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늘 속의 그림자 (1)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폭우였다. 모든 소란이 빗소리에 엉겨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우울해지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쉴 틈도 없이 일하는 후배에게 줄 커피 한 잔을 뽑아 들고 이석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한낮이었지만 태양을 가린 먹구름에 밖은 어두웠고 대부분이 퇴근해 썰렁한 실내에는 형광등이 부분부분 켜져 있었다. 그늘진 연구실 안을 떠도는 을씨년스러운 공기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퇴근 준비 다 했어?”
“이제 가야지.”
하선우는 결합전지를 전력에 접속시키며 대답했다. 버튼을 눌러 에너지의 밀도를 계측한 그는 이석이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그럼… 나도 퇴근 준비 좀 하고 올게. 밀도 좀 측정하고 있어라. 그것만 하면 돼.”
NnG 내에서 기술이전 여부를 결정한 이후 지난 3주간은 다망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단순한 기술이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기에 다면적으로 얽혀있는 이해관계를 최대한 NnG에 유리하게 이끌어야 했다. 기술이전에 대한 로열티와 기존 거래를 유지하는 조율은 사업적인 감각이 있는 이사가 맡았고, 그 외 기술적인 부분은 하선우가 담당했다. 그리고 지금 하선우는 엘텍전자의 본사에서 기술시연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다란 장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폭우 속을 빠져나온 그들은 차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같은 퇴근길이라면 옷에 라면 국물이 튀든, 양복에 구김이 가든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하선우는 비에 죄 젖은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거울을 살피고 있었다.
“이 와중에 용케도 여자 만나네.”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던 하선우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룸미러 속 하선우가 눈을 굴려 옆 좌석의 이석을 돌아보았다.
“이 와중에 안 만나면 언제 해. 여유 있을 때 사람 만나려고 하면 평생 못 해.”
“뭘 또 정색하고 말하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거냐?”
“아니. 일단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라도 하려고 만나는 거야.”
“2주 전에도 나가더니 괜찮나 봐?”
이석과 눈을 맞추던 시선을 낮추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세 번은 만나봐야 알 것 같아서 연락하기는 하는데 …모르겠어.”
“별로 느낌은 안 오나 봐? 안 예뻐?”
하선우는 건조하게 웃었다.
“오늘 만나보고 괜찮다 싶으면 새끼 좀 쳐봐라.”
“봐서.”
“보긴 뭘 봐. 당연히 해줘야지.”
이석에게 새끼를 쳐주는 날부터 NnG는 더 이상 안녕을 기원할 수 없을 터였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지 못하면 극복 못할 뼈아픈 연애의 흑역사를 읊어대는 이석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와이퍼의 빠르기를 아무리 높여도 폭우가 시야를 흐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여름 내내 해가 쨍하더니 겨울을 앞두고 늦은 장마가 찾아왔다. 노변 위로 번지는 네온사인과 전조등의 불빛에 눈이 피로했다. 한산한 도로로 접어든 뒤에야 그는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초대장 받았어?”
“무슨 초대장.”
“내년 초에 신년교례회라고 총동문회 한다더라. 최똘이 직접 챙겼던데.”
“최똘이?”
“응.”
“토요일이니까, 최똘이 꼭 오라더라. 넌 안 왔어?”
최똘은 최 교수 또라이와 최고 또라이를 뜻하는 말로 화공과 교수였던 최종완 교수를 학생들이 줄여 부르던 별명이었다. 졸업 이후 연락이 끊어져 어떤 교류도 없던 사이였기에 그의 연락은 의외였다.
“우편함 안 열어봐서 잘 모르겠는데.”
“너도 갔을걸. 우리 거의 세트로 취급했잖아.”
“…그랬었나.”
7년 가까이 연락하지 않았던 최 교수가 갑자기 연락한 이유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강 전무와 아는 사이라더니, 엘텍의 하청을 받고 있는 제자들이 떠올랐던 모양이었다.
“갈 거냐.”
“간만에 얼굴 비춰보지 뭐.”
“오랜만에 최똘 얼굴 보게 생겼네.”
“그러게.”
“다른 애들한테도 다 연락해볼까? 총동문회 오는지 안 오는지.”
김인후, 윤진권, 임현민, 김우석. 근데 문도일이 이 자식은 연락이 안 된 지 오래라서 올지 모르겠네.
문도일. 신경을 건드리는 익숙한 이름이었다. 혼잣말하는 이석의 입술에 머물렀던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던진 하선우는 묵묵히 핸들을 꺾어 골목으로 진입했다. 멀지 않은 곳에 이석이 사는 빌라가 보였다. 최대한 문에 가깝게 차를 멈춰 세웠다.
“데이트 잘해라?”
“사귀는 거 아니라니까.”
“여자 만나면 그게 데이트지 뭐. 암튼 잘해라?”
어깨를 한 번 들먹인 하선우는 이석이 문을 닫고 나간 뒤에도 한동안 시동을 켠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들이 불러일으킨 감흥에 지난 대학 시절을 떠올린 하선우는 곧 씁쓸하게 웃으며 빌라 앞의 좁은 공터를 벗어났다.
* * *
류주오와 여의도에서 술을 마신 이후로 2주 만의 만남이었다. 진국이라는 주선자의 말을 확인해볼 정도로 남자를 우려내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여전히 하선우에게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야 할지 확신을 주지 못하는 고민의 대상이었다. 약속 장소는 엘튼 호텔이었다. 관광 비수기지만 호텔에는 여전히 외국인 관광객이 득시글거렸다. 떼로 몰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그들을 지나쳐 약속한 장소로 걸어갔다.
한정식 레스토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판모양의 독특한 디자인의 간판에는 칠복주가 글씨가 흘림으로 크게 쓰여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임에도 한식당 앞은 개시 전의 분위기처럼 부산스러웠다. 입구를 오가며 층층이 쌓아올린 그릇과 식재료를 트레이로 옮기고 있었다. 조리복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한편에서 검은 정복을 입은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중요한 인물이 이곳을 방문하는 모양이었다. 불현듯 음식점에 들어가기 전부터 속이 더부룩해지는 불편한 느낌이 왔다.
“오느라 고생했어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류주오가 하선우의 어깨를 친근하게 감쌌다. 자리에 앉으려다 엉거주춤 선 채로 하선우는 포옹을 받았다.
“길 많이 막혔죠?”
“비가 와서 서울 진입로부터 좀 심하게 막히긴 하더군요.”
“다음부터는 약속을 일산이나 선우 씨 집 근처로 잡아야겠어요.”
대답하기 곤란해 하선우는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룸으로 잡으려고 했는데 모두 예약되어 있다고 하더군요. 홀도 괜찮죠?”
“예. 괜찮습니다.”
“어떤 코스로 먹을까요. 한정식이니까 같은 메뉴로 해야 할 것 같은데.”
“초란 코스로 하죠. 오기 전에 검색했는데 다들 그걸 추천하더라고요.”
“그럼 그걸로 하죠.”
주문을 한 뒤 두 사람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진지하게 고민하며 따져볼 만한 주제는 아니었고 싱거운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이런 시간을 계속 보내야 하나. 언제까지 서로를 탐색하며 이런 밋밋함을 견뎌야 할까, 대화의 중반에 이르러 하선우는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서로의 얼굴만 봐도 불타오르는 치열한 연애를 기대하는 건 아니었지만 류주오를 간 보는 이 상태가 즐겁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드는 생각도 있었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해 열애를 하는 것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 기회였다. 연애라는 것은 그런 감정들이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몸정과 마음정이 쌓이다 보면 사랑 비슷한 감정이 피어나기도 했다. 섹스도, 인물도 평범했지만 사랑 비슷한 감정이 피어나기까지 지지부진한 시간을 감내하기에 나쁜 조건도 아니었다.
“주말이라 그런지 손님 구성이 대부분 가족이네요.”
전복회를 집던 하선우는 류주오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식을 전문으로 하는 레스토랑이었기에 이곳을 찾은 손님들은 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양가 부모를 모시고 인사를 드리러 온 예비부부라든가, 가족 행사를 기념하러 찾아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격식 차리는 자리는 호텔 레스토랑이 편하긴 하죠. 저희 형들도 양가 부모님 모실 때 이런 곳을 찾더라고요.”
“선우 씨 형들은 다 결혼하셨죠?”
“예.”
“좋겠어요. 전 형제가 없어서 식구가 많은 사람들 보면 부럽더라고요. 외롭거든요.”
“외동이면… 결혼 때문에 부모님이 안달 내시겠군요.”
넌지시 던진 질문에 류주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씁쓸해졌다.
“이 나이 되면 다들 그렇죠. 대를 잇는 문제로 가끔 골치 아프긴 해요.”
남자의 대답으로 하선우는 그가 집에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폭탄 하나쯤은 안고 있는 셈이었다.
여러 가지 불확실한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사이 가족에 대한 얘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그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지병을 앓아왔고 어머니는 그의 모텔 중 하나를 관리하고 있었다. 과거 그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남자의 성공으로 지금은 도곡동의 타워팰리스에서 살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하선우는 어렵지 않게 남자의 집안 분위기에 대해 유추할 수 있었다. 자수성가한 외동아들을 통해 부모는 그들의 고생을 보상받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일견 자유스러워 보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가장이고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사는 책임감 강한 효자였다. 애착 강한 어머니 밑에서 사는 독립하지 않은 남자는 지속적인 관계를 맺기에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류주오가 진지하게 접근을 하니, 하선우 역시 이런 일반적인 사항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여자애의 울음소리로 갑자기 홀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들고 있는 모든 것이 무기인 조카에 대한 얘기를 하던 하선우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가 있었다. 자신을 꼬집은 오빠를 혼내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이르겠다고 원통함을 가득 담아 울먹였다.
“저맘때 애들이 고집이 세죠.”
“조카도 그런가 봐요.”
“남자애라 더하죠.”
하선우는 홀 중앙에서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있는 여자애를 보며 말했다.
“조카도 저 나이 대예요. 제 조카지만 진짜 독해요.”
“그래요? 전 애들이 너무 좋던데. 떼쓰는 것도 귀엽지 않아요?”
“애들도 애들 나름이죠. 조카라서 예쁘지만 다른 사람 아이였으면 안 그랬겠죠.”
“그런가요. 전 그냥 애들은 다 좋더라고요.”
책임감 강한 성격에 결혼에 대한 부담도 갖고 있고, 아이까지 좋아하는 남자. 같은 동성을 탐색하는 자리 대신 선자리가 더 어울릴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음을 쥐어짜는 아이를 다정한 눈으로 살펴보는 류주오를 지켜보던 하선우는 묵묵히 눈앞의 음식을 비워냈다.
화장실을 다녀온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일어난 하선우는 바닥에 들러붙어 떼를 쓰는 아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가까이서 보니 아이는 마른 울음을 쥐어짜가며 울고 있었다. 바닥에 드러누운 아이는 엄마가 바람을 들어줄 때까지 떼를 쓸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인상을 쓰며 지켜보고 있음에도 아이의 엄마는 조용한 말투로 어르기만 할 뿐이었다. 하선우의 어머니였다면 귀를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가 등짝부터 때렸겠지만, 아이가 늦둥이라도 되는지 여자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그 곁을 천천히 지나가던 하선우의 시선을 느낀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 관리된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여자는 하선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침착하게 타인의 시선을 응시하는 그 눈은 아이의 울음에 당황하지도, 창피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눈은 당당했다. 상관하지 말라는 무언의 요구에 오히려 머쓱해진 하선우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며 하선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겨우 30분이 흘렀다. 지루한 시간이었다. 물론 류주오와 자신의 공감대를 찾으며 조촐한 유쾌함을 느끼는 순간이 간간이 찾아오긴 했다. 그 조촐한 즐거움을 붙잡고 버텨볼지, 아니면 이제 그만 만나자는 얘기를 할지 슬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세 번째 만남 이후에는 남자는 분명 진지한 교제를 제안할 테니까.
고민에 빠진 얼굴로 화장실 밖으로 나온 그는 회랑 모양으로 꾸며진 복도를 지났다. 복도의 끄트머리는 홀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 중간에는 출입이 제한된 조리실 문이 있었다. 그 앞에 좀 전 눈이 마주쳤던 여자가 서 있었다. 하선우에게서 등 진 채로 그녀는 조리복을 입은 중년의 사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리장님.”
“예.”
“이상조 선생님께서 제작하신 그릇에 담은 요리를 드시고 싶다고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조금 전에 따로 사람을 보내 전달한 식기 받으셨죠?”
“예.”
“일전에 메로구이 맛이 짜다고 하셨는데 간을 좀 신경 써주세요.”
복도를 지나가느라 그들의 대화 전부를 들을 수는 없었다. 조리장이 공손하게 주문을 경청하는 것을 스치듯 본 하선우는 높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오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버릇없는 늦둥이 딸을 둔 여자라고만 생각했던 그녀는 누군가의 대리인인 모양이었다. 대리인을 앞세워 조리장에게 까다로운 주문을 요구할 수 있는 높은 사람.
불편한 예감에 눈살을 찌푸리며 그는 고개만을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로 요구를 하고 있었다.
조리장에게 유명 도예가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달라는 까다로운 요구를 할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될까. 설마. 마른침을 천천히 삼키며 가능성을 셈하던 그는 좁은 복도를 빠져나왔다.
요란하게 울던 아이가 사라진 레스토랑은 좀 전의 한산함을 되찾았다. 탁 트인 홀 전체를 둘러보며 하선우는 아는 얼굴을 찾았다. 구석구석을 살펴보았지만 강 전무를 닮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강 전무도 그의 수행비서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하선우는 긴장으로 어깨가 뻣뻣해졌다.
맛의 감미로움을 혀끝에서 충분히 즐겨보라는 배려인지 음식은 천천히 나왔다. 빨리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에 식사를 하는 내내 마음이 떠서 하선우는 대화에도, 음식을 먹는 것에도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레스토랑의 입구 언저리로 가끔 시선을 돌리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알아도 졸고 몰라도 졸겠지만 적어도 방어 정도는 하는 게, 무방비 상태로 마주치는 것보다는 나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어디 안 좋은 곳이라도 있습니까. 선우 씨?”
자신과의 대화가 하선우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는 생각이라도 했는지 류주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초조함을 사람 좋은 웃음으로 감추는 류주오를 보며 하선우는 말했다.
“갑자기 든 생각 때문에 대화를 놓쳤습니다. 미안합니다.”
산만하게 행동한 것이 미안해 머쓱하게 웃은 하선우는 말했다.
“회사에 일이 많아서 괜히 머리까지 복잡해지네요.”
“일이 많이 바쁘다고 하셨죠.”
“예. 전에 주오 씨 만난 뒤로 죽 바빴어요. 최근에 계속 야근만 하다 보니 잠도 부족하고 소화도 더디고… 어렸을 때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확실히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네요.”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던데.”
“예?”
“전에 보니까 쌩쌩하시던데요. 뭐.”
남자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의 말이 야한 농담 같은 것임을 깨달은 하선우가 하하,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선우는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했지만 남자는 몇 주 전의 섹스가 제법 각별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가끔씩 문자와 전화를 통해 넌지시 욕구를 전하기도 했다. 그 문자를 확인할 시간조차 없어 차일피일 약속이 미뤄져 남자는 상당히 초조해했었다.
“그땐 많이 쌓였거든요. 요즘은 그런 거 생각할 기운도 없이 바빴지만.”
앓는 웃음을 지으며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배가 불러 더 이상 입안에 뭔가를 집어넣고 싶은 생각도 없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남자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피곤해 보이긴 하네요.”
“모처럼 만났는데 계속 이런 얘기만 하는군요. 주오 씨도 많이 바쁘셨을 텐데.”
“선우 씨만 하겠어요. 많이 피곤하시면 장소를 좀 옮길까요.”
“그럴까요.”
“근처에 방도 예약해놨는데 쉬러 갈까요.”
하선우는 쉬러 가자는 말의 이면에서 성적인 의미를 읽었다. 류주오는 하선우가 그랬듯이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첫날부터 섹스를 하게 되면서 그런 일은 더 이상 민감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은 피곤이 겹겹이 쌓인 상태였다. 남자의 기대 어린 시선에 짧은 고민을 한 하선우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섹스는 차후의 문제고 어쨌든 이곳을 나가는 게 중요했다.
“그럴까요. 일단 자리를 옮겼으면 하는데.”
“그럼 이제 일어나죠.”
그 둘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선우는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레스토랑의 입구를 빠져나왔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려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는 하선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류주오가 말했다.
“뭘 그렇게 서두르세요.”
“빨리 나가고 싶어서요. …하하.”
멀리서 1층으로 내려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본 하선우는 다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류주오가 팔목을 잡아당겼다.
“체해요.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하죠.”
하선우의 조급함에 오히려 남자는 여유를 찾았다. 그는 서두르는 이유를 오해하고 있었지만 류주오의 기분 좋은 착각을 하선우는 내버려두었다. 손목에서 손을 부드럽게 빼내며 하선우는 말했다.
“예. 그래도 일단 여기서 나가죠.”
“나갈 필요 없어요.”
“나갈 필요 없다니요.”
“레스토랑 예약하면서 호텔 객실도 예약해뒀거든요. 데스크에 체크인하러 가면 돼요.”
남자가 다정한 눈빛으로 하선우를 마주 보았다. 웃음으로 당겨지는 입꼬리를 억지로 아래로 당기느라 애쓰고 있었다. 반응을 기대하는 그 얼굴을 보며 어느새 하선우는 생각을 가늠하고 있었다.
더 나가, 말아.
세 번째 만남까지라면 괜찮았다. 관계를 언제 끝낼지를 가늠하고, 상대방을 평가하는 게 무례하지 않은 마지노선이었다. 이 이상 길어진다면 남자 쪽에서도 진지하게 교제를 생각할 것이다.
“저기 선우 씨. …언짢은 건 아니죠.”
남자의 이런 점이 하선우를 망설이게 했다. 자신의 요구보다 상대방의 분위기를 눈치 보고 의견을 우선시하는 점. 남자는 생각보다도 더 무르고 순진했다. 우직한 인상의 사내가 수수한 눈매를 들어 굳은 표정의 하선우를 눈치 보는 면들이 그를 무르게 만들었다.
“언짢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굳이 비싼 돈 들일 필요 없어서 그럽니다. 근처에 주오 씨 게스트하우스 있잖아요.”
“오늘 예약 다 찼어요.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키 가져…….”
“됐습니다. 뭐 하러 비싼 돈 들여서 호텔 갑니까. 모텔도 상관없어요.”
몸을 돌리려 하자 소매를 잡아당겼다.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입술을 달싹이다 어렵게 입을 뗐다.
“호텔 이미 예약했다니까요. 선우 씨와 좋은 데서 같이 있고 싶어서 그러죠.”
염원하는 눈빛을 보내는 얼굴이 쑥스러움으로 벌게졌다. 부끄러움을 감추려 애쓰는 모습에 선우는 잠시 말을 잊었다.
“싫으시면 말씀하세요. 선우 씨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저는 훨씬 더 좋거든요.”
예전부터 그는 상대방이 각을 세우면 역시 각을 세우지만, 약하게 나온다면 누그러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상대방이 호의나 감정을 보이는 만큼 물러졌다.
난 이래서 안 돼.
결국 하선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래요.”
“선우 씨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주오 씨가 기분 내고 싶으시다면 이런 데서 쉬는 것도 나쁘진 않겠죠.”
하선우는 슬쩍 웃음을 흘렸다. 눈을 크게 뜨고 하선우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사실 스위트룸 예약했었어요. 저기 앉아 계세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는 하선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프런트로 씩씩하게 뛰어갔다. 남자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컸던 탓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하선우는 일부러 담담한 얼굴로 돌아섰다. 프런트와 떨어진 엘리베이터 앞의 분수대를 마주 보며 류주오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심심한 편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편했다. 연애 경력이 적진 않았지만 하선우는 단 한 번도 성격이 강하거나 화려한 사람과 사귀어본 적이 없었다. 외모 때문에 오해를 받고, 때로 그런 사람들이 접근하긴 했지만 그는 지나치게 자극적인 사람과의 만남은 꺼리는 편이었다. 그는 늘 간을 덜한 것 같은 연애를 해왔다. 하선우를 좋아했던 남자들의 감정까지 심심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선우는 연애에 심취하지 않았다.
그런 성격 때문에 도덕적으로 해이한 면도 있었다. 섹스에 이르는 긴 과정은 싫었다. 연애보다는 일과 공부에 매달리는 게 더 좋았고, 그 외의 시간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자동화된 기계처럼 모든 게 쉽기를 원했다.
물리용어 중에 한계속도라는 말이 있다. 어떤 구조물을 회전시킬 경우, 그 회전 속도를 초과하면 재료가 파괴되는 극한의 속도를 이르는 말이다. 단순한 물리용어였지만 하선우는 그 단어에 유다른 의미를 부여해 심리현상을 다루는 용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리적인 현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사람의 마음 역시 한계속도가 존재했다. 타인에 대한 기대, 설렘, 호의, 의무감, 공포, 사랑. 어떤 감정이라도 회전의 가학이 계속될 경우 한계치를 벗어나면 파괴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파괴가 심각하다면 회복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영원히 복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하선우는 자신의 한계속도를 알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류주오 정도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류주오는 자신을 한계속도와 근사한 값으로 감정을 휘두르지도 고조시키지도 못할 것이다. 막상 결정의 순간에 놓이고 보니 하선우는 남자와 사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일이 해결되고 나면 함께 여행을 가거나, 서로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주말의 텅 빈 시간들을 함께할 것이다. 휴식 같은 관계를 맺으며. 그런 여유라면 환영했다.
“아무리 그래도 스위트룸이라니. …미치겠네.”
해시계 모양의 분수대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던 하선우는 괜히 낯이 뜨거워 고개를 숙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스위트룸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구경은 해보고 싶었다. 설마 아는 얼굴을 마주치기라도 할까 싶었다. 이 나이에 남자와 스위트룸에서 섹스를 했다는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평생 고개 들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하선우는 피식 웃었다.
“뭐 좋은 일 있나 보죠.”
귓바퀴에 닿는 목소리에 하선우는 고개만을 느리게 움직여 옆을 보았다. 반걸음 뒤에 허리를 살짝 숙인 훌쩍 큰 키의 사내가 서 있었다. 자신의 어깨에 턱을 기대듯이 가까이 있는 그는 강주한이었다.
흠칫, 뒤로 물러섰다.
“…ㅇ…허.”
소스라치게 놀라 억눌린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조율 안 된 악기가 내는 음 이탈 같은 목소리였다. 무방비한 상태로 맞이한 습격에 잠시간 숨도 쉬지 못하고 강 전무를 올려다보던 하선우는 가까스로 말했다.
“강… 전무님.”
“너무 놀라시니 미안해지는데요.”
하선우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붙이며 강 전무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아는 척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까.”
“아뇨, 아뇨… 아닙니다. 너무 뜻밖이라 놀라서 그랬습니다. 전무님은 여기 어쩐 일로…….”
엘텍그룹 총수의 아들이 계열사인 엘튼 호텔에 들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는데 생각보다도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만날 사람이 있어서 들렀습니다. 하 사장은 저녁 식사 때문에 들른 모양이죠.”
“예?”
“칠복주가에 계신 것 봤거든요.”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인가. 흠칫하는 하선우를 보며 그가 미소 지었다.
“저도 마침 거기서 가족들과 저녁 먹고 나오는 길입니다. 아마 룸에 있어서 하 사장은 절 못 보셨을 겁니다. 제 추천으로 오신 것 같은데 음식은 어땠습니까.”
“…상당히 괜찮았습니다.”
강 전무의 목둘레를 감싸고 있는 작은 팔이 보였다. 분홍색 매니큐어를 검지와 엄지에 바른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부은 눈을 꼭 감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는 조금 전 홀 안을 소란스럽게 만들던 아이였다. 온몸으로 울더니 지쳐 잠들어 있었다. 독하게 울어대던 아이가 강 전무의 딸이라니. 아이를 업고 있는 강 전무의 모습을 보자 그가 슬하에 두 아이를 둔 아버지라는 사실이 새삼 낯설게 떠올랐다.
“전무님 따님인가 봐요.”
“예. 그렇습니다.”
역시 그 여자는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아이를 정중하게 어르고, 조리장에게 까다로운 요구를 하던 차가운 인상의 대리인이 떠올랐다. 오만한 눈빛으로 사람을 내려다보던 여자의 눈빛이 수긍이 가서 하선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린애가 벌써부터 분위기가 있네요. 크면 미인이겠어요.”
“그런가요.”
“예. 딸은 아버지를 닮는다던데 눈매가 많이 닮았네요.”
그가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수수한 느낌이 들 정도로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브이넥의 고동색 니트와 다리에 느슨하게 붙는 옅은 갈색의 면바지, 홈웨어 차림이었다. 이런 옷차림을 전에도 본 적 있었음에도 낯설었다. 하선우는 곧 낯선 위화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이마가 드러나도록 왁스로 머리를 빗어 넘기던 평상시와 달리 앞머리를 내리고 있었다. 한결 어려 보여 평소의 단단한 분위기가 성기게 헤쳐진 느낌이었다.
“같이 왔던 사람은 친구분인가 보죠. 상당히 절친한 사이 같던데.”
그의 느슨한 분위기에 잠시 자신이 누군가와 이곳에 왔는지 방심할 뻔했다.
“하하… 예.”
가까스로 웃으며 하선우는 저 멀리서 체크인 중인 류주오의 뒷모습을 흘깃거리다 다시 전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 이제 가보겠습니다. 친구가 기다려서요. 다음에 뵙죠.”
그는 강 전무가 어디까지 본 건지 짐작할 수가 없어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타이밍 나쁘게도 저 멀리서 하선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 씨!”
카드키를 들고 뛰어오던 류주오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추궁의 눈빛으로 강주한을 살펴보던 그가 하선우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난처한 기색의 하선우를 보고 다시 한 번 강주한을 보았다. 뒤늦게 강주한을 알아본 그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아…, 안녕하십니까.”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파고든 인지에 류주오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건네는 스스로를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강 전무는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받았다.
“선우 씨 친구분이시라고요.”
“…예, 예.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강주한입니다.”
강 전무는 류주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른 손을 내밀려던 류주오의 손이 멈칫했다. 강 전무가 왼손을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아이를 업고 있어서 오른손을 내밀기 불편하군요.”
잠든 아이를 다시 추슬러 업으며 강주한이 웃었다. 류주오는 주저하며 왼손에 들고 있던 카드키를 오른손으로 옮겼다.
“류주오입니다.”
부자연스럽게 내민 왼손을 맞잡아 흔들며 강 전무는 류주오의 오른손에 들린 카드키를 내려다보았다.
“객실을 잡으셨군요.”
“…예. 편하게 술이라도 마셔볼까 해서.”
얄팍한 임기응변에 강주한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올라가죠. 저도 엘리베이터 타려고 했습니다.”
대답도 듣지 않고 그는 뒤돌아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딱딱하게 강 전무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하선우는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가까스로 짓눌렀다. 서로의 이름에 존대를 붙이는 절친한 친구, 호텔에서 객실을 잡고 술을 마시는 누가 봐도 어색한 두 남자. 어느 면으로 보나 변명이 우스워지는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결국 그는 누렇게 뜬 얼굴로 저승사자 같은 강주한의 뒤를 따랐다.
무간지옥으로 향하는 급행열차에 탑승하는 기분으로 안으로 들어갔을 때, 대시보드에는 두 개의 층수가 눌러져 있었다. 강 전무가 두 사람이 내릴 객실의 층수를 이미 누른 뒤였다. 버튼을 누르려던 류주오가 괜히 손등으로 코끝을 문지르며 하선우의 눈치를 살폈다.
“특별실이라 비싼 객실일 텐데. 두 분 사이가 매우 좋으시네요.”
고집스럽게 전광판의 숫자를 쏘아보던 하선우의 눈길이 강 전무의 뒤통수로 옮겨졌다.
“그렇게 보이나요. 저흰 그냥 방 잡고… 술판이나 벌여볼까 했던 건데. 아하하.”
긴장한 목소리가 엘리베이터 안을 먹먹하게 채울 정도로 크게 터져 나왔다. 화통하게 웃는 류주오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스테인리스 미러를 통해 눈길을 류주오에게 던지며 강주한이 말했다.
“와인에 관심 있으십니까.”
“관심은 있지만 조예가 깊진 않습니다.”
“와인을 드실 거라면 객실 커피테이블 위에 책자가 있을 겁니다. 레스토랑에 연결하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으니 원하신다면, 직원이 유명 소믈리에가 추천하는 와인 메뉴 리스트를 가져올 겁니다. 보드카나 위스키, 전통주 종류도 추천해줄 테니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십쇼.”
스테인리스 미러 속 강 전무의 눈길이 이번에는 하선우를 향했다. 어떤 감정적인 내색도 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하선우에게 그가 말했다.
“하 사장님. 시간이 되신다면 라운지에도 한번 들러주시죠. 투자 문제로 드릴 말씀이 있으니.”
손목의 시계를 흘깃거리며 그는 말했다.
“생각해보니 두 분께서 함께 계시느라 바쁘실 것 같긴 하군요. 중요한 얘기는 아니니 오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월요일에 뵐 테니까.”
고개를 든 그가 거울 속 하선우와 눈을 맞추었다. 때마침 목적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차임벨이 울렸다.
“기술시연은 잘 준비하고 계시겠죠.”
“예.”
“기대하고 있습니다.”
“네.”
한숨을 내도록 꾹 눌러 참은 탓에 목 쉰 소리로 하선우는 대답했다. 문이 닫히기 전, 강주한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말했다.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새파래진 얼굴의 하선우도, 누렇게 뜬 얼굴의 류주오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선우가 아주 난처한 지경에 빠져 있다는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자 둘이 욕실과 거실, 침실이 한데 이어져 있는 스위트룸에 머문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무거운 기압 속에 갇힌 것처럼 어깨가 처지고 폐부가 짜부라드는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 몸이 저리고 아픈 것 같았다. 그는 제법 오랫동안 하선우를 지켜본 모양이었다. 두 남자가 한식 레스토랑에 들어와 식사를 하고, 1층의 프런트 앞에 서 있는 모습까지. 그렇다면 스위트룸을 잡느라 옥신각신하는 것까지 모두 지켜보았을까.
어느 것이든 강주한은 하선우의 약점 하나를 손에 쥐고 있는 셈이었다. 남자의 손아귀에서 그는 터트리기 쉬운 장난감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안전한 보루에 서 있는 그와 달리 하선우는 진흙 구덩이에 처박혀 있었다.
하선우의 머릿속은 수없는 위구심에 휩싸였지만, 곧 평소의 버릇대로 작금의 상황을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정리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강 전무는 하선우의 성정체성을 의심하며 그것을 이용하고, 비아냥대는 비열한 인간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모르는 척할 수도 있는 일을 굳이 끼어들어 후벼 파는 데는 분명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사항은 두 가지였다.
류주오와 스위트룸에서 뒹굴거나, 강주한에게로 가 자신을 부른 의도를 파악하거나.
“갈…까요.”
류주오가 어렵게 뜸 들이며 운을 뗐다. 제자리에 서서 제 발끝만 바라보던 하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주오 씨.”
“예.”
“다음에 만나죠.”
류주오의 얼굴이 당황으로 붉어졌다. 단호한 얼굴로 하선우는 말을 이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어요. 환불이 안 된다면 방값은 제가 지불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헤어지죠.”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던 남자가 말했다.
“위층에 잠시 다녀오는 걸로 끝내면 안 되겠습니까. 룸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언짢게 해서 미안하지만 오늘 도저히 섹스할 기분이 아니라서 그래요. 방금 그 남자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였거든요.”
잠자코 하선우의 말을 듣던 그가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한숨을 쉰 그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들어갈 때 전화해줘요.”
하선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는 승강기의 버튼을 눌렀다. 다시 자세를 바로 하며 분위기를 달리한 그가 하선우와 눈을 맞추었다.
“저 화 안 났어요. 알죠?”
착잡함을 쾌활한 웃음으로 감추며 그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별일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말고 끝나면 전화 줘요.”
류주오의 말처럼 별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정도의 사회적 위치를 가진 남자라면 하선우의 성적인 기호를 두고 불쾌해할지언정, 교활한 꿍꿍이로 이용해먹지는 않을 터였다. 또 그는 하선우가 게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불쾌함이라. 하필이면 들킨 상대가 강주한이라니. 씁쓸함에 헛웃음을 흘리던 하선우는 차가운 벽에 이마를 기대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강 전무와 마주치는 매순간마다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적당히 망신스럽고 적당한 불쾌감을 남기던 만남이 점차 수렁처럼 깊어져 이젠 바닥까지 까발려졌다. 실질적으로 그가 태클을 건 적은 없었지만 강주한과 마주칠 때마다 하선우는 매번 태클에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아….”
강주한의 앞에서 자신은 또 비굴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깊은 속에서부터 뜨거운 짜증이 치밀었다. 벽에 기댄 얼굴을 좌우로 흔들며 하선우는 분노에 가득 찬 헛웃음을 흘렸다. 재수 없는 새끼. 거북한 새끼. 반질거리는 얼굴도, 여유로운 척하는 행동도 모두 다 가증스러웠다. 억울하기까지 했다. 모욕을 받은 적도, 그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적도 없었지만 치닫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어깨를 떨며 화를 삼키던 그는 의아해졌다. 분노조절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런 것은 자신답지 않았다.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하선우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느꼈다. 자신은 두려움보다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 까닭을 곰곰이 자문하던 하선우는 곧 깨달았다.
“싫다.”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이유 없이 싫어한 적도, 미워한 적도 없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를 볼 때마다 느꼈던 거북함의 정체는 그를 싫어하는 마음이었다. 함부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성미가 아니었지만, 그를 볼 때면 마음의 도량이 좁아지던 이유는 그것이었다. 처음 봤을 때 재수 없는 인간임을 직감하였듯이 본능적으로 싫었던 것이다.
“……싫어하는 거였어.”
하선우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벽에 한참이나 기대어 서 있었다. 결론을 도출하자 어느 상황에도 적용되는 완벽한 이론을 만들어낸 것처럼 생각이 정리되었다. 불필요한 겉 가지를 쳐내고 거추장스러운 걱정들을 떨쳐냈다. 조금 전보다 차분하게 눈을 뜬 하선우는 무늬 없는 벽을 오랫동안 쏘아보다 승강기의 상승 버튼을 눌렀다.
눈에 익숙한 스카이라운지였다. 거대한 유리를 접합시켜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파노라마 사진 같은 유리벽에 둘러싸인 최상층이었다. 밖은 여전히 빗줄기가 쉼 없이 쏟아지고 있었고, 세상은 물먹은 수채화처럼 온통 젖어 있었다. 실내는 쾌적하고 따듯했지만 공기 중에 넘실거리는 이온 때문에 그의 몸은 젖은 솜마냥 무거워졌다. 이전에 강 전무와 불편한 저녁자리를 함께했던 레스토랑을 지나 더 깊은 곳으로 복도를 꺾어 들어가자 바가 드러났다. 보통 1층이나 지하에 위치한 바와 달리, 최상층에 위치한 이곳은 입장객을 걸러 받는 것 같았다.
조명마다 부조물이 달려 아슴푸레한 빛이 내리쬐는 바 안으로 들어선 하선우는 갸름하게 뜬 눈으로 강 전무를 찾았다. 여러 차례 반사된 조명은 바의 분위기를 안개 낀 호숫가처럼 흐리게 바꿔놓았고,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샹송 가수의 속삭이는 창법은 기분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시간마저 고여 있는 듯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하선우뿐이었다.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 분노가 오히려 그를 차분하게 만들었지만, 막상 강 전무가 보이지 않자 불안이 스미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외국인들과 한껏 차려입은 낯선 사람들 속에서 두리번거리던 그는 결국 바텐더에게 걸어갔다.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혈관의 두께만큼 목구멍이 오그라들었다. 찐득한 침을 힘겹게 넘긴 하선우는 탁하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
“강주한 전무님을 찾아왔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하선우라고 전해주시면 됩니다.”
“하 사장님이시군요. 따라오시죠.”
당연히 올 거라고 짐작했던지 미리 안내를 해두었던 모양이었다. 그것마저도 거슬려 하선우는 마음이 뒤틀렸다. 복도는 심한 야맹증 환자라면 필시 길을 더듬을 만큼 침침했다. 게다가 영리적인 목적을 가진 것치고는 공간의 낭비가 심했다. 복도를 앞서 간 웨이터는 왼쪽으로 갈라진 가장 구석진 룸 앞에 섰다.
웨이터가 돌아간 뒤에도 하선우는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몇 번이나 헛기침을 하느라 칼칼해진 목으로 한 번 더 헛기침을 한 하선우는 문을 두드린 후, 열었다. 유리창 밖으로 물을 탄 것마냥 묽어진 검은 도시가 보였다.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잠시 멍해져 있던 하선우는 눈을 굴려 강 전무를 찾았다.
“오셨군요.”
“예.”
“도중에 빠져나와서 친구분이 언짢았겠는데요. 본의 아니게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죄송하군요.”
표현은 점잖았지만 전혀 미안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였다.
“친구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간다고 일어섰습니다. 괜찮습니다.”
잠시간 하선우를 바라보던 그가 입술만을 움직여 느리게 웃음을 지었다.
“앉으시죠.”
강주한은 자신의 근처 자리를 가리켰다. 강주한과 멀찍이 떨어져 엉거주춤 앉은 하선우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는 하선우의 앞으로 빈 잔을 내밀었다.
“어차피 친구분과의 술약속이 취소되었으니, 여기서 마시고 가도 상관없겠죠.”
얼음을 반 채운 잔에 위스키를 따른 강주한은 하선우의 앞으로 잔을 좀 더 가까이 밀었다. 잔을 받으며 하선우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강 전무였지만, 안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가장 모서리 진 자리에 앉아 있는 강주한과 그 곁에 꼭 붙어 있는 그의 딸, 그리고 강주한의 대각선에 여자와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초면이었지만 하선우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여자는 간간이 TV에서 보던 연예인이었고 남자는 강주한의 남동생인 강태한이었다. 여자는 톱스타급은 아니었지만 최근 들어 화제가 된 드라마와 화장품 CF를 몇 편 찍는 것으로 이름을 알린 이설영이란 배우였다. 흥미로운 눈길로 강주한과 하선우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설영이 눈매를 갸름하게 뜨며 물었다.
“…신인?”
신인의 뜻을 깨달은 하선우가 당황한 낯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연예인 지망생?”
“아닙니다.”
반사조명 때문에 얼굴이 어려 보인 듯했다. 연예인 지망생이냐는 말의 이면에는 잘생겼다는 인물의 품평이 숨겨져 있었지만 그들의 오만한 태도에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각 잡힌 자세의 하선우를 대놓고 빤히 바라보며 강태한이 물었다.
“얜 뭐야.”
“신경 꺼.”
차갑게 잘라낸 강주한은 그의 동생 앞으로 파일 바인더를 밀었다. 하선우를 수상하다는 듯이 흘끔거리던 강태한은 곧 바인더를 열었다.
“뭐야.”
“국세청 비공식 공문.”
흥미 없는 눈길로 종이를 죽 읽어보던 그가 휘리릭 급하게 종이 몇 장을 넘겨보더니 다시 강주한에게로 밀었다. 강태한이 기지개를 켜며 하품을 했다.
“됐어. 형이 알아서 해.”
파일에는 국세청 공문이 들어 있었다. 과거 안신물산, 현재 안신그룹의 초대 회장인 외조부가 물려준 9조 3,400억대의 지분에 대한 자료였다. 신고되지 않은 돈의 비자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국세청 감사가 들어갈 예정이라는 내역이 적혀 있었다. 빠르게 내용을 훑던 하선우는 강한 시선을 느꼈다. 강태한이 갸름하게 뜬 눈으로 하선우를 살펴보고 있었다.
“나 외국 나가 있는 동안 취향 많이 변했다?”
대꾸가 없자 곁의 이설영이 끼어들었다.
“잘생긴 오빠네. 주한 씨 남자가 취향이에요?”
입이 벌어지는 하선우와 달리 강주한은 들고 있던 술잔을 빙빙 느리게 돌리기만 했다. 소파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있던 강태한이 튕기듯 허리를 떼어냈다.
“뭐야. 점잔 떨더니 진짜 데리고 노는 거야?”
강주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얘 뭐냐니까.”
“거래처 손님.”
“거래처? 거래처면 뭐, 누구 아드님인데.”
묵묵히 참고 있던 하선우는 결국 입을 열었다.
“NnG 대표 하선우라고 합니다.”
“…뭐야. 그건.”
강태한은 대놓고 생소한 얼굴로 물었다.
“엘텍전자와 거래중인 배터리 매니지먼트 시스템 전문기업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리에서 불쑥 일어난 하선우는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위아래로 하선우를 훑어보다 그는 입술 끄트머리를 올렸다.
“하청 사장?”
“예.”
“오, 젊은 분이 대단하시군.”
방자한 한량 같은 태도를 고친 그가 하선우의 손을 맞잡아 흔들었다. 거래처 사장이라는 말에 흥미가 떨어진 그가 손이 떨어지자마자 억지로 짓고 있던 웃음을 거두었다. 남자의 얼굴은 음영이 짙었다. 배우였던 어머니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아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화려한 외모의 사내는 훌쩍 큰 키의 강주한에 비해 체격이 작고, 뇌가 들었을까 싶을 만큼 머리가 작았다. 흑백의 명암만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의 형과 달리 그는 강한 원색의 분위기를 풍겼다. 강태한은 가십을 좋아하는 김 부장이 가끔 재벌과 관련한 이니셜 기사가 날 때마다 끼워 넣는 인물 중에 하나였다. 사회·경제면을 제외하곤 언론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강주한과 달리 그는 연예중계 프로그램에 가끔 모습을 비추곤 했다. 엘텍 측에서 공식적으로 보도된 자료가 아닌, 인터넷에 퍼져 있는 그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한 사진이었다. 강태한이 언론을 타는 주된 이유는 유명 연예인들과의 스캔들 때문이었다. K의 뒷배를 봐주고 있다더라, A를 그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터트린 게 그라더라, D에게 강남 아파트 두 채값의 무엇을 사주었다더라 말, 말, 온갖 말들이 그를 뒤따라 다녔다.
하선우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마네킹 같은 비율의 여자 역시 TV 속에 가끔 얼굴을 비추는 연예인이었다. 연기력, 미모를 고르게 갖춰 평판이 좋은 배우였다. 태양광 아래에서라면 부담스러웠을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 그녀는 룸의 어두운 조명 밑에서 인형처럼 보였다. 연예인과 재벌, 대가를 주고받는 부적절한 관계를 연상한 하선우는 일부러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들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친구분은.”
멀리 떨어져 앉은 하선우와 자신의 거리를 곁눈으로 가늠하며 강주한은 말문을 열었다.
“비싼 돈 들여 특별실 예약했는데 약속을 펑크 낼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니었나 보죠.”
“여자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보더군요.”
뻔뻔하리만치 태연한 태도로 대답하자 그가 눈매를 좁혔다.
“여자친구요.”
“예.”
하선우는 문제라도 있냐는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태연한 척하는 눈을 잠시간 응시하던 강주한은 더디게 웃음을 지었다. 그가 짓고 있는 미소가 실제로 기분이 좋아 지은 진심처럼 보여 하선우는 의아해졌다. 그러나 곧 강주한의 행동 하나하나를 자세히 관찰하는 행동이 바보같이 여겨져 깊게 생각하기를 관두었다.
“일은 잘되어갑니까.”
“예. 전에 지시하신 사항에 맞춰서 준비 중입니다.”
“임진태 부장이 일산으로 찾아갔었죠.”
“예. 월요일의 기술시연회에 특별히 임원급도 참여할 예정이라고 하셔서 따로 준비한 걸 보여드….”
“화장실!”
대화 도중 갑자기 끼어든 아이가 강주한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선우의 눈에서 시선을 거둔 강주한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장실?”
“급해. 급해.”
소파에서 내려온 아이가 다리를 붙인 자세로 주춤 엉덩이를 뒤로 뺐다. 쭉 내민 엉덩이를 심각하게 지켜보던 강주한이 하선우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나려 하자, 눈치 빠르게 이설영이 끼어들었다.
“여희야. 나랑 같이 가자.”
“언니랑?”
“언니 아니랬잖아. 앞으로 작은엄마라고 불러?”
다분히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이설영은 말했다. 그 말에 술잔을 스트로우로 빙글빙글 돌리던 강태한이 입술을 비뚜름하게 휘었다. 방자한 꼴을 봐준다는 듯이 웃음이 점점 더 깊어졌다. 두 남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하게 여자는 말했다.
“여희는 작은엄마랑 가기 싫어?”
“아버지. 작은엄마랑 같이 가요?”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던 이설영이 강주한을 돌아보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강주한은 대답을 대신했다. 요의에 마음이 급해져 바지춤을 움켜 쥔 아이를 안아 든 여자가 문 밖으로 사라진 뒤에 강태한이 말했다.
“하, 당돌해.”
강태한은 어깨를 들썩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칵테일을 스트로우로 휘휘 젓던 그가 시선을 옮겼고, 지켜보고 있던 하선우와 눈이 마주쳤다. 강태한이 씩 웃었다.
“쟤 예쁘지?”
“예. 실물이 더 미인이십니다.”
“그렇지.”
강태한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 사장은 몇 살이지?”
“서른한 살입니다.”
“생각보다 많네. 음, 아니지. 회사 물려받으려면 그 정도는… 아니다, 아니지. 아버지 회사 물려받기엔 서른한 살이면 너무 어린 나이 아닌가?”
“물려받은 회사는 아닙니다. 금년으로 창사한 지 5주년 된 회사입니다.”
“그래?”
“예.”
“보기보단 능력 있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하선우는 반말을 찍찍 내뱉는 강태한의 나이를 가늠해보았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얼굴이었다. 싸가지 없는 놈. 강태한을 속으로 욕하던 하선우의 마음 한구석에서 이 불편한 자리에 자신을 끌고 온 강 전무에 대한 원망이 한 번 더 내솟았다.
“하던 얘기를 마저 하죠.”
강태한에게 뻗은 하선우의 신경을 차단하며 강주한이 말했다.
“투자심의회가 시연회를 주최한다는 건 최종적인 투자를 결정하는 걸 의미합니다.”
“진행이 빠르네요.”
강 전무와 임 부장으로부터 기술이전과 투자제휴를 받았던 게 불과 3주 전의 일이었다. 최종 투자여부를 결정하는 자리가 예상보다 이르게 마련됐다는 말에 하선우는 얼떨떨했다.
“더디게 갈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빨라서.”
그 말에 강주한은 입술만을 움직여 조금 웃었다.
“그렇게 느끼십니까.”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는 깨달았다. 그의 입장으로는 단순히 3주 만이 흐른 것이지만, 물밑에서 그들이 하선우 모르게 준비해왔던 시간이 짧지만은 않았을 것이란 것을. 그들이 계획한 거대한 톱니바퀴에서 NnG는 작은 부품만을 차지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이 무엇을 계획했는지 하선우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꽤 오래 준비한 일입니다. 하 사장 못지않게 저 역시 간절하단 말이죠. 이차전지 사업 확장을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긴 했지만 투자심의회의 반대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투자에 소극적인 데다가 회의적인 인간들이거든요. 그들은 하 사장의 기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이니 확신을 심어줘야죠.”
불편한 자리였지만 하선우는 금세 강주한이 하는 얘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선우가 기술시연을 마친 후 프레젠테이션은 강주한 본인이 직접 담당한다고 했다. 책임지고 투자를 유치하는 데 힘을 실어주는 인물로 그 자신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류주오가 여자친구 때문에 급히 자리를 비웠다고 둘러댄 조악한 변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강주한은 애초부터 류주오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일 얘기만 했다. 조금 전 하선우의 분노가 무색하리만큼 하선우의 성적 기호를 인질 삼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게 형까지 나서서 할 일인가?”
강주한과 대각선의 자리에 앉은 그의 동생이 칵테일을 스트로우로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아랫것들 시켜서 하면 되잖아. 걔들은 월급 받아서 그런 거 안 하고 뭐한데?”
얼음 조각이 달각거리며 부딪히는 산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묵묵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주한이 말했다.
“일부러 빼내온 자료니 그거나 읽고 있어. 조만간 언론보도 나가기 전에 알아둬.”
그는 테이블 위의 바인더를 강태한의 앞으로 던지듯 밀었다.
“임 변호사 줘. 걔 월급 받고 하는 게 뭔데. 따까리짓 아냐. 밥줄 유지하려면 그런 거라도 던져줘야지.”
한숨을 내쉬며 강주한은 손바닥으로 관자놀이를 감쌌다.
“이설영 만나고 다니지 마라.”
“그 얘긴 갑자기 왜 나와.”
“스폰서로 임경호 붙었던 애라고 말했지.”
“그래서 뭐. 사촌끼리 구멍동서 하면 안 돼?”
대꾸 없이 강태한을 마주 바라보던 그는 머리를 감쌌던 손을 떨어뜨려 잔을 들었다. 더없이 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엘텍 이름에 먹칠하지 마라.”
“먹칠?”
“그래. 추문을 돈으로 틀어막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콧잔등을 찡그리며 강태한은 날카롭게 웃었다.
“왜 갑자기 관심 쓰는 척이야.”
“걱정되니까.”
“걱정?”
강태한의 얼굴이 구겨졌다.
“아, 씨발, 기분 존나 구려지네.”
그는 갑자기 들고 있던 술잔을 벽으로 거칠게 던져버렸다.
“걱정? 지랄하고 자빠졌네. 정작 찌라시 흘린 게 누구시더라. 그 기사 누가 흘렸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그 자식들이 겁도 없이 기사 낼 때는 뒷셈이 있었겠지. 안 그래? 왜 지난번처럼 터트려보시지. 저년 보지에 4억 꽂아줬던 것도 터트리지 그래.”
강태한은 팽팽하게 당겨진 어조로 쏘아붙였다. 잠자코 강태한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웠다. 반도 채우지 않은 잔을 들어 올리며 그는 말했다.
“그럴까. 네가 좆질할 때마다 뿌리고 다닌 돈, 1면으로 마련해볼까.”
높낮이가 없어 성의 없이 느껴지던 목소리에 곧 힘이 들어갔다. 경고하듯, 그러나 더없이 차분하게 강주한은 말했다.
“그나마 가진 지분 유지하고 싶으면 얌전히 굴어.”
“얌전히 굴어? 아버지가 서서히 마음 돌리게 만든 게 누구였더라. 나를 능력 없는 인간으로 매도한 게 누군데. 꼴랑 호텔 하나 먹고 떨어지라고?”
목 안에서부터 그렁그렁 쏟아져 나오는 분노를 간신히 추스르며 강태한은 웃었다. 잠자코 그의 말을 곱씹던 강주한의 어깨가 느리게 들썩였다. 웃음기 없는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호텔 하나도 과분한데. 설마 너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거냐.”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강주한은 자신의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진심이 강태한의 가슴을 긁는 모습을 하선우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생채기를 숨기지 못하고 턱을 부들부들 떨던 그는 강주한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그때 문고리가 돌아가고 문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설영이었다. 그녀가 좀 전의 대화를 듣지 못해 다행이다 싶어 하선우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과일 안줏거리를 든 여자가 웃는 얼굴로 들어서다, 룸 안의 분위기에 잠시 주춤했다.
“여희는요.”
“집에 가고 싶다고 하기에 윤영 씨 불러서 보냈어요.”
그녀는 약간 당황한 것 같았다. 눈치를 보며 쟁반을 내려놓은 그녀는 강주한과 강태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입술을 애써 당겨 웃으며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팔목이 거칠게 잡아당겨졌다.
“앉지 마. 씹질하러 갈 거니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강태한이 여자를 끌어당겼다.
“태, 태한 씨.”
“싫어?”
여자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강태한은 허리에 손을 감았다. 강압적인 눈빛에 그녀의 입술이 살짝 일그러지며 떨렸지만 이설영은 곧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위태위태한 자세로 안기듯 서 있던 여자는 남자를 먼저 유혹하는 모양새로 허리를 감싼 강태한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뭔가 귀엣말을 나눈 두 사람은 자리를 벗어났다. 문이 닫히기 직전, 강태한은 강주한을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갑자기 끌려와서 연예인과 재벌의 가십은 물론 형제간의 내분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하선우는 속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여기서 왜 봉변을 당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얘기를 김 부장에게 털어놓으면 그녀는 쌍수 들고 환영하겠지만 하선우는 그저 당황스럽고 어이없을 뿐이었다.
여배우는 인지도도, 연기력도 있어서 재벌과 배 맞추지 않아도 충분히 부를 누릴 수 있는 인물로 보였다. 무엇을 위해 모욕을 감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 같으면 강태한의 뺨 한 대를 올려붙이고 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갑을병정 중에서도 갑중의 갑인 그들이 손길을 뻗는데 별수 없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하선우는 닫힌 문에서 눈길을 거두었다.
적막 속에서 하선우는 딱딱한 자세로 강 전무가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잔에 첨잔한 뒤, 몇 모금씩 느리게 술을 비워낼 뿐이었다. 그의 그늘진 측면을 목격한 뒤라서 그런지 태연하게 행동하는 강 전무가 더더욱 살벌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술을 모두 비워내고 강 전무는 하선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멀지 않습니까. 여기로, 가까이 오시죠.”
강주한은 멀찍이 떨어진 거리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하선우는 엉거주춤 엉덩이를 떼 그의 곁으로 가 앉았다. 심란한 하선우와 달리 그는 별로 분위기에 휘둘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술 마시러 왔다는 분이 술은 안 드십니까.”
거의 그대로인 잔을 가리키며 강주한은 말했다. 하선우는 술잔을 공손하게 두 손으로 잡아 들었다. 얼음이 거의 녹아 밍밍해진 그것을 쭈욱 들이켜자 빈 잔에 그가 다시 술을 채웠다.
“못 볼 꼴을 보였군요.”
“하하… 뭐. 그럴 수도 있죠.”
병을 탈탈 털어 술을 따른 그는 하선우의 어설픈 웃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강주한의 턱 근육이 질근거렸다. 태연한 척하긴 했어도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곧 불쾌한 내색을 지워버렸다.
“조금 전에 하던 이야기 마저 하죠.”
“예.”
“하 사장님께서는 임 부장이 지시한 것만 그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기술에 대한 설명은 어차피 기술총괄 부회장 직속 사람들만 알아듣습니다. 경영자들은 돈 얘기는 알아들어도 기술에 대해서는 모르니까요.”
하선우의 회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전지 사업부를 확대하는 것은 강주한이 밀어온 전략 사업 중의 하나였다. 총수의 아들이지만 그의 현재 직급은 전무에 그쳤고 그에게는 신사업 확장에 대한 결정권이 없었다. 따라서 그 역시도 NnG와 기술제휴를 맺고 사업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투자심의회의 의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리고 큰 결함이 있지 않은 이상 총수의 아들이 발 벗고 나선 사업에 재를 뿌릴 인물은 없을 터였다.
NnG로서는 이미 강주한이 그들의 편에 있으니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에 편승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행운이었고, 보장된 성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운을 반갑게 붙잡을 수 없는 것은, 그 행운이 NnG가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었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강주한의 말을 듣던 하선우는 말했다.
“저희를 전적으로 밀어주시니 사실 두렵기도 합니다. 과분하기도 하고요.”
“동반성장이죠.”
“그렇다고는 해도… 믿을 수 없는 행운이라서. 기술제휴로 로열티를 지급하시는 것도 모자라 무담보 대출까지 해주시고, 신규 모델 생산 우선권도 주신다고 하니까. 지금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사실 부끄럽지만 저희는 엘텍에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한 적도, 판매전략을 세운 적도 없었으니까요.”
“하 사장님.”
“예.”
“판로 개척을 위한 기업가의 바람직한 행동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소 뜬금없이 던져진 질문에 하선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선우로부터 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그는 곧바로 물음에 대한 답을 내렸다.
“가장 정석적인 방법은 소비자의 욕구를 마케팅에 결합하는 겁니다. 하 사장의 경우에는 NnG를 통해서 엘텍전자가 돈을 벌 수 있다고 마케팅하는 것이겠죠. 엘텍은 자본의 확장을 원하니까요.”
강주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치 중얼거리듯 데시벨의 단위를 낮추는 소리에 하선우는 조금 더 가까이 강주한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회사를 상대로 마케팅을 하는 것보다 회사를 움직이는 한 개인을 설득하는 게 더 쉽습니다. 쉽게 말하면 최고결정권자의 욕구를 마케팅에 결합시키면 되겠죠. 그렇게 하면, 하 사장이 원하는 것을 더 쉽게 얻을 수 있겠죠.”
이해력이 빠른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선우는 남자의 말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하던 하선우는 곧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회사보다, 회사를 움직이는 최고경영자를 움직이는 게 훨씬 더 성공적인 판로 개척이란 말씀이시죠.”
“그래요. 하선우 씨가 이해한 게 맞습니다.”
귀를 가까이 가져가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주한은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단순한 이론을 타전하듯 감정 없는 어조였다. 곁으로 곁으로, 지척의 거리로 다가가 강주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옆얼굴을 보았다. 한때는 렘브란트의 종교화에 나올 법한 우아하고도 음울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바의 퇴폐적인 조명 아래 있으니 분위기를 달리했다. 날카롭고도 사내다운 굴곡의 얼굴은 참으로 관능적이었다.
“최고경영자를 단 하나의 소비자로 본다면, 그 소비자의 욕구를 마케팅에 활용하라는 말이죠.”
남자의 대답에 하선우는 말문을 떼려다 도로 입매를 굳혔다.
최고경영자의 욕구가 뭡니까. 그리고 그 욕구를 어떻게 마케팅에 활용해야 하는 겁니까.
목구멍을 간질거리는 질문을 삼켰다. 강 전무의 욕구라는 단어가 유난히 도드라져 야한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미쳤나 보다. 속으로 혀를 차며 하선우는 다시 슬금슬금 강주한과 거리를 벌려 앉았다.
“물론 NnG는 그런 해묵은 이론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에 의해 저희가 먼저 하 사장님께 접근한 거니 아쉬운 쪽은 엘텍전자겠죠.”
잠시 뜸을 들이던 강주한은 하선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 전체를 천천히 더듬던 시선이 눈을 맞추었다. 시선을 꼭 묶어둔 채로 그가 웃었다.
“그러니 월요일의 기술시연회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될 테니까요. 하 사장님은 그저 나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강 전무가 급한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술자리는 파하였다. 대리기사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뒷좌석에 앉아 그는 강주한과 자신의 관계에 끼어든 이질적인 단어를 곱씹었다.
우리라는 단어와 믿음이라는 추상어가 이렇게 의심스러웠던 적이 있었을까. 의식적으로 단어 속에 그늘이 깃든 곳을 더듬었지만 강 전무가 무슨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혹사당한 머리는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내가 네놈을 어떻게 믿어.
확신을 주지만 믿을 수 없고,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호한 전략처럼 느껴지는 남자를 하선우는 믿을 수가 없었다. 더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핏줄의 어두운 측면까지 까발려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사내였다. 빗물 위로 번지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선우는 피곤한 눈꺼풀을 닫았다. 생각을 꺼트려 버렸다.
* * *
새로 맞춘 양복은 기성복이었지만 마름질하여 지은 옷처럼 몸의 핏에 꼭 맞았다. 검은색에 가까운 남빛에 눈에 띄지 않는 희미한 줄무늬가 들어간 정장이었다. 허리 라인이 들어간 슈트와 베스트, 짙은 실버 넥타이와 준명품에 해당하는 메탈소재의 손목시계, 뒷굽이 적당히 높은 앞이 좁은 옥스퍼드 구두, 그리고 2대8로 깔끔하게 가르마를 나누어 넘긴 헤어스타일.
하선우는 신뢰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그려낸 회화 같은 모습의 자신을 주시했다.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신랑도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때가 낀 타일이 깔린 화장실의 배경은 초라했지만, 그 한가운데 서 있는 하선우의 모습만큼은 예기를 잘 벼린 명검처럼 날카로웠다.
“훌륭해.”
흥분이 전신을 저릿하게 내달렸다. 입술을 꾹 다물고 거울 속의 얼굴을 힘주어 바라보다 하선우는 군인처럼 절제된 걸음걸이로 화장실을 벗어났다.
사장실-이라고 쓰고 연구개발 3실이라고 읽는 방 안에는 바짝 긴장한 이석이 제작한 샘플과 영상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사님. 갑시다.”
평소 단둘이 있을 때는 낮춤말을 썼지만, 긴장한 탓에 두 사람 모두 존대를 번갈아가며 사용하고 있었다.
“잠깐만. 하 사장,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재생해봅시다.”
이사는 동영상 파일의 중간 단계로 화면을 넘겼다. 기술대학 내의 바이오광학 센터까지 찾아가 촬영한 동영상이었다. 전에 없이 진지한 눈으로 자판기를 눌러가며 화면을 넘긴 그는 영상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허리를 세웠다.
“챙길 건 다 챙겼습니까?”
“예.”
“샘플은 받았다고 연락 왔고요?”
“이사님. 전화 왔다고 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아, 그랬었지. 계속 까먹네.”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이사는 후우욱, 긴 숨을 내쉬었다. 숨결이 잘게 떨렸다. 자꾸만 마른침을 삼키며 그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시연회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이석이 자리를 비우고 하선우는 괜히 주변을 서성거렸다. 대출 문제로 은행장 앞에서 사업계획을 설명할 때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인데, 대기업의 임원들 앞에서 기술 시연할 생각을 하니 심장이 아예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거울을 보며 연습했던 발표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막상 그 순간이 되면 머릿속의 기억이 백지처럼 사라질까 봐 몇 번이고 곱씹고 곱씹던 내용이었다.
체스판 무늬의 리놀륨 바닥을 한 칸 한 칸 강박적으로 디뎌 걷던 하선우는 괜한 조급함에 놓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책상 위를 다시 한 번 뒤엎듯 살펴보았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띈 것은 한 달 전에 일어난 참극을 기억나게 했다.
노트만 한 크기의 사진 속에는 악수를 나누며 웃고 있는 강 전무와 하선우의 모습이 고화질로 담겨 있었다. 홍콩의 전자박람회에서 강 전무를 처음으로 만났던 날의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강주한에게 들켰을 때 딱 죽고만 싶던 심정이 생각났다. 시연회를 앞둬 긴장한 상황 속에서도 부끄러워 죽겠는 걸 보면 그때의 기억이 강렬하긴 한 모양이었다.
“우리 보석 같은 하 사장님 이제 가볼……. 어, 그거 뭐냐.”
씁쓸한 웃음이 남은 얼굴로 하선우는 바짝 다가온 이석을 돌아보았다. 물기가 남은 손으로 하선우의 손에 들린 사진을 빼앗은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강 전무? 신문에 실렸던 사진 아냐?”
“맞아.”
“근데… 뭔 사진이 이렇게 커?”
하선우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화질 사진을 구하느라 분투했던 어머니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럼 너한테는 고화질 사진 원본 없어?”
“어머니께 달라면 있겠지. 근데 왜.”
“더 크게 인쇄해서 회사 로비에 걸어놓…….”
“안 돼!”
단칼에 자르는 반응에 이석의 얼굴이 움찔했다. 성내듯 반대한 하선우 역시도 당황한 얼굴로 이석의 얼굴을 보았다. 입술을 벙끗거리던 이석이 억울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야, 왜 그렇게 기겁해. 놀랐잖아.”
“…….”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러냐.”
“……그런 사정이 있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한동안 허둥대던 그는 이석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았다. 물기로 군데군데 얼룩진 사진을 파일 안에 집어넣은 하선우는 동요를 감춘 얼굴로 말했다.
“엘텍 직원이 보기라도 하면 좀 그렇잖아.”
“뭐가 그래. 엘텍에 우호적인 걸 어필하는 게 우리로서는 더 좋지. 우리 기업이 이런 기업과도 거래합니다. 그거 자랑하는 게 뭐가 어때서. 그게 다 사업수완인 거다.”
어머니도 그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는 것을 떠올린 하선우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따지고 보면 강 전무가 우리 은인이나 다를 바 없는데 왜 안 내켜. 바보냐? 그거 무진장 자랑스러운 사진이야.”
하선우의 손에서 다시 파일을 빼앗아 든 이석이 사진 밑의 신문기사를 주욱 읽어 내렸다.
“내용도 딱 알맞잖아. 엘텍전자 중소기업과의 상생경영을 위해 힘써. 엘텍전자의 강주한 전무가 대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협력업체의 기술 일류화 지원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안 그래? 지금 우리 상황이랑 완전 똑같잖아.”
이석은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한 행운에 흠뻑 취한 얼굴로 웃었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선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석의 말처럼 그들이 믿을 수 없는 행운을 거머쥔 것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이석의 손에 들린 저 사진 때문에 이렇게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했지만 엘리베이터 앞에서 넘어져 사진을 흘린 덕분에 행운이 굴러들어 왔다. 이석의 말처럼 NnG는 그들의 기술력을 인정해준 강 전무의 안목에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래, 은인이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하선우는 웃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사진을 회사에 걸어놓는 것은 내키지 않아 이석의 손에서 사진을 거두어 서랍 안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좁은 문간 사이로 김 부장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 와요? 다들 기다리는데.”
배시시 웃는 그녀의 표정에 서로의 눈을 마주 본 두 사람은 곧 자리를 옮겼다.
아침은 회사를 설립한 이후 어쩌다 한 번 외치는 구호로 시작됐다.
리더 기업 NnG! 도약하는 NnG! 세계로 향하는 NnG!
이석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구호는 기운을 북돋기도 전에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문제점이 있어 그간 잘 사용하지 않았지만 오늘만큼은 전 사원들을 모아놓고 다 함께 구호를 외쳤다. 그 속에는 치열한 간절함이 있었고 그 간절함은 사람들의 가슴을 고양되게 만들었다.
이석과 하선우, 김주안 세 사람은 모든 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마치 포화 속으로 걸어가는 군인처럼 비장하게 회사 로비를 벗어났다. 오늘부터 NnG는 법인 설립 이후 새로운 분기점을 맞을 것이었다. 보잘것없는 일산의 임대 공장과 사무실에서 반 10년간의 고생 끝에 개발한 기술로 대기업의 본사 건물에서 기술시연을 하게 되는, NnG의 역사가 새롭게 쓰이는 날이었다.
김 부장과 이사가 함께 차를 타는 바람에 자연히 하선우는 홀로 운전대를 잡고 엘텍의 본사로 향하게 되었다. 토요일 낮부터 시작된 비는 지난 밤 잠잠해져 지금은 안개처럼 자욱한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앞서가는 이사의 차를 뒤따라 달리다 톨게이트를 지날 즘이었다. 거치대에 걸어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혼잡해지는 도로에서 눈을 떼 곁눈으로 화면을 흘깃거리던 하선우의 표정이 가늘게 구겨졌다. 낯선 번호였다. 짧은 고민 끝에 그는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밀어 넣었다.
“여보세요.”
-안 비서입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이 들어갔다.
“예. 말씀하십시오.”
-어디쯤 오시는 중입니까.
“지금 서울 톨게이트 막 지났습니다. 전무님은 도착하셨습니까.”
-예. 본사에 도착해 계십니다.
대시보드의 시계를 흘깃거린 하선우는 말했다.
“30분 뒤에는 도착할 겁니다.”
-세미나실에서 강 전무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임 부장님이 안내해드릴 테니, 로비에서 함께 만나서 오십쇼.
용건만을 전하고 끊어진 전화에 짧은 시선을 던진 하선우는 이어폰을 빼며 한숨을 쉬었다. 비서의 전화에 겨우 이완되었던 마음이 다시 팽팽하게 죄어졌다. 너무 긴장해서 어깨가 뻐근할 지경이었다.
모기업인 엘텍그룹을 포함해, 엘텍의 계열사 대부분이 종로와 을지로에 집중되어 있었다. 청계천 주변으로 면하고 있는 고층의 빌딩에는 엘텍의 이름이 박힌 전광판이 간혹 눈에 띄었다. 자동차, 전자, 통신과 물류 분야의 엘텍 계열사가 청계천의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회도로로 접어들자 차창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도 시야에 모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건물들이 가까워졌다. 과시적이고 적대적인 드높은 건물들은 고공하는 그래프의 수치 같았다.
비가 내리는 데다가 출근 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대였기에 엘텍전자 본사 건물 앞은 한산했다. 본사는 주변의 건물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부서진 큐브를 수십 개 겹쳐놓은 듯한 모양의 건물은 일대의 건물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높았다. 입면에서 볼 때 픽셀이 깨진 그림처럼 서로 다른 층수의 건물이 무계획적으로 겹쳐진, 전위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청계천 주위 사진이 언론매체에 보도될 때면 빠지지 않고 포함되는 건축물 중 하나였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압도적이었다. 엘텍 본사 건물이 국내 최고의 내진설계가 되어 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자본의 힘이라는 게 놀랍긴 놀라워.
혼잣말을 하며 고개를 빼 빌딩을 흘깃거릴 때였다. 시야의 맹점에 검붉은 상이 언뜻 맺혔다. 백미러를 통해 뒤를 돌아보자 적갈색의 우비를 쓴 남자가 보였다. 모자를 푹 눌러써 그림자가 이목구비를 가린 남자는 커다란 피켓을 들고 있었다. 검고 파랗고, 붉은 글씨로 강조하여 쓴 글씨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았지만 하선우는 그가 무엇을 의도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1인 시위 중이었다. 빗속에 홀로 서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커다란 체격의 남자는 주차장 입구로 들어가고 나서도 하선우의 뇌리에 잔상처럼 남았다.
지하 1층에 위치한 대기업 임원들의 전용 주차장을 지나 지하로, 지하로 계속해서 내려간 하선우는 적당한 자리에 차를 주차시켰다. 종로구에 막 진입했다는 김 부장을 10분 남짓 기다린 끝에 세 사람은 합류하게 되었다. 엘텍전자의 본사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잔뜩 고양된 그들은 방문객 전용 승강기 앞에 섰다. 서울로 출발하기 전, 소심하게나마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촌스럽게 굴지 않기로 약속했던 덕분인지 모두가 점잖게 층수가 오르기를 기다렸다.
“선우야.”
이석의 답지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하선우는 전광판을 올려다보던 그대로 대답했다.
“왜.”
“이번 일만 잘 성사되면 회사에서 너 차 바꿔준다.”
“뭐?”
“정말요?”
하선우와 김 부장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이번 일 전적으로 네 덕분이니까. 네가 강 전무한테 잘 보인 것도 있고 회사에서 연구개발 활동 크게 지원 못해줬는데도 나서서 개발한 이유도 있고. 이번 일 네 역할이 컸잖아.”
하선우의 등을 두드리며 이석은 말을 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대기업과 미팅한 게 한두 해냐. 기술 자료랑 샘플 가지고 다니면서 수도 없이 들락거렸어. 찾아가면 뭐해. 운 좋으면 약속 몇 번 더 잡는 걸로 끝나는데. 운 나쁘면 미팅하면서 제시한 연구자료 죄다 빼앗기고 자기들 이름 붙여서 판매하는 꼴 내 주변에서도 허다하게 봤어. 어렵게 거래하게 됐어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부도 겨우 면할 만큼 돈 받으면서 하청일밖에 더하냐. 우리 같은 빽 없는 기업에서 강 전무 같은 라인 붙잡는 거 진짜 천운이야.”
고생이 스쳐 지나가는 얼굴로 회상하던 이석은 분위기를 바꿔 웃으며 말했다.
“괜히 내가 보석 같은 하선우라고 하겠냐.”
여건만 되면 하선우를 등에 업고 엘텍을 뛰어다니고 싶은 얼굴로 이사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사준다고 할 때 차 사라.”
힘을 줘 어깨를 잡아 흔든 이석은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얼떨떨한 얼굴로 이석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엘리베이터에 뒤따라 오르며 말했다.
“아, 좀 그만해.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고, 일단 성사되면 얘기합시다.”
일부러 정색하자 김 부장과 이사는 비밀스러운 눈빛을 교환하며 웃었다.
로비로 올라가자 출입국 심사대처럼 생긴 게이트가 그들을 맞이했다. 위축된 하선우와 달리 이사는 덤덤해 보였다. 대기업을 다녔던 경험도 있고, 대기업을 상대로 한 미팅 경험이 다수였기에 능숙했다. 사원증을 갖고 드나드는 사원들과 달리 방문객이었기에 그들은 서류심사를 받듯, 신분증을 확인하고 출입증을 받아 들었다. 정보유출을 방지하는 절차라는 설명을 듣고 보안대를 통과하고 나서야 그들은 비로소 접견실로 안내되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악수를 청하는 임 부장의 단단한 손을 맞잡으며 이석은 자신감이 넘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연이어 김 부장과 하선우에게 악수를 청한 그는 부하직원을 시켜 내온 믹스커피를 세 사람 앞에 내려놓았다. NnG에서 기술 시연을 위해 가져온 샘플과 자료를 가져간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커피를 거의 다 비워갈 때쯤 돌아온 그는 세 사람을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부서진 큐브를 뭉쳐놓은 것 같은 독특한 외관과 달리, 내부 풍경은 여느 고층 건물의 구조와 다르지 않았다. 앞서서 걸어가던 임 부장이 걸음을 늦추며 잠자코 뒤를 따르는 세 사람의 긴장한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이 애써 웃음을 유지하고 있는 이사의 얼굴에 가 멎었다.
“길몽이라도 꾸셨나 보죠.”
“하하,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꿈은 안 꿨습니다.”
“지난밤 잠은 좀 주무셨습니까.”
“하하, 사실 좀 잠을 설치긴 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는 다시 앞을 보며 걸음을 재촉했다. 긴장을 풀어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긴장을 고조시키고 싶어 하는 듯이 무표정했다. 각진 윤곽이 도드라진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장난이나 유머가 통하는 부류로 보이지도 않았다. 입을 열기 전에도 무서웠지만, 입을 열고 난 뒤에도 다른 인상이 끼어들지 못했다.
김 부장은 말할 것도 없고, 이석 역시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고 있지만 임 부장을 어려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이 불혹을 조금 지나 대기업 최고의 부서라 불리는 전략기획 1팀의 부장으로 초고속 승진했고, 총수의 아들이 최측근이니 그의 자부심이 하늘을 치솟는 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두 사람을 앞으로 보내고 가장 뒤에서 그들을 따라 걷던 하선우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붙잡았다. 임 부장을 처음 만났던 날 흘리듯 들었던 대화가 기억났다.
‘국내의 비효율적인 공장 하나를 폐쇄해 해외로 나가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개별 공장 단위 노조들과 구체적으로 협상한 뒤에 결정해야겠죠. 지자체 협력 문제도 있고 복잡한 안건이죠.’
회사와 트러블을 일으키는 노조단체가 있는 공장을 골라서 폐쇄하겠다고, 살벌한 얘기를 웃으면서 하는 인물이었다. 지나치게 직선적이고, 불도저처럼 관용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는 강주한의 최측근이었다.
임진태 부장은 강주한이란 인간의 이면이 부풀려진 존재는 아닐까. 예의 바른 신사처럼 행동하는 강주한의 야만성을 과장해놓은 인물. 강주한 대신 자진하여 손을 더럽히고 비겁한 짓을 서슴지 않는, 토사구팽을 각오한 장기 말. 그런 인물들이 NnG에 베푸는 온정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하선우는 여전히 석연치가 않았다.
“여깁니다.”
걸음을 멈춘 곳은 경영위원회 세미나실 앞이었다. 이 문을 열면, 정말로 돌이키기는 어려울 것이란 생각에 검은 아크릴 문패를 본 하선우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내부는 국회의사당 본회의실을 떠올리게 하는 구조였다. 아래를 향해 비탈져 있고, 계단처럼 평평한 면 위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가장 아래의 정중앙에는 거대한 폭의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중앙을 비껴 가장자리에 단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스크린 안에서는 빔프로젝터를 통해 NnG에서 준비해온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리모컨을 누르며 시험가동을 하고 있는 이는 강주한이었다.
“도착하셨습니다.”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던 그가 굽혔던 허리를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깔끔하게 검은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도무지 흠 잡을 곳이라곤 없는 모습이었다.
지척의 거리로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깨를 끌어당기는 강 전무의 커다란 손에 하선우는 숨을 참았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가 격려하듯 상박을 손바닥으로 꽉 쥐었다 놓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하선우의 팔에 와 닿았다, 웃음 띤 강 전무에게로 돌아갔다. 그 눈빛 속에는 제법이네, 뜻밖의 놀라움도 있었다.
“고…생은요. 강 전무님이 부르시면 바로 달려올 수 있는 지척의 거린데요.”
“음, 그 말 그대로 믿어도 되는 겁니까.”
“예. 뭐 그런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까.”
하선우의 아부가 어색했는지, 김 부장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았다. 개성 없는 인사말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그들은 곧 시작될 시연회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미팅을 진행하는 것은 대개 이사의 담당이었지만, 오늘은 강 전무의 지시로 개발자이자 특허 출원자인 하선우가 맡게 되었다. 리허설을 하는 내내 강 전무가 곁에서 도와주었고, 그때마다 김 부장과 이사의 시선이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의아함이 담겨 있던 그들의 시선은 점차 수긍으로 변해갔다. 하선우는 곧 강 전무와 함께 있는 모습을 김 부장과 이사에게 보인 것이 처음임을 깨달았다. 하선우와 강주한의 관계가 그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 긴밀한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음향 장비와 프로젝터, 모든 장비의 세팅이 완료되고 리허설까지 마치고 난 뒤, 닫혔던 문이 열리고 커피를 든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매장에서 사온 커피를 하나씩 건네는 여자를 강주한은 자신의 업무비서라고 소개했다.
마흔 후반으로 보이는 단발의 그녀는 교양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중년의 아나운서 같은 인상이었다. 강주한의 곁에는 늘 수행비서가 따라다녔다. 그리고 일전에 하선우는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그의 딸아이를 돌보던 대리인을 마주쳤다. 지금의 업무비서를 포함해 강 전무의 사무와 공무를 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선우가 느끼기에 그는 마치 왕조 시대의 군주 같았다. 내명부의 상궁과 내시부의 내관. 의금부의 저승사자 같은 임 부장. 어쩌면 이부자리까지 살펴보는 지밀나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수족처럼 부리는 사람들에 대해 떠올리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사생활까지 쓸데없이 뻗어나가던 생각의 촉을 잘라버렸다.
짧은 휴식을 마치자마자 바깥이 시끌시끌해졌다. 곧 투자를 결정할, 엘텍전자의 경영 임원들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중년을 훌쩍 넘긴 임원들은 노련한 전문가들이었다. 아무리 겉모습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패기가 넘치는 눈빛을 해도 그 속은 설익은 풋내기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위축되는 본성을 간파당할까 두려웠다.
강 전무가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취지와 NnG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마친 후 그 뒤를 따라, 하선우와 이석은 단상으로 내려갔다. 하선우가 설명하는 속도에 맞춰 이석이 자료를 넘겨주는 2인1조의 팀이었다. 올림픽의 100미터 달리기에 출전하는 선수가 이만큼 떨릴까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하선우는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십니까. 배터리 전문기업 NnG의 하선우입니다.”
쥐가 날 정도로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꽉 쥐고 하선우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프로젝터의 새하얀 발광체가 눈부셨다. 임원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희가 개발한 기술은 원천기술로써 대량의 전류를 흘려보낼 경우 2분 안에 완전 충전과 방전이 가능한 전극소재입니다.”
빛나는 광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허공을 마주 보는 기분으로 하선우는 설명을 이었다.
NnG가 개발한 전극소재는 기존 전지에 비해 300배 이상의 전류를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있는 기술이었다. 전기차에 들어가는 중대형 전지 역시 짧은 시간 안에 충전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대량으로 합성이 가능하고, 에너지 밀도를 올려 배터리 자체의 용량을 늘릴 수 있었다.
스크린에 맺힌 동영상을 설명하는 동안, 긴장이 역력한 표정이 이따금 그의 얼굴 위로 드러나곤 했다. 프로젝터를 끄고 비로소 어두운 실내에 빛이 드리워지고 나서야 사람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찐득하게 들러붙는 마이크를 왼손으로 바꿔 쥐고 그는 기술 시연을 준비해둔 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아… 자, 잠시.
어… 음…,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전력을 잘못 연결시키거나, 선을 바꿔 끼우는 실수로 계획에 없는 불필요한 말을 연발하다 가까스로 샘플에 준비해둔 대량의 전류를 흘려보냈다. 정확히 2분의 시간 뒤 접속시킨 전력을 차단하고, 계측기로 에너지의 밀도를 재는 것으로 일차적인 기술시연이 끝났다.
임원들의 반응을 차마 보지 못하고 단상 뒤에 마련된 자리로 돌아온 그는 입술을 치아로 꾹 깨물며 질끈 눈을 감았다. 구체적으로 뭘 실수했는지조차 머릿속에 암막을 드리운 것처럼 떠오르질 않았다.
“잘했어.”
소리 죽여 귓속말하는 이사에게 하선우 역시 소리 죽여 물었다.
“실수 심하게 한 것 같아?”
“거의 안 했어. 괜찮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전기자극을 받은 것처럼 그는 전신이 조금씩 저려왔다. 진정하려 애쓰며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물로 서둘러 목을 축였다. 앞이 보이지 않아 기술을 시연하는 동안 반응이 호의적이었는지, 회의적이었는지 체감할 수 없었다. 임원들의 얼굴을 초조한 얼굴로 살펴보던 하선우는 스크린 옆에 서는 강 전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특허 기술력을 설명했던 하선우와 달리 강 전무는 특허 기술의 사업 전망에 대한 보고를 준비했다. 느슨했던 분위기가 팽팽하게 죄여졌다. 모기업인 엘텍그룹 전략기획실에서 근무했던 강주한이 계열사인 엘텍전자 전무로 직위를 옮기면서 추진하는 공식적인 첫 사업이었다. NnG 평가의 의미보다, 총수의 첫째아들의 안목을 판단하는 의미가 실질적으로 더 큰 자리였다.
그가 발표한 내용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기술성, 시장성, 경제성, 사업성 검토를 비롯해 공장규모와 건설계획, 시설 소요자금, 더더욱 구체적으로 들어가 제원가 비용을 추정하는 내용까지 거의 모든 것이 총망라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와… 프레젠테이션 진짜 잘한다.”
얼굴은 정면을 향한 채로 이사가 소리 죽여 감탄했다.
“신이 첫째에게 다 몰아준 모양이다.”
발표의 흥분이 가시지 않아 하선우는 이사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했다.
“뭐?”
“막내한테 갈 머리까지 다 첫째 주셨다고.”
멍하게 강주한의 동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던 하선우는 뒤늦게 이사의 말을 이해했다.
“난놈은 난놈이다. 그치?”
지금이야 강주한을 우호적으로 평가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부모 잘 만나 호강하는 인물로 폄하하던 이석이었다. 정치적인 생명에 따라 진보와 보수를 마음대로 오가는 정치인처럼 전향하는 이석의 반응에 긴장했던 것도 잊고 하선우는 조용히 웃었다.
“예… 진짜 잘났어요.”
이사의 왼쪽, 가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김 부장이 속삭임 같은 목소리로 동조했다. 그녀의 시선은 스크린이 아닌 강주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빈틈없이 차려입은 강주한 자체를 감상하는 듯이 보였다. 벌어진 입술을 아쉬운 듯 달싹이며 경제성 분석 단계를 설명하는 강주한을 바라보았다.
세미나 형식에 가까웠던 프레젠테이션은 한 시간을 훌쩍 넘겨 계속되었고, 어느새 점심시간을 지나 있었다.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는 그는, 하선우보다도 전지사업 분야의 미래성과 NnG의 기술력에 더욱 빠삭했다. 전체적인 맥락을 무섭도록 꿰고 있는 그는 결코 충동적으로 하선우에게 손을 내민 것이 아니었다.
하선우는 가슴 한편에서 써늘한 얼음이 부유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차가움에 생각의 회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기술의 도약은 대규모의 자본과 함께 공존하는 법이다. 자본이 있어야 신기술을 만들어내고, 신기술로 이익을 얻어내며, 산업을 추진할 수 있다. 엘텍은 정보를 전유하고, 신기술을 독점해가며 발 빠르게 얼마든지 혁신할 수 있다. 그들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었다.
하선우는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씁쓸함을 음미했다. 그것은 패배감과 닮아있었다. 부러웠고, 화가 났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자신들에게 투자하기를 결정한다면, 그 밑천을 바탕으로 NnG를 크게 성장시키고픈 욕심이 치솟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발표가 끝난 후에도 질의응답으로 시간은 계속 흘렀다. 지친 표정의 임원들을 보면서도 붙잡고 있던 마이크를 내려놓은 것은, 오후 3시를 지나서였다. 오전 10시 반부터 시작해 3시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강행군에 뻐근한 몸을 일으킨 그들은 곧 비서의 안내로 강주한의 개인 집무실로 안내되었다.
강 전무의 집무실은 소기업 사무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강 전무 개인을 위해 근무하는 하부조직과 비서실이 붙어 있고, 안쪽에 강 전무의 별실이 마련된 구조였다. 그들은 부드럽게 연마된 짙은 빛깔의 원목으로 꾸며진 사치스러운 방을 상상했지만 미색과 하얀색의 중간 빛으로 페인트칠된 벽면에는 과일 정물화 하나만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보통의 책상 두세 개를 이어붙인 크기의 책상 앞에는 커피테이블이 있었고, 벽 전체가 책으로 뒤덮여 있었다. 사무실은 세련된 인테리어를 기대했던 그들의 상상보다 간소했다.
간단히 끼니를 때울 만한 다과를 내온 뒤 비서는 자리를 비웠다. 강 전무는 중역과 함께 자리를 비운 뒤라 세 사람은 눈치 볼 것 없이 허기를 채우며 마음껏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긴장이 한껏 풀린 이사는 술 한 잔 걸친 사람처럼 배시시 웃었다.
“느낌 좋지 않냐?”
“글쎄, 나는 잘…. 강 전무가 밀어준다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쯧쯧 혀를 차며 이사는 강 전무의 한 살 터울 동생인 강예진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강주한보다 앞서 엔젤러스 화장품과 외식브랜드 부사장으로 진급한 그녀가 계열사에 끼친 피해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다. 새로운 화장품 브랜드 런칭과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사업의 잇따른 실패로 그녀가 회사에 끼친 손실액은 어마어마했다. 결국 엘텍의 전자 계열사와 금융 계열사에서 투자라는 명목으로 자본을 출자했는데, 그 피해가 연쇄 파급되어 엘텍 전체 계열사 주가의 동반하락을 일으켰다.
그녀가 총수의 눈에서 멀어지기까지는 2년이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고, 결국 강예진은 배움을 핑계로 남편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전자와 금융, 물류와 외식사업 등, 모두가 독립적인 회사였지만, 총수의 자녀들을 위해 투자라는 명목으로 다른 계열사에서 돈을 끌어다 썼다. 상식적인 일이 아니었지만 증발한 돈은 그들의 경영연습을 위한 기회비용일 뿐이었다.
“다른 계열사에서 돈을 끌어다 쓰는 한이 있어도 투자 받아낼걸. 강 전무야 뭐, 엘텍의 공식적인 황태자 아니냐. 아버지가 주는 돈 쓰면서 사업경험 쌓고 얼마나 좋아. 우린 손해 볼 것도 없고.”
“그거 알아요? 전무가 얼마나 돈이 많은지?”
잠자코 듣고 있던 김 부장이 돌연 끼어들었다.
“구체적인 자산 알려주기 전에 이것부터 먼저 생각해봐요.”
김 부장은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1천 원을 가진 사람에게 100원 가치는 100원을 가진 사람에게 10원의 가치와 다를 바 없잖아요.”
“그렇지. 십분의 일이니까.”
“그럼 계산하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바로 대답해봐요. 1조를 가진 사람에게 1억의 가치는, 1억을 가진 사람에게 얼마일까요.”
김 부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하선우는 대답했다.
“만 원.”
김 부장과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계산하던 이사가 동시에 하선우를 보았다.
“아, 진짜 싱겁게. 이공계 아니랄까 봐 그걸 바로 맞추냐.”
김샌 얼굴로 부장은 한숨을 쉬었다. 같은 이공계 출신의 이사는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것밖에 안 돼?”
“예. 그것밖에 안 돼요. 1억 가진 사람한테 만 원 달라고 사정하면 주겠어요, 안 주겠어요.(“읽고, 분노하고, 행동하자” 김인국 신부 인터뷰 참고. 『프레시안』2008.02.25.)”
“줘도 별로 안 아쉬울 것 같은데. 그래도 돈 있는 사람이 더하다고 절대 안 줄걸.”
낄낄 웃으며 이사는 남아있는 샌드위치를 얼른 가져가 자신의 입안에 밀어 넣었다.
“잠깐만 부장, 그 집안 자산이 얼마 정도 되지?”
“으음… 상장 계열사 주식자산만 17조고, 부동산이랑 비상장 회사, 현금이랑 비자금 포함하면 훨씬 많겠죠.”
재무에 관해서라면 빠삭한 김 부장이었다. 눈을 빛내는 그녀처럼 하선우와 이석 역시 갑자기 머리회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주식자산만 놓고 계산해본다면 그들은 1억을 700원처럼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흥미를 끄는 이야기였다. 피로회복제를 마신 것처럼 하선우와 이사는 피곤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별 볼 일이 없던 여섯 평 남짓한 강 전무의 집무실이 달라 보였다.
“진짜 잘 보여야겠네.”
눈앞이 어찔한 느낌에 얼굴의 근육을 움찔거리며 이사가 말했다.
“선우야.”
“응.”
“너 좋게 본 것 같으니까, 관계 잘 맺어둬라. 어? 형님, 아우 이러면서 돈독하게.”
진지하게 이사는 말했다. 하선우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꽉 잡았다. 강 전무가 왜 너를 좋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잡은 동아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당부였다. 실제로 그가 자신에게 호의적인지도, 관심을 두는지도 확신할 수 없어 하선우는 웃었다.
“그게 되겠나.”
“되든 안 되든 들러붙어. 남들은 기회조차 없다.”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주인 없는 사무실 안에서 속물처럼 굴었던 세 사람은 뜨끔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세요. 번거롭게 뭘 일어나십니까.”
강 전무의 뒤통수에서 돈의 후광을 지워내느라 이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김 부장의 옆이자 하선우의 맞은편에 앉은 그는 외투를 챙겨 들고 있었다.
“3일 뒤에 투자심의회가 열릴 겁니다. 최종적으로 결정이 나기까지는 그보다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반응이 나쁘진 않았으니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대해도 괜찮을 듯합니다.”
강 전무 역시도 시연회 동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는지, 비로소 한시름 놓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뜸을 들이는 것으로 긴장감을 조성한 강 전무는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본부장님이 하선우 씨에게 특히 관심이 많던데요. 딸 소개해주고 싶다고.”
“하하… 그렇습니까. 영광이네요.”
“하긴, 하 사장님 욕심날 만하죠. 성실하시고 능력 있으시잖아요.”
“성격도 좋습니다. 제가 왜 하선우 씨에게 욕심내서 동업하자고 했겠습니까. 하하.”
대놓고 띄워주려는 두 사람의 노력에 하선우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것 말고도 더 있죠. 연구실에서 썩히기엔 인물이 아깝잖아요.”
띄워주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강 전무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건 그래요. 하선우 씨는 인물이 좋아 인상이 강하게 남는 편이니까요. 제 남동생도 하 사장을 연예인이라고 착각할 정도였으니.”
강 전무의 말에 두 사람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서서히 자신을 향해 옮겨지는 두 사람의 시선에 하선우는 입술을 당겨 가까스로 웃었다.
“어머, 무슨 일이었대요? 저희는 처음 들어요.”
“그렇습니까.”
“네. 강태한 전무님 만났다는 얘기는 못 들었었어요.”
하선우가 엘텍가와 인연을 단단하게 맺었다고 오해한 그녀가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려 활짝 웃으며 손을 모았다.
“지난 토요일에 엘튼 호텔에서 선우 씨 우연히 만났거든요. 자리에 마침 제 동생도 있어서 뵈었습니다.”
“데이트 간다더니 호텔 잡았어? 진도 너무 빠른 거 아냐?”
짓궂게 웃으며 이사는 하선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슬쩍 찔렀다. 펄쩍 뛰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아낸 하선우는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강 전무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약간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잘못 들은 것처럼 되물었다.
“데이트요?”
“예, 뭐… 아…… 예.”
위험신호로 과부하된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흘려보내는 헛소리를 중얼거리던 하선우는 가까스로 말했다.
“그게 원래는… 데이트를 하기로 했는데 여자분에게 일이 생겨서…. ……그래서 중간에 취소돼서 급하게 일정을 변경했습니다. 때마침 시간 맞는 친구가 만나자고도 했고.”
마그네슘이 부족한 환자처럼 눈가의 근육이 자르르 경련했다. 말 속에서 오류를 찾아내듯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다시 눈을 들어 하선우의 얼굴을 살피는 얼굴은 초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군요.”
수긍하며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의심 없는 태도가 오히려 더 의심스러웠지만, 하선우는 더는 이 주제로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강주한이 먼저 화제를 돌려주었다.
“어쨌든, 위원회의 반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반색하며 이사가 물었다.
“예. 특히 NnG의 특허가 원천기술이라는 점을 눈여겨보더군요. 그래서 나온 얘기 중에 독점권에 대한 얘기도 있었습니다.”
“엘텍에게 NnG의 기술에 대한 독점권을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네. 특허의 독점권을 저희에게 주는 것. 그리고 선우 씨의 특허를 개량해 새로운 특허를 내는 것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저희에게 독점적으로 주는 것. 엘텍에서 원하는 건 그겁니다. 물론 그에 대한 로열티는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드릴 것을 약속하죠.”
“예. 이해했습니다. 고민해보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 이사는 웃음 띤 얼굴로 조금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전에 말씀하셨던… 입찰에 관한 얘기는 어떻게 되는 건지.”
엘텍은 배터리 케이스를 제작하는 하청을 해성과 NnG, 산원테크와 모성, 하신 등 모두 일곱 업체에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해부터 엘텍은 공개 입찰을 통해 협력업체를 일곱에서 세 곳으로 줄일 계획이라고 했다.
“지명 입찰에서 NnG를 내정자로 두겠다는 약속 말입니까?”
이사는 강 전무의 직설적인 말에 민망한 얼굴로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NnG를 내정자로 두고 입찰을 진행할 겁니다.”
비밀한 공모를 잊지 않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듯 강 전무는 웃었다. 이사는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세 개의 자리 중 내정자로 NnG가 정해졌으니, 결국 남은 두 자리를 놓고 여섯 업체가 전쟁을 벌이는 꼴이었다. 그 전쟁에서 등 돌리고 NnG는 그저 반칙 같은 행운을 즐기기만 하면 되었다.
“투자가 결정만 된다면 NnG 앞으로 엘텍 제품의 물량을 배정하고 신규 모델 우선권을 부여할 예정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이사의 인사를 받은 강 전무는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지체 없이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외투를 챙겨 들었다.
“그럼 구체적인 얘기는 다음에 정하기로 하고 일어날까요.”
“예. 그러죠.”
하선우는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1막이 끝났음을 느꼈다. 결과는 그들의 손을 떠나 있었다. 모두가 흡족한 마음으로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서가 후속일정에 대해 알려드릴 겁니다. 이사님과 부장님은 밖에서 얘기 나누시죠.”
슈트 위에 짙은 검정색 코트를 걸치며 강 전무는 말을 이었다.
“하 사장님.”
이사와 함께 밖으로 나가려던 하선우의 걸음이 멈칫했다.
“예?”
강 전무는 물었다.
“오늘 바쁩니까?”
“회사로 돌아가서 업무 볼 예정이었습니다. 바쁜 건 없지만요.”
의아함을 느끼며 하선우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미소 짓는 강 전무를 보면서 자신이 내뱉은 그 말이 곧 스스로에게 건 족쇄 같은 것임을 깨달았다. 강주한은 코트의 단추를 여미며 웃었다.
“잘됐군요.”
* * *
NnG의 납품처가 울산에 있는 엘텍 공단이었기에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가는 길은 비교적 익숙했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그 길이 편안한 길은 아니었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하선우는 서울에서 울산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계절이 바뀌어 6시면 해가 떨어지는 데다가 울산에는 완전히 어두워진 9시 이후에나 도착할 수 있었다. 뿐만이 아니라, 한 시간 남짓 공장 부근을 돌아다닌다면 자정을 넘긴 한밤중에야 서울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된 일정에 하선우는 벌써부터 지치는 느낌이었다.
터널 요금소를 지나며 그는 조금 전 비서와 강 전무의 대화를 떠올렸다.
헬기를 준비할까요, 라고 묻는 비서의 말에 조금의 고민도 없이 강 전무는 하 사장님 차 타고 이동할 겁니다, 라고 대답했다.
눈을 맞춘 채로 입을 연 그의 어조가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서 하선우는 그의 요구가 무례하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홀린 듯이 얼결에 제 차로 모시겠다는 대답을 했지만, 강남 집 한 채 가격의 자동차를 두고 하선우의 누추한 세단을 타고 이동하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잇따라 조금씩 PC로 업무를 보는 강주한의 옆모습을 흘깃거리면서 하선우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불안함에 대해서 곱씹었다. 그 불안함의 이유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실제 친밀한 정도와 친밀함을 넘어서는 행동에서 오는 간극. 그 간극이 강주한을 의뭉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럼에도 그 의뭉스러움을 대놓고 물어보지 못하는 것은 그의 직책이,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이 하선우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정말 그가 자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데 유독 자신만이 그를 어색해하는 것인가. 하선우란 인간의 사회성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가. 곱씹고 곱씹으며 터널에서 계산을 마친 하선우는 룸미러 속의 강주한을 조금 더 노골적으로 쳐다보았다.
여윈 듯한 뺨 아래 넓지도, 좁지도 않은 이상적으로 각진 턱, 가운데가 갈라지고 거칠게 표피가 일어난 입꼬리가 긴 입술, 늘어진 군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강직한 얼굴. 건조하면서도 신경증과는 거리가 먼 단단함을 훔쳐보았다.
준수한 얼굴이 호감의 조건이라면 그야말로 표본이 될 만한 외모였다. 재벌에 대한 대중의 증오가 강주한에 한해서 한 발 비껴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아내를 잃은 애처로운 남자라는 타이틀과, 금욕적인 외모가 분노의 초점을 흐리게 했다. 언론은 그의 준수한 외모와 극적인 삶을 가공하여 얼싸안았고 언론이 이끄는 대로 사람들은 둥둥 떠가게 되었다.
싫기만 하냐고?
강주한을 싫어하는 것은 수많은 감정의 파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조각 하나를 골라낸 것뿐이었다. 강주한에 대한 하선우의 마음은, 싫어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복잡했다. 강주한이 보이는 관심은 그의 내부에 있는지도 몰랐던 허영심을 만족시켰다. 그 같은 유명인이 대한민국 어딘가에 있는지도 모르게 꽁꽁 숨겨져 있던 별 볼 일 없는 중소기업 사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었다는 것, 사적인 호의를 보이며 다가온다는 것. 그 모든 관심이 억누를 수 없는 허영심과 거부감 사이에서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톨게이트를 지나 경부고속도로를 탈 쯤, 도로 위로 노을이 진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황혼이 진 도로를 바라보던 하선우의 피로한 눈에 여주 휴게소 표지판이 들어왔다. 시간은 5시에 이르고 있었고 간단하게 간식으로 때우긴 했지만 아직 점심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전무님. 조금 있으면 휴게소 나오는데 들를까요.”
PC에서 눈을 뗀 그가 차창 밖의 휴게소 표지판을 보았다.
“그러죠. 점심을 걸러서 배도 고프실 텐데 들르죠.”
퇴근 시간이 겹치지 않은 평일이었기에 휴게소의 주차장은 텅텅 비어 있었다. 화장실에 들른 후 밖으로 나온 하선우는 외국계 체인 커피매장 앞으로 걸어오는 강주한을 발견하고는 그 곁으로 갔다.
“식사는 안 하시고요?”
하선우의 말에 그는 커피매장 옆으로 일렬로 늘어서있는 매장으로 눈길을 옮겼다. 내키지 않는 얼굴로 식당 간판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그가 말했다.
“전 샌드위치면 됩니다. 드시고 오시죠.”
누가 재벌 아니랄까 봐, 엄한 데서 까다로운 척이야.
이죽거리는 속내를 감추며 하선우는 말했다.
“그럼 제가 샌드위치와 커피 가져가겠습니다. 전무님은 차 안에서 쉬고 계십쇼.”
“됐습니다. 바깥바람 쐬는 겸 나온 거니 신경 쓰지 말고 드시고 싶은 것 드세요.”
무신경한 어투로 대답하며 강 전무는 턱짓으로 식당 코너를 가리켰다. 한 번 더 권유할 새도 없이 그는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잘게 썬 김치와 김 부스러기, 고명을 잔뜩 얹은 잔치국수를 먹고 싶었지만 강 전무를 놓고 하선우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짙게 선팅된 유리 너머로 강 전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하선우는 결국 그를 뒤따라 들어갔다.
“저도 샌드위치 먹으려고요.”
넉살 좋게 웃으며 하선우는 아직 메뉴를 정하지 못한 강주한의 곁에 섰다.
“카페라떼 샷 추가해서 하나 주시고요, 치아바타… 음, 치킨 샌드위치? 그것도 주세요. 전무님은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웃음 띤 하선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혀를 찼다.
“캐모마일 차. 샌드위치는 하선우 씨와 같은 걸로 하나.”
강주한이 지갑을 꺼내기 전, 주문을 접수한 점원에게 하선우는 서둘러 카드를 내밀었다.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지갑을 꺼내려 코트 깃 안으로 손을 밀어 넣던 강주한이 다시 한 번 하선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을 발견한 하선우는 속이 뜨끔해졌다. 실수한 거라도 있나.
따끈하게 데운 샌드위치와 뜨거운 음료가 든 트레이를 들고 하선우는 강주한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웨이터처럼 강주한의 앞으로 그릇과 티슈, 스트로를 공손히 내려놓은 하선우는 그의 맞은편에 의자를 당겨 앉았다.
좁은 원형의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두 남자는 묵묵히 샌드위치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어색함에 콧잔등을 손등으로 쓱쓱 문지르며 하선우는 퍽퍽한 닭가슴살을 씹었다. 그는 할 말이 남은 얼굴로 하선우를 보았지만 얘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미묘하게 변해버린 삭막한 분위기에 하선우는 어렵게 입을 뗐다.
“제 차 불편하시죠.”
“편합니다.”
“피곤하시면 가시는 동안 좀 주무세요.”
“괜찮습니다. 운전하는 하 사장님이 더 피곤하실 텐데요.”
“아뇨, 전 가끔 울산 내려가기도 하고 원래부터 장거리 운전에 익숙합니다. 강 전무님 모실 줄 알았으면 청소라도 깔끔하게 해놓을 걸 그랬습니다.”
모두 다 사실이 아니었지만 술술 나오는 대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하선우를 그는 처음부터 간파한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긴장을 고조시키는 그의 침묵에 하선우는 말을 멈추고 괜히 커피를 들이켰다. 불편한 침묵 뒤, 강주한은 입을 열었다.
“하 사장은 다른 사람 비위 맞추는 거 좋아합니까.”
“……예?”
“아니라면 관두는 게 좋겠습니다. 나한테는 그러지 마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온도의 말투였다. 그럼에도 왜 사납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어서 멍하니 강 전무를 응시하던 하선우의 기분 역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과하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됐습니다. 사과 듣자고 꺼낸 얘기 아니니까.”
강 전무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유 없이 얻어맞은 듯이 기분이 가라앉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짧은 침묵 뒤, 하선우는 먼저 입을 열었다.
“전무님.”
“예.”
“저희 울산은 왜 가는 겁니까.”
“울산 말입니까.”
“예. 미처 여쭤보지 못해서요.”
“집무실에서 NnG에 엘텍 제품의 물량을 배정하고 신규 모델 우선권을 부여할 예정이라고 말씀드렸던 것 기억하십니까.”
“예.”
“투자가 결정되고 NnG가 낙찰될 경우,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물량이 늘어날 겁니다. 지금 일산의 제조공장은 부지도 좁고 설비도 부족하고, 어차피 납품처가 울산이니 공장을 옮기거나 두 번째 공장을 세우는 걸 고려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저희 때문에 울산에 가는 거란 말씀입니까.”
“그런 이유도 있지만, 제 개인적인 업무도 있어서 가는 겁니다.”
잔을 기울여 차를 마시는 강주한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얼굴을 했다.
하선우는 하선우대로 생각에 빠졌다. 강주한은 이미 NnG의 두 번째 공장 부지를 울산으로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었다. 수상한 속셈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전무의 행동엔 이타적인 의도가 있었다. 그 의도가 의외여서 하선우는 커피를 마시며 강주한의 눈치만을 살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여주 분기점을 빠져나와 중부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사위는 이미 어둑해진 뒤였다. 어스레한 땅거미 위를 헤드라이트를 켜고 더듬어 달리며 수도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터널을 통과했다. 그사이 침묵 속에서 실낱같은 구원줄이었던 강 전무의 개인 업무도 끝나 있었다. 강 전무는 PC를 끄고 차창 밖, 빛을 집어삼킨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산의 등마루를 뚫고 이어진 높은 고도의 고속도로에는 달리는 차도 볼 만한 풍경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두꺼운 콘크리트 철근 벽 너머로 언뜻 보이는 야만성을 단절당한 산의 어둠을 응시했다.
신경 쓰이는 침묵에 하선우는 주파수를 바꿔 디제이가 게스트들과 요란하게 떠드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틀어놓았다. 흥미를 끌지 못하는 사연과 게스트들의 시답잖은 연애 상담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그마저도 터널이 나올 때마다 지직거리며 주파가 끊기기를 반복했다. 장시간 운전하는 게 싫어 울산의 엘텍 공단에 내려갈 때는 되도록 KTX를 이용하던 그였다. 그리고 현재 하선우는 몹시 배가 고팠다.
손바닥만 한 샌드위치로는 성이 차지 않아 휴게소에서 김밥 몇 줄을 사왔지만, 강 전무가 진하게 풍기는 햄과 참기름 냄새를 거북해하는 것 같아서 차마 포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하선우는 김밥 냄새를 폴폴 풍기는 작금의 상황이 황송하고도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자기 소유의 자동차 안에서 왜 김밥 냄새로 황송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 우습기까지 했다.
전무님. 뒷좌석에 올려둔 검정 봉지 안에서 김밥 포장지를 뜯어 제 무릎 위에 올려주시겠습니까. 정중하게 부탁해볼지를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곧 하선우는 유혹을 떨쳐내버렸다. 위속이 텅 빈 것 같은 지금의 사점死點만 지나면 허기는 사그라질 것이다.
“라디오 듣습니까?”
시답잖은 게스트의 농담 뒤로 흘러나온 유행가가 거슬렸던지 그가 물었다.
“아뇨. 안 듣습니다. 주파수 옮길까요.”
“아닙니다. 끄도록 하죠.”
버튼을 누르자 완벽한 침묵이 찾아왔다.
강 전무가 업무에 매달려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하선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강 전무의 친절함은 대외 과시용이었던 것처럼 더 이상 그는 친근하게 굴지 않았다. 엘텍의 본사를 떠나 단둘이 남게 된 순간부터 마법을 부려놓은 것 같던 친밀한 꺼풀이 벗겨져 있었다.
차는 다시 경부고속도로로 합류했다. 도로의 표지판은 울산까지 170킬로미터가 남았다고 예고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이르게 도착할 듯했지만 그럼에도 한 시간 반 이상은 걸릴 터였다. 강 전무는 조금 전부터 미국에 있는 지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미국에 설립한 지사의 자금운용에 대한 얘기였다. 강 전무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던 하선우는 불현듯 김 부장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1조를 가진 사람에게 1억의 가치는, 1억을 가진 사람에게 만 원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 두 개의 비가 같음을 나타내는 비례식을 응용한 이야기였다.
‘1억을 가진 사람에게 만 원을 달라고 사정하면 주겠어요, 안 주겠어요.’
그들이 가진 부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가느냐며 긴장을 조성하던 김 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김 부장은 엘텍 일가가 소유한 자산이 상장 계열사 주식만 17조에 이른다고 했다.
그들이 갖는 배당금과 부동산, 비상장 회사, 현금과 예술품, 비자금을 포함하면 20조에 근사하지 않을까. 가늠할 수 없는 그들의 부를 생각하다 하선우는 NnG의 자금운용 상태를 떠올렸다. 평균적인 매출은 연 17억, 영업이익은 2억6천. 순수하게 남는 영업이익은 재투자와 은행차입금을 갚는 이유로 대부분 증발하여 3개월 뒤를 보장할 수 없는 재무 상태였다.
20조를 단순 계산하여 1억에 비례한다면, 그들에게 1억의 가치는 겨우 500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500원처럼 사용하는 돈이 없어 수십 번의 부도 위험을 넘겼기에 하선우는 엘텍 일가의 현실감 없는 부가 얼른 와 닿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500원만 달라고 굽실거리면 강 전무는 어렵지 않게 적선해줄 것만 같았다.
때마침 강 전무는 길었던 전화를 끊었다. 코트 안에 전화기를 밀어 넣으며 룸미러를 통해 힐끔거리는 하선우와 시선을 맞추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건 아니지만….”
500원. 뇌리에 맺혀 떨어지지 않는 단위에 끈적이는 침을 삼키며 하선우는 다시 정면을 보았다.
“아니지만…?”
뒷말을 재촉하듯 하선우의 말을 따라하며 강 전무는 웃었다. 갑자기 긴장한 하선우가 퍽 재미나다는 듯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500원의 강렬한 이미지를 지워버리며 결국 하선우는 가장 무난하면서도 인간적으로 공감할 만한 소재를 떠올렸다. 여희라고 불렸던 그의 딸아이에 대한 얘기였다. 그러나 입 밖으로 터져나간 것은 추호도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종류의 것이었다.
“500원만… 아, 아니!”
“…500원 말입니까.”
“아니, 아닙니다.”
“…….”
속에서부터 화가 치밀었다.
“따님이, 따님이… 예쁘더라고요.”
어둠 속에서도 벌게지는 얼굴이 보였다.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 지갑을 꺼내려던 강주한이 맥이 풀린 듯 웃었다.
“저보다는 아이 엄마를 많이 닮았죠.”
간신히 충격의 여운이 가신 하선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러고 보니 따님이 많이 닮았네요. 사모님이 미인이셨죠.”
“그랬죠.”
항간에 떠도는 가십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하선우였지만 강주한의 아내 서유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노동자 출신인 야당의 대표 최고의원을 아버지로 두고, 재벌가의 아들과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파란을 일으켰던 서유임이 꽃다운 나이인 서른에 자동차 전복사고로 사망했다는 것 역시도. 하선우 역시 강주한이 삼청동의 본가에서 칩거하는 사이 찍혔던 초췌한 몰골의 유출 사진을 본 기억이 있었다.
애써 골라낸 주제인데 칙칙 가라앉았다. 이대로 이 주제를 가라앉힐 수는 없어,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 하선우는 분위기를 바꿔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따님이 올해 몇 살이죠.”
“다섯입니다.”
“아… 다섯 살이나 됐나요. 더 어리게 보이던데.”
“다섯 살이라고 하면 괜히 많게 느껴지지만 36개월 조금 넘은 셈이죠.”
“이란성 쌍둥이죠? 위로 오빠가 있다고 들었는데.”
“강희원, 강여희 30분 터울 남매죠.”
“귀여울 나이라 보기만 해도 배부르시겠습니다.”
“그렇죠. 여느 부모가 안 그렇겠냐만.”
“다섯 살이면… 한창 말썽 많이 부리겠어요.”
하선우의 뇌리로 호텔의 한식 레스토랑에서 바락바락 울어대던 강주한의 딸이 떠올랐다. 그 역시 같은 것을 떠올렸는지 강주한은 입술만을 아주 조금 움직여 웃었다.
“여희가 떼를 많이 써서 곤란할 때가 많죠.”
“애들이 다 그렇죠.”
하선우의 말에 수긍하지 않고 그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여희가 유독 심하긴 하죠.”
“그래도 귀엽던데요.”
그는 마른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어깨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였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허공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주한의 시선을 좇아 눈길을 움직였다. 그 끝에는 내비게이션 아래에 고정된 작은 액자가 있었다.
“조카입니까.”
“예. 첫 조카예요. 귀엽죠.”
“남자아이입니까.”
“……여자앤데요.”
우락부락한 첫째 형을 꼭 빼어 닮은 조카가 남들의 눈에도 귀여워 보일 리 없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피식 웃으며 하선우는 말했다.
“지금은 많이 커서 중학생입니다. 제 자식은 아니지만 첫째 조카라서 남다르게 애정이 가더라고요. 애가 원체 애교가 많아서, 삼촌 하면서 잘 따르기도 하고.”
“붙임성 있는 조카를 두셨군요.”
“예. 티 없이 잘 자랐죠. 첫째 말고도 둘째도 있는데 둘 다 성격이 모나지 않아요. 자매끼리 싸우지도 않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다 형수님이 애들 잘 가르친 덕이죠.”
저도 모르는 사이 하선우의 경직됐던 마음 한구석이 이완됐다. 조카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위축됐던 이야깃거리 역시 술술 풀렸다. 분위기를 타 하선우는 말을 꺼냈다.
“전무님도 자제분들 교육 신경 많이 쓰이시겠습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아이들 엄마가 없으니 막막한 면이 있죠.”
잠시 멈추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전문가들이 곁에서 도움을 주긴 합니다.”
“기업가에서 태어난 자제분들이라… 받는 교육이 남다르겠습니다.”
“글쎄요. 다른 기업가들이 아이를 어떻게 교육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직은 무리하게 교육시키진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놀게 내버려둬요.”
모로 기울였던 고개를 다시 바로 세운 그는 천천히 침을 삼켰다.
“애착이론을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사실 인문학적인 소양은 많이 부족해서 처음 듣습니다.”
“생후 36개월 이전에 영아가 정상적인 감정과 사회적 발달을 하려면, 하나 이상의 주 보호자와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일설이죠.”
“한마디로 많이 사랑해줘야 한다는 이론이네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와의 올바른 애착관계가 올바른 인성발달의 틀을 제공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될 경우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더군요. 과하게 애정에 집착한다거나 반대로 감정을 억누르고 정상적인 애착관계를 거부하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딱히 교육방법이랄 건 없고 만으로 네 살이 될 때까지는 애정을 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아이들은 인성이 바랐으면 하니까요.”
묵묵히 듣고 있던 하선우는 룸미러를 통해 강주한을 바라보았다. 도로에서 반사되어 되돌아오는 전조등의 어슷한 빛을 받은 눈을 내리깐 얼굴로 말했다.
“저 같은 경우는 일반적인 유년기를 보내질 못했습니다. 시기별로 보육자가 바뀌었죠. 다섯 살부터 아홉 살 때까지 미국에서, 아홉 살부터 열두 살까지는 일본에서 지냈습니다. 일본에서는 조센징이라며 이지메를 당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국어를 잘 몰라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구가 없었죠. 듣고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막상 말을 할 때는 알파벳, 히라가나, 가타카나, 한글, 물리, 수학공식 같은 것들을 분해하고 혼용해서 사용했거든요. 나중에는 혼자만의 공식을 만들어서 일기를 썼는데 다른 사람에게는 외계어였겠죠. 더듬는 데다가 난독증도 있고 단어 구분하는 것도 벅차했으니 남들 눈에는 좀 모자라거나 괴상한 애처럼 보였을 겁니다.”
먼 기억을 떠올린 그는 낮은 웃음을 나지막이 흘렸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혼용하지 않고 사용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 증세 같은 것은 남았어요. 언어 같은 것들을 분해하고 공식을 만들어내던 일상이 편집증과 집착으로 발전했죠. 나이가 든 지금은 고쳐졌다지만 가능한 한 일이 아닌 사적인 부분으로는 몰두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몰입하는 순간부터 집착하게 되니까.”
하선우는 묵묵히 강주한의 덤덤한 자평을 들었다. 본인의 성격을 정상적인 범주에서 약간 비껴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건가. 별로 상처도 아닌 것처럼 얘기하는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도리어 멋쩍어진 것은 하선우였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처음 듣습니까.”
“예? …네.”
“꽤 쓸 만한 소재라 신문기사나 여성지에 몇 번 나갔다고 들었는데.”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그는 말을 이었다.
“몰랐군요.”
강주한은 웃었다.
“실수한 건가. 동업자에게 내 결점을 다 까발린 셈이니.”
전무의 개인적인 얘기까지 듣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던 하선우는 강주한을 따라 가볍게 웃었다.
“어디 가서 말 안 하겠습니다.”
“말해도 상관없어요.”
그는 하선우를 향해 어깨를 틀었다. 하선우를 감상하듯 좌석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그는 말했다.
“큰 걸림돌을 넘어서기 위해 스스로에게 엄격할 수밖에 없었던, 극복을 초자아로 삼았던 젊은 경영인. 언론에서 신화 만들기로 흘린 아부성 이야기니까.”
흠, 마른 한숨을 쉰 그는 하선우를 느리게 훑어본 뒤에 다시 정면으로 몸을 돌렸다.
어쩌다가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에는 그의 자녀들에 대한 얘기였다. 성격이 형성되기 전부터 무리한 교육을 받은 자신을 거울삼아 아이들을 무리하게 교육을 시키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때마침 강 전무의 전화가 울렸다. 휴대전화의 볼륨이 높아, 애교 많은 딸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혀 짧은 아이의 목소리와 강 전무의 개인사에 하선우는 숨이 조금 트이는 느낌이었다.
허리가 뻐근하고 허기진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 때쯤 저 멀리 울산 IC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강주한과의 일과가 시작된다는 생각에 절로 긴장되었다. 8시 50분을 표시한 시계를 흘끔 확인한 그는 피곤으로 뭉친 눈가를 손끝으로 비볐다.
“울산 도착했는데… 이제 어디로 갈까요.”
강주한은 직접 내비게이션의 전원을 켜고 목적지 주소를 적어 넣었다. 울주군 내의 산업단지였다.
“지금 가면 둘러볼 수 있겠죠.”
“부지 주변만 돌아볼 거니까 늦어도 상관없을 겁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울주군으로 들어서는 사이 도로를 메우는 차량이 점차 늘어났다. 퇴근을 한참 넘긴 시간이었지만 국내 대부분의 공단이 모여 있는 곳이었기에 물자를 나르는 운송차가 드나들었다. 달리는 차량 옆으로 제철소와 자동차 공장이 도로를 마주 보고 위치해 있었다. 기업의 로고가 커다랗게 인쇄된 담벼락 너머에서 간간이 흰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구획된 좌표에 레고블록을 쌓아놓은 모양으로 들어선 공단은 웅장하고도 경이로웠다. 끝도 없이 펼쳐진 드넓은 공장들은 압도적으로 자본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공장이 집약된 산업지구를 지나 해안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자 전지와 LCD 패널을 생산하는 엘텍의 대규모 공단이 그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러나 그곳도 강주한이 말한 목적지는 아니었다. 조선소를 지나 바다를 면한 도로를 한참 달렸을까, 내륙으로 꺾이는 갈림길에서 강주한은 말했다.
“저기에 차 세우세요.”
과적한 트럭의 행렬에서 급하게 빠져나와 차선을 변경한 하선우는 차를 갓길에 세웠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운전하죠.”
“아뇨. 괜찮습니다.”
하선우의 대답을 듣고도 강주한은 안전벨트를 풀고 차 밖으로 나갔다. 어쩔 수 없이 하선우는 보조석 자리로 옮겨 앉았다. 하선우 역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훌쩍 키가 컸던 강주한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레버를 당겨 좌석을 뒤로 밀었다.
바로 출발하는 대신 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임권혁 씨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습니까.”
짧은 신호음 끝에 강주한은 용건부터 물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은 서서히 경직된 냉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선우는 어딘가 개운하지 못한 느낌을 받았다. 잠자코 그 이유를 추적한 끝에 강주한의 짧은 대화 속에서 원인을 찾았다.
임권혁.
어디서 들었던 이름이더라. 그는 생각을 곱씹고 곱씹었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치가 전지사업부 사장 임권혁인데 내년에 이차전지 사업부를 확장하려고 한다더라고. 임권혁이가 내 외사촌인데…….’
엘튼 호텔의 대연회장에서 있었던 협력업체 경진대회에서 염 사장에게서 스치듯 들었던 이름이었다. 하선우가 산업체에서 군복무 했던 시절에 만난 염 사장의 외사촌이자, 엘텍전자의 전지사업부 사장을 맡고 있는 인물이었다.
임권혁 사장은 왜.
갑자기 차가워진 강주한의 분위기를 숨죽인 채로 지켜보다 하선우는 조용히 안전벨트를 맸다. 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점차 주변의 불빛이 줄어들고 공장단지도 드문드문 줄어들었다. 거대한 공단이 들어설 부지를 마련 중인지 철제 바리케이드를 친 풍경이 이어졌다. 바리케이드에는 ‘엘텍전자㈜ 5라인 건설현장’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주변 일대가 모두 엘텍의 공장이 들어선 곳이었다. 대부분 공장조성이 완공된 건지 외관이 갖추어져 있었다. 수 킬로미터 이어졌던 바리케이드가 끝나자 도로의 불을 밝히던 가로등이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안신기업의 부지입니다. 안신에서 사들여놓고 벌써 몇 년째 썩히고 있는 땅이죠. 안신의 자금사정이 어려워지면 1순위로 구조조정 될 땅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머지않은 시일 내에 부지가 매매될 겁니다.”
몇 킬로미터를 더 달린 뒤에, 차는 가로등 불조차 없어 주변이 완전히 깜깜한 도로로 접어들었다. 목적지는 ‘성일금형’이란 글자가 고딕체로 인쇄된 간판 앞이었다. 성일금형이란 단어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것 같아 하선우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곰곰이 생각을 거듭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목적지의 코앞에서 강주한은 내비게이션을 연결한 전원을 뽑고, 헤드라이터도 꺼버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하선우의 시선을 받고도 별다른 설명 없이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켜진 어두운 도로 위를 달렸다. 자동차가 속도를 줄인 것은 공장 단지 부근의 버려진 부지 앞에서였다. 불 꺼진 폐공장의 공터에는 버려진 차와 트럭이 군데군데 서 있었는데 강주한은 그 사이에 차를 주차했다.
“잠시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강주한은 벨트를 거칠게 풀고 밖으로 나갔다. 선팅은 연하게 된 편이지만, 구석진 자리에 빛이 거의 비치지 않아 강주한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할지, 이대로 기다릴지를 고민하던 하선우는 결국 밖으로 나왔다. 하선우는 어두운 땅을 더듬듯 걸으며 강 전무를 찾았지만, 어두워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최근까지 관리했던 공장인지 흙으로 뒤덮인 주차장에는 마른 풀 한 포기 없었다.
휴대전화 불빛에 의지해 걷던 하선우의 눈에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거뭇한 인영이 들어왔다. 그 역시 휴대전화의 약한 불빛을 통해 차 번호를 확인하고 있었다. 공터의 끄트머리에 있는 자동차는 이곳에 버려진 차들과는 달리 세차가 되어있는 대형 세단이었다. 그에게로 살금살금 걸어가며 하선우가 등에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쥐새끼같이 구는군.”
자신에게 한 얘긴가 싶어 강주한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하선우는 그가 갑자기 뒤돌아보는 바람에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여기서 뭐합니까.”
의아함을 담은 찌푸린 눈매가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괜한 오해를 했음을 깨달은 하선우는 그런 의문을 품은 자신이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아니 그게……. 꼭 차 안에 있어야 되나 싶어서요.”
강주한의 얼굴이 지척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럴 필요는 없지만….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있어서 눈에 띄지 않으려 불을 끈 겁니다.”
“들키면 안 되나 보죠?”
“명목상으로는 공개 입찰이니까요. CEO가 내정자를 두고 있다고 밝혀봤자 좋을 건 없겠죠.”
소리 죽여 속삭인 강주한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일단 따라 오세요.”
강주한은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어둠속에 간간이 드러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하선우는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공터를 지난 두 사람은 입구 앞에 다다랐다. 공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철제 바리케이드로 봉쇄되어 있었는데, 사람이 지나갈 만한 크기의 공간이 벌어져 있었다.
빛이 거의 들지 않았던 공터에 비해 공장 부지는 불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수명이 거의 다한 전등의 불빛이 어둠을 구멍 내듯 듬성듬성 밤을 밝히고 있었다. 희미한 빛 속에 드러난 공장은 제법 규모가 컸다.
“이곳으로 오면서 엘텍전자의 전지 사업장 건설 중인 것 보셨습니까.”
“예.”
“원자재 생산에서 출고까지 모두 마무리될 90만 평의 대규모 단지죠. 2년 전에 기공에 들어가 올 겨울에 준공 예정이고요. 가동은 내년 초가 될 겁니다. 그리고 조만간 안신의 부지도 사들여 공단을 만들 겁니다. 규모만 130만 평이 되겠죠.”
130만 평이란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는 그 규모가 언뜻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전지사업 내 단일 업종에선 국내 최대 규모일 터였다.
“그럼 여기도 안신그룹의 땅인가 보죠.”
“아뇨. 이곳의 옆 단지까지가 안신그룹의 소유고 여기부터는 개인 소유의 땅입니다. 듣기로는 플라스틱 금형 공장이었다더군요. 최근에 부도가 났다고 하니 조만간 경매로 나올 부지죠.”
하선우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강주한은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계속 걸어가며 소리 죽여 말했다.
“엘텍의 협력업체들이 들어서기에 입지 조건이 가장 좋은 편이죠.”
밟고 있는 땅을 가리키며 강주한은 말했다.
“엘텍의 공장과 인접해 물류흐름이 좋은 편이니까, 하선우 씨 회사에서 이 땅을 계약하는 게 유리할 겁니다. 운송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부근에 엘텍 종합기술원이 있으…….”
강주한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뒷걸음쳐 그늘진 벽면으로 몸을 붙였다. 이윽고 한 개의 환한 점이 먼 곳에서 반짝거렸다. 손전등 불빛이었다. 관리인으로 보이는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앞서 걷고 있는 무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 불빛은 하선우의 발치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을 서성이다, 다시 정면으로 되돌아갔다.
강주한과 하선우는 숨죽여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손전등을 든 관리인을 앞세워 뒤따라 걷고 있는 이는 염 사장이었다. 늘어진 턱살을 손등으로 쓱쓱 쓸며 웃는 염 사장 뒤로, 마른 중키의 사내가 지나갔다. 염 사장의 외사촌이라고 했던 엘텍전자의 전지사업부 사장인 임권혁이었다.
그들은 강주한과 하선우가 걸어왔던 길을 교차해 다른 공장 단지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닫혀 있던 녹슨 철문이 마찰되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들은 큰 소리를 내며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공장의 재사용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먼 곳에서 울리는 염 사장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자코 시간을 보내던 강주한이 입을 열었다.
“못된 짓은 우리만 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임권혁 사장도 내정자를 염두에 두고 있군요.”
하선우 역시 염 사장과 임권혁이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한 뒤부터 하고 있던 생각이었다. 아니, 애초에 일곱에서 세 개의 업체로 협력업체를 줄인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끈 없는 여섯 업체에 비해 염 사장은 엘텍전자 임원을 사촌으로 두고 있는 인물이었고, 그런 염 사장이 낙찰에서 떨어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짐작하던 일이었지만 두 눈으로 목격하니 입안에 잿물을 머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애초부터 내정자를 정해두고 벌이는 공개 입찰이란 단어의 어폐가 씁쓸했다. 나머지 다섯 업체는 입찰 전쟁에 뛰어들어 소모만 되는 장작개비에 불과했다.
“그런가 봅니다.”
하선우 스스로도 동조자이면서도 쓴 내색을 감출 수 없어 절로 말이 딱딱하게 나갔다. 어둠 속에서도 강주한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휴대전화기에 내장된 작은 플래시를 켰다. 빛으로 하선우의 발치를 비추며 그는 말했다.
“염 사장도 울산 땅을 염두에 두고 있나 본데 마주치면 껄끄럽겠군요. 돌아가죠.”
하선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9시 40분. 서울로 다시 돌아간다면 2시 전후로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헛수고를 했다고도, 보람 있었다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결과에 개운치가 않았다. 게다가 돌아갈 생각을 하니 지끈거리는 허리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일단 오늘은 근처의 엘텍 사택에서 자고 내일 일찍 다시 오도록 하죠.”
“예?”
앞서 걷던 강주한이 고개만을 돌려 뒤를 보았다.
“내일 급한 일정이 있다거나 갈 수 없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강주한은 말없이 하선우의 뒷말을 기다렸다. 자고 가지 않을 이유를 대라는 시선에 그는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뗐다.
“가죠.”
두 사람은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좁게 열린 입구를 지나 마른 풀이 무성한 공터를 가로질렀다. 운전석 문을 열려는 하선우의 팔을 가볍게 밀어내며 강주한은 말했다.
“제가 운전하죠.”
“아, 아뇨, 아닙니다.”
“어차피 사옥까지 가는 길도 모르지 않습니까.”
강주한은 운전석에 앉아 재촉하듯 하선우를 올려다보았다. 결국 보조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며 그는 깜깜한 정면을 바라보았다.
강주한은 출발하는 대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임권혁 사장 이 시간 이후의 스케줄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고 바로 전화 줘요.”
전화를 끊은 강주한은 올 때와 달리 전조등을 약하게 켜고 빈 공터를 벗어났다. 군데군데 움푹 파여 덜컹이는 도로를 달리다 부도가 났다는 플라스틱 금형제조 업체의 간판을 지나쳤다. 성일금형. 하선우는 어째선지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아마도 대기업을 상대로 물건을 납품하던 중소기업인 모양이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간판을 백미러를 통해 지켜보던 하선우는 조금 전 강주한의 말을 떠올렸다.
‘여기서부터는 안신기업의 부지입니다. 안신에서 사들여놓고 벌써 몇 년째 썩히고 있는 땅이죠. 안신의 자금사정이 어려워지면 1순위로 구조조정 될 땅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머지않은 시일 내에 부지가 매매될 겁니다.’
하선우는 조만간 안신그룹의 자금사정이 어려워진다고 단정하는 강주한의 판단에 의문을 느꼈다. 안신그룹은 재계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었다. 특히 물류와 에너지 분야의 선두 기업이었기에 이석은 안신의 우량주에 전세값에 맞먹는 돈을 투자하고 있기도 했다. 이석이 안신 네트워크의 주식이 18만 원대를 돌파했다며 좋아하던 것이 엊그제였다. IMF 당시도 아니고, 당면한 위기도 없는 상황에서 강주한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전무님, 안신에서 부지를 매매할 거란 건 어떻게 아십니까.”
강주한은 룸미러를 통해 하선우를 한번 힐끗 살핀 뒤 말했다.
“조만간 쓸모없는 부지들을 팔아치워 구조조정 해야 할 일이 벌어질 거니까요.”
“…….”
강 전무의 대수롭지 않은 표정과 눈빛에 하선우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미래를 가정하거나 예감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확실하게 그려놓은 좌표를 읽듯이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의심 없는 말투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안신그룹의 창립자는 강주한의 외조부로, 지금은 그의 외삼촌 되는 인물이 물려받은 기업이었다. 지난 토요일, 엘튼 호텔에서 만났던 그와 그의 남동생 강태한이 주고받았던 파일 안에는 국세청 공문이 들어 있었다. 안신의 초대 회장인 외조부가 물려준 차명 재산에 대한 자료였다. 하선우는 자료 속에서 언뜻 보았던 ‘비자금’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다. 그는 안신그룹에 조만간 고비가 닥쳐온다면, 엘텍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글쎄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을 회피한 강주한은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예, 예, 단답형으로 짧게 끊는 그의 대답을 들으며 하선우는 질문의 의미를 되새겼다. 조금 더 솔직한 질문은 왜 그런 일을 벌이시는 겁니까였지만, 그런 말을 할 정도의 배짱은 없었다. 주식 사둔 거 정리나 하라고 해야겠다. 일산에 돌아가는 즉시 이석에게 찔러줄 셈이었다.
강주한은 막 통화를 끝내고 휴대전화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임권혁 사장이 임원 전용 사택에 머물기로 했다는군요.”
“아… 그럼 사택으로는 못 가는 건가요?”
“외부에 비밀로 하고 울산으로 내려온 거라서 같은 사택에 머물기는 어렵겠어요.”
근처에 호텔이 있던가. 찌푸려지는 미간을 억지로 펴며 하선우는 물었다.
“그러면… 어디로 가죠.”
“좀 좁겠지만 일반 사택으로 가도록 하죠.”
씻고 잠잘 수만 있다면 하선우는 그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개의치 않는 하선우의 반응에 강주한은 액셀을 밟는 속도를 높였다.
차는 어느새 해안도로로 접어들었다. 도로 왼편으로 펼쳐진 밤바다의 수평선은 하선우의 머릿속에 꽉 찬 피로감처럼 검게 출렁거렸다. 이대로 가다간 저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 것 같았다. 피곤으로 무력해진 몸을 좌석에서 조금 떼어내고 그는 뜻하지 않은 울산에서의 하룻밤에 대해 생각했다. 시연회가 끝난 오늘만큼은 함께 준비해온 사원들과 회식자리를 가진 뒤에 푹 쉴 예정이었는데 이렇듯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일정이 틀어졌다.
강주한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멀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함께 있는 동안은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입찰이 되면 울산 부근에 제2의 제조공장을 시공해야 했다. 강 전무가 이렇게 제 일처럼 나서주는 이유야 여전히 의문이지만 공장을 세울 곳이라면 미리 돌아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결정적으로 지난 한 달 동안 겹겹이 피로가 쌓여 어서 빨리 쉬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스스로를 납득시킨 하선우는 좌석에 깊이 몸을 묻었다.
익숙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경기하듯 움찔, 몸을 떨며 눈을 뜬 하선우는 그사이의 기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선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강 전무는 여전히 운전 중이었고 휴대전화기가 울리고 있었다. 피곤해 죽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매가리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든 그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니.
대뜸 물음부터 던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어머니였다. 잠에 취한 목소리가 나지 않도록 헛기침을 하며 그는 말했다.
“울산.”
-울산? 울산은 왜.
“일 때문에.”
-혼자 내려갔어?
무거운 눈꺼풀을 반쯤 뜬 채로 하선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는 해안가를 지나 낯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엘텍 연수원까지 2킬로미터 남았다고 가리키는 표지판을 보며 하선우는 자신이 제법 오래 잠들어 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엘텍 관계자분과 같이 내려왔어.”
-발표는 잘했어?
여자의 목소리가 학예회에서 장기자랑 잘했냐는 투여서 피식 웃으며 하선우는 대답했다.
“그런 것 같긴 해도 두고 봐야지.”
-그래? 잘했겠지. 우리 아들 늘 잘했잖아. 그런데 어떡하니? 너 보려고 둘째랑 네 오피스텔 가는 중인데.
“선범 형이랑 같이?”
-너 기특하다고 형이 얼굴 좀 보자더라. 바꿔줘?
“……다음에. 일하는 중이라 오래 통화 못해. 엄마는 늦게 와서 어디서 자려고.”
-네 집에 들렀다가 선범이 집에서 자고 가려고 했지. 하루 종일 음식 만들었는데 그것 좀 두고 가고. 도가니탕이랑 밑반찬 좀 만들어놨는데 냉장고에 넣어두마. 살점은 따로 발라서 통에 넣어놨으니 국 끓일 때 넣어먹어. 파도 썰어놨으니까 같이 넣는 거 잊지 말고.
“…뭐하러 그런 고생을 해.”
-고생한 줄 알면 좀 챙겨 먹든가. 아무튼 바쁠 텐데 일해라. 근데 네 오피스텔 비밀번호가 뭐였니.
강주한이 들어도 하등 상관없는 번호였지만, 괜히 곁눈으로 운전에 집중 중인 그를 살펴본 하선우는 말했다.
“별표, 488231, 우물정자.”
-별표, 488……. 뭐?
“별표, 488, 231, 우물정자.”
이번에는 분명히 외웠는지 더는 묻지 않고 어머니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반전처럼 전화를 끊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로부터 문자가 왔다. 집 비밀번호를 문자로 보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그녀의 기억력에 그는 엄살 같은 한숨을 쉬며 답문을 보냈다.
“사이가 좋은 가족이네요.”
“하하… 그런가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강주한은 표정 없는 얼굴로 도로를 응시하다 다시 몇 번 고개를 까딱였다. 그 더딘 수긍을 눈여겨 지켜보던 하선우는 불이 꺼진 핸드폰을 괜히 만지작거리다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전화를 하는 사이 잠이 완전히 가셨다. 엘텍 연수원의 진입로로 들어설 때쯤 하선우의 머릿속은 커피 몇 잔을 연달아 마신 것처럼 맑아져 있었다.
연수원의 첫 인상은 자본을 초월한 어느 갑부의 정원이라는 것이었다.
“연수원 크기가 보통이 아니네요.”
“그런가요.”
“예. 골프장 정도 되는 것 같은데요.”
“모든 계열사에서 사용하는 연수원이라 규모가 클 수밖에요.”
한밤중이었기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일대는 막힘없이 넓게 트여 있었다. 골프장 라운지처럼 짧게 깎인 잔디가 깔려 있고 정돈된 조경수가 곳곳마다 심어져 있었다. 이국의 휴양지에서 갈라져 나온 듯한 아름다운 낭비가 시선을 끌었다. 땅덩이 좁은 이 나라가 허용할까 싶을 만큼 한계에 갇히지 않고 확장된 규모였다.
하선우는 넋을 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날씨만 좋다면 하늘을 지붕 삼아 잔디밭 위에서 잠들어도 극락이 따로 없겠다 싶었다. 엘텍의 신입사원이라면, 이곳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자부심을 느낄 법했다. 연수원의 규모가 곧 복지의 규모는 아니며 화려한 연수원을 가졌다고 엘텍이 좋은 회사라고 단선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이런 복지를 사원들에게 베풀 수 있는 점이 부러웠다.
“정말 멋있네요.”
“그런가요.”
“예. 진짜 아… 대단하네요. 낮에 보면 더 멋있겠어요.”
“흠, 근사하긴 하죠.”
미지근한 대답이었다. 그 대수롭지 않은 투에 하선우는 깨달았다. 화려한 삶을 당연하게 누려왔을 그에게 연수원의 웅장함은 별다른 가치가 없을 터였다. 매일 아침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던 백반을 하선우가 각별히 여기지 않았듯이 그에게 과시적인 삶은 익숙함 자체였다. 결국 하선우는 자신의 생각을 교정할 필요를 느꼈다.
“사택이 꽤 머네요. 다른 건물 중에도 불 켜진 곳이 많은 것 같은데.”
“연수원 안에 임원 사택도 같이 있어서 불가피하게 가장 외진 곳으로 숙소를 잡았습니다.”
연구소와 세미나실,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들을 지나며 강주한은 조금씩 속도를 줄였다. 안내판 앞에서 위치를 확인해가며 도착한 곳은 관리실이었다.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열쇠 좀 찾아와주겠습니까.”
“열쇠 말입니까.”
“제가 직접 나가면 번거로워질 테니 하 사장이 다녀오는 게 나을 겁니다. 비서실에서 처리했다고 하니 개발팀 윤성우 대리라고 얘기하면 열쇠를 줄 겁니다.”
차 밖으로 나온 하선우는 석재로 높게 쌓은 터 위의 관리소로 걸어갔다. 웬만한 자치구의 경찰서 같은 인상이었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경비업체의 직원들이 보였다. 장년의 사내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문을 열고 들어온 하선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분식과 함께 컵라면을 먹던 중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하선우는 테이블 근처로 걸어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막내로 보이는 사내가 아쉬운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개발팀에서 왔습니다. 윤성우 대리입니다.”
“아, 조금 전에 연락받았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카드키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남자를 기다리며 하선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수원의 곳곳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모니터가 벽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옆으로 진압봉과 인이어 이어폰 따위가 걸려 있었다. 관리실을 살펴보던 하선우는 왁자지껄 떠드는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3교대로 근무 중인지 그들은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시간을 죽이는 중인 듯했다. 그들 주위에서 매캐한 냄새가 풍겨왔다. 둘 곳 없던 시선이 절로 테이블 위의 컵라면과 떡볶이로 향했다. 허연 김이 올라오는 모양으로 보아 막 야식 판을 벌여놓은 듯했다. 음식을 본 것만으로도 위가 자극되는 느낌이 치밀었다.
“윤 대리님. 열쇠 여기 있습니다.”
부름에 하선우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하얀색 키는 건물 들어갈 때 찍으시고, 파란 키는 방에 들어갈 때 찍으시면 됩니다. 반납은 관리소로 해주십쇼.”
사내가 내민 키는 두 장이었다. 건물 출입에 필요한 흰 카드를 제외하면 방 호수가 적혀있는 키는 하나뿐이었다.
“방 출입 카드는 하나뿐입니까?”
“예. 그런데요.”
어디까지 얘기가 된 건지 확신할 수 없어 주저하던 하선우는 다시 말을 이었다.
“방이 하나 더 필요한데요.”
“체류 인원이 두 명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키 맞게 드린 겁니다. 2인1실이거든요.”
“…….”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남자는 반쯤 야식거리에 신경을 걸친 채로 물었다. 하선우가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는 남자의 마음을 은연중에 읽은 그는 녹슨 기계처럼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그는 이대로 물러나도 되는지 확신에 이르지 못한 상태로 관리소를 빠져나왔다.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 전무는 다시 시동을 걸었다. 사소한 문제가 생겼음을 말해야 하는지, 출발하는 강 전무의 옆모습을 보며 하선우는 고민했다.
“전무님.”
“예.”
“얘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관리실에서 방 키를 하나만 줬습니다.”
“하나요?”
“예. 2인1실이라고는 하는데…….”
“그럼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내심 싫다고 말해주길 원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상대와 하룻밤을 같이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잠이라도 편히 쉬고 싶었던 그는 속이 갑갑해졌다. 그런 하선우를 룸미러를 통해 지켜보던 강주한은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사택은 바로 뒤편에 산을 등지고 있었다. 연수원 내에서 가장 깊숙하고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불 꺼진 3층 건물이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은 건물은 세기말의 끝자락, 음산함과 불길함이 버무려진 영화 세트장처럼 보였다. 이렇게까지 동떨어진 장소일 필요가 있을까. 하선우는 꼭 외떨어진 섬에 강 전무와 단둘이 남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들어가죠.”
카드키로 닫혀있는 문을 연 강주한은 불을 켜지도 않고 휴대전화의 랜턴으로 발밑을 비춰 복도를 걸어갔다. 방은 2층에 위치해 있었다. 1미터 남짓 좁은 폭의 침대 두 개와 붙박이장, 침대 사이에 놓인 협탁이 가구의 전부였다. 모텔이 아니었기에 당연하지만 붙박이장 안에는 베스가운이 없었다.
“갈아입을 옷이 없네요.”
코트와 입고 있던 슈트 재킷을 벗으며 강주한은 피식 웃었다.
“호텔도 아니고 어쩌겠습니까. 입던 옷 입어야죠.”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한 번에 주욱 잡아당긴 그는 곧이어 손목 부근의 커프스 단추를 풀었다. 양쪽 손을 번갈아 움직이며 단추를 모두 끌러낸 그가 목둘레로 손을 뻗었다. 갑갑할 정도로 목 끝까지 단추가 잠겨 있었다. 손톱보다 작은 단추를 커다란 손이 요령 좋게 끌러내는 모습을 지켜보던 하선우는 강주한과 눈이 마주쳤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강주한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 넥타이 멋있네요.”
셔츠 깃 사이에 느슨하게 끼어 있는 넥타이를 가까스로 가리킨 하선우는 싱겁게 웃었다.
“하 사장도 오늘 넥타이 선택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옷 그대로 입고 있을 겁니까.”
“아뇨. …벗어야죠.”
“선우 씨 먼저 씻겠습니까.”
세 번째 단추를 천천히 끌러내며 강주한은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나중에 씻겠습니다.”
어디선가 몇 번 주고받았던 낯익은 대화 패턴이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하선우는 얼른 침대 위에 포개둔 강주한의 옷을 집어 들었다. 강주한을 대신해 코트를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집어넣은 그는 붙박이장을 활짝 열었다. 이불을 꺼내 침대 위에 펼치던 그는 멈칫했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옷을 벗으며 누군가를 빤히 바라보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두운 방향의 육감을 자극하는 법이다. 왜곡된 방향으로 흐르는 생각을 차단하며 태연하게 이불을 펼쳤다. 셔츠를 모두 벗고 벨트의 버클을 풀며 강주한은 물었다.
“선우 씨.”
“예.”
“핸드폰 충전기 있으십니까. 배터리 충전이 필요한데.”
“차 안에 USB 충전기 있습니다. 가져오겠습니다.”
강주한 쪽을 쳐다보지 않고 대답한 하선우는 서두르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태연하게 방을 빠져나왔다.
비상등 외에는 켜진 불이 없는 깜깜한 복도를 걸어가던 하선우는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정지했다.
“진짜 미쳤나.”
강 전무를 상대로 1초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경악스러웠다.
“으…….”
소름이 돋아서 상체를 팔로 감싸 부르르 떤 하선우는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충전기는 쉽게 찾았다. 핸드폰 거치대 아래 연결해둔 USB 포트에 꽂혀있던 충전기를 빼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나는 대신 하선우는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지났다고 생각했던 허기가 도돌이표처럼 되돌아왔다. 조금 전 관리실을 다녀온 뒤부터 줄곧 허기지다 못해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야식으로 배를 채우던 사내들의 모습이, 공기 중에 떠돌던 매캐한 음식 냄새가 촉매제처럼 하선우의 위장에 반응을 일으켰다.
“배고파 죽겠다.”
조금 주저하다 그는 뒷좌석에서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검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스티로폼 도시락을 열자 진한 참기름 냄새가 솔솔 풍겼다. 김밥 두 줄 위로 뿌려진 오돌토돌한 볶은 깨를 내려다보던 하선우는 굳은 얼굴로 김밥을 집어 들었다. 김밥의 끄트머리는 반나절이 흐르는 동안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살짝 쉰내까지 풍겼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차 안에서 몰래 으적으적 씹는 꼴이 지지리 궁상이라 먹으면서도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점심으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은 게 고작이었다. 배고픔에 내내 뒤척이면서 예민해지느니 위 속에 뭐라도 집어넣는 게 나을 터였다.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하선우는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불이 들어온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 자식은 뱃가죽을 철갑으로 만들었나.”
막히는 목을 찬물을 들이부어 뚫으며 하선우는 김밥을 집어 들었다. 급하게 한 줄을 해치우고 손등으로 기름으로 반질거리는 입술을 쓱 닦아낸 그는 불 켜진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위장을 금으로 코팅했다고 해도 강주한 역시 별로 먹은 게 없으니 허기지긴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는 남은 김밥 한 줄과 불 켜진 창문을 번갈아 보았다. 남은 것을 갖다줄까 싶다가도, 휴게소의 식당 간판을 쳐다보던 강주한의 찬 얼굴이 떠올라 내키지 않았다. 게다가 김밥에서는 희미하게 쉰내까지 풍겼다. 더하여 하선우는 지금 김밥 한 줄 비운 거로는 기별도 가지 않았다.
지금쯤 씻고 있을 테니 이 정도로 늦는다고 이상한 의심을 하지는 않겠지.
한 번 더 스스로를 납득시킨 그는 남은 김밥을 완전히 먹어치우기로 결심했다. 김밥을 모두 먹은 뒤에 지레 찔려 열심히 물로 입가심을 했다. 티슈로 손을 닦고 도시락을 검은 봉투 안에 밀봉해 부근의 쓰레기통에 버린 그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완전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된 기분을 느끼며 문 앞에서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깟 게 뭐라고.”
아무래도 자신은 사기를 칠 만한 배포가 없는 인물인가 보다. 씁쓸하게 웃은 그는 문고리를 돌렸다.
강주한은 막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상체를 탈의하고 바지 버클을 반쯤 끌러낸 상태로 바닥에 발을 디뎠다. 훌쩍 큰 키와 사내의 존재감 때문에 방 안이 비좁아졌다. 흰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하선우를 쳐다보았다.
“충전기 가져왔습니다.”
“수고했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콘센트용이 아니라서 노트북에 연결해서 써야 하거든요.”
노트북 가방을 열고 전원을 켜고, USB에 케이블을 연결했다. 주섬주섬 준비를 완료한 그는 그제야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티셔츠 하나 잡아당겨 벗으면 그만이던 평소보다 절차가 많았다. 성인 남자 둘이 사용하기에는 자리가 비좁았던 탓에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옷을 벗던 하선우는 휴대전화를 충전단자에 연결하는 강주한의 뒷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을 건성으로 말려 물이 어깨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이 거슬리는 하선우와 달리 한쪽 어깨에 타월을 걸쳐놓은 그는 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기를 훔쳐내지 않았다. 그의 몸은 하선우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단련되어 있었다. 쉽게 근육이 만들어지는 상박뿐만이 아니라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삼두근과 날개뼈 안쪽의 능형근, 등 전체를 감싼 광배근이 도드라졌다.
한때 이석이 몸매를 만들어보겠다고 헬스 관련 잡지를 구독했던 적이 있어서 하선우는 근육 명칭과 근육을 만들기 위한 운동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강주한의 몸은 제법 가혹하게 관리된 체형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져 질근거리는 질감이 느껴질 만큼 단단했다. 그는 강주한과 동갑이면서도 상반된 이석의 몸매를 떠올렸다. 사별하긴 했지만 한때 결혼했던 사내도 저렇게 몸을 관리하는데, 새해 결심으로 매번 결혼과 다이어트를 울부짖는 이석은 술배 때문에 몸이 이티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는 넥타이까지만 끌러내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갈아입을 옷이 없었기에 샤워를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아 소매를 접고, 곧바로 머리를 적셨다. 왁스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머리카락이 온수에 흐물흐물 풀어졌다. 거품이 잘 나지 않는 저렴한 샴푸로 머리를 박박 문질러 닦아내고 간단히 씻는 것을 마친 그는 밖으로 나왔다.
강주한은 커피테이블을 제 쪽으로 당겨 노트북을 올려놓고 업무를 보고 있었다. 약간 구부정하게 숙인 상체엔 여전히 옷을 걸치지 않은 채였다. 난방이 거의 되지 않아 싸늘한 실내의 온도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강주한의 맞은편에 앉은 하선우는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11시에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업무를 보는 강 전무를 두고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기도, 말을 걸기도 뭐해 잠시 고민하던 하선우 역시 노트북의 전원을 켰다. 할 일이 없어 괜히 특허청 홈페이지에서 스크랩해둔 자료를 훑어보았다.
“배고프신 것 같아서 피자 배달시켰습니다.”
하선우는 노트북 화면에 얼굴을 고정한 채 눈만을 들어올렸다.
“충전기 가지러 갔을 때 주문했으니 곧 올 겁니다.”
“피자…를요?”
하선우의 탐탁지 않은 반응에 강주한의 겉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배 안 고픕니까?”
“…….”
“아니면 피자를 안 좋아합니까.”
“아뇨. 아닙니다.”
차 안에서 몰래 김밥을 주워 먹은 자신의 치졸함을 저주하며 하선우는 웃었다.
“저 피자 되게 좋아합니다. 하하하….”
“다행이네요. 배달 음식이 마땅한 게 없어서 피자로 주문했던 거였는데.”
강주한은 다시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를 따라 하선우도 화면에 눈을 돌렸다. 글자가 눈앞을 떠다니기만 할 뿐,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 안에서 김밥을 먹은 것을 귀신처럼 알아챈 그가 자신을 물 먹이려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선우는 그런 생각들을 힘겹게 뿌리쳐야 했다. 앓는 헛웃음이 흘러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은 그는 물기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피자가 배달 온 것은 그로부터 10여 분이 지난 뒤였다. 피자는 중간 사이즈였다. 그로서는 불행 중 다행이었다. 급하게 먹었던 김밥은 여전히 위장에 머물러 있는 채였지만, 그는 피자 몇 조각을 적당히 먹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배달 온 캔맥주를 물 대신 마시며 두 남자는 늘어지는 치즈를 말없이 우물거렸다. 도톰한 두께의 도우에 짭짤하고도 토핑이 푸짐한 피자였다. 김밥만 아니었다면 감격하여 먹었을 피자를 맛없게 씹으며 하선우는 피자를 안주 삼아 묵묵히 맥주를 마시는 강주한을 쳐다보았다.
싸구려 샴푸로 머리를 감은 머리카락은 물기를 잃어가며 점점 부스스해졌다. 속옷만 입고 있기도, 그렇다고 불편한 양복바지를 모두 갖춰 입을 생각도 없어 바지 버클을 풀어놓고 있었다. 지방 없이 팽팽하게 당겨진 아랫배 옆으로 균형 잡힌 좌골이 언뜻 드러났다. 적당한 대화거리를 찾아낸 하선우는 말문을 열었다.
“운동하시나 봅니다.”
피자를 집어 든 강주한은 자신의 아랫배 언저리를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예.”
“바쁘셨을 텐데 틈틈이 하셨네요.”
“주기적으로는 못해도 하긴 합니다. 앉아 있을 일이 많다 보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라도 하죠.”
“어떤 운동 하시는데요.”
“권투합니다. 요즘 시대에 구식이죠.”
그는 피자를 가로로 반을 접어 입안에 집어넣었다. 질기게 늘어나는 치즈를 이로 끊어내고 씹어 삼킨 그가 말을 이었다.
“아내가 록키 발보아의 팬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권투에 관심을 갖게 되었죠.”
“실베스터 스탤론… 말씀이십니까.”
“스탤론의 팬이라기보다는, 록키에 나온 주인공 캐릭터의 팬이었죠.”
하선우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의 록키 발보아를 떠올렸다.
하선우는 영화의 후반부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던 실베스터 스탤론의 얼굴을 떠올렸다. 영화는 실베스터 스탤론의 자전적인 이야기였다. 그 역시 한때나마 록키 시리즈에 열광했던 때가 있었다. 사내라면 누구나 마초적인 판타지에 젖어들기 마련이지만 서유임이 록키를 좋아했다는 것은 의외였다.
“의외네요.”
“뭐가 말입니까.”
“아내분이 록키를 좋아했다는 거요. 오래된 영화기도 하고, 여자가 록키를 좋아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까.”
피자를 으적으적 씹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졌다. 하선우를 빤히 바라보며 피자를 삼킨 그는 맥주로 입가심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하지 않은 성격이었죠.”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한 강주한은 손에 들고 있던 남은 피자조각을 마저 먹어치웠다.
“그러는 하 사장도 운동합니까?”
“예.”
“무슨 운동 합니까.”
“자전거로 산책 나가는 수준이라 운동이라고 말하기엔 좀 민망하긴 합니다.”
“하선우 씨 집 주변 일대에 자전거 타기 좋은 곳이 많았죠.”
“예. 산책할 곳이 많아 일부러 목동으로 옮겼습니다. 형도 직장이 부근이라 근처에 살기도 하고요.”
“직장이 근처면 현성대병원에서 근무하시는 겁니까.”
“예.”
“선우 씨 집안과 엘텍이 인연이 깊군요.”
그는 강주한의 말이 단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하선우는 곧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하선우의 형인 하선범이 근무 중인 병원은 현성의대 부속 병원이었지만, 현성병원은 엘텍재단 산하 의료기관이었다. 넓은 의미로 보면 하선범 역시 엘텍에 근무하는 직원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네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지만 엘텍과 연결된 고리가 발견된 것이 좋은 일인지, 그 반대의 일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운동에 대한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뒤 강주한은 말했다.
“내일은 9시 30분 이후에 나가죠. 출근 시간대에 겹쳐봤자 차만 밀릴 테니까.”
“아, 근데 염 사장님 쪽에서도 같은 부지를 생각 중인 것 같던데요.”
“그 건에 대해서는 하 사장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앞으로 우리 쪽에서 노골적으로 나가면 그쪽에서 알아서 손 뗄 테니까.”
NnG는 강주한 덕분에 내정업체로 확정되었고, 임권혁을 사촌으로 둔 염 사장 역시 입찰 전쟁에서 떨어질 리 없었다. 씁쓸했지만 막상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이 되고 보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명 입찰에서 NnG와 산원테크가 낙찰되겠죠?”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만 지켜봐야죠.”
남은 업체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는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삼켜 문제를 불거지게 만들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죽어나갈 경쟁업체들 생각에 속이 꽉 막혔지만 착한 척 위선 떨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하 사장님.”
“예.”
“매주 금요일에 시간 낼 수 있습니까.”
피자를 입가에 가져가던 하선우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멀쩡하던 속이 갑자기 메슥거렸다. 하선우는 속이 얹히는 느낌에 쓴침을 삼켰다.
“확답을 드리지는 못하겠는데 무슨 일로…….”
“매주 금요일마다 엘텍 종합기술원에서 연수를 받아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연수요?”
“전자 계열사를 중심으로 박사급 연구 인력이 모이는 엘텍 내의 학회인데, 실제로 학위를 주는 건 아니지만 그만한 도움은 될 겁니다.”
과하게 먹었는지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아 그는 즉시 피자를 내려놓았다. 평소에도 자주 체하는 편이라 배부른 느낌이 오는 즉시 수저를 내려놓던 편이었지만, 오늘은 지레 찔려 무리를 했다. 얹히는 줄도 모르고 미련하게 일단 먹고 본 탓이었다. 강주한의 말에 집중하려 왈칵 올라오는 침을 힘들게 삼키고 하선우는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는 박사 학위가 없습니다.”
“하 사장님 석사 과정은 밟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리고 하선우 씨 정도면 학위가 없다고 해도 상관없을 겁니다. 제휴하기로 한 사업에도 분명 도움이 될 테고요.”
예전에 대기업 연구소를 다니던 친구들로부터 엘텍 종합기술원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 있었다. 종합기술원에서는 분기마다 학회를 통해 전략기술을 추진하는데, 핵심사업의 기술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분명 과할 정도로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대기업의 연구개발 활동을 배우고 자신의 회사에 적용할 수 있었고, 그 스스로도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계열사 간 CEO까지 참여하는 학회에 엘텍의 하청업체 사장에 불과한 그가 이물질처럼 끼어들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강주한을 주기적으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동을 걸었다.
“부담스럽다면 말씀하시죠.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선우가 말이 없자, 더는 기다리지 않고 강주한이 말했다.
단지 생각하느라 침묵했을 뿐이었던 하선우는 눈을 들어 올렸다. 마주 보는 강주한의 눈동자는 식어 있었다. 어딘가 차갑게 굳어 온기를 잃은 눈이었다. 그 눈빛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하선우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아뇨. 그런 게 아니…….”
“처음부터 표정에 다 드러났었지만, 하 사장은 여전히 내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죠.”
예상치 못한 강주한의 말에 하선우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그는 나무라지도, 그렇다고 불쾌해하지도 않는 얼굴로 하선우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나를 너무 버거워하는군요.”
“아닙니다. 왜 그런… 오해를 하십니까.”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건 나 혼자뿐이었던 것 같아 씁쓸하군요.”
입을 열었지만 막상 제시할 말이 없어 입술을 달싹이는 하선우를 보며 그는 맥주 캔을 들었다. 하선우는 감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눈빛이 식은 후에야, 그가 자신에게 그나마 호의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사업적인 파트너십 이상을 원하던 사람을 밀어내기라도 한 것 같았다. 당치 않다고 반박하려는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어떤 생각이 움직였다.
강 전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웃음 짓던 하선우 안의 의심과 거북함을 읽고 있었다. 매 순간 판단을 내리며 그를 거북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선우는 강주한이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또다시 의심하고 있었다. 뒤죽박죽 복잡하게 불거지는 마음의 요지는 하나였다. 그러니까 왜 내게 호의를 보이는 건가.
결국 하선우는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강 전무님께서 제게 주시는 것들이 죄다 믿기 어려운 행운뿐이라, 생각이 많아졌던 것 같습니다.”
이번만큼은 진심이었다.
강 전무와 돈독하게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허영심 한편으로, 그가 어려워서 멀어지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 있었다. 엘텍의 든든한 배경이 탐이 나면서도 강 전무가 불편했고, 그의 모든 행동에서 의도를 찾았다. 늘 단순하게 생각하던 자신이었지만 강주한이란 인물 앞에서 그의 마음은 뒤죽박죽 복잡하게 불거졌다.
강주한은 하선우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고 그래서 그가 어려웠다. 강주한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나약함을 마주하는 셈이었다. 그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들 틈에만 머물려 하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머물고 싶어 하는 한계를 보았다.
“보통은 호의를 베풀기 시작하면 그 점을 권리로 이용하려 들지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강주한은 말했다.
“가끔 하선우 씨 같은 사람들이 있죠. 어떤 것도 자신의 권리로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 행운에 기대려 하지도, 세상에 빚지지도 않으려고 노력하는 부류. 심하게 말하면 저와 조금도 안 통하는 사람들이죠.”
맥주를 기울이며 곁눈으로 하선우를 흘깃거린 강주한은 말을 이었다.
“뭐, 하선우 씨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지만.”
그는 냉소를 흘렸다.
“제가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하다고 탓하는 게 아닙니다. 본성이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속이 울렁거려 하선우는 온전히 강주한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방 안이 싸늘한 편인데도 콧등에 땀이 맺혔다. 소매를 당겨 땀을 훔쳐내며 하선우는 말했다.
“그럼 제가 조금 더 계산적으로 굴어야 하는 겁니까? 원하신다면 그런 식으로 본성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본성을 바꾼다. 하선우의 말을 따라 중얼거린 강주한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사라졌다.
“사회생활 하는 요령이 부족하다는 얘기였습니다. 하 사장의 그런 면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긴 했지만 이젠 좀 답답하군요.”
하선우의 얼굴에 긴장이 떠올랐다. 강주한은 말했다.
“설마 하선우 씨의 기술력, 그 한 가지 조건 때문에 접근했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겠죠? 내 사람으로 두고 싶어 접근한 거잖습니까.”
눈만을 움직여 하선우를 바라보던 강주한은 미간을 좁혔다. 이윽고 고개를 완전히 하선우에게 돌렸다.
“몰랐던 모양이군.”
살짝 찌푸려진 얼굴을 마주 보는 하선우의 눈이 느리게 끔뻑거렸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고백을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하선우는 시척지근한 침을 힘겹게 삼켰다. 체한 속에서 신물이 자꾸 올라왔다. 갑자기 나빠진 컨디션 때문인지, 예상하지도 못한 강주한의 말 때문인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 순간 정적을 깨고 벨소리가 울렸다. 단조로운 기본 벨소리는 하선우의 것이었다.
무겁게 이어지는 대화를 단절시킨 전화에 내심 한숨을 쉬며 하선우는 핸드폰을 찾았다. 전화는 텅 빈 선반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은 지난 토요일 이후로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류주오였다.
“하선우 씨 씻을 때부터 계속 걸려오던데. 몇 번이나 울렸습니다.”
전화를 뒤집어 음소거를 하려던 하선우는 강주한의 말에 멈칫했다.
“급한 전화 같은데 안 받습니까.”
덤덤한 권유가 오히려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핸드폰 화면을 봤을까. 류주오란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몇 가지 단상을 곱씹었을지도 몰랐다. 내색하지 않으려 웃는 얼굴로 하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 캄캄한 복도로 나왔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자꾸만 바닥으로 떨어지는 컨디션에 전화를 받고서도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이 상황이 짐처럼 느껴졌기에 하선우는 류주오에게 미안했다. 결국 건너편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선우 씨 자고 있는데 전화한 겁니까.
“…아뇨.”
-바빴습니까.
“죄송합니다. 씻느라고 전화 온 줄 몰랐습니다.”
-집에 늦게 들어갔나 보네요.
“집은 아닙니다. 일 때문에 울산 내려와 있거든요.”
-출장 가셨군요. 오늘 좀 봤으면 했는데.
“…….”
-…발표는 잘 끝났죠?
“예. 결과는 기다려봐야죠. 문자하셨던 것 바로 답장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바쁘면 그럴 수도 있죠.
말과는 달리 전화 너머의 류주오는 서운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하선우는 울렁거리는 몸을 벽에 기대며 말했다.
“주오 씨. 다음에 전화해도 될까요. 지금 몸이… 좀 안 좋아서.”
-몸이요?
“체했는지 속이 안 좋네요.”
-소화제는 드셨고요.
“약을 사러 갈 상황이 아니라… 괜찮아지겠죠. 내일 전화드리겠습니다. 쉬십시오.”
전화를 끊은 뒤에도 메슥거리는 속을 진정시키느라 하선우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체한 기색이 가라앉지 않고 심해지고 있었다. 빌어먹을 김밥. 그는 왈칵 올라오려는 위액을 억지로 누르며 식은땀을 훔쳤다.
속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강주한의 시선이 하선우의 동선을 따라붙듯 움직였다. 그는 어느새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던 몸을 떼 침대 맡에 앉아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지 적극적인 자세였다.
하선우는 표정을 굳히며 피자를 케이스로 덮어버렸다. 그의 얼굴은 조금 질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 억지로 짓고 있던 웃음조차 띠지 않았다.
깊게 생각하기 싫어 도피했던 문제였지만 어쩌면 강주한은 류주오의 전화의 의미를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의심이 불거지는 중이더라도, 지금까지 그랬듯 하선우는 그가 이번에도 조용히 넘어가주길 바랐다. 굳이 불편한 문제를 파헤치지 않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석연치 않은 문제를 덮고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 사장.”
“예?”
경직된 목소리로 되물은 하선우는 강주한의 가슴께를 내려다보던 눈을 들었다. 걱정을 죄다 드러낸 눈으로 강주한과 시선을 맞췄다. 그가 물었다.
“남자 좋아합니까?”
들고 있던 종이박스가 하선우의 손안에서 미끄러졌다. 커피테이블 위로 떨어진 박스 안에서 차갑게 굳은 피자가 찢어진 속살의 내장처럼 드러났다.
표정을 굳히며 하선우는 강주한을 바라보았다. 쇳물이 부어지는 것처럼 홧홧한 느낌이 치밀었지만 마음은 차가워졌다. 마음 한구석에서, 강주한이 언젠가는 한 번쯤 짚고 넘어갈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 어느 지점이 하필이면 컨디션이 최악을 달리는 때였다.
“갑자기 왜 그런…….”
목을 긁는 쇳소리가 튀어나왔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하선우 씨가 더 잘 알 것 같은데요.”
강주한 앞에서 실수로 흘려보낸 일들을 되작거리자면 끝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머릿속은 그런 것들을 일일이 점검하고 변명할 만큼 정연하지가 않았다. 강 전무가 호모포비아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약점을 잡힐 수는 없었다. 지친 머리가 생각해낸 것은 오직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뿐이었다.
“왜 그런 오해를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숨을 헐떡이지 않으려 애를 쓰며 하선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불편한 기분까지 내색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가 다른 증거를 들어 앞으로 내민다면, 하선우는 끝까지 아니라고 내뺄 참이었다.
그러나 강주한은 하선우를 볼 뿐이었다. 순수하게 호기심이 담긴 것도, 나무라는 것도, 이해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거북할 정도로 초연한 눈빛이었다.
……모르겠다.
생각을, 유리알 같은 눈동자 너머의 의도를 읽을 수 없었다. 불안한 눈빛을 감추려 하선우는 고개를 숙였다.
“절대 아닙니다.”
그 순간 핀트가 나가는 듯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곧이어 목구멍을 자극하는 구역질에 하선우는 힘들게 목구멍을 좁혔다. 꾹 눌러 참았지만, 반동처럼 쏟아지기 시작해 결국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변기를 붙잡고 속을 게워냈다. 토사물이 김밥이건 피자로 비치건 상관없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것을 토해냈다. 레버를 눌러 하수구 너머로 쓸려가는 토사물에서 산패한 요구르트 같은 시큼한 냄새가 독처럼 풍겼다.
한참 게워낸 후에도 하선우는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가시질 않아 변기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등을 두드리는 강주한의 손길에 움찔했지만 내버려뒀다. 입안에 맴도는 역겨운 맛에 한 번 더 구토를 한 뒤에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상체를 축 늘어트렸다. 고개를 들기 힘들 정도로 갑자기 힘이 빠진 그는 등을 어루만지듯 두드리는 손길을 밀어내지 못했다.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체한 것뿐이니까.”
말과는 달리, 순식간에 찾아온 어지러움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속이 내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울렁거리다 못해 욱신거렸다. 탈진한 사람처럼 그는 한참 동안 힘없이 앉아 있었다.
“응급실 갈까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하선우는 바닥을 짚었다. 등 뒤에서 강주한이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끼워 넣어 일으켜 세웠다. 다시 신물이 새어나와 침을 길게 뱉어내자, 그가 물을 틀었다.
“헹궈요.”
기운 없이 고분고분하게 하선우는 찬물로 몇 번이나 입안을 헹궜다.
“고개 들어봐요.”
강주한은 젖은 수건을 내밀었다. 하선우는 그것을 잡아 얼굴을 닦아내려 했지만, 강주한은 직접 식은땀을 닦아줬다. 하선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눈가가 젖어 충혈되었고, 막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처럼 핏기가 없었다. 흡, 역겨움에 헛구역질하자 눈이 젖어들어갔다.
“계속 속이 울렁거립니까.”
“…예.”
“응급실 갑시다.”
“아뇨. 진짜 괜찮아요. 됐으니까 놓아주셔도…….”
하선우의 등에 강주한의 가슴이 닿았다. 화끈거리도록 뜨거웠다. 몸을 웅크리자 식은땀이 맺힌 이마를 차가운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연약한 사람을 다루는 듯한 행동과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에 하선우는 몸을 틀었다. 축축해진 목덜미를 매만지는 순간, 본능적인 거부감에 그는 반사적으로 강주한의 손을 밀어냈다. 붉게 충혈된 사나운 시선을 던졌다.
강주한은 천천히 눈을 치떴다. 짧은 찰나, 이채가 돌았다.
눈을 마주친 것은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이 시간을 꼭꼭 다져 압축해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의 혈관이 꽉 조여드는 기분에 하선우의 숨이 거칠게 부풀었다. 곧바로 시선을 내린 하선우는 강주한의 입술이 다물리는 것을 보았다. 하선우는 시게 올라오는 침을 힘들게 삼켰다. 그의 턱 근육이 질기게 도드라지는 것을 살폈다.
더는 그 순간을 버티지 못하고 하선우는 강주한을 밀치며 욕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왜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하는지 스스로도 의문이었지만, 좀 전의 팽팽한 긴장을 두 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털썩 앉아 하선우는 반쯤 문이 열린 욕실을 쳐다보았다. 샤워기로 물을 뿌리는 소리가 났다. 게워낸 흔적을 치워내는 소리였다. 현기증과 무력감에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하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공황에 빠졌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붉은 색체의 정글이 눈앞에서 빙글거리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씨발, 이게 뭐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차가운 땀이 솟는 이마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경솔했던 건 사납게 쏘아본 자신이 아니라, 물어봐서는 안 되는 것을 물어본 강주한이었다.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곤두서는 신경을 억눌렀다.
밖으로 나온 강주한은 가까이 다가오는 대신 팔짱을 낀 채로 벽에 기대어 서서 하선우를 내려다보았다. 담배라도 피우는 것처럼 그의 입술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침대의 끄트머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하선우는 인기척을 듣고도 모르는 척했다.
“무례했다면 미안합니다.”
예상하지 못한 사과에 하선우의 어깨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움찔했다. 젖은 이마를 매만지며 하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좀 전의 과민한 반응이 수치스러워 그는 눈을 맞추지 못했다.
“아닙니다. 의심할 여지가 있었다면…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죠.”
“…….”
“하지만… 전 아닙니다. 그래서 좀 당황스럽습니다.”
끈적한 침을 넘기는 하선우의 목울대가 느리게 움직였다. 역겨운 맛이었다. 오심으로 인한 압력 때문에 하선우의 눈은 한참을 울었던 사람처럼 붉어졌다.
조금의 동요도 드러내지 않는 말 없는 대치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일시정지 상태를 움직인 것은 강주한이 먼저였다.
“알겠습니다. 쓸데없는 추측은 자제하도록 하죠.”
그는 옷장을 열어 옷을 걸쳐 입었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먼저 주무시죠.”
“……어디 가십니까.”
차가운 얼굴을 마른 손바닥으로 매만지며, 내키지 않았지만 하선우는 물었다. 코트를 옷걸이에서 빼낸 그가 한쪽 팔에 옷을 끼우며 남은 손으로 선반의 자동차 키를 집어 들었다.
“바람 쐬고 오겠습니다.”
“바람을… 쐬신다고요?”
강주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트를 한쪽 어깨에 어중간하게 걸친 채로 문고리를 돌렸다. 반쯤 문밖으로 발을 내뻗던 그가 돌연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문을 닫기 직전, 미지근하게 희석된 웃음을 지으며 강주한은 말했다.
“실수할까 봐요.”
<2권에서 계속>