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회색지대 분계선
“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걸 먹어.”
라면 다섯 개가 든 묶음을 집던 하선우는 잠시 주춤했다. 권정옥 여사가 못마땅한 눈으로 라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치를 보긴 했지만 하선우는 결국 카트 안에 라면 봉투를 집어넣었다. 레토르트 식품과 맥주, 컵라면을 쏘아보던 어머니가 말했다.
“너 집에서 라면만 먹니?”
“직원들 야근할 때 먹일 용도로 산 건데.”
“너 전에 보낸 반찬 그대로 남겼지.”
시식 코너를 지나 새로 출시된 해물라면을 집어 들던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젓가락 대긴 했어?”
제품설명을 읽으며 하선우는 고개를 성의 없이 끄덕였다.
“무슨 반찬이 젤 괜찮던.”
“김자반.”
“나머진?”
“쉴 것 같아서 자취하는 대리 줬어.”
손안에 들고 있던 라면묶음을 다시 선반 위에 올려놓고 선우는 카트를 끌며 느리게 걸어갔다. 뒤따라오던 어머니의 걸음은 라면 코너에 여전히 멈춰 있었다. 뒤돌아보자 그녀는 화난 얼굴로 아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
“네가 고추장이랑 된장 맛 괜찮다고 해서 네 할머니 친구분께 부탁해 전남에서 얻어온 걸로 만든 거다. 바쁘면 주말에라도 밥 지어서 만들어준 반찬이랑 같이 좀 챙겨 먹지 그랬어.”
“권 여사. 올해 내 나이가 몇이지.”
“서른하나.”
“밥 정돈 내가 알아서 챙겨 먹을 테…….”
“챙겨 먹는단 애가 카트에 이런 쓰레기만 담아?”
카트 안에는 각종 컵라면과 라면을 비롯해 냉동음식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내려다보던 하선우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영양제 챙겨 먹는다. 운동도 하고.”
하선우의 변명에도 어머니는 화를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그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반찬 최 대리가 맛있대.”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며 하선우는 어머니의 화가 누그러지길 기다렸다. 미운 감정을 담아 째려보던 여자는 8초 만에 결국 못 이긴 척 화를 누그러트렸다. 그녀가 보여주는 걱정이야말로 하선우를 향한 지긋한 애정의 증거였고, 어렸을 때부터 하선우는 형제들 중에서 유달리 부모님의 걱정을 끈기 있게 사왔다.
파마로 한껏 부풀려도 160이 되지 않는 땅딸막한 어머니와 투박한 외모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하선우는 형제 사이에서도 유전자의 기적이라는 시샘 어린 말을 종종 들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곱상한 외모와 총명함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그는 중학생이 되던 해 감염성 심내막염으로 수술을 받았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10대 시절의 허약한 막내아들을 대하듯 하선우를 극성스럽게 대할 때가 있었다.
오늘만 해도 그녀는 하선우가 사는 오피스텔 근처로 나타나 다짜고짜 마트부터 가자고 재촉했다. 차 안에서 주차장, 마트 안으로 들어와서까지 두 달 만에 보게 된 아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야단이 그녀의 유일한 낙이라는 듯이.
“아들만 있는 다른 집에선 막내들이 딸 노릇도 한다던데. 어째 넌 살가운 구석이 하나도 없어. 옆집에 석헌이는 엄마 김장 담그는 것도 도와준다더라.”
간식으로 만들 떡볶이 떡을 찾느라 하선우는 어머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진열대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순영이네 어머니랑 이번에 100포기 정도 담그기로 했는데 30일에 시간 되니?”
“뭘 그렇게 많이 담가.”
“순영이네 많이 필요하대. 와줄 수 있어?”
“형이랑 형수들은.”
“바쁘대. 와, 못 와?”
“당연히 못 가지. 아주머니 하나 써.”
하선우는 대기업의 세련된 로고가 새겨진 제품 사이를 뒤적거리느라 화가 난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먹던 떡이 없네.”
“저거 사면 되잖아.”
어머니의 손끝이 가리킨 것은 마트 자체 브랜드의 떡볶이 떡이었다.
“별론데.”
“왜 그래. 떡 얇은데.”
“중소기업 사장이 중소기업 제품을 팔아줘야지.”
“하여간 유난을 떨어요. 대기업 마트는 왜 왔어? 아예 재래시장을 가시지?”
“멀어.”
어머니의 말대로 마트 역시 대기업의 지점이었다. 게다가 대표이사는 강주한의 숙부였다. 엘텍과는 분리된 기업이지만 완전히 떨어졌다고도 할 수 없었다.
열흘 전 홍콩에서 보았던 강 전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만 떠올리면 밥맛이 떨어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거래를 연장한다는 얘기도, 연장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였다.
상표별로 나열된 떡을 살펴보던 그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자주 사 먹곤 하던 떡을 발견했다. 투명한 포장에 파란색과 붉은색이 조잡하게 조합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디자인의 제품이었다. 별 볼 일 없는 디자인과 달리 먹을 만해서 그는 늘 같은 제품을 구입하고 있었다.
기호가 확실한 그는 늘 먹던 것을 먹고, 늘 입던 브랜드를 입는 편이었다. 삶에 매뉴얼이 있는 편이어서 집중하고 싶은 분야 외에는 가지를 쳤고, 덕분에 그의 삶은 단순하게 흘러갔다. 어머니는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린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단출한 삶이 나름 마음에 들었다.
* * *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방 안에서 싸늘한 냉기가 쏟아졌다. 하선우보다 빠르게 안으로 들어가 보일러를 켠 어머니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래도 집은 좀 치우고 사네.”
사실 방 안은 치울 것조차 없었다. 오피스텔 안은 거의 텅 비어 세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있던 싱크대와 냉장고, 에어컨, 작은 옷장이 전부였다. 원룸은 사무실처럼 휑해 보였다. 그의 침대와 책상 및 너저분한 것들을 계단과 연결된 낮은 천장의 복층에 모두 옮겨놓았기 때문이었다.
“치울 것도 별로 없어.”
하선우가 선반과 냉장고 안에 마트에서 사온 음식을 차곡차곡 쌓는 동안 어머니는 오피스텔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만족스러운 것보다 성에 차지 않는 것이 먼저 눈에 띄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텅 비어있는 벽면이었다.
“그림이라도 걸어놓지. 아니면 포인트 벽지라도 붙여놓든가.”
하선우는 대꾸하기가 귀찮아 싱거운 웃음으로 대신했다.
어머니는 복층으로 올라갔다. 천장이 낮아 허리를 모두 펼 수 없는 복층 안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있었다. 자주 보는 책이 꽂힌 책장과 외국 영화의 프라 모델과 중고등학교 때 조립했던 투박한 모양새의 전자제품이 선반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보고 싶고 읽고 싶은 것이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모두 놓여 있었다.
어머니는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아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뭐 찾아?”
“신문 구독 안 해?”
“응.”
어머니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신문기사 안 봤어?”
하선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봤어.”
아들의 대답에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러지 않니? 엄마는 주변에서 전화도 받고 그랬는데.”
마치 아들이 연예인이라도 된 것처럼 어머니는 들뜬 얼굴로 말했다. 이전에 그녀가 가끔 짓곤 하던 표정이었다. 초중고 시절 온갖 경시대회에서 상장을 받아 올 때마다 어머니는 이마에 매직으로 ‘이 애가 내 아들입니다.’ 써놓고 싶은 얼굴을 하곤 했다.
“전화를 받긴 했어.”
“그래? 누구?”
“외할머니, 이모, 고모부, 민석이, 병준이, 삼촌. 동창들.”
밝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하선우는 식욕을 감퇴시키는 얼굴을 떠올렸다.
강 전무가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었을 때 하선우는 설마라는 부정적인 단서를 붙이며 추측을 했었다. 내일쯤이면 ‘강주한 전무, 중소기업과의 상생 협력 강화’ 따위의 기사가 실릴지도 모르겠다고.
노동과 동떨어진 삶을 산, 부드러운 손을 가진 강주한과 악수를 했을 때 하선우는 그의 눈이 인간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일간지의 1면 자투리에 실린 컬러 사진 속의 강주한은 인간미가 흘러넘쳐 보였다. ‘엘텍전자 중소기업과의 상생 경영을 위해 힘써’라는 표제 때문인지는 몰라도 웃고 있지 않은 두 눈이 협력업체의 절실한 어려움을 이해하는 듯이 보였다. 정면에서 마주 보던 얼굴과 다른 느낌이었다.
뉴스가 나간 후 하선우는 몇 차례 전화를 받았다. 처음으로 전화가 울린 것은 하선우가 호텔의 맛없는 조식 대신 달콤한 늦잠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신문의 1면에 그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잠결에 전화를 받아 담담했던 하선우와는 달리, 일가친척에게는 제법 큰 화제가 된 듯했다. 해외 로밍 요금 때문에 할 말만 전하고 전화를 금방 끊긴 했지만 홍콩에서 출국하기까지 여러 차례 축하전화를 받았다.
작년에 국무총리상을 받았을 때 한 번도 축하전화를 받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의 반응이었다. 비유하자면 장원급제한 풋내기 유생이 왕에게 교지를 직접 받든 분위기였다. 축하를 받을 만한 일인가 싶었지만 하선우는 결국 사람들의 반응을 받아들였다. 강주한 전무가 아니었다면 살면서 단 한 번도 주요 일간지의 1면을 장식할 일이 없었을 테니까.
엘텍전자가 중소기업과의 상생 경영을 위해 힘을 쓴다는 표제로 1면을 장식한 짤막한 기사는 경제면으로 이어져 자세히 서술되어 있었다. 대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협력업체의 기술 일류화 지원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피부에 와 닿는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기사였기에 하선우는 쓴웃음 지었지만 이석 선배는 NnG가 지면에 나온 것만으로도 상당히 상기되어 있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들뜬 분위기가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엄마한테도 얼마나 전화 왔는데. 다들 너냐고 묻더라니까.”
덕분에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녔지. 웃으며 어머니는 가방을 주섬주섬 열었다. 그녀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코팅된 사진 하나와 파일에 스크랩된 10월 17일자 신문 기사였다. 하선우는 어머니가 먼 길을 찾아온 이유가 이걸 전해주기 위해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하선우의 부모님은 학교 신문이건, 주민사무소에서 발간하는 작은 지역 신문이건 그들의 아들들이 지면에 실리면 한 줄짜리 자투리 기사라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스크랩을 해왔다. 스크랩된 신문 기사 속에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말없이 오래도록 내려다보는 하선우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신문 몇 부 사서 만들어놨다. 아버지도 신문에 너 나온 거 그래도 내심은 신기해하시더라.”
하선우는 어머니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술을 뗐다.
“뭐라시는데.”
어머니는 조금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뭐라기는… 네 아들 신문 기사 나왔으니 함 봐보라 하지.”
하선우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분명 그는 딴청을 부리며 무뚝뚝한 말투로 어머니에게 신문을 내밀었을 것이다. 신문 1면에 아들이 나왔다며 야단을 떠는 어머니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을 것이고.
하선우는 가벼운 한숨을 쉬며 그 밑의 코팅된 사진을 집었다. 신문 기사와 같은 사진이었지만 훨씬 더 고화질의 사진이었다.
“사진이… 다르네.”
“인쇄하려고 기자 메일 주소로 편지 보냈지. 강주한 전무랑 악수하는 중소기업 사장의 가족인데 프린트하고 싶다고 고화질 사진 좀 보내달라고 했다. 액자에 크게 붙여서 손님 모시는 사무실에 걸어놔라. 우리 기업이 이런 기업과도 거래합니다라고 보여줄 수 있지 않겠니? 그게 다 사업 수완인 거야.”
어머니의 극성에 하선우는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재계 1, 2위를 다투는 기업의 총수 아들과 악수하는 사진 하나만으로도 아들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믿는 순진한 어머니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다.
하선우의 서류 가방을 찾아 사진과 기사를 집어넣으며 어머니는 당부했다.
“꼭 걸어놔라? 석이한테 전화해서 확인할 거다.”
이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어머니를 보며 하선우는 쓴웃음 지었다. 이사라면 어머니가 들고 온 사진보다도 훨씬 더 크게 인쇄한 패널을 사무실에 걸어둘 것이 분명했다. 유명인과 악수하는 사진을 사무실에 걸어놓는 것은 연예인과 찍은 사진으로 음식점을 홍보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업가다운 수완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선우는 그 사진이 불편했다.
강 전무의 얼굴을 떠올리면 하선우는 심장을 가는 핀셋으로 꼬집는 듯 따끔한 불쾌함을 느꼈다. 컨벤션 센터의 화장실에서 마주친 이후 줄곧 그랬다.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길한 느낌이 따라다녔다.
“집에는 이미 걸어놨다.”
당연히 그랬을 것 같아서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당에 있는 부모님의 집에는 네 형제의 사진이 벽면 가득 걸려 있었다. 쓴 커피를 한 번에 들이켜고 그는 바닥에 늘어진 책을 정리하기 위해 무릎걸음을 옮겼다.
“사진 걸어놓을 자리가 아직도 남았나 보네.”
“사진이야 걸면 어디든 거니까. 정순이가 그걸 보더니 선 자리 잡아야겠다고 난리를 어찌나 치던지.”
혀를 차는 말투와는 달리 어머니는 하선우의 반응을 살폈다. 하선우의 이모인 정순은 부근 아파트 단지의 통장이었다. 하선우는 스물여덟 되던 해부터 꾸준하게 중매 강요에 시달려왔다.
“같은 동에 참한 아가씨가 있는데 이번에 외무고시에 붙었대. 학교도 너랑 같은 중학교 나왔는데 너보다 두 학년 아래더라. 네 이름만 댔는데도 널 알더라니…….”
“거절했겠네.”
건조한 대답에 여자의 얼굴이 굳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한 꾸러미 준비해왔지만, 아들의 칼날 같은 반응에 마음이 싹둑 잘린 표정이었다.
“아니. 이번엔 네가 이모한테 말해라.”
“그럴까. 이미 사귀는 사람 있다고 말할까.”
어머니의 입술이 벌어졌다. 떨림을 감추지 못한 놀란 목소리로 어머니는 물었다.
“너… 사귀는 사람 생겼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머니는 눈에 띄게 안심하는 얼굴을 했다. 바싹 마른 입술을 물로 축이고 그녀는 가는 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한참 뒤 어머니는 평소처럼 호전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여자 좀 만들어보지 그러니. 네 나이도 이제 서른하나인데 언제까지 엄마한테 아들 뒤치다꺼리하게 할래. 얼굴도 예쁘다는데 정말 소개 안 받아볼 거야?”
하선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바닥에 질서 없이 쌓아둔 책을 정리했다. 침묵은 그가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기피하는 화제를 피하는 방식이었다.
그가 침묵할 때면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며 더 이상 파고들지 못했다. 어머니는 진지하게 여자를 소개받지 않는 이유를 따져 물을 용기를 갖지 못했고 하선우가 의도한 대로 곧 더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에 입을 다무는 어머니를 하선우는 책장에 책을 꽂으며 지켜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어머니는 이 순간 가장 위축되었다.
어느 모임을 가나 아들의 얘기를 꺼내고 싶어 기회만 노렸던 그녀였지만, 몇 해 전부터는 누군가가 아들의 안부를 묻는 것조차 꺼리게 되었다. 자랑스러웠던 아들을 두었음에도 그녀는 동정을 받아 마땅한, 드물고도 애처로운 존재가 되었다.
하선우 역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는 부모님과는 달리 집을 나온 뒤론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 * *
양천구는 다른 자치구에 비해 자전거 이용 인구가 많았고 그만큼 주민들의 자전거 분실이 잦은 편이었다. 바로 옆방에 사는 의사 청년은 이곳에서 2년 동안 자전거를 네 대나 잃어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하선우는 거치대에 고정하는 것을 잊을 때도 있었지만 자전거를 한 번도 도둑맞지 않았다.
3년 동안 잔고장 없이 타온 자전거는 독일제 자전거로 근교의 병원에서 근무하는 하선우의 둘째 형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결혼으로 분가한 후 전보다 소식이 뜸해지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하씨 집안의 형제들은 우애가 좋았다. 특히 둘째인 하선범은 하선우의 집 근처 대학병원에서 근무해 형제 중에서도 비교적 자주 만나고 있었다. 게다가 실제로 만나지 않더라도 서로의 소식을 전해주는 제삼의 연락망이 둘 사이에 있었다.
“형!”
음악 사이로 새어 들어온 외침에 하선우는 이어폰을 빼며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렇게 느리게 가요. 다 따라잡겠네.”
등 뒤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어느새 바로 옆에서 들렸다. 도로 위를 달리고 있지만 바람을 가르는 청년의 목소리는 컸다. 하선우의 옆집에 사는 젊은 의사 청년인 백형운이었다.
“형 진짜 오랜만에 봐요.”
“그러게. 계속 운동했나 봐. 살 좀 빠졌다?”
“예. 너처럼 뚱뚱한 의사도 없다고 진료과장님이 계속 살 빼라고 하셔서요.”
“선범 형이?”
“예. 교수님 때문에 간호사 누나들까지 자꾸 갈궈요.”
백형운은 성악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야외에서도 느껴지는 큰 목청은 실내에 들어가면 귀가 왕왕 울릴 정도였다.
“형이나 좀 빼라 그래.”
“제가 교수님께 그걸 어떻게 말씀드려요. 저 죽게요?”
질색하는 형운을 보며 하선우는 웃었다. 셋째 형을 괴롭히던 선범의 평소 성격만 보아도 그가 레지던트들을 얼마나 괴롭혀댔을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선우 형.”
“왜.”
“형 신문에 나왔다면서요.”
한강과 안양천이 만나는 지점을 달릴 즘, 형원이 하선우의 옆으로 바싹 붙으며 말했다.
“선범 형이 그래?”
“교수님이 원래 자랑 안 하는 분이시잖아요. 저한테 와서 신문 기사 보여주시더라고요. 홍콩에서 박람회 참가했는데 강주한이 형네 회사 찾아왔다면서요. 강주한 실제로는 어때요? 사람들 말처럼 잘생겼어요?”
강주한 전무의 첫인상이 어떠했던가. 그는 일종의 아우라가 있는 존재임에는 분명했지만, 불편한 앙금을 남기는 그 느낌을 설명할 길이 없어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티비에서 보는 거랑 비슷하더라.”
“형은 강주한 같은 사람이랑 연락하고 지내요?”
30대가 코앞인데도 여전히 순진한 형운의 물음에 하선우는 피식 웃었다.
“누가 의사 아니랄까 봐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냐. 중소기업 사장이 그나마 자주 볼 수 있는 귀한 얼굴은 대기업 구매팀 팀장님뿐이거든?”
“그래도 엘텍전자 협력업체를 할 정도면 선우 형 진짜 잘나가나 봐요.”
지금까지 받았던 축하전화와 다를 바 없는 감탄에 하선우는 웃었다.
사업을 모르는 일반인들의 뜬구름 잡는 칭찬은 이젠 좀 지겨웠다. 이대로 계속 두면 어린놈의 아부까지 듣게 될까 봐 민망한 상황을 피하려 그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다.
“솔직히 그건 그래. 내가 잘나가긴 하지. 사업 잘해, 머리 좋아, 잘생겼어. 사람이 인간미가 없지 않냐? 못난 부분이 적어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너무 완벽하게 균형 잡혔잖아.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아?”
예상대로 백형운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께름칙한 시선으로 하선우를 위아래로 살펴본 뒤 코웃음 치며 말했다.
“그럼 뭐해요. 여자친구도 없는데. 나보다 못났지. 그러다가 금방 노총각 돼요.”
“형님께서는 바빠서 여자친구를 안 만드는 거란다.”
“전 인턴 때도 계속 있었어요. 아무리 바빠도 만들 수 있거든요?”
형은 안 사귀는 게 아니라 안 생기는 거예요. 본인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목소리로 백형운은 말했다. 여자친구에 대한 비생산적이고 유치한 논쟁으로 옥신각신하는 동안 하선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이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페달을 밟던 하선우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전화를 끊을 즘 그의 자전거는 거의 정지해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한쪽 발로 지면에 몸을 지탱해 선 하선우는 함께 속도를 줄인 백형운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운아. 가봐야겠다.”
“벌써요?”
“회사에서 연락 왔거든.”
아쉬워하는 형운을 뒤로한 채 하선우는 자전거의 방향을 돌렸다. 모자가 벗겨질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 오피스텔로 돌아간 그는 서둘러 양복과 가방, 차키를 챙겼다. 일산에 있는 이사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여전히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왔냐.”
문을 연 이석 역시 늘어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까치집이 선 떡진 머리를 긁적이며 이석은 슬리퍼를 직직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담배냄새가 자욱했다. 퀴퀴한 땀냄새에 하선우는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당장 창문을 열어젖혔다. 이사의 몰골 역시 말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평소였다면 야유했겠지만, 하선우는 올해로 서른넷이 된 눈앞의 노총각을 나무라지 못했다. 이사의 표정이 밝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인데 대뜸 양복 챙겨서 일산 오라고 그래.”
“내일 너 갈 곳 있다.”
“갈 곳? 어디.”
“엘튼 호텔.”
엘튼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하선우는 물었다.
“거긴 왜.”
“내일 거기서 엘텍전자 경진대회 있거든. 네가 가야겠다.”
하선우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석의 얼굴이 어두웠기에 하선우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주안이랑 형이 가는 게 아니고?”
“우리가 못 가니까 널 불렀지.”
“왜 못 가는데. 무슨 일 생겼어?”
“홍콩에서 체결했던 계약 말이다. 그 대만 업체가 로열티 문제 때문에 업무계약 맺은 걸 취소하겠대.”
“위약금 물어야 할 텐데.”
“위약금이 많지도 않았잖아. 그거 물고 안 하겠다 이거지.”
피곤한 얼굴로 이사는 말을 이었다.
“로열티 조건을 시정해주길 바란다더라. 내일 담당자가 한국 온다고 하니까 김 부장이랑 나는 거길 가야 할 것 같다. 너도 연구 때문에 바쁜 건 알겠는데 호텔에는 네가 좀 가줘라.”
1년에 한 번씩 엘텍전자의 주최로 ‘동반성장 우수사례 경진대회’라는 모임이 열리곤 했다. 엘텍전자의 1, 2차 협력업체를 대상으로 하는 대회였다.
공식적으로는 상생협력 활성과 동반성장 우수사례를 공유하여 서로 벤치마킹을 도모하는 모임이었고 비공식적으로는 엘텍전자의 매출 증대에 우수한 협력을 보인 기업의 성과를 인정하는 자리였다. 쉽게 말해 엘텍전자가 흑자를 내도록 기여한 하청업체에 상을 주는 시상식이었다.
엘텍과 2년째 거래 중인 NnG에서는 올해로 두 번째 참석이 될 예정이었다. 초대 인원에는 1, 2차 협력업체의 경영자가 꼭 포함되어야 했다. 불행히도 NnG에 이사를 제외한 경영자는 하선우 사장뿐이었다. 필드에서 거칠게 살아온 하이에나 같은 40, 50대 경영자들 속에서 홀로 경진대회에 참가해야 했다. 한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거북한 기분을 숨기며 대답한 하선우는 타박하듯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경진대회 가는 거라고 말해주지 그랬어. 이럴 줄 알았으면 양복 좋은 걸로 챙겨왔지.”
“대충 가. 어차피 가서 남들 박수 쳐주는 것밖에 없거든. 우리 회사는 상 받을 것도 없다. 적당히 박수 좀 쳐주다가 밥만 먹고 나와라. 밥은 잘 나오더라.”
이석은 권위주의가 팽배한 분위기와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는 하선우의 성격 때문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하선우는 알고 있었다. 그곳이 결혼식장도 아니고 밥만 먹고 나올 만큼 한가한 곳이던가.
“다행이네. 호텔 밥은 다르겠지.”
“눈치껏 먹어라. 맛있다고 너무 먹기만 하면 없어 보여.”
“김 부장이 그러는데 형이 작년에 그랬다며.”
하선우의 실없는 농담에 이사는 인상을 쓰다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거기서 괜찮은 정보 있으면 눈치껏 물어오고.”
하선우는 사회를 모르는 철부지가 아니었다. 거래처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전술적인 연출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사장의 직함을 달았지만 여전히 공돌이만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더 클 뿐이었다.
“알아서 잘할 테니 형님은 대만 거래처나 신경 쓰십쇼.”
검은 속으로 웃고 있을 경진대회의 사내들의 모습을 떠올린 하선우는 한숨을 짓누르며 간신히 웃었다.
* * *
하선우의 알아서 잘한다는 다짐은 아침부터 벽을 만났다.
현관의 거울에서 손질된 머리를 다시 한 번 점검한 그는 귀퉁이에 놓아둔 쇼핑백 안의 구두를 꺼냈다. 신 안으로 발을 밀어 넣는 순간, 하선우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팼다. 발부리에 구두가 닿지 않았다.
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온 구두가 하필이면 둘째 형의 신발이었다. 하선우가 자주 신던 구두와 거의 같은 디자인이었기에 착각한 것이다. 하선우는 처음으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어졌다.
키에 비해 발이 작은 편인 하선우와 달리, 둘째 형은 키에 비해 발이 많이 컸다. 그와는 15밀리미터 차이가 나는 데다가 하선우는 칼발이었다. 형보다 발이 더 큰 이석에게 신을 빌릴 수도 없었다. 신발 안에서 덜렁거리는 발 때문에 하루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느낌이었다.
차를 몰고 서울로 진입하자 부분적으로 도로가 정체되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 더 늦게 서초구의 호텔에 도착한 하선우는 가방을 챙겨 서둘러 로비 안으로 들어섰다.
발부리가 구두 앞코에 닿지 않아 신경 쓰였지만 전시관으로 들어선 순간 하선우의 고민은 금세 사라졌다. 4층의 입구에는 엘텍의 협력회사 생산제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엘텍의 가장 큰 협력업체로 알려진 ㈜산원테크의 부스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제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 뒤로 20개가 넘는 협력회사의 생산제품이 부스마다 전시되어 있었다. 일회성 이벤트에 제법 공을 들인 모습이었다.
엘텍에 납품하는 상품을 비롯해 개발 중이거나 개발이 완료된 제품을 전시한 다양한 회사를 보며 하선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홍콩에서도 기가 팍 죽어 돌아왔지만, 한국에서도 기가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엘텍은 성과급 제도로 사원들 간에 경쟁을 유도하는 기업이니만큼, 협력회사 간에도 경쟁을 유도했다.
NnG 역시 부스 참가를 위해 신청서를 보냈지만 제품을 전시해도 좋다고 확정받지 못했다. 이사에게 듣기론 80여 개에 달하는 협력업체 중에서 상위 20개 회사만이 상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커트라인을 정해둔 것이라고 했다. 전시된 회사 중에는 NnG처럼 이차전지 부품을 개발하여 납품하는 업체만 여덟 곳에 달했다.
갑자기 조급증이 치밀었다. 그는 이사가 거래처에 갈 때마다 수명이 한 달씩 줄어드는 기분이라고 했던 말을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특급 호텔의 대연회장은 마치 전설적인 가수의 디너쇼처럼 꾸며져 있었다. 시간마다 색이 변하는 부드러운 LED 조명이 하선우의 발아래로 연꽃 모양의 그림자를 사방으로 늘어트렸다. 원탁의 테이블이 넓은 연회장을 가득 채운 모습이 아주 장엄하게 보였다. 흰색의 공단이 깔린 테이블 위에는 성찬이 차려져 있고, 와인잔 위로 던져진 광채가 글라스의 테두리 위에서 반짝거렸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나열된 것 없는 격식을 차린 대연회장의 모습에 하선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 앉지.”
하선우는 혼잣말로 조급하게 중얼거렸다.
연회 시작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탓에 공석이 없었다. 테이블을 살펴보아도 회사명이나 이름표는 보이지 않았다. 지정석이 아니었다. 자리마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안면이 있거나, 같은 회사에서 초대를 받고 온 사람들이었다. NnG처럼 경영자 혈혈단신으로 경진대회를 찾은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자리를 찾지 못해 조금 곤란한 기분을 느끼며 하선우는 눈을 좁혀 멀리까지 살펴보았다. 앉을 만한 자리가 없었다. 단 한 군데. 무대 앞의 바로 앞자리만을 제외하고.
하선우는 도리 없이 무대 쪽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막상 앉으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앉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게다가 비어있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못했다. 친화력 없는 외골수 경영자로 비칠 게 뻔했다.
결국 하선우가 다른 자리를 찾으려 몸을 돌리려는 때였다.
“하선우 사장.”
하선우의 고개가 아래로 움직였다.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익숙했다. 군턱이 진 넓적한 얼굴과 작고 처진 눈매. 산업체에서 군복무를 했던 시절에 만난 염 부장이었다는 것 외에는 정확한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는 그 얼굴에 부글부글 끓던 과거의 기억 또한 떠올랐다. 그는 산업체 복무 중인 군인에게 고3 아들의 과학과 수학 과외를 강요할 만큼 뻔뻔한 인물이었다. 그에 대해 좋은 감정은 하나도 없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하선우의 구원자였다.
“염 부장님!”
“이 사람 봐, 좋아하긴. 나 염 부장 아냐. 이젠 염 사장이야. 하하하.”
“그러셨습니까. 하긴 10년 가까이 흘렀죠. 하나도 변한 게 없으시네요. 여전히 젊으십니다.”
“그러는 하 사장은 완전히 사람이 변했어. 어른이 다 됐어. 그때는 완전 볼살이 통통한 게 애기였는데 애기. 어수룩하긴 해도 잘생겨서 여직원들 사이에서 인기 최고였잖아. 하 사장이 제대할 때 예쁜이 간다고 얼마나 아쉬워했는데.”
“…하하… 그랬던가요.”
어색하게 구겨지는 웃음을 활짝 펴며 하선우는 맞잡은 염 사장의 손을 흔들었다.
“이 사람, 수행원도 없이 혼자 왔어? 볼품없이 그게 뭔가.”
“그러게 말입니다.”
“이 이사는 뭐하고.”
하선우는 눈을 조금 치떴다.
“이사님을 아시나 보죠.”
“그럼 알지. 자네 대학 졸업할 때 내가 우리 회사 스카우트하려고 했는데 이석이가 얼른 채 가버려서 기억하고 있지. 또 협력업체끼리야 세계가 워낙 좁지 않나.”
씩 웃으며 염 사장은 맞잡은 하선우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동업이라며. 그 어린애가 사업체 차렸다는 얘기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나? 솔직히 오래 못 버틸 줄 알았는데 이 이사가 그래도 대기업 연구원 출신이라 발이 넓었던 모양이야? 엘텍전자와도 거래 틀 줄 알고 제법이야. 어? 으허허.”
맞잡은 손을 놓으며 염 사장은 말을 이었다.
“하 사장. 솔직히 섭섭한 거 아나? 제대를 했어도 찾아오고 그랬어야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내가 알려주고 그럴 거 아닌가.”
“앞으로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하선우는 얼른 지갑 안에서 명함을 꺼냈다. 하선우의 명함을 살펴본 뒤 염 사장은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앉을 자리 없으면 여기 앉지 그러나. 마침 자리가 비는데.”
의자에 내려놓은 가방을 치우며 염 사장이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감사합니다.”
한시름 놓은 얼굴로 하선우는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주변에는 염 사장의 회사에서 온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염 사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모르는 얼굴이었다.
기본적인 식기만 놓여 있던 자리에 음식이 세팅되기 시작했다. 비어있는 잔을 채우는 투명한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던 하선우에게 염 사장 곁에 앉아 있던 수행원 중 하나가 말했다.
“음식 좀 들지 그럽니까. 개회식 시작되면 먹을 분위기가 아니거든요.”
“예.”
음식을 드는 사람들을 따라 하선우는 스푼을 들었다. 수프를 비우는 와중에도 가끔가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껴야 했다. 엘텍전자의 협력업체 중에서 가장 젊은 사장에 속하는 하선우였다.
대단한 수완가를 기대하는 노골적인 호기심에 하선우는 그저 조용히 웃어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니 긴장되었다.
“저 자리는 뭔데 비워두는 거죠.”
유일하게 하선우에게 관심이 없던, 조금 전 회장의 아들이라고 소개받은 청년이 비어있는 옆 테이블을 가리켰다. 짧은 앞머리를 왁스로 세우고 값비싼 정장과 짙은 남색의 네로우 타이로 한껏 멋을 부린 청년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것으로 보이는 인물이었지만 든든한 회장님 배경으로 이런 자리까지 참석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도 안 앉던데. 일부러 비워둔 건가 보죠?”
먹음직한 참돔회를 질긴 고기를 먹는 기분으로 씹던 하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 역시 궁금했던 바였다.
“엘텍전자 임원들과 협력사 협의회장들이 앉는 자리지.”
빈자리에 앉을 뻔했던 하선우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 사장 나 덕분에 좋은 자리 얻어 탄 거야. 어제 대연회장에 전화해서 지정좌석인지 아닌지 미리 알아보고 일찍 와서 맡아둔 자리라고. 나한테 고마워해야 해. 하하.”
“그럼요. 감사드리죠.”
하선우는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마음에 없는 아부를 하고 싶지도 않을 때 써먹는 그의 몇 안 되는 감정 연출 중에 하나였다.
지루한 시간이 30분 가까이 흐른 뒤 대연회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술렁이기 시작했다. 왼쪽 무대 위에서 중년 사내가 식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9시 뉴스의 앵커로 활동하던 아나운서였다.
“저 사람 방송국 그만두더니 더 잘나가네.”
“아… 그랬습니까.”
“하 사장 몰랐어? 세상물정 어두운 것 좀 봐.”
가볍게 혀를 찬 염 사장은 말을 이었다.
“3년 전에 정석형이를 엘텍 언론재단에서 데려갔잖아. 기자 출신에다가 데스크급의 인물이라 방송계에 영향력이 커서 엘텍에서 눈여겨봤다 꼬신 거지. 외국 대학 보내주고 해외 기업체 연수시켜줘서 엘텍 인물로 만들었다더라. 연봉만 10억이 넘어.”
하선우에게 귀를 바짝 가져다 대며 염 사장이 소곤거렸다. 오랜만의 재회라 모든 것이 어렴풋했었지만 염 사장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서서히 그에 대한 기억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선우가 산업체에 근무했을 때에도 부장은 사내에서 입지가 두터운 편이었다.
엘텍전자 임원의 사촌이라는 막강한 지위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소문에 빠르고 사내의 언론을 휘두르는 인물이었다. 어디서 말이 새나갈지 몰라 직원들은 회사 안에서는 함부로 염 부장에 대한 험담을 하지 않았다. 염 부장의 고3 아들을 과외하면서도 하선우가 불평 한 번 찍소리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엘텍전자 공장의 해외 이전과 신사업 추진에 관련된 정보를 염 사장이 떠드는 사이 무대 위의 조명이 밝아져 있었다. 개회식을 시작하려는지 비어있던 테이블에 사람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엘텍전자의 임원들과 협력사 협의회장들이 거의 동시에 자리에 착석했다.
대부분이 불혹과 지명을 넘긴 나이였지만 대연회장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남자는 평균 연령에 비해 한참이나 아래로 보였다. 실제 나이는 서른 초중반에 걸쳐져 있지만, 그보다도 젊어 보였다. 사내는 큰 키와 다소 매섭게 느껴지는 외모 때문에 임원진 중에서 인상이 가장 두드러졌다. 그는 식을 시작하는 개회사를 들으면서도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자신에게 집중되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느끼며 태연하게 시선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목이 마른지 사내는 잔을 들었다. 커다란 손으로 가느다란 와인잔을 잡아드는 행동은 여인의 가냘픈 목을 부러트리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내리깐 눈으로 차분하게 마른 목을 축이는 사내를 보자 하선우는 식욕이 떨어졌다.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처음 보았던 날의 긴장이 다시금 느껴져, 하선우는 입맛을 잃고 포크를 자리에 내려놓았다.
단지 그가 등장한 것만으로 공기의 밀도가 빽빽해졌다. 그 주변의 기압만이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에 하선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편으로는 강주한의 등장에 스트레스를 받는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강장제를 지나치게 마셔서 그런가.
개회사를 시작하는 아나운서를 보며 하선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침에 늘 저기압인 그는 근처에 머무르는 공기가 희박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몸은 문제없이 건강하지만 맥이 약해 피로가 쉽게 찾아왔다. 1년 전부터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한의사인 친구에게 가끔 마황 성분이 들어있는 강장제를 지어 먹었다. 강장제를 마시면 피로가 사라졌지만, 약효가 지나칠 때는 긴장감이 얇은 피막처럼 정신을 에워쌌다. 심장이 무겁게 쿵쿵거렸고, 눈앞이 선명해졌다. 지금이 꼭 그때와 같았다.
단상에 오른 CEO의 개회사 인사 이후 대기업 임원들과 서울시의 공직자 소개가 이어졌다. 다행히도 아나운서는 80여 업체에 달하는 협력업체 사장 소개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적막 속에서 사측에서 준비한 동영상이 재생되었다. 하선우는 흘끔 손목의 시계를 보았다. 개회사가 시작된 후로 고작 20분이 지났을 뿐이었다.
간혹 염 사장이 하선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옆 테이블에 앉은 사내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은 중소기업청에 소속된 인물인데 엘텍에서 먹인 뒷돈이 장난이 아니야. 작년에 아들내미가 여기 엘튼 호텔의 대연회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축의금 내는 줄이 보통이 아니었지. 그리고 저기 붉은 넥타이 한 남자 보이지. 저 치가 전지사업부 사장 임권혁인데 내년에 이차전지 사업부를 확장하려고 한다더라고. 임권혁이가 내 외사촌인데…….
끝도 없이 이어지던 염 사장의 수다가 멎은 것은 스크린 속에 그의 회사가 나왔을 때였다. 화면 속에서 무스로 반듯하게 앞머리를 넘긴 염 사장이 경직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화면 아래 나온 자막으로 하선우는 염 사장의 이름이 염동균이고 올해로 51세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회사 소개와 올 한해 엘텍전자의 혁신에 기여한 성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화면 안의 자신을 바라보는 염 사장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술을 억지로 아래로 당기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동그랗게 부푸는 염 사장의 광대를 지켜보며 물을 마시던 하선우는 순간 흠칫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화난 눈으로 주변을 쏘아보던 염 사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야, 깨워!”
다급하게 속삭이는 외침에 수행인 중 하나가 청년의 어깨를 흔들었다. 하선우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회장 아들이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젊은 청년의 고개가 앞으로 쏟아지다 정지했다. 청년이 눈을 부릅떴다.
“아 씨발… 미치겠……!”
순식간에 상황파악을 한 청년이 소란을 떨며 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회장 아들의 수선에 염 사장의 얼굴이 이번에는 흙빛이 되었다. 연회장을 가득 채운 걸그룹의 노랫소리가 멈춘 순간, 하선우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고개를 들었다.
강 전무의 한쪽 입꼬리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무대 위의 화면을 응시하고 있지만 희미한 웃음이 입가에 걸려 있었다. 모두가 이맛살을 찌푸리는 이때, 홀로 웃고 있었다. 청년의 곤란한 상황을 즐기는 듯이.
하선우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세상 누구보다 엄격한 환경에서 자라왔을 총수의 아들은 생각보다 괴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스크린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하선우를 향해 움직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정지했다. 물끄러미 하선우를 보던 강주한의 눈이 서서히 갸름해졌다. 가늘어진 눈매로 상대를 보는 것은 결코 우호적인 의사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 눈이 마치 하선우의 내면을 샅샅이 파헤치는 듯했다. 하선우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강 전무의 다른 행동이 또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는 의자에 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몸을 떼어 테이블을 향해 기울였다. 하선우를 향한 방향이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만 강 전무의 적극적인 움직임 때문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 보는 것 같았다. 강 전무의 검은 눈은 상대방을 똑바로 바라보는데 아무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결국 한없는 어색함을 느끼며 하선우는 가벼운 묵례를 했다. 강 전무도 묵례를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선우가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기 때문에.
이후 하선우의 귀에 경진대회의 내용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동반성장에 따른 우수사례 발표가 끝나고, 시상식이 시작되었지만 기계적으로 손뼉을 칠 뿐이었다. 흐릿한 스케치의 영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듯 모든 것이 어렴풋한 인상을 남겼다.
여덟 개의 협력업체가 기여도를 인정받아 수상을 했는데 그 수상자 중에는 염 사장도 있었다. 뿌듯한 얼굴로 단상 위에서 내려온 그는 트로피와 꽃다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단상 위에서 NnG의 회사명은 호명되지 않았다. 상을 받는 협력업체의 사장들은 대부분 엘텍의 간부 출신이었다. NnG로서는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다.
염 사장의 앞에 놓인 기다란 트로피와 화려한 꽃다발을 바라보던 하선우는 다시 강 전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무감한 얼굴로 단상 아래에서 상을 수상하는 협력업체의 경영자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선우는 성과를 나누고 기여를 치하하는 자리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했다. 여왕개미를 위해 희생하는 일개미를 보듯 단순히 하청기업을 소모재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한 번이라도 아등바등하는 일개미를 관심을 갖고 들여다본 적 있을까.
하선우는 조금 전 강주한의 웃음에 대해 생각했다. 강주한이라는 사내는 아마도 냉소에 익숙한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선우와 강주한의 유일한 닮은 점이었다.
뜨거운 가슴으로 사업에 뛰어든 이사와 달리 하선우는 사업에 관해서는 미지근한 편이었다. 초창기에 그는 단지 연구개발의 즐거움 때문에 일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었고 제법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래전에 개발한 기술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신기술은 돈이 되지 않아 썩히는 형편이었다.
기술의 개발이 뒤처지면 회사는 정체하고, 기술개발을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다.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현재 NnG는 벤처로서는 엄청난 연구개발 자금이 소진된 상황이었다. 새로운 거래처를 뚫기 위해 여전히 연구개발이 돈을 잡아먹는 귀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사업을 하면서 하선우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기술은 과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업에서 기술이 차지하는 비율은 20퍼센트도 되지 않았다. 변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었다. 그런 주제에 그는 지금까지도 영업과 사업적인 부분을 괄시하고 냉소하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스스로에게 냉소가 쏟아졌다.
저 총수의 아들이 재수 없는 이유는 그가 위에서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가진 모든 것에, 엘텍전자를 위해 피땀 흘려 얻어낸 협력업체의 성과에 무감했다. 그가 이 자리에서 즐긴 것이라곤 청년의 작은 실수 하나뿐이었다.
하선우는 강 전무의 옆모습을 우울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인내 속에서 시간을 죽이며 경진대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지막은 엘텍전자 사장의 격려사로 마무리되었다. 초청된 기자단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촬영시간을 가진 후 대연회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꽃을 준비해오는 건데. 처음이라서 잘 몰랐습니다.”
주변의 경영진들로부터 꽃다발을 받으며 염 사장은 소탈하게 웃었다.
“괜찮아. 우리야 뭐 매년 상을 받았으니 내년에도 받을 수 있을 걸세. 근데 자네 다음 해에도 여길 들어올 수 있겠어?”
내년에도 엘텍에 공급업체로 남아있을 수 있겠느냐는 뼈 있는 물음이었다. 하선우는 웃으며 대답했다.
“노력해야죠.”
“그래. 젊은 사람이 패기라도 있어야지.”
두꺼운 손바닥으로 하선우의 등을 아프게 두들기며 염 사장이 끌끌 웃었다.
늘어진 군턱을 주무르며 주변을 돌아보던 염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듯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가 걸어간 곳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는 테이블이었다. 엘텍의 임원진을 비롯해 협력사 협의회장들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남들보다 키가 훌쩍 큰 전무의 뒤통수가 보이긴 했지만 사람들에 둘러싸여 접근할 수도 없었다. 기어코 그 사이로 파고들어가는 염 사장을 보다 하선우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명함을 다 돌리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은 직무 태만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역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염 사장이 간 방향과 반대로 걸어간 하선우는 참관 온 시청의 공무원들에게 우선적으로 명함을 건넸다. 무대와 가까운 곳에 엘텍전자에서 가장 낯익은 구매팀의 여사원이 서 있었다.
“하 사장님이 오셨어요? 와…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꾸미면 쓸 만하다니까요.”
“매일 이렇게 입고 있으면 안 돼요? 그래야 저도 일할 맛 좀 나죠. 근데 혼자 오셨어요? 이사님이랑 김 부장님은요.”
“다른 일 있어서 제가 왔습니다. 구매팀 팀장님은 어디 계시죠.”
“저기 계세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엘텍의 임직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구매팀 팀장이 염 사장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하선우는 여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염 사장의 옆모습을 보다 여사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난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 바빠 보이시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될 것 같은데. 인사하실래요?”
“됐어요. 어차피 다음에 뵐 텐데 뭐.”
인사를 나눈 뒤에 하선우는 대연회장을 나왔다. 이후 짙은 무채색의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빠져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하선우는 그들이 마치 검은 슈트를 입은 군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틀린 판단만은 아니었다. 각자가 그들의 회사 가장 위에서 군림하는 존재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아니었다. 칼과 총만 없을 뿐 회사라는 짐을 지고 살아남아야 하는 각개전투 상황이었다.
어쨌든 회사 연구실이 아닌 밖으로 나오니 느낀 바는 있었다. 하선우 자신이 들고 있는 총이 아주 구식이라는 것. 자신의 보잘것없는 명함으론 방탄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대로 방만하게 살았다간 몰살당하리라는 것이었다.
하 사장이라는 직명의 무게를 덜어내려 나오자마자 명찰을 떼어냈다. 넥타이도 끌러내고 양복도 벗고 무거운 신발도 벗어버리고 싶지만 아직 호텔 안이었다. 진동을 풀려 하선우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사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끝나가냐」
10분 전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끝나서 협력업체 전시회 구경하고 있어 이사님은」
이사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오늘 늦게 들어갈 것 같다. 이 새끼 은근히 룸살롱 얘기 꺼낸다. 로열티 문제는 핑계 아냐? ㅅㅂ」
하필이면 한국의 룸살롱 문화에 호기심을 가진 바이어였다. 뒷머리를 긁적거리다 웃음기 남은 얼굴로 하선우는 답문을 보냈다.
「김 부장은?」
「통역해야 하니까 데려가야지」
「욕보겠네. 자기 힘내♡」
내일이면 김 부장과 이사의 욕 배틀을 구경할 수 있겠군. 낄낄거리며 하선우는 대연회장 아래층에 마련되어 있는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좀 전에는 경진대회 때문에 시간에 쫓겨 미처 제대로 살펴볼 수 없던 곳이었다.
엘텍전자의 1, 2차 협력업체들의 전시 제품으로 꾸며진 부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염 사장의 ㈜산원테크의 부스였다. 하선우의 회사와 같은 업종이었지만, 규모는 엄청나게 차이 났다. 핸드폰과 가전제품에 사용되는 소형 전지는 물론 전기 자동차에 사용되는 대형 전지까지 망라하고 있었다. 엘텍전자의 작은 계열사에 가까웠다.
이런 사람들 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회사의 기반이 탄탄하니 염 사장은 자신을 견제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전 자신을 풋내기 취급하던 염 사장이 떠올라 쓰게 웃으며 그는 발길을 돌렸다.
밖은 한산했다. 경진대회가 끝나자 모두 돌아갔고, 전시회장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새하얀 마감재로 처리된 드넓은 공간은 따듯한 느낌이라곤 전혀 없었다. 건물을 반만 낮게 지었다면 한 층이 더 들어설 수 있을 만큼 천장이 높았다.
저 먼 건너편에서 떠드는 사내들의 수다가 걸러지지 않고 하선우가 서 있는 곳까지 전해졌다. 뚜벅뚜벅 바닥을 울리는 자신의 구두 소리를 듣던 하선우는 비로소 의식했다. 끈이 느슨해져 신발이 덜렁거렸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잊고 있었지만 세 치수나 큰 구두였다.
첫 단추가 잘못 꿰였다고 생각했는데 괜한 기우였다. 별다른 탈 없이 경진대회가 끝났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거나 회사로 향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 숫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시보드의 F에 불빛이 들어오고 차임벨이 울렸다. 커다란 신발을 끌며 열리는 문 앞에 서던 하선우의 멍한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엘텍전자의 임원들과 협력업체의 경영자들이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하선우는 구부정하게 섰던 자세를 바로 했다. 가장 가운데에서 식욕을 감퇴시키는 얼굴이 하선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하선우는 적막이 흐른다고 느꼈다. 마치 질량을 가진 것처럼 무거운 고요함이었다. 간신히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하선우는 고개를 조금 움직여 인사한 후에 뒤로 물러났다.
“안 타십니까.”
매끄럽지만 동시에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로 강 전무가 말했다. 마주 닿는 남자의 눈길을 피해 하선우는 엘리베이터 안을 둘러보았다. 한 사람이 타기에 모자람이 없는 공간이었지만, 넉넉해 보이지도 않았다.
강 전무의 곁에는 염 사장이 바싹 붙어 있었다. 염 사장에게 짧게 눈으로 인사한 뒤에 하선우는 같이 타고 싶지 않다는 곤란함을 순수함과 예의로 가장하며 웃어 보였다.
“먼저 내려가셔도 됩니다.”
“타시죠.”
강 전무의 말에 곁에 있던 엘텍의 임원이 뒤로 조금 물러나며 공간을 넓혔다.
너랑 같이 타고 싶지 않아서 그런다니까.
목구멍으로 기어 올라오는 말을 삼키며 하선우는 입술을 늘여 웃었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선 하선우는 문 앞에 붙듯이 섰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사면이 스테인리스 미러였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하선우는 거울 속 비뚤게 매진 자신의 넥타이만을 응시했다. 그러나 시야가 미치는 범위 안에 강 전무의 얼굴이 보였다.
신장의 차이 때문에 그는 하선우의 정수리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하선우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가 스테인리스 미러 속에 비친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꼈다. 여느 때보다 느리게 시간이 흐르고 차임벨이 울렸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끼며 문이 벌어지기를 기다려 하선우는 발을 뗐다. 그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읏!”
엘리베이터와 지면 사이의 좁은 턱에 걸린 건지 아니면 누군가 자신의 신발 끈을 밟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급하게 밖으로 빠져나가던 관성이 제동을 받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볼썽사납게 넘어진 하선우의 눈앞에 끈이 풀어진 구두가 보였다.
“어이쿠, 뭐가 그리 급해서. 괜찮으신가.”
염 사장의 웃음 어린 걱정에 하선우는 이를 악물었다. 넘어진 것도 우스웠지만, 아픈 티를 내는 것은 더 우스웠다. 바닥에 찧은 무릎의 끔찍한 통증을 참으며 널브러진 구두를 주웠다. 그러나 태연하게 발을 집어넣던 하선우의 움직임은 곧 굳었다.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었지만 깨닫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가방 안에서 쏟아져 나온 서류 더미 속에 스크랩 파일과 코팅된 사진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강 전무는 넘어진 하선우를 대신해 그것들을 ‘매너 있게’ 수습해주고 있었다.
어머니.
하선우는 소리가 되지 못한 끓는 신음을 흘렸다. 아들이 챙겨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가 친절하게도 가방 안에 직접 넣어둔 모양이었다.
서류를 갈무리해 주워 든 강주한은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서류의 맨 위에는 스크랩 된 기사와 코팅된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악수를 나누며 웃고 있는 강 전무와 하 사장의 사진은 제법 돈독한 관계로 보이기까지 했다.
사진은 원본보다 고화질이었고, 소중하게 간직하려는 듯이 코팅되어 있었다. 그 가상한 노력이 애틋하고도 비굴해 보이기까지 했다. 강주한은 하선우에 비해 하나도 아쉬운 것이 없었기에 그런 것들이 더욱더 극적으로 느껴졌다.
공황상태에 빠져 돌처럼 꼿꼿하게 서 있던 하선우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끈도 묶지 못한 구두를 질질 끌며 강주한에게 다가갔다. 주변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고…맙습니다.”
스크랩된 기사와 사진을 응시하던 강 전무는 눈을 들어 올렸다. 온통 붉어진 얼굴로 손을 내미는 하선우를 보면서도 그는 가방만을 건네고 사진을 주지 않았다.
“홍콩 전자박람회 사진이군요.”
“…예.”
상황을 넘길 만한 능청스러운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것이 더 애처로워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선우는 선뜻 말문을 열지 못했다. 강 전무는 사진을 한 번 더 갸름하게 뜬 눈으로 살핀 뒤에 말했다.
“사진기자 실력이 형편없군요.”
강 전무는 스크랩 기사와 코팅된 사진을 임원들에게 건넸다.
“사진을 이렇게밖에 못 찍다니. 실물은 훨씬 훤칠한데, 안 그렇습니까.”
강 전무의 가벼운 농담에 진짜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임직원들은 사진을 돌려보며 웃었다. 얼굴을 붉히며 하선우는 사진을 흘깃거렸다. 사진은 어느새 염 사장의 손안에 들어가 있었다.
“신문 기사인 것 같은데 고화질 사진은 어디서 구한거야?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재주도 좋아?”
굳이 콕 집어 말하는 염 사장 때문에 하선우는 입술 안의 점막을 깨물며 억지로 웃었다.
“하 사장. 나도 전무님과 같이 있는 경진대회 사진 부탁해도 되나? 하하하.”
너털웃음을 흘리며 염 사장은 사진을 내밀었다. 늘어진 군턱을 비틀어주고 싶은 욕망을 느낀 하선우는 사진을 거의 낚아채듯 빼앗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졌지만 하선우는 개의치 않고 거칠게 서류가방을 닫았다. 하선우는 비굴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NnG 하선우 사장입니다. 지면에서 볼 때보다 강 전무님 실물이 훨씬 더 미남이셔서 놀랐습니다.”
손을 마주 잡고 흔든 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뵙길 바랍니다라는 말로 퇴로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뒤이을 멘트를 준비했지만 전무는 내민 하선우의 손을 내려다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긴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하선우는 내민 손을 거두어야 할지, 아니면 계속 내밀고 있어야 할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조금씩 아래로 떨어지는 하선우의 손을 내려다보던 강 전무가 입을 열었다.
“하선우 사장.”
자연스러운 하대였다.
“예.”
“테블릿PC에 들어가는 배터리 케이스를 생산한다고 하셨죠.”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거래처의 정보를 기억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니까요.”
빙긋이 웃으며 강 전무는 손을 내밀었다. 성긴 주먹을 쥐고 있던 하선우의 손을 벌리며 미끄럽게 파고들었다. 차가운 체온이 뜨거운 하선우의 손을 꽉 뒤덮었다. 그 감촉이 지독히도 차끈해서 하선우는 단순히 악수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뒤늦게 의식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 사장.”
“저도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든 강 전무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강 전무는 아직 용건이 남은 얼굴이었지만 하선우는 그저 이곳을 뜨고 싶었다. 몇 마디 뻔한 얘기를 주고받아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만, 제정신이 아니었던 하선우는 그저 이 자리에서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바쁘실 텐데 제가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군요. 기회가 되면 다시 뵙길 바랍니다. 그럼.”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기도 전에 강 전무가 말했다.
“오후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여전히 하선우를 직시한 채였다.
“생산기술연구원에서 본부장님 면담 요청하셨습니다.”
“하루만 미뤄.”
그의 뒤에 있던 사내가 난처한 얼굴을 했지만 결국 뒤돌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불길한 느낌에 하선우의 뺨이 굳었다.
“바쁘십니까?”
어중간한 거리에서 몸을 내빼려던 하선우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예. 저는 바쁩니다. 이 상황에서 그런 대답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적어도 엘텍의 협력업체 사장 중에서는 없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사업체를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하선우는 의도된 수에 눈 뜨고 퇴로를 차단당한 기분이었다. 멍하니 강 전무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허락의 말이 차마 떨어지지 않아 하선우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저희 회사는… 전무님께서 시찰하시기엔 부족한 점이 많아서.”
벽에 가로막히고서도 뒤로 조금 더 물러서는 하선우의 응수를 강주한은 진지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어려운 고백이라도 하듯 조금 뜸을 들인 그의 입술이 열렸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본부에서 오랫동안 근무해 현장에 어둡습니다. 협력업체의 주요설비 현황을 시찰한다면, 엘텍전자에서도 기업협력 네트워크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겠죠.”
그로서는 의미도 없을 심각한 이유를 만들어낸 강주한이 말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 * *
「뻥치시네」
하선우는 핸드폰 화면 속의 글자를 오래도록 집중해 바라보았다.
이사는 가끔 드러내는 장난기로 인해 경박한 인상을 주긴 했지만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엘텍의 강 전무가 NnG의 제조시설을 시찰하러 온다는 얘기에 서른네 살이나 된 성인 남자가 ‘뻥치시네’라는 답장을 보낸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누구라도 강 전무가 보잘것없는 협력업체를 방문할 거라고 가설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만큼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얘기였다.
그 모든 혼란의 함축적인 의미를 이해한 하선우는 굳은 얼굴로 답장을 보냈다.
「지금 같이 일산 가는 중」
답신을 보내자마자 메시지가 왔다.
「말도안돼 왜????????」
키패드를 누르던 하선우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그 역시 옆에 앉아 있는 남자가 왜 느닷없이 회사를 시찰하고 싶다고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으므로.
답장을 보내려던 하선우는 검게 선팅된 차창을 보았다. 거울처럼 내부를 반사하는 차창 속에서 강 전무의 얼굴을 훔쳐보려던 하선우는 흠칫했다. 검은 유리에 핸드폰의 화면이 또렷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강 전무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선우는 목을 긁는 헛기침을 내며 핸드폰을 재킷에 집어넣었다. 얼마나 부주의하고 어리석어 보일지. 실수와 삽질의 연발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톨게이트로 진입하는 도로는 정체되고 있었다. 그리고 차 안의 공기도, 하선우의 머릿속도 바깥의 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강 전무는 조금 전 차에 탄 이후로 하선우의 말에 가끔 대꾸를 할 뿐,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사교적인 방식으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역할은 오롯이 하선우의 몫으로 남겨주었다. 강주한은 누군가의 기분을 맞춰주며 살아본 적도, 살 이유도 없었을 테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그는 나른한 가면을 쓴 고압적인 미녀처럼 하선우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네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충분히 분위기를 완화시킬 수 있음에도 마치 일부러 하선우를 긴장시키려는 것처럼.
강주한은 무감한 얼굴로 하선우의 옆에 있는 차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을 보는지, 차창에 비친 하선우를 보는지 알 수 없는 시선이었다. 정체되는 생각을 더듬은 하선우는 힘들게 말문을 텄다.
“엘텍 기획실과 제조업 분야의 환경이 많이 다르죠?”
강주한은 차창을 향하고 있던 얼굴을 하선우에게로 돌렸다.
“글쎄요. 제조업은 엘텍의 척추와 마찬가지기에 꾸준히 연구해온 분야라서 익숙합니다. 계열사 관리라는 포괄적인 경영에서 부분적인 경영으로 범위가 좁아졌을 뿐입니다.”
말 한번 어렵게 한다. 내심 생각한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물론 쉽다는 말은 아닙니다. 경영이 쉽지 않다는 건 하 사장이 더 절실하게 느끼실 테죠.”
“그래도 엘텍 같은 세계적인 기업을 경영하실 전무님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죠. 엘텍에 비하면 NnG는 구멍가게 수준인데요.”
“그렇습니까.”
하선우의 꾸민 말에 강주한은 건조한 웃음을 지었다.
“제 말은 하 사장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말이었습니다. 자본과 규모가 작을수록 변수에 더 휘둘리는 법이니까요.”
“사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마다 그런 위기는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도 오겠죠.”
물론 내키지 않는 소리였다. 열정적인 이사와 달리 하선우는 성공한 자들이 말하는 ‘너도 버티면 좋은 날이 올 거다’라는 감상적인 회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대답에 강주한은 대답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근거 없는 낙관으로 희망하기엔 상황이 쉽지 않을 때가 많죠.”
중소기업이 얼마나 힘든지 너도 알긴 아는구나. 속으로 생각을 굴리며 하선우는 대답했다.
“그렇죠. 그래도 일단 버텨야죠.”
자동차의 시트에 뒷머리를 기댄 강주한의 자세로 인해 하선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내리깐 듯 보였다. 그 자세로 강주한은 하선우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거의 어색한 느낌이 들 만큼.
“예상했던 것보다 긍정적인 분이군요.”
“그런가요. 하하.”
날 부정적으로 여길 일이 있었던가?
자문하던 하선우의 머릿속에 홍콩의 전시관 화장실에서 일어난 일이 스쳐 지나갔다. 재수 없어. 그 말을 떠올린 그는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하선우는 머릿속 생각을 치워버리고 재빨리 다음으로 이어나갈 화젯거리를 찾았다.
“협력업체 시찰은… 전에도 많이 해보셨겠죠?”
“거의 없습니다. 자회사 시찰도 아니고 협력업체에서 좋아할 리도 없으니까요. 불편한 부탁이었을 텐데 허락해준 하 사장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뇨. 회사 차원의 사기도 올라가고 오히려 저희가 더 감사하죠.”
엎드려 인사치레 받는 심정으로 웃었지만 하선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총수의 아들이 작은 하청업체를 방문했다는 소식은 내일쯤이면 수십 개의 협력업체에 퍼져 나갈 것이다. 회사를 시찰해본 강 전무의 반응을 보고 확정 지을 얘기지만, 사람들은 NnG가 엘텍전자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로 인해 어떤 특혜가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다. 섣부르거나 행동이 빠른 사람들은 잡주 취급받는 NnG의 주식에 관심을 기울일지도 몰랐다.
그런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올 만큼 자신이 강 전무에게 어필했던가. 하선우는 조금 전 엘리베이터 앞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 떠올렸다.
크게 확대한 고화질의 악수 사진에 하선우는 일종의 굴욕을 느꼈지만, 강주한은 반대급부로 만족을 느꼈을 수도 있었다. 마치 북한 수뇌부의 초상화를 집 안에 걸어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강주한의 곁에는 강 전무를 향한 하 사장의 애틋한 짝사랑을 과시할 관중까지 있었다.
자존심 버려가며 사장님 나이스 샷을 외치는 여직원이 이런 기분을 느낄까. 힘들게 끈적거리는 침을 삼키며 하선우는 생각했다.
사진 하나 때문에 NnG를 방문하는 것이라면 강주한은 의외로 아부에 약한 면이 있는 듯했다. 관중을 의식하고 과시하는 타입에다가, 아첨하는 인간에게 선뜻 호의를 가질 만큼 경솔한 인간일지도 몰랐다. 허울 좋은 칭찬에 마비되어 피를 빨리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형.
그는 정말 그런 인간일까.
하선우는 재벌가의 가십에 열 올리는 주간지와 여성월간지를 읽어보진 않았지만 강주한의 배경에 대해선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정도 정보는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귀를 열고 있는 한 절로 들어오는 이야기였다.
군부독재 시절 정부의 보조로 성장한 기업 중 하나인 호운(현재 엘텍)기업의 설립자 강보훈의 손자인 그는 흔히 재벌 3세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재계 7위인 안신물산 회장의 장녀 임용화와 강보훈의 둘째아들 강제한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밑으로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를 두고 있었다. 단 몇 줄만으로 간단하게 압축했지만 행간 속에는 수없이 많은 사건과 비화가 숨겨져 있었다.
그의 가정사는 한국 사회의 흐름과 기민하게 맞물려 있었고 때론 관통했으며 이따금 가장자리에서 에둘러 흐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강제한의 시대에 엘텍은 이미 재계를 주무르는 가장 큰손 중 하나가 되어 있었고, 그 관성의 흐름에 잠긴 강주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대하고 다각화된 계열사를 거느린 총수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불법과 합법적인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아버지의 소유를 상속받을 운명이었다.
강주한이란 인물을 되짚어본 하선우는 그의 어마어마한 뒷배경에 새삼스럽지만 다시 한 번 놀랐다. 그의 거대한 배경이 고작 서른넷밖에 안 된 강주한을 엘텍전자의 전무 자리에 앉혀놓는 데 당위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난해한 수학 문제를 만날 때 흥분하기보다는 차갑게 가라앉는 하선우는 지금 이 순간 역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허울 좋은 칭찬에 마비되어 피를 빨리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형’이란 판단을 유보했다. 그런 배경에서 태어났다면 귀 간지러운 아첨에 기뻐할 만큼 순진한 구석은 없을 것이다.
그는 결국 강 전무의 의중을 파악하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새까맣게 속이 타들어갈 바에 속 편하게 NnG에서 어떤 비전을 보았거나, 자신에게서 얻어낼 만한 것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선우는 검은 차창에 비친 강주한의 옆모습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잘 알지 못하는 인물이지만 아버지 세대에서는 강주한의 어머니인 임용화는 유명 인사였다. 6, 70년대 스타를 추억하는 TV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인 그녀는 신비주의 콘셉트의 원조 격으로 불리는 여배우였다. 흔한 스캔들 한 번 없었던 그녀는 안신물상 회장의 장녀이자 일류 여대를 졸업한 재원이며 배우였다. 보수적인 기업가 집안의 장녀로 화제를 모았던 그녀는 데뷔작부터 주연을 맡았고, 몇 편의 굵직한 영화에 출연한 후 연예계 생활을 은퇴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만난 강제한과 약혼식을 올리면서 호운(현 엘텍)가와 인연을 맺었다.
차창에 비친 그의 얼굴은 60년대 낮은 화소의 사진 속 여배우의 얼굴과 닮아있었다. 아몬드 형의 긴 눈매 위로 한 줄기 난의 곡선처럼 뻗어있는 얇은 쌍꺼풀과 숱이 많아 눈매를 짙어 보이게 하는 속눈썹이 특히 그랬다. 미간 사이에서 시작되는 보통보다 높은 콧대는 산정으로 이어지는 능선처럼 안정적으로 솟아있었고 볕이 드는 방향의 반대편으로 음영을 짙게 드리웠다. 검게 선팅된 차창의 어둠에 매몰된 그의 얼굴은 렘브란트의 유화처럼 종교적 서사 작품에 어울리는 인상을 풍겼다. 사람들의 해묵은 표현처럼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우아한 음울함까지 느껴졌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남자의 뺨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낮지도, 또 높지도 않은 각도로 융기된 광대 아래 그의 볼살은 아래로 얕게 꺼져 있었다. 마른 뺨은 남자답게 각진 턱으로 이어졌고 사내가 입술을 다물 때면 턱의 근육이 도드라지게 질끈거렸다. 때문에 인상적인 강주한의 뺨은 그를 사내다운 동시에 헐벗은 겨울나무처럼 수척해 보이게 만들었다.
하선우는 평범한 얼굴들만 마주 보다 수식이 많이 필요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복잡해졌다. 저런 얼굴을 보고 있는 것 자체가 일상 탈피였다.
재벌을 무조건 백안시하던 사람들이 강주한의 이야기만 나오면 말을 왜 아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분노와 논리만으로 그를 난도질하기엔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호기심이 부풀어 올랐다. 재벌은 싫지만, 은연중에 그의 부와 외모를 동경하게 되는 인지의 부조화를 불러일으켰다.
저런 놈이 좋다고 덤벼들면 누가 거부할까 싶었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인류가 멸망하는 날까지 영원할 것이다. 하선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시제품인가 보죠.”
강주한의 손에는 엘텍의 로고가 적힌 경량화된 PC가 놓여 있었다. 광고에서 보지 못한 걸 봐선 아직 테스트 중인 제품인 듯했다.
“최종제품은 아닙니다. 하드웨어 사양도 결정되지 않았고요.”
화면을 터치해 고화질의 전투 영화를 재생하던 그는 PC의 뒷부분을 손바닥으로 쓸며 말했다.
“발열이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게다가 자기방전율도 높죠.”
총을 든 군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총알을 난사하는 화면이 흘러나왔지만 하선우도 강주한도 영화의 내용에는 집중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완성도면… 곧 출시되겠는데요.”
“베릭스 제품을 벤치마킹해봐야죠. 그쪽 제품들은 불량률도 적고 한 달 기준으로 자기방전율이 6퍼센트 이내더군요.”
흠, 소리 내어 짧은 한숨을 쉰 그는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턱을 쓸었다. 반쯤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하선우의 무릎 위로 시선을 돌렸다.
“산원테크 제품의 단점이 바로 자기방전율을 높인다는 거죠.”
땀에 젖은 손을 닦느라 구겨졌던 하선우의 바지를 바라보던 강 전무는 눈을 들어 올렸다.
“테스트해보시겠습니까.”
강 전무는 들고 있던 PC를 내밀었다. 얼결에 전무로부터 PC와 부속품을 받아 든 하선우의 머릿속으로 염 사장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전무는 산원테크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을 토로했다. 염 사장이 전무에게 밉보인 일이 있나 싶었다.
“테스트라면…….”
“사용해보고 느낀 점을 간단하게 말해주면 됩니다. 배터리 외적인 부분도 지적해주면 좋고.”
하선우가 PC를 받아 들기 직전, 강 전무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태도로 말했다.
“이런 얘기가 부담스러우십니까.”
하선우는 이전에도 느꼈던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강 전무는 사람을 직시하는 버릇이 있었다. 마주 댄 손을 깍지 껴 옭아매듯, 자극을 남기는 시선이었다.
하선우는 성기게 쥐고 있던 주먹 사이를 벌리며 파고들던 남자의 차갑고도 단단한 감촉을 떠올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올곧게 시선을 맞추지만 온기가 배제된 시선은 차가웠다. 현미경으로 세포의 핵을 들여다보듯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런 방식이 사람을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지 강주한 스스로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하선우에게선 은연중에 방어적인 태도가 배어 나왔다. 눈치 빠른 그가 하선우의 거북함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조차 개의치 않았다.
“부담스러우시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책 한 권에 달하는 보고서라도 작성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하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협력업체에서 이런 일을 해도 될까 싶군요. 유출 문제도 있고.”
“유출하시려고요?”
강주한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차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보는 웃음이었다.
인간 조련 자격증이라도 갖고 있는 건 아닐까. 재벌가에서는 그런 교육도 하나. 하선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태 고압적인 태도로 기를 죽이더니 조촐한 연출만으로 인간미를 느끼게 했다.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가요. 비밀유지 계약까지 고려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인데요.”
강 전무의 웃는 얼굴에서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떼어낸 하선우는 손안의 작은 PC를 보았다.
제품을 테스트해 리뷰를 남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강 전무와의 만남이 뒤따라야 했다. 유출의 위험이 있는 제품이니만큼 테스트를 끝낸 PC를 택배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건 하선우의 처지를 생각할 때 건방져 보이기까지 했다. 보안을 위해서-는 명목이고 실제로는 테스트를 할 수 있도록 외부인을 끌어들인 강 전무의 친절함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시제품을 되돌려주려면 강 전무를 다시 만나야 했다.
강 전무의 모든 행동 뒤에 의도가 숨겨져 있지는 않겠지만, 충동적으로 뭔가를 저지를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새 차는 일산으로 진입해 있었다. 직장인들의 퇴근과 맞물린 시간이었지만 평소 지·정체 구간이던 시내의 도로에서 차가 막히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하선우는 차 앞으로 길이 열리는 인상을 받았다. 마치 도로 위의 모든 차들이 전무의 차를 피해 가는 느낌이었다. 하선우는 그가 타고 있는 차가 원인임을 깨달았다. 어떤 소시민도 강남 아파트 한 채에 버금가는 가격의 독일제 자동차 주변으로 달리고 싶지 않을 터였다.
전용 기사를 둔 오너들이 타는 쇼퍼 드리븐 타입의 차는 파티션으로 앞좌석과 뒷좌석이 구분되어 있었다. 은은한 조도로 어두운 실내를 밝히는 선루프 아래 엘텍전자의 로고가 붙은 LED 모니터가 세 대 연결되어 있었고,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 좌석처럼 시트와 작은 식탁이 설치되어 있었다. 개인 사무실로 사용해도 손색없을 것 같은 차량의 내부는 뭐든지 최고급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자재들로 마감되어 있었다.
상식의 틀을 벗어난 자본의 과시는 하선우의 패배감을 유발시키지 못했다. 부러움에 가슴을 뻐근하게 하지도, 신세를 한탄하게 하지도 못했다. 지나치게 현실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강주한의 부는 상상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높은 곳에 자리했다.
내일 이사에게 강 전무의 차를 탔다고 고백하면, 그 경험담은 마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처럼 진귀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 이사와 김 부장은 지금쯤 대만의 바이어를 대접하면서도 앉은 자리에서 1센티미터쯤 붕 뜬 기분을 맛보고 있을 테다. 더 이상 대만의 작은 중소기업과 체결한 협약에 집중할 신경 따윈 남아 있지 않을 것이므로.
하선우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들이 굴러가는 사이 강 전무의 차는 NnG의 제조공장에 도착했다.
시내를 벗어나 일산의 외곽에 위치한 공장은 경기권 내의 높은 땅값 때문에 임대로 얻은 것이었다. 조립식 패널을 이어 만든 창고의 겉면에는 암흑색 외벽 판이 가로로 붙어 있었다. 상록수 몇 개가 화단에 드문드문 심어져 있을 뿐 별다른 조경이 되어 있지 않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주변에는 오래된 빌라 몇 채와 논밭이 늘어서 있고 낡은 간판을 걸어놓은 슈퍼가 하나 있었다. 칠십 넘은 노인이 운영하는 슈퍼의 최대 고객은 공장의 직원들로 슈퍼는 담배와 군것질거리를, 공장은 고객을 상호 교환하며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슈퍼가 주변 부대시설의 전부였다.
오래전, 하선우는 열아홉 살의 풋풋한 대학생이던 시절 산업견학으로 엘텍전자 대전 사업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말솜씨 뛰어난 가이드와 버스를 대동해 엘텍의 50여 개에 달하는 공장단지를 방문했는데 지금은 처지가 바뀌어 엘텍의 전무가 하선우의 사업장을 방문하고 있었다.
㈜NnG 간판 밑으로 ‘믿음을 주는 NnG, 전자배터리 산업 부문 리더기업으로 도약하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현수막이 초라하게 펄럭였다. 설상가상으로 현수막을 고정한 네 개의 끈 중 하나가 끊어져 바람에 방정맞게 춤을 추며 NnG의 품위를 훼손하고 있었다.
그는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을 느꼈다. 본사 건물과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공장은 평소에 생각 없이 드나들던 곳이었지만 오늘따라 초가삼간처럼 초라해 보였다.
전무는 펄럭거리는 현수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12첩 반상에 익숙한 왕에게 김치와 간장종지뿐인 밥상을 들이미는 나인의 심정으로 하선우는 말했다.
“들어가실까요.”
“그러죠.”
두 개의 생산 라인 중에서 하나의 공장만이 가동 중이었다. 그나마 퇴근하려는 직원들을 엘텍의 전무가 방문한다는 전화로 붙잡아놓은 덕분이었다.
물론 생산부 과장은 이사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강주한 전무와 일산으로 가고 있다는 하선우의 말을 바퀴벌레 날개 비비는 소리쯤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결국 하선우의 짜증 섞인 호소를 반쯤 의심하면서도 받아들였다.
그 와중에 단단히 각오를 한 듯 과장은 강 전무의 방문에 북한 어린이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산부의 직원들이 연출한 장면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하선우는 시선을 느꼈다.
과장의 눈빛은 오묘했다. 저 융통성 없는 샌님이 무슨 수로 이런 거물을 낚아온 건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라인이 24시간 돌아가는 모양이죠.”
“예.”
이차전지는 대부분 주문생산방식에 의존하기에 지금 생산하는 전자부품 역시 지난달에 엘텍으로부터 수주받은 물건이었다. 여름까지만 해도 두 개의 공장을 모두 가동했지만 8월부터 서서히 주문이 줄어들어 현재는 한 개의 공장만 가동 중이었다.
올해까지만 계약이 체결된 탓에 단순히 생산 감산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생산 중단으로 끝날 것인지 알 수 없는 실정이었다.
“단지 내에 공장이 두 곳이던데 하나만 가동 중인가요.”
“예. 가을부터 수주가 줄어들어 한 개 라인만 가동 중입니다.”
계절적으로는 성수기였고 엘텍전자 역시 흑자 고공행진을 기록하고 있는 요즘이었지만, 곧바로 NnG의 매출 증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염 사장이 있는 산원테크가 연이어 단가를 인하해 어쩔 수 없이 NnG 역시 단가를 낮춰야 했고, 최근 들어 간신히 적자를 면하는 수준이었다.
“아마 연말 재고 조절 때문일 겁니다. 관례적인 일이죠.”
심각하지 않게 하선우의 말을 넘기며 강 전무는 공장의 곳곳을 살펴보았다. 그는 줄지어 늘어선 대형 프레스 기계 앞에 멈추어 섰다.
“월 몇 만 개 생산 가능하죠.”
“공장 모두 24시간 최대 가동하면 30일 기준 30만 개 생산 가능합니다.”
강 전무는 표정 없이 레일을 타고 움직이는 부품을 보았다. 한참 동안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부품을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생산율이 상당히 낮은 편이군요. 산원테크의 경우는 350만까지 생산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선우는 설비투자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엘텍전자 임원을 사촌으로 둔 덕분에 설비투자와 무담보 대출을 받는 것도 염 사장의 수완이자 능력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특허는 NnG가 많습니다.”
하선우는 거슬리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 웃었다. 기계의 무지막지한 압력과 절단에 찍혀 나오는 은빛 각형을 바라보던 전무가 뒤를 돌아보았다.
“국제 특허도 중소기업치고는 상당히 많이 출원한 편입니다. 제품 제조량이 산원테크 대비 적긴… 하지만.”
자랑해도 부족할 판에 변명을 둘러대듯 말하고 있었다. 목 안에서 정면으로 맞서는 말들이 메아리쳤지만 하선우는 입을 다물었다. 전무는 하선우의 방향으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계신다고요?”
“예. 특허정보원에서 전지 분야를 검색해보니 하선우 씨 이름이 끝도 없이 나오던데요.”
하선우의 입술이 조금 멍청하게 벌어졌다.
“하 사장의 나이나 경력에 비해 특허가 많아서 놀랐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특허 발명자가 하선우 씨 이름으로 되어 있는 게 많더군요. 뿐만이 아니라, 출원자도 대부분 하선우로 되어 있더군요. 보통 개인의 이름보다는 회사 이름으로 출원을 내지 않던가요.”
대기업의 경우, 연구원 개인이 뛰어난 아이디어를 고안해내더라도 특허권은 대기업이 가져가곤 했다. 연구원이 회사에 소속되어 있고 회사에서 연구개발 비용을 지원하는 데 대한 대가였다. 특히 엘텍이 가지고 있는 특허는 수만 개에 달했다. 이는 엘텍이 전자 부분에서 세계 점유율을 높이고 다른 기업의 진입을 방어하는 동력 중 하나였다.
“하 사장이 마음을 바꿔 회사를 옮기면 NnG가 상당히 곤란해지겠더군요.”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제가 곧 NnG니까요.”
불쾌한 말이었지만 하선우는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에 강주한은 그렇습니까, 웃음으로 응수했다. 입술만이 아니라 응시하는 눈도 웃고 있었다.
하선우는 강 전무가 왜 방문했는지, 어렴풋이 윤곽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술문의나 설비투자, 신기술 자금지원, 그것도 아니라면 공동사업이라도 제안하려는 듯했다. 물론 이런 절차는 보통 지원팀이나 정보파트에서 접근하기 마련이다. 강주한 같은 경영자는 보통 사업적인 부분에 관심을 둘 뿐 기술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른 꿍꿍이가 있나 싶었지만 전무는 그에 대한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았다. 대신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다쳤나 보죠.”
“네?”
“좀 전부터 계속 다리를 끌던데.”
강 전무의 시선이 하선우의 왼쪽 다리를 가리켰다.
“넘어졌을 때 심하게 다친 모양이죠.”
엘리베이터 앞 참극을 떠올리게 하는 말에 목을 긁는 헛기침을 내려던 하선우는, 대신 굵은 이물감을 느끼며 마른침을 넘겼다.
“그렇진 않습니다.”
화제를 넘어가려 했지만 강 전무는 이유를 재촉하는 얼굴로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바뀐 일정 때문에 구두를 급하게 빌려 신고 왔더니 맞지가 않더라고요.”
“발뒤꿈치가 벗겨졌나 보죠.”
“예. 좀.”
공장을 걸어 다니는 동안 구두의 테두리에 하선우의 뒤꿈치가 마찰되었다. 피부가 벗겨져 아파 죽을 참이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강 전무는 눈썰미 좋게 눈치채고 말았지만.
꽉 묶었던 끈이 느슨해져 헐렁거리는 하선우의 구두를 내려다보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맞추며 말했다.
“일단 나가죠.”
강 전무는 하선우보다 먼저 밖으로 나갔다.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을 때 강 전무는 공장단지를 벗어나 이차선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지켜보던 하선우는 전무가 슈퍼를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콘크리트 벽에 녹슨 파란색의 슬레이트 지붕을 씌운 초라한 슈퍼와 강 전무라니. 인상 깊은 부조화였다.
고동색의 알루미늄 미닫이문 안으로 슈퍼의 주인인 할머니가 움직였다. 장판에 앉아 TV를 보던 그녀는 강 전무의 말에 뭔가를 주섬주섬 찾고 있었다. 하선우는 도로를 건너려 했지만, 때맞춰 한산하던 이차선의 국도 위로 트럭의 행렬이 지나갔다.
한참 뒤에 자욱하게 눈앞으로 날리는 먼지를 쫓아낸 하선우는 슈퍼로 뛰어갔다. 그는 이미 문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받아요.”
강주한의 손에는 네모난 곽이 들려 있었다. 담뱃갑인 줄 알고 손을 저으려던 하선우의 시선이 갸름해졌다. 일회용 밴드 상자였다.
“받죠. 하 사장.”
“고맙…습니다.”
뜻밖의 친절에 굳은 하선우의 곁을 지나며 강 전무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이제 퇴근하고 집에 갈 겁니까?”
“예. 그래야죠.”
“그럼 집까지 데려다줘야겠는데요.”
“예?”
“안 비서가 호텔에 두고 왔던 하 사장 차를 끌고 일산 오는 중인 거 아시죠. 방금 전화 왔는데 서울 톨게이트도 못 벗어났다고 하더군요. 부근에서 연쇄 추돌사고라도 난 모양입니다. 데려다드릴 테니 차에 타시죠. 집이 목동이죠?”
하선우는 강 전무에게 거주지를 말했던 기억이 없었다. 표정이 굳기 직전, 하선우의 의심은 곧바로 해소되었다.
“하선우 씨 자동차 내비게이션에 집 설정이 목동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가죠.”
“전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안 비서님 오시면 차도 받아야 하고요.”
“안 비서에겐 서울로 돌아가 하선우 씨 오피스텔에 차를 주차해두라고 했습니다. 지금 되돌아가는 중일 겁니다.”
꼼짝없이 강 전무의 차를 다시 타야 했다.
호의를 가장해 사람을 휘두르는 데 익숙한 전무를 거절할 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자신의 친절이 배려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밀어붙이는 남자에게 결국 하선우는 휘둘려주기로 했다.
“그럼 이제 돌아가죠.”
차를 가리키며 도로를 건너려는 강주한에게 하선우는 말했다.
“잠시만요, 전무님. 이것만 붙이고 가겠습니다.”
하선우는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달칵달칵 흔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슈퍼 앞에는 파란 플라스틱 의자와 원형의 간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로 라면국물이 말라 비틀어져 있고, 의자 위에도 도로의 먼지가 뽀얀 분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의자에 털썩 앉아 대뜸 신발을 벗으며 양말을 반쯤 끌어 내렸다.
커다란 신발 안에서 헛도는 발을 지탱하느라 발뒤꿈치가 온통 까져 있었다. 군데군데 보기 흉한 물집도 잡혀 있었다. 일회용 밴드를 꺼내 포장을 벗겨내던 하선우는 갑자기 웃음이 났다.
초라한 슈퍼 앞 지저분한 의자에 앉아 발뒤꿈치에 밴드를 붙이고 있는 저를 기다리는 전무라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사진을 찍어 사무실에 붙여놓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선우의 이런 속내를 알 리 없는 그가 입을 열었다.
“키에 비해 발이 작군요.”
“남자치고는 좀 작은 편이죠.”
양말을 당기며 하선우는 자신의 바로 앞에 서 있는 강 전무를 보았다. 언제 앞으로 다가온 건지 이마에 전무의 허벅지가 닿을 듯 가까웠다. 어색한 거리였다. 서둘러 신발 끈을 고쳐 묶고 하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뭘요.”
여상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인 강주한은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뒤에 도로를 건넜다.
“힐 때문에 발 아프다고 투정 부리던 아내 기다리는 기분이던데요.”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지만 명확하게 들렸다.
원래 묘한 말을 흘리고 다니는 편인가.
곁눈으로 큰 보폭으로 걷는 강 전무의 발치를 보며 하선우는 말했다.
“많이 기다려주셨나 봐요. 생각보다 다정하신데요.”
“이게 다정한 건가요.”
그가 설핏 웃었다.
“기다림에 익숙합니다. 끌리는 사람에 한해.”
하선우는 녹이 슨 기계처럼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숨을 멈춘 채로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강 전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전무의 옆얼굴을 응시하던 하선우는 자신이 그를 너무 힘주어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눈을 낮추려 했지만 그가 먼저 옆을 돌아보는 바람에 시선이 얽혔다. 끝까지 시선을 피하려 하지 않았지만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며 차오르는, 알 수 없는 밀도에 하선우는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 * *
일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뻥 뚫려 있었다. 속도를 높여 달렸지만 하선우는 거의 속도감을 느끼지 못했다. 파티션으로 운전좌석과 뒷좌석을 구분해놓은 데다가 곁에선 강 전무의 조용조용한 낮은 목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지면을 구른 타이어가 소음만을 따돌리고 앞으로 나아가기라도 하는 듯 실내는 조용했다. 그래서 하선우는 강주한이 전화를 끊지 않길 바랐다.
하선우가 속으로 빌자마자 바람이 무색하게 전무는 통화를 끝냈다. 다행스럽게도 하선우가 할 말을 마련하려 고심하기 전에, 난처한 얼굴로 강 전무는 말했다.
“집에 손님이 찾아온다는군요. 하 사장님과 저녁이나 같이 하려 했는데 미안하게 됐습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 사장에게 무리한 부탁만 하고, 이거 참 염치없군요.”
“찾아와주셔서 감사하죠. 오히려 저희 쪽에서 저녁을 준비해야 했던 건데.”
하선우는 적당히 살가운 태도로 아쉬운 듯 말했다. 이대로 흐지부지되길 바라는 마음에 말을 아꼈지만 강 전무는 가라앉아가던 화제를 또 한 번 건져냈다.
“다음 주 토요일 저녁에 시간 비워두시겠습니까.”
“음, 30일 말씀이시죠.”
“예.”
공교롭게도 30일은 어머니가 김장을 담가야 하니 집에 들르라고 엄포를 놓았던 날이었다. 배추를 소금에 절여놓느라 고생한 어머니는 육체의 고통을 호소하며 자식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고 강요할 것이다.
평년에 하선우는 분당의 본가로 내려가지 않으려 온갖 변명을 꾸며냈지만, 올해는 ‘강주한 전무와 저녁 약속이 있습니다.’ 한마디면 될 것 같았다. 어머니는 원더우먼이 되어 홀로 김치 300포기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상류사회 계층의 아이콘인 강주한과 저녁 식사를 하는 아들이라니. 여자는 분명 아들이 사회의 주류 속에 편입했다고 생각할 터였다.
김장이냐, 강주한과의 고급스런 저녁 식사냐. 우스꽝스러운 날 선 갈등 속에서 이성은 강 전무와의 저녁 식사를 허락하라고 말했다. 물론 김장 때문은 아니었다. 본능이 거부한다고 머리까지 외면할 만큼 하선우는 제멋대로 사는 남자가 아니었다. 갑과 을의 입장에선 마주치기 싫은 인물이지만 경영자로서, 전무와의 저녁 식사는 하선우에게 불가항력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미래에 다녀오지 않아도 그날의 저녁 식사 자리가 숨 막힐 듯 불편한 자리란 걸 예상할 수 있지만, 적어도 엘텍전자와의 계약 연장에 관한 얘기는 꺼내볼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하선우는 결론을 내렸다. 강 전무는 자신에게 어떤 볼일이 있는 모양이라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일산으로 시찰을 가고 싶다고 했던 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계획된 뭔가에 의해서였을 거라고. 접근하는 목적이 있다면, 계약 연장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쉬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비로소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찰나의 순간 동안 모든 판단을 신중히 내린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도 비워두겠습니다.”
허물없이 웃으며 대답하자 강주한이 만족한 듯 마주 웃었다.
“성격 시원하시군요. 메뉴는 제가 정하도록 하죠.”
약속 시간과 장소는 구체적으로 전무에 의해 정해졌다. 양천구로 진입하는 도로는 한산했다. 전무의 차는 일방통행로로 들어섰다. 오피스텔 앞 도로에 하선우의 흰색 소나타가 주차되어 있었다.
강주한의 비서가 보닛 앞에 정자세로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선우보다 적어도 10년 이상 연배가 있어 보이는 그의 태도는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밖은 추웠다. 목덜미를 파고드는 찬바람에 근육이 난데없이 경직될 정도였다. 비서가 보조석에 착석한 뒤에도 전무의 차는 떠나지 않았다. 검게 선팅된 차 속에서 전무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하선우는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예상대로 차창을 내린 전무는 하선우를 보고 있었다.
“토요일 오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다음 주에 뵙죠. 들어가십시오. 전무님.”
하선우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그가 웃는 얼굴로 손가락 한 마디만큼 고개를 까딱였다.
전무의 검은 차가 도로로 합류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하선우는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세탁기에 탈수된 빨래마냥 진력이 빠졌다.
지나친 긴장에 위장도 위축됐는지 허기도 느낄 수 없었다.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이사에게 전화를 걸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하선우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추어 선 채 오래도록 강주한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선우는 강 전무의 성격을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말을 적게 하는 편이 아님에도 강 전무는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을 삼갔다. 그는 주로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뻔하디뻔한 관용적인 표현들을 사용했다. 성격이 급하거나, 여유롭거나, 유하거나, 감정적이거나, 비틀렸거나. 어느 것 하나 강 전무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하선우는 고단한 피로가 육체 속에 버젓이 남아 있음에도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반나절 동안의 사건이 모두 꿈속에서 일어난 일 같았다. 조금 전까지 얼굴을 맞대고 있던 강 전무가 하나의 개인으로, 보편적인 정서를 가진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덩어리진 흑암색 안개를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 안개 속에 질퍽거리는 광포한 열기가 숨겨져 있을지, 차디찬 냉매가 흐를지, 그것도 아니면 건조하게 부스러지는 허무만이 존재할지. 하선우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 *
이번이 벌써 네 번째 방문이지만 최종완 교수는 위축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개를 꺾어도 시야 안에 모두 들어오지 않는 높은 담벼락을 지나면 자동차를 타고 등선을 따라 이차선의 길을 또 올라간다. 규모가 작은 대학의 캠퍼스처럼 숲의 곳곳에 듬성듬성 건물이 숨어 있다. 몇 번의 커브를 돌고 진입로에 들어선 그는 방문객용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뒤에 안내인의 안내를 받아 본관 안으로 들어선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3층 건물의 본관과 정원을 지나 또 다른 건물로 들어서면 골드 라임스톤이 깔린 기다란 복도가 나온다. 은은한 아마빛의 실크벽지에는 저명한 화가의 진품이 걸려 있고, 그 사이사이마다 생화가 꽂힌 꽃병을 놓은 호화로운 콘솔이 배치되어 있다. 거대한 적색의 원목으로 지은 나무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분위기가 바뀐다.
사면은 물론 천장과 바닥까지 유리로 지어진 별채였다. 등 뒤로는 북한산이 솟아 있고 왼편으로는 저 멀리 북촌 한옥마을이, 오른편으로는 경복궁을 두고 있었다. 지대가 높은 산등성이에 지어진 곳이었기에 그 자체가 야경이 아름다운 스카이라운지였다.
뿐만이 아니었다. 별채는 기둥으로 바닥을 받쳐 공중에 띄워져 있었는데 건물 아래에 늪이 있었다. 자연 늪지처럼 보이지만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뛰어난 조망권만으로도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마치 우포늪 한가운데 별장을 지어놓은 듯해서 더더욱 인상적이었다.
등 뒤의 암벽산은 평화롭게 산세를 감싸 안았고 검은 하늘에는 별처럼 보이는 인공위성이 반짝였으며, 저 멀리 도심은 금가루를 뿌려놓은 것처럼 야경이 빛났다. 유리바닥 아래로 수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밀생한 억새풀이 처연하게 고개를 떨어뜨리고 가늘게 부는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별채는 건물 전체를 유리로 지어 안에서 밖의 풍광을 즐길 수 있지만, 밖에서는 내부를 볼 수 없는 구조로 지어져 있었다. 게다가 외벽은 유리창형 태양전지 자재를 이용한 것이었다.
보편적이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곳에 모여들어 있었다. 상용화 초반 단계의 기술이 집약된 건물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고가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교수는 새삼 놀라웠다. 오늘 최 교수가 만나는 그는 이곳을 주거공간이 아닌, 단지 휴식을 취하려 잠시 이용하는 방으로 사용할 뿐이었다. 교수의 상식선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부(富)였다.
국내 최고의 공과대학으로 불리는 선일 과학기술대학의 친환경에너지공학부 최종완 교수가 이곳으로 초대된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엘텍전자의 강주한 전무가 개인적으로 뵙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고 조교가 전했을 때 최 교수는 처음에 믿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남겨진 연락처에 전화를 했을 때 전무의 비서가 받았고 농담조는 손톱만큼도 없는 진지한 대화에 비로소 최 교수는 전무가 자신을 만나려 한다는 걸 믿게 되었다.
그가 자신을 만나는 이유는 간단했다. 모기업인 ㈜엘텍 그룹 기획실에서 엘텍전자로 자리를 옮긴 그는 전자 분야가 낯설었던 만큼 사업의 세밀한 부분을 개론적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전무가 관심을 가진 친환경에너지도 그중 하나였는데, 때문에 그 분야의 권위자인 최종완 교수를 개인적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만남은 특이하게도 일대일 수업의 형식으로 이뤄졌다. 매일같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였지만 강주한 전무를 가르치는 일이 마음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적인 만남이었음에도 비밀유지 서약서를 써야 했고, 가르침을 받는 그보다 가르치는 교수가 더 진땀을 뺐다. 하지만 엘텍전자와의 인연이 이대로 이어진다면 엘텍으로부터 더 많은 연구지원 자금을 받아낼 수 있을 터였다. 운이 좋다면 지금의 학장 자리에서 총장까지 오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강 전무를 기다리는 동안 최 교수는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집무실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서재에 꽂힌 책의 목록을 살펴보던 교수의 눈에 액자 속 사진이 들어왔다.
젊은 여인이 어린 두 아이를 돌보는 사진이었다. 두 아이는 이란성 쌍둥이 남매였고 여자는 그들의 어머니였다. 강주한의 전 아내인 서유임이었다.
정치와 사회 소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정 교수지만 강주한의 결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맥락을 파악하고 있었다. 육 년 전 스물여덟 살의 강주한은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오면서 스물일곱의 서유임과 결혼식을 올렸다. 세간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던 그들의 결혼은 사회, 정치, 경제면으로 많은 파란을 일으켰다.
서유임의 아버지는 진보 정권으로 불리는 야당의 대표 최고의원이었다. 엘텍 총수의 아들이 재벌도, 언론가도 아닌 노동자 출신의 야당 대표의 딸과 결혼한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야당이 진보 신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격렬한 반감과 조롱, 사랑에 대한 감상적인 환상, 환영과 우려 속에서 사회는 분열증을 일으켰다. 그리고 진보와 개혁의 이미지에 찬물을 끼얹은 이들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혼생활을 유지한 지 3년째 되던 해 서유임은 자동차가 전복되는 사고로 사망했다. 미국의 엘텍 지사에서 머물렀던 강주한은 급히 국내로 귀국했고, 장례는 기자들의 출입제한 속에 치러졌다. 그 후 그는 오랫동안 삼청동의 자택에서 칩거하였고 초췌한 그의 사진이 인터넷으로 몇 차례 유출되었다.
그가 외부활동을 모두 근절한 동안 강주한에게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애처로운 남자라는 타이틀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그 타이틀은 그에 대한 모든 증오를 흡수해버렸다. 증오를 품어온 시절에 비해 지나치게 빠른 사면이었다. 그리고 대중은 그것에 대해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애틋한 단어의 나열이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에 의해 그는 가공되었고, 결국 강주한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존재로 비쳐졌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흑막 속에 감춰진 계략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호사가들은 떠들어댔지만 세상은 답을 요구하지도 요구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엘텍은 서유임에 대해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강 전무는 최 교수를 오래 기다리지 않게 했다. 프린트된 종이와 몇 종류의 책을 들고 온 그는 녹색의 카디건을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최 교수님.”
“아닙니다. 방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설핏 웃은 그는 최 교수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그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종이에는 메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일주일 전 이곳에서 수업했던 유기 용매 전해질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려우셨죠.”
“예. 특히 이온 이동도 향상을 위한 저점도 용매 부분이 난해하더군요.”
강주한은 반복된 구김에 하얗게 닳은 그림을 가리켰다.
개론적으로 파악한다고는 해도 이차전지는 일반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였다. 경영자로서 세부적으로 다룰 필요도 없는 분야임에도 그는 묵묵히 진도를 따라왔다. 어려운 이론을 배우고 나면 보통 뿌듯해하거나 자랑하기 마련이지만 그는 그런 면도 없었다. 오히려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하길 원했다. 다소 집착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몇 번의 만남으로 그런 판단을 내리기는 무리였다. 최 교수는 강 전무에 비해 스물한 살이 더 많았지만, 연장자라고 해서 그가 편한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어려도 그는 여전히 대하기 어려운 사내였다.
강 전무의 계속되는 물음이 소강된 것은 9시가 넘어서였다. 이국의 과일을 담은 접시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담은 그릇이 트레이에 실려 집무실에 배달되었다. 몰입의 분위기에서 벗어난 최 교수는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교수가 만들어온 스크랩북을 한 장 한 장 가볍게 넘겨보던 강주한의 움직임이 천천히 느려지다 정지했다. 파일을 멍하니 응시하기만 할 뿐, 내용에 집중하는 것 같지 않았다. 과일을 소리 없이 우물거리며 씹던 최 교수는 곁눈으로 강 전무를 흘깃거렸다.
“최 교수님.”
과일을 얼른 꿀꺽 삼키고 최 교수는 대답했다.
“예.”
“교수님은 선일 대학교에서 언제부터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까.”
“교편을 잡은 지요? 하하, 전임강사부터 시작해서 벌써 17년 되었습니다.”
“화학공학부에서 학생들을 계속 가르치셨겠군요.”
“예. 그랬지요.”
구체적으로 좁혀지는 질문에 최 교수는 포크를 슬그머니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럼 하선우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하선우…란 사람이요?”
전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최 교수는 미간을 좁힌 채로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익숙한 느낌의 이름이었다. 이름을 곱씹자 최 교수의 뇌리로 스치는 얼굴이 있었다.
“아… 하선우 학생 말입니까. 잘 알죠.”
웃으며 최 교수는 말을 이었다.
“선우가… 음, 워낙 인물이 출중해서 눈에 띄었죠. 집안 내력도 특이해서 교수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녀석이었습니다.”
“특이하다뇨.”
“녀석 집안이 의사 집안이거든요. 아버지 의사에 형제 셋 모두 의사인데 선우 혼자 고등학교 조기 졸업하고 공대에 왔어요. 선우 정도 성적이면 의대 가려고 하고, 또 과 내에서도 반수다 뭐다 해서 의대로 많이 빠졌던 걸 고려하면 특이하죠. 인물 뛰어난 데다가 머리도 좋고 신념도 있으니 교수들한테 예쁨받았죠.”
교수의 환해진 얼굴을 보며 강 전무는 계속하란 듯이 응시했다.
“화공과 내에 창업동아리가 있었는데 제가 담당했던 동아리였죠. 선우가 동아리 회장 맡아서 도 대회도 나가고 상금도 타고, 아주 부지런했어요. 적극적인 성격은 아닌데 주변에 사람이 많았어요.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늘 꼬이는 부류라고 해야 하나, 공대에 얼마 없는 여자애들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니까요. 하하.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연락이 거의 끊겼지만, 간간이 듣기로는 사업한다고 하더군요. 외국 대학 연구원 자리도 마다하고 국내에 남아있으니 한 번 만날 법도 한데…….”
강 전무는 유리바닥에 시선을 던지며 묵묵히 최 교수의 말을 듣기만 했다. 신이 나 너무 떠들었나 싶어 머쓱했던 최 교수는 비어있는 전무의 잔에 차를 따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선우는 왜…. 그 친구를 잘 아십니까?”
강 전무의 시선이 최 교수를 향했다 다시 바닥으로 돌아갔다.
“잘 모릅니다.”
잔을 들어 올린 전무는 눈길을 투명한 유리바닥으로 던졌다. 늪지 위로 부는 스산한 가을바람에 뒤엉킨 억새풀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앙상한 몸을 애처롭게 비벼 대는 그 모습을 응시하며 그는 말했다.
“알고 싶기는 하군요.”
* * *
전화기를 쥐고 있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으로 전화를 다시 쥐어 잡으며 통화볼륨을 낮추는 버튼을 꾹꾹 눌렀다.
-듣고 있어?
“응.”
하선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자고 있는 이석을 확인한 그가 화장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근 그는 벽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소개팅?”
-어. 좀 만나줘라.
“날 어디서 봤다고.”
-산악회 갔을 때 찍었던 사진 있잖아. 그거 보고 계속 졸라대서.
“산악회? 언제 우리가 갔었… 아… 한라산? 그거 벌써 4년 된 사진이잖아.”
하선우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 어때.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바 없고만.
“20대 때랑 지금 나랑 같아? 됐어.”
-그러지 말고 해봐라. 너답지 않게 왜 빼.
“나 요즘 정신없이 바빠.”
-내일은 약속 없다며. 하루만 빼봐라. 어? 한 번만 해줘.
“흠. 글쎄다.”
-야. 하선우 빼지 말고.
“……내일이면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싫다는 말 대신 일단은 거리를 두는 대답에 전화 건너편의 남자가 웃었다.
-내일 아니면, 시간은 나냐?
“장담 못하지.”
-됐어. 그럼 내일로 정해.
약속을 결정하는 말에 하선우는 “그래, 그러든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런 하선우의 반응에 건너편에서 각을 돋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야. 안 내켜? 이젠 설레지도 않냐?
“설렘은 개뿔.”
피식거리는 대꾸에 전화 건너편에서도 같은 웃음이 돌아왔다. 좋은 인연에 대한 기대감으로 풋풋한 설렘을 느끼던 일이 까마득하기는 저쪽도 마찬가지였던 탓이다.
나이가 점차 들어감에 따라 별것 아닌 사람들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습관이 되었고, 거기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을 만큼 원숙해졌다. 이곳에서 인생의 반편을 만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요원한 일이었기에, 신중을 기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소개팅은 별일 아닌 일이 되었다. 그래도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호감을 가진 사람 한두 명쯤 있다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소개팅 상대의 기본적인 정보만을 확인한 하선우는 통화를 끝냈다. 화장실 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생각을 고쳐 거울 앞에 섰다. 좌골 위에 두 손을 얹고 느슨하게 고개를 쳐든 거울 속의 자신을 감상했다. 곧 그의 눈매가 거슬리는 것을 쳐다보듯 얄팍해졌다.
그는 늘 자연스러운 멋을 추구하는 편이었다. 평상시에 즐겨 입는 옷도 가벼운 단카라 니트와 폴로셔츠, 캐주얼 재킷류의 편안하면서도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패션에 관한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과도하게 꾸민 티를 내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몇 대 몇으로 가르마를 탄 머리라든가 칼처럼 날을 세운 슈트, 거울처럼 광을 낸 구두 같은 것은 종이처럼 얄팍한 그의 패션 신조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선우는 지나치게 신경 써서 오히려 촌스러워 보이는 모습으로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중후한 멋을 내려 앞머리를 뒤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지만 무게감을 주기는커녕 풋내 나는 청년처럼 보였다. 그가 반감을 느껴온 패션 센스로 범벅이 된 채.
새 구두와 새 정장, 새 셔츠와 새 넥타이는 물론 고급 헤어살롱에서 머리 스타일까지 바꾸었다. 거울 속 지나치게 반듯한 남자의 모습을 보며 하선우는 자신을 향한 어머니의 강한 애착에 반감을 느꼈다.
그의 어머니인 권정옥 여사는 정자동의 한마음 아파트 단지 내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들 셋 모두를 명문 의대에, 막내아들을 한국 최고의 과학기술대학에 입학시킨 그녀는 자식교육의 성공적인 모범이 되는 어머니상이었다.
그녀가 한참 치맛바람을 일으키던 현역 시절, 동네 어귀로 들어설 때 아파트 단지 입구에 네 형제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형제들은 대학 입학의 어드밴티지를 위해 분기마다 경시대회에 참가했고 적어도 장려상 이상의 상을 받아왔다. 그중에서도 막내 하선우의 활약은 가장 두드러졌다. 이과 부분에 한해 특화된 두뇌를 가졌던 하선우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수학과 과학 경시대회는 거의 빼놓지 않고 참가했고 그의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있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 되었다. 덕분에 같은 아파트에 사는 주민 중에서 하선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말 잘 듣는 아들들을 둔 덕분인지 그들의 가족은 대체로 화목한 편이었다.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한 하선우가 의대에 가지 않겠다고 똥고집을 부리며 입학원서를 기술대학에 몰래 냈을 때를 제외하곤 가족 간의 언성이 높아졌던 일도 없었다. 그들의 집안은 타인의 눈으로 보기에 가장 행복의 근사치에 도달한 이상적인 가정이었고 실제로도 행복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막내아들이 빚을 지고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일이 종종 있었으나, 가세를 기울게 만들고 행복에 못질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대학 입학 때부터 삐끗한 아들이 못마땅했지만 천천히 원금을 갚아나가는 하선우를 보며 목구멍까지 나온 불만의 소리들을 꾹 눌러 참곤 했다.
그리고 어제 저녁. 아들에게 김장하러 오라고 전화를 걸었던 권 여사는 불안한 막내아들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그 계시적인 빛은 아들이 도내 경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을 때완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반짝거리며 빛났다.
다음 날 그녀는 절인 배추도 내팽개치고 아침부터 서울로 올라왔다. 태평하게 늦잠을 자고 있던 하선우를 닦달하여 백화점으로 끌고 갔다. 평소에 얼굴 보기 힘든 첫째 형까지 동원된 쇼핑이었다.
흡사 수험생 자녀를 둔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녀는 아들의 변신을 위해 분투했다. 백화점 매장을 돌 때마다 하선우는 조금씩 짜증이 치밀었지만, 곁을 보디가드처럼 지키고 선 첫째 형 때문에 얼굴을 굳히는 게 고작이었다.
‘얘 좀 봐. 해줘도 뭐라고 그래. 선혁아. 얘 좀 혼내봐라.’
‘선우야. 너 지금 불만 있는 거냐.’
첫째 형의 반항을 허락하지 않는 엄한 눈초리에 그는 묵묵히 두 사람의 뒤를 따라다녔다.
하씨 집안의 형제들은 우애가 좋은 편이었지만, 가부장적이고 엄격한 아버지의 성격을 기반으로 집안 분위기가 조성되었기에 위계질서가 확고한 편이었다.
형제들이 모두 분가하기 전까지 한밤중에 라면을 끓이거나 슈퍼에 심부름을 가고, 물을 떠오는 것은 언제나 하선우의 몫이었다. 형제들에게 하선우는 자랑스러운 동생이자 가끔 반항하긴 하지만 금세 제압할 수 있는 만만한 동생이었다.
“어? 언제 왔… 이야, 때깔 봐라. 완전 힘줬는데.”
소파에 게으르게 들러붙어 있던 이석은 졸음이 남은 얼굴로 한마디를 더 첨언했다.
“장가 가냐?”
어깨를 으쓱인 하선우는 화장실에서 나왔다. 배를 벅벅 긁으며 이석은 웃었다.
“영화제 레드카펫 밟아도 되겠어?”
“여태 시달렸어. 그만해.”
“머리도 자른 거냐?”
“응.”
“옷도 사고?”
“속옷 빼고 다 바꿨다.”
하선우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하선우를 위아래로 살피던 이석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진짜 지극정성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하선우는 커피테이블 위에 쌓아두었던 서류들을 정리했다.
“너희 어머니 학부모 운영위원회 회장 같은 거 하지 않으셨냐?”
“큰형 초등학교 들어가자마자 녹색어머니 위원회에서 교통안전 도우미 하셨다고는 하더라.”
“너 학교 다닐 때 어머니 치맛바람 장난 아니었지?”
“좀 극성이긴… 하셨지.”
슬리퍼를 직직 끌며 냉장고 앞으로 걸어간 이석이 생수의 뚜껑을 비틀어 열며 웃었다.
“너랑 결혼할 여자 고생 좀 하겠다.”
가벼운 농담조의 말에 하선우의 시선이 아주 조금 들어 올려졌다.
“글쎄.”
의미 없는 바닥의 타일무늬에 초점을 맞춘 하선우는 눈을 느릿느릿 몇 번 깜빡인 뒤에 말했다.
“어떤 여자든지 상관없다고 며느리 욕심 안 낼 테니 결혼만 하라던데.”
“너희 어머니가? 올해 들었던 말 중에서 제일 어처구니없다.”
하선우의 말을 실없는 농담으로 넘긴 이석은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근데 너희 어머니 나 싫어하시냐.”
“갑자기 그건 뭔 소리야.”
“아닌 게 아니라 전부터 묘하게 느꼈어. 오늘 아침엔 특히 심했고. 내가 딸내미 덮치기라도 한 것처럼 기겁하시는데 …아, 진짜.”
하선우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뭐라고?”
“너희 어머니가 나 노려보셨다니까.”
“설마.”
“진짜야.”
목소리를 낮추며 하선우는 물었다.
“어머니가 그랬다고?”
“너 화장실에서 씻을 때 넌 왜 다 큰 남자가 남의 집에서 팬티바람으로 자냐고 막 뭐라고 하셔서 좀 민망했다니까. 남자만 사는 곳에서 팬티바람으로 잘 수도 있는 거지. 내 나이가 몇인데 그걸 가지고 예의 없다고 뭐라고 하시니까 솔직히 좀 그랬다. 내가 너희 어머니 오실 줄 알았겠냐. 같은 남자끼리 좀 벗고 있으면 어때.”
억울함을 하소연하며 이석은 하선우의 앞으로 걸어왔다. 묵묵히 이석의 말을 듣기만 할 뿐, 하선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어머니의 험담을 한 것 같아 이석은 찔끔한 얼굴로 하선우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뭐 이해는 가. 살뜰하게 챙기고 싶으시겠지. 아들만 있는 집안의 막내들은 딸 취급 받는다고 하긴 하더라.”
“그런 귀한 취급 받아본 적 없는데.”
“보통 자취하는 아들은 방임하지 너처럼 안 챙긴다? 너희 어머니는 아들을 너무 곱게 키우시려고 그래.”
“석형. 우리 집 막내로 이직해볼래? 갈굼의 끝을 보여줄 테니까.”
“어흐흐, 말만으로도 고마우니까 집어치워라.”
두 손으로 손사래 치며 이석은 웃었다. 입술을 삐죽거리긴 했지만, 하선우는 뿔난 기색 없이 곧장 풀어졌다.
산업체에서 군복무를 대신한 것 외엔 직장을 다녀본 경험도 없고, 대출을 받아본 적도, 부동산 서류를 볼 줄도 모르는 풋내기를 사업파트너로 결정하게 된 것은 오랜 시간 하선우를 지켜보면서 생긴 신뢰 때문이었다.
개인 신상에 대해 거의 입을 열지 않는 하선우였지만 대학 선배이자, 동업자로 10년 가까운 세월을 지내다 보니 이석은 하선우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다시피 했다. 애착심 강한 부모님과 도저히 하선우와 닮은꼴을 찾을 수 없는 우락부락한 생김새의 형제들, 독서 취향과 습관, 버릇, 싱거운 연애사까지. 그에 대해 모르는 것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20대 초반의 하선우는 또래답지 않게 담백하며 검소하고, 이성적인 데다가 비교적 마음의 평온을 쉽게 찾는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반면에 창조적인 일을 좋아하고 한번 붙잡은 일에 대해선 집념이 강해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즉, 경영자보다는 연구원이나 기술자에 더 어울리는 성격이었다. 연구보다는 경영에 매달리고 싶었던 이석은 하선우의 그런 부분이 마음에 들어 동업을 제안했었다.
두 사람은 벤처업계를 선도하리라는 무한한 꿈을 품고 5년 전에 스마트 배터리 시스템 기업인 NnG를 창업했다. 부모님의 도움과 모아둔 재산, 은행 대출금과 정부 지원금을 긁어모아 회사를 차린 처음 3개월 동안은 패기에 가득 찼었다. 그러나 벤처업계 선도의 무한한 꿈이 벤처업계에서 살아남는 값싼 꿈으로 바뀌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년간의 지리한 연구개발 끝에 제품을 생산, 시장에 출시했으나 그들의 기술은 시장이 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조용히 썩혀졌다. 도산을 앞뒀던 시기에는 천운으로 관공서에서 수주를 받아 은행 대출기간의 만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그 후에는 엘텍 기업의 수주를 받아 회사를 유지하게 되었다. 종목은 배터리의 케이스를 만드는 것으로 단순한 가공이었다. 평균적인 매출은 연 17억, 순수한 영업이익은 2억6천에 이르는 중소기업으로 성장했으나, 하선우와 연구팀에서 연구개발한 제품은 대부분 특허만 있을 뿐, 실용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현 시점. NnG는 대기업의 횡포에 자금 확보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엘텍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독립성도, 자주적인 브랜드도 없는 위기 속에서 간신히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석은 하선우와 강 전무의 저녁식사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언제 나갈 거냐.”
손목의 시계를 힐끔 쳐다본 하선우는 말했다.
“6시 약속인데 뭐. 한 시간 뒤에 나가련다.”
“토요일엔 차도 밀릴 테고 먼저 가서 기다려야지 않겠냐.”
도로 막히는 시간을 고려해 여의도에서 을지로까지 넉넉잡아 한 시간 걸린다 쳐도 지금은 4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하선우는 황당한 의미를 듬뿍 실은 시선으로 이석을 쳐다보았다.
“너무 이른가?”
“어.”
“그럼 30분 정도 뒤에 나가.”
“일찍 가서 뭐하라고.”
“미리 가서 전무님 기다리면 좋잖아.”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이석은 말했다.
하선우의 머리 한 켠으로 시월 중순 홍콩의 전자박람회에서 이석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시팔, 제가 무슨 황태자야. 인간들 굽실거리는 것 좀 봐봐.’
전무라는 직위에 님자를 붙이는 이석의 언행에 하선우는 모든 이념을 초월하는 먹고사니즘의 위대함을 느꼈다. 그래서 서글퍼진 하선우는 손바닥 뒤집듯 바뀐 이석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어쩌면 오늘 저녁 전무와의 저녁 식사는 기업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 역시 생각하던 차였다.
강 전무가 NnG의 일산 공장을 다녀간 뒤로 회사에서는 세 가지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첫 번째 프로젝트는 사내의 각 부서에서 협업한, 일종의 사업계획서 작성이었다. 엘텍과 기술제휴를 통해 NnG가 새로운 사업 분야를 개척하자는 취지로 작성한 문건이었다.
두 번째는 하선우 홀로 진행한 프로젝트로 상당한 압박감 속에서 진행되었다. 전무가 테스트해보라 건네주었던 시제품 PC 보고서를 만드는 것이었다. 사용한 후기가 궁금하다는 강 전무의 단순한 권유에서 시작했지만, 책 한 권의 보고서라도 작성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하선우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프로젝트는 이석과 하선우 단 두 사람 간에 진행되었다. 일명 ‘월드베스트 리더 도약’으로 거창하게 명명되었지만, 단순한 속성 과외였다.
거래처 접대와 외부업무로 외근을 하는 이석과 달리 하선우는 재무업무와 제품개발로 사내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이사에 비해 하선우는 회사 밖 업무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 현장업무 요령과 매너를 단 일주일 만에 해치워버릴 수는 없었기에 이사는 자신의 책장에 꽂혀있던 경제·경영 관련 도서들을 쓸어 하선우의 오피스텔에 가져다 놓았다. 경험이 없으니 이론으로 중무장시키겠다는 심산이었다.
CEO는 물고기와도 협상한다, 인간행동론, 설득은 경제다, 화술손자병법, 이제는 절대로 심리전에서 밀리지 않는다, 중소기업 강화전략, 고래싸움에서 살아남는 중소기업, 리더 간의 갈등관리, 설득의 달인, 유혹하듯 협상하라, 엘텍을 벗기다, 성공하려면 옷을 벗어라, 등등 다소 신뢰가 가지 않는 제목의 책도 섞여 있었다.
성공하려면 옷을 벗어라. 불신의 눈길로 맨 아래 깔린 책 제목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길어봤자 고작 두 시간일 강 전무와의 저녁 식사였지만 온갖 정치적인 전략 속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서류가방에 빽빽하게 자료를 챙겨 넣은 하선우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미리 가서 전무님 기다리라며.”
“야야. 기다려봐.”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하선우의 앞으로 걸어온 이석은 손바닥을 비벼 탁탁 털어낸 뒤에 손을 뻗었다. 너무 짧게 매진 넥타이를 다시 매고 은색의 클립 위치도 고쳐주었다. 턱을 쳐든 채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던 하선우가 말했다.
“석 형.”
“응.”
“백 미터 달리기 할 때 레일 위에서 신호총 기다리는 기분이다.”
“떨려?”
“하하… 응. 나 원래 이런 거 잘 못했잖아. 창업동아리 할 때도 절대 발표 안 했었고.”
“못하긴 했지.”
“그래도 이번엔 열심히, 잘할게.”
“어. 넌 충분히 할 수 있다. 속성 과외하는 내내 내가 엘텍을 잡아먹어버리는 기분으로 덤비라고 했지. 네가 강 전무 자식을 잡아먹어버려.”
소리 내어 웃지 않았지만 하선우의 얼굴은 웃음으로 씰룩거렸다.
“왜 웃어. 내 말이 웃겨?”
고개를 저었지만 하선우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거두어지지 않았다. 하선우는 이사의 말을 중의적으로 느꼈다. 물론 하선우가 양성적인 방법이든, 음성적인 방법이든 강 전무를 잡아먹는 일은 절대 없겠지만.
이석의 배웅을 뒤로한 채 절도 있는 걸음으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하선우는 곧바로 시동을 걸지 않았다.
사내다운 기백을 끌어내도 초조함은 가시지 않았다. 오늘 저녁 식사의 목적을 하선우 역시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석에게는 전지사업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전무가 저녁 식사를 제의했다고 둘러댔지만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회사 차원에서 준비한 서류를 펼쳐 볼 시간도 없을까 봐, 직원들을 볼 면목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 한구석이 답답했다. 유난을 떨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입장이 서글프기도 하고, 온갖 걱정들이 휘몰아쳤지만 부딪혀보는 것 외엔 답이 없었다. 룸미러 속의 걱정 많은 얼굴을 오랫동안 응시하던 하선우는 결국 자동차의 시동을 켰다.
약속 장소는 을지로에 위치한 엘튼 호텔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40분 일찍 도착한 하선우는 커피숍에서 몇 만 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때우는 대신 호텔의 로비를 꾸민 조형물을 구경하기로 했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조망 좋은 호텔이다 보니 인테리어 역시 전통적인 느낌이 가미되어 있었다. 대나무와 돌, 꽃 등으로 자연적인 분위기를 살리고 패브릭과 화선지를 이용한 조명으로 한국적 멋을 드러냈다. 압도하는 화려함을 배제한 절제 속에서 오히려 자본의 힘을 느꼈다. 하선우는 분수대 옆의 가죽 소파에 앉아 비치된 팸플릿을 꺼냈다. 강남과 강북, 제주도와 부산에 들어서 있는 엘튼 호텔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주변 일대의 관광지가 적혀 있었다.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한 곳인 데다가 주변 관광지와의 접근성이 좋아 호텔 로비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았다. 한 무더기의 캐리어가 벽면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단체 관광이라도 온 모양이었다. 호텔 이곳저곳에서 시끌벅적한 중국어가 들려왔다.
목청껏 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강 전무의 비서였다. 그가 이곳에 있는 걸 보니 강 전무 역시 일찍 호텔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달갑지 않은 초조함이 다시 하선우를 찾아왔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는 비서를 보면서 로비에서 조금 더 버티고 있을지를 고민하던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호총의 발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던 하선우의 곁으로 중국인 단체가 걸어왔다. 왁자지껄한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무심결에 로비 방향을 돌아봤을 때였다. 강주한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신호탄을 기다리는 순간은 초조하지만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할 때는 오히려 마음이 평온하다. 발을 뗀 이후부터는 달리는 것만 생각하면 되기 때문이다.
수만 가지 상황과 모습으로 머릿속에 나타났던 강 전무였지만 정작 그와 눈이 마주치자 하선우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일찍 도착하셨군요.”
“생각보다 차가 덜 막혀서요.”
“잘 지내셨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강 전무님은 얼굴 좋아지셨는데요.”
악수를 청하려 하선우는 손을 내밀었다. 건조하고 차가운 강 전무의 손에 비해 하선우의 손은 땀으로 살짝 젖어 있었다. 악수하는 것만으로도 살 떨리는 심정으로 이곳에 나온 본심을 들킨 것 같았다.
“하 사장은 살 빠지셨군요.”
“그런가요.”
살이 빠질 수밖에 없는 치열한 일주일이었지. 내심 쓴웃음 흘리는 하선우에게 강 전무는 말했다.
“오늘 살 좀 찌워드려야겠군요. 특별히 알레르기 있는 음식은 없죠?”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습니다.”
“다행이군요.”
“아, 저기 도착했군요. 전무님 가시죠.”
엘리베이터를 가리킨 하선우를 따라 강 전무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뒤를 따라 줄 서 있던 단체 관광객이 엘리베이터 내부로 들이닥쳤다.
“이런… 지하로 내려가는 건데요.”
안으로 밀려드는 사람 속에서 나갈 때를 놓쳐 미안한 얼굴로 하선우는 말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강 전무의 옆얼굴을 하선우는 흘끗 쳐다보았다. 강 전무는 엘리베이터의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하 4층과 연결된 주차장을 지나간 후에야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빠져나간 주차장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길의 지하철처럼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욱여넣는 관광객 틈을 뚫고 간신히 35층을 누른 강 전무는 겨우 하선우의 곁으로 돌아왔다. 모서리를 차지한 하선우를 마주하고 선 강 전무와 아랫배가 거의 닿을 듯 가까웠다. 하선우는 자칫했다간 전무의 목덜미에 얼굴이 닿을 것 같아 얼굴을 돌려 전광판을 쳐다보며 말했다.
“관광객이 많네요.”
“예년에 비해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늘었다더군요. 덕분에 호텔에 묵는 고객 중 중국인 비율이 상당하죠.”
“관광철도 아닌데 어마어마하네요.”
“지난 중국 국경절에는 더했다더군요. 사장들이 죽는소릴 했었죠.”
강 전무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의 건조한 웃음에 하선우는 조금 전 로비에서 읽었던 팸플릿을 떠올렸다. 엘튼 호텔은 엘텍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로 강남과 강북, 제주도와 부산에 들어서 있었다.
호텔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은 강주한의 막내 남동생인 강태한이었다. 수백 개의 객실이 있는 호텔을 소유한 강태한은 건물주가 되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는 김 부장의 소망을 몇 백, 아니 몇 천 배쯤 화려하게 부풀려놓은 모습이었다.
엘텍 그룹의 형제들을 떠올리는 사이 전광판이 1층을 가리켰다. 승강기의 문이 열렸지만 내리는 사람 없이 오히려 사람들이 승강기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전무와 하선우의 가슴이 맞닿았다. 숨결이 귓바퀴에 닿는 거리였다. 난감한 간지러움에 희미한 인상을 쓰며 하선우는 고개를 조금 뒤로 뺐다.
“발은 다 나았습니까.”
하선우는 눈만을 움직여 강 전무를 쳐다보았지만, 지나치게 가까워 턱 언저리만 보일 뿐이었다.
“상처라고 말할 것도 아니라서 괜찮습니다. 그때 감사했습니다.”
“뭘요.”
웃으며 강주한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턱이 관자놀이에 닿았다 살짝 떨어졌다. 유난히 느리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에 전광판을 올려다보던 하선우는 속으로 어색함만 삼켰다.
“넘어졌을 때 심하게 부딪혔던 것 같던데 아직 멍 남았겠어요.”
강 전무 말을 이해하지 못해 순간적으로 생각을 거듭하던 하선우는 곧 맥락을 잡았다. 지난 경진대회 날 엘리베이터 앞에서 넘어진 것을 일컫는 모양이었다. 공중으로 날아가던 구두와 가방을 떠올린 하선우는 얼굴을 붉혔다.
“예. 보기보다 상처 회복력이 더딘 편이라.”
“저와 반대군요. 전 회복력 하나는 괴물 같다고 하던데.”
“부럽네요. 전 흉터가 많거든요.”
“그런가요. 아… 여기도 흉터 있네요.”
부스럭거리며 팔을 위로 빼낸 강 전무는 하선우의 귓불을 건드렸다. 흐흠, 숨소리에 섞인 강 전무의 웃음에 하선우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강주한의 숨이 귓바퀴 안으로 미끄러지며 흩어졌다. 동그랗게 말리는 발끝에 힘주며 하선우는 말했다.
“오래전에 염증 때문에 생겼던 흉터인데 좀 크죠.”
엄지와 검지가 왼쪽 귓불을 눌렀다. 간지러움에 절로 얼굴이 어깨를 향해 기울어져 하선우는 괜한 헛기침을 했다.
“어렸을 적에 뚫었던 건데 염증이 좀 심했어요.”
“하 사장이 …귀를요.”
“예.”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자취를 하게 되면서 간섭하는 부모님도 없었고, 무슨 심경에선지 하선우는 거의 충동적으로 귀를 뚫었었다. 투명한 피어싱을 착용했기에 눈에 띄지 않았지만, 왼쪽 귀가 염증으로 막히면서 상처가 커졌다. 보수적인 어머니의 강요로 결국 피어싱을 빼야 했었다.
“의외네요.”
“그런가요. 부모님이 싫어하셔서 몇 번 하고 다니다 막아버렸습니다. …하하.”
하선우 자신이 듣기에도 껄끄러운 웃음소리였다. 그의 불편한 반응을 눈치챈 강 전무가 귀에서 손을 뗐다. 주먹으로 입술을 가려 헛기침하며 하선우는 말했다.
“나름 작은 반항이었죠. 그때까지 일탈이라곤 거의 안 했거든요.”
“착한 아들이었군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속 많이 썩였죠.”
뒷말을 기다리며 강 전무는 침묵했지만 하선우는 그저 조금 웃고 전광판으로 시선을 던졌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내부는 한산해졌고, 강 전무와의 거리도 차츰 거슬리지 않는 거리로 멀어졌다.
“여깁니다. 내리시죠.”
엘리베이터 밖으로 빠져나온 하선우는 소리 죽인 한숨을 내쉬었다. 앞서 걷는 강 전무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하선우는 괜히 귀를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며 발걸음 옮겼다.
스카이라운지의 벽면은 온통 유리로 지어져 있었다. 거대한 유리를 녹여 붙인 것처럼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전체가 통유리로 된 건물이었다. 실내를 물들인 빛은 태양이 이우는 하늘의 색을 그대로 닮아있었다. 땅거미 지는 하늘을 담은, 분절 없는 파노라마 사진 같은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하선우의 발걸음을 따라 보랏빛 황혼이 대리석 바닥으로 긴 그림자를 늘어트렸다.
어딘가 모르게 이곳의 풍경이 눈에 익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하선우는 기억을 곧 떠올려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 가물가물했지만 분명히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첫째 형의 대입시험 결과 발표가 있던 날이었다. 무난하게 서울의 의대에 진학할 수능 성적이 나와 축하를 하려 마련한 자리였다. 그 이후 셋째 형이 의대에 진학할 때까지 가족은 줄곧 이곳을 찾았다. 값비싼 코스요리와 선물, 대학 근처에 전세를 얻어주는 것은 형제가 대학에 입학할 때마다 되풀이된 연례행사였다.
자연스럽게 몸에 밴 생활이었기에 하선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백화점 브랜드 옷을 입고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하선우를 마치 대단한 부자 취급하는 동기들이 있었다. 하선우는 자신을 서민이라고 생각했지만, 동기 몇몇은 그럴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어떤 경제적 어려움이나 결핍 없이 살아온 네가 서민 언급을 한다는 게 우습다는 얘기였다.
가난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서민이 아니라면 자신은 부자인 걸까. 하선우는 강주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유리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늑한 이곳에 비해 유리벽 밖의 세상은 모든 것이 궁상맞고 빽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혼잡한 도로와 쉴 새 없이 광고를 틀어대는 광고판, 신호가 바뀌자 막힌 둑이 뚫리듯 횡단보도 위로 쏟아져 나오는 인파. 저 멀리 지평선 너머를 뒤덮는 어스름 속에 늘어선 노점들. 호텔의 높은 곳에서는 길 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개미처럼 작아져 보였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밤이 찾아오면 악지 위를 꿈틀거리는 삶의 흔적들은 휘황찬란한 야경 아래로 잠길 것이었다.
멀어지는 강 전무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긴 하선우는 결론을 내렸다. 저 재벌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이런 곳에 몇 번 들락거린 것을 보면 하선우의 가족은 제법 먹고살 만한 서민부자였다. 아주 바닥에 있지도, 또 높이 떠 있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설정해놓고 살아가는 중산층의 무리. 위기 앞에서도 절실해지지 않는 이유는 먹고살 만하다는 방만함이 뒷배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일까.
하지만 지금은 이석의 몫으로 떠밀어두었던 악전고투, 배수의 진 같은 지랄 맞은 단어들을 자신에게 끌어와야 할 때였다. 하선우는 두 눈에 힘을 주어 강 전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착석한 곳은 창가 테이블이었다. 탁 트인 장소였다. 사업얘기를 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아니었다. 강 전무는 말 그대로 개인 치사와 관련된 일로 이곳으로 초대한 모양이라고 하선우는 추측했다.
물이 담긴 글라스의 긴 목을 검지 끝으로 가만히 매만지던 강 전무가 웃었다.
“그러고 보니… 하 사장님 근사한데요. 특히 타이 선택이 좋아요.”
“전무님이 불러주셔서 신경 좀 썼습니다.”
“초대한 쪽이 민망해지는데요. 저도 신경 쓰고 나올 걸 그랬습니다.”
오늘 강 전무는 고급 프렌치레스토랑에서 요구하는 드레스코드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골프 라운딩이라도 하고 온 건지, 지나치게 차려입은 하선우에 비해 느슨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분위기도 어딘가 느슨했다. 일부러 빗장을 열어두기라도 한 듯이.
“전무님이야말로 충분히 멋있으신데요.”
하선우의 말에 비뚜름하면서도 엷은 미소를 지은 그가 잔을 들었다. 자신을 칭찬하는 타인의 속을 들여다보듯 짧았던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디가요.”
“…녹…색 옷이 잘 받으시는 것 같네요. 목이 길고 어깨가 넓어서 라운드 네크라인도 잘 어울리시는 것 같고요. 엘텍 패션 계열사 브랜드에 모델로 나가셔도 되겠는데요.”
우물쭈물하는 말은 하선우 자신의 귀에도 어색하게 들렸다. 때마침 나온 전채 요리로 시선을 냉큼 옮기며 하선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재료를 알 수 없이 가공된 요리는 기하학적인 블록 모양이었다. 포크로 물컹거리는 그것을 찍는 하선우에게 강 전무는 말했다.
“하선우 씨는 보기보다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 것 같네요. 가끔 목소리가… 떨려요.”
강 전무는 집게와 엄지로 결후를 잡아 조금 흔들며 떨리는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내가 어려워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
“너무 긴장하니까 미안해지려고 하네.”
강 전무의 웃음에 하선우는 막연한 기분을 느꼈다. 애송이 취급을 하는 건지 아니면 배려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장난을 치는 건지, 세련된 웃음 뒤로 숨긴 본심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선우는 혀 위에서 녹듯 사라지는 요리를 꿀꺽 삼켰다.
“……많이 티 났습니까.”
“예. 신선한 느낌이라 좋네요.”
“어쨌든 강 전무님께 저 호감이라는 거죠. …하하.”
“글쎄요. 하는 거 봐서요.”
하하하 웃으며 하선우는 물로 마른 목을 축였다. 의외로 남자는 대놓고 짓궂은 구석이 있었다. 강 전무와 이런 대화를 나눌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하는 거 봐서요. 너무 긴장하니까 미안해지려고 하네. 입장 차이가 판이하게 드러난 대화를 빠르게 되새긴 하선우는 새삼 깨달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판검사, 의사, 한강에서 난 용, 개천에서 난 용 구분할 것 없이 모두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없는 것을 만들어가며 용써봤자 그의 눈엔 거기서 거기일 터였다. 어차피 어려운 사람. 그렇게 생각하자 하선우는 차라리 마음 편해졌다.
“음식맛 괜찮죠?”
“예.”
“이번 주간 동안 초청받은 프랑스의 스타 셰프가 준비한 만찬이거든요.”
간단한 설명을 끝으로 강 전무는 음식에 대한 이런저런 피곤한 설명을 곁들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음식 있습니까.”
암사슴 스테이크를 썰며 강 전무는 물었다. 그 앞에서 있는 척하는 것도 우스워 보일 거란 생각에 하선우는 솔직히 말했다.
“애들 입맛이라 분식 좋아합니다. 떡볶이와 라면은 거의 주식이고요.”
흘끔 눈만을 들어 전무의 반응을 살펴본 하선우는 물었다.
“전무님도 떡볶이 좋아하세요?”
“즐겨 먹지는 않습니다.”
“그러시군요. 전 매콤한 걸 좋아해서 스트레스받으면 매운 걸로 풉니다. 외국 여행갈 때 볶은 고추장 챙겨 가는 사람들 있잖아요. 제가 그렇습니다.”
“볶은 고추장?”
“고추장을 볶아서도 먹거든요. 그냥 고추장은 좀 독한 맛 때문에 꺼려지는데 볶은 고추장은 맵기가 덜해요.”
“그런 건 처음 들어보는데. 어떻게 만드는데요.”
“…글쎄요. 요리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강 전무와 볶은 고추장 얘기를 하고 있다니. 인간관계론 읽을 시간에 볶은 고추장 레시피나 살펴볼 걸 하는 후회가 생겼다. 하선우는 머금은 와인을 꿀꺽 삼켰다.
“전무님은 좋아하는 음식 있으십니까.”
“선호하는 반찬이나 음식종류가 있다기보다는 한정식 자체를 좋아합니다. 호텔의 1층에 칠복주가라는 한식당이 있는데 그곳 음식이 정갈한 편입니다. 최근에 조선왕조 궁중음식 코스요리도 새로 나왔다 하더군요. 요즘 대부분의 호텔이 한식당을 없애는 추세거나 세계화란 명목으로 퓨전요리를 시도하다 자가당착에 빠지는 데 반해, 꽤 현명한 선택이죠.”
말 한번 어렵게 한다. 에둘러 표현하는 자가선전에 능하다는 생각을 하며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 전무는 남자치고는 음식을 먹는 속도가 느린 편이었고 프랑스 코스요리다 보니 음식은 천천히 나왔다. 남자의 속도에 맞춰 먹느라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분간할 수 없는 사이에도 대화는 이어졌다.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분이시군요.”
졸업하자마자 회사를 차린 하선우의 경력을 놓고 강 전무는 말했다. 무모하다는 걸까, 용기 있다는 걸까. 굳이 해석하지 않고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강 전무의 친절하지 않은 화법에도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았다.
“대기업 연구원 출신인 이사님의 도움이 컸죠. 또 경력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저도 산업체에서 군복무 했습니다. 염 사장님 밑에서 일했었죠.”
강 전무는 하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염 사장을 모르는 눈치였다.
“생각해보니 잘 모르실 수도 있겠네요. 산원테크의 사장님이신데….”
“아아, 염동균 사장 말씀이시군요.”
“예. 제가 군복무 했던 당시는 염 부장님이셨죠.”
“염 사장 밑에서 일했으면 꽤 고생했겠군…. 성격 있어 뵈는 양반이던데.”
강주한은 냉소의 느낌이 희미하게 묻어나는 웃음을 지었다. 엘텍전자의 가장 큰 협력업체 사장인 데다가 전지사업부 임원을 사촌으로 두고 있는 염 사장이라면 강 전무가 알 법도 했다.
“고생도 했지만 많이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떻게 또 인연이 닿아 염 사장님 고1, 고3 자제분을 가르치기도 했고요. 좋게 보셨는지 졸업할 때 취업 제의도 하셨죠.”
넌지시 흘리듯 얘기하며 하선우는 티슈로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냈다.
이렇게 흉을 봐도 되나 싶었지만 군턱이 진 넓적한 얼굴과 처진 짧은 눈매를 떠올리자 상관없게 느껴졌다. 가볍게 혀를 차며 강 전무는 눈길을 접시 위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하 사장은 선일대학교 나오셨죠.”
자신에 대한 조사는 이미 마쳤겠다 싶어, 하선우는 어떻게 알았느냐는 멍청한 질문으로 시간을 끌지 않았다.
“예. 아시는군요.”
“에너지공학부 나왔다는 얘기도 넌지시 들었습니다. 가끔 최종완 교수님을 뵙는데 하선우 씨 얘기를 했더니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시더군요. 화공과의 유명 인사였다면서요.”
“유명 인사요? 최 교수님이 좋게 말씀해주신 걸 겁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대학생활 했었어요.”
“최 교수님 말씀으로는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더군요. 인물이 출중하기도 하고 집안 내력도 특이한 편이라 교수들 사이에서 예쁨 많이 받았다는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던가요. 그럴 분이 아닌데.”
의심스러운 어조로 말하며 하선우는 웃었다. 창업동아리 회장으로 지내면서 최 교수의 구박을 담당했던 인연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는가 싶었다.
“공대에 얼마 없는 여학생들보다 인기가 많았다면서요.”
“흠, 별로 행복한 기억은 아닙니다. 다른 말씀은 안 하셨나요? 분명히 제 흉을 보셨을 텐데.”
“칭찬뿐이었다니까요.”
강 전무는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의사 집안이라면서요.”
“예.”
“하선우 씨 아버지도 유명하신 분이더군요. 안화병원 수석부장 지내셨다면서요.”
“오래전에 퇴직하긴 하셨지만 아마 그랬을 겁니다. 저보다 잘 아시네요.”
“흥미로운 분 같아서 본의 아니게 뒤를 캤습니다.”
강 전무는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하선우에게 눈을 맞추었다.
“의사 집안이면 이공계열 가는 대신 보통 의대 가지 않던가요. 요즘 상위권 학생들은 의대 가는 추세기도 하고.”
“부모님이 반대하시긴 했지만 그냥 제가 좋은 걸 했습니다.”
“하선우 씨 때 특히 이공계열 기피가 심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공과대를 지원하신 걸 보면 신념이 강했나 봅니다. 의대로 가는 학생들 중에 하선우 씨와 같은 인재도 많을 텐데 가끔 안타깝습니다. 갈수록 이공계 기피가 심화되고 있더란 말이죠.”
하선우의 형제들이 학교를 다니던 당시는 사회 전반으로 고농도의 경제 불안이 삼투작용 하던 때였다. 대기업의 잇단 구조조정으로 인해 이공계를 나와서 취업할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이었고 불투명했다. 이후 이공계열 졸업자의 사회적 위치 역시 모래성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는 통념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파도 앞에서 모래성을 쌓고 지키는 것이 어디 신념만으로 되던가요, 왕자님. 하선우는 가르치고 싶은 마음을 삭이며 다른 얘길 꺼냈다.
“강 전무님과 최 교수님이 서로 아는 사이셨군요. 최 교수님 대단한 분이셨네요.”
강주한은 웃으며 대답했다.
“전지사업부 확장 안건 때문에 제가 먼저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하긴, 최 교수님이 산학협력 중점교수셨죠.”
“물론 그런 이유로 연락을 드린 건 아닙니다. 이차전지 분야를 접하며 개인적으로 쌓은 친분입니다. 최 교수님이 친환경에너지 분야에서 권위자시니 조언도 많이 해주셨고요.”
“조언을요?”
“대기업을 운영하는 경영 전문인이더라도 전자 분야에 대한 개론적인 지식은 필요하더군요. 엘텍전자로 자리를 옮긴 뒤부터 사업총괄을 지원하고 있는데 말은 그럴싸하지만, 구체적이지 않은 일이거든요. 아랫사람을 부리고 단지 결제만 하다 보면 산으로 가는지 바다로 가는 건지 알 수 없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 분야에 얕게나마 발을 담근 건 머리 안에 나침반 같은 감각을 가지려는 이유죠.”
고급스럽게 포장되었지만 강 전무의 말은 돈이 될 만한 일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위해 전지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 자리에 하선우를 초대한 이유도 그를 돈이 될 만한 인물로 파악해두었기 때문일 테고.
하선우로서는 다행이었다. 강 전무에게 자신이 돈이 되는 인물이어서.
사업 외의 공통분모가 없는 두 사람이었지만 하선우의 걱정과 달리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상당한 다독가인지 강 전무는 한 가지를 검색하면 본문이 이어지고, 비슷한 키워드의 링크가 걸리는 인터넷 백과사전적인 구석이 있었다. 우물쭈물할 새도 없이 대화의 주제가 확장되고 전혀 별개의 것으로 이어졌다.
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일대기를 다룬 전기에서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자료들과 이 시대 젊은이들의 혈기 없는 차가운 온도에 대한 이야기까지. 스펙트럼이 넓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하선우는 맥을 짚듯 강 전무의 의중을 조금씩 파악해나갔다.
그의 대화 스타일은 자신에 대한 정보나 사상은 거의 내비치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나열해 질문을 던지는 식이었다. 어떤 사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진보인지 보수인지, 어수룩한지 약았는지. 강 전무는 하선우를 판단할 정보를 야금야금 앗아가고 있었다.
하선우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는 강 전무의 외피 너머로 사람을 의심하고 감별하는, 수상쩍고 냉정한 얼굴을 보았다.
단지 사업 파트너로 점찍어둔 상대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거래를 원한다면 기업의 기술과 경영실태, 재무상태를 파악하면 그만이었다. 강 전무의 대답에서 하선우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향한 그의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하선우를 알고 싶어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선우는 며칠 전 허물어져 가는 슈퍼 앞에서 강 전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다림에 익숙합니다. 끌리는 사람에 한해.
끌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일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어 하선우는 찝찝함을 덮어두기로 했다.
파도에 둥글게 깎인 새하얀 자갈 모양의 디저트를 혀 위에서 녹이던 하선우는 디저트 와인을 비우는 강 전무를 살폈다.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 억만 광년 떨어진 부유한 별에 사는 남자는 하선우에게 외계인과 다를 바가 없이 느껴졌다. 꺼림칙하고 어려운 상대지만 하선우 역시도 강 전무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거의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강 전무님은 뭐가 되고 싶으십니까.”
강 전무는 멈칫했다. 그는 잔을 기울이던 자세 그대로 눈만을 움직여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누군가를 파악하기 위해 던지는 가장 흔한 질문이었지만 하선우는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흥미로운 질문이지만 …글쎄. 흠, 철학적인 질문입니까.”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네요. 좀 오글거리죠.”
“그러는 하선우 씨는 뭐가 되고 싶은데요.”
“그런 질문 해놓고 우습긴 하지만 정해둔 것 없어요. 저는 순간순간 제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삽니다.”
“보기보다 즉흥적이시군.”
“한 번 크게 아프고 나서부터 성격이 변했어요.”
상황이 어쩔 수 없을 때는 지금처럼 강 전무와의 저녁 식사를 감내해야 할 때도 있지만. 하선우는 작은 컵 안에 담긴 푸딩을 스푼으로 떴다.
“큰 사고라도 났었나 보죠.”
“사고는 아니고 병이었어요.”
“병? 어떤 병이었습니까.”
“심장질환이었습니다. 감염성 심내막염이 심해져 판막 성형수술까지 받았죠. 중학교 때 발병했는데 죽을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어요. 수술대에 오르면서 전신마취를 했는데, 다시 내가 깨어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고 앞으로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야겠다고.”
곱상한 외모와 총명함 때문에 가족들 내에서도 사랑을 듬뿍 받았고,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서도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았다. 언제나 타인의 칭찬은 질릴 정도로 많이 들었던 하선우였다. 칭찬이 인색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언젠가부터 그것이 더는 유의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대신 그는 그 스스로가 추구하는 바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런 그의 기질은 한 번 크게 아프고 난 뒤로 더욱더 굳어졌다.
“남을 별로 의식하진 않겠네요.”
“생계가 걸린 일이면 다릅니다.”
너무 속물 같은 발언이었나 싶었지만 이미 뱉어놓은 말은 물릴 수 없었다. 강 전무 당신을 의식하고 있다는 하선우의 아부에 강주한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 얼굴에 그 성격에… 주변 사람 꽤 안달나게 했겠군요.”
이성과 동성으로부터 그런 말을 꽤 들었지만, 제 입으로 시인하기는 좀 민망했다. 금가루가 다문다문 뒤섞인 푸딩을 스푼으로 뜨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이런 대답조차도 좀 멋쩍다고 느낀 하선우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쯧, 잇새로 혀를 차며 강 전무는 심문하듯이 두 손을 테이블에 올렸다. 테이블을 향해 상체를 기울인 그는 양손을 느리게 비비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도 질문 하나 하죠. 하선우 씨는 뭔가를 강렬하게 염원해본 적 있습니까.”
스푼 가득 뜬 푸딩을 입안에서 우물우물 녹여 먹던 하선우는 동그랗게 파인 푸딩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강렬과 염원이란 단어의 조합은 낯간지러웠다. 그 무거운 단어들은 비키니를 입은 신사만큼이나 하선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러나 떠올려보면 아주 없었던 것만도 아니었다. 무조건적인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 틈 속에서 자신을 보지 않던 유일한 타인. 기어이 신경 쓰게 되던 그 무심한 반응을 각별함으로 간직하던 기억. 너무 오래된 추억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떠올려보면 그런 것을 소중하게 품었던 때도 있었다.
“예. 있었죠.”
하선우는 눈을 들었다. 말투가 확고했던지 마주친 전무의 얼굴은 조금 의외의 빛을 띠었다. 강 전무는 하선우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강렬한 염원의 불꽃이 여전히 타고 있는지, 아니면 오래전에 재가 되었는지를 가늠하듯이.
“자리를 옮기죠.”
기대었던 테이블에서 몸을 떼어낸 강 전무는 미적거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일어나며 하선우는 깨달았다. 당신이 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남자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본 하선우는 타이밍을 놓쳤다는 생각에 아쉬워하며 호기심을 지워버렸다.
자리를 옮긴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커피숍이나 바, 혹은 호텔 안에 마련된 회의실처럼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곳을 상상했던 하선우는 당황한 눈으로 강 전무를 올려다보았다.
강 전무의 발길이 향한 곳은 스카이라운지의 바로 아래층이었다. 긴 복도의 가장 끝에 위치한 호텔 룸 앞에 멈춰 서서 강 전무는 하선우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문의 호수를 확인했다.
“……여긴… 왜.”
힐끗 하선우를 내려다본 강 전무는 쓸데없는 의혹을 불식시키듯 버저를 눌렀다. 그 안에 누군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선우는 찰나로 스쳐 지나간 민망한 의심을 지워버렸다. 문은 곧바로 열렸다. 안에서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말상의 얼굴에 좁은 콧방울, 은테 안경을 쓴 강 전무의 수행비서였다.
“도청, 몰래카메라 테스트는 마쳤습니다.”
도청과 몰래카메라라는 말에 즉각 반응하는 하선우와 달리 강 전무는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소파에 앉았다.
“임 부장님은 아직인가 보죠.”
“곧 도착하신답니다.”
“커피 좀 주문해줘요. 하 사장도 커피 괜찮죠?”
“예.”
도청 테스트를 할 정도로 보안이 필요한 일인가, 의혹이 담긴 하선우의 얼굴을 보고도 두 남자는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도청 운운하는 남자들로 인해 기분이 심란해졌다. 하선우는 쓸데없는 말을 낭비하는 대신 그들이 알아서 상황을 설명하기를 기다렸다. 그런 하선우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비서가 말했다.
“설명 없이 모시고 와서 놀라셨나 봅니다. 회의실보다는 객실이 말씀 나누기 더 편하실 것 같아 자리를 이곳으로 마련했습니다. 앉으시죠.”
엉거주춤 자리에 앉은 하선우의 시선이 커피테이블 위로 가 멎었다. 테이블 위에는 파일바인더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NnG 종합평가 평점표라고 프린트된 파일이 가장 위에 놓여 있었다. NnG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하선우는 강 전무와의 저녁 식사로 붕 떠 있던 세계가 현실로 추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나 강 전무는 자신을 개인적인 이유로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리가 없었다. 강주한이 물었다.
“가방이 두껍던데 뭔가 준비해오셨나 보죠.”
NnG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가득할지도 모를 파일에서 시선을 애써 돌리며 하선우는 말했다.
“전무님께서 주셨던 시제품 가져왔습니다. 시제품 테스트 보고서도 작성했고요.”
조금 오래도록 하선우를 응시하던 강 전무는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다.
“보고서를요?”
“예. 여기, 이거 보시면 됩니다.”
하선우는 PC와 충전기, 보고서를 가방 안에서 주섬주섬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시제품을 테스트해보라는 권유에 보고서까지 써온 NnG의 절박해 보이는 모양새가 재미있는 모양이었지만 하선우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보고서라기보다는 시제품에 대한 자세한 리뷰로 보셔도 무방할 겁니다.”
강 전무가 자신의 상사도 아닌데 보고서라고 얘기한 것이 조금 민망해 하선우는 얼른 덧붙여 말했다.
전무는 A4용지를 묶어 스프링 제본한 노트를 펼쳤다. 자세하게 세분된 목차만 3페이지였다. 벤치자료와 웹서핑·부팅 속도, 터치 감도와 핑거줌아웃 선명도, 펜 감압도, 디자인과 소프트웨어, 하드웨어적인 면을 거의 통틀어 작성한 리뷰였다.
시제품의 리뷰 보고서는 강 전무의 기대치를 넘어선 듯했다. 웃음을 띤 강 전무의 얼굴이 점차 진지해졌다. 이곳에서 리뷰를 모두 읽어볼 셈인지 그는 말없이 천천히 낱장을 넘겼다. 부동자세로 소파에서 등을 떼고 앉아 있던 하선우는 눈만을 움직여 벨소리가 울린 문을 보았다. 열린 문 사이로 호텔 직원에게 트레이를 받아 든 비서가 손잡이를 끌며 곁으로 걸어왔다.
트레이에는 운두가 낮은 동그란 스테인리스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보온병과 앤틱 소품 같은 고급스러운 커피 잔, 시럽 등이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룸서비스로 주문하는 커피는 처음 보기에 곁눈으로 살피던 하선우와 비서의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웃음기도 없이 잔에 담긴 커피를 강 전무와 하선우에게 차례대로 내밀었다. 커피가 나온 뒤에도 한참 동안 리뷰노트를 살펴보던 강 전무는 삼분의 일가량 읽은 노트를 종이를 반으로 접어 표시하고 덮었다.
“엘텍으로 회사 옮겨볼 생각 없으십니까.”
기분 좋게 건네는 농담치고는 웃음기가 없었다. 커피를 머금은 채로 강 전무를 빤히 바라보던 하선우는 느리게 그것을 삼키고 말했다.
“마음에 드셨나 봐요.”
역시 마찬가지로 하선우를 빤히 바라보던 강 전무가 말했다.
“예. 마음에 드네요.”
“…와하하. 노력한 보람이 있네요.”
진지하게 하선우를 바라보던 강 전무의 눈가가 미미하게 굳어졌다. 커피를 입으로 가져가며 기분 좋게 웃던 하선우의 입술이 덩달아 살짝 굳어졌다. 강 전무의 마음에 든 것이 리뷰노트를 말하는지, 자신을 말하는 건지 의미가 분명하게 가려지지 않은 것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회사를 옮겨보란 말이 진담인가. 바싹 마른 입매를 잔으로 가린 하선우는 짧은 침묵 뒤에 말했다.
“시간이 부족해서 PC의 온도 테스트와 RPM 확인은 못해봤습니다만, 무리 없는 수준이었던 같습니다. 개발자분들이 훨씬 더 자세히 알고 계시겠지만 어쨌든 사용자의 느낌이 그랬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시제품 테스트에 리뷰노트 작성한 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강 전무는 곧 손을 내밀며 진심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말했다.
“무리한 부탁이었을 텐데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시고 감사합니다.”
강 전무의 손을 맞잡고 흔들며 하선우는 웃었다. 테이블 위의 ㈜NnG 종합평가 평점표를 곁눈질로 힐끔거린 하선우는 좀 더 환하게 웃었다.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NnG에 대한 노골적인 평가보고서를 보자 압박감이 치밀기 시작했다. 하선우는 새삼 짜증이 났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이지 재수 없는 놈이었다. 하청업체를 평가하는 보고서를 고의적으로 노출시킨 의도가 뻔했다.
강 전무가 ㈜NnG 종합평가 평점표라는 보고서를 대놓고 드러내며 고압적으로 굴지 않아도 어차피 엘텍과 NnG의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거래처를 선택할 수 있는 엘텍과 달리 현재 NnG의 선택권은 하나뿐이었다. 그들의 바짓단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
하선우는 지금이 때인지를 생각했다. 저녁 식사 시간 내내 엘텍과 NnG의 업무제휴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재고 쟀었다. 사교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 업무 얘기를 꺼내는 게 쉽지 않았지만, 강 전무에게 호감을 산 지금이라면 그리 어색한 타이밍은 아닐 듯싶었다.
결심을 굳힌 하선우는 PC의 전원버튼을 눌렀다.
“부팅 속도가 8초쯤 걸리더군요. 상당히 고속이었습니다.”
PC 전면을 강 전무의 방향으로 돌린 하선우는 바탕화면의 파일을 터치했다. 시제품 리뷰 한글파일이었다.
“시제품 리뷰를 책으로 만들어두기도 했는데, 혹시 몰라 PDF파일로도 남겨두었습니다. 책갈피 기능 넣어두었으니 필요한 리뷰를 클릭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선우는 바탕화면에 있는 NnG 폴더를 클릭했다. 폴더 안에는 각종 보고서와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들어 있었다. NnG와 엘텍 간의 업무제휴와 관련된 구체적인 계획서였다. 지난 일주일 동안 사내 부서 모두가 참여하고 매달린 것이었다.
“뭐죠?”
강 전무는 관심이 아주 없지도, 있지도 않은 눈으로 파일을 보았다.
“신규 사업에 대한 업무제휴 제안서입니다.”
강 전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하선우와 눈을 맞추었다. 강 전무는 전혀 나무라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하선우는 자신이 흡사 수녀님에게 비키니 수영복을 방판하는 발칙한 영업사원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업무제휴라고 하셨습니까.”
“예.”
강 전무의 시선에 두려움을 국물 삼아 퉁퉁 불은 라면처럼 졸아붙을 뻔했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기술제휴를 포함한 신규 프로젝트입니다. 기술 설명은 파일 보면서 설명해드리…….”
“아뇨. 제가 보죠.”
점잖게 고개를 가로저은 그는 자신의 앞으로 PC를 가져갔다. 화면을 터치해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는 조금 전 시제품 테스트 보고서를 볼 때만큼이나 느리고 신중했다. 손이 떨려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커피를 마시던 하선우는 파일 속의 내용을 머리로 굴렸다.
현재 NnG가 엘텍을 상대로 납품하는 제품은 이차전지를 담는 외장재인 알루미늄 캔이었다. 깊이가 깊은 캔을 0.01밀리미터 두께 이하로 만들어 납품하면 엘텍이 그 안에 전지를 이루는 셀을 담아 가공하는 방식이었다. NnG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의 계약은 유지하면서 새로운 사업계약을 맺는 것이었다. 알루미늄 캔은 전지 셀을 많이 밀어 넣을 수 있지만, 대용량에선 얇게 만들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었다. 반면에 연성이 있는 파우치는 대용량에서 얼마든지 얇게 만들 수 있었다. 기존의 알루미늄 캔뿐만이 아니라, 파우치를 가공해 엘텍에 납품하는 것이 내년도 NnG의 신사업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자유로운 자금운용이 가장 절실했다.
말없이 화면만을 응시하던 강 전무가 고개를 든 것은 그로부터 20여 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고문 같은 시간을 멈춘 것은 버져 소리였다. 방 전체를 울리는 버져 소리에 고개를 든 강 전무는 하선우를 보며 웃었다.
“우리 둘 다 오늘 만난 목적이 비슷하군요.”
긍정적으로 검토해주겠다는 얘기일까, 기대를 갖는 하선우를 바라보던 강 전무의 웃음 띤 시선이 위로 비껴갔다.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좀 늦었습니다.”
낯선 목소리에 하선우는 고개를 돌렸다. 면식이 있는 수행비서와 달리 초면인 남자는 키가 훌쩍 큰 사내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뇨. 부장님이야말로 급히 오느라 피곤하시겠습니다.”
“사실 피곤하긴 합니다. 비행기 안에서까지 일하는 사람은 엘텍 직원밖에 없다고 스튜어디스가 웃더군요.”
강 전무에게 강도 높은 업무에 대한 엄살을 부리는 사내는 불혹을 넘긴 나이로 보였다. 숱 많은 겉눈썹 아래의 뼈가 불룩 튀어나오고, 눈매가 찢어져 고집이 세 보이는 그는 불도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우락부락한 그에 비해 강 전무의 인상이 유해 보일 정도였다.
소파에 앉은 강 전무에게 간단하게 업무보고를 마친 그는 하선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선우 사장님이신가요?”
“예.”
“전략기획 1팀 부장 임진태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만, 하선우는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의 손을 잡았다. 두껍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커다란 손에 힘을 줘 흔들며 그는 기선 제압이라도 하듯 하선우를 힘주어 보았다. 강 전무 못지않은 키에 헤비급 챔피언 같은 체격의 사내는 과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유형이었다.
“배터리 전문기업 NnG 사장 하선우입니다.”
강 전무로도 모자라 임 부장이라니. 몰이 당하는 짐승이 된 불편한 느낌을 내색하지 않으려 하선우는 애써 웃었다.
“저녁 식사는 잘하셨습니까. 맛이 괜찮죠?”
“아주 훌륭하던데요. 사슴 스테이크는 처음이었는데 맛있었습니다.”
“강 전무님이 몹시 신경을 기울이셨던 걸로 압니다. 하 사장님 오늘 특별대우 받으신 겁니다.”
“그런가요.”
하선우는 불독처럼 무섭게 생긴 사내가 자신 같은 햇병아리를 왜 띄워주나 의아스러웠다.
“해외출장 다녀오시는 길인가 봅니다.”
“아뇨. 지방에 좀 다녀왔습니다. 비효율적인 공장 하나를 폐쇄해 해외로 나가기로 결정이 난지라.”
“국내 공장을… 폐쇄하는가 보죠.”
“아직 어느 공장을 폐쇄할지는 결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개별 공장 단위 노조들과 구체적으로 협상한 뒤에 결정해야겠죠. 지자체 협력 문제도 있고 복잡한 안건이죠.”
회사와 트러블을 일으키는 노조단체가 있는 공장을 골라서 폐쇄하겠다는 얘기였다. 남의 밥줄 끊어놓겠다는 살벌한 얘기를 웃으면서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멀쩡하게 소화되던 사슴 스테이크가 역류해 명치에 콱 얹히는 느낌이었다. 하선우는 강 전무를 돌아보았다. 그는 소파의 손걸이에 팔을 얹고 손등에 턱을 괸 무심한 자세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임 부장님.”
“예. 전무님.”
“NnG에서 업무제휴를 제안했는데 서류 읽어보시죠.”
“……. 업무제휴 말씀이십니까.”
임 부장의 눈에 뜻밖이란 빛이 어렸다. 하선우는 왜인지 숨고만 싶었다.
“엘텍에 파우치 필름을 납품하고 싶다더군요.”
강 전무에게서 PC를 건네받은 임 부장은 하선우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강 전무와 달리 속독하듯 화면을 넘겼다.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길 기대했던 하선우에게 남자의 태도는 다소 성의 없이 느껴졌다. 빠르게 서류를 읽었던 만큼 남자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파우치 필름은 일본기업에 발주를 넣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지 부문 구매 파트 담당자가 아니라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국산화 개발을 이유로 자금지원을 할 만큼 별로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군요.”
두 사람은 짧은 침묵을 주고받았다. 하선우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파일을 보시면 단순한 파우치뿐만이 아닙니다. 얇은 폴리머로 양극과 음극을 분리하는….”
“하 사장님.”
“예.”
“굳이 설명하지 않으셔도 정리해주신 자료만으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기술시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임 부장은 단호한 얼굴로 웃었다. 긍정적인 평가인지 부정적인 평가인지 명확하게 판단을 내리지 않았지만, 하선우는 그가 유보하는 입장이란 것만은 알 것 같았다.
PC 안의 파일을 살펴보기나 했을까. 이대로 아까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말 한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는 남자의 반응에 애써 웃음을 유지하던 하선우는 어렵게 입을 뗐다.
“임 부장님. 최근 몇 년 동안 엘텍의 화학 계열사 투자가 에너지 저장 소재 분야에 집중됐다고 들었습니다. 그만큼 엘텍에서도 이차전지 산업에 관심이 있다고 판단하여 제안드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 사장님을 만나고자 한 이유입니다.”
별안간 끼어드는 목소리에 하선우는 고개를 돌렸다. 여태 잠자코 있던 강주한이 천천히 등받이에서 허리를 뗐다.
“지금껏 하 사장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이번에는 저희 쪽에서 제안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껏 하고 싶은 얘기의 발톱의 때만큼도 말하지 못했지만 하선우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 사장님의 말씀대로 엘텍에서도 이차전지 분야를 고성장이 가능한 분야로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외주를 내주느니 배터리 생산라인 자체를 엘텍의 직할에 두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죠.”
“…직할로 두시겠다고요.”
“NnG를 인수하겠다는 말이 아니니 오해하진 마시죠.”
잘라내듯 말하며 강 전무는 비서에게 커피를 더 따라달라는 주문을 한 뒤에 잔을 들었다.
“부품을 제공하는 기업들을 자회사로 인수하는 건 좋은 점도 있겠지만 기업 전체에 부담되는 일입니다. 저는 여타 국내의 경영자와 달리 기업의 몸체를 둔하게 키울 생각은 없습니다.”
잔여물이 가라앉은 쓴 커피맛에 미간을 좁히며 그는 말을 이었다.
“물론 핵심적인 부품 생산에 한해 인수할 필요성을 느끼긴 합니다.”
강 전무의 말에 하선우는 전자기기의 핵심부품에 대해 떠올렸다. 하나의 휴대전화를 만들기 위해선 셀 수 없이 많은 공정과 부품이 필요했다. 플라스틱 외관의 재료가 되는 석유화학부터 케이스를 만드는 금형기술, 메모리 반도체 분야, 설계와 디스플레이, 회로기판과 배터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연구와 회사와의 합작이 필요했다.
그리고 엘텍의 경우 핵심기술을 보유한 제조업체를 이미 대부분 계열사로 거느린 상태였다. 그중에는 배터리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적으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이차전지 분야에 관련 특허를 많이 가지고 있는 기업이다 보니, 엘텍은 전지에 들어가는 소재와 완제품을 이미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었다. 엘텍을 대상으로 하선우의 회사가 납품하는 것은 전지 본체를 담는 알루미늄 외장 케이스에 지나지 않았다. NnG의 제조라인이 생산하는 제품은 강 전무가 말하는 핵심부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재의 NnG는 엘텍 같은 대기업이 인수 대상으로 노릴 만한 기업이 아니었다. 결국 그는 뜸 들이지 않고 물었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엘텍에 핵심부품을 납품하는 업체도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저를…….”
“하선우 씨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커피잔을 내려놓는 동시에 하선우와 눈을 맞춘 남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언젠가 하선우는 강주한의 직시하는 눈빛에 불쾌할 정도의 자극을 받은 적 있었다. 현미경으로 세포의 핵을 들여다보듯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눈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 강 전무의 눈을 보면서 그는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상대방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은 뒤로부터 공격당할 리 없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확신으로 가득한 포식자의 전형적인 시선 처리였다. 반면에 초식 동물은 불안에 가득 찬 시선을 어깨너머로 흘깃거리는 것으로 포식자와의 거리를 어림잡았다.
표범은 정면을 응시하지만, 가젤의 불안에 찬 시선은 포식자의 주변을 헛돈다. 지배적인 계급과 피지배적인 계급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협상 테이블의 우위를 가늠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며칠 전 읽었던 책의 구절을 곱씹으며 하선우는 새삼스럽지만 다시 깨달았다. 자신은 이곳에 저 남자와 친해지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강주한은 표범이었고 자신은 달아날 수 없는 가젤이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덤벼드는 포식자는 하선우에게 예상하지 못했던,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저희가 관심을 가진 건 최근에 하 사장님이 개발한 급속충전 기술입니다.”
하선우의 뇌리로 얼마 전에 국제출원 등록 절차에 들어간 특허가 떠올랐다. 멍하니 강 전무를 바라보던 하선우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기술은 특허를 받긴 했지만 테스트 단계를 거치는 중이고…… 실용화될 만한 기술인지도….”
더듬더듬 말을 잇던 하선우는 입술을 다물었다가 생각을 빠르게 정리해 말했다.
“시제품 PC 안의 자료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무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술보다 훨씬 더 이익이 높게 판단되어 업무제휴를 말씀드린 겁니다.”
“그 기술도 차차 검토해보죠. 하지만 엘텍에서는 하 사장님이 개발한 급속충전 기술에 우선을 두고 있습니다.”
“안전하게 상용화되기까지 시일이 많이 소요될 겁니다. 소비자가 요구하는 기준점에서 최적의 상태를 보일지도 의문이고요.”
물끄러미 하선우를 바라보던 강 전무의 눈가가 갸름해졌다.
“하 사장이 특허를 출원하긴 했지만, NnG로서는 현재 실용화할 방안이 없는 걸로 압니다. 하 사장이 직접 특허기술을 기술거래소에 등록하셨더군요. 혹시 엘텍보다 먼저 기술이전 제안을 한 기업이 따로 있기라도 한 겁니까.”
“아뇨.”
“그럼 이해가 안 돼서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하 사장님.”
“예.”
강 전무는 하선우를 향해 상체를 당겼다.
“제안을 한 회사가 엘텍이라서 반갑지 않으신 겁니까.”
“아뇨, 아뇨! 절대 그런 건 아닙니다. 너무… 뜻밖의 제안이라서 그랬습니다.”
펄쩍 뛰는 하선우의 대답을 듣고 강 전무는 한참 뒤에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하선우를 향해 기울였던 상체를 소파 등받이에 느슨하게 기댔다.
“그럼 이야기가 쉬워지겠군요.”
하선우가 출원한 특허는 좋은 기술이라 말할 수 있었지만 NnG로서는 실용화할 가능성이 요원한 기술이었다. 개발하는 것까진 좋았지만 NnG는 기술을 실용화하기는커녕 테스트할 자본조차도 갖추지 못했다. 게다가 국제특허를 출원하는 과정에는 많은 돈이 들어갔다. 변리사 비용만 해도 500만 원이 넘어갔고, 미국 한 나라만 해도 천만 원 가까이 소요되어 수천만 원이 넘게 들어갔다. 이석이 국제특허를 내는 것에 회의적이었던 탓에 하선우는 개인적으로 가족에게 빚을 져가며 특허를 출원했다.
개발비용과 특허를 내는 과정에 들어간 돈을 전혀 회수하지도, 회수할 가능성도 없는 하선우에게 남은 결정은 한 가지뿐이었다. 타인에게 특허권 사용을 허락해 로열티를 지급받거나, 투자자를 찾아서 직접 제품을 생산하거나. 하선우는 그나마 가장 현실성이 있는 전자를 택했다. 그러나 기술이전을 위해 기술거래소에 의뢰한 지 두 달이 넘어가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연락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시장이 원하지 않는 지나치게 앞선 기술이 그렇듯이 빛을 채 보기도 전에 사장될 것이었다. 그는 강주한이 입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선우는 목이 타서 거의 비어있는 잔을 괜스레 기울였다. 혀끝에 감도는 쓴맛으로 목을 축인 그는 고동치는 맥박을 느꼈다. 뒤늦은 커피의 작용인지 심장이 뛰고 두렵게 느껴졌다. 분명 엘텍의 제의는 기술과 특허만이 전부인 NnG로서는 기회였다. 반갑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기이하게도 껄끄러웠다.
강주한의 눈짓에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임 부장이 테이블 위의 바인더를 들었다. 조금 전부터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던 ㈜NnG 종합평가 평점표 파일이었다.
“지금 당장 결정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시일을 두고 천천히 결단을 내리셔도 괜찮습니다. 선택을 강요하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니까요.”
임 부장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 사장님이 경영자로서 결정을 내리시려면 저희 역시 구체적인 제안과 조건을 내놓아야겠죠. 그래서 마련한 자리입니다.”
임 부장의 말 속에서 하선우는 몇 가지 사실을 추려냈다. 상대방은 면밀한 검토 끝에 특허를 돈이 되는 기술로 판단하였을 것이다. 강 전무 같은 중요인사가 직접 나서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면 그만큼 기술의 가치가 높다는 말이 된다. 즉, 결정권을 가진 것은 하선우였으므로 엘텍이 기술이전을 원하는 한 NnG는 뻗대 볼 만했다.
그렇다면 아쉬운 쪽은 엘텍이고, 힘의 우위는 NnG에 있는 것인가. 하선우는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NnG에서 납품하는 배터리가 들어가는 STX-200번대 모델은 1월 이후에 생산 종료될 예정입니다.”
하선우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파일을 펼치며 임 부장은 말했다.
“하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신제품이 거의 쏟아지다시피 하는 업계이다 보니 구 모델의 생산 중단 역시 빠른 편입니다. 계속해서 NnG에 주문을 넣고 싶지만 아쉽게도 생산 종료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건… 엘텍에서 신제품을 출시할 때 설계도를 저희 쪽에 넘기시면… 얼마든지 커버 가능한 일 아닙니까. 저희도 금형을 만드는 기술이 있고, 신제품에 따라 시간만 주시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남자는 파일을 하선우의 앞으로 밀었다.
“NnG에서는 매출 대부분을 엘텍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니 거래를 중지하면 타격이 크겠죠. 은행의 단기차입금이 장기전환을 거절당했는데 조만간 은행의 대출금 만기까지 도래하더군요.”
이대로 석 달을 버티지 못하면 회사는 부도가 나겠죠. 그는 임 부장의 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을 읽을 수 있었다. 임 부장이 내민 자료에는 NnG의 경영실태와 재무상태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하선우는 침묵했다. 점점 굳어가는 표정을 수습하며 말했다.
“NnG와의 거래를 중단하겠다는 말씀인가요.”
“굳이 표현하자면 거래를 중단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신 기존에 거래하던 산원테크와 해성, 모성, 하신 전자와도 모두 거래를 중지합니다.”
NnG뿐만이 아니라 기존의 거래처 모두 거래를 중단한다는 뜻밖의 말에 하선우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대신 입찰로 거래처를 선발할 예정입니다.”
“공개 입찰 말씀이십니까.”
“예. 지명입찰로 세 곳의 협력업체를 뽑을 겁니다. 기술력이 우수하고 가격 면에서도 경쟁력 있는 업체와 계약을 맺기로 했습니다.”
“지명입찰이면, 지명된 업자만 입찰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잘 아시는군요. 해성과 NnG, 산원테크와 모성, 하신, 원일, 카일텍 일곱 기업 중에서 선발할 겁니다. 입찰로 선발된 기업에는 설비투자와 연구개발비로 최대 160억을 무이자 지원할 예정입니다. 생산 시설도 증설하고 매출도 증대되니 공개 입찰에서 선발되는 기업에겐 행운이지 않겠습니까.”
“…그렇겠군요.”
입찰을 통해 기존에 거래하던 업체를 일곱 개에서 세 개로 줄이고 선정된 기업에는 비록 대출이긴 하지만 무이자로 160억 원 규모의 지원을 해주겠다는 얘기였다. 이런 얘기를 하필이면 지금, 특허 기술이전을 제안한 뒤에 하는 의도는 뻔했다.
“공개 입찰에서 NnG에 유리한 조건을 드리죠.”
“……. 저희를 내정자로 두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이해가 빠르시군요.”
“하지만… 그건 불법…….”
“정부기관에서 진행하는 사업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철부지 어린아이를 대하듯 웃은 임 부장은 표정을 지우며 말했다.
“비밀이 새어나가지만 않는다면 협력업체의 반발도 없겠죠.”
이것이 특허 기술이전을 제안하는 엘텍의 조건 중 하나였다.
엘텍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작전이었다. NnG를 내정자로 놓고 입찰을 진행한다면, 결국 남은 두 개의 자리를 놓고 여섯 업체가 싸움을 하는 꼴이었다. 생존이 걸린 만큼 기업들은 목숨을 걸고 덤벼들 것이고, 경쟁이 과열될수록 납품하는 물품의 단가는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협력업체가 손해를 보는 만큼 엘텍은 차익을 남길 것이었다.
남은 협력업체로서는 불행한 일이지만 NnG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특허 기술이전을 통한 로열티를 지급받고, 기존의 거래 역시 유지·증가되니 하선우로서는 엘텍과의 비밀한 공모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현재 NnG의 재무 상태는 최악이었고, 엘텍과의 거래가 끊긴다면 3개월 후를 장담할 수 없었다. 엘텍이 제시한 조건은 지나치게 달콤해서 그는 눈앞에 닥친 이 반칙 같은 행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희의 제안이 어떻습니까. 고려해보시겠습니까. 하선우 사장님.”
임 부장은 거절할 리 없다는 듯,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지나치게 힘이 담겨 오히려 반발심을 일으키는 임 부장의 얼굴을 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만약 거절한다면?
그사이에 다른 업체에 기술이전을 의뢰해 수락해버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기존에 유지하던 엘텍과의 거래가 중단될 것이다. 그건 정말로 멍청한 짓이었다. 결국 하선우는 치기가 뒤섞인 반발을 철회해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면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내민 달콤한 사탕을 입안에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한 행운임에도 죄를 짓는 듯한, 무력한 기분을 감출 수 없는 스스로가 이상했다.
“하 사장님.”
늦어지는 대답에 임 부장은 조금 더 부드럽게 하선우의 반응을 재촉했다.
하선우는 이번에도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움직여 강 전무를 찾았다.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앉은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로 숨김없이 의심을 드러내는 하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냉정할 정도로 상대방을 해체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갑자기, 불쑥, 하선우는 강주한의 초연하고도 메마른 감정의 거죽을 뜯어내버리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그 감정은 솟아올랐던 만큼 빠르게 꺼져버렸다.
강 전무의 시선을 피하며 하선우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 * *
남자는 상냥한 타입이었다. 장소를 남의 이목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룸으로 정하는 센스도 겸비했다. 외모는 준수하지만은 않았지만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학과는 떨어져 살아서 선우 씨 같은 사람 보면 뭔가 대단해 보이고 그러더라고요.”
“대단할 것 없어요.”
하선우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하며, 입안에서 단맛이 퍼져 나가는 호박전을 씹었다.
“대단할 게 없긴요. 제 모의고사 성적표 보시면 선우 씨 한숨 나올걸요.”
류주오라는 느끼한 이름과 달리 남자의 외모는 순박한 편이었다. 수다스러웠지만 경박하지 않고, 자세히 보면 귀염성도 있어 어머니들이 좋아할 타입이었다. 저기에 조금 더 우직하기까지 하면 자신의 취향에 반절 정도는 부합할 텐데. 소개팅에 큰 기대 없이 나왔지만 하선우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사회생활하면서 느낀 건데 공부 열심히 하는 게 다 돈 많은 사람들 배 불려주는 거더라고요. 윗사람 실속 챙겨주는 거죠 뭐.”
“사장님이시라면서요. 사장님이 그런 말 하니까 이상한데.”
“그런가.”
소리 없이 웃자 그가 호감을 가득 담은 수줍은 시선으로 하선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불편하도록 직시하는 그 누군가와는 다른 눈빛이었다.
“피부과 다니세요?”
“예? 그런 데 갈 시간 없는데요.”
“아니, 얼굴에서 막 광이 나는 것 같아서요.”
“아… 정말 그만하십쇼.”
남자의 장난기 섞인 말에 하선우는 속으로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입 밖으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솔직히 생각했던 것보다 인물이 좋아서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나은데요.”
“그 사진이 초췌하게 나온 거라니까요. 한라산 정상에서 찍었던 사진인데 오죽하겠어요?”
하선우는 한숨을 쉬었다. 오래전 동호회에서 활동하던 시절 제주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국내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것도 잊고 별다른 준비 없이 하선우는 제주도의 트레이드마크인 한라산을 올랐고 방만의 대가로 근육의 통증을 선물받아야 했다. 악과 깡으로 정상을 향했다면, 내려올 때는 일행으로부터 뒤처지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였다. 그 와중에 찍혔던 사진 속의 자신이 제대로 된 몰골일 리가 없었다.
“그때가 선우 씨 스물일곱이었죠? 지금이랑 별 차이도 없는 것 같아. 지나다니면 사람들 막 쳐다보고 그러지 않아요?”
“안 그래요. 이거 너무 좋게 봐주시니 부담스러워지려고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계속되는 칭찬에 이 자리가 슬슬 부담스러워지려 했다. 하지만 모처럼 잡힌 약속이었고, 엉덩이를 뗄 만큼 눈앞의 남자가 거슬리지도 않았다. 한때 단순한 욕구에 끌려 접근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소개팅이란 낯간지러운 격식을 갖추며 부딪혀오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주오 씨 주변에 사람이 많죠.”
“많아 보여요?”
“예. 서글서글하시고 붙임성 있으신 것 같아서요.”
“선우 씨야말로 인물 뛰어나고 성격 좋으셔서 많을 것 같은데요.”
“없어요. 매일 회사에 틀어박혀 있잖습니까.”
“어, 앞으로도 그러면 안 되는데. 나랑 연애해야 하는데.”
연애라니. 하선우는 헛웃음을 흘렸다. 욕구해소라는 분명한 선의 즉흥 만남에 익숙할지언정, 연애 자체가 목적인 적은 거의 없었다.
하선우는 류주오가 그저 그랬지만, 눈앞의 남자는 하선우를 거의 일방적으로 마음에 들어했다. 협상테이블로 보자면 아쉬울 것 없는 하선우는 강자였다. 어제 일의 여파가 상당한지 자꾸만 협상, 강자, 약자, 전략 따위의 단어가 사고의 회로에 떠돌아다녔다.
문이 열리고 음식이 들어왔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직원이 놓고 간 불고기 요리에서 먹음직한 단내가 풍겼다. 인사동 내에서도 유명한 한정식집이라더니 음식은 대체로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빈 접시를 가져가던 직원이 서로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는 하선우와 남자를 웃는 눈으로 살펴본 뒤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멈췄던 대화가 재개되었다.
“먹을 만하죠?”
“예.”
“이전부터 가끔 들러요. 맛이 자극적이지 않아서 한옥마을 오는 외국인들에게 소개해주기도 좋고요. 제가 한식을 좋아해서 근처의 한정식 집은 대부분 가봤는데 강북에는 여기만 한 데가 없더라고요.”
한정식을 좋아한다던 또 다른 얼굴이 떠올랐다. 요즘 대부분의 호텔이 한식당을 없애는 추세거나 세계화란 명목으로 퓨전요리를 시도하다 자가당착에 빠지는 데 반해, 꽤 현명한 선택이죠. 고급스러운 어휘를 뽐내던, 자가선전에 능한 사내의 말솜씨도.
“거기도 괜찮다던데.”
“어디 말씀이십니까.”
“거기가…….”
하선우는 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딘데요.”
류주오는 재촉했다.
“…여기서 가깝습니다.”
“근처면 인사동?”
“엘튼 호텔요. 1층에 칠복주가라는 한식 레스토랑이 있는데 상당히 괜찮다던데요.”
“아아, 칠복주가! 거기 유명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직 못 가봤습니다. 다음에 같이 가보시겠어요?”
자연스럽지만 노골적으로 후일의 약속을 유도하는 류주오에게 하선우는 껄끄러운 본심을 감추고 웃었다. 남자와의 두 번째 만남이 부담스러운지, 아니면 약속 장소가 엘튼 호텔이라서 거북한 건지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용기를 낸 남자의 면전에서 거절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시간 내보겠습니다. 저도 가보고 싶었던 곳이거든요.”
“어… 정말요?”
“예.”
하선우의 한마디에 그의 얼굴에 확연하게 기쁜 기색이 드러났다. 유연하게 상황을 대처하려고 해도 감정을 솔직하게 숨기지는 못하는구나 싶었다. 지나치게 아부를 한다든가, 긴장을 제어하지 못하는 모습이 묘하게 요령이 없어 보였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머리를 써야 하는 누군가를 만나고 난 다음 날이라서 그런지 하선우는 상대방이 보이는 순박함에 숨통이 트였다. 강 전무가 자신을 볼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쉬울 것 없는 입장이 되니 상대방의 모든 것이 보였다. 그의 목소리가 가끔 떨리는 것도, 마른 목을 축이느라 자꾸 물을 마시는 것도 모두.
강주한이 보통 인물이 아니긴 한지 의식하지 못하는 새 자꾸만 어제의 일들을 현재와 겹치고 있었다. 물론 눈앞의 남자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강주한이 아니었고, 강주한과 달리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한 인물이었다. 밥을 먹고 나면 술을 마시러 갈 것이고, 헤어지거나, 서로의 성적인 매력을 점검하기 위해 잠자리로 직행할 것이었다.
그러나 강주한은 그가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선우의 의도보다는 강주한의 의도가 우선되었고, 그는 강주한의 의도 전부를 읽어낼 수 없었다. 지난 밤 이석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와 하루 동안의 일을 털어놓았을 때 기뻐하는 이사의 감정에 순수하게 동참할 수 없었다. 자꾸만 거슬리는 무언가가 그의 가슴 안쪽에서 넘실거리는 기분이었다.
머리 비우려고 나온 소개팅에서 또다시 강 전무의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그는 찬물을 마셨다. 처음 만나 공통의 화제가 요원했던 두 남자는 결국 손쉬운 화젯거리를 찾았다. 자리를 마련한 주선자에 대한 얘기였다.
“선우 씨는 정운이와는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뭐… 인터넷 모임으로 알게 됐죠. 10대 때부터 들락거렸어요.”
남자는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자각이 빨랐나 봐요?”
“자각보다는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인정한 거죠. 오프 모임에 나간 건 대학 들어가면서부터고요. 예전에는 오프에서 만나 여행도 가고 그랬는데… 바빠서 못 간 지도 꽤 됐죠.”
“그럼 다른 인터넷 모임 같은 건 안 가신다는 얘기죠.”
“예.”
“어쩐지. 선우 씨 눈에 띄는 외모인데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나 했습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르는 외모 칭찬에 조금 웃어 보이는 것으로 하선우는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는 주오 씨는 정운이랑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정운이가 워낙 발이 넓잖아요. 정운이가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회원들이 가끔 가평의 펜션에 놀러 오는데 남자들끼리 놀러 와서 분위기 요상하게 잡는 게 한눈에 봐도 수상하잖아요.”
“하하, 그렇죠. 분위기 수상하죠.”
“촉이 왔죠. 아, 이쪽이구나.”
주선자인 정운이 이르기를 류주오는 신림 부근에 모텔 두 채와 가평에 펜션 하나, 을지로의 유스호스텔과 북촌 내에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한옥 한 채를 가진 숙박업자라고 했다. 상당한 자산가였다. 자영업 중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운 숙박업을 하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평범한 삶을 디뎌온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그는 하선우와 마찬가지로 궤도를 이탈한 떠돌이별이었다. 겉 가지는 모두 다를지 모르지만 핵심은 닮아있는 동류였다. 그래서인지 모든 것이 편안했다. 재미없을 정도로 지나치게 자극이 없었다.
지나치게 편안해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남자와, 지나치게 불편해서 그를 약간 제정신이 아닌 위축 상태에 이르게 하는 남자. 젓가락을 쥔 손이 움칫 떨렸다. 또다시 재수 없는 강 전무의 면상이 떠오르고 말았다. 국물이 튄 손목을 물티슈로 닦아내며 그는 낮게 혀를 찼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가 보죠.”
“예?”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으셔서요. 아니면 이 자리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건지.”
“아뇨, 아닙니다.”
난처한 표정으로 하선우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강주한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불편한 기색을 띠었던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이번 주에 일이 많아 머리가 복잡해서 그랬나 봅니다.”
“회사 일인가 봐요.”
“예. 거래처 사람들과 만날 일이 잦았거든요.”
“거래처면 엘텍이죠? 대기업 상대로 힘들겠어요.”
“다들 그렇죠 뭐.”
어깨를 으쓱이며 하선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접시에 덜어낸 음식을 먹는 하선우를 잠자코 지켜보던 그가 물었다.
“제조업 분야에서 서른하나에 사장님 직함 단 거면 선우 씨 굉장히 일찍 시작한 거네요.”
“경영은 이사님이 맡고 계셔서 전 직함만 사장이지 보통 연구원이 하는 일과 별반 다를 바 없어요.”
“연구원이면… 전 그쪽 분야는 연고가 없어서 감이 안 잡히네요.”
“저희 팀 같은 경우는 이미 출원된 기존의 특허를 파악하고 개량해서 제품개발을 합니다. 이미 있는 기술 중에서도 아직 응용되지 않은 공백 기술을 연구한다고 해야 하나. 좀 포괄적이네요.”
“얘기만 들어도 복잡하네요. 많이 힘들죠?”
“보통 공부 안 하는 학생더러 대학 가서 미팅할래, 대학 안 가고 미싱할래? 이러잖아요. 저는 대학 와서 미싱하는 기분이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아, 저 같은 경우는 땜질인가요.”
소탈한 웃음을 짓던 하선우의 표정이 차차 흐려졌다. 기어이 강 전무의 이름이 의식을 뚫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처럼 단순히 감정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하선우는 어젯밤의 대화를 빠르게 떠올렸다. 강 전무와 임 부장의 말 속에서 미처 짚어보지 못하고 넘겨버린 간극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하선우는 류주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거슬리는 느낌을 자아냈던 균열의 틈을 들여다보았다.
하선우가 개발하고 특허를 낸 기술은 기초과학이 부실하고 응용과학만이 발달한 국내 업계에서 흔치 않은 원천기술이었다.
기초가 되는 기술이다 보니, 하선우가 출원한 특허는 원천특허였다. 만약 그의 특허를 개량해 새로운 특허를 낸다면 권리자인 하선우와 민사상의 거래·계약을 체결하고 로열티를 지급해야 했다. 원천특허를 삼키지 않는 이상, 그와 관련된 모든 기술개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선우는 엘텍이 입찰 계획의 내정자로 NnG를 두면서까지 무리하게 기술이전 계약을 맺으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선우가 개발한 기술을 개량하고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선 NnG와의 계약이 꼭 필요했다. 여전히 의문이 남았지만 명확하게 실체화된 의도가 눈에 보였다. 그들의 의도를 알았으니, 기술이전의 조건을 NnG에 유리하게 끌고 올 수도 있었다. 내일 회사에서 이석과 심도 깊은 얘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하선우는 여태 흘려듣던 류주오의 말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대화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하선우는 그와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그 통한다는 느낌이 성적인 매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친구와 애인의 편안함이 다르듯이 류주오의 편안함은 전자에 근거하고 있었다. 일상다반사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시계추는 어느덧 8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음료가 바닥을 보인 지도 오래, 슬슬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누가 먼저 선뜻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때 류주오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겁게 운을 뗐다.
“선우 씨.”
“예.”
“차 좋아하십니까.”
“차요?”
“예. 마시는 차요.”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입술을 주먹으로 막았다.
“어떠세요?”
“주로 커피 마시는 편이라 챙겨 마시지는 않는데…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주오 씨는 차 좋아하시나 봐요.”
“예. 차를 좋아해서 담양에 있는 산사에서 다도법도 배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저희 한옥에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문화 체험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아… 북촌 한옥마을에서 게스트하우스 운영한다고 하셨죠.”
“예. 여기서 가까워서 차 타고 10분도 안 걸립니다.”
별것 아닌 말이 남자의 쑥스러운 말투 때문에 의미심장해졌다. 이야기의 기류가 묘하게 흘러갔다. 류주오는 차근차근, 거절당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조금씩 밀고 들어왔다.
“마침 내일이 월요일이라 한옥 한 채가 비는데 가보시겠습니까. 어린 야생 녹차 잎으로 만든 수제 차가 있는데 시음도 해보시고요.”
남자가 개인적인 공간으로 초대하는 첫 운을 띄운 셈이었다. 웃음 띤 얼굴의 밑바닥에 긴장이 꿈틀거렸다. 명목은 다도였지만, 하선우는 그 안의 의도를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류주오가 썩 마음에 차는 것은 아니었다. 류주오를 알아가고 싶다는 호기심도 생기지 않았다. 밀고 당기기를 거치고 연애를 지나 섹스에 이르는 고단한 과정을 감수할 만큼 류주오는 신비스럽지 않았다.
교양 있는 성인 남성으로서 지켜야 할 선은 두 사람 사이에 없었다. 섹스를 하고 헤어지든, 그냥 헤어지든 두 사람만의 문제였다. 때마침 하선우는 심신을 강퍅하게 만드는 일상에 지쳐 있었기에 축축하고도 질퍽한 위로가 필요했다. 결정적으로 저쪽에서 먼저 유혹해주었다.
어쩔까.
짧은 고민 끝에 하선우는 겉옷을 챙겨 일어났다.
“자동차 안 가져오셨다고 했죠. 제 차 타고 옮길까요.”
“그러죠.”
남자는 웃음을 감추려 괜스레 목을 긁는 헛기침을 해댔다.
“북촌이면 어디죠. 제가 이곳 지리를 잘 모릅니다.”
“종로 위쪽이에요. 엘튼 호텔에서 가깝습니다. 가면서 알려드릴게요.”
엘튼 호텔이라는 말에 하선우는 순간 멈칫했다. 근래 요 부근에서 활동이 잦다는 꺼림칙함에 표정을 굳히다, 괜한 기우라는 생각에 거슬리는 기분을 지워버렸다. 결정을 내렸으니 가타부타 불편한 핑계를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콘돔은 있죠?”
불쑥 던진 질문에 허둥거리던 류주오의 움직임이 멎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남자의 표정을 보고도 하선우는 태연하게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천천히 카드를 뽑아 계산서 위에 올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선우는 말했다.
“없으면 사갈까요?”
당황한 얼굴에 점점 상기된 빛이 떠올랐다. 긴장을 억누른 목소리로 남자가 대답했다.
“아뇨. 준비해뒀습니다.”
시침을 뗐지만, 그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쳐놓은 상태였다. 준비성. 그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뿐이었다.
* * *
노변을 따라 한옥마을이 늘어선 북촌로는 밤에 젖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 사이에 위치해 늘 북적이는 곳이었지만 주말의 활기가 식어가는 길 위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 길 위에 보기 드문 고가의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 주차된 차체에서 작은 소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앵커의 목소리였다. 남자는 파티션으로 격리된 뒷좌석에 앉아 마감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비리 혐의로 정치인이 검찰 조사에 소환되었다는 자막을 읽던 그의 눈길이 차창 밖으로 향했다. 파리처럼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호소문을 읽는 정치인의 소음 사이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는 비서의 뒤통수를 바라보다, 남자는 다시 뉴스로 눈길을 돌렸다.
“강 본부장의 연락 받았습니다.”
“뭐라던가요.”
“안신의 비자금 문서를 담당했던 세무공무원과 고등학교 동문이라고 합니다.”
“유상렬 씨 말입니까?”
“예. 게다가 세무공무원의 딸이 버지니아 대학에 지원을 했는데 추천서를 필요로 한다고 하더군요. 강 본부장님이 마침 버지니아 출신이기도 해서 다리를 연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잘됐군요.”
“그리고 알아본 바로는…….”
말을 흐린 비서는 조금 주저하다 말했다.
“단순한 사이가 아니라고 합니다.”
민망한 낯빛으로 비서는 말을 이었다.
“깊은 사이라고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육체적 관계까지는 가능한 사이인 듯합니다.”
“상대는요.”
“류주오라는 남자인데 숙박업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오늘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강주한은 채널을 돌렸다. 볼 것 없는 채널을 천천히 순회하다, 관성처럼 한 번을 더 돌아 결국 처음의 채널로 돌아왔다. TV의 볼륨을 조금 높이며 그는 물었다.
“국제 출원 과정은요.”
“하 사장이 국제특허를 출원 신청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조사, 공개 단계라고 합니다. 특히 미국, 유럽은 특허인정을 받기까지 아무리 빨라도 일 년 반은 더 걸릴 겁니다.”
비서는 룸미러로 뒷좌석의 강주한을 확인했다. 그는 뉴스가 아닌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주한이 국내에 머물 때마다 지켜봐왔지만 비서는 전무의 속을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외부 활동보다는 삼청동의 자신의 휴식처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 비서인 그에게 사적인 부분을 보여주지 않았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그와 함께 일한 덕분에 몇 가지 알게 된 것이 있긴 했다. 그는 막내 남동생을 거의 혐오했고, 여럿보다 혼자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며, 수집광인 데다가 다큐멘터리 시청에 관심이 많고 무골호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뼈 없이 순하여 남의 비위에 두루두루 맞는 사람에겐 관심을 갖지도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런 면에서 하 사장은 강 전무의 관심을 끌 만했다. 사람 좋은 척하려 하지만 날을 숨기지 못하는 배우다만 그 어색한 처세술이라니. 강 전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것은 하선우의 그런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심과 겉모습이 어긋나는 위태로운 태도.
과연 그것 때문만일까.
오래도록 차창 밖을 응시하던 강 전무가 고개를 돌렸다. 비서는 얼른 호기심을 담은 눈빛을 거두었다.
“출발할까요.”
“……가죠.”
강 전무는 편안하게 좌석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시동을 걸며 비서는 강 전무가 바라보던 어디쯤을 돌아보았다. 차가 서 있던 곳은 지대가 높았다. 혈관처럼 복잡하게 갈라진 북촌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저 아래 버선발처럼 곡선 진 기와지붕의 한옥이 보였다. 건물의 대문 앞에는 몇 시간째 하선우 사장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강주한의 시선이 향해 있던 방향을 힐끗 쳐다보던 비서는 곧 액셀을 밟았다. 차는 그늘을 벗어나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