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1화 〉 531화 재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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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람의 본성을 알아보는데는 술만한 것이 없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여자도 술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이재우는 하루는 일을 마치고 귀가를 하다가 나연에게 말했다.
“오늘 일은 너무 힘이 들더군.”
“전무님, 고생하셨습니다.”
“저녁에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 잔 해야겠어. 그런데 참 재벌이라고 다 행복한건 아니군. 이럴때 마음 편하게 술잔을 같이 기울일 사람도 없고.”
이재우는 우수의 젖은 눈으로 서울의 밤거리를 보았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다들 내 돈만 보고 오니. 친구도 없고. 가족도 아버지 밖에 없고. 그냥 술을 마시는 것도 힘들다는 이야기지.”
나연은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이재우의 몸이 달아오르기를 기다렸다. 역시 이재우는 먼저 말했다.
“나연 씨. 나랑 오늘 술이나 한잔 하지. 일 이야기는 하지 말고. 그냥 아는 오빠 동생 사이처럼.”
나연은 재벌가 남자도 별 수 없구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올뻔 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참아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우는 처음에는 달콤해서 먹기 쉬운 아이스 와인을 꺼내었다. 포도를 수확철에 따지 않으면 겨울에 자연히 얼어서 당분이 농축된다. 그걸로 만든 와인인데 달아서 술술 먹다보면 어느 순간에 맛이 가는 그런 술이었다.
나연은 룸살롱 에이스로 술의 전문가였고 당연히 이런 술도 잘 알았다. 또한 룸살롱에서 단련되어 술을 적게 마시면서 많이 마시는 척도 잘했고 기본적으로 왠만한 남자보다 술을 잘먹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잠깐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를 대었다. 소련과 러시아 스파이들은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했고 술에 취하지 않기 위해서 개발한 약이 있었다. 이건 민간에도 풀리고 한국에도 일부 들어왔는데 술을 마셔야 하는 직업은 많이들 애용했다. 그녀는 그것을 먹고 물도 없이 삼켰다.
나연은 자연스럽게 천천히 취하는 연기를 이어나갔다. 이재우는 술기운에 은근슬쩍 나연의 몸을 터치했다. 어깨부터 시작해서 팔뚝을 슬슬 만졌다.
만약 이재우와 하룻밤을 해서 팔자를 펴보려고 하는 여자라면 단번에 옷을 먼저 벗어던질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연은 더 큰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원나잇이나 그저그런 애인 자리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자가 멀어질수록 남자가 달려든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나연은 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아. 전무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요오.”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는 알잖아? 응?”
이재우는 은근슬쩍 둘러서 말을 했다. 현 시대에서 자신과 원나잇을 하는 것은 조선 시대의 왕자의 성은을 받는 것과 동일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어지간한 여자는 그럴 계획이 있었다면 속마음을 보일 순간이었다.
하지만 나연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어지간한 여자가 아니었다. 호사카가 고르고 골랐다. 수많은 트레이닝을 시킨 여자였다. 그녀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해서 하다가 식탁에 엎어져서 잠에 들었다.
이재우는 그 모습도 사랑스럽게 보였다. 이재우는 나연을 들어서 자신의 침실에 눕혔다. 지금 당장 꽐라가 된 나연의 몸을 탐할수도 있있지만 이 여자와는 첫날밤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재우는 손님방으로 가서 잠을 잤다.
다음 날에 나연은 이재우의 침실에서 일어나서 화들짝 놀라는 연기를 했다. 이재우에게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어제 무슨 실수가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전무님!”
“아냐. 어제 일이 기억나지 않는건가?”
“네? 네. 어제 무슨.”
“하하. 별일 없었어. 나연 씨는 술에 취해도 참 얌전하더라고. 술버릇이 얌전한 사람이 술친구로는 좋지. 앞으로도 종종 같이 마시지.”
이재우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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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우는 3일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원래 비서가 휴가에서 돌아올때쯤이 되어서야 나연에게 그냥 자신의 밑에서 계속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전무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부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빠!”
“왜 전화를 하자마자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그렇게 다 가져가야겠어?!”
“무슨 소리야.”
“나연이. 내 비서야. 내가 필요해서 뽑은거고. 잠깐 실수해서 반성하라고 시간을 준거라고. 다시 내놔.”
“허참. 너는 아랫 사람 관리를 그렇게 하니? 무슨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어쨌든 내 비서니까. 다시 내놓으라고.”
“이미 배정까지 끝났어. 넌 그냥 새 사람 뽑아.”
이재우는 안그래도 요즘 이부희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데 이런 작은 일로 그녀를 자극할 수 있다는게 즐거웠다. 이부희가 나연을 돌려달라고 할수록 더욱 돌려주기 싫어졌다. 나연을 옆에 두고 싶은 마음 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음까지 생겨난 것이다.
“뭐야. 걔 어떻게 한번 먹어보려고 그러는거야? 어차피 오빠 여자는 많잖아.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너는 상스럽게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냐? 그런거 아냐. 그냥 일 잘하고 착실해서 옆에 두고 쓰려는거 뿐이야.”
“아, 진짜! ㅆ!!”
이재우는 이부희가 욕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작은 승리감을 느끼면서 옆에 있는 나연을 보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전무님.”
“응? 편하게 말해.”
“혹시 이부희 이사가 저에게 무슨 짓을 하면…”
“하하! 확실히 그 아이는 그럴만하지. 걱정하지마. 나는 내 사람은 확실히 챙기는 사람이니까. 나연 씨는 그냥 내 옆에서 일만 잘하면 되는거야. 알겠어?”
“네, 전무님.”
이재우는 옆에서 무서워하고 있는 나연이 더 귀여웠다. 보호본능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꼭 지켜주고 싶었다.
“나중에 누가 해코지를 하려고 하면 즉시 나에게 보고 하고. 나연 씨도 알잖아? 구성 그룹은 아버지 밑에 바로 내가 있는거. 내가 보호하면 무서워할게 아무것도 없어.”
“네, 전무님.”
그러자 나연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이재우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재우는 행복했다.
그리고 시간을 빠르게 지나갔다.
이재우는 점점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나연은 그냥 마음에 드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특별한 색기가 있는 여자였다. 하루라도 빨리 그녀와 떡을 치고 싶어서 안달이 나고 있었다. 몸에서 남성 호르몬이 솟구치고 자지는 일단 따먹고 그다음에 생각을 하자고 속삭이고 있었다.
결국 이주일만에 이재우는 나연과 술자리를 했다. 그 사이에 한번의 술자리가 더 있었고 이번에 세번째 술자리였다. 퇴근을 하면서 적당한 맛집에서 안주도 사오고 소주와 맥주도 사왔다. 가끔은 이런 소박한 술자리도 가질때가 있었다.
이재우는 나연과 술과 안주를 먹는게 마치 신혼처럼 느껴졌다. 저번에도 그녀는 술을 먹고 손님방에 가서 알아서 잠을 잤다. 귀여운 여자였다.
그리고 술기운이 적당히 오르고 진담반의 이야기를 꺼내기 딱 적당한 시점이었다. 이재우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에게 직접 고백을 해볼 생각이었다. 술기운의 힘을 받아도 쉽지 않았다. 말은 나올까말까 하면서 계속 목구멍에 걸렸다.
나연이 말아준 폭탄주를 원샷을 때리고 나서야 겨우 말이 나왔다.
“나연 씨.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네, 전무님.”
“지금 술 마실때는 전무님이 아니라. 그냥 아는 오빠라고 하면 안되나?”
나연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 오빠.”
이재우는 심장이 터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맨날 자신에게 알아서 다리를 벌리는 여자만 먹다가 이런 순간이 오니 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 나연아. 내가 말이야. 왠만해서는 같이 일하는 사람과는 사적인 감정을 안섞으려고 하거든?”
“네, 알아요.”
“하지만. 이상하게 너한테는 이상하게 마음이 간다.”
“네?”
나연은 깜짝 놀란 연기를 했다. 마치 이재우를 한번도 그런 대상으로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그냥 여동생 같다거나 그런게 아니야. 네가 여자로 보여.”
“어… 하지만 오빠는 이제 곧 결혼을 하시잖아요.”
사실이었다. 이재우는 1998년에 다른 재벌가 아가씨와 정략 결혼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너도 이제 재벌을 충분히 봤으니까 이쪽 세상 사람들은 어지간히 알 거 아니야. 사랑 없는 결혼이야. 그냥 가문과 가문의 연대일 뿐이라고. 나뿐만이 아니라 그쪽 여자도 동의를 했어. 그냥 내 정액으로 시험관 임신을 하자고. 섹스도 하기 싫다는거지.”
나연은 계속 놀라워했다. 그리고 이재우는 서툴지만 자신의 진심을 계속 표현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다. 돈을 다 떠나서. 사랑을 하고 싶고. 이 외로움을 벗어던지고 싶어. 내가 진심이 아니었다면 그냥 너에게 몇억을 던져주면서 애인이 되자고 했겠지. 하지만 나는 말이다.”
“네, 오빠.”
“너랑 사랑을 하고 싶어. 알겠니? 너라면 알거 같아. 너는 그런 아이니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하는거야.”
나연은 두려워했다. 순진한 여자인척 하면서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에 장난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재우는 가슴이 조여왔다. 차라리 그녀가 빠르게 거절을 했으면 했다. 그럼 지금 술을 진탕 마시고 첫 거절의 상처를 치료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연은 손을 뻗었다. 이재우의 손을 잡았다. 이재우는 세상에서 그녀처럼 따스한 손을 가진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실질적인 체온이 아니라 영혼의 따스함을 느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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