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차가운 시작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사는 빠듯한 서민에게는 먼 이야기겠지만, 노동의 대가가 단지 먹고사는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통장에 현금으로 1, 2억쯤 박아두고 부동산으로 집을 서너 채 정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그 한 몸쯤은 고상하게 이승에서 살다 황천의 문턱을 넘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기본적인 의식주가 보장된 사람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직위의 상승 혹은 부의 축적, 타인에게 받는 인정, 자아의 실현 등 그럴듯한 많은 동기가 있겠지만, 경영자라면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매출의 정체가 곧 위기의 시작이라는 말이 정설로 통하는 경영업계에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은 필요 불가결한 요소다. 회사의 오너들은 이익 추구를 위해 사업체를 성장시키며, 그것은 그들의 근로 동기 중 많은 것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배터리 매니지먼트 시스템 전문기업인 NnG의 하선우 사장은 그런 것들이 절박하지 않았다. 그가 일을 하는 이유는 단지 일이 재미있어서였다. 중학생 때는 용산에서 컴퓨터 조립 아르바이트를 했고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과 함께 취미생활로 IT 제품의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해 인터넷에 배포했으며 대학생 때는 산학협력 기관에서 일하는 선배들로부터 프로그램 개발 의뢰를 받아 용돈을 벌었다.
스물다섯에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대학원의 연구소에 남아 그럴듯한 자리를 꿰차는 대신, 하선우는 대학 선배이던 이석과 함께 회사를 차렸다. 그런 그에게 지금의 회사생활이란, 어렸을 때부터 해오던 기술개발의 연속된 과정 중 하나였다. 하 사장은 뼛속부터 공돌이의 피를 타고난 인물이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회사가 안정화에 들어선 이후에도 사업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은 이사가 맡고 그는 여전히 좁은 연구실에서 에너지 저장 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밖으로 끌려나오는 경우는 발주를 넣는 거래처의 직원이 방문할 때나, 기업 홍보를 위해 대규모 제품 전시회에 참가할 때뿐이었다.
단지 하 사장이 젊고 외모가 준수하여 타인에게 호감을 산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동업자이자 이사인 이석이 거부하는 그를 끌고 나오곤 했다.
“막상 하면 잘하면서 왜 그러냐.”
한 무리의 외국인 바이어가 지나간 뒤 팸플릿을 만지작거리는 하선우를 보며 이석이 말했다. 뒷머리를 긁적이다 구부정하게 서서 하선우는 팸플릿을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곁에 있던 김주안이 거들었다.
“되게 내성적이라니까요.”
쯧쯧 혀를 차며 이석은 그녀에게 말했다.
“내성적인 게 아니야. 하선우는.”
“그럼 뭔데요.”
“저 꼴리는 대로 살아서 사회성은 원래 이 모양이고, 사람 많은 곳이 그냥 귀찮고 싫은 거야.”
이사의 말에 김주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의외라니까. 생긴 건 되게 잘 놀게 생겼는데. 이렇게 차려입으면 진짜 잘 노는 기생오라비 같잖아요.”
“얌마. 김 부장. 아무리 동기라지만 네 오너야. 사장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이사님이야말로 부장한테 얌마라뇨. 아무리 이사님이라지만 부하직원에게 말투가 그게 뭡니까?”
뾰족해진 목소리로 되묻는 그녀를 향해 이사가 눈을 부릅떴다. IT 업계인 데다가 생산라인을 제외하고 직원이 많지 않은 중소기업이다 보니 직급의 체계는 나뉘어져 있어도 실제 업무환경까지 엄격하지는 않았다. 흔한 광경이었기에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의 다툼을 하선우는 한 귀로 흘렸다.
폐장을 한 시간 남짓 남긴 시간이었기에 대기업 부스 외에는 대부분이 한산했다. 이사에게선 날선 짜증이 느껴졌다. 전자 박람회에 참여한 지 벌써 사흘째가 되어가건만 해외 바이어와 연계된 수출상담은 목표치의 반에 겨우 도달했을 뿐이었다. 그중에서 업무제휴를 맺은 회사는 규모가 작은 대만의 소기업 단 한 곳에 불과했다. 홍콩의 박람회에 참여하는 예산으로 7천만 원 가까이 투자하는 것은 회사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는데, 별다른 성과 없이 국내로 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하선우는 영업부의 김 부장과 함께 제품소개 PPT와 카탈로그, 브로슈어 제작 등 온갖 골치 아픈 일에 매달려 지난 몇 달을 바쁘게 보냈었다.
국내 경쟁을 뚫고 어렵게 참여하게 됐지만 막상 홍콩의 전자 부품박람회에 와서 보니 하선우는 자신의 회사 부스가 가장 초라해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디스플레이라도 좀 화려하게 꾸몄으면 좋았으련만 회사 사정이 최근 좋지 않아 예산이 빠듯했다.
또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도 뒷머리가 쑤시듯 아프더니 오후부터 다시 컨디션이 나빠지고 있었다. 의무실이라도 다녀올까, 아니면 폐장한 뒤에 약국에 갈까. 영어가 짧은 두 사람만 남겨놓고 가도 될지를 고민하며 하선우는 데스크 밖으로 한 걸음 나와 주변 부스를 돌아보았다.
국내 전자업계에서 1, 2위를 다투는 엘텍과 안신 그룹이 눈에 띄는 디스플레이로 화려하게 부스를 꾸며놓고 있었다. 특히 하선우의 부스 맞은편에는 엘텍전자의 부스가 있었다. 규모가 NnG 부스보다 10배는 큰 듯했다.
테블릿PC와 스마트폰, 3D TV 등 화려하게 디스플레이된 부스에는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에 비하면 NnG는 배터리 시스템의 부품을 설계하는 기업이었기에 디스플레이가 단순했다. 넓고 화려한 국내의 대기업 부스와 좁은 NnG 부스를 비교하던 하선우는 쩝, 입맛을 다셨다.
“오늘 온다더니 폐장할 시간 거의 다 돼가는데 왜 안 오지?”
한가한 틈을 타 김 부장이 구경꾼처럼 팔짱을 낀 채 엘텍전자의 부스를 턱으로 가리켰다. 부장이 말하는 인물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를 잠시 고민하던 하선우는 곧 그 인물을 떠올렸다. 커피를 홀짝이며 이석이 끼어들었다.
“세미나 참관한다더라.”
“세미나는 30분 전에 끝났던데요? 온다고 말만 많더니 안 오는 건가?”
“오겠지. 제 회사가 바로 저기 있는데.”
며칠 전 한국기업이 모여 있는 홀을 술렁이게 하는 소문이 돌았다. 엘텍전자의 전무가 홍콩의 전자부품박람회에 참관한다는 얘기였다. 엘텍은 계열사만 70여 개에 달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데다가 이번 박람회에 참여한 중소기업 중 10퍼센트 정도가 엘텍의 하청 기업이었다. 대기업의 전무급 인사가 박람회에 참관하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사장도 아닌 전무이사의 등장이 특별한 이유는 전무가 엘텍 기업 내에서 갖는 독특한 위치 때문이었다.
이석은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전무가 온다 한들, 뭐 별거 있겠어. 어차피 엘텍전자에 얼굴 비추러 오는 걸 텐데. 비싼 얼굴 빼꼼 보여주고 가겠구먼 뭐.”
“그 비싼 얼굴 좀 구경하겠다는 건데요? 이사님은 안 보고 싶어요?”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전무가 연예인이라도 되나? 이러다가 싸인 해달라고 하시겠네.”
“내가 미쳤어요? 왜 자꾸 딴죽 거세요.”
“그럼 김 부장이 그 얼굴 봐서 뭐해. 점수라도 딸 줄 알아?”
“점수를 따긴요. 대내외용 얼굴마담이잖아요. 궁금해서 그래요.”
“그렇지. 얼굴마담 역할만 하지.”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꾸하는 이사를 그녀는 신기한 물건이라도 보듯 돌아보았다.
“이사님은 강 전무가 싫어요? 그래도 거래처잖아요.”
“거래처도 거래처 나름이지.”
“제일 큰 고객인데 왜요.”
“아, 몰라. 재수 없어.”
이사는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 번에 쭉 들이켠 뒤에 하선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너도 재수 없지?”
“…그렇다고 치자.”
관심 없는 얼굴로 대꾸하는 하선우를 째려본 이사는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그렇다고 치자는 뭐냐. 넌 대체 회사 굴러가는 사정에 관심은 있냐?”
이사의 타박에 하선우는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아, 머리 아파. 여기 너무 공기가 탁하다.”
말을 돌리는 선우를 째려보던 이사는 결국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것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어.”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이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분위기를 바꿔 말했다.
“저녁에 야시장 가서 술이나 하자. 홍콩까지 왔는데 관광은 좀 하고 가야 할 거 아니냐.”
“이사님이 쏘는 거죠?”
반색하며 그녀가 끼어들었다.
“회사 돈이야.”
“에이, 공금을 그렇게 쓰면 안 되죠… 되죠…… 되겠죠.”
서로 낄낄거리며 웃는 두 사람은 또다시 화기애애해졌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하선우는 부스 옆 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컨벤션 홀 안의 공기는 쾌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쉴 새 없이 에어컨을 틀어대고 온갖 전자기기에서 미세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머리가 아프고 콧속이 답답했다. 이 땅의 낯섦이 피곤했다.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낯선 타인과 함께 있을 때 에너지를 충전하는 이사와는 정반대의 성격 탓에 그는 낯선 사람이 많은 곳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막상 시작하면 일은 잘하지만,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답답함을 느꼈다. 뼛속부터 그는 홍보와 영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게다가 낯선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해야 한다는 것은 더 큰 스트레스였다. 사업체 경영이라는 절실함 때문에 일선에서 뛰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사람을 대하는 일의 피곤함은 극복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만 해도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소망이 갈등을 빚었다.
“저기 있는 사람 십 분의 일이라도 왔으면 좋겠네.”
이사는 손가락으로 맞은편의 엘텍 부스를 가리켰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당장 내일 사회·경제면에 기사를 싣기 위해서 그들은 오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하선우는 내일쯤이면 그럴듯한 각도로 사진 촬영된 기사를 신문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사의 제목은 ‘엘텍전자 강주한 전무 홍콩 전자부품박람회 참관’ 혹은 ‘홍콩 전자전을 참관하는 강주한 엘텍 전무’쯤일 테고. 한국 경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대기업이긴 하지만, 전무가 전자전을 참관하는 일로 저 많은 언론이 모인 것은 신문사의 아부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부럽네. 우린 작년에 국무총리상 받았을 때 신문 몇 줄 나간 게 전부였지?”
“기업 규모가 다르잖아.”
“쩨쩨하기가 소인배나 다름없으니까 그렇지.”
이사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선우는 이제부터 이사가 익히 해온 얘기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부하직원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차마 하지 못하고 술자리에서 소주잔을 기울일 때마다 하소연처럼 털어놓던 이야기들을. 하청업체를 쥐어짜는 소인배란 말은 길고 긴 푸념을 시작하는 이사의 도입부 레퍼토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선우의 예상과 달리 이사는 더욱 우울한 얘기를 꺼냈다.
“이번에 정말 공치고 가는 거 아닌가 몰라. 벌써 3일짼데 계약이 성사된 게 없어.”
“대만 기업이랑 업무계약 체결했잖아.”
“규모가 너무 작으니까 그렇지. 이제 곧 엘텍과도 거래가 끝나는데.”
이사는 속에서 열이 오르는지 팸플릿으로 부채질해댔다. 하선우는 복잡한 표정으로 엘텍의 기업로고를 바라보았다.
한때 NnG는 공기업과의 거래가 만료된 뒤 자금 부족으로 도산 위기에 처한 적 있었다. 은행의 대금 회수 문제로 파산 직전까지 몰렸을 때, 천운으로 엘텍의 협력업체가 되었다. 물건을 납품하는 동안 뒷돈을 요구하는 공장 간부와 높은 원자재 가격 등의 암암한 문제가 많았지만 어쨌건 간신히 회사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엘텍과의 거래 유효기간은 2년뿐으로 현재로서는 11월과 12월 주문분만이 남아 있었다. 기간 만료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직까지도 엘텍에서는 별다른 협의가 없었다. 손에 꼽을 만한 주요거래처가 엘텍전자밖에 없는 지금으로선, NnG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바짝 엎드려야 하는 상태였다.
“계약 연장되겠지?”
담배가 고픈 얼굴로 이사는 물었다. 모든 게 불확실했지만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될 거야.”
“왜.”
“우리 기술이 최고잖아.”
말의 내용과 시큰둥한 말투의 부조화에 이사는 결국 쓴웃음을 터트렸다.
폐장시간이 한 시간 남짓 남아 한산해진 한국관 안으로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엘텍전자의 부스가 바로 앞에 있었기에 NnG로 눈길을 돌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멀리서 걸어오는 여자와 하선우의 눈이 마주쳤다.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다 하선우의 부스를 향해 걸어왔다.
부스 앞에 마련된 의자 앞에 앉은 그들을 상담하는 것은 중국어에 능한 부장의 역할이었다.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바이어는 하선우의 설명을 기대했는지 조금 아쉬운 얼굴로 부장에게 NnG의 연구 분야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팸플릿을 살펴보는 바이어들을 긴장된 표정으로 살펴보던 이사는 그들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며 애매한 얼굴로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다 안 되는 날인가 보다.”
다른 부스로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사는 말했다.
“진짜 기분 처지네.”
애초부터 큰 기대 없이 이곳으로 왔지만,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 상황의 연속에 서서히 몸도 마음도 무기력해지고 있었다. 그는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폐장 시간까지 50분 남짓 남았다. 점점 한산해지는 한국관에서 특별히 기대할 바이어도 성사될 거래도 없어 보였다. 조금 더 버틸지 말지를 고민하던 하선우는 결국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의무실 다녀온다.”
“의무실?”
“응.”
“왜?”
“머리가 아프네.”
조금만 더 참으라고 이석이 윽박지르기 전에 하선우는 좁은 홍보관 부스를 벗어났다. 사람들이 들락거릴 때마다 영업용 미소를 짓느라 입술을 힘겹게 끌어 올리던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는 피곤하게 당기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비비며 옆을 돌아보았다. 엘텍전자의 부스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그중에서 기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은 몇 시간째 피곤한 얼굴로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무실에서 약을 처방받은 뒤, NnG의 부스로 돌아가는 대신 그는 화장실로 방향을 틀었다. 하선우는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다. 머리가 정말로 아프긴 했지만, 아프다는 핑계로 최선을 다하지 않음을. 거래처를 잡아야 한다는 절박함은 이사의 몫으로 떠넘겨놓고 연구개발실에 처박혀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업이란 것은 제품 개발이 전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좋아하는 것에 더 매진하고 싶어 했다. 더 이상 20대의 풋내 나는 젊음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는 폰에 담긴 파일을 열었다. 홍콩에 오기 전 마지막까지 매달렸던 개발 관련 파일이었다. 코발트 함량을 줄이고 에너지 밀도를 높인 신기술로 가격적 부담을 줄이고, 이차전지의 충전과 방전시간을 줄인 연구내역이었다. 국제특허까지 출원했지만, 실용화가 어려워 계속해서 발목을 잡고 있었다.
NnG의 차세대 주력상품을 곰곰이 생각하던 하선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목구멍에서 계속해서 올라오는 알약의 쓴맛을 삼키고 그는 넓게 칸막이로 구분된 변기 앞에 섰다.
제품 실용화는 풀리지 않고 엘텍전자와는 머지않아 계약이 끝난다. 연장된다는 얘기도 없었고 거래처로부터 뒷돈을 챙겨달라는 암시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이번에 전무가 바뀌면서 임원들의 계좌를 추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뇌물을 받은 임원은 회사에서 정리된다는 뜻이었다. 즉, 그나마 먹히던 뒷돈도 소용없어졌다. 연구개발비로 투자했던 돈을 모두 회수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사정이 이런데 신제품을 양산하려면 산 넘어 산이니 눈앞이 암암했다. 이사는 배로 압박감을 느낄 거라 생각하자 하선우는 자신의 무기력함이 한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한심하다 진짜.”
변기의 물을 내리며 하선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바로 옆 불투명한 유리 칸막이 너머로 검은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흘끗 옆을 바라보다 하선우는 바지의 지퍼를 끌어 올렸다.
“엘텍.”
모든 일의 원흉처럼 느껴지는 이름을 으르렁 중얼거리며 바지의 버클을 채우던 선우는 칸막이 너머의 사내가 옆을 돌아보는 것을 느꼈다. 불투명한 유리에 가려 이목구비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주시하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 남자를 흘끗거리다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의무실과 화장실을 들르는 데만 30분 넘게 허비하고 있었다. 영어 설명을 필요로 하는 바이어가 올지도 모르는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바닥으로 짓누르다 하선우는 물을 틀어 세수했다. 수출길을 뚫고 바이어를 넘어오게 할 의욕, 의욕이 필요했다. 거울을 향해 씩 웃어보던 하선우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세면대를 향해 걸어오는 남자에게로 옮겨졌다.
TV와 지면 속에서나 존재하던 연예인을 처음 봤을 때 김주안 부장은 자신의 영역 속으로 스타가 파고든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연예인은 김 부장을 기억조차 못할 테지만, 그녀는 술자리에서건 휴게실에서건 스타에게 사인받은 이야기를 어디에서나 떠들어댔다. 김 부장의 정서에는 기본적으로 호의가 깃들어 있었지만 하선우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호감인지 악감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선우는 지면에서, 뉴스에서, 아주 간혹 연예 프로그램에서 그를 보았다. 사람들의 말 속에 공공연하게 살아있는 이름. 친구와 사랑이란 단어처럼 어떤 감정들을 만들어내는 단어인 그 이름은 일종의 명사였다. 그것도 주로 돈에 관련된 정서와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는 대명사.
강주한.
그는 하선우를 모르지만 하선우는 그를 알았다. 아주 일방적으로.
하선우는 자신이 그를 너무 오래도록 쳐다보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짙은 겉눈썹과 날카로운 눈매의 얼굴이 수도꼭지를 향하고 있었다. 하선우는 연예인을 본 적이 없었고, 유명 인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힐끔거리며 훔쳐보는 것을 알면서도 익숙한 일인지 강주한은 태연하게 손을 닦았다. 사내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멍한 시선을 수습하며 하선우는 종이 티슈를 잡아당겨 얼굴의 물기를 닦아냈다.
그는 뉴스에서 보던 것보다도 준수한 느낌이었다. 투사 같은 체격에 긴 다리, 각진 어깨와 긴 팔, 강인한 느낌의 커다란 손. 사지가 멀쩡하다 못해 우월해 보였지만 보나 마나 신체의 질환을 이유로 군대도 다녀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눈에 봐도 강주한은 기성복과는 다른 고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저게 바로 돈의 아우라라는 것인가. 남들이라면 기를 쓰고 악수해보려 하겠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아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살가운 척 위선적으로 다가가고 싶지도 않았다. 홍콩까지 와서 죽을 쓰고 가는 것이 엘텍전자의 탓은 아니지만 냉소를 거둘 수는 없었다. 시선을 거두며 하선우는 고개를 숙였다.
총수의 아들이라고 해봤자 아버지 잘 만난 일개 인간일 뿐인데. 움츠러드는 기분에 입이 썼다.
재수 없다.
소리 없이 입술만을 움직여 중얼거렸다. 푹 젖은 종이티슈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쓴침을 삼키며 몸을 돌리던 그는 느껴지는 시선에 잠시 멈칫했다.
종이 티슈를 잡아당기며 강주한이 거울 속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하선우가 아닌, 하선우의 가슴팍에 걸린 목줄이었다.
하선우는 빠르게 자신의 목줄 끄트머리에 매달린 명찰을 생각해냈다.
NnG President Seon Woo, Ha
주시하는 시선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먼 거리의 거울 속에서 남자의 시선이 천천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마른침을 삼키며 눈이 마주치기 직전 고개를 돌리며 하선우는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욕설이 목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조금 전의 하선우의 멱살을 잡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우울한 눈으로 닫힌 문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숙였는데 설마 본 건가. 부주의하게 실수를 한 건가.
물론 봤다고 해서 큰일이야 있을까 싶었다. 총수의 아들은 본인 회사의 계열사 사장 얼굴도 다 모를 테고, 계열사의 수많은 하청업체 중 하나인 NnG를 알지도 못할 테니까. 소심해지는 자신이 가소로워 하선우는 차게 웃었다. 무엇에든 초연하다 느꼈던 자신이 우스웠다. 밥줄을 쥔 사람의 칼춤에는 하나도 초연하지 않았으니까.
거대한 홀을 가로지르며 한국관 내 좁은 부스로 돌아온 그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긴장한 탓인지 뒷목이 아프도록 당기고 두통이 더 심해졌다. 시계를 확인했다. 폐장까지 아직도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왜 그래. 진짜 몸 안 좋냐?”
등 뒤로 다가온 이사가 뒷목을 주물러주며 물었다. 대꾸하는 대신 그는 종이컵에 단 음료수를 가득 따라 한 번에 마셨다.
“약은 먹었어?”
“응.”
“어쩌냐.”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 부장이 하선우의 앞에 섰다. 그는 호텔로 돌아가고 싶다는 무책임한 말을 꾹 눌러 삼켰다. 붉어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한숨을 쉬며 하선우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나 가고 나서 사람 좀 왔어?”
“여기 쳐다보기만 하다가 다 저기로 빠지더라.”
이사의 손끝이 엘텍전자의 업무협약 관련 팀을 가리켰다. 외국인 바이어들이 부스의 왼쪽에서 엘텍의 직원들과 상담 중이었다. 힘 빠진 얼굴로 맞은편의 부스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이사의 시선이 선우에게로 향했다.
“뭔 일 있었냐.”
“……왜.”
“뭐가 그렇게 초조해.”
“내가?”
“뭐 싸고 못 닦은 표정인데.”
하하. 애써 건조하게 웃으며 하선우는 풀어지는 넥타이를 다시 조여 맸다. 정신이 없었는지 세면대 앞에서 접었던 소매 끝이 아직도 접혀 있었다. 카페인이 고농축된 주사를 맞은 것처럼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온통 진탕인 정신을 유지하려 애쓰며 선우는 소매 끝을 펼쳤다. 일부러 엘텍전자와 등 돌려 앉아 있지만 그는 한국관의 공기가 조금씩 부산스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완전히 납셨네. 납셨어.”
이사의 빈정거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한국관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부스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카메라 셔터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음에 NnG의 좁은 부스까지 진동을 했다.
화제의 인물은 인파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인파 너머 엘텍 부스의 모델들은 좀 전보다 열정적으로 제품홍보를 하고 있었다. 마치 잘 짜인 시나리오가 있는 것 같았다. 언성을 높이거나 눈에 띄게 그를 환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모두가 그를 의식하고 있다. 애써 점잔을 떨고 있지만, 하선우의 눈에는 그들의 모습이 북한의 수뇌부를 환영하기 위해 모여든 기쁨조처럼 보였다.
“해외에 와서도 저러냐. 쪽팔리지도 않나.”
목을 빼 엘텍의 전무를 찾으며 이사는 말했다.
“시팔, 제가 무슨 황태자야. 인간들 굽실거리는 것 좀 봐봐.”
“황태자죠. 다 쟤건데. 사람이 왜 그렇게 꼬였어요?”
이사의 짜증스런 눈초리를 무시하며 김 부장은 부스 밖으로 조금 걸어 나갔다. 이사는 쓴 얼굴로 말했다.
“넌 관심 없어?”
하선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이석은 허리를 숙였다.
“안 보러 가냐? 얼굴에 금칠한 재벌을 언제 또 보겠어.”
“관심 없어.”
하선우는 조금 전 전무를 보았음을 이사에게 얘기할 생각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까 봐 고개도 돌리지 않는 소심함이 치사스러울 뿐이었다. 괜히 팸플릿이 꽂혀있는 수납장을 정리하다, 부스의 안쪽으로 들어가 NnG의 배터리가 들어간 테블릿PC의 시제품을 만지작거렸다. 엘텍전자의 테스트를 통과하기가 얼마나 까다로웠던가. 한국에 돌아가면 연구개발실에 처박혀 절대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하선우는 엘텍의 부스를 향해 눈을 들었다.
그 순간 하선우는 숨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커다란 탓에 전무는 멀리서도 잘 보였다. 전무의 눈길이 부스의 전광판을 향하고 있었다. 전광판에는 NnG 글자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피가 온몸에서 죄 쏟아져 나가는 기분이 이러할까 싶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을 찡그리며 하선우는 고개를 숙이려 했다. 하지만 전무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조금 더 빨랐다. 사람들의 웅성거림만으로도 전무가 발길을 돌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시름 놓았지만 배터리를 집은 손끝이 진땀으로 찐득거렸다.
전무는 엘텍전자의 부스로 들어갔다. 경쟁업체인 안신그룹을 제치고 가장 크게 자리를 차지한 엘텍전자의 위용을 만끽하기라도 하듯 참관했다. 폐장까지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바이어와 관광객도 이젠 거의 돌아가 한국관은 한산해졌지만 유일하게 맞은편의 부스만이 여전히 부산스러웠다.
이사는 여전히 폐장시간까지 자리를 지킬 셈으로 보였지만, 하선우는 조금씩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접이식 의자를 세우고 음료를 치우며 돌아갈 준비를 할 때였다. 셔터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엘텍의 전무가 돌린 발길이 자신들의 초라한 부스로 향하고 있었다. 하선우는 어쩔 수 없이 들고 있던 의자를 내려놓았다.
NnG는 엘텍과 거래하는 한국관의 수많은 협력업체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그가 굳이 이곳을 찾은 이유를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뒷목이 삐죽 날카롭게 당겼다. 정말 재수 없다는 한마디를 들은 건가.
강주한은 부스의 데스크 앞에 서서 특허 출원내용이 적혀있는 보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제법 진지하게 내용을 살펴보았다. 뭔 내용인 줄 알기나 할까 싶어 의심스럽게 그의 뒷모습을 훔쳐보던 하선우는 이사를 찾았다. 뒷모습만 보아도 부동자세의 이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먼저 이사에게 손을 내민 것은 강 전무였다. 이사는 힘들게 침을 삼켰다. 이석이 긴장한 채로 손을 내밀어 전무의 손을 마주 잡자, 전무는 단단하게 맞잡은 손을 두어 번 흔들었다.
“엘텍전자의 테블릿PC에 들어가는 배터리 케이스 협력업체입니다. NnG 대표이사 이석입니다.”
“강주한입니다.”
맞잡은 손을 떼어내며 전무는 입술을 조금 늘여 웃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석은 얼른 가슴팍의 케이스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주머니에 바로 집어넣지 않고 한 번 명함의 이름을 확인한 강주한의 시선이 부스를 훑었다.
강주한의 눈길이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부스와 복도에 어중간하게 걸쳐져 있던 하선우에게 향했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하선우입니다.”
강주한의 손바닥은 굳은살 하나 없이 보드라웠다. 하지만 악력 탓인지 하선우에겐 돌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엘텍 기획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탓에 전자부품 협력업체와의 관계에 조금 어두운 면이 있습니다. 자사와의 협력프로젝트 건에 대한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저음임에도 탁하지 않고 명료한 목소리였다. 손을 붙잡은 채로 전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선우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년, 엘텍전자의 협력업체에 선정된 이후 함께 개발에 착수하고 시제품을 만들어 시험하고 판매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회사의 연혁을 읊은 것에 불과했다. 기획실에서 근무했다던 강주한의 말처럼 그는 엔지니어도 아니고 배터리 작동원리에 대해 아는 바도 없을 터였다. 설명해봤자 아는 것 하나 없을 그에게 하선우는 성심껏 대답했다.
부스 밖에서 기자 명찰을 단 남자가 두 사람의 바로 곁에서 사진을 찍었다. 내일쯤이면 ‘강주한 전무, 중소기업 업체와의 상생 협력 강화 도모’란 제목의 기사가 실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하선우는 스크린을 터치했다.
컴퓨터로 금형을 설계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엔지니어가 아닌 이상 어려울 테지만, 전무는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진지하게 경청했다. 스크린을 보며 설명하던 하선우가 고개를 들었을 때, 전무와 눈이 다시 마주쳤다. 그는 화면이 아닌 하선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 속에서 적의, 혹은 오만함, 깔봄, 좀스러운 뒤끝 등 부정적인 감정을 찾아보려 했지만 읽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하선우는 자신이 지나치게 방어적으로 구는 것 같다고 느꼈다. 조금 전보다 더 견고하게 시선이 얽혔다. 엉겨드는 시선을 회피할 타이밍을 놓쳐 하선우는 조금 애매한 웃음을 띠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화면을 터치하자 마지막 화면이 끝나고 첫 화면이 다시 재생되었다. 화면을 정지시키고 하선우는 전무를 돌아보았다. 사업 초기 사업자금 5천만 원을 벌기 위해 도내의 중소기업청 프레젠테이션을 했을 때도 이보다 살벌하진 않았다.
“당사와의 협력 감사합니다. 3세대형 파우치 타입 배터리도 개발 중에 있으니 좋은 제품으로 찾아뵐 수 있을 겁니다.”
전무가 곁에 서 있는 비서에게 시간을 물었다. 5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폐장시간이었다. 전무의 전자박람회 참관과 중소기업 협력 강화라는 허례허식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몸을 돌리자 그를 따라 한 무리의 사내들이 걸음을 옮겼다. 부스 밖으로 이석이 걸음을 빨리 옮겼다. 전무를 따라가며 이석이 손을 정중하게 내밀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죠.”
고개까지 까딱이며 간단하게 대답한 그는 짧은 악수를 마친 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부동자세로 서 있던 하선우와 눈이 다시 마주친 강주한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컨벤션 홀을 가로지르며 멀어져가는 전무의 뒷모습을 쫓던 이사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와씨, 대박!”
불끈 쥔 주먹을 허공을 향해 뻗었다. 이사는 당장에라도 발을 구르며 기쁨의 포효를 외치고 싶은 얼굴이었다. 흥분되기는 김 부장도 마찬가지였는지 엘텍전자의 부스에서 몇몇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체면도 잊고 폴짝거리며 뛰었다.
“진짜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야! 하선우! 우리 부스 자리 너무 잘 잡았다! 야!”
“그러게요. 진짜 웬일이야!”
“오늘 저녁엔 가뿐하게 홍콩 관광이나 할까? 어? 오픈 버스 타고 달려?”
안타깝게도 하선우는 그들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애써 웃고 있지만, 그는 불안하기만 했다.
좆 됐다.
한국관을 벗어난 전무를 따라 철수하는 기자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선우는 힘 빠진 얼굴로 실소했다.
* * *
별드을이이 소곤대애는 홍콩의 밤 거어리.
합창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잔뜩 들떠 부풀어 있었다. 고온다습한 날씨에 지쳐 맥주 한 캔씩을 마셨던 그들은 알코올의 작용에 고취되어 금사향의 홍콩아가씨를 구간반복하며 부르고 있었다. 하선우는 두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화려한 네온사인이 밤을 밝힌 나단로드의 야경을 관람했다.
한국 관광객들을 인솔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훔쳐 들으며 좁은 이차선 길의 좌우로 다닥다닥 늘어선 고층 빌딩을 사진에 담았다. 홍콩의 유명 배우가 운명한 호텔을 스쳐 지날 즘, 때맞춰 야경쇼가 시작되었다. 예상보다 밋밋한 풍경에 시큰둥했지만 하선우는 관광객의 본분을 다해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각자 선물과 술, 짝퉁 쇼핑의 목적을 안고 몽콕에 도착한 그들은 9시가 넘어서야 헤어졌던 장소에서 재회했다. 하선우와 이석의 양손에는 쇼핑백이 잔뜩 들려 있었지만 정작 S급 이미테이션을 노리고 홍콩에 왔던 김 부장은 빈손으로 약속 장소에 가장 먼저 도착해 있었다.
“홍콩이 짝퉁의 천국이란 말도 옛말인가 보더라고요.”
“왜.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차라리 동대문에서 사는 게 낫겠어요.”
잇새로 혀를 찬 그녀는 말을 이었다.
“조심스럽게 A급 달라고 말하면 진품과 똑같은 짝퉁 모아놓은 창고로 데려가준다고 인터넷에서 봤는데, 정작 시장 상인들이 이상한 여자 취급하면서 물리치는 거 있죠. 완전 망신만 당했어요.”
투덜거리는 김 부장에게 하선우는 물었다.
“진품은 안 사?”
“사고 싶어도 비싸서 못 사.”
김 부장은 그 꿈이 좌절되자 시름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 모아서 언제 사니.”
테이블에 팔을 얹어 턱을 괸 그녀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김 부장에게 쥐꼬리만 한 월급을 주는 하선우와 이석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숙연해졌다. 소기업으로 옮기기 전까지 김주안은 외국계 기업에서 대리 직급을 달고 있었고, 하선우의 중학교 동창이었던 그녀를 반년간의 설득 끝에 NnG로 스카우트했던 것은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주먹으로 입술을 가려 헛기침을 한 이석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말했다.
“장소 옮기지? 저 앞에 노천식당 갈까. 막 중경삼림에 나오는 식당 분위기 아니냐?”
“농담이시겠죠. 주인 얼굴이 양조위와 억만 광년 차이 나는데요. 뭐, 가게 분위기가 비슷하게 별로긴 하네요.”
시무룩한 얼굴로 일어난 김 부장을 소심하게 흘겨보던 이석은 곧 그녀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중국집 메뉴에서 구경하지 못했던 각종 요리를 주문한 뒤 그들은 무뚝뚝하게 툭툭 던져주는 음식을 제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과감하게 도전했던 메뉴에서 실패를 맛본 그들은 처음보다 천천히 젓가락을 놀렸다. 붉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훈제오리고기를 살조각만 발라내 먹으며 이석은 말했다.
“김치. 김치가 그리워.”
“누가 보면 홍콩에서 몇 년은 산 줄 알겠어요.”
“김 부장이야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했으니 적응되겠지. 난 소화도 안 되고 더부룩해 죽겠다. 여기 애들은 야채까지 기름에 볶아 먹냐.”
진하게 우려낸 육수에 얹어진 향신료 고명을 거둬내며 김 부장은 말했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 와서 반대로 그러잖아요. 한국 음식은 기름기가 없어서 밥 먹고 일어나자마자 배고프다고.”
“근데 얘네들은 이렇게 기름진 음식 먹고 왜 다 날씬한 거야? 억울하게.”
“제 말이요.”
그릇에 잔뜩 묻어나는 기름을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세 사람은 여행지에서 흔하게 하는 각종 개성 없는 이야기들로 시간을 때웠다. 거의 비우지 못한 음식을 남기고 일어선 그들은 곧바로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야시장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술집을 찾았다. 휴가철이었기에 곳곳마다 사람들이 넘쳐났다. 어디든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중국 관광객들을 피해 간신히 노천의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유난히 짐이 많아 움직임이 거추장스러웠던 하선우는 셔츠를 잡아 흔들며 몸의 더위를 식혔다.
“넌 뭘 그렇게 많이 샀냐.”
“그냥 이것저것.”
쇼핑백을 빈 테이블 위로 올리며 하선우는 주섬주섬 쇼핑 목록을 늘어놓았다. 대부분이 선물이었다. 직원들에게 줄 초콜릿과 가족에게 선물할 건강식품, 형수가 부탁한 화장품과 조카들의 장난감, 하선우의 것이라곤 속옷뿐이었다. 속옷의 브랜드를 확인하는 이사에게 하선우는 말했다.
“캘빈클라인 드로즈 팬티 검은색 세 장, 코튼 브리프 시리즈로 회색 두 장, 바디 모달 타입 네이비 두 장. 한국에서 사던 평균가보다 5천 원은 저렴하더라. 아, 트렁크도 샀는데… 어.”
“적당히 좀 해. 뭘 그걸 또 일일이 보고하고 있어.”
멋쩍어진 하선우는 속옷 케이스를 쇼핑백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또 산 거 있는데. 거래처 직원들 선물도 샀어. 쿠키면 되겠지?”
“응. 최 부장 선물은 뭐 샀냐. 최 부장이 쿠키 받고 좋아할 인간이 아닌데.”
“술 선물 받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백화점 직원이 권하는 걸로 샀다. 술은 회사 카드로 긁었어.”
“어, 그래. 잘했어.”
이석은 두꺼운 쇼핑백에 든 묵직한 크기의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무늬가 새겨진 나무 케이스에는 금박이 고급스럽게 둘려 있었다.
“더럽게 비싸게 생겼네.”
아까움에 입맛을 다시는 이석의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엘텍의 전무가 바뀐 뒤로, 임원들의 계좌를 추적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여파가 커져 사소하게는 구매부서의 대리까지 대가성이 있는 ‘용돈’에 대해 손사래를 쳤다. 결국 현금과 선물의 기능을 하면서도 사용의 흔적이 남지 않는 것으로 상납을 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술이었다. 정치판 못지않은 칼바람이 부는 기업 내에서, 먼 훗날 인사고과에서 어떤 불이익을 줄지 모르는 흔적을 남기는 것은 그들로선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부산에서 엘텍 임원 120명이 총집결했잖아요. 자산 매각이랑 임원 구조조정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던데요. 용돈 받은 임원들 우선대상으로 명예퇴직자 리스트 돌잖아요.”
“이 와중에 돈 받을 상황 아니니까 술 달라고 하는 최 부장도 참 대단하다. 근데 갑자기 웬 구조조정이래? 지금까진 조용했잖아.”
“왜겠어요. 강주한 전무가 판 깔려는 거죠. 듣기로는 강주한 전무가 기획실에 있을 때부터 지주회사의 구조를 짜놨더라고요. 강주한이 ㈜엘텍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면 자동으로 그 밑의 자회사들을 다 지배할 수 있는 구조로 회사를 바꿔놓은 거죠. 그리고 엘텍의 최대 주주는 지금의 회장인 강제한이고요.”
그녀는 빠르게 써내려간 메모를 두 사람의 앞으로 내밀었다.
“지주회사인 ㈜엘텍만 물려주면 엘텍 전체를 강제한 일가가 지배할 수 있게 만들려는 거죠.”
엘텍의 이름 앞에 별표를 매기며 김 부장은 말했다.
“가장 재미있는 건요.”
김 부장은 엘텍전자 글씨를 검지로 가리켰다.
“엘텍의 전체 계열사가 엘텍전자의 지분을 조금 조금씩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엘텍전자가 전체 계열사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창고인데 한 주당 150, 많게는 200만 원 선에서 거래가 되니 모기업 입장에서는 감히 엘텍전자의 주식을 사들일 엄두가 안 나는 거죠. 엘텍전자 자체를 소유할 만큼 주식을 사들이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니까요. 총수의 입장에서는 엘텍전자를 갖고는 싶은데 살 돈이 없으니 막막했겠죠. 갖고 싶어서 얼마나 안달이 났겠어요. 그래서 엘텍의 밑에 있는 모든 자회사가 엘텍전자 주식을 조금씩 소유하게 만들었어요. 엘텍의 계열사들이 엘텍전자를 조금씩 나눠 가진 거죠. 총수는 ㈜엘텍의 주식을 소유하기만 했을 뿐인데 돈 한 푼 안들이고 엘텍전자를 갖게 됐고요.”
김 부장은 별표한 엘텍의 글자 위에 총수일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엘텍 주식을 소유한 총수일가의 지분이야. 가장 많은 주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엘텍의 회장인 강제한이고 그다음이 26퍼센트인 강주한, 그다음이 강예진, 다음이 막내아들인 강태한이지. 강제한이 46퍼센트를 가지고 있으니 최대주주이긴 하지만 최근 자녀들에게 점차 주식을 양도하고 있어. 근데 이 와중에 강주한이 엘텍전자의 전무로 자리를 옮겼어. 뭘 의미할 것 같아?”
엘텍 그룹에서 엘텍전자가 차지하는 의미가 물리적으로, 상징적으로 가장 큰 것을 상기한 하선우는 말했다.
“전적으로 강주한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거겠지.”
“맞아. 회장이 마음 바뀌어서 강태한이나 강예진에게 넘기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지금으로썬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지.”
“하긴, 양아치 강태한이나 사업 말아먹기가 특기인 강예진 주느니 나라도 강주한에게 물려주겠어.”
이석이 끼어들며 말했다.
“걔는 뭐 좀 똑 부러지는 구석이 있어 보이잖아.”
묵묵히 이석의 말을 듣고 있던 하선우는 술잔에 술을 따라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강주한 그 자식이 엘텍을 말아먹을지, 볶아먹을지 어떻게 아나. 속으로 혀를 차며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김 부장. 이 숫자들은 어떻게 다 기억하는 거야?”
이석은 어지럽게 글자가 갈겨진 메모장을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술잔을 한 번에 꺾은 그녀는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 학위 그걸로 땄잖아요. 재벌의 소유구조에 대한 논문. 엘텍뿐이에요? 안신, 한광, LHM, 대안, 국내 5대 재벌의 계열사 소유지분이며 순환출자며 뭐며 완전 빠삭해요. 또 묻고 싶은 것 없어요?”
“그럼 나머지 재벌은 엘텍처럼 지주회사 체제인가?”
“그건 아니에요. 되게 복잡한 고리로 연결된 경우가 태반인데요…….”
수첩의 페이지를 넘겨 글을 잔뜩 적으며 김 부장은 열을 올려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하선우가 아는 인물 중에서 가장 정직하고도 솔직하게 돈을 밝히는 사람이었다. 같은 중학교를 나와 중국으로 유학을 갔던 그녀는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다니던 도중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수도권의 평범한 대학을 졸업했다.
재벌의 소유구조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하선우는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자작하던 하선우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비교적 서민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몽콕의 야시장 밖을 도시의 야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전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저마다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빌딩은 작은 은하처럼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드높은 마천루 속에는 간혹 몇 안 되는 한국의 기업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중에는 한국 어디에서나 마주치던 엘텍의 이름도 섞여 있었다. 하선우는 낯선 타지에서 마주친 그 이름이 반갑다가도 저온의 화상을 입은 것처럼 가슴이 알알하게 쓰렸다.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 위로, 당장 한 달 뒤를 걱정해야 하는 NnG의 현실이 겹쳐지며 빚어지는 일종의 박탈감이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빛나는데 NnG의 현실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마음이 쓸수록 술이 달아진다는데, 그래서인지 술이 달았다. 두 사람의 높아지는 언성을 안주 삼아 입안에 콸콸 술을 쏟아붓고는 하선우는 크으, 얼굴을 찡그려댔다.
* * *
창가에 비치는 남자의 옆모습에는 미세하게 실금이 가 있었다. 끌로 얼음을 깎아놓은 것 같은 차가운 얼굴 위로 희미한 불쾌함이 스쳤다. 짙은 선글라스를 쓴 강태한은 남자의 언짢은 표정을 못 본 체 태연하게 여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왜 그래. 들어와.”
어느 때고 어디서고 도도하게 고개를 쳐들던 성혜인이었지만, 객실로 들어서 강주한을 발견한 순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들어와. 괜찮다니까?”
현관에 발을 걸치고 버티는 성혜인의 손을 억지로 잡아당긴 강태한은 창밖의 야경이 가장 잘 보이는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창밖에는 황금빛으로 수놓인 침사추이의 야경이 낭비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등받이에 손을 걸친 그는 창가와 소파 사이에 놓인 릴렉세이션풀을 보았다. 풀 안에는 강주한이 옷을 모두 벗은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형은 가족 앞에서조차 상의를 탈의하지 않았고, 타인 앞에서의 노출은 더더욱 불쾌해했다. 까다로운 성미를 비웃으며 강태한은 다리를 꼬았다.
결국 그의 형은 한숨을 쉬며 지척에 놓아둔 베스가운을 찾았다. 푸른 물이 와류하는 풀 속에서 일어난 그는 베스가운을 걸쳐 입고 풀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운의 허리띠를 여미며 강주한은 그의 동생과 처음 보는 미녀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눈이 성혜인의 옆에 놓여 있는 종이백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강태한의 카드로 산 온갖 브랜드의 명품이 놓여 있었다. 가수의 벌이로는 쉽지 않을 씀씀이였다. 그것들을 쳐다보는 눈빛이 언뜻 오만해 보여 성혜인의 낯빛이 붉어졌다.
“전자박람회에 얼굴 비추라고 누누이 얘기하지 않았나.”
“에이, 호텔 사장이 재미도 없는 거길 왜 가.”
“딴따라 끼고 노는 건 재미있나 봐.”
“당연히 재밌지. 형은 안 해본 것처럼 얘기한다?”
베스가운의 매듭을 강박적으로 강하게 묶는 그의 손을 쳐다보며 비뚜름 웃은 강태한은 말했다.
“석 달 만이잖아. 안 반가워? 왜 만나자마자 일 얘기부터 하고 그래. 타지에서 고생하는 동생을 반가워해야지.”
강주한의 손을 잡아끌어 제 앞으로 가져온 강태한은 차가운 손등에 이마를 가볍게 비볐다. 헐겁게 쥐어지는 주먹에 제 손을 끼워 넣어 약지를 만지작거리자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을 찌푸린 강주한이 손을 거두자 강태한의 긴 입술에 보란 듯이 웃음이 걸렸다.
“형. 마카오에서 한 달 머물면서 생각해본 건데 우리도 카지노사업 해볼까?”
강주한의 고개가 조금 들려지는 것을 확인한 강태한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거 알아? 마카오에 있는 호텔카지노 업장 하나 수입이 라스베이거스 전체 도박장 수입에 맞먹는 거. 베네치안 같은 메가 리조트 건설하면 웬만한 계열사 한두 개 합쳐놓은 것보다 수입이 많을걸. 마카오 정부에서 도박 입찰권을 따내는 건 내가 할게. 중공도 엘텍에서 하고 호텔의 가전은 엘텍 거 사용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잖아. 기획실에 건의해보는 건 어때? 우리도 이제 메가 리조트를 해외에 건설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빠르게 뱉어내는 강태한의 말을 묵묵히 듣던 강주한은 거실을 지나쳐 벽에 붙어있는 작은 미니바 안으로 들어갔다. 홍콩에 머문 1년 동안 여자 연예인들을 갈아치우며 도박과 행락 따윌 즐기다, 기껏 생각해본 게 카지노라는 사실을 책망하지 않았다. 잔에 물을 따르며 그는 말했다.
“다른 계열사에서 네 회사로 투자할 돈 없어.”
“아, 왜 그러냐. 출자 좀 해주면 해볼 만할 텐데. 아버지한테 얘기해볼까?”
“너도 미국으로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회삿돈 끌어다 쓸 생각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여지를 주지 않고 매듭지은 강주한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곧장 정리해둔 짐 안에서 노트북 가방을 찾아냈다.
“투자심의회에 건의라도 해줘.”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은 강주한의 반응에도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강태한은 꿋꿋하게 요구를 했다. 그는 냉장고 안에서 맥주를 꺼내 커피테이블 위에 주르륵 나열했다. 메가 리조트에 대한 투자는 진지하게 꺼낸 얘기는 아니었던 듯 강태한은 더는 조르지 않았다. 맥주의 흰 거품이 묻은 입술로 여자에게 보란 듯이 입맞춤하던 그는 강주한이 관심을 주지 않자 식은 얼굴로 일어났다.
“뭐하는 거야?”
강태한은 강주한이 들여다보고 있던 모니터 화면 위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모니터의 화면 안에는 지식경제부 산하의 특허 사이트 창이 떠 있었다. 검색창에는 하선우, 윤동학, NnG 등, 생전 처음 들어보는 특허 출원자들의 명단이 길게 나열되어 있었다. 곁에 바짝 붙어 앉아 강태한은 강주한의 행동을 간섭했다.
“전자박람회에서 재밌는 거라도 봤어?”
모니터 속의 활자를 따라 움직이던 강주한의 눈동자가 잠시 멈칫했다. 활자 속 누군가의 이름 위에 시선이 머물렀다. 이윽고 강주한은 입을 열었다.
“그럭저럭.”
“그럭저럭 뭐? 뭐 있었는데?”
대꾸 없이 강주한은 스크롤을 내리며 특허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한국기술거래소에 등록된 어려운 특허 이름들을 찌푸린 눈으로 훑던 강태한은 곧 흥미 잃었다. 조금 더 형의 곁을 서성거리다, 성혜인의 손을 잡아 허락도 없이 강주한의 침실로 들어가버렸다.
한참 뒤에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지난밤까지 휴식을 취했던 방 안에서 두 남녀의 요란한 신음이 울리고 있었다. 피곤한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던 그는 주저 없이 전화를 걸었다. 건너편에서 신호음이 세 번 울린 뒤에 안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머무는 방과 같은 방으로 바로 예약해줘요. 20분 뒤에 일어날 테니까.”
곧바로 전화를 끊은 그는 벗어두었던 옷을 다시 걸쳐 입었다. 들으란 듯이 젊은 남녀의 앓는 소리가 높아졌다. 강주한은 부주의하게 덜 잠긴 문고리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강태한은 뭐든지 보란 듯이, 그리고 들으란 듯이 행동했다. 웃고, 화를 내고, 경멸하고, 조롱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아열대의 고기압 날씨처럼 선명한 감정들이었다. 뭐든지 원색으로 강렬하게 반짝거렸지만 동시에 관중을 의식하고 저지르는 행동들이었다. 그는 아우의 난폭하고 거침없는 쇼의 관중이 되어줄 생각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강주한은 거실의 불을 꺼버렸다. 방을 나서려던 그는 천천히 고개만을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어두워진 실내의 풍경 속에서 홍콩 시내의 야경은 더욱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색찬란한 세상의 어딘가에서 강주한은 익숙한 이름을 발견해냈다. 침사추이의 고층 빌딩숲 사이로 엘텍이란 글자가 번쩍이고 있었다. 호텔의 객실은 아마도 비서가 신경 써서 고른 방일 터였다. 허영과 욕망이 번들거리는 도시의 풍경을 같은 높이에서 조응하며 느낄 수 있도록, 그는 밤의 야경까지 신경 썼던 것이다.
호텔의 층수와 높이를 같이하는 전광판을 바라보던 강주한의 눈동자가 조금 더 높은 곳을 향했다. 엘텍의 글자 위로, 더 크게 밤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기업의 이름을 눈으로 새긴 그는 소리 없이 어두운 객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