊은 줄 알았던 공포가 다시금 서운을 덮쳐 왔다.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다.

“아, 안, 돼. 무서워. 아파, 무서워, 안 돼, 안 돼, 안 돼….”

서운은 의진에게 아래를 꿰뚫린 채 미약하게 신음했다. 단단하게 고정된 아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그 어떤 반항도 무의미했다. 기껏해야 애처럼 칭얼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만, 그만할래. 응? 이거 빼. 의진아, 이거 빼. 빼 줘어….”

의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서운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운에게는 느껴졌다. 이 순간 겁에 질린 서운을 내려다보며 의진이 느끼는 만족감과 충만감은 서운이 느끼는 공포에 비할 데가 못 되었다.

“왜, 왜 그래….”

“…….”

“나 이거, 싫은, 데….”

“…….”

“의진아….”

그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자신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의진이 낯설었다. 서운의 손짓 하나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의진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의진, 의진아아….”

창피하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겁에 질린 서운이 기어코 눈물을 터트렸다. 처음 겪는 완전한 노팅은 여전히 두렵기만 했고, 서운의 고통보다 자신의 쾌감이 우선인 의진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무서웠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의진의 성기가 계속해서 서운의 안쪽 깊은 곳을 두드리고 있었다. 다른 이는 물론이고 서운 자신의 손길조차 닿아 본 적 없는 은밀한 부위였다. 교과서적인 지식으로 접해 오던 미지의 세계가 당장이라도 서운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이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잡아먹힐 것 같았다.

사실은 다 꿈이 아닐까. 서운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울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감촉이 어색해 일순 고통이 희석될 정도였다.

“…울지 마십시오.”

마침내 의진이 입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다정하게 서운의 안위를 살피고 서투른 손길이 조심스럽게 서운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서운이 알던 의진이 돌아왔다. 의진이 허리를 숙이며 서운의 눈물을 닦아 냈다.

“저 때문입니까?”

“안, 돼! 움직이지 마! 그대로, 가만히….”

“죄송합니다….”

“그대로, 있어….”

“죄송, 죄송합니다….”

이제야 좀 이성이 돌아온 걸까. 흉흉하게 날뛰던 의진의 페로몬이 금세 꼬리를 내렸다. 서운은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몸부림치면서도 의진의 감정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의진의 감정이 자꾸만 별처럼 쏟아져 내린다. 서운을 향한 미안함과 초조함, 걱정과 불안 따위가 본능적인 만족감과 충만감과 한데 모여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좋아?”

“무엇이, 말입니까?”

“이거….”

“노팅… 말씀이십니까.”

“응. 좋아?”

한층 가까워진 의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서운이 물었다. 서운을 바라보는 의진의 눈은 평소와 다르지 않아서, 뭐든 다 믿고 싶어져서 노팅의 통증이 조금 가시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겠어. 나한테 미안해 죽겠는데도 당장 저렇게 좋다는데, 그럼 나도 모른 척해 주고 싶어지잖아. 서운의 마음이 약해진 걸 알았는지 의진이 즉각 대답을 내놓았다.

“네, 좋습니다.”

“…얼마나?”

“평생 이러고 싶습니다.”

“…….”

“이 좋은 걸 왜 진작 안 했나 싶을 정도로….”

“아… 움직, 이면….”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노팅하는 사람이, 응… 어디 있….”

“처음부터, 이랬으면….”

의진이 낮게 신음하며 기꺼이 서운에게 몸을 겹쳐 왔다. 두 개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자 결합부가 한층 더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하, 서운 씨….”

“으, 응…. 아…!”

이제는 서운이 숨만 쉬어도 안팎에서 의진이 느껴졌다. 아, 따뜻했다. 서운은 아픈 것도 잊고서 있는 힘껏 의진을 끌어안았다.

“서운 씨한테 제 페로몬이 느껴집니다….”

의진이 냄새를 맡듯 서운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래는 여전히 고통스러웠지만 위아래로 전해지는 의진의 체온에 안심이 된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서운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원래도, 났어….”

“아니요. 아닙니다. 지금은 서운 씨가 숨만 쉬어도 제 페로몬이 느껴집니다.”

“어제도 했으니까….”

“그것보다 훨씬 더….”

“으, 응….”

“아, 서운 씨….”

의진이 아이처럼 서운에게 마구 입을 맞췄다. 서운의 목덜미에도, 쇄골에도, 어깨에도, 귓불에도, 가슴에도, 눈에 보이는 곳이라면 전부 다 입을 맞출 기세였다.

“서운 씨가 우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의진은 서운의 뺨에만 입을 맞춰 왔다.

“…나 원래 잘 안 울어.”

“다행입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군요.”

이제는 눈물 자국도 완전히 말라 버렸을 텐데 의진의 입술이 계속해서 서운의 뺨 언저리를 맴돌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다시 웃어 주실 겁니까?”

“그건 그냥 놀라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제게 다 요구하시면 됩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현금 및 현물을 포함 금전 거래가 가능한 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뭐든지…?”

“그렇습니다. 뭐든 좋으니 일단 말씀만 하십시오. 단, 이혼은 안 됩니다.”

갑자기 이혼이라니. 놀랍게도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었다. 의진은 이전에도 서운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전적이 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기분 탓일까. 이혼을 얘기하던 찰나 아랫배가 꿀렁이며 안에서 정액이 요동을 쳤다. 이제야 조금 아래의 사정에 익숙해진 서운이었다. 생경한 감각이 다시금 내벽을 자극하자 서운이 반사적으로 의진을 꽉 끌어안았다.

“많이 힘드십니까?”

“으, 응….”

“안 되겠군요. 서운 씨가 제 위로 올라오십시오.”

“시, 싫어.”

“괜찮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안 돼. 못 움직여. 아프단 말이야….”

“제가 서운 씨를 아프게 할 리가 없잖습니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의진이 힘으로 서운을 들어 올렸다. 왈칵, 안에서 정액이 흘러넘치는 느낌이 났지만 다행히 밖으로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노팅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의진이 서운을 품에 안은 채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의진이 제 위에 올라타 있는 서운을 살짝 올려다보는 자세였다. 두 사람의 눈높이가 비로소 비슷해졌다.

“지금도 힘드십니까?”

“응….”

“지금도 빼고 싶으십니까?”

“…응.”

“노팅이 싫으신 겁니까?”

“싫은 건, 아닌데….”

“그럼 좋으십니까?”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아픈 건 싫다. 다시 생각해도 싫지만, 정말 싫지만 이것만은 진심이었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고통을 피해 서운이 의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과연, 의진의 말처럼 의진이 숨을 쉴 때마다 서운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피부에 페로몬을 묻히는 페로몬 샤워와는 전혀 달랐다. 피부 아래 좀 더 깊은 곳에서부터 서운의 페로몬이 배어 나왔다. 노팅이 이루어진 순간 의진이 느꼈을 만족감과 충만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운 씨는 어떻게….”

“응…?”

“이런…. 하….”

의진이 와락 서운에게 안겨 들었다. 어떻게 봐도 서운이 의진에게 파묻혀 있는 모양새였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서운의 등을 쓰다듬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며 살 곳곳을 깨물던 의진이 마침내 서운의 아랫배를 더듬었다.

“아직은 서운 씨께서 준비가 되지 않으셨지만….”

“아!”

안쪽의 사정을 짐작하듯 의진이 신중하게 서운의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어느 지점에서는 의도적으로 서운의 아랫배를 꾸욱, 짓누르기도 했다.

“아이는 서운 씨를 닮으면 좋겠습니다.”

“누르지, 누르지 마! 그, 그거 이상해….”

“저는, 언제라도….”

“이상하다니, 아! 움직이면!”

“하…!”

“안! 아, 안 돼! 아, 아!”

의진이 서운의 어깨를 단단히 잡아 누르며 아래에서부터 성기를 쳐올렸다. 정액으로 가득 찬 내벽이 성기에 비벼지자 서운의 배 속이 출렁거렸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끌어안는 서운을 마주 안으며 의진이 제멋대로 자신의 성기를 박아 올렸다. 서운의 바람대로였다. 의진이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주일의 시간.

이제 겨우 휴가 첫째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고요하다.

희미한 숨소리가 정적을 대신했다. 집 안에 사람을 들이지 않은 지도 벌써 며칠째였다. 페로몬 샤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농도 짙은 페로몬 결착이 이루어진 직후이기도 했다. 아,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던가. 의진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색, 새액, 새액…. 색….

엉망으로 흐트러진 침대 위,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무언가 작게 숨을 쉬고 있다. 새액, 새액, 새액…. 얼마나 깊게 잠이 들었는지 의진이 이불째로 잠든 이를 감싸 안는데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바짝 귀를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졸음이 몰려오는 노곤한 숨소리였다. 규칙적이고 따뜻한 숨소리에서는 제 주인과 어울리지 않는 시원한 박하 향이 묻어 나왔다. 서운이 숨을 쉴 때마다 의진의 페로몬을 뱉어 내는 수준이었다. 서운의 페로몬이 본래 무슨 향이었는지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런 거였다, 노팅이라는 건. 의진은 만족스럽게 서운을 끌어안았다. 서운에게서 자신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익숙한 박하 향 사이로 달콤한 냄새가 느껴진다. 다른 이에게는 의진의 페로몬만 느껴질 테지만 의진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서운의 냄새였다. 자신의 배우자이자 오메가인 서운의 페로몬, 달콤한 향기가 이성을 마비시킨다. 의진은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서운에게 발정했다. 서운을, 이 사람을, 이 오메가를 가지고 싶다.

언제부터인지는 의진도 모른다. 서운을 알게 된 뒤 의진은 끊임없이 불확실성과 싸워 왔다. 그동안 의진이 믿고 따르던 질서도, 체계도 더는 통하지 않는다. 서운의 앞에서는 모든 게 무력화됐다.

당신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나에게는 이변이었다. 감정은 어렵고 욕구에는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를 원하는 마음에는 형체도 없고 정답도 없어서 의진은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을 잃고 헤매야 했다. 제가 가진 감정과 욕구가 낯설어 스스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길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서운뿐으로, 의진은 길을 잃을 때마다 필사적으로 서운을 찾았다. 서운이 곧 새로운 세계이자 질서고 체계다. 다른 방법은. 다른 사람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서운이 아니면, 서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안 돼. 안 된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돼. 허무에 가깝던 의진의 세상이 견고해진다. 이 사람을 부수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깨달음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감정의 조각들이 하나둘 의진의 빈자리를 메꿔 간다. 서운의 몸에 난 검붉은 멍 자국은 의진의 최선이자 노력이었다.

“하고 싶은 만큼 다 해도 돼.”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되니까….”

그런 의진의 노력을 부족하다 말하지 않는다. 의진의 미숙함을 탓하지도, 나무라지도 않는다. 의진을 올려다보는 서운은 언제나 웃는 얼굴이다. 허리에 붉은 손자국을 달고도 그렇게 내가 좋냐며 장난스레 웃어넘길 뿐이다.

서운은 아직도 의진의 품에 갇혀 있다. 의진을 피해 숨어 들어간 이불 속에서 새액, 새액 꿈처럼 잠들어 있다. 이불 속에 파묻혀 있는 서운을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의진은 서운을 생각한다. 자신의 욕구를 허락해 준 서운을, 이 모든 걸 알려 준 서운을 생각한다. 따뜻하고 다정한, 제게는 과분한 사람. 서운의 품은 언제나 따뜻해서 의진은 이대로 자신이 녹아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아마 온몸이 녹아내리는 순간조차 달콤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차라리 녹아 버려야지. 의진이 망설임 없이 이불을 걷어 올렸다. 멍 자국과 손자국, 붉고 푸른 울혈로 뒤덮인 서운이 온몸을 웅크린 채 기절하듯 잠들어 있다. 러트를 핑계로 제대로 재우지도 않았다. 먹인 건 최소한의 물과 약간의 음식뿐이다. 사람이 이렇게 될 때까지 몰아붙여 놓고 또다시 서운을 만지고 싶어 하다니, 닿고 싶어 하다니.

이런 게 정상인가. 의진은 고민했다. 여전히 감정은 어렵고 욕구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럼에도 기꺼이 이 선을 넘을 수 있는 건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운을 만지고 싶다. 닿고 싶고, 가지고 싶다. 어떻게든 이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

서운의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 안이 따뜻했다. 여기가 바로 의진의 세상이었다. 앞으로 의진이 살아갈 세상이었다.

의진이 스스로 갇힌 굴레였다.

+비하인드 스토리

“서운 씨!”

벌컥, 안방 문이 열렸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등장에 침대에 누워 있던 서운이 황급히 태블릿 PC를 내려놓았다. 뭘 하고 있었는지 무드등 조명 아래 보이는 서운의 얼굴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혹시 인터폰이 고장 난 건….”

“이, 일찍 왔네? 벌써 퇴근했어요?”

“…….”

“…왜. 뭐.”

쌍방각인의 효과는 대단했다. 무표정과 다를 바 없는 미묘한 표정 변화를 살필 필요도 없이 불만스럽게 일렁이는 의진의 페로몬이 직격으로 전해진다. 서운이 당황할 새도 없이 의진이 대놓고 불만을 토로했다.

“벌써라니요. 정규 퇴근 시간에 맞춰 온 것뿐입니다.”

“…오늘은 차가 안 밀렸나 봐?”

“아니요? 어제도 이 시간에 집에 왔습니다. 그 전날은 8분 일찍 도착했군요. 더는 주말 출근을 하고 있지 않으니 평일 기준 지난주 평균 귀가 시간은 약 7시 10….”

“알았어. 거기까지. 미안, 내가 말실수했어요.”

“…….”

“뭐 좀 하느라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 몰랐어. 오늘도 일 잘하고 왔어?”

대쪽 같은 인간 앞에서 똑같이 뻣뻣하게 굴어 봤자 창과 창의 대결밖에 안 된다. 서운이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시인하자 의진도 더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네. 잘하고 왔습니다.”

“또 일할 거 들고 온 건 아니….”

“…….”

“…뭐 해요?”

정정한다. 할 말만 없을 뿐 행동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번에는 의진이 긴밀하게 서운을 살폈다. 쌍방 각인만 아니었어도 꼼짝없이 속아 넘어갔을 텐데 서운의 당황한 페로몬을 맡고는 당당한 탐지견처럼 굴고 있다.

의진의 소프트웨어가 업데이트됐다. 쌍방 각인 후 서운은 의진을 다루기가 까다로워졌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습관처럼 이어져 온 서운의 대인관계 능력이 쌍방 각인을 기점으로 의진 한정 무력화되었다. 이제는 서운이 적당히 표정을 꾸며 내도 의진에게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통하지 않다 뿐일까, 대충 좀 넘어가려고 해도 서운의 페로몬이 나서서 미주알고주알 본심을 떠들어 대는 수준이라 적당히 감정을 흘려보내기가 어려워졌다.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의진이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서운의 본심을 의진이 대충 넘어갈 리가 없다. 물론 의진에게까지 적당히 굴 생각은 없었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의진의 업그레이드로 서운도 덩달아 매뉴얼 업그레이드가 필요해진 참이었다.

“그게 뭡니까?”

“뭐, 뭐가?”

기어코 찾아내는구나. 핑곗거리를 떠올릴 새도 없이 의진의 시선이 문제의 물건에 고정되어 있다. 서운이 내려놓은 태블릿 PC 밑으로 얇은 천 하나가 빠져나와 있었다.

“침대에 뭔가 있군요.”

“…내가 있지?”

“아니요, 훨씬 작은 물건입니다. 마치 넥타이처럼 생긴….”

“…….”

“넥타이입니까?”

“…어.”

숨길 거면 확실하게 숨기되 어차피 들킬 거짓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서운의 지론이었다. 서운이 체념한 얼굴로 의진의 넥타이를 꺼내 들었다. 구김 하나 없는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재질이 무색하게 엉망으로 구겨져 있다. 드레스룸에 걸려 있던 의진의 넥타이가 서운과 함께 침대에 누워 있는 것도 퍽 수상했다.

이제 더는 숨길 것도 없다. 마침내 모든 패를 내보인 서운이 체념조로 그간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어려워….”

“무엇이 말입니까?”

“영상에서는 쉽게 하던데 내가 하니까 잘 안 돼.”

“넥타이 매는 법이라면 제가….”

“여기.”

기다렸다는 듯 서운이 의진에게 꼬깃꼬깃한 넥타이를 위임했다. 언뜻 보이는 태블릿 PC 화면에는 영상 하나가 일시 정지되어 있었는데, 멈춰 있는 화면부터가 제법 거시기했다. 다행히 의진은 아직 보지 못한 듯했다.

“준비됐어?”

“네, 준비됐습니다.”

“시작한다?”

“네.”

쓸데없이 비장한 두 사람이었다. 의진은 셔츠 소매까지 걷어붙였다. 서운은 부산스럽게 침대 위를 돌아다니며 의진이 보기 편하도록 태블릿 PC의 각도를 조절했다. 서류 가방만 내려놓은 의진이 정장 차림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자 비로소 문제의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파트너를 안전하게 구속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플레이의 가장 큰 즐거움이죠. 자, 보이시죠? 매듭을 너무 세게 묶으면 파트너의 몸에 상처가 날 수 있으니 최대한….

“…서운 씨?”

“싫으면 지금 말해요.”

“이, 이게 무슨….”

“강요하는 건 절대 아니야. 진짜야.”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거절도 하지 않으면 좋겠어. 나 믿지? 나 믿잖아. 괜찮아, 괜찮아. 나만 믿어! 해 보기도 전에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딱 한 번만 해 보자. 결정은 그 후에 해도 되잖아.

라고 서운의 페로몬이 말했다. 진정한 언행 불일치였다. 어렵지 않게 서운의 본심을 전해 들은 의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서운 씨….”

“으응….”

주사위는 던져졌다! 새로운 세계를 눈앞에 둔 일생일대의 순간, 서운은 긴장했다.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보다 더 긴장했다. 그때랑은 비교도 안 된다.

“그동안 잠자리가 불만족스러우셨던 겁니까….”

“뭐?”

“제가, 부족해서 이러시는 거면… 소, 솔직하게 얘기해 주셔도….”

“잠깐, 잠깐만!”

“선천적인 문제만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든…!”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울망울망, 의진에게서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서글픈 페로몬이 새어 나왔다. 아니, 대체 왜? 황당함은 둘째 치고 몹쓸 짓을 저지른 극악무도한 인간이 된 것만 같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요. 그런 거 아니야. 그랬으면 아예 하지를 않았겠지.”

오해도 오해 나름이지, 서운이 침착하게 해명에 나섰다. 당장은 상처로 얼룩진 순수한 영혼을 보듬어 줘야 했다. 서운은 스스로가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내가 억지로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무 단번에 대답하는 거 아니니.”

아니라니 다행이긴 한데… 이건 또 이거대로 민망하다. 서운이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자 의진의 페로몬이 크게 요동쳤다.

“설마 아니셨습니까…?”

“아니? 완전 좋아한 거 맞는데? 의진 씨랑 하면서 한 번도 연기한 적 없어요. 진짜야.”

“…….”

“내가 널 어떻게 싫어해, 응?”

아, 됐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의진의 페로몬이 금세 기운을 되찾았다. 얼굴만 보면 여전히 무표정이 따로 없는데 페로몬은 신이 나서 서운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팔랑팔랑, 페로몬에 소리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런 소리가 났을 테다.

“그럼, 왜…?”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나. 의진이 마지막 의문을 던져 왔다. 이건 준비 좀 했지, 내가. 서운이 술술 입을 털었다.

“스스로 쾌감을 통제할 수 없다니 너무 매력적이지 않아요?”

“…….”

“절제된 쾌락! 억압된 본능!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아슬아슬한 쾌감!”

“…….”

“…은 핑계고 러트 때 보니까 의진 씨가 귀엽길래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요.”

쌍방 각인의 폐해란 이런 걸까. 도대체가 대충 넘어갈 수가 없다. 서운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의진의 페로몬이 크게 동요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많이 놀란 것 같았다.

놀라기는. 네가 못 봐서 그렇지 얼마나 귀여웠다고. 서운의 머릿속에서 그날의 의진이 자동 재생 되었다.

“싸고 싶어?”

“네, 네….”

“싸게 해 줄까?”

“네….”

“음….”

“…서운 씨….”

러트가 와서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서운에게 허락을 구하던 의진의 모습은 서운에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서운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만든 것이다. 서운의 쓰레기 같은 속내를 알 리 없는 의진은 전혀 다른 데 초점을 두고 있었다. 서운이 생각지도 못한 포인트였다.

“귀엽다니요?”

“어?”

“제가 귀엽습니까?”

“어? 어, 귀여운데….”

“…제가요?”

“응. 몰랐어요?”

“…알아야 했던 겁니까?”

“그런 건 아닌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아, 당황했다. 의진이 오랜만에 과부하에 걸렸다. 그럼 그렇지. 제아무리 업그레이드를 해 봤자 의진은 의진이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서운이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싫으면 안 해도 돼요.”

“…아닙니다.”

의진이 비장하게 넥타이를 주워 들었다. 손가락은 당장이라도 재생 버튼을 누를 기세였다.

“그런 이유라면…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거절은 한 번 했으면 됐다. 서운이 은근슬쩍 넥타이의 매듭을 잡아 주었다. 의진의 손목 굵기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서운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의진이 돌연 저와 서운의 손목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가 묶이는 겁니까?”

의진이 물었다. 가만 보면 은근히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이번 행위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대목이기도 했다. 서운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제가 묶이면… 손을 못 쓰는데….”

“그렇겠지? 그러려고 묶는 거니까…?”

“……!”

“괜찮아, 괜찮아. 위험할 거 하나도 없으니까 나만 믿어요. 의진 씨가 싫으면 언제든지 멈출게.”

“…네, 알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비로소 의진에게서 완전한 허락이 떨어졌다.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작업에 착수했다.

“이거 보고 따라 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습니다.”

“만들어서 나한테 줄래요? 매듭 폭은 의진 씨 손목 기준으로 잡고.”

“네, 알겠습니다.”

상황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스스로가 쓰레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서운은 미약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착실하게 의진의 준비를 도왔다. 서운이 제안한 건 맞지만 SM 플레이가 하고 싶은 건 아니었기에 다른 거 없이 의진의 양 손목만 묶기로 했다.

서운이 보고 싶은 건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는 의진의 애절한 모습이다. 넥타이 매듭은 이를 위한 도구일 뿐, 의진의 행동에 제약이 생기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옷은 어떻게 할까요?”

“의진 씨만 괜찮으면….”

“입고 있을까요?”

“…응.”

미안해, 이런 나라서. 이건 정장이 너무 잘 어울리는 네 탓인 걸로 하자. 서운이 속으로만 말했다. 이마저도 소리 내어 말했다면 쓰레기 신세를 면치 못할 뻔했다.

“알겠습니다.”

“하나도 벗지 말아요.”

“네, 그러겠습니다.”

“손목은 안 불편해?”

“네, 괜찮습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의진을 제 취향대로 눕힌 것까진 좋았는데 생각보다 손목의 매듭이 헐렁해 보인다. 의진이 힘을 주면 당장이라도 풀어질 것만 같다.

더 세게 묶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이 서운의 몸은 습관대로 의진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의진은 머리 위로 양팔을 교차한 채 넥타이로 손목이 묶인 모습으로 서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됐네, 됐어. 시각적인 효과가 주는 일차원적인 자극에 서운은 금세 매듭의 헐렁함을 잊어버렸다. 사실 여기까지 따라와 준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서운은 조금이라도 덜 쓰레기가 되는 법을 택했다.

쪽, 쓰레기가 의진에게 입을 맞췄다. 내심 긴장했는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의진의 몸에서 조금씩 힘이 빠졌다. 쪽, 쪽, 쪽! 아낌없이 입맞춤을 퍼부어 대자 의진이 저도 모르게 서운에게 따라붙었다.

“안 돼….”

“혀도 넣으면 안 됩니까?”

“아니. 내가 넣을 거야.”

아…. 의진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뒷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입을 처음 맞춘 사람처럼 다급하게 혀를 섞으며 익숙하게 서로의 온기를 더듬었다. 의진은 손목이 묶여 있어서 못 하고, 서운만 했다. 서운만 혼자서 실컷 의진의 몸을 더듬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의진은 꼼짝없이 서운이 주는 자극에만 의존해야 했다. 반강제로 끌어 올려진 성감도 성감이지만 완전히 주도권을 갖게 된 서운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였다. 서운은 황홀하게 의진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평소라면 의진의 속도에 휩쓸려 본격적인 행위를 시작하고도 남았을 텐데, 의진의 손이 묶이자 서운은 마음껏 의진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정장을 벗기지는 않고 셔츠 단추 몇 개만 풀어 놓는다거나 넥타이를 매고 있되 매듭만 헐렁하게 만드는 등 자신의 취향대로 열심히 의진을 조리했다.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는 딱딱한 벨트는 침대 아래로 던져 버렸다.

“벌써 젖으신 겁니까…?”

어느새 의진과 성기를 맞잡고 스스로 허리를 흔들던 서운이었다. 놀란 서운이 엉덩이를 뒤로 물리려 들자 의진이 허벅지를 세워 서운의 행동을 저지했다. 의진의 허벅지에 닿은 서운의 엉덩이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제 바지가 다 축축하군요.”

“나 아니야….”

“아니요. 서운 씨입니다.”

“아니라니까…. 의진 씨 거야….”

“아닙, 니다. 서운 씨입니다. 단 냄새가 진동을 하지 않습니까….”

“너라니, 아….”

“하….”

그때부터였을까. 의진이 작정하고 밑에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강하게 서운을 쳐올리는 힘에 단단하게 곧추선 성기가 빠듯하게 내벽을 드나드는 절대적인 감각이 떠올랐다. 억지로 내벽을 잡아 벌리며 쑤셔 박듯이 들어오는 성기의 감촉이 얼마나 짜릿한지도. 아, 아. 서운이 위에서 헐떡이며 스스로 바지를 벗었다. 서운이 벗어 던진 바지와 속옷이 의진의 벨트 옆으로 맥없이 떨어졌다.

잠깐, 이게 아니잖아? 하마터면 이대로 할 뻔했다.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서운이 귀두까지 들어온 의진의 성기를 빼냈다.

“아, 서운 씨….”

이거지. 의진이 애타게 서운을 부르며 온몸을 들썩거렸다. 누워 있는 의진의 성기가 완전히 기립해 있었다. 의진의 쿠퍼액인지 서운의 애액인지 모를 액체가 귀두 끝에서 반짝거렸다. 하아…. 서운이 더운 숨을 토해 내며 엉덩이 사이에 대고 의진의 성기를 문질렀다. 그러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새어 나온 애액이 의진의 성기를 진득하게 자극했다. 하, 윽…. 의진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서운이 뻔한 질문을 했다.

“하고 싶어요…?”

“네… 당장, 당장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넣고 싶습니다. 서운 씨 안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

“서운 씨….”

좀처럼 듣기 힘든 애처로운 목소리에 서운의 구멍이 저절로 움칠거렸다. 이를 느낀 건 서운만이 아닌지 의진의 들썩거림이 심해졌다. 여기서 마음 약해지면 안 돼. 의진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서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서운은 당장이라도 의진을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의진의 가슴팍으로 기어 올라갔다.

“빨아 볼래요?”

“네, 빨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내가 뭘 빨라고 할 줄 알고 뭐든지래….”

“뭐든 상관없습니다. 뭐든 빨겠습니다. 제발, 서운 씨….”

“의진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책망 어린 목소리와 달리 의진의 입술 위로 서운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쪽, 쪼옥…. 입을 맞추는 서운의 입술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사람이 너무 쉬운 거 아니에요…?”

서운이 나무라듯 의진의 귓바퀴를 깨물었다. 하, 읏…! 그 별거 아닌 자극에 의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운의 밑에서 몸부림쳤다. 모든 자유를 빼앗긴 뒤로 서운이 주는 자극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의진이었다. 서운이 의도적으로 의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게 답싹 답싹 아무거나 빨겠다고 할 거야?”

“아, 아닙, 아니요.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허리를 일으킨 서운이 은근슬쩍 의진에게 가슴을 갖다 대자 기다렸다는 듯 의진이 달려들었다. 양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쪽쪽거리며 서운의 젖꼭지를 열심히도 빨아 댄다. 이 정도면 빨리는 서운도 아파야 정상일 텐데 양 손목이 묶인 채로 자신의 가슴에 매달려 있는 의진을 보고 있자니 고통이 쾌감으로 변질된다. 아, 아아…. 멈춰 있던 서운의 허리가 애처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좋으십니까…?”

“아, 입, 떼지 마… 계속….”

“…….”

“아, 읏….”

“셔츠가, 축축하군요….”

“으응….”

“서운 씨 안이 완전히… 젖었나 봅니다. 하, 지금 넣으면 얼마나 부드러울지….”

의진이 탄식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제가 나서서 의진을 묶어 놓은 주제에 이런 소리를 듣는 데에는 면역이 없는 서운이 반사적으로 진저리를 쳤다.

“그, 그런 소리 좀….”

“좋은 건 다 서운 씨와 공유해야 하는데… 서운 씨께도 맛보게 해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울 뿐입니다.”

“하지…! 아…!”

“서운 씨, 서운 씨, 서운 씨….”

“아, 앗! 안, 돼! 안…!”

의진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있는 힘껏 허리를 쳐올렸다. 서운의 몸이 크게 들썩이며 의진 쪽으로 기울어지자, 의진이 허벅지로 서운을 압박해 왔다. 손목이 묶인 건 의진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운이 의진의 품에 갇혀 있는 자세가 되고 말았다. 뒤에는 의진의 허벅지가 단단히 후방을 지키고 있고, 앞에서는 손목이 묶인 의진의 팔이 올가미처럼 서운을 옭아매고 있었다.

의진이 불편한 팔로 서운을 제 위에 완전히 엎드리게 했다. 반강제로 의진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게 된 서운이 불편함에 자세를 고쳐 잡으려던 그때였다.

“어, 어….”

의진이 다시 한번 허리를 쳐올렸다. 아까처럼 무작정 허리를 쳐올리는 게 아니라, 허벅지로 서운의 다리를 받치며 서운의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바짝 일어선 의진의 성기가 기어코 서운의 엉덩이를 헤집었다.

“아, 윽, 잠깐, 아! 아!”

“하….”

“어, 윽! 의진, 씨…!”

애액으로 흥건히 젖은 입구는 어렵지 않게 성기를 집어삼켰다. 꾸역꾸역 의진의 성기를 받아들이며 서운의 내벽이 억지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래에서는 제멋대로 내벽이 쑤셔지는데 서운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온몸이 의진에게 갇혀 있어 꼼짝을 하기가 힘들었다.

“의진, 의진 씨! 팔, 풀어 줘. 이거, 풀어 줘…!”

“하, 서운, 씨….”

의진이 양팔로 서운의 등을 잡아 눌렀다. 퍽! 아래에서 무작정 허리를 쳐올리는 통에 제 위에 엎드려 있는 서운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하기 위함이었다.

위아래가 모두 의진에게 결박당했다. 온몸이 짓눌린 채 아래가 꿰뚫리는 감각은 서운이 잘난 척 떠들어 대던 ‘절제된 쾌락’과 ‘억압된 본능’을 떠올리게 했다. 맞는 말이지만, 그냥 한 소리가 아니라 서운부터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던 건 맞지만 이건 아니다. 서운이 보고 싶었던 건 제 밑에서 애처롭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의진이지 의진에게 결박당한 자신이 아니다. 이런 게 아니었다고.

물론 서운의 항변은 오래가지 않았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서운의 항변은 신음 소리에 파묻혀 그대로 묵살되었다.

“손목, 풀어도 되니까… 이거 놓! 아!”

“너무, 좋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하, 너무….”

“아, 앗! 의진, 아!”

“깊게, 들어갑니다. 서운 씨 안이 다, 느껴집니다….”

“아, 아…!”

“서운 씨, 서운 씨… 하, 도망가지, 마십시오….”

“살, 살! 의진아, 조금만… 천천히… 아!”

“하….”

“그, 거 하지 마! 그만, 아! 이상, 해, 이상해…!”

“아, 서운 씨, 그렇게, 조이시면… 하… 아직, 싸고 싶지 않습니다. 서운 씨, 조금만 더. 서운 씨, 조금만….”

“시, 싫어. 그만 싸. 응? 제발, 싸. 제발 싸 줘어….”

“…….”

“아! 왜 또, 커진…! 아! 아!”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서운의 계획은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했다. 언제부턴가 서운이 의진에게 애원을 하고 있었지만 다음에는 꼭 의진이 제게 매달리게 하리라.

두 사람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러트와 쌍방 각인의 진정한 순기능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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